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0. 01:11ㆍ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서 공사를 시행한다.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 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선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순교비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머릿돌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관훈
입구 소개판
입구 소개판
손양원 목사를 기리며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손양원 목사와 기도
손양원 목사
손양원목사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간,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기도로 산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 생가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일제의 위협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한성 신학교 학적부
일제 검사에게 취조받는 손양원 목사, 사랑의 원자탄 영화의 한 장면
출옥 후 옥종면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안하기위해 애양원을 떠나서 하동군 옥종면 산속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성도들이다. 둘째 줄 꼬마가
둘째아들 동인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일제는 군입대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온 가족이 흩어져 신사참배를 안하도록 의논하였다.
이에 동희와 동장이는 구포 고아원으로 동신이는 옥종면으로 동인, 동수, 어머니는 남해 산골로 각 흩어져 살다가 해방 후 모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다.
성경
손목사 십일조 내역
손 목사의 설교노트, 1925년도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김수남 권사가 받아 쓴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손종일 장로 신앙
옥중서신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에는 이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이외의 많은 사진들과 손양원목사님의 친필 설교 노트, 옥중편지, 성경 등 많은 유품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당시 손양원목사님이 활용하셨던 고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옥중편지
청주구금소에 있는 손목사님에게 어린딸이 보낸 편지
옥중편지
옥중편지
옥중편지
옥중편지
손양원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손양원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사모, 안고있는 아들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 낳은 아들이다.
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막내는 손동길 목사, 세째 사위 김원하 목사, 큰 외손자 박유신 목사)
손양원 목사 장례식
손양원 목사 하관식
손양원 목사의 생전의 옷 솜바지
손양원 목사의 생전의 옷 조끼
손양원 목사의 생전의 옷 조끼
순교자 동인, 동신 장례식, 1948. 10.24 애양원 교회 장례식 장면
1948. 10. 19 여순 사건 발생으로 동년 10.21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동인 나이 23살, 동신 나이 18살이었다.
손양원 목사 안장후 손동인,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목사님의 묘가 있다.
순교자 손동인
1925년 11월 6일 손양원 목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절대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1948.10.21 여순사건 때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23세에 순교하였다.
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목사
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목사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안재선
손양원 목사 순교 후 가족들과 함께한 안재선 (동인 동신 형제를 주였으나 손 목사님이 양자로 삼았다)
9가지 감사
아홉가지 감사
손양원 목사 일화
대한민국건국훈장, 1995.8.15
성화,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승리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지하 전시실
손 목사님이 사용하던 강단의자
애양원 순교유적지 입구, 오른쪽 길로 가면 성산교회, 기념관, 토플하우스, 평안의집, 역사박물관, 묘역 등이 나온다.
애양원 순교유적지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서 공사를 시행한다.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선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며 2007년까지 모두 마무리할계?이다.
유적지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성산교회(애양원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벨 목사와 오웬 목사가 파송 되었고 1904년 12월 25일 성탄에배를 드리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18일 광주에서 교회가 창립되었다. 1916년 세례교인 56명이 투표로 이종수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가 늘어나 1924년에는 560명에 달하게 된다. 그 후 부터 광주 한센병자촌을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를 해서 1928년 2월10일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되었다. 이후 1934년 4월 4일 예배당 재건되고 1935년 당시 애양원 원장인 윌슨 박사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현상공모하여 "애양원" 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 후 애양원교회로 불렀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 제2대 담임자로 1939년 7월14일에 부임하여 목회 하였으며 1945년 9월10일 부터-10월 15일 까지 애양원 병원장을 겸임 하였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 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며 공산군에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82년 2월28일 본원의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교회 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어 현재 사용하고 있다.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문화재 예배당
문화재 예배당
문화재 예배당 연혁
입구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성산교회 내부
내부 강단
초기 애양원교회 사진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애양원과 최흥종 목사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포사이트 선교사의 한센병 환자 치료에 감동을 받아 목사가 된 후 나환자 선교와 사회구원에 힘썼다.
성산교회 역대교역자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성산교회 역대교역자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뒷면
손양원원 목사 내외, 손동인, 손동신의 묘역
손양원원 목사 내외(뒤), 손동인, 손동신의 묘 (앞의 두 묘소)
손양원원 목사 내외(뒤), 손동인, 손동신의 묘 (앞의 두 묘소)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
애양원 동쪽 끝인 동도섬에는 1950년 9월28일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모두 세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두개는 1948년 10월21일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이다. 뒤의 묘소는 손양원 목사님과 1977년 11월26일 소천하신 정양순 사모님이 합장되어있다.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비
손동인, 손동신의 묘비 전면
손동인, 손동신의 묘비 옆면
손동인, 손동신의 묘비 옆면
손동인, 손동신의 묘비 뒷면
토플하우스 (옛 한성 신학교 건물)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토플하우스 (옛 한성 신학교 건물)
토플하우스 (옛 한성 신학교 건물)
노인요양원 평안의집
노인요양원 평안의집
여수애양원 병원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 시대가 시작되었다.
여수애양원 병원
여수애양원 병원
여수애양원 병원
역대 원장 기념비
역대 원장 기념비
초대 고 포사이트 원장 기념비
초기 애양병원
애양원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벨 목사와 오웬목사를 파송하여 광주 선교부를 만드면서 1904.12.25. 성탄절 예배와 함께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오웬목사는 이 후 전남 동부지역의 능주, 남평, 화순, 장흥 등지를 맡아 선교하였다. 오웬은 1909.4.3. 급성 폐럼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당시 오웬을 치료하기위해 목포에서 활동중이던 의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는 급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로 오던 포사이트는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왔다. 이 한센병 여인은 1908.3. 에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윌슨(Robert M. Wilson) 과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받게 되었다. 윌슨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택 건축을 위해 사용하던 벽돌 가마터를 단장하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정성된 치료에도 불구하고 여 한센병 환자는 주님을 영접하고 수 주일 후 소천하였다. 이일을 시작으로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집을 짓고 20여 명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고 1928년 여수로 터를 옮긴 후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수애양병원
현재의 애양병원은 정형외과, 피부과, 마취통증과, 내과 진료를 하고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와 일반 장애인들에게 의료적, 직업적, 정신적으로 재활을 도모하고 영적 구원을 위해 설립되었다.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은 애양병원 이외에 애양평안요양소, 애양재활직업보도소 등도 함께 운영하고있다.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 역사박물관
역사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우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이었다. 한동안 양로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 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에는 애양원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도록 당시 사용하던 의료기구들, 의료진들의 활동, 환우들의 생활상 등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다.
역사박물관과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박물관은 성산교회 건너편에 위치해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여수애양재활병원 현판
옛 교회 종
의료기구
애양병원 역대 원장
초기 애양원 사진
설립자 포싸이트 선교사
포싸이트 선교사
윌슨 원장
윌슨 원장
윌슨에게 내려진 훈포장
윌슨 선교사 관련 기사
대한민국문화훈장
훈포장
1941년 윌슨 병원장 환영행사
애양원병원과 성산교회의 변천사
애양원병원과 성산교회의 변천사
애양원병원과 성산교회의 변천사
성산교회 역대 교역자
성산교회 역대 교역자
성산교회 역대 교역자
전시물
제1전시실, 한센병
진료실
진료실
방사선 실
진료실
진료실
진료실
진료실
진료실
1층 1940년대 미국에서 제작된 휠체어
1층 전시실
전시실
1층 인공 고관절 시술 전시물
1층 인공 고관절 시술 전시물
인공 고관절 시술 전시물
2층 선교사 사무실 재현
1940년대 미국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사무용 집기들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였다.
2층 선교사 사무실 재현
선교사 가족
선교사가족
2층 당시 사용하던 선교사 의자
2층 애양원 병풍
2층 초창기 환자 입원실 재현
부부가 입원할 경우는 한 병실을 사용하였고 독신인 경우는 3명이 한 병실을 사용하였다.
2층 전시실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1층 전시실
전시실
2층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어린이 치료
한센병 환자와 처소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
전시 사진
2층 전시물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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