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

2011. 1. 18. 01:36교회사자료/6.장로교회사

제1장 장로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 장로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 장로교회란 장로회 치리형태를 채택한 교회이다.

 

교회를 위하여 치리가 필요한 성경적 근거는 마18:15-18 이다. 교회가 부흥되고 확장됨에 따라 조직과 관리가 필요하게 되어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는데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교황정치 :

 

교회를 계층구조로 이해하여 여러 계급으로 조직하고,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권세를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에게 주었으므로 교회는 세속정부의 영역까지 관할해야 한다는 정치체제로서 카톨릭교회가 이 치리 형태를 채택하였다.

 

2) 감독정치 :

 

계급구조를 따르고. 교회는 정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교회의 머리는 정부의 수반이 되고, 지 교회는 자율권이 없는 정치체제로서 성공회와, 정부를 교회의 머리로 삼지 않는 감독정치를 감리교회가 이 치리 형태를 채택하였다.

 

3) 회중정치 :

 

개 교회주의를 주장하고,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며. 성경적 배경을 추구하였고. 교회와 정부의 분리를 주장하고. 지 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회중에 의한 목사선택, 교회의 권징을 실시하는 정치체제로 침례교회에서 이 형태를 채택하였다.

 

4) 장로정치 :

 

자율사상과, 평등사상을 받아들이어 교회원이 장로라는 대표를 선택하여 대의 정치를 추구하고.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믿고 교회 사이의 연합을 강조하며. 교회와 정부영역을 분리하나 두 기관은 동등해야 한다는 정치체제로 장로교회, 개혁교회가 채택한 치리체제이다.

 

각 정치 체제가 그 시대 그 문화에 맞도록 채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장로교회는 장로회정치체제를 채택한 교회인 것이다.

 

 

(2) 장로교회란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교리로 채택한 교회이다.

 

1) 장로교회란 개혁주의자들의 5가지 주장을 따르는 교회이다.

 

개혁주의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인대 장로교회는 이 주장을 채택한 교회인 것이다.

 

①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의롭다 함을 받는다.

 

②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구원을 받는다.

 

③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tura) 교회의 기준을 삼는다.

 

④ 오직 그리스도만이(Sola Christo) 중보자시다.

 

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려야 한다.

 

2) 장로교회란 칼빈의 5대 교리를 따르는 교회이다.

 

칼빈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인데 장로교회는 이 교리를 따르고 있는 교회인 것이다.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 of the saints)

 

 

존 칼빈의 5대 교리는 신본주의를 신봉하는 장로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서, 이해를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인본주의와 교리를 비교해 본다.

 

A. 부분타락과 완전타락

 

a. 부분타락

 

인본주의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에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할 정도로 완전타락을 한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양심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선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믿게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간 각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b. 완전타락(전적타락)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도록 주어진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간에게 양심마저도 없다면 동물과 마찬가지인 존재가 될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대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므로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롬 2:14-15,20)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 2:17절에서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하셨고, 로마서 3:10절에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B. 조건부 선택과 무조건 선택

 

a. 조건부 선택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여 구원하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하리라는 예견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신앙을 선택하고 이에 하나님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선택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b. 무조건 선택

 

그러나 성경 말씀은 에베소서 1:4-5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예정섭리에는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는 작정과 전적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딤후 1:9), 인간의 어떠한 선한 행위나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딤후 1:9, 행 13:48)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이미 전능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신 전능자이시며, 인간의 모든 의지는 그분께 종속되어져 있는 것이다.

 

 

C. 일반적 속죄와 제한 속죄

 

a. 일반적 속죄(만인구원)

 

인본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세계)을 위하여 죽었으며, 오로지 그러한 사실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이 효과를 보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

 

 

b. 제한 속죄

 

다른 말로 특별 속죄라고도 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직 택함을 입은 자녀의 죄만을 제한하여 대속 해 주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에서 오직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도 로마서 8:33절에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와 로마서 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송사를 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D. 가항력 은총과 불가항력 은총

 

a. 가항력 은총(거절)

 

인본주의자들은 성령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할 수 있는 일은 하시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저항할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중생 시킬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저버릴 수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b. 불가항력 은총

 

이를 효과적인 부름이라고도 부르는 데, 디모데후서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와 디도서 3: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부르사 구원하심은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하신 은혜의 섭리만이 요구되어짐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셔서 구원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아니하며, 오직 그분의 전능하심만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다.

 

 

E. 구원의 불확실성과 구원의 견인

 

a. 구원의 불확실성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연결되어 일치될 때 인간의 구원이 성립된다는 신인공동사역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혹 구원받은 사람도 신앙을 잃고 타락하면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구원을 의심하게 되어 불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b. 구원의 견인(확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에 그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히브리서 6:17-18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너무도 확실한 말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1-22절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도의 보증과 인이 되어 주심으로, 이러한 약속들을 굳게 확립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틀림없는 보호를 입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다.

 

 

2. 장로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장로교회 특유의 교리

 

장로교회의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요리문답에 나타나 있다. 이것이 장로교회의 교리 규준이다.

 

장로교회는 이 규준 문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교리를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문서를 만든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회원은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선서를 요구받았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일원이 된 이 회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일치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교리만을 말할 것을 삼가 약속하며 서약합니다.?

 

 

장로교회의 규준 문서에 나타나 있는 교리의 체계는 존 칼빈의 이름에서 따온 이른바 칼빈주의 신학이다. 칼빈은 웨스트민스터 회의 100년 전에 이러한 교리를 ?기독교강요? 가운데 상세히 가르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성경을 배움으로써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한 칼빈주의 교리를 성경 가운데서 찾아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칼빈 이전에 이러한 교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명쾌한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그 이후에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로서 알려져 있는 위대한 교리 체계로 체계화시켰던 것이다.

 

 

장로교회는 물론 하나님,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을 믿고 있다. 또한 중생, 신앙, 의인, 성화, 양자가 되는 것을 믿고 있으며. 더욱이 성령의 인격성과 능력,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 이러한 교리를 복음주의 적인 모든 교회들과 함께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몇 개의 교리가 있다. 이것은 장로교회 특유의 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A.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이것이 중심적인 교리이며 다른 교리는 이 교리를 기초로 해서 세워진 건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장로교회는 하나님만이 우주에서 가장 높고 절대적인 지배자이며, 창조와 섭리와 속죄의 사역에서 주권자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1) 웨스트민스터 문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신앙고백서 제2장 2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하나님만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 모든 것은 그에게서. 그를 통해서 그를 향해서 존재한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가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사용하시고 보호하시고 명령하신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노출된다. 그의 지식은 무한하고 틀림이 없고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우연한 것이나 불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계획이나 역사나 명령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시다.“

 

 

2)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해서 흐르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단 4:35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계 19:6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3) 이 교리의 중요성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상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상을 가지는가에 의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정하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은 구원에 대해서도 숭고한 사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B. 예정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나오는 것이 이 예정론 이라는 장로교회의 교리이다.

 

엄밀한 신학적인 용어로서는 예정론(Predestination)이라는 것은 인간과 천사,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고,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포괄적인 것이며 하늘과 땅, 지옥을 그 계획 가운데 포함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1) 웨스트민스터 문서에 있어서의 예정론

 

이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칙령이란 그가 뜻하시는 의견을 쫓아 정하신 그의 영원한 목적이며, 이 목적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서 장차 일어날 모든 것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제7문)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신의 뜻으로 말미암아 가장 현명하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장차 일어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또한 변함이 없게 재정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조정하시거나 인간에게 허락하신 의지를 부정하시거나 또는 제 2의 원인의 자유와 유연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립하는 것이다.?(신앙고백 3장 1절)

 

 

2) 성경에 있어서의 예정론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있는가?

 

요셉의 이야기는 이 교리를 매우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가혹한 일을 했다. 몇 년 후에 요셉의 형제들에게 말한 것을 보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에게 내려졌던 한 가지 한 가지의 재난은, 세상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어야만 했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또한 오순절에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했던 설교도 이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행 2:23).

 

예수의 생애 가운데 일어났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행 15: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엡 1:4-5-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롬 8: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계에 대한 실권을 쥐고 계시고. 하나님은 마음 가운데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위에 하나님의 계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움직여 이익이 되도록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커다란 위로의 원천이다.

 

 

C. 은혜에 의한 구원

 

장로교회는 언제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강조했다. 이 교리에 의해서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자립 구원설

 

이 주장은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자가 될 수 있고. 인격자가 되면 구원받는다.?라는 것이다. 이 구원에 대한 견해는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사람이 주장했던 것이다.

 

 

2) 신인 협력설

 

두 번 째의 견해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에 의해서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할을, 인간은 인간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협력에 의해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은혜에 의한 구원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있다.?유효소명(Effectual Calling)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 바,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비참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개발시키고 우리의 뜻을 새롭게 하시어 그 부르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설득하시며 또한 그렇게 할 힘을 주십니다.?(소요리문답 31문)

 

구원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심과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구원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해 주신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서 속죄의 축복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들에게 거듭남, 회개. 믿음.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게 하는 힘을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다.

 

엡 2:8一너회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롬 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D. 성도의 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장 1절)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2) 장로교회 정치체제의 특징적인 원리

 

A.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치리회

 

장로회 정치체제는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사용하는 데가 많다. 장로회 정치체제란 장로들만의 교회의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의 연합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체제를 말한다. 이 말은 장로도 목사의 목회(Ministry)에 가담한다는 말이 아니다.

 

당회(Kirk-Session)나 노회(Presbytery)나 대회(Syond)나 총회(Genera1 Assemb1y)에서 치리회(Courts)든 의회(Convention)든 언제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교회정치 체제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 후 한번도 목사만으로나 장로만으로 당회나 노회나 대회나 총회를 모인 적이 없다. 특히 이런 정치체제나 치리체제를 장로회 체제(Presbyterian System 또는 Presbyterial Church Government)라 한 것은 감독교회체제(Episcopalian System)에 대한 말이었다.

 

사도교회에서 사도들이 장로들에게 감독 직을 부여한 것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장로직보다 감독직을 우선으로 하여 1천년 이상의 교회 정치체제를 굳힌데 대하여 종교개혁 당시에 많은 수난을 무릅쓰고서 장로회체제로 복원한 것이며. 특히 유럽대륙에서는 1천 년 이상 몸에 밴 감독(bishop)체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영국 쪽에서 과감히 장로회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즉 목사(minister 또는 Pastor)와 감독(bishop)이냐? 목사와 장로(minister와presbyter)냐를 놓고 스코틀란드 교회는 몇 번을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목사와 장로로 귀결하고 감독 정치체제 쪽이 아닌 장로회 정치 체제(長老會政治體制) 쪽으로 결론을 내린 데서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가 정착된 것이다.

 

장로교회는 감독교회와 회중교회의 정치 형태가운데도 진리의 일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정치 형태는 회중에 의해서 선출된 장로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대의제라고 믿고 있다.

 

 

B.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대의적 유기적 통일체

 

장로교회는 당회, 노회, 총회에 의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질긴 끈으로 결속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 때 먼저 유대교로 개종하고 유대인의 습관, 의식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완전히 고립되어 다른 교회와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문제를 자기들끼리 처리했을 것이다. 바울이나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안디옥 교회는 충분히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 회의(church council)의 의제로 삼게 했다.

 

이 회의는 사도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회의는 장로교회의 대회(presbyterian Synod) 또는 총회(General Assembly)와 매우 닮았다. 이 예루살렘 회의는 깊이 토의한 결과 문제를 해결하고, 안디옥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교회도 이 결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신약의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는 끈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장로교회의 원리에 관해서 디모데전서 4장 14절의?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는 말씀을 보면 여기서 ?장로"는 원문에는?장로들의 일단??장로단??장로회“라는 말이다. 영어의 노회(Presbytery)에 해당하는 말이다.

 

성경은 여기서 확실하게 ?노회?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로회와 근대 장로교회 제도의 노회라는 것이 그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신약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장로교회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의 장로교회는 각 교회가 하나의 생명적인 통일체(유기적인 통일체)의 구성분자임을 나타내는 일련의 교회 회의(churchcourts)를 가지는데 4개의 교회 회의를 가진다.

 

네 개의 교회 회의는 당회, 노회, 대회, 총회로 구성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지역 규모 상 3심적 당회, 노회, 총회로 구성하고 있다.

 

 

각 교회는 당회(Session)를 가지고 있다. 당회는 목사 또는 복수의 목사와 치리장로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당회의 임무는 각 교회를 영적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노회(Presbytery)는 일정한 지역 내의 모든 목사와 각 교회로부터 파송 된 총대 장로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노회는 지역내의 교회와 목사들에 대한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대회(synod)는 인근 지역 최저 3개 노회 이상으로 구성된다. 소속 노회의 모든 목사와 한 교회 한 명의 장로에 의해 구성된다. 그 관할하는 노회에 대해서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총회(General Assembly)는 교회의 최고 기관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전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 총회는 전 노회로부터 파송 된 대의원에 의해 구성되며 대의원의 수와 선출 방법은 규정을 정하여 시행한다. 총회는 전 교회와 그 활동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2장 장로교회의 기원과 유래

 

 

1. 개혁이전의 장로회.

 

(1) 성경 이전 문서에 나타난 장로

 

시리아의, 유프라테스 강(江) 중류 마리유적에서 발견된 2만 장 이상 되는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쓰여진 점토판 문서(粘土板文書)가 있는데 이를 마리 문서(Mari Letters)라 한다. 이 문서의 대부분은 야스마하 아다드왕 시대와 짐릴림 왕 시대(BC 18세기)의 것으로, 외교문서 ·의식문(儀式文) ·역사기록 ·상업문서 ·행정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마리문서는 BC 2000년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적 사항의 연대 결정에 중요한 구실을 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 장로란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발견되는데 이 문서로 보면 인류는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에서 추장이나 족장의 리더 아래 장로라는 협의체와 치리 기관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2) 성경에 나타난 장로의 어의

 

장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약 100번, 신약성경에 65번이 나오고 있다.

 

구약 : 1) לוֹד? (가돌) : 손위. 형(elder)(창10:21 27:42 삼상18:17

 

왕상2:22 겔16:46,61 23:4)

 

2) ???(자켄) : 나이든 장로, 장자. 수염이 있는 노인

 

(old aged)

 

(창50:7 출3:16,18 4:29 12:21 17:5,6 18:12 19:7

 

24:1.14 레4:15 9:1 민11:16 16:25 신5:23

 

19:12)

 

신약 : Πρεσβὐτερος(프레스뷰테로스) :

 

손위, 조상(눅15:25 행2:17 마15:2 막7:3,5 히11:2)

 

공직자(마16:21 26:47,57 27:3 막8:31 11:27

 

눅7:3 9:22 요8:9 행4:5 6:12 14:23 딤전5:17

 

딛1:5 약5:14)

 

영광 받을 자들(계4:4 5:5 7:11 11:16 14:3 19:4)

 

 

(3) 구약시대의 장로회

 

구약성경에 있어서 교회는 어떤 것이었는가? 구약시대에 교회가 있었는가?

 

스데반은 구약시대에 교회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사도행전 7장의 설교에서 모세 시대의 ?광야 교회?(행 7:38)에 대해 말하고, 이 광야교회는 장로들에 의해서 통치되었다는 것이 출애굽기 3장 16절, 민수기 11장 16절 등 많은 성구에서 보여 지고 있다.

 

 

1) 구약에서의 장로들은 교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위치와 직무를 행했다.

 

출18: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레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

 

레9:1 "제 팔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

 

민16:25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출19: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

 

모세는 백성의 대표들인 장로들을 소집하여 업무를 집행해 나간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 11장은 백성의 대표로서의 장로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2) 장로 70인을 세워 대의 정치를 행했다.

 

출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

 

출24:9-10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

 

출4: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

 

수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삼상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

 

겔8:11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

 

 

3) 이상의 구약에서 보여주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면서도 분리된 관계였다. 왕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이 구분되었던 것이다.

 

 

4) 신구약교회의 관계는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교육방법이 달라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고, 로마서 11장 17-21절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것의 뿌리를 구약성경에다 깊게 내리고 있는 감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이방인의 교회는 이 오래된 나무인 구약교회에 접목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O절에서는 기독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지자들?이라는 말에 의해서 우리들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장로교회의 교회관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장로교회가 ?신자의 자녀는 계약에 의해,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교회 회원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들이 구약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포함되어져 있고 또한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확실하게 제외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자의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회원이라고 믿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교회는 장로에 의해서 통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멀리 모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4) 회당시대의 장로회

 

1) 회당과 장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시부터 신구약 중간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형성 확산시킨 것이 회당(Synagogue)이었는데 여기서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도 하고 찬양을 하고 모세를 전하기도 하였다.(행15:21 겔8:1 14:1 20:1-4 33:30-)

 

그들은 이곳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예배하고 교육을 받았다. 이 회당의 모든 권위는 장로들로 구성된 조그마한 조직체에서 좌우하였다.

 

이 때 바벨론에 흩어진 자들은 직접 선거로 뽑았고, 그 이외 지역에서는 도성 가까이 있는 산헤드린과 예루살렘의 대 산헤드린에 의하여 임명되기도 하였다. 장로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요청되었을 때는 그들은 공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율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을 때는 회중에 의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로 또는 서기관(랍비)으로 부름을 받아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수를 받았다.

 

이 때 집례는 세 장로가 있어야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숫자가 적은 회중에서는 혼자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였으며 회의를 사회하였다. 그러나 단독으로는 권위 있는 결정은 할 수 없었다. 교의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있는 동료 장로와 함께 협의하였다.(눅13:14)

 

각 회당에 있는 장로들의 의회는 한 사람의 우두머리나 의장을 임명했다. 이를 회당장 또는 의장이라 불렀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나 밑의 사람들에 의하여 선출이 되었는데 일시 또는 영속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회당장은 항상 의회원과 같이 그러나 그들과 구별된 사람으로서 예전과 직무를 수행하였고 당회의 당회장으로서 사회를 하였다

 

회당에서 장로들의 의무는 의장 밑에서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이었다.

 

가르치는 일은 이미 장로가 된 기성인들이 하였고, 다스리는 일은 학식이 있고 전문적인 계층이 하였다. 이들은 모두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전통과 해석에 대해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서기관 일을 한 대표자이었다.(스7:6 느8:1-9) 후기에는 제사장뿐 아니라 일반인 중에서도 서기관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회중의 자연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마23:2-7에서 지적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개 회당은 장로 직으로 운영되었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그 지역 모든 회당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모아 장로회를 이루어 해결과 해답을 내렸으며, 모든 회중들을 돌보았다.

 

 

2) 산헤드린

 

산헤드린의 역사적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이 산헤드린의 성서적 기원은 신명기 17:8-11, 민수기 11:16에 둔다. 탈무드는 이 기원을 모세에 두며 백성을 재판하는 일을 한 것으로 명시하였다.

 

이 이름이 옛날에는 게루시아(γερουσια)로 통하여 “장로들” “장로들 모임” “백성들의 장로들”로 통용되었다.

 

이 말이 의회 또는 “재판 법정”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고등법원 대법원을 지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대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지방에 있는 소 산헤드린의 정족수는 23인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71인이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제사장,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들로서 이들은 대제사장 하에 있었다. 이를 “노회”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백성들 또는 이스라엘의 의회“라고도 하였으며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전직 대제사장, 현직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들, 장로들이었는데 이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회당에서 나온 대표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대 산헤드린 아래 예루살렘에 23인으로 구성된 보조적 법정이 둘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유대인 가구 수 120 이상이면 어느 마을에도 산헤드린을 설립할 수 있었는데 이 지방 정족수는 7인이었다.

 

산헤드린은 축제, 새 달의 계산을 좌우했고, 순례자들을 통하여 올라오는 산적한 종교적 사회적 법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내리는 일을 하였다. 문화적인 전통과 종교적인 독립과 자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산헤드린은 국가적 차원의 “백성들의 의회”였으며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통하여 발언을 하였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율법은 온 이스라엘에게 공포되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주 업무는 백성들의 소송 건에 대하여 재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종족 문제와 거짓 선지자, 고위 성직자의 유죄 유무와 적대국과의 선전포고와 성전의 성소 부분의 가감과 각 지파의 산헤드린 회원의 임명과 우상숭배의 심판등을 성경에 기인하여 판단하는 기능을 행하였다.

 

 

이 시나고그(회당)와 산헤드린은 민주적인 대의 정치의 본이었으며, 사람들의 의사를 가장 정당하게 잘 표현할 수 있으며, 가장 적합하고도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군주중심의 나라들 앞에서 장로회 조직체로 보여준 대의 정치는 오늘 날 까지도 본이 되는 것이다.

 

 

(5) 신약(사도)시대의 장로교회

 

장로교회라는 말이 역사에서 정식으로 사용되기는 1620년경이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기원은 사도시대 당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장로 직이 공적으로 교회의 직분으로 도입되었다

 

사도들의 전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교회(에크레시아)에 처음으로 장로 직이 언급되기는 행11:30이다.

 

벌써 이때 유대인 회당의 장로가 아닌 우리 기독교의 장로 직이 직분으로 도입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세운 교회에 ?교회마다 그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임명?했다고 씌어져 있고, 사도행전 2O장 17절에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라고 씌어져 있고, 디도서 1장 5절에서는 바울이 디도에게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함이니?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신약성경의 교회가 보통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졌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2)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 두 직분을 두었다

 

장로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에 허락한 직분은 장로(또는 감독)와 집사의 2가지 직분만을 인정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에는 구별이 없다고 본다.

 

3직분론 자들은(감독주의자, 교황주의자) 목사 또는 감독(teacher elder), 장로(ruling elder), 집사(serving office)의 3가지 직분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에서의 장로와 감독은 목사에 관한 언급이지 평신도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치리장로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본다.

 

두 직분 주장의 성경적 배경 : 빌 1:1 딤전 3:1-2, 8, 12

 

비록 성경은 2가지 직분만을 인정하나 그 직분의 기능은 셋으로 구별된다. 곧 가르치는 것, 다스리는 것, 섬기는 것이다.

 

 

3) 장로와 감독

 

성경에서 장로란 단어는 늘 감독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어떤 직분을 제정하실 때는 어떤 명칭보다도 그들의 기능과 활동을 위하여 일꾼을 세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의 명칭은 다양하게 장로, 목자, 교사, 감독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도들도 바울은 빌 1:1; 딤전 3:1-2, 5:17; 딛 1:5-7에서, 베드로는 벧전 5:1에서, 야고보는 약 5:14을 통하여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임을 말하고 있다.

 

 

죠지 나이트(George Knight. 커버넌트 신학교 교수)는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장로는 구약배경을 가진 말로 어떤 일에 노련하거나 권위, 성숙함과 연결되어 사용되었고 감독이란 말은 헬라계통에 익숙한 말로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특별한 책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요한과 베드로는 감독이었으나 장로로 자신을 소개(요이 1:1; 요삼 1:1; 벧전 5:1)했던 것이다.

 

 

장로회 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감독(bishop)이라는 말을 대할 때 당황한다. “감독?이라는 말은 신약성경 가운데 다섯 번 나온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감독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성경을 잘 공부하면 감독이라는 것은 요컨대 장로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 2O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 에베소 교회의 장로를 청하는데, 2O장 28절에서는 동일 인물을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도서 1장 5절에서는 바울은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있으나, 7절에서는 동일 인물들을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었음은 분명한 것이다. 다만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무에 대한 다른 지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며 대개의 근대학자들의 견해이다. 장로가 때에 따라서 감독이라고 불려진 것은 다음 시대의 교회정치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4) 장로 직의 두 종류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은 장로에는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5) 치리 하는 장로의 선택

 

신약교회의 장로들은 일반 회원(교인)에 의해 선출되어 임직 했다. 거기에는 충분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다.

 

사도행전 1장 23-26절에서 모든 제자가 유다 대신 보충하기 위하여 맛디아의 선거에 참가했다. 6장 3절에는 일곱 사람의 집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모든 제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또한 14장 23절에서는 모든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임명?(ordain)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은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손을 올리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장로 임직식 때에 손을 얹는 ?안수?에 관해서라기보다도. 장로 피택을 할 때 피택 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약성경에서 초기 기독교의 문헌에로 눈을 돌려 볼 때 교회 정치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교회의 일꾼들(church officers: 집사, 장로를 의미함-역주)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Rome)는 A.D. 100년경 교회의 일꾼은 ?전 회중의 동의에 의해? 그 직무에 임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약시대의 장로들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믿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정치 형태로서 대의제(代議制)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대의제는 오늘날까지 항상 장로주의에 있어서 소흘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의제라고 하는 장로교회의 이 교리에 의해서 시민적, 종교적 자유와 인간의 사회 의식 일반이 증진되고 큰 은혜를 계속 받고 있는 것이다.

 

 

신약교회의 장로제도는 헬라문화 환경 속에 있었던 장로제도, 고대 근동지역의 장로제도, 그리고 구약의 전통을 계승한 회당(synagogue)이나 산헤드린(sanhedrin)의 장로제도 중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셋 중에서 신약교회에서 모방한 제도는 회당과 산헤드린의 장로제도였다. 그리고 둘 중에서도 회당의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팽창으로 즉각적인 어떤 조직의 필요성이 있자마자 교회는 자신의 회당을 형성하였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이방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팔레스틴에 있는 크리스챤 공동체는 오랫동안 회당이라는 이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호칭되었다. 이에 회당이라는 이름 자체를 가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필연적인것은 아니지만, 회당의 정상적인 행정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로들의 체제(body of elders or presbyters)가 종교적인 예배와 부분적으로는 당시 사회의 번영을 위해 돌보도록 출범되었다."

 

신약교회에 나타난 장로제도의 적용에 있어서 오늘 장로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은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이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교회직분을 이 직분론으로 보느냐 삼 직분론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다 감독/장로와 장로의 관계는 직분 상(office)의 구분이 아니라 기능상(function)의 구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신약교회의 직분론이 오늘날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교회직제가 더 성경적인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미완성된 일치와 조화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6) 사도후시대 교회와 그 이후의 교회정치 형태

 

초대교회 초기에는 장로주의 적 정치형태를 유지했으나 교회가 확장 부흥됨에 따라 강력한 교권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중기 이후로 감독 중심으로 변천하게 됨을 보게 된다.

 

1) 클레멘트(30-100) :

 

[고린도 인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the Corinthians)] 에서 사도들이 감독과 집사의 구별을 하지 않았다. 클레멘트 때까지만 해도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정부형태를 유지하였다.

 

2) 폴리갑(69-162) :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클레멘트와 같은 사상을 보여준다, 빌립보 교회에는 두 가지 직분 곧 집사와 감독만이 있으며 어떤 직분의 높고 낮음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이래 폴리갑 때까지 50-60년 이상 교회의 직분을 집사와 감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키프리안(200-258) :

 

3세기에 접어들면서 박해, 배교, 교회의 분열 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키프리안이 '감독중심'으로 모일 것을 강조하자 '감독우위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감독직의 운영상의 우위성이 주장되기 시작했고 회의 시에 사회를 보는 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키프리안 자신은 감독을 장로보다 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키프리안 때까지는 로마교회의 군주적 감독직(monarchical episcopasy)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장로회 정치는 종적을 감추고 긴긴 중세교회시대는 교황정치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4) 왈도파 :

 

그 와중에도 12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왈도파에서는 성경 66권만을 유일한 신앙의 기초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로 주장하고, 연옥은 적그리스도의 고안물이며, 교회절기, 성자숭배, 성수, 금욕주간, 미사는 인간적 고안물이라 주장하고,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뿐이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인은 세속 권에 순종하여야 하며, 세금을 바칠 것을 주장하였다.

 

교회직분을 장로와 집사로 구분하고, 장로회를 인정하고, 목사가 큰 죄를 저질르면 출교 되든지 설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장로는 회중으로 부터 선출하고, 교회 총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목사는 일년에 한 번 회집해야 한다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룹이므로 피터 왈도파를 장로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과 교회정부 형태가 오늘날의 장로교회와 같았음을 볼 수 있다.

 

 

2. 칼빈의 장로교회 주의에 영향을 끼친 개혁자들

 

(1)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

 

16세기 개혁교회의 장로정치제도는 15세기 이후 체코의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Bohemian -Morahian Unity of Brethren) 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이들은 1467년, 장로제도를 캐톨릭 교회의 교황 감독제 대신 선택하였다.

 

이 교회에 장로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1877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 개혁교회연맹 총회에 파송된 대표를 통해서 재확인 되었다.

 

“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인 형제단 교회를 대표했다고 믿는다. 요한 칼빈이 태어났을 때, 형제 교단은 이미 장로들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심한 것은 여자 장로들도 있었다. 성실하고 경건한 장로들이 당시 장로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우리들의 교회가 바로 이점에 있어서 증인이다. 교회가 존재했었고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장로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이러한 장로들을 곧 목사로 간주했으며, 목사의 직분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직분으로 보았다. 그들은 신약의 감독과 장로를 같은 직분으로 보았고, 그래서 교회의 직분을 두개로만 구분하였다. 즉 장로들과 집사들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교회 직제구조를 가졌던 형제단 구성원들은 일찍이 루터를 만났고, 1540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방문하여 부쳐와 칼빈을 만나 토론을 가졌고, 후에 서신교환을 하였음이 밝혀졌다.

 

 

(2) 바젤(Basel)의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

 

형제단과 더불어 개혁교회의 정치제도에 영향을 주었던 자는 스위스 바젤(Basel)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 그는 1530년경 바젤에 새로운 교회조직을 만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마태복음 18:15-18절을 자신의 시대에 교회를 위해 필요한 성경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도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discipline)를 조종하기 위해 임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장로들의 위원회는 12명의 책임성 있고, 평판이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4명의 목사들, 4명의 시당국의 대표자들, 그리고 4명의 일반시민들의 대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작은 마을에서는 3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위원들을 구성하려는 그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였다.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조직을 위해 세속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교회의 권위를 가져가는 당국들은 적그리스도보다도 참기 힘들다 ···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당국에 가라고 아니하고 교회에 가라고 하였다.”

 

그의 개혁은 그의 사후 시당국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와 취리히의 쯔빙글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3) 스트라스부르(Strassburg)의 마틴 부쳐(Martin Bucer)

 

프랑스 스트라스 부르의 부쳐는 1530년 외콜람파디우스를 만났고 그가 발전시킨 교회관리위원회(a board of Kirchenpfleger)를 1532년에 구성하였고 1533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 교회규정(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1536년 부쳐는 "복음서의 주석"(Commentary on the Gospels)에서 일반적으로 치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대시켰다. 그는 여기서 장로들을 특별히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진 자들로 규정하였다. 참회(Cofession)까지도 장로들 앞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3판을 내면서 성도들의 치리에 대한 수정을 가했고, 주로 목사들에게 이임되도록 규정하였다.

 

2년 뒤에 사목(pastoral care)에 관한 논문(De Vera Animarum Cura)에서 사목의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임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죄인들을 치유하고 영혼을 돌보기 위해 특별히 임명된 자들이 필요함을 또한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지금까지 언급한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장로들의 경우를 교회의 치리의 중요한 기능그룹으로 주목하였다. 신약의 이러한 장로들의 그룹을 부쳐는 개혁교회의 치리를 위한 특정한 그룹의 교회지도자들과 일치시키므로 개혁교회의 장로단의 존재형성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왔던 때는 1538년이었으며 이때는 이미 부쳐를 중심으로 개혁교회에 장로정치제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상태였다. 칼빈은 3년간 이곳에서 프랑스 피난민교회에 사역하였고 스트라스부르그의 장로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칼빈은 1541년 제네바에 다시 돌아와서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주도할 때 바로 이 장로제도를 시행하려고 시도함을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정황에서 볼 때 분명히 개혁교회의 장로제도는 칼빈에게서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칼빈 이전에 부쳐가 있었고, 부쳐 이전에 오코람파디우스가 있었고, 오코람파디우스 이전에 형제단들의 개혁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3. 칼빈과 장로교회

 

개혁자 죤 칼빈은 긴 세월 동안 장로교회 교리와 정치의 근본 원리가 완전히 무시되고 잊혀져 버렸던 때에 장로회의 교리와 정치원리를 부활시켜 근대 장로교회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1) 칼빈의 장로제 사상

 

칼빈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의 박차를 가할 때 제네바 교회규정(Geneva Ordinances ;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그는 여기서 오늘날의 장로교의 정치제도인 4가지의 체제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제네바교회의 직제로 삼았다. 칼빈은 이러한 개혁교회의 직제를 자기가 창안(invention)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제도를 재발견(rediscovery)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칼빈이 교회의 장로직제의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롬 12:8("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하므로"), 고전12: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하는 것이다."), 그리고 딤전 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절이다.

 

 

롬 12:8절의 초기주해(1536)를 통해 칼빈은 다스린다는 직분을 신적 기원에 두며 동시에 정치, 사회적인 함의로 이해하면서 교회를 들어 세우기 위한 직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님은 일반통치자들의 직분을 그가 승인하고 또한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들을 가지고 권위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맡겼다. 하나님이 그들의 직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맡겼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신1:16~17, 역하19:1)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위가 왕들이나 다른 통치자들 손에 있다는 인간적인 왜곡된 사고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며 거룩한 제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의 일들을 다스리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 가운데 '다스림'(ruling)이라는 은사를 기입할 때 이 점을 분명히 가르쳤다.(롬12:8) 그런데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들어 세우기'(upholding of church)위해 그리스도의 종들에 의해 사용되어져야 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1543년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칼빈은 새로운 직분론을 이야기한다. 그는 목사 외에 교회의 영원한 직분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권징의 행사의 임무를 띠고 있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함을 논한다.

 

 

"고전 12장 28절에는 다스리는 자들은 내가 믿기로는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치리의 업무를 맡은, 사람들로부터 뽑힌 장로들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부지런하므로 다스리게 하라는 바울의 말을 아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잘못을 교정하는 재판권을 가진 거룩하고 엄정하고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서 뽑은 원로회(senate)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험자체가 이러한 종류의 체제(order)는 한 시대에 국한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관리의 직분(office of government)은 모든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특히 신약의 직분들에 대한 리스트를 언급하면서 다스리는 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선택된 장로들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두 종류의 장로를 언급한 곳은 딤전 5:17절 주해에서였다.

 

 

"나는 통치(governments)라는 것을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지고 있는 장로들(elders,seniors)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의 바로 세움에 있어서 장로들의 회(councils of elders), 즉 원로회(Senatus)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딤전 5:17절에서 장로들의 이중직제(duplicem ordinem)에 관해 언급할 때 이 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통치는 인격의 무게와 경험 그리고 권위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이행되어져야 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또한 두 종류의 장로들을 구분한다. 즉 말씀에 사역하는 자들과 말씀 사역에는 종사하지 않지만 잘 다스리는 자들이다.(딤전 5:17) 의심할 여지없이 후자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임명된 자들이며 그리고 교회의 열쇠의 권한을( power of the keys)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는 부쳐를 중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의 영향 속에서 발달되었다.

 

2. 칼빈은 장로정치제도의 타당성을 일반 사회나 초대교회의 일반통치원리의 경험론 위에서 조명하였다.

 

3.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는 세속정치의 교회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4. 칼빈은 필요에 의해 장로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갔다.

 

5. 초기에 태도의 교정(Correction of manners)을 위해 있었던 연장자들(Seniors)의 개념이 후에 목사를 도와 교회의 관찰(oversight)역할을 하는 장로의 개념으로 분명해져 갔다.

 

6. 초기 직분의 이러한 의무들은 점점 교회의 행정(government of church)의 정황에서 이해되어지므로 일반 원로회(Senate)의 개념들이 교회의 장로직의 것으로 전환되었다.

 

7. 교회정치제도는 성경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권위를 갖게 됨으로 성경적인 규범들(norms)을 추적하게 되었다.

 

8. 칼빈의 교회직분의 개념은 사상의 발전(progression)으로 성숙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의식적인 고려의 결과였다.

 

9. 칼빈의 장로제도는 발명된 산물들(inventions)이 아니고, 재발견의 산물(re-discovery)이다.

 

10. 칼빈은 두 종류의 장로직분(장로목사와 치리장로)을 분명히 구분한다.

 

11. 칼빈은 장로직분은 감독과 함께 감독을 도우는 사역으로 인식한다.

 

12. 칼빈이 말하는 장로직분은 시당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는 교회의 전권(the whole power of the keys)이 주어지지만 주로 교회내의 도덕적인 문제의 치리사역이다.

 

13. 칼빈은 말씀과 성례직분은 감독/장로들에게 국한 시킨다.

 

14. 칼빈은 감독중심의 교회행정과 치리를 선호한다.

 

15. 칼빈은 교회직분의 이러한 제도는 영원히 필요한 직제로 보고 있다.

 

 

(2) 칼빈과 장로교회

 

16세기 이후 서구문명의 흐름은 칼빈주의를 모르고서는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사회의 중심은 교회였고, 교회의 개혁은 바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다.

 

칼빈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이 이 사상을 모두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상의 중요한 해설가였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사상을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였고, 그의 성경 강해와 논문 및 서신들은 말씀 중심의 그의 신학 체계를 잘 보여 준다. 칼빈은 단순한 신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300년 동안 개혁교회들의 필수적 신학 교과서가 되었다.

 

복음적 신앙에 대한 칼빈의 짜임새 있는 확증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칼빈의 가르침은 어떤 다른 개혁가의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위그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화란인들을 준비시켜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영웅적으로 수호하게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으며, 영국의 청교도주의를 형성했고, 뉴잉글랜드 특성의 기반이 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그것이 침투해 들어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들을 취했으나 그것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장로회 정치를 실현하여 장로교회의 표본이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시와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정치와 훈련에 관한 “교회 규정”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결국 1542년 시의회의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교회에 관한 모든 것, 교회 정치, 교리, 예배, 훈련,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의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만들어 이 교회 규정에 담았던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교회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단순한 대의제이며, 장로 이외의 직원으로서 목사, 교사, 집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어 교회 규정에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네바 교회는 사실상 장로교회가 된 것이다.

 

제네바 교회는 명칭 상으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일컬어졌으나 정치 형태로는 완전한 장로교회였다.

 

제네바에서는 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로서 장로회가 조직되었는데 현대 장로교회의 당회와 닮았고 어떤 점으로는 노회와 비슷했다. 장로회의 임무는 교회를 치리하고 교회 규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장로의 피택은 교회 회중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시의회가 장로 선거에 강하게 개입하여 실현할 수 없었다.

 

제네바 장로회는 교인들의 훈련을 강조했고, 기독교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칙을 정해서 사람들이 이 규칙을 지키는가, 감독하는 일을 하였다.

 

제네바 장로회가 남긴 기록에는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징벌을 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매우 엄하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짓을 했을 때 징벌을 가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앙고백과 교리 문답서를 만들어 교회에서 채용케 했다. 이 두 가지는 오늘 날 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장로정치제도를 시도한 정치사회적인 배경은 3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로마가톨릭의 교황제의 독선을 방지하고, 둘째로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의 무정부주의(anarchism)적인 교회의 반제도화를 반대하면서, 셋째로는 교회의 치리와 행정관리를 제네바 시민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면 칼빈의 장로정치사상은 자신이 밝힌 대로 영원히 고수해야 할 교회의 유일한 성경적인 제도인가? 여기에 칼빈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칼빈은 교회제도 문제에 대해 사실은 자유함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고전 14: 34~37절을 주해하면서 교회의 외적인 통치나 관리조직(externa politia)은 정황이 바뀌었을 때 가변성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도덕적으로 중성인(indifferent) 교회의 행정관리, 정책 등은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칼빈은 당시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개혁교회의 성경다운 교회직제를 위해 신약과 초대교회의 장로정치제도를 도입하였지만 칼빈의 전체적인 교회직제관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교회의 직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장로정치제도 사상을 더 잘 이해한 경우가 될 것이다.

 

제3장 프랑스의 장로교회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s)라 하는데 이들은 교리적으로는 칼빈 주의자들이며 교회정치에서는 장로주의를 채택하였다.

 

1. 프랑스의 종교개혁

 

프랑스의 위그노교회를 만든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멀리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 프랑소와 1세와 볼로냐 조약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었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 뮤 그룹의 종교개혁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뮤(Meaus, 모)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뮤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돋힌 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뮤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뮤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2. 프랑스의 종교 개혁과 칼빈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

 

 

「기독교강요」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건>이 있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다. 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된 것이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 잡고 있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칼빈은 복음적 신앙 때문에 옥에 갖힌 리용(Lyons)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두신 능력을 아무 것도 동요시킬 수 없을 것을 확신합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the last conflict)에 대해 묵상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다스릴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은혜가 모든 시험들을 이길 것임을 확신 하십시요.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세상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리용의 신자들은 5월 16일, “용기를 내십시요. 나의 형제여, 용기를!” 이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순교하였다.

 

칼빈은 1557년 9월, 파리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분께 위대한 스승(the great Master)이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바, 인내로써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육신에 있어서 지극히 힘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our enemies)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 때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격정에 대항하여(against ourselves and our passions) 싸울 때라는 사실도 기억 하십시요.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하나님의 복음이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전멸 당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들의 재로부터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God will always cause the ashes of his servants to fructify,...). 그러나 지나친 행동과 폭력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서신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술책(the craft of Satan)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일치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증오의 대상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었다.

 

프랑스에 보낸 칼빈의 서신만으로 쉽게 30여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 칼빈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은 없었다. “실업자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도를 얻도록, 복음전파자들이 항상 강건한 영혼을 소유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는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1559년에는 프랑스에 2천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정치적으로 장로주의를 교리는 칼빈주의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1559년 5월에 프랑스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늘날의 총회와 같은 “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칼빈주의적 신조와 장로주의 정치 제도를 채용하였다.

 

지방교회는 지방단위 회의를 구성하였으며, 많은 상류층 남녀가 가입하했으며 귀족들도 들어 있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3. 위그노의 시련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뮤(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 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1) 장로교회의 조직

 

이런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그들의 교회를 조직하였다. 1555년 빠리에 있는 귀족 라 페리레(La Ferriere)의 가문에 아이가 탄생했는데 신교의 성례를 받기 위해 그들은 금식 기도 후 르마콩(John Le Macon)을 목사로 세우고, 이 모임은 제네바를 모델로 하여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였으며 소요리 문답서를 체택하였으니 이것이 프랑스 장로교회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으며 개혁 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장로교회라 불 수 있을 것이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1559년 5월 25일 첫 번째 장로회 대회가 앙뜨완느 드 샹디외(Anthony de Chandieu) 목사의 제안으로 빠리에서 모였는데 15개 교회가 모였다. 이 모임에서 프랑스교회를 위한 신앙고백과 훈련교서를 내 놓았는데 이것을 콘페시오 갈리카(Confessio Gallica)라고 불렀다. 이것은 칼빈이 프랑소아 왕에게 전한 신앙고백 거의 그대로였다. 후에 여러 차례 개혁이 되기는 했지만 이를 ‘프랑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라 한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 이었다.

 

 

국민적 규모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립은 프랑스 카톨릭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신교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대제독 코린(Admiral Coliny), 나바르공 앙리(Henry of Navarre)왕자, 꽁드(Conde)와 같은 유명한 군인들이 있어서 그들은 신교도들을 지키는 조직을 만들었으나 칼빈 등은 이를 반대 만류하였다. 그러나 국왕과 카톨릭 대 신교와 시민의 전쟁이 감정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피의 강이 흐르게 되었다. 약 1세기에 이르는 신교도와 카톨릭 교회간의 분쟁으로 엄청난 신교도들이 희생되었다.

 

 

2) 성 바돌로메 축제일의 대학살

 

1572년 8월 24일 기독교 사상 최대라고 할 대학살이 있었다.

 

다수의 신교도들이 신교도인 나바르 공 앙리와 카톨릭 교도인 마그리트의 결혼식을 구실로 파리에 유인되어졌다. 정부에서는 이 결혼식을 통하여 신구교도가 화해할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자 하는 사상 최고의 음흉한 계획이 굳혀져 있었다. 8월 24일 미명 성 제르만 사원의 큰 종소리와 함께 신교도들이 무참하게 학살 개시가 되었던 것이다. 신교도는 발견되는 데로 용서 없이 학살되었다.

 

파리와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된 신교도는 한 주간에 7만~1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개신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3) 낭트 칙령

 

신교도인 왕자 나바르공 앙리가 국왕이 되어 그를 앙리 4세라 불렀는데 왕위 획득 후 그는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1598년 “난트의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신교도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위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 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 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5일에 이 칙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 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개신교도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오늘날 프랑스 안에 있는 장로교회 교세는 미미하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력하고 장로교회는 약 백만에 불과하다고 한다,

 

제4장 네델란드의 장로교회

 

 

1.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배경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가 되어왔다.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었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 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의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악덕을 보았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을 글로 표현하였다.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그의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을 편집하여 출판했다(1516년). 이것은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2. 네델란드의 종교 개혁과 탄압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 카알 5세와 재세례파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 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 파라고 한다.

 

멜키오르 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이라는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 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메노파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압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2) 네델란드의 장로교회

 

이런 와중에서도 네델란드 장로교회는 성장하고 조직을 갖추며 세계 장로교회사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1559년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조직화되어 결집해서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그 해 제네바에서 칼빈의 교육을 받은 한 목사가 오늘날의 벨직 신조르 알려진 칼빈주의에 입각한 신앙고백을 만들었으며, 1563년 안트워프(Antwerp)회의에서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회 헌법이 작성되었으며, 이 헌법에 기초해서 대단히 많은 장로교회가 조직되어졌다.

 

1569년 네델란드 장로교회는 독일의 엠덴(Emden)에서 회의를 열어 대회(Synod)를 조직하고, 각 교회로부터 대회까지 전 교회 조직이 만들어졌다.

 

네델란드 장로교회의 하나의 특징은 한 마을에 장로교회가 몇 개가 있든 그들은 하나의 당회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3) 침묵의 사람 윌리암

 

교회가 조직되어 가는 가운데도 고통스런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침묵의 사람”으로 역사에 알려져 있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은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여 네델란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네델란드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1579년 네델란드 공화국이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이 나라는 실제로는 장로주의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장로주의의 대표적인 정치형태라고 하는 가르침이 일반 세속정치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4) “바다 거지들”(Sea Beggars)의 역할

 

네델란드 주민들은 겔만 대양에서 언제나 파도와 싸우며, 척박한 국토와 투쟁하는 선원들과 어부들과 상인들이었다. 이들을 “바다거지들”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신교 개혁사상을 받아 들여 스페인의 종교 재판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사랑하고 그들을 배척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윌리암은 이 바다거지들을 스페인을 격파하기 위한 해군력으로 길러 조직 이용하게 됨으로서 스페인 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알바공의 폭정에 네델란드는 폭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윌리암의 바다거지들은 스페인의 함대들을 무찔러 나가기 시작하였다. 홀연히 부른(Voorn)성과, 네델란드의 요새인 브릴(Brill)성을 빼앗으므로서 스페인으로 하여금 네델란드 주인노릇을 못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오랜 동안 계속됐고 바다거지들은 해안 도시들을 공략해 나갔다. 1572년 4월 1일 홀란드와 질란드의 중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드디어 윌리암은 네델란드의 총독으로 선언되게 된 것이다. 윌리암은 국민의회를 돌트에서 소집하였고, 여기서 주어진 권한으로 로마교회나 신교의 예배는 동일한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바다 거지들은 알바의 재 공포의 복수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3. 알미니우스와의 논쟁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 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은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다. 그는 유기의 작정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설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 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4. 도르트 회의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제5장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1.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

 

(1)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 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 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utheran stage of the Reformation)의 대표자였다.

 

 

(2)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왕권이 약한 반면에 귀족들의 세력이 거세었다. 교회는 국토의 반을 차지하여 비교적 부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 재산은 평신도 귀족들의 소유였다. 여러 대학들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은 대륙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1543년 국회는 성경 읽기와 번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1544년에 이르러 비이튼(David Beaton, 1494-1546)추기경과 친불 파는 강한 억압 책을 적용하였다.

 

이때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가 활동하고 있었다. 위샤트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석사(M.A.)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교장으로 일했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자로 소환되기도 했다. 아마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피신했으나 1년 안에 브리스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무렵(1540년 경)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갔으며, 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의 진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로 귀국한 후 던디(Dundee)와 그 밖의 지역에서 설교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으며 긴 수염을 가졌다. 태도는 정중했으며 생활방식은 단순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교사였다. 그는 추기경 비이튼의 명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비이튼 자신은 그 후 3개월 후에 성 앤드류스 성에서 매복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3) 메리 여왕과 죤 낙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이미 그녀는 낙스(Knox)가 자기 최대의 적이며 또 스코틀랜드가 이 양편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스는 처음엔 이 메리 여왕이 프로테스탄트 손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었고 곧 그와 비슷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낙스가 메리 여왕을 세 번 째까지 알현할 때는 정중한 만남 속에서 작은 논쟁만을 벌였었다. 그러나 네 번째 알현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조가 보였다.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낙스는 자기의 명령을 발하여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강렬한 반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메리 여왕은 국사에 한 이단적인 설교자(낙스)와 일반 평민들이 개입을 한다고 격분하여 낙스를 소환하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를 꾸짖고 또 낙스를 반역 죄인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세력은 기울었고, 1567년 메리 여왕은 몰락, 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오랜 친구인 모레이(Moray)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 제임스는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파와 섭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 속에 빠져들어 갔다.

 

낙스는 이 소용돌이 속에 걱정과 근심을 하며 개입하였다. 그러나 낙스의 힘은 기진한 상태에 있었다. 낙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이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

 

또한 낙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언에 기록하였다 :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다.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은 낙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이자 사도”(that most notable prophet and apostle of our nation)라고 불렀다. 섭정 모튼(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그의 일생동안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th a man who in his life never feared the face of man).

 

 

(4)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사망한 후, 곧 앤드류 멜빌이 지도자가 되었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Montrose) 부근의 밸도비에서 1545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몬트로즈에서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의 성 메리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564년 가을에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성 앤드류 대학교를 떠날 당시, 그는 “영국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시인인 동시에 헬라어 학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멜빌은 파리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철학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제네바를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곧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멜빌은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노력과 열의로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어 강의실들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1575년 8월의 총회에서 멜빌은 고위 성직제도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578년 4월부터 그는 <제 2 치리서> 작성을 주도하였으며, 이것은 1581년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제 2 치리서>는 멜빌의 주요한 노력의 결과였다.

 

 

2. 죤 낙스의 활동(사역)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그를 “그의 조국과 세계가 빚을 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인”(the one Scotchman to whom his country and the world owe a debt)이라고 불렀다.

 

죤 낙스는 제임스 5세의 초기인 1513년(혹은 1515년)경에 해딩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계급 출신으로서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샤트가 설교할 때 검을 들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다.

 

위샤트가 화형을 당한 후, 낙스는 성 앤드류 성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Others cut the branches of the Papacy, but he strikes at the roots.)라고 했다.

 

 

그 후 프랑스의 공격으로 성 앤드류 성은 함락 당하고 낙스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죄수나 노예들이 노를 젓게 한 돛배)에서 19개월 동안 죄수로 지냈다. 그 배에서 복역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성 앤드류 성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았으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나은 시기에(in better times) 그 곳에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석방된 후,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위크(Berwich)에서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당시에 영국 왕은 에드워드 6세(1537-1553)였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지도아래 종교개혁이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낙스는 5년 동안(1549-54) 비위크에서는 목회를 통해, 런던에서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의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버위크에서 목회할 때 그는 성찬 참석자들로 하여금 성찬 식당에 둘러앉게 했는데 그는 그것이 성경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꿇어앉는 것에 대한 낙스의 반대 때문에 크랜머는 제2차 기도 집(the Second Prayer Book)에서 꿇어앉는 것에 관해 극히 개신교적 설명을 가했다. 즉, 성찬식이 시행될 때 무릎 꿇는 것은 시행되지만, 이것은 경배의 의미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삽입하였다(이것은 낙스의 공헌으로 인정된다). 비록 낙스가 <제2차 기도집>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행정 장관(magistrate)의 명령 때문에 버위크의 옛 회중에게 그 기도집의 사용을 추천하였다.

 

1553년 메리(Mary Tudor, 1516-1558)는 그녀의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를 계승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은 완고하고 편협한 카톨릭교도였다. 메리의 통치가 시작된 몇 달 뒤 낙스는 도망을 쳤고 그 후 곧 프랑크푸르트의 영국 유랑민들 사이에 나타났다. 1554년 낙스는 영국 피난민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했다.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 있는 영국 유랑민들의 교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1555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는 여러 지역에서 표출되는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 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9개월 동안 아주 담대히 설교했다.

 

1559년 5월, 낙스는 고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자들과 유익한 접촉을 하였다. 본래 낙스의 입장은 위샤트와 같이 쯔빙글리 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칼빈과의 접촉을 통해 대부분의 면에서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낙스에게는 <제네바> 도시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로 보였다.

 

고국에 돌아온 낙스는 성 앤드류스 성당에서 설교함으로써(1559년 6월 11일) 자기가 프랑스 노예 선에서 품었던 소망을 성취시켰다. 낙스는 복음적인 기독교신앙의 확립을 위해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다.

 

1560년 체결된 버위크 조약(the Treaty of Berwick, 1560년 2월)에서 개혁가들은 스코틀랜드에 진주해 있었던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보호 하에 두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섭정 역할을 했던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관점과 야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프랑스적이었다. 섭정은 총명했으나 신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개신교도들이 거의 그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은 섭정에게 신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고 프랑스 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병이 들었고 개혁파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부르면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양편이 다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1560년 6월 11일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개신교 목사 죤 윌록(John Willock)이었다.

 

속수무책의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없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모두 퇴각하게 되었다. 7월 15일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로 출항했고 영국군도 도보로 출발했다. 19일에 낙스는 많은 교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승리한 스코틀랜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에는 모든 일을 처리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체적으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이 스코틀랜드의 정식 신앙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문서는 그 색조가 온건한 칼빈주의였다(a document moderately Calvinistic in tone). 또한 이 문서는 칼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성례전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었다.

 

개혁교회의 조직과 그 치리체제를 정립하는 문제는 계속 남았다. 낙스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제 1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1560년). 거기에는 개혁교회의 조직과 재정문제에 대한 제안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낙스의 전례서>(Book of Common Order)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낙스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개정한 것이었다. 이 <전례서>에 의하면, 교회 회중은 그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 이 장로들은 회중들 가운데에서 확고한 도덕적 규율(firm moral discipline)을 유지하는 데에 목사를 돕게 되어 있었다. 목사는 회중들에 의해 선출되지만 목사들은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신앙과 생활을 엄격하게 심사받고 통과된 후에야 만(after rigorous examination of life and doctrine by their ministerial brethren)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유능한 목사가 있으면 그는 어떤 한 지역(주로 과거의 카톨릭 교구와 일치함)을 담당하는 <감독자>(superintendents)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는 장로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전체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에 속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시편 찬송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의 표지였다. 제네바에 있던 낙스의 교회에서는 51개의 시편 모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총회는 1564년에 전 시편의 완성과 출판을 제시했다. 제네바의 곡조가 평이 좋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주 그 노래에 화음을 붙여 찬송했다. 그리하여 곧 4부로 된 찬송이 편집되었다. 가사들은 시적인 감각(poetic quality)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후의 다양한 번역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제2차 스코틀랜드 시편 집(the second Scottish Psalter)이 1650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칼빈주의는 후대의 칼빈주의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오직 한마음을 가지고 일생 내내 꿋꿋하게 헌신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드물었는데, 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낙스의 도덕적 생활이 그의 엄격한 시조(rigorous creed)와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낙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가 있다.”

 

 

낙스의 저술과 그가 끼친 영향력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면에서 또 정치적인 면에서 여러 갈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낙스가 가졌던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신념 위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워졌다.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이었으나, 후대에 남아있는 설교는 단 두 편 밖에 없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시험”(마 4:1)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의 근원과 한계”(사 26:13-16)이다.

 

 

3.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560년 8월 낙스의 지도아래 스코틀랜드의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폐기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백여 년 이상 스코틀랜드 장로교 인들의 운명은 스튜어트가(家)의 왕들이 교회를 성공회 제도로 만들려는 결의 때문에 성쇠를 거듭하였다. 왕권이 지배적일 때는 성공회 제도를 지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으며(1584년), 다시 교회가 권력을 잡으면 장로제가 실시되었다(1592년).

 

왕정복고(Restoration, 1660-1688) 이후 성공회 제도가 재수립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성공회파와 장로회파 간에는 보다 더 치열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혁명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시 장로제로 환원되어 그 이후로 계속 장로제가 실시되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나라로 병합되었고, 따라서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탄생하였다. 18세기 초반의 장로제 주장자들(the Presbyterians)은 17세기 후반의 주장자들보다 더 청교도적(Puritan)이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예배를 감독주의자들의 예배와 명백하게 구별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떠한 형식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인쇄된 의식서(printed liturgy)의 사용을 멀리하였다.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존 낙스와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 윌로크(Willock), 로우(Row), 더그라스(Douglas), 위남(Winarm) 이 여섯 사람을 시켜 스콜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채용하고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2) 제1회 장로교회 총회와 훈련교서.

 

1560년 12월 20일 스코틀랜드의 제1회 장로교회 총회가 낙스의 지도아래 개최되었는데, 출석자는 목사 6명, 치리장로 36명이었다. 이 총회는 훈련 교서(Book of Discipline, “스코틀랜드 교회정치 체제”“첫번째 훈련교서”)를 만들어 냈다.

 

이 훈련 교서에는 장로, 집사의 임기는 1년으로 하였고, 당회, 대회, 총회의 조직을 정하였으며, 교회 직분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주일학교 부장, 대독자(Readers) 등을 두게 했으며, 기독교교육에 관한 규정을 많이 할애 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태도, 도덕적인 문제를 취급하여 신앙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한 것을 본다.

 

(3) 멜빌과 제2훈련교서

 

존 낙스가 죽은 후 앤드류 멜빌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사실상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든 정체(政體)를 정립한 사람이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오래된 훈련 교서를 멜빌은 1578년 제2훈련교서로 개정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1년 총회에서 채택되고, 칙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교서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철저한 장로교회로 만든 것이다. 이 교서는 시정과 교회정치를 분리했으며, 교회 정치는 교리, 훈련, 성찬 등 3부분으로 구분했고, 교회 공직을 목사(감독), 장로, 집사로 구분하였고, 네 번째는 박사와 교사를 덧붙혀 놓았다.

 

 

(4)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

 

제임스 6세는 1603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어 제임스 1세라 불리어 졌는데 이때 양국은 동일한 군주 아래로 통일되었다.

 

이 제임스 1세가 16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방식으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챨스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교회는 1637년 7월 23일을 기해서 영국 국교회의 예배 형식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에딘버러의 존 낙스의 옛 교회인 성 길스 교회에서 대사제 로드의 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부인 노동자 제니 게디스(Jenney Geddes)가 의자를 수석 사제의 머리에 던졌기에 한 순간에 민중은 대 소동이 일어났고 여러 물건을 퇴장하는 사제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1638년 3월 1일에 귀족, 신자, 목사, 농민 등의 수많은 장로주의자 회중이 그리프리알(Greyfriar)교회 뜰에 모여 “국민 서약”에 서명을 하고, 생명을 걸고 서로 도와주며 장로주의 신앙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널리 퍼져 전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이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1638년 11월 21일 글레스고우에서 총회가 모여 알렉산더 헨더슨이 의장으로 뽑혔다, 그는 왕의 특사와 외교를 벌여 감독제도는 추방하고, 순수 장로회 주의를 안드레 멜빌레가 고안한 대로 회복시켰다.

 

 

(5) 계약자들(The Covenanters)

 

1660년 11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공화 정치를 했던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델란드에 망명해 있던 챨스 왕자를 맞아 들여 국민 서약에 서명시킨 다음 찰스2세 왕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얼마 안 있어 국민 서약을 파기하고 장로회주의를 조소하고, 엄격한 법률을 재정하여 영국 국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단속하였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인들은 다시 국민서약 아래 단결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계약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챨스 2세 때 이들이 받은 고난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수한 남녀, 어린이들까지 신앙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인 시대(Killing time)"라 일컫고 있다.

 

 

(6) 혁명과 종교 관용령

 

1685년, 찰스 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으나 1688년에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이때 이른바 명예혁명(Glorius Revolution)이 일어나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네델란드 사람으로서 “침묵의 윌리엄”의 자손이고, 장로회 주의자였다.

 

1689년에는 관용령(Toleration Act) 이 의회를 통과해서 역사상 없었던 종교의 자유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주어졌다. 1690년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가교회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712년에 “성직 추천령”이 의회를 통과하였는데, 이 법은 소수의 재산 소유자에게 목사를 임명하는 권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130년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이 되었다.

 

 

(7)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최초의 분열은 1733년 에벤저 어스킨(Ebenezer Erskine)의 지도에 의해 일어났다. 성직 추천령에 항의하여 동료 목사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나와 협동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만들었고, 이 새 교회는 100년 간에 걸쳐 몇 교회로 분열을 해 나갔다.

 

1752년에는 토마스 기레스피(thomass Gillespie)가 성직 추천령에 의해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 대회”(Relief Synod)를 만들었다.

 

1843년에는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성직 추천령에 반대해서 472명의 목사와 함께 이탈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대분열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교회원이 선거에 의해 제직(목사, 장로, 집사)을 선출해야 한다는 교회 자립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자유 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유력하고 유능한 영적인 목사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1874년 의회는 성직 추천령을 폐기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자치의 힘을 회복하였다.

 

 

(8) 합동과 재 합동

 

1847년 토마스 기레스피의 지도로 만들어진 구원대회와 협동노회로부터 이탈했던 사람들이 합동해서 “합동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다. 이 교회는 훌륭한 교회로 성장했고, 뛰어난 목사들을 배출시켰다.

 

1900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합동 장로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를 만들었는데 회원은 50만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한 자유교회의 25명의 목사들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는 이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929년에 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합동자유 교회가 합병하여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어 대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하여 계속 자기 교회이름을 유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아무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의 체제와 교리에 모판임을 사가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643년 7월부터 1648년 2월까지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참석하여 장로교회의 정치와 교리의 요람이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기타 원칙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물론 이 교리의 사상들은 칼빈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스코틀랜드장로교회가 직접적으로 적용했고, 세계에 전하여 준 것이다.

 

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줄기교회요, 세계 모든 장로교회는 그 가지와 같다고 할 것이다.

 

제6장 :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1. 개혁의 진행과 성공회와 개신교

 

영국 종교개혁의 간단한 흐름:

 

HENRY VIII --- EDWARD VI --- MARY --- ELIZABETH -

 

(middle way) (prostantism) (romanism) (middle way)

 

 

JAMES --- CHARLES I

 

(영국의 Anglican Church 확립)

 

 

(1) 헨리 8세(Henry VIII)의 종교 개혁 :

 

Henry는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킨 뒤 1536년에는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진술인 Ten Articles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이 신앙의 기초와 내용 임.

 

(2) 세례를 통한 중생의 은혜와 필요성.

 

(3) 고회(참회)의 필요성.

 

(4) 화채설.

 

(5)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어짐(선행의 필요성도 인정 함).

 

(6) 화상(image)은 숭배의 목적이 아니라 기억의 수단 암.

 

(7) 성자는 삶의 모형이며 기도의 대상이 됨.

 

(8) 성자를 통해 기도 할 수 있음.

 

(9) 의식은 신비적인 의미가 있음.

 

(10)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음.

 

*여기에서 괄목할 만 한 점은 영어성경이 개 교구의 교회마다 비치되고 읽혀져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1539년에는 Six Articles로 개정되었다.

 

(2) 에드워드 6세(Edward VI) 의 종교개혁(1547-1553):

 

헨리 8세가 죽은 후, 아들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1547년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549년 에드워드는 통일령을 발표하였다. <통일령>이란 영국의 종교개혁 때 성공회의 예전 및 기도서를 통일시킨 법령으로 1549년, 1552년, 1559년, 1562년에 걸쳐서 발표되었다. 또한 루터파와 칼빈파의 교의(dogma)를 참고하여 같은 해에 <공도문>의 일반적인 사용을 단행하였다.

 

크레머(Cranmer)와 그의 보좌관들에 의해서 개신교 정책이 수행되었다. 예배 개혁(liturgical reform)이 우선되었다.

 

통일령(The Act Of Uniformaty)에 의하여 성상을 파괴하고 예배의식을 통일하고 예배 시 영어를 사용토록 하였다. 영국교회의 첫 번째 기도서인 The First Prayer Book 를 1549년에 발간하였고. 교리적 개혁도 이루어져서 1552년에는 42조문(Forty-Two Articles)을 포고하였는데 여기에는 루터 및 칼빈주의 적인 요소가 비중 있게 포함되었는데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믿음에 의한 칭의.

 

(2) 성경의 최고 권위(Supreme Authority).

 

(3) 7성례를 2성례로 줄임.

 

(4)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전적 부인.

 

(5) 승려의 결혼 승인.

 

(6) 고해성사를 폐지.

 

 

(3) 메리(Bloody Mary. 1553-1558)여왕의 박해:

 

1553년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로마교회를 부활시키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였다.(Back to Romanism). 이때 개혁파 성직자가 2,000명이나 사형을 당하였다.

 

그는 캐더린(Catherine)의 딸로써, 앞 시대에 대하여 매우 반발적이었다. 매우 급한 성격이었고 이때에 많은 박해와 아울러 많은 순교가 있었다. Cranmer를 화형에 처하였고 이때에 많은 개신교도들이 영국 밖으로 도피하였다. 그녀의 이 같은 정책이 오히려 영국을 개신교 국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4) 에리자베스(Elizabeth, 1558-1603)여왕:

 

앤(Ann)의 딸로서 여왕에 올랐다. 그의 정책은 매우 온건 하였다. Romanist, Lutheran, Calvinist를 섞어 놓은 듯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개신교(prostant)의 출현 배경이 된다.

 

1559년 엘리자베드 여왕은 다시 성공회의 재흥을 도모하였다. 1563년 <39개조>를 제정 반포하였는데, 이것은 앵글리카니즘(Anglicanism) 신조의 기본이 되었다. <39개조)(Thirth-nine Articles)에는 칼빈주의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엘리자베드는 ‘최고의 통치자’(Supreme Governor)로서 자신이 영구국교(성공회)를 위해 통치자로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종교적 정착은 로마교회측의 도전을 받았고, 동시에 열성적인 청교도(Puritans)의 도전도 받게 되었다.

 

대륙의 종교개혁은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의 신학적 개혁(a theological reform)이었다. 즉, 하나의 교리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형태를 주로하여 표현되지 않았다. 엘리자베드와 그녀의 주교들이 세운 영국교회(성공회)는 세가지 구성 요소들, 곧 정치, 신앙, 예배로 이루어진 구성물이었다. 따라서 영국교회의 정치 형태는 전통에 대한 영국의 강한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영국교회의 교리적 신앙의 표현인 <39개조>는 신조는 가능하면 적고 단순해야 한다는, 그리고 인간의 삶의 방식이 신앙의 지적인 표현보다 궁극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영국인의 감정을 표현해 주고 있다.

 

 

(5)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

 

그의 어머니는 메리(Mary, Queen of Scots)였다. Scotland에서 어머니 Mary의 퇴위 후 James VI로 즉위 하였다. Elizabeth의 사후에는 영국에서 James VI로 즉위하였다. 이때 영국 안의 Catholic, Presbyterian, Anglican 이 각각 서로 다른 기대감을 갖는다. 왕은 결국 청교들의 탄원서를 거부하고 영국국교의 편을 들었다. 그는 비국교도들을 박해하고 추방했다.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no bishop,no king)" 는 주의로 국교를 옹호했으며 왕권신수설(王權 神收說, 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7년 간에 걸쳐서 킹 제임스 번역 성경(Authorized Version of King James)을 완역하여 출간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죤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의 지도로 May Flower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했다.

 

 

(6) 챨스 1세(Charles I, 1625-1649):

 

제임스 1세(James I)의 아들로서. 비국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의회가 이를 비난하자, 이에 왕은 의회를 해산한다(1629).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하였다. 이때 의회에는 장로교의 세력이 우세하였다. 1642년 에 시민 전쟁이 일어났고 의회는 청교도와 합세하여 개혁을 수행하고 감독제를 폐지하였다. 장기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하였다(1643.7). Westminster Assembly는 1643-1647에 걸쳐서 소집되었으며 120명의 정회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주로 장로교 세력이었다.

 

처음에는 Elizabeth의 39개 조항을 수정하다가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서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스코틀랜드(Scotland)장로교에서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 고백서는 모두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종교개혁 이후 125년간의 신학활동의 결론이며 청교도적 Calvinism신학의 결정으로 여겨진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 성경 관을 제일 먼저 취급하는 점이며 Assembly는 이기간 동안에 다음과 같은 걸작을 내 놓게 된다.

 

(1)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 대,소 요리문답(Larger and Shorter Catechism)

 

(3) 예배 모범(Directory of public worship)

 

 

2. 청교도 운동

 

(1) 청교도 운동의 역사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여 망명한 프로테스탄트들을 귀국하도록 허용하자 제네바와 대륙의 각지로부터 잉글랜드로 귀국했는데, 그들은 제네바 성경과 칼빈주의 신학과 장로주의를 가지고 돌아 왔다. 많은 사람들은 제네바 성경을 읽게 되었고, 돌아온 망명자들로부터 대륙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의 정도를 듣고 잉글랜드에는 참으로 지금까지 종교개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 국교는 좀 더 순수하게, 즉 더욱 성경적인 교회 정치형태와, 더욱 성경적인 교리와. 더욱 성경적인 예배형식과, 더욱 성경적인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에게 청교도(Puritan)란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때가 1565년경이었다.

 

일반적으로 청교도 운동은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이 선포된 1559년경에 시작되어, 17세기 후엽 1662년의 통일령과 뒤이어 일어난 대 추방령(Great Ejection)과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간주한다. 바꾸어 말하면 청교도 운동은 그들을 의심한 엘리자베스 1세 때 시작되어 그들을 두려워 한 제임스 1세 때 성장하였고, 그들을 경멸한 찰스 1세와 그의 충실한 추종자인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 때 상당한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들을 존경한 크롬웰(Cromwell)의 통치 하에서 당당한 주도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미워한 챨스 2세와 감독들 하에서 청교도 운동은 끝이 나게 되었다.

 

 

1) 16세기 청교도 첫 세대들은 정치적인 수단을 통하여 교회 정치나 예배 의식에 있어서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려고 시도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주의와 제네바의 칼빈주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가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원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카톨릭의 많은 정치적, 종교적 신조들을 거부하는 한편 국가뿐 아니라 교회마저도 장악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존재하는 청교도들의 극단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리고 1559년 수장령(The Acts of Sulremacy)과 통일령, 1563년의 주교회의에 의하여 자신이 만들 앵글리칸 모형에 순응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때부터 청교도 운동은 정치적으로 실패하였다. 의회법을 통하여 下向式으로 교회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하자 이제는 전에 없는 열정을 가지고 강단에서의 설교와 출판 및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상향식(上向式) 종교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후반기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같은 목적과 이상과 마음으로 헌신한 수많은 사람이 출현함에 따라 확산되었다. 윌리암 퍼킨즈(William Perkins)의 책들과,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dgers)의 ‘일곱 개의 소논문(小論文)’(Seven Treatise)은 청교도적 경건의 전형적인 표준과 함께 수천의 광채를 일으키며 불꽃을 피우게 하였다.

 

 

2) 제임스 1세(1603~1625)는 그의 장로교 요람을 버리고 감독주의를 짊어졌고, 또 청교도 지도자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을 이 땅에서부터 몰아내겠다고 하였다. 제임스 1세가 구 잉글랜드(Old England)로부터 몰아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뉴잉글랜드(New England)로 옮기셨고, 미국으로 가지 않은 사람들은 화란의 항구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왕위가 그 아들 찰스 1세(1625~1649)에게 넘어갈 때 대다수 청교도들은 국내에 머물면서 수많은 핍박과 환난을 인내하며 참아내었다.

 

 

3) 찰스 1세에 의한 영국민의 자유에 대한 박탈과 그의 완고한 추종자이었던 대주교 윌리암 라우드의 행동은 개신교 사상을 핍박하였고, 경건하고 신실한 개인의 존엄성과 책임감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호전적인 ‘청치적 청교도주의’가 탄생되었고 이것은 의회주의를 통하여 공화주의를 활짝 피게 하였다. 그것은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를 야기 시킨 혁명이었다.

 

 

4) 마침내 참된 자유의 평온한 시대와 시민전쟁(1642~1648)이 군주주의와 교권주의의 맹위를 감추게 하였을 때 올리버 크롬웰(1654~1658)의 우호적인 통치하에서 청교도주의는 최고의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을 가장 왕성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는 동료들을 불안케 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온건한 왕정주의자로서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크롬웰을 신뢰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의 정치적인 모임들과 일반적으로 의회주의자들의 모임은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모두를 산산히 흩어버렸다.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의 세력이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때 무정부주의 상태의 국가는 새로운 군주시대로 전환하였다.

 

 

5) 크롬웰의 죽음과 그의 공화정치 몰락 후에 스튜어트 왕가인 찰스 2세에 의한 잉글랜드 왕좌의 재빠른 복구는 청교도 혁명의 종말로 보였다. 청교도주의가 시민전쟁의 단순한 정치적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싹튼 많은 것들이 청교도주의가 보다 크고 순수한 영적인 청교도 혁명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1660년 후에 왕정주의자들의 의회가 대주교들과 다시 공모하여 정치적 청교도주의와 종교적 청교도주의를 구별하며, 청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재개하였다. 곧장 기도 에식서가 재차 강조되었고 1662년 통일령에 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새로 제정된 기도 예식서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조건 동의하며 순응해야 함은 물론, 이 법령은 장로교 목사안수식을 포기할 것과 감독주의식 안수를 재차 받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찰스 1세를 저항할 수 있게 한 의회의 권한을 합법화시킨 1643년의 ‘거룩한 협약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대한 철회를 포함하여 찰스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왕의 요구에 서약할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1662년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중 2000여명이 그들의 사역지로부터 추방당하여 세상으로 쫓겨났고, 많은 자들이 빈곤에 허덕였다. 그 다음에 취해진 조치는 추방당한 목사들이 개별적으로 인도하는 예배조차 집전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 설교를 하다가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부가하는 일련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법령이 제정된 것이다. 더 나아가 전체 청교도 운동을 사이비 종파의 집단으로 몰아세웠으며, 청교도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한 일련의 조치가 청교도주의를 파괴하고 실패하게 만들었는가? 역사가 보여주는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핍박과 정치적 실패로 말미암아 파멸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종교적인 非국교도로 전향하도록 변형시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교도주의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으며 국가의 종교적인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성사시키면서 옛날의 주권 자유를 회복하였다. 그들이 이룩한 무대는 1790년대에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로부터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非국교도 선교운동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2) 청교도 운동의 특성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 윌리암 아메스(William Ames)는 신학(divinity)을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교리’(the doctrine of living of God)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흐르는 정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청교도주의란 단순히 일련의 율법이나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활력소이다. 거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만족감에 대한 가능성을 감탄해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비젼(vision)이요 충동이다.

 

더우기 엄격한 규율은 뜨거운 헌신과 어울러져서 청교도주의를 한편으로는 천박한 신비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속적이며 피상적인 종교로부터 보호하였다. 바로 이 율법과 은혜의 절묘한 결합이 청교도적 경건 생활의 주된 요소였다”

 

 

1) 개인의 경건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매일의 삶을 눈여겨 살피며 차분히 경건스러운 개인 및 가족들의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어 마쳤다. 직업전선에서의 일거리나 집안일이나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실행되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행하여졌다.

 

사업상의 관계이든, 개인적인 친분관계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는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규정되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성경연구에 몰두하였고, 또 公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대화를 나누거나 열정적인 간증을 나누었고, 영혼의 유익을 주는 모든 다른 수단들로 남은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2) 건전한 교리

 

청교도들은 참된 교리를 구체화함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한 진리의 빛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과 무언가 다른 빛나는 삶을 보았으며, 또한 그 많은 부분들이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깜짝 놀랄만한 풍경의 도덕적, 영적인 대륙으로 이끄는 삶을 보았던 것이다. 영적 삶의 생생함과 더불어서 성경적인 사상 위에 서 있는 성경적인 삶에 기초를 둔 교리적 올바름과 견고함이 반드시 있었다. Richard Baxter는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대화(삶)와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든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학적인 사상에 있어서 다분히 칼빈주의적인 그들은 섭리와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개념을 아주 높이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어려운 역경의 체험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탱하게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에 잘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또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와 궁핍과 의지를 보여줄 수 있게 한 그들의 강한 복음의 능력에 반영된 사상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죄에 대한 교리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있는 사악한 잠재력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그들의 경향을 깨닫고 청교도들은 죄를 역명(逆命) 중의 역명이요, 모든 악의 근원임을 서슴없이 밝혀내었다. 청교도들은 죄의 사악한 모습을 파헤치면서 자만심을 파괴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간을 인도하였다.

 

 

3) 질서 있는 교회 생활

 

청교도주의는 영국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을 따라 행하였고,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세속 정권이나 교회정치나 교회생활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충분하고도 명백한 가르침을 더하거나 감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의 예식과 의복을 거부하였으며, 전통의 산물인 감독교회 정치를 배격하였다.

 

영적이며 교회론 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회는 세상 군주의 명령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교회의 나아갈 길을 명령하는 것인가? 교회적인 전통이나 경험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성경이 교회를 명령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교회와 영적인 삶의 영역을 누가 통치하는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이런 것들이 청교도들이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청교도들의 답변은 성경이라는 유일한 절대 권위 하에 교회의 자유를 위한 분명한 선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요지부동한 결단과 더불어 고통 받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

 

(1) 웨스트민스터 회의

 

웨스터민스터 회의가 열린 곳은 영국 의회정치(議會政治)의 본거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웨스트민스터란 서쪽의 대사원(大寺院)이란 의미로 ?시티?의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8세기에 교회가 있었으며, 국왕이 대관식(戴冠式)을 올리는 고딕 양식의 사원으로 긴 스테인드 글래스가 수없이 나열되어 있다.

 

에드워드 왕이 세운 교회로 실내는 여러 개의 예배당과 위인들의 관을 세워 놓은 묘가 많이 있다.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한 순간에 수 백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수많은 묘와 조각품들로 가득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1643년 7월 1일-1649년 2월 22일까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총회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칼빈 사상의 대표적 신조(信條)요 장로교회(長老敎會)의 표준 신조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을 비롯한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공중예배 지침서?, ?장로회 교회 정치 체제?는 영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 장로회의 헌장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 한국 장로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거의 원안을 따르고 있으나 ?장로교 정치체제(政治體制)?만큼은 영국 것을 도입치 않았다.

 

 

청교도가 주축이 된 의회는 특히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75년에 걸쳐서 청교도는 영국의 교회가 더욱 순수하게, 즉 더욱 성경적인 교회 정치 형태, 더욱 순수한 교리, 더욱 순수한 예배 형식, 더욱 순수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을 계속했다. 그래서 의회는 교회의 역사에서 이른바 ?신학자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라고 불려지고 있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목사 121명과 하원의원 2O명, 상원의원 1O명, 계 151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목사를 제외하고 목사 모두는 영국 국교의 목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며, 대부분 모두가 청교도였고 칼빈주의 자들이며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교회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의원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고. 다수의 사람들은 장로정치를 회망 했지만, 한편 꽤나 많은 사람들이 회중정치 형태(Congregational form)를 바랐으며, 소수이기는 했지만 감독정치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 정치의 형태야말로 이 회의에서 가장 열렬하게, 또한 가장 길게 토론하였던 의제였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처음 1643년 7월 1일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려서 5년 6개월 22일 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1,163회의 전체회의가 열렸고, 대단히 많은 위원회와 소위원회도 개최되었다.

 

회의는 의회 군에게 전황이 불리하게 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에 거의 진전되지 않고. 의회는 급히 스코틀랜드에 대표단을 파견해서 군사적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전 의원이 ?엄숙한 동맹?(Solemn Leagueand Covenant)에 서명할 것을 조건으로 원군을 보낼 것을 동의했다. 이 동맹의 초안은 스코틀랜드 측이 만들었고 잉글랜드는 이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에도 합의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모든 의원이 ?엄숙한 동맹?에 서명했을 때 그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속과 방위, 그리고?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를 하나님 말씀에 따른 교리, 교회정치. 예배와 권징의 면에서 개혁하여 가장 잘 개혁된 교회, 즉 모범적인 교회를 만들 것?을 굳게 서약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6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4명은 목사, 2명은 장로로서, 목사는 알렉산더 헨더슨, 베일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터포드였다. 그들은 회의에는 참가했지만 투표는 하지 않았고, 적은 수였지만 회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도착해서 ?엄숙한 동맹?에 서명한 때로부터 회의 활동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는 영국 국교의 ?39개조 신조?를 토대로 해서 이것을 개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고,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39개조 신조?를 버리고 영국 국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훌륭한 신학자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기독교사상 보기 힘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사용하고, 모든 것이 경건한 마음으로 충만해서 진행되었다.

 

 

(2)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업적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5년 반 이상 기도하면서 회의를 계속해서 ?장로주의 표준?(Prsbyterian Standards)이라고 불리 우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했다. 각 문서가 만들어진 순서는, 각 소 회의로부터 ?겸허한 조언?을 회의에 보내온 것을, 회의는 단지 그것을 결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가지고 토론했다. 이 장로주의 표준이 작성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회의는 1643년 7월 1일에 개회되었는데,

 

?공 예배 지침?(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을 1644년 12월에 완성하고, 1645년 1월의 회의에서 승인된 이후 교회의 예배에서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정치 규준?(Form of Church Government and Ordination)은 1644년 11월에 완성되었고 회의의 승인은 1648년에 받았다. 이 정치 규준은 그 정치 형태에서 장로주의였고, 이것에 의해서 영국 국교회의 감독과 대사제 제도의 감독정치를 대신해서 장로주의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Faith)은 1646년 12월에 완성되었고, 회의의 승인은 1648년 3월에 났으며, ?대․소요리 문답서?(Larger and shorter Catechism)는 1646년 가을에 완성되어 회의의 승인은 1648년 9월에 났다. 이 회의는 교회의 예배용 시편가(詩篇歌; Palter)를 만들고자 하는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개의 대립하는 안들이 있었는데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양 의원직을 가지고 있던 프랜시스 라우스(Francis Rous)의 안이, 많은 개정을 한 후 1645년 11월에서 승인되어 다음해 의회를 통과했다. 그 안이 더욱 많은 개정을 거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도 그것을 채택했던 것이다.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9년)

 

교리 1-38

 

십계명 39-81

 

구원의 방편, 82-97

 

주기도 98-107

 

2)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49년)

 

교리 1 1-45

 

교리 2 46-90

 

십계명 1 91-121

 

십계명 2 122-148

 

구원의 방편 149-177

 

주기도 178-196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관하여

 

제2장 하나님과 성삼위일체에 관하여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관하여

 

제4장 창조에 관하여

 

제5장 섭리에 관하여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에 관하여

 

제7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제8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9장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10장 실제적 부르심에 관하여

 

제11장 의인에 관하여

 

제12장 양자에 관하여

 

제13장 성화에 관하여

 

제14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관하여

 

제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

 

제16장 선행에 관하여

 

제17장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제20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제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제23장 관공직에 관하여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제25장 교회에 관하여

 

제26장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제27장 성례전에 관하여

 

제28장 세례에 관하여

 

제29장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제30장 교회의 권징에 관하여

 

제31장 대회와 회의에 관하여

 

제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제33장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제34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

 

선 언 문

 

 

(3) 예배 모범과 정치의 특징

 

WMC의 예배와 정치 부분은 엄밀한 개혁주의의 주된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로교가 개혁주의 내에서 칼빈의 정신에 가깝고 가장 엄밀한 개혁주의가 된 것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의 개혁이었다. 이런 정신은 '칼빈의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의 논문에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관점으로 '예배와 구원, 성례와 교회정치'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이 내용은 역사적으로 엄밀한 개혁주의의 노선을 정리할 때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6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회에 있다',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등 3가지가 예배와 정치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주의(퓨리탄)들의 순수성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WMC의 순수한 정신인 것이다.

 

 

① 예배

 

WMC에서 예배에 있어서는 예배의 본질적인 개념도 중요할뿐더러 예배의식문제도 매우 중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 예배의식에 대한 논쟁 중, 가장 핵심적으로 제시되었던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골로새서 2장 23절의 해석문제와 적용이 그 주된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자의적 숭배'에 대한 이해가 전 개혁주의 예배의식을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의 규범적 원리를 개혁주의에서는 오직 성경의 원칙에 따라서 적용하는 중요한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망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 예배 대상 앞에 혹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면 안 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한 예배를 스스로 결정하신다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주권 사상은 위의 "성경론"과 또다시 연결되어 오직 성경의 규범을 따라서 그 방식을 찾는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인간 자의적인 그 어떤 생각이나 아무리 선한 의도나 행동조차도 금지하는 정신인 것이다.

 

결국 WMC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배의 요소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신앙고백, 기도, 시편찬송, 말씀, 성찬" 등이다.

 

 

② 정치

 

㉠ 초판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 소집권의 권한 문제.

 

WMC의 정치 부분에서는 크게 두 부분의 중요한 부분을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원문상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회의 소집 권한에 대한 문제이며, 둘째로는 장로 정치에 대한 문제이다. 특히 WMC의 원문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초판(1647)에서 23장 3항88)과 31장2항89)이 문제가 되고있다. 이 부분에서 국가 위정자가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또한 대회와 협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있다고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가 의회의 건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입은 것을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인을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을 통해서 이 문제는 곧 수정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재판 원문은 수정된 형태의 조항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국가 위정자의 종교 회의 소집권한과 대회와 협의회의 권한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교회 지도자만이 그 권한을 가질 수 있다고 명시되었다.

 

 

㉡ 장로회(unitati)정치 방식과 "may be"(지 교회와 노회와 관계문제)

 

첫 번째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uni)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 자체(unitati)에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 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 교회(one head-Church) 혹은 주교 회(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 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 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장로회(unitati)정치의 중요한 특징은 복수 장로들에 의한 치리인 것이다. 사도는 교회의 정상적인 치리를 수행하기 위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원리는 오늘날 많은 회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무시되고 있다. 빈번하게, 교회는 ,효력면에서, 종교적인 독재자(dictator)가 되어 가는 목사들의 변덕(whim)아래서 운영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가 회중 투표를 통해서 중대한 사안들을 결정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각 사람들은 다스림 안에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조직은 성경적인 틀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늘 지적되어 왔었다. 성경은 연합된 자격으로 다스리는 장로들로 구성된 집단의 손에 회중에 대한 치리을 부여하였다. 장로들이 집합적으로(collectively) 다스리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속력 있는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 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 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 예를 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이나 위원회들,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들로 인해서 장로교 정치는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는 늘 교회 개혁을 일으킬 때마다. 위와 같은 정신에서의 정치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5) 웨스트민스터 표준과 스코틀랜드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완성되자 바로 채용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역사상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가운데 하나이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교회는 그때까지 존 녹스(John Knox)이래로 가지고 있었던 그들 자신의 신앙고백, 교리 문답 정치규준, 예배 지침, 시편가와 찬송가를 폐기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 요리문답, 정치 규준, 예배 지침, 시편가를 채용했던 것이다.

 

채용한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의원은 영국의 청교도 목사 121명과 스코틀랜드로부터 파송 된 4명의 목사로 구성했었을 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가치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장로교회가 합동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 나라에 걸쳐서 위대한 통일 장로교회를 만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꿈은 잉글랜드에서 장로주의가 폐기되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꿈은 깨졌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은 그들의 몽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로주의가 영국에서 찬란한 빛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신앙 가운데 계속 살아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이주와 전도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은 북아일랜드.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에 그리고 땅 끝에 까지 전하여졌던 것이다.

 

 

4.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잉글랜드의 의회가 전술한 ?장로주의 표준?을 채택한 결과 잉글랜드의 교회는 감독정치를 폐기하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장로교회가 되었다. 장로주의 규준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한 2,OOO명의 국교회(國敎會) 목사는 그들의 교회와 목사관으로 부터 추방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추방된 목사에게 정부가 지급하던 이전 급여의 5분의 1을 계속 지급하도록 했다.

 

장로교회가 잉글랜드의 국교가 되었다는 것으로 민중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는 것은 어려웠다. 민중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회의 정치 형태가 감독정치로부터 장로정치로 갑자기 전환하는 사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의 정치적 흐름이 변하는 것과 함께 국민은 감독정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 역사의 변화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자면,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군사 원조를 받고. 올리버 크롬웰(OliverCromwell)의 지휘를 받은 의회군은 찰스와 그 군대에 대해 완승했다. 1649년 1월에 찰스는 런던 탑에서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호민관(護民官)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수립되었다. 그는 1658년에 죽고, 1660년에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찰스 2세가 국왕이 되자마자 영국의 교회는 감독정치로 복귀됐다. 이전의 영국 국교회의 정치와 예배 형식을 강요하는 엄한 법률이 통과되고, 이 강요에 동의하지 않았던 약 2천 명의 장로교회 목사는 목사관과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또한 추방된 목사가 전임 지(前任地)로부터 5마일 이내에, 그리고 자치도시로부터 5마일 이내에 출입을 금하는 법률〔5마일령(Five Mile Act)과, 목사가 전직 가능한 유일의 직업인 선생도, 비국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은 금하는 법률〔지방자치체법(Corporation Act〕도 만들었던 것이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주의자가 받은 박해는 교회의 역사상 가장 엄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에서 감독주의의 부활이 있은 후에도 영국에서 장로주의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는 이후에 고난의 행진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공동 통치자가 된 1688년의 명예혁명과 그것에 이어진 ?관용령?(Toleration Act)이 발동된 후조차도 장로주의를 믿는 자유만이 허락되었고, 노회(Prsby Lenes)와 대회(synods)를 조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목사는 고립되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유니테리안(Unitarianism)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이단이 교회 내부에 침입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는 쇠퇴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됨과 더불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자들 사이에 복음적인 신앙 부홍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존 웨슬레(John Wsley)의 지도 하에 영국에 퍼져나간 메도티스트의 신앙 부홍 운동의 영향에 의한 것이지만, 더욱이 잉글랜드에 이주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감화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76년에 여러 장로교회의 그룹이 합동해서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270개의 지 교회와 5만 명의 교회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7만 5천 명의 회원을 가지고 케임브리지(Cambrigde)에 신학교를 가지고 있고, 이 신학교는 케임브리지 대학(Cambrigde University)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충실한 교수진을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estminster Theological Collage)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영국 장로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신학적, 비평학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소 요리 문답, 정치 규준과. 예배 지침이 주어진 것에 대하여 영국 장로교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생활과 사상에 이러한 장로주의 규준이 준 감화는 헤아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소 요리 문답 하나만 보더라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까지 그 생활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7장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아일란드(Ireland)는 예부터 왕국(British Isles)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16년 원주민들의 폭동으로 1920년에 독립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란드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 아일란드는 영국(United Kingdom-England, Scotland, Wales, Northem Ircland)에 속해 있다. 이 북 아일란드는 울스터(Ulster)지역(Cauan, Donegal, Monaghan, Londondery)에 속해 있는데 이곳에는 옛부터 스코틀란드나 잉글란드에서 온 신교도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이들을 스코틀란드 계(係) 아일란드 사람(Scotch -Irish)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미국장로교회(美國長老敎會)의 뿌리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1. 아일랜드의 기독교 역사

 

(1) 아일랜드의 기독교의 유래

 

이 섬의 최초의 기독교 지도자는 패트릭(Patrick)인데, 그의 저작물을 읽어보면 로마 카톨릭보다도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에 가까운 것 같다. 그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전혀 무관계한 겔틱 교회(Celtic Church)라고 불린다. 패트릭의 생애는 전설이 섞여져 있어서, 어쩌면 그는 317년경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6살 때에 노예로서 아일랜드에 끌려와, 거기서 기독교로 회심했다고 보고 있다. 그가 지도했던 고대 켈틱 교회는 아일랜드에 오랫동안 존속했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아일랜드는 1170년경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다. 그 해 로마 교황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헨리2세(Henry 1)에게 아일랜드의 통합을 명하였다. 그 명령은 실행되었고 그 때부터 350년 간 아일랜드는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1534년 헨리 8세 (Henry 四)가 ?수장령?을 의회에 제출하고 가결시켰을 때, 그는 잉글랜드와 동시에 아일랜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잉글랜드는 ?수장령?을 수락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수장령?에 대한 수락을 거절하고 그 이래로 분쟁이 계속되게 되었다.

 

아일랜드인과 영국의 지배자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된 분쟁의 원인은, 영국의 지배자가 아일랜드 인에게 영국 국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의 형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싸움은 때로 전쟁의 형태로까지 되었고, 그 전쟁은 종교적, 정치적인 것이었다. 1603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말기에는 얼스터(Ulster)를 포함한 북아일랜드는 전쟁에 의해서 인구가 실제로 감소했다.

 

 

(2) 얼스터의 개신교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 제임스 1세(James 1)에게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인계되었으나. 그는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 상담했는데, 베이컨은 영국 본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아일랜드에 이주시키도록 진언했다. 이 진언은 실행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얼스터 식민?(Ulster Plantatio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 이주는 아일랜드의 얼스터 현(Province of Ulter) 전체에 미쳤다.

 

제임스 1세는 이 이민의 실시에 대해서 먼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선상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1603년에 양국은 합병해서 하나의 왕을 섬기는 것처럼 되었으나, 그때까지 양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숙적 관계의 사람들을 아일랜드에 이주시킴으로써 일석이조의 해결을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국경지대의 분쟁을 해결함과 동시에 용감한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을 북아일랜드에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얼마 동안 대단히 많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의 신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북아일랜드 개척에 나섰으며, 잉글랜드로부터도 프로테스탄트가 이주해 왔다. 더욱이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잉글랜드의 청교도에 대해 영국 국교회의 신앙을 강요했을 때 이민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얼스터 지배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그 가운데 태반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북아일랜드의 벌판에 대한 개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남 아일랜드의 주민은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었다. 그 당시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 사람과 남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교도들 사이에 심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양자들 사이에는 오늘날도 결코 결혼을 하지 않으며,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태어난 아이는 로마 카톨릭교도로서 양육을 받게 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만에 하나 이 사람들이 결혼하는 경우가 있다면. 양친은 아이를 로마 카톨릭 교도로서 양육하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스코틀랜드 사람과 아일랜드 사람은 전혀 혼혈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인 장로교회 사람들을 그들이 아일랜드에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미국 이외에서는 그들을 얼스터인(Ulstermen)이라고 부르고 있다.

 

 

2.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1) 장로교회의 얼스틴 이민

 

북아일랜드에 이민한 스코틀랜드 인들은 모두 교양 있는 경건한 장로교도들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앤드류 스티워트(Andrew Stewar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피해 있는 때에도 아직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 계셨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그들이 전혀 교회에 눈올 주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도 또한 그들을 전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같은 시대에 또 한 사람의 목사인 로버트 브레이어(Robert Blair)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아일랜드에 이민한 사람들 가운데도 가문이 좋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범죄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상태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종교가 뿌리를 튼튼히 박고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목사 역시 대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북아일랜드의 이민 때에 전도를 시작했다. 주님은 이러한 장로교회의 목사들 가운데 가장 유망하게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목사를 들어서 가장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사는 제임스 글렌딩잉(James Glendining)이다. 당시의 어떤 작가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그는 교회의 총회에 의해 선출되어 아일랜드에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파송 될 만한 남자는 못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산만한 사람이었고. 후에는 참으로 착란 상태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불신앙의 나라에 거룩한 백성을 일으킨다면,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이며. 인간의 힘이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다시 글렌딩잉의 전도 방법에 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사람들이 지극히 음탕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오직 하나님과 율법의 저주와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만을 설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 일에 종사했다. 이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 이외의 것은 거의 설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어 ?우리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고 외쳤다.?죄를 자각했기에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부들부들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소식을 듣고, 다른 목사들이 응원했고, 더욱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깊게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신앙의 부홍운동의 바람이 북아일랜드에 불게 되었던 것이다.

 

 

(2) 암흑의 계약과 대학살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국교회의 정치와 교리에 복종시키고자 탄압했지만. 이와 같은 탄압의 손길을 아일랜드에도 뻗쳤던 것이다.

 

악명 높은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가 아일랜드의 총독(Lord Deputy)에 임명되었고, 그의 사명 가운데 남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회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의 사람들에게 ?4복음서의 기자(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대해 맹세하는 서약?(Oath upon the Holy Evangelists)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4복음서의 기자에 대한 서약?의 내용은 찰스 1세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과 왕의 명령에 대하여 언제든지,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반항하지 않고, 지금까지 스코틀랜드와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람들에 의해서?암흑의 계약?(Black Oath)이라고 금방 전하여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여져 무서운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습지대나 동굴로 도망갔고, 그 가운데는 바다를 건너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간 사람들도 있었다.

 

웬트워스는 바다를 피로 물들게 한 해전에서 아일랜드를 지키고, 아일랜드의 산업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했으나 그의 처참한 행위가 너무나 잔인했기에 그가 장기의회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1640년에 처형되었을 때 아일랜드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웬트워스가 실각한 후에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이 남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교도들이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을 공격하고, 특히 고립된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습격을 받아 옷이 벗겨진 채 추위에 방치되어 죽었다. 그 후 아일랜드 사람은 1572년 프랑스의 성바돌로메의 날(St. Bartholomew?s Day)에 있었던 위그노의 대학살(the Massacre of the Huguenots)을 계기로 교회의 역사에서 그와 같이 유례 없이 무서운 방법으로 장로교회 사람들에 대한 대학살을 시작했던 것이다. 1641년에 시작해 수년간 계속된 이대학살에서 수만 명의 장로교회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3)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

 

영국의 의회는 폭동을 진압하고 대학살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에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인인 먼로(Munro) 장군이 지휘한 이 군대의 대부분의 병사는 장로교회 사람들이었다. 각 연대에는 종군목사가 배속되었는데 그들은 장로교회의 목사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전도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편의 군대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이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각 연대에 장로교회와 노회를 만들고 신앙이 독실한 사관(士官)들이 장로에 선출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북아일랜드에 장로교회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1642년 6월 1O일 이러한 교회(당회)의 대표가 벨페스트(Belfast) 바로 북쪽에 있는 캐릭퍼거스(Carrickfergus)에 모여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를 조직했다. 이 노회는 5명의 목사와 4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일랜드에 더 많은 목사를 파송 해 줄 것을 결의해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에 보냈고, 이에 대해서 총회는 가장 모범적인 목사 6명을 아일랜드에 파송 했다.

 

그들은 북아일랜드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각지에 장로교회를 건설해서 1660년경에는 북아일랜드에 8O개의 장로교회와 7O명의 목사, 그리고 5개의 노회와 1O만 명의 교인이 있게 되었다.

 

 

(4) 장로교회의 빛과 그림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민한 장로교인들)은 천신만고 끝에 북아일랜드의 농업과 공업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 해가 더해감과 함께 번영한 마을과 도시가 되었으며, 장로교회도 번영과 성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반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이웃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의 침략의 위험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주해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찰스 2세가 1660년에 즉위하자마자 매우 엄청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모든 국민에게 영국 국교회의 정치, 즉 감독 대주교 제도와 로마 카톨릭에 가까운 고 교회(Hight Church)의 예배 방식에 따르는 것을 요구했다.

 

북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 계 아일랜드 인은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1685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심취해 있던 제임스 2세가 즉위했지만 그들에 대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1688년 영국에서는 명예혁명(great revolution)이 일어나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장로교 인이었기에 당연히 장로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윌리엄의 제위 기간 중에 그들의 제언으로 ?관용령?(Toleration Act)이 통과되어 그 기대는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에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행한 때가 찾아왔다.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로 도망했고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들 가운데서 군대를 모집했다.

 

윌리엄은 즉시 영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해 아일랜드는 전쟁터가 되었다. 런던데리(Londonderry)의 포위와 보인(Boyne)의 격전은 스코틀랜드 계 아일랜드인의 장로교회 역사에서 피도 얼어붙는 듯한 생각이 나는 곳이 되었다. 보인 전투에서 제임스 2세는 패배했고, 윌리엄과 메리의 왕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그 후 얼마 동안 북아일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찾아 왔다.

 

 

3. 대 이주(大移住)와 현대의 아일랜드 장로교회

 

(1) 대 이주

 

1702년 윌리엄이 죽은 후에 제임스 2세의 딸 앤(Anne)이 즉위했고, 그 직후에 심사령(Test Act)을 발표해 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피선되었을 때든지 임명되었을 때부터 3개월 이내에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에 따른 성찬식을 받도록 요구 되었다.

 

이것은 장로교 인들에게는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영국 국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양심적인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북아일랜드로부터 수출되는 물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이와 더불어 수년간의 기근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은 대량으로 미국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숫자를 1705년부터 1775년 사이에 적어도 5O만 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북아일랜드는 더욱 빈곤해졌고 반면에 미국은 풍요롭게 되었다. 그들이 북아일랜드에서 받은 고통을 안다면, 그들이 미국에 갔을 때 왜 미국의 독립을 위한 싸움을 했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 현대의 아일랜드 장로교회

 

현재 북아일랜드에는 600개 이상의 장로교회와 15만 명의 신자가 있으며, 더욱이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구 5O만의 벨페스트는 장로교 도시라고 일컬어지고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중심지이다.

 

여기에는 장로교회의 시설이 많이 있는데 유능한 교수진을 가지고 있는 신학대학이 있고 런던데리에도 하나의 신학대학이 있다.

 

1660년 이 교회의 통계와 현재의 통계를 비교해 보면 약 3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적어도 그 숫자 위에 미국이나 그 밖의 여러 나라로 많은 교인을 보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오랫동안 분열과 논쟁에 시달렸는데, 그 분열의 원인 가운데는 교리상의 일과 예배할 때 악기를 사용하는 데 대한 시비를 둘러싸고, 더욱이 시편 가와 함께 찬송가를 사용할까말까 하는 것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들을 통해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강하고 통일된 보수적인 교회로서 성장했다. 이 교회는 세계의 장로교회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인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제8장 미국의 장로교회

 

 

아메리카의 장로교회의 초기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불굴의 흘란드인. 모험적인 영국인, 열광적인 휴그노, 불타는 아일란드인, 집요한 스코틀란드인과 같은 조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1607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것이 아메리카에 영국인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시초라고 말해준다. 그 결과 영국의 아메리카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신교도(新敎徒)가 되도록 예정되었으며 영국의 미국 통치는 독립전쟁 전까지는 허드슨 만으로부터 플로리다까지 뻗쳐 있었고 서부로는 대서양으로부터 미시시피 강까지였다.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자들은 영국교회와 연관을 맺었다. 그들 중에는 약간의 칼빈주의적 청교도(淸敎徒)들이 있었다. 1611년에 알렉산더 휫타버라는 목사가 그곳에 도착했는데 그를 일컬어 밴크로프트는 ?버지니아의 자기를 부인하는 사도?라고 했다. 그는 칼빈주의 자였으며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를 신봉했다. 칼빈주의 자들과 장로회주의자들은 식민지인 미국의 최초의 정착민들 가운데 있었다.

 

 

1.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교회 설립의 시초

 

(1) 프랜시스 매케미(Francis Makermie) -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

 

강인한 개성과 기민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 흩어져 있는 장로희주의 추종자들을 모으는 일이 요구되었다. 이 요구가 바로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rnie ; 1658-1708)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북 아일란드에서 태어나 스코틀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1680년에 라간(Lagan) 노회에 의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미국 장로교회의 진정한 창립자인 그는 런던 연합회가 열리기까지 약 8년 동안 이 숭고한 선교 사업에 종사했다. 비록 그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지도력과 조직력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메릴랜드 동편 해안과 버지니아에다 많은 장로교회를 세웠다. 바울과 많은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매케미도 역시 장사(trade)를 해서 그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1704년 여름 런던에서 그는 도움을 호소하여, 미국에 돌아갈 때는 그라스고우 대학의 졸업생인 존 햄프턴(John Hampton)과 죠오지 맥니쉬(George McNish)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매케미가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는 항상 인디안이나 강도들의 위협 중에 있었다. 메릴랜드의 정착민들은 일반적으로 강을 따라 정착했다. 매케미는 이들에게까지 기독교의 위로를 전해 주었고 잊어버린 칼빈(Calvin)을 상기시켜 주었다. 1683년 그는 르호봇과 스노우힐과 메릴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후에 그 부조에 여러 다른 교회들을 세웠다.

 

 

(2) 최초의 미국 장로회

 

1706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최초의 미국 장로회(Presbyte교)가 프란시스 매케미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것을 필라델피아 장로회(Presbytery of Philadelphia)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단지 7명의 목사와 특정 장로들이 참석했다. 7명의 목사는 보이드(Boyd)씨를 새로 임명함으로써 8명이 되었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고 또한 둘을 제외하고는 스코틀란드와 아일란드에서 목사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유일하게 미국에서 출생한 앤드류스(Jediah Andrews)는 필라델피아의 목사였는데 매사츄세츠에서 태어나 하바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698년에 필라델피아로 가서 1701년에 임명되었고 끈기 있는 노력으로 인하여 매우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미약한 회중을 한 군데로 모았다. 1705년에 새로운 집회소가 건축되었고 이 새로운 집에서 대(大) 장로회의 기원인 최초의 장로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매케미는 이 모임에 대해서 이것은 ?종교를 향상시키고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알맞는 방책을 상의하는 것으로서 목사의 활동을 위한 목사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이 모임이 미국에 있어서의 장로회주의 조직의 최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노회는 1706년 중의 어느 시기에 모였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아마도 1706년 12월 27일 존 보이드를 임명키 위해 열렸던 특별 모임이 바로 첫 번째 노회(老會)가 아닌가 한다. 이 장로회는 다만 메릴랜드와 델라웨어와 필라델피아의 회중들만을 포함시켰다.

 

뉴져지와 롱아일랜드의 몇몇 청교도 장로교회들이 곧 이어서 이 장로회에 합세했다. 그리하여 1716년에 이르러서는 7명의 목사가 17명으로 늘어났다. 필라델피아로부터 북으로 롱아일랜드까지의 목사들은 거의 뉴 잉글란드 계통이고, 델라웨어와 메릴랜드의 목사들은 스코틀란드나 아일랜드 계통이었다. 이 장로회가 돌본 유일한 목사지망생이었던 웨일즈 사람 데이빗 에반스(David Evans)는 1710년에 들어와 1714년에 임명을 받았다.

 

목사의 수는 적었고 목사를 양성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로는 스코틀란드의 에딘버러나 그라스코 대학과 뉴잉글랜드의 하바드와 예일대학이었다. 창립한 지 몇 해가 지난 후에 장로회는 런던, 더블린, 그라스고우의 장로교 인들에게 재정적인 보조를 요청하여 지원을 받게 되었다.

 

 

(3) 대회(Synod)의 창립

 

장로회가 창립된 이후 교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는데 그것은 주로 목사들과 교인들이 해외로부터 계속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매케미와 그 밖의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그들의 일을 해 나갔다. 교회를 위한 봉사를 문자 그대로 자신을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하였다. 매케미는 1708년에 5O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또 여러 장로교회 목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1716년에 이르러는 장로회의 목사 수는 17명이었다. 이들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었고 또 여행이 힘들어 출석이 어려웠으므로 한 개의 장로회를 4개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4개는 필라델피아, 뉴 캐슬, 스노우 힐, 그리고 롱아일랜드였다.

 

필라델피아는 펜실바니아의 교회들로 이룩되었고 뉴 캐슬은 델라웨어의 교회들로 이룩되었으며 스노우 힐은 메릴랜드의 교회들로, 롱아일랜드는 뉴욕과 뉴져지의 교회들로 이룩되었다, 1717년 9월17일 4개의 노회 중 3개의 노회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최초의 대회(Synod)를 조직했다 그러나 스노우 힐의 노회는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참석치 않았다.

 

이즈음의 미국 장로교회는17명의 목사와 더불어 49여 개의 교회, 그리고 약 3,000명의 전도자가 있었다.

 

 

(4) 1729년 결의 채택

 

대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심각한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교리를 찬성하는 서명이 요청되었을 때 그럴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1724년경까지는 회원이 된 모든 목사는 그들의 고국에서 임직이 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미국 장로교회 훈련과 정통성(正統性)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植民地)에서 양육 받은 젊은 사람들이 목사의 허가를 얻기 위해 신청을 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찬성해야만 할 신앙의 표준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코틀란드나 북아일란드 출신의 목사들은 이들이 서명할 표준에 철저한 동의를 했다. 반면 영국과 웨일즈 출신들은 반대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서 1729년 필라델피아대회는 결의를 채택키로 했는데 그 결의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필라델피아 대회의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2. 분열, 성장, 재결합

 

몇 해 안되어 하나님의 성령 부홍 운동이 교회에 임했다. 그 시작은 제이콤 프렐링호이젠(Jakob Frelinghusen)의 열렬한 목회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는 뉴져지 주의 라리탄(Raritan)의 독일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프렐링호이젠과 거의 동시에 또한 개별적으로 뉴 잉글란드의 죠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에 은총의 소나기가 내려졌다. 이 무렵에 죠오지 횟필드(George Whitfield)가 미국을 방문하여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으며 부홍 운동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장로교회 내에서는 테넌트(Tennent)가 마음과 영혼을 부흥시키는 데 힘썼고, 프렐링호이젠의 목회를 통해 맹렬한 열심을 갖게된 그는 감격적인 설교와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서. 휫필드를 제외한다면 제1인자가 되었다. 이러한 부흥은 전지역으로 점점 힘차게 퍼져나갔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다툼과 고질적인 분리를 낳았다.

 

 

(1) 대회의 분열

 

1741년 필라델피아의 대회는 구파(Old-side)와 신파(Ncw-side)로 갈라졌다.

 

신파는 1745년 뉴욕의 대회로써 분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1741년부터 1758년의 재 연합까지 미국에는 2개의 분리된 장로교회가 있게 되었다. 하나는 필라델피아의 구파대회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의 신파 대회였다.

 

이 무렵에 뉴욕의 대회는 5개의 노회, 즉 써포크, 뉴욕. 뉴 브른스위크. 말링톤. 뉴 캐슬을 갖고 있었으며 필라델피아 대회는 3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도네갈, 그리고 뉴욕 대회의 뉴 캐슬과는 다른 또 하나의 뉴 캐슬을 갖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분열이 전국에 걸친 위대한 복음전도의 물결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늙은 스코틀란드인과 아일란드계 목사들은 그들이 일컫는바 새로운 열광(New Enthusiasm)도 인정하지 않고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사용된 방법도 인정하지 않았다.

 

복음전도에 있어 또 하나의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는 알 맞는 목사교육 문제였다.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또한 복음전도 부흥 운동에 의해 많은 개심자들이 생기자 목사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구파 그룹은 믿기를, 아메리카 교회의 목사는 뉴 잉글란드나 구 대륙의 대학에서 철저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신파 그룹은 그것을 너무 느린 과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구대륙의 대학들은 신대륙의 아메리카 목사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파(Ncw-side) 그룹은 목사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테넌트의 아버지인 윌리암 테넌트가 펜실바니아 근처 펜실바니아 네샤미니(Neshaminy)에 유명한 학교를 세워 많은 젊은 목사들을 교육했다. 반대자들은 이 학교를 조롱하여 부르기를 ?통나무 대학?(the Log College)이라고 했다.

 

 

윌리암 테넌트(William Tenunt) 목사는 1716년에 미국에 건너왔다. 그는 본래 아일란드의 감독 교회의 일원이었는데 그 후 감독 교회와의 관계를 바꾸어 1718년 9월 18일 필라델피아 대회에 합세했다. 1726년 그는 필라델피아 네샤미니에 정착했다. 통나무 대학은 교회를 위해 숭고하고도 필요한 많은 일을 하는 기관으로 존중되었다.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m) 목사는 1703년 아일란드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대학 문을 열었을 때 약관의 21세였으며 그의 아버지를 도와 가르쳤다. 그는 1726년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1727년 뉴져지주 뉴 브론스위크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설득력 있는 설교자였고 솔직하며 관대한 친구이자 근면한 목사였고 애국심 있는 시민이었다. 그의 영향과 명성은 매우 컸다. 1743년에 그는 필라델피아의 제2장로교회의 목사로 부름 받아 그곳에서 1764년 그가 죽는 해까지 성공적으로 목회를 했다.

 

 

대회가 분열되자마자 양쪽 모두 학교를 설립했다.

 

뉴욕 대회는 죠나단 디킨슨(Johnadan Dickinson : 1688~1741) 목사를 필두로 하여 뉴져지 주의 엘리자베스 타운에 한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위한 설립 허가는 1746년 1O월에 받았다. 다음 해 1O월 뛰어난 학장이었던 디킨슨이 죽자 학교는 뉴져지 주의 뉴 라크로 옮겨져, 아론 버르(Aaron Burr) 목사가 책임을 맡았다. 1755년 또다시 뉴져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옮겨져서 1896년에 프린스톤 대학교로 번성하였다.

 

 

(2) 1758넌의 재결합

 

뉴욕 대회는 필라델피아 대회와 다시 1746년 이들의 연합대회가 트렌톤에서 열려 재결합의 가능성을 상의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① 필라델피아 대회가 1741년에 받아들였던 테넌트 파에 대한 항의였고, ② ?신앙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해석이었다.

 

중복되어 소속되어 있는 노회들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도 두 대회가 재결합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난점들은 1758년의 결합 계획에 의해 모두 조정되었으나 첫 번째 문제는 매우 가슴 아픈 것이었다. 이 문제는 논의된 항의를 대회 전체의 공적 행위라기보다는 테넌트 파를 받아들일 것에 서명한 개개 회원의 사적 행위로서 간주하도록 하는 필라델피아 대회의 동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필라델피아 대회에 양보되었는데 이후로는 교회에 들어올 목사는 논의의 여지가 많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를 뺀 신앙고백서에 서명해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뉴욕 대회는 테넌트 파에 대하여 양보하기를 목사들이 다른 회중에 초대받지 않을 것을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인정했고, 또한 교회 임원들의 권위에 대해 더 큰 존경을 인정했다. 동료 목사들의 무책임하고 냉정한 탄핵은 금지되었다. 테넌트 파는 목사 후보생이 그들의 ?종교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으로 심사되어야만 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러한 규정들에 의해서 결합의 계획은 드디어 1758년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기초하여 ?뉴욕-필라델피아 대회?(Synod of Ncw York and Philadelphi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성취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이 재결합 된 대회는 98인의 목사와 200개 교회와 1만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3) 변경 지역 선교

 

재결합된 교회는 점점 더해 가는 선교 적 열심을 갖고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에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서부로 향해 갔다. 기독교 학교들이 세워졌고 미래의 대학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인디안 가운데서 선교적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문헌을 창작하고 전파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존 엘리오트는 지금까지 감춰졌었지만 이미 이전부터 인디안 가운데서 일했었다. 그는 홍색인종을 기도하는 마을로 모아들였으며 그들의 언어로 복음(福音)을 번역했다.

 

이러한 미국 선교사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니엘 브레이널드였다. 그는 뉴져지 주의 프리흘드에서부터 서스퀴 호나 강에 이르기까지의 인디안들 가운데서 일하였다. 그는 1747년 낙심한가운데 불과 4년이라는 세월을 일하고 죽었으나, 그의 생애가 죠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기록되어 무수한 독자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노력을 자극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서부 변경의 백인 정착민들도 역시 전도 사업의 대상이었다. 1755년 뉴욕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로부터 죠지아에 이르는 하노바(Hmover) 대회를 조직했다. 후에 뉴져지 대학의 학장이 된 능변의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cs)가 노회 설립 이전에 이곳에서 일했다. 이 변경 지역 노회는(Frontier Presbytery)다른 노회들의 모체가 되었다. 1781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 레드스톤에 노회를 설립했다. 이 노회는 당시 제일 서쪽의 노회였다.

 

 

(4) 미국의 혁명과 독립전쟁

 

오늘날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 미국의 특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전쟁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되었다.

 

1774년에 9개 주의 식민지가 합법적으로 설립된 교회를 갖게 되었다.

 

희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의 인정은 코네티커트 주에선 1816년 그리고 매사츄세츠 주에선 1833년에 끝났다.

 

어쨌든 미국독립전쟁은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기상(起床)이었다. 이 독립운동에 있어서 장로교 인들이 지도자들이었다는 것과 더욱이 장로교인들 가운데서도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 인이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역사가 밴크로프트는 말하기를 미국에 있어서 ?대영제국과의 모든 연결을 풀기 위한 첫 번째 소리는 뉴 잉글란드의 청교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뉴욕의 화란 인들로부터도 아니고 버지니아의 개척자들로부터도 아니고 아일란드 장로교 인들이었다?고 한다.

 

장로교 인들은 미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애국적인 헌신에 있어서 단연 첫째였다. 공교롭게도 경제적 정치적 대의(大義)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대의까지 미국 독립전쟁의 기초를 이루었다.

 

많은 비국교도들 그 중에도 특별히 장로교 인들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미국 식민지에 상주하는 신부(神父)를 보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17세기에 두 번, 18세기에 한 번, 이 계획이 거의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장로교 인들은 그들의 많은 직계 선조들이 영국에서, 스코틀란드에서, 아일란드에서, 국교도의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 정부로부터의 지독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와야만 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슷한 재난이 자기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자기들을 삼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필요하다면 검(劍)으로 찌를 각오도 되어 있었다. 국교에 반대하는 다른 교파들도 거의가 장로교에 공감했다. 비록 죠오지 워싱톤과 같은 뛰어난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감독교회 교인들은 독립전쟁 중에 있어서 ?애국자? 편을 대적하여 독립 반대자로서 영국 편을 찬성했었다.

 

전쟁 중에 장로교회의 영향은 온 식민지에 크게 미쳤다. 뉴 잉글란드에서는 회중교회가 우세했고 남부 식민지역에서는 감독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일부 식민지역에서는(만일 네덜란드와 독일 개혁교회의 신봉자들을 ?장로교인?에 포함시킨다면) 종교를 가진 자들 중 대다수가 장로교인들이었다.

 

1775년 5월 17일 뉴욕과 필라델피아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장로교의 바쁜 날이었다. 바로 한 달 전에 독립 전쟁의 첫 번째 피가 워싱톤에서 흘려졌다. 같은 달 일찍, ?두 번째 주 대표자 회의?(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모든 도시와 마을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이러한 열기 속의 혼란 중에 24명의 목사와 5명의 장로들만이 대회에 출석했다. 대회는 모든 회중을 위하여?엄숙한 금식과 금욕과 기도의 하루를 정했다. 대회는 또 목회서신(收會書信)을 기안했는데 이것이 비록 제한 받기는 했지만 애국자 편을 위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장로교 인들은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장로교회의 저명한 목사였던 위덜스푼 박사(Dr. Witherspoon)는 주 대표자 회의의 회원이었고 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다. 주 대표자 회의의 서기였던 찰스 톰프슨(Charles Thompson)도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죠셉 클라크(Joseph Clark)와 후에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던 제임스 암스트롱(James F. Armstrong)도 전쟁 중에 장교였다.

 

장로교 인들이 독립선언에 이르게 한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고 또 독립전쟁에 있어서도 많은 기여를 했으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미국의 헌법(憲法) 제정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미국 헌법과 장로교회의 헌법 사이에는 현저한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5) 첫 번째 장로회 총희( First General Assambly)

 

정치인들이 미합중국의 헌법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교회는 미국에 있는 모든 장로교회를 포함시킬 수 있는 총회의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뉴욕과 필라델피아 대회는 1788년 5월에 모두 16개의 노회를 4개의 대회로 나누었다.

 

첫 번째 총회에서는 16개의 노회로 되었는데 그 이름은 서포크, 더취스 컨트리. 뉴욕, 필라델피아. 뉴 브론스위크. 뉴 캐슬. 루이스. 발티모어. 칼리슬. 레드스톤, 워싱톤. 하노버. 오렌지, 아빙톤. 남 캐롤라이나, 트란실바니아이다.

 

이 16개의 노회들은 뉴욕-뉴져지 대회, 필라델피아 대희, 버지니아 대회. 캐롤라이나 대회로 나뉘어졌다. 존 휘털스푼은 적절하게도 첫 번째 총회의 사회자로 임명되었다. 대회들은 지시된 대로 모여서 총회 조직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어 최초의 모임이 1789년 5월 21일 필라델피아에서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ne General Assambly of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s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그것은 죠오지 워싱톤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꼭 3주 후였다. 그리하여 장로교회는 넓게 볼 때 국민적인 교회가 되었다. 총회 안에는 177인의 장로회 목사들과 111인의 목사 후보자와 419개의 교회들이 있었다.

 

1789년에 첫 번째 총회를 열리게 했던 1788년의 협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교회의 신조로 채택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담은 문서로 총회의 조직이 중대한 것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즉 ?좋은 성품과 도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 할 그런 진리와 형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개개의 크리스챤과 단체들은 서로를 향한 상호 관용을 연습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총회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바로 그때에 첫 번째 미국 국회가 새 헌법에 의해서 개최되었다. 총회는 죠오지 워싱톤에게 보낼 성명서를 기안하기 위해 뉴욕에서 존 휘털스푼을 의장으로 하는 하나의 위원회를 임명했다. 때때로 미국 헌법은 장로회 행정체제(長老會行政體制) 형식을 신중히 따를 것을 요청 받았다.

 

이 둘 사이의 뚜렷한 유사성은 이들을 기초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2/3가 칼빈주의적 장로교 인들이었다는 데서 근거한다. 미국 내에 있는 교파가 다른 자매 교회들이 장로회 조직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의해 매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예컨대 교회 행정체제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대표자간의 동등성 같은 것을 말한다.

 

 

3. 영적 각성운동과 분열

 

(1) 영적 타락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미국 독립전쟁 후에도 전 미국에 걸쳐 도덕적이며 영적인 타락이 따랐다. 수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군 복무를 위해 신도의 의무를 버렸으며, 애국적 운동을 하는데 눈에 뜨이도록 헌신했던 장로교회는 교회의 건물이 때때로 적에 의해서 병사(兵舍)로 또는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은 볼테르와 루소의 영향력과 다른 형태의 프랑스의 불신의 영향과 급진적인 사회관의 영향을 받게 만들었다.

 

톰 페인(Tom Pain)의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는 비종교적인 “자유사상?(Free thinking)을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시켰다. 이때 뉴 져지 대학에는 크리스찬 교수가 2명밖에 없었고, 반면 예일(Yale)에는 많은 사람들이 루소와 볼테르 같은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2) 영적 각성 부흥 운동(The Revival)

 

미국의 1차 영적 각성 부흥 운동은 1740~1750년대에 일어났었다. 그 때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장로교에서는 윌리암 테넨트(William Tannent),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 사무엘 블레어(Samuel Blair), 사무엘 데이비즈(Samuel Davies) 등 이었으며. 화란 개혁파의 데오도를 프롤링하이젠, 회중교회의 죠나단 에드워즈, 엘리에젤 휠로크와 침례교회의 슈빌 스티언스, 다니엘 마샬 과 루터교회에선 헨리 멜콰이어 뮬렌베르크,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죠지 휫필드 등을 들 수있다.

 

 

1798년부터 1801년 사이에 다른 부홍 운동이 일어나서 곧 전국에 퍼졌는데 이는 제2차 영적 각성 부흥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 운동은 켄터키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공상과 위험과 고된 노동과 저질의 육체적 만족과 싸움과 다툼이 가득 차 있었다.

 

1799년 제임스 맥그레디(James McGready) 목사는 켄터키의 호간 마을의(Hogan Country) 그의 교회의 교인들을 설득하여서 불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하도록 하였다. 몇 달 안 지나서 한 여인이 회개하였는데 이 여인이 열심으로 전도하여 곧 1O명 가량을 회개케 했다. 그 다음 2년 동안에는 이 부흥운동이 다른 교구에 퍼졌는데 이번에는 죄를 깨닫는 자들이 애통하고 울부짖으며 바닥에 버둥거리는 등의 이상한 가시적 결과를 수반했다.

 

1800년까지 이 운동은 켄터키 전역에 퍼졌고 이 운동과 관련하여?야외 집회?(Camp meetings.)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종교 집회가 열리는 거룩한 장소 주위에 마련된 텐트나 마차에서 잠을 잤다. 이 영적 각성 부흥운동은 켄터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전국에 걸친 것이 되어 독립 전쟁 후에 있었던 ?자유사상?과 불신을 타파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정 전도, 해외 선교, 목사의 교육이 이후 1O년 간 매우 발전했다.

 

 

이 활약한 지도자들은 장로교회에서는 제임스 멕그레이디,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바턴 스톤(Barton Stone), 라이만 비쳐(Liman Beecher), 알렉산더 켐벨(Alexander Campbell),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 등이었다.

 

 

이 시기에 ?컴벌랜드 장로교희?(Cumberland Prcsbyterian church)가 세워졌다. 트란실바니아 노회와 이것에서 성장한 컴벌랜드노회는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일부를 숙명론(宿命論)으로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공공연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목사로 임명했다. 켄터키 대회와 총회의 결의로 인하여 1810년 컴벌랜드 노회의 대다수가 후에는 컴벌랜드 장로교회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리된 교파를 만들었다.

 

 

(3) 선교와 팽창

 

1800년대에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일한 교파였다. 학식 많은 목사를 가졌고 한결같지는 않았을지라도 전 미국에 골고루 퍼진 막대한 회원들. 새로운 총회에 의해 제공된 유효한 중앙헌법. 의심할 바 없는 애국주의로 얻은 명성, 근래의 부흥에 의해 새로워진 영적인 활기를 지녔으므로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1800년에는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16개의 노회였던 것이 26개의 노회가 되었고, 1789년 첫 번째 총회가 열렸을 당시는 419개 교회였던 것이, 1803년에는 511개 교회가 되었다. 그 후에 많은 세월에 걸쳐 교회가 당면케 된 가장 큰 과업은 변경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었다.

 

1788년 구 대회(Old Synod)는 교회에게 ?변경의 목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권면했다. 새로운 총회는 곧 모든 회중들에게 가정 전도를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모금하여 그것을 총회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미국 역사상 초기의 민족주의 시기였던 1789년에서 1830년 사이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는 각 교파간의 상호 협동에 대한 관대한 정신의 본보기는 드디어 1810년 해외 선교를 위한 위원회를 형성케 했다.

 

1806년 사무엘 제이 니일스(Samuel J. Nills)는 로오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에 의해 해외 선교의 열정으로 불타게되어 윌리암 대학에 들어갔다. 니일스와 함께 영감을 가진 대학의 동료들이 한적한 건초더미에 모여 선교 사업을 하기로 엄숙히 맹세했다. 후에 이들 대부분이 안도너 신학교(Andoner Seminary)에 들어가 같은 뜻을 가진 자들과 합세했다. 1810년 이 무리들 중 몇 사람들이 매사츄세츠의 회중교회의 총회에 해외 선교를 시작할 것과 자기들을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회는 모임을 열어 일반적으로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로 알려진?해외 선교를 위한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aries for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

 

1812년 2월 제드론, 라이스 니웰, 노틀, 흘이 각기 부인을 동반하고 최초의 미국의 해외 선교사로서 인도를 두 파트로 나뉘어 떠났다.

 

1879년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6개의 해외 선교 위원회가 각각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1811년 미국 위원회는 장로회 총회(長老會總會)를 청하여 다음 해의 총회 시에 자기들과 협동할 수 있도록 장로회 자체의 미국 위원회와 유사한 위원회를 형성토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총회는 미국 위원회의 사업에 장로회가 보조해 주기로 하는데 그쳤다.

 

회중교회 회원들은 이러한 반응을 관대한 정신으로 받아. 미국 위원회에 많은 장로회 목사와 평신도를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1817년 장로회 화란 개혁교회와 스코틀란드 개혁교회는 연합된 해외 선교회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북 아메리카의 인디안들과 멕시코, 남아메리카 그 외의 다른 불신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공언했다.

 

1826년 미선교회는 미국 위원회에 의해 성취된 찬란한 해외 선교 업적을 관찰한 결과 만족하여서 자기 선교회의 모든 일과 재산을 미국 위원회로 넘겨주었다.

 

1837년 ?장로회 해외 선교 위원회?(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가 형성되기 전까지 장로회의 대다수는 미국 위원회의 일을 지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4) 신학교(Theological Seminaries)

 

급속히 팽창되는 교회의 일은 목사의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켰으나 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높은 수준의 목사 교육을 완화시키려는 유혹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총회는 뉴져지 주 프린스톤에 하나의 학원을 세워 1812년 8월, 3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박사와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박사가 초대 교수였고 몇 해 후에 찰스 핫지(Charles Hodgc)박사가 교수진으로 들어갔다.

 

다른 장로회 신학교들도 이 기간에 세워졌는데 1818년에 아우번, 1824년에 버지니아 유니온, 1827년에 웨스턴, 1828년 콜럼비아, 1829년에 레인, 1830년에 맥코믹, 1836년에 뉴욕의 유니온이 세워졌다. 이들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급속히 늘어가는 일을 위해 요구되는 잘 훈련된 목사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5) 분열된 장로교회

 

1) 새로운 시대

 

1830년경부터 미국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각성되고 1812년 전쟁에 의해 조장된 민족주의의 정신은 지독한 분파주의 정신에 굴복하여 농업을 하며 노예를 갖고 있는 남부와, 산업을 하며 노예의 자유를 주장하는 북부는 서로 점점 더 날카롭게 대치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새로운 정신을 가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나와서 ?평범한 사람들?을 새로운 힘을 지닌 뛰어난 인물로 만들었다. 정서적인 불안정과 끝없는 낙천주의가 새로운 민주주의 정신을 나타냈다. 종교 면에 있어서는 청교도 시대에 뒤이은 기독교의 세 번째 시대, 그리고 위대한 각성을 한 ?부흥사?(Revivalist) 시대에 뒤이은 ?근세?(Modern)가 다 일반적으로 1830년경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근세에 있어서는 교파 상호간의 협동이라는 관대한 정신이 분파주의에 굴복해 버렸다.

 

 

2) 장로교회의 분열

 

1837년의 장로교회는 아직 미국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파였다.

 

1800년부터 1830년까지 3O년 간 장로교회는 20,000명의 회원으로부터 173,000여 명의 회원으로 증가되었는데 이 성장은 국가의 성장과 비교하더라도 더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1837년 전의 몇 해 동안에 교회 내에서 교회 헌법과 교리의 문제로 ?올드 스쿨?(Old schoo1) ?뉴 스쿨?(New school) 간에 싸움이 일어날 불길한 움직임이 있었다.

 

올드 스쿨은 회중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 1801년의 유니온 계획(Union plan)에 만족하지 못하여 이 계획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결코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라고 비난하였으며 더군다나 그들을 교회 법정(Church Courts)에 의해 교회가 다스리거나 교회 교인을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드 스쿨은 또한 장로교회가 자체 교파의 교회 위원회를 가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는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나 ?미국 가정 선교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같은 타교파의 기관을 통한 일을 하기보다는 총회가 직접 일을 관장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뉴 스쿨(New school)은 회중교회적 배경과 훈련을 많이 갖고있는 학교로서 유니온 계획과 타교파의 기관에 대해 만족했다. 그들은 긍지를 갖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뉴욕 주의 ?제네씨 대회?(Synod of Genesse)와 여기에 이웃해 있는 두 개의 대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유니온 계획의 덕을 크게 본 것이라는 것과 이 계획은 1800년에 전 교회가 가졌던 수보다 더 많은 위탁 회원들을 1830년에 수용하고 있었다.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오늘날의 대다수 평신도들이 보기에는 실제로 모호한 것과 아니면 아주 하찮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도 일치를 보지 못했다.

 

올드 스쿨은 1837년의 총회에 자기들이 대다수임을 발견하고는 격한 행동을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들은 1801년의 유니온 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대회는 더 이상 장로교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조처는 명백히 뉴 스쿨을 교회로부터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그 다음 해. 제거된 장로회 회원들은 그들의 신임장을 제출하였으나 좌석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끼리 총회와 같은 조직을 해서 다른 건물로 이전해 갔다. 이렇게 하여 장로교회는 똑같은 공식 명칭을 갖고, 똑같은 교리적 표준을 갖고. 똑같은 교구를 가졌으나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때로는 적대시하게 되어 두 교파로 갈라지는 이상한 모습을 들어냈다.

 

분열의 시기였던 1837년부터 1869년까지 두 교회는 올드 스쿨과 뉴 스쿨로 널리 알려졌다. 올드 사이드는 본래 회원의 5/9를 포함하였고 민사 법원에 의해서 분열전의 교회의 법적 계승자라고 선포되었다. 이 비극적 분열은 국가의 지역적인 광대한 팽창이 막강한 힘으로 교회에 막 도전하는 그때에 일어났다.

 

 

3) 해외 선교 위원회

 

1837년의 분열 이전, 즉 1831년에 피츠버그 대회는 해외 선교(海外宣敎)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교파적인 통제 하에서 한다는 것이 무력한 것임을 깨닫고 ?서부 해외 선교회 (The Western Foreign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했다.

 

1837년 분열 이후에 올드 스쿨의 모임은 서부 해외 선교회의 기금과 일을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장로회 해외 선교회?(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 이때 이 선교회는 4개의 주둔지와 23명의 선교사를 갖추었다가, 1937년 100주년 기념 때에는 1.262명의 선교사와 16개국에 154개의 주둔지를 갖게 되었다.

 

4) 1857-1858년의 부흥운동

 

1857년은 미국이 전례 없이 번성한 때에 뒤이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경제적인 쇠퇴는 전국적으로 종교적 관심에도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돌이켰다. 1857년 뉴욕에 있는 옛 화란 교회(Old Dutch Church)에 교회의 문이 정오부터 1시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처음엔 모이는 수가 적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차고 넘쳐 다른 방들까지 들어찼다. 1858년 봄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O회의 이러한 모임이 뉴욕에서 열렸다. 종교적 깊은 관심과 유사한 장소가 전국에 걸쳐 목격되었다.

 

?위대한 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때처럼 이 부흥운동에서도 어떤 지도자들도 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의 편에서 자발적으로 종교적인 갈망을 갖게 했다.

 

새롭고도 급속히 성장하는 기관이었던 청년 기독교 연합회(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이 일을 촉진시켰고 비종교적인 신문들도 관대하게 선전을 해 주었다. 이때 약 100만 명이 미국 교회에 참가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에 상당한 수가 장로교회에 가입하였다.

 

 

5) 장로교회와 노예제도

 

1830년부터 1860년까지의 나라의 정치적인 큰 관심사는 노예제도의 문제였다.

 

1818년, 총회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강력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는 어떤 한 종족을 다른 종족이 자발적으로 노예 화 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모순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과 원칙에도 전적으로 대립된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1832년 이후에. 노예 제도에 대한 논란은 전국적으로 치열해져서, 1836년 총회는 ?이 모든 문제를 무기한 연기할 것?을 결의했다.

 

1837년의 분열 이후. 북부 회원의 7/8 이상을 갖고 있는 뉴 스쿨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남부 회원의 1/3을 차지하는 올드 스쿨 교회들은 더욱더 보수적 입장을 유지했다. 그 결과 남부에 있던 비교적 작은 뉴 스쿨 교회들은 1857년 ?장로교회의 연합 대회?(the United Syond Of the Presbyterian Church)로부터 탈퇴했다. 반면, 올드 스쿨 교회의 남부와 북부 회원들은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친교를 계속 가졌다.

 

 

6) 남북전쟁(1861~1865)

 

남북전쟁 동안에, 남북 양편의 여러 교회들의 목사들로 하여금 군인들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한 긴급함은 매우 분명하게 양 교파의 초교파적인 정신을 촉진시켰는데 그것은 군에 있는 크리스챤 사역자들이 자기 교파 사람들에게만 목회를 제한하여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1년 기독인 위원회(Christian Commission)가 전선에 있는 자들에게 설교자와 간호원과 도서와 기독교 서적 또한 위문품을 보내 주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 일은 거의 대부분이 교회의 대표들 또는 지원자들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많은 목사들이 이 짧은 기간 동안을 이렇게 봉사했다. 4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에 이 위원회에서 2.500.000달러를 기증 받았는데 이것은 거의 다 교회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미국 성서 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도 역시 매우 적극적이어서 양쪽 군인들에게 성서를 보냈다. 1864년 성서 공회는 총 100만 부의 성서를 보급했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이 남북 군인들에게 보내졌다. 소책자 위원회(Track Society)에서는 또한 수천 부의 소책자를 군인들에게 배포했다. 많은 군인들이 군복무 기간에 처음으로 크리스챤 생활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1863년부터 1864년까지 북부군에서는 거대한 종교적 부홍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양편에 참가한 대부분의 군인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비도덕적이고 야수적이 되어버렸다.

 

모든 전쟁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도 그 결과 국민의 도덕적 생활과 영적 생활은 큰 손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교회에 대한 관심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국민을 삼키는 타락의 기간은 실패의 기간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7) 남 장로교회의 설립

 

1861년 4월 12일, 남부 연합군은 찰스톤 항구에 있는 북부 연방군의 요새인 씹터(Sumtor)를 포격했다.

 

북부 여론은 급속히 북부 연방 정부(Federal Goverment)를 밀었고 남부 여론은 남부 연방 정부를(Confederate Govermant) 지원하도록 준비했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 가운데서 샘터 요새를 포격한 지 5주가 채 안 되어 올드 스쿨총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북 장로회도 여전히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회의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선포는 피하기를 원했다. 이 총회 기간 중의 셋째 날. 뉴욕의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 박사는 ?우리가 주 연방에 헌신할 수 있게 편의를 도모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키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묵살되었다.

 

며칠 후에, 스프링 박사는 또다시 북부 연방의 대의(大義)에 교회를 위탁할 것을 결의하도록 주도했다. 이 무렵 전국에서 신문을 통하여 총회의 협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과연 이 영향력 많은 교회가 북부 지역에서 급속히 구체화되고 있는 연합 취지에 도덕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인가 아닌가? 이러한 분위기와 대중 여론의 압력 하에 ?스프링 결의안?(Spring Resolution)이 5일 간의 논쟁을 거친 후 채택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올드 스쿨 교회의 남 장로회는 총회의 이러한 조처를 탄핵했으며 그 결과 ?미주 연방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조직하기 위해 탈퇴했다. 이 교회는 1861년 12월 4일 죠지아 주 어거스타에서 첫 번 모임을 가졌다.

 

1864년에 이 교회는 장로교회의 연합대회(United Synod)와 병합했다. 이 연합대회는 북부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부에서는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을 연합하는 것이었다.

 

1865년 전쟁이 끝나자, 이 병합된 남부 교회는(Southern Church) 이것의 이름을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고 하였다.

 

1869년 켄터키주의 올드 스쿨 대회 중 일부와 1874년 미주리 주의 올드 스쿨대회 중 일부는 이 남부 교회에 가담했다. 오늘날 미국 남 장로교회(南長老敎會)는 세계의 장로교회 가운데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교리의 보수성과 전도의 열정으로 유명하다.

 

 

4. 근대 미국 장로교회의 흐름

 

(1) 미합중국 장로교회(P.C. in the U.S.A.)

 

남북 전쟁의 참혹한 시기를 통하여 교회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전시(戰時)에는 항상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전쟁의 구름이 지나간 뒤에는 밝은 시절이 오기 마련이다. 1870년 북부의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대단한 기쁨 가운데 재결합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부의 장로교회들도 이러한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재결합 이후 ?미국 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맹렬히 전진했다. 그리하여 서부의 주민과 영역은 급속히 증가됐다.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는 밖으로 가정 선교정책으로 대 서부운동(Great Western Movement)을 시작하였다. 교회는 또한 해외 선교 정책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해외 선교 교회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 신앙고백서의 수정

 

1903년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했다. 이 수정은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고 신앙고백의 본문 중에 세 개의 문단이 바뀌었는데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the Decrees of God)라는 장을 해설하기 위해 신앙고백서에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을 첨가하였다.

 

신앙고백 가운데 들어있는 칼빈 사상을 이 선언문이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찢어 놓은 것이었다. 수정된 신앙고백에는 또한 두 장이 첨가되었는데 하나는 성령에 관한 장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한 장이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다른 신앙고백서에 없는 장인 것이다.

 

(2) 미국 장로교회(P.C. in the U.S.)

 

남 장로교회의 1865년까지의 공식 명칭은 ?아메리카 주 동맹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 한 적도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이 명칭은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United States)로 바뀌었다. 이 교회를 우리는 미국 남 장로교회?(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라고 부르나 이것은 공식명칭이 아니다. 1865년 총회 때도 남부의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South)라고 고쳐 부르자는 데 대해 단호히 거부가 되었다.

 

 

(3)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U.P. Church in the U.S.A.)

 

신앙고백을 수정한 후 ?미 합중국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미국외 모든 장로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할 것을 제의했는데 그것은 모든 장로교회를 연합하여 하나의 ?대 미국 장로교회?(The Great American Presbyterian Church)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810년에 갈라져 나간 ?컴버랜드 장로교회?는 이러한 초청을 수락하여 1906년에 수정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미 합중국장로교회?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약 1/3의 컴벌랜드 장로교회 회원들이 연합하기를 거부했기에 이 연합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컴벌랜드교회는 근본적으로 신앙 고백에 반대하여 왔으나 이러한 반대는 1903년에 신앙고백서 수정에 의해 제거하였다고 주장했다.

 

1920년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Welsh Calvinistc Mathodist Church)가 총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합중국 연합 장로교회(Thc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1958년 5월 북부 아메리카 연합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미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가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연합 총회는 1958년 5월 28일에서 6월 3일까지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어그에서 열렸다. ?북부 아메리카 연합장로 교회?는 1858년 ?개혁 장로교회 협회?(The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와 장로교회 협회 (The Associate Presbyterian Church)가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1957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와 스코틀란드 배경을 가진 ?선교 교회?(Missionary Church)는 ?미합중국 연합 장로교회?라는 이름하에 합병하기로 가결했다. 이 연합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서 이 연합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촉진시키는 행복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는 신앙의 깊은 목적? 수행에 착수했다. 그 외의 장로회 단체는 이 연합에 관하여 초청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 연합 장로교회(the U.P.C. in the U.S.A.)는 침체되지 않고 모든 나머지 장로회에 우정 어린 손길을 계속해서 내밀었다.

 

미합중국에는 1O개의 장로교파가 총 4백 만의 교인을 갖고 있는데 이들 중 최소한 3백만 이상이 연합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미국 장로교회는 1970년 현재 38개국에 1,045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97개의 종합대학교와 단과 대학과 양성소, 221개의 중등학교, 272개의 저학년 학교와 56개의 병원과 196개의 진료소를 유지해 나가거나 후원하고 있다. 1975년 현재에는 장로교회와 관련된 52개의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이 있고 7개의 신학교가 국내에, 21개의 신학교가 국외에 있어 총 1,131명의 목사들이 700개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고 있다.

 

제9장 기타 국가의 장로교회

 

 

1. 캐나다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는 노바스코티아 지역에서 미국 혁명이 있기 전 미국에서 그리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들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1825년에 비로소 그라스고우(Glasgow) 식민 협회가 창립되어 캐나다에 오는 목사들의 후원이 되었다. 이때 온 로버트 번스(Rebert Buns)가 ?낙스교회? ?낙스 대학?을 토론토에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분열하여 자유교회(Free Church)가 형성되면서부터 캐나다는 장로교회로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1861년 ?연합 장로교?와 연합하였고 1875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연합, 캐나다 장로교회의 면모를 갖췄는데 그때 장로교 인들은 8만 8천여에 달했다.

 

서부로 개척을 하는 것 때문에 교회 또한 이동을 하였다. 그때 지도자는 로버트슨(James Robertson)이었고, 고포스(Jonathan Goforth)는 캐나다 장로교회를 해외에 널리 알린 자였다.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조나 미신 성 또는 자유주의 등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가졌으며 칼빈주의는 쇠퇴기에 접했다.

 

1925년에는 감리교, 조합교회와 합동해서 “캐나다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이때 3십 8만 중 40퍼센트는 장로교 인들이었다. 그 후 국가적인 경제 문제에 당면한 장로교회는 독자적인 재기를 원했으나 당시 상황은 신학적인 문제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낙스 대학의 브리든(W.W. Bryden)은 바르트(Barth) 전에 이미 바르트와 같은 사상가로서 영향을 미쳤다.

 

이 연합교회는 1953년에는 87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원리가 살아 있다. 이 연합교회에 참여하지 않은 보수적인 많은 목사들은 “캐나다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남았는데, 1958년에 회원이 196,096명으로 집계되었다.

 

 

2. 멕시코 장로교회

 

멕시코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에서 고무되기는 1872년부터였다.

 

당시 멕시코의 국민 인구는 약 1천 5백만 정도였는데 대부분은 스페인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는 인디안들 이었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로마 천주교 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어 과격한 반(反)로마 천주교 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 장로교회가 들어갈 여백이 생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4개의 노회가 구성된 단일 조직의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의 뒷받침을 받았다. 물론 그 중의 3개 노회는 미국 북 장로회(美國北長老會)와 연관을 가졌고 나머지 한 노회는 남 장로교회(南長老敎會)와 관련을 가졌다. 이들이 한 곳에서 모임을 가진 것은 1901년 7월 8일 멕시코시에서였다. 그때 그들의 모인 이름은 ?멕시코 장로교회 총 대회?(General Synod of Presbyterian Church of Mexico)였다. 이때 총대는 목사 44명이었고, 교인들은 5만에 이르렀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3O년간의 독재를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멕시코의 정치. 경제. 사회의 면모는 대단한 변모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멕시코 사회는 보다 교육 치중으로 성장하였으나 종교적 자유는 오로지 교회 안에서 만이었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는 다른 종파와 대화의 문을 열 대로 열었으며 그들의 성서적 부홍운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장로교회와 다른 개신교회는 자립을 하고 있으며 복음협회에 속해있고 신학교도 장로교와 감독교회, 조합교회는 합쳐서 운영하고 있으며 출판사업도 공동으로 벌이고 있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신구교의 대화가 어느 곳에서보다 앞서 있다.

 

 

 

3 . 브라질 장로교회

 

브라질에 장로교회가 들어가기는 1859년 역시 미국 장로교회에 의해서였다. 이곳 상황은 멕시코와 대동소이한데 미국 장로교회가 남북으로 갈라지자 1869년 남 장로교회에서 계속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곳 브라질의 로마교회는 유럽을 방불케 하였다. 모든 성직자들은 호의호식과 사치에 여념이 없었고 허랑 방탕하였다. 그리고 신교의 목사들이 선교사로 와서 설교를 하면 반동적인 모반을 일삼았다. 그러나 1888년부터는 원주민들의 개종이 늘어났고 그들의 불의한 행동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장로교회는 뿌리를 내려 ?브라질 대회?를 열었고 4개의 노회와 4만여 신도를 확보하였다

 

1920년대에는 7개 노회에 8만여 명의 장로교 인들을 확보하였다. 특히 브라질에는 오순절(Pentecostals)교회가 왕성하여 그들의 토착종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희?(Assembly of God)라고도 한다. 이들은 1960년대에 ?브라질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 성회를 벌였다. 1964년 통계에 의하면 1,689,000명의 신도를 가졌는데 이때 장로교회는 167,000명이었다. 1964년 현재 브라질에 있는 신교인 총수는 2,592,000명이며 구교와 합하면 4백 만에 달하고 있다. 근래 와서 구교와의 관계가 호전되고 있다.

 

 

4 . 일본 연합교회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기는 16세기 제수잍(Jesuit)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때의 일본은 외국을 향해 문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1854년부터 일본 항이 열리기는 했으나 1872년까지는 기독교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제슈잍 교단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타입의 기독교를 제공하였다.

 

일본에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오기는 화란 개혁교회, 북미 장로교회.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등지에서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그들의 국가적 특색을 나타내어 ?일본 연합 기독교회?(Union Church of Christ in Japan)의 단일체제를 용납하였다. 이때가 1877년, 유럽이나 미국의 모든 장로교회는 일본 연합 기독교회와 협동하였다.

 

일본교회가 칼빈주의 자와는 관계가 밀접하다고 보지만 그들은 서구적인 교회정책에 종속성은 갖지 않은 특색을 보였다. 1900년에는 6개 노회와 8O여 명의 목사 그리고 11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일본교회가 단일체제로서 특색을 과시하기는 1942년 전시(戰時)에 정부가 강력하게 조종한 것으로 보며 1947년에는 ?국립 기독인 협회?(Nations Christian Council)가 형성되어 구 선교협회를 대신했으며 지금에는 이것이 ?교회협의회?(Council of Churches)로 변형되어 있다.

 

 

5. 중국 장로교회

 

중국에 기독교가 처음 나타난 것은 635년 네스토리안(Nestorian:景敎徒) 선교사 시리아인 알로펜(Alopen)이 당나라 수도(Sian)에 도착한 일이다. 당시 경교는 상당한 진전을 보았으나 1O세기에 와서는 몽고의 강세로 경교는 13세기 이후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프란시스파 몬떼 코르비노(Monte Corvino)의 조반니 존(John)가 1294년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동행하여 들어와 6천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으나 1368년에 또다시 기독교는 박해에 의하여 사라졌다.

 

16세기에 와서 일본에 갔던 프란시스 자비엘(1594,일본)이 중국에 가기를 희망했으나 1552년에 광동 가까운 곳에서 죽고 1574년 이탈리아인 알렉산더(Alexander Varignano)가 마카오(Macao)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익혔으며 중국 문화도 습득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태오리찌(Matteo Ricci)가 1601년에 북경(北京)에 도착, 기독교가 어느 정도 공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1610년에 죽고 기독교는 또다시 1644년 말까지 명(明)나라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만주의 진(Ching) 황제는 기독교에 호의를 보내 각 지역에 선교사를 허용하였으며 이에 제슈잍들은 맹활약 후에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선교사와 2십 5만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1717년부터 황제 강휘(Kang Hsi)의 명으로 또다시 기독교는 박해 속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세기가 넘은 1840년 제슈잍들은 상해(上海)에 거점을 다시 차렸다. 이렇게 중국은 1841년까지 신교 선교사와 외국상사에게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러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홍콩을 영국에게 활양 하자 선교의 문이 낮아지게 되었다.

 

1901년 1O월 2일 상해에서 열린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헌장을 취하였다.

 

1) 대회는 중국 내의 기독교회의 연합을 진심으로 추구한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모든 종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최선을 다한다.

 

2) 그러므로 이 대회는 연합하고 조직하는 일을 위해 특별위원회를 임명할 것을 추천하며 여기에 모든 교회는 동참하고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1903년 11월 11일 위원회는 임명이 되었고 7개 교회가 상해에서 모였다. 그리고 지금의 신.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용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신앙고백(Westminster)과 요리문답집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만주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표준 신조들을 채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장로교회는 근본주의 적이면서도 매우 진취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으로 본다. 상해 대회의 융통성 있는 연합 사업으로 중국에는 여러 장로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중국교회에 기여를 하였다.

 

1905년에는 2개의 대회(Synod)에 9개의 노회에서 3만여 명의 교인들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1년 중국 공산당이 형성되었다. 1927년에는 선교사가 8,318명(신교)에 이르렀다. 교인들은 3백만 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1926년에서 1934년까지 3천여 명의 선교사를 살해하였다. 1937-1945년의 일본과의 전쟁 중의 중국교회는 또다시 박해 속에 들어갔다. 3천여 명의 선교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9년 모택동(Mao)이 의장(議長)이 된 후 1950-1951년에 모든 신교 선교사는 중국을 떠나야만 했다. 1958년 교회는 부동 자세에 들 수밖에 없었다. 1966년 교회는 홍위병(Red Guards)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비밀 집회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세대의 중국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중공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한 후 기독교 선교의 문은 서서히 열렸고 소련과 공산주의가 동구에서 무너지자 또 다른 선교의 길이 열리고 있다.

 

 

6. 호주(Australia) 장로교회

 

오스트렐리아는 17세기의 모험적인 네덜란드인들이 발견을 하였다.

 

선장 쿡(C∞k)이 1770년 이곳에 와서 1788년까지 이곳 해안선을 탐험하였다. 지금의 시드니(Sydney)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수십 년 간 잉글랜드의 무법자들이 이곳에서 자비로운 삶을 차지하였다. 귀양도 되었고 개간도 되었고 도망도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6개 주로 나눠졌다.

 

 

1) 뉴 사우스 웰스(New South Wales)의 교회

 

오스트렐리아서 제일 일찍 장로교회가 들어선 곳이다. 존 던모어(John Dunmore) 목사가 스코틀란드에서 태어나(1799년) 1878년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이곳 교회를 위하여 대단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곳 총독 토마스 브리샨(Tomas Brishane) 장로의 초청을 받아 목사로서 보다 의회와 신문에 관여함으로 당시 이민 중에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이곳에 필요한 교육자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교육에 임하는 동시에 목사들을 5명을 데리고 와서 뉴 사우스 웰스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가1826년이었다.

 

십 년 후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19명의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감독교회에서 성직자들을 대하듯 모든 보장 문제를 정부로부터 받아내었는데 그는 스코틀란드의 장로회와 잉글란드의 감독교회의 공동 보장을 얻어냈다. 그러나 새 대륙에서 구습을 너무 강조하여 두 대회로 분리되었다. 그가 속한 뉴 사우스 웰스 대회와 오스트렐리아 대회였다. 그는 후에 정부의 보조를 떠나 독자적인 노선의 장로교회를 시작하였다.

 

 

2) 갈등과 성장

 

오스트렐리아 교회는 스코틀란드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1843년 스코틀란드 내에서 있었던 논쟁에 의거하여 22명의 목사와 16개의 교회가 ?스코틀란드 국립교회?에 남았고 6개 교회가 ?스코틀란드 자유교회?로 남았다. 이런 상태가 1865년까지 계속되다가 뉴 사우스 웰스 교회로 통합을 보았다.

 

이 나라는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인구도 성장하였고 교회도 따라서 성장하였다. 이런 일은 전적으로 스코틀란드 교회의 영향이었다. 스코틀란드의 성 안드레(St. Andrew) 대학이 1881년 시드니 대학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설립을 뒷받침하였다. 이는 장로교대학이나 다름없이 호주의 교역자를 배출해 내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스코틀란드의 선교활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3) 빅토리아(Victoria) 교회

 

1851년 뉴 사우스 웰스에서 빅토리아 주가 분립되었다. 바로 이 해에 금(金)이 발라라트(Ballarat)에서 발견되었다. 황금 열풍이 몰아쳤다. 빅토리아 주의 인구가 7만 7천에 이르렀다. 3년 안에 3배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설교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교회보다 황금에 더 눈이 밝았고 마구잡이 생활로 들어가 거칠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1834년 빅토리아가 남 웰스 주에 속해 있을 때 멜보른(Melbourne) 근교 필립 항구에 정착 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처음 설교자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은퇴한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1842년 4명의 다른 목사가 가담하여 멜보른 노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 웰스 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는데 금광 때문에 장로교회의 분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1870년에 빅토리아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 이 영향은 여러 주로 번져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주 장로교회는 하나로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오스트렐리아의 6개의 교회는 하나의 총회로 묶여졌다. 그들은 또한 선교사업에 열중하였다.

 

패톤(John G.Paton) 목사는 당대에 알려진 선교사였다. 그는 또한 멜보른 대학교의 올몬드 대학(Ormond College)을 신학교의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많은 기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렐리아의 절반 이상의 장로교인들을 확보한 주로서 모든 면에 앞서 가고 있다

 

 

7. 뉴질란드 장로교회

 

184O년 스코틀랜드로부터 이민 온 대부분은 장로교 인들이었다. 그들은 수도 웰링턴(Wellington) 근교에 정착한 후 1856년에 첫 번째 노회를 조직하였다. 물론 이들의 목사들은 스코틀란드에서 왔다. 그러나 후에는 자체에서 모든 것을 자립(自立)하게 되었다. 얼마 후 노회는 8개로 늘어났다. 이 곳에는 아일란드에서 온 장로교인들도 뉴질란드 장로교회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1900년에는 96개 교회의 12만 명의 장로교인들로 늘어났다. 남쪽 지역에서는 북쪽보다 약간 늦게 교회조직이 되었는데 1848년 자유 스코틀란드 장로교 인들이 중심이 되어 1854년 목사 3명과 2명의 장로로 노회를 열었다.

 

1861년 금광이 터지자 이민의 수는 늘어났고 듀네딘(Dunedin) 대학교에서 목사 양성을 맡았다. 그러므로 국립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후예들인 북쪽 섬사람들과 자유 스코틀란드 교회의 후예들인 남쪽 섬사람들의 반목이 있었으나, 1862년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 다음에 또다시 반목하였다. 1900년대에 와서 그들은 한 총회에 다시 연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뉴질란드 장로교회로 성장하여 나갔다. 지금은 7만여 명의 장로교 인들을 확보하였다. 근래 와서 호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함께 연합하였다.

 

 

8. 남아프리카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South Africa)

 

이교회도 스코틀랜드사람에 의해서 설립되었는데 회원은 1957년에 36,807명이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 교회만큼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던 교회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인종 문제는 엄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반투족 장로교회(the Bantu Presbyterian Church)도 1923년에 설립되어 독자의 노회와 총회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남아프리카, 화란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는 65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교리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정치는 장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 교회의 회원은 대부분 화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며. 화란어로 예배를 드리고 신학교는 케이프타운(Cape town) 가까이에 있는 스텔렌바하(Stellenbach)에 있다(Dutch theological Seminary).

 

 

제10장 한국 장로교회

 

 

1.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한국선교

 

(1)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 선교 활동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 중 고둥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1887넌 가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개성, 솔내, 펑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여행은 솔내에 있는 교인들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서 솔내 교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신혼의 부인과 함께 신혼 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약 600여명의 병자를 돌아보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학을 공부한 바 있고 그의 부인은 릴리아스 호튼 의사의 미망인이었다. 이들은 1889년 4월 27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세례 배푸는 것을 금하였기에 이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부른다.

 

 

(2)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 Henry Davis)가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 (Too-rack)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되었다.

 

데이비스 목사는 먼저 한국에 도래하여 선교 사업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협의하여 부산을 중심 하여 남부지역에서 선교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부지역 등 다른 지역은 이미 선교사들이 자리 잡고 선교 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서였다.

 

당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던 게일[James Gale]선교사는 데이비스 목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긴 여행을 보행으로 하여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급성 폐렴에 천연두까지 겹쳐 소생할 가망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1890년 4월 15일 데이비스 목사는 한국선교의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별세의 보도가 호주에 전달되자 전국의 교회는 깊은 애도 속에 잠겼다. 비록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호주 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그러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고 강렬한 선교 열이 고조되어 엥겔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1907년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가 설립되자, 엥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회를 대표한 파송 교수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교회사를 주로 강의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원어를 하는 신학생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으로 강직한 일면의 성품을 보여주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엥겔 목사는 191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17년에는 경남 노회를 창설하면서 제1,2,3대의 노회장을 연임하면서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위상을 격상하였고 또한 지방교회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3)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 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John T. Under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 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 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오직 성령 충만한 성신 인으로 키워,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 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영적 훈련 면은 우수하였으나 지적 훈련 면은 빈약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남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4)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 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맥켄지는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 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새 해가 되면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2월에 황해도 솔내로 갔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연히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처럼 되었으며,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로 1895년 7월 3일 교회당을 신축하여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외국인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한국교인 스스로의 헌금으로 완공한 최초의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뜻이 크다.

 

멕켄지 목사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심 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하는 생활에 헌신하여 우상 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이렇듯이 숭고한 생활로 일관한 그가 1895년 7월 23일 너무나 무더운 여름날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사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구절이 있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 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 기고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만주간도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 선교부가 용정에 설치되었으며 은진 중학교, 명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일대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특히 간도에 설치된 제창 병원은 의료 선교 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한국망명객들이 출입하며 독립운동을 숙의 하던 장소로 유명하게 등장하였는데 병원장 마틴(Stanly F.Martin) 선교사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 솔선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3.1운동의 추진을 위하여도 상당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5) 선교부들의 연합과 구역 분할 선교

 

여러 교파의 선교 단체가 속속 도래하게 되자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 염려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들 사이에 협동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교인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아니하였다. 1890년 [선교사 연합 공의회] (United Coyncil of Missions in Korea)는 그것을 목적하여 탄생하였다.

 

창립 회합에서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의사가 의장이 되었고,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목사가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언더우드 목사와 기포드 (D,L.Gifford)목사, 그리고 알렌(H.Newton Allen) 의사 등이 참석하였다. 마펫(Samuel A. Moffett)목사는 제2차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회합은 호주 선교회의 유일의 대표인 데이비스 목사가 별세하게 되자 미국의 북장로회 만으로는 존재할 의의가 없어져 3, 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도래하게 되어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빈튼 (C.C Vinton)박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는데, 여기에는 장로회 계통의 선교사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개혁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준행 하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조직하는 것] 을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한국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전국 교회에 대한 상회의 역할을 자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회가 결코 공식적 기구는 아니었으며 다만 상호간의 친교와 상담과 조언하는 회합에 불과했고 권리 행사를 여전히 각자의 선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1893년 1월에 열린 첫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남지방에서 선교하기로 약정되었고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모든 지역에서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부산 지역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두 선교회가 함께 상주하기로 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낙동강의 이북은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2. 한국 장로교회의 조직

 

(1) 한국의 최초 장로교회 - 솔내 교회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함께 성경 번역사업과 전도 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 사업을 하던 서 상륜은 동생 서 경조와 같이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솔내(松川 ․九美浦)에 있는 삼촌 집으로 왔다. 그는 1884넌 로스 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 권의 성경을 당시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호의로 인수하여 전도 사업을 하였고. 1885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 된 사실은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솔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이며, 한국 교회 역사의 발상지라고 하겠다.

 

자립 전도를 실시하였고 몇 해 안되어 이 교회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장년을 포섭할 정도로 교세가 확창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 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2) 최초의 장로 안수와 당회 조직

 

1887년 9윌 12일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문안 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1885년 9월 27일부터 집회하였었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두 사람의 장로를 뽑았으니 백홍준과 서상륜이었다.

 

그러나 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1900년 서경조가 소래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한다. “당회를 조직하니 시내(是乃)의 아국교회(我國敎會)의 최선(最先) 장로더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서울에서는 새문안교회의 송순명 장로가 1904년 10월 2일 장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 노회 조직 - 독노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나의 노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한다. 이 독노회에서 결의한 주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1) 신학 졸업생 7명 목사 장립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서 경조(徐景昨), 한 석진(韓錫普), 양 전백(梁甸伯), 길 선주(吉善宙), 이 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 안수를 받았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사 목사들인 것이다.

 

2)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사람인 이 기풍 목사를 파송 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설립 당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간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를 받은 지 2O년의 교회가, 그것도 처음으로 장립하는 7명의 목사 중 한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l907년 부흥 운동의 결과가 이같이 확장됨을 볼 수 있다.

 

3) 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4) 대리회의 조직이다. 전국을 한 개의 노회로 묶어 놓으니 그 지역이 너무 넓어 노회가 자주 모이기 곤란하므로 종전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경상 및 전라 지방에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5)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의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 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 한 것이 좋은 예이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 총회의 조직

 

1911년까지 독노회가 모이다가 1912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의 7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키로 하고 독노회가 발전적으로 총회가 되도록 하였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회집 되었는데, 회원은 목사 52인, 선교사 44인, 장로 125인 계 221명이 회집 하였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 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 필수, 회계 방 위량(W. N. Blair), 부회계 김 석창 등이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957년에 방 지일 목사가 중공치하에서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였다. 역대 산동성 선교사는 김 영훈(金永勳), 박 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박 상순(朴商純), 홍 승한(洪承漢), 방 효원(方孝元), 이 대영(李大榮), 방 지일(方之日), 김 호순(金好淳) 등이다.

 

이것을 보면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제주도 선교를 실시하고 그후 시베리아 선교, 일본 유학생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는 첫 걸음을 딛는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을 밖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3.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1)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 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 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 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 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 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 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2)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선교 개시 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 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터 한국 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의 객척 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 교파 (이중캐나다 장로회도 포함된)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 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 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 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한국 기독교 장로회라 하였다.

 

 

(3)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가 거듭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4) 고신측과, 합동측의 정치적 분쟁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 측은 이후 교권과 지방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 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는데 이때 탈퇴한 그룹의 대표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 고려측'이라고 부른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 부심 끝에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 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 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 보수'는 호남 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 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 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 측'으로 양분된다.

 

그 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수십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똑 같은 교리와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이해나, 어떤 견해의 차이 및 갈등이 생기면 인맥 중심으로 오늘도 이합집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게다가 장로회 정치 체제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장로교회란 이름을 내건 교회나 교단들도 있는 것을 본다. 한국 장로교회의 숙제는 순수한 원래 장로회 정치 체제를 회복하고 하나로 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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