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종교개혁

2011. 5. 6. 01:05교회사자료/4.종교개혁사

루터와 종교개혁의 시작



1) 루터와 종교개혁의 발발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복잡하여 많은 점에서 개혁이 요구되었으나, 어떤 새로운 개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15세기 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만스펠트 공작령인 아이스레벤 (Eisleben) 에서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루터의 할아버지, 즉 루더 (Luder) 가정은 아이스레벤 큰처에 있는 뫼라 (Moehra) 출신의 농부였다. 루터의 부친인 한스(Hans)는 네 아들 가운데 장남이었고, 막내가 부친의 농가를 상속받기 때문에 1483년 가을 아이제나흐 (Eisenach) 의 린데만 (Lindemann) 출신인 부인 마가레트 (Margarete) 와 함께 새로 발견된 구리광에서 광부로서 일하고자 만스펠트 공작령인 아이스레벤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483년 11월 10일 자정 무렵 그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다음날 베드로 교회에서 신부인 바톨로메우스 렌네베쳐 (Bartholom us Rennebecher) 의 집례로 그 날의 성인인 마틴 (Martin)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루터의 아버지는 이곳 아이스레벤에서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그 때문에 1484년 초여름 작은 가족을 이끌고 만스펠트 (Mansfeld) 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우선 일반 갱부로서 일했다. 그러나 1491년 다른 만스펠트인과 함께 작은 제련소를 임대하는데 성공했고, 곧 유명하게 되었으며, 재산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다. 1488년 마틴은 시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읽기, 쓰기, 노래하기, 그리고 라틴어를 배웠다. 라틴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알렉산더 드 빌레디에 (Alexander de Villedieu) 의 교과서 (Doctrinale), 라틴어 구문론에 의거하여 동사변화와 명사변화를 읽혔다. 어린 마틴은 Pseudo-Cato, 이솝 그리고 Terenz 를 배웠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비교적 엄했고, 경건이 특별히 지배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이었다. 1497년 봄에 마틴은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의 성당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성당학교에서 강의한 공동생활형제단 (Br dern vom gemeinsamen Leben) 과 함께 살았다. 경건운동인 새로운 헌신 (Devotio moderna) 이 어린 마틴에게 특별히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공동생활형제단의 종교적인 진지함이 마틴에게도 역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498년 부활절에 그는 마그데부르크를 떠났다. 왜냐하면 부모가 그를 저렴한 비용이 드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신부학교 (Pfarrschule St. Georg) 로 보냈기 때문이다. 루터는 경건한 고타 (Cotta) 의 가정에 묶으면서 샬베 (Schalbe) 의 집에서 매일 양식을 얻었다. 물론 그 대가로 루터는 그 집 자녀들의 학교 숙제를 돌봐주어야만 했다. 프란시스코적인 영향으로 고타와 샬베의 가정에는 중세후기의 경건이 크게 지배했고, 어린 마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501년 4월 말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의무과목인 자유예과 (artes liberales) 의 7 과목, 즉 문법, 수사, 변증의 세 과목 (Trivium) 과 수학, 음악, 지리, 그리고 천문의 네과목 (Quadrivium) 을 공부하는 인문학부에 등록했다. 인문학사 학위 (magister artium) 로 이러한 과정을 마친 사람은 더 높은 그 다음 단계의 학과, 즉 신학, 의학 또는 법학공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루터는 인문학부의 규정들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완수했고, 1505년 1월 7일 인문학사 학위 시험을 통과했다. 에어푸르트 대학의 학문적 경향은 새 길 (via moderna), 즉 오캄의 인식론적인 원리를특징으로 하는 노선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의하면, 실재 (Realitaet) 는 개별적인 것이거나 혹은 경험되는 것이며, 실재의 틀을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보편 개념들은 정신내적인(intramentale), 즉 우리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 실재이다 (universalia sunt post res).



루터의 가장 중요한 스승은 아이제나흐 출신의 요도쿠스 투르트페터 (Jodokus Trutvetter) 와 우징겐의 바톨로메우스 아르놀디 (Bartholomaeus Arnoldi von Usingen) 였다. 1518년 5월 9일자 투르트페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터는 스승인 그에게서 성서적 진리와 자연적 이성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고 쓰고 있다: Ex te primo omnium didici, solis canonicis libris deberi fidem, ceteris omnibus iudicium (rationis). (WAB 1,17 1,72f.: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에게서 나는 모든 성경에서 신앙만이 가장 중요하며, 다른 모든 것은 이성의 판단이라는 것을 배웠다"). 루터의 이러한 회상은 새 길 (via moderna) 이 대변하는 철학과 계시의 엄격한 구분과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인문학부를 마친 후 루터는 -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루터는 1505년 6월 2일 스토테른하임 (Stotterheim) 에서 커다란 폭우를 만났다. 번개가 그의 옆을 때렸고, 그로 인해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으며, 성 안나 (die heilige Anna) 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간절히 기도하며 "내가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덧붙였다. 극도로 긴박한 상황에서 이러한 서원이 튀어나오긴 했으나,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루터는 이미 그 이전에 수도사가 될 가능성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청난 수의 수도원, 당시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의 수도원 종사자들, 구원에 대한 불안등 이러한 가능성을 깊이 고민하며 영원한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할 동기는 충분했다.



그는 우선 에어푸르트에서 이처럼 우연히 이루어진 서원이 정말로 구속력이 있는지를 생각한 후에 수도사가 되는 길을 택했고, 1505년 7월 17일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엄수파 (Augustiner - Eremiten) 수도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부모도 루터의 결정에 동의했다. 견습적인 수련기간 후 루터는 1506년 9월 서원식을 했고,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정식 회원이 되었다. 금욕적 삶의 수행이 초기 수련시절의 주된 교육내용이었다. 처음에 그는 다른 모든 초보수련생들처럼 수련부장인 요한 폰 그레펜슈타인 (Johann von Grefenstein) 으로 부터 수도원에서의 행동방식과 어거스틴적 규율에 대해 교육받았다. 교육의 큰 비중은 영적인 교육수단인 성서강의에 있었다. 이것은 고해와 더불어 수련생 교육의 핵심을 이루었다.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수업과 더불어 수련생은 동시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관찰해야만 하며,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 규정에 따라- 수련부장에게 큰소리를 신중하게 그리고 겸손히 고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보 수련생인 루터에게 내면적인 자아분석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잘 알려진 그의 수도원의 영적시련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전보다 더욱 그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과 심판에 대한 공포에 사로 잡혔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수련부장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루터를 영적으로 돕고자 힘썼다. 격렬한 영적시련은 간혹 평안한 상태를 동반하며 계속되었고, 이때마다 루터는 만사를 제쳐두고 성서강의와 중세후기의 교육적인 서적들을 탐닉했다. 그렇지만 구원에 대한 공포 내지 심판의 두려움은 결코 그를 자유케 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를 엄습했다. 당시의 그러한 경험을 루터는 1518년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형벌을 종종 겪었다고 확신한 한 사람 (고후 12,2) 을 나는 알고 있다. 형벌은 잠시였지만, 말로도 글로도 형언할 수 없을정도로,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고,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형벌이 절정에 도달하거나 반나절만 지속되었어도, 아니 한 시간의 십분의 일만 지속되었어도 그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며, 그의 모든 뼈는 재가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는 도망도 없고, 위로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모든 것이 기소자가 될 것이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시31,22). 이순간에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자가 없다.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시6,1). 이 순간에 영혼은 언젠가는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형벌은 영원하고, 영혼은 그것이 잠시뿐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도움을 바라는 부질없는 욕망과 땅을 뒤흔드는 한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혼은 어디에서 그가 도움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벌어진 간격은 너무나 커서 그 모든 다리들을 동시에 셀 수 있으며, 가장 통렬한 고통이 아닌, 두려움, 전율,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찬 그곳에는 빈각이 없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자. 공이 일직선상의 선을 지나가게 될 때, 닿게 되는 선의 모든 점은 공을 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전체와 접촉되는 것은 아니다. 영혼도 이와같은 원리이다. 그 위를 지나는 작은 홍수라도 접하면 영원한 형벌 외에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며 마시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머물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간다. 만약 지옥의 형벌, 즉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고 그에 알맞는 위안도 존재하지 않는 공포가 살아있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면, 연옥에서의 영혼의 형벌보다 더 긴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내적인 불이 외적인 불보다 훨씬 더 무섭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영적시련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인식과 자신을 낮춤에서 신적인 심판을 선취하는데 목표를 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의 겸손신학은 작은 도움만을 줄뿐이었다. 중세의 성례전 역시 루터를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왜냐하면 성례전을 통해 매개된 은총을 공로가 되는 행위를 통해 보전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에어푸르트 대학교수들의 스콜라신학은 은총의 수용을 "facere, quod in se est"의 성향에 매어 놓았다. 이것은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모든 것을 정말 다 행하였는지 결코 알 수 없어 마음졸이는 수도승을 불안케 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겪은 영적시련과 침체를 병리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심리분석가인 에릭슨 (E. Erikson) 의 연구 (Der junge Mann Luther, 1970) 와 함께 일찍이 부인되고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에서의 영적시련은 계속 평온한 국면과 교체되었고, 루터는 높은 영적인 업적을 쌓을수 있는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루터의 영적시련의 경험보다는 새시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루터뿐만 아니라 중세후기 사람들의 특징이었던 종교적 동질성 위기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루터는 이러한 동질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장기간의 지불유예 (Moratorium) 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유예의 기간에도 루터는 언제나 수도원의 규율을 잘 지켰고, 수도원 예배 공동체 속에서 살았다.



1506년 수도사 서원식을 거행한 후, 루터는 지체없이 사제가 될 준비와 이러한 목적으로 튀빙겐의 신학교수인 가브리엘 빌 (Gabriel Biel) 의 미사정경의 주해 (Expositio Canonis missae) 를 공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507년 4월 4일 루터는 에어푸르트 성당에서 사제가 되었고, 1507년 5월 2일주일 칸타타에서 수도원 동료, 부모 그리고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임신부의 첫 미사를 축하했다. 신부가 된 후 수도원 원장은 정식 신학공부를 그에게 명했다. 이것은 먼저 교단자체의 일반수업에서 시작했다. 선생이자 수업의 책임자는 신부였던 요한 나딘 (Johann Nathin) 이었다. 그는 튀빙겐의 오캄주의자인 가브리엘 빌의 학생이자 추종자였다. 그는 서방에서 조직신학 수업의 기본 텍스트로 사용되었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 수업외에도 루터는 주해강의를 들었다. 해석학적인 참고서로서 성서주해 (Glossa ordinaria) 를 사용했다. 이것은 중세 주해가인 니콜라우스 폰 리라 (Nikolaus von Lyra) 가 성서 전체를 주석한 책이다. 또한 그는 조직신학적이고 신학적인 핵심 주제를 다룬 가브리엘 빌, 피어르 다이 그리고 오캄의 교의학 주해를 공부했다.그러므로 루터는 먼저 유명론적이며 오캄주의적인 신학을 공부했으나, 이것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시련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1508년 가을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에 할당된 도덕철학 (Moralphilosophie) 을 볼프강 오스테르마이르 (Wolfgang Ostermayr) 신부 대신에 비텐베르크 대학 인문학부에서 강의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는 이제 한주에 네 번씩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메니우스 윤리학을 읽어야만 했고 야간에 한번 학생들의 토론을 지도해야만 했다. 동시에 그는 신학부에서 자신의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1509년 3월 비텐베르크에서 성서학사학위 (Baccalaureus biblicus) 를 받은 후, 인문학부의 도덕철학 강의 외에도 신학부가 그에게 지정하는 성서의 몇 개의 장에 대하여 두 번째 강의를 해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1509년 10월 루터는 에어푸르트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스스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 (Sentenzen)을 읽었다. 루터는 당시 이 책을 에어푸르트 수도원 도서관에서 빌렸고, 여백에 기입해 넣은 일련의여백주기 (Randbemerkungen) 는 아직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루터는 여전히 오캄주의 신학의 노선에 있고, 그들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죄론과 은총론에 있어서는 새로운 강조점도 나타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악취가 나는 철학자" (ranzigen Philosophen) 라고 비판도 하고 있다. 그의 인간학이 스콜라 신학을 잘못 인도하여 인간에게 있는 은총을 영혼의 내재적 질 (eine habituale Qualitaet) 로 이해하도록 했고, 이로 인하여 은총의 직접성 (Unmittelbarkeit) 과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성격 (Unverfuegbarkeit) 이 손상될 위험에 빠졌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 공부는 1509년 가을 루터가 조직신학사(Sententiarius)가 됨으로 일단락 되었다. 롬바르두스 연구와 함께 그는 이제 어거스틴을 연구했고, 어거스틴의 소책자들 외에도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과 신의 도성 (De civitate Dei) 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 저서들을 아직은 연구하지 않았다. 1510년 11월 루터는 수도원내 다른 동료 한 사람과 더불어 로마에 파송되었다. 어거스틴 엄수파 독일지부 총 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가 주도하는 규율의 통합, 즉 좀 더 강한 규율의 추진과 작센지역의 헤이해진 수도원들의 수도사 통합을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름으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에서 개최된 수도원 총회에서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러한 반박은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고,얼마 지나지 않아 기각되었다. 루터는 4주간 로마에서 체류했다. 르네상스적인 로마 성직자들의 세속화가 루터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주요 교회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거기서 제공하는 은총의 수단을 얻고자 노력했다. 로마에서 루터가 종교적 오류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엄청난 은총이 그곳에 있음을 느꼈으며, 결국 긍정적인 인상이 더 많았다. 로마에서 돌아온 후 루터는 에어푸르트에서 수도원내 대다수의 의견과는 달리 독일지부총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의 중재안을 지지했다. 스타우피츠는 결국 루터를 1511년 비텐베르크로 불렀고 박사과정으로 신학수업을 끝마치도록 요구했다. 그는 루터를 동시에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담당 설교자로 임명했다. 루터는 이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규칙적으로 설교해야만 했다. 1512년 10월 19일 박사과정 최종 시험인 토론에 이어 학위수여식이 개최되었고, 1512년 10월 22일 신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대학평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스타우피츠는 이제 수도원 업무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성서학 교수직(lectura in biblia)을 루터가 수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결정은 초기 루터의 생애에 중요한 진로를 확정지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행한 집중적인 성서주해는 스콜라신학의 껍질을 그에게서 하나씩 벗겨주었고, 1515/16년 바울서신 주해를 토대로 소위 종교개혁적인 돌파가 일어났다. 루터가 영적시련을 겪을 때에 그를 위로하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도록 조언을 해준 것은 스타우피츠였다. 어느날 도대체 그 자신이 예정된 자인지 혹은 아닌지에 대한 송곳과도 같은 문제가 그에게 다시 일어났을 때, 스타우피츠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예정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시작하라.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라. 그러면 예정으로 인한 영적시련은 사라질 것이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금욕적인 겸손의 참회를 할 때도 참회를 하나님이 은총으로 선물한 사랑의 결과라고 토마스적으로 이해함으로서 영적시련 가운데 있는 루터를 계속 도와주었다. "참된 참회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번개처럼 나를 강타했고, 장사의 화살처럼 내 영혼에 박혔다"고 루터는 1518년 쓰고 있다.



스타우피츠에게서 넘겨받은 성서학 강의 (lectura in biblia) 는 루터로 하여금 스타우피츠가 해준 영적인 상담들을 바울 서신 주해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주었고, 종교개혁의 기반을 삼도록 이끌어 주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의 강의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고, 아마도 창세기를 읽었으며, 1513년 8월부터 1515년 7월까지 시편을 강의했다. 주해를 위해 시편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매일 시편을 노래했었고,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이 있었다. 가령 시편 31편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In tua iustitia libera me) 가 그를 괴롭게 했다. 왜냐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하며 자유케 하는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1513-1515년의 일차시편강의 (Dictata super psalterium) 는 볼펜뷔텔 시편 (Wolfenbuetteler Psalter) 에 자구해석 (Glossen) 이 그리고 드레스덴 시편 (Dresdner Psalter) 에 본문주해 (Scholien) 가 남아 있다. 오늘날 볼펜뷔텔의 에른스트-아우구스트 도서관 (Ernst-August-Bibliothek) 에 있는 자구해석 (Die Glossen) 은 루터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배려하여 줄 간격이 넓게 인쇄한 불가타 시편본문을 사용했다. 강의에서 그는 줄과 줄 사이에 있는 넓은공간에 자구해석을 기입했고, 그 후 소위 본문주해에 자필로 쓴 각 구절의 주해를 시작했다. 이러한자료를 근거로 우리는 중세 후기 오캄주의로부터 종교개혁적인 성서신학자가 되기까지 루터의 발전을 추적할 수 있다. 중세의 전통적인 이해처럼 루터도 시편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다윗은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운명을 예언적으로 선취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루터는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인 파버 스타플랜시스 (Faber Stapulensis) 와 그의 시편주해인 5개역 대조시편 (Psalterium Quincuplex) 의 도움을 받아 시편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를 구분하고 있다. 즉 하나는 다윗에게 연관시키는 역사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historicus) 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연관시키는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propheticus) 이다.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propheticus) 가 루터에게는 시편이 가진 본래적 의미 (sensus primarius) 이다. 사중적 성서해석이라는 중세의 전통적인 주해방식에 맞추어 루터는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사중적 성서해석이란 이미 언급한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와 함께 개개인과 그의 행동에 해석의 방향을 맞추는 도덕적 의미 (sensus tropopogicus), 교회에 초점을 맞추는 비유적 의미 (sensus allegoricus), 그리고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해석하는 신비적 의미 (sensus anagogicus) 를 말한다. 루터 자신은 시편의 그리스도론적 의미인 예언적 문자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의 관계에 점점 더 집중했다: "왜냐하면 예언적 문자적 의미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도덕적 의미에 의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신앙을 말한다" (WA 3,458,8-11). 그러므로 시편 71(72)편 2절에 대한 본문주해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 (iudicium Dei) 과 하나님의 의 (iustitia Dei) 를 도덕적 의미로 겸손과 신앙의 관계로 해석한다. 죄인인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시에 나타났다.



어떻게 십자가의 역사를 신앙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를 루터는 도덕적 해석 (sensus tropologicus) 의 틀로 주해한다. 도덕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겸손 (humilitas) 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fides Christi) 이다. 신앙인은 겸손으로 자신을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취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할 것임을 바랄 수 있다. 비록 여기서 루터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의를 구분하고, 겸손과 신앙을 도덕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술은 금욕적인 그의 십자가 신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은 믿는 자는 참회의 자기 심판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선취하고 (고전 11,31),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향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신앙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연관시키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가 일차시편강의에 이어 1515년 11월부터 1516년 9월까지 한 로마서 강의에서 비로소 종교개혁적인 돌파구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강의는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강조점은 더 이상 겸손에 있지 않으며, 신앙에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루터가 근원적 죄 (peccatum radicale) 라고 말하는 원죄 (Erbs nde, WA 56,277,12) 를 멀리하며 우리 밖에 그리스도 안에 (extra nos in christo, WA 56,158,9)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신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며 (고전 1,30),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를 향한 신앙과 소망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의 모든 찬양은 그리스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신앙을 통해 교회 안에 사시는 것이다" (WA 56,279,23-26).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외적이며 낮선 하나님의 의이다 (WA 56,158,13f. 159,2). 우리 안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나,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로 인하여 덮여 있고, 간주되지 않는 죄이다" (WA 56,280,2f.). 로마서 1장 17절 해석에서 루터는 그 때문에 사람 앞에서의 의 (Gerechtigkeit) 와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구분하고 있다.



인간적인 교리에는 인간의 의가 드러나고,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복음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며, (즉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의롭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지), 즉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마가가 마지막에 말한 것이 이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구원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그것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의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의를 통해서 우리가 그로부터 의롭게 되어지는 의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성 어거스틴은 그의 책「영과 문자에 관하여」(Vom Geist und vom Buchstaben)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는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으로 인간을 의롭게 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주의 구원' (Heil des Herrn) 이 그것을 통해 그가 구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같은 책 제9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행위에서 오는 인간의 의와는다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 3권에서 분명히 쓰고 있듯이, 그의 의견에 의하면 의는 우리의 행위를 쫓고 그리고그 행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의는 행위에 앞서며 행위는 그 의로부터 나온다.



루터가 여기서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의 발견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강조하지 않고자 힘쓸수록, 종교개혁적인 하나님의 의(義)의 발견은 해석학적인 이러한 진술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중세신학이 생각하듯, 인간이 쌓은 공적을 -비록 그것이 은총의 도움을 받아 쌓았다고 할지라도 - 마지막 날에 심판하고 재판하는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이며, 이 의가 구원의 원인이요,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게 됨을 루터는 인식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 이해는 루터가 로마서 강의 이후 집중적으로 사용한 반펠라기우스적인 어거스틴 저서「영과 문자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 제 9 장과 11 장에 의해 확인되고 있으며, 인간의 의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모순되고 있다. 루터는 1506년 요한네스 암머바흐 (Johannes Amerbach) 가 바젤에서 출판한 11권으로 된 어거스틴 전집중 반펠라기우스적인 글에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로마서 강의 이후 이 책들을 자신의 강의에서 즐겨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루터가 그레고르 폰 리미니 (Gregor von Rimini)에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 엄수파의 일원인 이 사람을 루터는 1519년에야 비로소 인용하고 있다 (WA 2,394,31-395,14). 특히 루터는 바울과 어거스틴을 토대로 중세후기 신학자인 가브리엘 빌에 대해 펠라기우스 혐의를 제기한다. 루터는 인간이 만약 자신에게 있는 것을 행할 때 (facere quod in se est) 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원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WA 56,502,14ff.). 자유의지는 구원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며(WA 56,182,9f. 385,15ff.), 욕망 (concupiscentia) 은 스스로 이타적이기를 원하지만 은총이 없이는 그럴 능력이 없는 무능한 전인(全人)과 관계하고 있다 (WA 56,356,2ff). 루터는 이제 원죄를 항구적(恒久的)이면서 근원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인격의 죄 (Person-S nde)라고 강조한다 (peccatum radicale: WA 56,277,12). 어거스틴의 도움 (de nupt. et conc. 1, 10,25,28) 으로 루터가 확신하듯이, 원죄는 "세례에서 용서를 받지만,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WA 56,273,9ff.). 원죄는 새로운 유혹으로 다시금 죄를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불꽃 (fomes) 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다 (WA 56,271,6ff). 죄 사함은 특성의 변화 (Eigenschaftswechsel) 가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통치 아래 머무는 통치권의 변화 (Herrschaftswechsel) 이다 (WA 56,334,14-17). 하나님의 의는 이제 루터에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가 증명해야만 하는 습성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의가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만 그에게 주어지는 낯설고 외적인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simul iustus et peccator, WA 56,272,17). 즉 인간은 그 자신 (혹은 우리) 밖에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그 자신 안에서 죄인인 것이다 (gerecht extra se (nos) in Christo. Suender in sich selbst).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은) 마치 한 병자의 비유와도 같다. 그에게 가장 확실한 건강을 약속하는 의사를 믿고 약속한 건강을 희망하면서 그의 처방지침을 지키고, 약속한 건강회복을 위태롭게 하지않고,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사가 그에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그만두는 환자와 같은 것이다. 이 환자는 그렇다면 지금 건강한가? 아니다. 그는 아픈 동시에 건강하다. 현실에 있어서는 아프다. 그러나 그에게 이미 건강하다고 설명한 그가 믿는 의사의 확실한 언약 (ex certa promissione) 에 근거하여 건강하다. 왜냐하면 환자는 의사가 그를 치유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의사는 이미 이 환자를 치유하기 시작했으며, 의사는 그 때문에 이 환자가 사망할 것 (원죄) 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제 그(환자)는 완전히 옳은가? 아니다. 그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simul peccator et iustus); 실제로는 죄인이다. 그러나 완전히 치료하기까지 죄로부터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과 참작 때문에 의롭다 (peccator rei vera, sed iustus ex reputatione et promissione Dei certa). 그러므로 그는 희망 안에서 완전히 구원받았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용납 받을 것이라는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이러한 희망은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 (certa promissio Dei) 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스콜라 신학이 그에게 가르쳐준 주요한 구원의 확신을 내려놓고 있다. 인간은 오로지 그 자신 밖에 (extra se)그리스도안에서 내지는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 안에서 의롭게 되기에 구원과 은총의 실현을 더 이상자기 자신에게서 추론하지 말아야 하며 금욕적인 자아분석에 근거시켜서도 안된다. 이것으로 루터는 수도원에서 자신이 겪은 영적시련을 극복하도록 그리고 단계적으로 자신의 정체성 위기 (Identitaetskrise) 를 끝내도록 도와준 종교개혁적인 입장에 도달했다.



종교개혁 인식과 관련해 로마서 강의를 통해 얻은 것을 루터는 후에 그 자신이 겪은 종교개혁 체험으로 여러번 요약 기술했다. (비교. WATR 3,32〔1538〕; WATR 5.52,47〔1540〕; WATR 5.55,18〔1542/43〕그리고 무엇보다도 1545년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한 라틴어로 쓰인 그 자신의 전집 (Opera latina) 서문, WA 54,185,12ff.). 위의 여러 가지 보도 가운데서 우리는, 비록 그것이 회고일지라고, 종교개혁적 인식의 관철을 핵심적으로 조명해주고 있는 두 가지를 선택하고 싶다. 우선 1532년의 탁상담화 (Tischrede) 에 있는 글이다.



"의로운" 그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말들은 번개처럼 내 양심을 강타했다. 그 말들을 들을 때 나는 무기력해진다. 하나님이 의롭다면, 그는 벌을 내릴 것임에 틀림없다. 한번은 내가 이 탑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에 있는 탑을 의미한다) 속에서 이 말씀 (롬1,17):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Der Gerechte wird seines Glaubens leben)와 "하나님의 의" (Gerechtikeit Gottes) 에대해서 곰곰히 숙고했을 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리가 의로운 자로서 신앙으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믿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영혼은 기운을 다시 얻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말들은 내게는 가장 사랑스러운 말들이 되었다. 이 탑에서 성령이 성경을 내게 드러내 보이셨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이 늘 성탑 체험으로 기술되는 것은 바로 이 본문 때문이다. 발견의 시점에 대하여 루터는 이 탁상담화에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내용에 대하여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까지 하나님의 의를 벌하시는 의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의는 더 이상 은총 때문에 가능했던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이며, 이것을 우리는 신앙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적 인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루터는 1545년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한 그의 라틴전집 (Opera latina) 서문에서 한번 더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나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한 바울 서신을 강의한 후 이제 자신 있다고 확신한 가운데 시편을 새로이 주해하기 위하여 이 해 (1518년말) 에 다시 시편으로 되돌아갔다. 로마서에 있는 바울을 알고자 하는 놀라운 열정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의 차가움이 아닌, 로마서 1장 17절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의 한 단어였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이 단어를 미워했고, 모든 박사들의 흔한 습관에 따라 소위 형식적인 또는 능동적인,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의롭고 불의한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벌하시는 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이 말을 가르쳤었다. 수도사로서 나는 흠이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고, 내 양심은 불안했으며, 나의 행위를 통하여 화해될 수 있다고 소망할 수 없었다. 나는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를 미워했다. 마치 불행하며, 원죄를 통해 영원히 저주받은 죄인들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으로 불행에 억눌려 있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말함으로 은밀한 모독이 아닌 엄청난 불평으로 나는 하나님을 불쾌해 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복음으로 역시 우리에게 그의 의와 그의 분노를 위협하고 있음에 틀림없지 않느냐? 이렇게 나는 혼란스런 양심 속에 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고자 하는 갈증에 목이 탐으로 끊임없이 바울의 이 구절에 대하여 문을 두드려 댔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겼다. 나는 그 말씀, 즉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의 연관성을 알기까지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이런, 즉 의인은 하나님의 선물로, 즉 믿음으로 산다고 이해하기 시작했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 즉 수동적인, 그것을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으로 의롭게 하시는데, 그것이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뜻임을 인식했다. 바로 여기서 나는 '나는 다시 태어났고, 문은 열렸고 나는 낙원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바로그로부터 성서전체가 나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기억하듯이 나는 성서전체로 달려들어 갔고 그리고 다른 개념에서도 비슷한 것을 확인했다. 가령 하나님의 역사 (Werk) 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능력 (kraft Gottes) 은 그것을 통하여 그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 (Weisheit Gottes) 는 그것을 통하여 그가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전에 내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미워했던 그 정도로, 이제는 나에게 가장 달콤해져버린 그 개념을 찬양했고, 바울의 이 말씀은 나에게 천국의 입구가 되었다. 그후 나는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에 대하여' (De spiritu et littera) 를 읽었다. 거기서 나는 기대와는 달리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비슷하게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때 그것으로 우리를 입히시는 의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완벽하게 언급하지는 않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로 주해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그가 가르쳤다는 것이 나의 눈에 띄었다.



위의 포괄적인 이러한 보도는 종교개혁적 발견에 대한 루터 자신의 진술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신하고 있다. 1)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것으로 죄인을 벌하시는 철학적으로 해석된 형식적이며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이며, 이것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쓰여진 것처럼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다. 2) 그는 어거스틴 특히 그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저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De spiritu et littera)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어거스틴 역시 여기서 인과적인 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의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의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완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가(Zurechnung)에 대하여 아직은 모든 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세례 또는 참회에서 하나님의 의가 죄용서라는 형태로 단지 처음에만 인간에게 인정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총 혹은 사랑과 동일 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의지를 공로가 되는행위를 하도록 회복시킴으로서 의롭게 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낯선 의는 믿는자에게 일생동안 인정되는 것이며, 신앙인은 행위에 앞서 믿음 안에서 완전히 단 한번에 의롭게 되는 것이다. 3) 복음은 새로운 율법 (nova lex) 즉 은총으로서 의를 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연유되는 수동적인 칭의의 계시이다. 4) 신앙에 의한 칭의의 발견은 루터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5) 거기서부터 루터는 이제 성서에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어휘들을 새롭게 이해한다. 6) 시점에 대하여는 바울 서신 주해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다룬 이후에 1518년 말 시편주해를 다시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적 발견의 시점에 대한 이러한 언급이 오늘날의 루터 연구를 서로 다른 두 개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나는 종교개혁적 발견을 로마서 강의시의 1515/16년으로 보는 초기설 (Die Fruehdatierung) 이며 (E. Hirsch, E. Vogelsang, G. Ebeling, R. Prenter, H.A. Oberman, L. Grane, B. Lohse, R. Schwarz), 다른 하나는 1518년으로 보는 후기설 (Die Spaetdatierung) 이다 (E. Bizer, O. Bayer, K. Aland, M. Brecht). 초기설에 의한다면, 루터는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바울서신을주해하는 동안에 발견했고, 후기설에 의한다면 바울서신 주해 후 이차시편강의을 시작하면서 발견한 셈이다 (1518-1521). 루터의 로마서 1장 17절 주해 (1515/16) 와의 내용적인 일치 및 거기서 보여주는 어거스틴의 저서 (De spiriru et littera) 인용과 로마서 강의가 보여주는 스콜라 신학과의 폭넓은 논쟁등은 본인에게는 초기설이 더 적합하게 보여진다. 그렇지만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를 해석학적으로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발견의 결과를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이에 상응하여 그의 신학은 여전히 이제는 그가 단계적으로 벗어야 할 중세 후기의 사상들을 담고 있었다.



로마서 강의를 통한 스콜라 신학과의 루터의 대립이 비텐베르크 대학 여론을 자극시켰다는 사실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루터는 스콜라신학과 자신의 대립을 토론하기 위해 당시 통용되었던,즉 학문적인 토론 방식을 활용했다. 그는 조직신학사 (Sententiar) 시험을 준비하는 제자인 바톨로메우스 베른하르디 (Bartholomaeus Bernhardi) 에게 "은혜 없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 (De viribus et voluntate hominis sine gratia) 몇가지 논제를 자신의 로마서 강의를 토대로 제시하도록 제안했다. 이 논제를 증명하는 데에는 성서 외에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저서가 사용되었으며, 인간은 은혜가 없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다거나, 또 은총을 예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배제되었다.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마귀의 노예이고, 그 때문에 인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때 단지 죄를 범할 뿐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자신의 에어푸르트 스승, 누구보다도 가브리엘 빌(Gabriel Biel)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신학 (die semipelagianische Theologie) 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여 은총을 예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집약된 문구인 "facere quod in se est"를 분명히 거부했다. 이러한 논쟁은 1516/17년 겨울 계속해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즉 어거스틴의 이해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학과 동료교수인 칼 슈타트 (Karlstadt) 는 루터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을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적 저서의 강의는 그러나 그로 하여금 루터가 바울서신을 주해하면서 바르게 어거스틴을 인용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1517년 4월 26일에 쓴 151개 논제에 그 자신이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스콜라 신학을 공격하는 입장으로 변하게 된 것을 표현하고 있다.



프란츠 귄터 (Franz Guenther) 의 성서학사 (baccalaureus biblicus) 취득 때문에 이루어진 1517년 9월 4일 루터의 논쟁「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 역시 스콜라 신학의 모순에 그 핵심이 있다. 루터는 가브리엘 빌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이 논제의 기초로 삼았다. 빌의 교의학 주해 (Sentenzenkommentar) 는 1514년에 출판되었고, 그 속에 있는 일련의 여백주기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루터는 이제 바울과 어거스틴을 근거로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반대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개인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스콜라의 수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그들의 본질을 이루는 목표(Entelechie)을 관조할 수 있는 영혼이다. 이 목표는 영혼이 덕스러운 행동을 실현할 때 도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그가 윤리적으로 선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실현할 때 그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식물이 그들의 목표, 그들의 본질을 싹에서 나무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실현하듯이, 물론 그 싹에는 이러한 나무의 성향이 본래 있는 것이기는 하나, 인간도 도덕적인 행동으로 그가 영으로 본 자신의 본질을 실현함으로서 참된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올바른 행위를 계속해서 수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



스콜라의 은총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점을 수용함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더 나아가서 스콜라 신학은 인간이 은총으로 계속 지원을 받아야 하며, 칭의는 세계내적인 목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론 전혀 알 수 없었을 영원한 목표, 즉 영원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인간없이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인간없이 인간을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어거스틴 이후로 계속 가르쳐 온 것이나, 스콜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동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이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혼론의 테두리에서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을 인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존재질서 (Seinsordnung) 인, 즉 이성과 자유의지의 협력에 개입시킴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또한 은총의 존재방식도 우리 안에서 윤리적인 행동의 실현 내지는 공적을 쌓는 행위에 의존하게 된다. 루터가 자신의 로마서 1장 17절 주해에서 하나님의 칭의 이해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 사상으로부터 이미 해방시켰다면, 그는 지금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즉 에어푸르트 스콜라 신학자들의 은총론 뿐만 아니라 스콜라 전성기의 신학자들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논제에서 이와 연관하여 다음과같이 날카롭게 언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윤리는 은총의 최악의 적이다.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 (Tota fere Aristotelis ethica pessima est gratiae inimica. contra scholast). (논제 41). 그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견해가 카톨릭 교리 (doctrina catholica) 에 모순되지 않는다" (논제 42) 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없이는 아무도 신학자가 되지 못한다" (Sine Aristotele non fit theologus) 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논제 43).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신학자가 되지 못한다" (immo theologus non fit nisi fiat sine Aristotele) 는 것이 옳다. (논제 44).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그의 존재론은 루터가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자신의 새로운 은총론을 해석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2) 1517년 면죄부 논쟁부터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까지



루터는 그 시대 교회의 불분명한 면죄부론을 학문적인 토론속에서 설명하고자 했고, 그러한 목적으로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만성절 (Allerheiligenfest) 하루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Schlo kirche)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를 붙였다. 같은 날 그는 개인적인 편지를 동봉하여 이 논제를 마인쯔의 알브레히트 (Albrecht von Mainz) 에게 보냈다.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마인쯔 교구와 통합된 마그데부르크에서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 (1503-1513) 가 베드로 교회 신축을 위해 발행한 일괄면죄부 (Plenarabla ) 을 도미니크 회원인 텟첼 (Tetzel) 을 통해 팔도록 허락했다. 같은 날 루터는 이 논제를 편지와 더불어 비텐베르크 소속 교구인 브란데부르크의 감독 히에로니무스슐체 (Hieronymus Schulze) 에게 보냈다. 루터는 후기 저서에서 이 논제를 붙인 날짜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에드윈 이저로 (E. Iserloh) 같은 카톨릭 교회사가는 루터는 결코 95개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붙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면죄부에 대한 소견을 기대한 채 언급한 교구 감독들에게 보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혀 또는 만족스럽지 않게 답변하였기에 루터는 의도한 토론에 초대하기 위하여 논제를 비텐베르크 안팎의 학자들에게 배부했다는 것이다. 면죄부 논쟁 (WA 1,528,18ff 그리고 WAB 1,245,358ff.) 의 일반적 시작에 대한 두 개의 언급에서 감독들에게 보낸 서신과 논제의 배부사이에 확실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기는하나, 그렇다고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토론을 목적으로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논제를 붙이지 않았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이 날짜는 물론 후에 멜란히톤이 1545년 루터 저작 2권 서문에 명시된 것이다. 멜란히톤이 이 날짜를 임의로 만들어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1517년 11월 11일 (WAB 1,121f.) 루터는 95개 논제를 에어푸르트에 있는 동료수사인 요한네스 랑 (Johannes Lang) 에게 보내며, 거기서도 이 논제를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네스 랑에게 보낸 편지에서루터는 감독에게도 역시 편지를 보냈음과 반응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고 있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실제로 만성절에 대학에서 통용된 방식에 따라 자신의 논제를 성교회 문에 부착했을 것이다. 면죄부 토론의 직접적인 동기는 자신에게 고해를 해야 할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피고해자들 (Beichtkinder) 이 면죄부를 구입함으로 고해의 필요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터보그 (J terbog) 또는 제릅스트 (Zerbst) 에서 면죄부를 구입했고, 이 도시들은 대주교인 알브레히 폰 마인쯔가 특히 브란덴부르크에서 도미니크 수도사인 요한네스 텟첼 (Johannes Tetzel) 에게 베드로면죄부 (Petersabla ) 를 판매하도록 허용한 도시였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 (Friedrich der Weise) 와 영주 게오르크 폰 작센 (Georg von Sachsen) 은 이에 반대하여 자신의 지역에서 베드로면죄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참회의 성례전에서 죄책과 함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은 용서받지만,그러나 죄인의 죄를 경감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이 부과한 한시적인 형벌을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한시적인 형벌사상은 중세에 교회가 부과하는 참회형벌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참회형벌은 참회를 행할 때에 사제가 부과하는 것이며, 고해자는 경건한 행동으로 이렇게 부과된 형벌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시적인 형벌을 제거할 수 있었다. 면죄부는 바로 교회가 부여하는 이러한 참회형벌의 사면을 보증해 주었다.



면죄부의 역사를 보면 우선 교회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과 특정한 십자군을 위한 기금 기부자를위해 면죄부를 발행했었다. 1300년 보니파츠 8세 (Bonifaz VIII) 는 소위 기념면죄부 (Jubelabla ) 를 발행했다. 이 면죄부는 로마의 건국을 기념하는 해에 로마에 있는 베드로와 바울의 묘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보니파츠 8세는 그러한 기념해는 100년마다 열리도록 규정했지만, 기간은점점 더 단축되어서 돈을 주고 일괄면죄부 (Plenarabla ) 내지는 특별면죄부 (Partikularabla ) 를 구입 할 가능성은 점점 더 많아졌다.



교황 율리우스 2세 (Julius II) 는 로마에 베드로 성당을 신축하고자 했고, 그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1506년 일괄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에게 이 면죄부의 판매를 위임했고, 면죄부 판매 수입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서 차용한 29000 굴덴의 융자금을 상환하는데 사용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는 그 중 14000 정도의 두카텐 (Dukaten) 을 마인쯔 교구를 인수하는데 드는 상납금과 예복비 (Servitien- und Palliengelder) 명목으로 교황청에 지불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10000 두카텐을 마그데부르크 교구를 인수한 마인쯔 대교구의 누적금 명목으로 로마에 지불했다. 물론 당시의 교회법이 이러한 것을 적법하게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면죄부에 대하여 그 이전에도 이미 비판적으로 언급했었다면, 베드로 면죄부는 이제 면죄부 논리와 그 효용가치에 대하여 학문적인 토론을 통해 설명하려는 동기를 제공했다. 로마의 금전주의 (Fiskalismus) 뿐만아니라, 돈을 모으기 위한 형식적 참회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의 새로운 종교개혁적인 인식의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을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칭의를 가진 신앙인은 동시에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모든 형벌의 사면을 가진 것이다. 동시에 의롭게 된자의 새로운 삶은 완전한 참회인 성서적 회개 (metanoia) 의 의미에서 볼 때 이미 용서받긴 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원죄의 세력으로부터 매일 매일 돌아섬 속에 있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루터는 면죄부 논제 제1조에서 "우리들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신자의 모든 삶이 참회이기를 원하셨다"고 강조한다. 논제 1-4에서 루터는 복음적인 참회는 신자의전 생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황은,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가 부과한 교회적인 참회 형벌만을 사해줄 수 있다 (논제 5-8). 형벌을 사해줄 수 있는 교황의 권한은 죽은 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논제 8-13). 그 외에도 교황은 연옥의 심판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죽은 자들에게 단지 중보기도의 형태 (per modum suffragii) 로만 면죄를 줄 수 있다 (논제 8-29). 면죄부가 살아있는 자들에게 갖고 있는 기능에 관한한,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매개할 수 없다. 참된 회개는 면죄부가 없어도 죄용서와 형벌의 사면을 가져오는 것이다 (논제 36-40). 논제 36에서 루터는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된 참회가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없이 면죄부 없이도 그에게 부여되는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 선한 행위가 사실 면죄부보다 더 나은 것이며, 그것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논제 43-55는 복음의 설교가 모든 면죄부 설교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힌다. 이것은 면죄부가 판매된 곳에서 면죄부 설교는 다른 모든 설교보다 우선적이라는 면죄부 지침을 루터가 반대하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교회의 참된 보고 (thesaurus ecclesiae) 는 복음이며 확산되고 있는 면죄부 설교는 복음과 모순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논제 69-80). 논제 62는 다음과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당시 인정되고 있던 면죄부 논리의 핵심, 즉 1230년 성 체르의 휴고 (Hugo von St. Cher)가 전개한 그리스도와 성자의 잉여 공로의 보화인 교회보고론 (Theorie vom thesaurus ecclesiae) 을 반대한다.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이 쌓은 잉여의 공로를 면죄부의 형태로 매각한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6세 (Clemens VI) 는 1343년 1월 27일자 칙령 우니게니투스 (Unigenitus) 에서 이러한 이론을 공식적 교리로 삼았다. 논제 81-91은 결국 평신도들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다. 논제 86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오늘날 가장 부자인 크라수스보다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교황은 왜 베드로 성당을 그 자신의 돈이 아닌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지으려 하는가?" 논제 92-95는 결국 면죄부가 주는 거짓된 평화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참된 평화에 대립시키고 있다.



루터의 논제는 신속하게 전 독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아직 1517년 말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라이프찌히 (Leipzig), 뉘른베르크 (N rnberg) 그리고 바젤 (Basel) 에서 출판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독일어역 번역판도 나왔다. 루터가 몸 담고 있던 수도원에서는 95개 논제를 우선은 신중하게 수용했다. 수도원장인 울리히 아담 (Ulrich Adam) 이 직접 루터에게 나아갔고, 수도원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에게 맹세토록 했다. 면죄부 설교자 텟첼은 1517년 11월 베를린에서 브란텐부르크의 감독이 이 논제를 자신에게 제시했을 때, "이 이단자를 내가 삼주안에 불 속에 집어 던질 것이며,욕조에서 저 세상으로 가게 할 것이다" (즉 그의 재를 욕조에 모아 물로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떠들어댔다. 논제가 가져올 이러한 파장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루터는 1518년 2월부터 5월까지 상세한 설명서, 즉 "면죄부 효용성에 대한 논쟁 해설" (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썼고, 관할 담당자인 브란텐부르크의 히에로니무스 슐체 (Hieronymus Schulze) 감독에게 그 안에 그를 불쾌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우고, 그가 좋을대로 원고 전체를 불에 던져 달라는 요청과 함께 보냈다. 감독은 회피하듯이 답변했고, 그가 당장은 이 글을 검토할 수 없다고 루터에게 알려왔다. 루터는 그동안 면죄부를 반대하는 새로운 글을 썼고, 3월말 독일어로 쓴 "면죄부와 은총에 관한 설교" (Sermon von Abla )를 출판했다. 이제 루터는 더 힘주어 면죄부를 반대하여 그것은 계명도 아니요, 교훈도 아니며, 공로도 순종의 행위도 아니며, 그 반대로 마땅히 해야할 복종에서 벗어나라는 유혹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면죄부로 인해 구원얻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뜻이요 요청이라고 주장한다.



1518년 3월 루터는 자신의 면죄부 논제에 대한 두 개의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다. 하나는 1518년 1월 오더의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O) 에서 개최된 도미니크 교단총회에서 논의된 반박논제 (Gegenthesen) 이다. 이것은 도미니크회 회원이며 오더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총장이었던 텟첼 (Tetzel) 이 제안하고 콘라트 빔페나 (Konrad Wimpena) 가 작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잉골스타트 (Ingolst dter) 의 신학부 교수였던 요한 에크 (Johann Eck) 가 루터에 반대하여 손으로 작성한 어구설명 (Glossen)인 소위 "날카로운 기둥들" (Obelisci) 이다. 텟첼의 논제에 대해 루터는 큰 반응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에크의 오벨리스치에 대해서는 소위 "작은별들" (Asterisci)이라는 글을 써 조목조목 반박했다. 루터는 95개 논제로 인해 1518년 1월에는 도미니크 교단을 통해 그리고 1517년 말에는루터의 논제에 대해 비판적 평가서를 로마 교황청에 제시했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고소되었다. 로마에 본부를 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총 책임자는 우선 루터에 대한 소송을 열기보다는, 루터가 본래 의도했었던 것처럼, 면죄부 논쟁을 신학적 토론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독일지부 총 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 (Johannes von Staupitz) 에게 루터를 잘 훈계하고, 그에게 신학적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도록 요구했다. 루터의 친구이면서 그의 고해를 들어주는 담당신부였던 스타우피츠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독일 어거스틴 엄수파 총회에서 면죄부 비판을 근거로 한 자신의 새로운 종교개혁신학을 강연해줄 것을 루터에게 요청함으로 이 요구를 이행했다. 루터의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1518년 4월 26일 이렇게해서 이루어졌다. 여기 작센외의 대학에서 루터는 처음으로 자신의 비텐베르크 신학의 개혁프로그램을 요약적으로 개진했고, 십자가 신학 (theologia crucis) 과 영광의 신학 (theologia gloriae) 을 소개했다.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트 대학 인문학부 강의실에서 열린 이 토론에 루터는 28개의 신학적 논제와 12개의 철학적 논제를 제시했다. 이 논제들은 면죄부 문제가 아닌, 면죄부 문제 배후에 있는 신학을 다룬 것이다. 논제 1-12에서 루터는율법도 행위도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도록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논제 3에서 루터는공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행위들은, 아무리 그것이 빛나는 업적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죄일 뿐이다." 루터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신뢰받는 근거로 그것을 남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죄인됨을 부인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논제 13-18은 칭의의 외적인 조건들인 즉 율법과 행위 뿐만 아니라, 그의 내적인 조건인 소위 자유의지 (freie Wille) 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논제 13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원죄 이후에 단지 명목상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며, (은총을 얻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한, 죽음의 죄를 범할 뿐이다 (librum arbitrium post peccatum res est de solo titulo, et dum facit quod in se est, peccat mortaliter).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칭의 인식을 인간론적으로 이보다 더 날카롭게 강조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낯선 의인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며, 결코 자유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유명론적인 신학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도 "facere quod in se est" 를 생각한 나머지 구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동이며, 자유의지와 은총의 연합으로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물질적인 의가 아니다. 이러한 논제 배후에 있는 신학적 근거를 루터는 논제 19-24에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구분함으로 전개하고 있다.



(논제 19) 하나님의 비가시적인 것들을 피조된 가시적인 것을 통해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이 신학자가 아니라, (논제 20)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가시적이며 작은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사람이 신학자이다. (논제 21) 영광의 신학자 (Der Theologe der Herrlichkeit) 는 악 (공로)을 선이라하고, 선 (십자가) 을 악이라 일컫지만, 십자가 신학자 (Der Theologe des Kreuzes) 는 사물을 있는그대로 말한다. (논제 22) 하나님의 비가시적인 것들을 행위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지혜는 어리석고, 생각이 모자라며, 완고한 것이다. (논제 23)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 (롬4,15) 를 초래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죽이고, 원망하고, 죄짓게 하고, 심판하고, 정죄한다. (논제 24) 그렇다고 그런 지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율법을 회피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십자가 신학이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가장 선한 것을 가장 나쁘게 오용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력함에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하시며, 인간을 죄인이라고 밝히신다. 이러한 경험은 어느정도는 좋은 것이긴 하나, 행위를 고집하는 스콜라의 영광의 신학에 의해 이것이 악하고 안좋은 것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인 통치행위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통치행위도 멀리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는 이성이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인식함으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은총과 오로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계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이 오직 인식되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자는 그 때문에 그것이 어떤가하는 실상 (Realit t) 을 설명해 준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현실주의자이다. 인간이 오직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대하는 논제 25는 옳다: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업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롭다." 루터는 그의 신학적 논제를 28조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신다. 이에 비하여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거룩한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죄인을 사랑 받을 만한 대상 즉, 의롭다 인정받은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논제를 기초로 이어지는 12개의 철학적 논제에서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비판하고, 논제 29에서 "위험없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석학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즉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의 의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통치행위를 파괴하는 그 사람은 자유하며, 철학과 그 속에 있는 인간 이성의 인위적인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다룰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토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토론이 루터의 스승인 투르트페터 (Trutvetter) 와 우징겐 (Usingen) 을 설득할 수는 없었으나, 비텐베르크 신학의 사안을 지지하는 브렌쯔 (Brenz), 빌리칸 (Billikan), 에프너 (Ebner), 쉬네프 (Schnepf) 그리고 마틴 부처 (Martin Bucer)와 같은 남부독일 출신의 젊은 신학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5월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1518년 5월 19일 에크의 오벨리스키 (Obelisci)에 대한 대응저서인 아스테리스키 (Asterisci) 를 잉골스타트로 보내주었다. 얼마전에 칼스타트는 406개의 논제를 출판했고, 여기서 그는 루터와 상관없이 요한네스 에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루터는 오히려 에크에게 칼스타트를 거칠게 대하지 않고, 이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해에루터는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라틴어로 출판했고, 1516년 5월에 처음으로 편집했던 독일신학 2판을발간했다. 이 책은 독일 신비주의에 의해서 나온 것이며, 아마도 1400년 프랑크푸르트 독일기사회(Deutschherrenhause)의 익명의 한 사제에 의해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타울러가 독일신비주의를 보듯이, 루터도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이라는 사상을 강조하며,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인 의 (iustitia passiva) 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외에도 루터는 독일어로 쓰인 이 글에서 라틴어로 쓰는 로마의 신학적 사고 방식과 대립되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독일신학 (Theologia deutsch)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적들은 언제나처럼 우리가 독일신학자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고자 한다. 나와 그들이 여태까지 라틴어로도, 희랍어로도, 또한 히브리어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하나님을 내가 독일 말로 듣고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이 작은 책자가 알려지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일신학자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신학자들임을 안다." (WA 1,379,7 12). 이미 그 이전에도 독일 신비주의가인 요한네스 타울러가 이와 유사하게 "나는 모든 대학에 있는 스콜라의 박사들보다 그에게서 참된 신학을 발견했다" (WA 1,557,29-31) 고 언급하여 독일 신학자를 칭송했다. 이 시기에 루터는 독일 신비주의와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서 유사한 사상을 보지만, 양자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곧 드러났다. 즉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신비주의적인 내면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 상당수가 1518년 3월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를 따른 반면에, 작센의 도미니크파 회원들은 이단혐의를 씌워 루터를 로마에 고소했다. 1518년 5월 로마에서 개최된 도미니크 교단 총회도 이러한 고소를 지지했다. 그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우선 로마 교황청의 신학자인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 (Sylvester Prierias) 에게 루터의 논제를 심사할 것을 명했으며, 1518년 6월 In praesumptuosas Martini Lutheri conclusiones de potestate pape dialogus 라는 제목으로 그 심의서가 작성되었다. 급히 작성된 이 글은 문제의 핵심으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교황의 무오류성을 교리적으로 확정된 것보다 더 강하게 강조했고, 교의적으로 구속력을 지닌 교리와 면죄부 판매의 차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다. 1518년 6월 이 dialogus는 인쇄되었고, 7월초 교황청 최고 판사인 체누치 (Chenucci)가 통보를 받은 60일 이내에 개인적으로 로마에 출두하여본인이 범한 잘못과 이단혐의에 대하여 답변하도록 루터에게 요구한 편지에 동봉했다. 루터는 이 출두 요구서를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터키와의 전쟁에 대한 독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낼 목적으로1518년 7월 이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에 머물고 있던 카예탄을 통해 1518년 8월 7일 넘겨받았다. 그러나 루터의 지역 영주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가 이 문제에 개입했고, 로마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루터의 심문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욱스부르크로 변경되었다. 1518년 8월 23일 교서를 통해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에게 루터를 아욱스부르크에서 심문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18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욱스부르크에서 루터 심문이 이루어졌다.



카예탄은 루터를 회유할 목적으로 호의적인 제안을 했다. 그 자신도 1517년 면죄부에 대하여 논했으며, 면죄부 이론에 대해 교회법 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주장했다. 면죄부에 대한 그의 관점은 매우 완화된 것이었다. 그에게 면죄부는 교회가 부과한 형벌의 단순한 사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 (Gerechtigkeit) 앞에서 죄를 범해 초래한 형벌로부터의 자유였다. 추기경 카예탄에게 심문을 받고자 루터가 1518년 10월 12일 아욱스부르크 푸거 가문에 나타났을 때, 카예탄은 그에게 세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할 것, 둘째는 그것을 더 이상 퍼뜨리지 않을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둘 것 등이다.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루터가 그에게 요청했을 때, 추기경은 먼저 58번째 면죄부 논제를 지적했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를 나누어주는 근거로 삼는 교회의 보고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교황이 없어도 내적인간에게는 은총을,외적인간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카예탄이 루터의 58번째 논제가 클레멘스 6세의 칙령 Unigenitus를 통해 반박되었다고 설명했을 때, 루터는 이러한 칙령은 자신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다고 대응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칙령은 성서와는 모순된 논지를 전개하며, 단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von Aquin) 의 관점만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 때문에 자신의 논제에서 인용한 성구에 무조건적인 우위를 주고 있다. 카예탄은 이에 대하여 교황은 모든 공의회와 성서보다 우위에 있으며,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취소해야 하고, 이것이 교황의 뜻이다라고 하며 루터를 비난했다. 루터는 그 점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며, 아욱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을 떠났다. 10월 31일에는 작센의 시의회에서 뤼헬 (R hel), 파이리취 (Feilitzsch) 그리고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 (Johannes von Staupitz)가 루터의 두 번째 심문에 동행했다. 물론 공정하게 심문이 진행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루터는 먼저 만약 카예탄이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고 잘못되었음을 밝히면,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신은 어떤 점이 성서, 교부, 교황의 교령 또는 이성에 어긋나게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적법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것이며, 아욱스부르크이건, 다른 곳이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토론할 것을 자청했다. 카예탄은 이제 화해적으로 루터를 대했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글로 써서 다음날 제출할 것을 허용했다. 다시금 작센 시의회가 동행한 가운데 루터는 세 번째 심문을 위해 10월 14일 카예탄 앞에 나타났다. 카예탄은 글로 작성된 루터의 입장을 경멸했고, 그에게 취소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다시금 1343년 칙령 Unigenitus에서 교리로 확정된 교회의 보고 (thesaurus ecclesiae) 에 대해 논의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 시련을 겪는 교회에 보화의 공로를 획득했다 (einen Schatz erwerben) 고 쓰여있는 권위 있는 한 본문을 읽어 주었다. 루터는 보화를 얻는 것 (einen Schatz erwerben) 과 보화인 것 (ein Schatz sein) 은 서로 다르며, 카예탄을 이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차이점이란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도록 교회에 준 은총을 공로로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은혜요, 교회의 근거라는 의미이다. 카예탄은 더 이상 토론을 진행하지 않았고, 심문을 끝냈다. 루터는 "잘 가르쳐져야 할 거룩한 아버지에 대해 전혀 잘 가르치지 못한 교황과 그의 판사에 대하여" (Von dem nicht gut unterrichteten Papst und dessen Richtern an den besser zu unterrichtenden Heiligen Vater) 라는 호소문을 작성했고, 10월 22일 아욱스부르크를 떠났다.



로마에서는 루터를 압송하려는 노력에 이어 이제 면죄부 교리를 합법적으로 선포하고자, 즉 교리화 하고자 노력했다. 레오 10세는 1518년 11월 9일자 카예탄의 구상을 근거로 "Cum postquam" 을 발행했다. 교황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그의 권세에 근거하여 면죄부로 그리스도와 성자가 쌓은 공로의 보화를 나누어 줌으로서 죄의 형벌을 사면할 수 있다고 새롭게 선포했다. 이 면죄부는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사면의 방식으로 그리고 죽은자 들에게는 "per modum suffragii" 즉 중보기도의 방식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루터는 그러는 사이 카예탄 앞에서의 자신의 심문을 다룬 "아욱스부르크 행적" (Acta Augustana) 를 집필했고, 1518년 12월 출판했다.



1519년 칼 5세 (Karl V) 의 독일 황제 선출은 루터에 대한 소송을 일시 멈추게 했다. 교황청은 교회국가가 북부와 남부 이태리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휩싸이는 것을 우려했고, 프랑스의 프란쯔 1세 (Franz I) 를 황제 후보로 추천했다. 후에 교황청은 칼 5세 선출을 반대하여 작센 선제후를 후보로 세우고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를 통해 금장식 장미 (die goldene Tugendrose) 를 보냈고, 게다가 기꺼이 루터 심문을 연기하고자 했으며, 작센 출신의 이 수도승에 대한 파문칙령을 취소하고자 했다. 1519년 1월 루터와 밀티츠의 협의가 성사되어 양측이 아래와같이 약속했다. 첫째, 면죄부 문제에 관하여 차후에 설교도, 토론도 하지 않으며, 둘째로 취소해야 할 루터의 잘못된 주장을 판결해 줄 감독을 한 사람 세우도록 밀티츠를 통해 교황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고, 교황청은 더 이상 프리드리히 현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정치적인 문제들, 재정적인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적인 유흥들이 루터 문제에 대해 강력한 박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송이 완만하게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 루터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되었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라이프찌히논쟁이 일어났다. 7월 2일까지 에크와 칼슈타트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하여 논의했다. 칼슈타트는에크의 적수가 못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학자였고, 탁월한 언변에 유명한 잉골스타트의 교수들도 압도되었다. 7월 4일부터 에크와 루터가 서로 토론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우선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리고나서 "면죄부", "참회", "연옥" 문제를 다루었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토론은 라이프찌히 논쟁보다 앞서 일어난 루터와 에크의 공개적인 논쟁이었다. 1518년 12월 에크는 이미 라이프찌히에서 "contra novam doctrinam" 을 변호하고자 12개 논제를 작성했다. 1519년 초 루터가 이 논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12개의 반대 논제로 응답했다. 이것은 에크를 다시금 자극하여, 그의 논제를 수정하고 추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논제중 13번째 논제는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그는 "로마교회가 실베스터 (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루터 역시 이에 상응하여 논제 13번을 추가했고, 에크의 논제 13번에 반대하여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천백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 (Konzil von Nic a) 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썼다. 도전적인 이러한 논제로 교황제도는 12세기에 비로소 생겼다는 것을 루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루터는 그레고리 9세 이후 이루어진 교령의 법령화가 교황들에게 특별히 독일에서 그들의 요구를 완전히 관철시키는 것이 가능케 했음을 단지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이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토론에 앞서 이미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 (Resolutio super propositione XIII de potestate papae) 을 작성했고 인쇄를 의뢰했다. 루터는 여기서 교황의 수위권은 엄격한 의미로 볼 때 황제 콘스탄틴 4세 (Constantin IV, 669-683) 치하에서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피력하며, 다른 동방교회들처럼 희랍교회는 한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 기독교 교회로 말해지고 있다는 논제를 피력했다. 루터와 에크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찌히 논쟁이 즉시 교황의 수위권을 다루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적인 법 (de iure divino) 이라는 것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요, 이런 의미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 때문에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또한 희랍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한번도 구원을 위해 기독교 최고의 권위인 로마 감독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지 않았다. 에크는 이제 위클리프와 후스를 정죄했던 여러 가지 말을 거론하며 로마의 수위권은 신적인 법이라는 강조했다. 이들은 1415년 콘스탄쯔 공의회에서 정죄받았다. 루터는 비록 콘스탄쯔에서 정죄받은 후스의 주장에 옳고 복음적인 것이 있음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후스와 동일시하는 것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것은 다시금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것이라고 선언할 수 없다. 이것은 라이프찌히 논쟁의 핵심이 더 이상 면죄부와 참회 문제가 아니라, 성서가 증거하듯이, 그리스도 한분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황이 아니라는 새로운 교회 이해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루터는 이미 이러한 사상을 1519년 6월 25일 라이프찌히에서 있은 베드로와 바울의 날 기념설교에서 표명했다. 당일의 복음서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13-19절의 베드로 고백이었다. 루터는 우선 칭의에 대해서 설교했고,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나 자유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강조했다. 죄를 사하는 권세에 관하여는 그것의 올바른 사용을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것이 주어지긴 했으나, 그는 사실 교회를 대표했기 때문에, 이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사제나 교황또한 증거해야 하는 복음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이 은총과 확신을 매개하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 복음에 비해볼 때 교회의 직제 (das kirchliche Amt) 는 기능적인 의미만을가지고 있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에 대해 세 개의 글로 그 정당성을 입증했다. 하나는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Resolutio super propositione (tertia decima) de potestate papae) 증보판이었고, 두 번째 글은 토론에 대한 상세한 해설 내지는 라이프찌히 논제 해설인 "Resolutiones Lutherianae ... Lipsiae disputate" 이며 그리고 세 번째는 "Contra malignum Joh. Eccii indicium"이라는 제목의 날카로운 논박서이며, 에크가 루터에 반대하여 유터보그 (J terbog) 에 프란시스파 수도원을 위해 작성한 평가서에 대한 반박이다.



에크가 라이프찌히에서 외적으로는 승리를 한 듯 했으나, 라이프찌히 논쟁은 그에게 신학적으로 하나의 패배를 의미했다. 에크는 루터를 대항하도록 쾰른 (K ln) 의 종교재판관인 야콥 폰 혹스트라텐 (Jakob von Hoogstraten)을 자극하고 쾰른과 뢰벤 (L wen) 대학을 반종교개혁자 대열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쾰른의 신학자들은 1519년 8월 30일에 이미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항의 문구를 정죄했고, 강력한 억압과 관련된 책자의 소각을 요구했다. 뢰벤의 신학자들은 1519년 11월에 반응을 보였다. 신적인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언급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15세기의 개혁 공의회적인 전통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루터의 주장에 대해 비판했고, 그의 책의 소각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 루터에 대한 로마의 소송도 다시 재게되었다. 쾰른과 뢰벤 대학의 평가를 근거로 로마에서는 세 개의 위원회가 루터의 가르침을 조사했다. 이 중 하나의 위원회는 에크가 제출한 평가서를 근거로 1520년 5월 21일부터 6월 1일까지 회의를 열었고, 1520년 6월 15일 파문교서 "주여 분기하소서" (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글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이교적이며, 분노를 유발하고, 오류가 있으며, 경건한 자의 귀를 더럽히고, 평범한 사람을 유혹하며, 그리고 카톨릭 교리에 모순된다"고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 말들을 취소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경우 파문 당할 것임을 경고했다. 교황청 대사로서 파문교서를 독일에 알리는 임무는 이태리 인문주의자인히에로니무스 알레안더 (Hieronymus Aleander)와 요한네스 에크 (Johannes Eck) 가 맡았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로마와의 갈등을 차단하기 위해 1520년 10월 12일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는 루터를 엘베의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an der Elbe) 에서 다시 만나 교황 레오 10 (Leo X) 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낼 것을 권고했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개인으로서의 레오10세와 로마 교황청을 구분하고, 자신의 공격은 개인 레오 10세가 아니라, 교황권과 교황청 제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밝혀야 했다. 서신과 함께 루터는 논쟁서가 아닌 새로운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 (Summe eines christlichen Lebens)를 요약한 책을 전달해야 했다. 루터는 실제로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고, 그는 "가장 거룩한 아버지" 그리고 "경건한 자" 레오에 대항하여 어떤 악한 것도 행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서를 근거로 교황제도를 비판하고자 했음을 맹세했다. 이 서신에 루터는 비록 논쟁적인 성격은 없으나, 자신의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을 명료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라는 논문을 첨부했다. 파문교서에 대응하여 루터는 "에크의 새로운 파문교서와 거짓에 관하여" (Von der neuen Eckischen Bullen und L gen) 와 "빌어먹을 적그리스도의 교서에 반대하여" (Adversus exsecrabilem Antichristi bullam)라는 책을 썼다. 루터는 이제 거침없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1518년 12월 이후 친구들간에 오고 갔으며, 1519년 말 무렵에야 비로소 공공연하게 표현된 사상이다.



1520년 10월과 11월 뢰벤 (Loewen), 뤼티히 (Luettich) 그리고 쾰른 (Koeln) 에서 루터의 서적들을 공개적으로 소각하자, 루터 역시 1520년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시입구(Stadttor)에서 서적 소각으로 맞섰다. 많은 교회법적인 교령들과 참회총서 (Beichtsumme) 인 안젤루스 시아바쏘 (Angelus Chiavasso) 의 "안젤루스 전집" (Summa angelica)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와 엠저(Emser)의 책들 및파문교서인 "엑스루게 도미네" (Exsurge Domine)가 불태워졌다. 루터는 "왜 교황과 그 제자들의 책들이 불태워졌는가" (Warum des Papstes und seiner Juenger Buecher verbrannt sind) 라는 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교황청은 이제 본래 의도했던 파문을 시행해야 했다. 1521년 1월 3일에는 루터의 파문을 선언한 파문교서인 "Decet Romanum Pontificem" 이 발부되었다. 교황청 대사인 알레안더가 이 교서 역시 독일에 알렸고, 1521년 2월 8일 "전 독일이 지옥 같은 폭동 속에 있다. 십분의 구가 루터를 연호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루터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로마교황청에 최소한 죽음을 연호하고 있다. 또한 모두가 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하며 소리치고 있다"고 로마에 보고했다. 알레안더가 과장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할지라고, 곧 개최될 보름스 제국회의는 결코 교황청이 기대하는 그렇게 큰 루터 판결이 아닌, 루터에게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면서 그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1519년 7월 3일 칼 5세가 맹세한 선거 공약에 달려 있었다. 그 공약에 따르면 독일 문제는 독일 내에서 처리되고 어느 누구도 사전에 청문회가 없이 판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터는 독일민족의 대변자가 되었고, 1520년 6월에 쓴 글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에게. 기독교 개선에 관하여"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에서 처럼 스스로 그들의 고난과 비판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 책에서 루터는 자신의 교회 개혁안을 "독일민족의 불만" (Gravamina nationis germanicae) 과 결합시켰다. 1520년 7월에는 "로마 교황청에 대하여. 라이프찌히의 유명한 로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Von dem Papsttum zu Rom. Wider den hochberuehmten Romanisten zu Leipzig) 라는 글로 새로운 교회론을 제시했다. 루터는 여기서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였던 알베드트(Alveldt)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는 루터에 반대하여 교황이 인간적인 법뿐만아니라 신적인 법에 의해서 전체 기독교의 머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520년 늦여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에서 중세교회의 성례론을 성서에 비추어 검토함으로서 자신의 새로운 교회론을 더 발전시켰다. 이미 1520년 초에 그는 "선한 행위에 대하여" (Von den guten Werken) 에서 자신의 새로운 칭의론이 결코 행위를 배척하지 않으며,그 반대로 윤리의 새로운 근거가 되고 있다는 문제를 다루었다. 1520년의 종교개혁 주요 저서들의 해석학적인 배경은 1518년 가을 다시 시작하여 1521년 4월 보름스로 여행하기까지 비텐베르크에서계속되었던 그의 시편주해 (Operationes in Psalmos) 였다. 종교개혁 주요 저서들은 독일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았고, 새로 개발된 인쇄술 덕분에 신속히 판매되었다. 루터 사건 (Causa Lutheri) 이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제국문제 (Reichssache) 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520년 10월 23일 아켄에서 거행된 황제즉위식에서 칼 5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에게 루터를공개적으로 심문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센제후는 루터를 보름스의 제국회의에 데려와야 했다. 1521년 3월 6일자로 작성되어 3월 16일 인편으로 발송된 소환장을 보면, 이러한 이유에서 루터는 이단자로 소환 당하지 않고, 자유통행을 보장받으며 공개적인 심문을 받고자 보름스로 초청되었고, 여기서 그는 1521년 4월 17일과 18일 황제와 국회 앞에서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과 교회개혁을 변론했다. 재판은 트리어 대주교 리챠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Richard von Greiffenklau) 와 감독의 판사였던 요한 폰 데어 에켄 (Johann von der Ecken) 이 진행했다. 프리드리히 현제가 1519년 이미 이 사람을 루터 문제의 재판관으로서 제안했었다. 교황청 대사인 알레안더가 오류를 범한 책 (corpus delicti) 이라고 모은 약 20여권의 루터의 책들이 앞에 제시되었고, 그가 이 책들을 알고 있는지 여부와 이 책들이나 혹은 그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 취소할 뜻은 없는지 질문되었다. 책의 제목이 크게 낭독되자, 루터는 자신의 책들임을 고백했고, 취소와 관련해서는 하루의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1521년 4월 18일 재판은 계속되었고, 루터는 다시금 제출된 서적들에 대한 취소를 요구받았다. 루터는 이제 황제, 선제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성서로 그를 반박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준다면 자신의 어떤 오류라도 즉시 취소할 것이며, 가장 먼저 자신의 책을 불 속에 집어던질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들의 위엄과 영광이 간결한 답변을 나에게 요구하기에 뿔도 이빨도 없는 그러한 답을 하고자 한다 (계략이 없이 있는 그대로 답하고자 한다 - 역자주). 본인이 성서와 명백한 이성적 근거를 통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 그도 그럴것이 교황도 공의회도 본인은 믿지 않으며, 왜냐하면그들도 종종 실수했고, 모순되었기 때문에 - 인용한 성서의 이 말씀으로 본인은 양심을 극복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인은 그것을 철회할 수도 없고, 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며, 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1521년 4월 24일 트리어 대주교 숙소에서 루터에 대한 특별재판이 한 번 더 벌어졌고, 여기서도 그는 다시금 취소를 거부했다. 1521년 4월 25일 저녁, 루터는 모든 경고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조처를 취하겠다는 황제의 통보를 받았다. 4월 26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났다. 작센 의원들의 암시로 그는 도중에 어디론가 가서 숨게 될 것임을 준비했다 (WAB 2,305). 프리드리히 현제는 루터를 보호하고자 그의 지역 어디엔가 루터를 숨기려는 계획에 동의했었지만, 그 자신도 만일 황제가 루터의 소재를 물을 경우, 떳떳해야 했기에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비텐베르크로 귀환도중 루터는 도중에 사로 잡혔고, 기사 외르크 (J rg) 라는 이름으로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에서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숨어 지냈다. 보름스에서는 그러는 사이에 보름스 칙령이 가결되었고, 루터와 그를 보호하는 모든 사람은 법의 테두리 밖으로 추방했다. 이것은 교황청 대사 알레안더가 준비한 것이었으며, 1521년 5월 8일 황제가 서명함으로 승인되었다. 대부분의 제국의원들이 보름스를 떠난 후인 1521년 5월 25일 제국회의에서 몇가지 변화를 가결했다. 브란텐부르크의 선제후 요아킴 (Joachim) 만이 제국 의원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칙령에 서명했다. 칙령은 소위 루터의 잘못된 가르침을 열거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콘스탄쯔 공의회에 손상을 입혔으며, 불안을 야기 시켰다고 비난했다. 칙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지존한 위엄과 영광과 권위에 의지해서 여기 모인 제국의 선제후, 영주, 의원들의 뜻과 권고를 따라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영원한 혐의를 인정하며, 이 문제의 재판장이며 거룩한 아버지인 교황이 허락한 파문교서가 완전히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파문된 루터를 완고한 자요, 분리자요, 그리고 이단자로 모두가 간주해야 함을 인정하고 선포한다."



3) 1520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저서



1519년 라이프찌히 논쟁 후 루터는 독일 민족의 대변자가 되었다. 제국및 교회와 관련하여 16세기초에 가시화 되고 있던 개혁안들은 더 강해졌고, 무엇보다도 루터를 대변자로 발견했다. 게다가 비텐베르크 대학도 계속 성장했고, 루터의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은 학생들을 통해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인쇄술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확산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미 1518년 바젤에 있는 인문주의자 요한네스 프로벤 (Johannes Froben) 은 그때까지 출판된 루터의 라틴어 전집을 여러판 출판했다. 1520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와 바젤에서 증보판이 나왔고, 여기에 1520년 5월 바젤에서 그리고 7월 스크라스부르크에서 루터의 독일어 전집이 시장에 나왔으며,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루터는 세명의 인쇄업자와 일했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루터의 글중에서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의 약력을 좀 더 상세히 논하고자 1520년의 소위 종교개혁 주요저서를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오직 믿음을 통한 그의 칭의 교리가 행위을 파괴한다는, 심지어 신앙이 행위를 가증스럽게 여기도록 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루터는 센제후의 비서인 스팔라틴 (Spalatin) 의 요청으로 1520년 봄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한 "선한 행위에 관하여" (Sermon von den guten Werken, WA 6,202-276) 를 집필했다. 그는 여기서 평신도들에게 십계명 해석에 근거하여 선한 기독교인의 삶과 활동에 대하여 폭넓은 교훈을 주고 있다. 모든 일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믿는 것이 일이다" (Werke ist der Glaube, 요 6,28) 는 것이다. 믿는 것은 다른 것과 더불어 있는 선한 행위의 종류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의 근원이다. 선한 행위는 믿음, 사랑, 기쁨, 평화 그리고 희망이 가져오는 열매이다. 사랑은 의롭게 하는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결과이다. 스콜라 신학이 우리 안에서 형성된 의, 신앙 그리고 사랑을 하나로 생각한다면, 루터는 그것을 근원과 그리고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행위로 구분한다. 신앙은 변함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믿는 것이요, 신앙의 열매인 사랑은 칭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제 삼자에게 경험적으로 계속 전달해준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선한 행위는 우리의 은총 내지 칭의를 통제 할 수 있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도 그럴것이 칭의가 신앙으로 가능하다면, 신앙만이 모든 계명을 성취하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의롭게하는 것이다" (WA 6,211, Z.4-5). 우리가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다면, "우리는 율법을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스스로 언제든지 선행을 할 것이다" (WA 6,213, Z.20-21). 선행을 행 할 이러한 신앙의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격식과 약속으로 선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받는 어린이들처럼 율법과 훈계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1520년 봄에 루터는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인 아우구스틴 알벨드트 (Augustin Alveldt) 의 교회개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알벨드트는 "사도적 지위에 대하여..." (Super apostolica sede...)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루터는 그의 친구 파물루스 요한네스 로니쳐 (Famulus Johannes Lonitzer)에게 이 글에 대해 답하게 했다. 그 결과 알벨드트가 자신의 글을 수정하여 독일어로 출판했을 때, 루터가 직접 격렬한 반박글인 "로마의 교황청에 대하여. 라이프찌히의 유명한 로마주의자를 반박하여" (Vom Papsttum zu Rom. Wider den hochber hmten Romanisten zu Leipzig, WA 6,286-324)를 작성했다. 루터는 이 글로 교회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1520년 처음으로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알벨드트는 교황은 신적인 법에 의한 것이고, 인간적 법에 의해서도 전체 기독교의 머리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가령 희랍인이나 위클리프 또는 중세 후기의 특별한 집단들처럼 이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가시적인 한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듯이, 교회도 역시 가시적 지도자 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모임은 육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서 비가시적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시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 숨어있는 교회는 경험되는 교회와 단절되지 않으며, 영과 육처럼 이 둘은 함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유일한 참된 교회인 기독교는 지상에 머리가 없으며,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혼자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를 다스린다. 사제, 감독 그리고 교황의 영적인 직임, 즉 복음선포와 성례전 집행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위에 언급된 직임들은 교회에서 모두 동등한 것이다. 외적인 교회에서 어떤 하나의 직임이 다른 직임보다 위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람이 만든 제도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언급된 죄를 사하는 권세는 마태복음 18장 18절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 베드로는 전체 교회를 대신해서 죄사하는 권세를 받은 것이지, 그 개인을 위해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황은 먼저 로마의 감독이다. 교회에서 그를 인정한다면, 단지 인간적 법에 의한 질서 요인으로서이며, 그러므로 "터키인을 감내하듯", 우리도 그를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 이해를 기초로 루터는 교회 개혁을 전체적으로 착수하며, 이를 위해 1520년 여름 그의 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기독교 개선에 관하여"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를 출판했다. 만약 교회가 전체적으로 개혁할 능력이 없다면, 황제 내지 독일 귀족들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성격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1519년 6월 28일 칼 5세가 독일 황제로 선출되자 제국 개혁과 로마 교황청 및 그들의 금전주의의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될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이러한 희망이 종교개혁 주요 저서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독일민족의 불만 (Gravamina nationis germanicae) 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며,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제 교리적으로 근거를 대고 있는 것이다. 독일 그리스도인 들에게 쓴 이 글은 세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로마주의자들의 세 개의 벽과 그들의 개혁. 2. 로마 교황청 개혁의 과제. 3. 기독교인을 통한 개혁의 수행 (27가지 개혁요점).



로마의 세가지 벽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담고 있는 첫 번째 부분은 지금까지 교회의 모든 개혁을 방해한 커다란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로마주의자들은 오랜동안 세가지 벽을 쌓아왔다. 그들은 이것으로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개혁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보호했다. 첫째는 이것이다. 만약 세속적인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르면, 세속권력은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힘이 세속적 힘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이것이다. 성서를 가지고 그들을 비난하려고 하면, 교황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서를 해석할 권한이 없다고 대응했다. 셋째는 공의회를 가지고 그들을 위협하면, 교황외에 어느 누구도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다고 꾸며댔다.



로마 교황청이 쌓은 이러한 장벽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을 생각나게 해준다. 첫 번째 장벽은 로마 교황청의 성직자 통치, 즉 영적인 권력이 세속적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세속적 권력은 영적권력 아래 있다는 중세의 두 검 이론 (Zwei-Schwerter-Lehre) 을 공격한다. 동시에 그는 사제계급이 영적인 고유권한을 갖고 있기에 우위에 존재한다는 사제신분과 평신도 신분의 구분도 비판한다. 그에 대해 루터는 세례, 복음 그리고 신앙 (엡4,5) 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동일한 영적 신분을 지닌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고 반론을 제기하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설명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계시록 1장 5절이하, 5장 9절 이하로 루터는 만인사제직 (das Priestertum aller Gl ubigen) 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동일한 직임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동일한 영적 신분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직임은 이에 비하여 영적인 전권을 공적으로 수행하도록 그러한 직임을 수행할 수 있는 교육적인 전제조건을 다 갖춘 사람들에게주는 위임에 근거한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개혁에 참여할 의무는 만인사제직에서 나온 결과이다. 만약 교회의 직임자들이 이러한 개혁을 거부한다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세속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하도록 부름을 입은 것이다.



두 번째 장벽은 교황의 교리수위권, 즉 교황만이 성서를 구속력 있게 해석할 수 있다는 권한에 대한 것이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1521년 3월에 쓴 자신의 논문 Assertio omnium articulorum Martini Lutheri per bullam Leonis X. ... damnatorum 서론에서 언급한 자신의 사상을 성서해석의 원리를 통해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것에 의하면 성서 (sola scriptura) 는 교회와 신학의 권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해석의 권위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그 자신을 해석한다 (scriptura sacra ipsius interpres) 는 것이다. 전통이나 혹은 교황의 직권이 성서의 바른 해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그 스스로를 해석한다. 성서는 구원의 문제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성서의 중심이며, 이 중심으로 인하여 성서는 구원론적인 명백성을 갖고 있고,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권위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세 번째 장벽은 결국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황의 요구에 대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만인사제직, 즉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관직에 있는 세례받은 세속정치가들은 성서를 척도로 삼아 교회의 개혁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옳고 자유로운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갖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루터는 중세 후기의 공의회주의가 가졌던 본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 공의회의 권위를 구원적으로 이해한 성서의 권위에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장벽들이 무너진 후 루터는 두 번째 부분에서 로마 교황청 개혁의 과제를 다룬다. 그는 교황을 그리스도를 단순히 따르는 자요, 영적인 과제를 가진 자로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교황청은 엄청난 수의 추기경을 대폭 감소시킴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로마의 조세주의 (Fiskalismus)를 개혁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황에 의해 임명받은 감독과 수도원장이 연봉의 절반을 자신이 얻은 성직에 대한 댓가로 로마에 내야만 했던 첫 수입세는 폐지해야만 한다. 교황이 제시하는 사면, 은총의 서신, 특별법 그리고 각종 호의들을 판매하고 승인하기 위해 교황이 설치한 교황의 달(月), 예복비 (Palliengelder), 교황의 마음속의 보류 (reservatio pectoralis) 사상, 성직록 관할청 (Datarhaus) 도 역시 폐지해야 한다. 면죄부, 참회서 그리고 결국 로마 교황청의 모든 조세주의가 페지되어야 한다.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은 27가지의 포괄적인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순례와구걸승단을 반대하며, 성직자의 독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과도한 교회축일을 축소하고 있고, 구걸 승단 제도를 없애며, 대학 개혁을 호소하고 있다. 언어, 수학 그리고 역사공부를 장려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과목은 폐지되어야 한다. 영적인 권리 대신에 세속적 법이 교수되어야 하며, 교부와 교황의 교령 대신에 성서가 연구되어야 한다.



1520년 10월 쓴 루터의 세 번째 종교개혁 저서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De capi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는 교회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금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인 알벨드트 (Alveldt) 가 1520년 6월에 쓴 "두 종류의 성찬에 대한 논문" (Tractatus De communione sub utraque specie)을 반대하여, 로마의 성례전론을 성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1519년에 이미 루터는 "참회의 성례전에 대한 설교" (Sermon vom Sakrament der Bu e, WA 2,713-723), "세례의 성례전에 대한 설교" (Sermon vom Sakrament der Taufe, WA 2,727-737), 그리고 "Sermon von dem hochw rdigen Sakrament des heiligen, wahren Leichnams Christi und von den Bruderschaften" (WA 2,742-758)에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 이해를 반대했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자신의 칭의론을 바탕으로 루터는 지칠줄 모르고 "사효론" (ex opere operato) 에 의해 성례전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이해에 반대하여 신앙을 가장 올바른 성례전의 사용이라고 제시한다. 의식으로 실행된 성례전이 아니라, 성례전에 대한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제 성례전을 다음과같이 설명한다. 성례전에서 세가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성례 (das Sakrament) 혹은 표지 (das Zeichen) 이며, 두 번째는 그 성례전 (혹은 표지)의 의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두가지 방식의 성례전에 대한 신앙이다. ... 그러므로 성례는 (1) 육적인 (객관적인) 형태나 모양으로 외적이며 가시적이어야만 한다. 그 (표지의) 의미는 (2) 내적이며 영적이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영에서 그 의미가 반추되어야 한다. 신앙은 (3) 성례를 바르게 이용하고 사용하도록 이 두가지를 결합시켜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성례전이해는 형식적으로 볼 때 인간이 성례전적 요소나 표지를 외적으로 받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내적으로 일하신다는 어거스틴적이며 프란시스코적인 전통에 서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가시적 말씀 (verbum visibile) 인 성례전은 요소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눈으로 명백히 볼 수 있게 된 말씀 자체인, 즉 내적인 말씀 혹은 성령이 요소에 더해지게 될 때 효력을 발생한다: Accedit verbum ad elementum, et fit sacramentum, et etiam ipsum tamquam visibile verbum (말씀이 요소, 즉 성례전적 표지에 더해질 때, 성례전이 되며, 동시에 그 자체는 하나의 가시적인 말씀인 것이다). 성찬의 요소를 받을 때에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말씀이라면, 루터에게 있어서는 선포된 성례전적 언약인 외적인 말씀이며, 이것을 통해 성령은 신앙안에서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자신의 성례전 이해를 종교개혁적인 말씀신학의 틀에서 분명하게 전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례전을 이루는 것은 두가지이다. 1. 언약 (promissio) 과 2. 성례의 표지이다. 동시에 그는 성서의 성례전은 이러한 척도에 맞게 제정되었는지를 묻고 있고, 로마 교회의 칠성례전을 세례 (Taufe) 와 성만찬 (Abendmahl) 으로 줄이고 있다. 참회는 신적인 언약이기는 하나, 외적인 표지가 없기에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성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서품, 견진 그리고 종유에 대해 루터는 성례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서에 명시된 성례전인 성찬, 세례 그리고 참회도 루터의 판단에 의하면, 교회의 오랜 전통속에서 심각하게 변모되어 성례전과 또 그 성례전에 의해서 사는 교회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과 관련하여 루터는 성찬의 세가지 포로를 말한다. 잔 박탈 (Kelchentzug) 의 포로, 화체설 (Transsubstantiationslehre) 의 포로 그리고 공로와 희생 (Werk und Opfer) 으로서의 미사의 의미이다. 첫째와 연관하여 루터는 두가지 방식 (sub utraque specie), 즉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 모두의 제공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한가지 방식에서도 역시 참으로 실재할 수 있지만, 회중에게 잔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성서의 성찬 제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화체설에 관한한, 이것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IV. Laterankonzil) 에서 인노센트 3세 (Innocent III) 에 의해 교리로 확정된 것이며, 미사에서 사제가 조용히 언급한 제정의 말씀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빵과 포도주의 형태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성직자 계급의 권력과 위엄을 쌓은 토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평신도와 구별된 서품받은 사제만이 화체를 일으키는 성찬 요소의 축성을 거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체설 비판으로 루터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러한 현재를 본체와 표징 (Substanz und Akzidens) 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용어로 설명 가능하다는 사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크고 분명하게 언급된 성레전의 언약을 통해서 현재화되고, 이 언약과 더불어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로 오직 신앙을 통해 받게 되는 것이다. 성례의 언약을 사제를 통해 조용히 언급된 법적으로 작용하는 축성형식 (Konsekrationsformel) 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루터에 의한다면, 성례 이해와 그 속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포된 말씀으로서 성례의 표지가 외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어떤 방식으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인지 (ist) 알 수 없기는 하나, 내 이성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또 전적으로 그의 말씀에만 의존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빵에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도 확고하게 믿고자 한다. 철학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성령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위대하다. ... 비록 철학은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신앙은 이러한 것을 파악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인간이 가진 지성의 파악능력보다 더 위대하다. 이와같이 성례에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있게 하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가 변질될 필요는 없으며, ... 두가지가 다 있는 그대로 동시에 거기에 존속하면 되는 것이다.이것이 "이 빵은 내 몸이며, 이 포도주는 내 피이다"라는 참된 의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계속 이와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인간의 이성으로 침해당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개념으로 왜곡되는 것도 용인치 않을 것이다.



성만찬의 세 번째 포로는 미사의 희생이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사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을 말한다. 이러한 희생론은 비록 성례를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을 성례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신다고 이해할지라도, 사제의 공로가 되게 할 위험이 있다.



세례에 관한한,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동의 기반이기는 하나, 루터에 의하면 그 본질이 참회의 성례전을 통해 상대화 되었다. 왜냐하면 중세의 이해에 의하면, 세례의 은총을 통해 원죄가 사라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자범죄를 불러 일으키는 우리안에 있는 죄의 뿌리 (fomes) 까지도 소멸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죄를 범하면, 세례의 은총이 상실된 것이며, 성례전을 행하여 그것을 새로이 받아야만 한다.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도 그래서 참회의 성례전을 파선후의 제2의 널빤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비록 죄가 은총의 능력을 벗어나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죄는 결코 세례의 본질을 소멸시킬 수 없다. 그 반대로 우리는 바르게 회개하고 참회함으로 세례를 통해 주신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로 언제든지 새로이 복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다시 이기거나 혹은 참회를 행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떨어져 나갔던 세례의 능력과 세례의 신앙으로 돌아서고, 거기서 일어나는 죄를 지어 우리가 떠났던 언약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WA 6,528, Z.13-16). 참회는 그 때문에 세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며, "파선후의 제2의 널빤지" (WA 6,529, Z.23) 도 아니며, 믿음안에서의 언약의 변함없는 훈련이며, 루터가 말하듯이, "세례에로의 계속적인 복귀" (reditus ad baptismum) 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성례전적으로 단 한번 (semel)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을 통해 항상 (semper) 세례를 받아야만 하며, 그것은 죽고 그리고 다시 사는데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WA 6,535, Z.10-11). 지속적으로 세례를 구성하는 언약처럼, 세례의 표지 역시 세례에 속한다. "왜냐하면 ...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말씀이 의미하거나 혹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성례가 작용함에 따라 의미하는 것을 묘사해주는 표지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WA 6,531, Z.28-30). 마찬가지로 세례는 "죽음과 부활, 즉 완전하고 완결된 칭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직자가 아이를 물속에 집어 넣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다시 아이를 끄집어 낸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WA 6,534, Z.3-5). 만약 세례가 이렇게 언약과 표지를 통해 효력을 발생한다면, 거기에는 객관적이고도 외적인 신적인 은총이 사전에 주어졌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총 내지는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을 통해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받을 뿐이다. 이러한 은총의 객관성은 루터에 의하면 어린이들 역시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을 때 어떤 노력과 공적으로도 해를 입지 않고 모든 점에서 자유하며, 오로지 영광스런 세례의 능력으로만 거룩하게 태어난 작은 아이들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연이어 세례를 받는 그런 작은 아이들이다" (WA 6,537, Z.38 -538, Z.3). 그러나 언약은 단지 신앙으로만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신앙이 이루어지는지 루터는 질문을 제기해야만 했다. 루터는 이에 대하여 어린이를 세례받도록 데려오는 사람의 낯선 믿음 (fides aliena) 이라는 논지로 대답한다. 교회의 기도, 그리고 부모와 대부 (Paten) 의 기도로 "부어지는 신앙을 통해 어린이는 변화되고, 정결케 되고 그리고 새롭게 된다" (WA 6,538, Z.10-11). 마지막으로 참회의 성례전에 관한한, 루터는 이것을 세례의 성례전으로 묶어서 참회를 세례의 언약을 회복하려는 항구적인 회귀 (st ndige R ckkehr) 라고 이해하고 있다. 성서적 토대를 둔 이러한 성례전과는 달리 결혼, 서품, 견진 그리고 종유의 성례전은 비성서적인 성례전이라고 루터는 거부한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i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가 새로운 성찬론을 통해 바벨론 포로상태에 있는 교회의 자유를 주장했다면, 1520년 말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 (De libertate christiana) 는 그가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 와 협상했듯이 교황 레오 10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 그의 새로운 신학의 전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은 그가 제시한 두 개의 논제에 일치하는 커다란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셔서 그에게 주신 자유를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우리가 잘 인식하고 있음을, 바울도 물론 이에 관하여 많은 것을 썼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Ein Christenmensch ist ein freier Herr ber alle Dinge und niemand untertan).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충실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Ein Christenmensch ist ein dienstbarer Knecht aller Dinge und jedermann untertan).



변증법처럼 보이는 이러한 논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논제 배후에 있는 루터의 칭의 이해의 토대가 되는 신앙과 사랑의 구분을 설명해야만 한다. 신앙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충실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그 역도 성립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앙과 사랑을 구분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 신앙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자유한 것이다. 또 이 사랑을 통해서 신앙은 밖으로 작용하며,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자신의 자유를 오로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행위들이 더 이상 그의 칭의 내지는 자유의 성취근거가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이고 실제적으로 자유하다. 자유는 그의 행위나 혹은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Sich-Empfangen)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앙에 의한 이러한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는 이 책의 첫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루터는 여기서 이러한 자유를 내적이며 영적이며 새로운 인간의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다. 내적 인간의 이러한 자유를 루터는 인격의 자유, 즉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인간 존재의 자유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자유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되는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을 통해 우리안에서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혼은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한 거룩한 복음, 하나님의 말씀외에 하늘에서도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에서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밖의 다른것은 없어도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확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어떤 다른것도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말씀속에 충분한 음식, 기쁨, 빛, 예술, 의, 진리. 지혜, 자유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는 자는 하나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는 자유하며, 의롭고, 참되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죄사이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교환을 통해 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영혼이 신적인 말씀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도록 모든 은총을 넘치게 하고, 자유케 하며, 구원할 뿐만 아니라, 신부가 신랑과 하나가 되듯이, 영혼을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한다. 바울 사도가 말하듯, 이러한 혼인으로 그리스도와 영혼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들을 함께 하여, 그리스도가 가진 것은 곧 믿는 영혼의 것이기도 하며, 역으로 영혼이 가진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들과 축복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동시에 영혼의 것이기도 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영혼은 모든 불의와 죄를 가지고 있으며, 이같은 원리에서 그리스도는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즐거운 교환 (der fr hliche Wechsel) 과 갈등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죄를 범한적이 없으며, 그의 의는 정복할 수 없고, 영원하며 그리고 전능한 하나님이자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믿는자의 영혼이 범한 죄를 결혼반지 - 이것은 신앙이다 -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삼고, 마치 그가 죄를 범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들은 그에게 삼키운바 되고, 익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극복할 수 없는 의가 모든 죄보다 크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제 자신의 새로운 신학의 최고의 문장들을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랑인 그리스도의 복은 영혼의 것이 되고, 영혼의 부족함과 죄들은 그것을 삼키우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영혼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합은 신비적이며 직접적인 존재의 일치가 아니며, - 베른하르트적인 신부신비의 예화(die Bilder der Bernhardinischen Brautmystik)를 추측케하나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에만 단지 중재되는 일치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은 비록 신앙으로 이미 참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중재가 이러한 성격을 유지시켜준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에게 토대를 둔 이러한 자유를 그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두 번째 부분의 주제이다 - 사랑으로 이웃에게 계속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은 영적으로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 충분히 의롭게 되었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과 만족함(Gen gen)은 내생(來生)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라야 하기 때문에 이생에서 그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하며, 사람들과 사귐을 가져야만 한다. 그는 이제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빈둥거려서는 안된다. 그는 몸을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절한 훈련으로 단련해서 내적 인간과 신앙에 순응하고 일치되도록 해야하며, 강요받지 않고 멋대로 행하듯이 모순도 방해도 되어서는 안된다" (WA 7, 30, Z.11-20). 그리스도인은 이웃사랑을 베풀어줌으로서 다른 사람과도 교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 자신 밖의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신 밖의 이웃안에 그들의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그는 자신을 넘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다시금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사랑 가운데 머문다. ... 보라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내지 그리스도인의 의는 이웃과의 연대속에서 동시에 수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흔히 하듯이 루터가 자유를 인간의 내면성에 제한시켜, 이것으로 특별한 시민적 자유개념의 창시자가 되었다거나 칸트 철학에 나오는 세속화된 특별한 자유 형태를 발견했다는 비판은 적절치 못한다 (Marcuse). 왜냐하면 루터에 의하면 사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내면성이 아닌 이중적인 "자신 밖에서" (au erhaln seiner selbst) 살기 때문이다. 즉 신앙으로 그 자신밖에 하나님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그 자신 밖에 이웃 안에서 사는 것이다.



4) 1521/22년 루터의 바르트부르크 체류와 비텐베르크 소요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Wartburg) 에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의 "밧모섬" (Patmos) 이었다. 한 때 요한처럼 그는 이곳에서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계속 영향을 준 글들을 집필했다. 물론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한 것은 아니다. 칼슈타트, 멜란히톤, 또한 종교개혁적 성향을 지닌 어거스틴 엄수파 출신의 루터의 수도원 동료들, 특히 그 가운데 급진적 개혁의 대표자였던 가브리엘 쯔빌링 (Gabriel Zwilling) 과 같은 2진에 속하는 사람들이 비텐베르크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개혁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이라는 배가 불안하게 표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터 역시 방관치 않았고,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계속 글을 써 개혁에 영향을 주고,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해 나갔다. 융커 외르크 (Junker Joerg) 로 변장하고 있는 동안 그는 시편 68편, 21편, 22편 그리고 37편을 주해했다. 더 나아가서 보름스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시작했던 마리아 찬가 (Magnifikat, WA 7,544-601) 주해도 완성했다. 그는 이제 인간의 무능함의 표현인 마리아의 겸손이 아닌 낮아짐 (Niedrigkeit) 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신앙에 의한 칭의에서 이러한 낮아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루터는 사제와 가정경건회를 돕고자 소위 "Kirchenpostille" 를 쓰기 시작한다. "Von der Beichte, ob die der Papst Macht habe, zu gebieten" (WA 8,138-185) 라는 글에서 루터는 아직은 사적인 고해를 긍정하고 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참회 강요는 반대한다. 이러한 글과 함께 소위 "Antilatomus" (WA 8,43-128)도 집필되었다. 이글에서 루터는 1520년 가을 뢰벤 대학(Loewener Fakultaet)이 자신의 종교개혁 저서들을 정죄하고 소각 결정을 하자 이를 방어해 주었던 뢰벤의 신학자인 라토무스를 반대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죄의 문제였다. 세례의 은총과 남아있는 원죄는 사라지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는 만일 죄를 부정적인 영혼의 질 (Qualit t) 로 그리고 은총을 긍정적인 영혼의 질로 이해했을때 스콜라적 사고체계에서 본다면 이것은 단지 결과적으로만 옳은 문제였다. 그렇다면 세례에서 죄가 은총으로 대체되는 성향의 변화(Eigenschaftwechsel)이 일어났고, 새로운 자범죄를 범할때까지 인간은 "죄가 없음" (ohne Suende) 에 틀림없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바울의 인간론을 근거로 원죄는 완전히 용서되나, 아직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격은 전인으로서 이미 의롭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통해 원죄를 용서 받았고, 덮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격은 믿음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에 완전히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인간의 인격은 매일 후회과 참회로 남아 있는 죄의 통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로 나아와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전인인 인간의 인격을 의롭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은총의 은사로서 인간의 인격속에서 남아있는 원죄의 세력을 대항하는 것이다.



뢰벤 대학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루터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 (Pariser Sorbonne) 도 반대하고 있다. 이 대학은 1521년 4월 루터의 많은 글들을 이단으로 판결했다. 먼저 멜란히톤이 비텐베르크에서 파리대학의 이러한 평가에 대하여 날카로운 변증을 했다. 루터는 이것과 파리대학의 교령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서문과 결어를 첨부해 이 두 개의 글을 출판했다. 루터는 교황에 대한 자신의 날카로운 공격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파리 대학의 신학자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랑스인 내지는 갈리아인들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교황에 대항하는 행동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소르본 대학의 공격을 재치있게 방어했고, 교황을 대항하는 공의회주의자들의 요새를 폭로했다.



대주교인 마인쯔의 알브레히트가 할레에 성유물 (Reliquienschatzes) 전시관을 개관했고, 방문자와예배자에게 일괄 면죄를 약속하며 신자들을 초청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루터는 격분했다. 그는 "할레의 우상숭배를 반대하여" (Wider den Abgot zu Halle) 라는 논문을 썼다. 선제후의 비서인 스팔라틴 (Spalatin) 이 이 책의 인쇄를 거절했을 때, 루터는 최후통첩방식으로 마인쯔의 대주교에게 썼다. 대주교는 현명한 태도를 취했고, 결국 루터의 비판에 굴복했다.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쓴 두 번째로 방대한 저서는 "수도사의 서원에 대하여" (De votis monasticis) 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사였던 자신의 과거를 결산하고,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이라는 수도사 서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1521년 11월 40명의 어거스틴엄수파회원중 15명이 비텐베르크 수도원을 떠났다. 루터도 그것을 알게 되었고, 선한 양심에 따라 모두가 다 이러한 행동을 감행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전혀 감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타까와 했다. 1521년 11월 11일 루터는 스팔라틴에게 "나는 이제 수도사의 서원의 문제를 다루고, 젊은 사람들을 독신의 지옥에서 풀어주기로 결심했다"는 서신을 보냈다 (WA Br 2.403). 같은 달에 그는 "수도사 서원에 대하여" (De votis monasticis, WA 8,573-669) 를 완성했다. 루터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외에 어떤 다른 일인자나, 감독, 교황도 알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양심은 자유하게 되었고, 이것은 최고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나는 아직도 수도사이고, 동시에 수도사가 아니다; 나는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이다" (WA 8,575,28f). 루터는 자아를 치유하고자 선택했고 이제는 복음으로 능력으로 내적으로 극복한 수도사로서의 그 자신의 삶을 16세기의 종교적인 정체성 위기를 잘 견디고 극복하도록 그에게 허락한 영적인 유예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을고려하여 1524년 10월 4일에야 비로소 그는 수도복을 벗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어느덧 예배와 미사의 개혁이 수행되고 있었다. 멜란히톤 (Melanchthon), 칼슈타트 (Karlstadt) 그리고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인 가브리엘 쯔빌링 (Gabriel Zwilling) 이 이와 관련된 개혁을 시작했다. 1521년 성 미카엘 축일에 멜란히톤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빵과 잔을 다 배분하는 양종성찬의 성례를 거행했다. 쯔빌링의 설교를 토대로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들은 1521년 10월이후 개인미사(Privatmessen)를 폐지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치들은 선제후의 관심과 염려를 불러 일으켰고, 선제후는 조사위원회를 소집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1521년 11월에 "개인미사의 폐지에 대하여" (De abroganda missa privata, WA 8,411-476) 을 썼다. 여기서 루터는 사제들이 회중없이 그 자신을 위하거나 혹은 죽은 자를 위해서 집행하는 개인미사 뿐만 아니라, 좋은 공적이 된다는 생각으로 행하는 미사의 희생을 비판한다. 미사를 언약으로, 즉 우리에게 주신 유언 혹은 은사로서 전개했던 이전의 생각들을 그는 이제 날카롭고 전투적인 형식으로 개진하고 있다. 새로운 논지로서 그는 히브리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단 한번" (ein f r allemal)의 십자가 희생을 미사의 희생성격을 반대하는 증거로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는 우리가 그의 희생을 생각하기를 원한다. 불안하게 전개되고 있는 비텐베르크의 사태를 개인적으로 지도하고자 1521년 12월 2일 루터는 융커 외르크 (Junker J rg) 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바르트부르크를 떠났고, 1521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아무도 몰래 (incognito) 비텐베르크에 머물렀다. 루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태롭게 하고자 하지 않았기에 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비텐베르크에서 체류한 후 다시 바르트부르크에서 그는 "소요에 폭동을 피해야할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실한 경고" (Eine treue Vermahnung zu allen Christen, sich zu hueten vor Aufruhr und Empoerung, WA 8,676-687)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엄청난 폭력으로 교회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폭력적이지만, 개혁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복음을 당파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복음주의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루터적" (lutherisch) 이라고 부르지 말도록 금했다. 선제후는 불안을 조성하는 사람을 시의회를 통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시민들은 예배의 개혁을 넘어 복음을 자유롭게 설교할 것과 개인미사의 폐지 및 평신도에게 성만찬에서 잔을 배종해 줄것을 요구했다. 선제후는 1521년 12월 19일 재차 강력하게 독단적인 새 제도의 도입을 금했다. 외적인 합의에 도달할때까지 기존의 모든 것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슈타트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에 미사의복의 사용등 다른 예식없이 알기쉬운 축성의 말씀만으로 빵과 잔을 다 나누어주는 성찬미사를 거행할 것이라고 고지했다. 선제후의 금지조치가 채 실행되기도 전에 그는 1521년 성탄절 예배에서 이 계획을 실현했다. 1522년 1월 6일 어거스틴 엄수파 총회는 수도사들에게 수도원을 떠날 자유를 허용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설교자 혹은 교사로서 활동하거나 아니면 수공업을 통해서 식량을 벌어와야 했다. 1522년 1월 11일 어거스틴 엄수파는 쯔빌링에게 수도원 교회의 부제단 (Nebenaltaere) 의 제거와 성상파괴 임무를 부여했다.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 (출20,4) 이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칼슈타트는 1522년 1월 19일 결혼했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가속화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소위 쯔비카우의 예언자들, 즉 직조상인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크 (Nikolaus Storch) 와 토마스 드레히젤 (Thomas Drechsel), 한때 멜란히톤의 제자였던 마쿠스 스튀프너 (Markus Stuebner) 로 인해 더 가열되었다. 이들은 쯔비카우 출신으로 그곳의 소요 때문에 추방되었으며, 스스로 비텐베르크로 왔다.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다고 자랑했다. "내적인 말씀" (Das innere Wort) 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기록된 말씀은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받은 내적인 계시에 의하면 세계질서는 곧 변혁을 할 것이고, 성직자와 불신자를 소멸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초가 놓여지게 될 것이다. 비텐베르크에서 이들은 물론 직접적으로 그 안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가속화되고 있는 종교개혁 운동을 부채질 했다. 이들은 멜란히톤을 불안케 했다. 멜란히톤은 1521년 여름에 나온 "신학총론" (Loci communes)에도 불구하고, 물론 여기서 루터편에 서서 새로운 비텐베르크 신학의 기본개념들을 잘 요약하지만, 복음적인 성령이해에 아직은 흔들렸고 쯔비카우인들의 예언자적인 자의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예언자들을 성서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시험해보라고 조언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그들의 설교에 영향을 받게 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린이가 낯선 신앙으로 세례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 지역이 자신들에게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쯔비카우 예언자들은 1522년 봄 이곳을 떠났다. 비텐베르크시 소요를 평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1522년 1월 24일 시규율 (eine Ordnung der Stadt) 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성화는 제거되어야 하며, 미사는 칼슈타트의 방식으로 거행되어야 하고, 성직자들의 성직록은 공동기금으로 모아야만 했다. 선제후와 함께 있던 카톨릭 주교 참사원들의 항의와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칼슈타트와 특히 쯔빌링하의 비텐베르크 개혁자들에게 개혁은 그리 만족할만큼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522년 1월 27일자 "성화의 제거와 그리스도인 가운데 거지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Von Abtung der Bilder und da keine Bettler unter den Christen sein sollen) 이라는 글에서 칼슈타트는 시규율 (die Stadtordnung) 이 반포된지 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성화는 제거되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구책을 강구했고, 이제는 직접 나서서 1522년 2월 초 시교회에서 대대적인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선제후는 다시금 기존에 사용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둘 것을 요구했지만, 사제단 회의, 대학 그리고 시의회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루터에게 돌아와서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이로인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일 후인 1522년 3월 9일 사순절 첫 주일날 루터는 처음으로 다시금 시교회 설교단에 섰다. 1522년 3월 9일 사순절 첫 주일 (Invocavit) 부터 1522년 3월 16일 회상 주일 (Reminiscere) 까지 행한 그의 유명한 설교로 도시는 평화를 다시 되찾았다. 그는 각자에게 신앙적인 책임의식을 호소했고, 개혁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개혁자들에게 기다려줄 것을 권고했다. 루터는 우선 비텐베르크를 위해서 일종의 유예기간을 택했다. 주일의 미사는 시교회에서 계속 진행했다. 1522년 부활절 성찬은 기존의 방식대로 집행했다. 즉 잔 배종은 하지 않으며, 늘 입었던 미사복과 몇몇 의식과 함께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다만 미사곡이 희생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의 호소로 즉시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는 성만찬을 두가지 방식으로 특별하게 거행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우선 미사와 결합된 설교에 강조점을 두는 정화된 미사예배가 진행되었다. 1523년 예배지침서인 "미사와 성찬 요강" (Fomula missae et communionis, WA 12,205-229) 에서 루터는 미사의 희생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 아직은 라틴어로 쓴 미사를 제시했다. 물론 복음적인 그의 의도는 독일어로 쓴 예배서가 목표였고, 이것은 결국 1526년에 쓴 "독일미사" (Deutschen Messe)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그러나 개정된 예배형식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배가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정복해야만 했다. 통역자와 번역자의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루터는 잘 알고 있었고, 비텐베르크를 은밀히 방문한 후 1521년 12월 친구의 요청으로 바르트부르크에서 11주간에 걸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언어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번역해야 할 본문의 문제을 수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룬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루터가 짧은 시간에 번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 성경을 그는 외우다시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번역을 자유롭게 써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동시에 1519년에 나온 에라스무스 (Erasmus von Rotterdam) 의 희랍어 신약성서 두 번째판을 사용했다. 루터보다 앞선 독일어 성서 번역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어떤 번역도 루터가 번역한 성서만큼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성공한 하나의 중요한 전제조건은 독일의 다양한 방언이 하나의 통일된 성서언어로 함께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이러한 통일된 언어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신약성서 번역을 통해 그 확산이 가속화 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에 그는 멜란히톤과 함께 자신의 독일어 번역 성서를 한번 더 면밀히 검토했다. 1522년 9월 독일어역 신약성서인 소위 "9월 성서" (das sog. September-Testament)가 발간되었다. 초판이 신속하게 매진되어, 1522년 12월 이미 제2판인 소위 "12월 성서" (das sog. Dezember-Testament)가 나왔다. 이것은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과 협의를 거쳐 많은 것들이 개정된 것이다. 신약과 구약을 망라한 독일어역 신구약 합본은 구약의 각성경이 개별적으로 번역되어 하나둘 나온 후인 1534년에야 이루어졌다.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성서번역을 위해 언어학적인 정확성과 함께 가장 좋고 명료한 표현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 때문에 루터는 "통역자의 서신" (Sendbrief vom Dolmetschen, WA 30 II,632-646) 이라는 글에서 표현했듯이, 백성들의 입을 보고자 노력했다. 결국 루터는 비텐베르크 개혁을 다시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1520년대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해결과정 (Klaerungsprozesse) 에서 단지 하나의 전야제에 불과한 것이다.

출처 : [기타] http://gnade.com.ne.kr/reformation/reform4.htm

'교회사자료 > 4.종교개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틴 루터의 두 왕국론  (0) 2011.07.10
[스크랩] 존 위클리프  (0) 2011.05.18
종교개혁 [宗敎改革 Reformation]   (0) 2011.03.18
종교개혁사   (0) 2011.03.18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0) 2011.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