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7. 10:49ㆍ교회사자료/9.이스라엘 역사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헬레니즘세계는 당시 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통치하기 훨씬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가운데는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그 사회적인 지위 덕택으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더욱이 이 기간에는 토비아스와 오니아스 사이에 심한 경쟁이 있어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 특히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아스 2세는 "돈을 아주 사랑하는 자"로서 프톨레미 2세에게 매년 내는 20달란트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더욱이 토비아스의 아들 요셉은 전국의 세리로서 자청하고 나섰다. 요셉과 그의 가문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가문은 나라에서 최고의 직책들을 맡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대제 때에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은 프톨레미에서 셀류커스에게로 이양되었고, 이에 따라 요셉과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이 새 왕조에 그들의 충절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에는 돈을 주고 권좌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토비아스가의 시몬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셀류커스 4세 때에 총리대신을 충동질하여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죄를 뒤집어 씌워 몰아내고 성전의 성금을 가로채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오니아스 3세는 셀류커스 궁정으로 달려가 이 소요를 평정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다. 이 두집안의 반목은 형 셀류커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때 그절정에 달하였다.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 특히 친 시리아파 귀족들은 아티오쿠스가 등극하자 그들의 목적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친 이집트파인 합법적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그들에게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니아스 3세가 잠깐 딴 나라에 간 사이에 안티오쿠스 정부의 찬동을 얻고 왕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동생인 예수, 즉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물론 아티오쿠스는 그의 임명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루살렘을 헬라적인 양식에 따라 재정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경기장이 세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풍의 의목을 입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 특히 핫시딤이나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몹시 분노했으며 헬라주의의 영향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새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대제사장의 임명은 하나님의 소관으로서, 이방 왕이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그래도 대제사장 야손이 정통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때에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토비아드가문의 도움과, 상대방보다 더 많은 뇌물을 왕에게 바치고, 야손을 몰아내고 그대신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공대적으로 그리스의 생활방식을 고취하며 정통파에 대항했다. 이 두 파의 적대 감정은 더욱더 심화되어 드디어 헬라파와 정통파 사이의 싸움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중에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야손은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잇따라 일어나는 싸움들은 "유대인 대 시리아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대인 대 유대인"의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일어섰고 모든 헬라화 정책에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와, 그가 이미 공포한 대로 헬라 문화와 종교를 통하여 그의 왕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며 팔레스타인도 이 정책대로 다스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로마의 권세가 날로 커져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그의 왕국을 통합시키겠다는 필요에서 더욱더 굳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심복 메넬라우스를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그의 왕권을 모독한 행위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메넬라우스를 복직시켰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토록 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기명들을 훔쳐냈다.(제1마키비서 1:20-28) 비록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주의자들의 후원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헬라화 정책은 대부분의 유대민중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드디어 그는 유대교를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바빌론 포로 때부터 유대교 신앙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온 유대교의 제도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금지하고 할례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게다가 토라(즉 율법서)찍고 불살랐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리를 먹도록 했으며, 전국 각처에 건립되어 있는 우상제단에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러한 그의 악랄한 행동은 성전 뜰에 제우스 제단을 건립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는데 거기에 안티오쿠스 자신의 모습을 담은 신상도 세웠다 이 제단이 바로 다니엘서에 있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 2마카비서 6-7장에 있는 "엘르아살과 7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바로 이 당시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신앙을 망살시키려는 정부 기관원들을 피하여 도시과 마을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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