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2. 07:27ㆍ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초대교회사
제 1 장
서 론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 초대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주전 4년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내면적인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1세기를 사도시대라고 할 수 있다면, 제 2세기 전반은 속 사도시대, 제 2세기 중엽은 변증가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 3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확립기라고할 수 있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통신학이 교회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 4-5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깃점이다.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정통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세속화로 달려가는 전환점이기도 한다. 일련의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에 분열의 요인이 되어왔던 신학적인 논쟁들을 종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그리고 칼케돈 회의(451)가 열려 정통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초대교회사는 사도-속사도-변증가-소아시아 신학-라틴신학-알렉산드리아 신학-삼위일체 논쟁-기독론 논쟁-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맥을 이해하면서 역사적인 흐름과 초대교회 역사를 이어온 사상가들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박해와 이단들의 연구, 수도원 운동의 발흥, 감독제도의 발달,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운동은 초대교회사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이다.
2. 초대교회사 문제
초대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역사구성의 thesis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초대교회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이다. 1세기부터 진행된 기독교 박해, 2세기의 속사도, 변증가, 이단, 3세기의 소아시아, 알렉산드리아, 서방신학을 형성한 교부들, 4세기부터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이 문제들을 니케아회의(325)부터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 이르기까지 로고스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로마의 최대 종교 스토아주의는 점점 더 인격적인 종교로 탈바꿈했고 그 핵심에는 로고스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로고스에 대한 사상도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모두 로고스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 사상이 차지하는 그 이상으로 당대 헬라철학 특별히 플로톤주의에는 로고스 사상이 더욱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로고스 사상은 기독교가 잉태되었던 그 시대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중기 플라톤사상과 그 후에 나타난 신플라톤주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기독교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로고스의 성육신의 준비는 비단 그레코-로만 배경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유대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로고스의 오심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 때문에 당시 메시아 고대사상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성숙한 시대 속에서 로고스가 오셨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기독교 핵심주제는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 사상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기독교가 태동되었던 제 1세기의 최대 주제였다. 제자들은 물론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 그분이 인간의 구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또한 로고스는 변증가들에게도 최대의 주제였다. 로마의 클레켄의 서신에서,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에서, 폴리갑의 작품에서,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속 사도들의 작품과 사상에서도 로고스가 핵심에 있었다. 속 사도들의 로고스 사상이 점점 더 발전되어 하나의 틀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변증가들에 와서이다. 변증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로고스였다. 이 로고스 사상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던 것이다.
로고스 사상은 2세기 이단들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세기 역사무대에 등장한 일련의 이단들, 즉 영지주의, 발렌티누스, 말시온이 갖고 있던 중심주제 역시 로고스였다. 기독교를 헬리철학의 틀 속에 뜯어 고친 나머지 기독교를 아예 헬라화시켜버린 영지주의자들의 한결같은 특징, 곧 영육의 이원론 사상은 플라톤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다. 이들은 일부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화 시켰던 변증가들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아예 전 헬라철학을 기독교화 하려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도전을 맞은 교회는 전통적인 사도들의 신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잘못된 신앙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재림을 담은 로마신경이 태동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되었다. 정경형성이 촉진되고 감독제도가 발달하고 신경이 발달되면서 2세기 말엽에 들어서 초대교회는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감독의 발달로 교구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교부라 불렀다. 최초의 교부는 이레니우스였다. 이레니우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구속사와 성서적인 전통 및 언약사상에 근거한 로고스 총괄갱신 사상이다. 인류의 구속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며, 로고스의 총괄갱신이 그 역사의 정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은 어거스틴의 역사관,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역사해석의 원형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콕세이우스를 비롯 많은 계약 신약자들의 계약신학도 이레니우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헬라철학의 로고스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로고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해하는 핵심열쇠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은 저스틴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필로에게까지 올라간다. 필로의 사상이 저스틴에게 와서 좀 더 성경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이 저스틴의 로고스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저스틴이 갖고 있던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속성이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사상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터툴리안이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개탄한 것에 반해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터툴리안 역시 당대의 흐름을 주도했던 로고스 사상을 피할 수 없었고, 라티의 법률 용어를 동원하여 로고스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터툴리안은 로고스의 성육신을 약화시키는 수많은 이단들 특별히 양태론자들에 맞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로고스를 변화시키는데 온 정열을 다했다.
이것은 또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초대교회사의 핵심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이신가? 라는 주제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인성과 신성이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아다나시우스가 수없는 추방을 받으면서도 일편단심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니케아 신앙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도, 교회가 이 둘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양편가운데 어느 한편에 위치시키기 위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도, 역시 로고스 때문이었다. 어쩌면 논쟁의 와중에서 고투해야 했던 4, 5, 6세기 교회회들에게 로고스는 생사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오류 많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결정들을 거룩한 방향으로 진행시켜 주셨던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출발했던 니케아 회의가 기독교 정통의 영원한 토대를 닦는 기회가, 시릴과 그 일행의 야심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이 에베소 정통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교회의 머리이신 살아계신 로고스께서 그 살아계심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역사에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역사에 개입하신 그 로고스는 이 시간도 여전히 인류 역사와 나 자신의 역사에도 개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제 1 부
초대교회 배경
제 2 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 - 바울(갈 4:4) -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라는 말로 당시의 역사적 성숙을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도 갈라디어서의 “때가 차매”라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외형적인 환경에서만 그 요인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당시의 로마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한다. 둘째, 언어적인 준비를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지만 헬라어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의사소통, 사상, 사고방식, 교육수준, 이해 방식의 통일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헬라 철학, 문학 그리고 종교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때가 차매”라는 바울의 말은 현대의 폴 틸리히가 지적하듯 내적인 시간과 외적인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건(event)과 행위(action), 그리고 외면적인 차원(the outer dimension)과 내면적인 차원(the inner dimension)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때가 찼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양적 시간 개념에서 말하는 크로노스(chronos)라는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시(the right time)를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오셨다는 사실이다.
1. Greco-Roaman 배경
초대 기독교의 헬라-로마배경에 대한 연구는 주전 330년부터 주후 33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헬라시대(the Hellenistic Age)로 알려졌으며 이 헬라 시대는 다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알렉산더부터 주전 약 200년까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지중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이다. 제 2기인 주전 200년 후부터는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 토착문화가 발흥하면서 헬라적인 요소들이 움츠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서 황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는 로마가 지중해를 완전 지배하면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이 시대를 로마시대(the Roman Age)라고 부른다. 이시기의 제 1기는 주후 2세기까지를 말하며 2세기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를 제 2기라고 할 수있다. 로마의 영향을 2세기에 최고 정점에 달하다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로마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이미 로마는 약 7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서부 이탈리아 출발한 로마는 읍, 도시 그리고 작은 국가로 점차 성장했다. 주전 256년 로마가 설립된지 50년 후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후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뻗어나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칼타고(Carthage)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주전 27년까지 모든 로마 영토는 공화국이라 알려진 통치형태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매우 강력했던 로마시 의회는 어떤 한 개인이 통치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주전 27년에, 즉 약 100년 동안 지속된 비참한 내란(civil war) 후에 로마의 전권은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의 수중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첫 번째 이며 가장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이 아우그스투스 시저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 기록된 시이저 이다. 그와 함께 공화국도 끝이 나고 제국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Pax Romana)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2) 헬라적 배경
로마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는 헬라 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가 발흥했던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 (2) 소크라테스(399 B. C) (3) 플라톤(d. 347B. C) 과 아리스토텔레스, 제 1기의 관심은 세계의 본질이었고 제 2기의 관심은 인간, 그리고 제 3기의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기는 스토아주의(Stoics), 에피큐리안주의(Epicurians), 신피타고리안주의(Neo-Pythagoreans), 회의주의(Skeptics)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Middle-Platonists)를 포함한다.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것은 바로 후기 이다.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까지의 헬라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일련의 고대 헬라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과 구별하기도 한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에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맨더(Anaximander)는 물이 아니라 무한 대기(the boundless atmosphere)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주전 500년경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 의하면 우주의 근본 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했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나왔다. 그후 땅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래서 끝없는 변화의 회전(the endless cycle of change)이 계속된다. 이들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합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헤라클리이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헤라클리투스와는 정 반대로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 가지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 뿐이다.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469-399 B. C)
주전 450년 전 아테네(Athens)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 관심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세상의 본질보다도 인간의 자질(quality)에 더 많은 과심을 기울였다.
헬라-로마시대, 특별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오늘날과 같이 이론적 연구나 형이상학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탁월한 두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 429-347 B. C)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 C)이다. 소크라테스의 인간사고 혁명이 영향력 있는 일련의 다듬어진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이들에 와서 이다.
이들은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 이해를 하나로 연합시켰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the world of the ideas)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제(ousia)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적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피라밋의 정상에는 성서적 신개념과 근접한 선의 이데아가 있다.
인간의 이성에 상당한 의를 부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므로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인 삶이다. 사람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순수 이성이란 생각하고 이해하며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실천 이성이란 행동에 적용된 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다.
관념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벽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모형에서 출발하여 개체로 진행해 나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개체와 보편의 불가분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와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대한 공헌 가군데 하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로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개체와 보편,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감각적 경혐(sense experience)에 의존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지성에 의해 인간은 보편을 배우며, 이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안간 사고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으며 그 영향은 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 학파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어 왔으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실천적 도덕으로 돌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에 복고되어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과 함께 수천년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주전 1세기에 플라톤의 연구가 복고되어 육체와 영혼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적 사상이 다시 등장하면서 교부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플루다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Maximus of Tyre) 그리고 알비누스(Albinus)이며, 이 중기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기 플라톤주의는 2세기 기독교 변증가들 즉 저스틴 마터,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술활동에 지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퍼거슨은 히비스서에서 조차 플라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름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인식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는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고 세상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는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는 영혼 불사개념으로 기독교와 가르침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신개념의 정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는데 신은 물질이 없는 하나의 형상으로 그 자체와 완전한 존재이다. 비물질적인 실체(non-material reality)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강조는 성서적 신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반영하는 후대 일부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말한바 이데아의 개념과 성경의 로고스 개념을 연결하여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우주적 종교사상(the idea of a cosmic religion)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기독교와 철학과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단인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Arianism)는 3세기 전후에 복음의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이 두 개의 이단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인간과 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3) 스토아주의
스토아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함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에 가장 성행하던 철학체계로, 폴 틸리이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고스 교리이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역사를 연구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을 말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이 말이 세 가지 면은 내포한다. 첫째 로고스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the moral law)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theoretical reason)이라 불렀다.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스토이즘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 스토아(the Early Stoa), 중기 스토아(the Middle Stoa) 그리고 후기 스토아(the Later Stoa)등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주전 300-200년 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노(Zeno of Citium ; 335-263 B. C), 크린테스, 크리시푸스,등이다.
중기는 150 B. C.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나에티우스(Panaetius of Rhodes; 185-109 B. C)와 포시도니우스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잘 알려진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 D. 1-65), 로마의 에펙터투스(Epictetus; A. D 50-135)그리고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 D. 121-180)를 들 수 있다.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토기 스토아는 첫째로 유물론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세계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물질적이다. 둘째로 스토아주의는 범신론이다. 스토아 철학은 만물에서 신적 실체를 발견하는 범신론에 기초한다. 셋째로 그들은 또한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자(monist)이다. 일원론적 사고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보았던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스토아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용어상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갖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내재적인 신일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스토아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 개념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간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에 스토아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필로(Philo)
디아스포라 유대인 알렉산드리의 필로는 스토아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이상적으로 융합시킨 초기 기독교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주전 20년에 태어나 주후 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어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사상이 광범위하여 성경에 대해 탁월하고 고결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필로는 거룩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였다."
헬라인들이 구약에서 그들의 중심사상을 얻었다고 확신한 필로는 구약과 헬라철학을 연합된 가르침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의 부조화였다. 헬라철학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mediator)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 였다.
요약하면 첫째, 필로는 고대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둘째, 필로는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상당부분은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 셋째, 필로는 헬라의 신관, 특별히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다.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약 1,000년 전에 이새의 아들 다윗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주전 960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주전 930년경 죽은 후에 다윗은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솔로몬 왕국 후 다윗의 왕국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북부는 주전721년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된 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다윗의 왕가에 충실히 남아있던 남쪽왕국 유다는 58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539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한는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첫 귀환 후 또 다른 그룹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가 에스라였다.
주전 334년과 323년 사이에 젊은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더가 그리스에서 잊도에 이르는 모든 동부땅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군이 광활한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프톨레미(Ptolemy)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팔레스틴은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의 통치권에 있었으나, 198년부터 다른 왕가인 셀류시드(Seleucids) 가문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의 통치 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해하였다.
2) 마카비(the Maccabees)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새 통치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 정책을 대표한 지도자는 시리아의 셀류시드왕 (the Seleucid King of Syria) 안디옥 4세였다. 이러한 셀류시드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나이 많은 제사장 미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네 아들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유다(Judas)가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는 마키비 즉 맹렬히 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전 141년에 유대인은 셀류시드를 몰아내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 주전 586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80년 동안만 그들의 자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일어난 내란은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름 60년 동안 이스라엘은 반(半) 독립국가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으며 아스라엘의 통치자는 로마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전 37년 헤롯이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 졌다. 주후 6년에 아켈라우스가 실수하자 그는 해직되고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이 로마의 영이 되었고 로마의 총독이 지배했다.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의 총독은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라 이름하는 로마인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주전 586년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 그들의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후에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의 목적으로 회당을 강조했다.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는 관할장은 회당의 통치자라 불렀다.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지도아래 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로마 통치아래 있었지만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했다.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 이후부터 유대지도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그들은 구습을 선호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헬라 사상을 유대 생활에 도입할려고 할때는 지지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이들은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는 함께 사멸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내새가 없다.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사두개인들과 정 반대였다. 부활 내세의 삶과 상벌사상도 믿었다. 그들이 주로 집착한 것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였으며 따라서 율법준수 이면의 영적 태도는 둔감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대립되었다.
사두개인은 잘못된 교리를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다소 오래 존속했지만 그들은 또한 유대정부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전쟁포로의 분산 그리고 특별히 상업적으로 유대인은 팔레스틴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산된 유대인과 회당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 모두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자연적 요새를 팔레스틴 밖에 건설한 샘이다.
분산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전 250년에 거기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70연역(the Septuagint)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최대의 철학자 필로가 배출되었다.
3. 제국의 종교
로마제국의 종교는 크게 자연종고, 신비종교, 국가종교등 세 종류로 나뉜다.
자연종교는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또는 어떤 동물과 사람에게서 찾는다.
신비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확산될 때 제국에서 강했던 종교이다. 잠시동안 밀교의 한 형태인 미트라이즘(Mithraism)이 기독교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것은 특별히 로마군대에 인기가 있었다.
국가종교는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을 지녔다. 주된 요소는 황제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국가종교는 신과의 교제,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요약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말한바 “때가 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교통, 언어, 종교적, 사회및 도덕적 요소,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 투스 황제의 통치기간동안 평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종교가 발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제 2 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 3 장 초대 기독교 박해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지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 할 수 있겠는가? - 폴리갑-
고대 아태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인된 종교외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낙인 찍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박해기간(약 A. D. 64-96),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 D. 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A. D. 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황제 이전에는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고 역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황제 이후 박해에 대한 진행은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심지어 4000명 유대 청년들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사르디아로 보내졌다.
2) 네로 황제 박해
글라우리오 황제가 의 문란한 결혼생활로 인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나의 아들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네로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2년 자신의 고문 부루스를, 65년에 세네카를 각각 권좌에서 제거하면서 국가는 쇠퇴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접점 악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유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광기”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네로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하나 로마의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 화재의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대박해였으며 역사에 1차 박해기간의 시작으로 알려졌다. 고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주후 64년 7월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화재의 원인을 돌려버렸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하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 로마 대화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로 황제의 개인적인 횡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말해준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반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네로 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하나님께서 메로의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실 수 없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박해자들이 거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줄리어스 시저에게서 시작된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68년에 막을 내리고 1년 동안 과도기의 내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초개교회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에 이한 대 박해가 그의 통치 15년에 있었다. 도미티안은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터툴리안은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라고 말한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제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은 전혀 신자들에게 불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도미치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안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슴에 유대되었다. 도미티안이 사망하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역시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적어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황제 치하에서 황제의 임의에 의한 박해가 진행된 뒤,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국 전여게 그와 같은 박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기간 동안 박해는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2차 박해기간(A. D. 98-249)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트라얀(Trajan; A. D. 98-117)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 D. 138-161)황제의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폴리니 2세(Pliny the Younger, 61-c. 113)과 트라얀 황제 사이에 오갔던 서신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임으로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트라얀 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국경선과 본토의 안정을 추구했던 하드리안(Hadrian; A. D. 117-138)황제는 헬라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125년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Caius Minnucius Fundan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도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 D. 160-180)황제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 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함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 멘. -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은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250년 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칼타고(Carthage)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잇는 모든 교회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끝가지 지켰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세베루스 이후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알렉산더 황제를 승계한 막시미누스 황제이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돌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멜브로즈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Protoctetus)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3세기 첫 50년 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박해가 진행되는 기단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1차 박해와 달리 2차 박해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으며,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서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칙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위 3차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근거하여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주어졌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3. 제 3차 박해 기간(A. D. 249-313)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여가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내에 국가(a state within the state)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햇기 때문에 내린벌이라는 견해를 들 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decius)황제 아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데시우싀 명령 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 조직적이고 극심했던 데시우스의 박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시우스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렇듯이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 후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안 황제(253-260)가 태도를 바꾸어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시작하였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필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우스 황제 통치 때 키프리안(Cyprian)도 칼타고에서 순교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안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그렇게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단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이 베풀어 졌다. 그 후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내린 칙령에의하여 43년간 합법적인 종교(a religio licita)로 인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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