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8. 06:51ㆍ목양자료/2.설교자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義 -빌 3:7-11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5-6절).”라고 합니다.
그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라고 합니다.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쓴 소리를 하듯이 바울은 교회에 대한 박해를 자신의 신앙의 확신에 따라한 것으로 “열성”에서 나온 일로 생각합니다. 그는 유대교 신앙을 수호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임했던 자신의 박해행위를 떳떳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살기에 제가 올 인하고 있는데 만약 한상렬 목사가 불렀기 때문이라면 인사로 한두 번 참석했을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단체이기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기에 꼭 일을 해야한다고 강제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지금으로서 꼭 나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나서는 것뿐입니다. 강제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 입니다. 함께 일하는 실무자들도 제 차비, 제 주머니 털어서 밥 사먹어 가면서 반년을 매주 만나서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권위로, 누구를 위해서, 어떤 사람에 의해서 엮어졌을까요? 당연히 “그리스도 때문에” 나선 것입니다. 여러분들 발에서 쥐나며, 불편한 이 공간에도, 매주 열심을 다하여 예배 출석을 하십니다. 제 얼굴을 봐서 그렇습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합니다.
“개척자들”이라는 단체가 오늘 우리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정신으로 보니 예수살기 운동하고 똑 같습니다. 세계 각국에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예수살기는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소속 평신도들의 운동이고 국내 운동이지만, 개척자들은 그 정신에 동의하는 젊은 크리스천이 중심이 되는 세계 각처를 무대로 하고 있는 운동입니다. 현재 기독교가 죽은 것 같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는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실존, 현존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에 그래도 기독교가 건재한 것입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나를 세워줄만한 강점들,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줄만한 것들을 이제는 해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삶의 전제가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가치관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니 내가 추구하던 그것들이 가장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내게 가장 해로운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크리스천이란 요즈음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면, “내 안에 나없다.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하는 말입니다. 나의 자긍심을 세워주던 그 놈이 없고, 나를 세울만한 그 놈이 없어 졌습니다. 나의 존재감? 나의 자존심? 내가 없는데 무슨 어떻게 이런 것들이 존재합니까? 크리스천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8-9절).
세상의 법칙은 내가 가진 소유를 위해, 보다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돈 없고 입만 가진 사람들은 귀찮은 것으로 여기고 해로 여깁니다. 그래서 매일 구조조정하고, 정리해고하고, 직장에서 쫒아내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귀찮은 것으로, 해로 여깁니다. 똥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나의 삶의 결과 나의 행위로부터 오는 의는 “나 스스로의 의”라고 합니다. 나의 의로운 결과물로부터 오는 의, “그 사람 훌륭해!”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의, 세상이 추구하는 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 조금 공을 쌓으면 그것을 근거로 사람을 모으고, 또 조금 공을 쌓으면 그의 주변에 힘이 모이고, 그러다가 힘과 힘이 대립하고, 사람과 사람이 갈리고, 서로의 의를 견주고 자랑하고, 다투고 남의 의를 깎아 내리고, 저희들이 다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마음은 이미 천 갈래 만 갈래이고 서로의 부끄러움 드러내는 것. 결국 다 죽는 것이 세상의 의입니다.
오늘은 삼일절 기념주일이자 우리 교단에서는 “신사참배 부일사역에 대한 죄책고백”을 전국교회가 함께 발표하는 주일입니다. 해방후 62년 만에 이루어지는 뜻 깊은 날입니다. 지난해 총회에서 이 죄책고백문을 통과시켰습니다.
작년 총회에서 신사참배 죄책고백안을 경남 노회에서 내었습니다. 마침 제가 사회부장이라 이를 총회 앞에 제안하고 방어하였습니다. 만만찮게 공격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만 고백하느냐? 그러면 ‘저놈들이 바로 친일했던 교단이구나!’ 하고 우리들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 아니냐는 염려였습니다. 남들 다 가만히 있는데 왜 나서서 스스로 독박 쓰려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서 오는 의입니다. 내가 불의인줄 알면 잘못햇다고 해야지, 앞 뒤 재고 거기에서 오는 불이익을 셈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다는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거짓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교단이 다소 불리한 위치에 처하더라도 우리가 고백해야할 것은 하자며 오늘 전국 교회가 함께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왜 그동안 이렇게 빤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까?
사람들이 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못합니까? 그들은 자기 스스로의 의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에서 자기를 보지 아니하고, 그분의 빛에서 나를 조명해보면 금방 잘못한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과할 것은 몸을 낮추고 사과하면 됩니다.
그런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일 수록 절대 사과하지 못합니다. 부패한 보수는 원래 부패한 것을 자기들도 알고 있으니 금방 사과도 하고 뭉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는 자기 가진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옳은 것을 추구해온 사람들이기에 내가 잘못했다는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실리는 기꺼이 희생하지만 명분을 위해서는 목숨걸고 싸웁니다. 자기 스스로의 의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기 의를 소중히 여기고 세우려고 하기에 남의 마음을 폄하하고 그들의 순수함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늘 분열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가장 가까운 사이에 더욱 원수가 됩니다. 원수는 늘 친하고 잘 아는 사이에서 나옵니다. 잘 알지 못하면 원수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여 명예에 집착합니다.
크리스천은 그것을 넘어서야합니다. 이미 내가 없다고 선언하고 내 안에 오직 주님만 계시다고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인격을 폄하하고, 남을 눌러 나를 세우는 자기 의는 아무리 사람들이 찬사의 말을 퍼부어도 그것은 오물입니다. 나를 망가뜨리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의 새로운 자아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받은 새로운 자아에 반합니다.
한국 교회는 일제에 협력하고 신사참배했던 죄를 아직도 주류의 교단들이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기 교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들을 딛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2006년 복음 교단이 고백을 했습니다. 복음교단의 창시자이고 존경받는 어른 최태용의 친일 행적을 용감하게 고백하고 함께 사죄를 구했습니다. 2007년에는 기장이 했습니다. 그러나 장공 김재준에 대한 고백은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죄책 고백을 선언하는 날 총회장 설교를 통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일본 신사를 교회 안에 설치하거나 또는 신사가 세워진 방향을 향해 참배하고 국민의 예를 표하고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1936년 카톨릭은 가장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라고 선동했습니다. 1938년에는 감리교회가 했고 같은 해 장로교 총회에서 형사들이 일일이 목사들에게 붙어 앉아 협박하는 분위기에서 참배결의를 했습니다. 압력에 의했다고는 하지만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부끄러운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에 항거했습니다. 3차에 걸쳐 구속을 당했습니다. 1940년에는 평양에서 만주 대표자들이 모여 신사 불 참배 노회를 전국적으로 결성하는데 합의했습니다. 최권능 목사, 안이숙 여사등 이에 참여한 20여명 모두 옥살이를 했습니다. 주기철, 최권능 목사는 옥살이와 고문,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옥사하셨습니다.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도 폐결핵 재발 영양실조로 죽어갔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영혼을 부탁하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으나 극적인 신유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상동아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살아서 나갈 것이다. 네가 하여야 할 일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하는 음성을 듣고 그는 살아났습니다.
신사참배의 시련 앞에서 조선의 교회는 참배파와 불참배 파로 나뉘어졌습니다. 참배파의 한경직 목사는 “너무 교인을 사랑해서 교인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참배했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송창근,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문을 엽니다. 싸움이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니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야하므로 신사참배를 인정하면서라도 신학이 있는 조선과 조선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토대위에 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물론 김재준은 민족에 빚진 것을 갚고자 나중에 반 유신 투쟁에 선봉에 섰고, 삼선개헌 반대 등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문을 열었습니다. 반면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였던 고신파는 군사독재가 기승을 부릴 때, 역사 문제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들의 의로 삼아 그 의를 자랑하며 교회 안으로 칩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의는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의는 전도되고 역전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의 빛이 이렇게도 밝은데 어찌 그를 수용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는 그 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실제는 의롭지 못한데 자기 스스로 의를 만들어 허장성세를 보이며 지켜 가려고 하는 의가‘자기 스스로의 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자기의 불의한 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실 의로움으로 가장 하고 있지만 내가 부끄럽고 오물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매일 찾아내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서로의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입니다.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오는 의는 우리의 근본을 이루는 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근본은 믿음에서 오는 의입니다. 그 사람의 리얼한 현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를 그렇게 믿어주는 그 믿음에서부터 의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어떤지 모릅니다. 세상은 모르니 일단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좋은 뜻을 폄하하고,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나쁜 의도부터 무한히 키워서 흔들어 봅니다. 그래야 내가 방어되었으니까! 그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에게서 오는 의를 셈하려는 것.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참 자랑할 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분량을 셈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나 자신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긴 터에, 어찌 남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근거로 판단하려고 합니까? 우리들의 의는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 이웃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체를 속속들이 알 수 가 없고 또 알 필요가 없고 또 알아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켜야할 소중한 비밀일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그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믿는 믿음으로 그를 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음에 근거해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10절),
서로를 그런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서로 간에 생명이 넘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들 상호간에 부활의 능력이 넘치게 됩니다. 서로의 얼굴에 자신이 넘치고 생명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 이 땅위에 계셨던 예수는 아픔, 고통, 눈물, 안타까움을 가지셨고 헤어짐과 죽음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생명에 대한 무한 한 연민을 가지셨으며 그들의 삶을 풍성케 하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11절).
그러나 예수께서 가지셨던 한계와 고난은 그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통과해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일제의 신사는 우리 앞에 없으나 그보다 더욱 심각하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 물질주의 맘몬의 우상 앞에 우리는 온통 정신이 나가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자기 스스로의 미래’는 한없이 쌓고 준비해도 불안합니다. 그들은 물질은 가졌지만 하나님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그들의 무저갱, 밑바닥이 없는 갱도에 자신의 삶과 열정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짧은 것인데 물질에 덜미가 잡혀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착각하며 꼭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습니다. 끝없이 들어부어도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이 그들의 내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자신의 의와 평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를 관리하고 지키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가진 허물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의입니다. 내가 쥐고 있으면 오물뿐이 아니지만, 그분에게서 오는 의를 붙잡으면 의와 생명과 부활입니다. (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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