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7. 17:25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갈라디아서 5:16-26
나무를 심는 농부는 나무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꽃을 피우기 위하여 나무를 심는가 하면 재목을 얻으려고 나무를 심는 이도 있습니다. 모든 농부는 자신의 밭과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원합니다. 같은 땅이라도 어떠한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서 다른 나무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는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하여 좋은 씨를 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열매를 거두기 원하시는 농부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구하시는 농부이십니다. 좋은 열매, 풍성한 열매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삶은 씨를 품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에 어떠한 씨가 떨어지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는 다른 열매를 통하여 결실이 다른 삶을 누리게 됩니다. 좋은 씨가 떨어짐으로 복되고 귀한 밭으로서의 인생을 살 수도 있고 더럽고 추한 씨가 떨어짐으로 추한 밭으로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로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복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삶에 들어오는 씨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가운데 정보와 지식이라는 씨앗이 있습니다. 좋은 지식과 정보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달라집니다. 저는 가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관심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쉽게 음담패설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평소에 그러한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며 그러한 정보와 지식에 노출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한 생각의 씨가 그의 삶을 성결하게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며 신앙적인 서적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정결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릇에도 더러운 것을 담지 않는데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과 같은 내 몸에 추한 것을 담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입니다. 사람은 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사람에게는 영이 들어갈 공간이 있어서 어떠한 영이라도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이 삶은 채워진 영에 의하여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같은 심령의 그릇 안에 거룩한 영을 담을 수도 있고 더러운 영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떠한 영이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동일한 밭에도 잡초 씨가 들어오면 잡초 밭이 되고 밀알이 떨어지면 밀밭이 되듯이 우리의 심령 안에 거룩한 영이 들어오면 거룩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은 그 안에 임재한 영에 의하여 삶이 전혀 다르게 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귀한 열매를 맺으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된 열매를 맺으며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곡간에 들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라지가 되거나 죽정이가 되면 버려지거나 불에 살라지기 때문이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고 편지합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의 삶을 보면서 영적인 열매가 맺어지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목회자의 심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귀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보낸 바울의 편지를 살펴보면 오늘 우리 부광의 가족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주는 성령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의 삶에는 두 가지 열매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가 있습니다. 성경은 어려 곳에서 마지막에는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가르칩니다.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양과 염소로 나누입니다. 이와 같이 열매도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로 나누어집니다.
축복의 열매와 저주의 열매가 있으며 수고의 열매와 은혜의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육신의 열매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거룩한 성령이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면 성령으로 인한 열매가 나의 삶을 채워지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면 그로 인한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그로 인한 결과가 삶 속에 나타납니다. 육신의 욕심이 이끄는 데로 살아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들이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육신의 열매는 다음과 같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살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며 자신의 이익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서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통제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러한 열매가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은 옷에 곰팡이나 좀이 쓰는 것도 신경을 쓰고 밭에 잡초가 나는 것도 신경을 쓰며 세탁을 하거나 풀을 뽑습니다. 그런데 나의 인생에 악한 것으로 가득 차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면 그의 삶에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고 성령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며 주관하면 전혀 다른 삶이 나타납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이러한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농부 하나님이 가지인 우리에게서 기대하는 열매가 바로 이러한 열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가 대적합니다. 함께 열리지 못합니다. 한 가지에서 두 가지 열매가 함께 맺히지 못하고 한 우물에서 쓴 물과 단 물이 함께 나오지 못하듯이 한 사람의 삶에서 두 열매가 함께 열리지 못합니다. 하나의 열매만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12:33)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아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의 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말할 것 없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떠한 열매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어떠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열매로 가득 찬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이곳저곳에 두 가지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다가 때로는 육신의 소욕의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성령의 열매로 채워지다가 세상에만 나가면 육신의 열매로 채워지는가 하면 평소에는 성령을 따르다가 자신의 이익이 결부되면 순식간에 육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성령을 따르려고 하지만 몸은 육신을 따르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한 때 그로 인하여 고민하였습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니므이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괴로움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 성령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성령이 맺게 하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그 답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둘째로, 열매에 따른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드시 성령이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절대로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거룩한 영으로 인한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열매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언제라도 평가를 받을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주님의 날의 심판을 생각하지 못하며 오늘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오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그 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 부광교회는 항상 시선을 가야 할 목적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로되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열매를 가지고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의하여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로 인하여 맺어진 열매로 냉정하게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스스로는 옳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판단은 냉정하다는 것입니다. 잠시 살다가 가는 동안 행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영원한 평가를 받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야만 하고 그 날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분명하게 행한 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보응을 가르칩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영의 이끌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이 나를 지배하거나 주관하지 못하게 하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나를 이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 심판의 결과는 너무나 무섭고 큽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육체의 욕심에 이끌림을 받고 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신의 삶의 결과에 대한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상급과 심판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 사람들은 잠신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듯 하지만 순식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우리는 항상 우리가 가야 할 곳, 서야 할 곳을 알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있는 것을 잊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잠시 살다가 가는 세월 죄를 짓고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동행하면서 성령을 기쁘시게 하고 마지막에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농촌에서 목회할 때 가을철 추수기의 들판에 나가서 농부들은 커다란 송풍기로 죽정이를 날려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곡은 남겨서 자루에 담아 곡간으로 들어가고 죽정이는 날려 보내거나 모아서 태어집니다. 한번은 자기를 굽는 도공이 가마에서 도자기들을 꺼내면서 실패한 도자기를 주저함이 없이 망치로 깨트려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된 도자기는 좋은 포장을 하여 전시되고 팔려나가지만 깨진 도자기 조각은 길에 밟히게 됩니다. 나는 그러한 버림받는 운명으로 끝나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는 자로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면 항상 성령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분명하게 답을 제시합니다.)
세째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믿음의 길을 가려는 우리들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의 기로에서 생명의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의 문제로 여기며 길을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은 바른 신앙의 길의 행동의 원리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을 따라 가야 합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육체가 추구하는 욕심을 따르지 말고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변함없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삶은 살았습니다. 악한 영이 이끌거나 사람의 욕심이 이끄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거룩한 영이 떠나고 악한 영에 이끌림을 받을 때에 그는 죄의 길로 가다가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면서 마침내 승리하는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이끌림을 받기보다는 일시적인 이익을 생각하며 육체의 욕심이 이끄는 삶을 살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사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결정하여야 합니다. 화가 난 엄마를 놓치면 큰 일이라도 날 것으로 여기며 울면서 따라가는 아이에게서 우리의 행동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만 따라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가듯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가며 살아야 합니다.
*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과 탐심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거스리는 것이므로 함께 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두 가지를 함께 둘 수 없습니다. 한 몸으로 두 길을 한 번에 갈 수 없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모든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사는 사람의 삶의 목적은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의 것과 다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하여 구하는 삶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상급을 위하여 구하는 삶을 삽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여기게 될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구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그 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며 강력하게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오직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며 달려 간다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의 상급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삶의 목적부터 바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정하고 인도자를 바로 세우고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오직 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떠한 곳인가를 미리 알고 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 교회를 찾아온 대학원생들에게 먼저 간 선배들의 발걸음만 잘 바라보아도 내가 갈 길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신앙의 길을 앞 서 간 선배들이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간 선배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수많은 실패자의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자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 말씀을 앞세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뜻과는 배치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주심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요 14:26)
“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지침이 되며 인생의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 기도하며 성령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뜻을 구하고 성령을 따를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힘을 주시며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성령과 교통하기를 원하는 신앙인은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령을 소명치 말라고 가르칩니다(살전 5:19)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꺼져가는 그들의 성령의 불길이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는 성령으로 살던 사람들이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다가 이제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사도 요한은 에베소교회에게 첫사랑을 잊지 말고 회복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도 모르게 첫 사랑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참으로 오늘날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첫 사람의 경험도 없는 이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성령으로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음에 대한 거룩한 고민도 해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추한 열매 정욕의 열매가 가득한 것을 모르고 신나게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변함없는 자세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부광의 모든 목회자는 지금도 살아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목회하고 교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거룩한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인천과 부천에 사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거룩한 행진을 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면서 성령이 맺게 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귀한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광 교회는 한두 그루의 나무가 아닌 거대한 과수원이 되어야 합니다. 부광교회가 아니라 인천과 부천의 모든 지역이 사람들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살면서 성령을 맺는 거룩한 도시가 되어야 합니다. 온 땅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과수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강원도의 옥수수 밭을 보다가 캔사스 시티에서 끝없는 옥수수밭을 보면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도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면서 추구하면서 열매로 칭찬을 받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큰 칭찬을 받는 모든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부광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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