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Israel History)

2010. 3. 12. 01:16교회사자료/9.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Israel History)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이스라엘 역사는 역사 편찬의 산물이다. 역사편찬 과정에서 사가(들)의 사관과 역사해석의 관점이 성서에 기록되어 전수되어 진 것이 이스라엘 역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성서의 독자는 성서 사가의 역사편찬 양식과 문학적 구조, 그리고 역사 기술을 통하여 전해주려했던 메시지가 무었이었을 까에 대한 명쾌한 분석을 필요로한다. 정확한 분석과 고찰을 통해서만 성서가 전하려고 하는 분명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시 연구에 있어서 성서 자체에 남아 있는 역사편찬 기록만으로는 역사 사건과 배경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성서 사건 이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나 고고학적인 발굴품들에 대한 분석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할 분야들이다.어떤 사건에 대한 증거가 한가지 뿐이라면 증 거불충분의 위험성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개의 증 거가 있다면 그 증거들을 비교해서 보다 더 적절 한 결론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개의 증거 들을 근거로 얻어지는 결과는 한가지 증거에 의존 해야하는 결과 보다 휠씬 논리적이며 합리적일 수 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열왕기 사가의 평가기준 은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는 가 아니었는가에 대한 기준이 그 왕이 도덕적으로 흠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라를 잘 다스렸는가 아니었는가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열왕기 사가의 관심은 어떤 왕이 '성전'에 대하여 어떠한 모습을 보였었는가에 관심 을 갖고 있었고, '성전'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선한 왕과 악한 왕이라는 일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가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 7일동안 통치했었던 시므리를 포함해서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가 열왕기 사가의 관점에서는 악한 왕들로 묘사되어있다.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과 무관하였던 왕들이었기 때문이었고, 열왕기 사가는 은연 중에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어떤 성전도 인정치 않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왕국 유다의 왕들도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제외하면 역시 부정적 판정을 받고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역시, 모든 왕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어있음을 고찰 할 수 있다. 반면에, 역대사가의 관점은 어떤 왕이든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직접 담당하게 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남의 과오 때문에 그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고 하는 식의 열왕기 사가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 있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예를들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열왕기 사가와 역 대기 사가의 서술 양식과 내용이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요시야왕과 므낫세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역사편찬에 의하여 전달되 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과 기록 양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쉽게 고찰할 수가 있다. 열왕기 사가의 관점에 의하면,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강화한 대표적인선왕으로 부가되고 있지만,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한 돌연적 죽음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열왕기사가는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선한 왕의 최후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 죽었는지에 대한 것도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선한 황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가? 그러나, 역대기 사가는 요시야의 죽음을 설명한다.

죽음을 설멸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가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요시야 자신의 과오에서 비록되어진 것임을 설명한다. 느고의 입을 빌리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았다는 설명을 첨부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므낫세 왕에 대한 열왕기 사가의 평가는 격력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주 나쁜 왕으로 묘사되었다. 므낫세 왕의 가증한 행위 때문에 유다 왕국 이 징벌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도 악한 왕이 55년 동안이라는 경이적인 통치 기간을 누렸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역대기 사가는 상반된 역사해석을 보여 준다. 므낫세가 회개하였다는 사실을 첨부하여 설명한다. 므낫세의 과오는 뉘우침으로 용서되었고, 결과적으로 장수하는 축복속에 55년이라는 장기적 통치를 가능케했다는 설명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역사 연구는 역사가(들)의 역사 서술 방식과 편찬 양식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틀 위에서 출발하게 됨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성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2. 이스라엘의 역사개관 (제2차 성전시대 이후)

 

- 헬라시대
- 마카비 반란
- 하스몬왕조
- 로마통치와 헤롯왕조
- 헤롯왕
- 헤롯의 후예들
- 로마의 총독들
- 유대의 대 반란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 종파의 형성
- 디아스포라 유대인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각각 망하면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를 보통 제 1 성전 시대라 하고, 바벨론포로 이후에 다시 재건한 성전을 시작으로 하여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를 제2 성전시대라 부른다. 제 2성전시대는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페르시아 시대 (주전 516년 - 주전 332년), 헬라 시대 (주전 332년 - 주전 167년), 하스몬 왕조 시대 (주전 167년 - 주전 63년), 로마 시대 (주전 63년 - 주후 70년)로 구분할 수 있다.

  • 헬라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은 세계사에 큰 분기점을 마련했다. 그리이스와 마케도니아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고, 주전 332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우쿠스, 프톨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쿠스 왕조는 가장 큰 제국이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다스리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그리이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는 이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 것 없이 큰 세계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세계주의가 강조되었다. 코이네 헬라어는 이 새로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언어로 새로운 세계의 신분증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혼합 주의의 결과로 제우스, 말둑, 바알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유대인에게는 헬라 세계의 일원이 될 것인지 유대인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복자인 셀레우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주전 223-187)는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적인 전통에 따라 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경제적 위기는 모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고(주전 190) 로마는 그에게 군대의 규모를 축소시키도록 하고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부친을 이은 안티오쿠스 4세는 왕조를 다시 일으킬 야망이 있었다. 그는 왕국의 남쪽 경계에 강조를 두고 이집트를 두 번이나 공격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제사장 오니아스3세를 해임하고 헬라 경향이 강한 그의 형제 야손을 대 제사장에 임명하고, 다시 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를 임명했다. 주전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쿠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에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쫓겨났던 야손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술렁이게 된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예루살렘은 다시 그의 손에 넘어가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등 반 종교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박해는 곧 반란을 불러 일으켰다.

  • 마카비 반란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교 제사를 수행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군이 모디인에 도착하고, 한 유대인이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하였다. 그때에 분을 참지 못한 여호야립 가문 출신의 제사장 마타디아스는 그를 살해하고 산지로 피하자 이에 동조하는 많은 하시딤들이 그를 따랐다(마카비 1서 2:15-30). 이들의 저항 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마카비라고 불리는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하스몬 가문으로 불리는 이들이 이제 약 130년간 유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드디어 주전 164년 유다 마카비는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되찾고 성전은 정화되었다. 이후로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하누카(수전절, 요 10:22)라는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셀레우쿠스 제국과 유대 반란군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대 제사장이었던 메넬라우스는 셀레우쿠스에 의해 숙청되고 알키무스가 임명된다. 알키무스도 죽자(주전 169년) 몇 년 간 대 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겨졌다. 마타디아스의 아들인 요나단은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내분을 기회로 초막절에 대 제사장직을 맡는다(주전 152년). 이제 대 제사장직은 사독의 후손이 아닌 반란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평범한 제사장 가문이 차지하기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거두어 사마리아, 에그론, 욥바를 그의 수중에 넣고 팔레스타인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헬라 도시까지 통치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요나단의 대 제사장직의 수행으로 그의 집안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통치 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기 시작했다. 요나단이 시리아 군의 음모로 살해되고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었다. 그는 데메트리오 2세와 동맹을 맺고 그 동안 내던 세금을 면제 받게 된다. 로마와 스파르타와도 동맹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는 통치 중에 유대인의 법적인 권리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주전 140년 모든 백성은 예루살렘에 모여 시몬을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구적인 지도자(Nasi), 대 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마카비 1서 14:42).

  • 하스몬 왕조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 국가가 형성되었다. '하스몬'이라는 말은 반란의 선봉이었던 마타디아스의 선조 아사모나이오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대사 12.265). 셀레우쿠스 제국은 데메드리오 계열과 안티오쿠스 계열간의 오랜 내분으로 힘이 분산되어, 유대는 셀레우쿠스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하스몬 왕조는 본격적으로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시키고 독립 국가의 번영을 누렸다. 민족의 지도자, 대 제사장으로 추대된 시몬의 뒤를 이은 요한 힐카누스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정복하여 이들을 개종시켰다. 힐카누스는 대 제사장이면서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헬라 도시는 하스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영토는 몇 배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를 이은 알렉산더 야나이는 남아 있던 해안 도시를 정복한다. 그의 시대에 하스몬 왕조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다. 야나이는 바리새파를 미워하여 무려 8백 명의 바리새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야나이는 죽을 무렵 바리새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샬롬 찌온으로 부르기도 함)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할 것을 당부한다. 여왕이 된 알렉산드라는 바리새파를 옹호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그녀의 죽음 이후(주전 67) 나라는 두 아들의 왕위 다툼에 휩싸이게 된다.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형 힐카누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 아리스토불루스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왔던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테르는 나바티안 원조를 받아 다시 왕이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힐카누스를 부추긴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형제간의 전쟁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힐카누스의 편을 들어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유대인의 독립 국가는 끝이 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주전 63년).

  • 로마의 통치와 헤롯 왕조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주변에는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나바티안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하스몬 왕조 치하에 있던 많은 헬라 도시를 해방시켰다. 힐카누스는 왕이라는 칭호 없이 대 제사장만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잡혀갔다. 힐카누스를 도왔던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를 도와 신임을 얻게 된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는 장남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주전 47년).

  • 헤롯왕

로마로 잡혀갔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 왕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오자 헤롯은 급히 로마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한다. 안토니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주전 40년) 헤롯은 삼 년간 그의 반대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안토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안토니가 실각하고 옥타비안이 정권을 잡자(주전 30년)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마로 건너가서 옥타비안을 만난 그는 비굴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한 자세로 자신이 안토니를 위해 충성을 바쳤듯이 옥타비안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유대의 왕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정세가 변해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어 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고 권력에 대한 애착이 많은 인물이었다.
 헤롯에 대한 유대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찬탈자이면서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매 출신이었다. 유대인 자료는 그가 하스몬의 노예였다고 경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바벨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3b). 그는 남아있는 하스몬의 후손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간다. 대 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처남이며 대 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고,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부인인 미리암을 누명을 씌어 살해한다. 부인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결국은 부친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헤롯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도 아들 안티파터를 살해 할 정도로 잔인했다. 로마에서는 그를 두고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의 새끼로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제사장직은 하스몬 가문에서 맡아 왔으나 헤롯은 고의적으로 하스몬 가문과 연관이 없는 바벨론 출신의 하나멜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로마는 헤롯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로마 황제를 위한 충성심은 그가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도시를 명명한 것에 잘 나타난다(가이사랴, 세바스테의 경우). 헤롯은 로마의 상류층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립바와는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내국의 유대인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못하였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헤롯이야말로 헬라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실력자로 여겨졌다. 헤롯의 통치 기간 중에 헬라 문화의 물결은 쉽게 유대인 세계로 유입되었다.
백성들의 헤롯에 대한 적개심은 그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비록 그의 생전에는 크게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다음 세대에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 헤롯의 후예들

헤롯이 죽은 후(주전 4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로마에 의해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헤롯이 죽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켜 달라는 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요가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유대, 이두매, 남부 사마리아 지역을 맡은 헤롯 아켈라오는 선정을 베풀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로마로부터 해임을 당한다(주후 6년). 아켈라오의 후임을 선정하려는 때에 더 이상 헤롯 가문에서 통치자를 세우지 말기를 호소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로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시리아와 합병을 시키자니 유일신 사상의 유대인과 헬라인이 화합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고, 결국 로마는 직접 유대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한다.헤롯 빌립(주전 4-주후 34)은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며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영토는 주후 37년 이후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게 된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주전 4- 주후 39)가 통치하게 되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의 이름을 따라서 티베리아라고 불렀다. 남편을 버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스는 아그립바 1세가 로마의 신임을 얻어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얻게 되자, 안티파스에게 로마로 건너가 왕권을 얻어오라고 부추긴다. 마지못해 로마로 건너간 안티파스는 왕권을 얻기는커녕 반역죄로 기울로 추방당한다.  아그립바 1세는 부친인 헤롯 대왕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고, 갈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아그립바 1세는 빌립의 영토를 받는다. 주후41년 갈리굴라가 암살 당한 후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스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하여 헤롯 대왕 이후 처음으로 분봉왕이 아닌 왕으로 임명된다. 그는 헤롯 대왕이 다스렸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는다. 아그립바 1세가 죽을 당시(주후 44)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17세에 불과했다. 로마는 어린 후계자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않았으나, 주후 50년 삼촌 칼키스가 죽은 후 그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고 점차 빌립의 옛 왕국과 다른 영토를 얻게 된다.

  • 로마의 총독들

아켈라오의 해임 이후 로마의 총독은 아그립바 1세가 왕으로 통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 유대를 다스렸다. 디베리야 황제는 총독을 자주 바꾸지 않았다. 아픈 사람의 상처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파리는 점차 그것에 만족을 하지만, 만일 이 파리를 쫓아내면 새로운 파리떼가 몰려들어 더 극성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 황제의 이유였다. 총독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설명인 셈이다.

  • 유대의 대 반란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로마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가혹한 이방 통치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내에 이방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유대인보다 더 많은 권익을 누리게 된다. 하스몬 왕조 말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메시야 사상은 절정에 이르러 이방인의 압제에서 유대를 구하고 메시야가 통치하는 왕국을 고대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즈음 로마는 빈번한 황제의 교체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주후 66년 가이사랴에서는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았다. 반란은 갈릴리 지역으로 번져 갔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베스파시안 장군이 갈릴리로 진격하였으며, 갈릴리의 철통같은 요새 요타파타가 무너졌다. 이때 반란군의 사령관이던 요세푸스(요셉 벤 마티디아스)는 포로로 잡히고, 로마 편에서 유대인 전쟁사를 기록한다. 추종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떠나고(주후 69), 그의 아들 티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반란군 유대인은 단일한 지도 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기스갈라의 요한, 시몬,시몬 바르 기오라를 지도자로 한 반란군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과 맞서서 싸웠으나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성전과 함께 파괴된다. 이때에 도망친 일부 유대인이 맛사다
요새에서 로마군과 대항하지만 3년만에 자결로 끝을 맺는다. 이제 유대인은 2천년의 방랑 길에 나서게 나서게 되었다.

  • 종파의 형성

하스몬 시대에 처음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등장한다. 이런 종파의 등장은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맡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윗 시대의 대 제사장 사독 이후 사독의 후손은 공식적인 대제사장직을 맡은 가문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요나단이 대 제사장이 되어 끊어지게 되었고, 사독의 후손은 처음에는 대제사장직을 빼앗은 하스몬 가문을 비난하였으나 결국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스몬 가문과 결탁하여 정치적 종교적인 이익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사독의 후예 즉 사두개파는 사회적으로 상규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구전(口傳)을 부인하고 오직 토라만을 신봉하는 점이 바리새파와 달랐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요한 힐카누스가 대 제사장의 자격이 없다고 공격하면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바리새는 '분리주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사두개파의 신앙, 정치와 의견을 달리했다. 즉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반대자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의 후예로 토라의 생활화를 목표로 하였다. 토라뿐만 아니라 구전과 전통을 인정하고, 영혼 불멸,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에세네파는 도래할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모든 일원이 재산을 공동 소유하며 독특한 금욕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동시대 헬라 로마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1947년 사해 부근 쿰란의 발견은 이들의 사상과 생활에 관한 새로운 많은 정보를 줄뿐만 아니라 1세기를 전후한 유대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다메섹 계약(Damascus Covenant)은 이 종파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느브갓네살왕에게 팔리운 후 390년 간의 진노의 시간이 지나면(겔 4:5) 하나님이 남아 있는 의로운 자를 찾으신다.(주전 586 - 390 = 주전 196년) 그러나 20년간은 장님처럼 어둠 속에 있었다. (주전 176년) 이때에 하나님이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이 종파의 창시자인 '의의 교사'를 주었다. 그리고 의의 교사는 한 세대(40년)을 가르쳤다.  의의 교사가 죽은 이후 최후의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40년이 지날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490년이라는 시간은 다니엘 9:24 와도 일치한다. 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새 계약의 수행자이며 죄악에 물들지 않은 남아 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다. 이렇듯 이 시대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충만해 있었다.

  • 디아스포라 유대인

제 1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離散이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어 이스라엘밖에 흩어진 유대인을 일컬음)는 시작된다. 제 2 성전시대의 독특한 현상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본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보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제 1 성전 시대에 유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에레쯔 이스라엘) 에서 이루어 졌으나 이제는 에레츠 이스라엘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도 관심이 나누어 져야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정보는 오순절에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파르티아(바대), 메디아(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갑바도기아, 본투스(본도), 브루기아, 이집트, 키레나이카, 로마, 크레데, 아라비아에서 온 유대인이었다(행 2:9-11). 모든 유대인은 일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제사를 드릴 의무가 있었으며, 이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러한 순례를 통하여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심장과도 같은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반 세겔의 성전세와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행동이 헬라 세계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헬라 세계의 유대인은 조상의 율법에 따라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이교의 제사를 거부했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고 주변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은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경건한 유대인을 보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도 생겨났다. 헬라 세계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각 지역에서 헬라인과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나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통치자들은 때로는 가혹한 처사를 일삼았다.

 

3.성전파괴이후 ( 미쉬나, 탈무드 시대 ) 

 - 성전파괴 이후의 유대인
- 바르 코크바 (Bar Kokhba) 반란 (132-135)
- 미쉬나, 탈무드의 편차
-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
-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들
- 유대인에 관한 로마의 법률 (콘스탄틴부터 테오도시우스까지)

 

유대인의 구심점이던 성전은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만 했다. 사두개파와 에세네파는 사라지고 오직 바리새파만이 남았다. 랍비 문학은 바리새파가 어떻게 성전 파괴 후에 대처해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요슈아 벤 하나니아에게 스승 요하난 벤 자카이가 말한다. "파괴된 성전을 위해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다른 보상이 있으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호 6:6)는 말씀이다"(아봇 데 라비 나탄 4.21). 성전 파괴 후 포도주와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 요슈아는 그렇다면 숨도 쉬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바벨론 탈무드.바바 바트라 60b). 성전 파괴는 유대인에게 끝이 될 수 없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토라가 남아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야브네에 새로운 기초를 다져 나갔다. 뒤를 이은 라반 가말리엘하에서 야브네는 성전이 있던 당시의 산헤드린이 행사하던 모든 기능을 회복했다. 율법을 공부하는 학교(Batei Midrash)가 야브네를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 마을에 생겨났다. 주전 1세기 힐렐과 샤마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주후 3세기 랍비 예후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율법의 지도자들인 타나(선생)의 지도하에 율법이 계승되어 갔다.

  • 바르 코크바 (Bar Kokhba) 반란 (132-135)

성전이 파괴되고 60여 년이 지났으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해방' '이스라엘의 구속'이라고 히브리어로 쓴 동전이 발행되었다. 바르 코크바는 자신의 이름으로 반란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작성하였다.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 24:17)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그를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로 선포하였다. 로마는 마지막 요새 베타르를 진압하는 데 고전했다. 하드리안은 원로원에 보내는 편지에서 의례적인 '나와 군대는 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생략했다. 반란의 결과는 참혹했다. 유대인의 마을은 회파되고 많은 이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예루살렘은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고 오직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 -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고,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 미쉬나, 탈무드의 편찬

성문 율법과 함께 구전 율법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전승은 구전 율법의 권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바리새파에 의해 발전되었고 유대교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원래 구전 율법은 기록이 금지되었다. 율법은 구두로 율법 학교에서 암송되고 토론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구전 율법은 랍비 아키바와 랍비 메일과 같은 타나임의 지도를 거쳐 랍비 유다 나시(Nasi, 지도자 )에 의해 종합되어 3세기 중엽 미쉬나(반복하다. 가르치다 라는 뜻)로 편찬되었다. 구전 율법은 토라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관습과 전통을 규범화시킨다. 예를 들어 토라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명서를 써 주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였으나, 구전 율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이혼이 성립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토라에는 언급이 없으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결혼 계약서의 작성과 효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미쉬나는 씨앗(Zeraim), 절기(Moed), 여성(Nashim), 손해(Nezikin), 성물(Kodashim), 정결(Teharoth)의 6편으로 되어 있고, 각 편마다 다시 여러 항목으로 세분화 되어 있다. 미쉬나는 다시 아모라(해설자)의 토론과 설명이 덧붙여져 탈무드로 편찬되었다. 탈무드는 미쉬나를 본문으로 하고 그마라(주석)가 추가되었다. 4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은 예루살렘 탈무드(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로 부름)를 편찬하고, 한 세기가 지나서 바벨론에서도 바벨론 탈무드가 편찬되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모든 도덕, 민속, 역사, 삶의 방식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후에 기독교 통치하에서 탈무드는 금서로 정해져, 1242년 파리, 1553년 이탈리아, 1757년 폴란드에서 불태워졌다. 탈무드의 첫 인쇄판은 1520-1523년 비엔나에서 출판되었다.

  •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

초대 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대부분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진다. 2세기 예루살렘을 제외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있는 곳은 가이사랴뿐이었다. 한 두 세기가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내의 기독교 공동체는 점점 늘어나서 욥바, 세바스테, 아스글론, 가자등에는 외부에서 온 기독교인이 정착한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유대인에 의해 미님(Minim, 종류, 분파의 뜻으로 이단을 가리키는 말)으로 불렸다. 오리겐에 의하면 5세대에 걸친 미님은 15만 명이 넘지 않는다
고 한다. 이들 중에는 에비온파가 있었는데 마태 복음만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 메시야임은 인정하지만 신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초기의 유대 크리스챤의 한 분파는 유대인도 받아 주지 않았고, 기독교인도 인정해 주지 않자 결국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가이사랴에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세워 가는 곳이 되었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왜 유대인이 버림을 받았는지 논증했고, 이에 대해서 유대인은 탈무드와 미드라쉬를 사용하여 유대교의 담을 쌓아 나갔다. 양쪽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교회는 이제 유대인을 대항할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355년 황제가 된 율리안은 헬라의 종교를 신봉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약속했다. 이일은 기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성전 재건은 예상치 않았던 천재 지변으로 중단되고 기독교인의 승리로 끝난다. 3세기 중엽 랍비 예후다가 나시(지도자)가 되면서 나시는 로마의 승인을 받은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시는 성전 파괴 이전 산헤드린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에게 나시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결국 42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시를 폐지하여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는 사라지게 된다.

  •  유대인에 관한 로마의 법률 (콘스탄틴부터 테오도시우스까지)

콘스탄틴 황제(324-337)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교회는 공적인 단체로 인정을 받고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는 종교였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고 유대교는 계속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호하고 유대인으로의 개종은 금지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거주가 금지되었으나, 일년 중 하루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예루살렘 방문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나중에 제정된 법과 비교할 때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 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만을 갖는 듯하나 결과적으로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유대인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히고 경쟁자인 기독교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대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8년 지금까지의 법을 종합화하였다. 이러한 모든 법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동일하지 않았으나, 이방인으로부터의 분리 조항은 유대인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으므로 지도자적인 유대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2-3.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의 모슬렘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슬렘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은 팔레스타인을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는 티베리야를 수도로 하는 우르둔(Jund Urdunn)으로, 중앙과 남부는 람레를 수도로 하는 필라스틴 (Jund Filastin)으로 구분되었다.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를 이어 모슬렘의 세 번째 성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으로는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모슬렘 제국은 우마이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파티미드(Fatimid 975-1171) 왕조가 통치를 하였으며 파티미드 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은 이슬람 제국의 몰락과 십자군의 진출로 이어졌다. 초기 모슬렘 시대에 팔레스타인 내의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모슬렘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이러한 모슬렘이 20 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 이전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이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게 되었다.

  • 십자군 (1099-1291)

모슬렘의 통치하에 있는 성지를 해방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팔레스타인을 기독교의 성지로 회복시켜 나갔다. 일부 유대인은 파티미드계 모슬렘과 함께 십자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지는 파괴되었다. 12세기 후반이 되자 유대인 거주지는 아코, 가이사랴, 아쉬켈론의 해안 도시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구가 있는 해안 도시는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요인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야와 사페드에도 고립된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 십자군은 정치와 경제적 이득권때문에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이 퇴색되어 갔고, 이집트에 거점을 둔 모슬렘인 맘룩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를 손에 넣었다.

  • 맘룩 (1291-1517)

맘룩은 악고,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 도시를 파괴하였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무역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경제적으로 쇠퇴해 갔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도 황폐한 채로 남겨졌으며 148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오바디야는 예루살렘의 4천 가구 중 유대인 70여 가구는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람레, 나불루스(세겜), 가자는 이 시기에 비교적 번성한 도시였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문화권에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으나, 교육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교회는 파괴되고, 모슬렘 사원이 건설되었다. 15세기 악화된 경제 사정과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정했다.

  • 오스만 터키 (1517-1917)

오스만 터키의 술탄 셀림 1세는 시리야,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고 헝가리, 흑해 연안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모슬렘 제국을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은 행정적으로 예루살렘, 가자, 나불루스, 사페드의 4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터키 제국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사페드에는 카발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이주하여 사페드는 유대 신비주의의 본거지가 될 것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로 인구가 늘어났다. 16세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는 그곳에 유대인 3백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7세기 샤브타이 쯔비에 의한 메시야 운동이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17세기말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은 1200명이었는데, 18세기가 되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천여 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빈곤했고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보내 주는 기부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9세기말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하여 전체 인구 45만 명중에 유대인은 24,000명이었고 과반수 이상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터키는 모슬렘의 대 제국이라는 자만심으로 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과 외세의 침입이 계속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중동의 질서에 끼여들자 터키는 흔들거린다. 1917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가지만, 유대인 사이에 시온주의가 확산되어 이스라엘 회복의 꿈이 번져 가고 있었다.

 

2-4.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 중세의 유대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
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
(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 유대교 사상의 발전과 사상가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벨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벨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벨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벨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 카발라 (Kabbalah), 신비주의의 발생

카발라는 전통(傳統)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 '전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래 카발라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말하나, 특별히 11세기 이후의 유대교의 신비적인 사상을 지칭한다.
유대교 내에 신비주의 운동이 처음 나타난 것은 주전 2 -1 세기였다. 쿰란의 사해 사본 중에도 신비주의 전통과 관계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주후 2세기 시몬 벤 요하이 학파는 '창조의 신비'(Maaseh Bereshit)와 '하나님의 수레에 관한 신비'(Maaseh Merkavah)를 다루고 있다. 마아세 베레쉿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를, 마아세 멜카바는 에스겔 1 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의 수레에 대한 신비를 주제로 한다. '헤칼롯'(Hekhalot, 하늘의 궁전)문학은 이 신비주의에 관한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신비주의는 성경에 근거한다. 모세, 엘리야, 엘리사가 행한 기적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현상적인 세계와 함께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메시야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은 악과 싸우고 있으며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사변적이며 실천적이기도 한 성격을 띤 신비주의에 관한 주제는 탈무드에도 풍부하게 나타나지만, 탈무드 시대에는 이단과 회의주의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고 소수에게만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12세기 독일에는 카발라에 심취한 '경건한 아쉬케나지'(Haside Ashkenaz)라고 불리는 분파가 생겨났다. 13세기 스페인에서는 카발라 운동이 절정에 달하여 '조하르'(Zohar, 빛남) 라는 신비주의의 고전적인 일련의 작품이 생겨났다. 이 조하르는 6세기 이상 유대인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신앙은 고난을 견뎌 내게 한 힘이었다.

  • 거짓 메시야

카발라에 영향을 받은 샤브타이 쯔비(Shabbetai Tzevi 1626-1676)가 이끄는 메시야 운동은 17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했다. 중세는 유대인 박해의 시기였다. 탈무드는 불살라지고 유대교의 의식은 핍박을 받았으며, 유대인은 살던 마을로부터 쫓겨나곤 했다. 참혹한 유대인 학살 사건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1648-1655)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 갔으며, 3백 개가 넘는 유대인 마을이 회파되었다. 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질문이 생겨났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곧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었다. 터어키에서 태어난 샤브타이 쯔비는 탈무드 교육을 받았으며, 카발라에 심취해 갔다. 그가 20세에 이르자 벌써 그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가 생겨났다. 그의 헌출한 키와 잘생긴 용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그의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다. 카발라주의자들은 1648년이 메시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믿었다. 이 해에 바로 대 학살이 일어났다. 메시야 정신에 사로잡힌 샤브타이 쯔비를 반대하는 마을의 랍비들이 그를 쫓아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나 그곳도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카이로와 예루살렘으로 옮겨 다녔다. 이때 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라라는 소녀가 메시야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곧 사라와 결혼한다. 1644년 샤브타이는 나탄 벤자민 레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예언자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1665년 샤브타이를 메시야로 선포한다. 터어키로 돌아온 그는 열광하는 유대인의 환영을 받고, 암스텔담의 영향력 있는 랍비들이 그를 메시야로 고백한다. 함부르그의 많은 유대인은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메시야가 거룩한 땅(Holy land)으로 갈 것을 준비한다. 샤브타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 그를 왕중의 왕으로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곳으로 갔으나 술탄은 그를 체포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샤브타이의 구금이 메시야가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으로 여겼다. 감옥에 갇힌 샤브타이를 방문한 느헤미야 코헨은 그가 메시야가 아닌 것을 깨닫고 술탄에게 아마도 샤브타이가 오토만 제국을 전복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알린다. 술탄은 사람을 보내 그가 모슬렘으로 개종하기를 권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샤브타이는 1666년 모슬렘으로 개종한다. 샤브타이는 그의 개종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었다고 공포하자, 많은 추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일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야곱 프랑크가 이끄는 소수의 메시야 운동(Sabbatean)으로 발전한다. 샤브타이 쯔비는 1676년 속죄일에 죽었다. 이 거짓 메시야 운동은 유대인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일부는 새로운 신앙을 찾아 동부 유럽에서는 하시딤 운동이, 서부 유럽에서는 하스칼라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다.

  • 하시딤 운동 (Hasidism)

이삭 루리아(Isaac Luria 1534-1572)가 이끄는 카발라 운동은 하시딤의 신조를 채택하여 그 가르침을 대중화시켰다.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운동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에 동참했던 하시딤이나 12세기에서 13세기에 존재하던 하시딤이 아님) 하시딤 운동의 대표는 바알 쉠 토브(Israel Baal Shem Tov c.1700 - 1760)로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과업이다. 이러한 헌신은 기쁨과 무아경을 만든다. 하시딤 운동은 도브 벨(Dov Ber) ,잘만(Shneour Zalman 1747-1813) 의 제자에 의해서 '하바드'(Habad, 지혜, 이해, 지식의 히브리어 약자임)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바드 운동은 종교적 체험에서 지적인 노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원래의 하시딤 운동과 다른 점이다. 하바드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특히 뉴욕, 캐나다, 이스라엘에서 활발하다. 뉴욕에서 포교하던 하바드의 최고 랍비인 멜루바비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1993년 1월 메시야로 선포되었으나, 1994년 6월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죽었다.

  • 하스칼라(Haskalah 계몽주의)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델란드와 이탈리야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넓혀 갔다.  독일에서는 멜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포고되자 세속적인 교육이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작가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월간지 HaMeassef가 발행되었다.(1783-1829)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으로 그들을 제한하는 대신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대 사상과 삶의 방식에 현대화를 촉구하여 이후 자유주의,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

 

 

2-5. 시온주의 운동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중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수정케 했다.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이 대두되어 갔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도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나갔다. 프랑스 혁명은 유대인에게 경제적 정치적 권위를 처음으로 부여했다. 네델란드와 함부르크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유가 주어졌고, 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유대인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다.약 백여 년 간 유대인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안티 세미티즘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는 반 유대인 법령을 제정하여 유대 공동체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881년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반 유대적인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프랑스의 대위 드레푸스(Alfred Dreyfus)는 프랑스의 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드레푸스가 썼다는 편지는 처음부터 위조된 것이었다. 드레푸스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언론은 그가 유대인임을 강조했다. 에밀 졸라도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1899년 재판이 다시 열리고 그는 감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무죄는 몇 년 뒤에야 인정되었다. 안티 세미티즘의 영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교에 복귀케 했다. 메시야를 기다리든지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든지 행동을 해야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 시온주의

유대 국가는 헤스, 핀스커, 헤르즐에 의해 구상되었고 그 꿈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였던 헤스(Moses Hess 1812-1875)는 '로마와 예루살렘'(Rome and Jerusalem 1862) 이라는 책에서 유대 국가의 정치적인 회복을 표명하였다. 그가 바란 유대 국가는 모세의 법과 사회주의가 조화된 형태였다. 핀스커(Leo Pinsker 1821-1891)는 헤스의 책을 읽고 그의 견해와 동조했으나 훨씬 극단적이었다.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방인으로부터의 도움 받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시온주의의 본격적인 활동은 헤르즐(Theodor Herzl 1860-1904)에 의해 서서히 막이 오르게 된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민족 의식은 없었다. 비엔나 신문사의 기자로 파리의 특파원이 된 헤르즐은 파리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의 반 유대주의를 접하면서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박애, 평등을 부르짖는 혁명의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반 유대주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헤스의 책을 알지 못했던 헤르즐은 '유대 국가'(Der Judenstaat 1896)를 저술한다.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 국가 건설만으로 해결된다는 이 소책자는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제안으로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가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가 1897년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모두 2백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헤르즐의 지도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회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하였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외교 활동을 통하여 유대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터키와 영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러한 방침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와 유럽의 유대인이 겪는 고난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 주기 위하여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에 유대 국가 건설'안을 받아들여, 제 5회 시온주의 총회에 제출했으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1904년 그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그리고 며칠 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7년 1회 시온주의 총회가 끝난 뒤 9월의 그의 일기에는 "나는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웠다. 만일 내가 이 사실을 크게 소리친다면 모든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 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이들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 히브리어의 부활

히브리어의 부활은 계몽주의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히브리어는 구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벤 예우다(Eliezer Ben Yehudah 1858-1922)는 현대어로서의 히브리어 부활에 공헌했다. 1883년 예루살렘에서 교사직을 맡은 그는 히브리어로 가르쳤고, 몇 년 뒤 리숀 레 찌온의 학생들은 히브리어로 수업했다. 그는 히브리어 사전과 필요한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 외에 스몰렌스키(1842-1885),세파림(1835-1917),프리쉬만(1839-1922)은 히브리어 잡지를 발행하고 시와
문학 작품을 쓰면서 히브리어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 이스라엘 독립

영국의 외무상인 발포어(Arthur James Balfour)는 유대 국가의 설립을 지지한다는 발포어 선언(1917)을 하였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882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점차 증가하여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4만 명이 이민을 와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8만 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주변 아랍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하가나라는 자위대를 조직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나치 정권을 피해서 오는 이민자들도 늘어났다. 2차 세계 대전 중 6백만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을 당하고 전쟁은 끝났다.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불법 이민자의 숫자는 증가했다.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독립을 위한 투쟁은, 식민지의 무역에 의존하던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전후 미국은 중동의 이익에 관여하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 영국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과 독립을 위한 유대인의 계속되는 투쟁은 영국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맡기게 한다. 1947년 5월 유엔의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내의 두개의 자치 국가안을 제시한다. 1947년11월29일 유엔은 이 안을 표결에 붙여 찬성 33, 반대 13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다. 1948년 영국이 철수를 시작하고 최종적인 철수 전 날인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했다.

 

3. 간추린 이스라엘사
유대인의 고향은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오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초기 몇 천 년의 역사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형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쫓겨난 후에도 수세기 동안에도 이스라엘에 유대인들이 명맥을 지켰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대민족간의 유대감을 잃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으로 2000년 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독립은 다시 찾게 됐다. 국가 수립으로 2000년 전에 빼앗겼던 유대인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3-1. 성서시대

1. 성서시대

유대인의 역사는 약4000년 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기록으로 그들의 유목생활의 양상이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여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또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의 종으로 부름 받았는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근이 나라를 덮치자 야곱과 열 두 명의 아들과 그 가족들은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동쪽 지방인 고센에 정착했다. 그들의 후손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제 노역을 했다.

■ 출애굽과 정착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 후에 이스라엘은 모세에 의해 자유를 찾았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하느님께 선택받아 그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 (에레츠 이스라엘)으로 인도(기원전 12~13세기)했다. 이스라엘인은 시나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5경을 받고 국가를 세웠다. 출애굽(기원전 1300년)은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기억 속에 유일신에 대한 신념을 담은 위대한 흔적을 남겼으며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과 율법을 받은 날, 그리고 광야의 방황을 기념하는 날을 당시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경축하고 있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목 생활을 청산, 농민과 장인으로 변신하면서 경제적 , 사회적으로 다소 기반을 잡았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마감된 것은 사람들이 '사사'로 알려진 지도자들 주위에 몰려든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면서였다. 사사들은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능력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이러한 지위로 추대되었으며, 적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간 동안만 헌신하였다. 이어서 블레셋(해안에 터를 잡은 소아시아 민족) 의 위협에 직면하자 부족 조직의 타고난 나약함은 부족들의 통합과 영구적이고 세습적인 왕권의 지위를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었다.

■ 왕국 시대 ( 기원전 1020년)
초대 왕 사울은 흐트러진 부족 시대와, 그의 후계자 다윗에 의해 정비된 완전한 군주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다윗 왕 ( 기원전 1004~965년경 ) 은 블레셋 정복을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위 나라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하여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그의 왕권은 이집트 변경과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확립했으며,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12부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여 예루살렘과 국왕이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 왕은 많은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편에서 그의 시와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왕 (기원전 965~930년경)은 부왕 다윗이 세운 제국을 계승하여 그의 능력을 왕국의 부흥에 쏟았다. 정략 결혼을 하여 힘을 증강한 이웃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왕국 내부의 평정을 유지하고 당시의 열강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은 외국과의 통상을 강화하고 동을 채광, 철을 제련하는 등 주요 사업을 발달시켜 경제를 부흥 시켰다. 솔로몬 왕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요새화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왕궁과 예루살렘 신전의 건축인데, 신전은 국민의 국가적 종교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성서의 잠언과 아가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왕국의 분열
솔로몬의 치세는 민중들의 고조된 불만으로 파국을 맞았는데, 그의 계획이 백성들에게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부족과 다른 부족에 대한 차별은 왕국과 부족 분리주의자들 사이의 적대감을 높였다. 솔로몬이 죽자(기원전 930년) 반란이 일어나 북쪽의 부족들이 떨어져나가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10개의 이스라엘 부족의 영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왕국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정하고 19대 왕까지 200년 동안 이어졌다.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부족으로 구성된 유다 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다윗의 대를 이어 같은 수의 왕에 의해 350년 동안 이어졌다. 앗시리아 확장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토확장으로 이스라엘이, 유다가 차례로 정복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고(기원전 722년), 백성들은 유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그로부터 백년 후에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점령하고 신전을 파괴하였으며 (기원전 586년), 주민의 대부분을 유배하였다.

■ 바벨론 유수 ( 기원전 586 ~ 538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으로 제 1 유대왕국은 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복이 유대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끊지 못했다. 그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밤낮으로 고향을 기억하자고 언약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편 137장 5~6절) 1차 성전 파괴(기원전586년)후에 바벨론의 유수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독특한 이상의 체계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유대교의 체계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정신적인 동질성이 확고해 지고 한 국가로서 민족의 장래를 보장하였다.

 

 

3-2. 외국의 지배

■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기원전 538년) 배를 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다윗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진 제2차 귀환은 율사 에스라에 의해 인도 외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38 ~ 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대군주 (기원전 332 ~ 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유태인들의 귀환, 에스라의 지도력, 두 번째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유태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 (의회) 의 설립은 두 번째 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기원전 166년) 강한 전투력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기원전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 동안 경축하고 있다.

■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하스모니안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 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기원전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안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로 대체하고 하스모니안 왕 히르카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기원전 40년)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 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스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수 (기원전4년), 주로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태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함락만으로도 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몰락하고 그 밖의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마지막의 짧은 유대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3년 후 로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은 '황소의 멍에로 갈라 젖혀졌으며' 이 땅에 대한 모든 유대인의 끈은 점차 소멸되고 유다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렀다. 제도적인 공동생활이 재건되어 국가와 신전의 통합체 없이 새로운 환경과 만나게 되었다. 최고 의결 기구이자 사법의 주체인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게돌라의 후신) 이 야브네(70년), 그 후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재소집 되었다. 제사장은 랍비들이 대신하였고 중앙성소가 없는 상태에서 가버나움, 고라신, 바람, 감라, 그밖의 장소에 웅장한 건축물로 정형화된 유대교 회당은 분산된 각 집단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 군은 예루살렘에 재 입성하여(629년) 다시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

■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632년) 지 4년 후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 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 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가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 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 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 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마므룩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 마므룩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마므룩의 지배아래 이 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궁핍해졌다. 마므룩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초시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 나블루스 , 헤브론 , 가자 , 츠파트 , 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 (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 (유대의 신비주의) 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 , 미국 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 , 프랑스 , 구 소련 , 오스트리아 ,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 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 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대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의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대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1)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중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2)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그것은 `선출된 의회'라 불렸는데, 매년 활동을 점검하고 정책과 계획을 수행하는 집행부인 '국가 평의회'를 선출했다. 지방의 자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1922년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태인 대리 기관'이 구성되어 영국 당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정부와 국제 기구에 대해 유태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3) 경제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이 나라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4)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 ? 음악? 무용 활동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렸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판, 지방 화가의 회고전 등이 언론에 소개되고, 커피숍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즉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서류, 동전?우표?라디오 등에서 사용되었다.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형태와 장르의 극장이 열광적인 청중에게 개방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희곡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과 1936~1939년에 걸쳐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태인의 교통수단이 공격당하고 들과 숲이 불타 버렸으며 유대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립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두 국민 운동의 반대되는 목표를 인지한 영국은 일찍이 위임 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1922년)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대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년). 유태인 지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여 유태인 대리 기관에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그 제안을 재공식화하는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전쟁 동안 약 2만6천명의 유태인 공동체 남녀가 나치 정권에 대항, 연합군에 지원하여 유대인 여단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으로 영국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6)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 개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하가나(1920년에 결성됨)'는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태인 공동체의 공식 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 유태인의 이민에 대한 영국의 통제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써 항거했다. '에쩰(1931년에 결성됨)'은 하가나에 대해 유대 지도층이 내린 자치제를 거절하고 아랍과 영국의 두 목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레히'는 가장 소규모의 호전적인 단체로 주로 반영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조직되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태인 공동체의 모든 무장 지하 활동 금지를 에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쩰로부터 분리됐다 (1940년). 이 세 개의 조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설립되자 해산됐다.

(7)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1994년 9월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차제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8) 홀로코스트(대학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유럽을 휩쓸 때 유태인들은 잔인한 박해 아래 온갖 고통과 굴욕을 받았으며 유태인 거리로 내몰려 그곳에서 산발적인 무장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거센 탄압을 받았다. 유태인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대학살에서 벗어나 몇몇은 다른 나라로 가고 몇몇은 게릴라로서 살아 남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숨었다. 결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 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영국은 이 땅에 와서 정착하는 유태인의 수를 더욱 제한하였다. 유태인 사회는 이에 대해 폭 넓은 '불법 이민'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천 명의 난민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택해 이 땅에 들어왔다. 영국은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만들어 난민들이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은 차단하여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수용소에 포로로 가두었다.

(9)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을 준비하였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일)에 약 65만 명의 유대인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3-3. 현대 이스라엘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 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 여 명으로 유대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 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 ?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랏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2기 10년간(1958년 ~ 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물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돗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대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사마리아 ?가자?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 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 키푸르(유대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예루살렘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대를 맞이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 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 박멸 위협이 제거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 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 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4년 의회 선거에서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어 안정 다수 의석을 차지만 정당이 없게 되자 리쿠드 당과 노동당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새 정부는 연간 400% 이상 뛰어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적극 나섰다. 임금과 환율의 동결을 비롯, 정부 지출의 과감한 삭감을 포함한 경제 조치들은 1986년까지 인플레이션 율을 19%가지 끌어내렸으며, 원활한 경제 성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과의 자유 무역 지역 협정 체결은 이스라엘의 국제 교역의 지위를 더욱 강화 시켰다. 1989년이래 소련과 에디오피아로부터 유대인들이 들어오면서 유태민족에 대한 조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을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공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대에 이스라엘 사회가 당면한 주요한 도전의 하나일 것이다.

■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 양자간 협상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보수립에 대한 초안이 마련되었다.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3년 9월 협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A,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PLO는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 사항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대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1995년 9월 선거를 통하여 팔레스타인 내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헤브론 대부분 지역과 서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를 규정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1998년 10월에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양측의 지도자들이 다시 회담을 시작하여 1995년에 서명한 잠정 자치안 이행에 대한 세부 항인 와이 리버 협정에 서명했다.


(2) 이스라엘과 요르단 :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마드리드 평화회의 후에 3년간의 협상 끝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4년 7월 46년간의 전시상태를 종식하고 양국간의 평화를 선언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은 아라바에서 1994년 10월에 클린턴 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명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평화협정 이후에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하고 있다.

(3)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으로 워싱턴에서 가진 바 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 21세기를 향한 이스라엘
1995년 11월 라빈 총리의 암살이후 다음선거까지 시몬 페레스 외무부 장관이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총리 대행은 반시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되며 각료를 임명할 권리를 가지고 총리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나 국회해산권은 없고 차기 선거까지 총리업무를 수행한다.1996년 5월 선거에서 리쿠드당의 벤야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선출되어 민족주의 및 중도정당으로 연립내강을 구성하였다.
새로이 들어선 정부는 국가의 목표와 국가적 관심이 쏠린 분야를 위해 많은 업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 중동평화협상을 계속하는 일은 새 정보가 직면한 도전이다. 이스라엘 안보의 보장,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 확대, 학교 수업시간 연장 및 소규모 학급으로 교육체계의 강화, 균등한 교육 기회의 제공, 이스라엘 산업에 기여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도모, 정부의 적은 개입으로 경제 경쟁력의 강화, 낮은 인플레이션,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정부 관료 조직, 국가 재정의 적자를 낮추는 일, 조세부담과 주택문제의 해결, 국가기반시설의 강화, 계속 유입되는 이민, 중동평화협상의 진전 등 이러한 사항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이스라엘의 발전과 계속된 성장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3-4. 역사 연표

■ 기원 전

17세기 ~ 6세기
성서 시대
17세기경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시대

13세기경
모세의 주도 하에 출애굽이 이루어짐
13 - 12세기 히브리인(고대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1020 군주제 성립 : 초대 왕 사울
1000 다윗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이 건설됨
960 유대 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인 첫 번째 성전이
솔로몬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짐
930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됨
722-720
앗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 ; 10개 지파가 흩어짐
586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정복됨.
예루살렘과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됨.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감(바빌론 유수)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제1차 귀환; 성전 재건
5세기 중엽 제 2차귀환; 에즈라와 느헤미야
332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함; 그리스의 지배
166-160 하스모니안의 마카비가의 반란
142-129 하스모니안 왕조 지배 아래 유대인 자주권 획득
129-63 하스모니안 왕국 안에서 유대인 독립
기원전 63 ~ 기원후 313 로마제국의 지배
B.C.37 - B.C.4 헤롯왕이 통치

■ 기원 후

66 유대인 로마에 항거
70 예루살렘과 두 번째 성전 파괴됨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132 - 135 바르 코크바,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
210 미쉬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313 - 636 비잔틴 지배
390 예루살렘 탈무드 (미쉬나의 주해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입
636 - 1099 아랍 지배
1099 - 1291 십자군의 통치 ;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
1291 - 1516 마믈룩 지배
1517 - 1917 오스만 제국 지배
1860 예루살렘 성곽밖에 최초의 유대인 마을이 생겨남

1882 - 1903
제 1차 알리야 (대규모 이민)가 있음 ; 주로 러시아로부터 옴
1897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 개최
1904 - 1914 제 2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909 1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와 최초의 근대적인 유대인도시 텔아비브 건설됨
1917 400년 동안의 오스만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영국이 종식시킴.
영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보장' 한다고 약속함
1918 - 1948 영국의 통치
1919 - 1923 제 3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에서)
1920 히스타드루트(노동조합)와 하가나(유대방어조직체) 창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국가 평의회 구성됨
1921 첫 번째 모샤브 나할랄 설립
1922 대영제국, 국제연맹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고 유대인 이민과 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촉진하는 임무를 맡게됨. 유대국가 창설, 위임 통치권에 대하여 유대인 공동체로 대신함
1924 이스라엘 공업협회 창설
1924 - 1932
제 4차 알리야(주로 폴란드에서)
1925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 스코푸스산에 설립
1929 헤브론 유태인들이 아랍군들에 의해 학살
1931 유대인 지하조직인 에쩰 창설
1933 - 1939 제 5차 알리야(주로 독일에서)
1936 - 1939 아랍군의 반 유대 폭동 개시
1939 영국 백서, 유대인 이민을 제한
1939 - 1945 제 2차 세계대전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
1940 - 1941 레히 지하운동 조직, 에쩰에서 분리
1944 영국군 소속 하에 유대인 여단 조직
1947 국제연합,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태인의 개별
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연합에서 분리
1948 이스라엘 국가
1948 영국의 통치 종료(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독립전쟁(1948년 5월 - 1949년 7월)
이스라엘 방위군(IDF) 조직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라크는 제외)
휴전협정 조인,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이스라엘, 국제연합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48 - 1952 유럽및 아랍각국에서 대규모 이민
1950 귀환법 제정
1956 시나이 분쟁
1962 아돌프 아히만 처형
1967 6일전쟁 : 예루살렘 재통합
1968 - 1970 소모전
1973 욤 키푸르 전쟁
1975 이스라엘, 유럽 공동시장(E.C.M)의 회원국에 가입
1977 리쿠르당 승리, 노동당 집권 종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예루살렘 방문함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조약 조인
1981 미국과 합의 각서에 서명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의 원자로 폭파
1882 이스라엘, 시나이로부터 철수 완료
이스라엘, 레바논으로부터의 PLO 공격을 종식시키기 위해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수행에 착수
1985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 조인
1987
팔레스타인의 폭동(인티파다) 시작
1989 이스라엘,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 유대인의 대이민 시작.
1991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걸프전동안 지대지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에서 공동평화회의 개최됨.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팔레스타인 대표단 참가
1992
중국 및 인도와 외교관계수립
노동당의 라빈이 이끄는 새 정부 출범
1993 미국과 러시아 입회 하에 이스라엘과 PLO, 잠정 자치안 협정에 서명
이스라엘과 교황청, 기본 동의 안에 서명.
1994 가자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인정
모로코와 튀니지에 대표사무실 설치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르파트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
1995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팔레스타인 자치확대
평화를 위한 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시몬 페레스 총리직 계승
199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회교 원리주의자 테러
자행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지역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작전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 사무소 설치 총선
리쿠드당 집권 텔아비브에 무역대표 사무소 개설
1998 와이리버 협정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