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8. 06:13ㆍ목양자료/2.설교자료
(2007년 3.1절 기념 예배 설교문)
자유로운 삶(요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늘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일제의 식민지에 항거하며 만세운동을 한 지 꼭 88년이 지난 삼일절기념예배의 날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에 퍼져 온 민족의 가슴에 자유를 열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로운 삶은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극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절, 자유란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유가 그리운 시절이었고, 자유를 갈망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유를 맘대로 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일본의 총칼 앞에 무기력한 조선 백성들은 굴종의 삶을 보내고 있었기에 마음속에서만 자유를 외쳤을 뿐입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자유에 대한 응어리로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그 응어리를 표현하였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조국 동포들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가슴은 시원하였습니다. 억압된 상처들이 치료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찾아든 자유를 누리기보다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방종을 일삼았습니다. 좌익과 우익이 나뉘어져 싸움을 벌였고, 급기야는 6.25사변 후에 38선이 생겨 기나긴 세월동안 반 토막 나라로 존재하는 지구상 유일한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북조선 공산주의, 남한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북한은 공산주의로 인해 세계최고로 가난한 나라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지구상 가장 억압된 나라, 자유 없는 나라, 테러지원집단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나라입니까? 물론 겉으로 볼 때 자유롭고 행복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서서히 곪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나라가 어느 사이엔가 병들고 말았습니다.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1위, 술 소비량 세계1위, 자살률 세계1위 등 불명예스런 세계 1위 자리를 확대시켜나가는 실정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일본의 계속되는 독도 영유권 주장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위한 한국의 역사 왜곡 등은 시끄러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시끄럽게 되어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 여전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겉으로 자유로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삶은 고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억압하고 상처를 주는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왜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1. 인류는 모두 죄의 종입니다.
본문 31절에 보시면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중에 저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핵심을 두고 설교하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말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역사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애굽에서 무려 430년의 종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430년 후에 애굽에서 빠져나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나안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수시로 나라를 빼앗긴 채로 80년(삿3:8), 혹은 7년(삿6:1), 혹은 18년(삿10:8), 나중에는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70년을 종살이하였으니 육신적으로 수시로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8:33)”고 반문합니다. 사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진 믿음에 기인합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자유를 빼앗겼지만 영적으로는 언제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할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고난을 받고 있지만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들을 구원하여 세계 최고의 독립된 국가로서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올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구원관은 그들이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를 영영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셨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왕의 모습으로 임하실 것으로 여겼습니다. 온 세상을 지배할 정복자, 위대한 다윗의 정권을 소유한 왕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선지자 정도나, 선생님 정도였을 뿐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보는 눈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태 파악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왜 종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왜 불행을 겪습니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까? 왜 일이 안 됩니까? 왜 가족들과 끊임없이 불화합니까? 왜 하나님이 제대로 믿어지지 않는 겁니까? 자신에 대한 사태파악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태 파악이 안 되면 교만해집니다. 성경 잠언 29장 18절에 보시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그 말씀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제멋대로 교만하게 행동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고, 무능하며, 죄악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교만하게,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둘 수 없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만해서 그럽니다. 교만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은근히 겸손한 척하면서 교만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알고서도 교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 모두는 교만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단이 교만을 먹이로 삼고 우리 가운데 들어와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교만하면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하와도 하나님처럼 되려고 교만을 떨다가 마귀 편으로 끌려들어갔습니다. ‘저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잘 모르는 게 아니고 교만해서 그러는 겁니다. 너무 세상적으로 똑똑해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무시하고, 기도를 무시하고, 말씀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들 맘대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교만 중에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마귀가 들어와서 우리의 영적인 자유를 다 빼앗아가도 사태 파악이 안 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언제나 자신이 지금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권면해도 안 듣는 게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종은 기도하고 말해주어도 그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대로 산 것이 옳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 맞추어서 역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사람과 다른 겁니다. 그런데도 사태 파악이 안 됩니까? 잘 되는 것 같지만 서서히 망해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 알량한 세상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얄팍한 자기 꾀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적인 도움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영적인 축복을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착각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반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
예수님은 죄가 사람으로 하여금 종으로써 살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죄! 죄는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죄는 인류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는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잃고 살아갑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억압합니다. 상처받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영적인 선행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죽음을 가져옵니다. 육체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입니다. 죄는 질병을 가져왔습니다.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죄는 사단을 부릅니다. 죄는 사단의 편이 되는 겁니다. 죄는 사단을 섬기게 만듭니다. 사단은 죄를 먹고 우리 몸에서 왕 노릇합니다. 주인 노릇합니다. 우리가 죄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만족을 심어 줍니다. 신경질 나게 합니다. 열 받게 합니다. 모든 것에 문제를 뿌립니다. 죄는 인생을 가장 처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단지 병들고, 사고 나고, 죽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죄를 품고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닙니다. 죄는 삶이란 없게 만듭니다. 언제나 죽음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건강해도, 지식이 많아도 죄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는 인생의 참된 의미도 없습니다. 자유로운 삶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죄는 우리를 억압합니다. 죄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꽁꽁 묶어놓고 제멋대로 살게 합니다. 건전한 삶이란 미련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무시됩니다. 영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게 만듭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죽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육체의 노예로 만듭니다. 땅의 종으로 전락시킵니다. 죄는 문제, 문제만 양산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에 빠뜨립니다.
죄의 특징은 그런 것입니다. 마귀적입니다. 세상적입니다. 정욕적입니다. 죄는 마귀로부터 왔습니다. 죄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속에다 죄를 뿌리면서 죄 속에다 악을 담았습니다. 욕심을 담았습니다. 거짓을 담았습니다. 살인을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오면 살살 거짓말하고, 욕심으로 행하고, 죄악의 행위를 합니다. 죄는 성도들마저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일생을 살게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끊임없이 분쟁합니다. 싸웁니다. 자신과도 싸웁니다. 타인과도 싸웁니다. 심지어 하나님과도 싸웁니다. 그래서 예배를 못 옵니다. 기도를 못합니다. 아니, 예배를 와도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기도를 해도 겉만 기도하고 속사람은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충성하는 것 같아도 속에는 불신과 오만이 가득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합니다. 충성하던 사람이 속을 썩이는 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의 역사의 결론은 언제나 멸망입니다. 사단을 따르는 자, 죄를 따라 교만하게 행하는 자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죽음입니다. 지옥입니다.
2. 종의 결과
죄의 사람, 마귀의 사람은 죄의 종,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나라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딸만 갑니다. 종은 아버지 집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종이 어떻게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고, 자고, 아버지 것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종은 아버지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아들, 딸만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만 아버지의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예수님의 생애를 살 때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의 능력으로 살지 않으시고 행함의 능력으로 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거짓되게 예수님을 믿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잖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만 다녔지 언제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삽니까? 사는 것 같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부 자기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도, 육신의 것들이 잘 안 되면 예수님 떠납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자고 듣기 싫은 소리하면 귀를 막아버립니다. 말 안 듣습니다. 예배 잘 드려서 복된 삶을 살아보자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기도하자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영생의 복을 받을까봐 겁내는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 마귀의 공격에 넘어진 자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솔직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귀중하게 여기며 삽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을 귀중히 보신다면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섬길 때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수시로 변합니다. 감정을 따라 변합니다.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변덕을 부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믿습니까? 물질을 믿습니까? 물질이 떠나가면 어떡하려고요? 사람 잃고 돈 잃고 낙망한 사람, 한 둘을 봅니까? 왜 우리는 매번 속는 것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탐심이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죄는 이렇게 우리를 멸망하게 합니다. 죄를 따라가는 사람, 마귀를 따라가는 사람은 철저하게 망할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고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무엇인가요? 36절에 나오지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은 진리와 아들 예수님을 동격으로 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되십니다. 이 사실을 성령님이 증거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14:1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6:13). 즉 예수님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죄의 포박은 끊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삶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기쁨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는 인류의 영혼이었습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셨습니다.
저는 요즘 예수님의 심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제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하만 그 사명이 나를 위한 사명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적, 나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사명이 아니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목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욕심 없이 사랑하는 양무리들을 양육하다가 주님께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니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저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때로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우리를 떠난 양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현재 우리에 있는 양떼들을 위해 남겨진 진액을 쏟아야 한다는 목양일념(牧羊一念)이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님 없는 자유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떠나시면 우리에게 마귀가 들어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하게 하시려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만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들어옵니다. 마귀에게 끌려가면 안 됩니다. 마귀의 밥이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세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세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세요. 예수님으로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세요. 예수님이면 됩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문제도 예수님이 풀지 못하실 문제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게 저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지 않는 게 저주요,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11:25,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 자유가 있음을 믿으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로운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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