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2. 22:02ㆍ목양자료/5.절기자료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16:13-17 이상민 목사(대구서문교회)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가던 예수님은 갑자기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부르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ꡒ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ꡓ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향해 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서문의 성도님들도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ꡐ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다ꡑ
여기에서 ꡐ그리스도ꡑ라 하는 히브리어는 헬라어로 ꡐ메시아ꡑ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고 지옥불로 가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만을 통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요 14:6). 그러므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자이십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ꡐ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들을 돌보지 않겠느냐?ꡑ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 할 수 있도록 다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잘 믿으면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고 돕고 섬기며 행복하게 사는 가정, 이런 건전한 국가를 이루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인생살이 고달프고 힘들 때, 그 짐을 대신 져주시려고 예수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ꡐ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 위에서 너를 대신해서 죽었는데ꡑ라고 하시며 부담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친구하자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고민과 문제도 모두 해결해주시는 참 친구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4)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옥은 첫째, 무서운 고통이 연속되는 곳입니다. 불은 타는데 죽지 않고, 고통스러운데 죽을 수 없는 그런 곳이며 둘째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완전히 거두어진 곳입니다. 셋째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넷째, 지옥은 알게 모르게 지었던 새까맣게 잊었던 죄들이 낱낱이 예민하게 기억나는 곳입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 이 시간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친구로 영접하면 이 축복이 시작 됩니다. 이 축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행4:12에는 다른 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기록합니다.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로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이 땅의 축복과 함께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지 :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로, 친구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험악한 세상 가운데 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승리하심으로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C3TV 2003. 11. 2 설교방송
겨울이 주는 영적 은혜를 체험하라 스가랴 14:5-8, 마태복음 24:16-21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오늘은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계절이기를 바랍니다. 교회력으로 대강절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성탄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은 추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계절입니다. 사람은 풍족할 때보다 어려울 때에 은총을 사모합니다. 추울 때에 인간의 사고와 사려가 깊어집니다. 겨울에는 추워야 하는데 아직 춥지 않아 염려가 됩니다. 평균으로는 11월 22일에 첫 눈이 왔다는데 아직 비만 내립니다.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추운 겨울을 잘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히브라어로 겨울은 ꡐ호렙ꡑ입니다. 이 말은 ꡐ범람하다ꡑ, ꡐ넘쳐 흐르다ꡑ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겨울은 ꡐ헤이몬ꡑ입니다. 이 말은 ꡐ비오는 계절ꡑ, ꡐ나쁜 날씨ꡑ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똑같이 겨울이란 말은 좋지 못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이란 24절기에 의하면 입동부터 입춘까지를 말합니다.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를 지나서 춘분까지를 겨울이라고 합니다. 기상학으로는 12월, 1월, 2월을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반구에서는 6월, 7월, 8월을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겨울은 가장 추울 때를 의미합니다.
가을도 겨울인 사람이 있고, 겨울도 여름인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계절은 개인이 느낌에 따라 다릅니다. 겨울은 움츠린 계절이며 죽은 계절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가장 성숙해집니다. 추위가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겨울의 삭풍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찬 북풍을 많이 맞은 나무를 가지고 악기를 만들면 가장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오히려 유익한 계절입니다. 따뜻한 계절만 있는 나라를 보세요. 얼핏 보면 재미 있을 것 같지만 재미 없습니다. 사람이 변화가 없으면 지루하고, 게을러지고, 도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삶의 발전을 못합니다. 추운 겨울이 있으면 정신이 바짝 들고 도전을 받고 삶의 향상이 있게 됩니다.
겨울은 준비해야 합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준비하면 겨울은 풍성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 겨울은 유익합니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으면 겨울은 죽음입니다. 개미와 배짱이의 우화에서 나타났듯이 준비해야 겨울이 즐겁습니다. 준비한 사람에게 겨울은 즐거운 계절입니다. 디모데후서 4:21에는 ꡒ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ꡓ고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월동준비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준비 내용은 적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연탄도 준비해야 하고, 김장도 해야 하고, 배추 무우도 땅 속에 묻어야 하고, 문에 문풍지를 붙여야 하고, 창문을 비닐로 막기도 하고, 내복을 꺼내 준비하고, 두꺼운 솜이불을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준비가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이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겨울이 주는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겨울 준비도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요즘은 김장도 잘 안하지만 김장은 안해도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겨울을 잘 준비하여 풍성한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인생의 마지막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봄은 뿌리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자라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거두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쉬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막연히 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 계절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동물들은 활동이 둔해지고, 지방을 많이 흡수저장하고, 동면을 취합니다. 식물은 낙엽이 떨어지고 나뭇잎의 엽록소가 사라집니다. 엽록소 대신 안토시아닌 계통의 색소가 많아지므로 붉은 색을 띠고, 크산토필 계통의 색소가 많아지므로 노란색이 됩니다. 잎이 떨어지므로 영양분이 뿌리나 줄기에 저장됩니다. 나무가 얼지 않게 물이 가지 끝까지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면 물이 오릅니다.
성경도 겨울이 쉼의 계절인 것을 말합니다. 아가 3:11에는 ꡒ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ꡓ라고 합니다. 솔로몬도 분위기에 약했던가 봅니다. 겨울의 긴잠을 깨어나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런 인생의 마지막, 쉼의 계절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준비를 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인생은 쏜 살같다고 합니다. 미트로프의 ꡐ백미러에 보이는 물체ꡑ란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ꡒ인생이 고속도로라면 영혼은 자동차이다. 백미러에 보이는 물체는 실제보다 멀어 보일 수 있다ꡓ. 인생은 고속도로입니다. 완행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뒤에 있는 것들은 멀어보이지만 훨씬 우리의 생에서 가까운 것들입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생도 가까운데 있는 우리의 실제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삶은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다가 퇴장하는 시시한 배우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삶을 마칠 때까지 정지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6개월을, 광고 우편물을 열어보는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이곳저것을 뒤적이는데 1년 반을 그리고 갖가지 이유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5년을 허비합니다. 그러고 나니 이미 황혼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10고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900세 이상 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장을 요약하면 ꡒ낳고 낳았으며 죽었더라ꡓ입니다. 900년을 살아도 이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중국의 한 현인은 우리의 삶을 다음의 세 가지 낱말로 요약했습니다. 서두름(hurry), 걱정(worry), 묻힘(bury)입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무엇인가 이루려고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인생은 걱정 투성이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다 묻히고 맙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ꡒ때가 차매ꡓ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꽉찼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뿐만 아니라 ꡐ플레루ꡑ(pleroo)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완전히 완성되거나 끝이 났음을 가리킵니다. 카이로스는 어떠한 과업이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한 기회를 가리키는 반면에 플레루는 그것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이 셋을 다 경험합니다. 그리고 플레루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잘 준비해야 할 시간이 플레루입니다.
일전에 텔레비전 뉴스에 기가 막힌 한 얘기가 보도되었습니다. 부모의 땅을 물려받은 아들이 부모를 봉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물려받은 땅을 되돌려주게 법원이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84세된 아버지는 ꡐ부모 봉양 약속을 어겼으므로 증여계약 역시 무효ꡑ라며 아들을 고소하였습니다. 65세 된 큰아들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소송에서 아버지의 손을 들어주고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중풍에 쓰러진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로 하였지만 땅을 넘겨받자말자 어머니를 노인전문병원에 보내고 치료비도 제대로 내지 않은 것은 의무불이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란 분이 65세였습니다. 자신도 손자를 봤을 만한 나이이고, 잠시 후에 자신도 아버지같은 처지가 될 텐데 어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이 짧은 뉴스는 우리 모두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어느 부부 세미나에서 ꡒ만약 나에게 3일만이 주어진다면?ꡓ하고 편지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참석한 부부들이 한결같이 ꡒ여보, 미안해요. 당신에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잘 하는 남편, 아내가 될께요ꡓ, ꡒ아들아, 딸아, 사랑한다ꡓ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불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가정도, 사회도, 세계도 평화만 깃들게 될 것입니다. ꡒ남편을 대할 때는 항상 마지막이라는 태도로 섬겨라ꡓ. 미우라 아야꼬의 말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지막의 태도가 우리를 경건하고, 진실하게 만듭니다.
둘째, 환난의 날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지중해 연안국가들인 신약시대의 나라들은 그들의 삶과 직결된 바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는 그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중해가 겨울에는 풍랑이 일고 얌전하지 못한 바다로 변해버립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여 뵈닉스로 가려고 합니다. 이 배는 항해도중 파선을 당합니다. 하물과 배는 다 바다에 빠졌지만 겨우 생명만 건집니다. 겨울의 항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겨울은 환난의 계절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덕길에는 모래함과 염화칼슘을 준비합니다. 환난이 많은 계절입니다. 요즘은 여름이 환난이 많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게릴라성 호우가 많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2에는 ꡒ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ꡓ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환난은 끊이지 않습니다. 풍성한 여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도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이 환난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자세가 지혜자의 자세입니다.
1812년 가을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편안하게 지내기 위하여 12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 곳에 진주했습니다. 첫눈이 10월 30일에 내렸는데 예년에 비해 3주나 일찍 내린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실망에 차 곧 퇴각을 서둘러 폴란드에 있는 여러 우호적인 도시에 겨울 진영을 설치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1천 마일이 넘는 황량하고 쓸쓸한 지역을 횡단하는 행군이었습니다. 1주일 후 그 거대한 군대는 완전히 모스크바를 벗어났습니다. 그들의 적들은 경계가 허술한 곳마다 그들을 기습했습니다. 명령과 훈련은 망각되었고 계급은 무너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하여 다투었습니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이 발에 밟혔고, 수백필의 말들이 식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정복의 꿈은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의 냉정함을 뼈저리도록 느끼며 또 한 차례의 패전을 기록하였습니다. 겨울은 냉엄한 계절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18에는 인류의 종말과 환난이 ꡒ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ꡓ고 예수님께서도 부탁하십니다. 환난의 때가 겨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최근에 리더십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옵니다. 리더십이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 ꡐ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ꡑ 혹은 ꡐ인듀어런스ꡑ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인 1914년에 탐험 대원 27명을 데리고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남극대륙 정복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남극해에 진입했을 때 배는 파괴되었고, 섭씨 영하 80도의 강추위와 굶주림의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새클턴과 27명의 대원들은 2년 뒤 얼음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전원이 무사히 생환하였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한 것은 무려 2000킬러미터를 헤맨 다음이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겨울을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은 죽음같은 환난이지만 그들은 똘똘 뭉쳐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환난을 이기는 준비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종말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인류의 겨울인 종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3에는 ꡒ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ꡓ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3절입니다. ꡒ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ꡓ. 예수님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난리와 소문이 있겠고, 민족과 나라가 대적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겠고, 불법이 성하겠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바울이 ꡒ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ꡓ라고 하면서 말세의 징조를 말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고, 거룩하지 않고,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고,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때가 종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가 인류의 겨울이라고 경고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종말에 삽니다. 인류의 겨울입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ꡒ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홀로 죽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할 수 없다ꡓ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은 우리 모두가 맞을 것이지만 결국 함께가 아니라 나홀로 맞을 것입니다.
스가랴 14:6-7에는 ꡒ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ꡓ고 합니다. 어두워지면 빛이 더욱 빛납니다. 어두움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오히려 은혜의 기간입니다. 이 시간을 잘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결론
히브리어의 산성이란 단어는 ꡐ미쓰가브ꡑ(misgab)입니다. 이 단어는 높다, 안전하다는 뜻인 ꡐ싸가브ꡑ(sagab)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시면 ꡐ마사다ꡑ(masada)라는 유적지에 가 보실 것입니다. 높은 산성같은 곳입니다. 이 곳에서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유대인을 함락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최후까지 항거했습니다. 마침내 올라가보니 모든 유대인들이 전부 죽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ꡒ그 때를 기억하라ꡓ는 교훈과 함께 학생들에게는 민족적 유적지로 답사하는 곳입니다. 이 마사다도 ꡐ미쓰가브ꡑ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환난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때 계획했고, 안정된 시기에 축성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ꡒ겨울에 땔감을 사는데 쓰지 않으면 안될 돈을 여름에 놀며 쓰지 말라ꡓ고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닥칠 가장 어려울 때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을 맞으면서 찬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의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며 영적으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남이 주신 말씀의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C3TV 2003. 11. 30 설교방송
성탄절을 맞는 자세 마태복음 2:9-11
최성규 목사(순복음인천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ꡒ성탄절 맞는 자세ꡓ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ꡒ성탄절 맞는 자세.ꡓ
네, 2003년 성탄절이 10일 남았습니다. 여러분, 성탄절 맞이할 자세가 되어있습니까? 아멘? 제가 국어사전을 찾아봤어요. 민중서간에서 발행하는 국어사전을 찾아봤더니, 성탄절이 뭐냐? 다른 말로 말하면 크리스마스(Christmas)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엑스마스(X-mas)는 아니다. 크리스마스다. 쓰기는 엑스처럼 쓰고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크리스마스로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ꡒ12월 24일부터 일주일 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함ꡓ 그랬습니다. 민중서간에서 발행하는 국어사전에 성탄절이 뭐냐? ꡒ12월 24일부터ꡓ 몇 일간? ꡒ일주일 간, 일주일 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함ꡓ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데 이 성탄절은 자그마치 몇 일간? 12월 24일부터 일주일 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그것이 성탄절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모두가 즐거운 날, 성탄절은 모두가 행복한 날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 민속명절인 추석과 설은 주부들이 싫어한데요. 특히, 며느리들이 싫어한데요. 딸들은 와서 먹고만 가고, 설거지도 하나도 안 하고 가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아주 힘들데요. 또 어린이날은 참 좋은 날인데 누가 힘드냐? 부모들이 힘들어하는 날이래요. 또 석가탄신일은 불교인들만 좋아한데요. 그런데 성탄절은 동양, 서양 구분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습니다. 뭐, 기독교인이든지, 천주교인이든지, 다른 종교인이든지, 종교를 갖지 않았든지 그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성탄절은 즐거운 날, 성탄절은 기쁜 날로 다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성탄절이 즐거운 것은 뭐냐? 하나님 은혜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는 기독교인에게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천주교인에게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은 창조주인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절이 왜 좋은 날인지 일깨워 줘야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ꡒ노는 날이어서 행복하다.ꡓ 그렇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쉽게 사라질 것입니다. ꡒ선물을 받아서 좋은 날이다.ꡓ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탄절은 참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참 사람으로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선물 보따리가 아닌 것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ꡒ성탄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님이시다. 아기 예수님이시다.ꡓ 믿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그렇게 믿으시고, 그렇게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래서 성탄절이 있는 12월 달은 첫 아기를 키운다는 부모의 심정으로 아기 예수를 사모해야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성대하게 축하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준비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어떤 자세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하고 있는가? 성탄절을 어떻게, 어떠한 마음으로 지금 준비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혹시 매년 있는 절기 중 하나로 예배 한 번 더 드린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성탄절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시간,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경적 자세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과는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크게 기뻐
첫째로 ꡒ크게 기뻐하자.ꡓ 따라하시겠습니다. ꡒ크게 기뻐하자ꡓ, ꡒ크게 기뻐하자.ꡓ 그렇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탄생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크게 기쁨을 회복케 해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나심은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가리키는 별만 보고도 기뻐했다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장 9절로 10절 말씀이십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별이 멈춘 것을 보고, 별이 멈춘 것만 보고도 얼마나 좋았든지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랬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아직 태중에 있을 때,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뻐했다고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1장 44절입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그랬습니다. 이 말이 뭡니까? 세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에게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촌 간이니까,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한 말인 것입니다. ꡒ보라 네 문안ꡓ, 그 네가 누구입니까? 마리아인 것입니다. ꡒ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ꡓ, 내가 누구입니까? 엘리사벳인 것입니다. ꡒ들릴 때에 아이ꡓ, 누구입니까? 엘리사벳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ꡒ아이가 내 복중에서, 자기 엄마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ꡓ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와서 문안할 때, 그 문안을 들을 때, 그 엘리사벳의 뱃속에는 어린 생명, 그 태중의 생명, 그 세례 요한이 뱃속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기뻐 뛰며 놀았다는 것입니다.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탄절에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있는가? 좋은 선물 못 사주고 못 받는다고 혹이라도 낙담하거나 불평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ꡒ예수구원ꡓ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과 더불어 ꡒ임마누엘ꡓ의 은혜, ꡒ임마누엘ꡓ의 은혜까지 주셨다 그랬습니다. 임마누엘이 뭡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보내신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함께 하신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즐거우냐? 얼마나 기쁘냐? 얼마나 감사하냐? 얼마나 감격하냐? 우리는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할 때, 나도 좋고 예수님도 좋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기쁨으로 맞이할 때, 나는 구원받고, 나에게 기쁨이 오고, 나에게 평화가 오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주어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헤롯 왕과 예루살렘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그들은 기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그렇습니다. 헤롯 왕과 예루살렘은 소란만 떨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성탄절 대목이라고 흥청망청 소란만 떨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탄절을 어떻게 잘 놀까? 어떻게 좀 흥청망청할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없어요. 아기 예수가 주는 큰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향해서, 성탄절을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성탄절을 맞는 참된 자세가 무엇인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 때문에 기뻐 뛰는 성탄문화를 만들자 그 말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 때문에 불신자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기뻐 뛰고, 아기 예수 때문에 외로운 자가 주님 만나고, 위로받고, 병든 자가 치료받고, 문제 있는 자가 해결받고, 그래서 아기 예수 때문에 모두가 기뻐하고, 모두가 즐거워하고 모두가 다 살맛 난다, 난 행복하다, 즐겁다. 그래서 이 땅에 성탄문화가 바르게 정립되는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엎드려 경배
두 번째입니다. ꡒ엎드려 경배하자.ꡓ 따라하시겠습니다. ꡒ엎드려 경배하자ꡓ, ꡒ엎드려 경배하자.ꡓ 그렇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동방박사뿐이 아닙니다. 헤롯 왕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복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 엎드려 경배한 사람들,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누가? 동방박사들이.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참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되신 것을 보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만났습니다. 이 특권은 모세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갖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갖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나는 은총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복이 있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무엇인지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누구처럼? 동방박사들처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마태복음 2장 11절 하반절입니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올 때, 빈손으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먼 곳에서부터 구세주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그들은 그냥 오지 않았습니다.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황금, 유향, 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미가 뭐냐? 황금은 예수님이 왕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향은 뭡니까?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몰약은 뭡니까?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류가 다 죽고 멸망받았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사람을 위해서,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죽으신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다. 십자가를 지신다. 그런 의미를 가진 몰약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성탄절을 그저 아기 예수의 그냥 탄생, 그냥 생일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구세주의 탄생에 관해 많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알았어요. 실천했어요. 그래서 복을 받았어요.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절 축하 자세이다.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절 축하 자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진정한 경배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역대상 16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그랬습니다. 혹시 설교 들으시면서 ꡒ참 부담되네. 뭐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가래. 뭐 아름답고 거룩한 것을 가지고 그 분께 경배하래. 이거 참 부담되네ꡓ 그럴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신 것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립니다. 역대상 16장 29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그랬습니다.
먹고 마시고 선물 사는 데는 풍성하면서 예수님께는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 혹이라도 예수님께 너무 인색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전부 주셨습니다.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아니하고 몽땅 쏟아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인간 가까이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 예수님께 드리는 삶으로 살아갈 때,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더 있게 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와서 드린 것처럼 성탄절이 정말로 건강한 성탄절이 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정말로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탄절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은혜받고, 더 사랑받고, 더 축복받는 성탄절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엎드려 경배하는 예물을 드리는 우리가 되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가족이나 친구나 거래선에게 선물하는 것만큼의 금액을 성탄절 예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안 기뻐하실까? 자기 마음에 은혜가 될까? 은혜가 안 될까? 은혜가 되고 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 함께 찬양
세 번째입니다. ꡒ함께 찬양하자.ꡓ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ꡒ함께 찬양하자ꡓ, ꡒ함께 찬양하자.ꡓ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탄절 가까이 되면 캐롤송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됩니다. 건전한 캐롤도 있지만, 요즘 캐롤은 대체로 사람을 재미있게 하는 그런 노래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탄절은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닌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날인 것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었기에 우리는 모두가 다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기 예수를 찬양합니다. 함께 찬양하는 것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다 아기 예수 탄생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보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도 찬양합니다.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번에 대학 입시생들이 많습니다. 다 합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손자가, 아니면 아들이, 아니면 손녀가, 아니면 딸이 대학입시하면 그것은 본인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엄마, 아빠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도 좋고, 할머니도 좋고, 그것뿐이 아닙니다. 외할아버지도 좋고, 외할머니도 좋고, 고모도 좋고, 모두가 다, 모두가 다 좋아합니다. 모두가 다 기뻐합니다. 그래, 기뻐하세요.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도 그렇게 모두가 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이 소식이 얼마나 좋은지, 천군 천사까지 함께 찬양했습니다. 보세요. 누가복음 2장 13절로 14절 말씀이십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높이는 찬양을 해야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사랑을 널리 널리 전파하고 전하는 찬양을 해야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 높여 찬양할 때, 이 땅위에 아기 예수의 평화가 더 많은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또 예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불신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가 더 많이 함께 찬양함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치료받고,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막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로 말미암아 정말로 함께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일에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찬양했습니다. 엘리사벳도 찬양했습니다. 성전의 나이 많은 시므온도 찬양했습니다. 안나도 찬양했습니다. 남녀 구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대를 구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분을 구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낮은 사람, 임금들도, 왕들도,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모두가 다 함께 어우러져서 찬양하기를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얼굴색깔이 희든지, 검든지, 노랗든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아요. 모두 오라. 함께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노래도, 솔로도 좋지만 합창은 더 좋은 것입니다. 연합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도, 목동들도 아기 예수 탄생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했다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손에 손잡고, 손에 손잡고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게 하십시다. 남자 여자 구분하지 말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구분하지 말고, 연령 구분하지 말고, 세대 구분하지 말고, 계층 구분하지 말고, 모두가 다 손에 손잡고, 손에 손잡고 함께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뿐이 아닙니다. 모든 지역, 모든 계층, 모든 세대가 함께 아기 예수의 오심을 찬양할 때,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이 땅에 임하므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평화가 올 것입니다. 전쟁 없는 평화가 올 것입니다. 가난 없는 부요가 오게 될 것입니다. 슬픔 없는 기쁨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탄절 문화를 만들 때, 온 나라와 민족이 함께 아기 예수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 ꡒ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 되데, 여호와 신으로 되느니라ꡓ(슥 4:6). 예수님의 영, 성령으로 되느니라. 우리가 성령세례받고 성령충만하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엎드려 경배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하면 모두 함께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경배하고 함께 찬양해야할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탄절의 주인은, 성탄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성탄절을 축하한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들도 보배합을 가지고 엎드려 경배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오직 아기 예수만이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건강한 성탄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탄절, 그래서 은혜와 치료와 축복을 우리가 받는 성탄절이 되게 하고, 우리 함께 잘 살 수 있는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2003년도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도 성탄절을 앞에 두고, 성탄절 맞을 자세, 맞을 준비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신 주님. 진실로 우리가 들은 것처럼 깨달아 지고, 깨달은 것처럼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성탄절의 주인공은 오직 아기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며, 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 C3TV 2003. 12. 14 설교방송
죄보다 사랑이다 요한복음 8:3-11
이정익 목사(신촌교회)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참으로 큰 선물입니다.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은혜를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고발하려 함이 아니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소망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삶은 소망의 삶입니다. 은혜의 삶입니다.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밝고 건강하고 신나게 하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삶을 따뜻하게 밝게 기쁘게 용기 있게 해 줍니다. 신앙의 삶은 누구에게나 자신감을 갖게 해 주는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이 주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도바울이 처음 이 신앙을 체험하고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사도바울처럼 행복해하고 기뻐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ꡒ나는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미련 없이 버린다ꡓ고 했습니다. 또 ꡒ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ꡓ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예수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의 생활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밝고 신선하고 따뜻하고 적극적이 되고 앞서가게 되고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쁨이고 구원의 은혜이고 주님을 만난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들이 실제적으로 이렇게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소극적이고 적극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자신감이나 밝음이나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ꡒ신앙의 깊이의 문제ꡓ 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어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생활에서 오는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맛을 알아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체험이 없으니까 그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맛을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 준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학의 새끼가 오리새끼들 틈에서 자랍니다. 자신이 학인 줄을 모릅니다. 연못에 학들이 떼를 지어서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왜 이 신세인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맛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10년을 해도 이 신앙의 삶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감사함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의 깊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ꡒ소극적이기 때문일 것ꡓ입니다.
신앙이 소극적인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깊이 알아도 별로 큰 기쁨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분은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지를 않습니다. 언제나 변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언저리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발전이 없고 깊은 체험이 없고 언제나 소극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소극적이면 감동도 적습니다. 깊이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한 시간 와서 예배드리고 그냥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러니 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데 그것을 모릅니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깊은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세 번째는 ꡒ성격에도 문제가 있을 것ꡓ입니다.
어떤 분은 늘 혼자입니다.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하는 삶이 아닙니다. 함께 하고 더불어 하고 어울려서 하고 같이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장작불은 같이 모아놓아야 잘 탑니다. 잘 타던 불도 장작을 흩어 놓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신이 납니다. 힘이 솟습니다. 능력이 나옵니다.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열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열기가 있었던 것은 함께 모여 힘 있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곳에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곳에 한 두 사람 좀 생소한 사람이 있어도 그 열기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은혜를 입을 때 그 사람도 함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늘 혼자인 분들은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10년이 되어도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발전하지도 않고 뜨거운 영적 체험도 적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도의 교제에 힘쓰라고 강조했습니다.
네 번째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ꡒ죄의 문제ꡓ 일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많이 사용하는 말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삶, 마음,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에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ꡒ하지 말라ꡓ는 말도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ꡒ하지 말라ꡓ는 말은 ꡒ하라ꡓ는 말 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10계명이 모두 열 계명인데 그 열개의 계명 중에 두 가지만 ꡒ하라ꡓ는 계명이고 여덟 가지 계명은 모두 ꡒ하지 말라ꡓ는 계명입니다. 다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다 지킬 수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늘 마음에 짐이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회개하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특히 부흥회 때는 회개하라는 말이 단골메뉴로 강조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어느 여인은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ꡒ이 죽을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ꡓ하고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기도를 듣고 ꡒ저 여인은 큰 사건을 일으켰나 보다ꡓ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후에 그분에게 ꡒ무슨 실수를 크게 져지르셨습니까ꡓ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ꡒ아닙니다, 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ꡓ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ꡒ아니 조금 전에 죽을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ꡓ하고 말하자 이 여인은 ꡒ그것은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ꡓ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코미디입니다. 웃지 못 할 일입니다.
물론 죄는 회개해서 용서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먼저 하늘에 회개해서 영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결 받고 나면 사함 받은 줄로 믿고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삶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것이 사함의 복입니다.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속에서 벗어난 기쁨이고 손을 씻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함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짐을 벗은 기쁨, 구속에서 벗어난 기쁨, 손을 씻은 기쁨이 주어집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 죄를 잊고 이 구속의 기쁨과 행복함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의 만나고 말씀을 듣고 나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으면 스스로 뇌물 받은 것은 4배로 갚고 전 재산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한때 귀신에게 매이고 죄에 매여 쇠사슬에 매인 사람처럼 구속 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면서 해결 받고 치유하고 고침 받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기쁜 마음이었으면 평생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헌신의 삶을 살아갔겠습니까. 그것이 사함의 복이고 자유함이 주는 기쁨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했습니까. 이것이 사함의 복이고 자유함의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고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교회는 너무 죄를 찾지 말고 사함 받은 후 주어지는 은혜를 더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의 삶이 더 밝아지고 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교회가 죄문제만 다루는 곳이 아니고 기쁨과 자유함과 은혜를 강조하는 곳인 줄 알게 해야 합니다.
또 설교에서 죄문제를 너무 강조하기보다 이 구원기쁨과 은혜로 주어지는 자유함 그리고 감사함을 더 많이 설교해야 합니다. 물론 죄문제도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죄문제만 강조하다 보면 더 큰 은혜나 구원의 기쁨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은 즐거움의 삶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죄는 잠간이어야 합니다. 죄는 사함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가 죄문제 때문에 가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해주신 죄를 사람들이 정죄하면 더욱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함 받았는데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용서를 안 합니다. 그래서 한번 실수한 사람을 평생 죄인으로 굴레를 쓰고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어느 창녀가 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삶을 청산하고 인생을 바꾸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 마음에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면 안 되겠다 싶어 이 부부가 멀리 이사를 가서 작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생전 처음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 이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중 한사람이 고향에 다녀오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이 부부가 사람들로부터 정죄함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어서 완전 고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부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ꡒ교회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교회에서까지 우릴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살아간단 말인가ꡒ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교회에서 조차 우릴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하는 결론을 내리고 두 부부가 자살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지적되고 해결되어야 하고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죗값을 다 치루고 용서를 받았는데도 사람들은 용서를 안 합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시고 주님도 용납해 주셨는데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용납을 안 합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안고 있는 교리적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목사님이 아주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문득 생각되기를 ꡒ아 이 설교는 김 집사가 들어야 돼ꡓ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ꡒ오늘 설교는 김 집사가 꼭 들어야 하는데ꡓ 하고 어디 앉았나 하고 두리번거린 일 없습니까. 오늘 신앙인들이 이렇게 내 흠은 보지 않고 남의 흠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가지고 와서 예수께 이 여인을 율법대로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다그쳤습니다. 당시 율법으로는 간음하는 것을 현장에서 붙잡히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인은 분명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했습니다. ꡒ너희 중에 누가 죄 없는 사람 있거든 돌로 치라.ꡓ 그랬더니 하나 둘씩 피하더니 나중에는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ꡒ나도 너를 용서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ꡓ
우리는 죄의 문제에 해결방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죄는 회개함으로 씻으면 됩니다. 주님께 회개하면 씻어주시고 사해 주십니다. 그 삶을 매일 매일 우리는 해결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네 죄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용서했는데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에 실수한 사람은 평생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 죄의 흔적을 잊어주지를 않습니다. 오늘 신앙인들이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무한한 자유를 주고 기쁨을 주고 홀가분한 마음을 주고 행복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얼마나 밝고 시원하고 따뜻한 삶입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제 죄문제 보다 소망 적이고 밝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조해야 합니다. 죄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밝고 따뜻하고 소망적인 요소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8편에서 천지를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ꡒ온 땅이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ꡓ 죄에 눌리고 짐 진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모두 다 털어버리고 아주 가볍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을 보면 그렇게 밝고 따뜻하고 소망찬 세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더 큰 사랑을 주고 살리고 구하고 사하려 오셨습니다. 이제는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은혜입니다.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장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울고 침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죄는 씻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과 행복함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려함이 아니고 용서하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시고 고치시려고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삶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의 삶은 가장 즐거움과 기쁨과 소망의 생활이 되고 이 세상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내가 있음으로 밝아지고 건강해지고 소망적인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출처 : C3TV 2003. 11. 30 설교방송
나를 정결케하소서 시편 51:1-19
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
제가 오래 전 미국에서 살 때 꽤 친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 후에 그 친구도 한국으로 건너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제 삼자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연락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와 제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2년을 살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발견한 다음에 친구가 과연 뭔가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2년 동안 몰랐다니 친구가 뭔지 허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친구 중에는 환경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반에 있다던가 같은 동네에 산다던가, 이런 편리함 때문에 친구가 되었을 때에는 환경이 바뀌어져 버리면, 예를 들어 학교를 옮긴 다던가 이사를 가는 경우에는 친구 관계도 종료돼버립니다. 반대로 중심으로부터 친구인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우정이 자리를 잡았을 경우에는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달라질지라도 그 우정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외적인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미션 스쿨을 다니기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 예컨대 안 믿는 집에 시집을 간다던가 직장 환경이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경우에는 신앙을 중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는 경우에는 아무리 환경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고든 엘포트 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의 편견 의식을 연구하던 중에 사람에게 2종류의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내제적인 믿음(intrinsic faith)이 있고 하나는 부대적인 믿음(extrinsic faith)이 있다. 그 말은 안에 있는 것이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내제적인 믿음은 인격적이고 힘이 있고 확신이 있지만, 부대적인 신앙은 주로 형식, 의무, 전통, 이런 차원에서 머문다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분들을 향해서 말하면서 회심의 필요성을 말하고 회개를 강조하고 은혜를 강조합니까? 그것은 부대적이고 외적인 믿음이 내제적이고 본질적인 믿음으로 늘 바뀌어져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렐루야
며칠 전 제가 운전을 하다가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젊은이가 진행하는 음악프로였습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내용의 음악을 틀어주고는 한 진행자가 다른 진행자에게 당신은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라고 물으니까 다른 진행자가 ꡐ당연히 주님이지요ꡑ 이렇게 대답을 하고 곧바로 다음 순서로 넘어 갔는데, 저는 그걸 들으면서 왠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정답은 정답 이예요. 그러나 진지한 질문에 대해서 너무 쉽게 대답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본인의 진심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는 그것이 적어도 저에게는 실감을 주지 못했고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 신앙의 주제를 그렇게 쉽게 말하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을 보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ꡐ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ꡑ ꡐDo you love me''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이 되는 겁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넘어지고 실패했거든요. 예수님을 부인한 적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내가 이 질문에 ꡑ예ꡐ라고 대답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본인 스스로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ꡑ 물으실 때 쉽게 대답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ꡐ예ꡑ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에 도달하기 까지 얼마나 많을 실패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씨름이 있었으며 적어도 우리의 응답이 그 과정을 반영을 해 주어야 거기에 실감이 있고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식을 올릴 때 서약 할 때는 ꡐ예ꡑ라고 대답을 안 하면 안 되죠. ꡐ아무개 씨는 아무개양을 당신의 아내로 맞아 일평생 사랑하고 아껴주고 이렇게 하겠느뇨?ꡑ 물어보면 다 ꡐ예ꡑ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하고 5년 후에 똑같은 질문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때도 그렇게 쉽게 ꡐ예ꡑ라고 대답을 할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고 이제는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지요. 그러나 살다보니까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기에 인내가 필요하고, 인격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ꡐGod Father 3편ꡑ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신부님을 면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앙적인 이유로 면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상의 이유로 신부님을 면담하는 중에 주인공이 당뇨병 쇼크를 일으켜요. 그래서 그야말로 넘어져서 겨우 숨을 가다듬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대화의 주제를 바꿔서 ꡐ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해보았느냐? 지금 고해성사를 할 의항이 있느냐?ꡑ 이렇게 물어봅니다. 왠만한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마는 주인공이 죽음의 가능성을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 신부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마음속에 많은 죄책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때 신부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ꡐ당신의 고난은 정당 합니다ꡑ, ꡐYour suffering is justꡑ
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개신교 목사 같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는 교인을 위로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부는 당장 위로하려고 하지 않고 당신이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그의 죄가 많았기 때문에 이 고민이 없었다면 당신은 그게 죄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죄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정말로 지당한 말입니다.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사역이 교인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치유를 받기 위해서 통과해야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걸 건너뛸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그 고통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세속적인 상담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들의 불편함을 성급히 제거하려고 합니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항생제를 주사 맞습니다.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정신적인 불편함을 빨리 덜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음주의 기독교가 구원의 확신에 연연하려는 경향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너무 쉽게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신앙적인 고민과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불확실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ꡐ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장차 지시할 땅으로 가라ꡑ 이렇게 명령하실 때 아직 그 땅을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장차 지실할 것입니다. 언제 지시할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요. 그건 상당히 불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서 나에게 번제로 바치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분명히 나에게 이 아들을 약속으로 주셨고 내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니라 약속하셨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만 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순종하면서 그 아들을 데리고 올라갈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불확실 천지일 것입니다. 그게 믿음 이예요.
제가 처음에 목사로서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저의 앞날을 불확실 천지였습니다. 장차 내가 어떤 목회를 하고 어디서 목회를 하고 잘할지 못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했습니다. 캐나다의 시민권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척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도하시지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니 예요. 그래서 찬송가 가사에 ꡒ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오직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님이 나를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압니다. 나와 함께 함께 하여 주실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제 주님을 만날지 내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믿음 이예요.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의 여정을 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답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모르는 것,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 내가 이해하지 모하는 것, 납득하지 못하는 것, 내가 수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그것을 주님이 믿음으로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ꡐ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ꡑ 한번 따라해 보세요. ꡐ믿어야 할찌니라ꡑ
여러분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할 때 하는 지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ꡐ예수 믿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의 죄책감을 빨리 벗어버리려고 한다.ꡑ 맞아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우리의 회개에는 자기 용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빨리 나를 용서하고 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까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만이 결제할 수 있는 서류에다가 자기가 임의로 결제하는 장면이 나오던데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임의로 거기에다 싸인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이유로 인해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 뿐 이예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문둥병자와도 같습니다. 그 문둥병자가 말하기를 ꡐ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ꡑ 지금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케 하여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병과 더러움을 예수님에게 맡기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거예요. ꡐ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ꡑ 여러분 우리가 세상 떠나서 하나님 보좌 앞에 설 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여 내가 이 땅에 살 때 나의 행함을 기억하시고 나를 받아주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내 믿음을 기억하시고 나를 받아주소서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섰을 때는 오직 ꡐ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ꡑ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요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수 있는 권한과 은혜와 뜻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걸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예요.
오늘 본문 시편 51편은 다윗의 유명한 회개 시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다음에 선지자 나단이 그를 찾아옵니다. 아마 그래서 목사가 심방을 오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옛날에 목사님이 심방 온다 그러면 회개부터 했으니까. 그래서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합니다. 임금의 죄예요.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임금이지만 개인의 도덕적인 죄를 지적받았어요. 정치적인 죄가 아니고,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를 지적 받았을 때,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사실은 다윗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없어요. 오직 침상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16절을 보면은 그가 말하기를 ꡐ주는 제사를 즐겨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ꡑ 여기서 제사가 뜻하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종교적인 형식을 원하시면 그걸 통해서 내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드릴 것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저희 교회에서는 일천번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는 게 아니예요.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일천번제는 제가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보충 수업을 받고 오신 분들은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별로 바람직한, 복음적인 신앙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순종하고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도록 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말씀하기를 ꡐ주는 제사를 즐겨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는 제사는 무엇이라?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ꡑ 다윗이 죄가 있고 허물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다윗 되게 만든 비결입니다. 다윗을 배우기 위해서는 바로 이 구절을 읽어야 됩니다. 다윗이 임금이요, 다윗이 영웅이요, 다윗이 위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그것을 하나님이 멸시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형식적인 신앙이 되기가 쉬워요.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에 통회함이라는 것을 경홀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눈물을 많이 흘리다가 예수를 믿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눈물이 말라버려요. 여러분 진짜 눈물이 말라버리면요 눈이 뻑뻑해 져서 눈을 자주 깜빡거리고 인조눈물을 넣어야 됩니다. 신체적으로도 이게 병입니다. 중심에 눈물이 말라버리는 것은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회개 시 에는 호소력이 있습니다. 이게 은혜가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팔복을 보면은 첫 번째 복은 ꡐ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 것임이요ꡑ 그리고 두 번째는 ꡐ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ꡑ 여러분 이 순서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심령의 가난함을 깨달은 사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달라, 내게 기쁨을 달라, 내가 기뻐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기쁨을 찾습니다.
여러분 기쁨을 원하십니까? 먼저 애통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ꡐ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ꡑ 구원의 기쁨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애통한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내 심령의 가난함을 깨닫고 내 처절함을 깨닫고 회개하고 애통했더니 거기에 위로가 있고 기쁨이 있더라 ꡐ이 기쁨을 빼앗아갈 자 누구랴 안심 일세ꡑ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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