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목회자 - 류호준

2010. 12. 24. 01:06목양자료/2.설교자료

설교와 목회자 - 류호준

 


설교자로서 목회자

강연 제목을 '목회자와 설교'라 하지 않고 '설교와 목회자'라고 잡은 것은 의도적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면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의 일을 감당하면서 일차적으로 위탁받은 사명은 '말씀의 선포자'로서 입니다.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목사로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자'(minister of the Word and sacraments)로서 안수 받는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선포자'(proclaimer of the Word)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요 명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의 위탁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이 사명을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그리고 신실하게 수행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온전하게, 풍성하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전체의 선포자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중의 하나는 Sola Scriptura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과 좋은 쌍을 이루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Tota Scriptura입니다. 그 뜻은 '전체 성경으로'란 뜻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오직 성경 안에서만 드러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성경의 일부분만 살펴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의 흐름과 맥락 아래서 각 부분들이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드러난(계시된) 뜻의 결집체로서의 '성경 전체'에 관해 일관성 있는 전망과 해석체계를 수립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자


이것은 다음과 같이 수많은 질문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을 제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문헌인가? 무엇을 이루기 위한 의도로 저술된 책인가? 성경의 일차적 저자와 이차적 저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성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신학적 흐름이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다양한 신학들과 전통들의 결집체인가? 서로 다른 양식들, 예를 들어 시, 역사, 이야기, 잠언, 비유, 예언, 신탁, 기도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각권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해석의 방법론이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엄청난 거리를 갖고 있는 '성경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건화, 혹은 상황화 되어진 책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제한되고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영원한 진리가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인간 역사와 언어 속에 담겨져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설교자들이 일차적으로 건전한 성경의 해석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전한 성경해석은 좋은 설교를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설교자: 신의 선물, 인간의 노력


그러나 올바른 성경해석을 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설교자는 물론 하늘이 내어야 할 것 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위대한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라 불렸던 크리소스톰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칼빈, 루터, 그리고 19세기 미국 뉴잉글런드 지방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의 요나단 에드워드, 부흥운동의 대표 주자들, 챨스 피니, 디 엘 무디, 챨스 스펄죤, 그리고 앞선 시대의 매튜 브랙우드, 죤 맥그라렌, 해리 에머슨 포스딕, 그리고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들 빌리 그래함, 죤 스토트, 마르틴 로이드 죤스 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선사하신 '신의 선물들'(divine gifts)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훌륭한 설교자는 고되고 기나긴 자기훈련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주석해야 할 두 가지 대상


사람들에 의하면,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칼 바르트가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설교자는 우선 '책의 사람'(man of book)입니다. 그는 한 평생 책의 사람으로 살고 책의 사람으로 죽습니다. 책이 그의 삶 전부이며 그는 전적으로 그 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살고 책의 지시를 받고 길을 갑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바로 '그 책'(The Book)인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 책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선포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통하고 정확해야 하며, 그 책을 올바로 정당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무지한 것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핑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책의 사람으로만 끝나면 온전한 설교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을 올바로 주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메시지를 들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면, 설교자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의 청중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깊이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에 관해 특별히 강조점을 두려고 합니다. 프래드릭 뷰크너는 그의 한 저서에서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하고 또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히 일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게으름을 피우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도, 꿈을 꾸기도 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좋은 때가 있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기도 끔찍한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화 날 때가 있고, 지루할 때도 있고, 무서워 두려워 할 때도 있고, 어떤 열망으로 마음 조릴 때도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은 '인간적인 일'들을 하는 자들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단지 진열장이나,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나, 화재 보험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신앙이란 바로 이와 같은 풍성하고도 다양한 인간의 경험의 혼합물, 축적물로부터 자라가기 때문입니다.

성서 신앙의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순간들 속에서는 우리는 그저 가장 인간적일 수밖에, 가장 우리적 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순간들, 경험들, 구체적 삶들 속에서 만나시는 분이 우리의 신앙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순간들과 '만나지도 닿지도'(touch) 못한다면, 때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 둘레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순간들과 사건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도 상실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슬프게도, 자신들과, 그리고 하나님과도 '만나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하는'(lose touch with)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목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목사로서 내 자신 특별히 이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목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것을 좀더 공개적으로 한다는데 ('만나지도 닿지도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말은 가장 역설적인 말입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목사들은 성경의 모든 책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의 절대적이고 중심적이고, 통일된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적 경험들 속에 자기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심적 주제가 아닙니까! 둘째로, 그들은 회중들로 하여금 한 인간으로서 '기도'라고 알려진 가장 깊고도 가까운 방식으로(intimate) 그리고 영혼을 찾는 심각한 찾음(searching)으로 그들 자신들의 경험들을 조사하도록 권고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세째로, 그들의 설교에서, 만일 그들이 설교를 옳게 한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현란한 좋은 소식,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 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그 안에서 일하시고 사역하시어 우리를 그분의 깊은 사랑 안에서 자기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들이시고 계신다는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목사의 사역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즉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보다도 더 중요할 정도로 우리의 관심을 쏟게 만드는 일들은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다시금,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어떠한 조짐도 보여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와 선포에 있어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하더라도, 종종 이런 경우, 설교의 요점을 예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거나, 혹은 마치 넘어가지 않는 약을 삼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보조수단으로만 사용한 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영적으로 도산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온갖 종교적 사업으로 배부르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본질적이고, 진정한, 그리고 일차적이면서 살과 피를 담고 있는 '진정한 이야기'(authentic story)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목사들도 그러한 순간들을 만나고 경험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종종 그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신뢰하지도, 그것으로부터 물을 긷지도, 그것들에 관해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제쳐 놓습니다. 그것들을 숨기고 비밀로 간직합니다. 아마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에는 너무도 사적(私的)인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너무나도 사소한 일이기에, 혹은 너무나도 모호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혹은 종교적이지 않는 것 같기에, 경건해 보이지 않고, 그것을 말하면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혹은 그들의 살과 피의 경험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너무 깊고 신비롭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모든 설교적 선언들(homeletical pronouncements)이 상대적으로 너무 공허하고 빈약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이 만나는 유혹은 설교적 선언들에 그냥 집착하는 일 뿐입니다. 그것들은(설교적 선언들) 공허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회중들에게는 적어도 매우 친숙한 것들이 아닙니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적 선언들은 점점 자라갑니다. 동시에 회중들도 설교적 선언들을 자연스럽게 기대하면서 나오게 됩니다. 또 그런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한 설교적 선언들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은 생각을 자극하고 덕을 쌓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회중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들도 그들이 너무도 자주 그것을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위협받거나 불안하다고 느끼지는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목사들은 매우 엄청난 위험 천만한 일들을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삶 속에 있는 현존(現存)에 대해, 즉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증인으로 서지 않는다면, 또한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회중들의 삶 속에 계시는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해 증인으로 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그들이 그분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런 하나님, 모든 비범한 놀라움으로 가득차있는 그런 살아 계신 하나님이 회중과 목사들의 삶의 중앙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하지 않는다면, 목사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목사들은 점점 전문인들 (professionals)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기관적인 종교의 모든 기술들을 마스터하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최대한의 권위(a maximum of authority)와, 동시에 최소한의 개인적 동참(a minimum of vital personal involvement)을 가지고 말하는 그러한 전문인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종종 피 없이 외치며, 또한 새 것처럼(진국이 없는) 외칩니다. 그들의 외치는 신앙은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두지도, 양육되지도, 도전되지도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선포하고 있는 신앙은 마음대로 떠다니는 배처럼, 제 2차적인,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침은 다 타버린 외침일 뿐입니다. 그들은 지겨움에 매번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기계적이고, 인간적 얼굴이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분명히 목사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전문인들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아시겠지만, 나는 믿습니다, 그들은 들의 백합화들을 생각하도록, 이 나의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들을 생각하도록, 길가에 떨어져 있는 죽은 참새들을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목사이건, 크리스챤이건, 장차 크리스챤이 될 사람들이건, 그들이 지녀야할 자격이 한가지 있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깊이 생각해 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구역질 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심장과 가슴에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목사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 역시 나사렛 예수를 생각하도록,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사심으로써 인간의 삶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보여주시지 않았던가요! 그분은 실질적으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던가요! 목사들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죽으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죽으시는, 아니 '우리에도 불구하고' 사시고 죽으시는 나사렛 예수를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들을 바라보도록 - 오랜 전에 발생하였던 일들이나,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들이나 - 이 모든 일들이 위대한 드라마, 즉 그 안에서 영혼들이 잃어버린바 되고 구원받는바 되는 그러한 위대한 드라마의 한 부분임을, 아니 매우 중요한 한 부분임을 기억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삶들을 추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거나, 혹은 우리의 설교를 발전시키려는 수단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은 진정으로 신성하고 거룩한 작업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나의 부모에 관한, 내 자녀들에 관한, 그리고 내 자신에 관한 비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길이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하는 길일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좀더 정직한 일 일뿐만 아니라, 나는 전혀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가장하는 것 보다 훨씬 흥미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이 비밀입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당신의 비밀들입니다. 우리들의 비밀은 인간들의 비밀들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 비밀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써 인간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인과 예언자들, 그리고 설교자들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문은 산문체입니까 아니면 시문(詩文)이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여러분이 쓰셨던 설교 원고를 기억하시면서 이 질문에 답변해 보십시오. 아마 모든 설교자들의 원고는 산문체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산문체로 설교문이 작성된 일에 대해 문제를 삼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 히브리 예언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히브리의 예언자들을 그들 당대의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향한 위대한 설교자들이라고 가정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매우 중요한 명제이기도 합니다. 좌우간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설교들을 담고 있는 예언서들이 산문체로 쓰여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문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예언서들은 대부분 시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여러분에게 충격적으로 들리기를 바랍니다. 설교문이 시(詩)라니요! 그렇다면 설교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은 시인이었단 말입니까?

원문으로 된 히브리 성경을 최소한 실제로 만져 본 경험이 있는 목사님들이나 신학도들이라면(신학교 다닐 때 원문 성경 과목 정도 하나는 택하였으리라 믿습니다!), 히브리 성경이 적어도 산문체와 시문으로 구별되어 인쇄되었다는 사실은 인식하였으리라 믿습니다(물론 신학대학원의 구약학 교수로서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학생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부분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이나 역사서와 같은 부분은 대부분 산문체입니다. 반면에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와 같은 부분들은 대부분 시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는 어떠할까? 앞에서 말한 대로 예언자들은 그들 당대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면, 그리고 현대의 설교자들의 설교들이 대부분 산문체로 기록한다면, 예언서는 산문체로 기록되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바처럼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시인들이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줄 것입니다.

부르그만(W. Brueggemann)은 설교와 설교자에 관한 매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한 책에서 설교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설교의 두 가지 모형론적 범주를 가리키기 위하여 '산문'(prose)과 '시'(詩, poetry)라는 은유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산문의 세계'(prose world)라고 부른 것은 고정된 형식에 안주하고 인습에 이끌려 아무런 흥분과 열정, 정념과 생동감, 기대와 예측없이 지내는 평평하고 밋밋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목회 기도도, 주일 아침에 선포하는 설교도 '산문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단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무런 열정도 없이 밋밋하게 산문의 세계를 소개할 뿐입니다. 마치 가도가도 끝이 없는 미국의 대 평원을 달리는 운전자와 같아,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의 끝이 보입니다. 좌우를 보아도 항상 무미 건조 할뿐입니다. 설령 그 무엇이 달리는 운전자에게 나타난다 하여도 이미 오래 전에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평한 대 평원을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위 '산문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단순히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들이 아무런 상관 관계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적으로, '시의 세계'(world of poetry)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시'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운율이나 박자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함축적인 언어들을 사용하여 세워진 '이상한 세계'(strange world)입니다. 또한 그 언어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담고 있는 폭발물과 같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시인이 만들어 낸 세계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위험 천만한 세계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도약이 없이는 건널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측된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시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이 보여주려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은 독자들에게, 청중들에게 바로 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올 것을 촉구하고 초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시문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그들 자신이 매우 강력한 시인들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 설교자들에게 매우 지시적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부르그만(Brueggeman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 볼만합니다:


넓게 말해서, 성서 본문의 언어는 예언자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 본문의 언어는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인습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실체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실체들을 예기케 하며 그러한 실체를 불러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서 본문의 언어가 예언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시인/예언자는 정착되고 안주된 실체를 산산조각 내는 목소리이며, 귀담아 경청하는 회중들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자극하여 불러내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설교란 이러한 위험천만한 언어 습관, 그러나 반드시 필수적이어야만 하는 이러한 언어습관을 계속하는 행위입니다. 본문에 대한 시적(詩的) 연설(poetic speech), 설교의 시적 선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예언자적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설교자들은 고대의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새로운 세계, 일반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가 아닌 세계, 좀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뒤집혀진 세계'를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부르그만의 용어를 다시 빌려 표현하자면, 설교는 '대안적(代案的) 세계에 대한 시적(詩的)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경우, 그들의 설교의 목적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scenario)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alternative)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은 좀더 분명해 졌습니다. 히브리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그리고 그들의 남겨 놓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예언서들은 매우 강력하게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를 불의와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는 인간의 세상을 향해 본질적인 대안의 세계로 선포하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는 병립할 수 없는 이 세상 나라들의 ― 그 나라들이 누구이든 간에 상관없이 ― 전통, 인습, 세계관, 가치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따라서 그들의 전적인 포기와 항복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 예를 들어, 불의한 자들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비판,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자들을 향한 사회-정치적 비난, 야웨 하나님 없는 이방 열국을 향한 전 세계적 비판, 제사의식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종교주의자들에 대한 종교-제의 비판 등과 같은 주제들은 바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와 다스림이라는 포괄적인 예언자적 메시지의 빛 아래서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사항들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미래에 대한 선포마저도 당대의 언약 백성들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설교는 예언자적/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예언서를 다루려는 설교자들은 바로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메시지는 언약 백성의 현재의 삶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오는, 다가오는 왕과 그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삶 속으로 들이닥치는 왕이신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언자 선포의 이러한 양대 축(심판과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키는 기둥들입니다. 심판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머리를 떨구고 그 앞에 그들의 불의와 악행들, 오만과 독선을 참회하고 그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가지고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무한한 감격과 보은으로 그분의 사죄의 은총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결국 설교자는 언약 백성들 앞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제시하고, 죽음을 넘어 사역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메시지는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새로운 삶은 가능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청중에게 새로운 존재의 시작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입을 열어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청중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응답하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포는 단순히 협박이나 설교자의 영적 우월감으로부터 기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긍휼로 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며, 예언자들중 '예언자' 되신 예수님의 선포도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설교는 예언자적이며, 시적이며 종말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설교의 노력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다스림을 집행하는 진정한 왕 하나님께 모든 청중들의 무릎을 꿇게 하는 초청이며 설득이며 선포인 것입니다.


끝맺으면서


설교문을 완성시켜 가는 동안에 설교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시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들로서, 그리고 그분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통치를 불의하고 분쟁 많은 이 세상을 배경으로 하여 감연히 선포하는 자들로서, 설교자들은 예언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으로서 그들은 옛 히브리 예언자들이 그처럼 풍성하게 사용하였던 다양한 심상(image), 은유(metaphor), 그리고 적절한 언어사용을 통하여 청중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언약 백성을 하나님의 '이상한 나라'로 강력하게 초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메시지 앞에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머리를 떨굴 것이며, 어떤 이들은 뭉클해진 가슴을 어루만질 것이며, 어떤 이들은 옷깃을 여밀 것이며, 어떤 이들은 한없이 흐르는 감격의 눈물을 추스르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熱情), 그리고 '정념'(情念, passion)의 진정한 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어진 마음의 상처에 주어질 치유가, 죄책으로 인하여 죽어 가는 영혼에게 안겨질 생명이, 암담한 미래 앞에서 절망하는 여인에게 주어질 희망이, 무기력한 일상생활의 답답함으로 가득찬 한 남자에게 채워질 기쁨이, 가정과 공동체를 깨뜨리는 분단 대신 평화가, 다음 주일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게 될 본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바로 이러한 '정념'(情念, passion)은 우리의 주석 작업에 불길을 당길 것이며, 이 불길은 다시금 '메시지'로 우리 심장을 불태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언서로부터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기를 바라면서 주의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설교사역위에 항상 함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