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주일 설교 모음
2008. 5. 10. 09:43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자녀에게 남겨 줄 것/수4:1-14
유대인의 탈무드에 의하면 사람 에게는 세 시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소년기,청년기, 장년기를 살 면서 삶의 성숙에 이르게 된다고 합 니다. 그런데 세 시기의 삶에 대해 흥미 있게 말했습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고, 청년기에 는 자신을 위해 살다가, 장년기에는 자식을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소년기에 부모를 위해 산다"는 말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녀들의 사는 모습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우리 자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나 해 놓고도 부 모를 위해서 큰 공로를 세운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부모 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을 던집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다가, 청년기에는 그 초점이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장년기가 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식 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을 긍정하면서도 막상 "자녀를 어떻 게 양육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 치면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불행 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 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놀랍 게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원을 활용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놀라운 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도 많이 했고, 나쁜 일도 많 이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 에 좋은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그들이 하나 님 앞에서 그리고 그 이웃과의 관계 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 해서 가르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 은 그들을 때리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두 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 른 민족들은 소외시키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 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 족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지내던 역사적 경험들을 사도 바울은 이렇 게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 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 으면서 그 사건이 우리와 아무 상관 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역사 라고 넘겨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 은 이 선택받은 백성들의 역사적 경 험을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 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 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지금도 여 전히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시기 때 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경이요, 기적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환 난을 겪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핍박 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잔인할 정도의 역경에 시달려 왔습니까? 이 와 같은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 고 끈질지게 버티면서 그들의 자녀 를 훌륭하게 길러내서 지금도 전 세 계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인물을 정 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배출한 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 다.
어떤 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 렇게 놀라운 민족으로 만들고 있습 니까? 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핏줄 속에는 어떤 다른 민족이 도저 히 모방할 수 없는 하나의 무서운 정열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 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민 족사에 나타난 이 정열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했는데, 한 수레바 퀴는 교육이고 또 한 수레바퀴는 신 앙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 열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만들 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지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 게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을 볼 수가 있습니 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어떠했습니까? 한 교육학자는 교육이 효과적으 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교 육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도구의 활용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관성 있게 반복하여 가르쳐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 교육에 필요한 효 과적인 요소 세 가지가 다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기회를 사용해서 자녀를 교육했습니 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 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면에서 천 재적인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모든 삶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 의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명절 이 되면 좀 편히 쉬면서 늦게까지 잠을 자고, 그렇지 아니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은 이 명절을 소중한 자녀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령 장막절 같은 명절에는 자 녀들을 데리고 나가서 들판에 천막 을 쳤습니다. 이것은 물론 귀찮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 무엇 때문에 이 좋은 명절에 이런 괴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하며 부 모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러면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말합니 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 야에서 이런 천막을 치고 이 천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단다" 했습니 다.
또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곤 히 잠들어 있는 자녀를 깨웁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면 얼 마나 짜증이 납니까? 그러면 잠자던 자녀들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서 짜증스럽게 말합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잠을 깨우면서 괴롭히세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 굽 땅을 떠날 때 급하게 한밤중에 온 백성을 깨워 허리띠를 띠고 여호 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유를 얻 기 위해서 애굽을 떠났단다" 했습니 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서 명절은 늦잠 자고 놀러 다니는 날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회였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 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 성은 기적적으로 요단을 건너갔습니 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는 아주 중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4 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이 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서."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 람을 뽑아서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 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 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 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이렇게 대 답하라" 했습니다.
이제 9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 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고생스럽게, 그러면 서도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 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이 아니라 이런 고생 속에서 의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나중에 그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19∼20절 말씀을 보세요.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 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라고 말씀했습 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자마자 제사장들의 발이 섰던 그 장 소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길갈이라 는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1절 이하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에 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 게 하여 이르기를 …하라" 했습니 다.
우리 가운데 과거에 고생을 많 이 한 사람들은 그들이 지난날에 고 생한 것을 자녀들에게 알리기를 꺼 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 라엘 민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이 고생스러 운 일들을 통해서 얻은, 그 어떤 것 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교훈 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 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전지대에 도착 해서 이제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그들이 이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기념비 하나를 세우고 "후일에 네 자손이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삶의 모든 기회를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묻거든." 이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25∼27절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여호 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 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 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 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 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 느니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예식을 단순히 의식을 위한 예식으로 행하지 않았 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자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순간도 교 육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냥 넘기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육은 학 교에서 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부모 가 교육열이 높은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서 오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 가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 까? 우리 자녀들이 가장 많은 시간 을 보내고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자녀의 최고의 교 사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교실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 다.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삶을 나누는 이 모든 기회를 통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 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 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행동, 부모의 삶의 모습, 부모의 삶에 대한 태도가 아들과 딸 에게 어떤 교육의 귀감이 되고 있습 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열에서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기회가 교육이었습니다. 명절 도, 예식도, 행사도, 프로그램도, 자 녀들과 즐기는 시간도 그들에게 있 어서는 바로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상징 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는 것 을 봅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 로 보는 것이 더 분명하게 그 인상 을 마음속에 새길 수가 있기 때문입 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교육기재를 활용했습 니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다는 사 실을 귀로만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후일 에 자녀들이 "아버지, 이게 무슨 뜻 이에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처 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징적인 교 육의 기재를 활용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우 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 다. 자녀교육에 대해서 "내가 아이 를 학교에 보내고 돈을 주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라고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 모가 바로 자녀의 교사임을 기억해 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에 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들 과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 지고 있습니까?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관성 있게 자녀를 가르쳤습니다.
교육은 그 가르침이 일관성이 있을 때 효과가 증진될 수 있습니 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교육에 있 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복 의 원리' 라고 합니다. 중요한 교훈 은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들도 설교의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 교육의 원리 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 교 중에 듣던 말씀이 또 나오면 '목 사님이 설교 재료가 떨어져서 또 그 말씀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부분이 중요한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여 들으 시기 바랍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선 생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가 시험 공부할 때 그 부분을 잘 기억해두면 시험에 대개 나옵니다. '반복의 원리'가 이 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보세요. 이스 라엘 민족이 열두 돌을 가지고 기념 비를 세울 때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하나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 았습니다. 그들이 길갈이라는 지역 에 도착했을 때 또 다시 한 번 기념 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을 방문해 보면 이스라엘 도처에 기 념비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고적이 아닌 것이 없 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지 고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경험한 일들을 눈으로 보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가 르치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 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로 가르치 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실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 에 대한 정열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교육의 내용이 바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신앙의 전달 방법이 바 로 교육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을 보세요.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 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 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 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계 시는 것을 상징하는 그 언약궤를 메 고 나갔더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건 널 수 없게 보이던 요단강의 물이 우리 앞에서 갈라졌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렇게 넘쳐흐르던 요단강 물이 복종하더구나"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사 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 과, 고난과 파도를 이기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4장 2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 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 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 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 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 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 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 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 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 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 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4:21∼24) 하셨습니다.
"아버지, 여기 이 돌을 왜 이렇 게 세웠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대답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내가 언약궤 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탁 내디뎠더 니 요단강 물이 쫙 갈라지는 게 아 니겠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 기 이렇게 돌을 세운 거야. 그때 일 을 생각하면 이 아버지가 참 대단했 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 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 렸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 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 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 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 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 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절).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주어 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여호와입니 다. 우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말 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능하시다 는 사실을 알게 하여,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자녀들이 하 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함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 된 우리 가 자녀에게 아무리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영원 한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는 언젠가 그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리에 있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들에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더 이상 부모가 자녀를 도울 수 없 을 때, 인생의 한풍이 불어닥칠 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삶의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쳐 어쩔 줄 모르고 헤 매일 때,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 성들은 정말 지혜로웠습니다. 그들 은 그때에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모 의 도움이 자녀에게 더 이상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을 더 강하게, 더 능력 있게, 더 지혜롭게 지킬 수 있는 놀 라우신 그 하나님을 그 자녀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지혜 있 는 일입니까? 이스라엘 부모들은 다 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기를 원한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 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겨준다."
의미 있는 말입 니다.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에 게 재산을 남겨 보세요. 그 재산 때 문에 자녀들은 오히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신앙교육을 제 대로 받지 못한 부자들의 자녀들이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 해 가는 광경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 든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모 두의 삶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양식 있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지식 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 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 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 말씀 은 모든 믿는 부모들이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 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아가 면서 폭풍우를 만나게 될 것을 아십 니까? 인생 항해는 폭풍우 없이는 항해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폭풍우 에 직면했을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어디에도 없다고 절망할 수밖 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다윗 왕의 유언은 감동적입니 다. 역대상 28장 9절을 보세요.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 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 으로 ?떡姸淄箏?."
누구를 알라고 요? 아비를 알라는 게 아닙니다. 물 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단순 히 아버지인 자기를 자녀에게 기억 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가 끝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력 하고 보잘 것 없는 부모, 많은 잘못 을 자녀에게 보일 수밖에 없던 자기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자녀에게 남겨 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남 긴 유산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 기를 원하십니까? 맥아더 장군은 이 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인생을 헛 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 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가정 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에게 하 나님을 유산으로 남겨 주게 되시기 를 바랍니다.
아내와 남편에게/엡5:22-3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주 안에서 부부 된 사람들에게 주신 권 면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혼식 때마다 수천 번을 읽었습니 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보이는 사람 이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삽니 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 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 므로 우리의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 다.
그런데 바울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와의 관 계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요한계 시록에 보아도 그리스도를 신랑으 로, 그리스도인을 신부로 표현한 것 을 볼 수 있는데 의미 깊은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아내 되 는 사람에게 먼저 권면했습니다. 사 도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제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 의 머리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은 원리임을 여 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몸 된 교회의 머리 되 신다"고 한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이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 람들에게는 이러한 특수한 결혼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 야 할 것은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 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도 "너 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 이 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짝지 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농사할 때 기계로 밭을 가는 요 즈음은 '짝지었다'는 말을 이해하기 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계 를 사용하기 전에는 소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봄 철이 되면 밭을 가는 것을 많이 보 았습니다. 그때 보니까 얕게 갈아도 될 때는 소 한 마리로 밭을 갈게 하 지만, 깊이 갈아야 할 때는 소 두 마리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 습니다. 그런데 황소와 암소를 같이 멍에를 메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 미가 있다고 봅니다. 남녀가 짝을 지어 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은, 말하자면 두 사람이 멍에를 같이 하 여 인생의 광야를 개척해서 옥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법적인 계약만이 아닙 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 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 32절에서 "이 비밀 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사 실 신비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와 성도 하나 하나의 연합, 이것은 사실일 뿐더러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는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 간이 걸리고 노력이 따라야만 합니 다.
가령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 접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령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기쁨을 무엇 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 아온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신비 한, 새로운 세계의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찬송가 499장)
그러나 언제나 그런 감격이 계 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깊은 고민에 빠질 때도 있 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알 수 없 었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악 많은 세상에 살 고 있고,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육신 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육 신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할 때는 혼자 사 는 사람과 같아서 육신이 하자는 대 로 하니까 문제될 것이 별로 없습니 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우리 심령 이 구원을 받아 빛 가운데 살게 되 면 어두운 데 살던 것들이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생기는 문제가 많습니다. 육신이 하 자는 대로 살자니 영혼이 책망합니 다. 영혼이 하자는 대로 살자니 육 신이 따라가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로마서 7장에서 고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 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 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 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 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 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 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 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 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육의 소욕 을 죽이고 심령을 따라 나아가는 것 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부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다른 남녀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 처음 한 달을 '밀월'이라고 합니다. 꿀처럼 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 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한 달쯤 지나고 나면, 결혼하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게 꼭 그렇게 달콤한 것, 신비한 것만 있 는 것은 아니거든요. 씁쓸한 일도 생기고, 미처 몰랐던 것을 알고 나 서 실망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서로 살다보면 교제할 때 천사처럼 생각되던 사람이 천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 끼리 같이 살려 하니까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 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의 차이가 생 겨서 말다툼이 생기고, 성격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도 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는데 그것이 서로 잘 맞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 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어 주시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입니다.
한 사람이 느긋하면 한 사람은 팔팔합니다. 한 사람이 깔끔하면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 욕 안 한다고, 속옷 갈아입지 않는 다고 야단 맞습니다. 한 사람이 더 운 것을 좋아하면 한 사람은 시원한 것을 좋아합니다. 한 사람이 무슨 일이든 철저히 하면 한 사람은 적당 히 합니다. 한 사람이 말이 좀 많으 면 한 사람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 신 조화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른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같이 사는 동안에 사랑 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개성 을 양보해서 가까워지고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부부 생활 하신 분들을 보세요. 그저 상 대방을 보기만 해도 분위기가 파악 이 되고 잘 맞추어 나아가는 것입니 다.
저는 제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40년이 되어 옵니다. 저는 비교적 직선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돌려가면 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머리가 비상해서 절대로 직 선적으로 말하는 적이 없고 쓱 돌려 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쉬 운 예로 제 아내가 "당신 냉면 생각 없어?"하면, 저는 냉면 생각이 없을 때는 "글쎄, 냉면 생각 없는데"라고 응답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것이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제 아내가 냉면이 먹고 싶은 것을 간접 적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 에야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 36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둔 합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그것을 참고 또 참으면서 인격자가 된 거예요. 사랑으로 참은 거예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토닥거리 며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 헤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 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주'라는 말은 '보호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를 돌보아 주고 길러 주는 자라는 뜻이 있습?求?. 하나님은 모든 사람 의 보호자이며 특별히 믿는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8∼29절을 보 세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 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 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 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 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 를 보양함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 다.
"남편이 제 육체를 양육하여 보 호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몸에 대해서 구주로서 행동합니다. 남편 에게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사도 베 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 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 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 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 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남편 은 아내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습니 다. 대신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 종하듯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 에게 복종해야 합니니다. 이것은 성 경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질 서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무엇입니 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 서 진리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아내가 남편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는 몸이 머리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나 교회가 그 리스도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같 은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면 이해 가 쉬울 것입니다. 이 몸은 지체들 이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손가락 과 발가락이 붙어 있고 팔과 다리가 붙어 있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유기적이고 자발적 인 연합체입니다. 그것은 하나요 전 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가 정의 남편과 아내는 나뉘어 있는 것 이 아닙니다. 둘이 하나입니다. 이것 이 신비입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도 직장이 나 사무실이나 일터나 교회가 아니 고 그의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그 의 솔직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모습은 가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 람은 내 아내요, 내 남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머 리와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내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기 를 결정하는 것은 나입니다. 내 몸 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편입니다. 만 일에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련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는 분을 보셨습니까? 머리를 흔드는 분을 보세요. 손이 떨리는 것을 보 세요. 그 분의 마음에서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데,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고, 머리를 흔들고, 손이 떨립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 런 병이 들면 어떤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움 직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하기를 원 하지 않는데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 습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우리 가정의 부부생활이 그렇습 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 따로 따로라면, 이것은 건강한 가정 이 아니라 병든 가정입니다. 만일에 아내가 멋대로 행동하면 그것은 혼 란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원치 않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편은 아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건강 한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 정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 모든 것 을 통제합니다. 아내가 남편과 상의 없이 멋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여기 어떤 분이 중풍에 걸렸습 니다. 그는 움직이기를 원하지만 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일부 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 말은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아내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 의와 존경심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에게 꼭 필요한 사 람이 되어, 그를 돕고 보전해서 남 편의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 한 분들을 보세요. 대부분 그 아내 가 훌륭한 경우입니다. 내려오는 말 에 "한 남자가 성공하는 데는 두 여 자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하나는 훌 륭한 어머니의 손이요. 다른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아내의 영향을 입지 않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 의 권면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 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 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 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겸손 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베드 로 사도는 계속 권면했습니다.
"너 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 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 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자 가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 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지금까지 아내에 대한 권면을 말씀드렸습니다만, 25절 이하는 남 편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 랑하라"입니다. 아내에게 대해서 권 면한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요,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아내에 대 한 사랑입니다. 이 말씀은 남편만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 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그것도 사랑입니다. 이 균형이 언제 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근 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남편은 언 제나 사랑으로 아내의 통제를 받아 야만 합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 라."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무엇 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남편들 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얼 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 주님께 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죽기 까지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이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 할 때는 언제나 '아가파오'(agapao)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 늘 주신 말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아, 하나 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그 차원에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 다.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차원의 사랑 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 십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보 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에로틱한 감정이 아니고, 그저 좋아하는 기분 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입니다. 사랑과 기쁨 그리 고 화평, 바로 그것이 남편이 자기 아내를 향해 가지는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성령의 충만함은, 환상과 같은 현상이 아니 라, 집에 있을 때 내 아내에게 하는 행함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 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이어서는 안되고 자연적이어 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성(性)을 악 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 독교적인 교훈이 아닐 뿐 아니라,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 이지 사람 이하도 사람 이상도 아닙 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을 포함한 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적인 요소 그 자체에 아 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끌리 고, 사랑을 느끼고, 결혼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제 는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 다. 육체적인 것만으로 결혼했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쉽게 바닥이 드러 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 는 이 시대의 심각한 고민 중에 하 나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결혼의 기초를 육신에만 두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해서 파탄 을 초래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서구사회에서 가정 파탄 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습니 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됩 니까? 그것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 는 기초가 육신적인 데만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아 무 부담이나 책임성 없이 결혼하고, 아무 부담 없이 헤어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로 눈이 맞아, 다음 정거장에 내려 차 마시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 결혼할까?"
"그 래, 하자"
그래서 결혼해 살다보니 이상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이상 이 안 맞으니, 신경 쓸 것 없이 헤 어지자"
"그래, 마음대로 해"
그래 서 헤어집니다. 짐승보다 나은 게 무엇 있습니까? 연습결혼, 계약결혼 이 있다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입니 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 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 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셨습 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든 사 람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 한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가지는 관심을 인 식할 때, 모든 예수 믿는 남편들이 자기의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에 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 얼마나 웅변적인 표현입니 까?
주님께서는 교회가 보잘 것 없 어도, 부족해도, 마음에 좀 들지 않 아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 셨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 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 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 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 를 사랑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관심이 깊으 십니다. 교회의 가능성을 아십니다. 그는 교회가 완전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그의 신부 인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열망이 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 고,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 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 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서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 다. 희생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이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가지려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 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라."
구체 적으로 사랑하세요.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으로 복종하고, 남편 이 아내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줄 때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을 믿습니 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이렇게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해서 행복이 넘치 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어머니의 큰 믿음/마15:21-28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보 였던 이야기입니다. 김상호라고 하 는 공군 중령의 자기 간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부엌 에서 일하시다가 실수로 인하여 하 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 원하여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꼼짝 도 못한 채 누워있고 조금만 움직이 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대 로 제일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합니다. 이 가죽이 다 벗겨지고 이 말초신경이 전부 드러 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 는 가장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어 머니를 아들은 지켜보면서 귀에다 대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어머니는 대답합 니다.
"천번 죽고 천번 사는 것 같 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픔이 있다 는 걸 몰랐다."
아들은 이 말을 듣 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하고 있었습 니다. 하루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내게 주십사 고, 너희들의 고통을 다 내가 걸머 지고 그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 서 너희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기 를." 어머니는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자리에서 편히 돌아 누울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 했습니다. 어머니, 참 어머니의 사 랑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어 머니들은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아 플 때, 열이 사십 도가 넘고 숨을 할딱할딱 할 때는 내가 대신 아프고 싶고, 아니 죽는다면 대신 죽고싶은 거예요.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 다. 어머니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 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 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적 의 미가 있는 높고높고 귀한 사랑입니 다. 이 사랑을 뜨겁게 아주 뜨겁게 체험하고 그리고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어머니의 이 야기가 나옵니다. 참 훌륭한 어머 니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볼 때마 다 언제나 저는 어머니를 생각합니 다. 저는 특별한 면에서 이 성경을 봅니다. 이 어머니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라고. 대표적인 어머니라고 저는 그렇게 늘 생각해봅니다. 오 늘 본문에 마지막에 보세요. 예수 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시 면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크 다!"라고 말합니다. 헬라 원문대로 는 메가스피스티스입니다. 메가톤 급, 메가톤 급의 큰 믿음이라고 그 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시기를 "네 소원대로 되리 라."
그래서 이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어머니의 믿음, 어떤 믿음입니까? 이건 교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성경 을 얼마 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무슨 재물 을 드렸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도 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얘기도 아닙니 다. 아주 심플한, 아주 단순한, 원 초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것뿐입니 다. 그는 이 아이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 그런 어머 니올시다. 아주 훌륭한, 가장 인간 적이고 가장 고상한 모성적 그러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이 딸이 어 떤 딸입니까? 귀신들린 딸이에요. 말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벌거벗 고 도망 다니는 거예요. 모든 사람 이 비웃어요. 도깨비라고, 저것도 사람이냐고 비웃어요. 그러나 이 어머니는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딸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아무 쓸모 없고, 모든 사람이 비웃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는 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건강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사실 은 또 한번 변질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에요. 여행 중에 있는 점잔은 분이 어느 날 지 나가다가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쉬는 데,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혼자 고생하면서 그 수고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 다 잠들고 혼자서 마루에 앉 아있을 때, 이 지나가던 점잔은 손 님이 한마디했다지 않습니까.
"어 떻게 이렇게 수고하십니까? 그저 수고하시느만요."
"아이 그저 아이 들을 위해서요. 아이들이 잘 되기 만 하면야."
그래서 "그러면 어느 아이를 제일 사랑합니까?"
"아 그 맏아들, 첫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사랑하죠. 아니오, 제가 그 막내를 사랑하죠. 그 놈은 아버 지 얼굴도 못 봤어요. 그래 내가 불쌍해서 더 사랑합니다. 아니오, 세 번째를 사랑합니다. 걔는 소아 마비에 걸렸어요. 늘 쓰러지고 넘 어집니다."
여러 자식이 있지만 병 신자식을 더 사랑하는 거예요. 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요. 모두가 다 우습게 보지만은 아니오, 이 어 머니에게는 가장 소중한 딸이었더라 이 말이요. 그리고 그 내면세계를 사랑해요. 그저 귀신이 들려서, 그 래 병이 들려서 그렇지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깨끗한 마음 이 있어요. 어쩌면 조용히 혼자 앉 아 있을 때 그 딸을 바라보며, 쟤가 귀신만 안 들렸다면 어떨까? 얼마 나 좋은 아이인데 라고 생각했겠죠.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그리고 그 미래를 믿었어요. 이 귀신만 나 가주면, 이 병만 고친다면 이 아이 는 훌륭한 아이라고 그렇게 미래를 믿고 있었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누가복음 13장 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지 18 년 된 여자를 만납니다. 이 여자는 곱추요. 몸도 병신인데다가 귀신들 려 18년 됐다면, 도대체 스무살에 귀신 들렸다면 지금 서른여덟살이 요. 여자의 아름다운 세월을 다 이 렇게 보내고 만 이 전형적인 도깨비 들린 여자, 이 여자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저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예수님은 그 내면세계를 보신 거예 요. 그 외모를 본 게 아닙니다. 깊 은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 고 계신 거예요. 아브라함의 딸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가나 안 여인은 이 귀신들린 아이를 그렇 게 사랑합니다. 거기다 희망을 가 집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딸을 믿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젊은이가 실 수로 살인을 합니다. 사람을 죽이 고 그 혐의를 받고 경찰에 체포되어 서 지금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조용히 방문해서 "애야 너 정말 사람 죽였냐?"
"아니오."
이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고,
"우리 아들은 안 죽였답니다"
그리고 고집 을 부립니다. 오히려 재판장이 설 득을 합니다.
"그렇질 않고요, 지금 모든 증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참 가슴 아프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요, 내 아들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결국은 재판은 사형이 됐고, 사형집 행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방문해서 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진실하게 말해달라. 정말 사람을 안 죽였냐?
"아니요, 죽였어요."
"그러면 왜 안 죽였다고 했냐?"
"어머니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 그럼 어떡하 면 좋겠냐?"
"제가 지금 뉘우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서 제가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내가 사람 을 죽였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목 사님이 찾아가서 이 아들의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지만은 사실은 사람을 죽였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 렇습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들에게 말해주세요. 나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살인죄를 지었 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 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믿습니다. 그 장 래를 믿습니다. 그의 진실을 끝까 지 믿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다 안 믿어도 어머니만은 그 자식을 믿 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뿐이 아닙니 다. 이 딸을 위해서 어머니는 참 어려운 시련을 다 극복합니다. 오 늘 본문에서 보세요. 어머니가 예 수님 앞에 나오는데
"내 딸을 불쌍 히 여겨 주시옵소서"하고 소리를 지 르지만은요 아무도 대답지 않습니 다. 아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소리지릅니다. 그 말 속에 두 마디 가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 세요. 귀신들린 딸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 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말합니 다. 이 말은 그 아이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올시다. 그의 아픔 이 내 아픔이요, 그의 고통이 내 고 통이요, 그가 정신병자된 것 그건 내가 정신병자된 거나 마찬가지요. 그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요. 완전히 하나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 이제 대답이 없습 니다. 대답이 없는 그것을 극복합 니다. 이제 제자들이 또 옆에서 말 립니다.
"아 이 여자가 시끄럽습니 다. 보내소서."
그것도 극복합니 다. 이스라엘 집에 보내심을 받았 다, 할 때 이 가나안 여인으로 보면 은 나는 이방 여자이기 때문에, 하 는 열등의식 그것도 극복합니다. 마지막에 보세요. 참 어려운 시험 이 걸렸습니다. 예수님 모처럼 입 을 열어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 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
세 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 째서 이렇게 말씀한 거 같습니까? 그러나 이 여자를 보세요.
"너는 개다. 너는 개 같은 여자다."
이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딸을 위해서. 만 일에 자기 자신의 병을 위해서라면 나를 고쳐주세요 하다가 "자녀의 떡 을 취하여 개에게"그러면
"까짓 거 죽으면 되자나요. 내가 개 취급까 지 받을 것 없잖아"
화를 벌컥 내고 가 버릴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안 그래요. 어머니가 자식을 위할 때는 그렇지 않아. 이 모든 굴욕을 참습니다. 개면 어떻고 고양이면 어때? 아 뭐면 어떠냐 이거예요. 자 얼마나 귀한 얘기를 합니다.
"개도" 개를 인정해요. 개도, 이스 라엘 사람들이 이방사람 특별히 가 나안 사람들을 부도덕하다고 해서 개라고 별명을 부르고 있어요. 그 런데 개라는 말 익숙해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는 대답합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 런고로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하 지 않겠습니까?"
아, 예수님의 마 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이 감동 이 됐어요, 이 여자의 마음에. 이 여자의 기가 막힌 사랑에 감동이 됐 어요.
"네 믿음이 크다. 메가톤 급 이다. 굉장한 믿음이다 이거"
칭찬 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느니라."
얼마나 굉장합니까. 이 같은 사랑, 이 같은 모성애, 이 사랑이 기적을 낳는 거예요. 여러분 이 같은 사랑 깨닫고 나면 그 누군가가 사람이 안 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변화가 안 생기겠습니까? 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모든 어머니의 깊은 마음속에 이 같은 마음이 있어요. 인간은 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살 고, 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며 살고 감사하며 살다가 여러분 아시 잖아요. 우리 한국군인들, 6·25 전 쟁 때 죽었어요. 많이 전사됐는데 죽으면서
"어머니!"하고 죽어요. 이 걸 알아야돼요. 80이 넘은 저희 할 아버지가 저와 같이 어디를 좀 가다 가 넘어질 뻔했어요. 아주 좀 실수 할 뻔하니까요
"아이구 어머니"그러 더라구요. 그래 제가
"할아버지, 아 지금 어머니가 뭐요?"
할아버지 지 금 연세가 얼만데 어머니 찾고 있냐 고 그랬더니
"야 이놈아,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다"
그러더라구요. 나이 들수록 어머니요. 90이 넘은 한경직 목사님 살아계실 때 제가 가 서 문안을 드렸는데요.
"아, 곽목 사, 아주 이상한 거 하나 있구만. 이상한 게 있어. 아니 글쎄 내가 한 평생 영어성경을 봤는데, 내가 한국말 성경보다 영어성경을 더 많 이 봤는데 영어가 싹 없어졌어."
아무리 봐도 영어 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난대요. 이 중간에 배운 건 다 없어지고 이상한 거 하나 있대요. 그저 어머니하고 옛날에 주고받던 말, 다 생각이 난대요. 거 이상하 죠. 그게 그 컴퓨터에 깊이 들어 있다가 지금 다 나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의 대화가 일일이 생각이 난다 그래요. 그러니까 죽을 때
"어머니!"하고 죽는 거예요. 이게 마음의 고향이요. 이걸 알아야 합 니다. 어머니의 마음, 그것이 사람 을 사람되게 하는 거예요.
캐시라고 하는 여자가 대학을 마 치고 연애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가 아무리 말렸지 마는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그는 탕 자가 됩니다. 탕녀가 되어 가지고 알콜 중독자가 되고 창녀가 되고 마 지막에는 아편까지 하게 됩니다. 다 시들어서 이제는 쓸데없다는 걸 알았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버려진 인간이 된 걸 알고 자 살하려고 했어요. 연못에 나가서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 연못 물에 어머니의 얼굴이 확 비치는 거 예요. '그렇지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내가 한번 가보 리라. 먼 빛으로라도 어머니를 한 번 보고 그리고 와서 죽자. 뭐 바 쁘지 않으니까.' 어머니를 뵈러 왔 습니다. 그러나 낮에 올 수가 없어 서 밤에 아주 어두운 때, 몰래 멀리 서 좀 보려고 왔습니다. 불빛이 환 하게 켜있습니다. 안팎으로, 안과 밖에 '아니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대문은 조금 밀어보니까 대문을 잠 그지 않았어요. 대문을 조금 더 밀 었더니
"삐익"
하고 소리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맨발로
"캐시야!"
하고 달려나오는 거예요. 꽉 붙들 렸습니다.
"어머니 내가 10년 동안 전혀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데 어떻 게 제가 올 줄 알았습니까? 왜 불 을 끄지 않고 있습니까?"
어머니 말 씀은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불을 끈 일이 없다. 문을 잠근 일 도 없다."
캐시는 거기서, 거기서 새 사람이 됩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데 내가 왜 밖으로 돌았던가 말 이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돼는 거예요. 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 건 사람이 아니요. 어머니의 간절 한 기도 그걸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 야 합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는 거예요.
아버지 뜻대로 하였는가/마21:28-32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면서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효성을 다하기 위하여 어버이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한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농사철이 되어서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아들은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말로는 순종하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아니한 아들에게 속은 것에 매우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로써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싫소이다." 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다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탄식했습니다. 얼마 후 둘째는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싫소이다.' 하고 아들이 말한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갈 수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므로 하기 싫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불효자의 말입니다.
1. 성경에서 가르친 부모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십계명 중 제 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이 가르친 부모의 뜻은 세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첫째, 부모는 선조 전체를 말합니다. 마태 1 : 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고 한 뜻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다윗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뜻으로 조상의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사도행전 7 : 2에서 스데반이 설교할 때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조상'이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둘째, 부모란 위에 있는 자, 혹은 권위자, 주권자, 앞선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왕을 국부라, 왕후를 국모라 한 것이 이런 뜻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말한 '소자들아' '아비들아' 한 것은 한 가정에 부모자식간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자, 앞선 자를 뜻합니다. 나아만의 종이 나아만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한 것은 권위자, 주권자라는 뜻입니다(왕하 5:13).
학교에서 제자가 선생을 사부라고 하며, 교회에서 교인이 교역자를 믿음의 부모라고 하여 '교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갈 4:19).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고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기와 마병 이여"라고 하였습니다(왕하 2:12).
셋째, 혈연적인 관계에서 부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하는 분을 부모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대표자를 세웠습니다. 가정에는 부모, 학교에는 교사, 교회에는 교역자, 국가에는 통치자, 기관에는 책임자를 세워 효과적으로 일하게 하시었습니다.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면 큰 죄가 됩니다. 이유는 피조본연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와 국가에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의 권한을 부모에게 완전히 위임되었습니다.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 온 권위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세계에 제일입니다. 양육과정에 있어서 젖먹이는 기간도제일 길고,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결혼, 직장, 집을 마련하는 일까지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80된 아버지가 60된 아들이 외출할 때 길조심하라고 말하는 등 죽을 때까지 걱정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매개체입니다. 야고보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주신 은혜가 수천대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2. 부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부모의 은공보다 더 깊은 은공은 없고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한부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산아 산아 높은 산아, 네 아무리 높단들 우리 부모 날 낳으신 높은 은공에 미치랴. 바다 바다 깊은 바다, 네 아무리 깊단들 우리 부모 날 기르신 깊은 사랑에 미치랴. 우리 부모 날 기를 때 춥지 않고 덥지 않게 젖먹이고 업어 주며 고이고이 길렀네. 우리들이 공부할 때 밭을 팔아 책을 사 주고 소를 팔아 붓 사 주며 공부시켜 길렀네. 우리 부모 날 기를 때 수고하고 애를써 검은머리 백발되고 곧은 허리 굽었네, 우리 부모 은공 생각하면 산이라도 높지 않고 부모 사랑 생각하면 바다라도 깊잖다."
둘째, 자녀는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위대한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제일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을 때 거기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부모는 나를 낳으시고 있게 하신 분입니다. 부모 없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도 없으며,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에서 어떠한 은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면 진정한 이성의 사랑도 알지 못하고, 친구의 사랑도 알지 못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고 효도하는 것은, 사람 사이에도 은혜와 사랑, 희생과 존경의 관계를 갖고 살게 합니다.
셋째,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첩경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3)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내 형제, 내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못하는 자는 영의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하고자 한다면 먼저 육신의 부모의 뜻을 따라 살고 사랑하여야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3.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중 사람에게 명한 계명 중 제일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요, 명령임으로 이를 실천하지 아니하면 곧 죄가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원어는 '키베드'인데 의학적으로 사람의 간장을 '카메드'라 하는데 내장 중 가장 무거운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공경이라는 말은 부모의 교훈이나 명령이나 요구나 희망을 자기 몸의 간장처럼 중히 여기고 귀히 여기며 무게 있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첫째, 공경하라는 뜻입니다. 부모공경은 계명의 대강령이며 본질입니다. 받들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부모의 말씀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명심하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내 내장 중 간장은 무거우나 그것이 무거운 줄 모르고 달고 다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음입니다. 부모공경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간이 배 밖에 나온 자라고 합니다. 부모공경하지 않는 자는 마음속에 상처를 입은 사람입니다.
둘째, 부모에게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32). 겸손은 무거운 물건을 들려고 할 때 허리를 굽히고 전 힘을 다 기울이듯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고 물질적, 지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위치를 존중하고 권위가 상실되지 아니하도록 잘 해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면에서 수고는 자식이 하고 영광을 부모가 받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잠 17 :6).부모를 자기의 영광으로 삼는 것이 겸손입니다.
셋째,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하였습니다. 존경하라는 말은 일에 대가의 상으로 후하게 갚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는 태도로 후하게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부모가 믿지 않으면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항상 편하게 하여 드려야 합니다. 친히 부모를 모셔야 하며, 좋은 의복이나 음식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의 마음을 따라 취미생환에 낙을 붙이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하도록 도와 드려야 합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5) 부모를 경히 여기지 않는 것이 존경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f5). 기쁘게 즐겁게 하는 것이 존경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 15:20).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은 존경이 아닙니다.
넷째, 부모공경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창 50:5) 라고 하므로 아버지 이스라엘의 뜻에 순종함을 봅니다. 순종을 하는 것 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 6:1)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0-2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부모의 뜻에 항상 순종함으로 공경하였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4. 부모공경하는 자에게 축복이 옵니다.
첫째, 부모공경하는 자에게 축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했습니다. 이 모든 계명은, 즉 부모공경하라는 계명은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잘되는 축복입니다. 순리를 따랐으니 범사가 형통합니다. 부모를 기쁘게 했으니 자식이 즐거울 것입니다. 위에서 만족했으니 아래도 만족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장수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생명이 깁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의 번영을 의미합니다. 소유가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손이 계속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어 운명하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잘 봉양하도륵 하였으니 우리도 그 뜻을 따라 공경하고 순종하고 즐겁게 하여 드리도록 하여 축복받는 자녀들이 되게 합시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여 영원한 축복을 누립시다.
자녀들의 본분/엡6:1-4
행복한 기독교 가정이 되려면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부부관계(엡 5 :7-33)이고, 둘째는 자녀와 부모관계(엡 6 :1-3)이며, 셋째는 부모와 자녀관계(엡 6:4)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비유하여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따라서 이 행복한 기독교 가정의 세 가지 요소 중에 자녀들의 본분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오해로 비롯된 결과가 사실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겪어온 역사도 그러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킨다고 장담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율법을 오해했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잘못 대하고 율법을 바로 지키지 못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잘못 대하는 무서운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릇된 율법의 눈을 가지고 동족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그들은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민족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300년 동안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과 터키 갑바도기아의 지하 도시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조정 역시 200년 전에 들어온 천주교회를 제사문제로 오해하던 끝에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후 100년 전 개신교를 통해서 들어온 기독교 역시 제사문제로 오해를 받아 기독교인을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식들'이라는 오해를 하면서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규정해 버리는 웃지 못할 비극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사종교로부터 비롯하여 제사문제를 해결한 하나님의 종교요, 부모 섬기는 것을 우선하는 종교입니다.
1.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효도할 것을 명령받은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20 : 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간에 지켜야 할 율법 중 첫째 조항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 6 :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 :15, 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2. 기독교인의 효도는 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동서고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로 규정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효도는 그 기준이 그 부모들의 요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악인일 경우 자식도 악인이 되어야만 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효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효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율법 만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효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의 효는 부모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하나의 본질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효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진정한 효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기독교인의 효도에는 반드시 약속이 따릅니다.
그 약속은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 :3)고 말씀함으로 주 안에서 효도하는 자녀들에게는 점진적으로 축복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물질적인 축복과 정신적인 축복, 사회적인 축복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수한 전인적인 삶이요, 전역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영생에 이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민족사회에 노인들의 숫자는 100만여 명에 달하며, 그중 15만 명이 무의탁 노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무료 양로원의 수용능력은 5천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서구 사회로부터 밀려오는 핵가족 제도는 부모님들을 현실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인들의 소외는 심해 갑니다. 이러한 시대의 상골 속에서 한국교회는 내 부모만을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섬길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입장에서 온 교회가 주 안에서 민족사회를 향해 효도를 다짐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주 안에서 효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제목 : 행복한 가정
본문 : 에베소 6 : 1-4
최 병 곤 목사/청주 동산교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제일 먼저 축복해 주신 곳이 가정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도 가정에서 성장하셨고 가정의 고귀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의 시작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도 했고 가정의 열매인 어린아이들을 영접해 주시고 안으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존재하는 날까지 기독교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하나의 사명입니다.
현대 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정 문제입니다.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녀간의 문제, 형제간의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5월 가정주간을 맞이하여 진정한 가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겠는가? 어떻게 우리들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규모가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무질서하고, 규모가 없고, 범절이 없는 기정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성 가정학자 버지니아 사타이아는 가정이 지니는 네 가지 중요한 특색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는 가정, (2) 서로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 (3) 규칙과 질서가 있는 가정, (4) 사회와 잘 조화되어 연결되어 있는 가정
이 네 가지 요소가 잘 적용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소위 가장(家長)들이 자녀와 더불어 동반 자살하는 기사를 많이 보게 됩니다. 가정이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규모와 질서가 없는 가정에 비극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다.
2. 서로를 이해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가족을 이루어 한지붕 밑에서 사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벌써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깥 사희생활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지라도 가정에 돌아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나눌 때 피곤이 풀리고 새로운 창조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없는 가정,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가정은 하나의 동거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는 1989년 5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하지 않은 동거자가 결혼 허가서를 신청하듯이 동거인 신청서를 내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법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동거하면서 가족 개념이 아닌 동거인의 개념으로 바꾸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가정의 정의를 기능적으로 내리면 꼭 결혼식을 올린 남녀가 아니라도, 그리고 혈통적 관계가 없는 아이라도 함께 모여 기능을 가지면 가족이라는 뜻이 됩니다. 얼마나 가정의 존재가치가 파괴되어 가는 현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 함께 거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지 않을 때 기능이 모여 동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교수 스티네트(Stinnett) 박사는 좋은 가정에는 공통점 여섯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1) 감사 : 가족 서로가 고마움을 말이나 행동으로 자주 표시하는 것
(2) 헌신 : 개인보다 나의 가족 전체의 유익과 명예를 위하여 사는 태도
(3) 교통 : 가족간의 잦은 대화로 어떤 일이 있을 때 묵과하거나 혼자 해결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의논하며 살아가는 태도
(4) 함께 갖는 시간 :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가족들이 함께 갖는다.
(5) 정신적 건강 : 낙관주의 윤리적 가치관, 박애정신 등 가족의 정신적 건강이 강한 가족을 만든다.
(6) 극복의 능력 : 가족적인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고통과 슬픔으로 넘기지 말고 변화와 발전의 기회로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이 강한 가족 등 가족 개개인이 각각 하나의 인격체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아껴 줄 때 행복한 가정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3.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가정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가정,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온 가족이 예배하는 가정, 이런 가정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바르게 신앙교육을 행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그 두 아들은 범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은 서원하여 얻은 아들로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바쳐서 훌륭한 선지가 된 것입니다.
저의 가정의 신앙훈련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2남 2녀, 사남매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성장하여 결혼을 시켜서 각기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려서부터 매일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한글 해독을 하는 대로 가정예배를 인도케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남, 장녀, 차녀, 차남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가정예배서를 가지고 인도자가 된 사람이 찬송을 찾게 하고, 성경은 다같이 돌아가면서 읽고, 예배의 말씀을 인도자가 읽고, 인도자가 기도하고, 주기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자녀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책망할 필요도 얼이 자기 차례가 되어 스스로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같이 울면서 기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가정은 이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훈련을 쌓아갈 때 요즈음 소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 문제아 문제 등의 염려가 없이 믿음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의 삶의 보람은 가정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단순히 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온 가족이 서로를 위해 주고 이해해 주고 거짓 없는 대화와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모든 가정들이 주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잘 지킵시다/딤전5:8,엡5:22-6: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가정이 파괴되고 어려움을 겪??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으로 가득 찰 때 사회가 아름답게 됩니다. 모든 것이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될 때 복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보통 교회 일에 열심히 있고, 기도도 잘하고, 부흥회나 기도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삶도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귀한 모습은 가정생활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5 :8). 그런데 가정생활에 충실한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가정 밖에서 이 일, 저 일에 분주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가정'이 소홀히 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까?
1.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은 가정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가정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많은 주부들이 가정에만 충실하는 것이 무능한 사람의 모습으로 여기고 밖으로 활동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취미생활을 한다면서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다닙니다. 호텔이나 고급식당, 그리고 헬스크럽 등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가정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지나쳐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을 잘 감당하면서 교회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목적도 가정이 잘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선물로 받아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고 복되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에 보면 교회 직분자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고, 자녀와 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교회를 잘 섬기게 됩니다. 자신의 가정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일수록 더욱더 가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을 맡길 때 그 사람의 학위나 배경을 보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을 보고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주의 백성들일수록 가정에 충실해야 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 오늘날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가정을 뛰쳐나와 이리저리 방황하고 탈선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부모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제 궤도에서 벗어나 금이 가면 그 사회가 병들고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회일수록, 또한 복지국가일수록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모두가 가정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가족과 함께 가집니다. 선진국일수록 가정이 안정되고 화목하며 모두가 가정에 충실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은 사회일수록 썩은 냄새가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정이 깨어져 거기서 흘러나오는 썩고 냄새나는 물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가정의 문제입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합니다. 가정이 치유될 때 사회도 치유됩니다. 사회문제, 청소년문제 ‥‥‥누구를 향해, 무엇을 향해 우리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 바로 우리의 가정에 있음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가정의 상처, 가정의 아픔이 해결되고 회복되고 치유될 때 우리주변의 모든 문제도 해결될 것입니다.
3.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세워 주신 '두 가지 터'가 있는데 그 첫째가 가정이고, 두 번째가 교회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닦아 놓으신 터전이기에 영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오래 지속되고 그 가치가 무한합니다. 교회 도 영원하며, 거룩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만드신 후에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서 그것으로 아름다운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깨어 보니 아름다운 하와가 옆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로다. "라고 이 세상의 최고의 사랑의 고백을 토할 정도로 기뻤으며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솜씨요, 작품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고, 서로 의지하면서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가정'이라는 '불'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도 귀하고 아름답고 복되게 생각하여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세우신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4.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경제가 성장되고 돈을 많이 벌면 누구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여건이 나아진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 든든히 서야 행복한 것입니다. 돈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면 온 사 회가 병들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 리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낙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가정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며, 가정에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먼저, 성경은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엡 5 :28).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길어지고 성숙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할 때는 뜨거웠다가 점점 식어지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아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앞설 수는 없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서가 안정됩니다. 그 자녀들은 사랑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에 잘못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넘치고 화목한 가정을 원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가정에 좋은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은 얼마 안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귀하고도 중요한 많은 것들을 가정에서 배우게 됩니다. 참 인격과 올바른 삶의 자세는 가정이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갈 때 자녀들은 그 신앙을 이어받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올바른 인격을 가진 분들이라면 자녀들도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성경은 자녀들을 가르칠 때 '주의 훈계와 교양으로' 양육하라고 말합니다(딤전 6 :4). 성도들의 가정에는 부모들이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태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는 탈선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만인 중에서 앞서 나갑니다. 그러므로 '가정'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인간교육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위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가정은 모든 사회와 국가의 핵심입니다. 교회도 가정이 모아져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교회를 주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은 천국 같고 에덴동산 같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효도/살전5:16-18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식된 자들이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하고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법을 익히고 실천을 다짐하는 주일이 어버이주일입니다. 본문에 의지하여 참된 효도를 살펴봅시다.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려하는 일이지만, 문제는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열심히 효도를 한다는 것이 효도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잘 보고 마음에 새겨서 우리 모두 하늘 아버지께, 그리고 육신의 부모님께 참된 효도를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참된 효도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요구하는 뜻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요구하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원하며, 어떤 부모는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으니 건강만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자식이 돈만 잘 벌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마다 운동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연습을 하게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나쁜 짓만 안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참 믿음만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렇듯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는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든 부모가 자식이 자기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만은 나보다는 잘 살아라 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를 향하여 가지신 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이 부족하고, 생각하는 것이 좁으며, 보는 것이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가지는 뜻이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이 세상을 뜬 후에 저 세상에 가서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므로, 육신의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과 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요구한 대로 자식들이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에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이 곧 나의 육신의 부모님이 가지신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구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식에게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향하여 가지신 이 뜻보다 더 좋은 뜻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가지신 뜻이 무엇입니까?
2.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가지신 뜻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다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을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면서 살아야 참된 효자가 됩니다. 자식을 기를 때에 항상 우는 아이는 부모의 마음에 근심덩어리입니다. 반대로 웃으며 자라는 아이는 부모의 즐거움이요, 가족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이치는 어른이 된 후에도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기뻐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울기만 하면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심 중에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기뻐하면서 살아서 참된 효도를 합시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물론 다 아는 사건들이지만 기도하여 보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처럼 자식은 부모님께 모든 일에 대한 보고를 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부모님께 아뢰고 행하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그리고 보고를 잘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보고할 때에 정직한 보고가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보고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취사선택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식은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왜 이 모양으로만 길렀어요." 하면서 원망한다든지," 다른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 주는데‥‥‥‥ 하면서 비교하여 불평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고픈 마음뿐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3. 왜 이 3가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기 위함이라기보다 자녀들을 위해서입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사는 사람은 육신이 건강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체내에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하니 힘이 없고 따라서 병균이 침입할 패에 막아 낼 힘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생활은 육신이 건강하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고 이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기뻐하며 삽시다. 육신의 건강이 부모에게 큰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영혼 건강의 비결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호흡 장애를 받는 사람과 같아서 그 영혼이 쇠약해집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 무엇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시험에서 이기게 되고, 기도하면 기쁨의 생활을 더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보고를 잘하면 그 관계가 항상 활발해집니다. 막힌 것이 없으며, 화기애애한 가정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생활 건강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있어야 사람에게도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원수가 없을 터이니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해서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됩니다.
이기심에서 발로된 효는 참된 효가 아닙니다. 물려받을 만한 유산 때문에 효를 가장하는 것은 참된 효가 아닙니다. 참된 효는 성경에서 가르친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가정에 계시는 주님/잠22:6,엡6:4-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날 파리에 있는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영국에는, 2박 3일이라고는 하지만 약 40여 시간 정도 밖에는 머물지 못했었고, 그나마 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영국을 관광한 것은 겨우 토요일 낮시간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저에게 참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가 참으로 훌륭하게 본 것은 저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였기 때문에 대로(大路)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소로(小路)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차들이 좁은 소로를 다니는데도 교통이 물 흐르듯이 소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래길에서 차가 서로 만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간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 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차들이 사고 없이,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잘 소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 보여 주었고, 그것은 경제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영국은 아직도 신사도가 살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영국은 그러한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국에서 앞날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훌륭한 문화수준과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들의 가정 때문이었습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개방으로 인하여 가정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양쪽 부모가 다 자기 친 부모인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Ⅰ? 재혼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에 아빠가 바뀌던지 엄마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바뀐 아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모 자신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상처는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희망과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가 대부분 성적으로 타락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저들이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이요, 또는 부국일런지 모르나 장차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나라입니다. 인구 수를 감안해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의 노벨상을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가정교육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려고 하면,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이며,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가정이며,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 교우님들 모두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가 되며, 여러분이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학교에서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사와 학교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말씀 중의 하나인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바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며,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과외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 악기나 미술과 같은 재능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희 교회의 집사님 중에는 전도사님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과 인재로 양육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학교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려고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도 학교와 교회의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학교와 교회가 되지 못하였고, 부모는 아이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이고, 가장 좋은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교회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이 자녀의 스승이 되셔서 좋은 학교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3
믿음의 자녀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효도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과 삶의 복을 주시기 위해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효도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지켜야 됩니다.
잠언 3장 1절은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말씀하고 있고, 6장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셨습니다. 효도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의 등불이요 빛이요 생명으로 알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모든 도덕의 기본이 '부모 공경'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1-2절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님의 사랑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은 저절로 생겨진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건 부모님들의 큰 희생과 사랑, 봉사와 양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자녀들은 마땅히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중국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숭이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 데려가자 그 어미가 백 리 이상을 좇아왔다고 합니다. 애닯게 따라오던 어미가 그만 죽었는데 조사를 해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 꾀꼬리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놨더니 그 어미는 울지도 않은 채 얼마 안가 죽었다고 합니다. 살펴보았더니 꾀꼬리 어미의 창자와 간장이 다 녹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를 향하신 부모님들의 사랑이 어떻겠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그 사랑과 헌신, 봉사와 희생에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본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 기적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요2장)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말씀을 하시자 순종하기 위해, 어머님을 섬기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고통 중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고향 땅 나사렛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같이 효도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요 백성인 우리도 마땅히 효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효도하는 것이 바른 효도의 방법이 될까요?
먼저, 본문에서와 같이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주님의 법을 먼저 따르라, 주님의 법과 육신의 부모의 말씀이 차이가 있을 때는 주님을 법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도 다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된 이들은 자녀들이 순종할 때 가장 ??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부모나 하나님께 효를 실천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이 효도인 것을 가르치는 고사가 있습니다. 시골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온 동네에 효자라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부자로 살고 있으며 부모님께 잘 해드리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효자라고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이 양반집 아들이 가난한 집 효자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몰래 싸리문 밖에서 가난한 집 아들이 어떻게 그 홀어머니를 모시는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들에 가서 일하고 돌아온 아들은 지게를 벗어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어머니에게 자기 발을 씻기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발을 씻은 다음에는 마루에 올라 어머니가 어깨를 주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반집 아들은 소문이 잘못된 것이구나 생각하고 뛰쳐 들어가 그 아들을 야단쳤다고 합니다. "아니, 자네가 이 동네에서 효자라 소문이 나 배워볼까 하고 살피러 왔더니 어떻게 어머니더러 발을 씻기라고 하고 등을 두드리라고 할 수 있나?" 그러자 효자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도록 맡겨드릴 뿐입니다. 내 발을 �기시는 것도, 내 어깨를 주무르시는 것도 모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양반집 아들은 이 말을 듣고 효과 관련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이 효도입니다.
두 번째로, 공경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공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키베드'인데 이는 키베드는 "가장 무겁게 여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간'이라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생명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공경이란 이처럼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잠언 23장22절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했습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군자(君子)는 그 어버이의 과오를 잊어버리고 그 장점만을 들어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학문이나, 재산, 벼슬이나 명예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때문에 귀중히 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세 번째로, 부모님의 육신을 잘 봉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자기 육신의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행위를 꾸짖으셨습니다.(마15:4) 그리스도인들은 물질로도 육신의 부모님들을 편안히 모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성도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도 드리고 부모님께 도 용돈으로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잘 공양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넉넉함과 훌륭한 가정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부모님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잘 되고 평안하도록 기도하는 것, 그들이 은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세상의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을 뿐입니다. 부모님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시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 땅 위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아갑니다. 부모님들이 구원받아 하늘나라 본향에 이르실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런 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효에 축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효가 인생과 가정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고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효가 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도, 공경하는 것도, 육신을 공양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효가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식치고 자기 부모에게 잘못하고 싶은 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효에는 시간의 제한이 따릅니다.
효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는 일입니다. 지금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 대대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96년에 장한 어머니 상을 받으신 박 찬해 여자 장로님이 계십니다. 박 장로님은 7남매를 키우며 교회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거기에다가 홀로 되신 시어머니를 40년간이나 모셨습니다. 이렇게 효를 다한 장로님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7남매 중 딸 넷이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30년 이상 새벽기도 한 장한 어머니"라고 칭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교회에 헌신, 충성하면서 7남매를 사회 각분야의 지도자로 키운 일 만으로도 대단한데, 박장로님은 홀 시어머니를 40년간이나 모시면서 효부 상과 장한 어머니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런 장로님의 효도와 기도가 자녀를 복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식된 우리들은 어버이 주일을 맞아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비추어 가슴을 여미며 부모에게 잘못 행한 일들을 회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배운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붙들고 효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기를 극복한 가정/룻4:13-17,벧전3:13-17
우리가 구약의 룻기를 읽을 때 한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로만 이해하였습니다. 룻기가 다만 효성이라는 덕목을 교훈하기 위하여 성경에 들어갔다면 성경에 들어가야 할 책이 동서양에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룻보다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성경에 들어간 것은 효성이라는 덕목 이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룻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이방여자인 룻이 아무 희망도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장차 메시야가 탄생할 땅인 베들레헴에 들어와서 자기 희생을 통하여 대가 끊어질 뻔한 집안의 대를 이어 놓은 것입니다. 그가 낳은 아들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룻의 등장으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넘치게 된 한 역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은총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은 메시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룻기를 살펴봄으로 고난의 역사가 어떻게 소망의 역사로 바뀌어 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위기의 역사
룻기 처음 부분에서는 나오미 집안에 닥친 불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에 살던 이 집안이 모압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거기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10년 사는 동안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집안을 이끌고 나갈 남자들이 모두 죽어버리므로 유다의 대를 이어나갈 수 없는 '위기'에 빠져 버렸고, 과부가 되어버린 세 여인의 삶은 참으로 소망 없는 고난의 삶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룻기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재난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세 여인의 '고난의 삶'입니다. 이것은 마치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것과 흡사합니다. 이 세 여인에게 특별히 지적할 만한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되는 절망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며느리인 룻은 이를 거절하고 시어머니와 동행하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고난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룻'이란 말의 어원은 '여자 동료'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여자라고 볼 수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이 룻의 출현은 뜻밖의 사건이요 예기하지 못했던 은총이었습니다. 돌아간 동서와 같이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런 경우에 처한 여인이 걸을 수 있는 보통의 길인데 룻은 '고난의 동반자'로 나선 것입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16-17
이 고백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시어머니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희망이 없는 그 고난의 삶 속에 철저히 동참하는 참된 벗으로서의 룻의 모습?都求?. 이것은 바로 신약에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로 연상케 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가 영접하여 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뱉은 탄식은 지금 그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란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차라리 "쓰라린 한을 품은 자"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떠날 때는 그래도 아쉬운 것 없이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이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탄식대로 베들레헴 사람들이 볼 때 그의 귀향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고난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나오미의 탄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한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 밑에 신음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 분단된 땅에서 전쟁과 독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기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보다 더 오래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고난의 역사는 끝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때 흥청거리다가 갑자기 당한 경제 대난을 만나면서 실업으로 인하여 지금 가정들이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오늘의 상황은 나오미처럼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는 나오미처럼 완전한 절망에 빠진다면 거기에서 헤어날 길이 있겠는데,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버티고 있는데서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를 아직 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하게 자기의 처지를 '나오미' 즉 기쁨으로 인식하지 아니하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인식한 여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은 비로소 개입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는 인간의 철저하게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고난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탄식하며 울부짖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에 처하였을 때 그 고난의 자리에까지 내려 오셔서 함께 고난을 당하시므로 그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경제 정책의 실패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벗어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의 궤도를 벗어나 함부로 달려간 정치의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위기를 이런 구원사적인 이해를 가지고 해석하고 대처할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정치적인 시각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문제를 접근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계속해서 가로막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절망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계속 헤매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셔서 거기서 이삭을 줍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끼니를 위한 작업이었지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돌보아 주면서 룻의 행위를 칭찬하였습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11-12
보아스도 나오미와 룻이 당한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룻에게 깨우쳐 준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의 보고를 듣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집안의 기업을 이를 가까운 친족임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시어머니는 그의 며느리에게 목욕하고 향수를 바른 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보아스의 잠자리로 숨어들라고 지시하였고 그 며느리는 그 지시대로 즉각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어떻게 보면 파렴치한 일이요 지탄받을 행위일 수 있기에 이것은 큰 모험이요 위험이 따르는 고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유다의 대통을 잇기 위하여 자신의 생과 자기 민족 그리고 자기의 종교까지 버린 것입니다. 룻은 자기의 젊음을 희생의 제물로 하여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한 한 여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부요를 비우고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희생된 것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나무라지 아니하고 그가 이루려는 구원사적인 행위를 이해하고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희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을 바람난 여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받을 여인이요 순결하고 정절이 뛰어난 여인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맥락을 이어가는 중요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즉각 법적인 절차를 밟아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보아스에게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11-12
룻은 여기서 무자한 이스라엘 가문을 일으킨 라헬과 레아, 그리고 무자한 유다 가문을 일으킨 다말과 같은 선상에 서는 여자가 됩니다. 이것은 룻의 역할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를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임을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룻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룻은 사라지고 나오미가 동네 여인들의 축하를 받는 것으로 보도가 됩니다. 아들을 낳은 것은 룻이지만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여인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룻기가 처음에 나오미의 탄식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때, 이제 그녀의 탄식이 바뀌어 기쁨의 노래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의 탄식이 변하여 나오미의 기쁨으로 바뀌었음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은 하나의 희생의 제물로만 등장을 한 것입니다.
서두에 나온 나오미의 탄식은 세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1)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탄식
2)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 대신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탄식
3)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여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탄식
그러나 나오미의 이런 탄식이 하나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빈손이었던 그녀에게 보아스가 보내 준 곡식이 담겨지고 그리고 그 손에 아들이나 다름없는 손자가 안기운 것입니다.
살맛을 잃었던 나오미에게 여인들의 축하의 노래가 들려집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그 품에 안긴 아들은 바로 그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살맛을 찾게 해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의 괴로움을 끝나고 그의 원래의 이름대로 기쁨의 생애가 그녀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희망이 없었던 나오미에게 놀라운 희망이 안겨진 것입니다. 모든 축하와 기쁨은 룻이 아닌 나오미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룻은 이 기쁨의 자리에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또 다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절망과 고난의 역사가 변화되어 희망과 생명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비천하고 야비하며 연약하였던 우리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룻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오미의 생애가 역전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음으로 달려가던 인간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역전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탕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룻기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예표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 이후부터는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모든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역전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과 고난을 감수함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나오미처럼 희망이 잃어버린 이 민족을 외면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함께 그 고난의 동반자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의 현실은 이 역사를 반전시킬 룻과 같은 고난의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야말로 이 고난 당하는 이들의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고난의 역사를 구원사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서는 누가 기쁨으로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룻기가 보여주는 소망의 신학은 룻이라는 연약한 한 여인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고난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한국교회가 그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이며 그 희생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는 우리 모두 역사를 함께 살피며 나갈 때 찾아질 것입니다.
오늘 많은 가정들이 가장의 실업 때문에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위기의 때일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가족들이 단합하여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때에 불평과 원망은 가정을 완전히 파괴하는 악마의 소행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가족 모두가 룻과 같이 자기를 완전히 희생하며 서로를 섬길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이 고난의 역사는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멍에에 짓눌려 탄식하고 있지만 말고 역사를 두루 살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서 순종함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이 역사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입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습니다. 평범한 한 여인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고난의 동반자"로 나섰던 룻과 같이 오늘의 고난을 가족과 또 이 민족과 함께 나누는 "고난의 동반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룩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를 마땅히 공경해야 합니다/삿11:30-40,엡6:1-4,막7:24-30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인간이 인간이 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고, 그리고 인간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배제하고서는, 인간의 행복을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근본이 되시고, 부모님은 우리의 육적 근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를 잘라 냈을 때에, 그 나무가 금방 말라죽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어버이를 부정하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거니와, 어버이에 대한 공경심이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어버이를 업신여기게 되면, 그런 사람은 곧,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기본 도리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에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어버이를 잘 모시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한, 잠언 23: 25의 말씀처럼, 부모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부모를 잘 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자식을 키우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우리 자신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써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식들 보고 "이 아비 어미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도 몰라주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부모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식들을 보고 하는 말은 사랑의 음성이고, 부모가 우리에게 하는 말씀은 잔소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이 답답하게 여겨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식들이 볼 때에,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답답하게 여겨질까요? 왜냐하면, 부모님과 우리의 세대 차이보다는, 우리와 자식들의 세대 차이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 부부들은 대담하게, '우리는 나중에 늙어서 자식들을 의지하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지금 부모를 모시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변명 삼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노인들의 고통과 고독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치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한 길을 갑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 길을, 머지 않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독을 우리도 맛보아야 합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자작이냐 모방이냐로,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동시(童詩)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울리지 말라. 지내 온 길인 걸.
늙은이를 탓하지 말라. 다 가는 길인 걸」
어른들은 자식들을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을 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우리도 언제 가는 늙은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노인들의 반복되는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젊은 우리도 늙어지면 자식들로부터, 우리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지겹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위(當爲)입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무슨 공경할 만한 일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낳아서 키워 주신 부모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1. 점점 더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바울 선생은 「자녀가 되신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씀이 다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의 질서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다 고루 그 빛을 비추듯이, 그의 부모가 악하든지 선하든지 간에, 그 자식은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명령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바울 선생은 에베소서 6장 1절에서도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①그러나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공경스럽지 않은데, 어떻게 공경하며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면 이렇게 말할 게 틀림없습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어른도 몰라본다. 아비 어미 알기를 우습게 여긴다"고 말이지요.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른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②부모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를 보십시오.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는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개만도 못한 여자'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자기 딸의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그 모욕을 참아 내고 있습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父兮生我(부혜생아)하시고 母兮鞠我(모혜국아)하시니, 哀厓父母(애애부모)여 生我句勞(생애구로)셨다. 欲報深恩(욕보심은)인데, 昊天罔極(호천망극)이로다. 〉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 슬프고 슬프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얼마나 애쓰시고 수고하셨던가!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그 은혜가 하늘같이 다함이 없도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나를 낳고 기르신 공로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안다고 해도 얼마나 지극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자식을 사랑하고 기르며 가르치는 수고가 어떠한지, 그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잘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이 문제를 속히 풀어서 깨달을 수 있을 때에야, 부모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③빗나간 자식 사랑이 불효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심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잘못된 자녀 사랑 때문입니다. 너무 공부만 강조하다 보니, 인간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만 잘 하게 해서 출세시켜야 하겠다는 부모의 지나친 욕심이, 정작 중요한 인간 관계나 공동체 생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자기만 알고 부모와 이웃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부모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도 쉽게 내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들을 가르치되, 우리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교육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를 ?? 섬기게 되며,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주셨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악습이 있었던 것은, 우리 인간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줄 알고, 늙으신 부모를 갖다 버렸겠지요.
젊은 우리도 언젠가는 늙어져서, 잔소리를 한다고 자식들로부터 구박을 받을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 생각할 때에는 안 할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심해져서, 조금 전에 한 말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을, 어떻게 그 길을 피해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지난 주 월요일에, 어느 목사님 내외와 함께 출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잔소리가 아닌, 사랑의 음성으로'이라는, 지난 주 설교 제목을 사모님께서 보시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있는데, 지금 초등 학교 4학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사모님이 뭐라고 하자, 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로만 여겨져서,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에도 청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의 말을 잘 듣게 될 것입니다.
①'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고 오래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면,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부모를 떠나서는, 행복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부모의 사랑도 깨달을 수 없거니와, 노인들의 잔소리나 간섭을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정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망령 끼 섞인 푸념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자식에게 강요하다 싶이 하면서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까지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늙어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그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실수나 잘못을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며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보다 더 어려운 가정을 도운 일, 우리보다 연약한 이를 보살펴 준 일, 우리보다 부족한 믿음 가진 이를 열심히 권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다 훌륭하고, 모두가 다 실수하는 일이 없고, 모두가 다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가 누구를 도와 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성하고 보니, 우리를 길러 주신 부모가 연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연약해진 부모를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인간의 도리요,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②자녀된 우리는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을 보십시오. 섣불리 하나님께 약속한 아버지의 서원 때문에, 애매한 딸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버지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세상 삶으로 끝나고 만다면, 이 딸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이후 이백 년 또는 삼백 년을 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지금 혹시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노라'고 한다면, 과연 그 즐거움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오늘 우리가 부모를 섬겨 사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의 말을 듣고 순종하기가 참으로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 섬기는 일이 힘들다고 부모를 업신여기게 되면, 우리의 자식 또한 우리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래도 좋다는 말입니까?
3. 공경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상대방도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불평하게 되면, 상대방도 나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고 비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되면, 우리의 자식들도 분명 우리에 대해서 불평 불만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식들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을 갖게 되겠지요.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린 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입니다.
①우리는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우리에게 해 준 일이 뭐가 있느냐?'하거나, '다른 부모에 비해서 우리 부모는 형편없다'고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혹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우리 대(代)에서 그 불행은 끝나야 합니다.
이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찾아보면, 부모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생각났으면, 마음으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쉬운 대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해 보십시오. 의외로 부모님은, 그 말 한마디에 눈물지으며 고마워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할 것 없이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일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열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나 하나님께로부터 칭찬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송강 정 철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은혜를 잊고 살다가, 그 은혜를 깨닫고 보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부모를 모른 체하며 살게 되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짐승의 자리에 빠지는 불행을 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②부모님을 공경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를 잘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시에 잘 섬기는 일이 됩니다.
③후세들을 올바로 교육해야 합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은, 자녀를 진정 아끼고 잘 교육하는 길이 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세상 지위가 높을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 교육은 학교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말(言)이 아니라 행위를 본받는 실습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가정입니다. 부모가 하는 대로 자녀들이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지 않을 경우에는, 새로운 가정의 시작을, 예수를 믿는 내가 열어 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야, 지금까지의 잘못된 구습을 타파하고 아름다운 전통을 새로 세울 수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 그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부모 앞에서는 불효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알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채 듣지 않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요 불효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에 옮김으로써, 자식들로부터는 존중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는 귀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대가 함께 사는 가정/히11:3-11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堧隔?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기독교적 경로사상/레19:32,딛2:2-3
1. 노인을 공경하라.
오늘 읽어 드린 레위기 말씀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창조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인을 공경하라고 명하신 까닭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에서 노인은 축복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공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을 놓고 에서와 야곱이 다툰 사실이나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한 사실들을 통해서 보듯이 노인의 축복권은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축복권은 단순한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전통을 잇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에게 부여된 이 권한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자연히 그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노인을 공경하여야 할 이유는 그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아낌 없는 희생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어버이들의 희생과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경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노인들은 젊은이보다 삶의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를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 속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삶의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넷째로, 노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하여질 때이기 때문에 당연히 돌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위로하고 돌보아 드리며, 노인들의 삶에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 드리는 일은 자녀들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2. 어떻게 공경할 것인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노인을 어떻게 공경할 것인가? 첫째로, 노인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야 합니다. 노인들을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편견을 고쳐야 합니다. 노인들을 비생산적이고 비활동적이며 비능률적이라고 단정하고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노인들은 개성을 지닌 독특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노인들에 대한 통념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 노인들이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고, 그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려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개성적인 존재가 되어 가기 때문에 그런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셋째로는 노인들에게 개인적인 관심과 인격적인 접촉을 제공해야 합니다. 노인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해와 수용이요, 따뜻한 인간적 관심과 접촉입니다. 노인들을 같이 모시고 있을 때나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시간을 내어 자주 전화하고 찾아 뵙고 따뜻한 위로를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진정한 공경은 따뜻한 관심에서 시작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넷째로는 노인들에게 독립심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적절한 활동과 참여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노인들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이 유용하고 쓸모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도록 도와 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 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노인들 스스로가 존경을 받게끔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노인들 측면에서 레위기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젊은이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노인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노인들이 공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공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 혹은 깨끗하고 정의롭고 확신에 찬 삶의 모습을 이룩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손들에게 남겨 줄 만한 정신적 유산을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발굴하고 그것을 물려주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적 전통을 수립하고 전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존경받는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의 백발이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기 위해서는 평생 그가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노인이라고 무조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지나온 삶이 아름답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혹은 욕심껏 자리에 연연하여 추하게 그것을 추구한 사람들을 보면 그 노년이 별로 아름답지 못합니다. 우리는 노년이 존경받을 만한 시기가 되도록 항상 의로운 길을 추구해 가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노인이 될수록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년기는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때요, 신앙적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때입니다. 정신적으로 결코 쇠퇴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낙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입니다. 노인들에게는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그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넷째로, 죽음과 친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늙는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 창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쇠약함과 죽음을 두려움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관문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통과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기 주변을 정리하면서 필요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유서도 쓰고, 그리고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맞는 노년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버이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또 어버이에게 그의 계명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함과 동시에 어버이를 공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달라지면서 과거의 전통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더욱 힘써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그의 계명들을 되찾아 자녀들은 노인을 공경하고, 노인은 스스로 공경을 받을 수 있도록 의로운 길로 행하여 나가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3
우리는 모두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고로 부모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낳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양육하시느라고 오줌똥을 더러운 줄 모르고 주물러 주시고, 때가 되면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잠자리를 가려 누여 주시고, 병이 나면 간호하시느라고 밤을 세워 보살펴 주시며, 애써 공부시켜 주시고,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힘드는 일, 위험한 일도 생명을 아끼지 않고 뛰어 드는 것이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생명을 마치 자기의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고,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달게 받으시는 것이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늙어도 자식을 어린애처럼 생각하고 위하는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런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입니다.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천륜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10가지 계명 가운데 사람에게 주신 첫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1.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우리 나라 백성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에서는 효도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효도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도에 대해서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주 안에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왔을 때, 그때 한국 사람들은 유교를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효도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집집마다 죽은 부모님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은 부모에게 잡숫지도 못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잘못 되었다고 금하였습니다. 사실 이미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으므로, 제물을 차려 놓아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지 못하게 금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기의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식이라고 하여 몹시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효도하라고 하는 말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뜻에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효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효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운 일이 내게 닥쳐올 때에도 항상 변함없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2.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땅에서 잘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룻기 1:16~17에 보면 모압 여자 룻은 청춘과부가 되어 아무런 의지할때가 없고, 희망이 없는,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공경하기 위하여 자기의 고국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고국땅 베들레헴까지 따라가서 가진 고생을 다했으나, 시어머니께 효도함으로 보아스의 눈에 들어서 그와 결혼하여(재혼) 오벳이란 아들을 낳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왕의 조모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 메시야가 탄생함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최고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잘한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손에 팔려 애굽인의 종이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또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오는 것을 거절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죄수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시어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귀한 자리에 오르게 하셨고, 다시 그의 아버지 야곱을 영접하여 효도함으로써 110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잘하는 사람에게 효도상을 주어 국민들에게 효도의 본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부모님이 불구자가 되었거나, 혹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서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오랫동안 대소변을 일일이 손으로 받아내면서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보살펴 드리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부모님이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나이가 많아서 움직이기가 어려울 때에도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3.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도할까 연구합시다.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도해 드려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는 바리새파 사람 중에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에게 아무런 대접도 해드리지 않은 채, 고르반하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부모님께는 아무 대접도 해 드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르반한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사람이니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 전에 어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이제부터 즉시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면 부모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속에 큰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직 효도를 게을리 하고 계신 분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꾸고 바로 효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동래에 효도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병이 나서 의원에게 찾아가 의논했더니, 큰 잉어를 구해서 고아 드리면 병이 났는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서 못에 가서도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의 못을 가보았지만 어떻게나 날씨가 추운지 연못마다 모두 얼어붙어서 도저히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잉어를 구하러 다니다가 몸은 추위에 얼어 붙었고, 잉어는 구할 수가 없어서 논 곁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가 울고 있는 바로 옆에 있는 논에서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얼른 잡아서 어머니께 고아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낳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동래온천 자리입니다. 온천수가 논으로 흘러내려 거기에 잉어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여러분 효도는 어버이주일 하루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에 예쁜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주는 것으로 효도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버이주일은 일년에 한 번 밖에 없지만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일년 내내 계속되어야합니다. 우리 나라는 농경사회에서 급속하게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핵가족제도가 급속하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부모님을 생각하고 공경하는 일이 아주 등안시 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큰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홀어머니가 아들딸 모두를 갖은 고생을 하여 공부시켜서 출세시킨 장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결혼하여 대구에 있는 모 대학 교수요, 딸들도 시집을 가서 모두다 잘 살고 있었습니다. 홀로된 어머니는 인천에서 혼자 아파트에 살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소식이 여러날 없어도 아들딸들은 어머니가 그냥 잘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았을 때, 이미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서 시체가 된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아파트 경비원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다면 날마다 전화로 문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곁에 찾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바람이 늘 한 곳에 머물고 있지 않듯이 부모님은 늘 살아 계시지 않습니다. 옛시조에 ■어버이 살았을 적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은 나이 많은 어른들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살았을 적에 주 안에서 효도하여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즐거움/잠23:19-25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세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없는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한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만은 "A Father's Prayer" by MacArthur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Build me a son"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 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한국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엇인가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한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은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다.
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히 마음을,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야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째가 뭐냐 하면은 어떤 일이든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외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니다. 이제 이 분의 마음속에 슬픔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Ю만?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 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지요. 그래 옛날에는 과거를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하면 효자요, 허구헌 날 낙방하면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아들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요." 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면은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 "그 때에 그 어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여라."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 "너는 효자다." 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 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님이여, 그놈을 불효자랍니다. 효도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습니다." 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주라." 그랬어요. "흉내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 결국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양로원에 보내야 됩니다." 그게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적으로 25%입니다만은 한국만은 아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 국가입니다. 그래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발광을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성경은 오래 사는 비결 오직 딱 하나 가르쳐 줬어요. 그것은 효도하라 그랬어요. 부모 박대하면서 오래 살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비성서적이요. 사업에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부모님 마음 슬프게 하면서 사업 잘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40년 목회 하면서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오래 사는 집, 거기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아주 성공한 사람은 비록 잘못도 많지만은 그 분은 효자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불효하면서 잘 되고, 불효하면서 건강하고, 불효하면서 오래 살고…… 기대하지 마세요. 효가 장수와 형통에 철저한 비결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제가 뉴욕에 갔을 때에 제가 잘 아는 친구 분이 계세요. 거기에 한번 오랜만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제가 이 서울에 있을 때에 그 분, 그 어머니를 가까이 지났거든요. 잘 아는 터이라서 가자마자 어머니 어디계시냐고 그러니까 아 저 골방에 계신데 뵙지 말라고, 냄새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어머니가 자꾸 보고싶어서 문을 열어요. 문을 여니까 또, 가서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문을 꽝 닫잖아요. 그걸 내가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웬만하면 내가 분위기를 위해서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더니요, 그 어머니가요 얼마나 슬피 우는지요. 내가 곽목사님 온다는 말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못 만나게 했다고…… 그러면서 우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여러분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요. 구제 대상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가 존중해야되요. 어느 사람은 논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강한 이유? 오직 하나,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겨 무슨 말하다가도 "이거는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전승이요, Tradition"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야 하는 거예요.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이 잔소리가 많고 그들이 간섭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다 그 깊은 곳에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선하라.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너만은 좀 열심히 해다오." 보상적 심리가 있어요. 또 나는 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의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이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 조금은 지나칠 때도 있어요. 말씀은 다 안하고 있지만은 그런 후회가 많아요. 과거의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랬다만은 너는 제발 이래다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요. 그런고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한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20절로부터 보면은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마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되요. 청종하는 지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효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소원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신앙생활 잘해서 영생의 기업을 얻으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서 모든 일에 실수없이 행하면 부모님께 직접적으로 효도하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다고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고……" 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니다." 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 자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고로 부모님을 즐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잠23:22-26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시 한번 반성하며 신앙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 할 때 어떠한 복이 임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가지 먼저 생각할 것은 부모라 할 때 나를 낳아 주신 어버이만이 아니며 또한 내가 낳은 자녀만이 자녀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결혼한 일이 없습니다만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 외에도 여려 사람을 믿음으로 낳았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볼 때 그처럼 훌륭한 아버지는 없다고 본다. 어버이되는 바울은 아들을 훈계하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음으로 영육간 효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였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진정으로 어른들은 다 내 부모요, 어린 청소년들은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은 토요 열림마당에 나오는 재가 장애인을 보고 '내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은 다 내 아들들이라'하는 마음과 '이 땅의 모든 노인은 다 내 부모님이다'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나는 효도 할 길이 없다고 하며 지난날에 불효한 것이나 후회하면서 눈물이나 흘리는 자녀는 효도 할 수 없다. 이제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으면 내 친구의 어머니도 있고 내 이웃의 어머니도 있으며 또한 이 땅에도 버려진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 내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이 땅에 아버지의 연배되시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에는 효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효는 첫째, 목적이 무었이냐가 중요하다. 누구를 위한 효냐하는 것이다. 정말 부모님을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함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선행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비록 구제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면 그 효도는 완전히 타락된 효도이다.
둘째로, 효는 그 방법이 문제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가? 흔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소홀히 하다가도 돌아가시고 나면 야단스럽게 굴면서 효자인 척 한다. 산 부모는 모셔봐야 이득이 별로 없고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얼마나 잘못된 방법인가? 목적이 그릇되고 방법이 잘못되면 미신적인 데로 빠져든다. 우리는 무엇을 효도하며 왜 효도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나이 많은 부모님을 자랑으로 생각해야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노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노인이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소외당하고 외롭게 사는 시대이다. 부모님이 오래 살도록 해 드리는 것과 장수하시는 부모님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효도이다. 엡6:2-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장수의 복은 효도하는 가정에 주시는 복이다. 따라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있고 그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늙으신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시다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 졌다 할지라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잠6:23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했다.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 자부가 아니냐고 칭송 듣는 것이 효도이다.
성경에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말씀하신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축복권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부모가 자녀에게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는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효도가 바로 복을 받는 기준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선포 할 수 있고 자식은 그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도 야곱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은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큰아들, 작은아들을 구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빈 복은 그대로 임했다. 그러므로 장수하신 그분의 자녀됨을 자랑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개념으로 볼 때도 부모의 죽음이 자식들의 책임이며 세상 떠나게 된 부모님을 잘못 모셔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죄인의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상복이다. 그런데 요즈음 장례식에 가 보면 상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옛날에는 상주가 죄인이기 때문에 수염도 안깍고 세수도 안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빨간 루즈까지 입술에 바르고 희희닥 거리며 웃지를 않나, 농담을 하지 않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
둘째로, 마음 편하게 모셔야 한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ex) 서울 중앙청 뒷 쪽에 효자동 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을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가 있다고 한다. 옛날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하여 자다가 손자를 깔아 죽였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실수하여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염려하여 아미를 몰래 안고 나와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아 불효 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죽은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 이 일을 임금님이 듣고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다. 어쨋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편하게 모시려는 것이 진실된 효도이다.
셋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효도이다.
요한3:4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했다. 내 아들이 진실하게 살고 내 딸이 아름답게 사는 그것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고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는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토론을 열심히 하다가도 "이것이 전승이다." 하면 절대 따르게 된다. 전승, Tradition이 무엇입니까?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모님들의 교훈들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부모의 말씀을 업수히 여기지 않고 존중한다. 이것이 신앙의 지혜이며 그 신앙적 효도가 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속여도 부모는 자식을 속이지 않는다. 거짓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서는 않된다. 불의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효도하고 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루 한 두번은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우리집에 어머니는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꼭 계셔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부모님 하시는 일이 다 옳고, 그 교훈, 그 뜻이 옳았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효도요 그리고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때에 그것이 바른 효도이다. 부모님의 귀를 즐거워하는 것이 참된 효도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참되 효도이다. 의인의 후손은 번성하며 은혜를 입는다.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나 또한 좋은 부모가 되어 후손에게 복된 길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형통한 복이라도 당대에 끝나 버리면 큰 비극이지 복이 아니다. 그래서 시 128:6에 가정의 복을 말씀하시면서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고 하였다. 대를 이어 내려가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믿음의 씨았을 심어야 한다.
ex)곽 선희목사님 책 가운데 이런 간증이 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올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손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벌도 부자도 아니지만 하고 싶은데로 구제하고 선교를 한다고 했다. 사실상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이며 소망 교회가 하는 일은 대단하다. 그렇게 된 이유를 곽 목사님은 자기가 선해서가 아니라 다 조상 덕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밥도 달라고 오고 쌀도 달라고 오면 할머니께서 손에 잡히는 데로 많이 주시곤 했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기를 '내가 죽거든 일 주일 동안 거지 잔치를 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아 가셨을 때 소를 잡아 일 주일 동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불러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 선조들의 신앙과 심어놓은 의로운 행위가 지금 자기에게서 거두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지금 부지른히 심어 놓으면 내 후손이 절대로 걸식하지 않는다. 솔직히 유산은 물려주지 않아도 신앙적 유산을 물려주면 어디를 가든지 귀인을 만날 것이다. 복받지 못할 짓만 하면서 복을 달라고 비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다.
오늘 우리는 부모상이 좀 달라져야 한다.
1) 훌륭한 아버지는 돈 많고 비싼 외제 장난감이나 뭐든지 사 달라는 대로 척 척 사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2) 훌륭한 아버지는 지위가 높아 교장 선생님도 쩔쩔매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작년에 어느 외국 신문에 나온 기사 가운데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다음의 다섯가지 조건을 충족 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째, [때로는 엄마를 몰아내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엄마가 아이를 치마폭 속에 넣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이따금 엄마를 빼 돌리고 아이들과 아버지가 집안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자기를 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해야한다.
둘째, [아이들을 자연으로 끌어내라]는 것이다. 등산도 좋고 야외 천막 생활도 좋다. 그래야 아이들이 순수하고 강하게 자란다.
셋째, [시선을 아이들과 같은 높이에 두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서서 말하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아버지에게 눌리게 된다. 그러면 부모 자식간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넷째, [아침에 얼굴을 맞대라]는 것이다. 퇴근이 늦은 아버지가 아이들과 마주앉는 기회는 이른 아침 이 외는 드물다. 그 기회 마저 놓치면 부자간에는 틈이 생기게 된다.
다섯째. [어린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신조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라」고 말씀 드린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며 또 자녀들에게 기쁨을 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이다.
땅에서 형통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자자손손 이어지는 가정되기 위해서 효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어버이에게 주신 지상명령/엡6:4-
저는 이 요절을 어버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어버이로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내 생명의 연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 생명의 연장입니다. 여러분은 죽어요,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을 통해서 내 생명이 이 지상에서 연장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영혼은 천국에 가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거예요. 자녀들은 지상에서의 내 생명의 연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원하는 거예요. 자식이 없으면 지상에서의 자기 생명이 끊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을 맞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지상 명령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기에 보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우리의 자녀를 노엽게도 하고 아내도 노엽게 합니다. 또 아내들은 남편을 노엽게 하고 시어머니도 노엽게 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럴 때가 많이 있어요. 예전에는 특히 아비들이 자녀들을 명령으로 마구 눌러서 자녀들을 노엽게 한 때가 많이 있었어요. 우리 성경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주의 교양'이라는 말이 'discipline(훈련)', 그리고 '훈계'는 'instruction(가르침)'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원문에 보다 가깝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영으로 훈련(discipline)하라. 또 말씀을 가르치면서 양육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데, 우리의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이올시다.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잘 자라지 못 합니다. 꽃나무나 과실나무를 키울 때 아무리 비료를 주고 태양 빛이 좋다고 해도 토질이 나쁘면 태양 빛이 들어오지를 않아요. 기본적 환경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도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 가장 좋은 환경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가장 좋은 환경을 '에덴 동산'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좋은 환경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말로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이라는 말은 '기쁨의 동산'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과 하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형상이에요. '아빠 닮았다,' 또는 '엄마 닮았다'고 하지요? 우리 인간의 마음과 성품이 지금은 죄인이니까 변질되었지만, 본래는 하나님을 닮았어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귀한 자녀들을 어디에 두셨어요? 아무 곳에나 두시지 않고 특별히 에덴 동산, 기쁨의 동산을 창조하셔서 그 곳에 두셨어요. 우리 사랑하는 부모들이 그 어린 자녀들을 가슴이 찢어지고 터지고 메이도록 '이 아이만 잘 되면...' 하며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디에 두셨어요? 에덴 동산, 그 기쁨의 동산에 두셨습니다. 기쁨의 동산에는 무엇이 있었읍니까? 선악과가 있었어요. 선악과가 뭐예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고 그걸 따먹지 말라 하시는지? "따먹지 말라"고 하실 바엔 아예 만들지도 않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자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자 훈련받은 사람은 선악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실 바엔 아예 만들지 마시든지 아니면 한 쪽 구석에 놓지 않으시고, 에덴 동산 중앙에 놓으셨어요. 그것도 따먹지 말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이상해요. 그러나 우리는 선악과가 있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고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알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쫓겨났어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왜 쫓겨 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하신 그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사과를 따먹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으면 쫓겨나지 않아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계속 기쁨의 동산에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 따먹지 않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라는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불순종인데, 불순종하니까 쫓겨 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안 따먹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니까 에덴 동산에 머물러 있어요. 이 에덴 동산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라고 합니다. 기쁨의 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니까 기쁨이 충만해요.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참 좋은 환경으로 삼기 원한다면, '에덴 동산 중심에 선악과나무가 있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순종만 했더라면 ...' 하고 우리 가정의 중앙에 하나님 말씀을 두고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 주권을 바치고 순종할 때, 우리의 가정이 에덴 동산이 된다고 배웠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주권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그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는 본래 이방인의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할아버지입니다. 소망이 없던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살 때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이 됐는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았는데, 그가 했던 일은 먼저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난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요.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마을을 형성할 때 먼저 그 마을의 중심지를 찾았어요. 그들에게는 아직 자기들이 머물 집이 없었지만, 그 마을의 중심지에 제단, 즉 예배당을 먼저 세웠어요. 그 때문에 지금도 남부의 시골 마을에 가면, '다운타운(downtown)'이라는 중앙에 예배당이 있고 그 옆에 시청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영적 중심, 시청은 육신적 중심입니다. 청교도의 후손들도 '우리는 먼저 예배당을 지어서 그 예배당에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제단을 먼저 쌓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서 청교도들도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 먼저 제단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먼저 돈 버는 생각, 먼저 숙제하는 생각, 먼저 학교 가는 생각, 먼저 쾌락을 즐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제단을 누구에게 먼저 쌓는가? 내 욕심의 제단을 먼저 쌓지는 않는가? 물질과 쾌락의 제단을 먼저 쌓는가, 하나님께 먼저 제단을 쌓는가? 누구를 먼저 섬기는가? 내 인생 뿐 아니라 자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히 중요한 얘기올시다. 그러니 가정 예배를 꼭 바쁜 아침에 드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직장에 가야 하는데, 어제 밤에 늦게 귀가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출근하여야 하는데, 거기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드릴 수가 없어요.
문제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잠깐이지만, 경건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모습, 한 절이라도 좋아요, 먼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식사할 때에는 모두 한 자리에 모이니까, '오늘 수고했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자. 얼마나 감사하니? 이북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어렵니? 우리 감사하니까 찬송가를 1절만 부르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애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누구는 어때서 감사, 누구를 주셔서 감사하면서,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자세가 올바른 겁니다. 격식을 차리고 율법적으로 하면, 그건 율법적이기만 하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자세가 문제란 말씀이죠.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지고, 나부터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실천은 어렵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정의 어떤 법을 만들 때에도 애들의 동의를 얻어서 잘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참 증인되길 원합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며,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는 하나님을 참 사랑해'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요. 아버지가 거기서 흐느끼며 기도하는 것을 애들이 볼 때에, '아! 우리 아버지도 우네!' 하며 느끼는 것이 다를 겁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 앞에 좀 더 올바로 서기 위해서. 올바른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팔로 알토(Palo Alto)에 있는 저희 교회에 새로 나온 가정이 있었어요. 그 부인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까불기만 했었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나에게 와서 상담을 청해요. "목사님." "왜 그래?" "제게 아들과 딸이 있는데, 얘들이 밤낮 싸우고 말도 안 들어요. 소리를 지르면 그 때만 조용했다가는 또 싸우고 그래요.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왜 그러는 줄 알아?" "왜 그래요?" "네가 하나님에게 못 되게 굴었잖아? 네 꼬락서니를 닮아서 그렇지 뭐." "어이구 목사님, 사실이 그래요." "그러니까 다음에 애들이 싸우면 꼭 이렇게 해." "어떻게 해요?" "내 말대로 하겠다면 가르쳐 주겠지만, 그렇지 않겠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거니까 안 가르쳐 줘." "꼭 그렇게 하겠어요." "애들이 그러는 것은 네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회개해야 하는데, 혼자 회개하지 말고 애들이 싸울 때 그 아이들을 붙잡고 '자, 너희 주일 학교에서처럼 기도하자' 하고 꼭 이렇게 기도해. '하나님 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애들이 싸우면 제가 소리지르고 잘못 했어요. 하나님은 제가 잘못할 때 제게 소리지르거나 저를 벌하시지 않고 밤낮 용서해 주셨는데, 저도 이제부터는 이 아이들이 싸워도 소리 지르지 않을게요. 용서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을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애들이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돼." "또 싸우면 어떻게 해요?" "뭐라고 할 것 없고 '우리 기도하자'고 하면서 기도만 해." 얼마 후에 나에게 보고를 하는데 말씀이죠, "목사님." "왜?" "애들이 착해졌어요. 싸우다가도 '기도하자'고 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기도해요." 엄마가 먼저 회개하고 소리지르지 않고 자기 꼬락서니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정말 상한 심정이 되어서 기도하고 애들을 정말 사랑하면, 그 애들이 믿음으로 자라는 것이에요. 그건 연극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정은 이렇게 이루어야 합니다. 실제적이에요. 이론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애들을 훈계해야 됩니다. 군대는 훈련이 없으면 소용이 없어요. 지금 우리 나라의 큰 문제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무법 천지예요. 왜 무법 천지가 되었습니까? 부모님들이 애들을 훈련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부족해서 그래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저부터도, 훈련하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잘못 하면 훈계를 해야 하는데, 싫은 소리를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애들도 잘못 했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부부 사이도 잘못 한다고 하면 기분 나빠해요. 사실 충고를 잘 듣는 사람이 정말로 성숙한 사람이고,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고하기가 참 힘들어요.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다른 사람이 잘못 할 때, 가정에서도 내 아내가 잘못 하거나 내 남편이 잘못 할 때,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깨달은 너희는 잠자코 있어야 되는가? 성경을 보니까 잠자코 있으면 안 돼요. 더구나 부부 사이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서로 끄집어 내 놔야지, 불만이 속에 자꾸 쌓이면 이것이 삼팔선처럼 휴전선이 되어 버려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온유한 심령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내가 온유한 심령이 됩니까? 내가 용서받은 탕자가 될 때 내 자신이 온유한 심령이 되는 것이에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라고 했어요.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온유한 자가 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용서해 주시고 어떻게 지으셨는가를 깨달으면 내 자신이 온유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부족한 것을 어떻게 참으셨는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족할 때마다 눈을 흘기시고 업신여기시고 꾸중하시지 않았지 않은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어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보고 그랬어요. 삭게오에게도 그랬어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 자녀들이 잘못 할 때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부족한가'를 생각 할 때에, 끝까지 오르던 화가 쑥 내려가고 온유해져요.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바로 잡고 '나도 이 아이처럼 하면 안 되겠다'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면,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고, 말의 실수가 많기 때문에 자꾸 상처를 줘요.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인데도, 말의 실수 때문에, 말에 온유가 없어서 상처를 주게 되고 도리어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 대화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훈계하고 가르쳐야 할텐데,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가?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목사님 아시죠? 그레함 목사님의 사모님도 빌리 그레함 목사님 때문에 유명하거든요. 하루는 텔레비전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데, 기자들이 짓궂게 물어봤습니다, "사모님, 사모님도 부부 싸움하세요?" 이 질문을 받은 사모님은 야단났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전 세계의 임금과 대통령 앞에서 설교하시면서, "부부 싸움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인데, 사모님에게 부부 싸움을 하느냐고 물어 보니 야단났어요. 그런데 이 사모님에게는 참 지혜가 있어요.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싹 웃으면서 되묻기를 "내 머리에서 광채가 나요?" '내가 천사냐?' 하고 묻는 거야. 사모님도 부부 싸움한다고 하니, 할렐루야! 내게 지혜가 있다면, 상대방이 말하는 바로 그 때에 화가 나서 말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때를 기다려서 식당에 가든지, 분위기가 좋을 때에 말하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나도 아내에게 타이르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여보, 내가 당신에게 배우는 것이 많이 있어. 내 설교에 대해서 말도 해주고 고마워" 하고 칭찬하니까 좋아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설교를 길게도 하고 되풀이도 하니까 답답하지?" "그래." "당신이 나를 고쳐 주니까 정말 감사해. 당신밖에 나를 누가 고쳐 주겠어? 근데 이왕 고쳐 줄 바엔 말이야, 사람이 없을 때 한 두 번만 말하면 내가 알아들어." 이렇게만 말하고 그만두면, 도리어 "당신이 두 번 말하면 알아들어? 다섯 번 말해도 안 듣는데" 하고 나온단 말이죠. 또 이렇게 되면 '아이구, 말했다가 밑천도 못 찾는구나' 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사실 내가 이만큼 된 것도 당신 덕분이지 뭐" 하고 내가 좋은 말을 하면 이게 싹 먹힌단 말이에요. "그러니 알았지?" 하면, "알았어" 한단 말이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런 대화법을 '샌드위치법'이라고 해요. 단 것을 먼저 싹 먹이고 쓴 것을 먹인 후에 곧 이어서 단 것을 먹이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할 때마다 성공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말을 안 들을 때 곧바로 주의를 주면 '아이쿠, 아버지가 나를 꾸중하려고 그러시는구나'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야, 피자나 먹자" 하면서 얘기해야 하는 거예요. 너무 덤비지 말고 시간을 가진 후에 "난 사실 감사해.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니까 감사해. 그런데 이런 것은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좋지 않겠니?" 하고 연구해서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영혼들을 키우는데, 노력도 없이 부주의하게 키워 가지고서 가정이 행복하겠어요? 마음이 비단결과 같아서 얼마나 상하기가 쉬워요? 여러분들은,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다 사랑을 원하잖아요? 사랑 대신에 이상한 것이 나오고 마음이 상할 때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우리 자녀들도 잘못 하니까 우리가 그것을 잘 고쳐 주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누구를 훈련하고 가르칠 때에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할텐데 말에 실수 없는 사람이 없단 말씀이죠. 그러니 먼저 '차렷, 나는 용서받은 탕자!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내 꼴을 가지고 뭘 그러나' 하면서 먼저 나를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부드러워 질 때에 나의 말도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지만 내 꼴은 안 그런가? 내가 괜히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냐. 난 정말 더 부족하지' 해 봐요. 먼저 내가 더 부족하다고 하는데 반격이 나오겠어? 내가 먼저 부족하다고 하고 내가 먼저 낮아졌는데 무슨 반격이 있겠어요? 이게 샌드위치 법이에요. 말의 실수를 없이 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하는 것은 절망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섭섭함이 자라고, '저 사람은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 하면, 가정이 있지만 그건 휴전선입니다. '공산당하고는 말해도 통하지 않는데 발을 빼고 말지'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을 해야 하는데 갈라디아서 6장, 야고보서 3장 2절, 샌드위치를 기억해서 노엽게 하지 말고 반드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지어서 하면 안돼요. 내가 용서받은 탕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얼마나 용서해 주셨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이 좋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즉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도 너희 죄를 용서치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염치가 없느냐? 너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고 왜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못 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한 심령이 될 때 이것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어요. 거듭난 사람은 내가 용서받은 탕자니까 온유가 있어요. 내가 부족한 자니까 마음에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어요. 참 사랑과 눈물을 가지고 이 어린아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억지로 연극으로 눈물을 흘리면 다 드러나니까 안 돼요. 진정한 눈물로 애들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이죠? 제 생각으로는 그 다음에 주신 축복이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무엇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아담'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아담이 에덴 동산, 기쁨의 동산에 살면서도 혼자 살아서 그런지 또 노총각이라서 그런지 한숨만 푹푹 내쉬는 거야.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시니까 '저게 왜 그럴까?' 하고 걱정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우리를 영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은 좋은데, 아담은 영 뿐이 아니라 육신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한숨쉬는 것을 보시고는, '아! 네게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네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너와 똑같이 영과 육을 겸비해서 너와 같이 사랑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구나' 하시고 가정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와를 데려 오실 때에 아담이 얼마나 기뻐했어요? 성경 최초의 시가 거기에 있어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 이상 멋있는 시가 어디 있어요? 아담이 그렇게 기뻐했어요.
그러니 가정이 뭡니까? 가정은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 생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올시다. 교회는 영적 생활의 중심지예요. 좋은 가정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것같이, 좋은 교회를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불행한 사람은 불행해요. 가정이 행복한 사람은 정말 행복해요. 사람은 하루의 일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하고 하루의 일이 끝나면 가정으로 돌아와서 안식을 취합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고 외로워요. 공중의 새들도 저녁이 되면 까욱까욱 제 둥지로 돌아가고, 여우도 저녁이 되면 제 굴로 돌아가고, 곰도 제 굴로 들어가고, 고기들도 제 굴로 돌아가요. 사람에게 가정이 없으면 외로워요. 예수님께서는 가정이 없었어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있을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어요. 외로워요. 우리를 위해서 다 희생하셨어요. 가정이 불행하면 다른 일이 잘 돼도 불행해요. 가정이 행복하면 다른 일이 못 돼도 집에 돌아가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상처가 나음을 받아요. 이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되겠어요?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에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중하게 여기고, 자식들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에덴 동산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세 가지 원리; 하나님 일등, 에덴 동산, 선악과. 먼저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주권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주권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사랑이 있어요.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아요. 참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은 죄인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잘못 하고 실수를 했을 때에도 노엽게 하지 아니하고, 인자와 온유함으로 샌드위치 대화법을 써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니까 표현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을 잘 해야 돼요. 예수님도 사랑을 표현하셨잖아요? 셋째는,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냥 가정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주셨어요. 그게 무슨 일이에요? "에덴 동산을 가꾸라"고 하셨어요. 에덴 동산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이니까 에덴동산을 가꾸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어요. 에덴 동산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이 사명을 주셨어요. 한 가정에 고귀한 사명이 없으면 그 가정은 놀라운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애들에게도 고귀한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우리의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크리스천 가정의 기본인데, 오늘은 가운데 얘기인 사랑을 중심으로 말씀했습니다. 사랑이 좋지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 너무 우리에게 자상하셔서 모든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부족하고 미련한 저희를 양육하시고 훈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을 당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겨 주신 귀한 자녀들을 저희들이 정말로 아름답게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고 믿음밖에 없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며, 형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세가 이래야 하는 것을 저희가 배웠습니다. 모든 것에 말의 실수가 많은 저희들, 사랑의 말을 하여야 함을 저희가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 고매한, 예수님께서 주신 가정의 목적을 가지고 비전과 꿈을 가지고 이런 일을 위해 전진하여야 되겠는데, 저희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때 용서받은 탕자가 되어서 힘을 얻어서 전진하게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서 이 일을 행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효도하며/엡6:1-3,딤전5: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부터 5월 2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다가 1960년대부터는 5월 2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제 방 책상 뒤에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제가 3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예쁜 사진입니다. 그 사진 옆에는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북한에 계시던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어제도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저의 가슴은 잔잔한 감동으로 파도치곤 합니다. 어머니의 애절하고 뜨거운 사랑의 체온이 제 몸에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여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 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제가 지금 여기 한 인간으로, 하나의 목사로 존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지만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지금 제가 여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는 어제 어머니의 편지를 읽다가 김은영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은영 집사님은 다리를 절단하신 어머니를 십여 년이나 극진하게 간호하며 돌아보셨습니다. 지금은 90세가 넘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정성껏 돌아보시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돌아보심을 너무 기뻐하고 계십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돌아보시면서 느끼는 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김은영 집사님은 "저는 죄인이지요"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보는 것 뿐이지 부모님에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김은영 집사님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고 있는 복 있는 딸입니다. 지금은 김흥식 집사님과 함께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돌아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효도는 왜 그리고 어떻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효도는 왜 하여야 합니까?
첫째, 나의 생명과 존재가 부모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의 생명과 존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자라게 하시고 나를 사람 되게 하신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인간세계에서는 물론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는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데 자기의 생명까지 바칩니다. 거미 어미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기 몸을 자식들의 음식물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사상가들은 효를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집안에서는 효를 나라에서는 충을 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효와 충이 인간의 근본이고 나라의 기초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가 효를 너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한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효를 중요한 덕행으로 가르친 것은 옳은 일입니다. 영국의 문호 쉑스피어도 효를 인간의 아름다운 덕목으로 묘사했습니다. 쉑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어 왕"에서 아버지에게 불효한 두 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년들의 혓바닥은 마치 독사처럼 내 가슴을 휘감았어. 하늘의 쌓인 온갖 복수여, 은혜도 모르는 그 년들의 뻔뻔스런 낯짝 위에 쏟아져라!"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효도한 막내 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 둘이서 새장 속의 새들이 되어 노래를 부르자. 네가 나의 축복을 빌어 주면 나는 무릎을 끓고 너의 용서를 구하마.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자.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날 얘기를 나누며 금빛 나비들을 보고 웃고 궁중의 불쌍한 녀석들이 궁중 소식을 퍼뜨리는 것을 들으며 살아가자. 내 딸 코델리아야, 너같은 희생 제물에 대하여 하늘의 신들은 향을 피워 줄 것이다. 내가 너를 붙잡고 있지 않느냐? 우리를 떼어 놓으려는 자는 하늘에서 횃불을 가져와야 할 거다. " 효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둘째,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명령과 인간에 대한 명령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에 대한 명령 가운데 으뜸이 되는 명령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도 잠언에서 인간의 근본 되는 도리가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효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엡6:1에서 명령했습니다. 딤전5:4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셋째, 효도는 내가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엡6:3).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9). 부모를 공경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고 존귀함을 누립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안드류 잭슨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백화점 왕 와나메이커 역시 부모님의 교훈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사랑을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이 어머니였고, 나에게 기도를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으며, 내 영혼에 밝은 등불을 켜 주신 분도 어머니였고,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잘되고 아름다운 이름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삭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요셉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룻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첫째, 부모를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6:1).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말씀을 무조건 다 들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말씀이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지혜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모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에 도시 효자가 시골에 효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골로 찾아 갔습니다. 시골 효자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습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까 옷을 누추하게 입은 청년이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일하던 노모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아들의 나무 짐을 받쳐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대야에 물을 떠 왔습니다. 노모는 아들을 마루에 앉히고는 열심히 아들의 발을 씻기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아들과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도시 효자는 시골 효자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게, 어떻게 기력도 없으신 어머니께 발을 씻게 하는가? 효자라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러자 시골 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효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기쁘게 해 드립니다." 이 말을 들은 도시 효자는 마음 속에 "내가 효행을 잘못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시 효자는 이 때까지 자신의 생각대로만 부모를 공경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잠자리, 좋은 음식, 많은 용돈은 드렸지만 자기 부모님의 얼굴에는 시골 어머니와 같은 환한 웃음이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님을 돌아보아 드리고 도와 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예수님은 목수이신 아버지를 도와 드렸습니다. 나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부모에게 효도를 행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효를 행할 때 가정이 화목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집니다. 사회가 밝아지고 건강하게 됩니다. 나라가 튼튼해 집니다. 효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 되는 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립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두 잘되고 장수하고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전받는 어버이들/엡6:1-3
통계에 의하면 자식들에게 학대받는 노인들이 전체 노인인구에 8%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높은 비율입니다. 노인들은 친족들이나 사회적으로도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들에 의해 학대받는다는 것에 대단히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노인들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현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부모공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양과 공경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것과 공경하라는 것은 의미가 서로 통하지만 그러나 구분이 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차원이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거운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순종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을 동시에 다 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효의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행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것과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서로 하나된 개념이고 그와 같은 영적이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큰 비중을 두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보다 더 깊은 뜻은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어린이 약 7천명이 아버지로부터 매을 맞고 학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이지만 그외에도 수없이 될 것이라고 추산을 합니다. 어린이를 학대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부모답지 못한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됨을 인정하고 부모됨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견마지양(犬馬之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아들을 셋을 둔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부인을 잃고 외롭게 사는데 노년이 되어가자 기력도 쇠하여지고 자신감도 없어지는데 더욱 마음이 괴로운 것은 자식들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위기감을 느껴서 지혜를 발휘하여 목공소에 가서 큼직한 궤를 하나 맞췄습니다. 궤 안에 유리조각으로 가득 채우고는 자물쇠를 잠그고 마루바닥 밑에 넣고 출입할 때마다 보이게 했습니다. 큰 아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지금 말할 수 없고 내가 죽거든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큰 아들의 호기심은 더해가고 궤를 차보니 찰랑이는 소리에 금화가 들은 것으로 착각하고는 큰 아들이 그때부터는 완전히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둘째 아들도, 셋째아들도 마찬가지로 착각하게 되어 아버지를 잘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큰아들이 아버지의 호화장례를 치르고 삼오제가 지나 드디어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유리조각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궤 맨 밑바닥에 '네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굉장히 분개했지만 둘째아들은 형님의 모습을 보고는 가책을 느끼고 펄쩍뛰는 형님을 만류하면서 우리가 궤를 봉양했지 아버지를 봉양했냐고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뉘우치고 통곡할 때 동생과 며느리 모두가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부양과 공경은 다릅니다. 우리는 곧잘 부모를 부양합니다. 잠자리를 드리고, 음식을 드리고, 옷을 드리면서 부모부양은 잘 합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이 없는 부양이 이 땅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에 대한 효를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부모의 주머니를 보고 부모를 섬기지 사실상 부모를 정신상으로 이미 학대하고 있는 자식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만큼 부모공경은 높은 도덕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부모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돈으로 효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태는 돈으로 효를 사서 드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마음이 상처를 받습니다. 60세 이상 노인인구가 318만명인데 그 가운데 놀랍게도 130만명(40%)이 몸이 건강하면 자녀와 따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불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오늘 우리 사회에 부모님들이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이 불편해 있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의 마음을 읽으면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특히 홀로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은 지혜롭게 관찰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양진미로 부양하셔도 부모님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이 넷이 있는데 명절때만 되면 아들네가 모여 한바탕 전쟁을 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두 번 거듭되자 어머니 마음에 한이 맺혔습니다. 어느 명절에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한달씩 모시기로 정한 자식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가 갖고 있는 용돈을 모아 갈 길을 준비키로 결심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 왔을 때 너희들 집에는 안간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시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자식들이 가서 말려도 이 어머니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헐벗고 병든 상태로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기자에게 말했지만 기자가 떠난 뒤에 어머니는 구석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중학생의 효행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동식이는 점심때만 되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동식이 도시락에는 돌이 나오거나 머리카락이 안나올 때가 없습니다. 비록 눌려서 떡이 된 도시락이지만 동식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친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고 선생님이 방문을 하려 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옆자리 친구가 과제물로 인해 동식이 집에 가게 되었는데 동식이의 엄마는 놀랍게도 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동식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 오늘도 도시락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학교로 전해지고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모신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거창한 효도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면 됩니다. 부양이 아니라 공경을 해드리면 됩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효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효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근본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부모를 부모 자리에 세워주고 부모를 공경만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들의 효를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놓고는 어떤 부양책도 부모에게 효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의 재산
오늘 저는 연만하신 우리 어버이들에게 귀한 권면의 말씀을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영원한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집니다. 인생에는 놓칠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 이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실직을 당하고 왜 자살을 합니까? 자살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실직은 직장을 잃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나는 이제 필요 없는 인간이구나,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구나, 나는 이제 희망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실직당한 사람의 정서라는 것입니다. 연애하다가 실연한 친구가 자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참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같이 살자고 약속한 사람이 배반을 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인간은 약해 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지만 중병을 앓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심정은 죽음을 느끼는 자리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늙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병들었다고, 내가 늙었다고, 내가 실직을 당했다고, 내가 명예를 잃어 버렸다고 믿음까지 놓치면 안됩니다.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야 하는 인생의 재산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순간을 허용합니다. 왜 믿음이 약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고 침묵하시기 때문에 약해집니다. '예수 믿어봐도 별수 없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데 하나님은 왜 도와주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약해져 있기 때문에 강하신 여호와를 더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평가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옆에서 말하는 것이 상처가 되어 그만 믿음을 놓아버립니다.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의 어떤 평가 때문에 믿음을 놓친다면 인생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유없는 고난도 오지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은 정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믿어야 합니까? 내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놓아 버리는 인생은 아무 것도 안됩니다. 나이가 들어가셔도 믿음은 청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노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일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재산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리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로님이 계시는데 수년전에 저녁을 먹고난 후 복통이 있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암초기로 발견되어 깨끗이 수술하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룻밤 복통의 고통은 영원한 고통을 예방하는 경고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를 약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때를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슨 고통이 와도 믿음을 놓아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 붙잡고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남은 때 복되게 사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어느 가정에 부부가 골프를 좋아합니다. 부부는 서로 가벼운 내기를 걸곤 하는데 골프를 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반갑게 맞으며 누가 이겼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않자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아빠가 졌지? 아빠가 졌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골프는 이기려고 치는 게 아니라 재미로 친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총명한 아이는 두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아빠가 더 재미 있었어?" 이기는 것과 재미는 함께 갑니다. 게임은 이겨야 재미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중요한 우리 인생의 게임입니다. 부모공경을 지고 내 인생의 보람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부모공경의 게임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공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라/레19:32-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섬길 줄 모르는 자는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런 자는 인간의 첫걸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부모란 인간의 근본에 해당합니다. 그 분으로부터 내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을 모르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공해서 세간의 존경을 받는다해도 돈을 많이 벌어 남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학계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부모를 모른다면 그 존경과 선행은 다 가짜고 위선입니다. 부모를 모르고 쌓은 위대한 업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모는 나의 근본이고, 살아 계시는 동안 부모는 내 존재목적의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例)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집수리를 하기 위해 벽을 뜯었습니다. 일본 집벽은 "오가베"라고 해서 흙을 바르긴 하지만 그 안에 얼기설기 나무를 대어 만들기 때문에 벽 안에 공간이 있는데, 그런데 뜯다보니 벽 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대못에 꼬리 윗부분이 찍힌 채 살아 있더라는 겁니다. 주인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그 대못은 10년전에 그가 집을 지을 때 박았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옴짝달싹 못하는 공간 속에서 10년동안이나 어떻게 살아 왔나"싶어 넋을 놓고 바라만 보는데, 때마침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 들어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을 먹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벽 속에 갇혀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먹이를 물어 나른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만 도대체 정이라고는 있을 법도 하지 않은 냉혈동물인 도마뱀이 일이년도 아닌 십여년을 갇힌 도마뱀을 위해 희생한 이것을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마리의 도마뱀은 어떤 관계일까요? 연인일까요? 부부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친구 사이일까요? 십년이란 긴세월로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연인이나 부부라기 보다는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갇힌 도마뱀이 어미였는지 새끼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일지라도 엄연히 어미와 자식간에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이 사랑을 모른다면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까?
例)언젠가 서울 종로 경찰서에서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서 영업을 하고 있던 "박카스 아줌마"22명을 잡아 즉심에 넘긴 일이 있었습니다. "박카스 아줌마"들이란 노인들을 상대로 윤락을 하는 40~60대의 아줌마들을 일컫는 비어입니다. 이 아줌마들의 윤락 수법이 할아버지들에게 박카스를 접대하면서 접근하기 때문에 "박카스 아줌마"들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저는 지금 노인들을 윤락의 대상으로 삼은 이 아줌마들의 자잘못을 가리자고 이 사건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 공원에는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어야 하는가"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도 가 보십시오.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노인들의 얼굴에는 외로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할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의 사랑을 넉넉히 받는 노인들은 그곳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도 공원에 가 말벗이라도 만들어야 하루를 살수 있기에 공짜 지하철을 얻어 타고 출퇴근을 하시는 겁니다. 설상가상 그곳에서 종일 굶다가 봉사단체에서 마련해주는 한끼식사로 기력을 유지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노인 소외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입니다. 가장 존경 받아야 할 노인들이 시대의 애물단지가 되어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또 맞이했습니다. 이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어버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말씀을 중심으로 한 깊은 통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리해 어버이를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나이 드신 어버이의 자리를 회복해 드려야 합니다. 노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효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효도란 모든 어버이를 모신 자식들의 의무요, 인간된 도리입니다. 예전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철부지해서 부모에게 불효를 하는 일이 많았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고 자식을 기르게 되면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효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모가 된 어른들이 노인이 된 부모들을 귀찮아하고 구박하고 불효하는 일들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늙어 가시는 부모님은 또 끔찍하게 꺼려하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큰 일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는 이미 65세의 인구가 7%를 넘어서면서 UN이 분류한 고령화 사회로 진입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전에 비해 많은 분들이 장수하게 되었다"는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노인의 복지를 제도적으로 준비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030년이면 젊은이 100명이 고령인구 30명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통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나 선진국이 되려고 기를 쓰는데 어떤 나라가 선진국입니까? 또 복지사회를 만들자고 많은 말들을 하는데 어떤 사회가 복지사회입니까? 선진사회나 복지사회를 물질적인 것으로 기준을 삼아 "얼마나 잘 사는가"하는 국민 소득으로 따져 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기준"입니다. 서민위주의 정책이 잘 발달한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빈민촌이 그대로 존재하면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면 그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자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불편함을 만회하거나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제도나 정책이 서민위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점차적으로 형평을 이루며 고루고루 잘 사는 그야말로 진짜 살기 좋은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복지사회란 무엇입니까? "복지사회"란 건강한 사람이나 젊은이보다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와 시민의식이 성숙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젊은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이나 노인들은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지사회냐, 아니냐"하는 잣대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회냐 아니냐"로 쉽게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노인 공경이 되지 않는 나라는 국민소득과 상관없이 절대 선진국할수 없습니다. 노인이 소외되는 복지사회는 거짓이며 그런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부터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이 말씀을 실천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 위주로 되어 있는 밥상부터 노인위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간에 어버이를 소외시키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부모님 위주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부모뿐 아니라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생각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기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아이들에게 위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위아래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센머리앞에 일어서라는 말씀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나이 드신 그 자체로 대접을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옛날에 조손겸상(祖孫兼床)으로 경로의 덕을 밥상 머리에서 가르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들어서는 안되고, 찬에 손을 대기전에 대서도 안되고 맛있는 별식은 떠주기 전에 손을 대선 안되고..하는 것들을 식사자리에서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노인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뼈에 스미도록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밥상에서 뿐 아니라 만사를 자기 위주로 자라 놓으니, 노인 앞에서 겸양해야 하는 기본이 정신적인 자질 속에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노인은 그저 육체적으로 무력한 존재로만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노인을 층계 아래로 떨밀어 절명하게 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제 방향으로 가고 있지를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노인들을 생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년이란 세월이 강산도 변하는 긴 세월이라고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눈 깜짝할 시간일 뿐입니다. 그렇게 20년만 지나면 30대가 50대가 되고 40대가 60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내 아이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내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젊음을 다 바쳐 키워 놓은 후에 늙었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서러움입니다.
자식에게보다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십시오. 돌아가신 후에 흘리는 눈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위 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요 신앙적이며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입니다. 냉수 한모금 마시는데에도 위아래가 (장유유서가)있는 것입니다. 이 우선 순위는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한 것입니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例)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데, 이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주무시다가 실수로 손자를 이불 밑에 깔아 죽이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기 실수로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해서 모랠 죽은 아이를 안고 나와 남편에게 왔습니다. 그랬더니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이 아이를 보고 "이 불효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시게 만들다니"하면서 그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 났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일을 임금님이 알고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이름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아이들에게 위아래를 가르치십시오. 죽은 아이에게도 효는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다가 할아버지에게 눌려 질식사한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의 마음 아프게 한 것도 불효라고 아이를 꾸짖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극한 효성은 죽은 아이도 살려내는 기적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 이야기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출20:12)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공경에는 분명한 축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혹 축복 없더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입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부모님을 공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이 본능보다 더 사람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나를 위해 늙으신 부모님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불효입니다. 아이들에게만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자주 하십시오. 그리고 대화와 모든 활동의 중심에 부모님이 계시게 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자식과 나누는 대화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힘이 없습니다.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버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효를 통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인의 긍지/잠16:31-
1. 노인 문제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노인에 대한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노인 문제는 앞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이 33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 2020 년이 되면 그 배가되는 14%를 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구 시내의 인구 250만 4 천 여 명중 65세 이상의 노인이 5.3%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중 치매 노인이 1997년 현재 약 6 천 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전국민을 국민 연금에 가입시켜서 미리 노후를 준비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문제만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노인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젊은이 때와 달리 인내심이 떨어지고 용기를 상실한 체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려는 심리적 자세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여러 작품가운데 대표작이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 소설로 그는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함께 탔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소설 이름에 담겨져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입니다. 바다는 엄청 험난한 곳이기에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곳입니다. 노인은 인생의 항해를 이제 다 마치고 바다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을 바다에 다시 내어보내어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노인의 독백이 많이 나옵니다. 독백은 외로운 노인의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의 삶에서 인내와 용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입니다. 그는 자기의 신조 하나를 만들어 냅니다 -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인간은 비록 죽음을 당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는 이 외로운 노인을 통하여 이른바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정신적 침체와 마비에서의 탈출을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인내심, 용기, 그리고 희망을 되찾자는 부르짖음입니다.
2. 백발의 영화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아직도 잡을 것이 남아 있음을 알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정신이 곧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 외 여러 은퇴하신 장로님들이 계십니다만 이 두 분은 아직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분은 팔순이 넘었는데 농장을 아직도 경영하시고 손수 일하시어 작물을 거두시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금번에 컴퓨터까지 익혀서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게시판에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 글에 "목사님 컴퓨터는 나의 밥입니다"고 하시며 의욕을 보이셨습니다. 어느 은퇴하신 권사님도 그랬습니다. 또 다른 한 분 원로 장로님은 지금도 매일 옥상에 마련해 둔 글방에 올라가셔서 사군자를 그리시며 묵필을 쓰시며 창작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3. 참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십니다.
오늘 성경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노인 시절을 극히 높여 표현 한 것입니다. 백발에 대하여 가진 우리들의 선입견은 부정적입니다. 과거에 저희 어머님 살아계실 때 머리 염색을 하셨습니다. 귀찮은데 왜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면 하시는 말씀이 "흰 머리는 추저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색깔에 대한 것보다는 노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어하시는 뜻이고 "노인은 추?求?" 혹은 "흰 머리카락은 푸대접받는다"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어른들께서 스스로 노인시절을 영화롭게 여기는 자긍심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셔야 합니다. 지미 카트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보다 은퇴한 후 지금이 더 아름답다고 인터뷰를 하시며 책까지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세계를 다니며 헤비타트 운동(무주택 자에게 집 지어주기 운동)을 하시면서 영화의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노인 문제의 해결책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해나가려는 의지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에게 효를 가르쳐서 노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남은 생의 목적을 세우고 의지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4.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노인의 영화는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It is attained by a righteous life)고 했습니다. 자기의 바른 삶에서 얻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 보다는 다른 것으로부터 영화를 누리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문학 작가였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고리오 영감」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고레오 영감은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딸을 통하여 자기 삶을 변화시켜보려고 비정상적인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큰딸은 아버지 돈으로 귀족 신분을 사서 귀족과 결혼하게 되었고, 작은딸은 아버지 돈으로 은행가가 되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있지만 아직도 상인이라는 신분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신분 상승을 한 두 딸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합니다. 친정에 오는 이유는 아버지의 돈을 빼앗아 갈려는 이유였습니다. 나중 고레오 영감은 딸들에게 돈을 다 써버려서 집도 없이 하숙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병이 드는데, 두 딸들은 그 소식을 듣고도 병 문안도 가지 않고 결국 임종도 지키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로 다 해 주고 대신 효를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이처럼 벌써 프랑스에서는 200년 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이젠 우리 사회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자녀에게 효의 윤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 절로 그 효를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노인들이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함을 가지고 삽시다. 목에 힘주고 허풍을 떠는 노인이 아니라 바른 삶을 살아온 결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존경받는 어른들이 됩시다.
그리스도인 어버이의 바람/요삼1:2-
모든 어버이들은 자식에 대한 천륜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고려장이라는 사회적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이 많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부모를 산에 갔다 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삶이 힘들어 젊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입을 덜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한 집에 고령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를 고려장 하기 위하여 업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자꾸 허리를 제끼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곤 해서 아들이 제대로 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이 “어머니 내 등에 딱 붙어 있어야지 왜 몸을 들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집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어머니는 “나를 고려장하고 자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길을 찾게 하려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지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들은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어머니를 고려장 하려고 업고 가는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돌아갈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고려장 하지 못하고 도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자녀들이 구원받고 천국 백성 되는 것
자녀들이 구원받고 천국 백성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크리스천 어버이의 소원입니다. 예수 믿는 부모치고 자식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원치 않는 부모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고 하였는데 온 집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크리스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크리스천 어버이들은 자녀들이 성수 주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으로 갈 때 어버이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머리숙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여, 자녀들이 성수주일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어버이들은 자녀들이 말씀을 멀리 하지 않고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랑하고 말씀을 가까이 두고 묵상하며 기도생활할 때 부모의 마음은 기쁘게 됩니다.
또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때 부모는 그 마음속에 굉장한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대한 교부요, 성자요, 신학자요, 기독교의 지도자였던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신앙이 굉장히 깊고 경건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방탕하고 이단인 마니교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회개하기 위해서 주야로 하나님께 머리숙여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기도가 싫어서 29세에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로마까지 아들을 따라갔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목사님이 “여인이여,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그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낙심치 말고 계속 기도하시오”라고 후원해 주고 격려했습니다.
어느날 어거스틴이 정원 나무 밑에 앉아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한 아이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음성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 같아서 마침 옆에 있던 신약 성경을 집어서 어거스틴이 펼쳤습니다. 그 말씀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장 13,14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두날 가진 금보다 예리하여 그 영혼을 찔렀습니다. 이 말씀이 레마가 되어서 그 심령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32세에 신학을 공부했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회개하고 주의 종이 된 것에 감사하며 감격중에 세상을 작별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워서 제자를 양성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참회록 등 70권의 책을 저술 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이 결코 저버리지 아니하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위대한 교부요, 철학자요, 신학자요, 초대교회 지도자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처럼 자녀를 위한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자녀들이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되는 것
부모치고 자식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기를 원하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기가 못 먹어도 자식은 먹이고 자기는 못 입어도 자식은 입히고 자기는 공부를 못했어도 자식은 최대로 공부를 시키려고 간절히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평생동안 목회를 부지런히 하고 70세가 되어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님 앞에 나와서 “목사님 이제 은퇴하시니까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께 여생을 지내실 집을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문서를 꼭 쥐고 계세요. 틀림없이 사업하는 자식들이 와서 집문서를 내 놓으라고 할테니까 그 문서를 내 놓으면 목사님 부부는 노년에 길거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꼭 집문서만은 내어 주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하고 교회가 사준 집에 있는데 맏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니까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집문서를 좀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장로님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어 집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잠시만 쓰고 돌려 드리겠다는 말에 집문서를 내놓았으나 아들의 사업이 부도나 파산하고 아들 가족은 미국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노부부는 길거리에 앉았습니다. 아들은 미국으로 도망을 쳤지만 이 노부부는 갈 곳이 없엇습니다. 그래도 노부부는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큰 상처를 입고 가면 마음속으로는 괴로워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식 욕을 안합니다.
저는 이런 실화를 읽었습니다. 경찰관이 순찰 도중 쓰레기 더미에서 큰 푸대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중풍에 걸린 노인이 푸대속에 버려졌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중풍걸린 부모를 버린것이었습니다. 그 결찰관이 노인을 경찰서로 데려와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이, 이름, 버려진 날 등은 다 말하였지만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입을 닫고 말았습니다. 혹시 아들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노인은 양로원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아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모가 위대하고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천륜의 사랑 때문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의 성공과 행복인 것입니다. 자녀가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굉장히 흡족하고 기쁩니다. 때문에 자녀가 성공적이고 행복한 길을가는 것을 원하는 부모의 심정을 자식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자녀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면 온통 다 잃어버립니다. 건강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들은 주야로 자식들이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평신도 때 부산에 있는 교회에 나갔는데 그 교회에 피난 온 할머니 한 분이 복스럽게 생긴 30대쯤되는 딸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을 했습니다. 그 딸은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낙심해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모가 그 딸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밥을 떠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노모는 그 딸을 살리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하루종일 딸의 곁에 있었습니다. 딸의 수발을 해 주어야 하고, 화장실로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신도로 별로 신앙도 없는데 저의 손을 잡으며 “형제여, 내 딸을 위해서 기도를 좀 해주십시오. 착하고 좋은 딸이었는데 이렇게 정신을 잃었습니다. 기도를 좀 해 주십시오”라며 매달려 제가 기도해 준 것이 기억이 납니다.
건강한 자식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자식이 신체불구가 되면 그 부모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간절한 이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는 또 자식을 어찌하든지 건강하게 잘 살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부모님이 아침에 잠을 자고 있던 31세 되는 아들에게 밥을 안 먹고 늦도록 자면 건강에 해로우니 일어나서 밥을먹으라고 깨우니까 이 아들이 일어나 격분하여 다락방에 있는 흉기를 가지고 어머니를 내리치고 아버지를 때려서 중상을 입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고학년 취업난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반면에 일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건강해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직장에 잘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20세 이하의 청소년 80%가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한국청소년개발원에서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불만의 이유는 빈부 격차가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80%, 집안과 배경이 중심이 되는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 77%, 정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77%, 계층에 따른 특위가 있어서가 75% 등 굉장히 많이 불만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가 부정확하고 교육 현실이 입시 위주라 학업 부담이 크고 인격 형성과 개발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건강해서 어찌하든지 잘살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그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4. 자녀들이 부모를 이해해 주는 것
자녀들이 만족할 만큼 잘 해주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주고 싶지만 만족할 만큼 잘해주지 못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부모는 마음만 있지 경제적인 사유 때문에 자식을 마음대로 돌봐 줄 수 없습니다. 남처럼 좋은 학교에서 공부 시키고 해외 유학까지 시켜서 훌륭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 마음 어느 부모가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모가 대다수이므로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장성하여 분가해 나가는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되어 주고 싶어도 만족스럽게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부모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자식들이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아무개는 아버지가 몇 억의 상속을 주고, 집을 몇 채를 주고, 사업을 물려주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해 준 것이 뭐요? 도대체 뭘 해 주었소?’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피 눈물이 흐릅니다. 어느 집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머니는 통곡을 하고 우는데 아버지가 울지 않으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은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냉담할 수 있느냐?”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가 탄식을 하고 기침을 하니 입에서 핏덩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은 안해도 가슴에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부모의 무능력을 통감하고 탄식합니다.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자식들을 도와주고 밀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못해 주는 부모의 마음이 잘 해 주는 부모의 마음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것을 알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될 것입니다.
5. 자녀들이 부모의 노후를 보살펴 주는 것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여생을 사는 것이 부모들의 소원이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 자녀들의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999년을 기준으로 볼 때 60세 이상 노인 중에 공적 연금을 받는 비율은 5%에 불과합니다. 65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사는 가구 중에 약 10%가 최저 생계이하의 빈궁한 생활을 하고, 특히 노인끼리 사는 가구는 30%가 빈곤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다수의 가족에서 시부모를 모시거나 돕는 것을 싫어합니다.
미혼 여성의 93%가 ‘시부모를 모시기 싫다’고 응답했습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는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아들이 16% 밖에 안됩니다. ‘왜 부모를 원치 않냐?’고 물으니 ‘부모를 모시고 있으면 아내가 불편하게 생각하고 아내가 불평을 말하기 때문에 아내와 다투기 싫어서 부모를 모실 수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에게 ‘왜 부모를 모시지 않냐?’고 하니까 ‘부모를 모시면 부자연스럽고 심신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과 자유만 누리기를 원하고 부모를 돌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녀를 길러서 독립시키고 난 다음 노인들은 오고 갈 때가 없어요.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낳아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며 손발이 다 닳도록 수고해서 길러준 것 만도 큰 은혜인 것입니다.
이번에 영산효행상을 시상하는 성도 가운데 한분은 남편과 사별한지 4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50년간 시부모를 모신 분이 있습니다. 또 뇌졸중에 걸린 아내가 10년동안 꼼짝을 못하는데 남편이 대소변을 다 받아 내며 수발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에게 잘 못해준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다고 하는 그런 좋은 남편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로 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 섬기는 자에게는 땅에서 잘되게 하고 장수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6. 자녀들이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는 것
부모에게는 모든 자녀가 다 혈육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근본적인 사랑은 같습니다. 착하게 잘 살면 더 사랑스럽고 못되게 굴면 좀 마음에 밉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키울 때 해야할 것은 자녀의 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자가 못났다고 해서 쥐어박고 차자를 높이면 가정의 질서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정에 질서를 지켜 주어야 그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제가 44년동안 목회하면서 보니까 언제나 은혜는 손위에서 밑으로 내려가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맏이가 언제나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도와주고 돌봐주는 일을 보았지 아래서 위로 맏이를 도와주는 것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들은 형을 공경하도록 부모가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17절에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는 일이 있을지 몰라도 위급한 일을 당하면 그래도 형제는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형제간의 사랑과 화목이 있을 때에 가장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잠언서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장성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황금제’라는 고개가 있는데 옛날 이 고개에 마음씨 착하고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함께 고개길을 가다가 동생이 돌맹이 만한 금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동생이 금덩어리를 들고 너무나 기뻐하니까 형도 같이 기뻐했으나 조금 있다가 서로 보니까 형의 눈길도 달라지고 동생의 눈길도 달라졌습니다. 형이 ‘동생만 없었으면 그 금덩어리가 내 것이 될 것인데’라고 생각했고, 동생은 ‘형만 없었으면 내가 안심하고 이 금을 누릴 것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의좋은 형제였지만 욕심이 들어오니까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형이 동생에게 “여보게 그 황금 덩어리 강물에 던져 버리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형의 말이 옳아요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쥐기 전에는 형을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황금 덩어리를 쥐고 보니 형의 눈치도 달라지고 내 마음도 달라져 형이 미워지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황금 덩어리를 물에 던져 버리고 난 다음 그렇게 형과 아우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황금보다 더 귀한 우애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우애는 형제간 만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의 조그만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수천배 수만배 수억만배 이상 우리를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죄사함을 주시고 믿고 구원을 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명기 8장 14절로 16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 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시키고 겸비하고 순종하고 복종하게 만든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못되게 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자식들이 알고, 어버이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며 어버이를 잘 모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옛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세월은 신속히 흘러가고 어버이는 세상 뜨고 또 자기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어 세상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버이를 잘 섬기면 내 자식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잘 섬겨 줄 것입니다. 그 후 자손이 또 그를 섬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현대화되고 삶이 각박해졌다고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을 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륜입니다. 성경에는 ‘부모들이여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한구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보고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은 수없이 많습니다. 자식이 천륜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의지로 마음에 결심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작정을 하고 의지로 결심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부모 자식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요사이 우리 사회에 부모 자식간에 사랑과 효가 행해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사회가 각박하고 냉정해 짐으로 부모 자식의 사이에도 냉정하고 각박하게 되어 가고 있으므로 이 세상에 슬픔이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꼭 어버이 주일이라고 해서 자식 사랑, 부모 사랑을 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사랑하고 받들고 동시에 우리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효를 다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유대인의 탈무드에 의하면 사람 에게는 세 시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소년기,청년기, 장년기를 살 면서 삶의 성숙에 이르게 된다고 합 니다. 그런데 세 시기의 삶에 대해 흥미 있게 말했습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고, 청년기에 는 자신을 위해 살다가, 장년기에는 자식을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소년기에 부모를 위해 산다"는 말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녀들의 사는 모습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우리 자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나 해 놓고도 부 모를 위해서 큰 공로를 세운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부모 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을 던집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다가, 청년기에는 그 초점이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장년기가 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식 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을 긍정하면서도 막상 "자녀를 어떻 게 양육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 치면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불행 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 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놀랍 게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원을 활용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놀라운 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도 많이 했고, 나쁜 일도 많 이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 에 좋은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그들이 하나 님 앞에서 그리고 그 이웃과의 관계 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 해서 가르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 은 그들을 때리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두 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 른 민족들은 소외시키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 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 족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지내던 역사적 경험들을 사도 바울은 이렇 게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 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 으면서 그 사건이 우리와 아무 상관 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역사 라고 넘겨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 은 이 선택받은 백성들의 역사적 경 험을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 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 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지금도 여 전히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시기 때 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경이요, 기적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환 난을 겪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핍박 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잔인할 정도의 역경에 시달려 왔습니까? 이 와 같은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 고 끈질지게 버티면서 그들의 자녀 를 훌륭하게 길러내서 지금도 전 세 계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인물을 정 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배출한 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 다.
어떤 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 렇게 놀라운 민족으로 만들고 있습 니까? 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핏줄 속에는 어떤 다른 민족이 도저 히 모방할 수 없는 하나의 무서운 정열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 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민 족사에 나타난 이 정열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했는데, 한 수레바 퀴는 교육이고 또 한 수레바퀴는 신 앙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 열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만들 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지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 게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을 볼 수가 있습니 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어떠했습니까? 한 교육학자는 교육이 효과적으 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교 육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도구의 활용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관성 있게 반복하여 가르쳐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 교육에 필요한 효 과적인 요소 세 가지가 다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기회를 사용해서 자녀를 교육했습니 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 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면에서 천 재적인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모든 삶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 의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명절 이 되면 좀 편히 쉬면서 늦게까지 잠을 자고, 그렇지 아니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은 이 명절을 소중한 자녀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령 장막절 같은 명절에는 자 녀들을 데리고 나가서 들판에 천막 을 쳤습니다. 이것은 물론 귀찮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 무엇 때문에 이 좋은 명절에 이런 괴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하며 부 모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러면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말합니 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 야에서 이런 천막을 치고 이 천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단다" 했습니 다.
또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곤 히 잠들어 있는 자녀를 깨웁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면 얼 마나 짜증이 납니까? 그러면 잠자던 자녀들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서 짜증스럽게 말합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잠을 깨우면서 괴롭히세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 굽 땅을 떠날 때 급하게 한밤중에 온 백성을 깨워 허리띠를 띠고 여호 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유를 얻 기 위해서 애굽을 떠났단다" 했습니 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서 명절은 늦잠 자고 놀러 다니는 날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회였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 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 성은 기적적으로 요단을 건너갔습니 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는 아주 중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4 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이 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서."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 람을 뽑아서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 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 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 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이렇게 대 답하라" 했습니다.
이제 9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 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고생스럽게, 그러면 서도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 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이 아니라 이런 고생 속에서 의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나중에 그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19∼20절 말씀을 보세요.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 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라고 말씀했습 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자마자 제사장들의 발이 섰던 그 장 소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길갈이라 는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1절 이하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에 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 게 하여 이르기를 …하라" 했습니 다.
우리 가운데 과거에 고생을 많 이 한 사람들은 그들이 지난날에 고 생한 것을 자녀들에게 알리기를 꺼 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 라엘 민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이 고생스러 운 일들을 통해서 얻은, 그 어떤 것 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교훈 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 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전지대에 도착 해서 이제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그들이 이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기념비 하나를 세우고 "후일에 네 자손이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삶의 모든 기회를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묻거든." 이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25∼27절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여호 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 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 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 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 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 느니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예식을 단순히 의식을 위한 예식으로 행하지 않았 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자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순간도 교 육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냥 넘기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육은 학 교에서 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부모 가 교육열이 높은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서 오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 가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 까? 우리 자녀들이 가장 많은 시간 을 보내고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자녀의 최고의 교 사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교실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 다.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삶을 나누는 이 모든 기회를 통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 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 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행동, 부모의 삶의 모습, 부모의 삶에 대한 태도가 아들과 딸 에게 어떤 교육의 귀감이 되고 있습 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열에서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기회가 교육이었습니다. 명절 도, 예식도, 행사도, 프로그램도, 자 녀들과 즐기는 시간도 그들에게 있 어서는 바로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상징 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는 것 을 봅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 로 보는 것이 더 분명하게 그 인상 을 마음속에 새길 수가 있기 때문입 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교육기재를 활용했습 니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다는 사 실을 귀로만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후일 에 자녀들이 "아버지, 이게 무슨 뜻 이에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처 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징적인 교 육의 기재를 활용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우 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 다. 자녀교육에 대해서 "내가 아이 를 학교에 보내고 돈을 주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라고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 모가 바로 자녀의 교사임을 기억해 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에 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들 과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 지고 있습니까?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관성 있게 자녀를 가르쳤습니다.
교육은 그 가르침이 일관성이 있을 때 효과가 증진될 수 있습니 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교육에 있 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복 의 원리' 라고 합니다. 중요한 교훈 은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들도 설교의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 교육의 원리 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 교 중에 듣던 말씀이 또 나오면 '목 사님이 설교 재료가 떨어져서 또 그 말씀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부분이 중요한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여 들으 시기 바랍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선 생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가 시험 공부할 때 그 부분을 잘 기억해두면 시험에 대개 나옵니다. '반복의 원리'가 이 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보세요. 이스 라엘 민족이 열두 돌을 가지고 기념 비를 세울 때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하나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 았습니다. 그들이 길갈이라는 지역 에 도착했을 때 또 다시 한 번 기념 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을 방문해 보면 이스라엘 도처에 기 념비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고적이 아닌 것이 없 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지 고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경험한 일들을 눈으로 보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가 르치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 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로 가르치 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실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 에 대한 정열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교육의 내용이 바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신앙의 전달 방법이 바 로 교육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을 보세요.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 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 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 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계 시는 것을 상징하는 그 언약궤를 메 고 나갔더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건 널 수 없게 보이던 요단강의 물이 우리 앞에서 갈라졌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렇게 넘쳐흐르던 요단강 물이 복종하더구나"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사 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 과, 고난과 파도를 이기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4장 2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 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 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 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 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 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 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 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 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 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 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4:21∼24) 하셨습니다.
"아버지, 여기 이 돌을 왜 이렇 게 세웠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대답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내가 언약궤 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탁 내디뎠더 니 요단강 물이 쫙 갈라지는 게 아 니겠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 기 이렇게 돌을 세운 거야. 그때 일 을 생각하면 이 아버지가 참 대단했 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 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 렸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 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 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 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 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 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절).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주어 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여호와입니 다. 우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말 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능하시다 는 사실을 알게 하여,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자녀들이 하 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함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 된 우리 가 자녀에게 아무리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영원 한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는 언젠가 그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리에 있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들에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더 이상 부모가 자녀를 도울 수 없 을 때, 인생의 한풍이 불어닥칠 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삶의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쳐 어쩔 줄 모르고 헤 매일 때,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 성들은 정말 지혜로웠습니다. 그들 은 그때에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모 의 도움이 자녀에게 더 이상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을 더 강하게, 더 능력 있게, 더 지혜롭게 지킬 수 있는 놀 라우신 그 하나님을 그 자녀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지혜 있 는 일입니까? 이스라엘 부모들은 다 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기를 원한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 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겨준다."
의미 있는 말입 니다.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에 게 재산을 남겨 보세요. 그 재산 때 문에 자녀들은 오히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신앙교육을 제 대로 받지 못한 부자들의 자녀들이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 해 가는 광경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 든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모 두의 삶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양식 있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지식 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 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 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 말씀 은 모든 믿는 부모들이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 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아가 면서 폭풍우를 만나게 될 것을 아십 니까? 인생 항해는 폭풍우 없이는 항해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폭풍우 에 직면했을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어디에도 없다고 절망할 수밖 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다윗 왕의 유언은 감동적입니 다. 역대상 28장 9절을 보세요.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 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 으로 ?떡姸淄箏?."
누구를 알라고 요? 아비를 알라는 게 아닙니다. 물 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단순 히 아버지인 자기를 자녀에게 기억 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가 끝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력 하고 보잘 것 없는 부모, 많은 잘못 을 자녀에게 보일 수밖에 없던 자기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자녀에게 남겨 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남 긴 유산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 기를 원하십니까? 맥아더 장군은 이 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인생을 헛 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 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가정 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에게 하 나님을 유산으로 남겨 주게 되시기 를 바랍니다.
아내와 남편에게/엡5:22-3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주 안에서 부부 된 사람들에게 주신 권 면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혼식 때마다 수천 번을 읽었습니 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보이는 사람 이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삽니 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 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 므로 우리의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 다.
그런데 바울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와의 관 계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요한계 시록에 보아도 그리스도를 신랑으 로, 그리스도인을 신부로 표현한 것 을 볼 수 있는데 의미 깊은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아내 되 는 사람에게 먼저 권면했습니다. 사 도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제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 의 머리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은 원리임을 여 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몸 된 교회의 머리 되 신다"고 한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이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 람들에게는 이러한 특수한 결혼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 야 할 것은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 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도 "너 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 이 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짝지 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농사할 때 기계로 밭을 가는 요 즈음은 '짝지었다'는 말을 이해하기 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계 를 사용하기 전에는 소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봄 철이 되면 밭을 가는 것을 많이 보 았습니다. 그때 보니까 얕게 갈아도 될 때는 소 한 마리로 밭을 갈게 하 지만, 깊이 갈아야 할 때는 소 두 마리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 습니다. 그런데 황소와 암소를 같이 멍에를 메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 미가 있다고 봅니다. 남녀가 짝을 지어 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은, 말하자면 두 사람이 멍에를 같이 하 여 인생의 광야를 개척해서 옥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법적인 계약만이 아닙 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 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 32절에서 "이 비밀 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사 실 신비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와 성도 하나 하나의 연합, 이것은 사실일 뿐더러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는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 간이 걸리고 노력이 따라야만 합니 다.
가령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 접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령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기쁨을 무엇 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 아온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신비 한, 새로운 세계의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찬송가 499장)
그러나 언제나 그런 감격이 계 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깊은 고민에 빠질 때도 있 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알 수 없 었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악 많은 세상에 살 고 있고,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육신 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육 신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할 때는 혼자 사 는 사람과 같아서 육신이 하자는 대 로 하니까 문제될 것이 별로 없습니 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우리 심령 이 구원을 받아 빛 가운데 살게 되 면 어두운 데 살던 것들이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생기는 문제가 많습니다. 육신이 하 자는 대로 살자니 영혼이 책망합니 다. 영혼이 하자는 대로 살자니 육 신이 따라가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로마서 7장에서 고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 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 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 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 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 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 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 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 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육의 소욕 을 죽이고 심령을 따라 나아가는 것 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부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다른 남녀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 처음 한 달을 '밀월'이라고 합니다. 꿀처럼 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 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한 달쯤 지나고 나면, 결혼하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게 꼭 그렇게 달콤한 것, 신비한 것만 있 는 것은 아니거든요. 씁쓸한 일도 생기고, 미처 몰랐던 것을 알고 나 서 실망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서로 살다보면 교제할 때 천사처럼 생각되던 사람이 천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 끼리 같이 살려 하니까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 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의 차이가 생 겨서 말다툼이 생기고, 성격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도 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는데 그것이 서로 잘 맞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 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어 주시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입니다.
한 사람이 느긋하면 한 사람은 팔팔합니다. 한 사람이 깔끔하면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 욕 안 한다고, 속옷 갈아입지 않는 다고 야단 맞습니다. 한 사람이 더 운 것을 좋아하면 한 사람은 시원한 것을 좋아합니다. 한 사람이 무슨 일이든 철저히 하면 한 사람은 적당 히 합니다. 한 사람이 말이 좀 많으 면 한 사람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 신 조화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른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같이 사는 동안에 사랑 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개성 을 양보해서 가까워지고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부부 생활 하신 분들을 보세요. 그저 상 대방을 보기만 해도 분위기가 파악 이 되고 잘 맞추어 나아가는 것입니 다.
저는 제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40년이 되어 옵니다. 저는 비교적 직선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돌려가면 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머리가 비상해서 절대로 직 선적으로 말하는 적이 없고 쓱 돌려 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쉬 운 예로 제 아내가 "당신 냉면 생각 없어?"하면, 저는 냉면 생각이 없을 때는 "글쎄, 냉면 생각 없는데"라고 응답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것이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제 아내가 냉면이 먹고 싶은 것을 간접 적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 에야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 36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둔 합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그것을 참고 또 참으면서 인격자가 된 거예요. 사랑으로 참은 거예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토닥거리 며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 헤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 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주'라는 말은 '보호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를 돌보아 주고 길러 주는 자라는 뜻이 있습?求?. 하나님은 모든 사람 의 보호자이며 특별히 믿는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8∼29절을 보 세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 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 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 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 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 를 보양함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 다.
"남편이 제 육체를 양육하여 보 호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몸에 대해서 구주로서 행동합니다. 남편 에게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사도 베 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 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 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 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 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남편 은 아내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습니 다. 대신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 종하듯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 에게 복종해야 합니니다. 이것은 성 경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질 서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무엇입니 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 서 진리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아내가 남편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는 몸이 머리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나 교회가 그 리스도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같 은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면 이해 가 쉬울 것입니다. 이 몸은 지체들 이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손가락 과 발가락이 붙어 있고 팔과 다리가 붙어 있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유기적이고 자발적 인 연합체입니다. 그것은 하나요 전 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가 정의 남편과 아내는 나뉘어 있는 것 이 아닙니다. 둘이 하나입니다. 이것 이 신비입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도 직장이 나 사무실이나 일터나 교회가 아니 고 그의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그 의 솔직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모습은 가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 람은 내 아내요, 내 남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머 리와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내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기 를 결정하는 것은 나입니다. 내 몸 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편입니다. 만 일에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련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는 분을 보셨습니까? 머리를 흔드는 분을 보세요. 손이 떨리는 것을 보 세요. 그 분의 마음에서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데,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고, 머리를 흔들고, 손이 떨립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 런 병이 들면 어떤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움 직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하기를 원 하지 않는데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 습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우리 가정의 부부생활이 그렇습 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 따로 따로라면, 이것은 건강한 가정 이 아니라 병든 가정입니다. 만일에 아내가 멋대로 행동하면 그것은 혼 란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원치 않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편은 아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건강 한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 정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 모든 것 을 통제합니다. 아내가 남편과 상의 없이 멋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여기 어떤 분이 중풍에 걸렸습 니다. 그는 움직이기를 원하지만 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일부 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 말은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아내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 의와 존경심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에게 꼭 필요한 사 람이 되어, 그를 돕고 보전해서 남 편의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 한 분들을 보세요. 대부분 그 아내 가 훌륭한 경우입니다. 내려오는 말 에 "한 남자가 성공하는 데는 두 여 자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하나는 훌 륭한 어머니의 손이요. 다른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아내의 영향을 입지 않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 의 권면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 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 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 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겸손 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베드 로 사도는 계속 권면했습니다.
"너 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 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 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자 가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 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지금까지 아내에 대한 권면을 말씀드렸습니다만, 25절 이하는 남 편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 랑하라"입니다. 아내에게 대해서 권 면한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요,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아내에 대 한 사랑입니다. 이 말씀은 남편만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 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그것도 사랑입니다. 이 균형이 언제 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근 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남편은 언 제나 사랑으로 아내의 통제를 받아 야만 합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 라."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무엇 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남편들 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얼 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 주님께 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죽기 까지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이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 할 때는 언제나 '아가파오'(agapao)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 늘 주신 말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아, 하나 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그 차원에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 다.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차원의 사랑 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 십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보 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에로틱한 감정이 아니고, 그저 좋아하는 기분 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입니다. 사랑과 기쁨 그리 고 화평, 바로 그것이 남편이 자기 아내를 향해 가지는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성령의 충만함은, 환상과 같은 현상이 아니 라, 집에 있을 때 내 아내에게 하는 행함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 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이어서는 안되고 자연적이어 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성(性)을 악 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 독교적인 교훈이 아닐 뿐 아니라,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 이지 사람 이하도 사람 이상도 아닙 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을 포함한 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적인 요소 그 자체에 아 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끌리 고, 사랑을 느끼고, 결혼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제 는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 다. 육체적인 것만으로 결혼했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쉽게 바닥이 드러 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 는 이 시대의 심각한 고민 중에 하 나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결혼의 기초를 육신에만 두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해서 파탄 을 초래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서구사회에서 가정 파탄 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습니 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됩 니까? 그것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 는 기초가 육신적인 데만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아 무 부담이나 책임성 없이 결혼하고, 아무 부담 없이 헤어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로 눈이 맞아, 다음 정거장에 내려 차 마시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 결혼할까?"
"그 래, 하자"
그래서 결혼해 살다보니 이상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이상 이 안 맞으니, 신경 쓸 것 없이 헤 어지자"
"그래, 마음대로 해"
그래 서 헤어집니다. 짐승보다 나은 게 무엇 있습니까? 연습결혼, 계약결혼 이 있다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입니 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 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 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셨습 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든 사 람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 한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가지는 관심을 인 식할 때, 모든 예수 믿는 남편들이 자기의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에 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 얼마나 웅변적인 표현입니 까?
주님께서는 교회가 보잘 것 없 어도, 부족해도, 마음에 좀 들지 않 아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 셨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 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 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 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 를 사랑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관심이 깊으 십니다. 교회의 가능성을 아십니다. 그는 교회가 완전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그의 신부 인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열망이 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 고,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 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 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서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 다. 희생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이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가지려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 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라."
구체 적으로 사랑하세요.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으로 복종하고, 남편 이 아내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줄 때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을 믿습니 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이렇게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해서 행복이 넘치 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어머니의 큰 믿음/마15:21-28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보 였던 이야기입니다. 김상호라고 하 는 공군 중령의 자기 간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부엌 에서 일하시다가 실수로 인하여 하 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 원하여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꼼짝 도 못한 채 누워있고 조금만 움직이 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대 로 제일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합니다. 이 가죽이 다 벗겨지고 이 말초신경이 전부 드러 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 는 가장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어 머니를 아들은 지켜보면서 귀에다 대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어머니는 대답합 니다.
"천번 죽고 천번 사는 것 같 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픔이 있다 는 걸 몰랐다."
아들은 이 말을 듣 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하고 있었습 니다. 하루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내게 주십사 고, 너희들의 고통을 다 내가 걸머 지고 그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 서 너희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기 를." 어머니는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자리에서 편히 돌아 누울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 했습니다. 어머니, 참 어머니의 사 랑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어 머니들은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아 플 때, 열이 사십 도가 넘고 숨을 할딱할딱 할 때는 내가 대신 아프고 싶고, 아니 죽는다면 대신 죽고싶은 거예요.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 다. 어머니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 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 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적 의 미가 있는 높고높고 귀한 사랑입니 다. 이 사랑을 뜨겁게 아주 뜨겁게 체험하고 그리고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어머니의 이 야기가 나옵니다. 참 훌륭한 어머 니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볼 때마 다 언제나 저는 어머니를 생각합니 다. 저는 특별한 면에서 이 성경을 봅니다. 이 어머니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라고. 대표적인 어머니라고 저는 그렇게 늘 생각해봅니다. 오 늘 본문에 마지막에 보세요. 예수 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시 면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크 다!"라고 말합니다. 헬라 원문대로 는 메가스피스티스입니다. 메가톤 급, 메가톤 급의 큰 믿음이라고 그 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시기를 "네 소원대로 되리 라."
그래서 이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어머니의 믿음, 어떤 믿음입니까? 이건 교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성경 을 얼마 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무슨 재물 을 드렸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도 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얘기도 아닙니 다. 아주 심플한, 아주 단순한, 원 초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것뿐입니 다. 그는 이 아이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 그런 어머 니올시다. 아주 훌륭한, 가장 인간 적이고 가장 고상한 모성적 그러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이 딸이 어 떤 딸입니까? 귀신들린 딸이에요. 말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벌거벗 고 도망 다니는 거예요. 모든 사람 이 비웃어요. 도깨비라고, 저것도 사람이냐고 비웃어요. 그러나 이 어머니는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딸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아무 쓸모 없고, 모든 사람이 비웃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는 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건강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사실 은 또 한번 변질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에요. 여행 중에 있는 점잔은 분이 어느 날 지 나가다가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쉬는 데,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혼자 고생하면서 그 수고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 다 잠들고 혼자서 마루에 앉 아있을 때, 이 지나가던 점잔은 손 님이 한마디했다지 않습니까.
"어 떻게 이렇게 수고하십니까? 그저 수고하시느만요."
"아이 그저 아이 들을 위해서요. 아이들이 잘 되기 만 하면야."
그래서 "그러면 어느 아이를 제일 사랑합니까?"
"아 그 맏아들, 첫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사랑하죠. 아니오, 제가 그 막내를 사랑하죠. 그 놈은 아버 지 얼굴도 못 봤어요. 그래 내가 불쌍해서 더 사랑합니다. 아니오, 세 번째를 사랑합니다. 걔는 소아 마비에 걸렸어요. 늘 쓰러지고 넘 어집니다."
여러 자식이 있지만 병 신자식을 더 사랑하는 거예요. 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요. 모두가 다 우습게 보지만은 아니오, 이 어 머니에게는 가장 소중한 딸이었더라 이 말이요. 그리고 그 내면세계를 사랑해요. 그저 귀신이 들려서, 그 래 병이 들려서 그렇지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깨끗한 마음 이 있어요. 어쩌면 조용히 혼자 앉 아 있을 때 그 딸을 바라보며, 쟤가 귀신만 안 들렸다면 어떨까? 얼마 나 좋은 아이인데 라고 생각했겠죠.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그리고 그 미래를 믿었어요. 이 귀신만 나 가주면, 이 병만 고친다면 이 아이 는 훌륭한 아이라고 그렇게 미래를 믿고 있었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누가복음 13장 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지 18 년 된 여자를 만납니다. 이 여자는 곱추요. 몸도 병신인데다가 귀신들 려 18년 됐다면, 도대체 스무살에 귀신 들렸다면 지금 서른여덟살이 요. 여자의 아름다운 세월을 다 이 렇게 보내고 만 이 전형적인 도깨비 들린 여자, 이 여자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저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예수님은 그 내면세계를 보신 거예 요. 그 외모를 본 게 아닙니다. 깊 은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 고 계신 거예요. 아브라함의 딸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가나 안 여인은 이 귀신들린 아이를 그렇 게 사랑합니다. 거기다 희망을 가 집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딸을 믿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젊은이가 실 수로 살인을 합니다. 사람을 죽이 고 그 혐의를 받고 경찰에 체포되어 서 지금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조용히 방문해서 "애야 너 정말 사람 죽였냐?"
"아니오."
이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고,
"우리 아들은 안 죽였답니다"
그리고 고집 을 부립니다. 오히려 재판장이 설 득을 합니다.
"그렇질 않고요, 지금 모든 증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참 가슴 아프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요, 내 아들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결국은 재판은 사형이 됐고, 사형집 행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방문해서 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진실하게 말해달라. 정말 사람을 안 죽였냐?
"아니요, 죽였어요."
"그러면 왜 안 죽였다고 했냐?"
"어머니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 그럼 어떡하 면 좋겠냐?"
"제가 지금 뉘우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서 제가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내가 사람 을 죽였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목 사님이 찾아가서 이 아들의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지만은 사실은 사람을 죽였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 렇습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들에게 말해주세요. 나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살인죄를 지었 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 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믿습니다. 그 장 래를 믿습니다. 그의 진실을 끝까 지 믿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다 안 믿어도 어머니만은 그 자식을 믿 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뿐이 아닙니 다. 이 딸을 위해서 어머니는 참 어려운 시련을 다 극복합니다. 오 늘 본문에서 보세요. 어머니가 예 수님 앞에 나오는데
"내 딸을 불쌍 히 여겨 주시옵소서"하고 소리를 지 르지만은요 아무도 대답지 않습니 다. 아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소리지릅니다. 그 말 속에 두 마디 가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 세요. 귀신들린 딸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 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말합니 다. 이 말은 그 아이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올시다. 그의 아픔 이 내 아픔이요, 그의 고통이 내 고 통이요, 그가 정신병자된 것 그건 내가 정신병자된 거나 마찬가지요. 그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요. 완전히 하나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 이제 대답이 없습 니다. 대답이 없는 그것을 극복합 니다. 이제 제자들이 또 옆에서 말 립니다.
"아 이 여자가 시끄럽습니 다. 보내소서."
그것도 극복합니 다. 이스라엘 집에 보내심을 받았 다, 할 때 이 가나안 여인으로 보면 은 나는 이방 여자이기 때문에, 하 는 열등의식 그것도 극복합니다. 마지막에 보세요. 참 어려운 시험 이 걸렸습니다. 예수님 모처럼 입 을 열어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 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
세 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 째서 이렇게 말씀한 거 같습니까? 그러나 이 여자를 보세요.
"너는 개다. 너는 개 같은 여자다."
이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딸을 위해서. 만 일에 자기 자신의 병을 위해서라면 나를 고쳐주세요 하다가 "자녀의 떡 을 취하여 개에게"그러면
"까짓 거 죽으면 되자나요. 내가 개 취급까 지 받을 것 없잖아"
화를 벌컥 내고 가 버릴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안 그래요. 어머니가 자식을 위할 때는 그렇지 않아. 이 모든 굴욕을 참습니다. 개면 어떻고 고양이면 어때? 아 뭐면 어떠냐 이거예요. 자 얼마나 귀한 얘기를 합니다.
"개도" 개를 인정해요. 개도, 이스 라엘 사람들이 이방사람 특별히 가 나안 사람들을 부도덕하다고 해서 개라고 별명을 부르고 있어요. 그 런데 개라는 말 익숙해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는 대답합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 런고로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하 지 않겠습니까?"
아, 예수님의 마 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이 감동 이 됐어요, 이 여자의 마음에. 이 여자의 기가 막힌 사랑에 감동이 됐 어요.
"네 믿음이 크다. 메가톤 급 이다. 굉장한 믿음이다 이거"
칭찬 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느니라."
얼마나 굉장합니까. 이 같은 사랑, 이 같은 모성애, 이 사랑이 기적을 낳는 거예요. 여러분 이 같은 사랑 깨닫고 나면 그 누군가가 사람이 안 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변화가 안 생기겠습니까? 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모든 어머니의 깊은 마음속에 이 같은 마음이 있어요. 인간은 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살 고, 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며 살고 감사하며 살다가 여러분 아시 잖아요. 우리 한국군인들, 6·25 전 쟁 때 죽었어요. 많이 전사됐는데 죽으면서
"어머니!"하고 죽어요. 이 걸 알아야돼요. 80이 넘은 저희 할 아버지가 저와 같이 어디를 좀 가다 가 넘어질 뻔했어요. 아주 좀 실수 할 뻔하니까요
"아이구 어머니"그러 더라구요. 그래 제가
"할아버지, 아 지금 어머니가 뭐요?"
할아버지 지 금 연세가 얼만데 어머니 찾고 있냐 고 그랬더니
"야 이놈아,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다"
그러더라구요. 나이 들수록 어머니요. 90이 넘은 한경직 목사님 살아계실 때 제가 가 서 문안을 드렸는데요.
"아, 곽목 사, 아주 이상한 거 하나 있구만. 이상한 게 있어. 아니 글쎄 내가 한 평생 영어성경을 봤는데, 내가 한국말 성경보다 영어성경을 더 많 이 봤는데 영어가 싹 없어졌어."
아무리 봐도 영어 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난대요. 이 중간에 배운 건 다 없어지고 이상한 거 하나 있대요. 그저 어머니하고 옛날에 주고받던 말, 다 생각이 난대요. 거 이상하 죠. 그게 그 컴퓨터에 깊이 들어 있다가 지금 다 나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의 대화가 일일이 생각이 난다 그래요. 그러니까 죽을 때
"어머니!"하고 죽는 거예요. 이게 마음의 고향이요. 이걸 알아야 합 니다. 어머니의 마음, 그것이 사람 을 사람되게 하는 거예요.
캐시라고 하는 여자가 대학을 마 치고 연애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가 아무리 말렸지 마는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그는 탕 자가 됩니다. 탕녀가 되어 가지고 알콜 중독자가 되고 창녀가 되고 마 지막에는 아편까지 하게 됩니다. 다 시들어서 이제는 쓸데없다는 걸 알았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버려진 인간이 된 걸 알고 자 살하려고 했어요. 연못에 나가서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 연못 물에 어머니의 얼굴이 확 비치는 거 예요. '그렇지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내가 한번 가보 리라. 먼 빛으로라도 어머니를 한 번 보고 그리고 와서 죽자. 뭐 바 쁘지 않으니까.' 어머니를 뵈러 왔 습니다. 그러나 낮에 올 수가 없어 서 밤에 아주 어두운 때, 몰래 멀리 서 좀 보려고 왔습니다. 불빛이 환 하게 켜있습니다. 안팎으로, 안과 밖에 '아니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대문은 조금 밀어보니까 대문을 잠 그지 않았어요. 대문을 조금 더 밀 었더니
"삐익"
하고 소리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맨발로
"캐시야!"
하고 달려나오는 거예요. 꽉 붙들 렸습니다.
"어머니 내가 10년 동안 전혀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데 어떻 게 제가 올 줄 알았습니까? 왜 불 을 끄지 않고 있습니까?"
어머니 말 씀은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불을 끈 일이 없다. 문을 잠근 일 도 없다."
캐시는 거기서, 거기서 새 사람이 됩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데 내가 왜 밖으로 돌았던가 말 이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돼는 거예요. 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 건 사람이 아니요. 어머니의 간절 한 기도 그걸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 야 합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는 거예요.
아버지 뜻대로 하였는가/마21:28-32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면서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효성을 다하기 위하여 어버이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한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농사철이 되어서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아들은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말로는 순종하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아니한 아들에게 속은 것에 매우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로써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싫소이다." 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다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탄식했습니다. 얼마 후 둘째는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싫소이다.' 하고 아들이 말한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갈 수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므로 하기 싫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불효자의 말입니다.
1. 성경에서 가르친 부모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십계명 중 제 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이 가르친 부모의 뜻은 세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첫째, 부모는 선조 전체를 말합니다. 마태 1 : 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고 한 뜻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다윗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뜻으로 조상의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사도행전 7 : 2에서 스데반이 설교할 때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조상'이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둘째, 부모란 위에 있는 자, 혹은 권위자, 주권자, 앞선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왕을 국부라, 왕후를 국모라 한 것이 이런 뜻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말한 '소자들아' '아비들아' 한 것은 한 가정에 부모자식간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자, 앞선 자를 뜻합니다. 나아만의 종이 나아만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한 것은 권위자, 주권자라는 뜻입니다(왕하 5:13).
학교에서 제자가 선생을 사부라고 하며, 교회에서 교인이 교역자를 믿음의 부모라고 하여 '교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갈 4:19).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고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기와 마병 이여"라고 하였습니다(왕하 2:12).
셋째, 혈연적인 관계에서 부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하는 분을 부모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대표자를 세웠습니다. 가정에는 부모, 학교에는 교사, 교회에는 교역자, 국가에는 통치자, 기관에는 책임자를 세워 효과적으로 일하게 하시었습니다.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면 큰 죄가 됩니다. 이유는 피조본연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와 국가에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의 권한을 부모에게 완전히 위임되었습니다.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 온 권위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세계에 제일입니다. 양육과정에 있어서 젖먹이는 기간도제일 길고,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결혼, 직장, 집을 마련하는 일까지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80된 아버지가 60된 아들이 외출할 때 길조심하라고 말하는 등 죽을 때까지 걱정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매개체입니다. 야고보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주신 은혜가 수천대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2. 부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부모의 은공보다 더 깊은 은공은 없고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한부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산아 산아 높은 산아, 네 아무리 높단들 우리 부모 날 낳으신 높은 은공에 미치랴. 바다 바다 깊은 바다, 네 아무리 깊단들 우리 부모 날 기르신 깊은 사랑에 미치랴. 우리 부모 날 기를 때 춥지 않고 덥지 않게 젖먹이고 업어 주며 고이고이 길렀네. 우리들이 공부할 때 밭을 팔아 책을 사 주고 소를 팔아 붓 사 주며 공부시켜 길렀네. 우리 부모 날 기를 때 수고하고 애를써 검은머리 백발되고 곧은 허리 굽었네, 우리 부모 은공 생각하면 산이라도 높지 않고 부모 사랑 생각하면 바다라도 깊잖다."
둘째, 자녀는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위대한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제일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을 때 거기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부모는 나를 낳으시고 있게 하신 분입니다. 부모 없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도 없으며,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에서 어떠한 은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면 진정한 이성의 사랑도 알지 못하고, 친구의 사랑도 알지 못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고 효도하는 것은, 사람 사이에도 은혜와 사랑, 희생과 존경의 관계를 갖고 살게 합니다.
셋째,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첩경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3)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내 형제, 내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못하는 자는 영의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하고자 한다면 먼저 육신의 부모의 뜻을 따라 살고 사랑하여야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3.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중 사람에게 명한 계명 중 제일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요, 명령임으로 이를 실천하지 아니하면 곧 죄가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원어는 '키베드'인데 의학적으로 사람의 간장을 '카메드'라 하는데 내장 중 가장 무거운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공경이라는 말은 부모의 교훈이나 명령이나 요구나 희망을 자기 몸의 간장처럼 중히 여기고 귀히 여기며 무게 있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첫째, 공경하라는 뜻입니다. 부모공경은 계명의 대강령이며 본질입니다. 받들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부모의 말씀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명심하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내 내장 중 간장은 무거우나 그것이 무거운 줄 모르고 달고 다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음입니다. 부모공경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간이 배 밖에 나온 자라고 합니다. 부모공경하지 않는 자는 마음속에 상처를 입은 사람입니다.
둘째, 부모에게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32). 겸손은 무거운 물건을 들려고 할 때 허리를 굽히고 전 힘을 다 기울이듯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고 물질적, 지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위치를 존중하고 권위가 상실되지 아니하도록 잘 해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면에서 수고는 자식이 하고 영광을 부모가 받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잠 17 :6).부모를 자기의 영광으로 삼는 것이 겸손입니다.
셋째,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하였습니다. 존경하라는 말은 일에 대가의 상으로 후하게 갚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는 태도로 후하게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부모가 믿지 않으면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항상 편하게 하여 드려야 합니다. 친히 부모를 모셔야 하며, 좋은 의복이나 음식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의 마음을 따라 취미생환에 낙을 붙이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하도록 도와 드려야 합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5) 부모를 경히 여기지 않는 것이 존경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f5). 기쁘게 즐겁게 하는 것이 존경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 15:20).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은 존경이 아닙니다.
넷째, 부모공경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창 50:5) 라고 하므로 아버지 이스라엘의 뜻에 순종함을 봅니다. 순종을 하는 것 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 6:1)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0-2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부모의 뜻에 항상 순종함으로 공경하였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4. 부모공경하는 자에게 축복이 옵니다.
첫째, 부모공경하는 자에게 축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했습니다. 이 모든 계명은, 즉 부모공경하라는 계명은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잘되는 축복입니다. 순리를 따랐으니 범사가 형통합니다. 부모를 기쁘게 했으니 자식이 즐거울 것입니다. 위에서 만족했으니 아래도 만족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장수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생명이 깁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의 번영을 의미합니다. 소유가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손이 계속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어 운명하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잘 봉양하도륵 하였으니 우리도 그 뜻을 따라 공경하고 순종하고 즐겁게 하여 드리도록 하여 축복받는 자녀들이 되게 합시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여 영원한 축복을 누립시다.
자녀들의 본분/엡6:1-4
행복한 기독교 가정이 되려면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부부관계(엡 5 :7-33)이고, 둘째는 자녀와 부모관계(엡 6 :1-3)이며, 셋째는 부모와 자녀관계(엡 6:4)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비유하여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따라서 이 행복한 기독교 가정의 세 가지 요소 중에 자녀들의 본분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오해로 비롯된 결과가 사실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겪어온 역사도 그러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킨다고 장담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율법을 오해했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잘못 대하고 율법을 바로 지키지 못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잘못 대하는 무서운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릇된 율법의 눈을 가지고 동족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그들은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민족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300년 동안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과 터키 갑바도기아의 지하 도시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조정 역시 200년 전에 들어온 천주교회를 제사문제로 오해하던 끝에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후 100년 전 개신교를 통해서 들어온 기독교 역시 제사문제로 오해를 받아 기독교인을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식들'이라는 오해를 하면서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규정해 버리는 웃지 못할 비극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사종교로부터 비롯하여 제사문제를 해결한 하나님의 종교요, 부모 섬기는 것을 우선하는 종교입니다.
1.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효도할 것을 명령받은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20 : 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간에 지켜야 할 율법 중 첫째 조항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 6 :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 :15, 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2. 기독교인의 효도는 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동서고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로 규정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효도는 그 기준이 그 부모들의 요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악인일 경우 자식도 악인이 되어야만 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효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효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율법 만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효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의 효는 부모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하나의 본질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효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진정한 효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기독교인의 효도에는 반드시 약속이 따릅니다.
그 약속은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 :3)고 말씀함으로 주 안에서 효도하는 자녀들에게는 점진적으로 축복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물질적인 축복과 정신적인 축복, 사회적인 축복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수한 전인적인 삶이요, 전역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영생에 이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민족사회에 노인들의 숫자는 100만여 명에 달하며, 그중 15만 명이 무의탁 노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무료 양로원의 수용능력은 5천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서구 사회로부터 밀려오는 핵가족 제도는 부모님들을 현실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인들의 소외는 심해 갑니다. 이러한 시대의 상골 속에서 한국교회는 내 부모만을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섬길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입장에서 온 교회가 주 안에서 민족사회를 향해 효도를 다짐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주 안에서 효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제목 : 행복한 가정
본문 : 에베소 6 : 1-4
최 병 곤 목사/청주 동산교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제일 먼저 축복해 주신 곳이 가정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도 가정에서 성장하셨고 가정의 고귀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의 시작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도 했고 가정의 열매인 어린아이들을 영접해 주시고 안으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존재하는 날까지 기독교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하나의 사명입니다.
현대 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정 문제입니다.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녀간의 문제, 형제간의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5월 가정주간을 맞이하여 진정한 가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겠는가? 어떻게 우리들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규모가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무질서하고, 규모가 없고, 범절이 없는 기정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성 가정학자 버지니아 사타이아는 가정이 지니는 네 가지 중요한 특색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는 가정, (2) 서로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 (3) 규칙과 질서가 있는 가정, (4) 사회와 잘 조화되어 연결되어 있는 가정
이 네 가지 요소가 잘 적용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소위 가장(家長)들이 자녀와 더불어 동반 자살하는 기사를 많이 보게 됩니다. 가정이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규모와 질서가 없는 가정에 비극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다.
2. 서로를 이해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가족을 이루어 한지붕 밑에서 사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벌써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깥 사희생활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지라도 가정에 돌아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나눌 때 피곤이 풀리고 새로운 창조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없는 가정,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가정은 하나의 동거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는 1989년 5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하지 않은 동거자가 결혼 허가서를 신청하듯이 동거인 신청서를 내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법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동거하면서 가족 개념이 아닌 동거인의 개념으로 바꾸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가정의 정의를 기능적으로 내리면 꼭 결혼식을 올린 남녀가 아니라도, 그리고 혈통적 관계가 없는 아이라도 함께 모여 기능을 가지면 가족이라는 뜻이 됩니다. 얼마나 가정의 존재가치가 파괴되어 가는 현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 함께 거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지 않을 때 기능이 모여 동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교수 스티네트(Stinnett) 박사는 좋은 가정에는 공통점 여섯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1) 감사 : 가족 서로가 고마움을 말이나 행동으로 자주 표시하는 것
(2) 헌신 : 개인보다 나의 가족 전체의 유익과 명예를 위하여 사는 태도
(3) 교통 : 가족간의 잦은 대화로 어떤 일이 있을 때 묵과하거나 혼자 해결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의논하며 살아가는 태도
(4) 함께 갖는 시간 :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가족들이 함께 갖는다.
(5) 정신적 건강 : 낙관주의 윤리적 가치관, 박애정신 등 가족의 정신적 건강이 강한 가족을 만든다.
(6) 극복의 능력 : 가족적인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고통과 슬픔으로 넘기지 말고 변화와 발전의 기회로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이 강한 가족 등 가족 개개인이 각각 하나의 인격체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아껴 줄 때 행복한 가정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3.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가정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가정,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온 가족이 예배하는 가정, 이런 가정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바르게 신앙교육을 행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그 두 아들은 범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은 서원하여 얻은 아들로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바쳐서 훌륭한 선지가 된 것입니다.
저의 가정의 신앙훈련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2남 2녀, 사남매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성장하여 결혼을 시켜서 각기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려서부터 매일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한글 해독을 하는 대로 가정예배를 인도케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남, 장녀, 차녀, 차남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가정예배서를 가지고 인도자가 된 사람이 찬송을 찾게 하고, 성경은 다같이 돌아가면서 읽고, 예배의 말씀을 인도자가 읽고, 인도자가 기도하고, 주기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자녀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책망할 필요도 얼이 자기 차례가 되어 스스로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같이 울면서 기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가정은 이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훈련을 쌓아갈 때 요즈음 소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 문제아 문제 등의 염려가 없이 믿음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의 삶의 보람은 가정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단순히 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온 가족이 서로를 위해 주고 이해해 주고 거짓 없는 대화와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모든 가정들이 주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잘 지킵시다/딤전5:8,엡5:22-6: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가정이 파괴되고 어려움을 겪??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으로 가득 찰 때 사회가 아름답게 됩니다. 모든 것이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될 때 복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보통 교회 일에 열심히 있고, 기도도 잘하고, 부흥회나 기도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삶도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귀한 모습은 가정생활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5 :8). 그런데 가정생활에 충실한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가정 밖에서 이 일, 저 일에 분주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가정'이 소홀히 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까?
1.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은 가정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가정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많은 주부들이 가정에만 충실하는 것이 무능한 사람의 모습으로 여기고 밖으로 활동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취미생활을 한다면서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다닙니다. 호텔이나 고급식당, 그리고 헬스크럽 등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가정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지나쳐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을 잘 감당하면서 교회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목적도 가정이 잘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선물로 받아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고 복되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에 보면 교회 직분자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고, 자녀와 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교회를 잘 섬기게 됩니다. 자신의 가정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일수록 더욱더 가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을 맡길 때 그 사람의 학위나 배경을 보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을 보고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주의 백성들일수록 가정에 충실해야 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 오늘날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가정을 뛰쳐나와 이리저리 방황하고 탈선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부모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제 궤도에서 벗어나 금이 가면 그 사회가 병들고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회일수록, 또한 복지국가일수록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모두가 가정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가족과 함께 가집니다. 선진국일수록 가정이 안정되고 화목하며 모두가 가정에 충실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은 사회일수록 썩은 냄새가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정이 깨어져 거기서 흘러나오는 썩고 냄새나는 물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가정의 문제입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합니다. 가정이 치유될 때 사회도 치유됩니다. 사회문제, 청소년문제 ‥‥‥누구를 향해, 무엇을 향해 우리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 바로 우리의 가정에 있음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가정의 상처, 가정의 아픔이 해결되고 회복되고 치유될 때 우리주변의 모든 문제도 해결될 것입니다.
3.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세워 주신 '두 가지 터'가 있는데 그 첫째가 가정이고, 두 번째가 교회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닦아 놓으신 터전이기에 영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오래 지속되고 그 가치가 무한합니다. 교회 도 영원하며, 거룩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만드신 후에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서 그것으로 아름다운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깨어 보니 아름다운 하와가 옆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로다. "라고 이 세상의 최고의 사랑의 고백을 토할 정도로 기뻤으며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솜씨요, 작품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고, 서로 의지하면서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가정'이라는 '불'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도 귀하고 아름답고 복되게 생각하여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세우신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4.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경제가 성장되고 돈을 많이 벌면 누구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여건이 나아진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 든든히 서야 행복한 것입니다. 돈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면 온 사 회가 병들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 리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낙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가정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며, 가정에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먼저, 성경은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엡 5 :28).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길어지고 성숙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할 때는 뜨거웠다가 점점 식어지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아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앞설 수는 없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서가 안정됩니다. 그 자녀들은 사랑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에 잘못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넘치고 화목한 가정을 원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가정에 좋은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은 얼마 안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귀하고도 중요한 많은 것들을 가정에서 배우게 됩니다. 참 인격과 올바른 삶의 자세는 가정이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갈 때 자녀들은 그 신앙을 이어받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올바른 인격을 가진 분들이라면 자녀들도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성경은 자녀들을 가르칠 때 '주의 훈계와 교양으로' 양육하라고 말합니다(딤전 6 :4). 성도들의 가정에는 부모들이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태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는 탈선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만인 중에서 앞서 나갑니다. 그러므로 '가정'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인간교육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위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가정은 모든 사회와 국가의 핵심입니다. 교회도 가정이 모아져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교회를 주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은 천국 같고 에덴동산 같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효도/살전5:16-18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식된 자들이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하고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법을 익히고 실천을 다짐하는 주일이 어버이주일입니다. 본문에 의지하여 참된 효도를 살펴봅시다.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려하는 일이지만, 문제는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열심히 효도를 한다는 것이 효도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잘 보고 마음에 새겨서 우리 모두 하늘 아버지께, 그리고 육신의 부모님께 참된 효도를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참된 효도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요구하는 뜻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요구하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원하며, 어떤 부모는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으니 건강만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자식이 돈만 잘 벌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마다 운동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연습을 하게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나쁜 짓만 안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참 믿음만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렇듯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는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든 부모가 자식이 자기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만은 나보다는 잘 살아라 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를 향하여 가지신 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이 부족하고, 생각하는 것이 좁으며, 보는 것이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가지는 뜻이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이 세상을 뜬 후에 저 세상에 가서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므로, 육신의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과 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요구한 대로 자식들이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에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이 곧 나의 육신의 부모님이 가지신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구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식에게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향하여 가지신 이 뜻보다 더 좋은 뜻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가지신 뜻이 무엇입니까?
2.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가지신 뜻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다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을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면서 살아야 참된 효자가 됩니다. 자식을 기를 때에 항상 우는 아이는 부모의 마음에 근심덩어리입니다. 반대로 웃으며 자라는 아이는 부모의 즐거움이요, 가족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이치는 어른이 된 후에도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기뻐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울기만 하면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심 중에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기뻐하면서 살아서 참된 효도를 합시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물론 다 아는 사건들이지만 기도하여 보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처럼 자식은 부모님께 모든 일에 대한 보고를 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부모님께 아뢰고 행하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그리고 보고를 잘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보고할 때에 정직한 보고가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보고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취사선택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식은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왜 이 모양으로만 길렀어요." 하면서 원망한다든지," 다른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 주는데‥‥‥‥ 하면서 비교하여 불평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고픈 마음뿐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3. 왜 이 3가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기 위함이라기보다 자녀들을 위해서입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사는 사람은 육신이 건강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체내에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하니 힘이 없고 따라서 병균이 침입할 패에 막아 낼 힘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생활은 육신이 건강하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고 이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기뻐하며 삽시다. 육신의 건강이 부모에게 큰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영혼 건강의 비결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호흡 장애를 받는 사람과 같아서 그 영혼이 쇠약해집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 무엇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시험에서 이기게 되고, 기도하면 기쁨의 생활을 더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보고를 잘하면 그 관계가 항상 활발해집니다. 막힌 것이 없으며, 화기애애한 가정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생활 건강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있어야 사람에게도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원수가 없을 터이니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해서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됩니다.
이기심에서 발로된 효는 참된 효가 아닙니다. 물려받을 만한 유산 때문에 효를 가장하는 것은 참된 효가 아닙니다. 참된 효는 성경에서 가르친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가정에 계시는 주님/잠22:6,엡6:4-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날 파리에 있는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영국에는, 2박 3일이라고는 하지만 약 40여 시간 정도 밖에는 머물지 못했었고, 그나마 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영국을 관광한 것은 겨우 토요일 낮시간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저에게 참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가 참으로 훌륭하게 본 것은 저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였기 때문에 대로(大路)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소로(小路)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차들이 좁은 소로를 다니는데도 교통이 물 흐르듯이 소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래길에서 차가 서로 만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간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 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차들이 사고 없이,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잘 소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 보여 주었고, 그것은 경제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영국은 아직도 신사도가 살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영국은 그러한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국에서 앞날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훌륭한 문화수준과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들의 가정 때문이었습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개방으로 인하여 가정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양쪽 부모가 다 자기 친 부모인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Ⅰ? 재혼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에 아빠가 바뀌던지 엄마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바뀐 아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모 자신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상처는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희망과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가 대부분 성적으로 타락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저들이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이요, 또는 부국일런지 모르나 장차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나라입니다. 인구 수를 감안해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의 노벨상을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가정교육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려고 하면,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이며,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가정이며,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 교우님들 모두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가 되며, 여러분이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학교에서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사와 학교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말씀 중의 하나인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바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며,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과외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 악기나 미술과 같은 재능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희 교회의 집사님 중에는 전도사님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과 인재로 양육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학교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려고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도 학교와 교회의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학교와 교회가 되지 못하였고, 부모는 아이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이고, 가장 좋은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교회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이 자녀의 스승이 되셔서 좋은 학교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3
믿음의 자녀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효도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과 삶의 복을 주시기 위해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효도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지켜야 됩니다.
잠언 3장 1절은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말씀하고 있고, 6장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셨습니다. 효도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의 등불이요 빛이요 생명으로 알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모든 도덕의 기본이 '부모 공경'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1-2절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님의 사랑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은 저절로 생겨진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건 부모님들의 큰 희생과 사랑, 봉사와 양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자녀들은 마땅히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중국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숭이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 데려가자 그 어미가 백 리 이상을 좇아왔다고 합니다. 애닯게 따라오던 어미가 그만 죽었는데 조사를 해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 꾀꼬리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놨더니 그 어미는 울지도 않은 채 얼마 안가 죽었다고 합니다. 살펴보았더니 꾀꼬리 어미의 창자와 간장이 다 녹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를 향하신 부모님들의 사랑이 어떻겠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그 사랑과 헌신, 봉사와 희생에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본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 기적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요2장)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말씀을 하시자 순종하기 위해, 어머님을 섬기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고통 중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고향 땅 나사렛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같이 효도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요 백성인 우리도 마땅히 효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효도하는 것이 바른 효도의 방법이 될까요?
먼저, 본문에서와 같이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주님의 법을 먼저 따르라, 주님의 법과 육신의 부모의 말씀이 차이가 있을 때는 주님을 법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도 다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된 이들은 자녀들이 순종할 때 가장 ??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부모나 하나님께 효를 실천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이 효도인 것을 가르치는 고사가 있습니다. 시골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온 동네에 효자라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부자로 살고 있으며 부모님께 잘 해드리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효자라고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이 양반집 아들이 가난한 집 효자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몰래 싸리문 밖에서 가난한 집 아들이 어떻게 그 홀어머니를 모시는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들에 가서 일하고 돌아온 아들은 지게를 벗어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어머니에게 자기 발을 씻기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발을 씻은 다음에는 마루에 올라 어머니가 어깨를 주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반집 아들은 소문이 잘못된 것이구나 생각하고 뛰쳐 들어가 그 아들을 야단쳤다고 합니다. "아니, 자네가 이 동네에서 효자라 소문이 나 배워볼까 하고 살피러 왔더니 어떻게 어머니더러 발을 씻기라고 하고 등을 두드리라고 할 수 있나?" 그러자 효자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도록 맡겨드릴 뿐입니다. 내 발을 �기시는 것도, 내 어깨를 주무르시는 것도 모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양반집 아들은 이 말을 듣고 효과 관련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이 효도입니다.
두 번째로, 공경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공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키베드'인데 이는 키베드는 "가장 무겁게 여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간'이라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생명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공경이란 이처럼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잠언 23장22절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했습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군자(君子)는 그 어버이의 과오를 잊어버리고 그 장점만을 들어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학문이나, 재산, 벼슬이나 명예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때문에 귀중히 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세 번째로, 부모님의 육신을 잘 봉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자기 육신의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행위를 꾸짖으셨습니다.(마15:4) 그리스도인들은 물질로도 육신의 부모님들을 편안히 모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성도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도 드리고 부모님께 도 용돈으로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잘 공양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넉넉함과 훌륭한 가정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부모님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잘 되고 평안하도록 기도하는 것, 그들이 은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세상의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을 뿐입니다. 부모님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시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 땅 위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아갑니다. 부모님들이 구원받아 하늘나라 본향에 이르실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런 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효에 축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효가 인생과 가정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고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효가 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도, 공경하는 것도, 육신을 공양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효가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식치고 자기 부모에게 잘못하고 싶은 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효에는 시간의 제한이 따릅니다.
효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는 일입니다. 지금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 대대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96년에 장한 어머니 상을 받으신 박 찬해 여자 장로님이 계십니다. 박 장로님은 7남매를 키우며 교회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거기에다가 홀로 되신 시어머니를 40년간이나 모셨습니다. 이렇게 효를 다한 장로님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7남매 중 딸 넷이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30년 이상 새벽기도 한 장한 어머니"라고 칭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교회에 헌신, 충성하면서 7남매를 사회 각분야의 지도자로 키운 일 만으로도 대단한데, 박장로님은 홀 시어머니를 40년간이나 모시면서 효부 상과 장한 어머니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런 장로님의 효도와 기도가 자녀를 복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식된 우리들은 어버이 주일을 맞아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비추어 가슴을 여미며 부모에게 잘못 행한 일들을 회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배운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붙들고 효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기를 극복한 가정/룻4:13-17,벧전3:13-17
우리가 구약의 룻기를 읽을 때 한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로만 이해하였습니다. 룻기가 다만 효성이라는 덕목을 교훈하기 위하여 성경에 들어갔다면 성경에 들어가야 할 책이 동서양에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룻보다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성경에 들어간 것은 효성이라는 덕목 이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룻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이방여자인 룻이 아무 희망도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장차 메시야가 탄생할 땅인 베들레헴에 들어와서 자기 희생을 통하여 대가 끊어질 뻔한 집안의 대를 이어 놓은 것입니다. 그가 낳은 아들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룻의 등장으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넘치게 된 한 역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은총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은 메시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룻기를 살펴봄으로 고난의 역사가 어떻게 소망의 역사로 바뀌어 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위기의 역사
룻기 처음 부분에서는 나오미 집안에 닥친 불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에 살던 이 집안이 모압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거기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10년 사는 동안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집안을 이끌고 나갈 남자들이 모두 죽어버리므로 유다의 대를 이어나갈 수 없는 '위기'에 빠져 버렸고, 과부가 되어버린 세 여인의 삶은 참으로 소망 없는 고난의 삶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룻기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재난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세 여인의 '고난의 삶'입니다. 이것은 마치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것과 흡사합니다. 이 세 여인에게 특별히 지적할 만한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되는 절망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며느리인 룻은 이를 거절하고 시어머니와 동행하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고난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룻'이란 말의 어원은 '여자 동료'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여자라고 볼 수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이 룻의 출현은 뜻밖의 사건이요 예기하지 못했던 은총이었습니다. 돌아간 동서와 같이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런 경우에 처한 여인이 걸을 수 있는 보통의 길인데 룻은 '고난의 동반자'로 나선 것입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16-17
이 고백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시어머니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희망이 없는 그 고난의 삶 속에 철저히 동참하는 참된 벗으로서의 룻의 모습?都求?. 이것은 바로 신약에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로 연상케 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가 영접하여 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뱉은 탄식은 지금 그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란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차라리 "쓰라린 한을 품은 자"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떠날 때는 그래도 아쉬운 것 없이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이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탄식대로 베들레헴 사람들이 볼 때 그의 귀향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고난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나오미의 탄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한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 밑에 신음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 분단된 땅에서 전쟁과 독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기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보다 더 오래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고난의 역사는 끝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때 흥청거리다가 갑자기 당한 경제 대난을 만나면서 실업으로 인하여 지금 가정들이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오늘의 상황은 나오미처럼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는 나오미처럼 완전한 절망에 빠진다면 거기에서 헤어날 길이 있겠는데,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버티고 있는데서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를 아직 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하게 자기의 처지를 '나오미' 즉 기쁨으로 인식하지 아니하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인식한 여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은 비로소 개입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는 인간의 철저하게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고난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탄식하며 울부짖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에 처하였을 때 그 고난의 자리에까지 내려 오셔서 함께 고난을 당하시므로 그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경제 정책의 실패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벗어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의 궤도를 벗어나 함부로 달려간 정치의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위기를 이런 구원사적인 이해를 가지고 해석하고 대처할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정치적인 시각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문제를 접근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계속해서 가로막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절망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계속 헤매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셔서 거기서 이삭을 줍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끼니를 위한 작업이었지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돌보아 주면서 룻의 행위를 칭찬하였습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11-12
보아스도 나오미와 룻이 당한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룻에게 깨우쳐 준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의 보고를 듣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집안의 기업을 이를 가까운 친족임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시어머니는 그의 며느리에게 목욕하고 향수를 바른 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보아스의 잠자리로 숨어들라고 지시하였고 그 며느리는 그 지시대로 즉각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어떻게 보면 파렴치한 일이요 지탄받을 행위일 수 있기에 이것은 큰 모험이요 위험이 따르는 고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유다의 대통을 잇기 위하여 자신의 생과 자기 민족 그리고 자기의 종교까지 버린 것입니다. 룻은 자기의 젊음을 희생의 제물로 하여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한 한 여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부요를 비우고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희생된 것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나무라지 아니하고 그가 이루려는 구원사적인 행위를 이해하고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희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을 바람난 여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받을 여인이요 순결하고 정절이 뛰어난 여인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맥락을 이어가는 중요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즉각 법적인 절차를 밟아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보아스에게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11-12
룻은 여기서 무자한 이스라엘 가문을 일으킨 라헬과 레아, 그리고 무자한 유다 가문을 일으킨 다말과 같은 선상에 서는 여자가 됩니다. 이것은 룻의 역할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를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임을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룻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룻은 사라지고 나오미가 동네 여인들의 축하를 받는 것으로 보도가 됩니다. 아들을 낳은 것은 룻이지만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여인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룻기가 처음에 나오미의 탄식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때, 이제 그녀의 탄식이 바뀌어 기쁨의 노래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의 탄식이 변하여 나오미의 기쁨으로 바뀌었음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은 하나의 희생의 제물로만 등장을 한 것입니다.
서두에 나온 나오미의 탄식은 세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1)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탄식
2)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 대신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탄식
3)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여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탄식
그러나 나오미의 이런 탄식이 하나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빈손이었던 그녀에게 보아스가 보내 준 곡식이 담겨지고 그리고 그 손에 아들이나 다름없는 손자가 안기운 것입니다.
살맛을 잃었던 나오미에게 여인들의 축하의 노래가 들려집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그 품에 안긴 아들은 바로 그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살맛을 찾게 해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의 괴로움을 끝나고 그의 원래의 이름대로 기쁨의 생애가 그녀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희망이 없었던 나오미에게 놀라운 희망이 안겨진 것입니다. 모든 축하와 기쁨은 룻이 아닌 나오미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룻은 이 기쁨의 자리에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또 다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절망과 고난의 역사가 변화되어 희망과 생명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비천하고 야비하며 연약하였던 우리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룻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오미의 생애가 역전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음으로 달려가던 인간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역전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탕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룻기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예표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 이후부터는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모든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역전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과 고난을 감수함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나오미처럼 희망이 잃어버린 이 민족을 외면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함께 그 고난의 동반자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의 현실은 이 역사를 반전시킬 룻과 같은 고난의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야말로 이 고난 당하는 이들의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고난의 역사를 구원사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서는 누가 기쁨으로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룻기가 보여주는 소망의 신학은 룻이라는 연약한 한 여인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고난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한국교회가 그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이며 그 희생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는 우리 모두 역사를 함께 살피며 나갈 때 찾아질 것입니다.
오늘 많은 가정들이 가장의 실업 때문에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위기의 때일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가족들이 단합하여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때에 불평과 원망은 가정을 완전히 파괴하는 악마의 소행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가족 모두가 룻과 같이 자기를 완전히 희생하며 서로를 섬길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이 고난의 역사는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멍에에 짓눌려 탄식하고 있지만 말고 역사를 두루 살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서 순종함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이 역사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입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습니다. 평범한 한 여인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고난의 동반자"로 나섰던 룻과 같이 오늘의 고난을 가족과 또 이 민족과 함께 나누는 "고난의 동반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룩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를 마땅히 공경해야 합니다/삿11:30-40,엡6:1-4,막7:24-30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인간이 인간이 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고, 그리고 인간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배제하고서는, 인간의 행복을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근본이 되시고, 부모님은 우리의 육적 근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를 잘라 냈을 때에, 그 나무가 금방 말라죽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어버이를 부정하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거니와, 어버이에 대한 공경심이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어버이를 업신여기게 되면, 그런 사람은 곧,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기본 도리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에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어버이를 잘 모시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한, 잠언 23: 25의 말씀처럼, 부모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부모를 잘 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자식을 키우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우리 자신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써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식들 보고 "이 아비 어미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도 몰라주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부모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식들을 보고 하는 말은 사랑의 음성이고, 부모가 우리에게 하는 말씀은 잔소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이 답답하게 여겨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식들이 볼 때에,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답답하게 여겨질까요? 왜냐하면, 부모님과 우리의 세대 차이보다는, 우리와 자식들의 세대 차이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 부부들은 대담하게, '우리는 나중에 늙어서 자식들을 의지하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지금 부모를 모시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변명 삼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노인들의 고통과 고독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치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한 길을 갑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 길을, 머지 않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독을 우리도 맛보아야 합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자작이냐 모방이냐로,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동시(童詩)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울리지 말라. 지내 온 길인 걸.
늙은이를 탓하지 말라. 다 가는 길인 걸」
어른들은 자식들을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을 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우리도 언제 가는 늙은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노인들의 반복되는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젊은 우리도 늙어지면 자식들로부터, 우리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지겹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위(當爲)입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무슨 공경할 만한 일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낳아서 키워 주신 부모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1. 점점 더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바울 선생은 「자녀가 되신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씀이 다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의 질서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다 고루 그 빛을 비추듯이, 그의 부모가 악하든지 선하든지 간에, 그 자식은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명령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바울 선생은 에베소서 6장 1절에서도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①그러나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공경스럽지 않은데, 어떻게 공경하며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면 이렇게 말할 게 틀림없습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어른도 몰라본다. 아비 어미 알기를 우습게 여긴다"고 말이지요.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른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②부모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를 보십시오.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는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개만도 못한 여자'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자기 딸의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그 모욕을 참아 내고 있습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父兮生我(부혜생아)하시고 母兮鞠我(모혜국아)하시니, 哀厓父母(애애부모)여 生我句勞(생애구로)셨다. 欲報深恩(욕보심은)인데, 昊天罔極(호천망극)이로다. 〉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 슬프고 슬프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얼마나 애쓰시고 수고하셨던가!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그 은혜가 하늘같이 다함이 없도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나를 낳고 기르신 공로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안다고 해도 얼마나 지극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자식을 사랑하고 기르며 가르치는 수고가 어떠한지, 그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잘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이 문제를 속히 풀어서 깨달을 수 있을 때에야, 부모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③빗나간 자식 사랑이 불효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심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잘못된 자녀 사랑 때문입니다. 너무 공부만 강조하다 보니, 인간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만 잘 하게 해서 출세시켜야 하겠다는 부모의 지나친 욕심이, 정작 중요한 인간 관계나 공동체 생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자기만 알고 부모와 이웃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부모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도 쉽게 내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들을 가르치되, 우리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교육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를 ?? 섬기게 되며,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주셨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악습이 있었던 것은, 우리 인간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줄 알고, 늙으신 부모를 갖다 버렸겠지요.
젊은 우리도 언젠가는 늙어져서, 잔소리를 한다고 자식들로부터 구박을 받을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 생각할 때에는 안 할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심해져서, 조금 전에 한 말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을, 어떻게 그 길을 피해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지난 주 월요일에, 어느 목사님 내외와 함께 출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잔소리가 아닌, 사랑의 음성으로'이라는, 지난 주 설교 제목을 사모님께서 보시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있는데, 지금 초등 학교 4학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사모님이 뭐라고 하자, 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로만 여겨져서,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에도 청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의 말을 잘 듣게 될 것입니다.
①'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고 오래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면,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부모를 떠나서는, 행복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부모의 사랑도 깨달을 수 없거니와, 노인들의 잔소리나 간섭을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정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망령 끼 섞인 푸념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자식에게 강요하다 싶이 하면서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까지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늙어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그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실수나 잘못을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며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보다 더 어려운 가정을 도운 일, 우리보다 연약한 이를 보살펴 준 일, 우리보다 부족한 믿음 가진 이를 열심히 권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다 훌륭하고, 모두가 다 실수하는 일이 없고, 모두가 다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가 누구를 도와 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성하고 보니, 우리를 길러 주신 부모가 연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연약해진 부모를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인간의 도리요,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②자녀된 우리는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을 보십시오. 섣불리 하나님께 약속한 아버지의 서원 때문에, 애매한 딸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버지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세상 삶으로 끝나고 만다면, 이 딸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이후 이백 년 또는 삼백 년을 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지금 혹시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노라'고 한다면, 과연 그 즐거움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오늘 우리가 부모를 섬겨 사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의 말을 듣고 순종하기가 참으로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 섬기는 일이 힘들다고 부모를 업신여기게 되면, 우리의 자식 또한 우리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래도 좋다는 말입니까?
3. 공경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상대방도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불평하게 되면, 상대방도 나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고 비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되면, 우리의 자식들도 분명 우리에 대해서 불평 불만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식들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을 갖게 되겠지요.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린 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입니다.
①우리는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우리에게 해 준 일이 뭐가 있느냐?'하거나, '다른 부모에 비해서 우리 부모는 형편없다'고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혹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우리 대(代)에서 그 불행은 끝나야 합니다.
이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찾아보면, 부모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생각났으면, 마음으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쉬운 대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해 보십시오. 의외로 부모님은, 그 말 한마디에 눈물지으며 고마워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할 것 없이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일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열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나 하나님께로부터 칭찬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송강 정 철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은혜를 잊고 살다가, 그 은혜를 깨닫고 보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부모를 모른 체하며 살게 되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짐승의 자리에 빠지는 불행을 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②부모님을 공경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를 잘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시에 잘 섬기는 일이 됩니다.
③후세들을 올바로 교육해야 합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은, 자녀를 진정 아끼고 잘 교육하는 길이 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세상 지위가 높을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 교육은 학교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말(言)이 아니라 행위를 본받는 실습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가정입니다. 부모가 하는 대로 자녀들이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지 않을 경우에는, 새로운 가정의 시작을, 예수를 믿는 내가 열어 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야, 지금까지의 잘못된 구습을 타파하고 아름다운 전통을 새로 세울 수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 그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부모 앞에서는 불효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알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채 듣지 않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요 불효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에 옮김으로써, 자식들로부터는 존중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는 귀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대가 함께 사는 가정/히11:3-11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堧隔?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기독교적 경로사상/레19:32,딛2:2-3
1. 노인을 공경하라.
오늘 읽어 드린 레위기 말씀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창조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인을 공경하라고 명하신 까닭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에서 노인은 축복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공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을 놓고 에서와 야곱이 다툰 사실이나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한 사실들을 통해서 보듯이 노인의 축복권은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축복권은 단순한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전통을 잇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에게 부여된 이 권한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자연히 그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노인을 공경하여야 할 이유는 그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아낌 없는 희생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어버이들의 희생과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경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노인들은 젊은이보다 삶의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를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 속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삶의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넷째로, 노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하여질 때이기 때문에 당연히 돌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위로하고 돌보아 드리며, 노인들의 삶에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 드리는 일은 자녀들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2. 어떻게 공경할 것인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노인을 어떻게 공경할 것인가? 첫째로, 노인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야 합니다. 노인들을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편견을 고쳐야 합니다. 노인들을 비생산적이고 비활동적이며 비능률적이라고 단정하고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노인들은 개성을 지닌 독특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노인들에 대한 통념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 노인들이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고, 그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려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개성적인 존재가 되어 가기 때문에 그런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셋째로는 노인들에게 개인적인 관심과 인격적인 접촉을 제공해야 합니다. 노인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해와 수용이요, 따뜻한 인간적 관심과 접촉입니다. 노인들을 같이 모시고 있을 때나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시간을 내어 자주 전화하고 찾아 뵙고 따뜻한 위로를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진정한 공경은 따뜻한 관심에서 시작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넷째로는 노인들에게 독립심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적절한 활동과 참여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노인들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이 유용하고 쓸모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도록 도와 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 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노인들 스스로가 존경을 받게끔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노인들 측면에서 레위기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젊은이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노인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노인들이 공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공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 혹은 깨끗하고 정의롭고 확신에 찬 삶의 모습을 이룩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손들에게 남겨 줄 만한 정신적 유산을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발굴하고 그것을 물려주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적 전통을 수립하고 전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존경받는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의 백발이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기 위해서는 평생 그가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노인이라고 무조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지나온 삶이 아름답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혹은 욕심껏 자리에 연연하여 추하게 그것을 추구한 사람들을 보면 그 노년이 별로 아름답지 못합니다. 우리는 노년이 존경받을 만한 시기가 되도록 항상 의로운 길을 추구해 가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노인이 될수록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년기는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때요, 신앙적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때입니다. 정신적으로 결코 쇠퇴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낙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입니다. 노인들에게는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그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넷째로, 죽음과 친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늙는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 창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쇠약함과 죽음을 두려움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관문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통과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기 주변을 정리하면서 필요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유서도 쓰고, 그리고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맞는 노년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버이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또 어버이에게 그의 계명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함과 동시에 어버이를 공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달라지면서 과거의 전통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더욱 힘써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그의 계명들을 되찾아 자녀들은 노인을 공경하고, 노인은 스스로 공경을 받을 수 있도록 의로운 길로 행하여 나가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3
우리는 모두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고로 부모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낳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양육하시느라고 오줌똥을 더러운 줄 모르고 주물러 주시고, 때가 되면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잠자리를 가려 누여 주시고, 병이 나면 간호하시느라고 밤을 세워 보살펴 주시며, 애써 공부시켜 주시고,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힘드는 일, 위험한 일도 생명을 아끼지 않고 뛰어 드는 것이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생명을 마치 자기의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고,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달게 받으시는 것이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늙어도 자식을 어린애처럼 생각하고 위하는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런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입니다.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천륜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10가지 계명 가운데 사람에게 주신 첫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1.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우리 나라 백성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에서는 효도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효도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도에 대해서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주 안에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왔을 때, 그때 한국 사람들은 유교를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효도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집집마다 죽은 부모님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은 부모에게 잡숫지도 못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잘못 되었다고 금하였습니다. 사실 이미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으므로, 제물을 차려 놓아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지 못하게 금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기의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식이라고 하여 몹시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효도하라고 하는 말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뜻에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효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효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운 일이 내게 닥쳐올 때에도 항상 변함없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2.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땅에서 잘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룻기 1:16~17에 보면 모압 여자 룻은 청춘과부가 되어 아무런 의지할때가 없고, 희망이 없는,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공경하기 위하여 자기의 고국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고국땅 베들레헴까지 따라가서 가진 고생을 다했으나, 시어머니께 효도함으로 보아스의 눈에 들어서 그와 결혼하여(재혼) 오벳이란 아들을 낳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왕의 조모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 메시야가 탄생함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최고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잘한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손에 팔려 애굽인의 종이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또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오는 것을 거절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죄수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시어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귀한 자리에 오르게 하셨고, 다시 그의 아버지 야곱을 영접하여 효도함으로써 110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잘하는 사람에게 효도상을 주어 국민들에게 효도의 본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부모님이 불구자가 되었거나, 혹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서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오랫동안 대소변을 일일이 손으로 받아내면서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보살펴 드리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부모님이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나이가 많아서 움직이기가 어려울 때에도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3.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도할까 연구합시다.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도해 드려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는 바리새파 사람 중에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에게 아무런 대접도 해드리지 않은 채, 고르반하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부모님께는 아무 대접도 해 드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르반한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사람이니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 전에 어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이제부터 즉시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면 부모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속에 큰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직 효도를 게을리 하고 계신 분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꾸고 바로 효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동래에 효도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병이 나서 의원에게 찾아가 의논했더니, 큰 잉어를 구해서 고아 드리면 병이 났는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서 못에 가서도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의 못을 가보았지만 어떻게나 날씨가 추운지 연못마다 모두 얼어붙어서 도저히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잉어를 구하러 다니다가 몸은 추위에 얼어 붙었고, 잉어는 구할 수가 없어서 논 곁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가 울고 있는 바로 옆에 있는 논에서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얼른 잡아서 어머니께 고아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낳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동래온천 자리입니다. 온천수가 논으로 흘러내려 거기에 잉어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여러분 효도는 어버이주일 하루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에 예쁜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주는 것으로 효도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버이주일은 일년에 한 번 밖에 없지만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일년 내내 계속되어야합니다. 우리 나라는 농경사회에서 급속하게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핵가족제도가 급속하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부모님을 생각하고 공경하는 일이 아주 등안시 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큰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홀어머니가 아들딸 모두를 갖은 고생을 하여 공부시켜서 출세시킨 장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결혼하여 대구에 있는 모 대학 교수요, 딸들도 시집을 가서 모두다 잘 살고 있었습니다. 홀로된 어머니는 인천에서 혼자 아파트에 살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소식이 여러날 없어도 아들딸들은 어머니가 그냥 잘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았을 때, 이미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서 시체가 된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아파트 경비원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다면 날마다 전화로 문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곁에 찾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바람이 늘 한 곳에 머물고 있지 않듯이 부모님은 늘 살아 계시지 않습니다. 옛시조에 ■어버이 살았을 적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은 나이 많은 어른들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살았을 적에 주 안에서 효도하여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즐거움/잠23:19-25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세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없는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한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만은 "A Father's Prayer" by MacArthur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Build me a son"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 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한국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엇인가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한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은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다.
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히 마음을,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야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째가 뭐냐 하면은 어떤 일이든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외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니다. 이제 이 분의 마음속에 슬픔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Ю만?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 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지요. 그래 옛날에는 과거를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하면 효자요, 허구헌 날 낙방하면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아들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요." 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면은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 "그 때에 그 어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여라."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 "너는 효자다." 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 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님이여, 그놈을 불효자랍니다. 효도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습니다." 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주라." 그랬어요. "흉내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 결국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양로원에 보내야 됩니다." 그게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적으로 25%입니다만은 한국만은 아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 국가입니다. 그래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발광을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성경은 오래 사는 비결 오직 딱 하나 가르쳐 줬어요. 그것은 효도하라 그랬어요. 부모 박대하면서 오래 살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비성서적이요. 사업에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부모님 마음 슬프게 하면서 사업 잘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40년 목회 하면서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오래 사는 집, 거기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아주 성공한 사람은 비록 잘못도 많지만은 그 분은 효자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불효하면서 잘 되고, 불효하면서 건강하고, 불효하면서 오래 살고…… 기대하지 마세요. 효가 장수와 형통에 철저한 비결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제가 뉴욕에 갔을 때에 제가 잘 아는 친구 분이 계세요. 거기에 한번 오랜만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제가 이 서울에 있을 때에 그 분, 그 어머니를 가까이 지났거든요. 잘 아는 터이라서 가자마자 어머니 어디계시냐고 그러니까 아 저 골방에 계신데 뵙지 말라고, 냄새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어머니가 자꾸 보고싶어서 문을 열어요. 문을 여니까 또, 가서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문을 꽝 닫잖아요. 그걸 내가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웬만하면 내가 분위기를 위해서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더니요, 그 어머니가요 얼마나 슬피 우는지요. 내가 곽목사님 온다는 말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못 만나게 했다고…… 그러면서 우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여러분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요. 구제 대상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가 존중해야되요. 어느 사람은 논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강한 이유? 오직 하나,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겨 무슨 말하다가도 "이거는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전승이요, Tradition"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야 하는 거예요.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이 잔소리가 많고 그들이 간섭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다 그 깊은 곳에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선하라.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너만은 좀 열심히 해다오." 보상적 심리가 있어요. 또 나는 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의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이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 조금은 지나칠 때도 있어요. 말씀은 다 안하고 있지만은 그런 후회가 많아요. 과거의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랬다만은 너는 제발 이래다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요. 그런고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한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20절로부터 보면은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마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되요. 청종하는 지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효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소원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신앙생활 잘해서 영생의 기업을 얻으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서 모든 일에 실수없이 행하면 부모님께 직접적으로 효도하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다고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고……" 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니다." 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 자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고로 부모님을 즐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잠23:22-26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시 한번 반성하며 신앙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 할 때 어떠한 복이 임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가지 먼저 생각할 것은 부모라 할 때 나를 낳아 주신 어버이만이 아니며 또한 내가 낳은 자녀만이 자녀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결혼한 일이 없습니다만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 외에도 여려 사람을 믿음으로 낳았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볼 때 그처럼 훌륭한 아버지는 없다고 본다. 어버이되는 바울은 아들을 훈계하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음으로 영육간 효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였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진정으로 어른들은 다 내 부모요, 어린 청소년들은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은 토요 열림마당에 나오는 재가 장애인을 보고 '내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은 다 내 아들들이라'하는 마음과 '이 땅의 모든 노인은 다 내 부모님이다'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나는 효도 할 길이 없다고 하며 지난날에 불효한 것이나 후회하면서 눈물이나 흘리는 자녀는 효도 할 수 없다. 이제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으면 내 친구의 어머니도 있고 내 이웃의 어머니도 있으며 또한 이 땅에도 버려진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 내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이 땅에 아버지의 연배되시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에는 효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효는 첫째, 목적이 무었이냐가 중요하다. 누구를 위한 효냐하는 것이다. 정말 부모님을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함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선행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비록 구제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면 그 효도는 완전히 타락된 효도이다.
둘째로, 효는 그 방법이 문제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가? 흔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소홀히 하다가도 돌아가시고 나면 야단스럽게 굴면서 효자인 척 한다. 산 부모는 모셔봐야 이득이 별로 없고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얼마나 잘못된 방법인가? 목적이 그릇되고 방법이 잘못되면 미신적인 데로 빠져든다. 우리는 무엇을 효도하며 왜 효도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나이 많은 부모님을 자랑으로 생각해야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노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노인이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소외당하고 외롭게 사는 시대이다. 부모님이 오래 살도록 해 드리는 것과 장수하시는 부모님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효도이다. 엡6:2-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장수의 복은 효도하는 가정에 주시는 복이다. 따라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있고 그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늙으신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시다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 졌다 할지라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잠6:23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했다.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 자부가 아니냐고 칭송 듣는 것이 효도이다.
성경에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말씀하신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축복권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부모가 자녀에게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는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효도가 바로 복을 받는 기준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선포 할 수 있고 자식은 그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도 야곱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은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큰아들, 작은아들을 구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빈 복은 그대로 임했다. 그러므로 장수하신 그분의 자녀됨을 자랑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개념으로 볼 때도 부모의 죽음이 자식들의 책임이며 세상 떠나게 된 부모님을 잘못 모셔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죄인의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상복이다. 그런데 요즈음 장례식에 가 보면 상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옛날에는 상주가 죄인이기 때문에 수염도 안깍고 세수도 안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빨간 루즈까지 입술에 바르고 희희닥 거리며 웃지를 않나, 농담을 하지 않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
둘째로, 마음 편하게 모셔야 한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ex) 서울 중앙청 뒷 쪽에 효자동 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을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가 있다고 한다. 옛날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하여 자다가 손자를 깔아 죽였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실수하여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염려하여 아미를 몰래 안고 나와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아 불효 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죽은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 이 일을 임금님이 듣고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다. 어쨋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편하게 모시려는 것이 진실된 효도이다.
셋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효도이다.
요한3:4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했다. 내 아들이 진실하게 살고 내 딸이 아름답게 사는 그것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고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는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토론을 열심히 하다가도 "이것이 전승이다." 하면 절대 따르게 된다. 전승, Tradition이 무엇입니까?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모님들의 교훈들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부모의 말씀을 업수히 여기지 않고 존중한다. 이것이 신앙의 지혜이며 그 신앙적 효도가 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속여도 부모는 자식을 속이지 않는다. 거짓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서는 않된다. 불의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효도하고 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루 한 두번은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우리집에 어머니는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꼭 계셔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부모님 하시는 일이 다 옳고, 그 교훈, 그 뜻이 옳았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효도요 그리고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때에 그것이 바른 효도이다. 부모님의 귀를 즐거워하는 것이 참된 효도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참되 효도이다. 의인의 후손은 번성하며 은혜를 입는다.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나 또한 좋은 부모가 되어 후손에게 복된 길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형통한 복이라도 당대에 끝나 버리면 큰 비극이지 복이 아니다. 그래서 시 128:6에 가정의 복을 말씀하시면서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고 하였다. 대를 이어 내려가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믿음의 씨았을 심어야 한다.
ex)곽 선희목사님 책 가운데 이런 간증이 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올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손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벌도 부자도 아니지만 하고 싶은데로 구제하고 선교를 한다고 했다. 사실상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이며 소망 교회가 하는 일은 대단하다. 그렇게 된 이유를 곽 목사님은 자기가 선해서가 아니라 다 조상 덕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밥도 달라고 오고 쌀도 달라고 오면 할머니께서 손에 잡히는 데로 많이 주시곤 했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기를 '내가 죽거든 일 주일 동안 거지 잔치를 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아 가셨을 때 소를 잡아 일 주일 동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불러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 선조들의 신앙과 심어놓은 의로운 행위가 지금 자기에게서 거두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지금 부지른히 심어 놓으면 내 후손이 절대로 걸식하지 않는다. 솔직히 유산은 물려주지 않아도 신앙적 유산을 물려주면 어디를 가든지 귀인을 만날 것이다. 복받지 못할 짓만 하면서 복을 달라고 비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다.
오늘 우리는 부모상이 좀 달라져야 한다.
1) 훌륭한 아버지는 돈 많고 비싼 외제 장난감이나 뭐든지 사 달라는 대로 척 척 사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2) 훌륭한 아버지는 지위가 높아 교장 선생님도 쩔쩔매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작년에 어느 외국 신문에 나온 기사 가운데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다음의 다섯가지 조건을 충족 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째, [때로는 엄마를 몰아내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엄마가 아이를 치마폭 속에 넣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이따금 엄마를 빼 돌리고 아이들과 아버지가 집안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자기를 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해야한다.
둘째, [아이들을 자연으로 끌어내라]는 것이다. 등산도 좋고 야외 천막 생활도 좋다. 그래야 아이들이 순수하고 강하게 자란다.
셋째, [시선을 아이들과 같은 높이에 두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서서 말하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아버지에게 눌리게 된다. 그러면 부모 자식간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넷째, [아침에 얼굴을 맞대라]는 것이다. 퇴근이 늦은 아버지가 아이들과 마주앉는 기회는 이른 아침 이 외는 드물다. 그 기회 마저 놓치면 부자간에는 틈이 생기게 된다.
다섯째. [어린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신조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라」고 말씀 드린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며 또 자녀들에게 기쁨을 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이다.
땅에서 형통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자자손손 이어지는 가정되기 위해서 효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어버이에게 주신 지상명령/엡6:4-
저는 이 요절을 어버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어버이로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내 생명의 연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 생명의 연장입니다. 여러분은 죽어요,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을 통해서 내 생명이 이 지상에서 연장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영혼은 천국에 가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거예요. 자녀들은 지상에서의 내 생명의 연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원하는 거예요. 자식이 없으면 지상에서의 자기 생명이 끊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을 맞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지상 명령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기에 보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우리의 자녀를 노엽게도 하고 아내도 노엽게 합니다. 또 아내들은 남편을 노엽게 하고 시어머니도 노엽게 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럴 때가 많이 있어요. 예전에는 특히 아비들이 자녀들을 명령으로 마구 눌러서 자녀들을 노엽게 한 때가 많이 있었어요. 우리 성경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주의 교양'이라는 말이 'discipline(훈련)', 그리고 '훈계'는 'instruction(가르침)'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원문에 보다 가깝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영으로 훈련(discipline)하라. 또 말씀을 가르치면서 양육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데, 우리의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이올시다.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잘 자라지 못 합니다. 꽃나무나 과실나무를 키울 때 아무리 비료를 주고 태양 빛이 좋다고 해도 토질이 나쁘면 태양 빛이 들어오지를 않아요. 기본적 환경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도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 가장 좋은 환경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가장 좋은 환경을 '에덴 동산'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좋은 환경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말로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이라는 말은 '기쁨의 동산'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과 하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형상이에요. '아빠 닮았다,' 또는 '엄마 닮았다'고 하지요? 우리 인간의 마음과 성품이 지금은 죄인이니까 변질되었지만, 본래는 하나님을 닮았어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귀한 자녀들을 어디에 두셨어요? 아무 곳에나 두시지 않고 특별히 에덴 동산, 기쁨의 동산을 창조하셔서 그 곳에 두셨어요. 우리 사랑하는 부모들이 그 어린 자녀들을 가슴이 찢어지고 터지고 메이도록 '이 아이만 잘 되면...' 하며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디에 두셨어요? 에덴 동산, 그 기쁨의 동산에 두셨습니다. 기쁨의 동산에는 무엇이 있었읍니까? 선악과가 있었어요. 선악과가 뭐예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고 그걸 따먹지 말라 하시는지? "따먹지 말라"고 하실 바엔 아예 만들지도 않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자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자 훈련받은 사람은 선악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실 바엔 아예 만들지 마시든지 아니면 한 쪽 구석에 놓지 않으시고, 에덴 동산 중앙에 놓으셨어요. 그것도 따먹지 말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이상해요. 그러나 우리는 선악과가 있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고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알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쫓겨났어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왜 쫓겨 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하신 그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사과를 따먹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으면 쫓겨나지 않아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계속 기쁨의 동산에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 따먹지 않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라는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불순종인데, 불순종하니까 쫓겨 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안 따먹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니까 에덴 동산에 머물러 있어요. 이 에덴 동산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라고 합니다. 기쁨의 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니까 기쁨이 충만해요.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참 좋은 환경으로 삼기 원한다면, '에덴 동산 중심에 선악과나무가 있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순종만 했더라면 ...' 하고 우리 가정의 중앙에 하나님 말씀을 두고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 주권을 바치고 순종할 때, 우리의 가정이 에덴 동산이 된다고 배웠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주권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그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는 본래 이방인의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할아버지입니다. 소망이 없던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살 때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이 됐는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았는데, 그가 했던 일은 먼저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난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요.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마을을 형성할 때 먼저 그 마을의 중심지를 찾았어요. 그들에게는 아직 자기들이 머물 집이 없었지만, 그 마을의 중심지에 제단, 즉 예배당을 먼저 세웠어요. 그 때문에 지금도 남부의 시골 마을에 가면, '다운타운(downtown)'이라는 중앙에 예배당이 있고 그 옆에 시청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영적 중심, 시청은 육신적 중심입니다. 청교도의 후손들도 '우리는 먼저 예배당을 지어서 그 예배당에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제단을 먼저 쌓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서 청교도들도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 먼저 제단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먼저 돈 버는 생각, 먼저 숙제하는 생각, 먼저 학교 가는 생각, 먼저 쾌락을 즐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제단을 누구에게 먼저 쌓는가? 내 욕심의 제단을 먼저 쌓지는 않는가? 물질과 쾌락의 제단을 먼저 쌓는가, 하나님께 먼저 제단을 쌓는가? 누구를 먼저 섬기는가? 내 인생 뿐 아니라 자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히 중요한 얘기올시다. 그러니 가정 예배를 꼭 바쁜 아침에 드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직장에 가야 하는데, 어제 밤에 늦게 귀가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출근하여야 하는데, 거기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드릴 수가 없어요.
문제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잠깐이지만, 경건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모습, 한 절이라도 좋아요, 먼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식사할 때에는 모두 한 자리에 모이니까, '오늘 수고했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자. 얼마나 감사하니? 이북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어렵니? 우리 감사하니까 찬송가를 1절만 부르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애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누구는 어때서 감사, 누구를 주셔서 감사하면서,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자세가 올바른 겁니다. 격식을 차리고 율법적으로 하면, 그건 율법적이기만 하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자세가 문제란 말씀이죠.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지고, 나부터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실천은 어렵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정의 어떤 법을 만들 때에도 애들의 동의를 얻어서 잘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참 증인되길 원합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며,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는 하나님을 참 사랑해'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요. 아버지가 거기서 흐느끼며 기도하는 것을 애들이 볼 때에, '아! 우리 아버지도 우네!' 하며 느끼는 것이 다를 겁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 앞에 좀 더 올바로 서기 위해서. 올바른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팔로 알토(Palo Alto)에 있는 저희 교회에 새로 나온 가정이 있었어요. 그 부인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까불기만 했었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나에게 와서 상담을 청해요. "목사님." "왜 그래?" "제게 아들과 딸이 있는데, 얘들이 밤낮 싸우고 말도 안 들어요. 소리를 지르면 그 때만 조용했다가는 또 싸우고 그래요.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왜 그러는 줄 알아?" "왜 그래요?" "네가 하나님에게 못 되게 굴었잖아? 네 꼬락서니를 닮아서 그렇지 뭐." "어이구 목사님, 사실이 그래요." "그러니까 다음에 애들이 싸우면 꼭 이렇게 해." "어떻게 해요?" "내 말대로 하겠다면 가르쳐 주겠지만, 그렇지 않겠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거니까 안 가르쳐 줘." "꼭 그렇게 하겠어요." "애들이 그러는 것은 네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회개해야 하는데, 혼자 회개하지 말고 애들이 싸울 때 그 아이들을 붙잡고 '자, 너희 주일 학교에서처럼 기도하자' 하고 꼭 이렇게 기도해. '하나님 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애들이 싸우면 제가 소리지르고 잘못 했어요. 하나님은 제가 잘못할 때 제게 소리지르거나 저를 벌하시지 않고 밤낮 용서해 주셨는데, 저도 이제부터는 이 아이들이 싸워도 소리 지르지 않을게요. 용서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을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애들이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돼." "또 싸우면 어떻게 해요?" "뭐라고 할 것 없고 '우리 기도하자'고 하면서 기도만 해." 얼마 후에 나에게 보고를 하는데 말씀이죠, "목사님." "왜?" "애들이 착해졌어요. 싸우다가도 '기도하자'고 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기도해요." 엄마가 먼저 회개하고 소리지르지 않고 자기 꼬락서니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정말 상한 심정이 되어서 기도하고 애들을 정말 사랑하면, 그 애들이 믿음으로 자라는 것이에요. 그건 연극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정은 이렇게 이루어야 합니다. 실제적이에요. 이론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애들을 훈계해야 됩니다. 군대는 훈련이 없으면 소용이 없어요. 지금 우리 나라의 큰 문제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무법 천지예요. 왜 무법 천지가 되었습니까? 부모님들이 애들을 훈련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부족해서 그래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저부터도, 훈련하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잘못 하면 훈계를 해야 하는데, 싫은 소리를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애들도 잘못 했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부부 사이도 잘못 한다고 하면 기분 나빠해요. 사실 충고를 잘 듣는 사람이 정말로 성숙한 사람이고,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고하기가 참 힘들어요.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다른 사람이 잘못 할 때, 가정에서도 내 아내가 잘못 하거나 내 남편이 잘못 할 때,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깨달은 너희는 잠자코 있어야 되는가? 성경을 보니까 잠자코 있으면 안 돼요. 더구나 부부 사이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서로 끄집어 내 놔야지, 불만이 속에 자꾸 쌓이면 이것이 삼팔선처럼 휴전선이 되어 버려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온유한 심령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내가 온유한 심령이 됩니까? 내가 용서받은 탕자가 될 때 내 자신이 온유한 심령이 되는 것이에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라고 했어요.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온유한 자가 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용서해 주시고 어떻게 지으셨는가를 깨달으면 내 자신이 온유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부족한 것을 어떻게 참으셨는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족할 때마다 눈을 흘기시고 업신여기시고 꾸중하시지 않았지 않은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어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보고 그랬어요. 삭게오에게도 그랬어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 자녀들이 잘못 할 때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부족한가'를 생각 할 때에, 끝까지 오르던 화가 쑥 내려가고 온유해져요.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바로 잡고 '나도 이 아이처럼 하면 안 되겠다'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면,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고, 말의 실수가 많기 때문에 자꾸 상처를 줘요.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인데도, 말의 실수 때문에, 말에 온유가 없어서 상처를 주게 되고 도리어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 대화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훈계하고 가르쳐야 할텐데,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가?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목사님 아시죠? 그레함 목사님의 사모님도 빌리 그레함 목사님 때문에 유명하거든요. 하루는 텔레비전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데, 기자들이 짓궂게 물어봤습니다, "사모님, 사모님도 부부 싸움하세요?" 이 질문을 받은 사모님은 야단났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전 세계의 임금과 대통령 앞에서 설교하시면서, "부부 싸움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인데, 사모님에게 부부 싸움을 하느냐고 물어 보니 야단났어요. 그런데 이 사모님에게는 참 지혜가 있어요.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싹 웃으면서 되묻기를 "내 머리에서 광채가 나요?" '내가 천사냐?' 하고 묻는 거야. 사모님도 부부 싸움한다고 하니, 할렐루야! 내게 지혜가 있다면, 상대방이 말하는 바로 그 때에 화가 나서 말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때를 기다려서 식당에 가든지, 분위기가 좋을 때에 말하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나도 아내에게 타이르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여보, 내가 당신에게 배우는 것이 많이 있어. 내 설교에 대해서 말도 해주고 고마워" 하고 칭찬하니까 좋아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설교를 길게도 하고 되풀이도 하니까 답답하지?" "그래." "당신이 나를 고쳐 주니까 정말 감사해. 당신밖에 나를 누가 고쳐 주겠어? 근데 이왕 고쳐 줄 바엔 말이야, 사람이 없을 때 한 두 번만 말하면 내가 알아들어." 이렇게만 말하고 그만두면, 도리어 "당신이 두 번 말하면 알아들어? 다섯 번 말해도 안 듣는데" 하고 나온단 말이죠. 또 이렇게 되면 '아이구, 말했다가 밑천도 못 찾는구나' 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사실 내가 이만큼 된 것도 당신 덕분이지 뭐" 하고 내가 좋은 말을 하면 이게 싹 먹힌단 말이에요. "그러니 알았지?" 하면, "알았어" 한단 말이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런 대화법을 '샌드위치법'이라고 해요. 단 것을 먼저 싹 먹이고 쓴 것을 먹인 후에 곧 이어서 단 것을 먹이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할 때마다 성공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말을 안 들을 때 곧바로 주의를 주면 '아이쿠, 아버지가 나를 꾸중하려고 그러시는구나'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야, 피자나 먹자" 하면서 얘기해야 하는 거예요. 너무 덤비지 말고 시간을 가진 후에 "난 사실 감사해.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니까 감사해. 그런데 이런 것은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좋지 않겠니?" 하고 연구해서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영혼들을 키우는데, 노력도 없이 부주의하게 키워 가지고서 가정이 행복하겠어요? 마음이 비단결과 같아서 얼마나 상하기가 쉬워요? 여러분들은,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다 사랑을 원하잖아요? 사랑 대신에 이상한 것이 나오고 마음이 상할 때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우리 자녀들도 잘못 하니까 우리가 그것을 잘 고쳐 주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누구를 훈련하고 가르칠 때에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할텐데 말에 실수 없는 사람이 없단 말씀이죠. 그러니 먼저 '차렷, 나는 용서받은 탕자!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내 꼴을 가지고 뭘 그러나' 하면서 먼저 나를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부드러워 질 때에 나의 말도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지만 내 꼴은 안 그런가? 내가 괜히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냐. 난 정말 더 부족하지' 해 봐요. 먼저 내가 더 부족하다고 하는데 반격이 나오겠어? 내가 먼저 부족하다고 하고 내가 먼저 낮아졌는데 무슨 반격이 있겠어요? 이게 샌드위치 법이에요. 말의 실수를 없이 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하는 것은 절망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섭섭함이 자라고, '저 사람은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 하면, 가정이 있지만 그건 휴전선입니다. '공산당하고는 말해도 통하지 않는데 발을 빼고 말지'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을 해야 하는데 갈라디아서 6장, 야고보서 3장 2절, 샌드위치를 기억해서 노엽게 하지 말고 반드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지어서 하면 안돼요. 내가 용서받은 탕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얼마나 용서해 주셨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이 좋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즉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도 너희 죄를 용서치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염치가 없느냐? 너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고 왜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못 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한 심령이 될 때 이것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어요. 거듭난 사람은 내가 용서받은 탕자니까 온유가 있어요. 내가 부족한 자니까 마음에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어요. 참 사랑과 눈물을 가지고 이 어린아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억지로 연극으로 눈물을 흘리면 다 드러나니까 안 돼요. 진정한 눈물로 애들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이죠? 제 생각으로는 그 다음에 주신 축복이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무엇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아담'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아담이 에덴 동산, 기쁨의 동산에 살면서도 혼자 살아서 그런지 또 노총각이라서 그런지 한숨만 푹푹 내쉬는 거야.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시니까 '저게 왜 그럴까?' 하고 걱정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우리를 영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은 좋은데, 아담은 영 뿐이 아니라 육신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한숨쉬는 것을 보시고는, '아! 네게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네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너와 똑같이 영과 육을 겸비해서 너와 같이 사랑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구나' 하시고 가정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와를 데려 오실 때에 아담이 얼마나 기뻐했어요? 성경 최초의 시가 거기에 있어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 이상 멋있는 시가 어디 있어요? 아담이 그렇게 기뻐했어요.
그러니 가정이 뭡니까? 가정은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 생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올시다. 교회는 영적 생활의 중심지예요. 좋은 가정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것같이, 좋은 교회를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불행한 사람은 불행해요. 가정이 행복한 사람은 정말 행복해요. 사람은 하루의 일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하고 하루의 일이 끝나면 가정으로 돌아와서 안식을 취합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고 외로워요. 공중의 새들도 저녁이 되면 까욱까욱 제 둥지로 돌아가고, 여우도 저녁이 되면 제 굴로 돌아가고, 곰도 제 굴로 들어가고, 고기들도 제 굴로 돌아가요. 사람에게 가정이 없으면 외로워요. 예수님께서는 가정이 없었어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있을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어요. 외로워요. 우리를 위해서 다 희생하셨어요. 가정이 불행하면 다른 일이 잘 돼도 불행해요. 가정이 행복하면 다른 일이 못 돼도 집에 돌아가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상처가 나음을 받아요. 이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되겠어요?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에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중하게 여기고, 자식들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에덴 동산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세 가지 원리; 하나님 일등, 에덴 동산, 선악과. 먼저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주권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주권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사랑이 있어요.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아요. 참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은 죄인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잘못 하고 실수를 했을 때에도 노엽게 하지 아니하고, 인자와 온유함으로 샌드위치 대화법을 써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니까 표현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을 잘 해야 돼요. 예수님도 사랑을 표현하셨잖아요? 셋째는,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냥 가정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주셨어요. 그게 무슨 일이에요? "에덴 동산을 가꾸라"고 하셨어요. 에덴 동산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이니까 에덴동산을 가꾸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어요. 에덴 동산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이 사명을 주셨어요. 한 가정에 고귀한 사명이 없으면 그 가정은 놀라운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애들에게도 고귀한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우리의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크리스천 가정의 기본인데, 오늘은 가운데 얘기인 사랑을 중심으로 말씀했습니다. 사랑이 좋지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 너무 우리에게 자상하셔서 모든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부족하고 미련한 저희를 양육하시고 훈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을 당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겨 주신 귀한 자녀들을 저희들이 정말로 아름답게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고 믿음밖에 없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며, 형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세가 이래야 하는 것을 저희가 배웠습니다. 모든 것에 말의 실수가 많은 저희들, 사랑의 말을 하여야 함을 저희가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 고매한, 예수님께서 주신 가정의 목적을 가지고 비전과 꿈을 가지고 이런 일을 위해 전진하여야 되겠는데, 저희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때 용서받은 탕자가 되어서 힘을 얻어서 전진하게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서 이 일을 행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효도하며/엡6:1-3,딤전5: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부터 5월 2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다가 1960년대부터는 5월 2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제 방 책상 뒤에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제가 3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예쁜 사진입니다. 그 사진 옆에는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북한에 계시던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어제도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저의 가슴은 잔잔한 감동으로 파도치곤 합니다. 어머니의 애절하고 뜨거운 사랑의 체온이 제 몸에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여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 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제가 지금 여기 한 인간으로, 하나의 목사로 존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지만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지금 제가 여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는 어제 어머니의 편지를 읽다가 김은영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은영 집사님은 다리를 절단하신 어머니를 십여 년이나 극진하게 간호하며 돌아보셨습니다. 지금은 90세가 넘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정성껏 돌아보시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돌아보심을 너무 기뻐하고 계십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돌아보시면서 느끼는 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김은영 집사님은 "저는 죄인이지요"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보는 것 뿐이지 부모님에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김은영 집사님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고 있는 복 있는 딸입니다. 지금은 김흥식 집사님과 함께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돌아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효도는 왜 그리고 어떻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효도는 왜 하여야 합니까?
첫째, 나의 생명과 존재가 부모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의 생명과 존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자라게 하시고 나를 사람 되게 하신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인간세계에서는 물론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는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데 자기의 생명까지 바칩니다. 거미 어미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기 몸을 자식들의 음식물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사상가들은 효를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집안에서는 효를 나라에서는 충을 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효와 충이 인간의 근본이고 나라의 기초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가 효를 너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한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효를 중요한 덕행으로 가르친 것은 옳은 일입니다. 영국의 문호 쉑스피어도 효를 인간의 아름다운 덕목으로 묘사했습니다. 쉑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어 왕"에서 아버지에게 불효한 두 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년들의 혓바닥은 마치 독사처럼 내 가슴을 휘감았어. 하늘의 쌓인 온갖 복수여, 은혜도 모르는 그 년들의 뻔뻔스런 낯짝 위에 쏟아져라!"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효도한 막내 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 둘이서 새장 속의 새들이 되어 노래를 부르자. 네가 나의 축복을 빌어 주면 나는 무릎을 끓고 너의 용서를 구하마.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자.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날 얘기를 나누며 금빛 나비들을 보고 웃고 궁중의 불쌍한 녀석들이 궁중 소식을 퍼뜨리는 것을 들으며 살아가자. 내 딸 코델리아야, 너같은 희생 제물에 대하여 하늘의 신들은 향을 피워 줄 것이다. 내가 너를 붙잡고 있지 않느냐? 우리를 떼어 놓으려는 자는 하늘에서 횃불을 가져와야 할 거다. " 효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둘째,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명령과 인간에 대한 명령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에 대한 명령 가운데 으뜸이 되는 명령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도 잠언에서 인간의 근본 되는 도리가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효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엡6:1에서 명령했습니다. 딤전5:4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셋째, 효도는 내가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엡6:3).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9). 부모를 공경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고 존귀함을 누립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안드류 잭슨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백화점 왕 와나메이커 역시 부모님의 교훈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사랑을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이 어머니였고, 나에게 기도를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으며, 내 영혼에 밝은 등불을 켜 주신 분도 어머니였고,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잘되고 아름다운 이름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삭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요셉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룻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첫째, 부모를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6:1).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말씀을 무조건 다 들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말씀이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지혜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모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에 도시 효자가 시골에 효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골로 찾아 갔습니다. 시골 효자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습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까 옷을 누추하게 입은 청년이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일하던 노모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아들의 나무 짐을 받쳐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대야에 물을 떠 왔습니다. 노모는 아들을 마루에 앉히고는 열심히 아들의 발을 씻기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아들과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도시 효자는 시골 효자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게, 어떻게 기력도 없으신 어머니께 발을 씻게 하는가? 효자라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러자 시골 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효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기쁘게 해 드립니다." 이 말을 들은 도시 효자는 마음 속에 "내가 효행을 잘못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시 효자는 이 때까지 자신의 생각대로만 부모를 공경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잠자리, 좋은 음식, 많은 용돈은 드렸지만 자기 부모님의 얼굴에는 시골 어머니와 같은 환한 웃음이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님을 돌아보아 드리고 도와 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예수님은 목수이신 아버지를 도와 드렸습니다. 나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부모에게 효도를 행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효를 행할 때 가정이 화목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집니다. 사회가 밝아지고 건강하게 됩니다. 나라가 튼튼해 집니다. 효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 되는 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립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두 잘되고 장수하고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전받는 어버이들/엡6:1-3
통계에 의하면 자식들에게 학대받는 노인들이 전체 노인인구에 8%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높은 비율입니다. 노인들은 친족들이나 사회적으로도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들에 의해 학대받는다는 것에 대단히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노인들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현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부모공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양과 공경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것과 공경하라는 것은 의미가 서로 통하지만 그러나 구분이 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차원이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거운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순종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을 동시에 다 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효의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행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것과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서로 하나된 개념이고 그와 같은 영적이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큰 비중을 두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보다 더 깊은 뜻은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어린이 약 7천명이 아버지로부터 매을 맞고 학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이지만 그외에도 수없이 될 것이라고 추산을 합니다. 어린이를 학대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부모답지 못한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됨을 인정하고 부모됨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견마지양(犬馬之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아들을 셋을 둔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부인을 잃고 외롭게 사는데 노년이 되어가자 기력도 쇠하여지고 자신감도 없어지는데 더욱 마음이 괴로운 것은 자식들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위기감을 느껴서 지혜를 발휘하여 목공소에 가서 큼직한 궤를 하나 맞췄습니다. 궤 안에 유리조각으로 가득 채우고는 자물쇠를 잠그고 마루바닥 밑에 넣고 출입할 때마다 보이게 했습니다. 큰 아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지금 말할 수 없고 내가 죽거든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큰 아들의 호기심은 더해가고 궤를 차보니 찰랑이는 소리에 금화가 들은 것으로 착각하고는 큰 아들이 그때부터는 완전히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둘째 아들도, 셋째아들도 마찬가지로 착각하게 되어 아버지를 잘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큰아들이 아버지의 호화장례를 치르고 삼오제가 지나 드디어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유리조각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궤 맨 밑바닥에 '네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굉장히 분개했지만 둘째아들은 형님의 모습을 보고는 가책을 느끼고 펄쩍뛰는 형님을 만류하면서 우리가 궤를 봉양했지 아버지를 봉양했냐고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뉘우치고 통곡할 때 동생과 며느리 모두가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부양과 공경은 다릅니다. 우리는 곧잘 부모를 부양합니다. 잠자리를 드리고, 음식을 드리고, 옷을 드리면서 부모부양은 잘 합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이 없는 부양이 이 땅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에 대한 효를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부모의 주머니를 보고 부모를 섬기지 사실상 부모를 정신상으로 이미 학대하고 있는 자식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만큼 부모공경은 높은 도덕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부모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돈으로 효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태는 돈으로 효를 사서 드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마음이 상처를 받습니다. 60세 이상 노인인구가 318만명인데 그 가운데 놀랍게도 130만명(40%)이 몸이 건강하면 자녀와 따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불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오늘 우리 사회에 부모님들이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이 불편해 있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의 마음을 읽으면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특히 홀로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은 지혜롭게 관찰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양진미로 부양하셔도 부모님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이 넷이 있는데 명절때만 되면 아들네가 모여 한바탕 전쟁을 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두 번 거듭되자 어머니 마음에 한이 맺혔습니다. 어느 명절에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한달씩 모시기로 정한 자식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가 갖고 있는 용돈을 모아 갈 길을 준비키로 결심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 왔을 때 너희들 집에는 안간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시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자식들이 가서 말려도 이 어머니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헐벗고 병든 상태로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기자에게 말했지만 기자가 떠난 뒤에 어머니는 구석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중학생의 효행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동식이는 점심때만 되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동식이 도시락에는 돌이 나오거나 머리카락이 안나올 때가 없습니다. 비록 눌려서 떡이 된 도시락이지만 동식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친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고 선생님이 방문을 하려 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옆자리 친구가 과제물로 인해 동식이 집에 가게 되었는데 동식이의 엄마는 놀랍게도 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동식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 오늘도 도시락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학교로 전해지고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모신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거창한 효도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면 됩니다. 부양이 아니라 공경을 해드리면 됩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효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효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근본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부모를 부모 자리에 세워주고 부모를 공경만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들의 효를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놓고는 어떤 부양책도 부모에게 효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의 재산
오늘 저는 연만하신 우리 어버이들에게 귀한 권면의 말씀을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영원한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집니다. 인생에는 놓칠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 이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실직을 당하고 왜 자살을 합니까? 자살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실직은 직장을 잃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나는 이제 필요 없는 인간이구나,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구나, 나는 이제 희망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실직당한 사람의 정서라는 것입니다. 연애하다가 실연한 친구가 자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참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같이 살자고 약속한 사람이 배반을 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인간은 약해 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지만 중병을 앓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심정은 죽음을 느끼는 자리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늙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병들었다고, 내가 늙었다고, 내가 실직을 당했다고, 내가 명예를 잃어 버렸다고 믿음까지 놓치면 안됩니다.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야 하는 인생의 재산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순간을 허용합니다. 왜 믿음이 약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고 침묵하시기 때문에 약해집니다. '예수 믿어봐도 별수 없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데 하나님은 왜 도와주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약해져 있기 때문에 강하신 여호와를 더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평가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옆에서 말하는 것이 상처가 되어 그만 믿음을 놓아버립니다.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의 어떤 평가 때문에 믿음을 놓친다면 인생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유없는 고난도 오지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은 정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믿어야 합니까? 내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놓아 버리는 인생은 아무 것도 안됩니다. 나이가 들어가셔도 믿음은 청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노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일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재산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리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로님이 계시는데 수년전에 저녁을 먹고난 후 복통이 있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암초기로 발견되어 깨끗이 수술하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룻밤 복통의 고통은 영원한 고통을 예방하는 경고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를 약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때를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슨 고통이 와도 믿음을 놓아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 붙잡고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남은 때 복되게 사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어느 가정에 부부가 골프를 좋아합니다. 부부는 서로 가벼운 내기를 걸곤 하는데 골프를 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반갑게 맞으며 누가 이겼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않자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아빠가 졌지? 아빠가 졌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골프는 이기려고 치는 게 아니라 재미로 친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총명한 아이는 두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아빠가 더 재미 있었어?" 이기는 것과 재미는 함께 갑니다. 게임은 이겨야 재미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중요한 우리 인생의 게임입니다. 부모공경을 지고 내 인생의 보람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부모공경의 게임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공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라/레19:32-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섬길 줄 모르는 자는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런 자는 인간의 첫걸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부모란 인간의 근본에 해당합니다. 그 분으로부터 내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을 모르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공해서 세간의 존경을 받는다해도 돈을 많이 벌어 남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학계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부모를 모른다면 그 존경과 선행은 다 가짜고 위선입니다. 부모를 모르고 쌓은 위대한 업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모는 나의 근본이고, 살아 계시는 동안 부모는 내 존재목적의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例)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집수리를 하기 위해 벽을 뜯었습니다. 일본 집벽은 "오가베"라고 해서 흙을 바르긴 하지만 그 안에 얼기설기 나무를 대어 만들기 때문에 벽 안에 공간이 있는데, 그런데 뜯다보니 벽 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대못에 꼬리 윗부분이 찍힌 채 살아 있더라는 겁니다. 주인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그 대못은 10년전에 그가 집을 지을 때 박았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옴짝달싹 못하는 공간 속에서 10년동안이나 어떻게 살아 왔나"싶어 넋을 놓고 바라만 보는데, 때마침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 들어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을 먹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벽 속에 갇혀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먹이를 물어 나른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만 도대체 정이라고는 있을 법도 하지 않은 냉혈동물인 도마뱀이 일이년도 아닌 십여년을 갇힌 도마뱀을 위해 희생한 이것을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마리의 도마뱀은 어떤 관계일까요? 연인일까요? 부부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친구 사이일까요? 십년이란 긴세월로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연인이나 부부라기 보다는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갇힌 도마뱀이 어미였는지 새끼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일지라도 엄연히 어미와 자식간에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이 사랑을 모른다면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까?
例)언젠가 서울 종로 경찰서에서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서 영업을 하고 있던 "박카스 아줌마"22명을 잡아 즉심에 넘긴 일이 있었습니다. "박카스 아줌마"들이란 노인들을 상대로 윤락을 하는 40~60대의 아줌마들을 일컫는 비어입니다. 이 아줌마들의 윤락 수법이 할아버지들에게 박카스를 접대하면서 접근하기 때문에 "박카스 아줌마"들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저는 지금 노인들을 윤락의 대상으로 삼은 이 아줌마들의 자잘못을 가리자고 이 사건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 공원에는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어야 하는가"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도 가 보십시오.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노인들의 얼굴에는 외로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할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의 사랑을 넉넉히 받는 노인들은 그곳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도 공원에 가 말벗이라도 만들어야 하루를 살수 있기에 공짜 지하철을 얻어 타고 출퇴근을 하시는 겁니다. 설상가상 그곳에서 종일 굶다가 봉사단체에서 마련해주는 한끼식사로 기력을 유지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노인 소외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입니다. 가장 존경 받아야 할 노인들이 시대의 애물단지가 되어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또 맞이했습니다. 이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어버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말씀을 중심으로 한 깊은 통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리해 어버이를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나이 드신 어버이의 자리를 회복해 드려야 합니다. 노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효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효도란 모든 어버이를 모신 자식들의 의무요, 인간된 도리입니다. 예전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철부지해서 부모에게 불효를 하는 일이 많았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고 자식을 기르게 되면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효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모가 된 어른들이 노인이 된 부모들을 귀찮아하고 구박하고 불효하는 일들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늙어 가시는 부모님은 또 끔찍하게 꺼려하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큰 일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는 이미 65세의 인구가 7%를 넘어서면서 UN이 분류한 고령화 사회로 진입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전에 비해 많은 분들이 장수하게 되었다"는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노인의 복지를 제도적으로 준비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030년이면 젊은이 100명이 고령인구 30명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통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나 선진국이 되려고 기를 쓰는데 어떤 나라가 선진국입니까? 또 복지사회를 만들자고 많은 말들을 하는데 어떤 사회가 복지사회입니까? 선진사회나 복지사회를 물질적인 것으로 기준을 삼아 "얼마나 잘 사는가"하는 국민 소득으로 따져 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기준"입니다. 서민위주의 정책이 잘 발달한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빈민촌이 그대로 존재하면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면 그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자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불편함을 만회하거나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제도나 정책이 서민위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점차적으로 형평을 이루며 고루고루 잘 사는 그야말로 진짜 살기 좋은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복지사회란 무엇입니까? "복지사회"란 건강한 사람이나 젊은이보다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와 시민의식이 성숙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젊은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이나 노인들은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지사회냐, 아니냐"하는 잣대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회냐 아니냐"로 쉽게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노인 공경이 되지 않는 나라는 국민소득과 상관없이 절대 선진국할수 없습니다. 노인이 소외되는 복지사회는 거짓이며 그런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부터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이 말씀을 실천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 위주로 되어 있는 밥상부터 노인위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간에 어버이를 소외시키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부모님 위주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부모뿐 아니라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생각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기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아이들에게 위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위아래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센머리앞에 일어서라는 말씀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나이 드신 그 자체로 대접을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옛날에 조손겸상(祖孫兼床)으로 경로의 덕을 밥상 머리에서 가르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들어서는 안되고, 찬에 손을 대기전에 대서도 안되고 맛있는 별식은 떠주기 전에 손을 대선 안되고..하는 것들을 식사자리에서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노인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뼈에 스미도록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밥상에서 뿐 아니라 만사를 자기 위주로 자라 놓으니, 노인 앞에서 겸양해야 하는 기본이 정신적인 자질 속에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노인은 그저 육체적으로 무력한 존재로만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노인을 층계 아래로 떨밀어 절명하게 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제 방향으로 가고 있지를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노인들을 생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년이란 세월이 강산도 변하는 긴 세월이라고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눈 깜짝할 시간일 뿐입니다. 그렇게 20년만 지나면 30대가 50대가 되고 40대가 60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내 아이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내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젊음을 다 바쳐 키워 놓은 후에 늙었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서러움입니다.
자식에게보다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십시오. 돌아가신 후에 흘리는 눈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위 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요 신앙적이며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입니다. 냉수 한모금 마시는데에도 위아래가 (장유유서가)있는 것입니다. 이 우선 순위는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한 것입니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例)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데, 이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주무시다가 실수로 손자를 이불 밑에 깔아 죽이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기 실수로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해서 모랠 죽은 아이를 안고 나와 남편에게 왔습니다. 그랬더니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이 아이를 보고 "이 불효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시게 만들다니"하면서 그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 났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일을 임금님이 알고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이름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아이들에게 위아래를 가르치십시오. 죽은 아이에게도 효는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다가 할아버지에게 눌려 질식사한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의 마음 아프게 한 것도 불효라고 아이를 꾸짖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극한 효성은 죽은 아이도 살려내는 기적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 이야기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출20:12)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공경에는 분명한 축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혹 축복 없더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입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부모님을 공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이 본능보다 더 사람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나를 위해 늙으신 부모님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불효입니다. 아이들에게만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자주 하십시오. 그리고 대화와 모든 활동의 중심에 부모님이 계시게 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자식과 나누는 대화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힘이 없습니다.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버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효를 통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인의 긍지/잠16:31-
1. 노인 문제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노인에 대한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노인 문제는 앞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이 33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 2020 년이 되면 그 배가되는 14%를 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구 시내의 인구 250만 4 천 여 명중 65세 이상의 노인이 5.3%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중 치매 노인이 1997년 현재 약 6 천 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전국민을 국민 연금에 가입시켜서 미리 노후를 준비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문제만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노인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젊은이 때와 달리 인내심이 떨어지고 용기를 상실한 체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려는 심리적 자세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여러 작품가운데 대표작이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 소설로 그는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함께 탔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소설 이름에 담겨져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입니다. 바다는 엄청 험난한 곳이기에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곳입니다. 노인은 인생의 항해를 이제 다 마치고 바다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을 바다에 다시 내어보내어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노인의 독백이 많이 나옵니다. 독백은 외로운 노인의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의 삶에서 인내와 용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입니다. 그는 자기의 신조 하나를 만들어 냅니다 -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인간은 비록 죽음을 당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는 이 외로운 노인을 통하여 이른바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정신적 침체와 마비에서의 탈출을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인내심, 용기, 그리고 희망을 되찾자는 부르짖음입니다.
2. 백발의 영화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아직도 잡을 것이 남아 있음을 알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정신이 곧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 외 여러 은퇴하신 장로님들이 계십니다만 이 두 분은 아직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분은 팔순이 넘었는데 농장을 아직도 경영하시고 손수 일하시어 작물을 거두시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금번에 컴퓨터까지 익혀서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게시판에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 글에 "목사님 컴퓨터는 나의 밥입니다"고 하시며 의욕을 보이셨습니다. 어느 은퇴하신 권사님도 그랬습니다. 또 다른 한 분 원로 장로님은 지금도 매일 옥상에 마련해 둔 글방에 올라가셔서 사군자를 그리시며 묵필을 쓰시며 창작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3. 참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십니다.
오늘 성경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노인 시절을 극히 높여 표현 한 것입니다. 백발에 대하여 가진 우리들의 선입견은 부정적입니다. 과거에 저희 어머님 살아계실 때 머리 염색을 하셨습니다. 귀찮은데 왜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면 하시는 말씀이 "흰 머리는 추저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색깔에 대한 것보다는 노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어하시는 뜻이고 "노인은 추?求?" 혹은 "흰 머리카락은 푸대접받는다"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어른들께서 스스로 노인시절을 영화롭게 여기는 자긍심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셔야 합니다. 지미 카트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보다 은퇴한 후 지금이 더 아름답다고 인터뷰를 하시며 책까지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세계를 다니며 헤비타트 운동(무주택 자에게 집 지어주기 운동)을 하시면서 영화의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노인 문제의 해결책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해나가려는 의지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에게 효를 가르쳐서 노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남은 생의 목적을 세우고 의지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4.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노인의 영화는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It is attained by a righteous life)고 했습니다. 자기의 바른 삶에서 얻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 보다는 다른 것으로부터 영화를 누리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문학 작가였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고리오 영감」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고레오 영감은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딸을 통하여 자기 삶을 변화시켜보려고 비정상적인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큰딸은 아버지 돈으로 귀족 신분을 사서 귀족과 결혼하게 되었고, 작은딸은 아버지 돈으로 은행가가 되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있지만 아직도 상인이라는 신분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신분 상승을 한 두 딸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합니다. 친정에 오는 이유는 아버지의 돈을 빼앗아 갈려는 이유였습니다. 나중 고레오 영감은 딸들에게 돈을 다 써버려서 집도 없이 하숙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병이 드는데, 두 딸들은 그 소식을 듣고도 병 문안도 가지 않고 결국 임종도 지키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로 다 해 주고 대신 효를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이처럼 벌써 프랑스에서는 200년 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이젠 우리 사회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자녀에게 효의 윤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 절로 그 효를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노인들이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함을 가지고 삽시다. 목에 힘주고 허풍을 떠는 노인이 아니라 바른 삶을 살아온 결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존경받는 어른들이 됩시다.
그리스도인 어버이의 바람/요삼1:2-
모든 어버이들은 자식에 대한 천륜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고려장이라는 사회적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이 많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부모를 산에 갔다 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삶이 힘들어 젊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입을 덜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한 집에 고령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를 고려장 하기 위하여 업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자꾸 허리를 제끼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곤 해서 아들이 제대로 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이 “어머니 내 등에 딱 붙어 있어야지 왜 몸을 들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집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어머니는 “나를 고려장하고 자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길을 찾게 하려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지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들은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어머니를 고려장 하려고 업고 가는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돌아갈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고려장 하지 못하고 도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자녀들이 구원받고 천국 백성 되는 것
자녀들이 구원받고 천국 백성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크리스천 어버이의 소원입니다. 예수 믿는 부모치고 자식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원치 않는 부모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고 하였는데 온 집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크리스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크리스천 어버이들은 자녀들이 성수 주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으로 갈 때 어버이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머리숙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여, 자녀들이 성수주일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어버이들은 자녀들이 말씀을 멀리 하지 않고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랑하고 말씀을 가까이 두고 묵상하며 기도생활할 때 부모의 마음은 기쁘게 됩니다.
또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때 부모는 그 마음속에 굉장한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대한 교부요, 성자요, 신학자요, 기독교의 지도자였던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신앙이 굉장히 깊고 경건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방탕하고 이단인 마니교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회개하기 위해서 주야로 하나님께 머리숙여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기도가 싫어서 29세에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로마까지 아들을 따라갔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목사님이 “여인이여,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그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낙심치 말고 계속 기도하시오”라고 후원해 주고 격려했습니다.
어느날 어거스틴이 정원 나무 밑에 앉아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한 아이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음성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 같아서 마침 옆에 있던 신약 성경을 집어서 어거스틴이 펼쳤습니다. 그 말씀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장 13,14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두날 가진 금보다 예리하여 그 영혼을 찔렀습니다. 이 말씀이 레마가 되어서 그 심령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32세에 신학을 공부했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회개하고 주의 종이 된 것에 감사하며 감격중에 세상을 작별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워서 제자를 양성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참회록 등 70권의 책을 저술 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이 결코 저버리지 아니하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위대한 교부요, 철학자요, 신학자요, 초대교회 지도자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처럼 자녀를 위한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자녀들이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되는 것
부모치고 자식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기를 원하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기가 못 먹어도 자식은 먹이고 자기는 못 입어도 자식은 입히고 자기는 공부를 못했어도 자식은 최대로 공부를 시키려고 간절히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평생동안 목회를 부지런히 하고 70세가 되어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님 앞에 나와서 “목사님 이제 은퇴하시니까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께 여생을 지내실 집을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문서를 꼭 쥐고 계세요. 틀림없이 사업하는 자식들이 와서 집문서를 내 놓으라고 할테니까 그 문서를 내 놓으면 목사님 부부는 노년에 길거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꼭 집문서만은 내어 주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하고 교회가 사준 집에 있는데 맏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니까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집문서를 좀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장로님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어 집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잠시만 쓰고 돌려 드리겠다는 말에 집문서를 내놓았으나 아들의 사업이 부도나 파산하고 아들 가족은 미국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노부부는 길거리에 앉았습니다. 아들은 미국으로 도망을 쳤지만 이 노부부는 갈 곳이 없엇습니다. 그래도 노부부는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큰 상처를 입고 가면 마음속으로는 괴로워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식 욕을 안합니다.
저는 이런 실화를 읽었습니다. 경찰관이 순찰 도중 쓰레기 더미에서 큰 푸대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중풍에 걸린 노인이 푸대속에 버려졌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중풍걸린 부모를 버린것이었습니다. 그 결찰관이 노인을 경찰서로 데려와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이, 이름, 버려진 날 등은 다 말하였지만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입을 닫고 말았습니다. 혹시 아들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노인은 양로원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아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모가 위대하고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천륜의 사랑 때문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의 성공과 행복인 것입니다. 자녀가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굉장히 흡족하고 기쁩니다. 때문에 자녀가 성공적이고 행복한 길을가는 것을 원하는 부모의 심정을 자식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자녀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면 온통 다 잃어버립니다. 건강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들은 주야로 자식들이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평신도 때 부산에 있는 교회에 나갔는데 그 교회에 피난 온 할머니 한 분이 복스럽게 생긴 30대쯤되는 딸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을 했습니다. 그 딸은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낙심해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모가 그 딸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밥을 떠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노모는 그 딸을 살리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하루종일 딸의 곁에 있었습니다. 딸의 수발을 해 주어야 하고, 화장실로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신도로 별로 신앙도 없는데 저의 손을 잡으며 “형제여, 내 딸을 위해서 기도를 좀 해주십시오. 착하고 좋은 딸이었는데 이렇게 정신을 잃었습니다. 기도를 좀 해 주십시오”라며 매달려 제가 기도해 준 것이 기억이 납니다.
건강한 자식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자식이 신체불구가 되면 그 부모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간절한 이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는 또 자식을 어찌하든지 건강하게 잘 살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부모님이 아침에 잠을 자고 있던 31세 되는 아들에게 밥을 안 먹고 늦도록 자면 건강에 해로우니 일어나서 밥을먹으라고 깨우니까 이 아들이 일어나 격분하여 다락방에 있는 흉기를 가지고 어머니를 내리치고 아버지를 때려서 중상을 입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고학년 취업난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반면에 일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건강해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직장에 잘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20세 이하의 청소년 80%가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한국청소년개발원에서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불만의 이유는 빈부 격차가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80%, 집안과 배경이 중심이 되는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 77%, 정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77%, 계층에 따른 특위가 있어서가 75% 등 굉장히 많이 불만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가 부정확하고 교육 현실이 입시 위주라 학업 부담이 크고 인격 형성과 개발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건강해서 어찌하든지 잘살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그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4. 자녀들이 부모를 이해해 주는 것
자녀들이 만족할 만큼 잘 해주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주고 싶지만 만족할 만큼 잘해주지 못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부모는 마음만 있지 경제적인 사유 때문에 자식을 마음대로 돌봐 줄 수 없습니다. 남처럼 좋은 학교에서 공부 시키고 해외 유학까지 시켜서 훌륭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 마음 어느 부모가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모가 대다수이므로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장성하여 분가해 나가는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되어 주고 싶어도 만족스럽게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부모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자식들이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아무개는 아버지가 몇 억의 상속을 주고, 집을 몇 채를 주고, 사업을 물려주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해 준 것이 뭐요? 도대체 뭘 해 주었소?’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피 눈물이 흐릅니다. 어느 집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머니는 통곡을 하고 우는데 아버지가 울지 않으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은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냉담할 수 있느냐?”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가 탄식을 하고 기침을 하니 입에서 핏덩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은 안해도 가슴에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부모의 무능력을 통감하고 탄식합니다.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자식들을 도와주고 밀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못해 주는 부모의 마음이 잘 해 주는 부모의 마음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것을 알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될 것입니다.
5. 자녀들이 부모의 노후를 보살펴 주는 것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여생을 사는 것이 부모들의 소원이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 자녀들의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999년을 기준으로 볼 때 60세 이상 노인 중에 공적 연금을 받는 비율은 5%에 불과합니다. 65세 이상 노인을 모시고 사는 가구 중에 약 10%가 최저 생계이하의 빈궁한 생활을 하고, 특히 노인끼리 사는 가구는 30%가 빈곤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다수의 가족에서 시부모를 모시거나 돕는 것을 싫어합니다.
미혼 여성의 93%가 ‘시부모를 모시기 싫다’고 응답했습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는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아들이 16% 밖에 안됩니다. ‘왜 부모를 원치 않냐?’고 물으니 ‘부모를 모시고 있으면 아내가 불편하게 생각하고 아내가 불평을 말하기 때문에 아내와 다투기 싫어서 부모를 모실 수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에게 ‘왜 부모를 모시지 않냐?’고 하니까 ‘부모를 모시면 부자연스럽고 심신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과 자유만 누리기를 원하고 부모를 돌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녀를 길러서 독립시키고 난 다음 노인들은 오고 갈 때가 없어요.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낳아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며 손발이 다 닳도록 수고해서 길러준 것 만도 큰 은혜인 것입니다.
이번에 영산효행상을 시상하는 성도 가운데 한분은 남편과 사별한지 4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50년간 시부모를 모신 분이 있습니다. 또 뇌졸중에 걸린 아내가 10년동안 꼼짝을 못하는데 남편이 대소변을 다 받아 내며 수발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에게 잘 못해준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다고 하는 그런 좋은 남편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로 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 섬기는 자에게는 땅에서 잘되게 하고 장수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6. 자녀들이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는 것
부모에게는 모든 자녀가 다 혈육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근본적인 사랑은 같습니다. 착하게 잘 살면 더 사랑스럽고 못되게 굴면 좀 마음에 밉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키울 때 해야할 것은 자녀의 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자가 못났다고 해서 쥐어박고 차자를 높이면 가정의 질서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정에 질서를 지켜 주어야 그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제가 44년동안 목회하면서 보니까 언제나 은혜는 손위에서 밑으로 내려가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맏이가 언제나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도와주고 돌봐주는 일을 보았지 아래서 위로 맏이를 도와주는 것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들은 형을 공경하도록 부모가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17절에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는 일이 있을지 몰라도 위급한 일을 당하면 그래도 형제는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형제간의 사랑과 화목이 있을 때에 가장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잠언서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장성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황금제’라는 고개가 있는데 옛날 이 고개에 마음씨 착하고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함께 고개길을 가다가 동생이 돌맹이 만한 금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동생이 금덩어리를 들고 너무나 기뻐하니까 형도 같이 기뻐했으나 조금 있다가 서로 보니까 형의 눈길도 달라지고 동생의 눈길도 달라졌습니다. 형이 ‘동생만 없었으면 그 금덩어리가 내 것이 될 것인데’라고 생각했고, 동생은 ‘형만 없었으면 내가 안심하고 이 금을 누릴 것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의좋은 형제였지만 욕심이 들어오니까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형이 동생에게 “여보게 그 황금 덩어리 강물에 던져 버리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형의 말이 옳아요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쥐기 전에는 형을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황금 덩어리를 쥐고 보니 형의 눈치도 달라지고 내 마음도 달라져 형이 미워지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황금 덩어리를 물에 던져 버리고 난 다음 그렇게 형과 아우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황금보다 더 귀한 우애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우애는 형제간 만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의 조그만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수천배 수만배 수억만배 이상 우리를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죄사함을 주시고 믿고 구원을 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명기 8장 14절로 16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 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시키고 겸비하고 순종하고 복종하게 만든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못되게 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자식들이 알고, 어버이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며 어버이를 잘 모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옛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세월은 신속히 흘러가고 어버이는 세상 뜨고 또 자기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어 세상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버이를 잘 섬기면 내 자식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잘 섬겨 줄 것입니다. 그 후 자손이 또 그를 섬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현대화되고 삶이 각박해졌다고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을 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륜입니다. 성경에는 ‘부모들이여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한구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보고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은 수없이 많습니다. 자식이 천륜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의지로 마음에 결심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작정을 하고 의지로 결심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부모 자식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요사이 우리 사회에 부모 자식간에 사랑과 효가 행해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사회가 각박하고 냉정해 짐으로 부모 자식의 사이에도 냉정하고 각박하게 되어 가고 있으므로 이 세상에 슬픔이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꼭 어버이 주일이라고 해서 자식 사랑, 부모 사랑을 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사랑하고 받들고 동시에 우리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효를 다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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