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1. 16:15ㆍ운영자자료/5.논문자료 모음
2003학년도
석사학위 청구논문
성경적 교회 개척설립에 관한 연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 ( 실천신학 )전공
이 범 석
성경적 교회 개척설립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이 영 욱
이 논문을 석사학위(M. Div.) 청구논문으로 제출함.
2003년 1월 10일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 (실천신학)전공
이 범 석
이범석의 목회학석사(M. Div.) 학위 청구논문을 인준함
2003년 1월 10 일
Ⅰ서론
1. 연구의 목적
“개척교회가 진정한 교회이다.”,“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하려면 개척교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어린시절에 들었던 말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교인들이 아닌 불신자들에게서 들었고 나 또한 불신자로서 그 이야기에 긍정하였기에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부흥하던 7-80년대에는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개신교의 경우 1955년에는 50만 명의 성도에 그쳤던 교회는 1985년에 이르러서는 전체성도 수가 800만에 이르게 되는 십여 배의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원구, “한국교회 성장운동 재평가”, 목회와신학 (1990년 2월호)
또한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원복 교수는 몇 가지 원인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원복 교수에 따르면“한국교회의 성장 요인은 크게 문화적, 교회적, 사회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요인으로서는 우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들 수 있겠다. 원래 한국인은 매우 종교적인 민족이며. 따라서 어느 종교든 철저하게. 열심히 믿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래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도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포교되고 깊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종교는 모두 무교(巫敎)와 혼합되어 기복적 성격을 띠어 왔다. 이것이 기복신앙 전통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의 심성에 부합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구한말 이후 가치관의 혼란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개화와 근대화의 이념들이 사회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 왔다고 본다. 교회적 요인으로서는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선교 초기부터 자급자족의 정책을 택함으로써 자립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이것이 개교회 중심의 성장에 크게 기여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교세는 곧 교회의 능력의 척도로 평가되어 왔기 때문에 개체 교회별로 최대한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해 왔던 것이다.
한편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 가지 선교 전략이 크게 주효했다고도 하겠다. 특히 20년대 이후 그들은 성령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부흥회, 산상기도회, 철야기도회, 연합집회, 사경회, 성경연구 모임 등을 통하여 교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고 강력한 전도 동기를 마련해 주었고. 이에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것이다 ......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과 정치력 부재. 경제적 불평등과 물질주의 가치관의 만연. 그리고 도시화로 인한 공동체 붕괴와 정체성 상실 등의 상황 변화가 사람들의 삶 가운데 심리적 혹은 사회 심리적 불안정. 불만. 박탈감. 소외감 등의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기제인 종교가 성장할 수 있었고. 이것은 특히 기독교의 경우 그러하다.” 앞의 책
즉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의 호응은 종합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것에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개척에 대한 열정과 결실들로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개척 혹은 개척교회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란 그리 희망적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교회는 사회를 주도하던 위치에서 이제는 사회와 괴리감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이러한 괴리감은 감성적인 면이나 학문적인 면에서 그러하다고 하겠는데 70년대 이후 교회는 학문적이나 사회적인 발전에 민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백적인 지식과 언어들로 일관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사회와 어색한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김근수, 『 복음서이해 』, (서울: 도서출판나단, 1996), 서문 중에서
텔레비전의 시사프로그램들은 잘못된 교회들에 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으며 이제는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의 통제에 들어와야 한다는 논리까지 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거나 그들의 세계관(혹은 언론관)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교회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쩌면 교회는 더 비참한 현실에 당면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에 비해서 캐톨릭 교회는 다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내가 기독교인이 된다면 천주교회에 다니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한 가지는 캐톨릭 교회가 꾸준히 사회와 대화하고 어떠한 역할- 무료 병원이라든지 사회시설의 운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 사제(신부)들은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분위기는 현대사회에서 교회 혹은 새로운 교회(혹은 개척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자리를 잡고 인정받으며 교회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1970-80년대의 교회의 급속한 성장이 현대교회의 열악한 여건들과 극명히 대조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 당시에는 분위기와 여러 여건이 괜찮았기에 교회는 부흥했고 지금은 그렇지 못하므로 애로사항이 많다고 대조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 1970년대부터 급속하게 성장하던 우리나라 교회는 전체 국민의 약 4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이 나올 만큼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교회 성장이 빠른 나라였다. 그러나 80년 중반기를 고비로 성장률이 둔화되더니 최근에는 교회성장보다는.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교적을 바꾸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이제까지 출석하던 교회에서 신앙적 충족을 받지 못하거나 불만을 느낀 사람이 소위 "이름난"교회로 옮겨가는 일이 대단히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떤 사람은 교적이 두개 이상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것은 결코 교회성장이 아니다. 하나님 측에서 보실 때에는 사람이 옮긴 것뿐이지 늘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앞주머니에 10,000원이 들어있고 뒷주머니에 또 10,000원을 가진 사람이 뒷주머니의 돈을 앞주머니에 옮겨 넣으면 앞주머니의 돈이 20,000원으로 늘게 되지만 뒷주머니가 비게 되기 때문에 총액에는 변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장의 둔화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급성장으로 인하여 일어난 부작용이 드러나기 때문에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복음이 전해진지 약 1,000년이 되면 어느 나라의 교회나 새로운 변혁과 갱신이 요구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질병"이 발생할 것으로 진단한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의 충고는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일이다. 박광철, “전환기에 선 한국교회 성장의 방향”, 목회와신학 (1990년 2월호)
이런 진단은 벌써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나타난 것이었음을 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의 급속한 부흥 즉 사회, 경제, 문화 등의 여러 여건들 속에서 호의적인 반응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이미 그 부흥이라는 속도에 현대 교회의 여러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인은 다각도로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이 논문에서 말하고자하는 바가 아니기에 생략하고 여기서는 “그러면 어떻게 교회를 세우며 그 기능을 그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특히 예비 목회자들의 준비과정인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면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 그 올바를 방향을 다루어 보는 것은 시기적 한국교회라는 전체적인 시기와 개인적인 시기를 모두 포함한다고 하겟다.
으로도 적절한 것이다.
그것이 기존의 교회에서 이어지던지, 혹은 새로운 교회를 소위 “개척”해서 할 것인지, 부교역자로서의 사역이 모두 포함되지는 이 논문에서는 “교회개척”에 무게를 두고서 앞에서의 목적대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국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현재만의 문제가 아닌 급속한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사 안에 내재 되었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현상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근본을 살피고 그 잣대에 비춰 한국교회 특히 그 성장을 진단하며 그에 따른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즉 교회다운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개척하고자하는 비전에 적용하는 것, 특히 어떠한 패러다임으로 이 목적에 접근해 나갈 것인가를 살펴보고 작은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선 먼저 선행되어야할 일들이 있다. “그러면 과연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의 정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먼저 교회의 일반적인 정의를 내리고, 특히 개혁교회로서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교회관으로부터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 그리고 우리와는 신학적 입장이 다르지만 실천적 혹은 실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던 바르트나 몰트만의 교회론을 살펴봄으로 상호보완적으로 신학적이지만 실존적인 교회는 바른 신학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실천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존재한다고 하겠다.
교회론을 생각해 볼 것이며, 더 나아가 상당히 현재적이면서 자유로운 교회관도 간략히 살펴봄으로 과연 교회가 어떻게 지역에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과 교회론의 도전도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그러면 교회개척의 실제적인 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현대사회 혹은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시대의 분위기를 분석해보고, 앞으로의 교회의 사역에 적용해 볼 것이다. 여기에선 이론 보다는 실제적인 경험들을 곁들이는 방법으로 그것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은 개인적인 면이 많이 강조될 수도 있어서 매우 협착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먼저, 목회학 석사(M.Div.)과정은 목사를 양성하는 기본과정이로 교회에서 바르게 가르치고 치리하며, 교회를 세우도록 의도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목회학 석사(M.Div.)과정을 총 정리하는 이 논문의 기본 방향은 이미 교회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한 개인이 어떻게 교회와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내겠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바는 다를 수 있으며, 성경의 저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그들이 경험하고 목격한 복음을 전했으므로,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선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이 따르게 되게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이론들을 가지고 목회현장에 나가면 싸워 이겨야 하는데 오늘날은 그렇지 못합니다. 목회학 박사가 목회를 더 잘해야 정상인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과 같이 교회개척과 성장의 환경이 척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실제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명성훈, 『 교회개척의 원리와 전략 』, (서울: 국민일보사 ,1997), 357-358에서 대전중문교회 장경동 목사의 고백
또한 지도교수인 이영욱 교수의 가르침 아래에 소개할 말은 언 듯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의적으로 접근된 것이 아닌 목회신학적인 면에서 상징적으로 사용한 언어였음을 감안해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처럼 “ 목사는 교회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2001년 “중소교회 목회론(목회신학)”의 이영욱 교수의 강의 중에서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목회자는 그가 사역하거나 개척하게 될 교회에 대해서 미리 목회적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게 되므로 이 논문이 개인적인 면을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또, “주여, 믿습니다! 소리치면서 문을 열고 나섰더니 바로 낭떠러지 였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세우는 데는 분명한 준비 없이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명성훈, 『 교회개척의 원리와 전략 』, 서문 중에서
라는 말이 이러한 개인적인 여기서는 개인적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여러 서적들이나 세미나의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교회개척의 준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개인적인 준비 그 중에서도 개인 경건 혹은 영성에 준비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있다. 누가 아무리 말을 해주고 이론을 말한다해도 개인적으로 준비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스타일과 개성을 무시한 획일화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므로 교회의 리더로서의 목사는 개인적인 준비가 분명히 필요하고 목회학 석사 과정에서 이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면은 이 논문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본인은 인테넷 까페 중에서 “전국 개척교회 연합” 주소는 http://cafe.daum.net/npca 이다.
이라는 곳에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교회개척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하니 경험자로서의 좋은 조언이나 주의 점을 말해달라”고 글을 올렸더니 이런 답 글이 올라왔다.
“직접 해봐야 압니다.”
한편 화가 나기도 했지만 현실을 정확히 말한 글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무쪼록 이 논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바라야할 교회관을 세우고, 예배 목사로서 미래의 바르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Ⅱ본론
1. 교회에 관한 제론들
1)사전적 의미의 교회
교회란 무엇인가? 우선 국어사전을 참고해 보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교ː회(敎會)[―회/―훼][명사] 어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교의(敎義)를 가르치고 펴며, 또 예배나 미사를 보기 위한 건물, 또는 그 조직.” 두산엔싸이버 국어사전 중 “교회” 항목 (http://kordic.encyber.com/)
즉 순수한 국어로서 교회는 어떤 종교의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며 신(神)에게 예배하기 위한 장소 혹은 그 조직을 말하고 있다. 또한 백과사전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넓은 뜻으로 사용될 때는 같은 종교를 믿는 신자의 집단 또는 집회소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로 결성된 단체(가시적인)를 말하는데, 이러한 용법 이외에도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맺어진 공동체(불가시적인)를 가리킨다.
【성립】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에클레시아인데, 이것은 시민의 집회 의회를 의미한다. 근대어로는 영어의 처치(church), 프랑스어의 에글리즈, 독일어의 키르헤(Kirche) 등이 교회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말들은 그리스어의 키리아케주님에게 속한다는 뜻의 말)에서 나왔다. 그리스도 교회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나라'에 불러 모으고 제자 중에서 이스라엘 12지파(支派)를 상징하는 12사도(使徒)를 선택, 그들을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육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주위에 사도와 제자들의 집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집단은 천한 직업인이나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소외된 자들'의 소수의 무리였다. 이것이 온 세상에 퍼진 복음의 씨였고, 여기에서 교회가 싹터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12사도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었는데, 특히 베드로(반석이라는 뜻)에게는 12사도의 우두머리의 지위를 부여하여, 교회를 그(반석) 위에 세울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그에게 줄 것을 약속하면서, 어떠한 악의 권세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단지 정신적인 모임일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조직을 가진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성령을 보내어 하느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고 거룩하게 함으로써 만인을 구원하는 기관이 되게 하고, 모든 사람을 그 곳으로 불러들여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조직】 이와 같이 교회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공동체임과 동시에 지상에 설립된 집단이라는 사회적 조직이므로, 신적(神的) 요소와 인간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두 요소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고 있는데, 사회적 기구는 '그리스도의 지체'의 성장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며, 교회를 살리는 성령(聖靈)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별 차이가 없지만, 인간적인 요소를 이루는 여러 가지 세부사항에 이르러서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가톨릭의 신앙에 따르면, 조직된 사회로서의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과 사도단의 후계자인 주교들에 의하여 다스려진다. 교회의 이러한 직분(職分)은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자유로운 협력 속에서 구원되도록 하는 데에 그 사명이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이러한 위계제도(位階制度)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빈곤과 박해 속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役事)를 이룬 것과 같이, 교회도 구원의 성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신 속에 죄인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성스러우면서도 늘 정결해지지 않으면 안 되며, 늘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힘으로 굳건해지고,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主)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산엔싸이버백과사전 중 “교회” 항목(http://search.encyber.com/bsmain.php)
또한 좀 더 구체적으로 신학사전을 참고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어의 교회에 해당하는 말들(church, kirche, kerk kirk)은 모두 헬라어 형용사 토 구리아콘에서 나왔다. 이것은 처음엔 '주의 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령에 의해서 소집된 회중을 뜻한다(행 19:32, 39, 40). 그러나 이 단어가 칠십인 역에서는 이스라엘의 회중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을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중심하여 모으신 회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증거함으로써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의 친교이다. 성령께서 예배하는 영혼(사람)들을 그리스도께(그리고 서로 서로) 연합시키는 곳에는 어디나 교회라는 신비(비밀)가 존재한다.
1. 교회의 정의 보다 더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교회(하나님의 한 교회)란 제도적인 실체가 아니고, 초자연적인 실체이다. 이것은 내세를 향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또한 이것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활동하시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며, 초자연적인 혈연 관계로써 얽혀 있다. 그들은 부여받은 모든 은사들과 활동을 통해서(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신)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시키고 있으며,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협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오는 세대에서는 마치 천성인 새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로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교회의 표징: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성령과 맒씀을 통해서 자기와의 언약적 교제 속으로 이끄시며, 그것을 유지시키신다(사59:21). 우리는 그의 음성을 '말씀'의 선포 속에서 들을 수 있고, 그의 행동을 성례의 집행 속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기도나 찬송과 더불어 가시적(可視的)인 교회의 표징들이다. 또한 이것들은 성령께서 각자들을 개인적인 신앙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모여 예배하는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모여 예배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시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례로써 오는 세대의 축복들을 보증하신다.
3.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역사: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마음이 계시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영원한 아들을 죄인의 구주와 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아들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 개개인을 이러한 교제 속으로 부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족장들, 고대 이스라엘의 회중,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초기 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교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구약 시대는 약속의 시대요, 신약 신대는 그 성취의 시대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고, 동일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예배 방법을 계시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신31:30)이 율법의 말씀을 들었고(신4; 10; 9:10; 18:16; 행7:38), 역시 온 회중이 유월절 양으로 희생을 드렸으며(출12장),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온 회중을 애굽에서 구속하셨고(출15:13, 16; 시77:15; 74:2; 행20:28), 그 온 회중과 함께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셨으며(출33-35장), 그 온 회중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희생을 준비하셨다(레4장과6장).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찬양하기 위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것도 역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었다(출19:6; 호2; 23; 시22:22; 참조, 히2; 12; 벧전2:9, 10). 또한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에도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통일성이 인정되어 있다(마8:11; 롬11:16-28; 고전10:1-4). 그런데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예언 속에는 '신실한 새이스라엘'이 형성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란 구약 시대 이스라엘 회중에 대한 예언적 성취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새 이스라엘'이 형성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들이 있었다. 양들을 목자에게로 모으시기 위해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심, 베드로의 신앙 고백, 최후의 만찬,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로서 사도들을 각 지방으로 보내심 등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유대인 랍비들의 토라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의 사상에 묶어 두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과 영원토록 교제하게 하셨다. 이러한 교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계시를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교제를 위해서 예수님은'케리그마'와 주기도와 성례전(최후의 만찬 뒤에 부르신 찬미와 더불어)과 (이혼, 권위 있는 스승들, 연보, 보물 등에 대한) 특별한 교훈 등을 교회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엔 좁은 통로(계시의 물줄기가 흘러가는)를 통해서 인간을 다루셨지만, 나중에는 세계 만민들에게 축복을 부어 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그리고 나중엔 소수의 경건한 가족들을 다루셨다. 이 가족들로부터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처음 제자들이 나왔다. 그리고 '선한 목자'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자, 모든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오직 구세주, 한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 구세주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흩어진 양들인 교회의 모든 개개의 회중들에게 다시 기름 부으시고, 세례를 주시며, 인을 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오신 이 성령님께서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의 생명이 되시며, 교회의 인도자가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시기 위해서 안디옥을 선교의 새로운 중심지로 정하시고, 사도 바울을 그 전도자로 세우셨으며, 자기 백성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명칭으로 칭하게 하셨다.
4. 교회의 성격: 사도 바울은 전체 교회나 지역 교회를 모두 교회라고 말했다. 그는 큰 교회(모임)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모임)도 교회라고 불렀다. 따라서 작은 교회들이 모여서 전체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체 교회가 작은 모임(회중)들로 나뉘어 지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크기로든지 일단 성도(교회)들이 모이면, 그곳에 바로 교회가 존재하며, 그것은 또한 전체로서의(완전한) 교회인 것이다. 특정한 교회(회집)는 우주적인 교회를 대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함으로써 신비적으로 전체의 교회를 의미하게도 된다. 그러나 보통은 이 지역 교회(지교회)가 전체 교회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교회'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란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 . 하나님의 교회들"(살전2; 14)이라는 말로써 완전히 표현된다. 이 말 속에는, 교회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련성에 관해서 살펴볼 때, 교회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즉,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신화가 이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에게 교회의 설립을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완성하셨다. 성자를 계시하신 것처럼, 메시야께서도 교회를 설립하셨다(마16:17, 18; 11:25-30). 또한 오순절 날에 일어난 세 가지 기적들을 통해서 볼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의해서 설립되었음이 분명하다. 신약 성경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 포도원, 전', 그리고 '하나님의 감람나무,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백성' 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신약성경에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고전12:28), 승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엡4:11), 성령께로부터(행20:28) 은사를 받은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한편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우위성을 인정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남녀의 모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친교하는 하나님의 회중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그 모임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임으로 간주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활동하시는 곳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교회 안에서 인간들을 만나시고, 창조주께 반역한 인간들을 변화시켜서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케리그마'(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믿는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그리고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 16; 15:16, 17; 딤후1:8). 우리가 말씀과 성례의 외적인 기능을 관찰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행하시는 것들을 믿음의 귀와 눈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서 잘못한 것을 책망할 때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깨닫게 해줄 때에 더욱 좋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와 세례와 문답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며, 성례의 집행을 통해서 죄를 용서하신다"(루터). 성례가 집행될 때, 집례자가 떡과 잔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줌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 축복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계신다. 종교 개혁자들은 안식일이란 육신의 일을 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전파를 통해서 신자들을 낳으시고, 성례를 통해서 양육하신다. 그리고 신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들이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심을 인정함으로써,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가 성립된다. 왕이신 메시야와 하나님의 백성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목자란 말 속에 양 떼가 암시되어 있듯이, 암탉이 그 날개 아래 병아리들을 모으듯이, 포도나무에 많은 가지들이 붙어 있듯이,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건물의 기초가 그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듯이, '여호와의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듯이, 왕이란 말 속에 왕국이 암시되어 있듯이, 메시야는 열 두 제자를 갖고 계시며, 주님은 그의 교회를 갖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 교회, 내 양떼'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도행전 20:28에는 이 두 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한 말들이 사용된 몇몇 구절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로써 교회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마16:18; 18:17).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임하시자, 우리가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각 특별한 기능을 갖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바로 교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이와 동시에 주님과 십자가와 신랑되시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또한 교회와 구별되기도 하신다. 교회의 생명과 거룩함과 통일성은 바로 그리스도안에 존재한다.
하늘에 있는 교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신부이다(막2:19, 20; 고후11:2; 롬7:1-6; 그리고 특별히 에베소서 계19-21장).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말씀'의 물로써 씻어서 정결케 하신다. 이것은 교회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정결케 하여 어린 양과 혼인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언제나 어린 양과의 혼인 날을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 때가 되면 그의 강림하시는 발길의 빛으로 인하여 모든 어려움들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5. 교회의 직분: 따라서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직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는 보좌 가운데 있는 어린 양, 즉 하늘의 기도 제단에서 언제나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시는 대제사장(기독교 예배의 핵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대제사장)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좌석의 구별이 없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성직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백성(평신도)이다. (벧전2:9; 5:2, 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보좌하는 목자들로서 맨 먼저 '사도들'을 임명하셨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계속 함께 다녔고, 그가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들의 '케리그마'(복음 전파)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 자들로 사도들과 똑같은 고귀한 믿음을 갖도록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대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위로써 말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전파했으며,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포했다(고후4:5).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었고, 사도들은 이 종교에 속해 있었다-교회가 사도들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었다-(고전3; 22). 아무도 사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그 교회를 맡고 있지 않는 다른 사도들이 세례식을 집행하는 것이 관례였다(행10:47, 48; 고전1:13-17).
사도들 다음에 해당하는 교회의 직분으로서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실제적인 생활상의 문제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계시 받았으며 교회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지고 보살피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전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맡게 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교회들에는 기타 여러 가지 직분들도 있었다. '장로들'-이들은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감독하는 자들이었다. '집사들'-이들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는 직분자들이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봉사하는 여인들'이 도와주었다)
6. 교회의 사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모든 사명들의 주권자이시다. 공적인 예배란 부활하신 구속주께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시는 것이며, 복음 전파란 사람들을 구세주께서 초청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율법을 공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육성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고 기성 신자들을 훈육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충복시키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대의사(大醫師)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모든 사역과 증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온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사업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의 주권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비유를 통하여 이것을 증명하고 계신다(사9:6, 7; 눅1:26-35; 행2:25-36). 주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게 하시기 위해서 모든 권위를 가지시고 다윗의 보좌에 앉으셨다(마28:18; 행5; 31).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중보의 기도를 힘입어 필요할 때마다 자비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와 성령의 모든 위로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증인인 것이다.” 원어성서연구원편,『 스테판신학사전 』 (서울: 원어성서연구원,1989)의 “교회”항목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부분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진리로 믿으며 성경대로 믿고 믿는 바를 행하려는 움직임으로서의 종교개혁과 그로인해서 세워진 개신교 교회는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에 몇 가지 특색을 더 한다고 할 수 있다.
2) 개혁교회의 특색
“로마 캐톨릭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의 성질에 관해서 그 의견의 차이를 현저히 보이고 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을 외부 또는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사실 이 조직체를 엄밀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전 단체가 아니라, 주교, 대주교, 교황의 최고 고문들, 또는 교황 등의 보다 높은 교권자들의 단체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교훈하는 교회’로서의 이 단체와 ‘교훈을 받는’ 혹은 ‘설교를 듣는 교회’로서의 신자들의 공동체를 구별지어 놓았다.(중략)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회에 관한 외부적인 개념에 반항하고, 성도들의 내면적 또는 영적 교통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을 찾았던 것이다.” Louis Berkhof,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6), 298.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조직이나 지위에 두지 않는다.
참교회의 표지, 표식의 문제는 종교개혁 때에 생겨난 것이다. 로만 카톨릭과의 대립에서, 참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는 카톨릭은 참 교회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또한 카톨릭은 개혁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사제들의 전통적인 연결이 참 교회의 표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비해서 개혁교회는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세례와 성찬)가 바르게 집행되며,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 것, 이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 중에서 권징의 경우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이미 그 모임을 교회라고 지칭할 수는 없게 된다. 또, 어느 모임에서 전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 모임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
참고로, 이 교회의 표식과 연결된 카톨릭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Wayne Grudem의 주장을 들어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거짓 교회인가를 묻는 질문은 오늘날 개신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거짓 교회인가를 묻는 질문과 흡사하다” 39.
과연 개신교회는 모두 참된가?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지식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왕성한 교제를 가진 사제들이 있는 교구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있다. 아직도 어떤 교리에 있어서는 우리의 가르침과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이 심오한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교회는 참된 교회의 두 가지 표징과 흡사한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교회가 참된 교회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의 책
사실 이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참된 교회이냐 아니냐를 구분함에 있어서, 그들의 자기 소개란에 카톨릭이라고 적느냐 개신교라고 적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 카톨릭 교회의 공적인 입장은 분명 이단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분명 올바른 말씀의 선포와 정당한 성례의 시행, 그리고 신실한 권징의 시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없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혹은 개신교의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①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프로테스탄티즘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 또는 '오직 은혜에 의하여' 의(義)로 인정됨을 강조한다. 물론 가톨리시즘에서도 '은혜에 의하여'를 주장하지만, 거기서는 은혜에 의하여 의화(義化)가 더해져서 드디어 성화(聖化)에 이른다고 하며, 의화는 구제(救濟)과정의 한 단계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인간은 선업(善業)이 없어도 은혜에 의하여 죄를 용서받는 것인데, 이 같은 죄의 용서가 의인이다. 따라서 똑같은 의인이라도 한편에서는 의화 내지 성의(成義)로 해석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인 내지 선의(善義)로 해석된다. 선업 없이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의(義)로 인정하는 신의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 의한 의인'이며, 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선업이다. 그것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라고 해도 행위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며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가톨리시즘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② 성서원리(聖書原理):가톨리시즘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라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성서의 해석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규정되므로 결국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권위의 통로를 성서에만 한정한다. 교회는 성서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로인하여 이루어졌으나 성서를 진실로 정경화한 것은 성서 자체의 힘이며, 교회는 그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③ 만인사제(萬人司祭):가톨리시즘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가 중요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권위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전승된 것으로 되어 있다(使徒傳承).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전례보다도 설교가 중시되어 교직제(敎職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직자는 제사라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교직자라고 해도 그 직위에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교직자의 신앙과 인격이 중요해지는데, 엄밀하게는 신의 말씀만이 권위이며 교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도하는 기능이다. 원리적으로는 만인이 설교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만인이 바로 제사장이다. 두산 엔싸이버백과사전, "프로테스테니즘” 항목
이렇게 개혁된 교회는 대 원칙으로서의 “오직 성경”과 더불어 “모든 성경으로”라는 구호 아래서 바른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3).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
이제 중세의 교회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사상들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 루터의 교회관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이전 즉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라는 큰 흐름이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이었다고 개혁파 교회는 고백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62번에서 “교회의 참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교회론의 중심에 권위의 복음을 두었다. 루터, 『 루터연구 』, (서울: 컨콜디아사,1966), v5집, 60.
이것이 핵심이었다. 당시에는 교황 중심의 세계에서 성경에 중심을 둔 것은 위대한 전환이었다고 하겠다.
루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는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었다. 루터는 말씀으로 교회가 형성하고, 교회와 모든 활동의 유일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의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 연구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0), 15.
루터는 교회가 말씀으로 인하여 형성되고 존재하게 되므로,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동시에 교회의 유일한 사명은 말씀선포에 있다고 보았다. 이장식, 『 기독교 사상사 2 』 (서울: 대한기독교서회,965), 216.
루터의 종교개혁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은 복음의 재발견과 이신칭의였다. 그에게 교회란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다. ꡔThe Papacy at Romeꡕ에서 교회론을 시작한 루터는 교회의 표지를 복음 설교와 세례, 성만찬으로 보았다. 그는 만인제사장론을 1520년의 세 논문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주장하여 교회론의 새로운 혁명을 이루었다. 1521년에는 사제(priest)개념의 재해석으로서 “성도의 교제”와 “만인제사장론”에 근본을 두고 말씀의 교역자(특수교역자), 공동체의 허락이나 선임자의 동의를 얻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usburg Confession)는 고대의 공인된 신조들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 사도신경 중 교회론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이병수, “21세기 한국 교회론 ”, (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1999), 32-35.
루터의 이러한 공로와 바른 방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몇 가지 장애의 요인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헷센의 필립, 작센의 프리드리히 등의 후원에 많은 힘을 얻었기에,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로 인해서 그의 교회론은 그가 원했던지 원치 않았던지 세속의 정치에 교회의 행적적인 부분을 많이 양도했고, 이로써 세속국가가 교회에 간섭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의표, 『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 연구』, 15.
그러므로 그의 교회론의 방향은 긍정적이었지만 몇 가지 한계를 드러냄에서 우리는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교훈을 얻게 된다. 현재도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많은 논의와 격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교회를 개척할 때, 루터의 교회관과 그 예는 좋은 거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2) 존 칼빈의 교회관
칼빈은 교회를 무엇보다도 타락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으로 보았다. 교회는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며 우리의 신앙이 출생하고 성장하는 곳이므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했으며, 또한 칼빈에게는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보는 개념도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보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그에게는 두드러진다. 이렇게 볼 때 유일한 구원의 기관인 교회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말씀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구원의 선포가 말씀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칼빈의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 4권 1장에서 진정한 교회에 대해서 교회란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이 교회와 우리는 연합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제 4권 , 편집부 역, (서울: 기독성문출판사, 1993), 16.
즉 교회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이며 중요한 곳인가를 말하면서 그것을 ‘어머니’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우리 모든 믿는자들은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이런 사상에 비춰서도 현대에도 교회는 계속적으로 세워져야함을 알 수 있다.
칼빈은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교회의 근원과 기원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사랑이다.” 존 칼빈, 『칼빈주석』, 시편주석 제 2권, 154.
라고 말함으로서 그 것이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서 시작된 공동체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잘 암시해 주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한 구원의 기관인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가시적 교회는 성도들의 사귐이라는 면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라는 면이 강조되므로 하향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칼빈의 가시적 교회는 성도들의 유기적 모임으로서의 특성보다는 제도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결국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약함을 돕기 위해 주신 가시적 교회이며, 말씀의 선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신앙의 출생과 양육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다. 임상훈, “ 칼빈의 교회론 연구”, (서울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 청구논문,1988), 9-10.
칼빈의 교회관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이다. 다음의 인용에서 보듯이 이것은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몸 안에서 지체가 된 성도들의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교회는 카톨릭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 - 둘 혹은 세 교회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연합되어 있어서 한 머리에 의존하게 되어 있으며 그들은 또한 몸의 지체들처럼 연합되고 결합되어 한 몸을 형성한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와 같이 그 단일성이 중요한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도의 교통’이다. 칼빈은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라는 구절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우애 가운데 지내야 한다는 점과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순복하고 양의 무리에 속한 한 마리 양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외적교회에 적용된다고 한다. 따라서 거기에 ‘성도의 교통을 믿사오며’가 첨가되어야 했던 것으로 본다. 현요한, 『칼빈의 교회론(성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대학원), 17.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상호의존하며 교통할 때 그 일치성이 더욱 공고하여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나누어질 수 없으며 성도의 교통이 중시되는 특징을 가진다. 성도의 교통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바탕으로 상호의존하는 가운데 교회의 일치를 공고히 하여 가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지니지만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을 좀 더 중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단순한 비유나 물리적 연합이 아닌 영적 결합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개념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연결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자신의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로 이 공동체는 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지고 서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구원받은 자의 총수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전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오는 것이며 이 구원의 단체인 교회의 회원의 자격의 근거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신앙에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조립되어지며 교회가 영원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신자들을 영원히 붙드신다. 또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 해 계셔서 신자들과의 사귐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광식, “칼빈의 교회론” (신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1990), 27-28.
칼빈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교회는 외부적인 형체가 없이도 자존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상형(地上形)이라고 말하는데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종성, 『칼빈-생애와 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139.
이러한 불가시적 교회와 함께 칼빈은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칼빈이 ‘교회 내에 이름과 겉모양으로만 그리스도인인 많은 위선자가 섞여 있다’ 존 칼빈, 『칼빈주석』, 이사야주석 제 1권, 168.
고 할 때의 교회는 바로 가시적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오히려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가시적 교회였다. 그러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술한 바와 같이 불가시적 교회는 현실의 제약을 벗어버린 이상적 교회이다. 그러나 칼빈이 목회 중에 상대한 교회는 가시적 교회였다. 그리고 이 가운에는 위선자들도 섞인 현실적인 제약을 받는 교회였다. 칼빈은 현실의 제한성을 지닌 교회를 적극 수용하고 적응하면서도 마땅히 되어져야 할 본래적인 교회상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시적 교회를 불가시적 교회에 수렴시켜 간다는 것은 현실적인 제약을 지는 교회가 이상적 모습을 향해 끊임없이 성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보았다. Otto. Weber. 『칼빈의 교회관』김영재 역.(서울: 풍만출판사, 1985), 49.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전자는 구원의 수단의 의미가 강한 개념인데 신자들의 신앙을 출생시키고 양육하는 방법은 말씀과 성례이다. 후자는 제도적 개념보다 공동체로서의 개념이 강한 것으로 성도의 교통과 교회의 단일성이 중시되었을 살펴보았다.
이제 칼빈이 그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에 관한 언급과 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교회는 “(시 65:5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존하지 않고 놀라운 위엄으로 보존하신다.” 459.
,“교회는 하나님 영광이 펼쳐지는 특별한 극장이다.” 칼빈, 시편주석 제 3권, 194.
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교회에 집중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동시에 지상에서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고 있다.“ 온 세상에서 교회 외에는 영구적인 것이 없다. 교회의 행복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하늘에 영원한 상태로 보존되어 왔다는 데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394.
,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비추는 거울이다.” 칼빈, 시편주석 제 4권, 315.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중심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하나의 동일한 신앙으로 연합되지 않는 한 즉 교회의 지체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칼빈, 이사야주석 제 2권, 45.
칼빈은 교회이 표지로서 “하늘 교훈을 전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임은 당연히 교회로 간주할 수 없다.” 213.
,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인 이상 십자가를 지고 겸손해지면 교회의 머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최고이 장식과 영광은 겸손이다.” 칼빈, 이사야주석 제 4권, 42.
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을 주님이 소유하신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신다.” 310.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구원은 항상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었다” 칼빈, 에스겔 주석 제 2권, 294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유일한 주이시다.” 칼빈, 고린도전후서 주석 제 1권, 146.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은 수 많은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칼빈, 빌립보서-골로새서 주석, 230.
존 칼빈은 그의 ꡔ기독교강요ꡕ에서 신자들은 일정한 표지와 특성을 지닌 공동체를 교회로 믿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보편적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모든 피택자들로서 하나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교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그이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마침내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직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부여해 주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정하셨다. 성례를 경험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성장시키고 강화하는 데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로써의 교회에 관한 칼빈의 언급들을 이해할 수 있다. 빌헬름 니젤, 『칼빈의 신학』, 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303-304.
4) 현대 교회의 교회론
먼저 근현대 교회의 모습들을 개관하여 보면,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소위 전통교회는 귀족 중심의 교회였다. 당시에는 사제나 목사의 설교 방향이 소수 귀족을 향하였고 대중은 설교자의 옆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19세기를 지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소위 자유교회가 등장하였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한국 등지의 교회는 자유로움이 있었고, 따라서 폭발적인 교파 분열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이른바 예언자적 교회가 등장하였다. 제3세계를 중심으로 태동한 예언자적 교회는 민중을 중심으로 하고 사회 참여와 정의 실현을 강조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민중 교회들이 생겨났으며, 80년대 이후 구미 교회들도 영성과 정의의 조화를 주요 주제로 삼게 되었다. 이병수, 『21세기 한국 교회론』, 34-35.
(1) 칼 바르트의 교회론
칼 바르트 신학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성은 ‘교회성’에 있다. 그는 “교의학은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음으로써 의미 있고 가능한 학문이다.” 이신건, 『칼 바르트의 교회론』, (서울: 성광문화사,1989), 17.에서 재인용
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 말로 신학의 실존적 근거요 그 주체가 된다.
칼 바르트의 교회론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은준관, 『칼 바르트의 교회론 이해』, (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97), 128.
그에 의하면 ,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만이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며 , 교회를 참되게 한다. 바르트가 진정한 교회의 표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리고 나란히 다른 것, 즉 독일인의 피와 영웅적인 히틀러를 추종하려던 당대의 교회의 잘못된 시도에 맞선 그의 예언적 외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서를 통하여’ 위대한 행위의 언어로써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를 듣는 바로 그 곳에 교회가 생기고 존재하는 것이다. 문경환, “칼 바르트의 교회론에 비추어 본 교회의 사명”,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1), 5-6.
그러기에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서를 항상 겸손히 연구하고 주석해야 하며, 여기에 견주어 보아야 한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 즉 성서의 증언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신건, 『칼 바르트의 교회론』,158.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존재하는 데, 그 말씀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이라는 것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교회의 주인이며, 본질적인 주체가 되신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역사적 실존의 형태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 ‘성도들의 교제’, 그리고 ‘하나미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문경환, 『칼 바르트의 교회론에 비추어 본 교회의 사명』, 57.
또한 교회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하며, 교회의 질서에는 봉사의 법, 예배법, 살아 있는 법, 모범으로서의 법을 통해 그것이 유지된다고 하였다. 앞의 책
그러면 이러한 교회는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하며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도 여기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바르트는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인간을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잠정적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세상 가운데서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세상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과제와 본질을 복음의 선로로 보고, 복음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성령을 통해 보여 주신 살아 계신 예수 그리드도의 확고한 약속 안에서의 봉사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 57-58.
고 말한다.
바르트는 교회를 회개하는 장소로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아무리 부복한 곳이 많아도 진실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자체는 큰 보이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성주, 『현대신학 제1권』, (서울: 문서선교 성지원,1994), 413.
결론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학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복음으로 사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몰트만의 교회론
몰트만의 교회론은 그의 책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존재하고 또 존속하고, 미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며, 성령의 현재와 능력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 나라의 교회, 성령의 현존과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교회론은 메시야적 교회론이다. 따라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구원하고 해방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몰트만은 오늘날 교회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하는 교회', '에큐메니칼 교회', '정치적 교회', 이렇게 네 가지 차원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먼저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기초요 힘과 희망이다."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유일한 주권을 통한 교회의 차원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 성경적 근거로 몰트만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라는 구절을 제시한다. Moltmann, Perspekiven der Theologie., 전경연 역, 『신학의 미래(Ⅱ)』, 복음주의 총서 8권, (서울 :종로서적, 1973), 16-17.
또한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을 선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 까닭은 “교회가 자신을 더욱 더 세계의 지평에서 이해해야 하며 교회의 위탁을 세계사의 틀 안에서 서술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선교적인 서술”이기 때문이다. 19.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다운 점은 선교에 있게 되며, 교회로부터 선교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로부터 교회가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83.
따라서 교회의 목적은 자기 기구의 확장이나 영광이 아니라 “그의 나라의 확장”이며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영화”이다. 따라서 몰트만은 그의 교회론을 세계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삼위일체론에서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의 선교(Missio-Dei)의 교회라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가시적 통일을 추구한다. 연합운동의 내적 근거는 “저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하소서.(요 17:21)”라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있고, 외적 근거는 “기독교가 그 자체에 있어서 연합적인 공동체를 통해서만 세계에 평화를 증거할 수 있는 파국적인 세계상황에 있다.” 23.
몰트만은 교회는 역사에 있어 항상 정치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지 교회는 정치적 요소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26.
그러나 몰트만의 "정치적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정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 지평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배, 메시야적 사명, 교회적 실존에 대한 보다 가까운 정치적 일치를 찾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상의 네 가지의 교회를 고려하여, 오늘의 시대의 경험들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교회 안의 경험들로부터, 그리고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같이 출발하고자 한다. 30.
몰트만은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하면서 그러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와 세계의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의 완성을 추구해 가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에 있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선교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니다.
몰트만은 교회가 어떻게 “종말론적 실체”로서 그리고 “경험적-역사적 실체”로서 자신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신앙과 경험, 희망과 현실, 본질과 형태들의 긴장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32-40.
이것을 위해 몰트만은 먼저, “역설적 동일성”을 통하여 신앙과 경험의 갈등을 해소시키고자 한다. 그는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경험의 대상이며, 또한 교회는 종말론적 실체이며 동시에 역설적 실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근거를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의 십자가를 동시에 종말론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의 역설”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에서 찾는다.
두 번째로 몰트만은 희망과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희망의 선취”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회상과 희망의 인상 아래서 자신을 역사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36-38.
세 번째로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과 형태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례전적 동일화”를 제시한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이 기대의 생으로 방향 정해진 사람들의 공동체들의 삶의 표현인 것이며, 그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도 세계를 위해 세계 안에서 활동케 하는 능력인 것이다. 38-40.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 성례전 안에서 종말론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이 상징적으로 결합된다고 봄으로서 교회의 본질과 형태의 갈등이 어느 정도 성례전적 동일화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해결책들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에서 이것들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그는 삼위일체적 역사 중에서 성령과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한다.
몰트만은 교회란 새롭게 창조하는 영의 역사로서 신앙과 경험, 희망과 현실 사이에 있는 그것의 현재의 긴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즉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사와 약속을 알게 되고, 우리가 말씀과 성례전과 교회 안에 오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각하게 되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앞서 말한 세 가지의 교회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49.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삼위일체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또한 영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그의 교회 안에 현재하고, 그것을 넘어서 창조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I50.
이제 몰트만은 때의 표징들의 영향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밝혀보고자 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계사의 주인이시므로 하나님은 이 세계의 파멸과 몰락을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그의 역사가 완성되는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이 세계를 역사화 시키시는 분이심으로 교회는 역사 속에 나타나는 때의 표징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역사 속의 교회라고 한다. 53
몰트만은 때의 표징들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다고 보고, 교회에 영향을 주는 결정적인 때의 표징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밝히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를 혁명을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근본입장으로 인도한 종말의 표징들이고, 둘째는 교회를 혁명적 교회로 인도한 역사의 표징들이다. 54-58
몰트만은 이 두 가지의 표징들은 각각 교회에게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측면을 가져오게 하였다고 한다. 161.
그러므로, 몰트만은 “희망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를 “위기의 표징”으로 이해하여 이러한 두 가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 61.
이제 끝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에 있는 교회를 통해 “세계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포괄적인 영역 안에서”교회의 사명과 의미, 실존과 기능을 고찰한다.
몰트만은 성령 안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영역 가운데서 자신을 이해하는 교회라고 한다. 66.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속에 있는 교회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역사를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몰트만은 먼저, “보내심의 빛”에서 삼위일체 역사의 기원을 이해한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아들과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인간, 세계, 그리고 시간에 대해 열려있는 하나님이 된다. 69.
또한, “부활의 빛”에서 삼위일체 역사의 미래를 이해한다. 그는 성령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을 받았다고 한다. 71.
결국 하나님의 삼위일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세계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의 종말론적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과 세계의 해방에 있음도 보게 된다. 이것을 몰트만은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다. 77.
하나님의 역사경험이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으로 이 역사에 관계하시며, 이 역사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몰트만의 교회는 세계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운동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교회, 구체적으로 피조물의 해방을 위한 교회, 인간과 인간, 사회와 교회의 영합을 위한 교회,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교회로써 하나님의 기쁨의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이다.
몰트만은 이렇게 삼위일체적으로 이해되어진 교회를 좀더 구체적으로 체계를 세우기 위해 첫 번째로,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 4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에서 성령의 교회를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는 이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교회의 실천과 과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82-90.
여기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메시야적 사명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다룬다. 그는 “예수와 제자들의 선포는 선교이지만 그와 그들의 선교는 단순히 선포만은 아니다. 병자를 고침과 갇힌 자의 해방과 의에 대한 갈구가 이 선교에 속하며,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음의 선포와 함께 행하여진다.” 92.
라고 말하며, 이 사명과 함께 종말시의 출애굽은 시작된다고 본다.
교회는 그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 그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케 되며 98.
, 사회와 과거의 세력과 미래의 힘, 압제와 해방 사이의 충돌 속에서만 장차 올 나라와 현재적 해방의 복음을 메시야적 선교의 지평에 올려놓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몰트만은 새로운 “종말시의 출애굽”으로서 이해하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출애굽 교회라고 부른다. 98-99.
여기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수난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다룬다. 몰트만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의 자기 헌신의 의미가 교회의 친교를 넘어서서 원칙적으로 또 경향적으로 세계의 화해와 해방을 포함한다는 것을(고후 5:19, 롬 11:32) 밝히고자 한다. Moltmann, Das Experiment Hoffnung und Politik, 전경연 편역, 『희망의 실험과정』, 복음주의 총서 13권, (서울:종로서적, 1977), 190.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의 시각을 가지고 십자가 아래 선 교회로서 교회가 다음 세 차원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처럼 죄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하는 차원 104.
, 둘째는 그리스도가 정치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부활하신 것처럼 정치적 권력의 우상으로부터 해방하는 차원 105-106.
, 셋째는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우리가 해방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로부터의 해방의 차원이다.
몰트만은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교회이며, 사람들에게 확신 있게 기대를 두며, 해방하는 교회”라고 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해방을 받으면 새로운 생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해방하는 지배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며”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rit, 박봉랑 외 4공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서울:한국신학 연구소, 1982), 120-121.
, “교회는 세계 구원을 위한 새 활력을 일으키는 성령의 은사 속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일하고 고난을 겪는 그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하는 교회의 근거는 “종이 되신 예수”이며, 우리가 섬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고, 해방하는 교회의 가능성은 “성령의 체험”으로써,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써 성령 안에서 우리의 전 생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새 생명으로 채워져, 세계의 해방을 위해 일하게 하는 전체적인 것(종교, 정치, 경제, 개인)것을 포괄하는 능력“ 몰트만, Politische Theologie, 전경연역 『정치신학』,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74), 29.
이기 때문이다.
결국 몰트만은 십자가에 대한 삼위일체적 해석으로 그의 메시야적 교회의 시도를 해방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몰트만은 부활의 빛(희망의 빛)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적 영안에서의 현실적인 해방과 새로운 공동생활을 선양하는 자유의 축제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다룬다. 즉,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로서 그들에게 메시야적 기쁨의 사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자에게 전해주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된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우정으로서 자유의 축제가 현재적으로 개방되어지는 삶이며 교회는 끊임없는 자유의 축제를 세계 속에 있게 하는 축제로서의 교회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끝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실존과 과제에 대한 이해를 마무리 지으면서 이것을 그리스도의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그는 교회가 그 실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현재하심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암브로시우스의 “그리스도가 계신 곳 거기에 교회가 있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가 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에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계시고 실제로 현재한다고”함으로, 묵시 문학적 배경 속에서 약속에 근거를 둔 자기의 계시 이해를 근거로 한다.
결국, 몰트만의 교회는 이러한 메시야적 영광의 선취에서 역사의 완성을 기대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현재 속에 있는 메시야적 교회인 것이다.
전장에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 곧 구체적으로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제, 몰트만은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에서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곧 하나님의 종말론적 성취를 통해 세계 속에서 전개되는 현실적인 하나님의 통치와(현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하나님 통치의 우주적 목표를 (역사의 지평 속에서가 아닌 미래에 있는 하나님 나라) ‘동시에’ 만족시키는 교회의 모습을 제시코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몰트만은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희망”을 말한다.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의 교회는 세계의 다른 희망의 관계들, 즉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의 관계를 명백히 할 뿐 아니라 다른 희망의 관계들인 세계 종교와 사회체제, 그리고 자연의 체계에 대한 관계들을 파악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그러나 구체적으로 역사 한복판에서 역사의 목표로 증거하는 모습을 가진 교회가 되는 것이다.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rit, 151
몰트만은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관계성을 말한다. 그것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그의 지속적인 동반자로서, 그의 역사 안에 있는 동반자로서, 그리고 그의 희망 안에 있는 형제로 인식코자 한다. 155.
이는 이방민족들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은 전 세계에 미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미래는 세계의 구원을 통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11:25) 몰트만은 “교회는 이스라엘이 신앙을 갖도록 자극하며(롬 11:11,14) 이스라엘은 교회가 희망을 갖도록 자극하는 관계(롬 11:25)” 162.
라고 함으로써 이방선교, 즉 세계 구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가 성취된다고 보고 이방선교의 절대성을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찾고자 한다.
몰트만은 신앙을 깨우치고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하고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서 새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을 선교의 목표 중의 하나로 인정 하면서도, 선교의 목적은 신뢰와 감정과 사고와 행동들의 새로운 삶의 환경을 질적으로 변화 시키는데 있다고 질적 선교를 강조한다. 그는 질적 선교는 대화 속에서 일어나며 이것을 통해 태도와 견해가 변화된다고 하며 세계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한다. 150.
그는 교회의 절대주의가 기독교를 자기 방어적, 비가변적, 공격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국가들 간에 메시야적 시대로 준비하고 속죄하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면 어떤 문명도 배척해서는 안되며 어떤 종교도 전멸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161-163.
몰트만은 기독교가 본래적으로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세계의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삶의 악순환들을 제거해 가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삶의 악순환들은 구체적으로 경제적 삶의 차원에서의 가난의 악순환과, 정치적 권력의 악순환, 무의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악순환 등이다. 물트만은 여기에서,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그 사회의 현재에 대한 책임적 존재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 Perspekiven der Theologie., 전경연 역, 『신학의 미래(Ⅱ)』, 복음주의 총서 8권, (서울 :종로서적, 1973), 123.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종말론의 빛에서 본 몰트만의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교회는 장소에서(이방인 선교), 삶의 영역에서(정치, 경제, 문화, 무의미)열려 있으며 세상을 위하여 세상과 더불어 존재하는 교회인 것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에 기인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교회란 신앙과 희망 사이의 긴장을 새롭게 창조하는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 즉,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포괄적인 틀 안에서 성령의 현재와 능력을 통해, “구원의 방편”들과 “교회의 교역”들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을 넘어서 세상의 고난과 하나님의 미래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안에서의 친교로써” 또 “은사적인 친교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메시야적 봉사의 공동체로 이해되게 된다.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rit, 220,
몰트만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성령의 교회”라고 한다.
몰트만은 또한 이러한 메시야적 삶의 형식은 다음과 같은 창조적인 긴장에서 의미를 더하게 된다고 본다.
먼저, 기도와 세상 사이의 긴장이다. 몰트만은 세상에 충실한 것도 기도와 울부짖음의 열정을 증가시키는 것이요, 기도하는 자는 더욱 세상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307.
이것은 곧 몰트만이 기도가 교회의 실천적인 요소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명상과 정치적 투쟁 사이의 긴장의 일치이다. 명상과 자유로운 행동은 삶의 다른 영역으로써 상호 보충하는 것이요, 기독자의 삶은 명상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정치적 투쟁 사이의 긴장에서 의미 있는 삶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308.
마지막 방법은 초월적 종교와 연대책임적 종교이다.
몰트만은 초월 종교와 연대책임적 종교를 기독자의 삶의 두 측면으로 생각하여 어느 한 쪽 만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우리는 메시야적 삶의 방식을 고정형태로 만들어서는 안되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이런 긴장을 해결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기독자의 삶의 형태를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몰트만은 그 다양한 직무와 책임을 진 교회를 성령의 현존과 활동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삶이 구체적으로 한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실천적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의 직무들에게 나타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312.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는 친교인데, 공동체는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사회적 역사적 자연적인 삶의 제도는 친교 안에서 무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316.
그러므로 제의와 조직을 가진 교회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지상적인 삶의 형태이며, 그것은 그가 세상을 해방시키기 위한 봉사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결국 몰트만은 교회가 성령의 능력들의 충만함 가운데 “성령이 스스로를”나타내는 장소이며, 교회에 주어진 은사는 종말시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봉사하는 능력과 가능성이 될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은사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새롭게 봉사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309.
이제 몰트만은 이러한 공동체에 부여된 임무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몰트만은 공동체의 임무는 전체 공동체의 소명에서 출발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동봉사를 전제해야 하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공동체에 위탁된 임무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부르는 일”로 생각한다. 323.
구체적으로 몰트만은 공동체의 임무들을 말하고, 이 임무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통일됨으로 함께 성장하며 서로 의지하게 됨을 밝히고 있다.
몰트만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과제가 “친교”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이 형제 공동체는 우정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친교형태를 가지는데 그 삶의 양식이 지배나 굴종이 없고 소유의 탐욕, 사유재산의 주장이 없어지고 사회, 문화, 인종적, 성적인 구별과 특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몰트만은 또 하나의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의 원리”에 의한 “회중”차원으로 이해되어 제시된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의 근거는 대중적 정치모임을 의미하는 에클레시아이다. 몰트만은 이 개념이 종교개혁에서는 최종적 원리, 즉 하나의 공동체 원리로 발견되어 교회를 차라리 “회중”이라는 차원을 제시하는데, 회중은 에클레시아의 정의에 따라 모이는 공동체이고, 어떤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하여 특수한 장소에서의 가시적 만남이며 철저히 카리스마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과제를 발견하고 삶의 영역에서 해방시키는 실질적인 “회중”인 것이다. 358.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몰트만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종말론적인 은사로서, 성령에 의해 새롭게 창죄되는 메시야적 삶을 살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봉사와 친교를 가진 위임된 메시야적 공동체, 회중인 것이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교회의 표식들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그리고 사도적 교회를 삼위일체적으로 새롭게 이해함으로서 그의 교회론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적 사명을 가졌기에 그 사명에 자기를 일치시키게 되어진다. 그러나 이 일치는 자유 속에서 일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가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의 지배의 요구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고 실천할 때 교회의 실제적인 일치를 획득하게 되기 때문에 교회는 자체적으로 에큐메니칼 교회가 되어 분열과 갈등 속에 파국적인 세계 상황으로 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공헌하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368.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서 보편적 교회의 모습을 찾는다. 이 교회는 전체적이고 완전한 교회의 모습으로서 교회의 공간적인 보편성, 곧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의 모든 영역 안에 있는 교회의 현존과 교회의 시간의 보편성, 곧 역사의 모든 시간 속에 있는 교회의 현존을 포함하는 모습의 교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이다. 371.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아직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볼 수 있게 되는 목표를 향해있는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보편성에의 참여를 실현케 하려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몰트만은 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거룩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규정되어 있으며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교회는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되었고 그것은 “그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했다는 것에 근거한다.(고전 8,9) 결국 몰트만은 교회가 “가난”속에서 교회의 “거룩함”이 강해진다고 봄으로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80.
몰트만은 역사적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유래하며 사도들에게 관계되며,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나온 것으로 본다. 381.
그러나 이 사도들의 선교에는 ”시련과 대립과 고통“이 뒤따랐던 것처럼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능동적으로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고난 받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385.
결국 몰트만의 교회론의 방향은 일치를 추구하고 세계의 역사를 포괄하고 가난한자를 위한 그래서 고난 받는 교회의 모습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향코자 한다.
몰트만은 교회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현대 사회 속에서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사회적 삶과의 관련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사회 에서 교회 본연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다.
몰트만의 교회론은 교회의 위치를 전통적인 형태인 장소와 영역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시간적인 점에서 봄으로서, 역사 안에 있는 교회가 단순히 그 자체로만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에 있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 존재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 즉, 하나님의 주도하시는 선교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몰트만의 교회론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론에 있어 그의 관심이 역사와 사회에 미래에 있기에 상대적으로 개인의 실존이나 인간의 내면, 과거에 대해서는 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 구원을 강조함으로 개인 구원의 빈약성을 낳았고, 인간의 비극적인 죄성(罪性)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고, 세상을 위한 교회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가시적 공동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몰트만의 교회론이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진 현실을 멀리하는 종말 사상, 개인의 축복의 추구를 벗어나 이웃을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교리주의와 교권주의에 의해 분열된 한국교회에 에큐메니칼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형식화된 예배와 성례식, 제도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5)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의 교회론
여기서는 현대 교회론 중에서 개혁주의 노선과는 사뭇 다른 소위 해방신학 혹은 한국적 민중신학의 교회론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따른다. 이 논문의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참고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개혁신학의 입장과 사뭇 다른 교회론을 주장하는 논문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하고 자세한 정보는 각주의 논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신학석사학위 청구 논문, “현장신학의 교회론 연구”라는 논문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논문은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바를 정리하고, 소위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교회론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참다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민중신학적 혹은 해방신학적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입장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것에서 말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많은 참고와 고민을 제공해 주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 이천우는 논문의 결론에서 한국교회에 대해서 바른 교회상을 몇 가지로 제언을 하고 있다.
첫째, “민중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교회적인 것 뿐 만 아니라 기구 적으로 탈출해야 한다.” 이천우, “현장신학의 교회론 연구”,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 청구 논문, 2001), 59-60.
고 말하면서 제도적인 교회와 그것에 수반되는 재정적인 것들로부터 단절하지 않고는 진정한 교회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로, “민중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가 되어야한다.” 60.
고 말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민중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민중들이다.
셋째로, “민중교회는 전통적인 교리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필요로 한다. 제의 공동체에서부터 삶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며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앞의 책
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도 상당히 도전적이지만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천우 씨는 계속해서 민중신학적인 교회론의 대안을 이어간다.
“넷째, 민중의 교회는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민중의 삶의 소외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므로 여기에 대조되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민중교회는 현재의 자본주의의 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질서를 획들하기 위해서 교회 안으로부터 대항의 질서를 실현해 가야한다.
다섯째, 겸손과 믿음, 사랑, 희망 등의 도덕적인 덕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어야할 것이다.
여섯째, 민중의 교회는 한국 민중의 역사적 전통에서 추출도리 수 있는 아름다운 덕성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야 하며 한국의 역사와 상황 속에서 민중들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사명과 과제를 긴밀히 연결해야 할 것이다.” 60-61.
우리는 여기서 논리의 주제를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과 칼바르트와 몰트만의 교회론을 다뤄보았으며, 민중신학 혹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바 바른 교회의 몇 가지 제언을 들어 보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논문의 목적을 상기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현재사회 그리고 세계의 한 부분인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교회를 세우고 개척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고 세워갈 것인가?”를 교려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1) 성장지상주의
교회의 기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이다. 또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이며, 교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게 되므로 그것의 운명은 반드시 성장하게 된다.
예수님도 그의 비유에서 뿌려진 씨앗이 많은 허실이 있어 보이지만 결국은 30배와 60배와 100배의 결실을 하게 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얽매이는 교회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칼빈도 “ 하늘 교훈을 전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임은 당연히 교회로 간주할 수 없다.” 칼빈, 『칼빈주석』, 이사야주석 제 2권, 213.
고 함으로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목적보다 성장지상주의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문제이요. 로이드 존슨의 표현을 빌자면 영적인 매춘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에 이러한 문제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부와 건강과 세상적 성공으로 규정하고 사람들에게 그 축복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님께 투자하라고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위시한 각종 헌금과 금식기도와 교회봉사 또 그 외의 모든 종교적 봉사 행위를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세상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도록 가르칩니다. 많은 교회들이 물량주의적 성장을 추구하여 웅대한 건축과 사치스런 치장에 관심을 기울이고 부자 성도를 더 우대하고 과소비적 프로그램을 조장하여 사람들에게 은근히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또 교회는 군사문화에 동화되어 세상적 힘을 숭배합니다. 우리는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과거의 불의 한 군사독재자들의 권력을 숭배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면서 그들의 제사장 노릇을 하는 등 그들에게 굴종한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또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크기에 따라 권위와 힘을 주장하며 목에 힘을 잔뜩 주고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는 반면에 작은 교회 목사들은 대형교회 목사들의 힘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김세윤 , 『기독교적 소명의식과 문화창조(기독교는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서울: 대장간, 1990)
이것들은 너무도 적절한 한국교회에 대한 지적이라고 생각 된다.
여기에 대해서 경제학자인 조상국 교수는 목회와 신학 1991년 9월호에서 “성장지상주의의 폐혜가 주는 교훈”에서 “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학을 "남성 (He: Hyper―expansionist의 약자)경제학"이라, 부르고 삶의 질과 의미와 생태계를 고려에 넣은 경제학을 "여성 (She: sane, humane, ecological의 약자)경제학"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에서 생명이라는 단어가 여성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성적인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생명 중심의 경제학을 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의 뛰어난 크리스챤 경제학자 하우츠바르트는 성장 지상주의는 기술진보라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물신주의 기술주의에 대한 신앙에서 허덕이는 것이 현대의 경제성장 추구 국가들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에야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 지상주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슈마허 같은 뛰어난 경제학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써서 작은 기술, 작은 공장, 작은 기업 등이 참으로 인간을 존중하며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존재가능성을 확보해줄 수 있다고 설파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우리 경제에도 작지만 인간적인 중소기업이 절실히 요구되듯이 우리의 교회에는 작은 교회 인간적인 교회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성장하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힘으로써 현실의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경제를 지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샬롬을 체험하며 바른 경제 하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경제주의 세속주의의 지배를 받아서 대형화 성장위주로 오히려 사회를 뒤따라가기 때문에 병리적 경제현상은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에서는 신앙과 경제생활이 분리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작은 신앙공동체에서는 구성원이 서로서로 자발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작은 자발적 신앙공동체가 경제 사회 모든 문제에 있어서 신앙에 기초하여 성령 안에서 사고하고 격려하고 생활해나가기가 용이하다. 이러한 신앙공동체적인 노력만이 교회에 침투한 세속주의를 물리쳐나갈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경제적 병리현상들은 근원적으로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경제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라고 경제학자 불딩 교수는 간파한 바 있다. 또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일조각), 모리시마 교수의 [일본은 왜 성공하였는가]등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바른 정신자세가 바른 경제를 이끌어나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경제의 바른 성장은 경제학자들의 손에 달려있다기보다는 정신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만이 한국경제의 앞날을 밝게 해줄 수 있다. 신앙이 경제를 지배하게 하자.” 조상국, “성장지상주의의 폐혜가 주는 교훈”, 목회와 신학 (1991년 9월호)
고 말함으로 바른 교회로서의 작은 교회의 역할과 그것의 아름다운을 역설하고 있다.
성장지상주의 그것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바른 성장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2) 기복종교화 현상
예전에 전도를 하면서 경험한 일인데,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신(神)은 잡신(雜神)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웃이 무당이었는데, 요즘 기독교의 하는 일을 보니 무당과 똑 같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이 너무 심한 비판일까?
불행하게도 이것을 다 부정하기가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회성장의 요소에도 이러한 요소가 있었다는 것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한국에 들어온 종교는 모두 무교(巫敎)와 혼합되어 기복적 성격을 띠어 왔다. 이것이 기복신앙 전통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의 심성에 부합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원구, “한국교회 성장운동 재평가”, 목회와신학 (1990년 2월호)
는 분석처럼 한국교회가 성장적인 측면에서 혹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이방종교의 순기능이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문제의 한 근원이 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적인 요소로 어떤 이들은 안수기도, 예언기도와 복을 추구하고 비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무조건 덮어 두고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학자들 가운데는 축복이 구약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단 그것이 샤머니즘적인 기복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정연빈, “한국교회 갱신에 관한 연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1), 40-41.
이러한 현상에 대해 또한 축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이종윤, 『급변하는 사회와 교회 갱신』, (서울: 요단출판사,1996). 29.
기복신앙적인 요소는 반드시 교회를 세우는 단계부터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유혹은 단호히 배척해야 할 것이다.
3) 사회의식의 결여
한국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또 하나는 사회의식의 결여라고 말 할 수 있다. 즉 한국교회가 교회만을 위한 교회 중심적인 모습으로 변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모습에 대해 반발을 일으킨 것이 해방신학의 한국적인 표현인 민중신학일 것이다. 먼저 민중신학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 갱신의 위한 제언들을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한국교회에 대해서 혹은 기존 교회에 대해서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교회가 거듭나야 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천우, “현장신학의 교회론 연구”, 58-62.
이런 주장에 대해서 본인은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문제시하는 민중의 소외문제, 교회의 자기중심적인 욕심의 문제. 교회가 사외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가에 대한 심각한 물음 등에는 귀기울여 한다고 여겨진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지던 시기에 기독교는 사회를 향해서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들과 그들이 키워낸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봉사하며 바른 목소리로 사회에 공헌하였었다. 그러나 2002년 현재에 이르러 교회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문제 있는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만민중앙교회 성도들의 방송국 난입사건, 시한부 종말론으로 많은 주부와 학생들을 미혹했던 다미선교회와 유사한 교회들이 일으킨 사회적인 물의, 대형교회의 목사의 개인적인 비리와 사생활의 문제에 대한 의혹,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 등으로 교회는 사회에 봉사하고 선도해 나가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로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일들에는 오해와 기독교에 대한 사전지식의 결여 편파적인 보도의 문제도 함께 상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현재의 한국교회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용상은 그의 책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에서 역사적으로 한국교회가 교회의 구실을 제대로 한 때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재정치에 저항한 민주 민주투쟁 시기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용상,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서울: 해누리, 2001), 141.
그리고 그 외에는 바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계속해서 불의에 항거한 교회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특히 바른 신학과 전통을 자랑한다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중에서 본교(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와 같은 신학적 노선을 가지고 있는 합동측은 침묵 혹은 친정부의 입장에 섰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 중에 한가지이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장로교신학대학교의 학생들은 십자가를 들고 항거했지만, 반면에 충신대학교에서는 그것에 반대해 정부로부터 대형버스를 받았다는 사실 이 이야기는 당시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학생회의 임원이었던 송영민 목사(현재 서울 갈현동 세움교회 담임)에게 들었던 사실이다.
은 부끄러운 일이며, 이런 분위기에서 배출된 교회는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본다.
물론 “어떻게 교회의 목소리를 내야하는가?”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일방적인 침묵과 획일 적인 침묵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로는 강력하게 혹은 온유함으로 왕과 권력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를 수 없이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고아와 과부와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세심한 배려 또한 성경에서 수 없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권력자나 혹은 약한 자들을 향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할 예언자적인 기능을 분명히 감당하루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사회를 바로 보고 대안을 제시하며, 진정한 복음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선 먼저 신학교에서 한국역사(특히 현대사)와 사회적인 정의에 대해 적그적으로 가르치고 바른 목소리를 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교인은 70명이지만, 그래서 규모는 매우 작지만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있다. 바로 청량리의 다일교회이다. 그들은 작지만 소외된 아웃을 섬기고 사회를 감동시키는 교회의 바른 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울 때 혹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때, 그 교회의 비전에는 반드시 사회를 향한 사랑과 열정과 헌신의 각오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4) 목회자의 자질 문제
이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모든 목회자의 자질이 문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그분의 양들을 목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평가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몫으로 돌려진다. 정확히 말해서 평가는 하나님만이 하실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혹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르고 바른 것을 성도들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금지할 법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명백하게 무자격자의 모습을 드러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가장 심한 책망을 하셨다.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는 자”이며 “소경이 사람들을 인도한다.” 마태복음 23:13
라고 말씀하시며 심하게 꾸짖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자들이었고 외적인 자격에 있어서는 완벽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근래 어떤 이들은 비정규신학교에서의 졸업자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학위의 유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자질의 문제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다뤄져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로이드 존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는 정규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가 늘 하나님 앞에서 공부하게에 게을리 하지 않고 살아 있는 영성으로 목회사역을 감당했을 때, 교회가 세워지는 바른 목회자 상과 교회의 상을 교회와 사회에 제시했다.
목회자는 그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부름을 받은 그 시점에서 겸손함으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을 보여야 한다. 디모제전서 4:12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자격의 목회자들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세우는 일 중에서 최우선에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교회를 개척했던 선배 목사들의 조언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의 조건으로 선배 목사들은 공통된 증언이었다. 명성훈, 『교회개척의 원리와 전략』, 267-392.
5)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
(1) 한국교회 예배의 이교적 요소
여기에 대해서 김윤철은 2000년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에서 한국교회 예배의 현실 중에서 이교문화의 요소를 지적하였는데, 이를 살피는 것이 바른 교회를 세우는 데 한 역할을 할 것이다.
먼저 김윤철은 그의 논문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및 갱신”에서 이교문화적인 요소로 지양할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샤머니즘 적요소이고 둘째는 불교적 요소 그리고 마지막은 유교적 요소다.
결론적으로 “ 한국교회는 이교적인 요소들의 영향으로 예배가 바르게 행해지지 못 하고 있다. 샤머니즘에서 ‘굿’하는 행위와 기복신앙은 예배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예배로 바꾸며, 성도들을 예배의 구경꾼으로 만드는 위험한 요소이다. 불교의 허무주의와 행위에 의존하는 구원관은 예배의 생활화를 약하게 만들며, ‘시신득의(칭의)’의 신앙을 혼돈 시키는 요소이다. 유교의 주종관계의 삼강오륜(三綱五倫) 사상과 형식주의 그리고 혈연 중심사상은 예배 인도자로 하여금 권위주의적 의식을 심어 주므로 예배가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것을 외면케 하고, 형식과 체면 때문에 예배에 출석하고 기도와 헌금을 하도록 만들며, 분파주의와 지역주의를 생기게 하는 위험한 요소이다.” 김윤철,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및 갱신”,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0), 40.
라고 그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잘못된 뿌리를 예민하게 관찰하여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고 할 것이다.
(2) 성만찬 즉 말씀과 성례의 불균형
현재 교회에서 성만찬은 분기에 한 번 정도 씩 시행되고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너무 자주 시행하게 되면 신비함과 긴장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 가운데 성례는 예배에서 상당한 위치를 치지한 것도 사실이다.
성례전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는 첫째,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이다. 둘째,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현장이다. 셋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넷째, 성례전은 성도들을 공동체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다. 마지막으로 성례전은 화육적(incarnaonai respect) 관계형성을 이루는 통로로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이미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라느 말씀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례전 사건은 개인에게 그리스도와의 상관관계를 연속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37.
또한 허철민 교수는 온전한 예배를 위한 제언에서 칼빈의 성만찬을 중심으로 이렇게 정의했다. 여기서는 그이 논문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초대 교회는 설교 중심의 예배와는 다른 예배 형태였다. 성만찬 중심의 예배였다. 이 성만찬 중심의 예배가 “그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중심적인 형태였다. 그렇다고 설교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상 설교가 초대 교회 사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행위였으며, 이를 통해서 교회가 발전해 왔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만찬이 중요시되어 졌고,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 예배의 문제점은 이런 말씀과 성례가 둘 다 중요시되면서, 함께 동반되는 균형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균형 잡힌 예배와는 다른, 지나친 설교 중심의 예배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금 자성해 볼 필요성이 있다.
죤 칼빈은 매주마다의 성만찬 예배를 강조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예배 의식을 재건하려고 시도했었다. 실상 칼빈에게는 성만찬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칼빈의 신학은 총체적으로 성례의 신학(a theology of the Sacrament)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칼빈이 성만찬 신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그의 기독교 강요 4권에서 그것도 교회론을 설명하는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성만찬 신학은 그 자체가 신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만찬의 중요성이 교회의 매주 예배에서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묄러에 따르면,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에 대한 생각들이 세 개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우리의 전 삶이 예배의 한 행위라는 그런 정의로까지 확산될 만큼 폭넓은 의미로 예배를 보고 있다. 묄러는 ‘예배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이다’라는 그런 안목으로 칼빈의 예배관을 전개해 나간다.
칼빈에 따른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운 관계를 지니시기를 원하시고,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시고, 우리가 있는 그 장소로 와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만찬이다. 묄러는 “칼빈과 관계되는한, 한때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지금 성만찬과 세례의 사건 안에서, 빵과 포도주와 물로써, 이 세상의 육신의 연약함의 상태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지닌다”
성만찬을 접근함에 있어서 칼빈은 우리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유익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세례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시키는 한 표징이라면, 성만찬은 우리의 영혼을 양육시키는 한 표징이다. 1536년도에 쓰여 진 그의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성만찬을 다루면서 칼빈은 주의 만찬의 의미는 그 자체의 이름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것이 주의 만찬이라 불리워지는데, “왜냐하면 이 에서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에 의해서 영적으로 먹이어지기 때문이다.” 1556년에 쓰여진 그의 후기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주의 만찬에서 생명을 주는 “영적인 잔치”와 동일시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떡과 포도주는 단지 빈 껍질만의 상징은 아니다. 떡과 포도주의 표징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진실로 우리에게 보여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떡과 포도주의 표징들은 빈 상징들이 아니라 확실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의 표징들임을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가 영적인 음식을 먹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과,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지닌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해주는 통로와 같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주님의 만찬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칼빈은 이 성만찬을 또한 감사제(the Eucharist)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우심로 인해 감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전파되는 말씀과 성만찬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예배에서 이들은 따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이 둘의 어느 하나를 빼어 버린다면 예배는 불완전한 것이 되어 버린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성례가 약속 그 자체를 인치고 확약시킨다는 의미에서 성례를 전파된 말씀에 “일종의 부가물” (a sort of appendix)이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로 확고하고 충분한 것이다. 그 자체로부터가 아닌 다른 어떤 원천으로부터 더 낳은 확약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례가 중요한가는 우리의 연약한 한계성 때문이라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전파된 또는 들려지는 말씀과 구별해서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성만찬과 전파된 말씀과의 관계성은 ‘양쪽의 어느 하나’가 아닌 “양쪽 모두”의 통합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성만찬은 보여지는 상징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말씀하며, 또한 그 상징이 가리키는 그 실재가 전달되는 효력을 발휘하는 은혜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칼빈은 그의 성만찬 신학이 단지 이론에 머물기를 원치 아니했고, 교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실제적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논의할 때, 그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성만찬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유익들을 논의한다. 칼빈은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적인 음식을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그는 이 영적인 자양분 (spiritual nourishment)의 개념을 “그의 성만찬 신학의 절정”으로 만든다.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주된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를 위한 것(pro nobis)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성만찬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한 촉진제를 제공해 준다. 칼빈은 교회 안에서 성만찬보다 더 유용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사탄은 이 성만찬을 잘못 준수하게 하고 이것을 오염시키려고 노력했던 이유라고 칼빈은 말한다.
매 주일 성만찬 거행에 대한 칼빈의 노력이 왜 실패했는지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로, 칼빈이 1537년에 제네바에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제안들을 제출했을 때, 시 의원들은 성만찬의 매월 시행을 거절했고, 그들이 시행해 오던 년 중 네 번의 성만찬 시행을 선호했다. 실상 칼빈이 제네바에 오기 전에 제네바 교인들은 1533년에 나우차델에서 발행된 화렐의 Maniere et Fasson 예식서에 나와 있는 것에 따라서 년 중 네 번의 성만찬을 시행해 오고 있었다. 화렐의 이 예식서는 “즈윙글리의 영향과 화렐의 극단적인 견해들을 담고 있는 완전히 빈약한 예식서” 였다. 즈윙글리는 성만찬의 의미를 상징적인데 주로 강조를 둠으로써 일년에 네 번 시행하는 것으로 만족해 했고, 제네바는 바로 이런 즈윙글리 예식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제네바 시 의원들은 성만찬을 한 기념으로서 네 번 즉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추수 감사절에 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 하에서 매주 마다의 성만찬 시행은 허용될 수 없었다.
둘째로, 제네바에 있는 교구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성만찬을 받을 만한 모습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서 그들은 전혀 성만찬에 참석하지를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매주마다 성만찬을 시행할 것을 가르쳤고 권고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초대 교회의 성만찬 위주의 예배 모형을 따라서 성만찬을 회복하기를 열망했다. 칼빈 자신이 그의 전 생애 동안 성만찬을 매주 마다 시행하기를 노력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한 이상으로 매주 성만찬 거행을 제시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제네바 시 의원들의 방해로 인해 그의 이상은 좌절되고 말았다. 허철민, “온전한 예배를 향하여-칼빈의 성찬론 중심으로-”, 국제신학 3권(2001년 겨울호).
한국교회에서 성찬은 거의 년 중 행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자주하는 것은 그것의 은혜를 떨어뜨리고 신중성이 결여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장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일어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교회의 창시자인 칼빈의 진정한 사상과 노력 그리고 열망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예배 가운데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을 잡으려는 움직임은 필사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서 성찬은 우리의 믿음과 은혜를 더욱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임을 기억하고 이 잃어버린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과 예배 모범이 교단적으로 정립될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해서 예배의 진정한 회복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 예배의 회복은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영역 가운데서 활력과 선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찬양예배에 있어서도 이러한 균형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말씀 중심의 예배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에 소홀한 점에 대한 저항 혹은 반동에서 생겨난 이러한 예배의 형태는 오히려 전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즉 또 다른 극(極)으로 치우쳐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역사적인 전통과 성경적인 균형을 잡는 것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찬양과 성찬예식 등이 균형을 잡으면서 새로운 감동을 더 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 또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 삶의 핵심이며 존재의 필수 요소인 예배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소원한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와 교회 난립의 문제 등이 대두 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하지만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과연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교회의 난립이 아닌가?”라는 물음과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다음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를 세우는 문제로 주제를 넘기려고 한다.
3. 성경적인 교회 세우기
1) 교회개척의 정의
교회개척이란 ꡐ기존의 한 교회가 다른 공동체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누어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회중을 형성하는 행위ꡑ이다. 그러면 왜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가? 1) 교회개척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마 28:18~20, 행 1:4, 8). 이 복음명령의 수행이 교회의 본질이요 교회개척의 근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2) 교회개척은 기존교회․건전한 자극과 도전을 준다. 성장하는 교회라면 어떤 이유로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기꺼이 새로운 교회로 축복하여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양쪽교회가 다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3) 교회개척은 교단적 성장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다. 한국침례교단이 교단적으로 교회개척을 강조 지원하여 큰 성장을 해오고 있으며, 예장통합측도 1992년부터 20년간 1만 교회, 300만 성도를 목표(일명ꡐ만사운동ꡑ)로 교회개척에 박차를 가하여 그 결과 교단 성장률이 타 교단보다 앞서고 있다. 4) 교회개척은 교회지도자를 배출하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교회는 성장되어야하는데 교회성장의 최대 요인은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5) 교회개척은 다양한 계층의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세대와 계층에 따라 문화변화(culture change), 문화충격(culture shock)이 상존한다. 독특한 정체성 지역성을 가진 독특한 공동체성(unique comminity)을 가진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2) 교회개척의 필요성과 당위성
칼빈은 교회는 “(시 65:5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존하지 않고 놀라운 위엄으로 보존하신다.” Weber.,『칼빈의 교회관』, 459.
,“교회는 하나님 영광이 펼쳐지는 특별한 극장이다.” 칼빈, 시편주석 제 3권, 194.
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교회에 집중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동시에 지상에서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고 있다.“ 온 세상에서 교회 외에는 영구적인 것이 없다. 교회의 행복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하늘에 영원한 상태로 보존되어 왔다는 데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394.
,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비추는 거울이다.” 칼빈, 시편주석 제 4권, 315.
라고 말함으로 교회란 세상에서 말하는 공급과 수요의 법칙 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과 보호 아래 있는 특별한 기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개척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뜻을 이루셨고, 성령은 그 뜻을 적용하여 활동하시는 근거가 되신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교회 개척을 본질이다. 명성훈, 『교회 개척의 원리와 전략』, 48.
예수님께서는 ꡐ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ꡑ 마 16:18
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문자적으로 ꡐ부름 받은 집단․회중ꡑ의 뜻이다. 교회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정한 지역에 모인 신자들의 단체, 즉 지교회를 가르킨다. 행 5:11, 1:26, 고전 11:18, 14:19, 28, 35, 16:1, 갈 1:2, 살전 2:14
또한 가정교회를 가르키기도 한다. 롬 16:5, 23, 고전 16:19, 골 4:15, 몬 1:2
포괄적인 의미로는 지상에서와 천상에서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연합된 또는 장차 연합될 신자전체를 가르킨다. 엡 1:22, 3:10, 21, 5:23~25, 27, 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셨고, 그들은 광야에서 ꡐ광야교회ꡑ를 조성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을 불러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있는 교회이다. 출 12:37, 38, 행 7:38
그러나 교회는 비록 세상에 있지만 세상의 교회는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이다. 광야교회와 달리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ꡐ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ꡑ 마 16:18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엡 1:23
이기 때문이다.ꡐ구원받은 모든 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연장(延長)이다(the continuing in carnation of christ in the world).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그대로 잘 감당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명성훈은 그의 저서 “교회개척 원리와 전략”에서 교회개척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적이고 종합적인 정리라 여겨진다. 그것을 소개하면, 첫째로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교회개척은 민족 및 세계 복음화에 효과적이다, 교회 개척은 교회성장의 거룩한 수단이며, 교회 개척은 교단적 성장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다. 그리고 교회개척은 기존교회에 건전한 자극과 도전을 주며, 교회개척은 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기회가 된다. 마지막으로 교회개척은 다양한 계층의 새로운 필요를 채워준다. 명성훈, 『교회개척의 원리와 전략』, 13-34.
즉 교회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효과적으로 전파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유흥을 위한 장소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서 교회는 더 많아지면 안 된다는 논리는 균형감이 없어 보인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지상명령을 통하여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처럼 아직도 교회는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3) 교회 개척의 유형들
교회개척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잘 못된 동기로 인한 개척이다. 명성훈은 일곱 가지 잘못된 동기의 교회개척을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1) 나도 교회를 하나 가지고 싶어서
(2) 생활의 방편으로 삼기 위해서
(3) 내 마음대로 목회를 하고 싶어서
(4) 사람들이 개척하자고 하니까
(5) 신학교를 나왔으니까
(6) 부교역자로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7)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41.
이렇게 잘못된 동기로 교회를 개척하는 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올바른 동기가 앞서야 그 일의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교회개척의 유형을 보면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깊은 고민과 세밀한 계획이 없이 즉흥적인 결정에 의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좋은 계획을 짜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일 계획을 세우지 않거나 대충(즉흥적으로)한다면, 그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좋은 시나리오에서 실패작이 나올 수는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말인데, 교회 개척에 있어서 이 말은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교회 개척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다음은 교회개척의 다양한 유형을 살피는 것이 순서이다.
우선 이런 유형을 나열해 보면 모(母)교회에서 지교회를 세우는 방식 혹은 독립된 교회를 세우는 방식, 성경공부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방식, 관심사 위주로 모이는 방식, 가정교회, 셀교회 등등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살피기 이전에 왜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나는 고려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명성훈은 여기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한 가지로 비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는 비전이 없다면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뛰어 들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비전을 정립하기 위한 7 단계를 면성훈 목사는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소개하면 1.비전이 없으면 개척을 하지 말라. 2. 비전의 절대 중요성을 깨달으라. 3. 비전을 성서적으로 책정하라. 4. 비전을 효과적으로 진술하라. 5. 비전을 총체적으로 전달하라. 6. 비전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라. 7. 비전을 실제 목회에 적용하라. ( Ibid, p. 46.)
그리고 그 비전에 따라 교회의 유형이 결정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은 계속해서 연구되고 개발되어 갈 것이다.
4. 교회개척 연습
교회개척에는 연습이란 없을 것이다. 개척의 현장은 그야말로 전투하는 교회의 최전선이다. 그러므로 서론에서 말한 소위 “개척해봐야 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는 이러 자러한 이유로 개척에 대한 부분은 철저히 개인의 영역으로 묶어 두었다. 그리고 소위 성공한 목사들은 그 방법을 공개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기술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개척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은 이러한 이론들을 최대한 정리했으며 어떠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역할을 감당한 분이 있다면 명성훈 목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의 이론에 따라 가상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계획해 보았다. 또한 이 작업에는 3명의 동역자들이 조언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며 교회의 명칭은 가칭 “세움교회”이다.
1)교회개척 준비(수태기) 사역
(1) 교회설립 비전과 가치 설정(정립)
소명과 자질에 대해서 확신이 있으므로 이제 어떤 교회를 개척할 것인지 그림을 구성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정체성(identity) 확립과 함께 사명의식(mission)과 목적의식(purpose)에 따른 전략의식(strategy)이 확실해야 한다. 이른바 비전(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것이다. 비전이 명확해야 성도의 협력은 몰론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극복할 수 있겠기에 기도와 연구 끝에 ꡐ우리-팀ꡑ은 다음과 같은 비전과 가치를 설정하였다.
인자의 오심은 ꡐ섬김ꡑ이요,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을 새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ꡐ대속물ꡑ로 주시기 위함이요,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시다(막 10:45, 골 1:22).
교회의 사명과 기능 -예배․친교․교육․봉사․선교-(행 2:42~47)도 바울의 사역의 중심(골 1:28)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졌음을 감안하여 1) 예배와 윤리의 생활화로 섬기는 교회, 2) 교육과 상담으로 치유하고 양육하는 교회, 3) 성도의 헌신된 사역으로 선교하는 교회, 4) 성령충만으로 가정과 사회를 세우를 교회를 세움에 비전과 가치를 두었다.
㉠ 예배와 윤리의 생활화로 섬기는 교회
기쁘시게 흠향하실 만한 예배드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습은 신앙과 윤리(생활)의 이중구조는 아닙니까? 성육신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주님 오늘도 거룩한 산 제사를 흠향하실 줄 믿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저들을 돌보신 것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예배가 곧 생활이 되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재정의 을 섬기는 일에 사용한다. : 복지시설(고아원), 양로원, 무의탁 재소자들을 위해 개인별․기관별․교회재정별로 인계하여 지속적으로 돌보며 섬기기겠다.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을 비난할 때 ꡐ입으로는 천국이요, 행동․삶으로는 지옥ꡑ이다. 우리의 행함이 없는 믿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의 선행과 구제는 고넬료의 그것과 같이 하나님께 상달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저희들이 Θ께 영광 돌림(마 5:16)은 예비된 영혼 -잠재적 교인-을 구원으로 안내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육․상담․치유로 양육함도 머리만 남고 가슴과 손발(의지)은 보이지 않는 자가 아니라, 머리에서 가장 먼 가슴과 손발을 가슴이 손발에 가까운 것처럼 가깝게 해야 하겠다. 행동하는 설교자로 생활이 곧 예배가 되는 예수님 뜻대로 섬기는 교회를 세워나가겠다.
㉡ 교육과 상담으로 치유하고 양육하는 교회
화평과 거룩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이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와 질서가 파괴되었습니다. 저들의 이기심․갈등과 거짓, 부정과 부패, 가출, 폭력, 음란, 이혼, 실직, 부도 등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망각한 체 온갖,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저들의 큰 상처와 고통 그리고 장차 저들이 받을 심판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저들을 하나님말씀(사랑과 공의)으로 가르쳐 일깨우고 상담과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성령님의 전으로 양육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고 싶습니다. 부디 ꡐ우리 세움교회ꡑ에 이런 믿음․사랑․소망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상담치유학교 지역사회문화센터(노인, 주부대학, 유아원, 청소년 문화교실 ;체육공간시설, 수화찬양교실, 독서실, 쉼터, 대화방, 맞벌이 부부 탁아방) 성경대학(30~40대 중심 - 제자교육) 개설 운영한다.
※ 항존직은 물론 목회 사역자 까지 6년 시무 1년 안식년 지키고 재 신임을 묻는 제도의 과감한 도입은 몰론 개종한 초신자 뿐만 아니라 이명해 온 교인들도ꡐ세움교회 교인화ꡑ하기 위해서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으로 교육한다.
㉢ 성도의 헌신된 사역으로 선교하는 교회
다시 오셔서 신천․신지를 열어주시고 저희들을 새롭게 재창조해 주실 주님! 아담의 타락으로 저들이 문화명령 즉, 위임하신 천국건설을 실패할 때 얼마나 실망이 크셨나이까? 전지전능, 무소부재, 거룩하신 하나님게서 성육신하시기까지 자신을 제한하시고 직접 개입하셔서 쓰리고 아픈 십자가의 고통과 수모를 당하심은 온 인류 구원과 천국건설의 소망이 아니셨습니까?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사오니(마 28:18~20, 행 1:4~8)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성령님께 온전히 사로 잡혀서 이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재정의 을 선교비로 사용 가장 많은 선교사를 섬기는 교회로 세워나간다.
ꡐ문화간격과 격차ꡑ에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선교뿐만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 미전도 종족 선교, 북한 선교, 도시빈민선교, 농어촌 미자립 교회와 특히 청소년 사역에 역점을 두되, 주 5일제 근무와 관련 ꡐ교회 납골묘역ꡑ과 함께ꡐ기도동산ꡑ을 확보하여 헌신된 선교사역 훈련을 강화한다. 특히 개인별․기관별로 헌신된 사역자 300(목회자 포함)을 양육하여 개척․파송한다.
㉣ 성령충만으로 가정과 사회를 세우는 교회
최초로 가정의 행복을 축복하신 하나님! 저희들 대부분이 주님 원하시는 가정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생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저희 교회가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세울 수 있도록 경건한 축제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상담소 설치 운영 : 온 성도와 교회가 성령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사랑과 희락과 평강을 누리는 풍성한 천국생활을 누리는 가운데 생명의 전화 참여, 예비 부부교실 운영, 인간관계 훈련,내적치유 등 단계별로 실시하여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사회를 세워나간다.
(2) 개척모델 확정
교회개척은 성경에 근거한 사도행전적인 것이 좋다. 예루살렘교회(행 2:1), 안디옥교회(행 11:), 빌립보교회(행 16:), 데살로니가교회(행 17:), 고린도교회(행 18:), 에베소교회(행 19:), 로마교회(행 28:30~31) 등의 모델이 있으나,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심 따라 교회개척 단계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척방법은 상황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시작해야 된다. 본 개척 팀(보고서 작성 팀)에게는 여러 가지 모형 가운데 모 교회가 자교회를 개척하는 유형인 안디옥교회 개척유형이 좋은 듯 싶다. 왜냐하면 팀 구성원 5명 가운데 1명은 이미 개척했고 3명은 이미 그러한 내락을 받았거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세우고 예루살렘교회가 목회자를 파송하고 자교회인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더 나아가서 모교회가 되어서 해외선교를 하는 등의 성장․성숙, 재생산을 보인 모범적인 건강한 교회가 되었던 것도 모델로 선정한 이유이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빌립보 교회 유형을 택하기로 협의 선정하였다.
(3) 개척지역 연구와 전도대상 분석 및 성공사례 연구
개척지역은 신흥아파트 개발지역으로 한다. 대형 아파트보다는 중․소형 중심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계층․세대보다 30~40대 중심으로 미래에 도전하고 내일을 노래하는 하나님을 섬겨나갈 세대 중심으로 하되 청소년․노년 복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물론 교통이 편리한 대로변에 주차장도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대중교통․도보 입지도 고려하여 선정한다. 지역도해(圖解)와 그 지역에 산제한 교회 분포도를 확인한다.
전도의 주 대상을 30~40대에 맞춘 만큼 교회학교 부흥을 통하여 그들의 부모와 접촉점을 확보하고 그들에 걸 맞는 문화공간을 확보 제공하기 위해 다각적인(교회비전<목표> 표어 참조) 측면 -경제․사회․심리적․레저․교양․가정 등-에서 분석 연구하고 전도전략을 수립 시행한다.
교회개척 성공사례를 연구하는 것이 교회개척선배들의 시행착오를 재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간․비용․정성을 효과적으로 극대화 할 수 있는 방안이므로 철저히 연구한다. 물론 개척자의 소명(열정), 자질(은사), 훈련정도(준비성), 개척 팀 성격(칼라), 후원 팀의 지원정도, 지역성,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 역사하심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지역성과 전도 대상자의 독특한 정서를 고려하여 잘 연구하면 매우 유사한 성공케이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개척을 위한 준비사역, 투철한 목회철학과 교회비전, 예배의 차별화와 교회홍보 및 아파트촌 교회개척 성공사례를 읽고 현장을 답사 면담(탐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Th. M 과정에서 목회상담을 전공하여 교인들의 상처 치유를 통해서 활력을 얻게 하고 생동하는 교인으로 헌신케 하는 일도 중요한 사역이 될 것인즉 기도 중이다.
(4) 성경적 전략 수립 및 프로그램 확보
소명과 자질과 훈련 그리고 비전은 교회개척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집으로 말하면 기초와 기둥과 지붕이 끝난 셈이다. 이제 내부 벽, 인테리어, 장식 등 S/W가 문제다. 개척자는 우선 성경에 정통해야 하고 복음과 교리 가르침에 성경적 자료를 꿰뚫어야 한다. 목회자료와 설교자료는 많을수록 좋으나 자신의 사명과 교회목적에 복합된 것으로 질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개척에 성공한 교회를 탐방 그 교회의 각종 자료들을 모아서 분류․정리하고 최소한 자기지역에 알 맞는 설교를 개발하여 최소한 1년치 설교자료를 확보한다. 필수적이 것은 목회자 자신이 만족하는 자료가 아니라 목회대상인 성도들에게 유익하고 은혜가 되는 많은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교회비전과 목적에 따라 효과적인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대체로 프로그램은 WEST로 요약되는 네 가지 분야로 선정한다.
1) Worship(예배) 프로그램이다. 의식, 음악, 설교는 분위기 개발조성에 전심 전력한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성장하고(열매 맺고) 다시 파송(개척)이 가능하다.
2) Evangelism(전도) 프로그램이다. 개척에 관한 한 전도전략이 제 1전략이다.
3) System(조직)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평신도들은 조직화가 빠를수록 좋다. 대 예배조직, 친교조직, 소그룹서도 조직을 교회 성장형으로 조직하고 처음부터 특성화시킨다.
4) Training(훈련)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목회란 사람을 키우는 행위이다. 설교는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목회자의 최대 사명은 구비사역이다. 제자로 키우기 위해서 반드시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2) 핵심 개척사역 시스템과 후원 팀조직(태아기) 사역
(1) 핵심 개척사역 팀 확보
모교회가 자교회를 개척하는 모델로 선정했을 경우 당연히 개척멤버가 있어서 문제가 안 되나 모교회의 지원이 없을 때는 개척자 자신이 협력자를 확보해야 한다. 핵심 개척사역 팀을 확보함에는 다음의 단계에 따라 기도하며 시행한다.
① 충분한 기도와 최선의 방법 탐색하고
② 개인전도와 소그룹 성경공부 시작하여
③ 개척 준비 팀으로 발전시킨다. 개척 팀을 구성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척 팀은 적어도 2개월 전에 확보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개척 팀의 규모는 5~8가정이 적합하다. 창립예배 일주일 전에는 리허설이 필요하고 개척 후 6주간 이상이 흘러야 교회가 정착된다는 선배들의 경험 측과 통계에 귀 기울여야 한다.
(2) 후원 팀(기도․재정) 확보
교회개척사역은 영적전투다. 중보기도 팀과 재정후원 팀을 확보하고 멤버들을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모교회․교단과의 관계도 바르게 확립해 나간다. 특히 기도․재정 후원 팀은 많을수록 좋다. 소액으로 지속성 있게 후원하도록 협력 받는다. 또한 그들에게 일정기간을 설정하여 기도모임과 친교 및 보고회를 갖는 것도 효과적인 것으로 사료되어 시행할 것이다.
4) 교회개척(설립) -출생기- 사역
(1) 시설․재정 확보
교회개척의 최대 어려움은 재정과 시설의 문제이다. 재정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6:25~34말씀 따라서 먹고 마시는 일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필요를 따라서 채워주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임을 믿는 믿음이 재정문제의 해결에 진정한 열쇠인 것이다.
감정과 정서문제로 지금까지 익숙한 생활방식이 바뀜에 따라오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극복한다. 교회개척자는 ꡐAre you pursuing a ministy or a lifestyle?ꡑ(목회를 원하느냐 아니면 생활을 원하느냐? )에 확실한 대답을 갖는 사람인 것이다.
교회가 사용할 건물과 시설과 비품을 성장형으로 준비하고 기존공간과 시설을 활용하되 교회설립에 관한 법규도 숙지한다. 재정확보 계획서를 확보한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척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생존에 지장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소액으로 다수가 정기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여 운영비 포함 최소한 월 150~200만원을 확보한다.
교회건물비용, 내부시설 및 집기 비용, 지역조사비용, 창립과 관련된 홍보비용, 최소한 1년간 교회 운영비 및 교역자 생활비 등이다. 교회 운영비와 교역과 생활비를 제하고 ‘97년 현재 최소 1억에서 3억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대부분 개척에 성공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간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믿음가지고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시험해 볼 것이다.
※ 개발지역 기준 100평 매입 교회건축 재정 계획
① 땅을 매입 가건물 세우기(350,000,000원)
② 교회 건물 세우기(1,000,000,000원)
㉠ 복합 건물 세워 교회와 사택(4~6충)확보 입주
㉡ 건축비용 : 땅 값 350,000,000
건축비 1,100,000,000(200만원×80평×7개 층<지하포함>)
준공허가 등 기타비용 100,000,000
총 비용 계 1,500,000,000내외
㉡ 분양비 수입 1층 80평×800만원 = 6억 4천만원
2층 80평×500만원 = 4억
3층 80평×300만원 = 2억 4천만원
분양비 총 계 1,200,000,000
③ 상황변수에 따른 유의사항 : ㉠ 땅 매입비 3억 5천만원 마련과 분양 여부 및 금액 변수
㉡ 분양 때까지 개척교회 건물․시설․유지비 확보
㉡ 교회성장에 따라 나머지 층도 교육관․문화관 으로 교회에 봉헌
(2) 설립예배 드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창립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영적 기상도가 적절해야 한다. 창립예배는 너무 일러도 너무 늦어도 안 된다. 최상의 시기와 분위기가 창조될 때까지 인내와 자신감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공이라고 부름 받은 생명․축제․생활공동체이다. 교회개척은 믿음과 성장과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이 정신은 목사와 성도, 모두가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는 교회만이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신앙으로 기도하고 기대한다.
창립예배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과정은 1. 충분한 준비, 2. 세부계획, 3. 적극적인 홍보, 4. 초청자 확보, 5. 동역자들 협조, 6. 예배 리허설, 7. 창립예배 드림의 관계이다.
(3) 효과적인 홍보 실시
교회창립 비전과 가치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실시한다. 1) 홍보전단이나 우편물 등을 이용하되 다른 일반 홍보지와 특색있게 구성한다. 2) 가능하면 텔레마게팅도 활용한다. 이때 자원봉사자를 활용할 것이다. 효과 면에서 1% 참석자만 건져도 성공적일 것이다. 홍보요원의 자질은 ① 인간적 성실과 신뢰 ② 단정한 용모와 차림 ③ 지역에 대한 지식 정보 ④ 설득력 있는 의사소통 ⑤ 친근감과 따뜻한 ⑥ 유머와 미소 ⑦ 강요하지 않는 자세와 기술을 갖춘 사름으로 확보하면 금상첨화일 듯 싶다. 3) 언론매체(국민일보 등) 이용 4) 가능하면 방문하여 초대한다. 5) 포스터 프랭카드 설치 6) 창립예배 이벤트행사(어린이․청장년․주부․노인 초청 행사) 7) 유명 기독연예인 초청 등도 고려해 볼만하다.
4) 목양(성장기)사역과 개척․파송(재생산기) 사역
(1) 교회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목회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은혜로 성령님의 가르치고 인도하심 따라 주님의 말씀 따라 예배하고 교육과 친교를 통하여 양육하고 섬김으로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는, 하나님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천국생활을 누리고 나누고 전하도록 한다. 특히 맡기는 양들을 잘 돌봄으로 앞에서 살핀 교회비전에 충실한 목회사역에 충성한다.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ꡐ최후의 날ꡑ이라고 여기면서.
(2) 자교회개척 및 선교사 파송
개교회 성장(church growth)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kingdom growth)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개교회 간 경쟁을 지양하고 교회 내 최초 3년 이내 1개 교회, 그 후 1년에 1개 교회를 개척해 나간다.
Ⅲ. 결 론
교회는 지금도 세워져야하며 그 곳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교회는 이미 그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사회의 판단 아래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세상과 역사의 중심에 위치해 있음은 성경과 믿음의 선진들이 확고하게 증거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에서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개척교회를 피하고 대형교회에서 익명으로 지내기를 선호하거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목회자들도 개척을 하기 보다는 기존교회에 부임하거나 부목사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사역을 원하고 있는 것도 한 현실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개척은 치열한 자리 전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차선으로 시도하거나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런 생각과 현실은 현실적으로 잘못된 교회 개척이 유형 명성훈 목사는 이를 다섯 가지로 정의했다. (1) 나도 교회를 하나 가지고 싶어서 (2) 생활의 방편으로 삼기 위해서 (3) 내 마음대로 목회를 하고 싶어서 (4) 사람들이 개척하자고 하니까 (5) 신학교를 나왔으니까 (6) 부교역자로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7)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명성훈, 『교회개척의 원리와 전략』,p. 41.)
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시작은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개척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 획일 적인 것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현재 교회를 개척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개척은 실전에서만 배울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개척교회연합이라는 인터넷 동호회에서, 그러니까 개척을 하고 서로 정보와 기도로 도우려는 모임에서 조언을 구한 본인에게 올라온 답변은 한마디로 “개척은 해봐야 안다.”는 대답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면이 강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올바로 예측하고 분석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것이 된다. 종은 계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듯이 교회개척도 준비와 계획 그리고 비전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개척의 비전이라는 것이 바로 성립될 수 없다. 비전이란 교회개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앞에서 다뤘듯이, 올바른 비전이 정립되지 않았다면 그 교회의 개척은 잘못된 결과를 낳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분명한 비전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 비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모른다. 막연하게 좋은 교회를 혹은 사회에 봉사하고 인류와 하나님 나라에 공헌하는 교회를 세운다는 비전은 그야말로 순진하고 무책임한 비전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교회는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대안은 창출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사회, 문화, 정치, 교회, 철학 등의 문제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 명분은 명분을 위한 명분으로 힘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전들의 획일화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석사과정의 졸업예행에서 가진 비전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약 30명을 대상으로 한 물음에서 약 70%가 치유, 상담, 복지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고 그리는 비전이야 각각 다른 일면이 있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획일화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비전이라는 것이 유행하는 비전에 영합된 것일뿐 구체적이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고려함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의 부재가 교회개척의 현장에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에 대한 바른 모습을 그리고 그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거룩한 모임이라고 정의했고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루터는 중세에서 비뚤어진 교회의 모습이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긴밀한 것이 된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이 된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하여 중세의 제도에 얽매인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 공동체로서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구원의 유일한 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설명하였고, 하나님은 교회만을 소유하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하심을 강조하였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장소만의 것이 아니었다. 교회란 믿는 이들이 모이는 그것 자체가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을 교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로 나누어 결국에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신정통주의의 아버지와 같은 칼바르트는 그의 신학자체가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며 신학의 모든 근거를 교회와 연관하여 생각할 정도로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며 섬기는 동시에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는 장소로 더욱 확장한다면 하나님과 인류가 만나는 장소가 된다. 그래서 인류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용서하기고 감싸는 복음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장소임을 잘 이야기 하고 있었다.
몰트만은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존재하고 또 존속하고, 미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며, 성령의 현재와 능력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 나라의 교회, 성령의 현존과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교회론은 메시야적 교회론이다. 따라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구원하고 해방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몰트만은 오늘날 교회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하는 교회', '에큐메니칼 교회', '정치적 교회', 이렇게 네 가지 차원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먼저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기초요 힘과 희망이다."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유일한 주권을 통한 교회의 차원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 성경적 근거로 몰트만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라는 구절을 제시한다.
또한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을 선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 까닭은 “교회가 자신을 더욱 더 세계의 지평에서 이해해야 하며 교회의 위탁을 세계사의 틀 안에서 서술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선교적인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다운 점은 선교에 있게 되며, 교회로부터 선교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로부터 교회가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은 자기 기구의 확장이나 영광이 아니라 “그의 나라의 확장”이며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영화”이다. 따라서 몰트만은 그의 교회론을 세계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삼위일체론에서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의 선교(Missio-Dei)의 교회라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가시적 통일을 추구한다. 연합운동의 내적 근거는 “저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하소서.(요 17:21)”라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있고, 외적 근거는 “기독교가 그 자체에 있어서 연합적인 공동체를 통해서만 세계에 평화를 증거할 수 있는 파국적인 세계상황에 있다.”
몰트만은 교회는 역사에 있어 항상 정치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지 교회는 정치적 요소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몰트만의 "정치적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정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 지평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배, 메시야적 사명, 교회적 실존에 대한 보다 가까운 정치적 일치를 찾는 것이다.
현대의 민중신학 혹은 해방신학의 교회론은 과격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포괄하기 보다는 소외된 자들 혹은 잘못된 개념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과 함께하려한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생각들과 사상들은 그 강조점에서 다소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면 어느 한 주장에만 근거하거나 그것을 절대화하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견해 속에서 그들이 말하려고 하였던 신앙의 고백을 듣고 그들의 현실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주목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자들이 신학과 교회를 농간하고 있을 때 칼바르트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변호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고 몸부림 쳤다. 물론 그의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열정과 현실의 문제를 바로 직시한 점에서는 매우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의 경우에도 어떻게 실존적으로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다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바른 상을 정립하고 배움에 있어선 역사를 통해 균형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포용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들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해석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복음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할 것이다. 혹 이부분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동성이란 진리에 대한 유동성이나 다원성이 아닌 열린 말음으로서의 포용성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에서 비중 있는 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통합측은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불신으로 등을 돌리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서로에게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대화하고 진지한 토론 가운데 하나님의 뜻도 확실해 질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맡겨주시고 경험케 해 주시며 여러 조건을 통해 훈련시키신 은사에 따라서 그 강조점은 달라질 것이며, 여러 가지 교회에 관한 제론들의 고려하고 현실의 문제를 바로 파악해 적용해야 할 것이며, 이런 점에 있어서 교회개척에 앞에 놓여진 숙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서 교회를 개척하고자 할 때, 왕도는 분명 없다할지라도 패배주의적이거나 통속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과 조사 연구는 필연적이다. 영화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나올 수는 있어도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는 나올 수 없는 것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항상 유연하게 개선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 대한 바른 이상을 정립하고 지역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적용하고 펼침에 있어서 그 비전은 항상 성경과 현실과 역사를 교려한 폭넓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작업에 종교개혁자들이나 현대의 신학자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주장에도 귀 기울이고 이것을 소화해 나의 것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선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독단을 버리고 가능한 모든 재원을 활용하여서 세밀하고 치밀하고 역동적인 사역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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