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선교사들의 활동 및 사업

2010. 3. 12. 00:21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여선교사들의  활동 및 사업

 

 

그렇다면 그들이 한국여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들은 무엇일까? 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 가장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사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즉 유대 나라에서 시작되어 서구에서 생성되고 발전된 기독교를 한국에 전한 것은 여하튼 선교사들이었다고 그들은 한국교회의 기초가 되는,실질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다.

1907년 12월호 The Korea Mission Field지에 실린, "한국여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심포지움에서는 선교사들이 한국여성의 복음화(Evangelization)와 계몽(Enlightenment)을 가장 시급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덟명의 여성들 가운데,서울의 존스(Margaret B.Jones)여사는 전도부인(Bible Women)의 훈련을 위한 학교, 젊은 부인들과 과부들을 위한 학교가 가장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펜위크(Fannie Belie Fenwick)여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울의 버너(D.A.Buner)여사도 역시 한국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로 아는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서울의 무스(J.R.Moose)여사는 기독교 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 훈련받은 교사들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원산의 롭(A.F.Robb)여사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도록 예수의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40) 즉 교육을 통한 전도야말로 한국 여성들에게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1) 교육

여성의 교육이 복음전도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선교 초기부터 세워져 온 원칙이었다. 선교사들은, 1889년에 조직된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호주)미션연합공의회"에서 1890년 중국 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네비우스 (John Nevius)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한국의 선교사들의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고 이를 한국 교회에 적용할 가능성을 연구했다. 즉 연합공의회는 네비우스 방법을 밑바탕으로 하면서 핵심적인 몇 가지 원칙을 첨가 확대해서 선교정책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 바로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천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특별히 힘을 쓴다"는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가정주부들, 곧 여성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1)이는 선교사들이 여성의 교육을 전도와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육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감리교단에서 발간한 신학체계의 부인부에서는 특히 어머니의 종교적 역할을 강조한다. 반복귀라는 부인은 '종교를 가라치는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때부터 어린 아희에게 종교를 가라칠 수 잇느뇨?이 갓흔 것은 여러신자 어머니가 간절히 무러보는 것이올시다.디답흘 것은 출싱한 후 즉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겟다."42)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머니들, 장래의 어머니들이 될 소녀들의 교육이 시급하다.

이러한 생각과 그 당시 종교를 직접적으로 전파할 수 없었던 상황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교육기관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스크랜톤 여사는 여성교육을 수단으로 한 기독교의 전도와 한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점진주의에 입각한 방편으로서 이화학당을 시작했다.43) 스크랜톤여사는 1898년 그녀의 교육이념으로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데"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아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사람들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므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44)

말하자면 스크랜톤 여사는 교육기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한 것이"그 목적이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여성들은 보다 나은,기독교를 아는 한국인이 될 것이고 그때 그들은 직접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한 혜택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그 효과를 어느 정도까지 생각했겠는가? '보다 나은 한국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화학당의 제2대 사감인 프라이 당장은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손으로 하는 기술만을 연마함으로써 세상 일엔 어두워지고 비젼도 좁아지는 여성의 교육은 더 이상 할 수는 없으며 아들들을 정의와 정직의 원칙 아래 그 국가나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과 딸들을 그들 남편의 진정한 반려로서 교육시키는 넓은 지식을 여성들은 가져야 한다"45)고 보았다.

그녀의 견해는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보다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고 남편의 반려자, 자녀들의 현명한 어머니가 되는 것 정도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때 선교사들은 대체로 가부장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가정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높이려 했을 뿐이다.

2) 전도

처음부터 개신교는 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신중함을 보인다. 알렌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몇몇 성급한 선교사들도 있었지만46) 그런대로 천주교식의 직접적인 전도방법을 비난하면서 교육,의료사업 등을 통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스크랜톤 여사는 1886년 보고서에서 "처음에 우리는 상당한 의심을 받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한다. 그들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비록 우리의 계획들에 관해서는 많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라고 쓰고 있다.47) 이러한 상황 진단 아래 스크랜톤 여사는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진다.

1887년에는 "시간이 왔다"라는 판단한다. '나는 종종 이 사람들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고 느낀다."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가르친다면 매우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나는 가능한 한 빨리 한국의 가정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에 관해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할 것이다."48)

그런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에 능통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언어에 그다지 능치 못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스크랜톤 여사는 한국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한 남자선생으로 하여금 부녀자들에게 설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외법이 심하던 한국의 관습으로 부녀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생각 끝에 방 가운데 휘장을 치고 서로 얼굴을 못보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게 하였다"49)고 한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과 그들의 언어적 능력의 결핍은,그리고 여성들이 은둔되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여선교사들로 하여금 전도부인(Bible Women)을 쓰게 하였다.

그녀들이 전도부인을 어떻게 택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주로 그녀들을 사적으로 돕던 한국여자들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서신에서 선교사들의 요리사가 전도부인이 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전도부인을 훈련시키는 부인 성서 학원(Women's Bible Institute)이 곧 열릴 것인데,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록할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의 현재의 요리사도 올 봄에 그 학원에 입학할 것이다. 그녀는 매우 영리하기 때문에 훈련을 받으면 훌륭한 전도부인이 될 것이다."50)

전도부인들은 다른 훈련보다는 주로 성경을 많이 읽는 훈련을 받았다.
"내가 한 전도부인에게 얼마 전에 '성서'를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자 그녀는 '100번'이라고 답했다.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마가와 교리문답9Catechism)외에는 번역한 것이 없다."51)

따라서 전도부인들이 전한 복음을 별로 신뢰할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교회로 오고 있지만,여자 설교가들(evangelists)들은 그렇게 크게 요구되고 있는 아주 초보적이고 간단한 가르침조차도 가르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인들을 좀더 훈련시킴으로 우리의 영향력을 증가시켜야 한다."52)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말을 유능하게 잘하지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능력이 약하고 질문의 가치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전도부인들의 가르치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실제적인 훈련을 시켜야 한다."53)

이러한 한국 여성들의 지도력의 결여에 대해서는 상당히 후기까지도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1934년 12월 19일자 서신에 보면,"23년 전 내가 광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 토착여성들은 훌륭한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몇 천년간 내려온 제한된 사회적 권리, 거의 완전한 문맹,남편, 남자형제, 아버지에게의 종속들을 통해 발전된 열등 컴플렉스를 아직 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54)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왜 직접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않고 일을 시작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들은 피선교국의 상황에 대한 철저한 분석없이, 다만 개인의 종교적인 회심이 계기가 되어서 선교사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피선교국이 중국이든 일본이든 조선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의 문화, 전통에서 생긴 가치관에 입각한 복음해석과 서구적 문화를 표준으로 하는 윤리관을 가지고 전도를 한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다른 문화에 대한 존경의 결핍, 유대 기독교 이외의 문화와 역사 안에서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찾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며, 함께 살 수 있는가를 서로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 한 독선도 일단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반성을 거치지 않은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열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19세기의 자본주의, 시민주의 세계팽창의 조류에 협조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55) 해링톤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먼저 미국 문명을 가르치고 나서 기독교가 바로 서양문화의 기본이라는 것은 성급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잘 사는 생활양식을 호기심과 선망에 찬 한국인들에게 과시했다는 것이다.56)

여선교사들의 전도활동 역시 이러한 차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지위에서 해방된 여성의 표준을 기독교적 여성, 즉 남편과 시집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믿는 여성, 또한 기독교적 결혼과 서구식 의생관념을 가지고 가정을 관리하고 영위하는 여성에게 두었다. "기독교계 학교의 졸업생들은 집안을 청결하게 하고 아이를 깨끗이 키우며 정님이는 일주일에 한번 목욕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57) 라고 자랑스럽게 쓴다.

"성서는 기독교적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에 여성들은 남편과 나란히 교회에 가며,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허용된다. 넉넉한 계층의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신을 여성의 영역에다 감춰두지 않아도 되며 어떤 계층의 젊은 여성들도 걸어갈 때 머리에 긴 코트를 걸치지 않아도 된다..."56)

기독교인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남편과 평등한 목소리를 가진다고 하며 자기들이 아는 미국의 부인과 동일한 평등과 선한 의지의 정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부인상이었다. 즉 종이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부인상을 말하는 것이다.59)

이렇게 여선교사들은 전도부인과 함께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고 모이는 수가 늘어나면 교히를 지었다. 즉 "조그만 방 한칸으로부터 시작된 성경공부는 날이 가고 달이 감에 찾아드는 사람이 늘어 스크랜톤 부인은 드디어 학교 외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부녀자와 소녀를 위한 여성교회를 동대문에,그리고 1895년 6월 20일에는 남대문 부근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전도여행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사업을 발전시켰다.60)

아뭏든 여선교사들이 전도부인을 데리고 전도를 하러 다니는 광경을 우리는다음의 편지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원씨(Mr.Winn)의 포드로 화요일 아침 10시 15분경 전주를 떠났다. 우리는 차로 150리를 갈 수 있었으므로 릭샤(ricksha,인력거)나 가마로 가는 것보다 하루의 여행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무리중에는 원씨와 그의 조수가 있었고, 에밀리,나 그리고 전도부인이 짐을 가지고 있었다. 경치는 아주 아름다왔다. 산과 들 주위는 신선하고 아름다왔다. 우리는 오후 1시 30분쯤 되어 여행을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길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몇 번이나 멈춰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고 그들에게 집에 가서 읽을 소책자들(tracts)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소책자들을 건네주는 일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그것들을 받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들에게서 이상하게 보이는 종이뭉치를 받으면 무시무시한 병이 옮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했다고 추측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들이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 책들을 가져갔고, 따라서 나는 말씀이 그런 식으로 퍼져 나가리라고 희망한다.
나는 단지 그들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pe-se-o'(펴세요...제발 읽으세요를 의미하는)를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웃으면서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나는 안 만질 거야,그것은 더러워''이 새 교리를 치워 버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남원에 오후 2시 30분 경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에다 자동차를 남겨두고 30리나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나는 릭샤 (ricksha 인력거)를 탔고 원씨와 조사들은 걸었다....

그곳 교회의 지도자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우리는 여기서 토요일 아침까지 지낼 것이다...
이곳 교회는 반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쪽은 여성을 위해서,한 쪽은 남성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지도자의 부인의 집까지 가서 앉아 불을 피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와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거칠거나 해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예배 후에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다 갈때까지 인사를 하고 또 했다....
아침식사 후 여성들을 위한 아침 반이 모이기 시작했고 여자 20명과 아이들 10명이 모였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또 다른 예배가 있었는데 여자 21명과 아이 16명이었다. 후에 에밀리는 전도부인과 함께 마을로 가서 여자들을 찾아다녔고 아이들에게 요한3장 16절을 가르쳐 주었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61)

이런 교회들에서는 여성을 위한 성경반(Bible Class)을 만들어 전도 사업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여성 성경반은 먼 거리에서부터 오는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서에 대한 열흘간의 집중적인 공부를 했고,442명 정도가 등록했다. 그들은 거의 끝까지 잘 해나가서 378명이 마쳤다. 이 여성 성경반은 우리의 선교를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이다."62) 이렇게 성경반을 만들어 가르칠 때, 선교사들은 많은 여성들이 이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여인도 '누구 누구 부인'이라든가 '누구 누구 할머니'라든가 '이런 저런 마을에서 온 부인'이라든가 '돼지 할머니'라든가 '마을의 강아지의 엄마'라든가로 성경반에 등록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거나 모르거나 혹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63)

사실상 한국의 여자에게는 단지 어릴 때 필요에 의하여 붙여 준 아명이 있을 뿐이었다. 속칭 젖이름, 작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시집가는 날쪽을 지을 때까지 이 이름을 쓰고 그 이후에는 친정의 성에 씨자만 붙여 부르거나 시집의 성에 실(室)자를 붙여 박실, 김실로 부르거나 남편에게 관직이 있으면 그 관명아래 宅자를 붙여 참봉댁,교리댁,벼슬이 없으면 김서방 댁,박서방 댁으로 부르고 그 밖에 친정의 지명,살고 있는 집의 위치 등에 댁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단지 비녀같은 하층계급의 여인은 시집가건 말건 평생 아명으로 불리웠다.64) 1934년에 간행된 [숙인 창영 조씨 실기]에 보면 300여명 조문객 중 여자 50여명이 참석했는데,같은 조문객 남자들은 성명,직명이 기재되어 있고,여자 조문객들은 대부분 누구의 자당,누구의 매씨,누구의 조모,누구의 빙모 등으로 여성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라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소개되고 있다. 다만 8명만이 여성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65) 따라서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을 쓸 것이다. 과거에 그녀의 이름은 출생시 한문으로 등록되는 것 외에 다시는 들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은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주체성과 인격의 중요성을 통찰하게 되었다."66)

여성들이 자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주체성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들이나 서양식 이름들이었다. 마리아, 헬렌,또라... 등등의 서양식 이름들은 이름없는 여성들에게 자기 주체성을 갖게 해주는 과정으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반면에, 기독교가 서구적이라는,외래의 것이라는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심어주었고,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기독교 여성들은 종종 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경험을 한다.이런 외래적인 이미지를 벗고 토착화된 우리의 종교로 만들어가는 작업은 어렵기는 하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 하겠다.

3) 의료선교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다. 알렌의 경우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의료사업은 복음전파의 선두 주자 노릇을 해내었던 것이다.67) 즉 갑신정변 때 민영익이 받은 상처는 한의사들이 치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렌은 한의사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치료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알렌은 선교부가 관장하는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여선교사들이 왕비의 시의로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68)

이리하여 1886년에 미국 장로교 본부는 앨러즈 양을 파송하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중요한 부녀가 사업을 맡아보도록"하였다. 앨러즈 양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왕비의 궁중 귀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앨러즈 양은 오자마자 곧 왕비의 신임을 받고 친근하게 되었다. 국립병원 안에는 의학박사 호톤(Lilias S.Horton)양이 국립병원의 부녀과의 책임자가 되고 왕비의 신임받는 시의가 되었다.69)

이에 비해서 감리교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카나다 연합교회의 여의사,간호원들의 의료사업은 "제일 불쌍한 계급"을 상대로 시작하여 가장 가나안 사람들을 위하여 시행되었다.70)

특히 그 당시의 여성들은 내외법으로 인하여 남성이 여성을 직접 진찰할 수가 없었다. 또한 병든 여인들은 별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그냥 내쫓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풍속 때문에 병이 난 여자를 치료하거나 기독교를 전도하려면 여의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닥터 스크랜톤은 여성해외선교히에다 여자와 어린애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에 여성 해외선교회에서는 닥터 메타 하워드(Meta Howard)를 조선에 파송했다.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전용병원이 세워진 것이다. 이 병원은 메리 대치 스크랜톤 여사가 조선에 세운 첫번째 여자학교와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닥터 하워드는 조선에서 수천 명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치료했다. 그 결과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는 바로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다.71)

로제타 셔우드는 1890년 10월 13일자 일기에서 그 당시의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도착 첫날 병원을 가보았는데 집에서 가까왔다... 병원과 시료원을 돌아본 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약간 구조를 고친 조선집이었지만 보기에도 훌륭하고 병원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방들은 온돌이며 환자들은 따뜻한 방바닥 위에서 쉬고 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는 바닥에 앉아야 하므로 습관이 될 때까지는 이 자세가 매우 힘이 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방법이 좋은 것 같다. 첫째 이유는 환자들이 조선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양식 침대는 매우 춥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해롭지 않은 풍속을 고쳐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방바닥이 따뜻해서 잠자기에는 참으로 편안하다. 둘째는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방 전체가 하나의 침대나 마찬가지니까. 세째는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가 매우 쉽다... 병원에는 약품이 꽤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72)

로제타 셔우드에 의하면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대부분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상류층의 여성들은 대낮에 거리를 나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녀는 "밤에도 병원문을 열어 어떤 계층의 여자 환자라도 치료를 받도록 하고 싶다"고 하였다.73)
그러다가 로제타 셔우드는 홀(W.J.Hall)의사와 결혼하고 평양에 파송되어 거기서 선교병원을 개설하였다. 서울 부인병원의 일은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가 후임으로 맡게 되었다. 홀 의사는 1892년에 평양에서 의료사업을개설하였고 아내 로제타는 1894년 5월에 평양에서 부인병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평양의료사업은 청일전쟁의 발발, 홀의사의 사망과 그 부인의 미국 귀국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홀 의사의 유산으로 평양에 그를 기념하여 병원이 설립되었다. 다글라스 폴웰 의사가 이 새 병원에서 1897년 2월에 개원하였다.74)
로제타 홀은 다시 돌아와 1898년 6월 18일 여성진료소의 문을 열었다. 평양감사의 아내의 병을 낫게 해준 결과, 치료소 이름을 감사하게 지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감사는 광혜여원(Women's Dispenary of Exten-ded Grace)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75)

그 당시 신문에 "평양에 잇는 병원"이란 제하로 "홀의원의 부인이 처음으로 병원을 륙월 십오일부터 열고 병인들을 곳쳐 주엇ㄴ디 ㅎ달반 동안에 병인 소빅여 명을 보앗더라"76)라는 기사로 보아 이 여성병원은 여성들의 치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양의술의 보급은 물론 그 당시 내외법은 타파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홀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나는 아침 외래 환자를 진찰할 때에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많이 본다. 병세가 중태가 아니었다면 도무지 못을 길을 왔다고 말하면서 내가 매우 용한 의사란 말을 듣고 왔다고 하였다"77)적혀 있다.
한국에 의녀의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의녀의 제도는 태종 6년(서기 1409년)에 창설되었는데 그때부터 주로 부인들의 질병의 진료와 침구슬을 병행하였다. 이 의녀들은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해 온 당시의 풍습 때문에,외부의 남성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천류의 노비출신으로 충당되었다.
의녀들의 출신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연산조에 이르러서는 의녀들을 기녀들과 함께 공사의 연회에 참가하게 하였고 비록 중종 때에 이르러 이를 금하기는 하였지만 좀처럼 시정되지 않아 의녀들은 부인들의 진료 및 침구슬 외에 약방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녀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비록 의녀들이 머리에 흑단으로 만든 "족도리"를 써서 다른 관기들보다는 품위가 높은 것을 표시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왔으므로,갑신정변이 일어난 뒤노비제도는 폐지되고 서양의법에 의한 왕립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식 간호원을 모집하려 하였을 때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78)

이와같이 내외법이 뿌리깊은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여의사, 간호원,여자병원 조력자들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으며,이들을 양성해낼 수 있는 훈련기관,교육기관이 필요했지만 응하는 여성들이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1915년 홀의사가 한국의 선교 여의사로 활동한 지25주년이 되는 그해 한국에는 여성을 위한 의학전문학교가 없었는데 비해 중국에는 이미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세계의 여자의학 전문학교가 있었고 인도에는 아그라(Agra)에 70명의 의학도를 가진 여자의학 전문학교가 있었다.79)

이러한 가운데 우리나라의 최초의 여의사인 박 에스더가 탄생하였다. 그녀는 로제타 홀이 서울 이화학당에서 생리학과 약물학 강의를 맡아했을 때 뽑힌 학생이었다. 그녀는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수술보조를 싫어했으나 홀 부인의 언청이 수술을 본 다음부터 마음이 달라져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또한 그녀는 세례를 받아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그녀의 원래 이름은 김점동이었다.

에스더는 홀 부인이 1849년 11월 29일,홀 의사의 추도식을 지낸 뒤 미국에 돌아갈 때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하여 드디어는 1896년 10월1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00년에 그녀는 미국에서 의학 석사를 받아 귀국했고 그녀의 남편은 에스더가 의학교를 다니는 동안 볼티모어 식당에서 열심히 일해 아내를 도왔다.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려서 에스더가 졸업반 때 병사했다.

그녀는 귀국 후 "어머니의 의료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일한 지10개월 동안에 그녀는 3천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라고 셔우드 홀은 기록하고 있다.80)

정규 의료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에 조선 여성들은 주로 병원의 조력자(helper)들로서 일했는데, 약국,부엌,세탁장들에서 의사의 감독하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동시에 성서를 환자들에게 읽어주고 가르쳐 주는 역할도 했다.

간호원들을 위한 훈련학교가 W.F.M.S의 후원하에 1903년 3월에 서울의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병원(Woman's and Children's Hospital)과 제휴하여 시작되었다. 1902년에 에드문즈(Margaret J.Edmunds)양이 이 일을 위임받아 1903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훈련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이전에 병원에서 일하던 여성들 중 몇몇이 입학을 지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마르다(martha)는 몇 년 전 병원에 왔는데, 그녀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이 없었고 코의 일부가 없었다. 이는 그녀의 남편의 짓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왔을 때 인상이 별로 좋지 않고 무지하고 냉담한 여인이었지만,그리스도의 복음의 부드럽게 하는 영향력이 작용을 했고 이 어두운 땅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는 여인이 되었다.또 다른 하나는 환자로서 병원에 온 그레이스(Grace)인데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이 여인은 노예생활로부터 구원을 받고 많은 결함들을 고친 후에 병원관리자로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81)

이렇게 해서 한국 여성들의 의료교육이 시작되었다. 1927년까지는 의사 20명,약사5명,그리고 치과의사 2명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본에 6명,중국에 2명,미국에 3명이 의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과정을 하고 있었다.82) 의료기관의 존재는 물론 전도사업을 도와주기도 하였다.여선교사들이 전도하러 다니면서 만나는 수많은 병든 여인들을 병원과 연결해서 치료해주고 그녀들을 믿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이다.

"종종 우리가 마을을 통과할 때,우리는 병원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하루는 한 여인이 웃음을 띠우며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작년 병원에 있으면서 믿기를 배운 이래 교회에 다니고 있다'"83)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따라서 그의 생각들이 이 삶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보다 더 복음을 잘 제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84) "온리(On Lee)는 서울의 부녀병원(Woman's Hospital)에 있는 환자인데,그녀는 그리스도의 힘이 드러나는 그녀의 약함을 찬양한다. 그녀는 나의 몸에 결함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을 키울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85)

1906년 로제타 홀의 광혜여원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지난 2년동안에 많은 수가 세례를 받았거나 교회의 충실한 신도가 되었다"86)고 한다. 병원에는 흔히 전도부인이 있어서 환자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퇴원한 후에도 믿음을 계속 가지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평양의 연합 기독교병원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같은 전도방법으로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즉 세브란스 병원의 경우, 남녀 각기 1명으로 구성된 전도사팀이 두 조가 있어서 서로 교대로 병원과 병원 밖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전도사팀은 한달 동안 병실과 외래환자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다음 한 달은 기독교에 관심을 표시한 퇴원한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다. 이와같은 전도방법은 다분히 다양성을 지닌 효율적인 방법인 동시에 퇴원한 환자를 그 고을의 목사나 전도사에게 인계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애비슨(Dr.Avison)의 보고에 의하면 이와같은 전도방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잠시 동안이었다고 한다. 즉 세브란스 병원의 전도사업이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원인을 두가지로 보았다. 첫째, 퇴원한 환자들이 병원에서 소개받은 교회나 교회지도자들을 소개장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둘째 원인은 교회지도자들 가운데 병원에서 소개받은 환자의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그들을 직접 찾아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한편 병원의 전도사들은 ㅎ퇴원한 환자의 집을 방문할 때 병원에서 먼 거리에서 사는 사람보다 오히려 병원에서 채택한 전도방법은 이론상 좋은 것 같았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이와 같은 전도방법을 포기하는 방법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87) 그런데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자처하는 의료사업은 필연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의술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재래식 의술은 주로 미신이라고 비난받았다.

"한 마을에서 한 마술사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다음 집에서 외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단조로운 멜로디를 듣고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앞에다가 작은 탁자를 놓고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위에는 쌀과 돈이 있었는데, 그 집의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준다고 생각되는 주문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가 그녀는 주문을 멈추고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시오,당신들이 여기 있으면 일을 하 ㄹ수가 없오.'우리는 말하기를 '당신은 그런 식으로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소.'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예수에 관해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그분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소.언젠가 나도 그분을 믿을 것이오.그러나 지금은 안돼요!' 88)라고 말했다.

병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재래식 치료법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미신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조선 민중들의 심리를 좌우하는 종교, 문화 전통으로 존중하고,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았어야 했다.

고종 13년 일본과의 소위 "수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서양의학이 수입되고 서양 선교사를 통하여 洋의학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1905년 세브란스 의전의 설립과 함께 의학교육과 신의 사상이 보급됨으로써 병 치료의 바법이 무의에 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이 있었다.89) 또 한편 일제는 무속신앙의 구축을 현대화를 위한 것보다는 동화를 노려, 민족 전래의 원시 종교를 미신 타파라는 표면적 구실로 무격과 점복사에게 은근한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산제,기우제,별신제,장전,석전,차전 같은 민족 전래의 신사에 대하여 위생 또는 치안을 이유로 집회를 불허하거나 강제로 해산시켰다.90) 따라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을 타고 생활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던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거침없이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양의학의 보급은 결국 한방과 침술 등의 재래식 치료법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선교사들의 한국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언더우드 여사는 조선여자들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조선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못지 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 일은 털어 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질병,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25)

즉 언더우드 여사의 눈에 비친 한국의 여성들은 가난과 질병, 고된 삶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물론 조선의 여성들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었다. 캠벨(Josephine P.Campbell)여사는 한국 여성을 네 계급으로,즉 양반, 중인층의 여성, 무당과 나인들, 노예들과 점쟁디들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26) 이들 네 계급의 경제상태는 다르다. 즉 이들 중 낮은 계급에 있는 여성들은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동일한 계층의 여성들과 비교도 안되게 가난하고 거칠다. 그들의 옷은 더럽기 짝이 없다. 이 여성들은 아무런 기쁨이 없으며 며느리가 들어올 때가지 힘든 일을 해야 한다. 그녀들은 30대에 이미 50대처럼 보이며 40대에 이미 거의 이가 빠져 있다.27)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상층 계층의 여성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캠벨 여사가 언급한, 저 네 계층은 위로올라갈수록 은둔의 정도가 심해진다. 헐버트(H.Hulbert)는 이 은둔의 정도를 자세히 기술하는데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은둔의 정도는 심하다고 한다. "명문가의 규수들은 집안 이외의 어떠한 남자도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중류계급의 아낙네들은 양반네의 아낙네들보다는 덜 은둔되어 있지만 그래도 장옷을 걸치지 않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중류게급의 아낙네들은 '사랑'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친척들이 내실로 초대되는 경우 남자 친척들을 볼 수가 있다."28) 마지막으로 기생, 하녀,촌다니 및 요술장이들은 장옷을 걸치지 않아도 욕을 먹지는 않는다고 쓰고 있다.29)

이렇게 조선의 여성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여러 이유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성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제외되어 있는 여성들을 선교사들은 보았다. 게일(James S.Gale)은,한국 여성들은 내외 때문에 점차 인정받는 세계로부터 노예와 감옥의 세계로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30) 그러나 비숍 여사는 한국 여성들 자신은 그러한 상태를 오히려 보호받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은둔은 몇 세기를 걸쳐 내려온 관습이며,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이념은 위험하다. 따라서 나는 그녀들이 귀중한 물건들이기 때문에 잘 간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 내가 한 지적인 여자에게 우리의 관습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당신 남편들은 당신을 잘 돌보지 않는군요'라고 말하였다"31)는 것이다.

그러나 내외법이라는 것이 유교의 영향에 의해서 강화된 법이며,고려시대까지는 상당히 남녀관계가 자유로왔고 특히 고구려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남녀관계가 문란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 내외법은 조선조에 와서 고착된 관습임이 분명하며 여성의 지위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여성을 은둔시키는 일과 더불어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 상층계급의 여성들은 집에서 한문 교육을 받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글을 읽을 줄 아는 한국 여성의 수는 1000명에 2명꼴밖에 안된다고 한다. 외국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은 종종 "여자들이나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보며 남자들이 무시하지만,모든 여성들은 이 한글을 익히고 또 철저하게 사용한다고 했다.32)

또한 여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도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결혼하여 꾸미게 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실제에 필요한 것만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식이며 그들로 하여금 오직 가정적인 의미에서의 남편의 반려가 되도록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33) 이 모든 것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호받아야 될 약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여성을 남성 아래 예속시키는 결과를 빚어대는 것이라고 한다.34)

그런데 선교사들에 의하면 이러한 상태는 기독교의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예수는 오셔서 세상의 여자들을 자유하게 하셨다. 그분만이 그녀의 감옥 - 집을 여는 법을 알고 계신 유일한 분이다.... 이제 20세기에 들어서서 예수라는 이름이 높이 올리워졌고 모든 여성들의 자유함이 선포되었다."35) 헐버트 역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성은 은둔은 야만민족의 난혼과 선진국가의 여성의 해방된 상태의 중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러한 풍속을 전자보다는 낫지만, 후자보다는 나쁘다. 서양에서 바람직한 여성의 지위를 형성시켜 준 것이 기독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동양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이 풍미하기 전에는 서양과 같은 풍조가 형성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극동에서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상황이 존속되는 한,여성의 은둔은 욕된 것이 아니라 미덕이며 몇몇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풍습을 갑작스럽게 근절시킨다면 사회가 진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혼미 상태에 빠지게 될른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바이다."36)
즉 한국여성의 지위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될 때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여성해방의 흐름을 살펴볼 때, 서구의 여성들에게도 18,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어렵고 힘든 투쟁을 거쳐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독교가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기독교는 서구의 가부장제 문화와 그 맥을 같이하는 반여성해방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다고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지탄을 받아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고,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자를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존재로 인식시켜 오는데 기독교는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서구의 여성관이 진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선교사들이 그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문화 제반 사항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선교사들,특히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경건주의 신앙유형을 가지고 있었고 정교분리라는 입장에 서서 교육을 했으며 세속의 차원에서는 단결된 신령상의 영혼의 안주, 네세에의 열락 등을 복음의 핵심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장로교의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J.Brown) 은 이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개괄하고 있었다. "한국 문호개방 이후 찾아온 전형적인 선교사는 청교도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성수주일 하기를 우리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1세기 전에 하듯 하다. 그는 댄스나 흡연이나 카드놀이를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는 죄로 경원한다. 신학과 성서비판에서는 사뭇 보수적이며 그리스도의 前천년왕국 재림설을 핵심적인 진리로 믿는다. 고등비판이나 자유신학은 위험한 이단이라 단죄된다."37) 이렇게 사회의 흐름에 대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보수적이었던 그들이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진보적이었다라고는 볼 수 없다.

오늘날 여성신학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복음의 내용이 2000년 동안의 가부장제 문화속에서 왜곡되어 이용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여성관도 역시 그러한 선에서 많이 벗어났을 수는 없었을것이다. 물론기독교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청교도 혁명은 가장의 권위를 주장하긴 했지만 여성의 영혼도, 비록 이 세상에서의 지위는 열등해도, 신이 보기에는 남성의 영혼과 동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청교도주의가 '인간의 개성'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는 아직도 온정주의적인 선에 머물고 있었다. 여성의 지위와 "자유"의 성격을 규정하는 자는 남성 가장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주의적인 인물들이라고 볼때 그들은 대충 그런 정도의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38)

물론 그들 중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직접 체험하여 여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선교사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21년 9월 28세로 한국에 온 의료선교사 모레리 박사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다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카나다 장로교회에서는 여자목사가 없었고 신학교 입학도 여간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때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러 교회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의논하였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신학교에서 여자를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받아들여 공부를 마치게 된다 하더라도 목사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레리의 실망은 큰 것이었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한 끝에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39) 그녀는 1919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5년에는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 정부에서 두번이나 훈장을 받았는데, 이거들을 사양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필자에게 밝힌 일이 있다.

이러한 그들 선교사들의 의식 수준이 온건하였다. 하더라도 그 당시 한국의 상황 속에서 여성의 교육에의 기회, 일부일처제의 가족관 등은 상당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여성관에 입각해서 보다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조선여성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