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교단사

2011. 7. 10. 17:57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한국교회교단사

(The korea church, History of Division)

□ 서 론

한국교회의 부흥은 복음이 들어 온지 120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해서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와 교인, 각 교단의 가장 큰 신학교도 모두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성결교회, 순 복음교회, 침례교회 뿐 아니라 세계 각 교단 신학교들도 가장 많은 신학생들과 교수, 규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교회와 성도, 교단들의 숫자적인 부흥 뿐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과 성경 번역, 기독교 출판물,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수준향상, 예수의 문화 영향파급에서 이 성장을 기적으로 알고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미흡한 점과 개선할 분야가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각성의 소리가 높은 실정이다. 세계교회와 하나님 앞에 빠르게 부흥한 성공적인 교회. 「순교의 피로 세워진 한국교회」, 민족의 슬픔과 비극을 개혁하며 여명의 불길을 일으킨 살아있는 교회로서 역사적 종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열과 슬픔의 역사적 과오를 벗어버리고 초기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처럼 칼빈주의적 경건부흥운동을 펼쳐야 하겠다.

과거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현재의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며 내일을 설계하고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부흥 성장의 원인을 살피기 위해 그 「뿌리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사이 성행하는 교회부흥성장의 방법들 중- 디지털의 방법, 인스턴트식 방법, 부흥공식과 요령을 말하는 Event성 세미나 방법은 있을 수도 없고 성경적방법도 아니다. 쉽고, 편하며, 빠른 성공과 부흥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아니다. 초기 한국 교회에 있었던 성도들과 선교사들의 순수한 복음과 뜨거운 열정, 간절한 기도생활, 성령의 임재, 희생적 연합단결 등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다. 따라서 한국교회 교단사 곧 그 뿌리를 찾아보면 부흥 성장의 방법과 근원을 알 수 있게 되며 현재의 한국교회 정체성과 미래의 전망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각 국가들과 단체, 교회 사이에 국가관과 민족사ㆍ역사 정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좁아진 세계와 열강들 속에서 자존과 특성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단합된 사상적 체계를 세우기 위함이다. 문화적 산물 뿐 아니라 스포츠와 모든 산업 구조에 이르기까지, 하물며 각 나라의 풍습과 양식 등 역사적 체계를 착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뿌리」는 각 민족들과 국가ㆍ 사회와 단체에 사관(史觀)설립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세분화되고 과학화되며, 일일 생활권과 인터넷의 열려있는 정보 세계 속에 각 국가와 개체의 뿌리는 그 나라의 정책과 진로에 막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서 교회와 성도로서 책임과 사명ㆍ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또한 신앙생활에서도 신학적 계보는 정치와, 경제, 사회, 예술 뿐 아니라 국력의 신장과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의 부흥과 영광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말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지 1세기가 조금 지난 한국의 교회와 신도의 수는 급격히 성장하여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부흥의 업적을 남겼고 민족의 부흥성장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부흥 뿐 아니라 민족과 온 세계에 복음의 능력을 전할 한국교회의 책임은 지대하다. 한국교회의 뿌리와 성장, 부흥원인, 분열의 요소, 우리가 믿는 신학 노선은 성도들 뿐 아니라 분파를 계속하는 각 교단과 한국교회 및 성도들에게 좋은 지침서와 각성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민족사적 측면과 선교사적, 민중사적, 사상사적, 교리사적 , 인물 중심적, 각 교단의 교세전달; 선전홍보용, 타 교단 비판역사였다. 본 한국교회 교단사(분열사)를 살펴보며 「하나님 주권사」의 역사적 체계를 세워보자.

 

 

   

 

제1부. 한국교회의 시작(設立)

사도도마의 동양 전도설

 

기독교 초기의 전설이나 문헌은 예수님의 12사도들이 선교지역을 분담할 때에 도마와 바돌로매가 현재의 이란과 인도 등 동방을 담당하였다. 도마는 46년 유브라데강 상류인 에뎃사에 선교기지를 정하여 페르샤 전역에 기독교를 확산하는 기초를 세웠고, 57년경에는 남 인도의 서해안 말라바르( Marahbar)에 정착하여 전도 활동을 벌여 그 일대에 7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도마는 중국의 북경(Khan-balig)까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다시 인도로 돌아와 마일라풀(현, 마드라스)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중 이교도들에게 창에 찔려 72년에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68년 설도 있다). 지금도 마일라플의 ‘성 도마 산’은 도마의 순교를 기념하는 순례자들이 계속 방문하고 있다. 현재 인도의 서남해안의 케랄라지역과 말라바르교회. 시리아 정교회들은 사도 도마가 그들 교회의 창설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에 영향을 끼친 첫 번째 기독교는 경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제1장 경 교(景 敎)

 

1.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와 경교(景敎)

 

초대교회는 기독론 논쟁으로 313년~680년까지 목숨을 건 정통과 이단의 진리전투를 계속하였는데, 428년 동 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실체적인 결합으로 보지 않고 외형적인 결합으로 보아 ‘인성은 신성의 얼굴이요 신성은 인성의 얼굴이다’라는 그리스도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키릴( Cylil)파의 주장으로 이단자로 규정되어 콘스탄디노플의 감독직에서 추방된 후 안디옥으로 갔으나 435년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유배된 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교회를 세웠다.

그 뒤 로마와 페르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동방지역은 페르시아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어 안디옥을 중심으로 발전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하여 동방 중국에 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며 활발히 선교하였고,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라 하였다.

2. 경교(景敎; Nestorius파)의 당(唐) 전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단은 동방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당나라에 와서 “밝은 종교, 빛의 종교;Lumminous Religion)라는 뜻에서 경교라고 불렀고, 또한 종교의 발원지인 페르샤를 따라 파사교(波斯教), 로마에서 온 종교라 하여 대진교(大秦教)라고 불리 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자신들을 ‘갈대아; 앗시리아 교회 또는 기독교’라 칭하였다.

마호멧 회회교가 아라비아에서 일어나 동진하는 것을 보고 그 세력을 견제하려는 페르시아는 정치적 계산에서 후한(後漢) 이후 문호를 개방하여 대당 통일국가를 이룩한 당나라(唐太宗)와 친선을 도모하였다. 635년에 페르시아 사절단의 단장인 알로펜(Alopen:阿罗本:아브라함)은 비단길(Silk road)로 중국에 오면서 경교를 가져왔고, 638년에는 황실로부터 교회당 건축과 자유로이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공인종교로 허락을 받게 되었다. 알로펜은 635년에서 641년까지 경교의 시리아어 경전 중에서「예수 메시아경」등을 한역(漢譯)하였다. 또한 당고종(650년 즉위)은 경교를 진종(眞宗)이라며 교회건설을 지원하였고, 알로펜을 ‘진국대법주’로 존중하였다. 또한 경교 선교사 경정(景淨)에 의해 「대진경교선원본경」(大秦景敎宣元本經)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경교가 부흥한 781년(당덕종)에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세웠다. 이것은 로마(대진)의 기독교(경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으로 그 내용은 ‘635년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781년 까지 경교의 중국 선교약사(略史)와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 실천항목’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845년 당무종은“회창(會昌) 대 박해” 때 경교비를 땅속 깊이 묻고 경교금지령을 내려 선교사들은 도주하였고, 회당 5만여 개소를 훼파하였으며, 승려 26만 여명을 환속시켰고 200년 만에 쇠퇴하고 말았다.

그 후 몽고족 징기스칸의 원대(元代1234-1367) 에 이르러 경교가 약간 부흥할 때에 외래종교라는 인식을 바꾸려고 명칭을 ‘복음을 전하는 자’의 뜻인 <야리가온>이라고 바꾸었다. 1275년 로마교황의 사절단으로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에서 17년간 봉사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쓴 <동방견문록>에 <야리가온>을 상세히 기록하여 초기 중국기독교의 유물들과 신앙생활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야리가온>은 불교식 신앙형태를 도입하여 목탁을 사용하며 여러 종교를 융합하였고 일부다처제와 황제숭배를 행하여 부흥을 꾀하였으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1368년 한족이 세운 명(明)나라 때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3. 경교(景敎)의 한국전래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42~199)이 남방계 혈통인 것은 폭넓게 알려졌는데 김수로와 허황후는 기독교인 이었다고 주장(인도에 도마가 복음을 전함)하는 학자들도 있다. 김수로 왕릉 안에 있는 물고기의 형상과 허 황후릉 석탑(5층)을 들어 기독교 유물이라고 하며, 지금도 가야지방(김해시 주변)에 가면 그 당시 가야국의 찬송가였다는 구지가의 노래는 애국가로 통할 정도라고 말하나, 위 내용들이 기독교라고 확증할 자료로 미흡하다.

1). 통일신라( A.D.668~ 935년)시대의 경교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때(668년)는 경교가 당나라에서 가장 번창하던 시기(635~845)였다.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친당정책으로 약 300년간 교분이 많았기 때문에 경교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며, 삼국시대에 이미 경교가 전해졌 을 것으로 보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장보고(통일 신라) 때 중국ㆍ일본과 해상 무역의 범위를 뛰어넘어 멀리 아라비아와 교역하여 유입된 보석, 의복, 물품들의 기록으로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신라초기에 당나라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통상교류와 우호 사절단ㆍ유학생 교류가 성행하였고 신라와 아랍권사이의 직접적인 무역교류를 통해 페르시아에 근거를 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곧 중국에서는 경교로 번창하였으므로 한국에 전래된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당나라에 유학한 흥법대사가 귀국할 때 경교승려를 데리고 온 기록을 보아서도 당과 동맹을 맺었던 통일신라에 경교의 유입은 확실하였을 것이다.

 

2). 고 려(918~1392)시대의 경교

몽고족 원나라(元)에 야리가온이 유행하던 시기는 고려 왕조의 무인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후기에 속한다. 고려는 몽고족의 1231년 사르타이(橵禮塔)의 몽고군에게 1259년까지 7차례 침략을 받았다. 송(宋)을 멸망시킨 후 원나라는 1264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인 교류가 활발하여《고려사》에 보면 몽고인들과 티베트인들, 서역인(西域人)들도 고려로 귀화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몽고(원)와 고려 사이에 교류를 통해 몽고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야리가온 신앙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정해 볼 수 있다.

 

3). 조 선(1392~1897)시대와 현 한국교회의 경교연구

조선시대는 유교가 국교로서 조상혼령 제사가 성행했으므로 기독교인 천주교가 박해를 받았다. 기해교난(1839년)중 정하상은 「상제상서」에 천주교를 변호하면서 경교의 역사를 첫 번째로 논한 한국 기독교 사학자라 할 수 있다.

 

옛날의 요순들의 이야기도 경사로 전해 내려옴이 있어 이를 금석같이 믿고 있사오이다. 우리 성교의 전함도 또한 경전이 있어 내려오고 있사오이다.

어찌 서양의 역사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탓하리오. 손 권이 세운 오 나라의 적오년간(서기 238-248)에는 철로 만든 십자가를 얻은 일이 있었고, 당나라의 정관 9년(서기 635년)에는 경 교가 크게 일어나 조정의 대신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숭배하여 큰 제사를 시 작하고 경교비를 세웠소이다. 명나라 만력 년간(1573-1619년)에는 서양 선비들이 나와서 많은 책을 지음이 있어 이제까지 중국에 전하고 있소이다. 천주께서 잠잠한 가운데 동방을 도우사 동방의 나라가 행복을 같이 하게 된 것을 기특히 여기시오며 제 50여년이나 되었사오이다.

(참고, 헌종 때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경교에 대한 발표와 이규경의 <오주연문 장전산고> 32권, 49권에 경교를 소개한 내용은 중요한 역사적인 중요한 고증이다. 오윤태목사와 김양선, 김광수교수 등이 경교 한국전래를 주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적인 경교 연구가 필요하다.)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고든(E. A. Gordon)은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의 사찰을 살펴보며 한국에 경교가 전래된 것을 제일 먼저 주장하였고. 이 연구를 기념하려고 중국 장안에 건립되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모조비를 1917년 자비를 들여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紳將), 관음상(觀音像), 나한상(羅漢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에서 페르시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통일신라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十二支像)부조, 능 앞의 무인상(武人像)을 경교적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김양선(金良善)목사는 고든의 주장을 받아들여 1956년에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石製物),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제(銅製)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상과 유사하다는 관음상(觀音像)을 예로 들며 경교의 전래 가능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동경한인교회를 시무하며 귀중한 한국기독교사(Ⅰ~Ⅳ권)와 <한일기독교교류사>를 저술한 오윤태목사는 한국의 경교전래설을 강하게 주장한다. 원래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말세와 미래적인 신앙은 없을 뿐 아니라, 간다라 지방에서 기록된 <화엄경>에 나타난 중생구원의 종교가 아니며, 자력적 개인의 해탈과 구원을 지양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인도에서 도마와 바돌로메가 전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184년 소승불교와 분리된‘대승불교’라고 주장하며, 6~7세기 통일신라 이후 경교의 영향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임을 피력하였다.

현재 경교의 역사적인 자료가 없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1145년 고려인조 때인 중국에서 경교가 쇠퇴한 이후였으므로 경교가 성행했던 통일신라와 삼국시대에 전래되었을 경교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불교가 고려의 국교였던 영향도 컷을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고 조상혼령을 숭배한 유교(儒敎)를 국교로 섬겼으므로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의 기록은 당연히 삭제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천주교인 정하상의 <상제상서>와 고대 불교유물ㆍ여러 서적 등, 고대 한국사학자들과 중국과 연합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영향을 끼쳤을 경교의 연구는 충분한 학적 가치와 중요성을 간직한다.

감사한 것은 경교가 다원주의와 호국종교, 이단의 뿌리인 것을 생각하면 한반도에 정통 복음을 예비하신 하나님 은혜를 찬양하고 영광 돌릴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

 

제2장. 한국천주교 순교신앙의 뿌리

 

초기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는 왜 수난을 당하였고,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하였는가?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왕국과 백성들은 철저히 조상의 혼령께 제사를 드렸다. 처음 중국에 들어온 천주교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것을 중국에서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 출신 선교사들의 자유 분망함으로 인한 문제와 폐해가 많아지자 그 후 중국과 한국에 파송된 프란체스카회와 도미니카회 선교사 출신들은 단호히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금하였다. 또한 당쟁의 요소로 인한 반대파인 천주교인들에 게 정치적인 보복과 황사영의 ‘백서사건’, 프랑스의 천주교를 앞세운 통상 협상과 열강들의 침입, ,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왕권의 분열몰락ㆍ500년 유교의 몰락과 불교의 몰락을 주관하시며 순교의 피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

 

1. 신유박해; 교난(사옥) 1801년

 

정조께서 갑자기 서거하시고 순조(1800년)가 11세에 등극하자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정치를 하게 된다. 대왕대비 김씨와 남매간인 김구주는 남인 벽파의 수령이었는데 남인 시파의 모함으로 정조때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였으나, 1800.11월 정계에 등용되자 이일을 보복하며 시파들 3o명을 죽였고, 1799년에 별세한 영의정 채제공의 관직도 삭탈하였으며, 사학을 금하는 교서를 1801년 1월10일에 발표하였다, 첫 번째의 박해는 그 해 2월에 정약종과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그리고1774년 한국인으로 첫 번째 영세받은 이승훈이 목 베임 당해 순교하였으나 정약용과 약전은 배교하여 유배되었다. 또한 한국에 첫 번째 신부로 온 중국인 주문모(4.19순교)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으며, 9월25일 충청도 배론에 숨어 있었던 황사영은 천주교박해 내용을 비단에 백서(帛書)를 적어 ‘북경의 청나라 황제가 중국신부 죽인 것을 책잡든지 또는 열강의 함대를 동원하여서 조선정부가 천주교를 받아드리는 방안’을 기록하여 중국에 보냈으나 이 백서가 발각되자 정권을 쥐고 있었던 남인 벽파는 천주교를 ‘대역부도’한 사교로 공포하고 남인 시파와 그 가족들과 그 친분 자들까지 온 천주교인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으니 이 때에 1백여명이 순교하였고, 유배된 신자들은 4백명이 넘었다. 따라서 신유박해 한 해에 3백명 이상이 순교와 옥사하였고 유배된 자들과 산간지로 피신한 가족들은 대단히 많았다.

 

2. 기해박해; 교난(사옥) 1839년

순조비(안동김씨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교우인 정약용이 남편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 치료해준 것을 감사하며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그런대 1839년 효명세자가 죽자 그의 부인 풍양조씨(조만영의 딸)는 아들 헌종이 임금이 되자 조씨가문의 세력을 확창하려고 대왕 대비 순원왕후를 몰아내려는 기해년박해를 주장하였다. 순원왕후는 어찌할 수 없이 1839,10,18에 척사윤음을 발표한 후 정하상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인 앙베르주교, 샤스탕, 모팡 총 113명이(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70명, 옥사 60여명)순교를 당하였다. 그 때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우의정 이제연의 천주교 박해의 그릇됨을 알리려고 천주교 최초 호교문인 변호를 위해 첫 번째 국왕께 호소한 한문의 글을 기록하였는데, 이곳에서 고대 한국 교회사의 뿌리인 경교의 유래를 볼 수 있으며 경교의 한국 전파를 첫 번째로 제시하고 있다.

병오교난은 1846년에 한국인 최초로 신부로 서품된 김대건(1821,8,21,충청당진출생)의 순교를 뜻한다. 그는 조부와 온 가족이 천주교인이었다. 그는 1836년 모팡 신부를 통해 마카오에 신학생으로 파송되었으나, 기해박해 때 부모님과 친척들, 3명의 신부들이 처형된 소식을 듣고 한국에 여러 번 잠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김대건은 1845,8,17 한국인 최초로 신부로 서품된 후 또 다시 잠입하여 1846년 4,18 연평도에서 체포되었다. 그 해 6.20 프랑스 함대 세실 사령관은 3척의 군함을 충청도 외연도에 정착하여 3명의 신부 죽임을 문책하고 돌아갔으나, 이것을 못마땅히 여긴 헌종(1846. 7,26)은 김대건(25세)을 새남터에서 칼로 참수케 하였다.

 

3. 병인사옥;박해(사옥) 1866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서거하자 수렴정치를 행한 순원왕후(순조비)는 강화도에 유배중인 철종을 즉위케 하였다. 철종은 천주교 신도로 순교한 은언군의 자손으로 천주교에 관대하자, 1865년(고종 2년) 2300명으로 신도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1863년 12,8 철종이 급서하고 후사가 또 없자 어린 고종이 등극하므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그 당시 순조 말부터 정권을 휘어잡고 백성을 탈취한 안동김씨들과 사대부의 권력을 몰아내고 왕권회복을 노렸으며 쇄국정책을 펼쳤다. 흥선 대원군은 1864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함경도를 침입하고, 중국 동지사인 이홍민이 ‘청나라에서 서양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있다’는 편지를 1866년 1월에 받고 프랑스 주교를 통해 러시아를 막으려던 대원군에게 대신들이 강력히 항의하였다. 1866년 2월부터 시작된 박해는 그 해 7월 미국 상선 셔어먼호의 침입(토마스선교사통역)과 10월에 프랑스 함대 7척을 로즈( P.G.Roze)제독이 리델신부를 통역으로 한강 양화진까지 인도하고 강화도에 침공(병인양요)하여 정박하므로 박해는 심해져 8천명이 옥사하였다. 더욱 옥사가 극에 달한 것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프랑스 신부 페롱과 해군들이 충남 행담도 구만포 덕산군청을 습격하고 흥선군의 양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훼파하려던 사건으로 옥사는 극에 달하여 천주교를 믿는 온 가족을 몰사하므로 6년간 2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500년 조선국교인 유교의 제사와 양반상놈ㆍ학문은 존중하고 농사와 상업은 천대하는 신분귀천의식 뿐 아니라 고대 신라와 고려의 1천년 불교의 숙명론적 생활양식, 수천년의 전통적인 기복토속신앙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사대부간의 사색당파는 기독교의 전파에 지장된 요소들이며 조선의 파멸 원인이었다. 세계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무지의 아집에 빠져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낙후된 생활과 고립된 이 땅위에 열강의 침략에 압박당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농경민족으로서 이동이 없고 안일한 삶으로는 세계 열강과 경쟁할 수 없는 것을 체험케 하셨다. 무엇보다 정신적 지주였고 소망의 목표였던 종교의 허탈감에 빠져있던 이 땅위에 천주교의 입국은 진리의 여명이며 구원의 종소리였다. 천주 하나님을 믿는대 지장되는 프랑스 국가의 침략 정치목적이나 조상숭배, 제사 등 술 과 담배 등도 수용치 않았던 ‘경건순교신앙’은 암담한 한국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서서히 불붙이기 시작하였다.

초기 한국 천주교 성도들의 성결되고 철저한 순교신앙을 본받아 복음전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제3장. 한국을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들

 

하멜 표류기를 읽었던 구츨라프(Carl Gutzlaff)는 화란 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ciety)로부터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로 동인도회사 통역을 맡고 1832년에 잠깐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해 7월17일에 다시 입국하여 40여일 동안 충청도 홍천 교금도(현,고대도)와 군산 앞 바다 금강입구에서 성경과 복음을 증거한 독일인이었다. 너무나 짧은 기간으로 영향이 미흡하리라고 생각하나 그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첫 번째 선교사였고 감자와 농사법도 가르쳐준 놀라운 공헌자라 할 수 있다.

 

1. 구츨라프 선교사

 

1832년 여름에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촬스 귀츨라프(Charles Gutzlaff)였다. 그는 포메라니아(Pomerania)에서 출생하여, 17세기 독일 경건중의 운동중심지인 할례(Hall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바타비아에서 봉사한 후 방콕 사이암과 마카오로 옮긴 후 중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1832년 동 인도회사는 암허스트(Amherst)호 편에 촬스 귀츨라프와 H.H 린드세이(Lind Say)를 중국 북쪽 항구에 보냈는데, 이 항구들이 어디까지 점차적으로 영국과 무역을 개방할 것이며 원주민들의 경향과 지방관청이 얼마나 호의적인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로버트 모리슨은 귀츨라프에게 항해동안 배포하도록 많은 중국성경을 주었다. 쏸퉁해안을 방문한 후, 그 배는 한국으로 항해하였다. 처음에 배는 황해도의 서해안에 있는 장상봉 마루 근처에 정박하였다. 탐험가들은 지방감사를 통해 편지로 궁정에 들어가는 것을 시도하였으나 노력은 실패하였다. 그들은 남쪽으로 항해를 다시 계속하여 충청지방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암허스트호가 바실만에 정박하여 있는 동안 선물들과 통상을 요청하는 청원서가 지방관리를 통하여 왕에게 급송되었다. 그들은 수도로부터 회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방문객들은 백성들과 만났다. 귀츨라프는 성경들과 전도서적들을 나누어 주었고 감자도 심었다. 청원서와 선물들은 오래 지체된 후에 되돌아왔다. 방문객들은 한국이 먼저 중국과 협력없이 무역거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전달 받았다.

귀츨라프의 한국방문은 너무 짧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방문한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요동치 않는 믿음으로 방문에 대해 기록하였다.

‘여하튼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계속하여 주님께 은혜로우신 돌보심을 기 도한 결과입니다. 한국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가 소멸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주께 서 정하신 때에 열매가 열리고 맺힐 것입니다. 이것을 고대하는 동안, 모든 힘과 뜻 을 다하여 십자가의 영광스런 도를 전파하도록 접근을 서두르는 매우 어려운 일을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찮은 출발에 축복하실 수 있음을 믿도록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여명의 날이 한국에서 속히 밝을 것을 소망합시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오랜 침묵을 깨기까지인 33년동안, 한국을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는 한사람도 없었다.

 

2. 토마스선교사 (Robert Jermain Thomas)

 

놀라운 사건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한국에 전해준 최초의 장로교회 선교사 R.J 토마스는 한국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아벨과 같이 자신의 피를 조선 땅에 물들였던 것이다. 그는 1840년 9월7일에 영국 웨일즈의 Rhayder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Haver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863년 7월21일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선교사로 떠났다. 단꿈에 젖어있을 이 신혼부부는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상해에 12월 도착하였으나 그 다음해 1864년3월24일에 아내가 사망하고 말았다. 슬픔에 처한 그의 마음은 더욱 주님께로 향하였고 선교사로서의 굳은 결심을 갖게 하였다. 그가 청국 해상 세관의 통역으로 일하면서도 선교사로서의 헌신은 불타고 있었다. 그 당시 토마스선교사는 Scotland의 성서회사의 지배인 Alexander Williamson의 집에서 김자평과 함께온 한국인 카톨릭 신도를 만나게 되었다. 1865년 9월4일에 이들과 함께 지푸를 떠나 한국의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하는 첫 번째 선교 준비여행을 한 것이다. 그는 황해도 웅진근방의 여러섬에서 약2개월 반을 지냈으며, 지금의 백령도에서 체류하였음이 오문환씨에 의해서 밝혀졌다.

1866년에는 병인학살 사건으로 프랑스의 카톨릭 신부 3명이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중 Ridel신부가 북경에 주재중인 로체장군 에게 보고하고, 함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프랑스 신부의 사망을 문책하기 위하여 로체장군은 토마스 목사에게 통역을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General Sherman호인 미국상선이 총과 화약 밀수품 등을 실고서 한국에 장사하려고 출항하였기 때문이었다. 4명의 미국인, 영국인 1명과 24명의 중국과 말레시아 선원들은 그 당시 조선의 쇄국정책과 서양인 배척의 위험을 알고 있어 그 상선의 통역인으로 토마스 목사의 승선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청하여 승선하였다. 그들은 1866년 8월 그믐께 대동강 어구에 도착하여 상류로 올라가는 동안 江西 포산에서 해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였다. 배가 용강군 쑥섬에 이르러 평양감사와 함장이 교섭한 결과, 상륙하는 의견차이로 이 주일동안이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에 관군은 나무배인 Sherman호를 태우기 위해서 거룻배에 솔가지를 싣고서 유황을 뿌려 떠내려 보내자 1866년 9월3일 화염에 휩싸인 배에서 홀로 살아남은 토마스 목사가 언덕으로 끌어올려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참수하려는 자에게 성경을 주려 했으나 거절을 당하자 성경을 뿌렸고, 처형당하기 전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것을 보고서 선한 사람을 죽였음을 깨달은 박춘권은 자기에게 주려던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쓴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널다리 교회가 되는 기적을 가져왔다. 또한 박춘권의 조카가 이영태인데 후에, W.D Reynolds박사와 성서번역에 종사하였다. 평양의 쑥섬에 뿌리워진 27세 R. J. Thomas의 순교 선혈은 12세된 최치량을 복음화 시켰고,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벨 때의 막나니 박춘권을 교화시켜 그 후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3. 중국 만주에서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서 Alexander Williamson목사(英 Glasgow 출신, 1885년 런던선교사)는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토마스 목사의 유지를 실현시키려고 힘썼다. 1866년 양인박해사건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통해서 8년간 무려 8천여명의 천주교인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A. Williamson목사는 1867년9월9일에 한국인의 내왕이 잦은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에 착수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성경책을 반포하였는데 거저주면 소홀히 여기므로 돈을 받고 팔았다.

(첫 번째 만주 선교사는 William Burns이다. 1845년 영국 선교회 소속 : 허드슨 테일러도 도움(1862년)

John Ross와 그의 매부인 John Macintyre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867년 만주 영구 봉천 선교, 다음에 병사하여 J. M Hunter(아일랜드 선교사)가 1896년 봉사. 고려문까지 찾아 옴. 이들도 역시 Scotland의 회중교회 선교사로서 1827년에 만주 우장에서 만주 개척 전도를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만주에서 전도하면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생각하며 한국의 복음화를 원해 1874년에 인접지인 고려문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에 의주의 청년 이응찬과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고려문에 와 있었다. 이중에 이응찬은 롯스목사를 만나 이야기한 결과 롯스목사와 함께 우장으로 떠났고, 세 청년은 그해 가을에 함께 우장 만주에서 그곳 서양인들의 어학교사로 힘껏 일하며 그들의 신문화와 성경을 배우게 된다.

1876년에야 비로서 이 4청년은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 받게되니 우장으로 들어간지 3년만의 쾌거이다. 롯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이 청년들에게 중국성경을 한국어로 번역시키고, 서상륜도 후에 이 작업에 참여케 되었다. 롯스 선교사와 이 청년들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였고,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간행되었다. 1887년에 이르러서는 신약전서를 완역하여 인쇄하였으니 롯스목사의 “예수성교전서” 를 3,000부 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John Ross목사와 John Macintyre목사는 1884년 가을에 만주 서간도 한국인 촌에서 최초의 한국교회를 세웠다. 또한 성경번역의 한국어 보급화와 인쇄 보급의 문서전도를 하기위하여 서상륜을 만주에서 본국으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였다. 이들은 한국교회설립과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고 한국교회가 기념해야할 보고이기도 하다.

Robert Jermain Thomas(최난헌 곧 J. sherman호의 音譯인 듯 하다)는 대동강에서 순교하였으나, 동국인 Williamson과 John Ross, John Macintyre 목사를 통하여 한국선교가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초석은 위와 같이 Scottland목사들인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 이 선교회는 1795년에 영국 회중교회와 성공회, 장로교 및 감리교의 보수 신학 입장에서 선교에 힘썼다. 이들의 주 멤버인 회중교회는 「청교도의 직 계보로서 교파적 교회의 이상을 그 신학에 배태하고 있었던 교회였다. 다시 말하면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서구교회의 이미지가 거기에는 상당한 분량 약하게 표현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분명히 한국교회는 청교도적인 개혁파 칼빈주의에 입각한 런던 선교회의 기도와 헌신으로 복음화 되기 시작하였다.

깨끗한 대동강수는 깨끗한 시냇가의 물이 합하여 이루어지듯이 한국교회는 청교도의 칼빈주의로 설립되었으나 서해의 탁류와 같은 흐름에 따라 자유주의 신학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오염되며 분열을 갖게 되었다.

 

 

제Ⅱ부. 한국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

 

□ 선교사들의 입국원인

 

왜 청년, 신혼부부 선교사들이! 생활이 안정된 의사와 간호사와 선진국의 엘리트들이 심히 가난하고 쇄국 정책으로 생명의 위험과 열강의 침략으로 혼란한 한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왔을까?

1. 하나님께 은혜 받은 보답이었다.

2. 믿음의 뜨거운 열정과 자발적 헌신이다.

3. 복음 전파의 투철한 사명감과 기도의 삶이다.

4. 성령 충만한 능력과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 영광의 모습이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의 발달과 과학화로 부흥 발전한 영국과 프랑스뿐 아니라 네델란드, 스페인, 러시아 등이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열강들은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려고 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아시아와 미주지역까지 심혈을 기우려 진출하려고 전쟁도 불사하였다. 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원인으로 발생하였고, 섬 나라로 일찍 개화한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할 야심을 갖게 된 것이다.

1842년 영국은 청국과의 아편전쟁에서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시켰고, 프랑스와 연합하여서 빼이징을 점령하여 청국을 반식민지로 삼았다. 이 열강들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차례로 아시아 각국을 침입하였다. 1854년 미국은 Perry제독을 앞세워 일본과 미,일 화친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였다. 1832년(순조32년) 영국은 상선 Amherst호로서 선교사를 통하여 한국에 통상을 희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1846년 (헌종5년) 프랑스의 A. Cecile함장이 己亥박해사건(1839년에 수천명의 천주교 신도가 투옥되고 130여명이 순교하였는데 앵벨트 주교와 모팡신부 챠스틴 신부도 포함됨)의 책임을 추궁하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 당시 1872년 일본에서 미국 성서공회 소속 Henry Loomis 선교사는 후에 가우쳐, 맥클레이와 함께 일본으로 피신한 이수정을 도와 성경번역과 한국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Loomis 선교사는 1882년부터 한국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까지 겸임)

서양 선박의 출몰이 부쩍늘고 서양 열강이 청나라에 침투한 사실이 알려지자 고종의 부친 이하흥(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1873년에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로 쇄국정책은 끝이 나고 민비의 친척인 민승호와 민태호는 개화 세력을 등용시켜 문호개방의 싹을 트게 하였으나 심각한 국가의 앞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왕권세력을 지키려고 외국세력을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려는 어리석은 정책을 채택하였다. 일본은 명치유신(1867년)으로 세력을 키우고 서양열강들과 교류하며, 무기를 도입하고 미일화친조약을 모방하여 군함과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어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1876년에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고종은 일본의 조선 독주를 견제하려는 청국의 이홍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2년 미국과 수교통상조약을 맺으므로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국제무대에 등장케 되었다.

미국에 대한 인식은 청인(淸人) 황준헌이 극동정세와 조선의 외교정책을 논술한 「조선책략」에서 더욱 좋게 인식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이 부강하려면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의 남침을 막으려면 親중국, 結일본, 聯미국 하여 自强을 꾀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조선정부에서는 김홍집의 주장에 따라 신사유람단(1881년4월)과 영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청나라의 권고로 60여명을 천진으로 보내어 새로운 문물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나 청일ㆍ동학전쟁ㆍ러일전쟁의 참혹함으로 민족의 대규모 이동과 생활양식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게 된다.

위와같은 국내외의 혼란과 침입속에 1884년 9월14일 웨슬리안대학과 마이아미 의대를 졸업한 Horace N.Allen박사가 미국 선교부에 의해 처음 한국에 들어온 실제적인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식적인 선교사로 허가를 받지는 못했다.

 

 

 

제1장. 개혁파 장로교 선교사들

 

1.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들

 

Horace N. Allen박사는 의료 선교사였다. 그는 1883년 10월11일에 미국 북장로교 외국 선교부 소속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업의 적당한 지역을 찾지 못하고 1년여 동안을 돌아다녔다. 이 때 상해에 있는 친구 Henderson박사로부터 한국으로 선교지를 정하라는 권유를 받고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한국세관의 책임자였던 P. G. Von Mollendorff(묄렌돌프)은 경건주의 본거지 독일의 할례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869년 주청 독일영사관에서 세관이 되었다. 1882년 11월에는 청나라 대신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 총 세무사와 통신사 아문을 겸임하였으며Allen선교사의 친구인 Henderson과 친구였다. Allen선교사는 묄렌돌프 밑에서 한국세관 사무를 보고 있는 Joseph. Hass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세관에 의사가 필요로 한가를 알아보고, 선교사로 사역하도록 부탁하였다. 또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 6월22일 한국선교사로 허가받았다. 그는 188년 9월20일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온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막으려 하였으므로 알렌은 선교사의 직분으로는 입국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Mollendorff는 국왕 고종에게 Allen의사가 입국한 목적과 그의 입국 허가를 얻게 하는데 대단히 수고를 하였다. 9월22일 서울에 도착한 Allen은 한국 최초의 住在 선교사가 되었고, 미국 영사관의 公医요 영․청․일본영사관 公医로 봉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묄렌돌프의 수고에 감사하며 세관의사로도 봉사하였다. Allen선교사는 의사의 일로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어학교사인 이하영에게 세밀히 복음을 전하였다. 이 소식이 국왕에 까지 전달되었으나 미국의 푸트공사는 각국의 영사관 公医라고 답변하여 안심 시켰다.

1884년 12월4일에 우정국 신축 낙성연회가 있었다.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개혁파인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에 금위대장인 민영익이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케 되므로 한의 14명을 불러 치료케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묄렌돌프의 연락으로 Allen선교사가 그를 치료하였다. Allen은 3개월 동안 온갖 정성으로 치료하여 민영익의 상처는 완전히 낫게 되었다. 그러므로 Allen선교사는 의사로서 궁정에서 신임이 두텁게 된다. 따라서 궁정의사인 어의(御醫)로 임명받게 되었다. 궁정에서 한국․ 일본․ 청국의 군사가 충돌하여 환자가 생기니 Allen선교사는 의사로서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므로 신임도가 더욱 깊어졌다. 날마다 중병환자들이 Allen선교사의 집에 모여들었다. 그는 미국 대리공사 Foulk에게 말하여 정부에서 1885년 2월 25일 병원을 설립하고 광혜원(Widerspread Relief House)이라 칭하였으며, 3월 12일에는 제중원(Universal Helpfuless)을 설립하였고,왕실 의료원도 설치하게 되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이었다. 이날은 한국에 개신교가 미국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다. Horace. G. underwood(원두우) 미 북장로교목사와 미국감리교 선교사인 Appenzeller부부 3명이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경 마가복음을 가지고 똑같이 땅을 밟으려 손을 붙잡고 첫발을 내디뎠다. 6월에는 Heron 의사가 선교사로 제중원에서 사역하였고, 언더우드선교사는 1885년 4월10일 상륙5일 후에 Allen선교사의 도움으로 왕실의료원이 개원된 그 날부터 함께 일하게 되었다.

Horace.G. underwood는 1859년 7월19일 영국의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대학과 네덜란드(화란 개혁교회)신학교에서 각각 문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1884년 7월28일에 미북장노회의 외지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로 젊음과 학식과 신앙의 열도가 활활 타오르는 시기였다.

underwood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광혜원과 학생들에게 거리에서, 시골에 나가 한국인에게 직접 전도하며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정동에 고아원을 세우고 Allen선교사 부인과 협력하여 영어성경 등도 가르쳤다. 1885년 6월 Heron박사는 알렌선교사를 도와 광혜원을 도왔다. 또한1886년에 간호원 Annie Ellers양이 파송 되었고, 1888년에 Lillias Horton이 광혜원의 여자부 책임을 맡아 왕비의 전속 의사가 되었다.

이 Horton이 underwood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James. S. Gale이 1888년에 한국에 파송받아 입국하였다. 그는 캐나다 Y.M.C.A에서 파송한 선교사였으나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어 미국 북 장로교 선교회에 가입 하였다. 그는 저명한 학자로서 유력한 전도자로 활약하였고, 사전을 번역하여 출간하며 문학계와 사회활동에 힘썼다.

1890년에 Samuel A. Moffett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되어 underwood가 세운 고아원을 책임맡게 되었다. 그는 고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 경비를 장로교 선교부에서 담당하였던 것을 부모들이 책임지게 하였다. 또한 학교로서의 조직과 기구를 갖추고 예수교학당을 세우며 학원 선교에 기틀을 세웠다. 1891년 W.M.Baird목사 부부는 교육사업에 봉사하며 1898년에 숭실학교와 1901년에 숭의학교를 평양에 세웠다. 또한 Vinton여의사가 광혜원을 위하여 파송되었다.

1892년 Graham Lee목사 부부는 전도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파송 되었다. W.L.Swallon (소안론)은 교육에 봉사하였고 외국 거주민이 휴대하는 여행권에 그를 An American Missionary Teacher라고 하였다.

 

2.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들

 

1889년 10월에 J.H.Davis와 그의 누이동생 M.T.Davis양이 경상남도 일대를 선교하였다. 그러나 Davis는 너무 먼 거리를 도보로 전도 여행하여 병약하던 중 천연두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울프 주교가 1887년에 호주 신문에 호소문을 기제 하므로 이뤄짐) 1900년에 호주에서는 계속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경상남도 일대의 농촌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공헌하였다.

3. 미국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

 

1891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첫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미국신학생연합회 외국선교회 주최 내쉬빌 집회의 한국선교 보고 때 Lewis Boyo Tate(최의덕), William McCleery Junkin(전위렴), William Davis Reynolds(이눌서) 이 세청년은 사명을 받고 한국선교사를 지원하였다. 보수적인 남 장로교회 외국 선교부 실행 위원회는 선교계획이 없었으나 선교열기에 감동되어 이 세사람과 네사람의 여자 선교사인 이눌서선교사의 신혼부인 볼링( Pasty Bolling), 테이트양(Mattie Tate), 데이비스양(Linnie Davis), 리번양(Mary Leyburn)을 결의하고 임명하였다.

1892년 10월2일에 데이비스 여사가 알렌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먼저 들어왔고, 그 나머지 일행은 질병과 사정으로 11월3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눌서 목사와 전위렴, 최의덕 목사 부부들과 자매 최매리와 데이비스양은 전북군산에 선교지를 정하고 전주에서 남장로회를 조직하였다.

 

4. 카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

 

1893년 10월 카나다의 한국 선교사역은 특수하게 시작하였다. William John Mckenzie목사는 공식적인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다. 그는 카나다 동해안의 Labrador에서 개척전도 하던 중 갑자기 한국선교사로 친구들에게 기여받은 선교비로 찾아왔다.

그는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에서 선교사업을 행하다가 1895년 7월23일 극심한 병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897년 카나다 장로회 총회는 한국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W.R.Foote목사와 D.M.Mcrae, B.G.Grierson박사 세사람을 파송 하였다.

제2장. 감리교 선교사들과 침례교. 기타 교단 선교사들

 

1. 미국 북 감리교 선교사들

 

아펜셀러 선교사 신혼부부는 결혼식을 올린 후 3개월밖에 안되었지만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한국에서 청․일 전쟁의 위험으로 미국 공사관에서 부인들의 상경을 삼가라는 통보를 받고 아펜셀러 부인은 일본에 되돌아 간 후 6개월 뒤, 다시 내한하였다. 그 해 5월 3일에 아펜셀러 목사와 함께 일본에 와 있던 스크랜튼 선교사가 내한하였으며 그는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도 그 뒤에 입국하여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 이 가족들을 한국감리교의 대두라 부른다.

 

2. 미국 남 감리교 선교사들

 

중국 선교사 핸드릭스 감독과 리이드(이덕)박사는 윤치호의 요청에 의해 1895년 10월에 서울로 찾아와 지방을 시찰하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조선 감리교회로 연합한다. 콜리어,캠벨 등 모든 미국 선교사들의 입국에 소임을 다한 사람은 윤치호 이었고, 최초감리교 세례를 1887년 4월 3일에 받고 그또한 남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3. 영국 성공회 선교사

 

1885년 영국 성공회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울프(J.R. Wolf)신부는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명의 선교단을 구성하여 부산 등지에서 2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영국성공회의 한국선교는 1889년에 해군 군목인 코프(C.J. corfer)을 파송하여 개시되었다. 마침내 1890년 9월23일에 그가 선교신부를 대동하고 제물포에 도착했고, 9월30일 서울에 머물렀다. 또한 영국에서는 한국선교회를 조직하여 수도신부를 파송하고 선교사업을 지원했다. 처음 명칭은 종고성교회(宗古聖敎會;Holy Catholic Church)로 변경했다.

 

4. 미국 침례교 선교사들

 

펜�은 평신도로서 1889년 12월8일에 내한하여 서울에서 어학을 배운후 황해도 솔내(송천)에 찾아가 한국집을 사고 1936년 죽을 때까지 원산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1893년에서 1895년까지 고국으로 되돌아가 한국 침례교의 선교에 중요성을 전하였다. 그는 미국 보스톤에 있는 클라렌톤 침례교의 엘라 팅 기념 선교회의 폴링 목사와 스테드만 교사 부처, 가아드라인양, 엘머양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충청도 공주와 강경에 주재하면서 선교하였으나 선교단의 재정적 뒷받침이 여의치않아 수년간 전도하던 지역을 다시 내한한 펜�에게 넘겨주었으나 펜�은 이 선교지역에 있지 않고 1903년 사경회가 열렸던 원산으로 옮겨 선교하고 1936년 죽을 때까지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5.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

 

동방 헬라 정교회 소속인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는 1898년 1월 제정러시아 정교회 교무원(敎務院) 암부로시 신부가 내한하여 공관 안에 임시 성당을 설치하고 러시아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했다.

6. 구세군의 선교사

구세군의 창설은 영국의 윌리엄 부우드(William Booth)가 1865년 창설한 국제적 규모의 교단이다. 모든 명칭과 용어, 조직을 모두 군대식으로 하는 것이 특색이다. 교역자도 계급적으로 부령, 참령 등으로 부르고 전도하는 일을 전투라고 한다. 한국선교는 창립자 윌리엄 부우드 대장이 세계 순회중 1907년 일본에 들렀을 때 한국 개전(開戰:선교시작)을 결정하고 레일톤(C.S. Railton)과 로울레이(C.J. Lawley) 두 사관으로 현지를 답사케 하여, 1908년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정령, 번윅(M.E. Ward)기관(여자독신)을 개척대로 파송하여 1908년 10월 1일 서울 서대문 평동 76(현 고려병원 뒤)에 자리를 잡았다.

 

7. 성결교의 선교사

 

한국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MS)이다. 이 단체는 본래 창립자 카우먼(C.E. Cowman)목사와 길보른(E.A. Kilbone)목사인데, 이들은 1901년부터 일본 동경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하는 비 교파적 선교단체였다. 1907년부터 한국선교에 착수했으며 성결교의 초대선교사는 카우먼과 길보른 두 분으로 한국성결교회를 키우고 세운 뿌리였다.

제3장. 선교사들의 신학계보

간하배(Harvie M. cann)목사는 “The Annual Report(1922년) of the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를 인용하면서 40명의 초기 한국에온 선교사들을 출신학교별로 분류하였다.

16명이 Princeton 출신자이며, Mccormick이 11명, San Anselmo와 union은 4명, New york 3명과 10개 성경학원들 중 moody성경학원이 New York에서 선교사를 한국교회에 보냈다.(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Harvie M.Cann, p95)

A.J Brown목사(one of the general secretaries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는 1911년 전의 선교사들에 대하du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를 개방한 이후 처음 25년간의 전형적 선교사들은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으니 우리 New England 선조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한 것과 같이 행하였다. 춤이나 담배 또한 카드놀이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동자가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간주하였다. 신학과 성경을 비판할 때에 이 사람들은 강력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생생한 진리의 전천년설 견해를 가졌다. 고등 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의 복음적 교회사 영국의 보수주의들이였고, 자유주의자들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배웠으며 함께 일하였으나 현대적 견해를 가진 소수라도 한국에서 특히 장로교회 선교회에서 험준한 여정을 가졌다.

Samuel A.Moffet은 그의 동역 선교사들에게 매우 강한 공감을 표명하며 1909년 신학적 방향을언급 하기를「이 선교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철저히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구원인 복음 소식인 열정에 복음주의적 심령에 의하여 현저히 나타났었다.」고 말했다.

간하배선교사는 초대 한국교회의 이런 보수주의적인 성질은 복음주의적 그 이상이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성질은 놀라울 정도로 개혁신앙이나 칼빈주의의 특성에 관한 날카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표준성경 연구」에 쓴 마펫박사의 서언은 Westminster 신앙고백을 강력하게 지지한 초대 선교사들의 열심은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적인 그리고 더욱 특별하게 장로교적인 신학을 가르치는데 있었다.

동시에 현저하게 신학적인 칼빈주의를 꾸준히 설명하고 강권하려는 초대 선교사들의 열심은 항상 실현을 본것은 아니었다.

1905년에 있었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회의에서 「때가 한국의 국가적 교회의 수립이 무르익는 때요 한국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교회」라고 불리워야 한다는 것이 바로 비공식적 선교사회의 의의하고 하는 동의가 있었는데 이것이 만장일치로 통과를 보았다.

이와같이 초대 선교사들이 선교와 한국 복음화를 위하여 협조한 것이다라고 서술한 바 있다.

한국 보수주의에 대표자인 박형룡박사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 항목에서 마포 삼열박사는 한국에서의 전도사업의 유일의 주도적 특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믿는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서의 성경 교훈에게 준 최고도의 지위 아마 거의 비류없는 지위」라고 공석에서 자주 말하였다. 박형룡박사는 계속하여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1)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과

2) 하나님의 주권에의 확신

3)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4) 성실한 실천

5) 전천년 재림설을 지적하였다

 

총신대 교회사 홍치모교수는 1893년에서 1910년 까지 한국에서 활약했던 선교사들은 프린스톤 신학교와 Mccormic 신학교 출신들이었음을 인용하며 두신학교는 미국북장로교의 직영신학교로서 charles Hpdye박사의 아들 A.A.Hodye와 B.B Warfield박사는 제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 나온 초기 선교사들은 칼빈주의적 복음신앙을 소유한 진실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뿌린 씨앗이 성장하여 오늘날 한국장로교회는 칼빈주의적 복음신앙을 소유한 교회 로 토착화되었다. 하물며 자유주의 성향인 연세대학교 민경배 교수도 기독교의 한국도입은 그 관련이 여러모로 단절된 순수한 형태의 복음 주의적인 부흥회 타입의 경건적 교회였다.

한국 개신교의 초기 신앙형태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사의 저류에 도도히 흐르는 모습을 볼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복음주의 적인 경건주의의 신앙은 한국인 본래의 정신적 유형에 상통하는 데가 많았다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철저한 보수 신학을 찬사하고 있다.

 

제4장. 선교사들의 업무 분담 비교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장로교회와 한국교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미국선교부의 방침은 어떠하였으며 한국의 선교사들은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헌신하였는가? Roye shearer는 “Wild fire: church growth in korea"에서 Stokes박사의 기록을 인용하며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성장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 선교 정책을 지적하였다.

장로교회는 일찍이 반응이 강한 서북부 지방에서 활발하고 성장하는 큰 교회를 세웠으나 감리교회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초기에는 감리교 선교부는 학교나 병원, 기관 사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토크스 박사는 장로 교회는 그들의 비네어스 방법을 통해서 마포 삼열 목사가 행한 사랑방 전도와 같이 순회전도와 개인전도에 치중하였으며 그들은 기관을 덜 설립하고 이러한 형태의 선교활동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고 하였다.

감리교 선교부는 광범위한 복음 전도의 계획을 세웠지만 그러나 그들은 선교부의 교육국과 의료국을 희생하면서 까지 그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실제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의 사업에 가장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복음 전도계획은 거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하였다.

 

1. 선교사들의 인사배정과 자금 분담

스토크스 박사는 여러 선교 보고서에 의해 1893년의 각 사업에 대한 선교사 인원 배당 일람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실제로 장로교 선교부는 이때에 복음 전도를 위하여 임명된 9명의 남자 선교사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육사업을 위해서 임명된 선교사는 한사람도 없었다.

J.S.Gale은 1893년에 비록 정식으로 임명을 받지는 않았을지라도 복음 전도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원산과 그 인근에 교회들을 세웠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최초로 교육선교사가 임명된 것은 실로 1893년 이었다고“고 기록하였다. 이 보고서를 살펴보면 장로교의 선교사(남자)들은 40%가 복음전도 사업에 종사하였고, 교육분야는 5%, 의료사업은 10%, 부녀사업이 45 %이다.

Stokes의 기록에 나타난 선교 자금의 분배 비율표를 살펴보면(1927년) 북장로교회의 복음전도 사업에 54%, 교육사업에 21%, 의료사업 21%, 기타는 4%로 나타나있다.

선교 자금 분배 비율표를 살펴보면, 1927년도의 한국 장로교회선교사들의 업무분담과 사업의 치중도를 간과 할수 있게 된다. 그러나 Roy E.Shearer(서명원)선교사는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 간부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와는 반대로 교육을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책적으로 그들의 학교는 기독교인의 자녀들만 받아들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비기독교인 학생들을 받아 들여서 종교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복음전도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더욱 스토크스 박사도 장로교 선교사들의 입장에 지지하였다.

위와 같은 미국장로교회 선교부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는 의견차이가 있었다. 전에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학위를 가질 만한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일보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적적인 교회의 부흥이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다수의 목회자가 필요하였기에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의 선교에 비교와 Data, 성공적경험을 미국장로교선교부에서는 강요하고 있었다.

 

2. 선교사들의 활동 ; 복음 전도와 교육, 문화, 의료사업

 

첫째, 초대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만일 인원과 자금에 제한을 받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성장과 보다 높은 교육이 모두 실현되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미국교회로 부터의 인원과 자금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도사업과 교육 사업 중에 교회설립과 전도에 힘을 썼던 것이다. Clavence F. Reed목사는 “나는 봉사 활동보다는 차라리 복음 전도사업을 우리 선교부의 주된 특징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는 여러 기관, 학교, 병원 등이 우리의 가장 유능한 사람들과 많은 돈을 소모시켰다. 좋은 학교와 병원은 물론 훌륭한 기관 사업이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업 가운데 극히 적은 비율만이 교회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아 왔으며 또 복음 전도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가 수천에 달하는 신도들을 헤아리는데 반하여, 기관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는 겨우 수백의 신도들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고 말하며 장로교선교사들의 활동을 추종 하고자 하였다. Roy E. Shearer선교사는 "만일 어떤 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그 교회는 자연히 많은 교회를 세우고 훌륭한 교육계획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육사업보다도 복음 전도사업에 치중한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필자는 교회를 확장시키는데 전적으로 헌신한 그들이 위대한 사명을 성경적 입장에서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바 있다.

교육이 교회들을 낳는 대신에 장로교회에 의해서 설립된 서북부 지방의 독립적인 교회들은 스스로 소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소학교 교육도 교육정책에 포함시킨다면 장로교회는 사실상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으며 양적으로도 감리교회보다 실제로 더 많은 교육사업을 행하였다고 본다는 의미심장한 사실을 설파하였다.

따라서 1927년에 연합선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교회와 관련된 학교들이 북 장로교 선교구역에는 23개였으며 북 감리교 선교구역에는 꼭 100개였다고 기록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은 중등학교이상만을 통계한 것이다. 따라서 1909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교과별 통계를 보면, 장로교가 605교, 학생수가 6,423명에 이르고 있었으며 성공회나 천주교 및 안식교 등의 것을 합하면 학교 수는 실로 950여 교에 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학교까지 포함시킨 것이지만 실로 교회 설립이 결코 교육사업을 등한히 했다고 장로교선교사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록이다.

1885년 4월, underwood는 한국에 도착한 즉시로 미국 공사 푸우트(福德)에게, “우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려고 왔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한국이 연구생으로서 또는 교육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아래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지금은 선교사업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시작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편지한 것을 보아서도 복음 전도사역을 위한 교육사업을 수단으로 한 것이다. J.S.Gale선교사도 ‘한국인들은 서구의 교육과 고등교육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위한 준비의 단계로서의 그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벌써 다 그만한 준비는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분명히 장로교선교부사들은 교육의 목적도 주님의 제자삼는 일이며, 지도자 양성임을 알았고 당시의 교회의 형편과 본국선교부의 자금난에 의하여 고등학교에 치중하지 못하였으나 학당과 야학을 교회에서 시작하여 교육의 사업을 실시하였다.

전성천박사는 ‘카나다 장로교선교부의 일부 선교사들과 북 감리교 감독교회 선교부는 특별히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반대로 깨달았다. 그들은 종교교육이건 일반교육이건 간에 교육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였고, 改宗은 거기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로교선교사 특히 미국의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교육이념이 철저한 성경적 근거임을 다시 인식할 수 있으며 교회에 부흥이 우선이며 복음전파 사역을 힘쓴 이유를 알 수 있다. 따라서 1900년에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이 신학교를 완전히 승인하여 평양 연합신학교라는 명칭으로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1907년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부흥으로 지도자 양성 목적으로 사경반이나 성경학원, 특별 사경반을 설치하여 이들을 양성하였다.

 

□ 각 지방 학교와 설립 선교회

지방

학교명

설립연대

선교부

지방

학교명

설립연대

선교부

평양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1897

1903

1894

1899

북장

부장

미장

미장

광주

숭일학교

기전여학교

1907

1908

남장

남장

선천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1906

1907

북장

북장

목포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1903

1902

남장

남장

대구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1906

1903

북장

북장

순천

매산학교

1913

남장

재령

명신학교

1898

북장

함흥

영생학교

영생여학교

1907

1903

캐나다

캐나다

강계

영실학교

1908

북장

선진

보신학교

보신여학교

 

 

인천

영화여학교

1892

미감

원산

보광학교

루씨여학교

1903

캐나다

남감

공주

영명여학교

영명학교

1905

1907

미감

미감

개성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미리홈여학교

1906

1904

1906

남감

남감

남감

이천

양정여학교

1904

미감

부산

일신여학교

1892

호주

수원

삼일학교

매향여학교

1903

1907

미감

미감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1906

1903

1906

1913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1900

1902

남장

남장

군산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1901

1901

1901

1901

이만열, 한국 기독교 문화운동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pp.190-198.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198면 각주 인용

Quarto Centnnial Mad Before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 Aug. 1909. p.65.

둘째, 복음 전도 활동은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복음 전도 사역은 서로의 의사가 통용해야하고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문학의 보급이 중요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했던 당대에는 아직까지 한문의 통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을 한글로 발행하였고, 교회에서 한글 교육에 앞장섰던 것이다.

1887년 John Ross목사는 고려문에서 배에 상품을 싣고 고려문으로 오다가 파선당한 이응찬을 만났다. 그는 이일을 술회하기를 ‘어느날 저녁에 그 사람이 내가 유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는 나와 만난 뒤에 그의 친구들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의 어학 선생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中略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는 자기의 계획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폭로되면 그의 친척들까지도 옥에 갇히고 가장이 되는 사람은 목 베임을 당할까봐 겁이 났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John Ross목사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이응찬과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과 함께 성경 번역을 힘썼다. 또한 롯스 목사는 영신한 매약 상인 김청송으로 인쇄소를 일보게 하며 성경을 출판하였다.

1889년 10월에 몇몇 선교사가 정동의 언더우드 저택에 모여 ‘한국성교서회’를 조직하면서부터 문서와 문예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모임이 1919년 ‘예수교서회’로 개칭한 문서활동의 모체이며, 출판된 최초의 서적은 “성교촬요‘로서 1903년 판매 총 부수가 25만이나 되는 언더우드의 저작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로 고상한 사상을 담은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 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 하면 그 문학사의 제 일면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주시경은 한글의 중흥을 이루었는데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었다. 분명히 한글 교육은 부녀자와 서민층을 일깨웠으며 민족의식의 각성제가 되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1889년 5월 배재학당 안에 인쇄소를 차리고 잡지 ‘교회’월보를 창간하였으며, 신문으로는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한국 최초의 신문(독립신문)보다 10개월 후에 창간하였다.

1897년 언더우드는 4월 1일에 ‘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였다. 장로교선교사들은 한국연구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게일, 헐버트, 죤로스는 한국사 연구논문을 썼으며, 한국어 연구로는 죤로스의 ‘A Korean primer'를 꼽지 않을 수 없으니 최초의 한국어 연구인 것이다. 1886년 게일 선교사는 ‘韓國英字典’을, 1890년에 언더우드는 ‘韓英文法’을, 또한 게일목사는 ‘천로역정’을 한역하였고, 춘향전과 구운몽을 영문으로 번역한 최초의 것이었다.

C.A.Clark박사의 ‘Religions of old korea'와 같이 한국의 토속학, 종교, 풍습뿐 아니라 고전에 까지 한국인과 호흡을 같이하였으며 문화적 발전, 민족적 애국심, 반일운동 등에 앞장섰다.

셋째, 마지막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살펴보자.

감리교회의 선교자금 중에 23%가 의료에 사용되었고 의료 사업의 장로교 선교부는 21%에 사용하였다(1927년). 그러나 감리교의 선교사는 남녀가 5.5명이며, 부녀사업은 8명으로 13.5명인데 반하여 장로교회는 의료사업에 남자만 2명이요, 부녀사업에 9명으로 11명인 것이다.

따라서 의료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의료 선교사들은 이 나라의 복음 전도사업을 발전 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의학기술을 이용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 전도에 대한 이해를 얻는 일이었다. 그들은 한국인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노력하였다.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의료사업을 기독교적 사랑의 봉사로 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이 나라에서 그 기반을 얻는 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1902년에 이르러 미국의 선교부는 사사로운 기부금으로 수도 서울에 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많은 보조금을 한국에 주려고 했을 �에 선교부는 (특히 서북부 지방의) 그 보조금을 받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에 병원을 세우게 되면 근본 목적을 흐리게 만들고 ‘의료사업’을 마치 교회확장과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시키게 되리라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Howard Moffet박사는 그 병원의 복음 전도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병원의 모든 활동과 프로그램의 중심은 복음전도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볼 때에 직원들의 자발적 전도회를 조직한 것과 함께 교회를 백여 개 설립하였다.

 

 

 

제Ⅲ부.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인

 

한국교회의 회고와 전망에서 장성식목사는 ‘한국교회의 교세가 기하급수로 상승한 것은 큰 이적이다. 이 성장하게 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

첫째는 전도의 대상을 근로대중과 여성들을 위시하여 상향식으로 차츰 상류층으로 올라가도록 한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 賣暑, 전도인, 조사 등 교역자를 양성한 것이고, 셋째는 한글 장려의 문서 운동이고, 넷째는 의료사업과 자선사업을 통한 선교였고, 다섯째는 교회운영에 있어서 자금자활인데 특히 1890년에 중국에서 초청하여온 선교사 John Nevius의 선교방책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 방침은 경제적 자급은 물론 성경연구를 중심으로 훈련하여 모든 교우들이 각각 자기가 처해있는 곳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신앙적인 自活人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선교는 한국인으로 담당케 하자는 선교적 자치를 목적으로하고 훈련 시키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다른 각도에서 연합장로교 선교사인 Roy E.Searer목사는 한국의 장로교회의 폭발적인 증가는 1).청일전쟁의 영향, 2)죄의 고백과 대부흥-노일 전쟁 후의 절망상태와 대부흥의 방편이된 사경회, 복음 전도운동, 선교부로부터 독립하게된 한국교회, 3)한일합방과 이민, 만주에의 이민을 촉진시킨 빈곤, 교육에 관한 논쟁, 1915년의 박람회 4)투옥과 궁핍, 독립운동, 재조직된 복음 전도운동, 절망감, 5)神道와 압박, 신사 참배에 대한 장로교 학교들의 항거, 교회를 지배하려는 일본 경찰과의 충돌 등을 지적하였다.

그는 머리말에서 핵심의 내용 중심을 간략히 말하고 있다.

‘먼저 강조해 둘 것은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를 성장케 하셨다는 점이다. 필자가 이 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생각이 성경적 신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 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계획과 힘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음을 차츰 더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회에서 인간적 수단이 사용되는 것도 있 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구주인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한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 발전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성령의 도구로 사용 될 수 있겠는가’라는 중요한 문제를 간파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정리해 보면 한국교회의 성장요소의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장 한국 교회 부흥의 뿌리

 

1. 하나님의 특별섭리

 

마삼락(Samuel H. Moffet 선교사의 3남, 마삼락)선교사는 회갑기념 논문집에서 무엇이 한국교회를 자라게 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지금까지 많은 해석이 시도되었지만 반세기 훨씬 이전 나의 선친 마포삼열박사의 대답을 능가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피력한바 있거니와 1907년의 한국교회 성령역사와 한국교회 부흥요인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마삼락 박사의 논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마포삼열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즉 ‘해를 거듭하여 우리는 그저 이 백성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밖의 일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고 하면서 한국교회 부흥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생명력을 주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하지 아니하고서는, 또한 기독교신앙과 교육에 있어서 성장의 중요성을 내세우지 않고는,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힘의 어떠한 분석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놀랍고도 지워버릴 수 없게 바로 선교 초창기에 성령의 인장(印章)이 한국교회 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한국교회에 성령이 역사하므로 부흥하였음을 보고 체험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42년간 한국선교사로 일했던 방위량(William Newton Blairhr)목사는 언급하기를 ‘나는 한국의 복음 성장에 관심을 갖고서 가장 큰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특히 1907년 부흥에 관한 사실을 알기를 원했었다. 우선 나는 하나님의 영적 대 강림(降臨)에 대하여 쓰기를 원하였으나 그 사건들은 8년간 행복하게 살아오며 봉사하는 동안 체험했던 초창기 한국교회 역사의 어떠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그 때를 드라마틱하게 특별히 기록하였다.’고 한국교회 부흥성장 요인 중 1907년 성령 강림이 가장 중요한 부흥성장 요인임을 주장하였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지금도 교회가 세워질 뿐만 아니라 특별한 때에는 권능으로 임하신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주의 신학자 고(故) 박형룡 박사도 말하기를 “성령 역사의 전능한 사역은 교회밖의 불신자들을 상대로 한 선교활동에 크게 역사하였다. 사도 시대에 교회의 안과 밖에서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은 역사상 후세교회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즉 교회는 성령 사역으로 시작되고 자라나며 완성되는 것이다.”고 역설하였다. 평야에 임하신 1907년의 성령의 역사는 확실히 한국교회 부흥의 뿌리 중 가장 중요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는 조그마한 반도 국가에서 10년 사이에 두 차례나 국제적인 전쟁을 치르게 하셨다. 그리고 유교 국가인 청나라와 강국(强國)인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하게 되므로 불안과 공포 가운데 백성들은 교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토오가 좌절, 낙심하고 있는 한국교회 위에 성령으로 그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체험케 하셨던 것이다.

 

2. 한국인의 종교성

 

앞 장에서 한국의 종교적 상황을 기독교의 수용 관계에서 살펴보았다. 본 절에서는 한국인의 종교성이 한국교회 부흥에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팔머(Spencer J. Palmer)교수는 기술하기를 ‘이조(李朝)시대에 있어서 일반시민(一般市民)은 유교적인 형식원리를 경원하였고 서민보다 더 천시당한 불교 승려는 산간의 먼 절간에 피해 버렸다.’고 하였으며 또한 계속하여 언급(言及)하기를 ‘188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민족 수난의 격동기에 국민의 좌절의식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수용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분명히 한국인의 심성이 기독교 복음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종교 생활의 준비를 미리 갖추고 있었다. 기포드(L. Gifford)선교사도 보고하기를 ‘한국인은 진취적이고 활발하여 개척정신이 강하며 인심이 후하여 복음의 토양으로는 가장 알맞은 옥토였다. 남쪽은 유교 사상을 굳게 지키는 보수적 입장이 강하였으나 서북쪽 관서인들은 개방적이었다.’고 하였다. 종교성이 강하고 진취적인 지방에서 교회는 부흥하였다. 또한 시대적 상황과 국민성에 따라 종교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구드리치(Joseph K. Goodrich)교수는 한국인의 성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즉 ‘한인(韓人)의 기질은 확실히 점액질이 많은 중국인과 다혈질인 일본인의 중간에 처하여 있다. 한인의 성격은 처 인상에서 나타나는 처량하고 꼼꼼치 못하며, 폭이 좁은 편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한국인들은 냉철하면서도 격하기도 쉽다. 차근차근히 이론도 따지지만 열이 나게 행동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앵글로 색슨(Anglo-Sexon)족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한국 민족은 중국과 같이 대륙적 소유자도 아니고 일본과 같이 교활하고도 난폭한 성격도 아니다. 고요하고 인정 많은 낭만적이며 슬기로운 민족이다.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인 한국은 중국의 세력과 일본의 침략 때문에 역경을 겪은 때가 많았으나 종교의 힘을 의지하고 은근과 끈기로 극복해 나왔다. 미국 해외 선교부 총무인 브라운(A. J. Brown)목사도 한국인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국인 기독교인들을 전체적으로 볼 때에 널리 알려진 희사, 헌금, 성경공부, 열성적인 전도, 일상생활의 상관성을 볼 때에 한인 교인들은 식견이 없고 감상적이라는 혹평을 충분히 부정할 수 있다. 나는 신자들을 각지에서 접촉하여 보았다. 시골도 도시에서, 교회와 가정에서 접촉하였는데 그들의 진실성과 헌신적인 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묘사하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이 신앙생활의 열심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간과한 것이다. 종교심이 강한 한국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므로 교회가 부흥하고 역경 중에도 이길 수 있는 소망을 간직하도록 섭리하셨다.

 

3. 네비우스(NEVIUS) 정책

 

곽안련(C.A. Clark) 목사는 한국교회 부흥요소를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에게 Nevius 방법을 정책적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성경중심, 광범위한 순회전도를 통한 개인전도, 자기확장, 자치, 엄격한 훈련, 협동과 연합, 소송 등의 세속적 방법을 피하는 것, 백성들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 Horace G. Underwood 목사는 이미 네비우스 방법에다가 네비우스 정책을 적용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진술하였다. Allen. D.Clark 목사는 네비우스 선교방침의 중심원칙으로 성경공부를 장려하여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얻어 어떤 사람을 상대해서든지 자신있게 전도할 있게 하자는 것을 목표(目標)로 삼고 교회를 확장시켰다고 말하였다. Nevius 정책을 세가지로 규정하면 ‘교회의 경제적 자립, 복음의 자력전도, 정책적 자치’라고 일반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가지로 축소하면 성경공부 즉 사경회와 교회자립이다. 이것은 McGavran이 말한데서 입증이 된다. 즉 Nevius는 약 1천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중에서 약 2백명을 잃었고 나머지 8백명은 60교회를 구성하였다. 한 유급 교역자가 40교회를 돌보았고 다른 사람은 10교회를 돌보았다. 위에서 McGavran이 말한 것을 보아도 Nevius 방법이 교회 부흥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C.A.Clark 목사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그 원칙을 전적으로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까지 주입할 목적으로 선교 규칙을 정하여 새로 오는 모든 선교사들의 도착과 함께 Nevius 책을 선교부로부터 받아 재임 일년 만에 가지게 되는 어학 시험과 함께 필수 과목으로 Nevius 방법도 시험과목에 삽입시켰다고 언급한 것을 볼 때 Nevius 방법이야말로 선교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선교구역 분할, 순회전도, 노방전도, 사랑방 전도, 교육, 의료, 여성,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설정에 맞도록 Nevius 정책을 채택하였다. NEVIUS 박사의「선교교회의 설립과 발전(The Planting and Devo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의 제목과 같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지금까지 미국 연합 장로교회의 선교목적이었다. 더욱이 1905년 [한국 복음주의 총회]와 1911년의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연합회]에서 장로교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선교하는 일에 주된 원인으로 삼는 뿌리인 것이다.

선교사들의 연합회와(공의회)와 자치활동은 먼저 1889년 미국, 호주 연합 선교회 조직 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890년 봄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는데 1893년 1월 28일 선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892년 6월 11일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정이 이루어졌는데, 북장로회와 남감리 회는 먼저 선교한 지역을 맡기로 했으며 인구 5천이상의 도시에서는 공동선교를 하기 로 협정했다. 또한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하고,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회 는 부산을 공동으로 담당하기로 했으며, 경남은 호주 장로회에서 담당하였다. 캐나다 장로회는 1898년 함경도를, 1910년에 그 외의 지역은 북장로회에서 맡게 된다.

1901년 9월 2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가 이루어졌고, 합동 공의회로서 북․남․호주․ 캐나다․한국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905년에 북감리회는 영변중심으로, 북장로회는 평북지역으로 협정을 맺는다. 1906년에는 선교사공의회는 조선 독로회를 결의 하였고 이듬해인 1907년 제1회 독로회를 갖게 되었다. 1908년 서울을 공동지역으로 삼고 경기 도 2/3, 경기도 이북지역은 남감리회에서, 강원도 1/3, 서울 동부는 남감리교가 담당 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1893년에 모인 제1회 선교사 공의회-미국 남부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의 4개 선교부가 한 개의 장로교 선교공회-에서 채택된 한국에 있는 모든 선교부들은 Nevius 방법에 따라 선교정책 6조에 ‘모든 번역 종교서적은 외국어를 넣지 말고 순전히 한국어로만 기록항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린이들로부터 여자들, 무식층이라 불렀던 모든 대중들에게 한글로 번역한 하나님 말씀이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게일(J.S.Gale)선교사는 말하기를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간결하고 재치 있는 글이다. 부녀자들까지도 한 달 정도면 읽히는 글이라 해서 괄시를 받아 왔던 한글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오래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한글 신약성서와 그 외의 기독교 문학이 기록되었다.

헐버트(H.B.Hulbert)는 찬양하기를, ‘장로교 선교회의 관할 하에 있는 한국 북부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선교지역으로 널리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단지 교회와 관련을 갖고 있는 사람 수가 많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놀랄만한 결과 때문이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자주적 자치교회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시도 전에 이미 만주에서 신자가 된 본국인을 통해 세계 교회 사상 유례가 드문 일로 초창기 한국교회인 소래교회와 의주교회는 이미 Nevius 법칙 이상의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성경사경회( Bible Class; Conferance)

 

성경사경회는 한국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과 성령 강림에 있어서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성경공부가 발전하여 사경회가 되었으므로 우선 성경 공부의 지역별 상황을 살펴볼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평양에서 1897년부터 1898까지 다섯 사경반을 개최하여 남자 105명 여자 60명이 참가하였고 선천에서는 1898년 12월에 마팻(S.A.Moffett)목사가 처음으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1898년 전주에서, 1896년 부산에서 각 지방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사경회가 계속 진행되었다. 1904년 선교회 보고 문서에는 60퍼센트에 달하는 신자들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09년에도 북장로교 선교구역 안에서 약 800여회의 사경회에 연 인원 5만 명이 참가 하였다. 1907년 한국교회 성령역사 (聖靈役事)의 봉화라고 할 수 있는 1903년 원산 모임도 똑같은 선교사 사경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역사는 하나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덧붙여서 성경공부에 효과를 준 한글 성경번역과 그 결과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 교회가 이 한글을 남달리 사랑하고 완전하게 쓰고 있는 실정이다. 부녀자들의 허리띠 틈에 일제어로 된 신약성서가 꽂혀 있어, 사랑방 책장 위에도 언문(諺文)의 한글 성경이 올려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만열교수는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에서 다음과 같은 다장을 인용(引用)하여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인데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남녀간에 국문으로 번역한 성경 보기를 배고픈 사람의 양식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리오니(중략), 따라서 성서의 번역과 출판은 현실적인 필요로 강력한 요구로서 선교사들이 중심으로 성서 및 각종 문서의 출판을 감당할 기구로 창설했는데 그것이 「야소교성서회」혹은 「대한성서회」라고 불리어진 기관이라 하였다. 김광수 교수도 ‘사경회를 중심으로 한 성경공부 운동의 발흥과 성경공부를 바탕으로 한 초기 교회의 부흥 주일학교 운영을 통한 성경공부의 열의, 일제 탄압으로 성경공부의 중단과 새 출발을 향한 다짐이 한글 성경번역의 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1878년 Ross 목사가 만주에서 한글성경을 번역한 것과 1883년 일본에서 이수정의 성경번역은 한국 교회사적인 면에서 교회의 발전과 민족의 단합, 애국심, 문맹타파, 교육발전 등 한국교회 성경강림의 매개체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예술, 여성진출 등 각 사회분야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3) 서명원(Spearer)선교사는 스톡스(M.B.Stokes)박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언급하기를 장로교회는 일찍이 성향이 강한 서북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성장하는 큰 교회를 세웠으나 감리교회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초기에는 기관 사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였다.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 같이 성장하지 못하였다. 북 장로교회 선교자금 분배비율을 살펴보면 복음전도사업에 54%, 교육사업에 21%, 의료사업 21%, 기타는 4%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교회 설립에 가장 힘썼고 기관 사업이 차선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교 사기 상(上)에 보면 1885년 1910년까지 전부 교회 683개 중에서 관서 지방이 362개소이고 대부분 1897년에서 1905년 6월까지에 세워졌다.

1910년 7월 1일 관보 제 4756호에는 전국 학교수가 2,235인데, 사립학교의 종교 단체를 보더라도 755개교로서 거의가 기독교 단체의 학교들이다. 문서 사업에서 스크랜튼(W,B,Scranton)박사는 로스(John Ross)목사가 한어독본(외국인을 위한 것)과 한글 성서번역으로 한국어의 기초를 닦아 주었는데 맥킨타이어 목사와 함께 감사한다(요약)고 말하였다. 「한국선교서회」가 「예수교서회」로 개칭하여 출판한 최초의 책은 「성교섭리」인데 1903년 판매 부수가 25만부나 되는 언더우드의 저작이었다. 신문, 잡지, 사전, 한국학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연구와 출판에 힘써 복음 전도사업 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고학, 의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이것 역시 교회부흥의 요인이 된 것이다. 선교 공의회에서 어디에서나 선교 중심지로 삼으려 할 때는 반드시 한 사람의 의사를 배치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청일전쟁 후 1895년에 전국을 휩쓴 콜레라가 5,000명의 희생자를 냈고 선교사들은 많은 인명을 구해 냈던 것이다. 또한 1902년부터 1903년에도 콜레라, 천연두, 홍역이 창궐하였다. 이 때에 9,000명의 환자가 치료 받았고 235명의 환자가 입원 치료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국가에서 인준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의료선교는 백성들에게 전도하는 가장 빠른 효과를 주었다.

학교 선교사역을 보면 장로교가 695교, 학생수가 14,708명, 감리교가 200교, 학생수가 6,423명 기타 성공회, 천주교, 안식교를 합한다면 학교수가 950여교에 달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숭실대학과 세브란스 의학교가 1906년에 설립됐고, 1909년에는 이화학당에 오늘의 이화대학의 전신인 대학부가 설립됐다.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됐다. 그러므로 한국 각 방면의 지도자들이 믿음으로 이 나라를 인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여성들이 알기 쉽고 이해가 빠른 한글로 펴낸 기독교 신문, 학교, 여자 선교사들의 접촉(가장 많은 곳은 교회와 병원에서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도부인이 활동을 했고 그들은 여자 선교사들의 조역이요 매서인이요 교사이고 한국 여성지도자들이었다. 이로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과거 유교의 퇴폐적인 사고방식이 개혁되는 촉진제가 된 것이다. 여성들의 복음화는 가정의 복음화에 직결되어 한국교회 부흥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5. 한국 기독교 개척자들의 신앙과 생활

 

한국교회의 급성장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형성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생활은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 형성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들 또한 목사들을 고찰하여 한국교회 부흥의 뿌리를 서술하고자 한다.

간하배(Harvie M. Conn)선교사는 1922년 미국 장로교회 한국 선교회 연례보고서를 인용하면서 40명의 선교사들의 출신학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6명이 Prinston 출신, 11명은 McCormick이고, San Anselmo와 Union은 4명, New York은 3명, Moody Institute와 그 밖의 성경학원에서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브라운(A.J. Brawn. 미국장로교회) 해외 선교국 총무는 1911년 이전 한국 선교사들을 논평하기를 나라를 개방한 이후 처음 25년간의 전형적 선교사 형태는 청교도형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으며 우리 New England 선조들이 한 세기(世紀) 전에 행한 것과 같이 행하였다. 계속해서 그들은 그리스도 재림에 관하여 생생한 진리의 전 천년설 견해를 가졌다. 고등 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표준 성경에 쓴 서언에서 마팻박사는 피력하기를 ‘초대선교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을 강력하게 지지하였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자한 과정인 것이다. 박아론박사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현대 미국신학 연구>(상)에서 미국교회는 원래가 한국을 선교한 교회요 미국신학은 한국선교의 신학이었다고 하리 만큼 한국교회는 분명히 100년 전에 미국선교사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수받았을 때 이울러 미국 교회의 개혁파 칼빈주의 신학도 전수받았다.

이와 같이 한국에 나온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칼빈주의적 개혁신앙과 감리교 선교사들은 경건한 보수주의 신앙을 소유한 복음적인 선교사들이었다. 또한 한국 백성중에서 매서인들의 활동과 평신도들 교역자 등을 신앙과 활동을 살펴보아야 한다.

매서인 중에 백홍준, 이성하, 서상윤, 김관근 등은 선교사들의 입이 되었고 발이며 모든 것을 돕는 조사였다. 그들은 낮에는 성경을 팔며 저녁에는 교회를 순회하며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과 가정을 구원시키고 교회를 세운 바울과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승훈, 조만식, 서재필, 이상재, 안창호, 주시경 등 이들은 각기 교육자요 또한 사업가로서 독립과 사상적 지도자로서 헌신한 평신도들이었다. 목회자로는 새벽기도의 신앙과 능력의 말씀, 기도생활의 모범을 보인 길선주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요한계시록만 1만 2백회 봉독했고, 부흥회는 35년간 연 6천회로 총 20만리에 다 달았다.

또한 초기 감리교 부흥의 뿌리인 윤치호(남감리교회 선교사)와 정동교회를 개척한 아펜셀러와 최병헌목사는 지식층과 상류층에 복음을 전파하였고, 스크랜튼 선교사는 전덕기 목사와 남대문 일대의 서민을 대상을 대상으로 상동교회를 개척하였다. 감리교 신학자 양주삼, 최병헌, 정경옥의 역할은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의 성바울이라고 하는 김창준 목사는 사회주의 공산당을 철저히 배격하고, 천국운동과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1930년대의 신비주의자 이용도목사를 부각시키는 것은 교회역사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성결교회는 1907년 5월 정빈, 김상준,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것은 사중복음 중생과 성결, 신유, 재림으로 성결교회의 중심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구리개 전도회관을 설립하여 성결운동을 펼쳤으며 1912년 J.H. Smith(미국성결교 부흥사)가 언더우드와 저다인 선교사의 집회를 인도하였다.

1. 이명직과 성결부흥운동/구리개 전도관: 1921년 경성성서학원

2. 김응조의 부흥운동과 재림신앙

1917년 4월 경성성서학원 입학

1911년에는 일본의 축호전도 참여

1917년 9월13일 그리스도의 재림 체험

3. 이성봉 목사의 부흥전도 운동-「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자서전

1921년 6월24일 평양기자묘 앞에서 다리아프기 시작, 3년간 고생 후 낫아

1925년 경성성서학원 입학

「저 높은 곳을 향하여」순교한 주기철목사, 최봉석목사의 ‘예수천당’과 감리교 목사인 김창식, 김기범, 양주삼 등의 노방전도와 기관사업의 헌신 등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 부흥의 뿌리에 대하여 여러 분야를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여러 선교사들의 주장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C. A. Clark선교사는 Nevius방법과 성경 중심, 광범위한 순회 전도를 통한 개인전도 : 자기 확장, 자활, 엄격한 훈련, 협동과 연합, 소송 등의 세속적인 방법을 피하는 것, 백성들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 Spearer선교사는 백성들의 종교적인 태도, 사회의 구조, 복음에 대한 반응의 표준을 제시 하였으나 Nevius방법에 기인한 보편적인 학설을 반대하였다.

Latourette교수는 이 기간에 있었던 나라의 비운에서 받은 마음의 충격, 나라의 허약의 대책과 안정을 찾으려는 한국인의 소망, 한국 재래종교의 실제상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Samuel H. Moffett 선교사는 성경에 의한 복음소식, 성령의 권능, 개인 전도의 열심, 역경 중에서의 신실성, 국가적 토양의 근거와 역사상 하나님의 섭리라고 발표하였다. Everette N. Hunt는 첫째로 정치적 요인을 들면서도 아시아의 긴장관계에 미국의 우호적 인상, 둘째는 토착 종교의 결여, 셋째로 선교사들의 자세와 활동을 들었다. 또한 창가평(倉傢平)교수는 ‘포로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와 Messiah적 상징’설도 참고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부흥의 뿌리는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의한 1900년 이후의 한국 내, 외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이며, 둘째는 한국인의 종교성, 셋째로 Nevius 정책, 넷째 한국교회 개척자들의 신앙과 활동, 가장 핵심적 요인으로 1907년의 성령 강림, 성경 사경회, 열정적인 전도, 자발적 헌신, 기도(새벽기도, 자백기도) 등을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5.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연합활동

 

1) 선교사 공의회(미국, 호주 연합 선교회 조직, 1889년)와 선교지 분담

1890년 봄 호주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으로 중단, 선교 연합회. 1893. 1. 28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정은 1892년 6, 11북장로회와 남감리회는 먼저 선교한 지역을 맡는다.

인구 5천 이상 도시-공동선교, 이명서 없이 이명 못함.

2) 남장로교회-전라도와 충청도 담당 부산-북장로, 호주 장로회 공동. 경남은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는 함경도(1898), 1901년 9월 20일 조선 예수교장로회 합동 공의회, 북. 남, 호주, 캐나다

3)1905년 협정/북감리회 영변 중심, 평북 지역 북장로회

조선독노회 1906년 선교사 공의회는 조선독로회를 창설하기로 결의 (1907년 제1회 독노회)

1908년 협정; 서울-공동지역으로, 강원도2/3, 경기도 이북지역은 남감리회, 북장로교-강원도 1/3 서울 동부. 서울 남 감리교 약 4천명 교인.

1905년 장로교4개선교회와 감리교2개선교회가 연합하여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를 설립하여 단일 한국개신교단을 조직하려고 연합하였으나 일본총독부의 탄압으로 세계교회사에 기릴 위대한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고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창립하여 다시 개신교연합을 도모하였으나 친일,자유주의신학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제2장. 1907년 성령강림의 내력과 결과(제공한 자료 참조)

 

1. 1907년 한국교회의 성령역사 배경

 

1)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의 신앙

(1) 미국 보수 신학교 출신: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 웨슬리안 감리교신학, 경건․복 음주의의 신앙

(2) 학생 자발운동(Student Volunteer Mission) 출신

2) 성령역사를 사모한 결과: 영국 Wales 와 인도 Khassi 지방의 성령역사

3) 1903년 원산부흥 사경회: Hardie, Franson, 길선주

 

2. 1907년 한국교회 성령역사의 내력

 

1) 성령사경회(Bible Class; Conference)

2) 통회자백 기도회

3) 하나님의 특별섭리( 국제전쟁, 국가의 위기와 시대적 배경)

 

3. 1907년 한국교회 성령역사와 결과

 

1) 평양에 임하신 성령현장 보고: Blair, Lee / Gorforth 중국선교사

2) 한국교회에 끼친 결과:

(1) 한국교회 부흥과 선교사 파송

(2) 백만명 구령운동과 연합활동

(3) 3․1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3) 세계교회에 끼친 결과

 

제3장. 3.1독립운동과 평신도 연합사역

 

독립운동은 독립협회가 뿌리이며 1907년 「광문회」출판사 사장인 김광제와 서상돈을 중심으로 국채보상기성회를 만들므로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홍보하매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10년 1월 일본의 시장세에 반대 「백일세사건」이 평남 순천의 기독교 상인 중심으로 일어났다. 두 해전 1908년 평안도의 용천, 선천, 정주 상인들이 「협성동사」를 만들어 배일운동에 불을 붙였다. 안중근, 장인환, 이재명, 강우규, 윤봉길, 이동휘 등 한국교회는 조국독립에 앞장섰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더욱 거세졌다. 국내에서 대한인국민회와 YMCA미국의 공립협회와 대동본국회 등, 만주 일본, 러시아에 이르었다.

 

1. 3․1독립운동의 뿌리

근원적 뿌리는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을 주창하여 약소 민족을 향한 독립의 기대를 부풀게 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온 우리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자주 독립을 온 세계에 선언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국적으로 해외 교포들까지 대대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이 알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非暴力) 무저항 민족자결 원칙에 의하여 피압박 민족들이 자기 나라의 독립을 선포하는 나라가 많이 일어났다.

3․1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인 그 뿌리는 1918년 11월 13일 만주에서 중광회원 3백명이 회집하여 대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붕어하자 일본의 독살소문이 퍼졌다. 국권을 빼앗고 백성들은 고종 장례식 3월3일을 피해 3월2일 거사하려 하였으나 주일날이므로 3월1일(토)오후 2시에 거행하였다. 33인 민족대표자들은 태화관에서 총독부 관리들에게 참관하도록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으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백성들은 태화관(명륜관)앞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시작 행진하였다.

‘조선 청년 독립단은 2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의승리를 얻은 세계민국의 앞에 독립을 기성할 것을 선언하노라’ -2․8독립선언서

 

2. 3․1독립운동의 내력

 

1919년 3월1일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독립차원 운동이 아니라 온 세계에 독립을 선포한 자주국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 만세 시위는 교회의 어떤 기관(총회, 노회, 시찰회, 당회)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한 사람 곧 개인의 자격으로 가담한 것이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은 우리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장․감양 교파의 인물들이다.(16인중 10인이 감리교 소속)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이명룡, 이승훈, 이필주, 이갑성, 김창준, 박희도, 신홍식,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양한묵, 신석구 등이다.

3․1독립운동이 연락 및 주도적인 역할은 기독교계통의 학생들이 책임을 맡았다. 1896년 협성회를 뿌리로 YMCA 및 기독학생들은 배재, 경신, 이화, 정신, 연희, 세브란스 학생들이 앞장서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6개월간 계속되었다. 참가자가 136명이며 피살자가 6천 6백 70명이며 피상자가 만4천 6백여명이며 투옥자가 5만2천7백2명이 되었다. 715개의 가오과 47개의 교회당, 2개의 학교가 헌병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손되었다. 한편 그 해 10월 4일 평양신학교에서 회집하였던 장로교 제8회 총회에 복고된 피해 총계 내력이다.

(1)살해:39명 (2)목사:4명 (3)상해 (4)악형:142명 (5)태형:795명 (6)복역:719명 (7)미결:44명 (8)구류:20명 (9)보석:2명 (10)집행유해:30명 (11)예배당 소실:8처, 파괴:4처, 피해액:4만여원

 

3․1운동은 무저항 비폭력, 자주적, 전국적이며 자발적인 독립운동의 뿌리요, 교회 진흥운동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케 하는 뿌리였다. 또한 중국,폴란드, 체코, 헝가리, 발틱 3국 등 3․1운동 이후에 일어난 신흥국가들의 세계적 독립운동의 뿌리였다. 따라서 3․1독립운동선언서와 공약3장을 기억하며 선친들의 애국사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복음의 진리자유운동을 펼치자. 33인 독립대표 중 기독교인이 16명인 것을 기억하여 민족역사를 이끄는 한국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자.

 

4장. 백년전진운동과 물산장려운동

 

1. 백년전진운동 ․ 진흥운동

일본의 무력진압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않고 국외에 망명하여 있던 교포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3․1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왔다. 또한 국내의 한국교회에서 1920년 감리교회가 「백년전진운동」을 장로교회에서는 「진흥운동」을 각각 전개하였다. 복음전파와 진리운동, 부흥사경의 성령운동으로 조국의 슬픔과 비통을 극복하고 독립의 기틀을 쌓았다. 따라서 교회가 부흥하는 동시에 해외(중국,만주)에 흩어져 있는 교포사회에서도 장로회총회에 예속되는 노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 낭만교회, 1921년 간도노회, 1922년에 시베리아노회까지 조직되었다. 또한 1920년에 장로교인은 5,603명의 새신자를 얻었으며 1925년까지 신설 교회당과 교인이 증가하였으나 그 이후는 감소하고 말았다. 남․북 감리회도 부흥성장이 장로교회와 같은 추세였다. 교회적으로는 주일학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주일학교가 조직되었으며, 여름에도 특별히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여 주일 학생들에게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무자보급, 곧 문맹타파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 장로교 교세표 : 1917~년 10년간의 교회당, 교인 수 등

년도

교회당 수

신설교회당

교인수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1927

1,648

1,778

1,705

1,738

1,879

1,941

2,090

2,171

2,277

2,265

2,545

52

102

115

184

267

308

255

300

213

178

-

149,526명

160,919

144,062

153,915

153,915

179,158

193,850

191,887

194,408

519,060

194,678

 

일본은 무단 탄압정치로는 식민통치를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소위 문화정책인 동화정치를 시행하였다. 또한 선교사와 한국교회를 이간질시켜 분열시키려고 기독교의 단일화를 꾀하였으니 〔일본조합교회〕의 포교활동이다. 이것은 1942년 3월 〔조선혁신교단〕의 뿌리로서 일본군국주의의 앞잡이요 천황폐하의 백성이라는 경기도 경찰국 보안과장 야쯔기(立木)의 계략이었다. 1920년 4월 7일 조선 총독부령 59호로 개정포교 규칙을 실시하여 한국교회와 민족 말살운동으로 교회를 총독부 선전기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교설립, 청년운동, 문화운동(잡지발행,학술연구), 신문 보급운동(조선,동아)을 역으로 이용하여 민족의 정신적, 주체의식 구축에 3․1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계속 기독청년운동인 장로교회의 CE운동과, 감리교회의 웹윗운동, YMCA가 활발히 부흥하는 뿌리를 제공하였다. 교회하면 독립운동을 생각하였다.

 

2. 물산 장려운동

3․1 독립운동에 정치적인 요소가 큰 것을 생각한 선교부는 그 이후 사회 복지사업 위원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폐창의 초 교파적 절제운동을 벌였다. 민족의 독립과 계몽, 교육, 과학, 문화 부흥을 목표로 1920년 7월30일 조만식, 김동원, 김성업 등 50명이 평양 예수교서회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발기대회를 열고 그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평양 YMCA총무인 조만식의 주도로 1922년 1월 20일 유성준, 김윤수, 백관수 등이 무두회(無頭會), 즉 회장이 없는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매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무두회에 대한 반성과 함께 1923년 1월25일 전국 각 지방의 종교, 교육, 사회단체대표 1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유성준을 이사장으로 선출함으로서 그야말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내살림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으로’,‘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자’의 구호를 외치며 일본상품 배격과 국산품 애용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창시자 조만식도 장로, 초대 이사장 유성준도 장로, 그 밖의 주동인물이 거의 다 교계 지도자들이었다. 이 운동에는 서울의 YMCA를 비롯한 교회 청년회, 부인회 등이 적극 가담하였다. 더욱이 각 지방교회의 부인회에서는 1923년 음력 초하루(양력으로 2월16일)를 기하여 조선물산장려선전대회를 가지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저지로 실패하였지만 그해 1월1일 함흥 YMCA는 회원 천명이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가두행진을 벌여서 국산품 애용정신을 크게 일으켰다. 현제 I.M.F와 일본의 경제와 상품의 침략, 역사왜곡 뿐 아니라 열강들의 내정간섭 특히 남북통일 문제 등을 앞에 놓고 절제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기독교가 계승해야 한다.

이 운동은 1907년의 국채보사운동과 신민회, 3․1독립운동을 뿌리로 하는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노동쟁의(원산과 진주 활발)와 6․10만세운동(1926년)뿐 아니라 해외교포들의 독립운동과 광주학생 항일운동(1929년)의 분명한 뿌리인 것이다.

 

 

 

제Ⅳ부. 한국교회(교단)의 신학과 분열

 

1905년 “한국복음주의 선교연합 공의회”는 4개 장로교 선교부와 2개 감리회 선교부가 연합하여 한국선교의 활성화와 협력을 다짐하고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1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장감연합 협의회”를 조직하여 연합활동을 벌였으며, 1924년9월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를 창립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인 김관식목사를 총무로 임명하였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한국교회는 그 해(1926. 9월) 제4회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에서 YMCA, YWCA, 영국성서공회 등 12개 초교파 연합단체가 참석하는 부흥을 이뤘다. 그러나 다음 해 1927년 중앙YMCA 총무인 신흥우가 장ㆍ감교단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적극신앙단”을 조직하고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교회들의 협조를 받지 못하였다.

세계교회역사상 찾아 볼 수 없는 하나의 단일교회는 선교사들과 교단의 신학, 정치와 사상, 성격과 친분, 기관과 교회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1935년 파산되고 말았다. 오호 통탄할 일이랴! 이것은 1934년 제23회 장로교총회에서 “공의회가 각 교파 교회들로만 연합하자”는 제안을 결의하였으나, 적극신앙단의 폐해와 선교구역 타파 안을 강력히 주장하고 문제를 일으킨 감리교단을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제1장. 한국에온 미국선교사들의 신학사상

1. 미국 대 부흥운동과 개혁파 장로교회

 

한국교회신학은 제2의 미국교회신학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진리의 황무지였던 조선 땅.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개혁파 청교도신앙을 가진 미국장로교선교사들과 경건파 복음신앙을가진 미국감리교선교사들이 한국에 순교적 신앙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 장로교의 신학을 알지 못하고서 한국교회 신학과 분열은 논할 수 없다.

앞에서(제2장, 2절),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의 산학사상에 대하여 상고한바 있다.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교 분류를 살펴본 바에 의하여 또한 그들의 신학체계도 알 수 있다.

이 선교사들의 신학교육과 개인적 교분, 외국에 유학하여 돌아온 한국의 신학자 당대의 시대적 상황인 일본의 정치적 문제, 기타 사항으로 지방색과 교권인책 등의 여러가지 문제가 한국 장로교회의 당면과제였다.

한국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장로교회를 한국장로교회의 母體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역사를 다시 고찰해 보며 우리의 신학계보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는 그 신학사상 면에서 개혁파 칼빈주의 신학이요, 교회정치 체제면에서는 장로교 단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총신대 교수 홍치모씨는 ‘하나는 희랍어 성서원전에 표시되어 있는 장로요 교회시대의 교회정치 조직의 제현이며, 다른 하나는 John Calvin과 종교개혁 사상이다’라고 표명하였다. John Calvin의 신학사상은 프랑스의 Huguenots와 화란에서는 개혁교회를 탄생하였다. 또한 16세기 후반까지 서 유럽의 변경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스코틀랜드가 장로교의 사상과 신학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영국과 청교도(Puritans)들은 프로텐스탄트 신앙을 소유한 신도들의 복합적 집단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 「長老派」는 아니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원조를 얻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타협하였을 뿐이지 결코 칼빈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감독제도도 아닌 독립주의와 회중제도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재 세례파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영국국교의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아일랜드를 거쳐 미 대륙으로 이주하였고, 프랑스와 독일 등의 개혁 칼빈주의 신교도들은 화란( Netherland)에 모여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의 주요인물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피니였다.

Jonathan Edward: 1703년 Timothy Edwards 11子 중 다섯 번째

1716년 예일대학 20 졸업: 사라 피오폰트와 결혼 11자녀 8명 딸 3명 子

회중교회목사로서 칼빈주의자

1758년 프린스턴 총장

죠나단 에드워드는 미국 대각성운동(1734-35)과 미국 대부흥운동(1740-41)을 일으켰다. 18세기말 계몽주의와 세속주의(자유주의), 19세기초 인본주의와 과학주의에 빠져 영적위기와 지성인들의 타락을 각성시키며 부흥케 한 위대한 대학생 영적부흥뿐 아니라 미국 전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

 

2. 미국의 대 각성운동과 신학교 설립

 

아메리카에 이주한 청교도(Pilgrim Fathers)들은 1706년에 필라델피아 시에서 최초로 노회를 조직하였고, 1716년에는 4개 노회로 확산되면서 大會(synod)를 결성한 후 1717년 미국에서는 최초로 장로교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729년 大會에서 Westminster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정식적인 信仰標準으로 삼았다. Francis Makemie목사가 메리랜드주 레호보즈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William Tennet는 자기의 오두막에서 성경과 교리를 네 아들을 앞에 놓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오두막집은 오늘의 Princeton university and seminary의 모체가 되었다.

주로 1720-40년대 사이에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주들에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으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 서유럽을 휩쓸고 간 종교운동의 일부로 유럽에서는 죤 웨슬리(1703-91)가 이끈 복음주의와 관련이 있다. 아메리카 식민지 이주자들에게 신세계에서의 일체감과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목적을 부여해주었다는 자각을 불어넣어준 초기 대운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무미건조한 이성주의와 중부 식민주들에 분포해 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에 집착한 형식주의, 그리고 남부의 목회감독 소홀등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여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것들이 식민주들에서 부흥운동의 터전이 되었다. 부흥운동은 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일부 성공회 등에서 일어났으며 이들 대부분이 주로 칼뱅주의자였다. 그러므로 대각성운동은 복음주의적 칼뱅주의가 발전한 형태라고 볼수 있다.

부흥설교자들은 죄인에 대한 ‘율법의 경고’, 하느님이 대가없이 베푸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남’을 강조했다. 이 운동을 이끈 주요인물 가운데는 조지 화이트필드가 있다. 그는 성공회 사제로서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칼뱅주의자였다. 1739-40년에 아메리카를 방문하여 여러 식민주를 찾아다니면서 여러사람을 수용할 만한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들판에서 많은 군중을 상대로 설교했다.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다른 부흥 목사들 때문에 들판에서 많은 군중을 상대로 설교했다.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다른 부흥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비판하고 지나친 감정과 위험한 종교적 망상을 자극하며 교회 성직자들의 정당한 초청을 받지 않은 채 기존의 교구에 함부로 들어와 설교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William Tennet 2세와 Gilert는 Jonathan Edward와 더불어 1746년 프린스톤대학을 창건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Jhon Witherspoon과 Archibald Alexander박사, Samuel Miller의 뒤를 이어서 Charles Hodge, B.B.Warfield은 1887년에 취임하였으므로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때에 교육 받았던 것이다.

1861년 여름 남부연합 Confederate stste의 노회들의 대표들이 Georgia의 Augusta에 회집하였다.

South Carolina의 Benjamin M.Palmer는 미국 남북장로교회의 분리의 원인을 ‘두개의 교회가 함께 머물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공개토론의 질문들과 열정들을 그 토론장에서부터 강력히 배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노예제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우리는 감히 주장하거니와 만약 인간들이 그들의 결론을 성경에서 끌어온다면, 인간의 두뇌로서는 군왕제, 귀족제 혹은 기근을 거부할 수 없음같이, 노예제도를 죄악으로서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은 민권과 재산과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과 교회와 종교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노예제도에 대한 남북의 엇갈린 의견이 1864년 전쟁 결말까지 남부의 장로교회는 완전히 통합하였다.

1861년 미국의 남북장로교회는 분열되었으나 신학적 문제는 1812년에 창설된 프린스턴 신학교에 달려있었다. 1890년에 미국 뉴욕시에 소재한 Union Theological Seminary는 북장로교회가 경영하는데,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Charles A.Briggs가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북장로교회 목사인데 「성경의 권위」라는 신학강연에서 독일의 자유주의신학을 지지하며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므로 큰 물의가 발생하였다.

위와 같은 Briggs의 사건은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Union신학교가 이탈하고, 또한 프린스턴신학교의 도전자로 자유주의 온상으로 등장한다.

Walter M.Horton은 1849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자유주의 신학의 황금시대 (The Great Age of Liberalism)라고 지적하였으며, B.B.Warfield가 1921년 서거한 후 1924년 1월, 150명의 북장로교회 목사들이 뉴욕시, Auburn 신학교에 모여 교단내의 자유주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하여 채택한 선언으로 신학의 좌경화는 노골화 되었다.

이 선언과 더불어 북장로교회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점차 좌경화하기 시작하자 G. Marsden은 1929년 프린스턴을 떠나 Westminster신학을 세워 소신대로의 보수신학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계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미국상륙은 점차 미국 북장로교회와 다른 교단, 그 신학교와 다른 부분의 전략적 자리를 거의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Archibald Alexander박사로부터 시작하여 G. Machen박사가 프린스턴신학교를 사임하던 1929년까지를 Old Princeton이라 하고 1930년 자유주의 신학에 좌경된 Walter Rauschenbusch와 briggs, Sailer Matthews, Newman, Smyth, Grahan, Taylor와 같은 독일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수한 이후를 New Princeton이라 하였다.

 

3. 감리교 경건 복음운동

 

John Wesley(1703년 出生)는 영국 Samuel Wesley목사와 母 Susana의 19名 자녀중 15번째로, Charles Wesley는 18번째로 P. Worth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大學에서 The Holy Club을 만들었는데 비웃는 학생드은 시간정해 기도, 성경 공부, 점심기도회, 감옥과 병원 등 위문전도의 경건생활에 힘썼으므로 Methodist라고 하여 웨슬리언 메소디스트라 부른다.

1735년 10.14 미국 조지아주 선교, 「풍파 대작할 때와」시몬드호 배 풍파, 1738년에 좌절된 모습으로 돌아옴. 한 모라비안 선교사인 스펜젠버그(A. Spanggenberg)와 영국 모라비아 목사 뵐러(P. Boehler)를 만나게 되어 경건생활에 몰두하고, 1778년 4월 5일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것이 부족 깨닫고 Methodist Revival에 힘썼다. 1791년 88세, 40만번의 설교한 부흥사요, 선교사였다.

 

4. 디 엘 무디와 학생자발운동( S. V. M )

 

학생자발운동은 1888년 미국에서 “학생 외지선교 자원단”(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 발족되어 그 구성원을 대학 YMCA, YWCA, 미국신학교 선교연맹, 캐나다 대학선교연맹 등 4개의 초교파 학생연합 단체들이었다.

그 역사의 뿌리는 다음과 같다.

1) 사무엘 존 밀스 주니어와 4명의 친구(제임스 리차드, 프란시스 엘 로빈스, 하비 루미

스, 바이렘 그린):

1808년에 조직된 건초더미 운동 곧,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한 형제회(The society of brethren)이다. 이것이 부흥하여 미국선교사회(AMS)로 발전하였다.

2) 로버트 윌더와 프린스턴해외선교회(PFMS) : 1844년 Y.M.C.A.와 1888년 미국신학생 선교연맹(The American Inter-Seminary Misionary Alliance)에 소속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등이 1883년 선교집회에서 선교사로 소명을 받는다. 1886년 윌더에 의해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S.V.M.의 뿌리가 되었다. 여기에는 AJ고든박사 의 도움과 윌더선교사 자녀인 RW반커크 회장의 선교헌신이 있었다. 반커크 선교사 는 왜 당신은 가지 않으려고 하는가?’라는 설교로서 큰 은혜를 끼쳤다.

3) 디엘 무디 : 1886년 헬몬산 수련회를 인도하던 중 대학생 선교지원자 10만명을 배출 하고 2만 5천명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1891-1945)

4) 죤 N 포먼 : 1895년 세계기독학생연맹을 창설하여 1906년 죤 B 슬레만이 시작한 평 신도운동(LMM)에 영향을 끼쳤다.

5) 죤 R 모트 : 16년간 Y.M.C.A. 총무로 국제적인 선교를 담당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 하였다. 1946년 조직이 비대해지고 재정적인 어려움과 자유신학의 범람으로 59년 NSCF를 병합하였다.

6) 로버트 매킬 킨 박사(콜롬비아 성경대 설립자): 어바나 선교대회에서 학생회선교회 (SFMF)를 형성하고 그 후 죤 스타트가 IVF를 만들며 크리스트 윌슨은 CCC에 뿌리 를 제공하여 빌 브라이트박사가 세계적인 대학생선교회로 발전시켰다.

 

 

제2장. 한국의 신학교설립과 교단분열의 뿌리

1. 장로교단과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장로교단의 사경회는 해가 지날수록 부흥하여 여러 지역에 남녀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성경학교는 평신도전도자 양성․신학교 진학과 훈련 등에 계속 활용하였다. 따라서 장로회 선교부는 평양에서 1901년에 1년 3개월씩 5년간 수업 후 졸업시키는 장로교 연합신학교(The unio Theological seminary)를 시작하였다. 그 해에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2인 김종서, 방기창을 첫 신입생으로 1903년 14명이 입학한 후 1905년에는 3학년 8명으로, 1906년에는 전체학생이 50명으로 부흥하였다. 따라서 1905년 장로교공의회(미국남․북 장로회, 호주, 캐나다)의 인준을 받아 마팻(S.A. Moffett)선교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 대한장로회 독노회를 첫 번째로 개최하고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우게 되는 기쁨을 맞았다. 곧 최초 한국장로교의 7명의 목사인 서경조, 이기풍,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인서, 방기창 이었다. 또한 대표적인 장로교 평양여자신학원은 1897년에 설립되었다.

1907년 4개 장로회가 하나의 독로회로 연합하였으니 “대한예수교장로회” 즉 대한국독립로회를 조성하였고, 그 기념으로 이기풍목사를 제주도로 1909년에 한석잔목사를 일본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흘못사를 시베리아에, 1910년 김영제목사를 북간도로 파송하였다. 1912년 9월1일 평양신학교 강단에서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에 언더우드선교사를 선임하였으나 선교사들은 본국의 목사들이 총회를 운영, 부흥시키도록 협력할 것을 공포하였다. 또한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 선교를 시작 해외선교의 뿌리를 펼쳤다.

지금까지의 한국 장로교회를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며, 교단 분열의 원인을 체계화하자 하자(개요 요약).

① 한국장로교회 준비시대(선교사 기초 작업기)

;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츠라프 입국 - 1884년 미국북장로교 선교부 알렌(Allen)정착

② 한국장로교회 설립시대(선교사 개척시기)

; 1884년 ~ 1889년 선교사 공의회 조직

③ 한국장로교회 부흥, 성장시대(선교부 연합시기)

; 1889년 ~ 1912년 9월 1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직’

④ 한국장로교회 총회시대(선교사 철수시기)

; 1912년 ~ 1943년 5월 7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해산’ (31회 총회)

⑤ 한국장로교회 분열시대 (세계 장로교회 교류시기)

; 1946년 6월 16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조직’ (1960년 2월 17일 통합측 분열)

⑥ 한국장로교회 신학교 난립시대(신학 범람과 분열 난립기)

; 1960년 ~ 1980년 합동측 사분오열

⑦ 한국장로교회 선교사 파송시대 (세계속에 교회 설립과 선교사파송기)

; 1980년 현재

 

2. 감리교단과 협성신학교

 

한국에 온 감리교 선교사들은 미감리회의 사경회 안에 1893년 지방전도자 학습과정을 개설하였고 1896년 ‘신학회’로 발전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신학교육의 첫 번째 뿌리다. 한편 1900년에는 신학회 4년급에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 이승은이 졸업하였다. 그 중 김창식과 김기범이 1901년 5월14일에 한국 개신교 사상 집례 목사로 첫 번째 목사안수를 받았다. 1903년 5월 6일에 미 감리회 제19회 선교회에 남감리회 소속의 무즈(J.R. Moose)가 참석하여 협의한 끝에 양 감리회가 합동으로 ‘연합교육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미 감리회 측에서는 그 위원회의 교육위원으로 보불, 스웨러, 케이블, 벙커 등을 선임하였다. 그후 1905년에 미 감리회신학당이 설립되어 전도사 4년급 과정을 마친 사람을 전문신학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1906년 미국해외선교부총무였던 허버존스가 다시 돌아와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고 그 해 9월 남, 북감리회를 “조선감리회”로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뒤이어 1907년 6월에는 남․북감리회가 연합하여 협성신학당을 설립하였으니(Union Theological school),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뿌리가 되었다.

처음 감리교 여학당으로 설립한 기관은 1920년에 남북감리교회 합동 운영의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929년에는 협성신학교와 연합하여 남녀공학의 협성신학교를 이룬 뿌리였으며, 남녀공학의 첫 번째 학교로 전국을 놀라게 하였다. 1930년12월2일 경성내동감리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구성하고 명칭은 “기독교 조선감리회”로 초대 총리사에는 양주삼목사였다. 또한 1931년12월북간도용정교회에서 “만주선교연회”를 조직하였다.

 

3. 성결교단과 경성신학교

 

1901년 동양선교회가 조직되어 1907년에 경성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성결교단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910년5월에 영국인 요한 토마스목사를 초대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911년3월 무교정전도관에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1912년 3월 제1회 졸업생 이명현을 배출하였다. 1914년 4월 5명의 최초 성결교 목사 김상순, 이장하, 강태은, 이명직, 이명현을 안수하였다. 이들은 4년제 경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4년 교역자회와 지방회를 조직하고 각 교회를 순회하여 지도하며 만주선교를 시작하였다. 1932년 총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이명직목사가 선출되었다.

 

4. 구세군과 구세군사관학교

 

1908년10월8일 서울 서대문 평동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910년 구세군사관학교를 시작1917년에는 여자사관학교를 개교하였다.

 

5. 침례교단과 침례교신학교

 

1890년 평신도선교사 펜윅과 엘리팅 기념선교회 파송 선교사들로 시작한 선교사역이 강경, 공주지역을 복음화 하며 부흥하였다. 펜윅은 함경도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만주까지 복음을 전하였으며 본국으로 가 신학을 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열정정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펜윅선교사는 1906년 강경의 첫 대회에서 초대감독으로 선출되고, 1921년 “동아기독교”로, 1949년 “대한기독교 침례회”로 명칭을 바꿨으나 교단이 분열되었고 1953년 침례회신학교를 설립한다.

 

위와 같이 한국교단의 분열은 각 교단의 신학교 설립으로 뿌리를 삼을 수 있으나, 1905년 장로교4개선교회와 감리교2개선교회가 연합하여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를 설립하여 단일 한국개신교단을 조직하려고 연합하였으나 일본총독부의 탄압으로 세계교회사에 기릴 위대한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고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창립하여

다시 개신교연합을 도모하였으나 친일,자유주의신학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3장. 한국교회의 교단분열과 이단문제

 

한국교회 교단의 분열은 일본제국주의 야욕과 박해로 신사참배와 일본기독교에 통합시켜 무산되었다. 또한 교단분열의 역사적 흐름은 한국교회 자체에서 발생된 사건으로 민족교회 곧 토착화 신학과 이단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외국의 신학을 무분별하게 받아드린 것과 지역 이기주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남용하므로, 교주와 신비주의로 인한 한국교회의 분파와 교단분열을 낳게 하는 뿌리를 제공하였다.

 

1. 최중진(崔重珍)의 자유교회(교단)

 

전북 정읍출생인 최충진은 1895년 테이트선교사의 조사로서 순회전도와 교회설립에 열심하였다. 그는 호남지방 최초의 장로며, 호남최초의 목사로서 평양신학교(2회)를 졸업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은 도시에 전도하며 재정후원을 받고 있으하는나 자신과 농촌지역은 차별한다고 선교사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1910년 미국 선교사들의 횡포와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교회의 자유와 자치, 독립을 주장하며 ‘대한 예수교 자유교회 목사 최중진’이라고 전라대회 회장 부위렴(W.F. Bull)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장로교 목사가 아닌 자유교회 목사임을 나타냈다. 전북 부안, 태인, 정읍, 임실 등 약간의 시골교회와 1911년 평북의 김원유목사와 강계 차학연장로 등이 가세하였으나 얼마 후 사라지고 말았다.

 

2. 김장호의 조선 기독교회(교단)

김장호는 1914년 평양신학교(7회)를 졸업한 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자 똑똑함을 인정받아 바로 노회서기가 되었다. 그는 공위량(William C. Kerr) 선교사의 서기로 있으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 모세의 홍해기적 부인, 오병이어;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심 등 기적을 부인하며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을 선호하였다. 또한 장로교회 정치를 거부하고 회중제도를 제창하였다.

김장호목사는 1918년 7월 7일 시무하는 봉산신원교회(황해도 봉산군 신수면 재령)에서 「자치조선기독교회」를 창설하고 장로교회를 떠났다. 따라서 1918년12월6일 황해노회는 그를 이단으로 제명하였고, 그 결의문을 가지고 신원교회에 간 임시당회장 장홍범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 김장호의 둘째형인 김재호가 등단하여 경관과 교인들이 보는데서 심히구타하였다. 김재호는 이 후 자축회를 열고 먹은 술과 불고기음식이 급체하여 심장마비로 죽었다. 따라서 ‘목사 때린 놈 날벼락 맞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1919년에 동양적 기독교를 주장하고, 1920년에는 반 선교사운동을 벌리며 ‘조선교회의 주권과 이익을 위해 단합하여 외국 선교사의 교권을 거절하였다.’인본적 자유주의자인 김장호는 1928년 일본 총독부로부터 훈장까지 받는 친일파로 앞장섰고, 그 교단(20개 교회)도 ‘친일적’교회들이 되었다.

 

3. 이만집의 자치교회(교단)

 

1921년 대구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전신)를 시무하던 이만집목사(평신10회)는 계성학교의 고등학교인가를 받지 못한 운영진 선교사와 학생들의 휴학문제를 공격하자 노회와 교회 안에서 선교사들의 지지파와 자치파들로 나뉘어 갈등이 심하였다. 1923년 3월18일 이만집목사는 ‘자치선언’을 하였고 경북노회는 이만집ㆍ 박영조목사를 면직하자 약 400여 교인들과 14개 교회들이 그를 따랐다.

이만집목사는 1919년 3.1운동 대구 주도인물로 인격과 지도력을 갖고 있어 전남장성 박용기장로, 충북보은 이병식목사, 평양 이규찬목사, 경기고양 이은우목사, 서울 북감리교 이병재목사, 황해도 김재석목사 등도 가담하였다.

 

4,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김교신은 1920년 4월 동경의 미사노리영어학교에 유학 중 동양선교회 학생들의 노방전도로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 교회가 내분으로 시무했던 훌륭한 시미즈(淸水)못의 사퇴를 보고 교회에 회의를 가졌다. 그때에 무교회주의 자인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7년간 성경공부를 배우며 큰 은혜를 받고 조국사랑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1927년 4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 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며,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계간(季刊) 「성서조선」을 7월에 창간하였다. 1928년 양정고보와 송도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1930년 5월에는 성서조선의 주간과 편집을 책임 맡았다. 그는 성서적 입장으로 기성교회의 제도와 교리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하여 <무교회주의 자>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기성교회에 적을 두지 않았고 자기들끼리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초교파 성경연구 운동으로 ‘성서’를 생활로 실천하여 ‘새 조선’의 민족주의적 위대한 토착 신앙인 교회의 개혁과 성서조국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새로운 교파를 설립한 최태용을 심하게 비난한 것을 보아도 무교회주의를 목적삼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성서조선>은 1930년 후반부터 일제군부로부터 삭제와 발행 중지를 당하다가 1943년 3월호(158호) 권두언인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한다)는 민족부활을 노래하였다하여 폐간 당하였고 13명이 구속되었다. 1년 후 출옥한 그는 만주를 순회하며 신앙동지들을 격려 하였고, 1944년 함흥 질소공장에 입소하여 노동자들을 위해 힘쓰다 4월25일 44세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5. 최태용의 복음교회(교단)

 

최태용은 1887년 함흥출신으로 수원고등농립학교를 졸업 후 교편을 잡다가, 1916년 겨울 저녁에 영계(靈啓)의 빛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21년 일본에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內村鑑三)의 신학에 몰입하며 교회제도와 예배의식,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성령의 직감과 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는 1925년 6월‘ 천래지성(天來之聲)’ 이란 잡지와 1928년에는‘영과 진리’잡지를 창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신약성경의 유일회성 계시를 부인하고, 현재 기독교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시는 진리가 아직도 존재하므로 이것을 깨닫도록 직감이 필요하다며 신비주의를 강조하고 전도무용론을 주장하였다.

최태용은 동조하는 백남용과 한국교회 성도를 무시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우월성과 기성 교권을 반대하고, 1935년 12.22일 서울에서 초교파 공동체를 창설하여 무교회주의를 탈피한 후 조선교회 독립과 자주성을 주장하는 「복음교단」을 설립한 것이다.

 

6. 백남주와 성주교회(교단)

 

백남주목사와 한준명목사는 한국의 신비주의를 조직화한 뿌리로서 ‘새 생명의 길’을 제창하며 구약은 생명을 들려주고 신약은 생명을 보여주며 새 생명의 길은 생명을 받게 한다하여 성경이상으로 강조하여 신구약성경이 66권임을 고집을 버리고, 사도신경 무용론과 삼위일체교리를 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가현설과 속죄를 부인 하며 성경계시와 재림을 부인하고 스웨덴 버그의 천계와 지옥 썬다싱의 영계의 묵시를 교리로 삼아 ‘천상의 재 결혼설’을 믿었다.

백남주목사는 1902년 함남 갑산군에서 태어나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원산 마르다 윌손여자신학교 교수로 있으며 신학산(神學山) 기도소를 차렸다. 그는 자기가 번역한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성 어스틴의 <참회록> 등을 강의하였으며, 간도에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 부른 한준명목사를 원산에서 만나 신비주의자 스웨덴버어그와 인도의 선다싱에 심취하였고, 접신체험을 하였다는 유명화에 빠져 들었다. 그는 1933년 <새 생명의 길>이란 이단성 소책자를 만들어 한준명, 이용도, 이호빈, 이호인, 유명화와 함께 <예수교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한 주동인물이다. 그는 새로 신전과 헌법 등을 조직하였으나 여신도 김정일과 동거하여 문제가 커지자 1934년 예수교회를 떠났고, 다음 해에 또 신탁(神託)이라 하며 평북 철산의 ‘ 새 주(主)’라 칭한 김성도라는 여인과 성주(聖主)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백남주는 공주사범 교사를 역임하다 1949년 봄 공주에서 죽었으니(교회대사전은 1948년 별세) 그는 한국교회 신비주의의 뿌리였다.

 

 

7. 신비주의자 이용도목사와 예수교회(교단)

 

이용도목사와 같이 엄청난 양극의 삶을 산 사람도 드물다. 현재 그는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부흥사의 상징인물이요,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던 한국교회와 백성들에게 영적각성과 소망을 심어준 고난 받은 애국자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용도목사는 접신녀와 함께 사역하였으며, 신비주의자들의 예언을 하나님의 신탁(명령)이라 하여 성령역사와 동일시하였고 성경계시를 부인하였으며, 형식화된 기성교회와 교리, 거만한 목사ㆍ직업적 부흥사와 선교사ㆍ교회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무교회주의를 선전하였다. 또한 예배의 형식을 무시하고 설교의 노트작성 없이 3-4시간을 행할 때가 대부분이었으나 특별히 10분 만에 집회를 마치기도 하였으며, 계속 철야기도를 하는 자유 분망한 신비주의적 모습이었다. 따라서 1931년 8월12일 장로교 황해노회와 1932년 1월28일 장로교 함남노회와 그 해 7월 평양노회,1933년 2월 안주노회에서 금족령을 내렸으며 1933년 9월 제22회 총회에서는 이단으로 인정하여 정죄되었다. 더구나 자신의 교단인 감리교 연회도 1933년 그에게 목사 휴직처분을 내렸다.

이용도는 1901년 4.6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소장사인 이덕홍씨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었으나 어머니는 시변리교회 전도부인으로 독실하였으며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하여 싸움이 잦았고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이용도는 어렸을 적부터 병약하였으나 말을 잘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15세 때 개성의 송도고보에 입학하여 9년 동안 학교에 다녔으나 고학으로 또한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므로 4차례의 옥고와 2년간 옥고를 치러 졸업하지 못하였다.

그는 교장인 왓슨(A.W. Wasson,왕아덕)선교사의 권고로 24세 때 서울 협성신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시와 연극, 가극 등에 몰두하며 신학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1924). 이때 사귄 친구 이호빈과 이환신은 목사가 된 후에 함께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며 1930년 <예수교회> 교단을 만드는 뿌리를 형성하였다. 이용도가 2학년인 25세 때 폐결핵 3기로 각혈이 심해 친구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에 쉬러 내려갔다. 그곳에 신학생들이 온 것을 알고 그 교회가 간곡히 부흥회를 청하자 사회를 보던 이용도가‘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찬송을 부를 때 울기 시작하였고, 다음 날 저녁 이용도의 설교는 설교자와 온 교우들의 울음바다로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 이용도 자신이 설교하다 성령체험과 폐병이 낫게 되고 교회는 큰 힘을 얻었다.

1928년 1월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강원도 통천교회에 파송을 받았으나 형식적인 설교와 사명감 없는 목회로 교회가 부흥하지 않아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하던 청년 박재봉과 함께 통천읍 서북쪽의 금강산 백정봉에 올라가 10일간 금식기도한 후 기도에 전념하여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된다. 그는 신비한 환상을 쳬험하였다고 말하며 열정과 뜨거운 설교를 전파하였다. 그가 1928년 12월24일 새벽3시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 버리소서. 그리고 예수에게 미쳐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예수에게 미쳐야 하겠나이다. 예수에게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이 때 무서운 형상을 한 마귀가 나타나 용도 전도사를 육박하였다. 그는 권사님 집으로 들어간 마귀를 좇아가 간절히 부르짖어 주먹에 피 흘리며 기도하여 그 마귀를 쫓아 낸 후 부흥운동의 불길은 통천읍 교회 50-60명 교인이 교회가 앉을 자리가 없을 뿐 아니라 그 구역안의 7교회와 그 지방 20여 교회도 부흥하게 되었다.

1930년 이용도는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부흥사로 집회하던 중 2월26일부터 3월6일까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집회 후 평양 각 교회에서 기도운동이 일어나므로 ‘평양기도단’의 모임을 서문밖교회에서 갖고 민족과 회개의 기도운동을 불붙였다. 그런데 이용도의 친구였고 평양기도단으로 함께 사역하였한 장로교단의 김인서장로는 이용도의 접신극 사건 후 그의 <신앙생활>을 통해 비판의 기수가 되었고, 박형용, 남궁 혁 목사에게 이들은 ‘이세벨의 무리’라는 비난을 받고 그 후 해체되었다. 이 당시 교계에서 최태용의 무교회주의와 황국주의 피가름과 혼음문제가 컸을 뿐 아니라 감리교 내의 이용도 반대자들은 타교파와 다른 구역연회까지 부흥회를 다닌 다하여 그에게 통천구역을 떠나 주일학교 연합회 간사로 전임시켰다. 1931년 그는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전임되어 부흥운동에 열중하니 1931년 20회, 1932년 23회로 절정기를 이루었고 페결핵의 질병 중에서도 피를 토하며 회개와 기도, 사랑을 부르짖고서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희생적 가르침인“참 나라 사랑, 새 생명운동, 열정적 기도, 주님께 헌신”을 몸소 실천하며 강조하였다. 그는 ‘사랑의 화신’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부흥회 사례금을 가난한 목회자나 거지에게 주었으며 새 옷을 입고가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냥 벗어주었고 기생이나 그를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한 무차별적 사랑의 실천자로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였으며 자신의 소유재산이 한 푼도 없는 청빈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파를 초월한 인류애적 사랑과 일본군국주의의 핍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 민족주의적인 애국열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였다. 또한 부흥회를 원하는 교회와 기도원ㆍ집회에는 어디든 갔으며, 교회의 크고 적음과 빈부도농(貧富都農)을 가리지 않고 기도와 금식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용도는 백남주와 한준명의‘새 생명의 길’을 강조하고 신구약 성경에 대한 불만을 말하며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성경계시의 유일성을 부인하였다. 그는 사도요한의 말씀을 복음으로 주장하고 사도 바울의 복음은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불경과 사회주의에서도 배울 것을 찾았다는 다원주의 자였다. 신비주의적인 환상과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다 성경과 복음에서 떠나 사회의 지탄받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단에 빠져 감리교 협성신학을 졸업한 복음교단의 지도자로서 모범적 사역을 보이지 못하고 자신의 감리교단에서도 목사휴직 징계를 받았다.

□ 백남주, 한 준명, 유명화 등< 원산 신비주의자> 들과의 연결

1932년 1월 28일 함남 원산의 백남주목사와 간도에 있다가 원산에 들린 한명주목사는 점쟁이 같은 (입신여) 이유신과 원산 감리교 박승환장로 부인 유명화(劉明化)를 데리고 평양에서 30일간 「입신 강신극」을 연출하였을 때 이용도 목사의 친구인 이호빈목사가 도취하게 된다. 그해 가을 만주 선교사였다 원산에 온 이호빈목사는 이용도에게 (접신녀)유명화를 소개하며“ 주님께서 스웨덴의 스웨덴버그와 인도의 선다싱에게는 직접 나타나셨지만 유명화에게는 직접 친림하셨습니다”는 편지를 받고 원산에서 만나 이때부터 이호빈,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와 <접신신비주의>와 함께 하는 극단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특히1932년 11월 평양에온 유명화가 백남주와 결탁하여 강신극을 벌여‘용도야 너는 내 교회를 세우라. 이 놈 네가 교회를 분립치 않으면 나를 위해 십자가 진 것이 무엇이냐’고 꾸짖자 ‘주여’부르짖고 무릎을 꿇어 하나님 예언의 말씀으로 굴복하여 교단분립을 작정케하였다.

1933년 3월 이용도는 감리교연회의 휴직처분을 받은 후 6월6-8일 평양 신양리에서 <예수교회> 창립공의회를 열었으며 초대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였다.(교회사 대사전은 1월3일과 ‘백남주’란에는 6월3일로 , 전택부는 3월 설립을 기록하였다) 참석인원과 이용도목사, 만주선교사 이호빈목사, 장로교출신 백남주목사, 한준명목사, 소설가 박계주 등 90여명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교회의 출현은 결코 새 종파 새 제도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고 기성교회 의 내용혁신을 기도함이 시종일관의 목표다. 로마구교라거나 갱정신교(更正新敎)라거 나 가릴 것 없고 종문(宗門)의 동서나 파별의 남북을 논할 것 없이 교회의 내용만 예 수로 정화되면 고만이다’

 

이용도는 폐병과 금식, 건강을 생각지 않고 3-4 시간을 열정적 설교한 후 또한 계속 철야 기도하여 7-8시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목사휴직 처분을 받고도 얼마 후 해주(海洲)에서 집회하다가 여러 교우들의 돌을 맞고 원산 신학산에서 치료하던 중 1933년10월2일 33세로 죽었다. 그 후 이호빈목사가 선도감이 되었으며 원산의 신학산(神學山)은 백남주목사를 수도감으로 선출하였다.

그들은 기관지로 1934년 <예수>를 출간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쳐 1937년에 25개 교회와 2천여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이용도의 형제라 불리운 이호빈은 1946년 11월5일 김우현, 변성옥 등과 함께 ‘초 교파적 민족자주교회’를 표방하며 서울 Y.M.C.A 강당에서 <중앙신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초대원장에 변성옥을 이호빈은 2대원장 및 이후 이사장 등으로 현 용인 기흥에 있는 < 강남대학교1990.3.1>가 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현 강남대학교는 1. 대학부에 1) 신학부; 2개과 2) 사회복지학부; 3개과 3) 독일음악부 4)~ 6) 1대학~ 3대학 각 6개학부와 7) 중국학대학 2.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3.박사원을 운영하며 미국과 일본 중국, 독일 등 국제적으로 여러 대학교와 제휴를 맺고 있으나 신비주의자 이용도의 뿌린 씨앗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교회(교단)는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교세는 크지 않지만 시사하는 점이 대단히 많다.

우리 복음주의 교단들은 철저한 각성과 부흥성장 못한 분파주의ㆍ 분열ㆍ 안일의 죄악을 회개하며, 이단들의 부흥을 애통히 하고 저지하는 것으로 급급하거나 만족하지 말자. 복음주의 교단들이 합동하여 세계와 통일조국의 복음화와 예수문화를 전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8. 현성원의 조선기독교회(교단)

 

만주지방 감리교 선교사였던 현성원은 효과적인 전도사역을 위해 감리교와 장로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하고, 기성교회의 부패와 선교사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지역주의와 자치 신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하자 교파를 초월한 제휴로 수정하여 이단으로 제명된 김장호의 ‘자치조선기독교회’와 이용도와 이호빈의‘예수교회’와 제휴를 맺었다.

현성원목사는 1926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5년 북만지방 감리사로 만주 길림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동료 한동규, 우인철, 박세평, 변성옥과 ‘새 신앙파’라는 교파를 창설하므로 감리교 동만지방 감리사 배형식목사로부터 이단으로 공포되므로 1935년 1월25일 ‘조선기독교회’로 범위를 넓혀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또한 <길림신학교>를 창설하여 교장에 변성옥, 학감은 현성원이 취임하였고 국내와 연합부흥을 원하며 김장호까지 강의를 맡겼다.

해방과 함께 월남해 귀국한 현성원은 중앙신학교를 이호빈목사와 함께 설립하고 교수하며, 1949년 감리교목사로 복귀하여 안양교회를 담임하고 수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9. 송태용의 하나님의 교회(교단)

 

송태용목사는 성결교목사로 ‘성화’잡지의 주필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 교파를 도입하였으니 미국에서 1829년 독일 침례교 교사였던 죤 위네브렌너가 창설한 새 교단이었다. 한국의 첫 번째 성결교단은 동양선교회의 킬보른(E. A. Kilbourne)선교사를 중심해 1921년 ‘동양선교회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꿨으나 선교사 들 주축으로 이사회를 조직하여 상임기구로 교단을 주관하였다. 따라서 1932년 3월26일 한국목사들 중 자치와 자립를 선언하고 1933년 총회를 조직하고 1936년 제3회 총회장으로 변남성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으나 이사회와 서울 중심의 목사들이 불법처리하고 총회임원 등을 면직처분하였다. 이를 격분한 곽재근, 변남성, 정남수, 오규식, 안형주, 서재철, 송태용, 김광원목사들이 성결교를 탈퇴하고 장로교를 탈퇴한 이원균목사와 함께 1936년11월25일 평양상수리교회에서 집회후 11월29일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자치ㆍ자유 독립교회를 주장하며 선교사들의 교권에 불복하여 표준 5개조를 제정하였으니 1) 하나님의 교회는 성서에 보이셨고, 2) 모든성도들은 주안에서 하나가 돼야하며, 3)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개조를 제정치 않고, 4) 정치적통제기관이나 법규를 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직속하여 성서를 유일의 정칙으로 함. 5) 각 교회의 협동을 요하는 주님 사업에 상호연합하여 행한다.

10. 박동기교주의 시온산제국

 

지금까지 한국교단의 분열은 대 부분 선교사들과의 알력과 한국민의 토착화신앙의 자치자율을 목표 삼았고, 만주지방의 지역특성의 교파분열이며, 이용도목사와 원산파는 신비주의 분파였고, 박동기와 황국주, 백남주는 교주로서 이단교단을 세웠다.

1936년 포항장로교회 조사였던 박동기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와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교인들을 모집한 후 1940년 경북청송 매산에서 기도하던 중 특별계시를 받아 ‘항일투쟁을 목표’로 황유화와 추종자들과 함께 1944년4월25일 국가 선포식을 갖고 <국기>도 만들었으며 연호를 <도광(道光)> 국호를 계14:1-5, 단7:26-27에 따라 <성일본제국>이라 했으나 곧 <시온산제국>으로 바꿨다. 성일제국의 조직은 태평왕 지상대리(박동기교주; 신부, 어린양). 내각은 성령의 9열매에 따라 9부서: 전권총리, 문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 농무대신, 외무대신, 사법대신, 일본총독, 육해공군사령관.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에 따라 각도를 12도로 나눴다.

경 상 도: 유다, 전라도: 요셉, 충청남도: 베냐민, 경기도: 시므온, 평안남도: 스불론, 함 경남도: 갓

전라북도: 레위, 충청북도: 르우벤, 강원도, 단, 평안북도: 잇사갈, 함경북도: 아셀, 황해 도: 납달리

그 후 황유화와 분열한 박동기는 시온산성일제국으로, 황유화는 시온산 예수교장로회로 나눴다. 박동기는 항일과 신사참배를 반대한 고모부 조병국의사의 영향을 받았고, 신앙을 변절한 자들을 ‘음녀의 교회’라 부르며 자신들은 주님을 맞을 준비를 갖춘 흰 옷 입은 백성이라 주장하였다. 박교주는 ‘십자가 영광의 신비체험’을 주장하며 주님재림 때 성령의 은사로 성도가 변화하여 공중휴거하고 부활성취의 예표라고 시온산인 <대구 팔공산>에서 성도들을 함께 묶어 주의 재림을 두 번씩이나 기다린 시한부 종말재림의 첬번째 뿌리를 나타냈다. 그들은 1945년 5월 일본경찰에 <이단>(일제에 반대조직)이라 하여 감옥에 체포되었으나 해방을 맞아 풀려 나왔다. 1946년 12월26일 박교주의 계시에 의해 남녀 16쌍이 합동결혼식을 거행하였으니 통일교 문선명의 합동결혼식의 뿌리임이 확실하다. 1948년 4월에 청송일대의 청년교인들이 교주를 반대하자 경북 경산군 안심면 동내동으로 이주 후 10월 가정방문 중 ‘심령검사’를 실시하여 교세를 만회하였으며, 그 해 12월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집단 나체예배’를 경북 의성에서 드림으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교주 박동기는 계시를 받았다고 명령하여 1959년 교단 본부를 경주시 황성(현 본부)으로 옮기므로 내분이 일어나 1960년 동생 박한기와 간부 양하우 등 요직자들이 교주의 일방적 명령과 교리ㆍ법규ㆍ조잡한 성경해석의 반대를 충고한 후 탈퇴하였다. 박동기는 시온산 새노래와 자작한 찬송가, ‘성삼위통역책1.2.3권’등 10여권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은 첫 번째 시한부종말 재림이단이요, 첫 번째 나체예배, 첫 번째 합동결혼식을 드려 현금의 이단들의 뿌리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항일 민족주의와 신비주의’로 인한 이단교주 단체였다.

 

11. 황국주교주의 피가름ㆍ목가름

 

1933년 만주 간도의 용정중앙교회를 다니던 청년 황국주가 백일 산기도 중에 특별계시를 받았다며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예수님처럼 꾸미고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기도하던 중 자신의 목이 잘리고 예수님의 목이 자기에게 붙었다는 ‘영체교환’이란 황당한 주장을 할 때 장로였던 아버지가 젊은 아들 앞에 엎드려 ‘오 주여’경배하니 그의 누이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간도에서 돌아다니며 ‘머리도 예수님의 머리, 피도 예수님의 피,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 전부 예수화 하였다’고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한 이단교주였다. 그는 새 예루살� 성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는데 그곳은 본국 경성(현, 서울)이라고 하며 출발하자 그의 부친 황장로와 누이들, 처녀, 젊은 부녀자들 6, 70여명이 가정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안주노회에서 조사단이 왔을 때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와서 남ㆍ여간의 성문제를 초월하였다.’함남 삼호교회 부근에서 본 일을 무주리교회 조승제목사는 말하기를‘삼호교회 부근에 와 보니 남녀가 섞여 6,70여명 정도의 무리들이 예배당 그늘 밑에서 피서하고 있었다. 그 중 10여명은 예배당 유리창 밑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누워 있었는데 그들의 혼잡한 모습은 일종의 난류(亂類)들 같이 보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혼숙(混宿)을 하였는데 ‘나는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황국주는 호언장담하며 여행도중 젊은 남녀 추종들과 함께 난잡하게 생활하였다. 그는 성의 도취를 ‘완전에의 첩경’이며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 신탁이라 하였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화신을 구경하겠다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평양에서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가는 곳곳마다 집회를 열어 자신이 ‘영체교환’된 예수’라고 주장하므로 장로교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는 서울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 ‘목가름과 피가름’의 교리를 가르치며 혼음하였다. 이것은 통일교 문선명교리의 뿌리이며 한국교단의 원흉이라고 부fms다. 그 후 그는 운산 모 유치원 보모와 큰 죄를 범하고 도망하였으며, 말년에 추종하던 여자 둘을 첩으로 술장사를 하다가 1952년 가을 이 황당한 교주는 죽고 말았다.

,

12. 김백문교주와 이스라엘 총회

 

1) 김백문의 이스라엘 기도원:

김백문은 1955년부터 80년 중반, 한국을 휩쓸었던 박태선전도관(후에 천부교로 개칭)과 1960년 초부터 2천년 현재까지 한국 교계와 사회 뿐 아니라 세계에 물의를 빚은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개칭)의 뿌리이다.

김백문(金百文)은 1916년 9월 4일(음력)에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경북 칠곡에서 자라 일제시대 그에게 있어서 신앙적 전환점인 대구의학 전문학교 4학년 여름방학 중에 수련의 실습 차 함경북도 청진도립병원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김남조노파를 알게 되어 은혜를 받은 후 학교마저 중퇴해 버리고 신비주의 운동을 하게 되었다. 김남조 여인의 소개로 김백문은 원산 이스라엘 수도원장 백남주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것은 1930년대의 발광적인 신비주의자들의 부흥집회에서 받은 감화요, 자신의 결단이었다.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이스라엘 수도원을 차려놓고 1944년부터 1946년까지 3년간 신비주의 기도원을 운영하였다. 이때 상도동 지교회 책임자는 방호동(方好童)이란 사람이었고 영등포 신길동에 살면서 백수건달 생활을 하고 있던 문선명을 위해 본처 최선길의 모친이 신접살림까지 차려주었다. 문선명은 김백문의 상도동 지 교회를 드나들면서 그의 주장과 교리에 심취하였고 심지어는 문교주가 그의 처였던 최선길에게 권하여 김백문으로부터 혈통복귀 의식을 받으라고 했으나 김백문이 최선길이 보통 여자가 아닌 것 같고 자칫하면 문제가 될 것 같아 복귀의식을 하지 않고 보냈다고 한다.

김백문은 서울, 인천, 대구지방에서 소위 이스라엘의 회중을 모아 "이스라엘 총회"를 만들어 제사장이 되었다. 정능의 기독교 청수교회의 담임자인 박일환에 의하면, 김백문은 신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의 사람이란 김백문은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하여 중병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포교지인 청수교회는 매 주일 불과 20명 내외의 추종자들이 모여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통일교의 문선명과 전도관의 박태선의 이단집단들은 사회와 기독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기이한 현상이며, 또한 우리나라 기독교회 계통의 이단종파의 역사적 계보를 말해주고 있다.

김백문의 첫 저서는 “성신신학"을 쓴 것으로 1954년 3월 2일에 발행되었다. 본서의 내용은 요한복음 1장부터 17장까지를 이용도식으로 풀이한 것인데 주관적인 신비체험을 성경의 교리들에 합리화시킨 것을 말한다.

2)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통일교 원리강론 뿌리

김백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새 종교의 원리로 인류의 구원도리라는 "기독교 근본원리"란 방대한 저서를 1958년 3월 2일에 내놓았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을 만 3년간씩 3번에 걸쳐서 임상학적 실험과 심령학적 체험을 통해서 9년간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말한다. 이 "기독교 근본원리"는 통일교의 "원리강론"의 뿌리인 것이다.

첫째, 기독교 근본원리의 이원론적인 구조이다.

김백문은 인류역사의 근본적 기원문제를 인류의 창조와 타락의 상대적 관계로 보 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와 타락으로 원인한 복귀의 원리를 제창한 것이다. 그는 창조원리에서 신관문제를 취급하며, 타락원리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근본유대와 그의 악 령정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복귀원리에서는 양자의 원인원리로 말미암은 해결과 결 과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김백문은 이것은 만인종교의 유일한 원리요, 만고 진리의 원칙이라고 자찬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수렁의 범신론적인 이원론에 빠져 창조의 신과 타락의 신을 주장하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였다.

둘째, 기독교 근본원리의 내용은 혼합주의이다.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는 창조원리, 타락원리, 그리고 복귀원리로 일관된 성경 사상 체제를 주장한다. 그 내용은 동양철학의 역학사상, 과격한 신비주의, 그리고 에로스적인 성의 원리로 혼합된 것이다. 그는 요 17:5을 근거하여 창조원리에 있어서 창조(창세) 전 신관문제를 위시하여 창조역사의 신관문제, 그리고 창조 후 피조세계와 신관문제를 분해하여 언급하는 일종의 삼일론적 시대론의 구분이며 신의 과정적 변천사역을 뜻하고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는 피조물이 있으니 조물주가 있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창조의 세계가 없으면 조물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법이 된다. 그리고 창조사역의 신문제는 피조인간의 원상적 본질문제를 통해서 밝히며, 만물이 조성원리를 유추해서 신을 정의한다. 부위신성인 의의 본격, 자위신성인 애의 본격, 그리고 성령신성의 선의 본격이다.

인간은 2성 성상의 존재자이므로 신 역시 2성성상의 중화적인 존재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교의 원리강론에는 더욱 잘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만물의 조성원리를 볼 때 우주만물은 태초부터 생존현실에 있어서 천리법도로 말미암아 생존지속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야의 윤회법칙이요, 선악의 상대법칙이요, 그리고 음양의 상응법칙의 상대적 관계로서 조성되고, 유지되며, 또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을 인간과 자연의 만물유생론(Hylozoism)으로 보고 있고 하나님을 세계의 존재형식으로 보는 범신론을 주장한다.

우리는 김백문과 문선명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의 이상세계의 복귀로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자로서 성육신하셨으며, 새 창조의 역사를 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신 것이다. 그의 초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구현되었고, 영광의 재림주로 오실 때 완성을 볼 것이다. 인간 구세주는 교주요 이단인 것이다.

셋째, 기독교 근본원리의 타락원리이다.

김백문은 타락원리에 있어서 영적세계의 타락, 악령문제, 선악과의 정의, 그리고 인류 조상의 타락을 일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주제적인 흐름은 에로스적인 성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세계의 타락, 즉 천사의 타락은 하와의 혈연적 타락으로 본다. 영적 피조물인 천사 루시퍼가 하와의 아름다움과 그 여자의 육체를 부러워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하와가 천사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백문은 선악과를 사랑의 결정체요, 사랑의 조화를 이룩하는 섹스적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일부 자유주의 계통인 마이어, 알포드, 그리고 발렌벨그 등의 주석가들도 아담과 하와의 타락적 상태를 보고, 타락을 성적 요인에 귀착시키고 있다.

천사가 간음으로 타락하였다는 성경구절이 있다고 반증을 유1:6-7을 내세운다. 그러나 본절은 비유적으로 천사를 말하고 거짓 스승들을 뜻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체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그들의 눈이 열렸고, 벌거벗음을 알았기 때문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운 것이다. 결코 천사와 육체적 관계가 아니다.

셋째, 기독교 근본원리는 복귀의 탕감적 회복론이다.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는 복귀의 탕감적 회복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복귀원리의 주제요, 기독교 근본원리의 결론이다. 그는 복귀원리의 성경적 근거를 롬 11:36에 두고 있다. "이는 (대개)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주에게) 돌아감이라 (귀하나니) 영광이 (영광은) 그에게 (주께) 세세에 있으리로다 (있나니라)." 김백문은 괄호안의 성경구절을 취했고, "돌아감이라, to him"에서 복귀원리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삼위일체의 창조적 사역을 말한 것이다.

김백문은 삼위일체의 주권적 창조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창조가 아니고, 창조의 주께로부터 이탈한 역사적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종의 윤회설로서 창조, 타락, 그리고 복귀의 과정적 순환론이다.

복귀원리는 인간복귀 혹은 인간회복 또는 인간완성을 시도하는 자력적 구원이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완성이라 했고, 인간완성은 신앙인격의 형성을 말하며, 그것은 인생관 수립을 뜻했다. 이와 같은 자아의 복귀는 피조인간의 타락된 처지에서 조물주와의 생명관계가 되는 배신한 그 일의 회복이라고 했다. 이것을 임마누엘 종교의 원리라고 하며, 이 원리는 인간의 영혼구원(영적구원)과 육체구원(현실구원)을 복귀방법으로 이룩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영적타락은 영적복귀로, 육적타락은 육적복귀로써 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복귀방법의 구체적인 것은 인류타락의 방법에 대한 역행적 진행이다. 다시 말하면 영물인 천사 루시퍼와 하와의 혈연적 관계를 같은 방법으로 복귀하는 것이요, 그리고 하와와 아담과의 육적타락을 같은 원리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조일석에 되어지지 않고 5천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수반되는 것이 기독교의 재 선교문제라는 것이다. 복귀원리의 주안점은 내세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지상의 에덴복귀요, 기독교의 우주적 종말을 의미하는 내세가 아니다. 그러므로 복귀원리는 인간복귀의 윤회적 순환론이며 신의 이상세계의 지상천국론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인격적 대속을 혈육의 성체로 보는 영체교환으로 범성욕주의적 성 행위이다.

김백문은 창조 타락, 복귀 등의 삼일론적 시대론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적 이원론이며 신비주의와 동양철학의 역학사상, 그리고 에로스적인 섹스주의를 혼합한 혼합주의이며, 세상과 인간복위의 탕감적 회복론으로 전도관과 통일교의 뿌리다.

 

   

 

Ⅳ부. 신사참배와 교단분열

 

제1장. 신도와 신사참배의 역사

1. 신도(神道)

 

1930년 중국 全土를 차지할 목적으로 일본 자국의 자성에 단합과 그 목적에 모든 힘을 집약하기 위해서 神道를 부흥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이 神道란 일본 국민이 아마테라스라는 海神의 자손임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신사에서 자기들의 천왕들 혼에게 사정을 호소하며, 또한 소원하는 바를 기원하고 예배를 드렸다.

1935년 가을 숭실 전문학교장인 George S. McCune박사(윤산온)와 숭의 여자고등학교장인 Miss.V.L. Snook에게 60일 기한 내에 신사에 경의할 것을 총독부에서 명령하였다. 이 신도의식에 두가지가 기독교와 완전히 다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로 역대 천왕에게 (魂)경배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일본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애국적인 의식이다.

이것을 양해하고 참석하기를 종용한 사람은 일본 외사부, 서울지부에 근무하는 기독교인 太田(오다)가 교회 지도자를 강요하였다. 평양의 27명의 한국인 목사들 중 한 사람을 빼놓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 모인 27노회 목사86인, 장로 85인, 선교사 22인 도합 193명이니라고 서기가 보고하였다. 총회장 홍택기목사 사회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이다’고 하여 성경을 모독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불법가결을 단행하였다. 총회장이 ‘가’만 묻고 회원의 이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 묻지 않고 가결하며 솔선하며 신사에 참배하였다. 회장이 경찰의 지시에 따라 신사 참배를 의결할 때 선교사단에서 협의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방위량목사의 대표 발언이 있기도 전에 경관의 저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율법과 교회의 헌법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의사록에 기록하시오」라고 반대하였다. 이때는 참으로 비참한 시기였었다. 실로 한국 교회의 수난기였다. 감옥에 수감당하며, 순교하는 교역자가 성도들과 같이 많아졌다.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 당하였으며, 2천여명의 성도와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1936년 Mission학교를 폐쇄하고 1938년에는 평양, 연희전문, 정신학교까지 폐쇄하였다.

 

 

□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一死覺悟 설교 時

「 옥중 명상 」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순교 기념관 거울에 새겨진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를 간직하자.

 

2. 신사참배 반대 역사적 뿌리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고 온 총독을 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일본총독부의 거짓으로 꾸민 음모다. 배일사상이 강한 선천, 정주, 평양의 기독교와 학교, 교회와 성도 말살 정책이며 신민회를 해체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당시 정부 신안학교 교무 주임의 반대로 천황 어진영 앞에 절문거절하여 7년형 언도 받은 것 처음 뿌리.

신성학교 교장 매퀸 박사가 권총을 주어 선천역에서 살해 하려 하였다는 음모로 선천 기독교 인사와 학생 600명 검거함. 신민회 간부인 장로교인(97명), 감리교인 중 105인을 기소,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선교사들 - 윤산온, 나부엘, 마팻, 언더우드, 해리스-의 거센 항의와 출옥운동으로 석방되었다.

1905년 동아일보 9.25일 사설에 일본의 3중 神器를 우상 숭배라 규정하여

1924년 10월 충남 강경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반대, 학생들 정학시킴.

1932년 9월 일을 계기로 강요시작, 만주사변 권몰장병 위령제 학생참배. 기독교 학 교가 거부-국민의례만 참석키로 함

1932년 9월 제21회 장로회 총회는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로 가결.

1935년 11월 14일 평남 도지사가 평양 신사참배를 기독학교들에 요구하자 안식교 순안 의명중학교장 H.M.Lee가 허락하여 첫 번째 신사참배 학교가 되었다.

두선교사 매퀸과 Snook는 파면, 귀국 조치 하였다.

1940년 안동시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기본 방침을 결의함

 

 

제2장. 조선 혁신교단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1. 조선혁신교단

 

1930년 9월 3일 감리교의 양주삼총리와 1938년 9월 9일 27차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다. 천주교는 1936년, 장로교는 1938년 총독부의 탄압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감리교측 김인영, 이동욱, 심웅섭목사와 장로교측의 전필순, 윤인구목사와 같은 친일파, 자유주의자들이 뿌리가 되어 1942년 3월 조선혁신교단(이후 조선감리교단)을 세웠다. 이에 1대 총리로 채필근, 2대 김응순, 3대 정춘수였다. 1945년 7월 19일에는 27장로교 대표, 21감리교 대표, 구세군, 소교파 5곳 대표들로 하나의 통합교단을 만들었다.

조선 혁신교단은 4복음서만 보게 하였다. 구약성경 중 출애굽기와 메시야의 언약이 분명한 이사야서 뿐 아니라 바울 서신과 계시록 성경모두를 설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사도신경도 찬송가도 삭제한 곳이 많았고 예배 시작 전 천황의 사진, 전몰용사 영혼에게 묵념, 황국시민서를 제창하였다. 성직자는 강단에 오를 때는 일본 군복을 입고 설교와 찬송가를 일본말로 하라고 명령 받았다. 힘없는 민족의 비극적인 모습이었다. 혁신 교단은 변홍규목사의 반발로 「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하였고,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을 혁신교단신학교로 개편한 것이었다고 한다.

2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변경 1945년 7월 29일(8월 1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 교단 대표들을 모아 ‘한국교회’를 빼앗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 하여 일제 탄압의 극치를 보였다. 또한 2주일 후 1945년 8월 17일 전국 교회 지도자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저들의 망동을 8월13일 원자폭탄 투하로 파멸시켜 버렸던 것이다.

 

 

제3장. 신사참배와 한국장로교 최초의 분열

 

1.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교단)

 

1943년 5월 7일 제31회 총회에서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변경시켜 버렸다. 또한 1945년 8월 1일 종교 단체법에 의해 세워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 하여서 모든 교파를 단합해 버렸다. 해방의 기쁨을 맞자 1945년9월4일 평양노회가 산정현교회에서 개회하여 신사참배의 죄악과 우상숭배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3일간 금식하며 부흥사경회를 갖고 순교하신 주기철목사와 50여명의 순교의 신앙을 본받고, 한상동목사를 중심하여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목사들은 계속 기도와 논의하여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목사,장로) 모두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 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둘째.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셋째.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넷째. 교회 재건에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전국 각 노회 또는 지 교회에 전달하 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다섯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원칙이 발표되자 11월14일 평북 6개 노회, 200여명은 출옥한 이기선 목사와 신사참배를 피해 만주 봉천신학교의 박형용박사를 강사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해방감사 및 부흥사경회, 교역자 퇴수회를 가졌다. 이때 박형용 박사가 교회 재건원칙을 발표하자 신사참배를 불법으로 통과시킨 증경 총회장 홍택기목사와 친일파 목사들은 “ 신사참배의 죄의 벌칙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파렴치하게 소란을 벌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극단파인 북쪽의 김인희, 남한의 최덕지 여전도사와 월남한 한부선선교사, 한상동목의 고신파, 또한 혁신복구파인 이기선 목사의 세 분파로 나뉘었다. 최덕지전도사는 신사참배하고도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견책하며 양떼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재건운동의 방법으로 ‘밖에서 개혁하자’하는 방법과 한상동목사의 ‘안에 들어가 개혁하자’라는 차이로 분열된 것이다.

경남지역에서 최덕지전도사의 주도하에 1948년 2월 18일 부산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임시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21교회 대표 72인으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를 세웠으나, 1952년 5월 13일 부산시 소정동의 재건부산교회에서 ‘남한 지방회’로 발전하고, 1958년11월10일과 12월 2일 월남한 재건교회와 연합하여 부산 영주동교회에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대회’라는 명칭과 신학교까지 세우기로 정하였으니 첫 번째 장로교회의 분열이었다. 이 발기회의 「우리의 선언」내용은

가. 신념 : 진리는 종국적 승리다

나. 주장 : 무너진 재단을 다시 세우자

다. 실천 : ㄱ. 철두철미 회개하자

ㄴ.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ㄷ. 불의와 위선을 절교하자

. 이들의 총회 조직목표와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께 범죄하여 신앙과 도리에서 파괴되었으므로 오직 남아계시는 과거 현재의 신앙 선배들의 순교하시기까지의 충성된 신앙생활을 계승하여 재건운동에 힘쓰는 중략.....

사도시대 교회 신앙으로부터 계승하여 받은 그 신경과 과거 은혜시대 한국 초대교회의 신조와 주후 1930년 평양신학교 교수들에 의하여 성명한 신앙고백과 같이 현재 재건교회의 12신조 신앙고백과 아울러 신앙생활 실천강령을 성명한다고 기록하였다.

재건교단의 정화와 순교적 신앙은 한국교회가 계승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제 하의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고 고백하는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고 정죄하며 배격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순교하였던 모습을 기리며 도량 큰 용서의 복음을 실천하여야 한다. 더구나 사분오열로 분열하는 추한 모습은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2. 재건 단독교회(혁신복구파)

 

신사참배파 목사들의 완악한 태도에 이기선목사는 도저히 저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북, 황해도 지방의 30여 교회와 1949년5월에 “혁신복구파”라는 독립노회를 만들어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강경하였다. 이들은 끝까지 순교의 신앙을 지키고 김일성 공산당에 핍박을 당하면서 월남하지 않았다.

 

3.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신학파(고신교단)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목사 등은 옥중에서 출옥한 후 건전한 신학의 재건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목표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모인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목사는 신사참배의 철저히 회개하는“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 한다”는 선언을 하고 퇴장하는 사태가 생겼다. 또한 6월에서 8월까지 만주 동북신학교 교수 박윤선박사를 초청하여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월 20일에 부산 진 일신여학교 교사에서 설립자에 주남선, 한상동목사와 교장에 박윤선목사로 고신신학교 창립개교를 하였다.

1947년 4월에 송상석목사가 2차 왕복 끝에 봉천에 있던 박형룡박사를 모시고 왔으며 그해 10월 14일 고려 신학교는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고 건전한 신학을 그 배경으로 한다는 조건에 합의를 보고서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그 해 12월 49회 경남노회에서 한상동목사는 진주에서의 탈퇴선언을 취소하였다. 한편 박형용박사는 신학교가 총회 승인을 받고자 한다는 뜻을 밟혀 노회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시작은 송도 앞 바다에서 신사참배를 강행한 김길창목사가 1949년

3월8일 그가 시무하던 항서교회에서, 또한 권남선목사가 또 다른 경남노회를 문창교회에서 개최하여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형룡박사는 한상동목사와 신학교 운영면에서의 충돌로 1948년 4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며, 1949년 4월 19일 조선 신학교를 이탈한 학생들과 함께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문제된 신학교 운영면이란 박형룡박사는 Machen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신학교 재건에 있어서는 4개 장로교회 선교부(미국 남북, 호주, 카나다 장로회 선교부)와의 협력을 구할 때에 Machen파 한부선교사는 비협력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때문에 총회와 Machen파 선교사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1949년 제35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 교회는 한부선교사 일파와 상관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신사참배 거부로 출옥한 목사들과 함께 총회를 떠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제36회 총회에서 실제적으로 절연 당한 경남 법통노회는 1년이 지나도록 총회의 태도가 변함이 없자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제 57회 진주노회 때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그날 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으니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설립한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 교파적으로 흐름 에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장로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함이었다. 그 목적은 ‘전통적인 예수교장로회를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 통괄하며 개혁주의 신앙운 동을 위하여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이었다.

신사참배로 야기된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은 재건교단과 고신교단 뿐 아니라 법통총회라는 교단을 만들어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한국장로교회의 비극이요, 통탄할 시대적 상황이었고, 신앙의 포용성 문제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제4장. 감리교단의 분열

감리교단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는 심각하였다. 1945년 이규갑, 변홍규, 이윤영목사 등을 중심한 일제에 항거하고 투옥되었던 “재건감리파”들은 3부 연회를 조직하고 1946년1월 서울동대문교회에서 다시 모였다. 참석한 교회가 70여개의 적은 수였으므로 미약하였으나 서울의 큰 교회들 대부분은 친일파들로서 교권을 잡고 있었으며 “부흥파”인 강태희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서로 분열하였다.

 

   

제Ⅴ부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교단분열 뿌리

 

한국 초대 선교사들 중 케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일본의 청산신학원에서 유학한 진보주의적 한국목사들도 자유주의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마침내 1934년과 1935년의 총회에서는 장로교 보수주의 사상을 공격하는 다섯가지의 의제가 상정되었다. 그것은 창세기 저작설과 여성의 권리, 적극신앙단과 기독신보, 그리고 아빙돈 성경주석에 관한 것이었다.

1. 모세의 창세기 저작권 부인

김양선 목사가 쓴 「한국 기독교 해방십년사」에 보면 서울 남대문교회에 시무하는 김영주 목사가 모세가 쓴 것으로 되어있는 창세기를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장로교 내의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영주 목사는 일본의 자유주의 계통 신학교인 관서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캐나다 선교사인 윌리암 스캇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김영주 목사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고등비판적인 해석과 자유주의 신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Roye Shearer선교사는 브라운 박사의 1930년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열운동을 인용하여 ‘몇가지 이유로 보아서 총회의 분열이 임박한 것 같이 보였다’고 기록한다. 그는 한국 서남부 지방에서 교회의 분열을 위협한 요인으로 3가지 문제를 들고 있다.

첫째, 총회 유권자의 대다수는 북부지방에 있었으며 남부지방의 장로들 가운데는 북쪽 사람들이 총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 독립운동 이후 정치적 권력을 지닌 자들이 교회의 분파를 파급시키는 데 영향 을 주었다.

셋째, 해외에서 훈련을 받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과 본국에 있으면서 비교적 교육을 적 게 받은 목사 및 평신도들과의 사이에 생긴 분열이었다고 지적하였다.

민경배교수는 한국 특유의 민족교회를 형성치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것은 3가지 조건 때문에 실현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모 교회들의 모호한 태도였고, 이들이 적극 연합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각 교단의 교리와 연합을 구분하며 본국 교회와 단절된 한국 선교사들의 태도요 셋째, 선교사들은 선교회가 아닌 교회 곧 민족교회가 결정할 성질의 것을 그 때에 문 제시 할 수 없다는 정책적 양보가 거기 있었다.

또한‘한국 기독교회’의 문제성은 장로교 독노회의 설립 과정에서 명백하게 유형적 인 문제점이 셋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하나는 신경과 정치 헌장이다. 이 ‘12신조’의 특색은 그 강직한 칼빈주의적 경향이며, 교회정치도 웨스트민스터 정치규범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두번째는 선교사들의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와 거만함이었다. 治理面과 선교사들의 소속성에서 양면을 나타내었다. 세번째, 선교사들의 신학교육 정책에 있었다. 1896년 남장로교회의 W.D. Reynolds선교사가 규정한 교육 정책 내에 그 골격이 있다. 그 큰 의미는 1) 목사는 영적인 경험을 가진 Holy ghostman일 것 2) 성경말씀을 핵심적으로 가르치되. 기독교회 중심의 역사와 진리를 철저히 교수 할 것 3) 목사의 교육 정도는 한국 교인의 지적 수준에 상응하게 할 것인지, 지나치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거나 서로 어울리지 아니할 정도로 높은 교육은 시키지 말 것 등이다.

위와같은 민교수의 주장은 민족교회 형성을 아쉬워하는 인간적 염원이며, Ecumenical 자유주의 신학자의 신조로서 선교사들에게 부정적이며 비평적인 태도이다. 「한국교회 비정치화」의 장에서 민교수는 ‘한국교회는 한국 국민이나 국가의 의식 중추로 자처하고 그곳에서 대외적으로 그 얼을 가꾸어 그 얼의 소재와 스스로 동일 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복음과 경건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한 말도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던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 교회의 비정치화를 감행할 획책을 꾸미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예증을 알렌 선교사와 언더우드를 들었다. 조약문에 전교의 관용이 명시되지 않았는데 계속 어디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조약문에 의료사업과 교육에만 당분간 치중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고래고래 소리치는 감리교인’이라는 별명과 ‘장로교 선교부의 감리교 전도자’라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핀잔하였다.

Gale 선교사는 알렌선교사를 정치에 아부한다고 말하며 ‘내 생각에는 이 알렌의 이름을 선교사의 명부에서 아주 빼버려야 마땅하다’고 서슴치 않았다. F.A.Mckenzie선교사는 ‘미국과 영국의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 하려고 할 때 그 지원자들은 반드시 데까당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만했다. 왜냐하면 (똑똑하면 사람들을 선교사로 내보내면) 그 보내는 나라와 교회는 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과장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사의 성격차이는 크게 분열의 이유라 내세울 수는 없고 선교구역 배정문제는 Roye Shearer의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에 징조(요소)들을 집약해 보자.

첫 번째, 선교 공의회는 먼저 신학적 배경을 달리한 선교회의 모임이었다.

두 번째, 선교사들의 신학교육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등단이다.

세 번째, 정치와 사회적 요소로서 일본 군국주의의 강압적인 신사참배로 인한 분열.

네 번째, 신학노선 문제이다. 인간적 술수와 교권, 지방색, 분파의식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신학계보와 공의회 신학교육과 미국장로교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다음 문제들을 한 가지씩 서술해 가면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계보를 알아보자. 한국교회 신학계보의 근원과 분열 원인들을 살펴보며 우리 신학의 시조와 근거, 역사성, 전래된 사상적 배경과 인물, 투쟁사, 특성을 재정리하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의 신학을 디모데가 계승하였고,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신앙의 역사성을 실천하자.

 

   

근세; 해방 후 한국교단의 재건운동

1945년 해방되고 3주 후인 9월8일 미군사령관 핫지가 서울에서 군정을 시작하는 그 날, 새문안교회에서 친일파인 장로교 김관식목사와 감리교 김인영, 박연서목사와 동조하는 목사들이 “남부대회”라는 단일 교단총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출옥한 감리교 재건파의 탈퇴로 성사되지 못하였고, 다음 해 9월3일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대표들이 모여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하였으니 KNCC 곧 지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뿌리인 것이다.

 

 

 

1. 신학사상의 문제와 분열

Harvie M. Cann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 1945년까지 ‘1938년 이전의 자유주의 초대 선교사들까지 더듬어 올라 가야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이 땅에 자유주의를 소개한 것도 그들임을 알아야 한다’고 전재하였다.

김양선교수와 전성천박사는 ‘그 영향은 한국의 선교사 공의회가 시작할 때 벌써 있었다고 유래를 말한다. 특히 1898년에 한국의 선교사를 보낸 카나다 장로회의 신학문제’라고 하였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William Scott선교사가 선교회 회장이 되었으며 또한 김관식, 조희영 등 두 한국목사가 미국으로부터 유학 후 교육사업에 가담하였다.

「이때로부터 저들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 사상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즉 보수와 자유 양 신학사상의 충돌은 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목사들이 카나다 연합교회의 신학사상을 따랐다」라고 김양선씨는 기록하였다.

Samuel A.Moffet와 Charles A.Clark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중 소수가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것이다.

1932년 1월호에 미국의 종교 출판물은「한국복음주의동지회」의 결성이 선교지역 내 에 현대주의 대두로 인하여 조직되는 것임을 기재하였다.

세 번째의 기초 영향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돌아온 한국인신학자들이다. 「비록 자유주의의 세력이 아직도 소수이기는 하나, 그들이 끼치는 영향은 저들의 적은수를 능가하였다. 비교적 잘 훈련된 이 무리들은 점차적으로 교회와 신학교를 장학함과 동시에 교육사업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라고 전성천박사는 지적하였다. 위와같은 시대적 신학사상은 평양신학교의 폐교(1938년)이전과 이후의 문제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분열로 나타난다.

1) 평양신학교 폐교 이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분열뿌리

앞에서 카나다 선교사들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와 김관식, 조희영 등의 유학생 중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입국한 때부터 문제는 발생하였다. 이와같은 선교사들(자유주의 사상자)의 영향에 의한 한국교인들에 적용되는 문제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6년 함흥 교역자 수양회의 자유주의 대두:선교회 공의회에서 돌려가며 주최하던 수양회가 카나다 선교회에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당시 소속해 있던 본국 장로교회가 자유주의적인 감리교회와 통합된 「연합 선교회」로 바꾸어지자 Robf선교사는 장로교회의 신조와 전통을 고수하기 위하여, Young선교사는 일본으로 가서 재일 교포에게 선교사업을 힘썼고, Robf선교사는 평양으로가 북장로교 선교부와 합세하여 평양신학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조희영목사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강의할 때에 장도원목사와 이원균, 한기춘 등이 사과를 요구하며 강단에서 끌어 내렸다.

김의환박사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함경도 출신이 많다는 것도 이와같은 인간관계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당분간 함경도 내에서만 국한되었던 문제로만 그쳤다. 그러나 카나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자유주의 신학화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먼저 인물양성을 시도했다. 그들은 유망한 후진들을 카나다와 미국으로 유학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先見之明이었다’라고 강조하였다.

간하배선교사는 ‘한국교회에 논쟁을 폭발시킨 중심인물이 김재준목사인데 그는 카나다 선교사들에게 많은 끊지 못할 줄에 얽매인 한국 자유주의자들 중의 지도적인 대표자이다’라고 말하였다. 두 번째,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1934년 1월에 김재준목사와 A. F. Robf선교사는 신학지남 편집간사로 수고하였다. 이때에 신학지남 편집인은 남궁혁박사인데 그는 김재준목사와 친분이 깊으므로 평양신학교수로 채용되지 못했으나(박형룡박사의 반대) 신학지남에 일을 보았다.

보수와 자유 두 신학의 필연적 충돌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가운데 1934년 1월에 발표된 신학지남의 권두언을 계기로 일어났다. 그는 ‘신학을 지금까지의 보수신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한국적인 신학선교사의 관련을 떠나서 우리들의 새로운 신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한국적인 새로운 신학 건설을 제창’하였다. 김재준목사는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라는 논문발표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을 ‘동정녀’에서 ‘여자’로 고쳐버렸다. 그래서 이사야연구에서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을 이제는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까운,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해석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표적’을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덧붙여 지적함으로 노골적으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주의에 대한 도전을 하고 나섰다. 그때에 편집위원이었던 박형룡박사는 이러한 사실에 불만하여 편집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신학지남과도 관계를 끊어버렸다.

세 번째,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 : 1934년 제23회 총회에 보수, 자유신학적 싸움이 냉전에서 열전으로 그 모양을 바꾼 첫 케이스를 다루게 되었다. 이 두가지 표면화에 자유주의 신학이 분란의 주제이다. 창세기의 저자 문제는 서울 남대문교회 김영주목사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설에 대한 강병주목사의 문의에서 문제화되었다. 여자의 지위문제는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목사가 쓴 ‘장로회 전통에 올리는 말씀’ 중에 여자가 종용히하고, 가르치지말라는 것은 2000년전의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다라고 진리의 성서권위에 도전하므로 자유주의사상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케 하였다. 박형룡박사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설은 장로교 신조에 위반한 것이라고 공포하며, 여권문제는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네 번째, Abingdon 성경주석 번역사건 : 1935년 9월 제24회 총회가 평양서문외 예배당에서 회집되어 황해 노회장으로부터 헌의된 유영기목사의 국제신생아 발행인 Abingdon 성경번역으로 자유주의신학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길선주목사는 동 주석에 대하여, 그 집필자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자인 것을 지적하고 동 주석의 번역자를 책임 규명하였다. 그들은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의 자유주의 목회자들이었다.

박형룡박사는 주석의 내용을 간략히 묘사하였다. ‘모든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집대성이라 할만하였다. 동서는 성경을 과괴적 고등비평의 원리에 의하여 해석하였으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진화론의 선입견을 가지고 고찰하였다’. 또한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인, 도덕적 감화의 속죄론, 예수의 육체적 부활의 부인, 천국은 유형한 것이 아니요, 개인의 선한 생활과 사회의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고 말하였다. 다섯 번째, 積極 信仰團문제 : 1927년 신흥우가 Y.M.C.A총무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연구회라는 반 선교사, 반 보수운동(Positive Faith Society)을 1932년 6월에 조직하였다. 구성은 장로교 8명, 감리교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필순목사의 의견에 따라서 ‘積極이란 말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또한 신앙선언이나 강령인 목적은 신학적인 것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되어있다. 1935년 제24회 총회는 ‘적극 신앙단“의 신앙선언은 우리 장로교회의 신경에 위반되는 것임으로 그 적극 신앙단은 우리 장로교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결의하였다.

 

2) 평양신학교 폐교 이후; 조선신학교 설립과 장로교회의 분열

1938년 평양신학교의 폐교는 신사참배 때문이었다. 일본군제국의 무력과 탄압으로 인한 불상사였다. 간하배선교사는 한국교회가 수난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혼란의 변천이 빨리 왔다고 주장한다. 일본 총독부의 하수인격인 친일파들은 공포와 혼란을 이용하여 그 당시 조선의 모든 분야를 인도한 선교사들과 국내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없어짐으로 공석이 된 주도적인 임무를 채우려고 정치, 교육, 경제, 예술 뿐 아니라,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인 친일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한국장로교회의 모든 권세를 휘어잡았고, 선교사들이 강제로 출국하는 공백을 메웠다.

1) 평양신학교 복구와 조선신학교

1938년 3월 27일 채필근목사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동년 가을 조선신학교설립 기성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영주, 차재명목사와 함께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강을 하였다. 또한 김대현장로의 거액 기부금으로 설립하여 총회에 직영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 신학교는 조선교역자의 자질향상과 지역적 고려로 설립목적을 삼았다. 그러나 이 학교는 평양신학교의 강력한 보수주의 신학을 배격하기를 원하든 사람들에 의하여 조직되었으며 또한 시작부터 그 의도가 교계내의 자유주의신학사상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지로 보였다.

조선신학교의 교수진은 모두 한국인이었으며, 한국 사람에 의하여 설립되었었다. 그런데 교수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자유주의신학 출신들로서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1940년 2월 김관식, 김길창, 이승길 채필근 목사는 서북 세력과 함께 <평양신학교> 복구를 신청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평양선교리 동덕학교에서 개교하였다. 김양선 목사는 “평양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복구하여 출발하였다가 일본 황도정신으로 기울어진 후, 공산주의에 이용되어 마침내 폐교되고 말았다고 서술하였다.

1940년 일본군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1939년-45년, 6년간 뿐 아니라 1931년 만주사변 이전부터 아시아 패권을 부르짖고 1차 세계대전도 주관), 또다시 전쟁을 일으켜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아시아 뿐 아니라 온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참사와 비탄의 불을 붙였다. 일본군제국은 주변국들을 정복하려고 1940년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강화하여 창씨제도를 2월부터 실시하였고, 8월10일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켰으며, 외국선교사들을 강제로 출국(9월)케 하여 그들의 만행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강압기 때에 평양 신학교의 총독부 인준에 자극받아 서북지방의 기독교 부흥이 평양에 신학교가 있기 때문이라고 불만을 가진 기호(이남)지방 사람들이 친일파 채필근목사를 교장으로 내정하고 조선신학원을 경기도 학무과에서 1940년 4월 사설학원 인가를 받았다. 또한 감리교 협성신학교도 복구하여 일시 조선신학원에 통합하게 되었다. 그런대 신사참배까지 하면서 서울에 신학교를 또 설립할 필요가 없고 평양신학교 복구에 힘써야 한다고 채목사가 교장을 사퇴하였다. <조선신학원>은 그 당시 거금인 30만원(동산과 부동산)을 김대현 장로가 희사하여 재단을 만들고 8월18일 승동교회에서 초대원장에 김대현장로, 교수에는 김재준, 김영주, 함태영, 윤인구, 궁내창(일본인), 송창근, 김관식목사로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이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두 신학교 졸업생들은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김재준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신학을 무조건 전수하였고, 서울에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고, 선교사들이 일제히 귀국한 것은 전쟁에 의한 불가피한 사태라 할찌라도 벌써 선교사 집권시대는 지났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에 자유주의신학과 민족주의적 사상을 전개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1941년 한국교회 주체성을 주장한 조선신학원은 일본인을 이사장으로 영입하는 인본주의요 기회주의적인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1940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감리교회와 성결교, 구세군, 성결교, 캐토릭 성당도 일본 각 교단에 귀속시켰다. 일제의 앞잡이가 된 감리교와 장로교 목사들의 주도로 모든 개신교단이 1943년 <조선혁신교단>을 만들어 치욕의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사상의 감, 장 정치지도세력들은 친일파들로서 신사참배 뿐 아니라 황국신민으로 군납, 징병자원 및 계몽 등 일제의 앞 자비요,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자유주의 대표신학자인 김재준 교수만이 혁신교단을 반대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소탈한 인품으로 여러 제자 신학생들과 동료목사들이 자유주의신학의 문제점들과 폐해를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 전북지방의 교회에서 기장측의 분열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7월19일 일본총독부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장로교 대표 27명, 감리교 대표 21명, 구세군 6명, 소 교파인 5곳은 한명씩을 대표로 조직하여 일본 기독교에 예속시켰으니 해방을 한 달도 남기지 않고 최후까지 발악하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징벌을 받는 악한 표본적인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을 섭리하신 하나님께서는 일본군제국의 야욕과 박해에 빠진 한국교회를 해방시키셨다. 남과 북의 모든 교회들과 교단들이 재건되는 바닷물도 춤을 추는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한국교회와 백성! 그러나 기쁨의 감격도 한순간 또다시 쓰리고 아픔이 조선 한반도를 거세게 휘몰아 쳤다. 남북에 소련군을 앞세운 김일성과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자유민주지지 세력인 이승만과 공산사회주의 김일성 괴뢰정부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 또한 신탁통치 찬. 반의 와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1945년 11월16일 한경직목사 등이 조직한 <기독교사회민주당>과 기독학생들 5,000명은 평북용암포에서 공산당의 퇴각을 외친<신의주 학생의거사건>을 주동하였다.

1946년 6월12일 남부대회로 모인 남한장로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때의 신학교 교수에는 채필근,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송창근, 김재준, 윤인구, 한경직 등이었다. 이와 같은 분들 중에는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재준교수와 자유주의 신학자, 친일파도 있었다. 특별히 김재준교수는 일본청산학원(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자유주의학교의 출장소)에서, 또한 웨스턴신학교에서 자유주의를 수업받았다. Abingdon주석 번역위원였던 채필근, 송창근, 김영주목사 등도 자유주의자들이다. 김영주목사는 창세기 저자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앞 장에서 우리는 미국장로교회의 Princeton 신학교의 좌경화를 언급하였다. 1929년 G. machen의 Princeton 신학교 사임 후의 New Princeton 자유주의신학을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 박형룡박사는 G. Machen 지도하의 변혁과정에서 보수주의를 공부하였으나 남궁 혁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교수는 New Princeton신학교에서 자유주의신학을 전수 받았고 또한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로서 1939년 11월 김석창목사와 윤하영, 고려위, 김관식목사 등 자유주의 신학의 교수진으로 평양 선교리의 동덕학교 교사를 빌어 평양신학교가 복구되었다. 김양선목사는 말하기를‘평양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복구되어 일본 황도정신으로 기울어 졌다가 공산주의에 이용되어 마침내 폐교되고 말았다. 또한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신학으로 출발하여 마침내 자유주의신학의 확립을 달성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2) 장교회신학교ㆍ총회신학교 설립과 분열원인

앞장에서 신사참배로 인한 분열 중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서술한 바 있다. 1946년제32회 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인준한 것을 개탄하여, 박형용박사는 자유주의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도 이인식, 이재성목사를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의 재건운동이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1947년 김재준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불만을 품었던 조선신학교학생 51명이 제33회 총회에 김교수의 신학을 규명해 주도록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5월에 모인 이사회에서 김교수는 자신의 실수임을 성명서로 발표하므로 그의 성경관이 보수적인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신학교문제는 신학 때문이 아니요 교권과 지방 싸움으로 오해하도록 선전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을 키웠다.

1948년 봄 박형용박사는 개혁파 보수주의 신학을 회복하자는 평양신학교의 계승을 부르짖고 <장로회신학교>를 남산공원에 있는 신궁(신사참배) 터에 설립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우신 것이다. 또한 고려신학교 한상동목사와의 학교운영에 의견차이로 교장 박형용박사가 서울로 올라가므로 대다수의 신학생들과 교회들이 1949년 4월19일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고 총회 직영 신학교로 제35회 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또한 같은 날 서울에서 모인 제35회 총회는 이전 총회에서 김재준교수를 1년간 퇴임시켜 미국에 유학하게 하였다. 총회는 가장 중요한 조선신학교문제는 취급하지도 않고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결정하였으나 조선신학교직영을 취소하지 않고 합동하도록 공포하므로 분열의 불씨를 남긴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대 수난은 한국교회가 책임져야할 최대의 사건이요, 수치였다. 소련과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괴로운 시기에 교회가 단합하여 민족의 이념대립과 빈부ㆍ지역ㆍ 통일ㆍ정부구성 등 해결해야할 산적한 문제는 방관하고서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1년 5월25일 제36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에서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9월18일 대구에서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감부열선교사(Archibald Campbell)와 보수주의 교수들로 선출되었으며, 1953년 봄에는 남산에 있던 신사의 건물 일부를 사용하였다. 신학생들은 고려신학교와, 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뿐 아니라 월남한 평양신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본과와 예과를 합하여 무려 600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이처럼 학생 수가 많은 이유를 Allen D. Clark선교사는 지적하기를 ‘첫째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순교와 납치당한 결손 교역자와 새로 세워지는 교회의 수가 급증하였고 두 번째는 재학생은 군복무를 연기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3) 한국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교단 분열

총회의 직영취소에 ‘장로회신학교’는 즉시 폐교했으나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명령에 불복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대학으로 개편시켜 <한국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의 분열을 살펴보자. 1950년 4월 제36회 총회(대구)는 성경오류설을 주장하거나 동조하는 자들은 엄중 처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후 제37회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씨를 면직하고 카나다선교사 서고도(Scott)를 소환하여 그의 신학을 들어 보기로 결의하였으나, 김교수가 소속된 경기노회에는 조선신학교 출신들이 많아 총회의 결정이 과격하였다며 경기노회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이 뿐 아니라 경기노회 회원들의 중심적인 자유주의신학 성격과 여러 회원들이 총회의 김재준의 면직에 대해 잘못된 인식과 오류는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더구나 1953년 4월 제38회 총회는 대구서문교회에서 <한국신학대학> 졸업자는 일체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경기노회를 통해 37회 총회결의를 처리하도록 강경하게 지시하였다. 총회는 강경한 그 결과의 파장을 생각하지 않았으나, 교단 이탈교회와 목회자수가 생각했던 수 보다 많은 것과 분열의 비극과분열 그 이후의 교계와 민족, 사회, 하물며 가족 사이에 까지 발생하는 분열의 슬픔을 가져왔다. <한신계통>의 자유주의신학 지지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은 「호헌대회」를 소집하고 전국교회에 성명서 발표를 결의한 후 해산하였다. 그 내용은 총회의 불법결의가 시정되지 않는 한, 교회의 평화와 통일은 영구히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총회와의 분열을 불사하였다. 이 자유주의신학 지지자들은 1953년 5월25일 대구에서 다시 모여 분열된 노회장 회의를 6월10일 제38회 총회로 재소집하였다. 이 때 9개 노회의 대표 47명은 한국신학대학 강단에서 「법통총회」라 결의하고 전국적인 회유와 세 불리기에 힘썼다.

한국장로교단의 보수와 자유 신학문제로 분열은 1954년 6월10일 제39회 총회를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개최하여 총회장에 김세열목사를 선출하고 ‘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카나다 선교회가 가세하므로 각 지역과 교회마다 분열의 싸움과 고통, 비극과 슬픔을 맞게 되었다. 출범 당시 교회는 546개소요 교인은 95,220명이다.

또한 이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본 총회는 전 세계 장로회의 주장을 따라 세계교회회의(N.C.C)에 협조하여 Eccumenical 운동을 적극 추진할 것’을 선포하여 카나다 선교회와 세계 교회와 모든 종교(캐토릭, 불교, 원불교 등)와 더불어 호흡을 맞추어 나갈 것을 명시하였다. 그 후 1961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명칭을 바꾸고 진보ㆍ자유주의 신학, 민족ㆍ민중신학, 사신신학과 다원주의 등 서구신학과 새로운 사상을 무조건 수용하였다.

 

3. 감리교단의 분열

1954년3월 서울정동교회에서 총회가 열렸으나 유영기감독의 임기와 자격 문제로 “호헌”을 부르짖고 1953년3월 천안에서 김응태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분열하였다. 1959년 서로 합동한 감리교는 감리교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광화문에 감리회회관도 건축하였다. 그러나 1962년“자유감리교회”의 소수교회 이탈과 “예수교감리교회”의 분열의 상처를 남겼으며, 1975년에는 감독선출과 교회혁신을 주장하는 “혁신파”들이 마경일 감독을 선출하고 분열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4. 근세 한국 신비주의 교단: 기도원과 이단들의 뿌리

 

1) 나운몽 : 용문산 기도원

1930년대 한국교회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의 투쟁에 휘말려 있을 때, 감리교목사 이용도가 1930년 3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후 많은 사람이 기도단을 조직하였다. 신비운동을 펼친 이용도와 이호빈목사는 입신과 강신극을 자행․원산의 접신녀들을 이용한 이 신비주의에 빠져들었고, 이들은 「중앙선도원」이란 교회를 세웠다. 나운몽은 이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1946년에 서울수동감리교회 장로가 된다.

나운몽은 위와 같은 신비주의 운동을 다시 일으키려고 용문산에 기도원을 세워 <애향숙>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6․25동란 중 기도할 때 입신, 방언, 예언, 환상, 진동, 신유, 신비체험을 받았다며 용문산의 한 바위의 파여진 두 곳을 나운몽의 ‘기도무릎바위’ 라고 속여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고 신학교를 졸업하려면 세상에 내려가(용문산) 자발적인 전도헌신을 실시하였다.

그는 신비주의와 기도와 전도에 동양사상을 첨가해 <기드온 수도원신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용문산>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고, 그 사람들과 신학을 배웠던 사람들을 <용문산파> 또는 <애향숙파>라고 불렀다.

 

2) 문선명의 통일교

문선명은 김백문과 평북 정주태생으로 한고향의 아는 사이였다. 김백문은 ‘기독교 근본원리’에서 선악과를 하와가 따먹음으로 사탄과의 성적관계를 맺었으므로 혼음은 새로운 피의 영적 교접인 에덴 복귀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이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여기에서 취하였다.

6․25 전쟁의 비극과 가난, 허탈, 슬픔이 한반도를 물들게 했을 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다. 일화 통일산업은 북한에 자동차공장을 2000년도에 개설하였다.

이 교리는 창조론, 타락론, 복귀섭리론으로 ‘피가름’, ‘혼음’사상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사회는 물론이고 외국에까지 분열과 슬픔, 가정파탄을 가져왔다.

 

3) 박태선 전도단

평북영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박태선은 국민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고학으로 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김치선 목사가 시무한 남대문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1955년 3월 하순 남산광장에서 김치선 목사와 미국의 스완스부흥사를 초빙하여 대표적인 부흥회를 열었다. 그는 감람나무를 자처하여 성령의 이슬, 불, 향취, 악취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병에서 나았다는 소문을 퍼지게 하였다.

박태선을 따라다닌 교역자들은 서울 50여명, 부산 30여명, 대구 20명 등 대도시 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소사에 신앙촌을 세워 사업을 경영하고 신도들을 착취하였으니 한국교회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는 쓴 뿌리였다.

 

1950년대 여러 선교회와 교단 활동

 

(1) 구세군 : 피난민들과 전쟁폐허를 위해 식료품 ․의료품․건축자재․의약품 등을 지원 하였다.

(2) 선명회(World Vision) : 1953년에 이재민들과 고아들을 돕는 단체

(3) 컴패션회(Compassion) : 미국부흥사 스완스 목사가 한국의 고아들과 고아원사업을 하였다. 전국 190여개의 고아원과 2만여명의고아․농촌교회를 도았다.

(4) 팀 선교회(Team mission) : 복음주의 연합선교회로 1953년부터 한국에서 고아원․성 경학교․방송․문서선교에 힘쓰고 있다.

(5) 홀트 양자회 : 농부 홀트씨가 한국의 고아들을 미국에 데려가 돌보며, 1955년 입양기 관을 설립하였다. 세계적인 고아들의 입양기관이 되었다.

(6) 구라선교회(나병:한센스환자) : 1910년 부산에 외지선교회를 통해 시작하여, 나병환자 들의 집단처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주택을 지어 집단부락을 만들어 주었다.

(7) 루터교 : 1958년 루터선교회가 창립되어 루터란 야우어-방송선교와 신학교․문서선 교․베델성서연구 등을 활발히 운영 중에 있다.

(8) 오순절파 : 1932년 박성산목사가 서빙고에 교회를 세웠고, 1953년 4월 8일 정식으로 교단을 설립하였다. 성령은사를 중히 여긴다. 현재 급속한 부흥성장을 보이고 있다.

 

 

  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교단의 분열

 

초기 한국교회 분열원인/1.시대 흐름과 역사변화 부재. 2.인재 양성의 부재. 3. 큰 비젼과 섭리와 연합력 부재

 

1, 신학교육의 부재

1) 1901년 평신설립, 1908년 교사 설립, 채필근 복교

2) 조선신학교 1940년 4월 서울 숭동교회/해방 후 복교/1950년 한국 신학대학

3) (만주)동북신학교 1941년 만주 한인교회 등이 총회 조직 후/ 평양신학교 폐교 후

4) 고려신학교:1946년 부산

5) 장로회 신학교:1948년 서울 남산

6) 총회신학교:1951년 9월 1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총회가 조선 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 와 합동 결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개교. 1959년 장로교 분열 「장로교 신 학교」와 「총회 신학교」로 분리

7) 1980년대 이후 합동 신학교, 개혁 신학교, 아세아 신학교, 피어선 신학교, 구세군 신 학교, 침례교 신학교, 성결교.

신학사상으로 인한 장로교의 분열은 또다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분열(NAE와W.C.C)을 낳고 말았다. ‘복음동지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1942년에 시작된 개인구원의 완성을 목표한 복음적 신앙생활을 위하여 세계 연합체(W.E.F)라는 에큐메니칼 운동인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당시 한국 N.A.E의 주도적 인물은 정규오, 조동진, 박찬목목사 등이었다. 그러나 N.A.E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의결기관은 아니었으나 N.A.E의 주동적인 지도자들은 1947년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올린 보수주의 계열의 신학생들 <51명 동지회원> 이었다.

1. 칼(Ecumenical)측 통합과 합동교단의 분열

이 당시 한국교계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보수진영을 N.A.E 측이라고 불렀으며, W.C.C를 지지하며 Ecumenical 운동을 주장한 다른 교단을 <칼>측이라 불렀다. W.C.C는 ‘세계교회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인대 한국교회와의 관계는 1948년 김관식ㆍ엄요섭 목사가 참석하여 정식으로 가입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 전역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신탁통치 찬. 반과 갈등으로 갈라져 혼란을 격던 중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이르켰다. 한국전쟁은 세계전쟁 터로 발화되었다. 의 폐허와 슬픔 중 미국교회를 위시한 세계교회의 물질과 기도의 도움을 받아 힘을 얻게 되었다. 한국교회와 정치, 경제에 미국교회와 UN과 한국 전쟁 참전국인 16개국의 도움은 한국교회와 성장의 뿌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W.C.C대회에 김현정, 명신홍목사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두분의 신학사상은 다르므로 명신홍목사의 W.C.C 탈퇴 의견에 W.C.C연수위원회를 설치하였고 한경직, 안광국, 전필순, 유호준, 황은균, 박형룡, 정규오목사를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다음 제42회 총회에 보고하도록 더욱 연구하게 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남산 신궁 터인 좁은 캠퍼스였으므로 성도교회도 빌려 사용한 교장 박형룡박사는 학교부지 확보를 넓히려고 힘쓰던 중 악덕 사기꾼을 만나 3,ㅇㅇㅇ만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임을 통감한 박형룡 교장은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1958년 후임에 노진현 목사를 교장서리로 임명하였으나 이 사건은 총회로 옮겨져 각 노회들은 이 금액을 반환해야 된다는 W.C.C지지 세력과 학자의 실수이니 용서하자는 NAE세력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상반된 견해차이는 노골적으로 총회 전체 분위기에까지 미쳤으며 W.C.C에 대한 반대세력이 예상외로 큰 것을 알게된 선교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9년 9월24일 제44회 총회는 총회장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개최되는 날부터 4일간 경기노회의 N.A.E를 지지하는 이환수 노회장과 서기 서재신목사측과 W.C.C를 지지하는 부노회장 강신명 목사측의 총대문제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합일점을 찾지 못하여 정회로 산회하였다. 전국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휘말려 혼란과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도시의 동네 뿐 아니라 시골, 산촌까지 두 개의 교회로 나누어 서로 싸우고 미워하여 마주 보이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보기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두 개로 갈라진 총회는 노회의 분열과 교회,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교인과 교인 뿐 아니라 가족 중에까지 부모와 자녀들끼리 싸움이 치열하였으며 사회법정에까지 서로 고소하는 사태를 벌여 교회의 본연의 자세와 사명을 망각한 비극을 낳고 말았다. 또한 대부분 교인들로 구성된 이승만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국가의 혼란과 한국교회의 계속되는 분열은 초창기 한국교회 부흥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친일파들의 정계와 교육, 예술, 군인, 경찰, 사업 분야와 교계에서까지도 철저한 규명과 청산을 하지 않아 국가의 사상체계와 목표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미리 총회분열을 예상했던 에큐메니칼 지지자들은 즉시 서울연동교회로 모여 총회를 속회하였으니 <통합>측 총회라 하였다. 또한 분열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든 NAE측 사람들은 11월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44회 총회를 속개하였고 <합동>측이라 불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분열은 교계에만 혼란과 싸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3.15부정 선거와 1960년 4.19학생의거와 1961년 5.16군사 쿠테타(반란)로 인한 국가 혼란의 책임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통합측은 남산의 장로회 신학교가 둘로 갈라지자 대광고등학교 교실을 몇칸 빌려 사용하다 1960년 광나루에 신학교를 완공한 후 다음 해에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 교역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되었다.

한편 WCC를 반대한 합동측의 총회신학교는 서울승동교회를 사용하다, 용산역 4층 건물을 구입하여 5년간 운영하던 중 1964년 사당동에 신학교를 완공하고 교육부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순전히 한국 보수주의 합동측 장로교회와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응답받아 세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실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적인 어려운 현실과 합동측 교단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든 여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장로회 선교회는 외부의 도움 없이 <총회신학교>를 건축한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고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역사적인 기적사건이라 말하였다. 한국교단들 본 합동측 교회들과 특히 분열된 통합, 다른 교단들, 세계 모든 교회에 기적의 능력을 다시 나타내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신헌법ㆍ 3선 개헌의 지지는 보수교단 주도하의 합동측의 김인득장로와 김윤찬목사였다. 그 당시 민주화 운동은 과열 진압 그 이상의 탄압에도 대학생들과 사회 지성인들, 진보적인 교단과 교회, 캐토릭이 애국운동을 펼쳤다. 그런대 국가의 문제인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도움을 끼치기는커녕 군부독재정치 지지성명과 조찬기도회 및 축하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 통합측의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한 목사였으나 그 때에 예배 설교를 맡아 합동측 뿐 아니라 통합측 교단과 보수교단들은 정치 앞잡이라고 대학생, 지성인들과 교계로부터 모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김인득장로가 새마을운동의 스레트 지붕개량과 페인트 사업, 국가발전 사업의 지원을 받기로 타협한 결과라고 교계와 전국에 소문이 나돌았다.

그 당시 조동진, 김의환목사 등 보수진영의 여러 목사님들은 군부독재 지지 성명서에 자신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 자신의 허락없이 도용된 것이라고 사석에서 말하였다. 또한 대학생선교에 힘쓴 김준곤목사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치 않고 복음주의 전도운동을 계속 펼치도록 박정희 군부 대통령이 정릉의 과거 러시아대사관 자리를 무료로 임대받아 한국C.C.C회관을 건축한 기적을 일으켰다. 또한 김준곤목사는 1974년에 Explo' 74 세계C.C.C대회를 여의도에서 개최하고 <한국교회의 연합집회>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그를 정치목사는 진보측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보수교단의 침묵과 협조는 민주화 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애국선혈과 순교하신 선배목사님, 성도들 뿐 아니라 한국역사의 오점을 남긴 신사참배와 같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교부가 대학교 인정학교로 간략한 명칭을 개정하도록 법제화하므로 에덴교회에 시무한 윤인식장로가 수고하여 사당동에 위치한 <총신대학>은 종합대학교로 1981년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또 다른 캠퍼스를 마련하여 경기도 용인의 양지에 강정준장로(군산중앙교회)가 사업장의 집하장 부지헌납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세웠으니 세계적인 보수 개혁파 칼빈주의 신학의 산실이다.

 

2.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대신측) 분열 - I.C.C.C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1961년 6월 미국 칼 메킨타이어박사가 주관하는 I.C.C.C(국제기독교연합회)인 극단 칼빈주의와 단절을 결의하자 김치선박사는 1948년부터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운영하던 대한신학교를 서소문으로 옮겨 총회를 분립하였다. 1981년 2월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교 학력인정을 받고 <대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어 1985년 현재 재학생 2300여명 전임교원 500여명 졸업동문 25,000여명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대신측 교단으로 가입하였고 세계전도선교회(WME)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I.C.C.C의 경제원조를 받았던 박병훈목사도 합동측에서 탈퇴하여 1962년 11월 <호헌총회>를 조직한 후 교단을 만들었으나, 박목사는 다시 합동측에 복귀하였다.

 

3. 예성과 기성의 분열( KNCC문제)

한국성결교단은 KNCC에 가입하여 초교파 연합활동에 참여하였다. 1960년 NAE측 복음주의협회와 ICCC(국제기독교연합회: 근본주의신학)에서 WCC에는 용공주의 자들이 있어 공산권과 결탁하여 사회주의운동을 행하였으며, 신 신학(新 神學)이요, 에큐메니칼 운동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ICCC를 따르는 김응조박사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예수교 대한성결교회(예성)를 조직하였고, 동양선교회의 후원을 받는 총회측이 기독교 대한성결교단(기성)로 분열하였다. 이후 합동을 위해 기성에서 KNCC를 탈퇴하므로 예성의 목회자와 교회들이 대거 기성에 합류하여 가장 큰 성결교단이 되었다.

1972년 예성 내에서 신학노선과 교리, 정치적인 문제가 겹쳐 다음 해 6월<예수교 대한성결교회-혁신>측이 분열하였고, 교단의 분열은 곧 바로 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온다. 따라서 예성은 독립문쪽에 성결교 신학교를 운영하던 중 경기도 안양시에 종합대학인 성결신학대학교로 승격하여 발전중이다. 또한 기성은 서울신학대학을 서대문구 아연동에서 경기도 부천으로 캠퍼스를 옮겨 종합대학으로 인준을 받았고 또한 신학대학원을 개설하여 교역자를 배출하고 있다.

 

 

4. 고신 및 합동ㆍ 통합 측과의 재 합동 모색 및 분열

 

1) 합동측과 고신측의 재합동 및 환원분열

1960년 9월 합동측과 고신총회는 각각 합동위원회를 선출하고 정회하였다. 동년 12월 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양측은 합동총회를 조직함으로 <합동>이라 불렀으며 WCC반대 결의를 재확인하고 신학교 일원화와 “새찬송가”를 편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61년 제46회 총회에서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곧 칼멕킨타이어박사측인 근본주의와 우호를 결의함으로 1962년 한상동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고 부산남교당에서 “환원총회”가 1963년 9월 17일 모여 분열하게 되었다. 이때에 합동측에 200여 교회가 잔류하였고 468개 교회는 고려측으로 환원한 것이다.

 

2) 합동측과 통합측의 재 합동 모색 및 분열

 

1967년 9월 합동측과 통합측에서 합동위원회를 선출하고 쌍방이 그 원칙과 새칙을 작성하였다. 다음해 3월 1일 대전에서 양 총회가 속개하도록 합의하였으나 통합측에서 W.C.C를 탈퇴하고 KNCC는 2년 후에 탈퇴한다는 통합측의 결정에 서로 의견이 상충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재 합동위원회의 노력과 양 교단의 목회자들 뿐 아니라 교회, 성도들 또한 한국교계의 기도와 열망으로 1968년 9월 제53회 총회를 서울에서 모이기로 결정했던 총회의 장소를 다시 부산으로 옮겨서 통합측 총회에 합동에 관한 공문을 전달하였으나 통합측 총회가 1969년 W.C.C에 복귀하기를 가결함으로 현재까지 분열상태에 있다.

이같은 통합측의 재 합동 분열은 1967년 미국장로교회에서 자유주의 성향인 새신앙고백서가 나오므로 통합측의 보수적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합동측과 연합운동을 펼친 것이다.그러나 장신대학 이종성박사와 통합측의 정치지도자들의 무성의로 부산까지 총회 장소를 옮겨 재합동하려는 합동측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장통합은 신복음주의 곧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간직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을 포용한다는 관용적 자세를 나타냈다. 통합측은 좌경 프린스턴대학의 자유주의 신학과 칼바르트신학, 서구신학의 다원주의 신학으로 분명한 신학노선이 없었다. 그러나 통합측은 칼바르트신학으로 신학노선을 잡고 기장측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어가는 현실이다.

기장측은 1972년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내어놓았고 완전히 자유주의 신학을 선포하였다. 1960년 김재준교수는 토착화신학과 민족주의신학, 세속화신학을 주도하였고, 1970년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김정준박사와 함께 감리교신학과 연계를 맺어 민주화운동에 기치를 들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과 전두환, 노태우의 30년여년의 군사정권을 진보교단 자유주의 신학의 기장측과 감리교는 캐톨릭-정의사제단과 함께 목숨을 내걸고 국가 민주화를 위해 옥고를 치뤘다. 따라서 1971년 기장측은 로마 캐톨릭과 외경을 포함한 신, 구교 합동성서번역판인< 공동번역성서>를 대한성서공회를 통하여 출간하였다.

 

 

Ⅵ. 1980년대의 개혁측 분열

 

1. 합동교단과 합동보수측의 분열

 

1959년 통합측의 분열 이후 10여년을 정규오목사를 비롯한 조동진 등 조선신학교 51명 동지회(NAE주동)와 정규오, 이환수, 황금찬목사 등의 호남권과 황해도, 경기도 지역이 총회신학원과 교권을 장기간 주관하였다. 이때에 그 반대파인 김윤찬과 이영수목사 등의 경상도권과 평안도 지역의 비 주류측은 지역감정 및 장기집권 문제 등의 반발로 주류측과 갈등이 심하였다. 이 팽팽한 세력 다툼 중 곳곳에서 파벌조성과 정치권확보 등의 기득권(헤게모니) 싸움이 치열하였다. 총회의 싸움은 1968년 최성원목사(정규오목사의 추천으로)가 전주서문교회에 취임하여 교회건물등기가 장로들 명의로 된 것을 발견하고 당회와 제직회의 결의 없이 노회 유지재단에 단독으로 이전 등기하였다. 그 교회와 노회, 전북지역은 최목사 지지측과 정규오목사의 후원을 받은 장로측인 목사와 장로들로 나뉘어졌고

그 노회와 교회들 뿐 아니라 전국에 까지 이 여파가 휘몰아쳐 총회싸움의 전쟁터와 같았다. 이 당시 총회 서기였던 이영수목사는 최성원목사를 지원하며 그 지지파인 목사와 장로들 전북권 일부를 흡수하며 호남권을 분열시켰다. 이 때 황해도출신 장목사가 부 총회장이였으나 이영수목사는 평안도출신이요 서울충현교회를 담임한 김창인목사를 총회장으로 당선케 하므로 1969년부터 교권을 휘둘렀다. 한 사람, 한 교회, 한 가지의 문제가 노회 뿐 아니라 총회의 분열의 뿌리가 되는 점을 깨닫고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한다.

1970년대 합동총회의 교권과 신학교 운영권을 잡은 경상도측과 평안도출신들은 이전의 정치남용과 비슷한 장기집권, 지역차별, 독선적 작태로 주류파 이영수목사 등의 독주체재로 달려갔다. 따라서 비주류가 된 호남과 황해도측은 총신대학 김희보학장의 문서설을 주장하여 전국교회가 서로 싸우며 모함하므로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

1979년9월 제64회 총회 때에 김희보학장의 문서설을 앞세워 이영수정치 세력을 반대한 사람들은 서울 방배동에 박형룡박사의 아들 총신대학교수인 박아론박사를 교장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워 총신대학을 개혁하고 교단을 보수하자는 합동 보수측으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1980년 11월10일-12일 까지 정동C.C.C.회관에 모여 <합동추진연합기도회>기간인 11일 남서울교회당에서 합동신학원을 설립하기로 가결하므로, 합동보수교단은 청담동측의 정규오, 조경대 목사계열로, 홍은동측은 최선재 목사계열로 나뉘어져 갈라졌다. 그런데 박아론박사가 다시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장으로 취임하여 합동총회분열의 파급여파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장로교의 개혁보수 정통신학의 대부인 박형용박사의 영향과 계보는 김의환박사가 계승하여 개혁주의 칼빈신학을 보수하는 합동총회를 사랑하지도자들과 교회들의 기도 때문이요, 지역감정으로 분열할 수 없다는 한국교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계의 혼란과 분열은 그 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살과 1981년 전두환 ‘신 군부독재’의 쿠테타를 낳게 하였으며, < 5.18광주민주화의거> 곧 피로 물들어진 사건을 낳은 장본인이 아닐까! 한국교회의 분열과 혼란은 국가의 혼란과 비극을 가져오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2. 합동교단과 합동 개혁측의 분열

 

합동보수측 곧 방배동에 있었던 총회신학교는 교세와 신학교의 확장을 위해 무자격 신학생을 받아들였고 군소교단의 편입목사를 받아들여 한국교계에 무자격 목사, 무자격 신학생, 무인가 신학교, 무질서 교회개척 등 교계와 사회에까지 지탄을 받는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몰상식적인 추하고 보기도 흉한 현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고자 박윤선박사와 신복윤교수, 김명혁교수 등은 홍정길, 옥한음 목사와 함께 합동 비주류계 청담동측의 정규오, 조경대목사의 합의 제의를 받아들여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개혁교단 기치를 들고 1981년 9월 합동신학원을 세웠으며 남서울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니 합동측의 분열로 인한 합동<개혁측>이라는 교단이 또 다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합동개혁측에서도 합동보수측과 똑같은 무자격 신학생과 목사편입생을 받아들이므로 원장 박윤선박사가 사임하였으나 합동신학원은 어려운 중에서도 수원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경상도 이영수목사의 장기집권과 푸대접받은 호남세력은 광주에서 개혁신학원을 운영한 정규오목사는 개혁측의 총회와 신학교의 실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이러한 중에서도 5공의 군사독재 장기집권을 반대하고 < 인권탄압 규탄성명서>를 총회에서 발표하였으며, 새 번역성경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반대하여 합동교단과 연합활동을 펼쳤다.

그는 “합동신학원을 졸업한 사람에게만 목사안수 받을 수 있다”는 합의를 저버리고, 광주신학원을 <개혁신학대학>으로 인가 받아 목사 안수까지 할 수 있도록 강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합동신학원을 운영하는 서울지구와 박윤선박사를 지지하였던 측은 “교수들은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학교운영과 교단의 정치는 이사들에게 맡기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합동개혁측과 합동신학원측은 또 다시 분열하고 말았다. 정치남용과 신학교운영, 지역갈등 및 장기집권으로 인하여 합동개혁교단은 서울측과 광주측으로 갈라지고 합동개혁과 합신, 합동보수, 합동정통, 합동국제, 합동진리.... 四分五裂이 아닌 거의 100여 개의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비극과 무질서를 낳게 된 것이다.

1998년 제83회 총회가 전주에서 모여 합동측에서 나간 합동개혁측을 중심으로 9개 교단이 합동하여 세번째의 큰 한국교단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신학교운영과 실권장악, 정치세력 확보, 목사정년제(군소 교단에서는 종신직을 주장), 지역갈등 등으로 다시 2002년9월 개혁 국제측과 합동 개혁측으로 다시 나뉘어져 서로 싸움과 혼란을 가져오는 비극을 또 다시 남기고 말았다.(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