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다싱(Sadhu Sundarsingh, 1893~1929?)

2011. 7. 10. 18:16선교자료/3.전도자료

 

 

 

 

썬다싱(Sadhu Sundarsingh, 1893~1929?)

 

인도의 경건 인물로 힌두교 가정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그가 체험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으며, 예수를 일생 전했던 신비가이다. 13세기의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khart), 18세기 임마누엘 스웨덴볼그(Emmanuel Swedenborg)와 더불어 삼대 세계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한사람이라 칭하며, 타고르와 간디와 더불어 인도가 낳은 위대한 삼인 중 하나로 꼽힌다. 36세에 예수를 증거하러 히말라야 산맥의 얼음길을 열 번도 더 넘다가 마침내 실종되고 말았다.

 

사두 썬다싱은 1893년 9월 3일 북인도 빠치아라 주 씨물라에서 부유한 지주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은 힌두교 집안으로, 특히 어머니는 기독교를 믿지 아니했지만, 썬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다. 후에 그가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나는 천국에 가서 내 어머니를 만나 보지 못한다면, 어머니와 함께 지옥에 가기를 하나님께 빌겠습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 동네에 있는 장로교 소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을 구입하여 읽는 중 힌두교 교리와 다른 것을 알고 성경을 찢어 불에 태워 버렸다. 어려서부터 구도심이 낳은 썬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여러 종교 경전을 읽어보았으나 참 신이 누군지 알 수 없어 번민하다가 큰 결심을 세우고 참 신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자살하기로 하고 1904년 12월 18일 날짜를 정하여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기도했다.

 

정한 날짜 새벽 4시 30분 마지막 시간, 집 앞으로 자나가는 5시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하러 나가려는 순간 기도하던 자기 방안에 큰 빛을 보았다. 그 속에 예수께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 계시는구나’하고 깨닫는 그는 그 때부터 예수 믿고 주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아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본 부모와 친척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아들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고 부모는 집을 나가는 아들의 도시락 속에 독을 넣었다. 썬다싱은 이것도 모르고 먹고는 피를 토하며 죽어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후 만16세 되던 날인 1905년 9월 3일에 영국성공회 성 토마스 교회에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나환자 병원 입구의 길가에 있는 임시숙소에서 아침저녁으로 길을 쓸며 병원 일을 거들어 주었다. 시간만 나면 노송이 우거진 숲 속에 고요히 앉아 묵상을 하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세례를 받은 지 33일 후인 10월 6일부터 그는 크리스찬 사두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세례 받은 후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도중이었다. 인도 종교가의 도복을 입고 ‘사두’라고 자칭하면서 사방으로 전도하러 다녔다. 썬다의 전도단은 나환자촌에 가서 봉사하기를 즐겼는데, 나환자들의 몸을 씻어주기도 하고 복음을 전했다. 전염병과 싸우면서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아니했다. 썬다와 함께 봉사한 미국인 사무엘 스토크스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주님을 본받고자하는 신앙적 열정이 생겨서 재산을 불우한 사람들에게 희사하고, 사흘동안 기도를 드린 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처럼 탁발전도자로서 나섰다. 몇 주일 후, 나는 길에서 산야시(Sanyasi) 탁발 전도자 한 사람을 만났다. 시크교에서 개종한 크리스찬 사두였는데, 그는 인도 전역을 광범위하게 전도여행을 해본 경험이 있는 홍포의 소년 사두였다. 그의 전도열정과 성실, 그리고 메시지는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아직 소년의 몸인데도 그는 주를 위해 온갖 가난과 박해, 기아와 추위, 심지어는 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에도 그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원래 위장이 약한 탓인지 그는 때때로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한번은 위경련에다 고열까지 겹쳐 도로상에서 쓰러졌다, 날씨는 매우 추운데다 해까지 저물어서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경을 헤매는 듯한 그를 지켜보다가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더니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소리로 ‘나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님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그의 헌신을 읽고 나는 저 정신이 앞으로도 그를 죽기까지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1907년 11월까지 그와 동역을 하다가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15)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2년 동안 북인도 지역과 한번의 티벳 여행에서 온갖 위험을 겪으면서 전도했다. 회교도의 방해와 박해, 말라리아와 열사병, 눈보라와 히말라야의 급류 등 어려움 속에서 그의 목적은 오직 예수 증거에 헌신을 하였다. 밤 시간에도 자주 숲 속에 들어가 오래 기도하였다. 한번은 표범이 나타났으나 그는 꼼짝없이 기도하니, 표범은 마치 양순한 개처럼 사두 앞에 와서 앉더니 머리를 내밀었고 사두는 그것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깊은 기도 중에 ‘우주적 감정’을 체험하였다. 그의 얼은 깊이 모를 영(靈)으로 해서 히말라야 연봉 뿐 아니라 온 우주가 다 손안에 있는 듯 하였다. 그 앞에 있는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도 거룩하게 보였다. 걸터앉은 바위조차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1909년 12월 이 우주적 감정 체험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저녁 썬다는 라호르 지역 성공회 주교 레프로이(Lefroy) 박사로부터 성 요한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사제직 서품을 받을 것을 권유받았다. 평소에 잘 알고 존경하는 분의 제의라 썬다는 곧 동의하고 신학적 훈련과 목회생활을 위해 입학을 하였다. 위그램(Wigram) 신부와 웃(Wood) 신부가 교수였는데 이들에게서 성경과목들, 기도서, 교회사, 교의 변증학을 배웠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적 풍토에 토착되지 못한 인도교회에 그가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신학교 생활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의 경건은 늘 묵상이나 기도를 원했는데 신학교의 생활이 그의 경건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또 주님을 위한 그의 헌신적, 희생적 자세를 동급생들이 인정해 주지 아니 했으며, 도리어 그들은 썬다의 경건과 전도열정을 비판했다. 그가 가장 갈등을 느낀 점은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면 타교단의 교회에서 설교를 할 수 없고, 오직 성공회의 교구 내에서만 목회를 한정한다는 주교의 방침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8개월 만인 1910년 7월에 그만 두었다. 훗날(1922년) 제네바의 한 교회에서 간증한 그는 질문을 받고 자신의 신학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물론 나는 신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기대가 난관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교리며 교회사,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호교론 등 흥미있는 과목들을 가르쳐 주었으나, 진리를 가르쳐 주진 못했습니다. 오롯한 생명의 지혜는 진정 주님의 발아래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그의 발 아래에서 묵묵히 묵상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때 내게는 주께서 말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길속에서 고귀하신 주님의 마음과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둘도 없는 신학교는 바로 십자가 밑에서 그이 발을 붙들고 있는 것, 이것입니다.’16)

 

그리고는 계속 한 권의 성경책과 담요만을 가지고 부락마다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지리도 모르고 언어도 서투른 그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주로 나무 아래에서, 또는 바위 사이에서 묵상하고 잠을 잤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영혼은 더 맑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지도하에서 읽은 힌두 경전의 <解脫 Moksha >에 나오는 “매일 죽는 자는 살고, 매일 사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이나 로마서 14:8 말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과 접목시켜 ‘매일 죽자. 매일 죽어야만 눈이 떠지는 것이라면 어찌 천 번의 박해인들 견뎌내지 못하랴. 내 정신만 불이 되어 탄다면 내 몸은 아무도 죽이지 못하리라’는 신념으로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1912년 어느 날 히말라야의 은수 산인 중 특이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카일라스 산(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21,850피트)에서 209년 동안 거주해 온 ‘마하리시’(大聖師)를 만났는데 고향이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이며, 30세가 될 때까지 이슬람교도였다가, 30세에 자기 마을을 방문한 쟈르노스(Jarnos, 아랍어로는 Yernaus, Francis Xavier의 조카)에게 세계를 받고, 75세까지 전세계에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었다. 그후 이 산에서 계속 기도하며 묵상의 생활에 힘쓴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는 낡은 양피지로 된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두는 마하리시와의 만남을 생애 두 세 번 언급했고, 그후 1916년에 두 번째 만났는데 은사는 어떤 선교사에 대해 기도하면서 그 사람이 지금 처한 형편과 기도응답 받으려면 취해야 하는 태도를 다 알아 맞추는 것이다. 마하리시는 각종 약초와 식물의 뿌리를 말려서 빻은 것을 음식으로 하며, 자신의 이름은 그냥 크리스찬이라고 소개한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시기 때문이란다. 1917년에도 그를 만났다고 밝혔다. 세 번째 만날 때에는 호기심이 많은 4사람(영국인 2명, 인도인 2명)이 은사를 만나려고 함께 출발했다가 길이 너무 험난하여 모두 포기하고, 마지막 길에 만난 어느 라마승과 함께 노성사를 만났다. 양피지로 싼 헬라어 고문 성경 요한복음서를 읽고 있었다. 함께 기도한 후 ‘썬다, 같이 떠났던 �슨과 클리포드, 그리고 마시와 모한 랄은 다 돌아가고 그대만이 오셨구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뭣하러 그렇게 찾아오려고 하시었소. 주님을 찾아야 할 일이고, 그를 모시고 사는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이오. 돌아가거든 부디 그들이 주님을 착실히 섬기라고 일러주시구료. 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리다’고 다 알아 맞추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라마승에게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증거하였다.

 

1913년 봄에 그가 티벳에 갔을 때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라마교 국가인 티벳에서는 썬다를 체포하여 사형수처럼 깊은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우물 속 송장들 썩는 냄새 속에 태연히 있다가 밤중에 우물 뚜껑이 열리면서 밧줄이 내려와 천사의 도움으로 구조되기도 하였다. 그의 전도를 말리지 못했다. 어느 해 티벳 전도를 위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눈길을 하루에 백리씩 걸음) 눈에 막혀 못 가고 머무는 동안 그는 기도 중에 입신하여 천국을 구경하였다. 그후부터는 기도하기 시작하면 20분이 지나 입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고 그 체험을 책으로 저술했다. 그래서 그를 신비주의자라고 한다. 1914년 6월에는 히말라야의 동쪽 산령에 있는 네팔의 일람으로 전도여행을 갔다. 폭풍우가 앞길을 가로막던 어느 날, 사두는 지친 몸으로 폭풍우 속에서 전진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그를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돌풍에 휘몰렸지만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아니했다. 여기에서 고난 주일의 주님의 모습들이 환상 속에서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였다. 여권이 없는데다가 기독교 전도자의 신분으로 전도를 하여 네팔 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쳐 넣어졌다. 옷을 홀랑 벗기고 착고를 채워 운신을 못하게 했다. 거머리 떼와 오물을 두고 욕을 하며 나가자 거머리 떼는 전신으로 기어올라 그이 피를 빨았다. 처음 두서너 시간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그는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순간 고통은 멈추고 감옥은 천성같이 변했다. 계속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자 죄수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경찰이 그를 석방해 주어서 나가는데 거머리에게 피를 다 빨려서였는지 현기증이 나서 잘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몰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루 종일 걸어서 티벳인 동역자 탈진(Thar Chin, 성경을 티벳어로 번역함)을 만나 건강을 회복하였다.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으며, 1914년 여름에 그의 전도 거점인 코트가르로 다시 돌아왔다.

 

남인도 일대를 맨발로 전도했다. 빈민굴에 찾아가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가장 겸손한 자세로 구원의 복음을 외쳤다. 벵갈에 도착하여 인도의 시성(詩聖)이라 불리우는 라빈드라나드 타골을 만났다. 긴 백발의 수염과 범상치 않는 풍모, 한눈에 보아도 그는 큰 인물이었다. 그는 삼십대부터 절대 우주주의와 범신(汎神)론적 종교혼합주의를 원융(圓融)하여 형제애에 기초한 이상적 인간상과 사랑의 사회건설을 모색했다. 브라만(절대)에 도달하면서도 인성(人性 humanism)에 벗어나지 않고, 인성에 머물면서도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인간으로 영감의 노래를 한 인물이다. 썬다를 맞이하는 타골은 아들을 반기듯 포옹했다. 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사흘동안 머문 타골의 집은 아늑한 평화의 집이었다. 썬다는 그에게서 아리아인의 종교적 뿌리에 대해 들었고, 그는 타골에게 예수가 진리 자체임을 증거했다. 창세기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타골은 에덴의 네 개의 강에 대한 이해와 고대 중근동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특히 고대 종교언어를 비교하는 지혜를 보였다. 헤어지는 날 타골은 말없이 썬다의 손을 잡고 말없이 기도를 한 후, 멀리까지 배웅을 하여 주었다.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 타골은 그대로 서서 멀어져가는 젊은 썬다를 보고 있었다.

 

이후 썬다는 캘커타에서 배를 타고 미얀마에 가서 전도를 하고 싱가포르에 가서 영어로 설교를 하였다. 말라야와 페낭에 가서 전도하고 남지나해, 동지나해를 거쳐 일본에 갔다. 싱가포르에 와 있던 일본인 우메모리 목사가 일본 YMCA에 연락하여 초청한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 도착하여 도쿄, 고베, 오사카, 교토, 요코하마, 나가사키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오직 성경 한 권만을 들고 겸손히 꿇어 엎드려 기도한 후 소박하게 설교하는 썬다를 일본에서 환대해 주었다. 일본 전도집회는 가는 곳마다 은혜가 넘쳤다. 도꾜의 후지미 교회는 썬다가 강단에 썼을 때 마치 예수님이 선 것 같다고 성령에 쌓인 분위기를 전했고, 고베의 교회에서는 청년교인들이 맨발의 썬다를 따라 그 겨울동안 양말 안신기 운동과 교회 부흥 특별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주선에 따라 중국대륙을 향해 일본을 떠났다. 중국전도는 예상외로 어려움이 많았다. 중국과 티벳이 교전중이어서 외국인인 그로서는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독감에 시달리면서 여러 곳에 순회하며 전도강연을 하였다. 썬다는 세계 일주 전도를 다닐 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에 가득 찼으며, 자기 마음에 이미 천국이 왔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실천은 현재 살아서 자기 마음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이라고 증거했다.

 

1919년 5월 9일(30세) 썬다는 마드라스를 거쳐 티벳으로 갔다. 이로써 열 아홉 살 때부터 넘나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를 열번 째 넘은 것이다. 라마들은 그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저지했으며, 박해를 하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 했다. 인도와 티벳 국경지역에 썬다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티벳 정부의 지령도 하달된 상태여서 통상 이용하던 코트가르 방향은 어렵게 되었다. 험난한 길을 통해 티벳에 들어가 마을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는데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 전도여행에서 썬다는 48곳에서 전도를 했다. 하루 평균 40리를 걸으며 9월말까지 전도를 하였다. 그해 티벳은 7월 30일부터 8월 9일 사이에 큰 눈이 내렸고 9월말에는 산천이 눈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 썬다는 더 추워지기 전에 심라힐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랑게트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티벳인 한 사람과 동행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으나 동행인이 있으니 서로 힘이 되었다. 한참동안 사력을 다해 산길을 전진해 가니, 앞에 웅크리고 있는 동사체(凍死體) 하나가 나타났다. 얼어죽은 것 같았다. 시체는 길에서 약 10미터 떨어진 가파른 비탈 쪽에 있었다. 썬다는 동행인에게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 동행인은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소.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혼자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썬다는 조심해서 동사체에 접근하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이를 업고 가는데 너무 힘이 들어 땀이 날 정도였다. 몇 시간을 이렇게 가고 있는데 또 하나의 동사체가 앞에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얼어 죽어있는데 그는 바로 몇 시간 전에 혼자 살겠다고 가 버린 동행인이었다. 한편 썬다 등에 업힌 사람은 차츰 온기를 되찾아 살아났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

 

썬다는 10월초에 판잡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즉시 그는 판잡의 읍들을 찾으며 전도하다가 15년만에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셨다. ‘아들아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그 동안 너에게 못할 짓을 내가 너무 많이 했구나. 나도 이제 예수를 믿고 싶다만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실는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고,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온 집안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이후 썬다가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의 선편 여비를 대주었다. 1920년 1월 영국의 버밍햄에 있는 셀리옥 선교대학에서 전도초청장을 받아 가게 되었다. 폼페이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거쳐 영국에 도착하니 2월 10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1837~1903) 선교에 불타던 영국교회가 이제는 지는 해처럼 식어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썬다는 홍포에 터번을 쓰고 성경 한 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히 증거하였다. 그는 영국교회에게 기도의 운동을 다시 붙이자고 호소했다. 그의 단순 소박한 메시지는 영국교회를 뒤흔들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은 성령의 위로와 감동에 싸였다. 옥스퍼드, 캠브리지에서도 그는 기도운동을 역설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3월 9일 버킹검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는 썬다의 메시지를 듣고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4월 6일 성금요일에는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가 시무했던 Metropolitan Tabernacle Church에서 설교했다. 부활 주일 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갔다. 글래스고우나 에딘버러에서도 은혜로운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설교는 자연을 비유로 들어하는 설교로서 그리스도만 증거 하였다. 영국에서 300여 집회 초청을 받았으나 다 응할 수 없었고, 마침내 1920년 5월 30일 미국으로 건너가 주요도시 순회전도를 하였다. 물질로 병들어 가는 미국인의 정신문화와 교회의 앞날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 전도집회를 인도한 후 호주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인도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선교지 티벳 고원으로 다시 올라갔다. 간디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만나 비폭력 이론을 ‘산상수훈’에 연계하면서 간디가 눈물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저 눈물이 온 인도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인도를 해방시키는 폭풍이 되리라. 다음날 헤어질 때 간디가 썬다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간디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그의 앞날을 붙들어 주시어서 그가 어둠뿐인 인도대륙에 빛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경건생활은 저녁에 목욕을 하면서 ‘주여 정화수로 나를 씻기소서. 우슬초로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더 희리이다’며 씻고는 밤이 깊도록 기도하고 묵상에 잠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읽고 묵상한 말씀 중 이해가 안간 부분에 대해 하루가 지나기 전인 밤 시간에 다시 묵상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의 묵상 성경공부는 먼저 조용한 마음으로 성경구절을 읽거나 또는 머리 속으로 떠올려 읽은 후 기도하면서 그 뜻을 음미한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관련되는 구절들을 대각으로 맞추어 증거를 관주케하고, 뜻을 꿰어 상고를 한다. 한동안의 묵상 성경공부가 지나면 직관으로 숨은 뜻을 꿰뚫고자 생각들을 더 세우지 않고 다시 기도 드리면서 주님 지혜를 구한다. 물론 묵상보다는 기도가 더 길다. 그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데 객실 내 한 마술사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마술을 자랑하기 시작하는데 마술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 이 차안에 높은 신을 공경하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1922년 1월 29일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성지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아스완댐을 건설한 영국인 윌리엄 윌콕스(William Willcocks) 경의 안내로 베들레헴, 나사렛, 베다니, 여리고, 헤브론, 사해, 요단강, 갈릴리 바다, 가버나움, 세겜, 헐몬산을 거의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스위스에 가서 여러 교회 집회 인도를 강행하였다. 병든 서구의 문명을 나무라면서 예수를 닮자는 설교를 담대히 선포하였다. 3월 3일 스위스 로잔느에서 행한 설교에서 서구문명을 ‘동물주의’라고 혹평했다. 기도 없는 유럽 교회는 죽은 교회요,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호흡(기도)을 나누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는다고 경고했다. 독일, 프랑스를 방문하여 말씀을 증거하면서 오직 예수만 증거하였다. 과로에 위궤양, 폐결핵이 그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유럽 순방 전도여행을 마치고 1922년 12월 초 인도로 돌아와서 계속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그후 3년 동안 건강회복을 하는 중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1924년 9월에 <종교들의 진면목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몇가지 생각>(The Search after Reality Thoughts on Hinduism, Buddhism, Muhammadanism, and Christianity)란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독일에서는 저명한 하일러(F. Heiler)박사가 1924년 를 출판하였다. 일부에서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이단으로 몰기도 했다. 1925년 11월 30일 썬다는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자신의 책 출판에서 들어온 인쇄 전액과 합해 복음전도 희망자들을 위한 자선 및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 계속 집필활동과 전도여행을 하는 중 1929년 4월 18일(36세) 수바투를 떠나 티벳을 향해 간 썬다는 그 후 소식이 없었다. 동사를 했거나 순교를 했거나 승천을 했거나 칩거를 했거나 여러 추측이 나오나 그후 소식이 없음은 하나님만이 그의 최후를 아시기 때문이다. 1929년 9월 3일 나병원 왓슨 원장이 썬다의 모든 친구들에게 회람편지를 내면서 “…이제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With and Without Christ)가 올해 발간되어 나왔습니다”고 알렸다.

 

 

THE LIFE OF Sundar Singh

 

1889 - Born at Rampur, Punjab

1903 - Conversion

1904 - Cast out from home

1905 - Baptised in Simla; begins life as a sadhu

1907 - Works in leprosy hospital at Sabathu

1908 - First visit to Tibet

1909 - Enters Divinity College, Lahore, to train for the ministry

1911 - Hands back his preacher's license; returns to the sadhu's life

1912 - Tours through North India and the Buddhist states of the Himalayas

1918 to 1922 - Travels worldwide

1923 - Turned back from Tibet

1925 to 1927 - Quietly spends time writing

1927 - Sets out for Tibet but returns due to illness

1929 - Attempts to reach Tibet and disappears

 

http://www.southasianconnection.com/articles/53/1/Sadhu-Sundar-Singh---A-Scandal-to-the-Comfortable/Page1.html 에 의하면 선다싱은 1889년 출생한 것으로 나온다.

 

http://www.superzeko.net/tradition/AugustoHermetFedeCristianaInUnMisticoIndiano.html 에는 더 선다싱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www.calvarycomics.com/comics/sadhu/index.html 선다싱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려 인터넷에 올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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