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설교론

2010. 12. 24. 01:13목양자료/2.설교자료

수 설

 

 

 

 

 

 

 

정 인 교 지음

 

 

목   차  

 

1장 고전적 찬송설교

 1.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2. 찬송설교의 작성

 3. 찬송 설교의 실제

 

2장 현대적 찬송설교

 1. 현대적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2. 현대적 찬송설교의 작성

 3. 현대적 찬송설교의 실제

 

3장 역할 설교

  1. 역할설교의 개념적 이해

  2. 역할설교의 작성

  3. 역할설교의 실제(1)

  4. 역할설교의 실제(4)

 

4장 스킷드라마(Skitdrama) 설교

  1. 스킷드라마 설교란 무엇인가?

  2. 스킷드라마 설교의 작성

  3. 스킷드라마 설교의 실제

 

5장 낭독극 설교

  1. 낭독극 설교란 무엇인가?

  2. 낭독을 위한 대본

 

6장  대화 설교

 

7장 2인 대화 설교

  1. 설교의 성격

  2. 설교의 준비와 진행

  3. 설교의 실제

 

8장 질의식 대화 설교

  1. 설교의 성격

  2. 설교의 작성

  3. 설교의 실행

  4. 질의식 대화 설교의 실제

 

9장 영상설교 - 연구 논문

 

부록: 오후예배 살리기

 

 

1장 고전적 찬송설교

 

 1.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찬송설교(Liedpredigt)라는 개념은 경배와 찬양 그리고 열린예배의 영향으로 우리 강단에 익숙한 설교형식이다. 그러나 본래 찬송설교에 대해서는 그리 높은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게 사실이다. 원래 찬송설교란 르네상스시대부터 유럽강단에 자리잡아온 방식으로 설교의 본문을 성경대신 특정한 찬송가로 잡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사순절 기간이나 교회의 축제절기에 행해지는 전통이 있었으며 지금도 이런 경향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설교하면 성경의 일정부분을 본문으로 잡는 것에 익숙한 우리 실정이고 보니 찬송가를 본문으로 설정하는 방식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찬송이란 무엇인가? 말씀으로 훈련받은 한 신앙인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 혹은 그의 절박한 상황 또는 기쁨의 상황 그리고 잔잔한 일상가운데 감동된 내용을 가사화 하여 거기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성경말씀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찬송가사의 바탕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기초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삶에서 체험한 것이고 보면 이미 신적 차원이 인간의 차원에서 수용되고 경험된 것이 찬송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찬송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이미 한 단계 적용되고 경험되고 이해된 상태이기 때문에 간은 성상을 지닌 회중들이 수용하는데 있어 훨씬 유리한 장점을 지닐 수 있다. 동시에 설교에 회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설교보다 찬송이 가지는 정적인 터치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하는데 큰 장점을 가진다 할 수 있다.

 

 

2. 찬송설교의 작성

 

 찬송 설교는 찬송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설교보다 회중의 정적인 자극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만큼 그 작성에서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기 마련이다.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찬송설교는 특정한 찬송을 설교본문으로 설정한다. 즉 성경 대신 찬송가 한 장이 설교본문이 된다. 어찌보면 설교본문은 곧 성경이라는 도식에 익숙해 있는 입장에서는 생소한 것이 아닐 수 없고 일부 보수적인 회중들 입장에서는 찬송설교의 본문 설정에 극력 반대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설교 방식은 우리에게 설교를 전해준 서구 교회에서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즐겨 사용해온 방식이다. 또 설교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상당 기간 동안 본문없는 설교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원론적인 면에서 찬송이란 한 신앙인이 자신의 삶 한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 혹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말씀이 같은 성정을 가진 한 인간의 삶을 통해 한 번 적용되고 걸러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찬송의 가사는 각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담고 있기 마련이며 그 찬송이 계속 불려 지는 한 그 찬송이 담고 있는 신학 역시 그대로 보존되어질 수 밖에 없다. 일반 신학이론이 부침을 계속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찬송은 그 어느 장르 보다도 신학의 보관함 구실을 톡톡히 한다고 볼 수 있다.

 설교자는 본문이 찬송가 인 만큼 찬송가의 가사로부터 메시지를 추출해 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본문과 씨름하던 그 수고를 이제는 찬송가사로 옮겨야 한다. 동시에 설교란 언제나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펼쳐나가는 것이므로 대개 3-4절의 가사로 이루어진 찬송가사를 놓고 어떻게 추출한 설교메시지를 디자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둘째 특별히 찬송설교 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찬송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설교에서 66권의 성경이 이론적으로는 모두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찬송 역시 이 일반룰의 적용을 받는다. 전술한 것처럼 찬송이 한 신앙인의 체험을 전제한 것이라면 가급적 설교에서 회중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사연'을 지닌 찬송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찬송가사로부터 메시지가 추출되지만 그것을 작시한 작사자의 신앙체험은 이 메시지의 경험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평범하지 않은, 회중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더욱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맹인이면서 동시에 농아였던 3중의 중증 장애자였던 패니 크로스비가 작시한 찬송들은 그 어떤 곡보다 진한 감동과 신앙의 참 의미를 회중에게 전해 줄 수 있다.

세째 이러한 두 가지 사항 즉 메시지 추출과 작시자의 독특한 체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했다면 이제 찬송이 지닌 특징을 최대한 살려 설교를 어떻게 설교를 진행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대개 찬송이라는 것은 가사와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찬송을 노래하기도 하고 그 리듬만을 듣기도 한다. 이런 특징을 기초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방식을 설교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a.. 설교자와 온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경우이다. 설교자의 의도에 의해 혹은 설교의 진행에 맞추어 찬송 전체를 부를 수도 있고 특정한 節만을 부를 수도 있다.

b. 설교자 혹은 회중 가운데 한사람을 지정하여(미리 약속된 인물을 의미) 독창하게 하는 방식이다. 또는 교회에 다양한 중창단이 조직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

c. 찬송의 일정한 부분을 낭독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맡을 수도 있고 회중이 참여할 수도 있다. 만일 다같이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 피아노 오르간 혹은 기타 등 악기주자와 미리 약속하여 낭독에 음악을 깔아주는 것도 전달에 효과적이다.

d. 피아노나 오르간 혹은 첼로나 바이올린 등 교회 형편에 따라 가용한 악기를 동원, 연주자로 하여금 그 곡을 연주하게 하여 찬송이 가지는 감미로운 음률만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제 요소들을 적절히 설교에 배치함으로 설교 진행의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며 정적인 전달의 효과를 높일 수 있게 된다.

 

 3. 찬송설교의 실제

 

제목: 그대 평생의 길!

본문: 찬송가 470장

 

관찰력이 있는 분들은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뭐 하나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으레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잡는 성경봉독이 빠졌는데 그것은 결코 사회를 보는 분의 실수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찬송설교(Liedpredigt)라 불리우는 전혀 새로운 설교의 한 장르를 소개하려고 합니다.아니 그런 설교도 있느냐? -. 물론입니다.

 찬송설교는 우리에게 무척 낯선 방식입니다마는 그러나 이미 르네상스시대에 생겨나서 오랜동안 서구 교회에서 사랑받아온 설교방식입니다. 찬송설교에서는 성경대신 특정한 한장의 찬송을 설교의 본문으로 잡습니다. 설교의 역사를 보면 본문이 없는 설교가 자리잡았던 시대도 있었으니까요.

찬송이라는 것은 한 신앙인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서 그의 신앙고백을 가사와 음조에 실어 내놓은 것이거든요. 그래서 성경 말씀이 한 인격을 통과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 삶에 가깝고 감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설교의 본문은 찬송가 470장입니다. 우리 다같이 470장을 찬송하시겠는데 1절은 다같이 2절은 여성 3절은 남성 그리고 4절은 다같이 - 그런 방식으로 부르겠는데 자기 파트를 찾아서 부르실 수 있는 분은 그리 해주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470장을 온 성도가 합창)

 어떻습니까? 가사의 내용도 평화스럽지만 멜로디 자체도 마치 석양이 뉘엿 뉘엿 넘어가는 황혼에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위에 배 한척이 한가롭게 떠있는 듯한 평화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나같이 바라는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런 그림이겠지요. 그걸 한마디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평안'(2번) - 평안일 겁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람이 언제 노래가 절로 나오느냐 하면 마음이 평안할 때입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사람을 보면 영락없이 별걱정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그때도 노래합니다. 주로 기쁨 평안 행복... 노래는 주로 그런 단어들하고 연결되어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사람 죽은 것을 애도하는 조가라는 것도 있질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초상집에서도 음악은 울려나오니까요. 그러나 조가가 어디 노래입니까? 애인한테 발로 채여 술에 절어 부르는 게 어떻게 노래겠어요?그거야말로 비탄이요 한탄이요 푸념이요 절규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노래가 아닙니다. 요즘 가정들을 보세요. 기껏 해야 너 댓명 정도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열 댓명이 모여 살던 그 시절 보다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몇 명되지도 않는 가정인데 서로 제멋대로 입니다. 부부지간에 서로 사랑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부자지간에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부부 싸움 하고 남편 밥도 안차려 주고 예배에 간 아내가 있다 칩시다. 가서 열심히 찬송은 부르겠지요. 그러나 그 찬송이 진정 찬송이겠어요? 적어도 그런 노래와 찬송은 전혀 연결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노래와 찬송이 죽어있는 집이 어디 한 두 군데이겠습니까? 여러분들 사시는 집도 장담할 수 없잖아요? 가정의 달이라는 오월에도 쌈질하는 부부들은 여전히 쌈질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망가져 내팽개친 시계처럼 그렇게 널려 있는지요.

 가정은 그렇다 치고 그럼 우리 사는 사회는 살 맛 나는 사회냐? - 제가 언젠가 "18초마다 당신은 위험하다"라는 신문기사 말씀을 드렸지요? 우리 나라에서 살인 사건은 9시간 5분마다 한 건이 발생하고 강도사건은 2시간 23분마다 한 건 강간사건은 1시간 28분마다 한 건, 절도 사건은 5분 49초마다 폭력사건은 2분 19초마다 한 건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18초마다 이 나라 어디에선가는 살인이든 강간이든 절도든 폭력이든 그 어떤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이거든요. 한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는 인원이 우리 나라에서만 연 60만명을 넘어 전주시 인구가 일년마다 교통사고로 죽거나 장애자가 된다 그 말입니다. 제가 취재기자처럼 사건 사고의 현장만을 말했지만 어떻게 고통이 이런 종류만 있겠어요?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배신당하는 고통, 인간관계가 어긋난 쓰라림... 일일이 열거하자면 하루가 모자랄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이게 우리 사는 현장이에요. 제가 너무 비관적인 말만 했나요? 아니에요. 어린 아이들이 처음 유치원 갈 때 '차조심해라' 그 말을 들으며 인생을 시작해서 나이 60이 되어 집을 나설때에도 '차조심 하세요' -  그 이야기를 듣고 사는게 인생입니다. 평안이 없어요. 다들 긴장과 남모르는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 굳어지고 말이 거칠어지고 태도가 냉냉해지는 것을 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우면 신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불평하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습니다. 고통이 오면 절규하고 고난이 오면 불평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사는 모습입니다. 집안이면 집안 사회면 사회 직장이면 직장... 전부가 평안이니 행복이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멉니다. 당연히 찬송이니 노래니 하는 단어들하고도 담을 쌓게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바라보다가 오늘 찬송을 대하면 참 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가 별세계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자, 이 시간 우리 다시 한번 아름다운 첼로의 선율로 이 찬송을 들어봅시다.

                  (첼로로 1절만 연주)

 어떻든 가요? 험악한 이 세상과 맞지 않지요? 아마 어떤 분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정말 인생의 행복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일거야.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는 그 어떤 행복한 상황가운데 있었던 사람일 거야" -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게 보이는 이 찬송, 평화로움이 감도는 이 찬송의 밑바닥에는 그러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슬픈 사연이 숨기워 있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작시한 사람은 게이츠 스패포드라는 교수입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스패포드 교수는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의 회계집사요 주일학교교사였습니다. 그런데 1873년 일어난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무디교회가 전소되어 버렸고 당시 사업을 하던 스패포드의 사업역시 파산의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니 재정집사로서 불타버린 교회를 재건하랴 불황에 빠진 사업 정리를 하랴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부인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더욱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마침 주치의가 부인의 건강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게 좋겠다는 권고도 있고 해서 네 아이와 함께 부인을 여행길로 떠나보냈습니다. 스패포드를 뺀 온 가족이 '비르두 아베르'라는 초호화 여객선을 타고 1873년 11월 15일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1주일을 잘 순행하던 이 여객선이 11월 22일 새벽 2시 영국의   '록키안호'와 정면충돌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이타닉 영화의 비극적 장면처럼 그 여객선은 채 30분도 되지 않아 226명의 목숨을 실은 채 대서양밑바닥으로 가라 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아비규환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도 나도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스패포드 부인은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아이들의 옷소매를 잡고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랑하는 네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주세요".

그러나 그 기도도 헛되이 아이들은 하나둘 차디찬 대서양 물 속으로 사라져갔고 스패포드 부인만 기절한 채 록키호의 구조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패포드의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이런 재앙이 연이어 들이닥칠 수 있단 말인가?'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으로 간 스패포드는 부인을 데리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대서양 복판을 지나는데 선장이 이 부부에게 찾아와 이런 말을 합니다. "스패포드씨, 지금 우리는 당신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참고 참았던 슬픔과 웬지 모를 분노가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랐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홀로 선실로 돌아온 스패포드는 그 터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밤새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안겨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원망과 애원 좌절과 분노로 밤새 몸부림칩니다.

 얼마나 됐을까- 선창너머 먼동이 터오를 무렵 이상하게도 스패포드의 가슴에 일던 분노의 격랑이 가라앉으면서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여러분!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찬송이 이런 애끓는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피아노 반주시작) 이 찬양 1절의 원가사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정해진 낭독자 낭독) "평화가 강같이 내 길을 따를 때나 슬픔이 파도처럼 굽이 칠 때, 내 운명이 무엇이든지간에 주께서 "평안하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라고 가르쳐 주시네 -"

참 대단하지요? 스파포드 가정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게되는 불화라든지 반목이라는 것은 복에 겨운것들에 불과합니다. 불행 불행해도 스패포드의 불행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이런 경우 스패포드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간다 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평안하다. 평안하다"라니요. 믿음이 없는 상식으로 보면 이건 둘중의 하나입니다. 충격으로 정신이 돌았든지 아니면 아주 지독한 독설을 그런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이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신앙의 도리를 배울때에 불행이면 불평하라, 행복하면 웃어라 - 그리 배우셨던가요?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위대한 말씀이 여러분이 갖고있는 성경에는 빠져버렸습니까? -

예수 믿는 이유가 언제나 인생이 순탄하기만을 바라는 부적심리 때문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종교를 택해도 정말 잘못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은 편편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골고다로 이르는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자식들 다 죽고 난 뒤 스패포드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정신이 돌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 상식의 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술입니다. 신앙으로 들어와야 신앙의 깊이를 체험한 자들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비밀암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한 음성으로 2-3절의 가사를 함께 읽어 보실까요?: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서 다 씻으사 힌 눈보다 더 정하겠네"

믿음이 무어냐 하면 불 신앙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전쟁을 보게 합니다.

  우는 사자 같이 광명한 천사같이 간교한 뱀처럼 사탄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자가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믿음은 우리로 보게 합니다. 목욕하면 깨끗하다! 이런 상식 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얼마나 지독한 죄의 냄새가 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마는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일년 365일 목욕탕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고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 땅의 지혜 있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어려움이 올 때 그들이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그 똑똑한 사람들이 운수와 재수 일진을 믿을 지언정 사탄은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치욕입니다. 오히려 고난의 순간이 오면 다른데서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갖고,... 사는 것은 전쟁이려니... 이기는 게 승리임을 신앙처럼 믿으며 눈에 불을 켜고 삽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절대 양보하면 안된다. 옆사람을 타고 누르더라도 어떻하든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  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쌓아놓고는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이리 말합 니다. "이리 살아야 평안한 거야!"(2번) -

  물론 그것들이 가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핍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평안일까요? 싸워서 쟁취하는 풍요가 진정한 행복일까요? 그렇다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놓고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자초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일까요? 악을 밥먹듯 행하는 사람이 아무런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해서 그것을 진정한 평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님이 포기하고 악한 사탄이 장담한 평안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그 누군가가 내 무덤엘 와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꽃 한송이 바치도록 삶을 사는 것도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 영혼의 마지막 안식처가 하나님 없는 곳이라면 그 평안 역시 진정한 평안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거룩한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생으로 인도하는 평안을 보장할 수는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날, 그분 앞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그것이 진정한 평안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이 진리 위에 서있던 스패포드는 그래서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한다면 여러분 들 역시 스패포드가 했던 고백을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피아노 반주 및 낭송)

'내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는 더 이상 담당할게 없다는 것, 아,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하고 찬양하라 주여 내 믿음을 보게 될 날을 서두르소서 두루마리처럼 구름을 접으시고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 주께서 강림하시리니 그렇다해도 내 영혼은 평안합니다 -

우리 마음을 모아 3-4절을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함께 찬송)

 

2장 현대적 찬송설교

 

 1. 현대적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찬송설교에 '현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변화된 세계상을 반영한다는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이미 서구 교회에서 사용되던 17-19세기에 만들어진 찬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 찬송가는 시기적으로 볼 때 이미 지나간 과거의 곡이며 만일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면 골동품으로 취급받을 수 있을 만큼 시대적 감각에서도 맞지 않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서구 교회에서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찬송가를 구시대적 유물(?)로 간주하여 현실과 괴리된 지루한 설교, 교회의 대 사회 적응성의 실패 등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은 지 오래이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 찬송가 외에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새로운 찬송 및 복음성가만을 새롭게 엮은 부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게 서구 교회의 실정이다. 우리의 경우도 교회의 내일을 이끌고 가야하는 청년층 및 청소년층에서는 기존 찬송가보다는 CCM(Contempolary Christian Music)계열의 복음성가를 즐겨 부른다. 소위 권위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찬송가의 고수가 과연 이들이 주역이 되었을 때에도 오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하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함으로 그 활용의 폭을 넓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은 이런 제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 의해 작사작곡 된 곡이 다수를 차지함으로 문화와 정서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삶에서 만들어진 경험과 신앙고백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신앙 체험을 글로 옮긴 후 그것의 빠른 전파를 위해 당시 유행하던 일반 곡들에 가사를 붙인 콘트라 팍타(Contrafacta) 형식의 찬송이 여전히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현대적 찬송 설교라는 것은 시대성뿐 아니라 형식성을 문제 삼는다. 고전적인 찬송 설교가 찬송가 한 장을 설교 본문으로 잡는다면 현대적 찬송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본문을 잡는다. 성경으로부터 메시지를 추출한 다음 그것을 디자인 하는 과정에서 설교의 진행에 맞추어 찬송을 정한다. 물론 이 경우 오늘날 유행하는 CCM곡만을 설정 범위로 국한시킬 필요는 전혀 없으며 상황에 따라 기존 찬송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본문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추출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디자인하여 적절한 곡을 삽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성경도 약화되고 다양한 곡을 사용하기 때문에 찬송도 약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2. 현대적 찬송 설교의 작성

 

 현대적 찬송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 및 주의가 요청된다.

 첫째 현대적 찬송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본문을 정해야 한다. 어떤 본문이 좋은가 하는 질문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건을 담고 있는 서사 본문은 설교 과정에서 그 이야기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며 경구나 교훈 위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설교자가 추출한 메시지를 중심으로 보다 자유롭게 설교를 디자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설교와 마찬가지로 이 설교방식에서도 반드시 분명한 메시지를 본문으로부터 추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찬송이나 복음 성가의 사용은 철저하게 설교의 내용 진행에 종속되어야 한다. 가사내용이 설교 진행 시 강조하려는 포인트와 유리되거나 괴리가 생긴다면 설교는 자칫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합창이나 중창, 독창, 노래 말 낭독, 악기에 의한 연주 등 고전적 찬송설교 시 찬송을 설교에 조화시키는 방법은 현대적 찬송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넷째 현대적 찬송 설교에서는 한 설교에 대략 5-6편의 노래가 사용되기 때문에 설교 내용과 노래 가사의 조화뿐 아니라 노래의 보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회중이 전혀 모르는 노래라면 곤란하며 듣기는 들었는데 따라 부를 수 없는 곡이어도 안 된다. 그렇다고 일반 예배에서 복음성가 일변도로 곡을 배정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3. 현대적 찬송 설교의 실제

 

예배의 주제: 희망 그리고 비젼!

예배의 대상: 청소년

입안자: 김 호진(청소년 설교론 수강자)

 

(예배시간 15분전 사회자가 침묵기도를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전부터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은혜의 보좌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범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감히 주의 임재 앞에 와 있습니다.

 

 (사회자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작은 목소리로 찬양의 고백을 드린다. 사회자가 한번 부른 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반주에 맞추어,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몇 번 반복한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그렇습니다! 아무 공로와 노력이 없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시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가슴에 두 손을 올린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고백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화요모임 테잎 중 "은혜로만 들어가네" 솔로 부분이 흘러나온다.)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 곳 은혜로 들어가네 그분의 그 은혜♬

 

 (1절이 끝나갈 즈음에 테잎이 점점 작아지며 사회자가 마무리 기도를 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영원히 사망의 저주 아래 빠진 저희들을 건져주시고, 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전에 빠졌던 죄와 사망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악의 저주를 끊고 완전한 자유를 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저희를 의롭다고 칭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있는 곳은 존귀한 주의 보혈 아래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중에 여전히 우리가 죄의 속박아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죄를 반복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사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죄악과 짝할 수 없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감사를 드리오며 죄악에서 날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드럼과 베이스, 신디 등 모든 악기가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기쁨과 환희의 분위기로 바꾼다. 반주에 맞추어 모두 자유롭게 찬양하게 한다.)

 

♬유월절 어린 약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저 어둠의 권세는 힘이 없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그 피로 내 사했네

원수가 날 정죄 할 때에도 나는 의롭게 설 수 있네

난 더 이상 정죄함 없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죄악의 저주를 끊고 완전한 자유를 주신 우리 주님 앞에 입술의 고백을 드리며 예배로 나아갑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신앙고백을 마침과 동시에 스크린에 박종호의 "에베소서2:8" 자막이 뜬다. 다같이 반주에 맞추어 찬양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곧이어 스크린에 성경 본문이 자막으로 뜬다. 성경본문은 로마서 5장 6절부터 10절 말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제 : hope!

 

(회중들이 본문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읽고 뜻을 생각하는 동안 송정미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곡이 흘러 나온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아무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피조물이나

그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가 아직 죄 인되었을 때 우릴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 지극한 사랑

그 어느 것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우릴 끊을 수 없네

환난 핍박 곤고 닥쳐와도 루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네♬

 

(노래가 점점 작아지며 설교자가 앞으로 나온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십니다! (회중들이 참된 확신으로 아멘할때까지 반복한다.)

 과거의 어떠한 죄와 허물도 더 이상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힘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 그리고 그의 거룩한 율법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우리는 전적으로 영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기 구원에 관한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진 다음에 그 의를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들을 주신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F. M. Lehman은 이런 찬송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늘이 양피지로 펼쳐있고,

세상이 모든 갈대와 나뭇가지, 칼이 펜이며

대양을 모두 잉크로 채우고

모든 사람들이 능숙한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으리라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옛적에 홀로 땅과 하늘을 만드셨도다'♬

 

이 찬송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04장입니다.

(신디사이저 반주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며, 설교자는 오른손을 들고 3절을 부른다. 찬양단들 그리고 회중들 따라서 부른다.)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아멘... 너무나 귀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또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그러한 사랑으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바울은 1-5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얻는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화평과 즐거움과 소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6-11절에서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구요.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자인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 중에 주를 찬양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살게 된 자는 오직 그의 은혜를 맛보고 그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지은 죄로 인하여 늘 우울하게 죄의 멍에를 메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지고 걸어가신 그 죄를 가지고 죄책감에서 살아간다면 주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굳게 잡고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이 시간 3주 전에 우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신 김미정 자매님의 찬양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진실한 고백을 찬양으로 드릴 때, 우리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하정의 나의 나된 것은 MR 반주로 자매님이 독창을 한다.)

 

♬만일 나의 생애 주님이 없었다면 지금 내 모습이 이대로 남아 있을까

끝없이 솟아나는 슬픔과 뜻 모를 외로움으로 내 영혼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진 않을까

나는 아무 공로 없으나 주님은 나를 부르시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고...

나의 나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 나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전혀 없어라

이젠 나의 생명 나의 연혼 나의 모든 것 주님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손뼉으로 영광돌립니다.

 (회중 모두 "아멘"하며 박수를 친다.)

 복음가수 김수지의 새 앨범 중에 설문이란 앨범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널 위해 준비된 히나님의 크신 사랑...

너의 가는 길 주의 사랑 가득하기를 축복해♬

 

 그 선물이 바로 우리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온 세상 만물 다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이 감격 영원히 간직하며 주님 오시는 날까지 승리하며, 순결한 주의 신부로써 세상과 짝하지 아니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회자 다시 나온다.)

할렐루야! 이렇게 좋은날 한 형제 자매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지체님들을 환영하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날" 반주와 함께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자역스러운 찬양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좋은날 아름다운 우리의 만남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득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만남을 기뻐해요♬

 

 우리 다같이 일어나셔서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찬양드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녀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친다. 그리고, 부흥 테잎의 "파송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모두들 인사를 하며 교제와 받은 은혜를 나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리...♬

 

 

3장 역할설교

 

 1. 역할설교의 개념적 이해

 

 역할설교란 설교의 진행에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 설교의 전달효과를 높이려는 설교방식이다. 원래 심리학자나 정신병리학자들이 역할연기라는 것을 이용해서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하기도 하지만 설교에서의 의미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 일반적으로 설교가 지식을 전하기 보다는 진리를 경험적 맥락에 접맥시킬 때 회중들의 수용력은 훨씬 배가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설교자 한 사람에 의한 구연으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왔다. 물론 이런 전통적 설교방식은 설교자 한사람의 -설교가 준비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연설적 차원에서 볼 때 - 역량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설교가 시작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내용의 설득력과 내용의 변이요인(본문다시 읽기, 본문같이 읽기, 경험적 진술, 논쟁점 도출, 예화등)외에 형식상의 변화를 기하기는 쉽지않은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훈련되고 준비된 설교자라 하더라도 매번 설교를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전달의 다양성을 기하고 효과를 배가할 수 있는 방식가운데 하나가 역할 설교이다. 이 설교방식은 설교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된 내용을 설교자대신 실제인물을 등장시켜 그 부분을 담당하게 함으로 경험의 사실성을 높이고, 설교형식의 변화를 통해 회중의 집중력을 높이려는 방식이다. 따라서 역할 설교에서는 단순히 교리나 지식을 전달하는 대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경험 그들의 신앙적 실존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부각시킴으로 회중들과의 동질성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용의 필터를 확장시킬 수 있다. 결국 역할 설교란 진리를 경험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되 이미 한 인격안에서 시도되고 경험된 그 진리를 회중에게 전달함으로 회중접합성을 배가시키려는 목표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역할설교의 작성

 

역할설교는 일반적인 목회설교에 포함되면서도 그 성격상 특정한 절기에 어울리는 설교방식이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설교내용속에 보조 설교자를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보조 설교자란 설교중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인물의 역할을 입체적으로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광의적으로는 설교의 어떤 부분에 대한 대리 낭독등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 설교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구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 본문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물론 현대인들의 견해를 대변한다든지 아니면 설교의 진행을 위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할 수도 있지만 원론적으로는 인물들의 갈등이나 번민 문제등을 통한 주제의 진행이라는 맥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성경 본문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둘째 역할을 맡은 보조 설교자는 가급적 3인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설교는 설교자가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보조 설교자가 등장하게 되면 설교자에 의한 주제의 심화가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원칙은 준수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셋째 보조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내용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는데 대체로 독백 형식 혹은 회중에 대한 호소나 변명 아니면 설교자를 향한 항변과 회중에 대한 호소등을 섞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분량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 하며 만일 내용의 전개 그리고 보조 설교자의 재능등이 잘 조화될 경우 내용전개에 맞는 찬양을 보조 설교자가 함께 담당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째 설교자는 원고를 미리 보조 설교자에게 주어 내용을 숙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암기하여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을 경우에는 내용을 읽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다섯째 보조 설교자는 강단 아래 의자를 배열하여 설교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자기 차례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는 성가대나 회중 석에 자유롭게 자리하고 있다가 자기 차례에 자리에서 일어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마이크로 폰의 이용에 적지않은 애로가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역할설교는 일반적인 목회설교에 포함되면서도 그 성격상 특정한 절기에 어울리는 설교방식이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설교내용속에 다양한 인물의 설정이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 그인물은 일차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일 수도 있지만 설교자가 설교내용에 따라 임의로 설정한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3. 역할설교의 실제(1)

 

제목: 고난의 역설

본문: 막 11: 6-10

 

얼마전 아주 우연히 길거리에서 중학교 동창 하나를 만났습니다. 무려 25년만의 만남이고 보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서로 근황을 묻고나서 그 친구가 대뜸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야, 자네 아직도 삭지않은 것 보니 젊은 물이 좋긴 좋구나" - 정말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젊은 학생들과 같이 호흡하다보니 몸도 젊은이가 되어가는 것 같고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생활하면서 여러분들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젊음, 희망, 봄날, 미래 비젼... 뭐 그런 단어들입니다. 색으로 나타내면 푸른 색이고 공기로 따지면 이른 아침의 그 무공해의 상큼한 산소입니다. 도무지 어떤 회색빛 암울함이란 여러분과 도무지 어울리질 않습니다.

 이걸 한마디 단어로 다시 요약하면 행복이라 할 것입니다. 행복! 그래요. 참 좋은 단어이고 모두가 바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단어가 바로 행복 아니겠어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 -

 저 역시도 여러분 시절에 그런 행복을 꿈꾸었드랬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기를 바랬고 동시에 남자다움의 영원한 표상인 군인이고 싶었습니다.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는 것이 없겠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한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군목이 그것이죠. 군목시험에 합격하고 군대교회목사로서 전방부대에서 생활하는데 까지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1989년 12월 9일 정말 꿈에도 생각지않은 사건이 저를 방문했습니다. 부대 관사에서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것입니다. 국군수도통합 병원까지 긴급 후송되었지만 군의관 마저 이미 늦었다는 진단을 내릴 만큼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마는 아직 제가 갈 처소가 하늘나라에 준비가 덜 되엇던지 기적적으로 3일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된 헌신을 다짐하게 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 은혜인데... 그런데 그런 감사함과는 별개로 그 사건 때문에 저는 오랜 시간을 원치 않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장례치를 준비를 하라는 군의관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아내가 유산을 하였습니다. 퇴원을 하긴 했습니다마는 도무지 자율 신경이 말을 듣지 않는 겁니다. 설교를 하긴 해야겠는데 A4 한 페이지 분량의 설교를 무려 30분 이상 더듬거리며 해야 했습니다.

 관사에서 직선 거리로 500m도 채 안되는 부대 회의실까지 가는데 무려 30분 이상이 걸리는가하면 가다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방료를 해서 가던 길을 되돌아 옷을 갈아입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감사는커녕, 군복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질만큼 참기 힘든 시련의 시절이이었습니다.

 

역할 1) 듣고 보니까 목사님이 당하신 어려움도 적은 것은 아니었군요. 하지만 저에 비하면 목사님의 어려움이란 건 새발의 피입니다. 두 번 다시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 나왔으니까 얘기를 하죠. 저요, 이래봬도 꽤잘나가던 사람입니다. 재산이면 재산, 가정이면 가정 학벌이면 학벌 아이큐면 아이큐- 뭐하나 빠지지않는 사람이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망할라니까 한 순간이더라구요.

 그날도 사업 때문에 누굴좀 만나려고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고 어제저녁 바이어 대접하느라 과음한 탓인지 머리가 아파서 눈을 감고 뒷자석에 앉아잇었는데 느닷없이 엄청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대형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저희 차를 받아버린 거죠. 아, 와서 받는데야 어떻합니까?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차는 뺑소니치고 꼬박 3년을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가장이 그꼴이 되다보니 사업이며 가정이며 무엇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더라구요. 완전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사업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병원비 대느라 있던 집마저 날려버리고 집사람은 팔자에도 없는 파출부 생활을 하고 한참 에민한 사춘기를 지나던 아이들은 비툴어 나가고.... 그래도 목사님은 결과라도 괜찮지요 나는 이게 뭡니까? 이몸으로 할 수 있는게 도대체 아무 것도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잘 들으셨지요? 이분 말씀대로 차가와서 박는데에야 어떻게 하겠어요? 언젠가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일분에 한번꼴로 사고가 난다는 겁니다. 절도 강간 강도 차사고 폭력... 이것 저것 평균을 내보니까 일분에 한건씩 사고가 난다는 거에요. 불행이란 본디 눈이 멀어서 여기저기 가리지않고 방문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하나 환영하는 사람 없는데 그리도 용하게 찾아다닙니다.

 이렇게 원치않는데 찾아오는 불행과 고통은 수동적인 고난입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잃은 여인네에게 부처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다니면서 단 한번도 울음소리가 나지않은 집을 골라 이 바가지에 쌀을 가득 얻어오면 네 아들을 살려주겠다 - 아들 살려준다는 말에 하루종일 헤메고 다녔지만 단 한 알의 쌀도 구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요.

 이게 세상입니다. 이 땅에 원치않는 고통이 많은지 적극적으로 행복을 쟁취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발 이런 고통만 당하지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소리를 할 정도도입니다. 그러니 만일 누구라도 부러워할 행복의 조건을 다 갖고 있다면 얼마나 세상 살맛나는 일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생명처럼 아끼는 겉옷을 벗어서 길위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호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가득메운 사람들이 전부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겉옷을 벗어들고 환호하는 사람, 양손을 번쩍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 -

'이제 로마의 압제는 끝났다. 모든 불행은 끝났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행복뿐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고 보면 충분히 흥분할만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들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흥분할 만한 일입니다.

 

역할 2)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들도기뻤겠지만 정말 마음이 설렝던 것은 저희들,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아, 정말 황홀했습니다. 그건 마치 온 세상이 곧 내 것인 것 같았다니까요. 사실 삼년을 따라다니면서 찬이슬 마실때마다, 끼니를 굶을때마다 속으로 욕도 많이하고 투덜거린 것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 요한은 확신했었습니다. '아냐, 이 양반 예수를 보니까 분명이 뭔가 있어, 조금 고생되더라도 참고 견디면 분명 좋은 날이 올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날을 생각하면 이깟 고생이야 못견딜라구... 여러분도 명심하십시오. 미래가 분명하다? 그러면 오늘의 고통은 참으십시오. 암요 참아야 하구 말구요. 참고 견디는 자에게 행복이 온다니까요 -

 

 요한이 참 좋은 말을 했습니다. 사람중에는 내일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학생, 밤늦도록 연구하는 연구원... 전부 내일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해서 견디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런 부류에 해당될 겁니다. 당연하지요. 잠깐 어렵다고 쉬운 것만 찾다보면 딸 수 있는 열매는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요즘의 우리 나라가 왜 위기이겠어요? 고통없이 땀흘림 없이 열매만 가득 거둘려는 심보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복권이니 마권이니 증권이니... 이게 전부 적은 돈가지고 요행을 바라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건데 전국이 이런 열풍으로 가득차 있으니 이게 나라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참는 것, 그것은 역사가 보장하는 진리입니다. 그런 고난이라면 그런 고통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고생한 보람이 이 땅에서 나에게 영광으로 돌아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까지만 해도 우리 인간이 사람 도리를 다하는 것 같은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또 하나의 고난이 있습니다. 속 없는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님을 보고도 고진감래려니 영광의 대왕즉위식리려니 하고 그저 열광하기만 했습니다마는 만일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관찰력이 있다면 그 모습처럼 우스운 장면이 어디있겠어요? 다큰 33살의 청년이 이제 멍에를 한번도 지어보지않은 어린 나귀새끼위에 앉아 기우뚱거리며 들어온다? 힘에 부친 나귀가 하얀 콧김을 연방 내뿜으며 헐떡거리는데 메시야가 기다리던 왕이 그 연약한 힘에 부친나귀위에 엉거주춤 앉아있다? 이게 어떻게 왕입니까? 왕이라면 늠름한 백마를 타고휘황찬란한 자색옷을 입고 긴 보검을 차고 만조백관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와야지요.

 

역할 3) 나 참, 빈깡통이 요란하다더니 며칠전부터 시내에 메시야가 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드랬어요. 뭐 나사렛 출신 예수가 온다나? 나같이 술팔아 먹고 사는 년이야 메시야가 뭔지 별관심 없었지만 술마시러 오는 손님들마다 온통 에수 이야기뿐이더라구요. 자꾸 그러니까 나도 궁금해지대요. 그래서 길거리로 나가보았지요. 나참,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또 있을라구. 그 큰 등치의 어른이 연약한 나귀새끼위에 앉아 기우뚱거리는 꼴이라니... 그걸 보고 왕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그게 어디 제정신이겠어요?... 허기사 그 오랜 세월 남의 나라 종살이하느라고 지치다보면 약간씩 머리가 돌때도 됐지 암, 다 돌았어!"

 

 그렇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보고 호산나를 외쳐대며 열광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엄밀히 말하면 삼류코메디의 한 장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코메디같은 장면안에 고난의 역설이 숨겨 있습니다. 그것은 피하려는데 억지로 와서 안겨버리는 수동적 고난도 아닙니다. 나의 영광된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난을 마다하지않는 소극적 고난도 아닙니다. 그것은 - 이름하여 남을 위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적극적인 고난입니다. 적극적 고난, 남을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받는 고난!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입니다.

 여러분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은 하나같이 서로 잘났다고 이기는 것이 곧 승리라고 믿기 때문아니던가요? 모두가 왕이 되길 원하고 더많이 갖길 원하고 더 높아지길 원해서 나타나는 현상아니던가요? 강한 것이 최고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강한 군대를 갖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마는 그러나 무력이 해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팍스 로마나! 무력으로 이룬 로마의 평화가 얼마를 가던가요?

 여러분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잘났다고 으스대는 사람은 총맞아 죽고 칼로 쳐 죽이는게 인간 역사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 종이되겠다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돌을 던지지않습니다. 스스로 지겠다는 사람을 향해 이기겠다고 달려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을 위해 내 땀을 아무 대가 없이 바치는 사람,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기를 마다하지않는 사람, 그 사람은 더 이상 질것이 없는 사람이고 이 말을 뒤짚으면 이 사람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이 세상을 이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론입니다.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잠간동안의 고난까지는 참아내는 인간들아,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를 통해 이미 보았지 않느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내 아들 예수의 모습말이다.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구? 또다시 고난주간을 맞았다구? 올해는 어떻게 할 건데? 예수의 뒤를 쫓는다면서 그런데 왜 방향이 다르지? 그쪽은 골고다가 아니라 헤롯의 궁전인데..."

 그렇습니다. 생명을 이어주고 전달하는 진정한 고난은  나귀를 타고 들어오면서 왕되심을 선포하신 예수처럼 우리의 이성에 어울리지않는 어색함입니다.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고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지않는 똑똑함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손뼉치고 좋아하시는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것이 제대로된 코스가 아닐까요? 자기앞날의 영광을 위해 고난당하는 그 긴 행렬로 이미 이 땅은 발디딜 틈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청년들이여, 우리의 짤은 한 평생, 이 역설적인 고난의 길에 승부를 걸어보시지않으시겠습니까? 예수처럼 말입니다.

 

 4. 역할 설교의 실제(2)

 

제목: 그러면 우리는...

본문: 골 3, 15-17 (추수감사주일 역할설교)

 

 독일어 가운데 Rasismus라는게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종차별이라는 뜻인데 피부색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는 겁니다.

요즘 우주에 정거장을 세운다, 수억광년 떨어진 별나라까지 인공위성을 띠운다 - 야단인 시대인데, 그리고 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존재가 인간인데, 이런 소위 위대한 인간들에게, 이 단어는 사실 대단히 부끄러운 치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국민이 많이 가는 호주에서도 최근들어 백호주의라는 백인우월주의가 극성을 부린다고 하는데 정말 인간의 두 얼굴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쓸쓸 합니다.

더구나 그리도 인권을 외쳐대는 서구에서 이 단어가 만들어지고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피부색으로 인간을 판단하고 편갈라서 만들어낸 게 전쟁과 살인, 미움과 다툼말고 더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해가지고는 무엇하나 선한 것을 절대 기대할수 없고 이리해서도 안되는데, 그런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될 사람가르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피부색이라든지, 가진 재산이 얼마냐, 어느 지방 출신이냐, 조상이 어떠했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그래서 다툼만 만들어 내는 편가르기를 하자는게 아닙니다.

오늘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인데, 사람이 동물과 다른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감사하는 존재라는 건데 그래서 인간하면 사실은 모두가 감사하는 존재 - 이리 생각되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사실인즉슨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피부색처럼 당장 눈에 띠지는 않지만 피부색보다 더 선명하게 가슴속에 느낌으로 다가오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몇번만 만나보면 금새 가슴으로 와닿습니다.

우선 이런 사람이 와 닿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길 이었습니다. 열차안이 어찌나 만원인지 도대체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제 앞에는 이제 갖 돌이 지났을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저 온 몸이 땀ㅇ오로 목욕을 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막 칭얼칭얼 대는게 울음보를 터뜨리기 일보직전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시지만 짜증나는 만원열차안에서 아이마저 울어대기 시작하면 참 지루하지 않아요. 그래 얼른 갖고있던 신문으로 부채질을 해주었습니다.

웬 낯선 미남 아저씨가 바람을 몰고오니 울고자 했던 마음이 좀 바뀌었는지 울지를 않더군요. 그 덕분에 이제 역전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흘릴 땀을 제가 몽땅 흘리면서 수원까지 꼬박 부채질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무려 한 시간이나 그리 고생하며 부채질을 해주었으면 아저씨 고맙습니다' - 인사라도 있어야지요, 인사가 다 뭡니까? 열심히 부채질하느라 보지도 않았던 신문을 저달라고 빼았는겁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어린아이같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세상을 산다는게 뭔고하니 어린아이가 맞았던 그 신문지바람처럼 누군가가 부쳐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는 겁니다.

누가 보아도 감사할 일인데 그게 상식인데 그 감사를 못하고 사는 겁니다.

 

역할 1)

아 목사님, 지금 제 이야기를 그리 돌려서 하시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대놓고 하세요. 물론 제가 예수라는 양반에게 문둥병을 고침받은게 어디 작은 일 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실수를 한 거라고요.

사실 목사님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장 가서 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찌나 많이 눈앞에 어른거리든지...

그 일 때문에 바쁘다보니 기회를 놓친 거 뿐입니다. 그리고 꼭 나에게만 뭐라할거 없다구요. 나만 안간게 아니지않습니까? 열명 가운데 아홉이 안갔으니 어찌보면 다수결 사회에서 감사하러 간 녀석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또 사실 이런것도 있어요. 꼭 세치혀로 말해서 맛이 아니잖아요. 살다보면 이리저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텐데 그래서 갚으면 되지 뭐 특별하게 그런 감정때문에 빚진 심정으로 살 필요는 없는거 아닙니까? -

 

언뜻 눈에 띠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은 에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있습니다. 발을 밟아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뭡니까, 왜 네발을 거기두어서 나로 불편하게 하느냐는 투로 오히려 짜려봅니다. 앞서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있으면 그거 고마운일 아니에요? - 그냥 횡하니 가요, 마치 무슨 호텔보이가 손님위해 문열고 서있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얘기를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차원입니다. 사실은 가장 상식적인 건데 그 상식을 지키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미안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잊고 사는 사람들 말이지요.  

그러니 발을 밟아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는 사람이 남의 가슴을 밟는다해서 미안함을 알리 없습니다. 미안함을 모르면 감사 역시 모르게 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살기어려워지는게 먹을게 없어서가 아니지요, 살기가 불편해서가 아니지요. 이러한 상식이 무너져 가기 때문입니다. 고마운것을 고맙다고 말하고 감사한 것을 가슴으로 느끼며 가슴으로 전달하는 그 상식말이지요. 이런 부류에서는 사람과 금수가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것보다 좀 나은 모습도 나옵니다.

 

역할 2) 시편 136편 낭독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던가요?

내가 고통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이 정도되면 얼마나 행복한 성도입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시다-

이것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계획하는 일마다, 매시간마다, 발길가는 곳마다 나혼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함게 동행하신다- 이것처럼 신나는 일이 어디있겠어요?

여러분이 기도하고 하나님게 매달리는게 사실은 이런 것들이지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집안이 일어나야지요. 복음이 들어가면 집안이 행복하게 변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해야 정상입니다.

대개 우리 성도들이 감사하는게 이런 승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뜻대로 되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할 내용을 두고 감사하는거, 이것을 두고 상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눈이 있기때문에 시편기자의 감사처럼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내 지나온 발자취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해 내고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게획의 풍성함을 생각하면서 미리 앞당겨 감사하는게 바로 우리 성도입니다. 멋진 신앙입니다.

믿지않는 사람들 보다 한차원 높은 감사를 여러분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모두가 다 감사할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겁니다. 감사할만 하니까 감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어떻게 합니까?  감사가 다 뭡니까, 되는 일마다 하는 일마다 시마다 때마다... 도대체가 내가 손을 댓다하면 되는게 없어요, 내가 나타났다하면 꼭 안좋은 일들만 생겨요, 그리도 기도했는데 내소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만 생겨요...

이런 때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이 더 잘 알지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감사라는 조건과는 거리가 먼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역할 3): 욥의 경우

그 문제라면 제가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인간이 당할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다 당해본 사람입니다. 동방의 의인 소리를 듣고 엄청난 부자로 살다가 하루 아침에 전 재산과 자식 모두가 죽어 나가질 않나 마누라도 도망치질 않나 몸에는 문둥병이 도지질 않나 ... 고생고생해도 이런 고생은 상상이 안갈겁니다. 제가 하나님을 몰랐냐구요? 이게 교만한 마음에서 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저는 제대로 신앙생활한다고 했어요. 그건 아마 하나님도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미치겠더라구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벌이 내게로 오나- 그전까지는 부러운게 하나도 없었지요. 다 감사할 조건이었습니다. 헌대 조건으로 치자면 제가 당했던 악몽들은 다 저주의 조건 뿐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의 갈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상상이나 할수 있겠어요?

 

질문)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상황을 이길수 있었습니까? 우리같으면 당장 하나님이고 뭐고 저주하고 말았을 텐데요

대답)  저라고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마누라도 떠나가고 친하다던 친구들마저 오하서 한다는 이야기가 네가 뭔가 잘못이 있으니 하나님이 벌하시는거라고 불난집에 기름이나 붇고... 더 이상 볼 상황이라는게 없었지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이런 신앙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게 부귀영화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내 생명을 지으시이도 하나님 이시라면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나... 내가 그 뜻을 어떻게 막겠나. 하나님은 내게 닥친 상황보다 훨씬 큰 분이시니 상황은 다 잃었어도 그 하나님만 잃지 않으면 된다....

여러분 자도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저 혼자 할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도 같이 만들어 갈수 잇는 고백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비로소 하나님을 귀로만 듣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보는 성숙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4장 스킷드라마(Skitdrama) 설교

 

1.  스킷드라마 설교란 무엇인가?

 

스킷드라마란 일정한 시사적인 주제를 짤은 극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연극이 정통적인 의미를 갖고 극을 통해 인생을 표현하는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르라면 스킷드라마는 약식의 의미가 강하다. 즉 일정한 주제를 간략한 대사와 동작을 주축으로 음악등에 실어 표현하며 스토리의 전개, 출연하는 인원과 소품에 있어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들이 시사성과 현장성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극이든 다루려는 주제를 단순한 구연에 의지하지 않고 입체화된 극으로 옮겨 전달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전달효과를 갖기 마련이다. 즉 듣기만하는 설교를 보는 설교로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메시지의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장점이다. 회중은 머리속으로 드라마를 정리하는데서 벗어나 시각과 청각을 통해 메시지를 접할 수 있으며 드라마의 줄거리가 경험을 주축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메시지의 경험적인 맥락을 접할 수 있게 된다.

 

 

 2. 스킷드라마설교의 작성

 

 스킷 드라마에서는 2-5명의 등장인물과 탁자 전화기등 다루는 주제에 따라 간단한 소품을 무대에 올리지만 연극에서의 막의 전환처럼 장중한 무대설치는 하지 않는다. 특히 스킷 드라마를 설교에 접맥하는 것은 전통적인 듣는 설교에서 '보는 설교'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인 흐름에 시의적절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스킷드라마 설교는 일반 설교에 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이 드는게 사실이다. 드라마 대본을 작성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나머지 시중에 나와있는 스킷드라마 대본모음 서적을 이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단게이긴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설교자가 직접 대본을 작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킷 드라마를 작성할때에 유의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한가지 주제를 정하되 그 소재는 경험적 맥락에서 회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하라

2. 스킷드라마가 설교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를 결정     하라.

3. 설교에서의 역할배정에 맞게 대본을 작성하라. 대개 설교의     도입에서 갈등까지를 드라마로 처리하고 설교자가 이어 갈     등의 해결과 종결까지를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4. 감동과 재미 그리고 메시지를 항상 생각하라

5. 무대가 교회이고 설교의 한 부분임을 기억하여 장면전환, 소품, 음악, 배우의 수, 언어사용등을 결정하라.

 

 

 

3. 스킷드라마 설교의 실제

 

 

제목: 새술은 새 부대에

본문: 막 2, 17-22(해방절 기념 주일)

 

출연: 힌옷입은 사람(2) 속이 검은 사람(2)

 

 

해설: 아시아의 맨 동쪽 고요한 아침의 땅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 한국인이 조용히 등장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다.

그들은 언제나 힌옷을 즐겨입었고 맑은 심성과 해맑은 미소로 싸움을 싫어하고 서로 돕고 사는 평화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봄이오면 들에 나가 씨앗을 파종하고-씨뿌리는 동작- 여름한철 그 무더운 날에도 들판에 나가 열심히 농작물을 가꾸었습니다-피뽑는 동작-

가을이 되어 오곡백화가 만발하면 구슬땀을 흘리며 일년간 땀흘린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벼베는 동작.

그리고, 그 힘든 일년의 노역이 끝나면 언제나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습니다. - 하늘향해 두손을 모음

풍성한 먹거리를 앞에 놓고 그들은 멋들어진 축제를 벌리고 가무를 즐기는 멋도 있었습니다-춤추는 동작.

그런데(배경음악)/신디사이저 -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면에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쉽게 분열하고 갈라서고 파당짓는 좋지못한 습성이 있었습니다-서로 삿대질하며 토라져서 서로 등을 지고 돌아선다  .

서로 자기 욕심만 챙기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손으로 품을 움켜안은채 몸을 구부리고 자기것만 지키려는 자세.

 

그러던 어느날//(배경음악: 강하게 시작해서 사인나갈때까지 계속)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웃에 살던 속이 검은 사람들이 밀어닥쳤던 것입니다.-검은 사람들 의기양양하게등장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었습니다.(시비거는 모습) 그들은 평화대신 정복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기세는 실로 무서웠습니다(욱박지르고 자기 힘 과시하는 모습).

아무런 힘도 없었던 힌옷입은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부둥켜 안고 떨기). 속이 검은 사람들은 이들의 자유를 빼앗았고 꼼짝못하게 묶어 버렸습니다(준비한 올무를 씌우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절망의 올매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늘을 우러러 절규하는 것 뿐이었습니다(몸부림치고 빠져나갈려 안간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더 이상 투쟁할 힘도 기도할 힘도 다 잃어버린채 아무 희망도 없이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넋을 잃고 멍하게 있는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배경음악)그토록 기세 등등하던 속이 검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드럼으로 리듬맞출 것). 무엇에 놀랬는지 허겁지겁 자신들이 씌워놓앗던 올무를 거두더니 혼비백산해서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놀래서 올무를 거두어가지고 도망치듯 퇴장

평화를 사랑하던 힌옷입은 사람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차례대로 동작 연기

이제 그동안 못했던 김매기도 다시해야 하고 잡초가 무성한 집도 다시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에는 서로 잘 의논하는 것 같더니 무슨일때문인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합니다.-서로 말다툼하고 삿대질하는 장면 

 할 일은 너무도 많은데 싸움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서로 뒤돌아서서 각각 제갈길로 가고 맙니다...(토라져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퇴장)

 그때 허겁지겁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도망갔던 속이 검은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슬그머니 염탐하듯 무대 한편에 등장).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웬지모를 의미있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극이 끝나고 설교자가 설교시작)

 

여러분은 지금 한 편의 스킷 드라마를 감상하시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고 고통받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를 예배시간에 올린 이유는 오늘이 바로 광복 54주년을 맞는 뜻깊은 광복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식민지 생활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 젊은 세대입장에서 무슨 말을 한다하더라도 그때의 아픔과 절망을 표현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마는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한민족으로서 공유하는 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근본을 부인당하고 자기 문화와 자기 말을 쓰지못하고 이름도 갈아야 하고 성도 갈아야 하는 자기 부정의 역사, 그래서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자유하지만 결코 자유하지 못한 노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식민지의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하얀색 비닐끈으로 올무를 만들었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쓰여준 올무는 쇠보다더 더 무겁고 칼날보다도 더 날이 선 올무였습니다. 우리를 옥죄는 올무의 무게와 뼈를 파고드는 칼날의 그 살을 에이는 고통이 무려 36년이나 계속되었던 만큼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독립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요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아니 그것은 단지 감정상의 문제나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회복이요 우리됨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소위 헌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이것을 신학에서는 뉴 에이온이라 부릅니다. 뉴 에이온에서는 이전 것은 전부 지나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지요. 한 여인이 어느 남성하고 교제를 했습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가까워졌고 마침내 서로 죽고 못사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인의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완고한 부모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같으면야 야반두주해서라도 자기 사랑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집에서 정해준 사람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 여인은 말하자면 지금 두 에이온을 거쳐 살고 있는 것이지요. 결혼전 애인이 구 에이온이라면 지금 신랑은 새에이온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신랑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리고 그것을 비극이라 느낀다하더라도 일단 결혼을 했으면 자신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요. 간단합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고 깨끗이 정리하고, 그래서 애인이 준 반지도 돌려주고 그에게서 받은 편지도 다 태워버리고 그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시대인 신랑에게 충실해야 거기에 행복이 있는 법이거든요.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54년이 지나도록 잊지않고 또 앞으로도 이나라의 역사가 지속되는한 결코 잊지않을 이유는 단순히 광복이라는 것을 감정적 차원의 기쁨정도로 기념하려는데 있질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았으니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출발을 다짐하고 실행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가 나라의 독립이라는 광복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마는 새로운 시대와 구 시대라는 이 구조는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구시대를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인고 하면 에수 그리스도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이전까지를 구 시대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이후 시대를 새로운 시대 이렇게 구분짓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구시대에는 무엇을 했느냐하면 새시대를 기다리는 일에 온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읽었던 레위의 집에서의 식사가 바로 공교롭게도 이 금식하는 날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질문을 하는 겁니다. 아니 세레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꼬박꼬박 금식을 하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도 안하고 금식하는 날에 오히려 음식을 먹습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물은 것은 아마도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지 않앗기 때문에 금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함께 19-20절을 한음성으로 읽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잇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신랑이 왔다 잔치는 시작되었다. 금식은 그 신랑이 오기까지 준비로서 하는 것인데 이미 왓는데 더 무슨 금식이 필요하단 말이냐? - 그런 이야기이지요. 신랑이 오면 준비기간에 의미있는 일들이라도 다 폐지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주 생생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도 많이 애용하는 표현이니만큼 우리 같이 읽도록 합니다. 21-22절입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그렇지요. 새시대가 오면 정리가 필요합니다. 종교도 그러하고 신부가 옛애인을 잊고 오직 신랑만을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의 생활에서도 그러하고 그리고 나라의 일도 그러합니다. 새시대가 왔는데 여전히 구시대를 청산하지 못하면 새시대는 진정한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주 서점에 나가보니까 주섭일이라는 분이 지은 프랑스의 대숙청이라는 책이 눈에 띠었습니다. 독일에 점령당햇던 프랑스가 전후에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을 다룬 책이었는데 우리 역시 프랑스와 같은 입장이고 보니까 무척 관심이 갔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햇던 것은 불과 5년에 불과했습니다. 36년이었던 우리나라에 비하면 정말 짤은 기간이었습니다마는 전후 프랑스에서 이 기간에 나치에 협력햇다는 이유로 숙청한 사람의 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보낸 사람만 99만명 사형에 집행된 사람이 760명 유기징역에서 종신징역에 처해진 사람이 4만명 그리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된 사람이 3500명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프랑스사람들이 애국심이 없는 민족으로 비쳐질지 모릅니다마는 그런 해석보다는 어떻하든 새롭게 시작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국가의 기초를 튼실히 다지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겠다는 프랑스인들의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참 철저한 사람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연세 대학교 안용식 교수가 쓴 논문가운데 "우리나라 고급공무원의 일제관련 경력분석"이라는게 있어요. 그걸 들여다 보니까 참 기가 막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행정의 실제집행자였던 국장 과장의 55.2%가 일제시대에 관료를 지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무려 프랑스에 비해 7배의 기간을 식민지치하에 잇었지만 그리고 반민특위라는게 조직되어 일제시대에 대한 정리를 한다고햇지만 그 죄과를 물어 제대로 책임을 물은 사람은 단한사람도 없는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행정의 공백을 메울길이 없었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문제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시대를 맞으려는 의지가 우리에게는 없엇다는게 이게 문제입니다. 그런 추상같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려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후 광주 대학살극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후도 버젖히 대통령이 뽑히는 웃지못한 희극이 연출되는 것이고, 몇십만원 사기친 사람은 옥살이시키면서도 정작 수십억원을 해먹은 김 현철이는 감방에 가지않아도 되는 고무줄 정의가 이나라의 최고 권부인 대통령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프랑스는 철저히 새술을 새부대에 담았고 그리고 그 대가를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새술을 헌부대에 담았고 역시 정반대의 혹독한 대가를 여실히 치루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세상사는게 다 예수님 말씀하신 것같아야 맞지않아요? 가령 새로운 양복을 한벌 맞추었다 칩시다. 그런데 신고잇는 구두를 보니까 발가락이 다 나온 형편없는 구두를 신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그 사람을 멋쟁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또 양복만 놓고서 멋지다고 그래서 양복까지만 보고 발은 보지않겠다 그러는 분은 도 누가 있겠습니까? 새 양복에 어울리는 새구두가 아니면 아무리 비싼 새양복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 싸잡아서 촌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이 정말 오늘의 이 하나님이 주신 새시대의 기회를 진정한 새시대로 만들려면 구시대의 잔재에 대해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대통령부터 정신 독바로 차리고 역사와 민족앞에 죄인이 되지않으려면 그리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밀실 야합의 정치를 버리고 공의의 대도로 나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역사의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말아야 합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기회주의자들을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에서 몰표를 몰아주는 우를 또다시 범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그리고 민족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복절을 맞는 저와 여러분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차원에서는 더더욱 애수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갖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을 사는 목표의 질을 높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복해지기 원하는 개인적 심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앙은 그 차원까지도 넘어서게 합니다. 그래서 설사 내가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져오고 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즐거워하는 그런 수준까지 다가서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야 말로 복음이라는 새술을 담는 새부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봉사를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의미를질문하는데 자루된 나는 여전히 소유만 생각하고 나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새 술을 헌부대에 담고 잇는 것이고 생벼를 헌옷가지에 붙이고 잇는 꼴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알고 거기서 손해보지않으려는데 익숙한 여러분이 왜 복음의 원리안에서 이익내는 것에는 그리도 인색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 우리가 신랑이 여는 잔치집에 가서 금식하고 배를 곯아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새술도 버리고 가죽 부대도 버리는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지않습니까?

복음이 마련해준 새로운 지평을 응시하면서 넓은 가슴을 펴십시다.

우리민족이 또다시 그 아픈 노에의 올무를 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겉모습만 신앙인인 이중인간으로 남아잇을 수는 없지않겟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기회 이 귀한 복음안에서 이나라 이민족 그리고 우리 모두가 새롭게 살 수 있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맙시다. 이것이 오늘 광복 54주년을 맞는 우리의 각오입니다.

 

 

5장 낭독극설교

 

 1. 낭독극 설교에 대한 이해

 

 어떻게 하면 설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의 한결같은 고민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의 한 해결책으로 시도해 볼만한 것이 바로 낭독극 설교이다. 이 설교 방식은 전하려는 설교의 메시지와 관련된 내용의 일부를 - 가급적이면 문제제기 - 낭독극 형식으로 작성하여 설교 도입 부분에 - 필요에 따라서는 설교자가 배치하려는 부분 - 배치함으로 설교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내용을 낭독극 형식으로 배치할 수도 있고 리포터 보고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고통을 주제로한 설교의 도입부로서의 리포터식 낭독극이다.

 

 2. 낭독을 위한 대본

 

낭독(1): 서울 남대문 경찰서를 돌아 가파른 골목길로 접어들자 50대 아주머니가 달라붙었다. 원래 색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묻은 3층 건물로 들어서자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두명이 나란히 걷기 조차 힘들 정도로 좁은 복도 양쪽에는 1평 남짓한 방이 12개나 된다. 쪽방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판자로 된 문을 열자 벽지는 덕지덕지 얼룩져 있고 고물 TV와 가스버너, 이불이 놓여 있다. 가스버너는 장기투숙하던 사람이 방값을 떼먹고 도망가며 남겨둔 것이다. 하루 방값이라야 고작 7천원이다.

 서울 중구 회현동 622번지 일대엔 이런 쪽방이 8백 여개에 이르며 서울시 5개 쪽방 밀집 지역의 전체 쪽방 수는 5천개에 이른다. 회현동에서 만난 54세의 이모씨는 20년째 쪽방 생활을 해온 1호실 붙박이다. 그에게는 아내도 자녀도 가정도 없다. 이 생활을 끝장내려고 몸부림친게 언제부터였던가 -

그러나 이날도 그는 경기도 포천 공사장 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 했다. 젊은 실직자들이 공사장으로 몰리면서 오십줄의 이씨가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외상 방값은 10만원을 넘어섰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 20년동안 하루도 거르지않고 쉬어온 한숨이, 오늘처럼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다 -

 

 

낭독(2):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90년대 중반 화양리는 돈암동과 더불어 1318세대들로 북적대는 대표적인 유흥업소 군락지중 한군데였습니다. 화양리에는 언제나 10대들이 넘쳤드랬습니다. 한쪽에서는 호프집과 당구장 오락실을 드나드는 10대들로 북새통을 이루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평균 17-18세에 데뷔하는 화양리 삐끼들의 호객행위와 업소의 80%이상을 차지하는 10대의 어린 쇼걸들로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한때는 10대 삐끼들이 400명을 넘어설 만큼 호황을 누리던 이곳이 그러나 요즘은 20명도 남지 않을 만큼 쓸쓸한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작년 10월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이 터지면서 그리고 김 강자 서장의 10대 매매춘 단속 발언이 나온 이후 윤락업소는 말할 것도 없고 유흥업소도 덩달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잠실의 신천일대나 강남역 일대에 십대들의 대규모 유흥공간이 생기면서 화양리는 물빠진 갯벌처럼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화양리 술집주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온통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서 나쁜줄 알면서 빠져드는 탈선, 그리고 종국에는 그것이 나쁜 것인 줄도 모른채 그것을 즐기는 우리 젊은이들 - 갈곳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본받고 살아갈 모델도, 좌우명으로 새겨넣을 철학도 전무합니다. 우리는 이곳에 와 있지만 많은 다른 젊은이들이 너무 아파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 저들의 고통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낭독(3):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이 땅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은 작년 11월경이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땅, 그곳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분은 배고파보지 않으면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대 모릅니다. 나무 껍질을 벗겨 그것을 삶아먹고 배탈이 나 고생하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목숨을 걸고 이 저주의 땅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꽁꽁언 두만강을 건널 때, 바로 지근 거리에서 순찰 도는 인민군 동무들의 말소리가 들릴 때, 저는 생전 처음 그 옛날 할머니께서 이야기하시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어머니가 압록강 얼음판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을 때 두 번째로 나는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혼자 산속으로 숨어들어 며칠을 굶고 나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동네로 내려왔다가 하나뿐인 여동생이 중국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아직도 살아있는 저 자신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잘 사시더군요. 허기사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짐만 될 뿐이지요. 동포면 뭘하고 형제면 뭘합니까. 결국 돈있고 나서 핏줄도 핏줄이지요.

허지만 설마 나와 똑같은 하나님 이름 부르는 당신들마저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울고 있는 형제와 자매를 놔두고 홀로 웃고 있지는 않겠지요?

(낭독이 끝난 뒤 설교가 시작된다)

 

 

6장 대화설교

 

 1. 대화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그 본질상 대화이다. 설교를 나타내는 최초의 헬라어 단어인 Homilia는 본래 '서로 서로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 설교자가 설교할 동안 회중들이 의문이 생기면 직접 질문하고 대답하는 관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초대교회가 의식적이고 의전을 중시하는 중세와 달리 소박한 형제애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설교의 직접적인 전달과 반응이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현상적인 측면 이전에 신학적인 견지에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대화이다. 즉 설교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걸으심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에 대해 반드시 대답을 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말걸음과 대답함은 대화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현실적으로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과의 대화이다. 비록 변화된 상황 때문에 초대 교회가 보여주었던 직접적인 대화가 단절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설교자의 일방적인 독백으로 변질시켜서는 곤란하다. 전통적인 설교 방식이 갖는 독백적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회중의 상태와 필요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을 요청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선포'라는 일방성의 개념과 하나님의 전령이라는 권위적 설교자 이해롤 설교의 전달방법과 혼동함으로 오히려 회중들이 들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지 못하는 교리적 관념적 설교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가 다시 살아나려면 설교가 갖는 기본적인 대화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방성의 선포식 설교로는 변화하는 회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회중과 설교본래의 성격의 회복이라는 양대 축을 염두에 두고 설교의 대화적 성격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바로 대화 설교이다.

 

 

7장 2인 대화 설교

 

 1. 설교의 성격

 

 2인 대화 설교란 두 사람의 설교자가 설교를 이끌어 가는 방식의 설교를 말한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이 방식은 네덜란드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결성해 예배드리는 일단의 장로교회에서 지난 130여년간 지속적으로 유지해 온 설교방식이다.

 이 방식의 설교는 현실적으로 회중들이 직접적으로 설교에 참여할 수 없는 한계를 가능한 한 극복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담고 있으며 동시에 설교의 전달적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설교자의 일방성을 완화시키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식이다. 비록 이 방식 역시 회중의 직접적 참여를 100% 보장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느 방식보다도 회중의 생각과 견해가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설교에 반영되어 질 수 있다. 즉 설교자 2인이 설교를 진행함으로 설교가 곧 대화라는 기본적 성격을 가시화 현실화 할 수 있으며 두 설교자의 역할 분담을 통해 설교의 명료성과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물론 이 방식은 두 명의 설교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여건상 시행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가령 개척 교회나 한 명의 목회자가 목회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또 목회자가 다수라 하더라도 부교역자가 통상 주 설교자인 담임 목사와  설교단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부담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자칫 설교의 권위를 깎아 내린다든지 설교를 한담으로 오해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은 논리적 전달, 분명한 이해를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그래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설교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청년층이나 학생층들에게는 확실히 수용될 수 있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2. 설교의 준비와 진행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2인 대화 설교에는  2인의 설교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주 설교자와 보조 설교자로 그 역할과 기능이 나누어지는 데 설교 준비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두 설교자가 서로 상의하여 한 본문을 연구하고 설교의 주된 메시지를 추출하며 그것의 기본적인 골격을 함께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본문의 핵심적 메시지를 무엇으로 추출할 것인가, 이 본문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본문이 오늘 우리 회중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들을 함께 상의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설교 준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주 설교자가 주된 작업을 전담하여 대강 만들어진 설교문을 보조 설교자로 하여금 보고 그로부터 질문을 추출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정해진 본문을 보조 설교자도 읽게 하여 보조 설교자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정리하도록 한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설교문을 작성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기능 분담이 주 설교자는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보조 설교자는 질문 일변도로 나가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그리 된다면 설교는 인테뷰에 가깝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방식은 기본적인 수칙은 주 설교자-메시지, 보조 설교자-질문에 의한 진행 및 설교 구성의 정리로 정하되 이 역할을 부분적으로 서로 바꾸어 가면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의할 점은 두 명의 설교자는 자기들 끼리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것이 설교단에 오른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즉 설교의 대상은 철저히 회중이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 끼리 마주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중간 중간 서로 시선을 마주하면서 진행해야 하지만 설교의 대부분은 질문자나 답변자가 회중을 향하여야 하고 회중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설교 방식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강단의 구조가 많은 장애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강단은 설교자 일 인을 위한 구조이기 때문에 외국인 통역하듯 좁은 강단을 두 명의 설교자가 나란히 서서 설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된다면 회중들은 눈동자를 움직임 없이 두명의 설교자를 한 시선에 담게 되기 때문에 집중력에서 산만해 질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구도는 두 명의 설교자가 회중이 반드시 시선을 바꾸어야 볼 수 있는 위치에 떨어져서 설교에 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2인 대화 설교의 실제

 

제목: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라!

본문: 막 8: 27-38

 

보조 설교자: 아마 우리 성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마는 저 역시 목사님께서 정하신 설교의 제목을 보고 좀 놀라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놀랐다는 것은 자칫 하면 설교가 인생성공론 비슷한 처신술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신선감을 느낀 것은 통상적인 설교 제목하고는 무척 달랐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설교 제목을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라로 정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주 설교자: 아마 충분히 신선함과 당혹감 사이를 왕래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의 제목을 그리 잡은 것은 사실 평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저의 소신때문입니다마는 좀더 직접적인 동기는 이런 것입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전에는 전혀 듣지 못했던 단어가 요즘 우리 귀에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인터넷 동반 자살'이라는 내용인데 엊그제 신문에도 그런 기사가 났어요. 조치원의 한 여관에서 20대 후반의 두 젊은이가 투숙한 후 그 다음 날 오후가 되어도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나란히 이불을 쓰고 숨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 옆에는 쪽지 하나가 남겨져 있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더라는 거지요: "자살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두 젊은이의 직업 난을 보니까 둘 다 무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 같은 나라는 우리보다 다섯 배나 많은 자살자 수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리고 죽은 내용도 어처구니없는 게 많습니다. 어떤 전도 유망한 럭비 풋볼 팀 주장이 자살을 했는데 그 이유가 아침 운동하는 게 싫어서 라는 겁니다. 또 어떤 대학생은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고 심심해서가 자살의 이유입니다. 우리 보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일본이다 보니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런 배부른 생명 경시 풍조가 나오는지도 모릅니다마는 우리 경우는 좀 다릅니다. 대부분 삶에서 좌절하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소위 자기 인생이 자꾸만 꼬여가고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겁니다.

 직업을 잃고 할 일이 없는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지금까지 꿈꾸어 왔던 것이 허망하게 물거품처럼 변한다면 정말 다시 살아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으니까 같이 죽자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처음 만난 사람과 저승길의 길동무를 삼기도 하고 죽여줄 사람을 수소문  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는 소위 자살 신드롬(sucide-oneself syndrome) 이면에는 대부분 강한 성공에의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실망하고 힘이 빠졌으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을 생각을 했을까...

 

보조 설교자: 저도 그 기사를 보았습니다마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흔히 하는 말로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아마도 자살로 자기를 버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를 이미 성공하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할 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살이라는 극단 속에서 목사님은 '성공'이라는 강렬한 화두를 읽으신 거군요.

 

주설교자: 그래요, 이 땅의 들끓는 화두는 성공입니다. 이것을 위해 모두가 그리 바삐 움직입니다. 성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촌각을 다투어 공부를 하고 기술을 연마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직장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근한 후에는 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먹고산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없다고는 보지 않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이상이지요. 짧은 인생에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진취적인 인생관 때문입니다. 누군들 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들 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성공 때문에,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래서 못 쉬는 것이 아니고 안 쉬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못쓰는 것이 아니라 성공 때문에 안 쓰는 겁니다.

 

보조 설교자: 어차피 이 세계는 생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각박한 세계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부분을 부인할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 평생을 살면서 경쟁에서 뒤지고 낙후되고 처진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핑계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럼 어떤 성공을 할 것이며 어떤 자기 이름을 남길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목사님은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주 설교자: 대개 사람이 사는 길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성공 지향적인 유형입니다. 소위 Success oriented people! - 예를 들어 운동 선수 가운데 마이클 조던이라는 농구 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농구공 하나를 가지고 일년에 무려 3천만 달러를 벌던 사람입니다. 조던 한사람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 효과는 수십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조던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오는 사람들, 조던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의 판매량, 조던을 모신 각종 모임의 파급 효과 선전 효과... 그 사람은 지금 은퇴해서 여유롭게 골프를 즐기며 농구단을 하나 인수해서 구단주로 풍요한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제 2의 조던을 꿈꾸며 농구장으로 몰려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엄밀히 따지면 마이클 조던이 거둔 성공이라는 것의 수혜자는 조던 자신입니다. 그렇게 땀흘려 번 돈과 명성은 마이클 조던 한 사람의 것이지 여러분의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그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보조설교자: 이것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는지 모릅니다마는 어제 신문엘 보니까 이제 마흔 한 살의 전직 영어 강사가 한국 싸이버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났어요. 이 사람은 정규 대학도 나오지 못한 검정고시출신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자기 실력을 쌓아서 대학생들 영어 교재인 '거로 워크숍'시리즈를 내서 160만 부나 팔았고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최고 인기 있는 강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을 공부해서 밀워키 시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 사람은 그 성공을 쟁취하기 까지 뼈를 깍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이 사람은  인생 성공의 한 모델로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분야에서 성공해서 사회 지도층의 반열에 오른 이 사람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우러러 보고 존경하며 우리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이 감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성공은 있는데 존경과는 거리가 먼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주설교자: 비단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지요.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맥도날드 햄버거사를 예로 들어 볼까요? 이 회사의 목표는 전 세계 각 도시마다에 500미터 간격으로 자기들의 점포 체인망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디서든 도시에 들어서면 맥도날드 간판이 눈에 띄도록 하자는 야심찬 계획이지요. 아마 우리 젊은층들 가운데는 이 회사의 성공에 적지않은 기여를 한 친구들도 있을 겁니다. 코카콜라 하면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운데 하나인데 얼음집에서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벌벌 떨면서도 콜라를 즐기게 할 만큼 코카콜라도 돈버는데 있어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그들로 인해 쓰러져가야만 했던 수많은 중소업체의 눈물이 있거든요?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성공했고 어느 기업이 성공했다 하면 반대로 어느 누군가는 그리고 어느 기업인가는 반대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은 좋은 것 입니다마는 그러나 이런 유의 성공, 자기만의 성공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공입니다.

 

보조 설교자: 참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시간에도 그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자기만의 성공을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아마 시간이 곧 돈인 그들 눈에 이렇게 앉아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비칠까 생각하니 누가 한심한지 잠시 헷갈리는 군요. 자, 자기만의 성공, 석세스 지향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나머지 또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주 설교자: 인생을 사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 지향적인 경우와는 정 반대로 남들이 좇아가는 성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참된 의미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소위 의미 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 (signifi- cance oriented people)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내 수고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데미안이라는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이 격리되어 살고 있는 섬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데미안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왜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그런데 얼마 안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데미안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겁니다. 데미안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어 나병환자가 되고 나서 말이지요.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데미안은 실패자에 불과할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러나 그 실패자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이유와 사람 사는 훈훈함으로 감동되었다면 이것을 우리가 어찌 실패자라 쉽게 단정할 수가 있겠어요?

 

보조 설교자: 목사님은 지금 전혀 상반되는 두 종류의 인간형을 말씀 하셨습니다. 성공지향형의 인간과  의미 지향형의 인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마는 그러나 목사님, 현실적으로 이런 구분은 너무 극단과 극단을 오가는 구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 입장에서 이런 극단적인 흑백 논리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게 사실이거든요.

 

주 설교자: 그래요 제가 너무 이분법적인 흑백 논리로 몰고 갔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딛고 움켜쥐는 성공일변도의 삶도, 그렇다고 나와 가족 전체를 포기하는 의미일변도의 삶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둘 다 부담스러운 것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 그것이 힘든 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났을 때 세상이 말하는 성공만 남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다 살고 결산을 해 보니 나의 성공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면 참으로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다 살고 났을 때 의미의 양이 더 많아야 그게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삶입니다.

 

보조 설교자: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실 예수를 안믿는 사람중에도 휴머니즘이라는 이름하에 살신성인하신 분들, 한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살다 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더욱이 예수 믿는 우리가 자기만의 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사님께서 오늘 설교 본문을 막 8: 28이하로 잡으셨는데 언뜻 보아서는 오늘 목사님이 의도하시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마는 특별한 어떤 이유가 있으신지요?

 

주 설교자: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발생한 신앙고백 사건입니다. 언뜻 보면 성공이라는 것과 무관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리 생각해 봅시다. 이 땅에 왔다간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감동케하는 의미를 남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마는 그 누구도 예수 이상의 완벽한 삶을 사신 분이 있었는가, 예수야 말로 의미의 전형을 사신 분 그리고 진솔한 성공을 거둔 분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분을 성공자라고 했는데 무슨 떼 돈을 벌어서 성공이 아니라 이 땅에 온 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성공자였습니다. 또 그 분 때문에 온 인류가 제대로 살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완벽한 의미를 남긴 분입니다.

 

보조 설교자: 아, 그분은 하나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신 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 설교자: 바로 그런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는 당연히 슈퍼맨처럼 무 결점의 기계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역사를 살다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나사렛 청년 예수라는 실존적 차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 분도 배가 고픈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슬프면 눈물을 흘릴 줄도 아셨고 화나면 분노하실 줄도 아는 분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성공과 의미를 함께 움켜 쥘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삶이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삶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삶!

 

보조 설교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자기 이야기를 만든다는게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가 어떤 자기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주 설교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한 대답은 이겁니다: 세례요한이라 하데요 엘리야라 하던데요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더군요.' -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대답이 안나왔으니 틀린 거라고요?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선지자 - 이게 다 뭡니까? 사람들 눈에 예수가 그리 비쳤다는 거지요. 세례요한, 그러면 정의의 사도입니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올곧게 살고 양심대로 사는 사람, 바로 그 세례요한의 모습을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본 것이지요

엘리야, 그러면 기적을 몰고 다니는 사람, 감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사람,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그 모습을 본 겁니다. 선지자중의 한 사람,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사람이거든요? 이미 말라기 이후 400년간 선지자가 나오질 않았는데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선지자의 모습을 보았던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건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의 사시는 모습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사람들 눈에 그리 비치고 각인 되어 '예수!' 그러면, 아 이러 이러한 사람, 이런 스토리가 형성되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보조 설교자: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해 주셨는데 목사님 말씀처럼 자기 이야기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인생의 성공과 의미 이 두 가지를 함께 잡으려면  자기 이야기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개 하면 당장 떠오르는 인상 그리고 그에 대한 평판!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 영역 뿐만이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군산중앙교회 청년 대학부 집회를 인도하고 왔는데 목사님이 식사를 하러 가자고 그래요. 한 참을 가더니 어느 음식점엘 들어서면서 하는 말이 "교수님, 이 집이 군산에서 샤브샤브 잘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요.

 

주 설교자: 그래 생각만큼 맛이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거지요. 신앙을 떠나서라도 사업의 영역에서도 무엇 하나 소문만 잘나면 평판만 좋으면 금새 뜨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소문이 나고 평판만 좋으면 돈버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어떤 평판을 만들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이름을 떠올리면 당장 연상되는 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살아야 하는 가를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35절 말씀을 함께 읽읍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보조 설교자: 그런데 그 다음 구절들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36-37절을 보면 그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것은 35절의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게 목숨이라면 가장 귀한 것이라는 건데 그 가장 귀한 것을 버리야 얻을 것이라니요?

 

주 설교자: 한마디로 말하면 역설입니다. 가장 귀한 것 천하보다 귀한 것 목숨 맞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자기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든 자기 목숨을 일 순위로 생각합니다. 다 자기 자기 자기 나 나 나 - 이리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풀어쓰면 그것이거든요: "그리하면 죽어, 가장 귀한 게 목숨인데 너만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면 죽어!" 자기만 생각하고 살 것만 생각하고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은 오히려 죽는다는 말입니다.

한 번 목사님께서 대답해 보시지요; 예를 들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그 길을 거부했다면 예수가 목사님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보조 설교자: 전혀 의미가 없지요. 저뿐 아니라 목사님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주 설교자: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지만 그래서 자기만을 위해 살면 살아서도 죽고 죽어서도 죽습니다. 이 땅을 보세요. 소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천하를 호령할 만큼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아시지요? 궁궐같은 성을 싸놓고 호의호식하면서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 사람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거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불러 칭하셨으면서도 부자에게는 자연인의 이름은 아예 생략한 채 '부자'라고만 부르신 것을 보면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하셨는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진짜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살아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내 평판과 내 이야기가 인정받는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부끄러워하신다 든지 낯을 붉힌다든지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보조 설교자: 성경은 그렇게 사는 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잃는 것 등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특출난 전도자가 된다든지 목회자가 된다든지 아니면 순교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특수하고 좁은 의미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 바로 사랑이라는 최고의 원리를 내 온 몸을 다해 실천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모두가 데미안이나 테레사 수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마는 진정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 설교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그러니 우리는 잘 생각하여야 합니다. 진정 사는 길을 나 혼자만을 알고 사는 성공에서만 찾을 것인가 아니면 나 때문에 고마워하고 감격해 하는 의미에서 살 것인가 - 아마 후자는 전자 보다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려 할 때 그것을 막아섰던 베드로처럼 우리가 제대로 살아보려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돈을 아까워하는 베드로 시간을 아까워하는 베드로 남의 이목을 걸고 나오는 베드로... 이런 저런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와 방해는 우리로 마음을 바꾸고 편히 쉽게 살도록 집요하게 우리를 설득할 것입니다.

 

보조 설교자: 그런 유혹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런 유혹으로부터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설교자: 유혹치고 달콤하지 않은게 없고 유혹치고 손해나는 것처럼 보이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넘어 뜨리려는 유혹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신앙 양심과 공의에 비추어 보면 즉시 드러 납니다. 그리 판명되면 간단 합니다. 예수님 처럼 하면 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아마도 예배를 끝내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 유혹은 시작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유혹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혼자만을 위해 살아 천하를 얻고 목숨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 지금 그리고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8장 질의식 대화설교

 

 1. 설교의 성격

 

 가장 바람직한 대화설교란 설교를 들으면서 의문나는 사항을 회중 가운데 그런 필요성을 느낀 사람이 직접 질의하고 그 질문에 대해 설교자가 대답하는 방식일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통용되던 설교방식이 바로 이런 직접적인 방식이었다고 보면 이런 직접적인 대화설교는 가장 원초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직접적인 대화설교가 오늘의 실정에서 보편화 되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낙관적인 대답을 내놓기 힘들 것이다. 우선 신앙의 자유가 억압당해 상당 기간 지하 묘지인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고 상대적으로 회중의 규모도 작았던 초대교회에 비해 오늘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모이는 회중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사회의 발전에 의해 회중의 층도 매우 다양하게 변했다. 또한 전체적인 교육의 질도 매우 높아진 상태이다. 성격적으로도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질문이 여과없이 나올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자칫 설교 자체가 진행될 수 없는 난처함을 유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설교가 아닌 논쟁으로 치닫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의 설교의 권위와 자리마저 논쟁의 기술에 의해 대치될 우려도 있다. 이런 단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질의식 대화설교이다.

 

 2. 설교의 작성

 

  이 설교 방식에서는 회중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의 의견과 질문 그리고 이의와 반대 등을 보조 설교자들을 통해 질의케 하고 그것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회중의 질문을 수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설교를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생각하는 회중들의 경향 역시 어려움을 주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몇 가지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에 설교와 예배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들에게 설교 본문을 고지한 후 그 본문을 대했을 때 느끼는 점이나 제기되는 질문 등을 조사하는 방법이다.

둘째 설교자가 3-4명의 설교 보조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경우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일정 기간을 두고 이들을 교육시켜 설교와 예배에 대한 신학적 안목을 키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던져지는 질문들은 항상 표면적 차원에서 맴돌게 될 것이고 보다 깊이 있는 질문의 제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의 경우에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가급적 설교자가 사전에 질문을 숙지하고 대비한 상태로 설교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마지막으로 설교자 자신이 회중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스스로 질문을 작성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자칫 회중을 전시적으로만 설교에  참여시키고 진정한 의미에서 회중의 질의가 아니라는 반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목회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이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설교자가 미리 질문을 작성하여 설교 보조자들에게 배포하여야 하며 미리 약속된 질문들이 제기되도록 하여야 한다.

 

 3. 설교의 실행

 

 질의식 대화 설교의 형식과 관련하여 고정된 어떤 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능한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설교 보조자들을 강단 하단에 배치하여 회중과 설교자를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앉게 한다. 이러한 좌석의 배치를 공식화 하는 방법은 에배의 의식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이들에게 설교전문이 들어있는 원고를 미리 배포하여 자기 순서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가급적 질문이 그 내용이나 분량에서 너무 짧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질문자가 여의치 않을 경우 한 사람이 두 번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무방하다. 진행의 자연스러움을 위해서는 질문 내용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강요할 사항은 아니다.

 둘째 몇 명의 질문자들이 회중앞에 일렬로 도열하여 본문을 읽으며 느낀 점이나 의문 사항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덜 의식적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움이 돋보일 수 있지만 자칫 그에 못지 않은 어색함을 수반할 수도 있다. 이때 미리 지정한 보조자들이 스스로 준비한 내용을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설교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사전에 설교자와의 조율이 추천될 만 하다. 설교자는 가급적 제기된 질문의 순서대로 질문을 언급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지만 질문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해 처리하는 것도 무방하다. 다만 질문의 구체성에 비해 대답이 모호하다든지 추상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질의식 대화 설교의 실제

 

 

제목: 빈들로, 구유로!

본문: 눅 2: 8-14(성탄절 설교)

 

 할렐루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높고 귀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아기 예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우리 공동체 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절은 참으로 기독교 절기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가장 즐거운 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성탄절은 매우 중요한 축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매년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는 적지 않은 질문들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질문1) 저는 전에부터 궁금한게 있었습니다.

성탄절이라는게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고 나서 곧바로 성탄절이 전 세계인의 축제로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답)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비슷한 의문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만 언제 나셨는가 하는 날짜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질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탄생축하 의식이 3세기 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초기에는 날자를 고정시키지않고 어떤 때는 1월 6일 어떤 때는 춘분인 3월 21일 또 어떤 때는 12월 25일에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354년에 12월 25일로 확정해서 축제일로 삼기 시작했고 379년 동방 정교회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원래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국교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때 이미 로마에는 동지를 축하하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새턴이라는 농경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 신을 기리는 축제가 바로 12월 21-31사이에 펼쳐졌던 것이지요.

이 축제기간을 가리켜 사투르날리아라 했는데 이 기간중에는 노예들이 주인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반대로 주인이 노예들의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빈부 남녀 노소 신분의 차별을 없애고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축제를 즐겼던 겁니다.

그 중에서도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날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로 중시되었었는데 이 날이 마침 그 당시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던 미트라 라는 신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교회는 이처럼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아예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해서 축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질문 2) 지금까지 신앙 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신 것이 구세주가 나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어린 아기이어야 하고 또 그 태어나신 곳도 말구유이어야 합니까?  말 구유라는게 사람누울 자리도 아닐뿐더러 더더욱 왕이 누울 자리는 아닐텐데 말입니다.

 

답) 지금 그 질문은 바로 성탄절의 핵심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이게 그리스도의 성탄인데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높고 귀한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행위와 관련이 있지요.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즉 높아지려고 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래서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법을 택하신 것이지요.

인간이 높아지려다 망했는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간의 단계까지 낮추심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낮아지고 겸비해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굿간에 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은 조금만 물질이 들어가고 지위가 올라가도 힘이 들어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 보다 못한 사람 위에 자꾸 군림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올 때 빈 몸이었던 것처럼 갈 때에도 빈 몸이거든요.

이 땅에서 움켜쥐는 것들은 하나같이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결국은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굿간이니 말 밥통인 구유니하는게 뭐겠어요? 더 이상 낮아질것이 없는 최하위 구조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택하심으로 우리가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겁니다.

같이 살아라 서로 도우며 살아라 불쌍히 여겨라./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그런 절기입니다.

 

질문 3) 저는 어려서부터 성탄절을 무수히 지켜봐왔습니다마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오셨다 만백성 맞으라' - 찬송도 많이 하고 새벽송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매년 똑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매년마다 아기 예수가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게 매년 오셔도 되는 겁니까?

정말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대답) 그렇지요 지금 질문하신 분이 어려서 오셨다는 그 아기 예수가 나이가 먹었어도 아마 고등학교 다닐 나이가 되었을 테니까요.

우선 일차적으로 우리가 축하하는 아기 에수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정확한 시간과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지금부터 이천년 전에 유대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그 아기예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한 그리고 나의 구세주라 고백하는 한 이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를 문제삼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기 예수의 의미를 여러분 삶에 적용시키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은 분입니다. 지금 오셔야 할 분입니다. 지금 환영해야 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오늘도 이렇게 찬양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115장 1절- 성가대 4절 다같이)

 

질문 4) 성경엘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는데 지극히 높은 곳은 제가 올라가 보지 않아서 하나님께 영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평화라는 말에는 언뜻 동감이 가질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참으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단지 전쟁이 있다 그런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장 먹고 살기가 힘이 듭니다.

얼마전 신문엘 보니까 먹고 살 길이 막연해진 어느 실직자가 전직 교장 선생님 댁에 들어가 쌀을 훔치다가 교장 선생님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실렸드랬습니다.

또 두 아이의 아버지인 이 모씨는 돈을 구하기 위해 택시강도짓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도대체 이런 현실속에서 땅에는 평화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 우리 성도들은 이 성탄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 참으로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지금 질문하신 분이 아는 것 이상으로 이 땅은 문제 문제 문제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리 만치 문제 투성이입니다.

경제면 경제, 정치면 정치, 가정이면 가정 모든 게 다 엉망입니다. 게다가 요즘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말 가운데 스와핑이라는 게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부부끼리 서로 상대를 바꾸어 섹스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이냐?

그런데 정말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다들 먹고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마는 그것도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서울 강남의 번화가인 로데오 거리에는 한끼 일인분에 20만원하는 식당이 만원이라고 합니다.

하나에 2-3천만원하는 핸드백도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고 세모를 맞아 동남아 항공권은 아예 동이 나버렸다고 합니다.

아마 아까 말씀드린 고요한 밤 광란의 밤이라는 콘서트 제목 만큼이나 금번 성탄절도 일부 계층에게는 광란 그 자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러한  인간의 세계를 동물들이 보았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 같습니까?(나귀와 소의 대화)

 

모두에게 기쁜 성탄절이 되는가 아니면 슬프고 착잡한 성탄절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어느 간호사는 친구를 마중하러  부산  에 나갔다가 얇은 셔츠 차림으로 떨고 있는 노숙자를 보고 자신의 점퍼를 벗어주고는 매일처럼 새벽 1-4시 사이에 역에 나가 노숙자들에게 컵라면을 끓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신사가 길을 가는데 장애인 노점상과 단속반원이 실강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좌판이 쓰러지고 팔고 있던 빵이 땅에 떨어져 흙이 묻었습니다. 이 신사는 그 빵을 주워 돈을 주고 그것을 샀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한둘 그 물건들을 팔아주어 금새 좌판에 있던 물건이 동이 나 버렸다고 합니다.

구걸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느 아주머니는 구걸해서 받은 돈을 따로 따로 모으는데 천원짜리는 먹고사는 생활비로 500원 짜리는 아들의 눈 수술비로 그리고 백원 짜리는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쓴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줄 뿐 아니라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문제에 둘러싸여 질식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아기 예수를 보내신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이제 몸으로 그리고 지갑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평화는 사랑위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나도 사랑이 부족해서 흘려야 될 눈물이 많습니다. 이 눈물을 모아 아기 예수의 구유에 선물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 낭송)- 배경 음악과 함께 담당자가 진행

 

손님 아닌 주인으로 당신을 맞을 마음의 방에

어서 불을 켜게 하소서

돌처럼 딱딱한 마음 대신

아기의 살결처럼 보드라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욕심으로 번쩍이는 어른 옷 대신

티없이 천진한 아기 옷을 입고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주의 말은 찬미의 말로 바뀌고

불평의 말은 감사의 말로 바뀌게 하소서

절망은 희망으로 일어서고

분열은 일치와 평화의 옷을 입으며

하찮고 진부하게 느끼던 일상사가

아름답고 새로운 노래로 피어나게 하소서

 

 

9장 영상설교 - 연구논문

 

21세기와 설교의 갱신

- 영상설교는 정보화 시대 설교의 한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 -

 

 

I. 들어가는 말

 

 인류는 지금 인터넷, 멀티미디어로 대변되는 거대한 정보화 시대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구전시대, 필사본시대, 인쇄시대를 차례로 거쳐왔다면 작금의 인류앞에 밀어닥친 새로운 변혁의 물결은 전자시대(electronic age)의 도래이다. 전자시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보지못한 첨단 매체로 특징지워 진다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매체의 급격한 변화는 세계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할뿐 아니라 인간들의 사고와 실생활 그리고 나아가 사회의 틀 자체를 급격하게 변혁시키는 엄청난 위력으로 우리앞에 다가서고 있다.

 수동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새로운 도전의 물결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극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인들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반론은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1999년 12월 24일) 전자시대의 총아인 인터넷은 2001년에 이르면 그 이용자가 6억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웹(web)은 종교활동의 주요 수단이자 '영적(靈的) 수퍼마켓'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CNN은 종교사학자 스티븐 찰스턴의 말을 인용해 종교의 본질이 사람들간의 접촉을 통한 위안이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그런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급변하는 세태에 대한 반동으로 '근본주의'로 회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 가능성을 일부 인정한다하더라도 우리는 미디어가 변할 때 종교역시 일종의 변혁의 과정을 겪어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사이버처어치가 등장하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예배를 대치할 매체의 준비가 급속화되어가는 현실, 과학만능주의와 테크노피아를 부르짖는 시대흐름, 그속에서 문화낙관주의(Kulturoptismus)에 빠져드는 동시대인들의 경향성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자체로 위기이고 거센 도전이다. 새시대의 거센 파도앞에 기독교와 현장의 교회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나아가 이 물결의 힘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화두가 오늘처럼 절실한 적이 없다.

 우리의 관심을 설교라는 테마로 집중한다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한국의 강단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강단들에 대해 '위기'라는 처방이 내려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포사이드(P. T. Forsyth)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가 설교와 함께 일어서기도 쓰러지기도 한다'1)면 교회가 정체국면으로 접어든 작금의 상황에서 그 오욕의 주범으로 설교가 거론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21세기의 특징이 매체의 변화라 한다면 따라서 그 어느 분야보다 시급한 점검을 요하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인 설교이다.

 

 우리가 함께 주목하고자 하는 영상설교는 아마도 이런 질문과 매체의 변화에 대응하고자하는 설교의 시대적합적인 한 모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000년 설교의 역사에서 줄기차게 견지해온 기존의 "구연설교"(Mundpredigt)를 전달매체의 혁신적 변화물결에 접맥시켜 보려는 설교 전달 패러다임의 한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상설교가 - 영상예배도 마찬가지지만 - 매체변화에 길들여진 회중들에게 다가서려는 순수한 의도와 복음의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선한 의도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설교패러다임은 그 자체로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는게 사실이다. 전통적인 구연설교와는 파격적으로 다른 영상설교의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정보화 시대속에서의 경쟁력(?)있는 설교는 결국 그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설교로 국한시킬 수 있는가, 매체의 변화를 수용하지않는 기존의 설교는 適合性(Gemasheit)을 가질 수 없는가?

 이런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정보화 시대의 변화양상과 그것이 설교회중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영상설교가 새로운 시도라 할 때 그러한 변화의 시도가 가능한 것인지를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살펴 볼 것이다. 4장에서는 영상설교의 성격과 문제점들을 다룰 것이며 5장에서는 설교의 불변적 성격과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의 바람직한 방향을 다루도록 할 것이다.

 

 

  II. 정보화 시대와 변화의 물결

 

  미래학자들이 진단하는 것처럼 오늘의 세계는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고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모든 분야의 발전중에서도 특히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발전은 괄목할 만한 것인데 이런 발전의 動因으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와 컴퓨터시스템으로 대변되는 뉴미디어, 이름하여 멀티미디어의 출현이다.

 원래 미디어란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표현양식을 일컫는 말로 그림 소리 문자 기호 화상 동화상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인데, 이것이 실생활의 제품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전화 라디오 텔레비젼 신문 팩스등 이다. 멀티미디어란 이러한 단일 매체들을 통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환경을 일컫는 말로 1990년 이래 개개 미디어의 디지털(digital)화가 이루어놓은 결실이다. 이 용어는 정보화라는 용어로 호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데 경제학자인 황 두현은 이 용어를 "인간의 소비활동이나 생산활동에서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산이나 소비에 관한 행동정보(소프트웨어)를 도구나 기계(하드웨어)에 이전시켜 인간의 노동을 도구나 기계에 분담시키는 현상"2)으로 정의한다.

 지금은 초보단계에 불과한 단계이지만 기술발전의 속도로 미루어 볼 때 21세기 중엽에는 멀티미디어의 환경이 급속도로 구축될 것이며 이런 새로운 환경의 구축은 사회 각 분야뿐 아니라 인간의 생활 나아가 인간사고에 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사회, 정보화 사회의 조짐은 대표적으로 컴퓨터 분야 및 이를 응용한 家電분야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으며 변화된 인간상 역시 X-세대 Y-세대 C-세대3) N-세대라는 생소한 인간형(?)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II. 1 변화된 세계

 

 정보화 사회(information society)란 정보와 지식이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는 사회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은 세계 전반을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비롯 가정과 직장 개인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고 그 추세는 더욱 가속화 되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기계적 전기적 기계전기적 시스템이 점차 전자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으며 소형화(miniaturization) 디지털화(digitalization) 그리고 소프트화(software)가 가속화 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물론 인간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해 주고 복지사회라는 이념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문제점도 안고 있는게 사실이다.다.

 

 앨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에서 우리가 정보화 시대라고 일컷는 시대의 특징을 생산과 소비의 분열에 기초한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집중화, 극대화, 중앙집권화로 특징지워지는 제 2물결의 산업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일련의 변화로 진단하면서 제 3 물결의 특징을 매체의 탈 대중화, 탈 대량 생산, 의사결정의 탈 중앙집권화, 가족의 탈 대중화(핵가족을 대신하는 개인주거 형식의 보편화) 다목적 기업화 초국가적 조직망의 확산과 민족국가의 위축등으로 예견했다4).

  한편 다니엘 벨은 "탈 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Post-Industrial Society)에서 탈 산업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5):

a. 산업사회에서 자본과 동력이 전략적 자원으로 변모해 왔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가 전략적으로      중시되고 사회적 자원으로 변화된다.

b. 과학과 기술의 변화로 인한 이론적 지식과 정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탈 산업사회는 이를 생산하는     대학이나 학회 연구소등과 같은 각종 연구기관들이 핵심적인 사회기관으로 떠오른다.

c. 산업사회가 재화중심의 사회인데 반해 탈 산업사회는 기술혁신으로 인한 서비스 생산중심 사회이며 따라서     인간 상호간의 게임이 주가 되는 사회이다.

 

 정보화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가운데 하나는 사회의 통합체계화이다. 이런 특징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기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온라인 시스템, 컨트롤시스템, 데이터베이스매니지먼트, 서비스통합디지털망(ISDN: Intelligence Service Digital Network), 인터넷 등이 현재 이것을 외형적으로 규정하는 것들이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이러한 사회적 통합체계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이 이론을 창시한 비이너(N. Wiener)는 이것을 "유기체와 기계체를 통합하려는 사상"6)으로 정의한다. 즉 유기체인 생물과 기계체인 컴퓨터를 통합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인간지식의 하드웨어화이다. 인간의 지식이 컴퓨터에 입력되면서 획기적인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사고활동의 상당부분이 컴퓨터에 의해 대행되게 된다.

 이러한 정보화사회에서는 전통적인 知識이 情報로 인식되게 된다. 이말은 지금까지 지식이라는 고착된 개념이 언제든지 새로운 정보에 의해 加減/變化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더우기 오늘의 정보개념이라는 것이 주로 물질적 에너지의 형식에 관계됨으로 인해 인간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배제된 물질적이고 자동기계적인 면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흘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보화사회에서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인간의 노동과 관련된 개념의 변화이다. 석기시대에 사용하던 賭具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엇음에 비해 정보화 사회의 도구는 고도로 집적된 기술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양태상 큰 차이를 보이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도구에 전이시키고 인간의 일의 효율성을 위해 첨단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 사용범위가 단순히 육체적 노동의 차원뿐 아니라 전문 정신노동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환원하면 인간은 도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상아래 놓이게 되고 인간의 가치역시 그 도구의 熟練度와 그것을 통한 效率性의 창출이라는 척도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構圖아래 인간의 가치는 인간성으로 판단되지않고 효율성으로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를 특징짓는 또하나의 현상으로는 지식이 지배하는 사회상을 들 수 있다. 이제 정보라는 것은 더 이상 인격의 도야나 특정한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통과의례의 차원정도가 아니라 지식자체가 개인이나 공동체의 존립을 결정하는 주요 자원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특히 오늘의 정보라는 것은 데이터베이스화 할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그 전달 및 효용여부가 결정되다보니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는 온통 자연적인 지식이 주종을 이루게 되고 소위 초자연적인 영역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은 인간됨의 가치를 중시했던 종래의 정보가 실용적, 현상적 정보에 의해 밀려나고 삶의 편리성과 합리성, 신속성이 우선적인 잣대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테크노피아의 지상구축적 발상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소위 기술문화에 대한 인간의 樂觀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기실 정보화 시대에는 공장 자동화(FA), 사무자동화(OA) 그리고 가정자동화(HA)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에 의해 실현되어진다. 모든 것이 인터넷을 통해 가능해지고 자신이 주문한 것들은 電子的으로 디자인되고 생산되고 배달되고 결재되어진다. 이런 理想이 현실화되는 시대는 逆으로 인간까지도 그 구조속에 從屬시키는 物化의 비극을 포함하게 되고 또 정보에 의해 개개인이 지배받고 종속되고 감시받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런 인식과 상관없이 이시대는 기계적 합리주의에 기저해 유토피아를 향해 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物神의 범주아래 기계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가 정보화사회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II. 2. 변화된 인간

 

 이런 사회는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逆으로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영향받기 마련이다. 사회를 만든 인간이 그 사회에 의해 지배받고 변화되며 그 변화는 단순히 삶의 외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와 가치관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TV등 미디어의 등장이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었는가에 대해 포어(W. Fore)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7):

첫째 사람들은 효율성을 최고의 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 기술이 사회를 규정하며 기술은 인간이 영향을 미칠수 있는 것 이상의 실재가 된다. 셋째, 적자가 생존한다. 넷째, 권력과 의사결정은 중심에서 시작하여 바깥쪽으로 움직인다. 다섯째, 행복이란 끝없는 물질 획득이다.

 

 그렇다면 정보화 사회하의 인간은 어떤 변화의 양상을 보이는가? 바빈(P. Babin)은 정보화시대에 대중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네가지로 정리한다8):

 첫째는 대중의 주체성 극대화이다. 소수 엘리트의 사상과 권력 및 자본에 의존해오던 중앙집권적인 사회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일반 대중의 잠재력이 사회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전 사회에서 이러한 대중의 주체성은 소수의 의식있는 엘리트에 의해 의식화되고 이론적으로 무장되었지만 정보화사회에서는 각종 매체(전자게시판, 전자우편, 전자동호회등)를 통해 대중들이 자신들 스스로 고유한 정보를 나눔으로서 사회를 움직이는 여론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둘째로 대중의 자율성이 극대화된다. 대중은 멀티미디어 환경하에서 소극적인 소비자에 머무르지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한다.

 셋째 대중의 개별성 극대화로 대중은 개개인의 이익추구를 위해 연대를 필요로 할뿐 인류의 共同善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連帶에는 소극적이 된다. 소위 이익사회로서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는 극대화되지만 인간공동체로서의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는 극소화된다.

 넷째는 대중의 臨時性이 극대화된다. 사람들간의 만남은 임시적으로 되어갈뿐 깊이있는 인격적 만남은 회피하고 타인과의 총체적인 연관관계를 갖는 것은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오직 기능적, 필연적 관계에서 부분적으로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정보화 사회는 긍정적인 면에서 대중을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형성자로 이끌어내고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까운 대중사회의 구현에 이바지한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대에 대중의 주체성 자율성 개별성 임시성 추구는 더욱 극대화됨으로 자칫 이익집단화의 위험성을 그 자체로 내포하게 된다. 즉 자기 利益을 앞세움으로 인해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이 어려워지는 대신 사회적 기능인으로의 만남이 주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기 이익추구와 자기 만족을 위한 개별자들의 집합으로 전락할 위험이 정보화 사회에서는 常存한다 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깊이있게 연구한 인물로 푸코(M. Foucault)를 들 수 있다. 그는 현대기술문명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특히 부정적인 면에서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이시대의 인간은 과학적 지식과 복종의 기준을 따르면서 자신을 훈련하게 되고 이런 지식과 기술에 따라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고 순종적 신체가 형성됨으로 결국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보여질 뿐이며 볼 수 없다. 개인은 정보의 대상일 뿐이며 결코 의사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9). 그에 의하면 기술의 발달은 권력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며 개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증진시키지도 못한다. 오히려 개인을 분리시키고 末端化한다. 지배층의 사람들은 더욱 증진된 감시능력을 갖게 되고 일반사람들은 감시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분리, 감금된다는 것이 푸코의 진단이다.

 

 조 동호는 정보화 사회가 가져올 변화를 개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의 단위로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10): 첫째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변화가 두드러진다. 즉 컨트롤에 의한 피해의식의 증가, 과도한 일체감, 대인관계의 변화, 시간적 촉박감, 양자택일적 사고방식, 스트레스, 우울증, 현실과 허구의 혼동, 현실인식의 약화, 고정관념의 조장, 공격성 증대 및 도덕성의 저하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가정생활의 변화로 이 시기에는 가족간의 유대가 약화되고 이에 따른 이혼의 증가, 독신노인의 급격한 증가 및 공동체 의식의 약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 직장생활의 변화로 실업의 증가와 정보처리증가로 인한 과도한 노동 및 불안등이 나타날 수 있다.

 

 II. 3 변화하는 청중

 

 우리의 주제가 정보화 시대의 설교문제라 할 때 설교의 대상으로서의 회중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인간들의 이해적 측면이다. 마샬 맥루언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는데, 그에 의하면 서양인들에게 지배적인 사고는 좌뇌기능에 의한 것으로11) 서구의 발전된 기술과 과학은 수천년간이나 지배해온 서구인의 시각적이며 논리적 사고와 양적 이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환경에 대한 수용은 槪念的이며(concrpt) '눈'을 통한 인식의 극대화를 이루면서 환경을 조정한다. 그러므로 조정가능한 인식의 틀을 벗어나 있는 것들은 '自然'이며 그것은 곧 카오스(chaos)와 같은 것으로 처리한다. 이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에서는 좌뇌 우위의 사고에 의하여 삶의 모든 가치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맥루언은 기술문명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죄뇌 우위의 사고는 더욱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연구를 좀더 발전시킨 것이 1981년 노벨상 수상자인 로저 스페리(Roger W. Sperry)인데 그는 분리두뇌(split-brain)연구를 통해 인간의 좌우 두뇌가  각각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즉 미개발 상태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오른쪽 두뇌는 미발육 상태가 아니라(not underdeveloped) 다르게 발달되어 있다(differently developed)는 것이다. 왼쪽 두뇌는 언어적(verbal),분석적(analytic), 계수적(digital), 합리적(rational), 논리적(logical)인 기능과 관련된 것임에 비해 오늘쪽 두뇌는 비언어적(nonverbal), 종합적(synthetic), 공간적(spatial), 유추적(analogic), 전체적(wholistic), 직관적(intuitive)인 것과 관련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12).

 

 이러한 분석은 지금까지 교육이 보여온 一方性의 방식이라든지 강단이 추구해온 '宣布'의 일방성이 더 이상 수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은 조정가능한 인식의 틀을 거칠 때 비로소 수용가능한 것으로 인정될 것이고 설교의 전달 기법이 회중과 설교자의 연대성(Solidaritat des Predigers mit dem Horer)으로 구체화되는 경우에만 수용의 필터가 열려질 것이다.

도이치만(Deutschmann)이나 아트킨(Atkin) 팔레츠(Paletz)등의 '인간행위의 선택성'에 관한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존의 태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참여하고 선택적으로 인식하며 선택적으로 저장하고 선택적으로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선택적 참여란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이라고도 하는데 청중 스스로가 좋아하는 연설만을 골라듣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청중은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다고해서 무턱대고 듣는게 아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사의 연설이나 자신의 태도에 부합하는 연설만을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또 선택적 해석이라고도 불리우는 선택적 인식(selective perception)은 주어진 메시지를 청중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일단 참여하여 연설을 듣는다 하더라도 청중은 연설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만을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아가 회중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기억속에 저장하고 회상해 내는 선택적 저장(selective retention)과 선택적 회상(selective recall)을 한다.

 

 이런 경향성은 상명하달식 사고구조가 무너지고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더욱 뚜렷하게 부각하여왔고 이런 추이는 정보화 시대가 깊어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갈 것이다.  물론 설교가 회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골라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어서는 안되고 또 설교에서의 회중이해가 그런 의미와도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회중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가르치려든다면 언제나 설교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회중이 듣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III. 설교의 시대적합성과 그 근거

 

 상술한 바와같이 현시대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의사전달 수단을 통해 이미 새로운 문명권에 진입했다. 따라서 매체의 변화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현실이해가 이전 시대와 달라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피할수 없는 도전으로 다가왔다. 종교성의 훼손(毁損)이라는 차원으로 보면 이러한 변화가 기독교에 부정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전달매체의 발달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귀를 다시 찾게된"13) 시대일 수도 있다.

환원하면 복음의 내용을 이해시킴에 있어 과거 어느때보다 내용의 명확한 전달이 용이해졌다는 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변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문명의 변화앞에서 보여온 태도는 어떤 것이었나? 오늘날의 새로운 현상에 대해 어떤 진단이 가능한가?  만일 전자시대의 매체들을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면 -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 그것의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영상설교라는 매스미디어를 기반한 설교의 새 패러다임의 수용은 가능한 것인가?

 

 III. 1 의사전달방식의 지속적인 변천

 

 인류는 그들의 지능발달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미디아의 변천 과정을 밟아왔다. 기독교 역시 지난 2천년동안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가 사용하던 매체를 그대로 이용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인류가 밟아온 미디어 변천의 변화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14):

 첫 단계는 가장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단계인 구술 커뮤니케이션 단게이다. 대략 4백만년전으로 그당시 사람들은 기록된 표시들을 정리하여 의사전달을 위한 그들의 언어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이 시대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언어, 목소리, 말씨, 억양, 표정 몸짓, 의상등 전달자의 태도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둘째는 기록 커뮤니케이션의 단계로 주전 3300년 전에 기록이라는 의사전달 체계등장/가 등장하였다. 기록의 발명은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게 함과 아울러 새로운 종류의 교육, 새로운 사업과 무역을 가능케 함과 아울러 계약, 법 제도등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방식의 등장이 마냥 긍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하베록(Eric Havelock)은 구전문화에서 읽고 쓰는 문화로의 전이가 사람들로 하여금 연설에 근거하여 고도의 정확한 암기력의 필요성 제거했다고 주장한다. 또 방대한 길이의 무용담 시 리듬 운율의 반복과 상투적인 문구들과 풍부한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기록이라는 방식은 이야기꾼 대신 작가들을 만들어 냈으며 그들은 사람 아닌 사상에 전념케 되었다15).

 

 옹(Qalter ong)은 기록이라는 방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구술로 묘사되는 언어와 사고는 분석적인 정확성이 없다. 즉 어떠누 사람이 감동적으로 말할수 있고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나타낼 수는 있지만 사려깊은 사고는 거의 표현하지 못한다 반면에 저술가는 연사가 즐겨쓰는 손짓 얼굴 표정 눈맞춤 피드백등을 이용할 기회가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저술가는 저술하면서 어떤 상황하에 있는 어떤 독자에게 무슨 의미를 뜻하게 될 것인지 모든 가능성을 예견하여야 하며 자신의 언어작품이 그 자체로서 분명한 것이 되도록 작업해야 한다16).

 

 세 번째 단계는 인쇄 커뮤니케이션으로 서구사회에서 구텐베르그로 대변되는 인쇄술의 발달은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을 확장시켰지만 앞단계의 변화에 비해서는 근본적이지 않다. 아이젠스타인(E. L. Eisenstein)은 "인쇄는 학문이 더 이상 신부들의 독점물이 아니며 무식과 미신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교황들의 명령을 받드는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결과적으로 서유럽을 암흑의 섹케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17) 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소수 사제들이나 학자들만이 소장하고 있던 성서가 일반 독자에게까지 보급된 것은 큰 공헌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기점으로 성서는 단지 읽는 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쇄매체를 수용하면서부터 교회는 논리적 분석적 연역적 그리고 추상적인 사고에 매달려 왔다. 또한 행동과 언어, 탁상의 해결책과 현실의 해결책, 전파한 설교와 들려진 설교 사이에 혼선이 빚어진 것도 인쇄매체가 만들어 낸 아쉬움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자 커뮤니케이션을 들 수 있다. 모든 전기 기술의 발달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1844년 사무엘 모스(samuel F. B. Morse)의 전신기이다. 무선전신은 바다위의 배와 다른 대륙과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저 케이불은 타 대륙과도 전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한편 1950년경부터는 텔레비젼이 각 가정에 도달하였는데, 이것은 사건을 그림속에 넣는 사진잡지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의 능력뿐 아니라 원자를 확대하고 반대로 세계를 축소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각인되었다.

 

 한편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총아인 컴퓨터는 1946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 Integrater and Calculator)이 처음 만들어진 50년 뒤 550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손톱만한 칩에 집적하고 초당 3억개의 명령을 처리할 수 있는 펜티엄 프로(P 6)가 상용화되는 단계에 까지 이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90년대부터 미국등 선진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정보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한편 군사적 필요에서 배태된 인터넷은 아르파넷(ARPANET)이라는 네트워크로부터 출발해 1993년 안데르센(Sakzm Adersen)의 연구에 의해 '모자익'(Mosaic)이라는 윈도우용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비약적인 인터넷 발전의 문을 열어놓게 되었다.

 

  보머샤인(T. Boomershine)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역사를 통해 보여온 교회의 태도를 거부(Resistance), 순응(Capitulation)그리고 전유(專有, appropriation)로 구분한다. 이것을 시대와 종파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18):

 

      거부           전유                순응

필사본

랍비적 유대교     초대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인쇄

 로마카톨릭           개신교           스콜라주의

우성프린트

  근본주의        역사비평             이신론(Deist)

                  자유주의            극단적 자유주의  

전자매체

정통보수주의           ?                전자교회

 

 이러한 변화의 단계와 그것의 수용양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문자미디어를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은 오랜 세월을 구전이라는 방식에 의존해야 했다 .적어도 천년이상의 세월을 거친 후에야 그들은 문자 미디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개신교 역시 필사본 문서 미디어로부터 인쇄 미디어로 넘어가기가지 수백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최근 전자시대가 개막되기까지 - 비록 전자시대가 본격화 된다하더라도 문서에 익숙한 세대들은 기존의 방식을 선호할 것이며 상당기간 이 양자가 병존하는 시기를 가질 것이지만 - 인쇄미디어는 종교적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자리잡아왔다.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파에 따라 그들의 성향에 따라 변화의 속도가 상이하고 수용과 거부의 양태도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의 시기가 있고 단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달방식에 있어 교회가 사회발전 양태에 발맞추려는 개방성을 견지해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口傳단계에서 필사본의 단계로의 변화라는 것은 매체를 갖지 못하던 상황에서 글이라는 매체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문자에서 전자로의 변화와는 분명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시간이 흘러 문서단계가 종결을 고하는 시기가 온다면 교회역시 전자매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의 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통해 새로운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종파가 그 다음 단계를 主導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교회는 첨단기술의 결실인 멀티미디어를 도입하는데 있어 소극적, 폐쇠적인 입장을 벗어버려야 한다.

 

  특기할만한 것은 종교가 새로운 매스미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어떤 효과의 상승만을 수반하는게 아니라 그 상승의 폭이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류최초의 미디어가 구전(oral)이었을 때 유대교는 야웨의 말씀을 음성과 시각적 효과로 전달되었다. 이런 전달은 신을 진노와 사랑의 열정을 가진 한 인격으로서 소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사본이 대중매체의 주류를 이루면서 신앙생활은 문자로 된 성서를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지성적 활동에 근거하게 되면서 하나님도 그의 존재와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인식되어지게 되었다. 즉 인격으로의 하나님보다는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인쇄문화가 보편화되면서 부터는 특정 감각활동의 극대화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다매체 시대에는 활자가 갖는 한계를 넘어 시각적 청각적인 전달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III. 2 신학적 타당성

 

 엄밀한 의미에서 내용이나 정수(精髓)의 변화가 아닌 틀의 변화를 놓고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매체의 변화는 곧 삶의 차원과 관련되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틀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회를 등진 어제의 인간으로 남기를 원치 않는 한 그리고 묘지에 묻힌 주검을 향해 복음을 전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당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견지에서 매체의 수용을 논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내용이나 그 틀의 정당성은 결국 신학적 바탕에 의해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첨단 매체의 교회유입 및 설교에의 사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이땅에 매체와 메시지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마샬 맥루한은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루한 역시 매체 자체를 메시지와 완벽하게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시인하였다19). 즉 예수 그분만이 매체이자 메시지인 것이다.

 더욱이 틸리히(P. Tillich)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은 것을 매체에 대한 우상화의 거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의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어진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있던 문자에 매여 문자 자체를 절대시한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담는 틀로서의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가 담아내려는 정신 혹은 메시지이다. 또한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문자이외의 새로운 것을 낯설어하는 것은 그만큼 문자에 우리가 익숙해 있다는 이야기일뿐 그것이 불변하고 단정적이며 유일한 틀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환원하면 복음이라는 내용에 손상을 끼치지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 틀의 변화 매체의 변화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복음은 그 시대가 만들어내는 문화와 그 시대의 매체를 무시할 수 없다. 시대가 변한다면 복음의 전달방식 역시 변화된 시대의 틀에 적응성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교회가 복음 전파와 전달의 수단으로 의지해온 문자 매체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전달수단이 문자화 활자화 되면서 부딪치게 되는 심각한 문제는 많은 내용들이 묵상및 관념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복음의 살아있는 음성'(viva vox

 evangelii)을 온전히 전달하는데 최상의 방법이며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데 필요충분한 조건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 발달이 문자와 인쇄 수준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異論의 여지가 없는 최선책이었다면 과학 문명이 또다른 대안을 내놓은 이시점까지 절대적인 방식으로 고집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매체 그자체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매체이든 그 자체로는 인격을 갖고 있지않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는 전자악기라든지드럼의 사용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 교회에 드럼이 유입되었을 때 보수적 성향을 띤 교회일수록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고 그 악기를 마치 부정한 것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의 많은 곡들이 민간에서 불리워지던 곡에 복음적 가사를 붙인 일종의 '콘트라팍타'(Contrafacta)였다. 이런 사실들을 염두에 둔다면 악기나 도구 그 자체를 선악의 판단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어떤 방법의 도입도 그것이 전통이 갖는 '정신'을 위배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정신'이 아닌 전통의  '형식'을 절대시하고 논쟁의 초점을 그쪽으로 끌고 가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의도와 사용자의 인격이다. 만일 회중의 흠미만을 자극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예배와 설교를 삼류 극장의 쇼로 전락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어떤 정당성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지금까지 사용해온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주려할 때 얼마만큼 회중들의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 역시 개개 사역 현장에서 선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III. 4 설교내용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노력

 

 설교의 역사는 이러한 구연설교가 기본적인 틀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보완내지는 다양화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어왔음을 알려준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말씀의 의미를 삼중적으로 정리하면서 언어가 가지는 최상적 가치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루터도 설교의 전달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마귀의 흉내도 내고 시험받는 회중의 역할도 떠맡는 '가상대화법'을 설교에 즐겨 도입할 만큼 설교의 전달적 효과를 높이는데 있어 기계적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설교 방식 가운데 그림설교(Bildpredigt)와 찬양설교(Lied- predigt)를 들 수 있다. 그림설교는 시각적 전달이 가진 효과에 주목하여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명화들을 직접 설교단에 올려 그것을 설교에 이용함으로 전달의 효과를 얻으려는 동기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찬양설교는 당시 교회에서 불려지던 찬양을 설교본문으로 정하여 그것을 지은 사람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여정을 소개하고 회중과 같이 그 곡을 합창한다든지 가사를 음미한다든지 아니면 독창자로 하여금 일정 부분을 부르게 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회중과 동일한 성정을 지닌 작곡자 작시자의 신앙을 회중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미 100년 전부터 프랑크푸르트 화란 장로교회에서 설교자 2인을 내세워 인터뷰식 대화설교를 설교의 형식으로 고착시켜오고 있다. 이것은 주설교자와 보조 설교자가 설교를 분담하여 회중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을 양자간의 대화를 통해 대신 처리함으로 설교의 회중접맥성을 높이려는 소위 인터뷰식 대화설교이다. 이런 다양한 방식들은 비록 구연이라는 설교기법을 그 근간에 깔고 있으면서도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데 있어 교회가 경직되어 있지도 기계적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강단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어왔는데 설교중에 직접 가위를 들고 회중의 상투를 잘랐던 김 익두 목사라든지 명심도라는 연속 그림과 천로역정을 그림으로 그려 설교에 이용했던 이성봉 목사등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를 설교에 도입한 연극 설교와 설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설교에 등장시키는 역할설교등이 청소년층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 설교에서 오래전부터 애용되고 있는 시청각 설교나 융판설교등도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연설교라는 고정된 틀을 인정했지만 그 시대에 인간들의 문명이 만들어내고 또 응용할 수 있었던 각종 소재를 적극적으로 설교에 도임하는데 있어서도 열린 자세를 가져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 자체는 루터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그리고 최선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 최선의 것을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말씀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말씀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있어 구연이라는 형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 형식들이 그 자체로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익숙하다는 이유로 어떠한 설교방식 그 자체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불변의 원칙을 고수하려 한다면 이미 우리는 매카니즘의 맹신이라는 또다른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IV. 정보화 시대의 영상설교

 IV. 1 미디어의 교회 유입과 그 현황

 

 어떠한 신학적 입장이 정리되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찾아오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어떤 면에서 뚜렷한 신학적 고민이나 합의 그리고 입장의 정리없이 교회는 매체의 변화에 의해 크게 영향받아온게 사실이다. 멀티미디어 시대가 열리기전에도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시대의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통한 복음전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라디오의 종교프로그램은 상업방송국이 인가된지 두달이 못된 1921년 1월 2일 피츠버그에 있는 KDKA방송국이 갈보리 감독교회로부터 원거리 방송을 내보내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종교방송국 시대를 연 것은 컨콜디아 신학교 구약학 교수였던 마이어(Walter A. Maier)가 1924년 2월 14일에 '계속 앞으로 위에 것을 향하여'를 뜻하는 KFUO(Keep Forward, Upward, onward)방송국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는 이미 1925년에 교회가 63개의 방송국 소유하여 주일 예배방송을 중게할 정도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후 많은 종교프로그램이 난립하면서 텔레비젼을 복음전파에 사용하게 되었는데 빌리그레함이나 오럴 로버츠가 대중집회를 텔레비젼과 연계한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면 렉스 험바드(rex Humbard)와 팻 로버슨과 세븐 헌드레드 클럽은 텔레비젼 방송교회를 도입하여 정착시킨 인물들이다.

 방송교회에 관해 1980년 Time지는 미국 종교방송인 협회의 벤 암스트롱(Ben Amstrong)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방송은 권위를 목사들로부터 다이얼에 손을 얹은 평신도들에게 옮겨주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미국 종교의 권력구조에 일대 변화이다"(방송교회의 영웅들 Time 1980. 2월 4일 64-65).

 맥 로린(William McLoughlin)은 이런 변화를 기존의 대각성의 연장인 4차 각성(1960-1990)으로  보기도 하는데 1982년 갤럽 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43%가 한달에 한번 정도 종교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으며 매주 700만명 정도가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략 30-90분의 방송시간을 사서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며 가시화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메시지가 주로 마귀, 적극적 사고 그리고 자긍심을 강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갤럽 연구소의 연구는 방송교회는 시청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강화해줄지는 모를 지언정 효과적인 복음전달의 방법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TV의 종교 프로그램 시청자는 반드시 새롭고 젊은 혹은 다양한 수용자가 아닌 거의가 기존 신자들이고 교회출석자들이며 헌금을 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일련의 종교적 신념을 표출하고 확인하려는 까닭에서 시청하지 그것들을 대체하려는 이유에서는 아니기 때문"이다20). 또 방송 프로가 종교와 세게에 대해 제한적이고 편협한 견해를 고착하고 강화하는데 일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42). 물론 방송교회가 기여한 점도 적지 않다:

1. 방송교회는 미국 매체문화의 비인간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저항하여 직각적으로 역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영적 기갈을 정확히 진단하였다. TV전도자들은 인간무시 인정받지 못함 상품처럼 취급됨 이것들로 인해 상처받는 인간을 간파하였고 기존의 교회들이 이것을 간과하는 사이 방송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2. 방송교회는 쌍방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 모델들은 TV위성과 유선방송 기술뿐 아니라 컴퓨터가 관리하는 개인서신 서적들 팜플렛 연구과정 장거리 정액전화제도(WATS)소개와 양육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지역집단 이용등을 창의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방송교회는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방송교회가 새로운 욕구에 귀를 기울였지만 적절히 충족시키지 못하엿다는 점과 복음전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방송교회가 점차 상업방송과 그 요구에 포박당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비위만 맞추는 쪽으로 복음을 경박한 것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의 주제와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멀티미디어의 교회 유입은 어떠한가? 이에 관하여는 크게 세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기존의 교회를 떠난 온라인 처어치(on-line-church), 텔레비젼교회(TV church), 전자교회(electronic church)로 불리우는 소위 '假想교회'(cyber church)의 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유형은 아직까지 가상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활발하지도 않고 신학적 근거역시 뚜렷하게 제시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인터넷이라는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 혹은 기성 교회에 대한 환멸등이 가상 교회를 출범시킨 동기가 아닌가 추정되어진다. 아마도 이런 가상교회는 전통적인 의미의 목회자보다는 인터넷 기술에 능한 평신도들에 의해 주도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또다른 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통합디지탈 서비스망'(ISDN: Integrated Service Digital Network)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구축됨에 의해 '통합적 네트워크형 교회'(Integrated Network Church) 혹은 '간(間)교파적 교회(Inter-Church)의 출현이 예견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교파적 구분을 초월해 교회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각각의 교회들은 나름대로의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기 미련인데 이런 개교회적 전통을 정보화하고 잠재적 역량을 공개함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활용함을  의미한다.

 

 여성신학자 콥(Jennifer J. Cobb)이라는 여성 신학자는 "가상은혜"(Cybergrace)라는 저서를 통해 조심스럽게 가상공간의 신학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녀는 양자물리학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를 고정이 아닌 진행으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을 과거보다 더 향상, 진화, 팽창시킬 수 있으며 보다 깊고 넓고 높게 경험시킬 수 있는 분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특성을 창조성으로 파악하면서 컴퓨터의 가상공간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창조성을 신적 속성과 연결시킨다. 동시에 창조성은 본질상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계산보다는 기도에 가깝우며  창조적인 것 주관적인 것 관계적인 것 무형의 것을 시험하는데 익숙한 것을 신학의 성격으로 규정하면서 이 모든 것이 가상공간의 모든 성질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가상공간이 우리가 신이라 불리우는 성스런 영역에 불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컴퓨터가 창조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천명한다. 그녀는  컴퓨터에 거룩이라는 것이 현존하며 이러한 가상공간에 대한 성스런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과학적, 종교적 세계관 간의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21).

 사이버 문화의 창궐은 엄밀히 말해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상현실의 활용이 의료 교육 레저 군사 영화 예술 건축 디자인 오락등 거의 모든 분야에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라든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이 매체혁명의 물결속에서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와 신앙지도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의 탈선이라는 일반론과 함께 사이버 교회의 가상현실속의 예배로 인한 교회공동체의 개인화 및 공동체성 약화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점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다 광의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의 대처가 필요하다. 우선 가상현실이 하나의 사회정보전달체계의 중심으로 등장한 이상 이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신학화 작업, 가상 현실을 염두에 둔 평신도 교육커리큐럼의 개발 및 신학교육 과정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작업으로는 먼저 회중들에게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정확히 교육하여야 하며 예배가 갖는 공동체적 성격과 복음의 공적 임무를 숙지시켜야 한다. 또한 양적 성장에 치중해온 기존의 목회개념에서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진정한 목회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동시에 사이버 문화의 개인화와 자기도피화에 대비해 대인관계의 회복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희생정신의 강조등 공동체 의식 개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런 작업의 기초위에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말씀의 예전과 성찬의 예전이라는 두 기둥을 예배에서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예배의 갱신을 모색한다면 가상현실의 사회체계속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침해받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은 멀티미디어를 교회에 도입하여 기능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이것은 새로운 전달매체를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의 교육 봉사 선교 행정 예배 기관별 프로그램 기획 및 진행의 효율적 관리에 사용하는 교회적 차원과 목회자가 설교와 목회의 효율을 기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랄프 하디(Ralph Hardee)는  개교회 멀티미디어화를 기능적인 면에서 설치단계(Embarkation-컴퓨터 응용 소프트웨어화와 하드웨어 구비 시행착오와 불안수반) -능률단계(Efficiency-초보단계, 시간절약 행정의 능률, 데이터축적 데이터 참고정도) - 효과단계(Effectiveness-중급단계, 생산성 향상 능류의 강화 데이터의 정보화 정보의 비교와 분석) - 강화단계(Enhancement)-전문단계, 성장목적, 창조적 작업, 실험적 양식 정보의 해석)의 4단계로 나누고 있는데22) 한국 교회의 경우는 설치단계 내지는 능률 단계등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교회의 관심 부족에서부터 재정, 인원 환경등 여러 요인들과 맞물려 있으며 목회자 개인의 차원에서도 젊은층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낯익은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단적 혹은 초교파적인 정보운영 시스템의 운영과 함께 신학교에서의 커리큘럼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IV. 2 영상설교의 본질과 문제점

 

   상술한 바와 같이 매체의 변화가 기독교 복음전파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져 온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 패러다임의 변화 역시 그 가능성은 열려져 있다 할 수 있다.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염두에 둘 때 이러한 변화는 정도의 차이가 문제로 대두될지언정 당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매체의 변화가 내용에 대한 이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인쇄문자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은 분석적으로 나뉘어지고 개념적으로 정리된 관념상의 하나님이었다. 문자로된 성서는 모든 사건 교훈 그리고 구체적인 인물과 역사를 단지 문자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서 역사와 인물을 살려내기보다는 설명하고 묘사하는 1차원적 전달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이 차원에서는 읽는 행위 그리고 일방적으로 듣는 행위가 주종을 이루게 됨에 따라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움직이는 動的 부분이 차단되었고 따라서 회중의 이해와 수용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수반했던게 사실이다. 멀티미디어라는 매체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여 활자화된 역사를 살리고 인물에게 구체적인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전달과 수용을 가능하게 한다. 맥루한이 분석한 다음의 표는 이 사실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23):

                       의사전달과 매체의 효과 개요

의사전달수단

 정보환경

인간정신반응

문화적 가치

국가와 교회

학습행위

  음 성

   청 각

  정서적

  인격적

  부족적

개별교육

  문 자

   시 각

  분산적

  비인격적

  국가적

학교교육

  시청각

   촉 각

  전체적

  기술적

  전체적

환경교육

 

  이렇게 본다면 멀티미디어의 다양한 매체를 설교에 접목시키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디어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것처럼 미래는 '읽기' '쓰기'의 전통은 사라지고 '전자시대'(Electronic age)가 도래하고, 또한 새로운 매체의 수용이 단순한 편리함의 차원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자기 이해를 함축하는 차원을 포함한다고 볼 때 - 언제나 찬반 양론은 있기 마련이지만 - 단지 현재매체에 대한 숙련과 새로운 매체에 대한 생경함을 이유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영상설교는 음성 그림 문자등 이질적인 형태의 정보를 디지털 신호라고 하는 단일한 신호처리 방식에 통합적으로 처리하고 전송하는 멀티미디어의 기능을 설교에 적극적으로 접맥하여 설교내용의 전달을 극대화 하려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현장감과 입체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Surround Stereo와 동화상 그리고 3차원의 문자를 설교진행에 동원하는 설교이다.

 이 설교방식은 엄밀히 말해 신학적인 검증없이 매체의 편리함과 전달효과를 우선적으로 설교에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열린 예배' 의 축제성을 살리기 위해 예배전체에 다양한 매체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설교에 까지 연결된다든지 어떤 특별한 주제를 다루면서 설교의 효과를 배가시킬 목적으로 그 주제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동영상을 곁들인다든지 아니면 교회의 크기 때문에 설교자의 모습을 보다 확대해서 보여주어야 할 필요로 인한 카메라의 설치등 매우 다양한 현실적인 동기와 이유가 신학적 필터나 가이드라인없이 새로운 설교방식을 발진시켰다. 따라서 단순히 설교자의 얼굴만을 중계하는 방식이 아닌 설교를 위해 제작, 편집된 동영상을 사용하는 영상설교에 대한 신학적인 안내와 검증은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영상설교는 그 인식이나 시행에 있어 거의 초보적인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는 반드시 구연이어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고정관념과 설교에 대한 - 정확히 말하면 설교방법에 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는데 - 신학적 판단이 설교와 미디어의 연결을 가로막는 장애로 등장하는 가 하면, 회중들의 인식부족, 재정적인 문제 그리고 동영상자료의 확보등 여러 이유들이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격적인 영상설교를 시행하는 교회라고 해야 이를 위한 전문 전산팀을 가동하고 있는 울산 감리교회와 홍성교회등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교회에서의 영상설교는 동영상과 드라마 찬양과 워십댄싱등으로 이루어진 '축제식 프로그램예배'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데, 예배 자체의 파격(?)이 영상설교의 생경함을 압도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스크린을 이용하여 설교자의 모습만을 동영상으로 회중에게 비추어 주는 초보적 단계에서 부터 성경 본문과 설교의 핵심적 내용 그리고 찬송의 가사를 문자화 시켜 영상으로 처리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상설교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상 설교는 설교와 동화상 입체적인 문자 그리고 서라운드 입체음향이 설교메세지를 실어나를 때 비로서 이름붙여줄 수 있다.

 

 영상설교는 그 메시지의 성격에 따라 매우 다양한 구성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설교메시지와 관련된 동화상을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로부터 발취하여 설교도입부, 설교 중간, 혹은 설교 끝 부분에 내보내주는 방식을 취할 수 있으며 설교자의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설교 내용에 상응하는 정지화면 혹은 동영상을 지속적으로 방영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또 청각적인 면에서는 오디오기기를 이용하여 설교내용과 관련된 소리나 음악을 내보냄으로 설교의 내용전달에 대한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도 행해지고 있다. 또한 파워 포인트나 그래픽 문자를 이용하여 설교의 핵심 내용이나 관련 성구를 동화상위에 깔아주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영상설교를 소위 한국식 '열린 예배'속에서 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기계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물론 회중의 중지를 모으는 열린예배 형식과 영상설교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영상설교가 담기는 맥락을 '갱신된 예배'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예배갱신은 언제나 지속적으로 열어놓아야 하는 과제이지만 이에 대한 분위기가 성숙하지않은 경우에는 설교 그 자체만의 변화만이라도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상설교라는 것은 말하자면 사회의 전달체계의 변화와 발맞추어 '듣는 설교'에서 '보는 설교'를 지향하는 회중들의 경향성에 대한 정당한 고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설교가 이런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며 또 변화하는 회중들의 성향과 매체의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잘 부합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 먼저 생각할 것은 매체가 내용이해에 순기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샬 맥루한, 에드문드 카펜터등은 매체가 감각기관의 연장물로 작용하는데 이 매체가 눈 귀 여타기관들 사이에 맞추어진 내적 감각균형을 깬다고 주장한다24). 특별히 움직이는 동영상이 설교와 함께 깔릴 경우 쉬임없이 변하는 동영상은 회중들로 하여금 화면에 집중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버린다. 만일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채 설교하게 되면 회중들은 화면의 장면만을 머리에 각인한채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본 기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배치하기 보다는 구분하여야 하며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에 마지막 목표를 두도록 하여야 한다. 즉 보는 것은 반드시 듣는 것을 통해 생각되어지고 해석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다른 문제는 미디어 자체가 가지는 흡인력과 메시지가 주는 힘 사이의 구별의 문제이다.25) 환원하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감동되는 것과 메시지 내용 때문에 감동되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동화상을 설교에 접맥시키는 것은 설교자의 말이라는 일차원과 시청각적 동화상이라는 3차원의 결합이다. 회중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1차원적인 구연보다는 3차원적인 동화상이 훨씬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이럴 경우 과연 회중들의 인상에 각인되는 것은 1차원보다는 3차원적인 수단이 더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교의 맥락에 맞는 동화상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에서 사용되어지는 동화상들은 거의가 상업적인 필름의 일부에서 발취된 것들이다. 이 말은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성서의 메시지만이 아니라 그 메시지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동화상 자체에도 준비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가 성서적 복음적인 내용이고 그 동기자체도 그 범주에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세속적 상업적이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의 상반된 메시지가 회중에게 주어진다할 때 - 비록 동화상의 메시지가 갖는 상업적 성격이나 세속적 성격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다 - 과연 어떤 메시지가 회중에게 더 어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비록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의 보조수단으로 설교의 맥락을 고려해 선별한 것이지만, 그리고 동화상으로부터 받는 메시지의 본래 의도는 숨겨져 있는 것이지만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3차원의 보조자료가 우위를 점한다고 할 때 이 문제는 심각히 생각되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동화상을 설교전반부에 재치하였다면 그것이 끝난후 이어지는 구연으로서의 1차원은 이미 전달방식이 복합성에서 단순성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과연 설교자는 회중들이 동화상을 통해 받았던 인상을 그대로 유지시켜야 하고 나아가 설교본래의 메시지로 동화상이 주는 인상을 뛰어넘을수 있어야 한다는 더 큰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요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설교의 전달을 위해 도입한 동화상은 설교의 메시지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미디어의 사용은 설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해칠수 있는 흉기의 기능으로 오용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화상을 통해 다양한 화면을 설교시데 띄워줄 경우 과연 이것이 설교의 집중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가의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 더더욱 설교내용에 따라 수시로 동화상을 띠울 경우 회중들은 설교자와의 시선접촉보다는 화면과의 접촉에 몰두할 것이며 따라서 설교자를 중심한 회중과 설교자의 대화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 아무런 동화상의 전송없이 설교중 오직 설교자만을 화상에 비출 경우에도 - 이것은 예배실이 넓은 경우에 주로 해당이 되겠지만 - 또다른 부담을 설교자는 짊어져야 한다. 즉 확대된 화면을 통해 온 회중은 설교자의 세세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의 표정관리나 단상에서의 처신 그리고 설교내용에 따른 표정의 수반에 이르기까지 설교자는 이전보다 더많은 자기 관리와 훈련을 요청받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설교에 동원되는 미디어들은 그 자체로 설교의 메시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조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효과'와 관련된 기능만을 가질 뿐이라는 사실을 전제할때 뉴 미디어가 본래 미디어 즉 성경을 넘어서서 그 내용을 왜곡내지는 과장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즉 성경에 실린 내용을 전달하는 보조수단으로 기능해야 하는 매체들이 성서의 상황과 메시지를 이미지화함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관을 자극하고 그것을 통해 전달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위험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또한 다매체를 설교에 적합시킬 경우 예배가 갖는 거룩한 분위기가 훼손될 수 있다는 문제도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매체의 사용은 인간들의 이해를 돕기위한 의도에서 시도되는 것이다. 즉 기본적인 축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수용자 중심이라는 현대의 상업적 발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는데, 이 의도가 실제적인 방식으로 연결될 경우 예배와 설교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거룩한 분위기가 훼손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물론 예배가 갖는 축제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기쁨을 드러내는 축제와 매체에 의존한 '종교적 쇼'와 같은 인상을 풍길 수 있는 축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역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보조자료로서의 동화상들이 주로 세속적 자료에 의존한 것이라면 최초 제작의도나 그 내용에 있어 설교가 가진 것과 같은 의도의 순수성과 내용의 복음성을 견지하는 자료의 제작이 여전한 숙제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교회에서 감당하기에는 매우 지난한 과제로 범 교단적, 초교파적 공동작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또 아무리 시대가 급속히 변하고 세로운 미디어의 설교접맥의 필요를 공감한다해도 이것들을 실천에 옮기는데에는 적지않은 예산상의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적어도 한국 교회의 반 70% 이상은 이런 재정적 부담을 해결할 입장에 있지 않다.

 

 V. 설교의 불변성과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의 방향

 

  지금까지 우리는 변화된 세계와 그 세계속에서 필연적으로 변화될 수 밖에 없는 인간 그리고 그 변화를 외면할 수 없는 기독교와 교회현장을 영상설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집중하려는 것은 이런 일반론으로부터 시야를 좁혀 설교라는 특정한 주제가 시대의 변화에 일일이 적응해야 하며 따라가야 하는가, 변해야 할 부분과 불변의 부분이 나뉘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분명해 지지않으면 설교는 시대의 하녀로 전락하고 말것이며 원칙없는 배회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설교가 가져야 하는 시대적합성은 설교가 갖는 시대초월성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인지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질 수 있다.

 

 

 V. 1 설교의 불변성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도대체 설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가운데 하나가 설교를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회중의 운집을 위한 도구정도로 설교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인데 만일 이런 차원에서 설교를 생각한다면 이미 설교는 오래전에 흥미로운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어야 했고 기독교 역시 말씀의 종교(Religion des Wortes)라는 그 자체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려야 했을 것이다. 또 이런 경우라면 오히려 멀티미디어를 설교와 호환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설교의 개념은 곧 성만찬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하시는 기회'가 설교라는 것이다. 즉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를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26). 바르트(K. Barth)가 갈파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하나님과 참인간이 함께 있는 것(Zusammensein)이다. 즉 영원과 유한의 역설적인 모순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Paradoxe Gegensatzeinheit von Zeit und Ewigkeit)27). 따라서 죄인으로 유한이라는 숙명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들은 이 예수를 통해 영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이 계시된 하나님은 그러나 영국의 이신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하되 간섭하지 않는 그런 신으로 남아있기를 거부하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기를 원하시는 분 (Anredender Gott)이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서를 읽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다가오신다. 또한 예배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시며 성만찬을 통해 설교에서 선포된 그 뜻을 가시적으로 확증시키신다. 이렇게 본다면 설교라는 것은 성만찬과 더불어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이고 따라서 성도의 동원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순서이다.

 

 이 설교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요소외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설교재료로서의 성서와 누가 말할 것인가라는 설교자 그리고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라는 회중의 세가지의 가시적인 축으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교가 기독교적 연설(evangelische Rede)이라 할 때 반드시 성서로부터 메시지가 추출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메시지추출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 설교자라는 사실이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가 갈파한 것처럼 설교자는 회중에 의해 본문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는 이런 말씀에의 위탁에 근거하여 본문과 씨름하는  '본문에 대한 첫번째 경험자'(erster Erfahrer)이다. 설교자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잡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결정되고 회중이 어떻게 변하는가가 결정되게된다. 환원하면 설교자가 본문과의 씨름을 통해 추출해낸 것(das usere)은 설교자의 의식속으로 내면화되고(das Innere) 이것은 다시 설교라는 행위를 통해 외적인 것으로 공표되며(das usere) 이것을 들은 회중이 그 내용을 수용함에 의해 회중의 의식속으로 내면화(das Innere)되어진다. 이것은 다시 회중들의 삶을 통해 외면화(das usere)되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설교자는 복음이 흐르는 관이고 메시지가 구형되는 틀이다. 설교자가 얼마나 준비되었는가에 따라 같은 본문이라도 각기 다른 강조점과 뉘앙스 그리고 상이한 구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설교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설교자가 전해주는 내용은 단순히 정보(Information)에 그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반 연설이나 강연과 구분되어진다. 설교자의 메시지와 설교자의 인격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고백 그의 성품과 세계관 그리고 신학적 입장 전체가 설교의 내용과 함께 용해되어있다. 따라서 설교는 이런 설교자의 인격과 회중의 인격이 마주치는 대화의 장이다. 이것은 그 어떤 매체로 대치되어질 수 있는 선택적 사안이 결코 될 수 없다.

 설교란 설교자라는 인격적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는 대화이며 비인격적 매체의 사용은 결국 설교를 돕는 보조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즉 설교의 핵심은 설교자이며 매체는 보조적 기능을 가질 뿐이다.

 "설교란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진리의 전달이다. 설교에는 두가지 요소가 담겨있는데 진리와 인격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생략될 수 없으며 또 그럴 경우 그것을 설교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뜻에 대한 표명인 참된 진리는 형제의 인격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지는 그런 방식을 제외하면 진리가 설교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창공에 쓴다고 가정해 보라, 너무 오랜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존경받아온 나머지 그것의 페이지를 적어넣은 사람들의 생생한 인격이 점차 시들해져가는 책속에 그것이 구현되어 있다고 추측해 보라; 그 어떤 경우에도 거기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설득력이나 친화력을 통해 타인들로 자신들의 생각을 경청하게 한다든지 혹은 그들의 뜻을 실행하게 한다든지 자신들의 총명함을 호소한다든지 하는 일체의 것 역시 설교가 아니다. 전자는 인격을 결여하고 있고 후자는 진리를 결여하고 있다. 설교란 인격을 통해 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28)

 

 비록 뉴메디어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대해 우리가 열린 자세이어야 하지만 매체의 사용이 설교의 전부를 좌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시대를 초월해 설교의 중심으로 위치되는 것은 설교자이다. 설교의 메시지는 뉴미디어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씨름하는 설교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새로운 환경에 의해 변화된 회중을 상대해야 하는 설교자는 이전보다 더 큰 책임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V. 2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의 방향

 

 상술한 것처럼 매체의 새로운 변화가 영상설교라는 설교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보이는 설교'를 위한 중요한 방식으로 자리잡아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는 설교에 있어 보조수단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보조수단이 과학화 되었을 뿐 설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회중의 경향성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설교의 변화를 당위로 요구하기 마련이다.

 

 우선 생각할 것은 설교의 내용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회중들의 관심은 매우 복합적이다. 바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기대가 궁극적으로 구원에의 기대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양보될 수 없는 철칙이다. 즉 구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자시기에 설교는 철저히 성서로부터 그 메시지를 추출해야 한다. 따라서 그 어느때 보다도 새로운 시대의 설교자는 성서적 설교자이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밀덴베르그(F. Mildenberger)가 이야기하는 시대진단의 기대라는 항목 역시 주목해야 한다. 회중들은 구속사의 맥락에서 지금현재 이 지구상에 나타나는 각종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설교자의 진단과 해석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가 시사보고서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설교가 회중들의 이런 관심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기독교적 진단을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교리적, 구원론적 설교일변도에서 설교의 테마를 확장시켜야 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추상적인 이야기(meta-narrative)나 총괄적인 담론(totalizierung discourse)을 거부하는 대신 자신들의 삶이 설교에 투영되기를 바란다는 경향을 설교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의 내용적인 면에 이어 우리는 설교의 형식적인 면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  최인식 교수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문법을, 단절성, 단편성, 절충성, 상업성, 개별성으로 보면서 이런 것들은 전체성 추상성 연속성 순수성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이성(ratio)우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는 것으로 진단했다29). 물론 이런 진단은 우리 설교를 위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신세대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감성적인 요소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역사가 보여주듯 청중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며, 설교라는 것 역시 감성 그 자체만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신앙에 근거한 이성적 동의를 요구함을 그 속성으로 한다.

 따라서 영상매체에 익숙한 정보화 시대의 청중들이 한 주제에 대한 무변화의 논구에 대해서는 다른 시대의 청중들 보다 인내력이 떨어지겠지만 그러면서도 만일 그 논구가 긴장과 흥미를 수반할 경우 여전히 그 논구의 과정에 몰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 시대의 문법이 설교에 영향을 미치는게 사실이지만 시대를 통틀어 설교가 지녀온 공통적인 문법, 즉 단순한 주제, 복합적 접근, 반복적 강조 일관된 흐름, 정적인 터치와 이성적 전달은 여전히 강한 생명력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시대와 상관없이 이런 설교의 특징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설교는 회중에게 성공적으로 수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는 우리의 설교는 새로운 회중의 변화양상에서만 해답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설교자체가 갖고있는 고유의 특징에 소홀했던 기존의 설교방식에 대한 반성과 극복에서 보다 분명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가령 지금까지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했던 설교는 주제식 대지설교였다. 이런 방식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교육적 측면에서는 강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설교는 학적 수준이 낮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낮았던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방식의 설교였다. 그러나 시대도 변하고 인간도 변했다. 더 이상 이런 방식의 설교는 청중들을 사로잡지 못한다. 비록 새시대의 청중이 아닌 오늘의 청중들 역시 일방성으로 흐르는 선포식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거부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일의 청중들 뿐 아니라 오늘의 청중들 역시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며,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대지 자체에 조각 교훈이 나오는 그런 설교진행에 대해서는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최근들어 한창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설교의 始終이 하나의 맥을 형성하는 '이야기식 설교'가 내일의 강단을 위해서도 중요한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는 설교본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관찰을 통해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추출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핵심 사안들을 설정한 후 이것들이 핵심아이디어와 맺게되는 관계를 기능어(what's problem, why not, what, who, when, where, why, how, what then)와 연결지어 하나의 맥을 형성한 전개로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설득을 위한 설명 - 말하려는 핵심의 진술이라는 방식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는 사건을 전제로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설교내용의 전달을 위한 기법은 - 우선적으로 내용자체가 설득력을 지녀야 하지만 - 만일 설교자가 논쟁적인 설교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전달되는 설교를 위해 필수적인 사항이다. 더욱이 회중들이적절한 커팅 셧에 익숙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적절한 변화의 장치는 미래의 설교에 필수적이다. 이런 장치의 내용으로 본문다시읽기 -본문에 대한 해석-경험적 진술 -본문같이 읽기 - 예화 - 정언적 정리 - 異論의 제기 - 논쟁점 추출 등을 들 수 있으며 설교자의 의도에 의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문어체 보다는 구어체의 구사와 휴지(pause)의 적절한 활용, 질문, 반복, 부연, 점층의 도입등 구전시대에 용이했던 수사학적인 기법들은 매체와 함께 사용됨을 통해 전달의 효과를 더욱 배가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VI. 나오는 말

 

  종교개혁의 설교이론을 제시한 멜랑히톤(Melanchtjon)이 주장한 것처럼 설교는 해석과 적용(explicatio et applicatio)의 두 기둥위에 자리잡아야 한다. 해석이라는 것이 성경과의 씨름을 전제한다면 적용이라는 것은 회중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환원하면 설교자는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오늘의 회중에게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 성서가 불변의 성격을 갖는다면 회중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특징을 갖는데 바로 이런 가변성은 시대의 옷이라는 틀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새로운 시대의 옷과 도구에 주목해야 하며 그것을 설교에 적절히 접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설교가 메시지 추출이라는 점에서 결국 설교자가 그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매체는 그 전달의 효율을 높이는 도구적 수단적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다차원의 도구사용이 단순한 매체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설교자에게 더 큰 책임감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준다.

 설교자가 말하려는 것 그리고 설교회중이 듣게 되고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보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기능으로 매체는 자리잡아야 하며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 설교는 설교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부록: 오후 예배 살리기

오후예배를 안 드릴 수 없어서 드린다면 차라리 그만두라, 그렇지 않다면 오후예배를 적극 개발하라

 

 

 

 

1장 오후 예배의 이론적 지침

 

 현재 한국교회는 정체 내지는 퇴보라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세속화의 심화, 과학발전에 따른 문화 및 인간 신뢰의 심화 그리고 이에 따른 영적 종교적 관심의 축소등과 같은 시대정신적 조류에서부터 비롯해서 성도들의 삶과 교회의 실존양식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요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 요인이 바로 침체된 예배를 들 수 있다. 주일 아침의 공예배는 단순한 순서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구도이상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아무런 감동이나 예배드리는 기쁨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채 순서에 끌려가는 예배가 된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는 목사나 장로들은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기존의 양태를 고수하고 있으며 그 어떤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두고 있는게 사실이다. 심지어 교단에 따라서는 예배에서 웃는 것 조차도 예배의 경건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금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실로 예배의 신학과 성격을 오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게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도시교회의 한 특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후 예배는 그 정도가 더 비참하다. 아침 대예배가 끝난 지 2-3시간 후에 연이어 시작되는 오후 찬양예배는 아침 예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주일 아침 예배의 '축소판'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청년 찬양단에 의한 찬양이 추가된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나마 찬양도 청년등에게나 익숙한 복음성가 일변도로 되어있어 나이든 노인이나 장년들은 정작 예배에 참석하고도 그 진행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예배가 거두어 드릴 수 있는 성과는 결코 풍족할 수가 없다. 회중들에게는 안 드릴 수 없으니까 드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뿐이고 이런 생각은 결국 2-3시간만에 예배를 또 드릴 필요가 있느냐는 오후 예배 무용론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심의 모이는 신앙 양태가 한결 느슨해 졌다. 예배의 횟수는 과거와 다름없지만 일주일에 단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배 출석 빈도를 갖고 신앙의 깊이를 논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삶에서 교회와 예배를 빼고 신앙의 성숙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어폐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앞으로 토요 휴무제가 도입되면 사람들의 탈교회화 탈 예배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런 경향성을 차단할 수 있으며 교회에 오는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 대책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배를 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주일 예배가 순서의 기계적인 반복이라면 여기에 찬양의 순서를 보강함으로 회중의 정적 차원을 터치한다든지 매주일 마다 바뀌는 순서를 1-2개 추가함으로 예배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도 예배에 활기를 불어넣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오전 예배에 포함될 수 있는 유동성이란 원래 새로 만들어낸 용어라기 보다는 전통적으로 교회의 예배에서 고정된 부분과 유동적인 부분을 구분해온 오랜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 말하자면 개신교의 예배는 카톨릭의 우를 범하지않겠다는 결심이(?)지나친 나머지 예배에서의 의식(ritus)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 종교에 있어서 의미를 실어나르는 의식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는가하면 또다른 한편으로는 예배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확립된 단순한 순서위주의 예배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체로 고정된 틀이 되어 버리는 또다른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일 아침 예배의 고정된 틀에 추가할 수 있는 유동적인 순서로는 유명인사 내지는 특정한 사연을 가진 인사와의 5분 인터뷰, 혹은 특별한 사연을 가진 분의 5분 간증, 예배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5-7분 분량의 동영상 상영, 특별한 음악적 재능이 있는 교인의 음악등을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려고 하는 것은 오후예배의 활성화 방안이다. 그나마 오전 예배는 신앙의 유무와 관게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잇어 성도라면 가급적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예배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지만 오후 예배는 전혀 다르다. 거의 전 교인의 50-60%만이 오후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시간대가 점심식사후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성도들은 밀려오는 식권증과 싸워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따라서 웬만한 준비없는 예배로는 회중들을 예배에 전념케 하기가 결코 쉽지않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오후 예배를 폐지할 생각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오후 예배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 이미 저녁 예배에서 오후 예배로 시간대가 변한 것이 변화하는 시대와 삶의 패러다임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면 오후 예배의 내용 역시 회중에 대한 고려를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즉 오전 예배가 전통에 기반을 둔다면 오후예배는 '현대적 적응성'에 바탕을 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이것은 어찌보면 예배의 역사에서 또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시도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위에 철저하게 준비되고 프로그램밍된 예배를 기획하여야 한다.

 

I. 오후예배의 기본 가이드라인

 

오후예배의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 가이드라인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예배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예배의 차별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성이란 2-3시간 전에 이미 드려진 오전 예배와의 차별성을 말한다. 즉 오후예배는 오전 예배와 180도 달라야 하며 회중들은 예배분위기와 진행되는 순서에서 이것을 피부적으로한다. 일차적으로 오후예배가 오전 예배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때에만 오후예배의 존립당위성은 확보될 수 있다.

둘째 예배의 축제성이다. 오전 예배는 대부분의 교회가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기 마련이다. 아침예배가 이러한 기조를 띠는 것은 아침 시간대라는 시간적인 요소와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예배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의 인식에 잘 부합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성도들은 엄숙한 예배가 끝난 뒤 곧이어 드려지는 예배에서는 다른 기대를 갖기 마련이다. 엄숙성보다는 축제성 기계적인 의식보다는 여유있는 가변성, 굳어있는 표정보다는 웃음띤 미소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후 예배는 엄숙함과 상반되는 축제적 성격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예배드리는 기쁨을 만끽힐 수 있는 예배이어야 한다.

셋째는 예배의 교육성 확보이다. 교회현장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교육이라는 요소인데 현실적으로 교육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불과 전 교우의 30%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예배참석을 일주일에 주일 낮 예배 한번으로 그치고 마는 교우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에서 그나마 주일 낮 예배 설교는 복음에 주안을 둔 '복음설교'(Evangelion)일색으로 흐르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쉽지않다. 주일 예배 다음으로 회중을 모을 수 잇는 것이 주일 오후 예배라면 이 기회야 말로 부족한대로 교육적인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위해 주일 오후 예배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디다케'(Didache)설교가 되어야 한다. 즉 교육을 목표로 한 설교로 통상적인 설교와는 달리 회중의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 그에 따른 연속주제를 정하고 칠판이나 슬라이드 혹은 동화상등을 이용해 마치 성경공부와도 같은 자유로운 방식속에서 행하는 설교이다. 이것은 20-25분 정도의 시간내에 이루어져야 하며 평소 교우들이 접하지못하는 교리, 각종 이단의 정체, 기독교 역사, 성경의 난제, 현대적인 사회 이슈에 대한 성경적 진단등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것이 효과적이다.

넷째는 예배에서 회중들이 동질성(Identity)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교회의 규모가 큰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규모가 작은 경우에도 성도 상호간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르,ㄹ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겉돌고 마는 것은 성ㄹ도 상호간에 서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간에 서로 친분관계로 어울리는 대상이 아니면 '명목적인 인식'외에는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본래 성격을 해치는 가장 커다란 적이 아닐 수 없다. 오후예배는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자리잡아야 하며 이것을 위한 구체적인 순서가 도입되어야 한다.

다섯째, 오후예배는 가변성을 확보해야 한다. 오전예배와 달리 오후 예배는 우선 매 예배마다 주제를 가져야 하며 모든 순서와 그 내용은 그 주제와의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환원하면 매 예배마다 주제가 바뀐다는 것은 거기에 따른 순서와 내용이 바뀐다는 이야기이다. 매주 마다 다른 예배! 오후 예배는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배에서 보여지던 가변적 순서를 극대화시킨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예배의 주제설정을 통해 회중들의 삶에 예배가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매번 새로운 예배를 드린 다는 것은 소재의 한계로 인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6-8개의 주요 순서를 고안한 후 그것을 매주일 마다 바꾸어 장치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예배의 경제성이다. 대부분 오후 예배는 오전 예배에 비해 여유가 있기 마련이고 교역자나 성도 모두 보다 자유로운 태도로 임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움과 여유가 지나쳐 예배가 산만해지고 '늘어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유로움과 늘어짐은 결코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또 순서를 치밀하게 계획한다해서 여유로움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예배도 마찬가지이지만 오후 예배는 준비된 예배이어야 하고 그 철저한 준비속에 오히려 여유로움이 제대로 숨쉴 수 있다. 또 오후 예배의 경제성이란 현실적인 예배 시간의 제약을 포함하는 말이다. 즉 오후 예배는 배부른 투정이 나오기 전 좀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을 놓은 지혜를 참조해야 한다. 환원하면 예배시간이 길어짐으로 예배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든지 혹은 한번의 예배만으로 포만감을 주는 것을 절대 피해야 하며 무언가 여운을 남기는 예배이어야 하고 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예배는 80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2. 오후예배 활성화의 실천적 시안

 

 그렇다면 상술한 오후예배의 이론적 지침을 어떻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순서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지향하는 오후 예배는 '고차원의 공연예배'(High Performance Service)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예배를 위해 모범적으로 설정된 순서를 갖고있는 교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 예배의 성공적인 실천을 위해 반드시 '예배는 그래야 한다'는 기계적 도식을 강요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지향하는 오후예배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열려있는 정신'과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인 사고'이다. 혹자는 교회의 규모를 들어 가용한 인력의 문제를 난점으로 들 수 있으나 오후예배는 온 교인들이 참여해 만들어 갈 수 있는 전체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 장년 성도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자기만의 달란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크게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일종의 실험적인 '한 시도'(Ein Versuch)로 다양한 변형과 가감 그리고 비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현재 각 교회 현장에서 되어지고 있는 예배의 성격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 할 수 있다

 

3. 일반적인 주일 오후예배

 

 일반적으로 주일 오후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고정적인 순서들로는 찬양단이 주도하는 찬양과 미리 작성된 신앙간증 주제에 따른 디다케설교 그리고 침묵 및 통성기도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찬양위주의 진행에 별 변화없는 설교방식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준비된 예배를 드리면 오후예배가 활력있는 예배로 변화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몇몇의 순서를 기본 틀로 하되 아래에 나오는 몇가지 순서들을 매주 적절히 바꾸어 배치하여 진행한다.  상술한 것처럼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모든 오후 예배는 매번 각각의 주제를 가진 예배로 가져가야 하며 모든 순서의 내용은 그 주제에 맞춘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순서와 순서간에 허술한 틈을 제거하면서도 기계적이지않은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 상자에 기술한 내용중 ▲표시는 예배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택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순서로서 이 순서들을 매주일 변경해가면서 사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가급적 예배는 기본적으로 음악이 끊임없이 흐름을 전제로 물흐르듯 사회자의 멘트없이 이어지도록 한다. 각 순서에 동원되는 인원은 청년부를 비롯 장년과 학생등 가급적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골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오후예배순서(시안)

 

마음을 여는 찬양 - 찬양단(힘찬 곡으로 3곡)

예배를 여는 기도 - 미리 준비되어 작성된 기도

시에서 만나는 하나님 - 예배주제에 맞는 아름다운 신앙시를 백뮤직에 맞추어                           낭송

율동으로 영광을! - 율동이 곁들인 찬양

이렇게 살았습니다 - 신앙간증(5분정도의 미리 준비된 간증문 낭독)

▲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

▲ 스킷드라마

▲ 낭독극

▲ 영상에서 만나는 하나님

침묵기도

디다케설교

파송의 찬양

축도

 

위에서 기술한 내용들은 주로 오후예배의 기본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성격들을 살리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다.

1) 먼저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라는 순서에서 의도하려는 것은 현안의 기도의 제목을 놓고 온 교우들의 기도를 하나로 모으는데 있다. 이를 통해 온교우의 신앙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고 자기의 이해관계를 떠난 중보기도의 모범을 몸소 체득토록 함으로 수준있는 성도의 자세를 함양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사회자가 기도제목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한 후에 통성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감동어린 기도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마음깊이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느껴 기도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마음에도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외현적으로는 온교우가 참여하지만 실상은 진중한 참여의 일치가 아닌 외식적인 모방만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따라서 온 회중의 진정어린 기도를 이끌어내기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이 순서는 이를 위한 하나의 시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용한 방법으로는 기도할 제목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동화상을 먼저 5-8분 상영한뒤에 기도를 부탁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홍수 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어느 지역의 수재민을 위해 기도를 모을 필요가 있을 경우 TV방송의 관련 필름을 녹화한다든지 각 방송국 영상 사업단에 연락하여 관련 자료를 입수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사실적이고도 시각적인 접촉을 회중들에게 제공함으로 사안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몸소 깨닫게 한후 그것을 기도로 연결시키는 것은 공감어린 기도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러한 동화상의 활용이 어렵다면 기도할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을 OHP자료로 만들어 보여주는 방법이라든지 관련 신문기사나 보도 내용을 스크랩하여 읽어주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런 구체적인 자료없이 말로 기도를 요청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시각 자료 혹은 청각자료를 이용하여 회중들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이 마음깊이에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의 제목을 낭독극으로 입체적으로 꾸며 전달하는 방식이다. 물론 대본을 직접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없지 않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수고인들 못할게 있겠는가? 모든 낭독극 그렇듯 여기에서도 사실적인 정보에 바탕을 둔 대본 내용과 성우들의 실감있는 대사 및 적절한 음악 및 효과음의 배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스킷드라마란 일정한 시사적인 주제를 짧은 극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연극이 정통적인 의미를 갖고 극을 통해 인생을 표현하는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르라면 스킷드라마는 약식의 의미가 강하다. 즉 일정한 주제를 간략한 대사와 동작을 주축으로 음악등에 실어 표현하며 스토리의 전개, 출연하는 인원과 소품에 있어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들이 시사성과 현장성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극이든 다루려는 주제를 단순한 구연에 의지하지 않고 입체화된 극으로 옮겨 전달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전달효과를 갖기 마련이다. 회중은 머리속으로 드라마를 정리하는데서 벗어나 시각과 청각을 통해 메시지를 접할 수 있으며 드라마의 줄거리가 경험을 주축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메시지의 경험적인 맥락을 접할 수 있게 된다.

 스킷 드라마에서는 2-5명의 등장인물과 탁자 전화기등 다루는 주제에 따라 간단한 소품을 무대에 올리지만 연극에서의 막의 전환처럼 장중한 무대설치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킷드라마는 그 무엇보다 드라마 대본의 작성이라는 부담이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가장 바람직 한 것은 에배를 총괄하고 기획하는 당사자인 목회자가 직접 작성하는 것이지만 만일 여러 이유로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교회내의 인력을 동원하는 것도 무방하다30).

 

3) 오후예배의 주제를 소화함에 있어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에 가용한 수단가운데 하나가 낭독극 이다. 이 방식은 전하려는 주제와 관련된 내용의 일부를 - 가급적이면 문제제기 - 낭독극 형식으로 작성한 후 회중들이 직접 성우로 참석하여 전달함으로 주제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식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내용을 라디오 극 형식의 낭독극 으로 배치할 수도 있고 가자들의 리포터 보고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4) "영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다루려는 예배의 주제를 살릴 수 있는 동영상 필름을 상영하는 것으로 메시지의 입체화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특히 많은 회중들이 TV나 영화등 동영상에 익숙한 세대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방식은 가장 시대부합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방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액정 비젼과 주제를 살릴 수 있는 동화상의 확보가 관건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이를 전담으로 하는 전문 업체들이 생겨남에 따라 이런 고민의 상당 부분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서를 진행함에 있어 전체 예배시간과의 조화를 유지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동화상의 내용이 예배의 주제를 살릴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함은 양보할 수 없는 전제이다.

 

2장 특수목적의 오후예배

 

1. 선교헌신 예배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매달 마지막 주일을 선교주일로 정하여 선교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선교주일을 위한 치밀한 준비는 현장에서 의외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선교와 관련된 설교를 하는 것으로 선교예배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정이 허락하는 일부 교회에서만이 그나마 선교지의 교역자를 초청하여 현장보고를 듣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예배는 회중들로 선교열을 고취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매달 계획에 따라 드려지는 또하나의 행사예배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해서나 성도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선교헌신예배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이를 위한 특단의 준비가 있어야 하며 예배의 내용을 새롭게 하려는 지속적인 아이디어개발에 나서야 한다. 아래에 제시된 순서는 기계적인 반복을 극복하고 선교예배 본래의 의의를 되살리는데 하나의 긍정적인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헌신예배(시안)

 

마음을 여는 찬송(2곡) - 찬양단 주관으로 선교와 맞는 복음성가나 찬송가

예배를 여는 기도 - 미리 원고로 준비된 기도를 하도록 하며 가급적 사회자의

                   멘트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찬양(복음성가) - 빠른 템포로 박수를 치거나 율동을 곁들이도록 한다.

★이렇게 복음이 왔습니다!

★선교현장은 이렇습니다!

★선교지에서 온 소식

★전도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전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

찬양 - 조용한 곡으로 회중들로 엄숙한 분위기 유도

디다케 설교 - 선교와 관련된 내용으로 교육에 치중할 것

헌신을 다짐하는 순서 - 헌금시간으로 특송(기관 내지는 개인)을 준비하도록 함

파송을 위한 찬양(함께 일어서서)

축도

 

 위에 제시된 예배순서중 별표 표시가 된 부분은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순서로서 가급적 매 선교예배시에 바꾸어가며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이렇게 복음이 왔습니다"라는 순서는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기 까지 헌신적으로 애쓴 인물들의 일대기 및 순교 일화 혹은 복음전파의 이동경로를 소개함으로 회중들에게 전도의 물줄기가 자신들에게서 막히지 말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임을 각성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가용한 방법으로는 일차적으로 다루려는 인물과 관련된 동영상의 상영을 시도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필름입수등의 문제로 어려울 경우 낭독극 형태로 이를 처리할 수 있다. 복음이 전파된 통로를 소개할때에는 O.H.P를 이용해 작성된 지도를 이용하여 설명을 시도하되 각 지역에서 복음 전파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선정하여 소개하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2) "선교현장은 이렇습니다"라는 순서는 선교를 지원하고 있는 해당 교역자를 초청하여 사역지의 선교보고를 청취하는 순서로 이미 많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미자립 교회를 선정하여 선교비를 보냄으로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펴고 있고 많은 교인들이 이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많은 개척교회 미자립 교회 및 해외 선교지의 사역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의 대부분은 이렇게 열심히 선교비를 헌금하면서도 정작 그 교회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회 상황이 어떤지 무슨 문제가 있으며 어떤 비젼을 품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비를 보내 후원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를 초청하여 그 교회의 현황을 보고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선교비를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후원받는 교회의 교역자가 와서 통상적인 설교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초청교회 교역자는 사전에 초청의 의의를 충분히 기획된 의도에 맞는 내용을 준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대개 설교식의 일방적인 전달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회중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곁들인다든지 피초청자에 의한 일정한 설명이 끝난 뒤 교역자가 나와 일문 일답식으로 진행해 가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때 만일 그 교회의 사진이나 활동등과 관련된 사진을 미리 입수하여 O.H.P필름으로 만들어 시청각 재료를 곁들인 설명을 준비하게 하면 훨씬 사실적인 전달이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현지 사정을 캠코더등으로 촬영한 비디오 필름을 같이 곁들여 상영할 수 있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3) "선교지에서 온 소식"은 선교지 목회자 초청이 어려울 경우, 선교지의 사역자를 초청하여 거둘 수 있는 효과를 겨냥하는 순서이다. 즉 피선교 교회로 하여금 편지등을 통해 그곳의 자세한 사정을 보고토록 한다음 그 내용을 낭독하는 방식이다. 이때도 딱딱한 서류보고형식이 아닌 다정한 편지형식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편지형식으로 각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낭독시에도 배경음악을 깔아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사정이 허락한다면 2)에서 제안한 O.H.P나 동화상을 낭독시에 곁들이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전도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는 전도에 대한 성도들의 막연한 환상을 제거하는 동시에 긍정적인 시도를 결심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캠코더를 통해 불신자들이 기독교 및 기독교인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태도, 전도를 했을 시에 그들이 보이는 반응, 일대일 전도의 과정등을 촬영한 후 그것을 편집하여 예배시에 상영한다. 이를 통해 회중들은 한 영혼을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과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 화면을 보고 전도의 어려움을 지레 짐작하여 전도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은 그 뒤에 따르는 구체적인 전도전략을 통해 해결해 주어야 한다. 만일 촬영이 용이치 않다면 녹취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전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는 전도의 사례를 발표하는 순서이다. 즉 교우가운데 실제 전도현장에 나가서 경험한 전도사례를 발표하게 하는 것으로, 성공한 사례뿐 아니라 실패한 사례도 다루도록 한다. 전도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소중한 것인가를 성도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는 것은 교역자가 전도에 관해 설교하는 것 보다 훨씬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에서 사용한 방법중 전도로 유명한 분을 초청하여 간증을 듣는 방식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라든지 너무 '큰 성공'이 주는 부담감등의 문제 때문에 일반화 하는데에는 좀더 깊은 숙고가 있어야 한다.

 

2.  온 가족이 드리는 예배

 

 현대 사회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철저히 가정 예배를 시행하는 몇몇 가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되어버렸다. 교회에서의 예배 역시 기관별로 나뉘어 드리기 때문에 온 가족을 함께 어우르는 예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이러한 비정상은 극복되어야 하고 시정되어야 한다. 더욱이 현대 사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정의 결속력 약화, 가정의 붕괴 세대간의 대화의 부족등이고 보면 교회가 가정이라는 화두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동시에 나아가 가족을 위한 예배를 기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책무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에 참여함으로 주안에서 하나된 기독가정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드높일 수 있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신앙가족이라는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빈번하게 가족예배를 드리기에는 교회현장의 사정이나, 프로그램의 운영등에 있어 적지않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을 위한 예배는 5주가 들어있는 달의 마지막 주일을 택해 드리는 것이 바람직 하다.

 문제는 어른으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다 보니 대폭 넓어진 연령층을 포괄하는 문제, 어린이들의 집중력을 유지시키는 문제 그리고 가족이라는 의미를 고양시키는 문제 등이 중요한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일 이런 것들에 세심한 배려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가족예배는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몇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는데 아래에 제시된 순서는 하나의 긍정적인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시안)

 

- 예배를 여는 기도

- 하나님 영광 받으세요

- 우리는 이렇게 삽니다

- 엄마 아빠께 드리는 글 - 우리 생각은 이래요!

- 얘들아 내말좀 들어보렴!

- 우리 가정의 신앙지수

- 우리는 이렇게 찬양해요

- 하나님의 향기가 납니까?(디다케식 설교)

- 축도

 

 가족예배는 화기애애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참여자 폭의 확대, 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예배속의 방관자 등등의 문제로 인해 어느 예배보다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가급적 각 순서를 각 가정에 할당함을 원칙으로 하여 예배전에 간단한 리허설을 통해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배를 여는 기도"는 한 가정의 어린아이가 작성한 기도문을 낭독하는 방식이든지 한 가족 전체가 동일한 기도문을 낭독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 영광 받으세요"라는 순서는 주일 학교 어린이들로 율동을 겸한 찬양을 준비하도록 한다. 반대로 엄마 아빠가 어린아이의 복장을 하고 이 순서를 담당할수도 있는데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라는 신학적인 명제를 생각하면 결코 어색한 순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삽니다"에서는 한 가족을 정해 그 가족의 삶 전부를 소개하는 순서로 각 가족 구성원마다 각기 다른 것을 말하게 한다. 가령 가장은 가족의 가치관 가훈등을, 어머니는 아이들의 장단점을, 자녀들은 각기 자기 가족 소개, 갖독의 하루 일상등을 말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간단한 찬송이나 복음성가를 부르도록 한다

"엄마 아빠께 드리는 글"(우리 생각은 이래요!)에서는 어린이들이 부모님께 바라는 것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들려줌으로 부모들이 미처 알지못했던 아이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순서이다. 이를 통해 부모들과 자녀들의 의사소통의 원활을 꽤할 수 있다.

"얘들아 내말좀 들어보렴"에서는 위의 순서와는 반대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바램을 이야기하는 순서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바래는 바람혹은 부모의 소원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녹음 녹화하든지 아니면 어느 한 분을 정해 4-5분 정도의 글로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때 음악이 곁들여지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 두 순서는 가정안에서 세대간의 갈등과 대화의 단절이 심화되어가는 오늘의 세태를 염두에 둘 때 성서적인 '화목'을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의 신앙지수"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로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자라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성서적 교훈이 바탕이된 가정교육 이상으로 인간교육의 성공적 모델은 존재하지 않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우리 가정의 신앙수준에 대한 가시적 측정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목적을 프로그램화 한 것이 이 순서라 할 때 사회자는 먼저 한 가족을 택해 부모는 문제에 대답하고 자녀들은 단어를 설명하는 스피트 퀴즈 형식으로 진행하도록 한다. 가정당 10문제 정도로 출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3가족 정도가 출연하는 것이 예배를 위해 생산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찬양해요"는 가족 찬양의 순서로 가급적 임직자가정이 아닌 일반 평신도 가정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이때 가급적 전통적인 방식의 찬양보다는 복장의 변화나 역할의 분담등을 통해 보다 준비된 찬양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3.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특별 순서들

 

 오후 예배시에 많은 교회들이 특별 행사로서 분기마다 한번 꼴로 다양한 공동체 결속의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간략한 예배가 드려진후 진행되는데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됨에 틀림 없다. 특별히 21세기 들어 개인주의가 심화되며 교회에 있어서도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도록 예배의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야 말로 매우 중요한 조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이런 의도가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그러하지만 특히 오후 예배는 준비된 경우에만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오후예배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배기회로의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히 목회자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식, 복음안에 차별이 없다는 동등성의 확인이야 말로 왜곡된 한국교회의 직제이해를 교정함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런 당위의 정신을 프로그램으로 구체화시킴에 있어 어떤 특정한 기계적인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정과 규모에 따라 얼마든지 목회자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활용될 수 있다. 다음에 제시하는 순서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본적인 성격을 구형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1) "우리는 신앙 가족"이라는 순서는 교우 상호간의 진정한 거룩한 공회 조성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교우들간에 서로를 신앙안에서 알아가는 것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사실 우리는 성도들을 표면적으로만 알뿐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상대가 어떤 삶의 여정을 밟아 왔는지 그의 신앙 입문 동기는 어떠한지등에 대해 서로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간에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들끼리 알뿐이고 이것은 자칫 교회내의 보이지않는 그룹화로 나아갈 위험도 있다.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순서는 이런 위험을 제거하고 진정한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격을 구현하는데 부응할 수 있는 순서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할때에는 가급적 장로나 권사등 교회의 임직자들을 대상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사전에 그 의의와 취지를 충분히 설명함으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않도록 하여야 한다. 대상이 정해지면 먼저 당사자에게 그가 살아온 인생여정을 3-5쪽으로 정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교역자 - 혹 다른 재능있는 교우 -가  낭독극 식의 원고를 작성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 - 혹은 피아노나 신디사이저등으로 효과음을 낼 수도 있다 -을 준비하도록 한다. 원고의 내용은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미리 써낸 원고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도록 하되 긍정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자극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담당은 교우중에서 대본에 상응하게 설정하여 2-3차례 미리 연습을 하도록 한다. 암기할 필요가 없이 앞에 나와서 대본을 보며 하기 때문에 많은 연습없이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순서가 끝난뒤에는 당자자로 하여금 2-3분에 걸쳐 소회를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2) "같이 이야기합시다"라는 순서는 주의 몸된 공동체내에서 일체의 사심을 떨쳐내고 교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시도하려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내에서 교우들 상호간의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간에 언로가 막혀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교회의 발전 방향에 관해서도 다수의 평신도는 침묵한채 당회 혹은 소수의 실력자(?)들에 의해 좌우되는게 사실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발상지가 교회임을 감안한다면 매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상호간에 언로가 막혀있으면서 하나님과의 언로가 개방되기를 바란다면 이처럼 서글픈 코메디가 어디있겠는가! 따라서 이 순서는 교회 현안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상황윤리의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놓고 피차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게 함으로서 교회내에 언로를 틔우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토론 문화가 살아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고 생기가 넘치는 교회이다. 이 순서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5-8명으로 한 개의 조를 구성하고 조장 및 조원을 사전에 미리 정하여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조가 갈리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이 좋다. 조장은 토론이 과열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잘 조정하여야 하며 토론이 끝난 뒤에는 각 조별로 도출된 결과를 발표하도록 한다. 만일 이것이 교회의 발전 방향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다음 주 주보에 이 결과를 공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3) 이러한 순서와 함께 특별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많이 애용하는 것이 "함께 풀어보는 성경퀴즈" 프로그램이다. 성경퀴즈는 모든 교회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프로가운데 하나로, 이를 통해 교인들은 성경을 가까이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건전한 친교를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개는 오후 예배나 저녁 예배에 간단히 예배를 드린후 2부 순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그러나 자칫 잘못 운영하게 되면 실패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퀴즈이기도 하다. 가령 범위를 너무 광범위하게 잡으면 이것이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어 아예 예배 자체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또한 마치 시험을 치르듯 너무 전문적이고 정보위주가 되면 진행의 분위기가 매끄럽지 못하다. 결국 친교와 교육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흥미와 가벼운 긴장 그리고 재미가 어우러진 문제와 진행이 바람직 하다31).

이밖에도 기관별, 개인별 성경암송 대회를 통해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적인 삶을 고취시킬 수도 있고 가장들만을 위한 특별 순서, 초신자들만을 위한 프로그램도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데 순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1. P. T. Forsyth, "The Aurthoy of the Preacher", in: Richard Lischer(ed.), Theories of Preaching, The Labyrinth Press, 1987, p. 74.

2. 황 두현, "정보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보사회연구』5, 2(1993. 12), p. 103.

3. C-세대(Chemical Generation)는 화학물질과 인스턴트식품에 의해 키워진 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스포츠, 음악, 컴퓨터통신, 만화, 게임, 영화, 춤등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세대는 자신들이 빠져있는 대상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지다'는 자기도취증적 양상을 보인다. 이들 세대는 무엇이든 어느 한가지에 빠져 있어야 직성이 풀리며 안정감을 갖는다. 반면 자기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서는 무서우리만큼의 무관심을 드러낸다.  Y-세대가 개인주의 개방주의 감성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솜비와 유행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X-세대와 본질적 차이점이 없는데 반해 C-세대는 출생시점(1978년 이후)으로는 Y-세대와 같지만 소비나 유행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으며 오직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 세대는 무엇인가에 중독됨으로 그 분야에 대한 열정이 전문성으로 연결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그들이 갖는 폐쇄성이 세대간, 이해관계집단간의 통합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적지않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4. A. 토플러, 제 삼의 물결 유재천 역(문화서적 1981), 제 3편 "제 3의 물결"을 참조하라(pp. 169ff.)

5. Daniel Bell, The Coming Post-Industrial Society, (New York: Basic Books, 1973)

6. 김 용정, "기술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의미", 『정신문화연구』61(1995): 3-30, 8.

7. William F. Fore, Television and Religion: The Shaping of Faith, Values and Culture (Mineapolis: Augsburg 1987, 63-70).

8. Pierre Babin, The New Era in Religious Communication, with Mercedes Iannone, trans. David Smith(Minneapolis: Fortress, 1991), pp. 5f. 참조. Louis Weber, on Cities and Social Life(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4), p. 70.

9. M.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Birth of the Prison, trans. A. Sheridon(New York: Vintage Books, 1979), p. 166.

10. 조 동호, "멀티미디어가 가져올 충격과 대처방안",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회갱신 대화모임(제 1차-1995. 3. 31) ; 최 인식, 미래교회와 미래 신학(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96), pp.47-48.에서 재 인용.

11. 트로터(R. J. Trotter)에 의하면 좌뇌는 시각 언어 논리 수학 직선 연속 조정 지성 지배 현실 양 능동 분석 순차성과 관련된 기능을 담당한다. 반면 우뇌는 촉각 청각 총체성 예술 상징 동시성 정서 직관 침묵 영성 질 수동 종합 추상성을 파악한다("The Other Hemisphere", in Science News 109(Apr. 3, 1976).

12. 민 영진, "말씀의 전달: 한 매체에서 다른 다매체로", 제 3회 멀티미디어 예배 세미나 자료집(1999년 5월 25-27일 울산감리교회), pp. 2-21.

13. Eugene H. Peterson, "Apocalyse: The Medium Is the Message", in Theology Today 26(JUly 1969), p. 133.

14. 전달체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William Fore, 매스미디어 시대의 복음과 문화, 신경혜 홍경원 역(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98).

 

15. Eric Havelock, The Muse Learns to Write: Reflections on Orality and Literacy from Artiquity to the Present(New Haven: Yale Univ. Press, 1986), pp. 100-101.

16. Qalter ong, Orality and Literacy: The Technology of the word(New York: Methuen, 1982), p. 104.

17. Elizabeth L. Eisenstein, The Printing Press as an Agent of Change(New York: Cambridge Univ. Press, 1979), p. 304.

18. Thomas E. Boomershine, "Religious Education and Media Change: A Historical Sketch", in Religious Education 82(1987), p. 277.

19. 참조. Pierre Babin, The New Era in Religious Communication, trans. David Smith(Mineapolis: Fortress Press, 1991), p. 6.

20. 죠지 거브너 외 공저, 종교와 텔레비전. 펜실베니아대학교 안넨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원과 갤럽 주시회사가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 제 1권(New York: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1984년 4월) 2-3; William Fore, 매스미디어 시대의 복음과 문화, 신경혜 홍경원 역(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98),pp.  80ff에서 재 인용.

21. Jennifer J. Cobb(Crown Publishers, Inc.//New York 1998), PP. 10-19.

22. Ralph Hardee, "Compters and Local Congregations", in: Review and Expositors 87(1990), 228f.

23. Ronald A. Sarno, Using Media in Religious Education(Birmingham: Religious Education Press, 1987), p. 68. 최인식, 상게서 p. 182에서 재인용.

24. E. Carpenter, M. Mcruhan, 커뮤니케이션 연구(Boston:Beacon 1960), William F. Fore, 김 성웅 역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텔레비전(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1), 54에서 재 인용.

25. 최 인식, 상게서, 134.

26. K. Barth, KD IV/1, 203.

27. K. Barth, "Not und Verheissung der christlichen Verkundigung, in: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Munchen 1924, S. 121ff.

28. Phillips Brooks, The Two Elements in Preaching, in: R. Lischer, p. 14.

29. 최 인식, 상게서, pp. 149-150.

30. 참고로 아래에 정리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스킷드라마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 및 드라마 대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31. 성경퀴즈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기획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미리 숙지하여야 한다:

1. 기관별 대항인 만큼 각 기관별로 자리잡도록 하고 기관 명패를 설치하도록 한다.

2. 문제의 난이도를 적절히 조절한다.

3. 적절한 상품을 준비하되 단체상과 개인상을 함께 준비한다.

4. 전기식 보턴 장치를 준비할 수 있으면 진행에 더욱 도움이 된다.

5. 점수를 적을 수 있는 칠판을 준비한다.

6. 진행자와 점수 기록자 그리고 발표순위를 결정하는 보조 진행자를 준비한다.

 

 

 명  칭

 주 소(http://)

 1

스킷드라마-100?枰?프로포즈

cuecom.com/cuemag/9901/drama.html

 2

규장인터넷-크리스천정보뱅크

kyujang.co.kr/

 3

예수사랑 진주사랑

cjccc.org/jlc198.htm

 4

너 나 몰랐었지만

seoul-gchs.seoul.kt/~student/year03/s98312/s9831244/homegape.htm

 5

No Title

logos.colkr/mas/ch_scr/skit.txt

 6

문화사역자 양성학교

rch.religion.co.kr/leaderclass.htm

 7

mn21/이벤트/일반공연이벤트

mn21.com/event/list/199908/event-19990808a.htm

 8

크리스천플라자

kukminilbo.co.kr/christ/form/n_cultcont_6.html

 9

라디오드라마벌거숭이 오동이

cuecom.com/cuemag/9904/skitl.html

 10

Untitled

cuecom.com/cue_academy/edu.htm

 11

n0811

kimc.net/n0919a.htm

 12

낮은 울타리 홈페이지

cuecom.com/cuemag/9904/purun_l.html

 13

충신교회 드라마팀 ACTS

cafe.daum.net/acts

 14

사랑의교회 중등부 드라마팀

side.to/drama/

 15

우물가 선교회

myhome.shinbiro.com/~umoolag/index.htm

 16

Jlovemin Christian Station (JCS)

home.opentown.net/~jlovemin/

 17

예수만나기

seejesus.or.kr

 18

장창수-성민이아빠의 홈페이지

amigas.kaist.ac.kr/~csjang

 19

cmtv

cmtv.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