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2. 00:19ㆍ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주기철 목사의 신앙 - 평양 이전의 생애를 중심으로
들어가는말
주기철 목사의 생애와 삶, 신앙과 신학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이미 적지 않은 전기류가 낙양의 지가를 높여 왔으며, 최근에는 학술적인 연구도 축적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웬만한 연구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거나 혹은 윤색하는 정도에 그치게 하고 있다 이것은 관심이 증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1차자료 발굴이 부진하기 때문에 재래된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출간된 연구들에는 적지 않은 혼선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존의 오류가 계속 답습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 나온 전기와 연구서들의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연구자들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더 헤집고 들어갈 분야가 있을 것같지가 않았다. 연구과제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난제였다. 그러다가 어렵게 주기철 목사가 활약할 당시의 경남노회록을 얻어볼 수 있게 되어 거기에서 그의 행적을 더 밝힐 수 있는 몇몇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경남노회장으로 있을 당시의 신앙사조와 관련된 것으로서, 당시 성행하기 시작한 무교회주의의 일파인 최태용(崔泰瑢) 계열의 신앙노선과 관련된 문제였다. 경남노회록의 이같은 자료를 근거로 하여 최태용이 간행한 《영(靈)과 진리(眞理)》를 대조해보니 거기에도 적쟎게 경남노회와의 관계를 암시 또는 설명하는 자료들이 보였다.
필자가 주기철 목사에 관하여 뒤늦게 붓을 든 것은 기존의 연구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위에서 말한 자료들이라도 새로 소개할 수 있다면 학계에 도움이 될 것 같이 느껴졌다. 글의 제목과 관련, 주기철 목사에게 '신학'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도 생각하다가, 고심 끝에 '신앙'으로 잡았는데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글의 순서는 그의 생애를 간단히 스케치하고 그의 신앙의 배경이라할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살펴본 후 그의 신앙의 내용, 그의 노회장 시절 경남노회내의 신앙 갈등=최태용계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 그의 생애에 대한 관견(管見)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한국 기독교회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 한 분이다. 그는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반세기가 조금 넘었을 일천한 시점에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일본의 저 천황(天皇)주의 이념에 바탕한 무도한 군국주의 횡포에 저항하여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그 절대성을 증거하여 위대한 순교적 증인이 되었다. 그의 삶은 비록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구약시대 이래의 유일신 하나님 신앙 전통에 입각하여 한국 기독교교회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순교자의 반열에 추앙되었다.
그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직후에 태어났다. 광무(光武) 원년이었다. 그가 태어난 경남 창원군 웅천(熊川)은 조선조 초기 내이포(乃而浦) 혹은 제포(薺浦)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본 세견선(歲遣船)에 문호가 개방되었던 곳으로 중종 때(1510)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임진왜란기에는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침략군 부대를 이끌고 들어온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듭된 후퇴로 고달프게 된 예하부대를 머물게 하며 본국에 요청, 선교사로 와 있던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Cespedes)를 초빙한 곳이기도 하였다. 조선이 형식적이지만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국가 중흥의 의미를 띤 연호 광무를 사용한 그 첫해에, 일찍부터 일본과 악연을 맺어온 곳에서 일제의 천황신숭배에 반대하여 순교한 주기철이 태어났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을사조약 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첫해(1906)에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2년 뒤에 그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졸업한 1912년은 한국교회로서는 뒷날 그가 그 교단의 목사로 임직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총회가 조직되던 해였다. 졸업 후 그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상급학교를 굳이 마다하고 정주 오산(五山)학교를 택하여 진학한 것은, 당시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던 이광수(李光洙)의 웅천 방문과 학교 소개, 진학권유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나 그에 대한 학부형의 기대가 어우러져 결정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오산 진학의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오산과 관련을 맺지 않고 오산에서 배웠던 신앙적 민족적인 기초가 없었다면, 뒷날 과연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 주기철로 다듬어질 수 있었을까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은 더욱 의미깊다. 여하튼 주기철은 대한제국이 일제 강점기로 바뀌고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가 착착 정비되던 시기, 그 자신으로서는 망국의 설음을 느낄 수도 있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를, 고향을 떠나 배움의 터전인 정주 오산학교에서 아마도 예민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보내었을 것이다.
그가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세운 학교에서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과 학행(學行)이 겸비된 스승들로부터 신앙과 민족을 배우고 오산을 졸업하게 되는 것은 1916년 봄이다. 그가 오산에 입학하기 직전에 불었던 소위 '105인사건'의 한파는 한국의 기독교계와 애국계몽운동계 및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어 많은 지도자들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승훈이 옥에서 간고를 겪고 있는 사이에 주기철은 남강에게서 직접적인 교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감수성이 강했던 오산시절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남강 대신 고당에게서 산 교육을 받고 오산을 졸업하게 되었다. 뒷날 주기철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받을 때에 마산으로 와서 교섭을 벌인 산정현교회 대표가 고당이었다는 것은 사제간에 얽힌 여러가지 미담들을 상상케 한다.
오산을 졸업한 주기철은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연희(延禧)전문학교 상과(商科)를 진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장래 우리 나라에 필요한 인재들의 충원을 고려하여 졸업생들의 진학방향을 조언하고, 졸업생들은 그 조언에 거의 순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에 따르면, 주기철은 아마도 고당이나 남강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 장차 조선의 경제문제와 씨름할 결심을 하고 연전에 진학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연전은 재한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오랜 동안의 논란을 거쳐 이 해에 서울의 YMCA 건물을 빌려 개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기철은 연전의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를 지도한 오산의 스승들이나 그 자신이 서북적인 분위기를 안고 있던 숭실전문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갓 태어난, 그래서 그 분위기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연전을 택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주기철의 성향이 숭실적인 분위기보다는 연전적인 분위기를 선호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어떨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연전 선택은, 안질(眼疾)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정확하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좌절당하고 만다. 여기서도 우리가 그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꿰?어 보아야 한다면, 그의 생애를 너무 자주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시켜 고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주기철은 1916년 여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몇년간 뚜렷한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듯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의 학업중단과 귀향이 이복(異腹) 형들에 의해 야기된 유산 분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생애에서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 이 기간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까지 5년 이상 계속되었다. 귀향한 이듬해 그는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1917년 김해교회 출신으로 신교육을 받은 안갑수와 결혼하여 이 방황의 기간에 위로를 받는다. 불확실한 자료들은, 그가 이 기간에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민족자결주의>의 세계풍조에 따라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3 1운동 때 그 지방 만세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1개월 동안 구류를 살았다. 주기철은 그만한 나이의 의식있는 청년이라면 으레 걸을 수 있는, 민족을 향한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주기철은 고향에서 열심히 교회를 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집사의 직분을 맡기도 하였고 교회의 회계를 맡기도 하였다.
깊은 방황은 때때로 창조적인 출구를 기약해 준다. 섭리 가운데 마련될 새로운 길은 본격적인 경제운동이나 민족운동을 통한 길이 아니었다. 그가 뒷날 강조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뛰어날 수 있다고 평가한 영적인 분야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진로를 목회자의 길로 굳힌다. 즉 그 헤 9월의 마산 문창교회와 11월 웅천읍 교회에서 개최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는 몇년간 방황하던 주기철의 앞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사경회를 통해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쓰기 위해 몇년간의 방황의 때와 김익두와 같은 부흥사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오산과 연전에서 가졌던 이상과 지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그는 김익두를 통해 그렇게 큰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5년간의 방황의 의미가 있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는 한편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신학교 수련은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에 비교될 만큼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오산과 연전, 그 후 몇년간의 방황기간동안,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히브리민족을 안타까와하였듯이,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자신이 처한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공사판의 애굽의 감독관을 쳐죽일 정도로 민족의식이 충일했듯이, 그도 아마도 오산의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민족에 대한 고민을 가꾸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광야도피는 바로 스스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 인간적인 민족애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모세의 광야행이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자기신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주기철의 평양신학교행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을 사로잡아온 문제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민족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신앙적 승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렙산 가시떨기 앞에 선 모세가 40년 전의 도도한 자기신뢰와 인간적인 자신감을 다 비우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고백하였듯이, 주기철도 이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자신의 무력을 철저히 깨닫는 자를 세워 지도자로 그리고 승리자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신앙인의 승리의 비결이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목사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1936년 7월까지는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아 인생의 큰 전기를 맞았던 마산 문창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여 그의 목회사역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는 인생의 첫 반려자 안갑수를 잃고 오정모를 새로 맞아야 하는 등 곡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노회장으로 있는 기간(1932-33)에 야기되었던 경남노회 안의 신앙적 갈등의 문제는 어쩌면 그가 앞으로 신사참배와의 대결에 앞서 겪어야 했던 신앙노선상의 한 시련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경남노회가 겪었던 그 사건은 한국 교회가 희년(1934-35)을 맞던 때에 일어났던 여권문제 창세기의 모세저작부인 문제 단권주석 사건과 같은 새로운 신학사조와의 갈등이 있기 전에 나타난 시련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상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었다.
경남에서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은 주기철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일제 태양신에 대결하기 위한 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로서 그는 한국 교회의 전면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밀어넣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겪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의 길, 그는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골고다로 향했다. 일제의 거듭되는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검속,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다가, 1944년 4월 21일 한국 기독교사에 찬란히 빛나는 순교의 길을 걸으니 47세였다. 그는 갔지만, 지금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를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속되는 한 그는 그 역사와 함께 역사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2. 신앙 형성의 배경
2-1. 한국 교회 초기에 소개된 신앙: 주기철은 그의 나이 14세되던 1910년 12월 말경에 웅천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어린 시절 출석하던 웅천읍교회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창원군 웅천읍 교회가 성립하다. 이에 앞서 선교사 심익순(沈翊舜)의 전도로 약간의 신도가 점차 나아와 송화여(宋化汝) 사저에서 예배하였고 교회가 점진하여 서중리(西中里)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가 뒤에 북부리(北部里)에 예배당을 옮겨 지으니라"
경남지역은 일찍부터 호주 장료회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선교 지역의 분할이 확정되기 전에는 미국 북장로회도 부산과 밀양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펴고 있었다. 웅천읍교회가 성립되기 전 이 근방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김해읍 내지교회(1898)와 구마산교회(1901)가 성립되었고, 1905년에는 김해읍교회를 비롯하여 김해군 진례면 시례동(詩禮洞)교회, 창원군 경화동(慶化洞)교회 등이 성립되었다.
우리가 주기철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이 땅에 처음 전파될 때 어떠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주기철의 신앙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시대의 신앙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독교 수용초기에 사용된 전도문서에 대한 검토와 둘째 장로교가 채택한 신경 셋째 초기의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신학사조 및 그가 신학교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김익두의 신앙을 거론해보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선교사들의 신학사조와 관련, 평양신학교의 신학적인 입장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90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는 60여종이 넘는 전도문서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과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설명하는 것, 기독교를 동양종교와 비교설명한 것, 교회의 의식과 규칙에 관한 것, 교리공부를 겸해 국문공부를 위한 것 그리고 찬송가책 등이다. 이들 중 1897년에 노병선이 쓴 《파혹진선론(破惑進善論)》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번역된 것으로서, 이들은 현대신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교리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었다.
초기의 전도문서는 한국 사회의 범신론(汎神論)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유일신(唯一神)관을 분명히 하였고, 하나님이 존재의 기반이고 만물의 제일원인이며 자존영원(自存永遠)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인간의 아버지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기독신자들에게 제일, 제이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고 거기에 따른 비타협적인 신앙생활을 엄격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론(基督論)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타락한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으며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3일만에 부활, 승천하여 장차 재림할 것이라고 성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관 기독론을 전제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배타적이며 다른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신관을 갖고 비타협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도전하였으며, 따라서 우상거부와 제사폐지 등의 반전통적 행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전통적 윤리에서 자신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성속을 구분하여 세속으로부터 성화(聖化)를 이룩하려는 개인윤리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도문서는 한편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원론(二元論: 二分法)적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을 통일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현대 기독교적인 인간관과는 다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희랍적 혹은 영지주의적 인간관과 상통하는 것으로, 한국의 경우 무교(巫敎)적 바탕 위에서 성립된 인간관이라 할 것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예수믿는 것을 영혼의 일로 귀속시키고, 육체를 세속과 연관시켜 일상생활을 철저히 영적인 세계와는 분리시켰다. 사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을 전제로 예수믿는 것이나 땅위의 선행의 목적은 사후에 영혼의 안식과 영복(永福)을 누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원론적인 사상은 일 자체도 하나님의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고 세속적인 생활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차단시켰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머물러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성행하게 된 타계(他界)주의 사상과 함께 기독신자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윤리생활도 개인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이 개인의 생활을 규제하는 사회의 구조문제에 대해서 일정하게 눈감아버리게 만들었다.
2-2. 요리문답과 신경: 주기철의 신앙형태를 규정했을 신앙적 지형은 당시 장로교단이 채택했을 신경에서 엿볼 수 있다. 교단적으로 신경을 채택하기에 앞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는 1888년에 장로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Westminster Cstechism>을 번역, 출간하였고 이어서 1890년에는 <성교촬리 Salient Doctrines of Christianity>를 간행하여 신자들의 교리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들 교리서들은 장로교 신자들이 믿어야할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카나다장로회 등 4개의 재한(在韓)선교부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장로교적인 이념과 치리기구를 일치시키려고 하면서 신경의 제정을 서둘렀다. 이미 1905년 9월에는 장로회공의회가 이런 결의를 남기고 있다.
"1905년에 교회신경(1907년에 채용된 것이라)을 공의회가 의정(議定)채용하였는데 그 위원이 보고하기를 새로히 신경을 제정하지 아니하고 만국장로회에셔 전부터 사용하는 신경과 신경에 대하여 개정한 것과 신경도리에 대한 광고와 또 선교각지방에셔 통용하는 신경을 비교하야 조선예수교장로회형편에 적합한 신경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 이 신경은 몇개월전에 새로 조직한 인도 나라 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하니 우리가 이 신경을 보고한 때에 희망하는 바는 이 신경이 조선, 인도 두나라 장로회의 신경만 될뿐아니라 아세아 각 나라 장로회의 신경이 되어각 교회가 서로 연관이 되기를 옹망(毋望)한다 하니라(1905년 영문회의록 37페지)"
이 때부터 시작된 신경제정의 논의는 그 이듬해에는 교회정치문제에 집중, 계속되었고,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유안해 온 신경을 장로회규칙과 함께 1년만 채용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 서문은 이 신경이 장로교회의 가르치는 표준이며 '성경을 밝히 해석한 것'임을 천명하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대한 장로교회에서 이 아래 기록한 몇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와 및 인허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곰 청종케 하는 것이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드민스터 신경과 셩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셩경요리문답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물론 이 신경이 확정되는 것은 그 뒤 신중한 논의를 더 거쳐서 채택되었다. 이 신경을 '12신조'라고도 부르는데, '칼빈주의' 경향이 강력하게 표시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2개 조목은, 제1조 "신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믿고 행할 본분의 확실한 볍례인데 다만 이 밖에 없느니라"로 하여 신앙의 출발점인 성경의 권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인간창조, 인간의 타락과 범죄, 대속자(代贖者)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 예정과 구원, 성례, 믿는자의 본분 그리고 최후의 부활 심판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주기철이 주일학교시절부터 쳬계적인 교회교육을 받았다면, 당시 책자로 소개되고 있었을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장로교단에서 채택한 12신경을 중심으로 하여 교육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교육받은 신앙은 앞서 전도문서에서 보이는 신앙유형에다 장로교 교리 속에서 터득한 것을 그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3. 부흥운동적 열정: 교리와 신조는 신앙을 냉정하게는 하지만 가슴 속에서 울어나는 뜨거움은 없다. 뜨거움이 없이는 회심도 생의 방향에 대한 결단도 할 수 없다. 주기철이 그 때까지 쌓은 학식과 3 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민족적 고뇌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에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사건은 바로 길선주와 김익두로 대표되는 1920년 전후의 부흥운동에 접하면서부터라 할 것이다. 그는 김익두의 마산 문창교회와 웅천교회에서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크게 회심하여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김인서는 부흥운동가 김익두를 두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조선 초대교회는 영계(靈溪) 선생의 영화(靈化)운동을 통하여 그 터가 잡혀졌다. 그러나 신문화 수입에 선구되였던 것만치 과학사조와 함께 신신학사조가 침습함에 미쳐 신앙상 동요가 생기게 되고 일변(一邊) 민족주의자의 이용에 기울어진 때도 있었고 우(又) 일방(一方) 사회주의의 방해도 받게 되어 기미(己未) 전후의 조선교회는 정(正)히 위기였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내세운 종이 권능의 사자 김익두였다. 조선교회를 바로 보는 일(一) 노인은 말하되 '기미 이후에 만일 김익두 아니더면?' 하고 탄식과 감사를 마지아니함도 이 때문이다."
김인서의 지적대로 기미 전후에 조선교회를 향한 김익두의 역할이 이러하였다면, 바로 그 시기에 주기철은 기미 직후(1920) 한국 사회나 그 자신이 혼란에 빠졌을 그 때에 김익두에 의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익두는 경건과 독경(讀經), 기도로 신유의 큰 권능을 받아 한국 교회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게 되니 눈에는 흔적이요 얼굴에는 기쁨이라 여광(如狂) 여취(如醉)하니 부흥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옷모양이나 태도가 이 세상 사람같지 아니하였다. 대정(大正) 9년 사람들은 새벽 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였고, 낮공부에 모이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이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울었다. 선생이 문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신인(神人)의 얼굴을 뵈옵고자 좌우에 인성(人城)을 쌓고 병자들은 그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바랐다. 그 때 김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전하는 대로 들어보면 지금 김목사의 설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건만 보다 더 큰 은혜가 내렸으니 이는 하나님이 때의 조선 교회를 돌보시고 특별히 성신으로 감화하신 것이다."
대정 9년이라면 바로 1920년이다. 이 때의 김익두의 부흥회의 광경이 이랬다면, 마산이나 웅천읍의 김익두의 부흥회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되었을 것이고, 주기철이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하고 생의 방향을 틀었다면 그는 바로 이러한 부흥운동의 성령의 역사에 사로잡혔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주기철이 지금까지의 오산 연전으로 이어지는 어쩌면 민족운동적이라고 해야 할 삶의 방식에서 자신과 민족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고 의지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1920년의 한국 부흥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주기철이 뒷날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김익두를 준비하셨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에서 축적된 힘이 밑받침되었던 것이다.
2-4. 지성을 갖춘 신학교육: 부흥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불같은 신앙은 자칫 순간적일 수 있다. 그 불을 계속 지피는 데는 교리나 신조 공부와는 다른 냉정한 수련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주기철로 하여금 부흥운동의 뜨거움을 신학공부로 연결시킨 것은 가슴과 머리의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 후에 일어나야할 제3의 부흥운동을 전망하면서, "제3 부흥의 그 사람은 길선주 신앙에 플러스 김익두 권능 그리고 또 플러스 석학(碩學) 대덕(大德)이라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 때는 언제일가? 과거를 기록하는 분은 미래를 전망한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에다 석학 대덕을 겸비한 인물을 말했을 때 그 자신은 예측한 것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 제3의 인물을 부흥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할 수 있는 인물로 예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존재함으로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김인서가 고대했던 그런 인물은 뜨거운 신앙과 냉철한 지성을 갖춘 인물이어햐 했다. 김익두의 부흥회로 뜨거워진 주기철은 평양신학교의 배움을 통해 신앙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1922년-25년의 3년간인데, 그 때 신학교의 정식 교수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네비어스 방책 중 한국인 교역자 양성책과 관련, 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유학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물러나기까지 장로교단의 신학문제는 거의 선교사들이 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기철은 재학 시절, 3 1운동 때 장로회 총회장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가 옥살이를 경험한 김선두 목사와 미국 유학에서 갓돌아온 남궁혁 박사를 졸업 전에 교정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들의 출신학교와 교과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던 선교사들은 호주선교회 소속으로 왔던 엥겔(G.O.Engel, 王吉志)이 스위스 바젤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미국 캐나다의 신학교 출신이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공부한 신학교들은 '보수주의 신학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근본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근본주의운동은 천년왕국운동을 기초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인간의 전적타락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및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주기철의 신학교 재학 시절,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근본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보다는 길선주 김익두 및 이용도 등으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에 의한 부흥운동이 신앙의 큰 조류로서 전개되었음을 더 유념해야 한다.
교과과정의 시간 배정으로 볼 때 평양신학교는 감리교계통의 협성신학교에 비해서 성경신학의 백분율이 서로 비슷했다.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분야의 교육은 훨씬 강조되었다. 성경신학도 성경해석 정도에 그쳤을 것이며, 현대적인 성경신학을 교수했다고는 볼 수 없다. 1930년대 이전, 평양신학교는 성경원어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역자 양성책'을, 한국인의 평균 교육수준보다 약간 높게 교육하자는 선에서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기철이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새 신학사조를 소개받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정통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은 열심히 되풀이되었고, 칼빈주의적 신경과 거기에 따른 훈련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자될 사람들은 금식과 철야기도 등 고된 훈련을 강화하도록 하자는 교역자 양성책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뒷날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근본주의 신앙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함께 수용되어 군국주의와 부딪치게 되었다. 기독교의 1,2계명은 군국주의와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태양신숭배 강요와 기독교의 우상숭배거부론은 결국 신사참배에서 강요와 거부로 부딪쳤던 것이다.
3. 경남노회 시절의 신앙행적 확인
주기철이 1925년 말에 목사로 안수받아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마산 문창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수많은 곡경을 겪게 된다. 그 중에는 아내 안갑수를 먼저 보내는 인간적인 비애를 맛보기도 하지만, 경남노회의 중진이었던 그는 교회의 정체성 수호와 관련된 여러가지 갈등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장로교회가 1934년 희년을 맞아 신학 노선의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기 전에 터졌던 것이다.
희년을 맞으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여권(女權) 문제와 모세의 창세기저작 부인(否認)문제 그리고 단권주석(單券註釋) 문제 등의 '신신학(新神學)'적 사조에 관련된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경남노회에서는 이와는 다른 일종의 신앙적인 갈등을 겪는데, 이들 사건들은 주기철이 당회장으로서 혹은 노회장으로서 처리해야 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노선과도 일정하게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박승명 목사 사건, 정덕생 목사 사건 그리고 최태용 추종자들과의 문제 등이 있다. 그 중 한국교회에 소개되지 않은 뒤의 두 사건만 언급하겠다.
주기철의 행적에서 이 기간 동안 몇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그가 1929년 혹은 1931년에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반대 결의를 이끌어냈다는, 전거가 불확실한 그의 행적이다. 둘째는 그가 노회장으로 재직한 시기이다. 곁들여 그의 초취부인 안갑수에 대한 것이다. 먼제 이 문제를 거론한 뒤에 정덕생 목사 사건과 최태용 백남용과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3-1 경남노회 신사참배 거절안 가결의 문제: 이것은 아마도 김인서(金麟瑞)가 "주목사가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당시 일인(日人)의 부산일보(釜山日報)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공격하여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했다. 주(朱) 목사가 태양신(太陽神)과 싸운 것은 경남에서 시작하였다."고 썼던 데서 발단되었던 것같다. 그 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 답습하거나 혹은 이를 전재한 것을 다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김요나는, 주기철이 1929년 노회석상에서 <신사참배 반대 헌의안>을 경남노회장 함태영 앞으로 제출하여 가결케 했다는 것과, 가결되던 날 왜인들이 경영하던 부산일보가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완미(頑迷)한 양귀(洋鬼), 끝끝내 신사참배 거부"라는 사설까지 게재하여 신랄히 비판하였다고 했으며, 또 "주목사의 신사참배반대의지가 대외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최초의 일이었다. 김충남 전기는 이 장면을 전일본과 한국 교회는 소년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했다."고 썼다.
민경배는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설이 '김인서와 『어둠을 밝힌 사람들』의 저자'에게서 나타나며 그 후의 모든 전기나 논문에 문헌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되어 왔음을 지적하면서 전승의 전모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주기철이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되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의 일본인 발행 부산일보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공박하되, '완매(頑迷)한 양귀(洋鬼) 끝내 신사참배 거부'라고 해서 일본 조야에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여기서 발단된다. 따라서 한국교회 신사참배 반대투쟁사는 여기서부터 기론해야 한다. 그 다음 시대가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그리고 제3기가 전국적인 신사불참운동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의 주기철 저항과 순교에서 정점을 이루는 투쟁기라고 본다. 경남노회에서 거절안이 가결된 것은 1931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필자는, 주목사 주도로 경남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가결을 끌어낸 주장과 '부산일보'에서 그 점을 대서특필하였다는 점과 관련, 연구자들이 김인서를 인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거를 제시하지만 그 원자료(原資料)에 대해서는 어떤 전거도 내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경남노회록의 소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1929년 9월에 이홍식(李弘植) 목사가 편집, 간행한 경남노회 제22회(1926)∼제27회(1929) 노회록과 <송상석(宋相錫) 목사 자료>에서 제 28회∼제40회 경남노회록을 발견하고 기록을 검토하였지만, 1929년과 1931년에 '신사참배반대'를 논의하거나 가결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929년이나 '1931년 여름'에 가결하였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1925년말 주기철이 경남노회원이 되었을때부터 노회를 떠나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는 1936년까지의 기록에서는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었다는 어떠한 논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경남노회에서 주기철의 주도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경남노회에서 그같은 결의를 했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더구나 주기철과 한상동의 신사참배반대 방식을 비교하면서, 한상동이 운동차원에서 진행시켰다면 주기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시켰다고 주장하는 형편이고 보면, 주기철이 경남노회에서 그런 결의안을 가결하도록 주도했다는, 말하자면 운동적인 방식으로 반대시위를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주기철이 내면에 정열을 안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신앙인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구나 뒷날에 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급박한 사단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분위기에서 주기철이 미리 앞장서서 참배반대에 나섰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반대와 순교에 연계되어 이루어진 이 불확실한 증언은 사료적인 실증을 거치지 않은채 많은 연구자들의 검증없는 지지를 끌어내었다. 이런 지지 분위기 속에서라면 그가 초량교회를 떠나면서 행했다는, "이제 앞으로 일제가 강요하는 우상숭배의 어려운 시대가 눈앞에 다가옵니다. ."라는 설교가 나타났다는 것도, 그 전거가 희박하지만, 자연스럽다. 그러나 경남노회가 주기철의 주도로 일찍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다는 항간의 주장은, 아직까지는 그 확실한 전거를 들이대어야 할 단계이지,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사실'을 해석해야 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3-2. 노회장 재임시기와 사모 안갑수: 몇몇 연보나 행적기록에서 그가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된 시기를 1931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경남노회록에 의하면, 그는 1930∼31년은 부회장(회장 김만일 목사)으로 봉사하였고,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30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 이듬해 1933년 1월 3일 부사진예배당에서 회집된 31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가 노회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서 두가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하나는 경남노회 내의 목사 정덕생 씨에 관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최태용 백남용 등이 경남노회 관내에 와서 집회를 가짐으로 적지 않은 파란이 야기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주기철의 초취부인 안갑수는 1931년과 32년에 경남부인전도회 회장으로서 해당년도 정기노회에 출석하여 경남부인전도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가 이렇게 경남여전도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면, 그를 두고, '한국 목사 부인들의 한 삶의 모습' 혹은 '말없이 조용히 목사의 일과 많은 목회 성역(聖役)을 뒤에서 돕고, 어렵게 가정생활을 꾸려나가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다 다시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삶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런지 의문스럽다. 안갑수가 이같이 연합활동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활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자 경남부인전도회는 전회장 안갑수의 장례를 적극 도왔고 주기철은 그 이듬해 2월에 그 후의에 감사하여 경남부인전도회에 엽서를 보내고 그의 아내 장례 때에 도와주심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3-3. 정덕생 목사 사건: 주기철 목사에 앞서 초량교회에서 거의 10여년간 시무했던 분은 정덕생 목사다.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8회)하고 그해 경상노회에서 목사안수받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주동교회로 부임하였다. 2년후 그는 장로회 총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생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교포 교회를 운영하는 등 선교활동도 하면서 학문에도 전념하였으나" 그 부인의 신병으로 귀국, 다시 초량교회를 섬겼다. 그가 시무하는 동안 초량교회는 30∼40명의 교인이 240∼250명으로 증가되어 초창기의 기초가 다져졌다. 삼일운동 이후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그 교회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 기관으로 1914년에 설립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등이 출석하였으며, 항일운동을 위해 초량교회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초량교회사는 백산상회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세운 무역상회이나 사실은 무역상으로 위장된 족립운동의 연락처였던 것이다. 안희제 선생이 부산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할 때 초량교회에서 간부들이 비밀 모임을 자주 가졌다.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중에는 초량교인들이 많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한 인물이 윤현진 집사이다. 호가 석산(石山)인 윤씨는 1892년양산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씨와 손잡고 처음에는 소비조합을 만들려고 12,000원의 자금을 모았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희제, 송문주 등과 함께 백상회를 설립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백산상회의 안희제가 초량교회와 이런 관계를 가졌다면 담임목사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덕생 목사가 1922년 예배당을 신축, 헌당식을 거행하는 그 해 2월경, "대정 8년(1919) 제령위반피고사건이라고 평북 중강진 경찰서에 압송되어 3천리이 먼길을 16유치장을 거쳐서 50일만에 무사히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1919년에 관련된 '피고사건'이라면, 초량교회사(105)에 "정목사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과 연대되어 이들을 측면지원한던 것이 발각되었던 것"으로 언급된 것처럼, 3 1운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사실은 그의 백산상회와의 관계 및 그 후의 그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주기철이 1925년 부임한 후에도 초량교회에는 정 목사 때의 그같은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윤현진은 1919년에 상해에 파송되어 그 뒤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주기철이 부임한 지 2년만인 1927년에 해산되었으며, 그 즈음해서 안희제도 만주로 망명한 듯 1931년 10월 3일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주기철이 부임한 후 김익두 목사(1927년과 30년)와 이명식 목사(1931년)를 부흥강사로 모신 것은 교회의 이런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기철이 6년 동안 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쓴 결과 초량교회는 400여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주기철이 마산교회로 부임한 후 1932∼33년에 경남노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초에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2회 총회에서 "졍덕생목사는 딴교파를 세우고 나아갓슴으로 본로회로서는 권증죠례 54조에 의하야 그 셩명을 로회명부에서 제명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이 보인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정덕생 목사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는 점이다. 자신에 앞서 초량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부산에 있는 동안 정목사에 대하여 소상하게 이해하였을 주기철로서는 노회장의 직분상 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 많은 인간적인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정덕생 목사 문제는 1933년 1월 3일 31회 경남노회가 부산진예배당에서 회장 주기철의 인도로 회집되었을 때 노회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정덕생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부산진 교회의 김덕경씨가 1931년 5월 16일에 '교인을 선동하여 불복도장을 받아' 별노회소집을 청원한 적이 있었고, "김덕경 씨가 노회장 주기철씨를 상대로 한 고소장"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1931년에 이미 벌어졌던 것이다. 노회는 김덕경 씨의 고소장이 합법이 아니므로 본인에게 반려하였지만, 정목사는 이 때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정도로 신앙생활에서 떠나 있었다. 노회가 특별위원을 파송, 정목사의 일을 심사토록 하고 그 다음 노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정덕생목사에게 대하여 주일 지킨 상태를 물어보니 거년 3월로 11월까지는 아들 병으로 인하여 간호하기 까닭에 주일 예배에 출석지 못한 것과 그 외에는 외처 여행중에 있엇다 함으로 또다시 목사의 성직을 가지고 광업을 함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하등 양심에 가책이 없다고 하였으며, 3. 목사 정덕생씨에 대하여 금일까지 지내오는 중 주일을 잘 아니지키는 것과 광업을 한다는 것으로 목사성직에 부당한 소문이 들릴 뿐더러 건덕에 방해스러운 일이 많이 있으니 그 사실에 진부를 회중에서 한번 청취하여보기로 가결하고 정덕생 목사로 회중에 설명케 하니 정덕생 목사는 형편에 의하여 주일을 지키지 못한일도 있고 광업도 경영하는 것이 사실이라 함으로 회중에서는 목사의 성직으로 이러한 건덕에 방해되는 일을 함이 불가하니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아니 하겠느냐고 하매 정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하고 이후로는 주의하겠다 함으로 노회에서는 2개월 기한을 정하고 광업 폐지할 것을 부산 시찰에 맡겨 돌아보고 권면하기로 회중에 가결하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부산진교회의 김덕경이 노회에 고소장을 제정(提呈)하는 등의 와중에서 정목사는 아들의 병과 외처(外處) 여행 등으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하지 않았고, 노회에서는 성수주일 문제와 목사로서 광업을 경영하는 문제로 그를 불러 권면하니, 건덕(建德)을 위해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기로 자복(自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덕생 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한 것과는 달리 금광사업을 정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하고 경남노회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1933년 7월 3일 마산문창예배당에서 모인 임시노회는 그를 노회명부에서 삭제하는 책벌을 단행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회장 주기철은 이를 그해 9월 총회에 보고하였다. 경남노회의 기록이다.
"7. 정덕생씨에 대하여는 거(去) 노회에서 2개월내로 금광사업을 정리하겠다 하였음으로 2개월 지난 후 본시찰회에서 2차나 불렀으되 한번도 오지 않았사오며 아직 금광도 정리하지 않았사오며 또한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하고 목사직을 행하며 세례를 주고 장로와 직원을 택하며 동예배당 건축비라 하고 노회반동분자가 있는 각 교회에 불온언사의 문구(경남로회의 무법과 폭정행위라는 문구)를 써서 각 교회에 선전한 일도 있었사오며 출교를 당하고 벌아래 있는 자들을 제직이라는 명칭을 주고 선전문에 기록하여 배부한 일도 있었사오며(선전문 첨부), 정덕생 목사는 부산시찰의 보고에 의하여 권징조례 54조대로 그 성명을 노회명부에서 삭제함이 좋은 줄 아오며."
총회에 보고한 내용과 노회의 결의사항을 앞뒤로 맞춰보면 정목사가 노회명부에서 삭제되는 책벌을 받게 된 것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총회록)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노회록)한 것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장로교회에서는 1918년에 이르러 소종파가 나타나고 있었다. 황해도 지방 김장호(金庄鎬)의 '조선기독교회'와 대구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였다. 이들은 반선교사 내지는 자치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 중심으로 가르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노선과 달랐고 선교사들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는 장로교회의 신앙노선과도 이념을 달리하려고 하였다. 이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점에서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도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교단의 지도부가 일차적으로 우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예수교회'라는 명칭일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은 바로 그 해(1933) 1월 3일 이용도(李龍道)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창립된 새 교단 '예수교회'의 이름을 연상케 한다.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와 이용도의 '예수교회'는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1930년에 들어서서 이용도는 경남지방에 부흥사경회 강사로 자주 내려왔다. 그러다가 이용도는 장로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기독신보에 의해 '이세벨의 무리'로 낙인찍혔다. 그 때문에 이용도가 창설한 '예수교회'라는 명칭이 장로교회에 주었던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여기서 정덕생의 책벌이 단순히 주일성수나 목사로서 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또 그가 과거 민족운동을 도았다던가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게는 신앙노선상의 갈등을 책벌문제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경남노회가 주기철 주도로 정덕생 목사의 새교단설립을 책벌한 처사는 당시까지의 장로회 신앙정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경남노회가 엄중한 책벌을 가하고 그것을 총회에까지 보고하였지만, 노회는 계속 그의 귀순을 권고하면서 정덕생과 접촉하여 1935년 6월 4일 부산 항서예배당에서 회집된 35회 경남노회에서는, 특별위원 3인을 택하여 정덕생 씨를 권면하여 본 노회에 돌아오게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특별위원들이 정덕생 씨를 권면한 결과 노회에 귀순할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고 노회 앞에서 말할 기회를 요청, 노회 앞에서 사과하니 회중은 이를 감사히 받고, 그의 귀순에 따른 후속조치를 임사부원과 특별위원 3인에 맡겨 의논,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임사부는, 정덕생씨가 내주일부터 노회 관내의 장로교회에 예배보려 오겠다는 것과 정덕생 씨의 장래문제는 부산시찰회에 맡겨서 다음 노회시에 보고케 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하였다.
1935년 12월 3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는, 부산시찰 보고에 의해, 정덕생 목사를 회원으로 받자는 안을 45대 27로 가결하는 한편 정덕생 목사에게 금후 일년간 당회장권을 맡기지 않고 전도사로 청하는 곳이 있으면 허락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약 4년간 끌었던 정덕생 목사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다. 주기철이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터진 문제가 그가 경남노회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해결되고 그 이듬해 그는 다소 홀가분한 심경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할 수 있었다. 주기철이 이런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이런 책벌이 단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기철은 다음에 볼 최태용 백남용의 문제에서와 같이 신앙적 보수성 내지는 정통성 고수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최태용 백남용 계열과 경남노회-정통신앙 보수의 문제
주기철이 경남노회장으로 재임하던 2년동안 그는 장로회총회에 두 차례에 걸쳐 경남노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 경남노회 회장 자격으로 노회 관내에서 문제되고 있는 '예수??육설'과 '이단'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로회 경내에는 백남용 시의 창도한 예수??육셜이 류행되야 거긔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잇셔 회가 다소 어지러운 ?d에 잇싸오며"
"본로회 경내에는 이단에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 잇서 루루히 로회로써 권유하엿스나 종시듯지 안코 졈졈 악화되여 나아감으로 치리를 바든 자들이 만사오며, 금년 칠월에 본로회 주최로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야 특별이 교리에 대한 문뎨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얏사오며"
위의 인용에서 말한 '예수순육설'이나 '이단'은 같은 내용으로서, 최태용(崔泰瑢)이나 백남용(白南鏞)과 장도원(張道源) 등이 경남지방에 와서 강설한 내용을 두고 지칭한 것이다.
경남노회록을 보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는 부흥 사경회가 자주 열렸다. 당시 전국적인 부흥사로 이름이 높은 강사들이 많이 내려왔다. 1931년에만 하더라도 이용도 목사가 사천읍교회, 통영읍교회, 거창지방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주기철은 자신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회심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부흥사경회 개최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김익두 목사가 당시 일부에서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량교회에 시무할 때에 그를 두번이나 강사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부흥사경회의 강사로서 봉사하였다.
경남노회가 백남용의 집회를 처음 거론한 것은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제 30회 노회를 개최했을 때다. 마지막날 임사부는 "부산시찰 구내에 백남용씨에 대한 문제 듣기로 회중이 가결하다. 백남용씨의 대한 문제는 해 시찰회와 관계된 당회에 맡겨 돌아보고 내회에 보고하기로 회중이 가결하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그 전해(1931)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김해 대지교회에서 부산시찰 구내의 전도사들이 '당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백남용을 강사로 하여 집회한 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고, 그 경위를 살펴보고 적당한 조치를 취한 후에 다음 노회에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경남노회의 전도사들이 최태용 계열의 백남용을 초빙하여 집회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기성교회가 영적인 피폐성을 드러내는 한 증거이면서 새로운 신앙사조에 갈급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1920년데부터 일본에 유학하면서 우찌무라(內村鑑三)로부터 성경과 민족의식을 배웠던 김교신과 최태용 등은 조선의 이같은 영적인 갈급을 채워주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김교신은 1927년 7월부터 《聖書朝鮮》을 간행하면서 <성서 위에 조선을>이라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으며, 최태용은 1925년 6월부터는 《天來之聲》을, 1929년 2월부터는 《靈과 眞理》를 간행하였다. 조선 교회의 기성 신앙에 일정하게 식상한 젊은 전도사들 중에는 이러한 잡지를 구독하는 이들이 있었다. 백남용을 초청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31년 9월에 그를 초청한 것으로 보아 이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경남노회 안에서 둥지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잡지가 구독되고 새로운 신앙사조가 소개되면서 교회에 따라서는 최태용과 연결된 이들에 대해 교권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는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 최태용은 《영과 진리》를 통해 '조선교회의 관용을 바란다'는 글을 띄웠다. 당시 최태용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성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현대 문법으로 풀어 쓴, 그 글의 일부다.
"조선교회에 관용을 바람
교회는 교리로써 통일될 것이 아니다. 종래 교회가 교리적 통일만을 주안으로 하였음으로 그것은 지리멸렬, 他를 이단으로 매도함을 능사로 한 것이다. 교리적 통일을 주안으로한 교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새 번역이 이염이명 일어나는 예언자정신이 현저히 쇄감되어 있다. 교리적 교회는 산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도 가지고자 한다. 조선교회에서 교리에 충성된 정통주의자를 향하야 나는 울고 싶으다. 정통주의자여, 너는 과연 기독교를 네 배속에 생수가 강과 같이 흐르는, 하나님 말씀의 샘이 네 영혼안에 터저 있는 산 종교로 가졌느냐고. 안의 깊음에 산 종교를 가짐이 없이, 네가 누구의 正한 교리를 지적으로 쥐고 있음으로 신자인체하나, 우리는 그것을 칭하야 종교상의 이지주의 intellectualism이라 하야 거기에는 종교가 십분지일도 잡혀 있지 아니한 줄로 안다.
교리적인 통일을 무시하면 이단사설이 백출하는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니냐고 혹은 말하리라. 그러나 이는 역시 교리적 관념에 잡힌 판단에서 나오는 기우이지, 사실은 그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교리를 떠나서 기독교 신자를 통일할 규정은 충분히 있다. 성신받은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거듭난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그리스도를 그 안에 살리고자 하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성령의 다스림이 행하는 곳에 아무 혼란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근자에 우리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를 어떤 노회는 그 이유로써 그 소속교회의 장로를 파면하며, 어느 지방에서는 저희가 저희의 말하는 교리에 복종치 아니함을 책잡고자 소동을 일으키며, 또 어떤 지방에서는 신자가 오인의 잡지를 구독함을 금하랴 하니, 이 어찌 가당한 일인가. 나는 그 교권자들이 어떤 정도로 칼비니즘, 웨슬레정신에 철저하여 있는지를 모르거니와, 짐작건대 그것은 전통주의적정통주의가 아닌가 한다. 저희는 칼빈적, 웨슬레적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신경문자의 표면을 할터 모은 지식을 가지고 산 신앙을 비판하는 자들이 아닐가 한다. 나는 나의 우인들이 나의 보는 바로써하면 저의는 그 기도가 성하며, 그 언설이 열렬하며, 보담 더 생명이 약동중에 있음으로써 진부한 교권자들과 낡은 신자들과 구별되어 저희 두 사이에는 싸움이 일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지금 기성교회의 파괴를 일하(삼?)지 아니하며, 신교파를 창시코자 아니한다. 우리의 우인들로 장로는 그 교회의 충실한 장로이고자 하며 전도사는 그 집회에 생명의 말씀을 주기를 힘쓰며 평신도는 그 회당을 기도의 집으로 쓰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신앙을 생명이라고 깨닫고 그리스도와 보담 더 생명적인 관계에 들어가랴고 힘쓰며, 들어가는 확신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은 신앙의 부흥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산 신앙을 자기로써 예증하여 교회에 종사하려는 자들이다. 교회가 만일 우리를 용납하면 우리는 교회에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왕성케 할지언정 교회를 못되게 하지 아니할 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으로써 신앙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더 긴밀한 것, 더 생명적인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 인격을 그 진리의 높음대로, 깊음대로 개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바가 신앙을 더 참되게 하며, 그것을 더 생명적으로 하여 신자로 더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하지 아니 하거든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를 정죄하라. 우리가 상이한 형식을 가진 자들일지라도 같은 주안에 있는 형제애를 感하야 서로 손을 이끌고 하나님나라의 싸움을 싸울 것이 아닌가. 나는 조선교회가 성령 이외의 다른 아무 것에도 잡히지 아닌(니한?)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를 용납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위의 글이 발표된 것이 1932년 7월 말이고, 경남노회가 모여 본격적으로 백남용의 집회를 거론한 것이 그 이듬해 1월이다. 이 글에 의하면, 경남노회 회집에 앞서 이미 기성교회에서는 최태용 계열의 집회에 참석한 신자들이나《영과 진리》독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래서 최태용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를 알게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오, 성경연구가 아니오, 환란이다. 우리는 성령의 책망을 받아 죄의 고통을 가져서만 기독교를 안다.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세상고생을 하여서만 기독교를 안다. 집회 기타 방법으로 일시의 흥분을 얻음도 그때 그때의 가치가 있다. 마는 거기에 아직 너의 확실한 기독교파악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환란중에 있는 자, 저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하고 더한다."고 하면서 환란과 핍박이 그리스도 진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준다고 격려하였다.
이듬해(1933) 1월 3일 부산진예배당에서 31회 경남노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주기철이 노회장이었다. 그 전 해에 부산시찰회에 맡긴 백남용의 집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시찰부장 박문찬의 보고가 있었고 그 보고는 어쩔수 없이 경남노회로 하여금 결단하도록 몰아갔다. 이러한 사건이 주기철의 노회장 때에 이뤄짐으로 그는 이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장황하지만 보고서 전문을 현대 맞춤법에 따라 옮겨 본다. 부산시찰회 나름대로의 노력이 돋보인다.
"1932년 1월 노회에서 비 시찰구내에 발생한 신교리에 대하여 위임한 사항을 좌기와 같이 보고하오니 조량하심을 경요하나이다.
최초발단: 상회의 허락없는 전도사회가 주최하여 김해대지교회에서 당회장의 승락도 없이 전라도 백남용씨를 청하여 일주일간 집회함으로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전도사중 일인인 김형윤씨는 그 당회로부터 책벌을 받고도 여전히 시무함으로 비회에서 위원을 파송하여 권면함으로 전도사의 시무는 정지되었고 그 후에 비회에서는 전도사들을 선도키 위하여 평양신하교 교수 박형롱씨를 청하여 7월 1일부터 5일간 동래읍예배당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광고를 하였던 바 미리 몇 전도사의 주최로 당회장의 허락없이 울산읍교회에서 일본있는 장도원씨를 청하여 몇날동안 집회를 하였으며 그 후로 들리는 바 제반풍설이 자자하나 이미 광고한대로 동래읍교회에서 5일간 교역자수양회를 개하였더니 저 전도사들과 또한 동감된 교인 몇사람들은 끝까지 참석하였으나 별로히 은혜를 받지 못함인지 여전히 자미없는 소식이 들림으로 할 수 없이 비회에서는 매견시, 예원배, 박문찬, 조승제 4씨를 파송하여 울산읍교회와 량산읍교회를 방문케 한 후 그들의 보고를 듣건대 여좌함.
울산읍 교회에서 장로 안영두 집사 오의상 양씨를 만나 문답한즉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예수를 자유로 믿을 것이오 율법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하고 다음으로 양산읍교회는 풍편으로 많은 이상한 말들이 들였으나 직접 가서 보는 바로는 평온한 상태에 있는 모양이라고 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여러가지로 들리는 말이 있음으로 1932년 10월 18일에 비회에서 전도사 중 문제인 대표로 5인을 지명 소환하여 별지와 같이 일일히 문답한 후에 종차로 특별히 주의하여 상회를 복종함에 아무 문제가 들리지 않도록 힘쓰라고 권면한 후 돌려보내였던 바 그 후 얼마 아니하여 양산읍교회에서 최태용씨를 환영하여 문제중에 있는 전도사 몇사람들이 당회장도 모르게 몇날동안 회합한 일이 있은 바 모든 사실에 대략 보고하나이다.
전도사들에 대한 문답의 대요:
1. 금석호씨에 대하여, 김해 대지교회에서 거년 음 정월 시찰사경회시에 김형윤씨는 책벌하여(에?) 있음과 해교회 당회장 안다손 목사가 직접 가서 조사가 치리아래 있음으로 시무할 수 없다는 것을 직원들에게 알게 한 뒤에도 성경을 교수케 한 것이 잘못이 아니냐 물은즉 그의 답은 현재 조사로 시무하니 그를 시키지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인 고로 한시간 맡겨 교수케 하였다는 것과 또한 김형윤씨 치리에 대하여는 잘 잘못을 말할 수 없다고 하다.
1. 배철수씨에 대하여, ① 교리관에 관하여 물으매, 예수는 영과육이 불이(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예수이시나 신자(神子)의 인식이 12세 전에는 없었다고 하다. ② 장도원 백남용 양씨를 청할 때에 당회장의 허락도 없이 청한 것은 어떠한 이유이냐 하매 그것은 당회원의 허락과 교인들의 청에 의하여 한 일인데 하여간 법적으로 보아서는 잘못됨인즉 앞으로 주의하겠다 하다.
1. 홍성만씨에 대하여, 김형윤씨를 청하여 사경을 시킨 것은 불법한 일이 아니냐 하매 그것은 교인들의 선청(先請?)에 의하여 거절할 수 없는 사정인 고로 그리한 것인데 법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니 앞으로 주의하겠다 하다.
1. 손량원씨에 대하여, 손씨에 관하여는 제반 풍설이 많이 있었음으로 그대로 물어본즉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었다.
1. 오성문씨에 대하여, 김형윤씨를 청하여 강도시킨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하매 그의 답은 김형윤씨가 은혜받은 사람인고로 다만 은혜를 생각함이요 또한 안란애목사의 치리에 불복하고 있음으로 벌아래 있는 자가 아닌 줄 알고 청하여 강도시킨 것이나 지금에 생각한 즉 범법한 일인 줄 알고 이후에는 주의하겠다 하다.
1. 김형윤씨에 대하여, 1932년 12월 27일에 비회에서 김형윤씨를 불러서 책벌받은 것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여부를 물은 즉 자기를 이단자란 조문을 취소하면 순종하겠다 하다.
이상 보고를 채용하고 사건만 임사부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위에 인용한 내용은 1931년 9월 12일에서 19일까지 김해 대지(大池)교회에서 열린 백남용의 집회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노회보고를 위해 부산시찰회에서 정리한 것이다. 정리 내용은 문제의 핵심인 백남용의 강론 내용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 않고, 그보다는 당회장의 허락도 없이 백씨를 청하였다는 것과 책벌 중에 있는 김형윤 전도사를 초청, 강도(講道)시킨 점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위의 보고는 당시 야기되었던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즉 백남용의 집회 후에 부산시찰회에서는 "전도사들을 선도키 위하여" 그 이듬해(1932) 7월 1일부터 5일간 박형룡 교수를 청하여 동래읍예배당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키로 하였다는 것, 이 사실을 알고 그 전도사들은 일본에 있는 장도원씨를 청하였다는 것, 양산읍교회에서는 최태용씨를 환영하였다는 것, 그리고 강론한 내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뒷날 <복음교회> 운동의 중심인물 세사람이 등장하며, 이들의 신학 신앙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부산시찰회는 박형룡 교수를 초빙하여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였다는 것,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는 전도사와 장로를 만나 면담한 내용과 그들의 이름도 일부 거명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러면 이 사건의 핵심이라 할 김해집회는 어땠는가. 이 집회에 참석한 배철수가 《영과 진리》의 주간인 최태용에게 보낸 편지에 집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됨으로 전문 게재한다. (편지는 한자를 많이 사용했지만, 한글로 옮겨도 뜻을 알 수 있는 한자는 대부분 고쳤다.)
"김해 집회 기사 裵哲秀
우리는 9월 12일 오전 8시 50분에 경부선 구포역에서 기다리던 白선생님을 맞어 感깊은 악수를 交하였음니다. 거긔에서 도보로 집회장소인 大池교회(김해)고 갓슴니다.
12일 오후 8시에 경남부산구역 전도사 중심의 집회가 우리 백선생님의 인도하에 열니게 되였음니다. 집회의 첫 선언으로 「신앙의 고집을 깨트리라」는 설교는 가장 날카로운 주장이여서 그의 한말 한말은 寸鐵과 같이 모든 심령의 奧底를 관철하엿음니다. 첫시간브터 성령의 역사는 강하엿음니다. 백선생의 설교는 적극적 주장을 위한 소극적 주장으로써 시작되야 진행하는 중, 일반은 驚異疑問의 상태로 되여 장내의 기분은 자못 긴장하엿음니다. 성령의 역사는 집회의 도를 따라 강하여가고 진리주장은 깊은 내용에 드러가게 되자 청중은 진리의 밝힘을 받아 아- 과연 철저하다는 소래가 장내에 가득하게 되며 時時로 놀나며 말끝마다 아멘 아멘을 브르게 되엿음니다. 이 폭발력의 복음에 정복을 당한 일반은 서로 서로 고백하되 이제야 참 신앙을 알게 되엿다하며 그중 엇던 전도사 형님은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주께서 나를 이 집회에 참석케 하기 위하야 과거이 불으섯다」 하며, 또 다른 형제는 「과거에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께서 이제 나를 肉에서 구속하엿다」말하야 깃븜을 금치 못함니다. 어느 전도사는 말하되「과거에 나의 전도는 사람으로 하여곰 순수한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하고 도로혀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게 하엿다」고 참회하며, 모 신학교 재학중인 형제는 말하기를 「백선생의 진리주장은 다른 아무대에서도 듯지 못한 새 說이올시다. 금후브터 신학교 칠판밑에 앉어 견대기가 괴롭겟다」고 하엿음니다. 이같이 은혜를 味解한 여러 형제들의 진정한 간증을 들은 生은 백선생을 향하야 「선생님은 이십세기에 반다시 잇어야 할 靈의 과학자라」고 불넛음니다. 아- 망한 조선아 네가 복이 잇도다 하는 感이 솟아올나 깃븜과 감사의 눈물뿐이엇음니다. 이려한 상태중에 집회는 성령의 다사림을 받아 시종이 여일하엿고 백선생님의 웨치신 진리는 질서정연한 대체계를 일운 것이엿음니다.
9월 19일 오전에 집회를 ?이게 되여 동일 오전 11시 구포발 차에 사랑한 백선생님을 석별하엿음니다. 우리의게 희비의 정이 깊엇고 주의 허락중에서 속히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엿음니다.
아-찬송하나이다. 조선의 구원을 위하야 팔을 펴신 아바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돌니나이다. 이것이 지극히 높은 곧에서는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감이 되고 땅에서는 이 깃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게 위로와 깃븜의 충만함이 되기를.
특히 이 일을 위하야 먼곧에서 기도하시는 최선생님과 이 깃븐 소식을 듣고저 기다리시는 여러 형님들을 위하야 이 拙筆의 기록을 드림니다.
(집회중 전문과 서신으로써 장려하여 주신 여러 형님들께 이에 감사를 표함니다.)"
김해 집회의 참석자의 한 사람인 배철수로부터 김해 집회에 관한 편지를 받자 최태용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김해 집회의 강사 백남용이야말로 '우리의 전도자'로서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이라고 증거하였다. 《영과 진리》를 통해 최태용은 백남용의 집회일정을 보도하고 있는데, 경남 김해군 진영면 신용리교회에서 마산구역 교역자 중심의 집회를 인도하고 11월에는 함남 문천 집회를 인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최태용 계는 그 자신과 백남용, 장도원 등을 통해, 그들의 약속과는 달리, 주로 기성교회를 파고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태용계의 주장이 어떠했기에 경남에서 추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논의의 초점상, 최태용계의 주장이 어떠한가보다는 당시 추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두겠다.
경남노회에서는 처음에 이를 '신교리'라고 언급하였다. 울산읍교회의 안영두 오의상 집사는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예수를 자유로 믿을 것이오 율법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로 이해하였다. 최태용계와 가장 깊이 사귀고 있던 배철수는 교리관에 대한 질문에 "예수는 영과 육이 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예수이시나 神子의 인식이 12세전에는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1931년 11월 22일 문천교회 사경회에서 북선영계의 웅자 전계은 목사와 백남용 사에에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변론이 벌어졌는데, "이는 백선생의 사람의 난대로의 전존재가 육이라는 말에 대한 전목사의 의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의 난대로의 전존재가 육'이라는 데서 '純肉說'이라고 명명된 것 같다.
배철수는 1931년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계속된 백남용의 김해 집회에 참석한 사람으로 앞의 부산시찰회의 보고서 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김해 집회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쓰기 전에 《영과 진리》의 주간 최태용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어 나름대로 깨달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의 편지는 당시 최태용 백남용 장도원 등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전문을 소개한다.
"배철수씨의 편지
경애하는 선생님, 그리스도안에서 영의 생활이 부요하시기를 비나이다. 너무 늦게야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복음을 통하여 살림을 받은 소생은 장구한 시일에 오직 복음의 소화를 위하여 잠잠하였나이다. 소생은 <天來之聲>(직접 독자는 아니었지만 간접으로 읽었음)으로부터 <영과 진리>까지 빠짐업시 받아 읽어 그 말씀들의 일점일획은 저의 살과 피로 化現되었나이다. 그 말씀의 폭발력이 저의 전존재를 삼켜 靈化하였나이다. 이제 저에게는 영 이외의 그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육과 세상을 부정하고 영으로 살 생명이 되었나이다. 영을 味解한 생명은 육에서는 살 수 없게 되었나이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나 크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다. 선생님의 주장하신 영적 기독교는 全然한 <새복음>임을 확신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선생님의 독립복음임도 확신합니다. 영, 진리, 생명이란 말씀들은 종래의 기독교가 경험치 못한 것을 내용으로 하여 독창적 술어로소이다. 전인미답의 영계의 처녀지를 개척하였음이 확실합니다. 선생님의 영적 복음은 그 가치비판에 있어서 독립성을 가졌나이다. 그것이 또한 동양인이 그리스도를 味解한 첫 소리로소이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소화할 첫 소리로소이다. 하나님이 동양인을 통하여 영의 지성소를 엶이여! 그 진리가 오묘하도소이다. 아, 그 누구가 이 복음의 독립성을 捉心하는가? 우리는 엄숙한 진리비판에 있어서 종래의 기독교에서 이같이 철저한 진리주장을 듯지 못한 것을 확인합니다. 신앙은 육의 靈化라고 충분 해명히 주장한 자가 과거의 기독교 역사에 있었는가? 신앙이 교회도 아니오 성경도 아니오 聖도 아니오 愛도 아니오 전도도 아니오 오직 영이라고 명백히 가리킨 사도가 누가 있었는가. 진리주장에 있어서 영을 가장 과학적으로 취급한 자가 현대신학자중에 있는가. 아- 진실로 현대를 含(?)消할 영적복음이로다. 현대교회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로다. 아-, 현대의 종교는 形의 종교요 영의 종교가 아니며, 우상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가 아니외다. 소생은 실로 선생님의 위치는 영적 복음에 접촉하여 혁명을 받은 신앙이 되었고 그 진리의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인간적 종교관념을 깨쳐버리고, 현대를 정복할 생명의 종교를 가졌나이다. 소생은 과거 전통적 종교관념 속에 무서운 고뇌를 맛본 자올시다. 스사로 성자가 되고자"
위에 언급한 것은 최태용게의 주장에 대한 당시 신자들의 반응이다. 배철수가 언급한 것처럼, 종래 기독교에서 이같이 철저하게 진리주장을 한 적이 없을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전통을 묵수하던 조선교계에 충격을 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육으로 이해하고 십계명이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 예수를 자유로 믿는다는 것 등 받아들이는 측의 반응은 혼란스러운 일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대답은 당시 두번이나 경남에 내려와 '이단'에 대한 반격을 가했을 박형룡의 표현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들의 주장을 게노시스기독론 혹은 신비적 속죄론으로 풀이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3년 1월 3일부터 회집된 제31회 경남노회는 부산시찰회에서 올린 보고를 중심으로 그 동안 드러나지 않게 해결점을 찾아 보려고 노력하였다. 최태용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주기철의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최태용계추종세력을 '무교회주의' 혹은 '순육설'로 인식하고 권면은 하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1월 7일 폐회하기 직전에 주기철이 주재하는 노회는 임사부의 보고에 따라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교회법을 따라 치리하되 시간을 두고 지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김형윤씨의 애원서는 해 당회장에게 맡겨 처리케 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안영두씨는 김만일 목사와 해 당회에 맡겨 신중히 돌아보고 치리케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금석호 씨는 김해 대지교회 사경회 때에 벌아래 있는 사람으로 성경을 교수케 한 것과 부산시찰회에서 문제있는 사람은 주의하라고 권면한 것도 불고하고 최태용씨에게 강대를 허락함에 대하여 무교회주의에 의심이 있음으로 전도사직을 1년간 쉬게 하는 것이 ??은 줄 아오며, 배철수 씨는 주일지키는 것을 경히 여김과 무교회주의의 의심이 있음으로 1년간 전도사직을 쉬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부산시찰회에서 우봉석씨는 강도사로 청원한 것은 허락지 아니함이 좋을 뿐아니라 해 당회에 맡겨 치리케 함이 좋은 줄 아오며, 부산시찰회에서 오성문씨를 구포교회의 전도사로 청한 것은 허락지 아니함이 좋을 줄 아오며, 임사부보고에 의하여 각 교회내의 무교회주의나 기타 교리에 위반되는 일들이 있을 때에는 그 지방 시찰과 당회는 특별히 잘 돌아보아 처리하도록 회중이 가결하다."
1933년 1월의 경남노회의 이같은 결의는 곧 최태용에게도 알려진 모양이다. 그는 "교회는 우리를 이단이라 하며 무교회주의자라고 한다"고 항변하면서 무교회주의자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며 교회가 부르는 이름이며 자기들은 교회에 적을 두지 않고 "복음이 없는 교회시대에 있어서 교회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한다고 하였다. 최태용은 경남노회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한편 노회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신교에서 법왕지위를 얻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경남 지방 교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 추종세력에 대해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남지방의 몇교회는 노회에 대항하야 노회의 명령을 들지않고 있는 현상이 출현되고, 그 원인은 崔泰瑢을 강단에 세우며, 그 집회에 참석한 전도사들을 노회가 치리하였음에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 사건을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대체 조선장로교회의 노회란 것은 그 至上權을 주장하고, 시비막론하고 노회에의 복종을 교회에 요구하고 있어 그것을 맡이(마치) 신교에 있어서의 법황지위를 얻고저하는 모양이다. 저희에게 取하야 사람이 진리에 就하는가 안는가는 문제가 아니고 누가 노회에 복종하는가 안는가가 문제이다. 「노회를 무시한다」는 말이 저희의 판단의 표준어이다. 제군은 생각하여보라. 노회가 신성한 권위의 대표가 되어서 가한가. 푸로테스탄트교회에는 하나님 말슴의 권위 이외에 다른 권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이고, 노회도 이 말씀으로 새 심판을 받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노회란 것이 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받지 아니하고, 우매하게 기뻐하기도 쉽고, 노하기도 쉬운 감정의 소유인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권위를 주장하고, 「노회를 무시」한다고 하여 그 관하의 교직을 함부로 처벌하니, 일이 이렇게 되어 가한가. 만일 전도사들이 신앙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그릇됨이 있거든 어찌하여 진리로 悔諭하지 아니하고, 이를 휴직 면직을 식힘으로써 능사를 삼는가. 吾輩가 경남형제들과 관계됨이 있다면 이는 오직 신앙의 일, 영의 일에 한하여서 관계됨이 있을 따름이다. 吾輩는 노회를 대항하여 서라고는 일언도 말한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도리어 거기에 복종할 것을 말하였음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남에 있어서 수교회가 노회와 대항, 분립이 되어 있다면 이는 경남노회의 無理解가 일을 그렇게 한 것이다. 일전에 나는 울산교회에서 사오회의 강연을 하고 왔거니와 나는 신앙 이외의 일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이 나와 상관이 있다면, 이는 서로 주안에, 한 믿음에 있는 사랑으로 그러한 것뿐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나는 경남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이 더 믿음에 나아가며, 진리에 자라기를 기도한다."
경남노회가 논의를 시작함으로 이 사건은 긴장감을 갖게 되었고 아량이나 무조건적인 복종이 없이는 원만하게 끝나기가 힘들게 되었다. 경남노회는 약 6개월간 해당 시찰회를 통해 관련된 전도사들과 교회를 설득하였다. 노회에서 결정한 대로 전도사들에 대한 치리를 시행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그러나 해당 교회들은 노회의 치리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서의 정덕생 목사의 문제와 중첩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므로, 노회차원에서 더 이상 묻어둘 수가 없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설득과 함께 신학적인 판단이 중요하였다. 주기철은 부산시찰을 중심한 경남일대에 확산되었던 '이단' 문제를 보면서,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바탕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경남노회장과 마산시찰장을 겸임하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6월 26일부터 1주간 마산서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고 강사로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초빙하였다. 경남노회가 몇년간 '이단' 문제로 갈등을 빚어 왔기 때문에 박형룡 교수를 통해서는 '특별교리 문제'에 관한 강좌도 들었다. '특별교리 문제'는 바로 경남노회가 겪고 있는 '이단' 문제였을 것이다. '이단' 문제의 심각성 때문이었든지, 2년전(1931) 7월 1일부터 5일간 동래읍교회에서 행한 박 교수의 별로 '재미없는' 수양회 강의와는 달리, 이번에는 타 구역 교역자도 다수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을 정도였다.
박 교수와의 만남은 그 뒤 주기철의 행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특히 마산 집회에서 만난 것은 아마도 그 1주일 뒤에 모였던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소위 <부산시찰 각교회의 문제>를 결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주기철이 박 교수 인도의 교역자수련회를 임시노회와 타이밍을 맞춘 것도 바로 당시 현안해결에 초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 해(1933년 9월) 장로회 총회에서 "금년 칠월에 본로회 주최로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야 특별이 교리에 대한 문뎨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은 이 수양회를 그만큼 중요시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수양회에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7월의 임시노회에서 최태용계 추종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최태용에 대응하는 데에서 합력한 그들은 주기철이 산정현교회로 옮기는 데까지 이어지지만, 신사참배라고 하는 큰 대적앞에서는 삶의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박형룡이 신학자요 지성이 앞섰기 때문에 그 시련에 대해 정면으로 서지 못하고 회피하는 길을 걸었다면, 주기철은 신앙인이요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큰 대적 앞에 감연히 대결, 승리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1933년 7월 3일 주기철은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마산문창예배당에 임시노회를 소집하였다. 소집통지서에 명시한 '조건'은 목사청빙건이 몇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시찰에 관한 것'이었다. 즉 지난 번 노회에서 시무를 정지시킨 바 있는 최태용추종 전도사들의 문제와, 정덕생 목사의 문제였다. 노회는 신학준사 김태업 이정심 두 사람의 강도사 인허식을 거행하고 총회총대를 보궐선정한 후 곧 바로 부장 매견시에 의한 부산시찰보고를 듣게 되었다. 보고의 요지는 이랬다.
1. 울산읍교회에 관한 사건: 당회장과 방조위원 등이 2월 25일 교회에 가서 노회의 의결사항을 집행하려 했으나 일체 협조하지 않았고, 치리명령을 받은 안영두씨가 사회하고 벌아래 있는 김형윤씨가 마 8:9에 <그리스도의 신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제목으로 강도하였는데 노회와 시찰회를 모욕하는 언사가 많았사오며 본 시찰회장이 대표로 광고하려 할 즈음에 찬송하고 폐회선언을 해 버렸다.
2 양산읍 교회에 관한 사건: 양산읍 교회는 전임 당회장 등이 갔으되 당회와 제직회를 모혀주지 않았고 강도권도 주지 않을 뿐아니라 광고하려 할 때에 집사가 와서 밖으로 끌어내려고 한 일도 있었고, 3월 22일에는 당회장의 허락도 없이 문제중에 있는 전도사와 기타 수십명이 3일간 회집하여 불온한 문제를 토의한 일이 있고, 5월 7일 본시찰회에서 대표 4인을 파송하였지만 금석호 장로는 노회와 시찰회에서 파송한 사람을 받을 수 없고 강도권도 줄 수 없다고 했다.
3. 대지교회에 관한 사건: 당회장이 수차 가서 우봉석 씨와 제직원들에게 노회를 순종하라고 권면하였으나 우봉석씨는 여전히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지난 노회에 치리하라는 명령에 따라 우봉석씨의 본교회인 보은교회 당회에 책망한 일도 있으나 여전히 불법시무하고 있다.
4. 지난 노회에 1년간 정직당한 전도사 중 배철수씨는 여전히 불법 시무하고 있다.
5. 홍승만 씨는 당회장의 허락과 시찰회의 허락도 없이 불법시무를 하고 있다.
6. 양산읍 교회 김덕봉씨는 당회장과 시찰회의 허락도 없이 자기교회 직원들에게 청원을 받았다 하고 불법으로 전도사로서 시무하면서 자기 교회와 타교회 연합 예배를 인도하러 다니며 또 치리받은 전도사들과 그 동지자들이 암암리에 활동함으로 그 인근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노회는 이런 보고를 받아 사건을 임사부로 이첩하였다. 이 때쯤해서 지금까지 이름이 붙지 않았던 이 사건은 <부산지방 각 교회의 문제>로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노회는 정덕생 목사 성명을 노회명부에서 삭제함과 동시에 다음의 임사부 보고를 채택함으로 교회법의 단호함을 보였다. 역시 주기철이 노회장으로서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1. 김형윤 씨는 치리하에 있는 자로 치리를 불구하고 강도하며 이단을 선전함으로 노회는 해 당회장에게 명하여 출교하심이 좋은 줄로 아오며,
2. 배철수 홍성만 우봉석 3씨는 상회의 명령을 불복하고 여전히 이단을 선전하오니 전도사직을 면직시키고 해 당회에 명하여 무기 책벌케 하심이 좋은 줄로 아오며,
3. 금석호 안영두 양씨는 장로로 장립할 때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맹서한 자로 상회의 명령을 불복하고 여전히 행동함으로 해 당회장에게 명하여 면직시키고 무기책벌케 하심이 좋은 줄 아오며,
4. 양산읍교회 김덕봉씨는 노회의 승인도 없이 자칭 전도사라 하고 당회장과 시찰원을 무시하고 이단을 각처에 선전하오니 해 당회장에게 명하여 무기 책벌케 하심이 좋은 줄 아오며,
5. 양산읍, 대지는 전 당회장으로 여전히 시무케 하고 울산읍 당회장은 한익동목사로 정하여 주심이 좋은 줄 아오며,
6. 전권위원 8인을 택하여 각 해 당회장과 협의하고 문제의 교회를 정리하되 이단을 회개치 않는 자가 발생할 시는 전 노회의 결의대로 치리케 할 것.
7. 전권위원은 매견시 김만일 주기철 박문찬 조승제 예원배 이약신 양성봉 제씨로 정하심이 좋을줄 아오며,
8. 대지, 양산, 울산 교회 교역자를 치리한 후에 미순회교역자로 하여금 그 곳에 주재하며 교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경남노회가 최태용계 추종전도사들과 장로들을 치리한 '죄목'은 '이단'과 '상회명령 불복'이었다. 노회는 이들에게 "여전히 이단을 선전"한다고 규정했는데, 여기에는 용기 못지않게 신학적인 입장의 정립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 이 점에서 경남노회 소속 선교사(왕길지 등)들의 학문 못지 않게 노회장 주기철이나 윤인구 등의 신학적인 수준이 도움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사건에 관련된 전도사들과 장로들을 '이단'과 '상회명령 불복'이라는 '죄목'으로 심의한 결과, 김형윤에게는 출교가, 배철수 홍성만 우봉석에게는 전도사직 면직에 무기책벌이, 금석호 안영두에게는 면직에 무기책벌이, 김덕봉에게는 무기책벌이 각각 주어지도록 해당 당회에 명했다. 주기철은 그해 9월에 회집된 총회 앞에서 정덕생 목사건과 함께 "본로회 경내에는 이단에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 잇서 루루히 로회로써 권유하엿스나 종시 듯지 안코 졈졈 악화되여 나아감으로 치리를 바든 자들이 만사오며"라고 이 사실도 보고하였다. 노회장 주기철이 이 사건 처리에 주도적으로 활약하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 사건처리의 최종 책임을 직책상 그가 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는 선지 사도에 의해 계승된 정통 신앙을 파수하고 교회의 치리권을 확립하는 데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경남노회가 최태용계 추종세력에 대해 '예수순육설' 혹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 문제를 노회적인 차원에서 치리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첫째, 아마도 경남노회의 이같은 태도가 그해 9월에 개최된 장로회 22회 총회로 하여금 "각 로회지경내 이단으로 간쥬할 수 잇는 단톄(리룡도, 백남쥬, 한준명, 리호빈, 황국쥬)에 미혹하지 말나고 본 총회로셔 각 로회에 통?t을 발하야 쥬의식히기로 가결하다."는 결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당시 총회의 차원에서도 최태용계 추종세력을 아직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남노회가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 주기철이 노회장으로 있었다.
<부산지방 각교회 문제>는, 경남노회록에 의하면, 더 계속되었지만 여기서 그 진행과정을 더 기술하지 않으려 한다. 논의의 초점인 주기철이 경남노회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1934년 1월 16일의 32회 노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경남노회의 이같은 결단으로 그 후 '문제'는 훨씬 소강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권위원들의 활동은 전보다 활발해졌으며 노회가 명령한 대로 치리가 시행되도록 당회장의 협조가 있었다. 더 주목되는 것은 최태용의 비판이나 반발의 강도가 훨씬 약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남은 말
주기철의 생애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그의 순교다. 이 글은 원래 그가 어떻게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는가를 그의 신앙이라는 관점을 통해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주기철에게 하필 신앙이냐고 물을 수 있다. 필자는 주기철을 기본적으로 신앙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고 용솟음치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신앙대상에 혼란을 주는 행위에 대하여는 그것이 정치든 이념이든 대결한다. 그가 1934년의 한국 신학계의 논쟁에 뛰어든 것 같지 않은 것은 그가 신학자가 아니요 기본적으로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뜨거운 신앙인의 가슴을 냉정한 이지로서 얼마나 식힐 수 있었느냐 하는 점과 상통하다고 할 것이다. 뜨거운 가슴에 찬 머리, 그것이 주기철의 신앙을 묘사하는 표현의 하나다.
그의 신앙을 말하자면 그의 설교집을 분석하여 신앙의 핵심을 유형화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에 세운 목표는 순교에 이르게 한 바로 주기철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앙과 민족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뒤로 미룰 수 밖에 없다. 다만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두가지 그의 신앙인으로서 그의 말년의 민족의식과의 관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창씨개명의 문제다. 여러 연구에서 대체로 그가 창씨개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신사참배반대투쟁의 성격에서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전거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의 견해는 <아니다>이다.
둘째, 그가 동방요배를 했는가의 문제다. 그의 아들들은 동방요배거부 때문에 학교를 쫓겨 났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의 가정교육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랬다면 주기철이 동방요배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까.
셋째 그의 신사참배반대투쟁에는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만이 부여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필자는 신사참배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강요되었고 또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인사들이 대체로 민족의식적인 인사들이거나, 교육 등에서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점에 유의, 민족의식과의 관련을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그의 신사참배반대가 결코 민족운동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투쟁에서 민족의식적인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신사참배반대자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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