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로교(Presbyterianism) **

2007. 7. 22. 22:47교회사자료/6.장로교회사

** 장로교(Presbyterianism)  **
                                                                      김응철 목사 역
장로교는 첫째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교회적인 용어로 세 가지 교회 정치형태들(다른 두 가지는 감독교회와 회중교회) 가운데 한 형태로 정의된다. 장로교는 장로들에 의해서 치리된다. (장로는 헬라어 프레스부테로스 presbuteros에서 온 것이다.) 장로교는 둘째로 교리적인 용어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그의 추종자들의 신학의제를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더 나아가서 세계적인 교회로서 장로교는 프로테스탄트교회와 개혁교회와 동일시된다. 이와 같이 장로교의 정체성의 뿌리는 두 가지 주요 근원에서 나온다. 첫째는 신약성경의 초대의 사도적인 교회의 증언에서 유래된 것이며, 둘째는 16세기에 칼빈과 그의 계승자들의 지도 하에 진행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장로교회가 발전한 성서적, 역사적 뿌리다. 이와 같이 초대의 사도적인 교회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에서 그 성서적인 정체성이 나온 반면에, 현대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주로 16세기의 유럽에서의 그 신학적, 교회적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그 세계적인 발전과 관련되어 있다.
1.  영국에서의 장로교
영국에서의 현대 장로교의 뿌리는 존 녹스(John Knox, 1514-1571)와 16세기 후반기와 17세기 중에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의 그 역사적 발전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 시기의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은 찰스1세와 의회와의 싸움(Civil War, 1642)으로 발전했다. 이 싸움에는 장로교를 지지하거나 장로교에 헌신하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가담했다. 이 싸움에서 의회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지지했고, 신성 동맹과 조약(the Solemn Leagues and Covenant)은 1643년에 체결되었다. (잉글랜드 사람들과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의 조약이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의 군사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의 장로교 개혁 프로그램에 동의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의회의 첫 번째 행동은 감독교회 제도를 철폐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1647)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1560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과 그 신앙교리문답(catechisms)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물론 미국의 현대 장로교의 본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의 왕정복고(1660)와 새로운 의회에 의한 기도방식 통일법령(the Act of Uniformity, 1662)의 통과는 장로교 개혁의 이행에 대한 희망을 좌절시켰다. 17세기 후반기와 18세기 초반기에 잉글랜드에서의 장로교는 큰 손실을 겪었다. 하지만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장로교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는데, 그것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장로교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다. 마침내 왕위계승 혁명(the Revolution Settlement, 1688-9)은 스코틀랜드교회의 설립을 가져왔다.
2.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스코틀랜드교회(the Church of Scotland)의 발전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코틀랜드교회가 ‘모 교회’(Mother Kirk)라고 언급된다. 여러 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수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대개 신학적인 논쟁 또는 정치적인 동맹에 근거하여 국교에 반대하는 장로교가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논쟁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부유한 평신도들이 해당 지역교회의 목사를 임명하는 ‘평신도 목사임명권’(lay patronage)문제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 가운데서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토마스 챌머스(Thomas Chalmers)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로 자처하고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의 3분의 1을 이끌고 거의 모든 선교사들을 배출했던 1843년에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1874년에 ‘평신도 목사임명권’은 폐지되었고, 각 교회에 목사를 선출할 권리가 주어졌다. 1990년에 자유장로교회(the Free Presbyterian Church)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는 스코틀랜드 연합자유장로교회(the United Free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로 통합되었다. 작은 장로교회들과 단체들이 계속 남아 있지만, 가장 큰 두 개의 장로교단(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은 1929년에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교회로 통합되었다. 현재 이 교단의 교인 수는 200만 명 이상이며 영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을 이루고 있다.

장로교가 1560년에 스코틀랜드에서 6명의 목사와 35명의 장로로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는 총대 수는 이제 1,200명을 헤아린다. 스코틀랜드교회의 노회들은 점점 약화되고 있지만, 당회와 제직회가 교회의 전반적인 생활과 목회에 중추적인 것이 되고 있다. 스코틀랜드교회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경향이 있다: (1) 스코틀랜드교회의 중앙집권화. 이는 에딘버러(Edinburgh)를 중심으로 총회 위원회와 사무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데서 입증된다. (2) 지난 20년 동안의 스코틀랜드교회의 교인수의 감소현상. 하지만 반전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3) 스코틀랜드교회와 독립운동과의 관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를 독립시키려고 추구한다.

스코틀랜드교회는 기독교 전체는 물론 특히 장로교의 역사적, 신학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위대한 신학교육기관과 학자들이 스코틀랜드교회와 관련이 있다. 신학교육기관으로서는 에딘버러, 애버딘(Aberdeen),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 글라스고(Glasgow)가 있다. 유명한 학자로서는 도날드 베일리와 존 베일리, 토마스 토렌스와 제임스 토렌스 등이 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선교사업(특히 중국과 인디아)과 20세기 에큐메니칼운동에 깊이 관여해 왔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선교사업과 에큐메니칼운동에 앞장 서 왔다. 셋째로, 스코틀랜드교회는 다른 나라에, 특히 아일랜드와 미국과 캐나다에 장로교를 ‘심는’(planting) 도구가 되어왔다.
3. 아일랜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옛 아일랜드 지방인 얼스터(Ulster)의 이민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그때 영국 의회는 물론 어려운 사회여건도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로 하여금 아일랜드 북부지방에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아일랜드 장로교 설립에 스코틀랜드교회의 영향력이 과소 평가될 수 없다. 스코틀랜드교회가 아일랜드에 이민해간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노회가 1642년에 조직되었고 1659년까지 5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회의 결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그리고 스코틀랜드)로부터의 미국에로의 대량 이민이 생겼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사람들은 초기 식민지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잉글랜드와의 식민지의 독립 전쟁(the Revolutionary War)과 미국에서의 장로교 정착(아래 참조)이 이루어졌다.

18세기 중에 아일랜드장로교회에서 발생한 가장 큰 논쟁 가운데 하나는 보수주의자들(, 구좌파, ‘Old Lights')과 급진적 자유주의자(신좌파, ‘New Lights’)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적 갈등이었다. 논쟁의 중심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동의 문제였다. ‘신좌파’와 얼스터 노회의 비동조자들이 우세했지만, 그 갈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해 동조하는 여러 교회들과 탈퇴 노회들(아일랜드-탈퇴 장로교 노회)을 생기게 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양대 노회는 영국을 휩쓸었던 복음부흥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얼스터 노회(신좌파 장로교)의 분위기는 더욱 더 정통적, 복음적이 되었다. 1820년대에는 내적 갈등을 일으켰지만 1835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그 갈등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두 노회 사이에 새로운 협력정신을 낳게 했다. 특히 세계선교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인구가 급성장하던 아일랜드의 복음화 과제 앞에서 그러했다. 1840년경에 얼스터 노회(the Synod of Ulster)에는 292개 교회, 아일랜드(탈퇴) 노회(the Synod of Ireland [Seceders])에는 141개 교회가 있었다. 이미 1830년대에 두 노회의 연합을 위한 많은 토론과 제안이 이루어졌고, 이 연합과정은 1840년 6월, 두 노회가 벨파스트(Belfast)에서 아일랜드재건장로교회(the reconstituted Presbyterian Church in Ireland)로 통합됨으로써 완수되었다.

1921년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아일랜드장로교회는 특히 북아일랜드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장로교회는 특히 1960년대에 시작된 ‘분쟁’ 문제로 안팎으로 계속 고심하고 있다. 최근에 열린 여러 번의 총회는 교리논쟁, 에큐메니칼 관계(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 그리고 (특히 정치적, 문화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집중되었다.
4. 잉글랜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통합(1707)에 따라 잉글랜드 장로교에 현저한 갱신이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사람들이 잉글랜드의 주요 도시들에 정착하고 독립된 장로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교회들은 스코틀랜드교회의 한 노회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총회는 그러한 건의안들을 각하시키고 잉글랜드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England)에 들어오도록 권장했다. 이러한 과정은 1836년에 시작하여 1942년에 끝났다. 독립된 교회들이 일찍이 1783년에 설립된 노스엄버랜드(Northumberland) 노회로 들어갔다. 잉글랜드장로교회에는 연합장로교회 잉글랜드 노회(English Synod of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에 속하는 다른 여러 조직체들이 있었다(1847년과 1863년). 1876년에 잉글랜드장로교의 두 분파는 잉글랜드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로 통합되었는데, 260 교회, 10개 노회, 5만 신도를 헤아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잉글랜드장로교회는 350 교회, 6만 신도로 성장했다. 많은 목사들이 스코틀랜드교회와 아일랜드장로교회에서 청빙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장로교회는 1899년 이래 캠브리지 대학교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Westminster College, 본래 1844년 런던에서 설립)로 알려진 신학교에서 나름대로 목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교회의 저명한 신학자로서는 존 오만(John Oman), 파머(H.H. Farmer), 콜린 군톤(Colin Gunton)이 있다. 잉글랜드교회는 세계선교(특히 중국과 인디아)와 에큐메니칼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72년에 잉글랜드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 통합하여 연합개혁교회(the United Reformed Church, 약칭 the URC)를 조직했다. 연합개혁교회는 개혁전통의 핵심교리들을 주장하면서 장로교정치의 개정된 형태를 나타냈다. 목사와 장로는 연합개혁교회의 여러 위원회의 회원이 된다. 총회의 지도와 안내 하에 교회를 감독하는 12명의 지역 노회장들이 있다. 최근에 연합개혁교회와 영국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 in England) 사이에 통합을 위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잉글랜드 내에 9개 교회로 구성된 1개 노회를 가지고 있고, 웨일즈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Wales)는 잉글랜드 내에 50개 교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웨일즈방언을 말하는 교회들이다.

영국장로교회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 수가 감소함에 따라 논쟁점이 되고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전면에 나타나 있다: 첫째로 잉글랜드교회와의 관계에서 동조하지 않는 교회들의 역할에 관한 문제가 있다. 둘째로 첫 번째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연합장로교회와 (감리교와 같은) 다른 교파와의 통합 시도에서 생기는 장로교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5. 미국에서의 장로교
미국 장로교의 뿌리는 일차적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사람들의 북아메리카에로의 이민에로 소급해 올라간다. 미국 식민지에 맨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England Puritans)로서 그들은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정착했다. 청교도들은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싸움(the Civil War, 1642-46, 1648-52)이 일어나기 직전인 1641년에 잉글랜드를 떠나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잉글랜드교회를 ‘정결하게 보존’(purify)하려 했고, 잉글랜드 왕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청교도들은 세상에 대해 기독교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꿈을 안고서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과 실천에 있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하게 훈련된 삶의 스타일을 표방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를 위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뉴잉글랜드로 알려진 장소에 집중적으로 정착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사람들의 이민이 미국 장로교의 두 번째 뿌리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사람들이 두 번 파도처럼 이민해 왔다: 첫째로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까지, 둘째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민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사람들도 뉴잉글랜드에 정착했지만, 그들은 남부와 서부로 이주하여 현재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에, 그 후에는 오하이오와 (노스 &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정착했다. 장로교도들이 초기 아메리카에 사상적, 문화적, 정치적 구조를 제공해 주었다.

1706년에 필라델피아 노회(the Presbytery of Philadelphia)의 조직으로, 미국장로교는 그 형태와 내용에서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교회의 정통성에 관심을 가진 필라델피아 노회는 17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미국장로교의 교리적 표준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 장로교 내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로 성직자와 평신도 가운데서의 영적 경건의 역동성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되었다.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의 주도로 장로교 목회의 ‘회심’(conversion)에 대한 촉구 운동이 벌어졌다. 목사들이 신학교리에 있어 정통성을 유지하고 기독교적 경건에 있어 열성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740년대 초에  ‘부흥운동가들’(revivalists) 또는 ‘신파’(New Side) 장로교도들(길버트 테넨트, 조지 화이트 필드 George Withefield,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과, 참된 기독교의 증거로서 교리적인 정통을 표방하는 ‘구파’(Old Side) 장로교도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신파가 우세했고, 부흥운동가의 설교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새로운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며, 젊은 성직자들이 훈련을 받고 신파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사회제도들이 확립되었다. 신파는 구(舊)세계로부터 신(新)세계로 온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더 잘 아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신파는 개인적 경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여 종교적 체험이 주류(主流) 미국장로교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83)에 이르러 장로교도들은 잉글랜드 왕에 대한 충성이냐, 아니면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독립하는 혁명정신에 대한 충성이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하지만 「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이 발표되고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장로교도들은 혼연일치가 되어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장로교의 저명한 목사이자 학자인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많은 장로교도들이 「미국헌법」(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작성에 참여했다. 장로교회는 전쟁 이전 식민지들에서 잉글랜드교회로부터 독립하려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정책을 지지했다. 1787년에 독립전쟁과 「미국헌법」의 채택에 뒤이어 장로교회는 종교적 자유의 선언을 채택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장로교의 입장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 세워진 미합중국의 종교적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主)라는 것, 신앙과 실제에 대한 모든 종교적 문제에 있어 개인적으로 판단할 권리에 대한 한 표현으로서 양심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독립전쟁을 전후하여 장로교가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급성장하자, 그 성장에 부응하도록 조직적 구조가 변모했다. 1788년에 미국장로교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가 조직되고, 1789년에 제1차 총회가 개최될 수 있었다.

미국이 성장하고 19세기 초반기에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이동하자, 장로교회는 미국 개척자들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회중교회 교도(Congregationalists)들과 협동 플랜을 세우고 관련을 맺었다.(1801년 연합 플랜, Plan of Union)  이 시기에 장로교 성직자 교육에서 많은 발전이 이뤄졌다. 하버드대학은 교리적 정의의 표준에 대한 헌신을 배격하고 나중에 유니테리언파(unitarianism)의 중심지가 되었다. 장로교 복음주의자들은 개혁교회 및 장로교 전통의 본질적 교리를 신봉하는 ‘정통적인’ 성직자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1808년에 앤도버 신학교(Andover Seminary)를 세웠다. 그러나 연합 플랜에 대한 혐의(저들은 이 플랜이 정통과 경건을 침식시킨다고 보았다)와 하버드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에서 신학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다른 내적 분쟁이 있었는데, 이 분쟁은 1837년에 연합 플랜에 반대하는 ‘구학파’(Old School)와 연합 플랜을 지지하는 ‘신학파’(New School) 사이의 분열로 발전했다. ‘신학파’는 1836년에 뉴욕 시에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한 반면에, ‘구학파’는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Seminary)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프린스턴신학교는 프린스턴대학(Princeton College)으로부터 독립하여 성직자 교육을 위한 자립기관이 되었다.

미국장로교 역사 속에서 프린스턴신학교의 역할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프린스턴은 진정으로 ‘프린스턴 신학’(Princeton theology)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미국 신학교육의 중심지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기에 프린스턴 신학교와 관련된 신학자들로서는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아키발드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d, 1851-1921), 그레샴 메첸(J. Gresham Machen) 등이 있다. 최근에도 프린스턴 신학교는 존 맥케이(John Mackay), 제임스 맥코드(James McCord), 브루스 메츠거(Bruce Metzer) 등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장로교에서 구(舊)학파와 신(新)학파 사이의 분열은 19세기 전체를 통해서도 계속되었다. 캔터키 주 컴버랜드 노회(the Presbytery of Cumberland)가 총회로부터 떨어져나가 독자적으로 기독교회(그리스도의 제자교회 Disciples of Christ)를 세웠는데, 그 교인 대다수가 장로교도들이었다.

노예제도 문제가 그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미국 북부 구(舊)학파 지도자들이 남부 장로교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예제도를 정죄하는 데에 찬동하지 않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구(舊)학파와 신(新)학파 사이에는 일종의 ‘양해’가 이뤄졌다. 하지만 미국 북부에서 신(新)학파는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점차 더욱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남부 동맹(the Confederate States of the south)의 철군에도 불구하고 1865년에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남부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1837년의 분열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여 1870년에 미국장로교회가 재설립되었다.

19세기 전체와 20세기 초반에 뉴잉글랜드와 그 밖의 지역의 많은 장로교도들은 자신들을 유니테리언파와 동일시하거나 신(新)학파와 동일시했다. 따라서 신학적, 교리적 논쟁이 지속되었다. 특히 성서의 권위, 성서해석에서의 역사-비판적 방법의 사용 문제, 장로교 전통의 본질적 강령들에 대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들은 더 많은 분열을 가져왔는데, 이 당시에는 ‘근본주의자들’(프린스턴신학교의 그레샴 메첸이 주도)과 ‘근대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1936년에 메첸은 독립 해외선교국을 세우고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는 존 칼빈(John Calvin)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충실하고자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진행된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장로교회는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장로교 내에 구학파와 신학파의 분열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증거가 분명했고, 특히 교회가 미국 현대사회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장로교는 또 다른 중요한 성장기를 맞이했는데, 그 성장은 주일학교운동, 세계복음전도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장로교는 신도수의 급격한 감소를 겪게 된다. 사회문제, 정치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은 격렬했고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교회의 정치화가 나타났다. 특히 전쟁, 평화, 임신중절, 성적인 삶의 스타일, 인종문제, 부와 빈곤, 여성의 권리, 종교간의 대화,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관계에서 그러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 내에서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다. 장로교회 신조서와 신앙고백서는 11개의 신조, 신앙고백, 교리문답, 선언문으로 늘어났다. 그 대부분은 초대교회로부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거쳐, 1934년의 독일의 바르멘 신학선언(the Barmen Declaration)을 포함하고, 1967년의 신앙고백서, 1991년의 간략한 신앙선언문을 포함했다.

현재 미국에는 9개 장로교단이 있다. 본질적으로 그 교단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장로교회들은 강력한 유럽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2. 장로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합병과 영합의 결과였다.
3. 장로교회들은 교리적, 교회론적, 정치적 분열의 결과이다.

미국장로교의 대다수는 1983년에 미국 남부 연합장로교회(UPCUSA)와 미국 북부 장로교회(PCUS)의 합병에 의해서 생긴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CUSA)에 속해 있다. 미국장로교회(PCUSA)의 교인수는 대략 300만 명이다. 다른 주요 장로교단들은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 아메리카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PCA), 복음주의 장로교회(the 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EPC) 등이다.

장로교의 미래는 장로교인수의 지속적인 감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교인수의 지속적인 감소는 미국의 다른 주류 교회들(특히 감리교와 감독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초점은 기독교 일치를 향한 에큐메니칼 운동에의 참여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방식의 발전, 그리고 미국 전체 사회 내에서의 교회의 역할에서 나타날 것이다.

1988년에 미국장로교회(PCUSA)는 교단본부를 뉴욕 시에서 캔터키 주의 루이스빌(Louisville) 시로 이전했다. 교단본부를 옮기면서 교단을 재조직하고 탈(脫)중앙집권화를 감행했다. 이것은 미국장로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교인수가 감소하는 실제의 여파를 실증한 것이었다. 장로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변화하는 미국과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교회가 더욱 더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영적인 지도와 영적인 갱신에 대한 폭넓은 요구와 갈망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가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와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가 계속해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심사에 열중한 나머지 현대 미국의 영적이며 신학적인 문제들을 소홀히 할 것인가?

미국 내에서의 장로교의 미래가 어떻게 되더라도, 미국에서의 장로교의 문제가 주로 구파/구(舊)학파와 신파/신(新)학파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이 논쟁은 계속 되었으며 각 파는 때와 장소, 지도력에 따라 서로 우세함을 주장해 왔다. 이것은 미국의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앞으로도 분열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미국장로교회의 교인수의 지속적인 감소와 지속적인 분열이라는 빛에서 볼 때, 최근 수십 년 동안 우세했던 신(新)학파의 영향력이 소멸될 것인가? 그리고 구(舊)학파가 미국에서 강력한 영적, 사회적 증언을 갖추는 방식에서 장로교를 소생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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