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역사

2012. 2. 25. 14:46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 한국기독교의 역사Ⅲ 』(해방이후 20세기 말까지)


저자: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출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0장 해방과 새로운 출발  송영천목사

1. 해방과 교회 재건

1)  해방 전 45년 7월 일본의 종교 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유일하게 존재하였다. 30년대 감리교와 장로교의 갈등을 체험한 교회 지도자들은 교파를 초월한 통합된 교회의 긍정적인 면과 해방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통합된 조직이 요구되었는데 남한에서만 한다고 기독교조선남부대회가 개최되었다.


2) 교회의 재건에서 해방 후 첫 민족적 과제가 일제 잔재 청산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회통제와 안정을 유지를 위해 이 과제를 유보시켰고 종교 방면 즉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45년 박형룡이 출옥성도입장에서 자숙을 전제로 한 교회 재건 기본원칙을 발표하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할 1938년 총회장인 홍택기는 오히려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애쓴 사람이라면서 친일과 신사참배문제를 삼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회개할 것이라면서 반발하였다. 이처럼 기독교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제도의 유지 차원에서 해석하는 태도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계속되었다.


3) 해방 전 미국서 친한회를 조직 결성하였는데 그 목적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선교사들이 미군정의 협조로 입국하고 선교사들을 활용하였다. 침례교인 동아기독교회는 48년 총회에서 미국 남침례회와 교섭을 결의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었다. 지나친 남침례교의 의존으로 선교회와의 관계가 갈등의 원인되었고 교단분열로 이어졌다.


4) 북한 지역에서는 신학교 재건과 운영이 사회주의같은 외부적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면 남한 지역에서는 교회 내부문제가 주원인이었다.

신학교가 교단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총회직영이 되면서 정치세력의 신학적 성향이 신학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2. 분단과 기독교

1) 남한교회와 정부수립

(1) 교단 거의가 미국에서 전래되고 선교단체에서 미국인들을 접하는 기회가 많기에 대체로 친미적이고 우호적이었다. 맥아더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일본을 기독교화 시키려했고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근원이며 반공의 보루라 여겼던 그였다. 그런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미군정은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였고 적산으로 분류된 것을 기독교 시설로 내주었다. 선교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교회 사람 중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미군정의 관료나 통역으로 일하며 통역정치를 통해 해방정국에서 영향력을 미쳤다.


(2)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를 보면 해방 후 국가 재건운동에서 조선기독청년회 전국연합회 중심의 중도파,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기독교 민주동맹 중심의 좌파, 이승만 계로 분류된 우파로 대다수 한국교회가 그렇다.


(3) 기독교적 국가 재건구상을 보면 45년 11월 기독교조선남부대회 주최로 서울 정동교회에서 임시정부환영대회에서 김구는 경찰서 열곳 세우기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강한 나라를 세우려면 “성서 위에” 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규식도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승만 역시 “만세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가치에 토대를 둔 국가 재건을 주장한 요인은  기독교국가로 알려진 미국을 통해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생각,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 미국을 통해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생각, 기독교가 민주주의 정신적 기반이라는 인식 3영수를 비롯하여 정치지도자들의 기독교적 배경, 구미 여러 나라가 보여준 사례, 우호적인 미군정, 교회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이다.


2) 북한정권하의 기독교는 사회주의 정권 성립으로 당국의 감시와 견제를 받았기에 신앙과 예배로 국한하였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제11장 6․25전쟁과 교회-  허대식목사


1.전쟁과 교회

1)6․25전쟁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처음에는 북한과 남한과의 싸움이었으나 곧 유엔군과 소련.중공군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 되어갔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자본주의 권과 공산주의 권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45년 8월이후 이두주의의 양대세력인 미국과소련이 분할 주둔함으로 한반도는 냉전체제속에 편입되었고, 그결과 내부적으로 내전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가 전면전이 일어난것. -단순히 영토나 국가 이익을 확보하려는 동기에서 전개된 전쟁이 아니라 심각한 이데올르기적 대립상황에서 진행된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쟁으로 기독교인을 포함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전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이 감행되었고, 이전쟁은 신앙의 모습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남한의 교회들은 국가안보를 위한 반공적신앙과 개인의 생존을 위한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강조되는 현상을 낳았다.


2)교회의 반응

(1)남한교회

해방직후부터 활발해진 남북한 교회의 정치참여는 전쟁이 일어난 후 전쟁지원으로 이어졌는데,

남한정부는 줄곧 휴전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남한의 교회는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만일 38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국토는 영구히 양분될 것이며 아시아와 전세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 휴전 반대의 주요한 이유였고, 휴전 반대운동을 최고의 구국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었다.


(2)북한교회

남한교회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통일과 독립 그리고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로 전쟁수행을 도우며 전승을 기원했다.


(3)외국교회

6․25전쟁에 대한 입장표명과 지원이 나왔다. 세계협의회 성명은 유엔이 세계질서유지 차원에서 북한의 침략에 맞서서 신속한 결정을 취해줄것과 회원들국의 경찰행동을 허가해줄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교회와 중국교회는 이에 항의햇는데  한국문제가 서구국가들의 무력간섭에 의해서 해결될수있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해야하는데 오히려 세계교회협의회가 오히려 그것을 지지하고 나섰다고 지적했다.


3)구호활동

(1)외국교회와 기독교 외원단체

6.25전쟁은 한민족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한국정부나 민간단체는 그런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상황에서 외국정부와 및 외국 민간 단체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는데 외국이 민간 원조 단체들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의 교회 및 기독교 구호 단체들이었다.1953년 내한한 세계교회협의회의 난민 구호책임자 리즈(Elfan Ress)는 한국방문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한국인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고 그는 구호활동을 확대하는것이야 세계교회들의 “도덕적 의무”라고 언급했다.


(2)구호내용

다양햇지만 구호대상가운데 심각한 문제는 아동문제로 고아사업,미망인사업,피난민 정착사업

과 급식구호 활동등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외국교회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한구교회는 역사상 가장 횔발한 사회사업시대를 맞이하였고 한국기독교인들은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알게되는 기회가 되었다.


 2.전후의 종교상황

1)새로운 종교현상

전쟁직후의 교회는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간의 대립양상과 다른한편에서는  기도원과 사설 예배소, 오순절파 교회를 중심으로한 방언과 신앙치유 같은 신비체험이 신도들의관심을 끌게 되는 새로운 종교현상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2)통일교외 전도단

또한 이러한때 새로운 형태의 교리와 제의를 내세우며 등장했는데 통일교와 전도관이 대표적인 집단이다.


3)교회와 정치의관계

해방과 국가 재건 시기부터 남한과 북한 두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은   정당을 조직하는일로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기독교단체의 결성, 정계투신등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였다. 군종제도, 선거지원등으로 정부와교회가 유착관계에 있게 되고 1950년대 교회의 선거운동을 통해 형성된 교회와 이승만 정부의 유착관계는 결국이승만 정권과 교회모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제12장 교단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 홍완표목사


해방 직후 기독교 각 교파는 내분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과정을 겪었다. 교회 분열의 요인은 복합적이었는데 해방 후 신하참배 회개문제를 포함한 일제 잔재 청산문제, 지역적 배경과 인맥, 신학 노선의 차이, 해외 교회 및 선교부와의 관계, 교권 다툼 등의 요인들이 작용했다.

행방 직후 기독교 각 교단분열의 내용


분열 차수 및 시기

분열 내용

주요 쟁점

장로교

제1차 분열 1952

고신의 분립

신사참배

제2차 분열 1953

예장과 기장의 분열

신학적 노선

제3차 분열 1959

통합과 합동의 분열

WCC 가입

감리교

제1차 분열 1946

(통합 1949)

총리원측과 복흥파의 분열

일제잔재 청산

제2차 분열 1954

(통합 1959)

총리원측과 호헌파의

감독 선출

제3차 분열 1974

(통합 1978)

총리원측과 갱신총회의 분열

감독 선출

성결교

1961

기독교대한성결회와 예수교대한성결회의 분열

국제 연합기구 (WCC, NAE, ICCC)가입및 탈퇴

침례교

분열 1959

(통합 1968)

대학기독교침례회연맹(포항총회)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대전총회)의 분열

총회와 선교부의 갈등



*** 새로운 교단의 등장


나사렛교회 : 1948년 미국 유학파 출신 정남수가 국내에 흩어져 있던 몇몇 성결교 집단을 미국 나사렛교회와 연결시키고, 나사셀교회 국제본부 극동담당 감독인 니스(Orval Nease)가 내한하면서 한국나사렛교회의 토대가 닦였다.


오순절교회 : 6·25전쟁 중인 1952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 체스넛(A. B. Chesnut)이 내한하면서 그 동안 흩어져 있던 오순절계 교회들이 교단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순절 교회는 물세례와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강조했으며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며 열정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했다.


루터교 : 1958년 미국 루터교 미주리 시노드(Lutheran Church-Missouri Synod)에서 바틀링(L. B. Bartling) 도로우(M. W. Dorrow) 선교사를 파견했다. 루터교회는 초기부터 대중매체를 통한 초교파적인 선교에 주력하였다. 루터란 아워를 통한 방송선교와 컨콜디아 출판사를 통한 출판사업, 그리고 베델성서연구와 기독교통신강좌는 루터교의 존재를 알린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퀘이커(Quaker) : 친우회(Society of Friends)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6·25전쟁 때였다. 전쟁 중, 그리고 전후의 구호사업에 영미계통의 퀘이커들이 참여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윤구가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가 되었고 공병우, 함석헌 등이 참여하였다. 성경, 교리, 성례전, 교직제도, 교회 건물 등 전통적인 요소보다는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인 ‘내면의 빛’(Inner Light)을 듣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국제적으로 퀘이커는 교세보다는 관용과 평화주의 그리고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제 13장 교회의 성장과 발전 -김덕호 목사

1. 교회의 성장의 현상들

1960-80년대 한국기독교가 유례없는 양적성장을 이룩한 시기-교회와 교인의 수 급증현상 나타났다. 93년도 한국종교사회연구소통계에 의하면 50년에 3,114개에서 90년에 35,819개로 증가, 10년 단위로 60-70년대 157% 70-80년대 65%, 80-90년에 69%가 증가 30년동안 교회수가 7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은 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그 기세가 급격히 둔화되었고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단되었다. 60년대 기독교의 성장은 루터교, 나사렛교회, 오순절교회처럼 새로운 교단들이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가 크게 성장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교세의 증가는 거의 모든 교파에 걸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특히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것은 오순절교회(하나님의 성회)였다. 50년대에 1만 명 정도에 서 80년대에 여의도 순복음교회만 20만 명을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침례교도 70년대 후반부터 크게 성장하였다. 60년대 2백여 개에서 교단의 적극적인 교세확장 노력이 결실을 맺어 84년에 처음으로 1천개 교회를 넘어섰고 그 후 90년까지 매년 1백 교회가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작은 교단 가운데 해방 후 5천에서 90년대에 5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대한 성공회는 93년 독립관구로 승격되었다.


성결교회도 60년대부터 크게 성장하여 주류교단으로 자리를 자았고 50년대에 10만에서 70년대 말까지 증가하여 90년대에 기독교성결회(기성)만 60만 명이 넘었다.  

 

전통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교세도 크게 성장했지만 교단 분열이 심했던 장로교는 교단마다 성장률에서 상당한 편차를 보였다. 가장 크게 성장한 것은 교세가 가장 큰 합동과 통합이 70년대에 급성장하여 각각 두 배 이상씩 교세가 증가하여 1백 만 명이 넘어섰다.  통합측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력과 포용력 있는 신학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합동측은 보수적인 신학 전통을 내세워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장로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한 고신은 작은 교단이지만 70년대에 교세가 배가되어 20만 명을 넘었고, 가장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기독교장로회는 다른 대표적인 교단들만큼의 양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교단들이 교세를 늘려가던 군사독재의 시기 동안 개인구원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사회의 구조악과 싸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감리교는하나님의  선교를 선교의 신학적 기초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는 토착화신학을 전개하는 등 장로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전보적인 면을 보였다. 그러나 교단 차원의 교세확장 노력과 교인들의 열정적인 신앙이 감리교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70년대에 성장이 두드러졌고 70-78년 사이에 29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두 배가량 교인 수가 증가하였다. 침례교를 비롯하여 감리교 오순절계 교회, 성결교 등 장로교 이외 여러 교단들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한국 기독교 내에서 장로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급성장한 교회의 활력과 자신감은 한국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기념했던 84년을 전후하여 최고조에 달했다. 81년부터 범 교단 협의체를 만들고 준비하였고, 88년 서울올림픽까지 이어졌고 올림픽을 세계선교를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 활발한 선교활동에 임했다. 90년대에는 교이수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90년 중반에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0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 수가 약 861만이었는데 95년에 비하여 14만 명이 감소했고 같은 기간 동안 75%까지 성장률을 보인 천주교와 크게 대조되는 현상 이었다.


2. 교회성장의 사회적 배경

6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분단의 구조였다.  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명분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기초한 군사독재를 구축해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정권은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했고 민주적인 정치행위를 탄압했다. 72년 유신체제는 이런 제왕적 독재의 극단적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억압적인 독재정권 속에서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한 국민들은 점점 더 욕구불만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60년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군사독재의 시기에 정부는 경제성장을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보고 모든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70년대 경제계발은 괄목할 만한 외형적인 성장은 계층구조를 피리미드형으로 경직시켰으며 계층구조의 아랫부분에 놓이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증대되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할 형편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이주한 60년대 전체인구의 28%였던 도시인구는 90년대에 두 배가 훨씬 넘는 74.4%로 증가했다. 도시화된 사업사회의 생존경쟁과 물질주의 배금주의 가치관은 공동체 및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고 각 사람의 자아정체성의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의 시장경제는 개발독재라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원칙과 질서가 무너지고 많은 지배층들의 정치와 경제가 유착된 상황을 이용하여 법과 규칙을 존중하지 않았고 특권층의 도덕적 타락과 법 경시는 결국 사회전체에 부도덕, 요령주의 편법주의가 만연하는 결과를 낳았다. 70-80년대 중반까지는 반공주의, 군사적 국가주의, 관료주의, 성장만능주의 등이 더욱 맹렬하게 추진된 시기였다. 이처럼 개발독재는 아노미현상을 낳아 한국인들은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을 상실한 채 혼돈상태에 빠졌으며 사회는 여러 가지 병리현상을 보였다.  도시 속에서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종교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좋은 장이 되기 마련이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여 근대적 개인주의와 잘 어울렸던 기독교는 한국에서도 전통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불교, 유교, 무교보다 도시인들에게 더 좋은 안식처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따라서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침례교의 성장과정은 이 시기의 교회성장이 급속한 도시화가 야기한 사회 변화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57년부터 농촌지향적인 직접전도사업을 통해 교세확장을 시도했다. 58년 208개 교회수가 10년 후16개 증가했고 70년대 후반부터 미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공동으로 도시중심의 전도대회를 개최하여 괄목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60년대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나 불교뿐 아니라 여러 신흥종교들이 전반적으로 성장하는가운데 현세적인 복을 약속한 종교나 교파일수록 더 크게 성장하였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성공하도록 동기유발하며 그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했던 교회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었다. 적극적인 사고, 성공의 복음, 풍요의 복음 등 자본주의화 된 축복의 메시지는 이 시기에 크게 번창한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설교 내용이었다. 대표적인 교단은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여의도 순복음교회다.


3. 교회성자의 원인들

6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양적인 팽창을 종교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시기에 한국교회는 사람들이 종교를 필요로 할 때 그 수요를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했다.                                


  

  


제14장 다양한 교회활동 - 김송권 목사

 1. 성경과 찬송가의 발행

  1) 공인성경

 해방후 한국교회는『셩경개역』(1938)을 개정한『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을 1952년부터 사용, 선교사들이   1911년에 출간했던 최초의 우리말 신․ 구약 전서인 『셩경전서』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달 표기법만 수정. 1961년 한차례 개정, 옛 용어나 표현들 함부로 고치지 못함.

 1967년『신약전서 새번역』대한성서공회 출간, 그리스 원어에서 직역 쉬운 현대어 경어체 사용. 청소년과 진보적 교단 환영 받음.

 1977년『공동번역성서』천주교와 함께 작업해서 낸 번역성경,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은 성경 사용 반대.

 1993년『성경전서 표준새번역』각 교단 신학자와 국어학자 등이 10년 가까이 작업 구약성경을 완역. 한국학자들이 원문을 사용하여 완역한 최초의 성경전서로서 한국성경 번역사에 기념비적인 작품.  장로교(합동)의 강력한 반대로 예배용 공인 성경으로 채택 되지 못함.

 1998년『성경전서 개역 개정판』출간 원문을 참고했지만 새로운 번역보다는 언어의 현대화에 초점. 예배용 공인 성경의 지위는 획득했지만, 원어에 근거한 새로운 번역도 아니고, 새로운 세대의 언어와는 거리가 먼 성경.

 2)다양한 현대어 성경

  1948년 『영한 대조 신약전서』출간. 감리교 류형기가 영어 개역성경(RSV)을 번역한 가로쓰기 성경.

  1958년『쇼트바이블』출간, 김재준이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아래 영어발췌 신약성경을 구어체로 번역.

  1961년 『새로 옮긴 신약성서Ⅰ, 마태의 복음서』출간, 박대선, 문익환, 김용옥 등이 참여했던 복음동지회 성서 번역 위원회가 그리스 원문에서 번역, 경어체 사용.

  1971년 『젊은이여, 참 삶을』출간, 영어성경 『리빙레터스』(Living Letters) 가운데 로마서만 현대적 우리말로 번역. 『리빙 레터스』신약의 서신서만 묶은 것으로 『리빙 바이블 』의 모태가 된 영어성경. 생명의말씀사를 설립한 복음주의 동맹선교회(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TEAM)가 출간.

  1977년 『신약현대의 성경』 출간, 팀 선교회가 『리빙 바이블』을 토대로 전도에 목적을 둔 성경.

  1985년『현대인의 성경』 출간, 의역을 시도했던 다른 현대어 성경과 마찬 가지로 초기에는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교역자들로부터 많은 비난 받음. 30년 동안 150만부 팔림 젊은이들 중심으로 애용됨.

  1983년『표준 신약전서』생명의말씀사가 한국표준성서협회를 조직하고 출간.

  2001년『쉬운성경』아가페출판사 출간,『현대인의 성경』보다 더 쉽게 성경의 의미 전달 목적.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2005년『우리말 성경』두란노서원 출간, 쉬운 표준어를 사용하되 원문에 충실하자는 목적.


 2. 신학교육

 장로교의 경우 분열을 전후하여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와 고려신학교, 총회 신학교가 독자적인 신학노선을 표방하면서 별도의 신학교육을 실시. 1959년 예수교장로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열되면서 남산에 위치한 총회신학교도 분립, 합동측은 사당동캠퍼스에 총회신학교를 통합측은 광나루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움. 통합측은 서울 신설동에 야간과정으로 개설 되어 있던 서울 장로회 신학교(1954년 개설)를 신학교로 육성, 대구, 광주, 부산, 대전 , 전주지역에 지방 신학교를 설치하거나 개편 육성. 합동측의 경우는 1979년 이후 여러 개의 교단들이 분립하면서 합동신학원, 개혁신학연구원 등 수 많은 신학교 생김.


 감리교의 경우는 감리교신학대학이 1950년 문교부 대학령에 의해 4년제로 개편. 1954년 감리교대전신학교 대학인가를 받은 후 1972년부터 목원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종합대학으로 확장. 각 연회마다 운영했던 감리교 소속 신학교는 1980년대에 통합되어 현재의 협성대학교로 발전.


 성결교단의 경우는 교단신학교인 서울신학교가 대학인가를 받은 후 1965년 서울신학대학교가 됨. 기독교성결회와 예수교성결회로 분열된 이후, 예수교성결교회는 안양에 성결신학교를 별도로 세움. 성결대학교로 발전.

 침례교단은 1973년 대학설립인가를 받아 침례신학대학교가 됨.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신학원과 한세대학, 루터교회의 루터대학, 그리스도교단의 그리스도대학과 서울 기독대학, 성공회의 성공회 대학, 나사렛 교단의 나사렛 대학, 안식교의 삼육대학 등도 모두 이무렵 문교부 인가를 받았다. 신학교가 신학대학으로 된 후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것이 대부분 교단 신학교가 보여준 대체적 경향.


 특정교파에 속하지 않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은 1968년 싱가포르 아시아태평양전도대회에서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된 후 1974년에 정식으로 개교함. 피어선 성서학원은 1981년 피어선성서신학교로 승격된 후 1996년 평택대학교로 발전. 1990년대 후반부터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신학대학원대학교들이 새로운 교육 기관으로 등장하기 시작함.


 종합대학 내에 설치된 신학관련 학과로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설립 당시 신과로 시작하여 해방과 더불어 연희 대학교 내의 신학과로 자리잡고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을 담당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이 대표적인 예다. 이화여자대학교, 계명대학교, 배재대학교, 숭실대학교, 전주대학교, 한남대학교, 호서대학교 등 기독교계 종합대학 안에도 신학관련 학과들이 설치 됨. 연세대학교 안에 설립된 연합신학대학원은 교파연합 정신에 입각하여 196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국제신학교육기금이 11만 달러의 기금을 제공하여 설립됨. 그 후 각 교파 신학대학들이 독자적인 신학대학원들을 설치함으로써 교파연합의 취지가 약화되며, 연세대학교 단독으로 운영 됨.

 신학교육 기관이 점차 늘어나고 신학 교육내용도 다변화 하면서 신학적 토론과 교육자원의 교류를 위한 협의체의 필요성이 대두 됨. 1965년 5월 9개 신학대학 대표가 신학증진, 신학교육기관 사이의 협력, 신학교육의 수준향샹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전국신학대학협의회를 결성 함. 1961년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설립을 필두로 한국신약학회, 한국구약학회, 한국조직신학회, 한국교육사학회, 한국실천사학회, 한국기독교윤리학회가 차례로 설립, 이들이 모여 1973년 한국기독교학회를 창립. 한국기독교학회의 설립은 한국 신학 교육의 외형적인 발전만이 아니라 한국 신학의 내용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음.


 전국신학대학협의회, 각 부문별 학회, 한국기도학회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진영의 교회와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운영. 1990년대 들어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 대변되는 보수진영의 학회들이 조직되면서 진보진영과 신학적 교류 가능성이 높아짐.

 

 3. 기독교 언론 및 학술 연구 단체

 1946년 초 [기독교공보] 창간, 해방이후 발간된 기독교 최초의 신문이며 기독교조선남부대회의 기관지. 6.25전쟁으로 폐간. 1951년 장로회 총회가 복간, 그 후 장로교(통합)의 기관지가 됨. [한국기독공보]로 개명.

 1955년 [기독교보] 고신측 발행, 1960년 [기독신문] 합동 측 발행, 초교파 신문인 [크리스챤 , 1960]과 [연합기독신보, 1965]가 창간. 이 신문들은 모두 주간신문으로 발간. 기독교 일간지로는 1960년 10월에 창간된 [복음일보]와 [기독일보]가 있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1년을 채 넘기지 못함. 1988년 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간한[국민일보]는 교회 내 신문이 아니라 대중언론 지향하며 계속 발간 됨.


  기독교 월간 잡지로는  대한기독교서회가 1925년에 창간한 어린이 잡지 「새벗」,여성들을 위하여 1954년 창간한「새가정」, 그리고 1957년 창간한「기독교사상」, 「기독교사상」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진보적이고 지적인 개신교 잡지로 이름을 얻음.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기독교 교양지 교파적인「신앙세계」와 1976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간한「신앙계」, 1980년 온누리교회가 설립한 두란노서원이 발행한 교양잡지「빛과소금」, 교역자나 전문인을 위한 잡지도 많이 출간. 1961년 창간한「기독교교육」은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잡지로 교회학교 교사와 기독교교육과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을 끔. 「월간목회」는 교역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현대적 교역을 연구, 개발할 것을 목적으로 1976년 창간된 잡지. 두란노서원의「목회와 신학」은 교역자를 위해 신간적인 내용을 주로 다룸. 1982년부터 탁명환이 발행을 맡았던「현대종교」는 기독교적 신흥종교를 중심으로 각종 신교를 다룸. 1963년 박재훈에 의해 창간된「교회와 음악」은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잡지며 8호를 내고 중단 됨.


 기독교 잡지 가운데 정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  또는 정간된 경우는 1970년 김재준이 창간한「제3일」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는 역할을 감당하다 1974년 정부로부터 폐간 명령 받음.  1951년 안병무가 창간한「야성」은 1969년 「현존」으로 이어짐.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 「기독교사상」은 5.16 군사정변 때 쿠데타를 반대하는 글을 실어 수정하라는 협박을 받았고 전두환 장부 시절인 1982년에 북한선교를 주제로 삼았다는 이유로 6개월간 정간되기도 함.


 기독교방송(CBS)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으로 1954년 12월 개국.  CBS에 이어 두 번째 민간방송이자 선교전문방송으로 1956년 개국한 극동방송은 팀선교회가 한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가지면서 설립.  1973년 개국한 아세아방송은 선교방송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에 의해 설립.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를 대상으로 전파를 통한 선교에 전력. 1990년대 들어 유선방송이 보편화 되자,CTS(1995),CBS-TV(2002)등 영상 방송국도 설립.


 1960년대 이후 설립되어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기독교연구단체로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있음. 한국신학연구소는 1973년 설립. 이 연구소는 한국적 신학의 창출을 도모하고, 신학 연구를 통해 교회의 진로를 탐색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출발함. 신학 전문잡지「신학사상」은 민중신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함.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한국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과 한국기독교학술원이 통합하여 1979년에 설립.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정의롭고 민주적인 한국 사회의 건설에 기여할 것을 목적. 1982년 한국교회100년 종합조사연구를 실시하여 한국교회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함. 한국기독교사연구회(1982)로 발족한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 모임이 1990년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발전해 자료수집과 연구에 많은 활동.


 4. 기독교 문화

 한국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으며 이른바 토착화 신학에 관한 논의가 대두되면서 한국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생김. 1960년 이후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문학예술 분야의 활동을 살펴보면 각각 분야에서 상당한 문화적 축적을 이루었음.

 문학의 경우 1954년 전영택, 박목월, 박두진, 박계주, 김말봉 등이 가담한 한국기독교문학인클럽의 창립과 여기서 간행한「한국기독교 문학선집」(1955)은 한국기독교 문학운동의 현저한 진보를 보여준 것.   1970년대부터는 기독교적 주제를 한국의 현실 속에서 담아내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 황순원의「움직이는 성」(1973)은 한국인의 심성을 기독교적 입장에 비추어 다룬 본격적인 작품으로 평가 됨.  1979년에 출간된 이문열의 첫 장편소설「사람들의 아들」은 1970년대 당시 현실보다 내세의 구원에 집중해 있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정의의 문제를 물음. 이청준의「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는 한 실존 일물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체험적인 차윈에서 기독교를 다루면서 기독교적 준거를 수용. 이청준은「벌레이야기」(1985)라는 단편소설에서도 기독교의 용서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다룸.


 1985년 출간된 조성기의「라하트 하헤렙」은 신앙의 본질과 현상을 깊게 다룬 본격적인 기독교 소설. 조성기는 연작 형태의 소설인「에덴의 불칼」, 「야훼의 밤」등 기독교 소설을 연이어 발표. 집단적인 광신주의를 고발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원형을 탐구. 그 외에도「에리지톤의 초상」,「테초에 유혹이 있었다」등을 쓴 이승우는 타락과 구원,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문제 등을 진지하게 성찰. 김성일은「땅 끝에서 오다」,「제국과 천국」등을 통해 호교(護敎)적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소설화하는데 힘씀.


시 분야에서는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이 신앙시의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품격 높은 기독교 시를 만들어 냄. 김현승은「절대고독」(1968),「견고한 고독」(1970) 등 시집에서 신의 존재와 인간의 고독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비장하게 형상화 함. 박두진은 후기로 갈수록 신앙체험을 더 많이 다룸. 「사도행전」(1973), 「포옹무한」(1981)등 신앙고백적 시집은 시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그의 목표였음을 보여 줌. 박목월은 중기 이후 신과 인간 존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다가, 타계하기 전 몇 년간은 거의 신앙시만 씀.


 한국교회 음악은 1950년대 음악대학, 군악대, 음악 단체의 책임자와 활동가들이 대부분 교회 출신인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음악계를 주도했음. 교회 음악은 여전히 서양중심적 이었으나 교회음악의 토착화가 시도되기도 함. 1950년대부터 나운영과 박재효, 1980년 이후 문성모 등 교회음악 작곡가들이 국악을 접목시키거나 국악양식으로 창작. 박동진의 판소리 “예수전”은 개인의 신앙을 넘어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함.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면서 기독교적 노래들이 운동권 노래로 사용, 교회음악이 교회를 벗어나 민중과 호흡하는 계기를 만듦. 1980년 초 부터는 전국대학 기독교 동아리와 종교단체에서 노래패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 펼치면서 기독교 음악의 민중가요화는 더욱 활발히 이루어 짐. 한국민중교회 연합회가 노래집「민중복음성가」(1990), 기독노래운동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주축되어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1991)를 만듦. 저항적이고 민중적인 성가는 일 부 진보적인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사용. 대부분교회는 영성을 고양시키는 복음성가를 여전히 선호.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가요는 교회의 관심에서 멀어짐.


 미술분야에서는 기독교신앙을 한국적 미학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계속 됨. 한국적 성화의 표본으로 꼽히는 “부활 후”(1924)를 그린 김은호의 제자로 한국화의 계보를 이은 김기창과 김학수는 한국화 기법으로 예수를 그렸다. 이외에 장운상의  “동심”, 김흥종의 “성탄”도 성경내용을 한국적으로 해석. 1965년에 한국기독교미술협회가 발족 개신교와 천주교 작가가 함께 참여하여 매년 전시회를 개최. 1969년제4회 부터는 천주교 미술가들이 독자적인 모임 만들어 분리해 나감. 1980년에는 민중신학과 민중 미술의 영향이 기독교 미술에 미쳐 전통적인 성화풍의 그림대신 민중의 현실을 목판화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표현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교회건축은 1940년 중기까지 서양식, 일본식, 한옥식 또는 혼합식으로 지어 짐. 그 후 대부분의 교회건축은 특정한 양식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성을 지님. 교회 건축물이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못한다거나 주변환경과 어울러지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함. 1950년 이후 영락교회와 같은 네오고직양식이 한참 유행하다가 1980년대 들어 개신교회 건축은 다양한 현대식 건축으로 탈바꿈 함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는 그런 점에서 전환점이 됨. 한국적교회 건축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여전히 초보단계에 머묾.


 5. 연합운동

 1)천주교와 개신교의 연합활동

 개신교가 전래된 개항기 이래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못함. 두 전통 모두 신학적으로 경직되어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데 어려움이 따름.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 -65)였음. 공의회 도중 교황 바오로 6세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재일치를 위해 194년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 공의회 정신에 따라 천주교는 1966년 일치위원회를 발족 개신교를 형제의 종교로 받아 들임. 1968년부터는 교회일치 기도주간을 제정 천주교와 개신교가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 전개.

 천주교와 개신교의 연합운동은 성서 번역 작업을 통해 절정에 달함. 그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적 합작품인「공동번역 성서」, 1971년 부활절에 신약성서가 발간되고 1977년 부활절에 구약성서가 발간. 이것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이루어진 공동 작업. 하지만 개신교 거의 모든 교단이 사용하지 않음. 천주교도 계속 사용하다가 2005년부터 독자적으로 번역한「새번역 성경」을 사용.

 신학적 차원에서도 협력 작업을 시도했고, 민주화 운동에서도 연대활동을 함. 국내에서 전개 된 개신교 천주교의 연합활동은 진보적인 지식인과 활동가 중심으로 전개되어 일반 신자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크지 않았음.


 2)개신교 교회일치 운동

 1970년대를 지나면서 교회는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되는 현상을 보임. 진보진영의 대표적 역할을 한 것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하 교회협의회), 교회협의회는 군사정권 시절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통일운동을 주도해 나감. 6개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대한성공회, 대한구세군본영)이 가입. 1980년대의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에서는 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교단들도 교회협의회와 함께 사업에 참여. 1989년 초에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했던 한경직, 강원룡, 조향록, 지원상 등 교계 인사들은 교회협의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논의.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및 여러 장로교 교단의 총회장 및 감독을 지낸 인사들이 모여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한경직을 준비 위원장으로 추대 탄생한 연합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다. 보수 진영의 한기총은 창립 이후 보수교단 및 기관들 사이의 교류 및 협력 사업을 토대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 대내적으로는 이단 및 사이비 종교의 척결, 단군상 철거운동 등을 통해 보수적 신앙의 수호를 위해 주력,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의 강화 및 북한정권의 민주화 등을 외치면서 친미반공주의 노선을 견지. 2008년 현재 한기총은 63개 교단과 22개 단체가 회원인 반면, 교회협의회는 1997년에 가입한 한국정교회와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를 포함, 8개교단으로 구성되어 있음. 장로회(통합)은 교회협의회 회원을 유지하면서 한기총에 가입했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한기총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교회 협의회에 가입.

 2000년대에 들어서는 양 기구의 통합이 가시화되기도 함. 2000년 7월 양 기구의 통합을 위해 한국기독교연합준비위원회가 결성, 2001년 12월에는 한국교회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가 구성. 이 단체들은 한국교회의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를 출범시키기 위해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의 통합을 시도. 이런 분위기에서 각기 개최해 왔던 부활절연합예배를 공동으로 개최. 그러나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은 서로 다른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 기구의 통합은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음.


제15장 변화하는 북한교회  김성진 목사 -    

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

   북한에서는 종교활동을 제한하다가 6·25전쟁을 거치면서 종교를 탄압했고, 50년대 후반 이후에는 종교를 말살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북한기독교의 이해에서 종교탄압 정책을 중시한다면 북한교회는 소멸과정만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정부의 종교탄압 상황을 주시하면서도 그런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북한교회가 어떻게 생명을 유지했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실상은 북한교회가 소멸된 것처럼 보이지만, 북한교회와 교인들은 신앙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온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예가 1960년대 후반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가정교회 입니다. 전쟁이 나면서 공공연히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몇몇 사람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가정교회의 출발입니다. 이런 가정교회를 인정한 것은 1960년대 사회주의의 황금기를 지나면서 종교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북한 당국이 가졌던 여유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교회는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유지시킨 자생적 조직이고, 가정 교회를 통해서 북한교회의 신앙이 이어져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

   가정교회가 지속되면서 70년대 이후는 북한정부의 인정 하에 1972년에 평양신학원을 다시 개원되었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도 활동을 재기했습니다. 가정교회 전통이 공개적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비밀리에 존속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조직들이 재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교 조직을 통해서 1970년대부터 북한교회가 외국 종교단체들과 종교교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조기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들이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논의하고 성경공부와 성만찬을 같이 한 일은 분단의 벽을 뛰어넘는 종교교류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서방교회의 모습들,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게 되고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종교교류 과정에서 80년대부터는 해외에 나가 있던 남한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북한에 교회를 세울 것을 요청하기도 하고 기독교적 삶을 북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스위스에서 수차례 남한교회 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

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

   1988년 10월과 11월에 개신교 평양 봉수교회가 설립되고 천주교 장충성당이 각각 문을 연 일은 기독교 변화를 대외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편으로 가정교회가 유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운영하는 교회를 생기게 된 것입니다.

   북한의 교회는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과시하고, 남한 및 서구사회와 교류하며, 외부로부터 많은 돈과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는 창구의 역할을 하는 장소로 교회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봉수교회가 세워짐으로 인해서 평양시내의 가정교회 신도 일부가 봉수교회의 교인으로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봉수교회의 등장은 여러 가지로 북한정부가 주도한 것이지만,  거기에 가정교회의 신앙이 흘러들어갔다고 보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북한 당국과 인민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이 있는데, 문익환과 임수경, 문규현의 북한 방문이었다.  

   북한교회의 재건과 활동을 종교 외적 동기에서 바라보면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북한교회 내부의 경험에서 보면 그래도 북한식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주체 사상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생활이 집단화되어 있는 북한의 사회주의적 환경속에서 기독교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젊은 지도자와 새로운 교인을 통해 교세를 유지하는 일이다. 1980년대 말이후 북한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며 그 존재와 모양이 결정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사회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였으며, 북한 기독교는 정권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이전보다 활기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16장 새로운 신학의 모색


1. 한국적 신학의 등장 - 1960년대

                교회밖에서 기+노장사상+ 불교사상 - 류영모1940 ☞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안병무, 김흥호

                교회안에서 논의 2차대전이후 - 문화민족주의 영향으로 1960년대 신학의 한국화 시작

                한국신학의 토착화 - 감신대를 중심으로 - 1950년대 후반 유동식이 로고스☞도道 이해함

                1962년 인도 감독 나일즈(D.T Niles) 내한 강연 “ 아시아의 기독교를 서양 선교사들이 화분에 심어 놓은 화초로 비유하며, 이제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이 화분을 깨뜨리고 자신들의 옥토속에 이 화초를 심어 힘차게 자라게 해야 한다”

                전경연의 토착화 논쟁 - 기독교 문화가 한국에 토착화해야 한다.

                윤성범 - 유교중심 - 감, 솜씨, 멋 --->> 誠성의 신학 : 말 言이 成 이루어졌다 -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이종성(장로교신학자) - 혼합주의라고 비판

                유동식 : <한국종교와 기독교> 유, 불, 선의 혼합 -무교중심 -->>1980년대 풍류신학의 발전

                변선환 - 불교중심 -종교간의 대화주장


2. 민중신학 -1970년대

                기독교안에서의 인권운동+민주화운동이 민중신학탄생

                배경: 군사독재정권- 김지하 장일담/ 함석헌 씨앗사상/ 민중사관의 대두

                1세대 안병무, 서남동 2세대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서남동 “ 성서는 절대적 표준이 아니라 하나의 전거典據reference 이다”

                안병무 ‘ 민가복음“ 오클로스 개념을 민중으로 해석 - 한국사에서 홍경래사건,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

                김용복 - 몸의 언어인 탈춤에서 종교적 비판적 초월성으로 해석

                서광선 - 무속적 신앙에서 민중신학의 형태를 찾았다

                1990년대 - 민중신학의 퇴조 - 사회환경의 급격한변화 - 군사정권의 퇴각, 사회주의붕괴, 시민사회의 담론형성,


2. 새로운 신학의 수용

                1. 해방신학 : 1960년 라틴아메리카의 카톨릭신학에서 출발 - 절대빈곤과 교회의 무관심에서 출발 : 구스타프 쿠티에르즈, 레오나르드 보브, 돔 카마라/ 서구의 사회종속이론을 적극적으로 교회신학으로 재해석함

                국내에 1970년대 함세웅신부를 중심으로 받아들임 그러나 족적이 거의 없다- 1980년대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진영이 관심을 폭발시킴- 1982년 기독교사상 잡지가 학회를 열어서 소개 - 당시의 남미와 유사한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1980후반 관심이 급격히 퇴조 - 대통령직선제쟁추


                2. 여성신학 :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중심으로 한국에 소개됨 -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근원적 질문을 던짐/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성신학의 한계를 벗어나 여성신학으로 완성/ 여성의 으로서의 경험을 강조하는 신학이 중요성을 띠었다.

                1968년 ‘교회여성연합회’  1980년대 ‘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1984 한국여성신학회 1986기독여민회, 1989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1989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1989여성교회등으로 발전

                1990년대 거시적접근에서 미시적접근으로 여성신학이 변혁 - 1994년 통합에서 여성목사안수


3. 보수신학의 전개

                1) 새로운 신학의 도입

                신학적 근본주의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 존 맥킨타이어 신학 - 고신, 합동, 대신 -박형룡박윤선의 신학+반공주의 신학이 형성 - 문자적성경해석

               NEO- Evangelicalism 신복음주의 - 폐쇄성을 극복, 기독교지성주의주장, 사회적관심확대

                네달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와 허만 바빙크의 신칼뱅주의 신학을 받아들임 : 하나님의 주권과 일반은총론을(문화, 예술, 과학, 정치체제강조) 또한 하나님나라(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땅에서 실현되는 나라)와 언약신학, 구속사적신학을 강조함

                한국에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VP, SFC학생신앙운동, IVP한국기독학생회


                2) 새로운 신학과 사회참여

                세계적으로 1970년대 John Yoder, Ronald Sider 등의 보수적학자 사회참여 강조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세계복음화국제대회 ‘로잔언약발표’-하나님의 선교, 인간화강조

                로잔언약의 기초 - 존 스타트가 기초작업을함 국내에서 많이 번역됨

                로날드 사이더 의 - 기독교윤리관 -손봉호에 양향줌 제임스콘의 신학 -이만열의 민중신학대한 민주화에 기여 - 진보잡지의 창간<복음과 상황> 1991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한다



17장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

1.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선교

                1960년대 박정희정권은 군사독재와 도시중심의 국가개발로 인한 이농귀도 현상이 벌어짐

                그래서 노동자, 도시빈민, -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농민선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 사회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선교하는 모습을 가져옴

                1)도시산업선교 - 196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소속교단 - 감리교, 구세군, 복음교회, 예장- 에큐메니칼운동의 중심으로 1970년대 도시안에있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선교시작- 저임금과 수출지향성 성장구도는 박정희군사정권과 대립, 갈등이 불가피하게 발생됨- 산업선교를 - 정부는 공산주의 침투라는 용공으로 몰아붙임 대표적인 예) YH무역사건1979 여성노동자 야당당사에서 농성시작 - 인권을 요구하는 기본적 시위에 배우세력으로서 EYC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 서경석, 인명진등을 구속함

                2)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1960-70년대 대도시중심의 개발성장은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도시로 몰려든 빈민층들은 새로운 선교의 필요성을 가져왔다. 1960년대 부산에서 성공회가 - 기하해방운동을 중심으로 최초로 시작- 1980년대 민중교회, 노동자교회, 농촌선교운동으로 발전됨

                농촌선교 - 1966년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시작 1974년 농민운동가의 이론가를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교육하기 시작1980년대 신용협동조합, 양곡사업, 시범부락으로 발전


2. 인권및 민주화운동

                1960년대 3.15 부정선거 → 4.19 학생의거→ 1961년 5.16 군사혁명→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 일본의 원조와 청산금을 가지고 경제개발시작) →기독교의 반대에 직면함

                1969년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 반대파 - 박형규, 함석헌, 김재준↔ 찬성파 김윤찬, 김준곤, 김장환


                1970년대 1972년 유신헌법 발표- 한국그리스도인의 선언 1973년 부활절예배시 - 장기집권의 음모를 폭로하고 반대운동시작- 대통령 긴급명령1.2호 발표 1974년 전국민주청년총연맹(민청학련) 으로 기독교민주인사들을 구속함- 교회는 목요기도를 시작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독재정권에 계속적으로 대항했다. 보수적기독교와 박정희정권의 연결고리는 - 반공이었다. 그래서 조찬기도회가 생겼다. 외국에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가 발족하여 한국교회의 어려운 정치현실을 지원하였다


                1980년대 1979년 박정희의 피살 -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 전두환정권 ( 한경직, 조향록, 김지길, 정진경등은 혁명쿠테타세력을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축복함- 노태우정권의 군사정권의 연장

                민중교회와 민중신학은 한국교회가 사회참여와 하나님 나라의 정의실현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고 1980년대 -9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 기독교농민회, 기독교여민회, 기독노동자연맹,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 중심의 운동

                한국복음주의 협의회 - 보수파 김명혁, 손봉호 -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직선제개헌, 기독교윤리실천본부결성- 경제정의실천연합 -기독교인중심 - 운동으로 발전


                3. 통일운동

                1974년 이전까지 통일운동에 기독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함 7.4남북공동성명부터 성명서를 내었다 1980년대 개신교 진보운동을 중심으로 소리를 내기시작 북한선교를 선교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진보파가 주장하는 획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 3국에서 남,북의 기독교단체들이 만나기 시작했다 1989년 문익환목사 북한 봉수교회방문 - 부활절예배드림 - 93년 남,북인간띠 잇기 운동시작

               

                4. 민주화이후의 시민운동

                1987년 6월이후 민주화운동이 한국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각종 NGO(시민단체, 비정부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냄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기윤실) 이만열, 손봉호, 장기려가 주축이 되어서 기독교시민단체 출범- 검소절제, 교회갱신, 음란문화추방- 경제정의실천연합 (경실련) 경제정의, 조세정의, 정치개혁, 환경운동, 통일운동에 민간주도의 관여를 시작함

                북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1990년대 급증 - 정부주도적 - 남,북한 교류법 발표 - 이후 남, 북 쌀 나누기 운동, 보수적기독교인들이 대거 교회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 곽선희, 홍정길등- 남북나눔운동, 굿네이버스, 한민족재단, 유진벨재단, 월드비전


21세기를 향하여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문제들 - 기복신앙, 내세적신앙,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세계관, 교파간의 치열한 경쟁---- 교권세습, 일부 지도자의 도덕적 타락과 세속 권력지향, 교인수의 감소, 물신숭배적 가치관

                왜 이런 일이 한국교회에 ? 6.25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 일탈적 신앙양태과 성경해석, 물질적 소망을 내세운 현세의 기복신앙과 결합/ 친일파청산의 실패와 그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폐와 편협한 신학으로 인한 교단분열, 개인의 권력으로 인한 분열 그리고 지방색도 큰 작용을 했다

                6.25 전쟁이후 회개와 화해에 앞장서지 않음 - 민족의 앞길을 제시하지 못한채  - 분단체제의 고착화와 순응화로 인하여 증오의 감정만 정착하였다. 이후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과 경제개발 우선주의로 인한 인권, 도시중심 개발등 그 후휴증으로 인한 교회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 잘못된 물결에 교회의 본질을 등안시하며 편승하여 외형적 성장만을 중요시하는 악습때문이었다.


                앞으로 과제

                공평과 나눔 중심의 물질주의 극복, 남북통일를 위한 교회와 기독교중심의NGO의 적극적 역할, 한국사회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책무를 인식하며 성서의 본질적 회복, 기독교의 토착화, 좌, 우 기독교의 연합을 통한 상호 장점을 퓨전시켜 새로운 한국기독교를 탄생시켜야만 한다. 교회안에서의 남녀 평등과 여성리더십의 확립과 활용이다. 또한 다음세대를 위한 청소년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의 확립을 교회교육을 통하여 형성하도록 적극적 미디어개발과 교육향상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