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회개대상 1호입니다.
2007. 5. 3. 19:43ㆍ목양자료/2.설교자료
교만은 회개대상 1호입니다.
눅 18 : 9 - 14
현대인들은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며, 죄를 극복하려고 눈물 흘리며 노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도, 죄를 이기는 환희도 경험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죄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종되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그 말 대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정서 장애", 습관적인 집착증"등의 심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해가며 "죄"라는 말로부터 도피하려합니다.
죄에 대한 해결은 죄를 죄로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 독약이 든 병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병에 '독약'이라고 써 붙여 보관하면 기분이 좋지 않아 '설탕'이라고 써 붙여 보관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도움이 아니라,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독약은 "독약"이라고 써 놓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 아래 '해골' 그림을 그리고 위험이라고 표시해 놓아야 합니다.
이처럼 독약은 독약이라고 해야하고,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샘솟는 교회에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원하신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일곱 가지 중요한 죄악'의 리스트는 기독교 역사에서 4세기 무렵에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가 처음으로 썼습니다.
이 일곱 가지 죄악은, 첫째, 교만입니다.
둘째, 질투입니다.
셋째, 분노입니다.
넷째, 탐심이고,
다섯째, 탐식입니다.
여섯째 죄악은 게으름,
일곱째는 정욕입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죄악인 교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교만은 질투를 낳고,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탐심 등, 모든 죄악을 낳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고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8장 9 - 14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비유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교만의 죄를 폭로합니다.
첫째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에게 교훈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멸시합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긴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존감은 정신 건강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존심(pride)은 그런 의미에서 병적인 자만(arrogance)과 구별해야 합니다.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음모와 술수를 쓴다면 그것은 이미 자존감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입니다.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화시킬 때, 혹은 자기 주장을 절대화시키기 시작할 때에 교만이라는 질병이 찾아옵니다.
교만은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된 죄악입니다.
두 번째로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담을 쌓는 죄악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성경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자리는 세리와 구별된 자리였습니다.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세리와는 같이 기도하기도 싫어서 아예 자리를 따로 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흑인과 백인이, 양반과 상놈이 같이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해서, 예배 장소를 따로 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바리새인의 기도는 두 번씩 반복되는 "같지 아니하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로마에 아부하는 사람,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세리를 멸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우월감이 바로 교만을 보시고 예수님은 훈계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려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바리새인의 이 기도에서 강조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나"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는 구절마다 "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일까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하나님 앞에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세요" 이처럼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의 중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다만 자기 위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결혼할 때, 남편 될 사람과 잠자기 전에 항상 기도하고 자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결혼 후 비교적 그 약속을 성실하게 잘 지켰고, 남편도 아내를 따라 늘 자기 전에 함께 기도하고 잡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이 술에 취하여 돌아와 그냥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그날도 아내는 남편에게 기도하자고 그러자 "오늘은 당신 혼자 기도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당신, 약속했잖아요? 같이 기도해요" 하고 억지로 남편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밤은 우리 남편이 이렇게 술이 만취되어 돌아와 기도를 못하고 잠자리에 들려합니다. 우리 남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남편이 눈을 떠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며,"여보 하나님한데 나 술 취했다고 하지 말고 아프다고 그래" 했습니다.
남편은 자기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교만의 병은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 교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교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로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의 구세주가 예수님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비참한 자기 실존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나오는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하나님의 나라가 내 것이 되려면, 먼저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니고서는 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와 병든 모습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이런 제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픔과 병듦과 부끄러움과 누추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병원을 찾아가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누추함을 가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병원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교만이 낳은 마지막 비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교만의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세리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리의 모습은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도움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웃의 도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책에서 겸손한 사람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이웃의 손을 붙들고 인생의 길을 따뜻하게 걸어가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한 손은 하나님을 뿌리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웃을 뿌리치며 혼자 고독한 파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모습이 세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파국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는 세리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힐라스테리온'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때, 법궤 앞에 서서 피를 뿌리는데, 그 법궤 앞에는 판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 판을 시은소, 혹은 속죄소(mercy seat)라고 부르는데, 그 곳에 피를 뿌립니다.
그래야 하나님 받아주시고,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여기에 나를 대신할 속죄의 제물을 바칩니다.
여기 나를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 그의 피가 있습니다.
이 피를 보시고 저를 용서해주시며, 저의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붙들고 주 앞에 나와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그 피 앞에 우리의 존재를 적시는 순간,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주 앞에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야 합니다.
이것이 교만을 뿌리뽑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교만을 뽑아주신 것을 확신을 가지고 "주님! 감사합니다." 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 18 : 9 - 14
현대인들은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며, 죄를 극복하려고 눈물 흘리며 노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도, 죄를 이기는 환희도 경험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죄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종되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그 말 대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정서 장애", 습관적인 집착증"등의 심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해가며 "죄"라는 말로부터 도피하려합니다.
죄에 대한 해결은 죄를 죄로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 독약이 든 병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병에 '독약'이라고 써 붙여 보관하면 기분이 좋지 않아 '설탕'이라고 써 붙여 보관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도움이 아니라,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독약은 "독약"이라고 써 놓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 아래 '해골' 그림을 그리고 위험이라고 표시해 놓아야 합니다.
이처럼 독약은 독약이라고 해야하고,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샘솟는 교회에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원하신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일곱 가지 중요한 죄악'의 리스트는 기독교 역사에서 4세기 무렵에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가 처음으로 썼습니다.
이 일곱 가지 죄악은, 첫째, 교만입니다.
둘째, 질투입니다.
셋째, 분노입니다.
넷째, 탐심이고,
다섯째, 탐식입니다.
여섯째 죄악은 게으름,
일곱째는 정욕입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죄악인 교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교만은 질투를 낳고,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탐심 등, 모든 죄악을 낳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고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8장 9 - 14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비유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교만의 죄를 폭로합니다.
첫째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에게 교훈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멸시합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긴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존감은 정신 건강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존심(pride)은 그런 의미에서 병적인 자만(arrogance)과 구별해야 합니다.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음모와 술수를 쓴다면 그것은 이미 자존감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입니다.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화시킬 때, 혹은 자기 주장을 절대화시키기 시작할 때에 교만이라는 질병이 찾아옵니다.
교만은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된 죄악입니다.
두 번째로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담을 쌓는 죄악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성경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자리는 세리와 구별된 자리였습니다.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세리와는 같이 기도하기도 싫어서 아예 자리를 따로 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흑인과 백인이, 양반과 상놈이 같이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해서, 예배 장소를 따로 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바리새인의 기도는 두 번씩 반복되는 "같지 아니하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로마에 아부하는 사람,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세리를 멸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우월감이 바로 교만을 보시고 예수님은 훈계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려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바리새인의 이 기도에서 강조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나"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는 구절마다 "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일까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하나님 앞에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세요" 이처럼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의 중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다만 자기 위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결혼할 때, 남편 될 사람과 잠자기 전에 항상 기도하고 자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결혼 후 비교적 그 약속을 성실하게 잘 지켰고, 남편도 아내를 따라 늘 자기 전에 함께 기도하고 잡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이 술에 취하여 돌아와 그냥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그날도 아내는 남편에게 기도하자고 그러자 "오늘은 당신 혼자 기도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당신, 약속했잖아요? 같이 기도해요" 하고 억지로 남편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밤은 우리 남편이 이렇게 술이 만취되어 돌아와 기도를 못하고 잠자리에 들려합니다. 우리 남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남편이 눈을 떠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며,"여보 하나님한데 나 술 취했다고 하지 말고 아프다고 그래" 했습니다.
남편은 자기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교만의 병은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 교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교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로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의 구세주가 예수님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비참한 자기 실존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나오는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하나님의 나라가 내 것이 되려면, 먼저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니고서는 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와 병든 모습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이런 제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픔과 병듦과 부끄러움과 누추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병원을 찾아가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누추함을 가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병원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교만이 낳은 마지막 비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교만의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세리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리의 모습은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도움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웃의 도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책에서 겸손한 사람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이웃의 손을 붙들고 인생의 길을 따뜻하게 걸어가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한 손은 하나님을 뿌리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웃을 뿌리치며 혼자 고독한 파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모습이 세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파국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는 세리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힐라스테리온'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때, 법궤 앞에 서서 피를 뿌리는데, 그 법궤 앞에는 판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 판을 시은소, 혹은 속죄소(mercy seat)라고 부르는데, 그 곳에 피를 뿌립니다.
그래야 하나님 받아주시고,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여기에 나를 대신할 속죄의 제물을 바칩니다.
여기 나를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 그의 피가 있습니다.
이 피를 보시고 저를 용서해주시며, 저의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붙들고 주 앞에 나와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그 피 앞에 우리의 존재를 적시는 순간,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주 앞에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야 합니다.
이것이 교만을 뿌리뽑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교만을 뽑아주신 것을 확신을 가지고 "주님! 감사합니다." 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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