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20. 00:00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르네상스(Renaissance)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귀족층과 토지소유자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중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三分法:고대·중세·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역사·도덕·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문주의의 전통은 페트라르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이탈리아에는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와 조각이 등장하였는데,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데에 고대의 스타일을 부활시켰으며, 조토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G.바사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대의 재탄생이란 고대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까지를 일컬었다. 법률 분야에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는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부활한 로마법 연구는 바르톨루스에 의하여 새로운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인문주의 시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서기장관(書記長官) C.살루타티는 키케로의 서간(書簡)을 발견하여 고전기(古典期) 라틴어의 수사법(修辭法)을 처음으로 공문서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호하는 공화정(共和政)을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었는데,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피렌체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시대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였으나, 카이사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국민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으므로 피렌체의 이상은 로마공화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스콘티가(家)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살루타티는 적(敵)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하여 독재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자유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시민적 인문주의는 역시 서기장관으로 봉직한 살루타티의 후계자 L.브루니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저서 《피렌체국민사》에서 피렌체의 자유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자유도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투스카니(Tuscany)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주장하고, 평등은 정의의 균등한 기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라노 쪽의 인문주의자들은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를 수습한 것은 카이사르라고 찬미하고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치정(治政)을 합리화시켰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에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정의 정통성을 고대에서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현실이 과거에 투영된 결과, 고대문화의 부흥은 단지 학문상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고 여기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寫本)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寄進狀)’을 후세(後世)의 위작(僞作)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치오,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르네상스의 변질】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경정(現實更正)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활동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식인들 간에 현실도피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문화 부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코무네 체제가 쇠퇴하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고 있던 군주국현상(君主國現象)이 발달하였다. 피렌체의 경우 명목상 코무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434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시민적 인문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판도는 비교적 단순하였는데, 북에는 스포르차가의 지배를 받는 밀라노와 귀족지배의 공화국 베네치아가 있었고, 중부에는 피렌체와 교회국가, 남에는 아라곤가의 나폴리 등 강국 간에 일종의 세력 균형이 성립하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에서도 각기 군주국을 형성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화정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식인은 궁정에 기식하는 궁정문화인이 되거나, 현세를 도피하는 자세를 택하였다. 또, 비잔틴 학자들의 영향이 더해져서 지식인들은 학문연구 중심의 사변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전후하여 플레톤이나 베사리온과 같은 다수의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그들의 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을 전하였고, 그 영향으로 C.메디치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도덕철학·정치학 등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C.란디노와 같이 명상적(瞑想的)인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중심인물인 M.피치노의 학문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문화는 군주들의 보호 아래 궁정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B.카스틸리오네가 쓴 《정신론 Il Cortegiano》은 이상적 인물로서의 궁정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문학도 단순한 고전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을 나타냈으며, 중세 기사도에 대한 로맨틱한 관심은 귀족적인 서정시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T.타소와 L.아리스토의 작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술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개성과 활력에 넘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이 배출된 뒤로는 차차 바로크 미술양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1521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 매우 중시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1527년 황제군(皇帝軍)에 의하여 약탈당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자의 활동과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자가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고대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자가 코무네와 군주국에 관직을 구하는 예가 증대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출세의 수단이 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는데,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알프스 이북의 절대군주국가에서도 인문주의자를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에서의 인문주의의 보급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가 그들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결합된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대부분이 종교문제에 무관심했거나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융합을 도모하였음에 반하여,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언어문헌학적 방법을 성서연구에 적용하여 신앙문제를 취급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연결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연구에 헌신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던 독일의 J.로이힐린과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J.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있다.
영국의 J.콜레트와 T.모어도 이들의 범주에 속하며, 북방의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D.에라스무스도 초대 교회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절대왕정의 전단계적 과정이라는 특징을 띠었는데, F.라블레와 M.몽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강한 귀족적·궁정적 성격을 띠며, 이는 곧 루이 14세의 절대왕조문화에 연결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E.스펜서의 《선녀왕(仙女王)》과 같은 대서사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송시(頌詩)였으며, 셰익스피어가 낳은 드라마의 극치는 절대주의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데, 세르반테스의 소설도 가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에스파냐 절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는 나라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따라서 근대문화와의 관계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문주의자들은 공통의 교양과 언어와 이상을 통하여 공동영역을 분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의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지만 에라스무스가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주유했던 것과 같이 종교 이외의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공통의 지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실상 르네상스시대에는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기(手記)에 나타난 견해를 근대과학의 예견(豫見)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생각도 수정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록은 중세 말기의 스콜라 학자에 의하여 이미 발견되었던 것을 다만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근대과학의 진원지로서가 아니라,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중세를 이어온 과학의 변화와 더불어 16·17세기의 J.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낳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뉴턴으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J.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 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史家)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사포리는 서유럽의 결정적인 르네상스는 11세기 십자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12세기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는데, 이때는 도시중심, 상업자본주의, 자치적인 도시국가, 대중의 새로운 문화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시대이다. 레인 또한 르네상스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 페거슨의 시대 구분에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재생이나 시작의 국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부르크하르트적인 해석을 앞지를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예견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르네상스가 하나의 뚜렷한 구획이 되는 역사적 시대 구분 용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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