[스크랩] 중국의 근대사와 기독교 선교

2013. 5. 10. 17:50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1) 교회에 대한 통제와 박해가 증가된 시기

1949-1966년의 기간 중, 교회는 일정 한도 내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증가되어 갔다. 1950년, 총리 죠우언라이의 영도 하에서, "그리스도인 선언(Christian Manifesto)"에 서명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외국과의 유대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음 해에 결성할 삼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 목사와 사역자들은 삼자회에 협조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결국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1979년 후에야 비로소 복권, 석방되었다. 시골 교회는 이미 1950-1953년에 토지 개혁 운동 감행될 때 폐쇄되었다. 1958년 말기, 원래 64개였던 북경의 교회는 네 곳만이 개방되었고, 200개의 상해 교회는 23개로 줄었으며, 기타 다른 도시에도 1-4개밖에 남지 않는다.

(2) 문화혁명-전면적 종교 탄압

문화 대혁명은 1966년 5월에 젊은이들이 홍위병 집단을 구성하여 사대구습을 소멸하고, 구지식인, 전문직업인, 종교인 그리고 마오쩌뚱과 좌파에 대해 반대할 우려가 있는 정부와 당의 지도자 등을 공격하였다. 대규모의 유혈극과 엄청난 수난이 있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박해와 홍위병과 노동자들 간의 경쟁적인 파벌로 인한 싸움의 와중에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무시한 수난을 겪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혹독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이때 극좌 분자들은 당과 종교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에는 극좌파가 득세하는데, 문혁 기간중의 박해는, 무력으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의 자연스런 결과로 치닫는다. 모든 종교 단체 건물은 훼손되고 폐쇄되었다. 종교 서적 및 상징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어떠한 종교적 신앙의 표현-십자가를 다는 것까지-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수색되었으며 성경 및 다른 여러 책들은 모두 몰수되어 잿더미가 되고,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노역에 처해졌다. 어떤 이들은 혹형을 받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기도 했다.

(3)비교적 완화된 정책의 실시

1977년부터 현재까지는 고무적인 양상, 문혁 기간에 극좌 분자에 의해 폐쇄되었던 종교 사무국은, 1977년초에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받아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에, 수년간 잠적했던 "애국" 종교 지도자들이 정부 기관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1978년 3월 다시금 조직되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통제는 완화되어, 공산당은 빼이징 민주 벽을 개방할 정도로 상당한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각 도시의 재개방된 몇몇 교회들마다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모두 가정 교회가 급성장 하여 전도하거나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혁의 정책이 급전되었으므로, 당 간부들도 "극좌 분자"로 몰릴까봐,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보고도 종종 못 본 척했다. 그 결과, 중국은 종교적 부흥 같은 것을 겪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더불어 거짓 종교인 마오져뚱 종교에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미신이 다시 활개를 쳤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모여들었다. 이때 사찰과 회교 사원도 다시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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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cmm.ctm.or.kr/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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