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목회자의 성품

2008. 3. 26. 22:48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성공적인 목회자의 성품
 
곽 선 희   목 사
(소망교회)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 : 14~16).
그리스도인이란 말씀과 성령안에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우선 은혜라고 하면 우리 마음의 기쁨, 죄사함에 대한 감격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또는 빗나간 생각이지만 내 소원이 형통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하면 장사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했던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을 낳으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던 소원이나 기도가 응답될 때 보통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지성적이긴 하지만 깨달음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을 때 "아 감사하다. 내가 버림 받았는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하며 감사하고 감격해 합니다. 이럴 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더 잘못된 이야기로는 어느 목사님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할 때의 은혜입니다. 그때의 은혜라는 것은 재미있더라,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입니다.
은혜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닮아야 하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마치 애인들끼리 같이 있으며 행복한 것처럼 교회 가는 것이 행복하고, 성경 읽는 것이 행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행복하고, 봉사하는 것이 행복하면 이것을 은혜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내 생각도 그리스도와 같아지고, 내 취미도 그리스도와 같아지고, 기쁨과 가치관과 나의 모든 것이 점차 그리스도 곁으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론 거듭남이라는 단계를 통해 출발하는 것이지만 계속 신앙생활해 나가면서 은혜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고,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 다시 말해 교회 나와서 뭘 좀 깨달을 때는 은혜 받은 것 같다가 밖에 나와 주차장에서는 한바탕 싸우고 야단 법석인 사람은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고 집사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자기 말로는 20년 전부터 예수 믿었다고 하는데 은혜는 근래에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을 깨달았다든지 성경을 많이 읽는다든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분이 분명히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이 은혜 받고 나니까 남편이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는데 "왜 밤에 잘 때 눈을 감고 자게 만들었습니까? 그 예쁜 얼굴 보면서 자면 좋겠는데" 했다고 합니다. 눈을 감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은혜 받은 사람 아닙니까?
은혜 받으면 사람이 바뀝니다. 가령 교회에 나와서는 '할렐루야, 아멘' 하다가 집에 가서 남편 얼굴 보면 보기 싫어서 '어쩌다가 저 웬수한테 걸려서 내가 이 고생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 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비유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한국 교인의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 받은 사람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은혜가 뭔지도 모르면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들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아름답게 보이고 한평생 보아 왔던 아내의 얼굴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지향해야 할 인격(personality)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수준보다는 한 수 높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수준보다는 한 수 높아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요, 인격입니다.
또한 교역자는 교역자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 단계 더 높은 교역자의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목회의 성공이나 실패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교인 몇 사람 더 모였다고 해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예배당 크게 지었다고 해서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가 생각할 수 있는 목회의 성공이란 내가 목회자로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얼마나 그리스도적인 성품에 도달했는가, 얼마나 목회자적 성품에 도달했는가의 여부입니다. 목회에 성공하고 실패했는가를 평가하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가 부흥하고 못하고의 여부가 완전히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행동이 따릅니다. 행동이라는 것은 지정의(知情意)의 복합체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에 따르고 감정에 따르고 의지에 따릅니다. 사람의 행동이 자꾸 반복될 때는 습관이 됩니다. 또 습관이 계속 반복되면 성품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회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 다니고 성가대 하고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다 거쳐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이 목회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예수 믿은 사람들, 30대나 40대에 예수 믿어 화끈하게 은혜 받아 목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걸핏하면 안 좋은 옛 버릇이 나옴을 볼 수 있습니다. 당회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당신네들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나와 버리니 당회가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교회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단에 서니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장로님들이 그걸 들어 줍니까? 교인들도 익히 소문을 듣고 강대상에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웁시다"라고 설교하면 교인들이 "너나 잘 참아라" 합니다. 이래서 은혜가 됩니까? 안 됩니다.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나왔습니까? 그의 성품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역자적 성품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크리스찬의 인격은 물론이고 한 단계 더 높여서 교역자적 성품에 도달해야 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목회가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저는 35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어떻게 목회하나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목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는 교인들이 수준이 낮아서 내 설교를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탄하니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 것입니까? 시간 시간마다 자기의 지식 자랑만 합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몰트만 등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교인들은 잠이나 자게 됩니다. 이런저런 유익하지 않은 소리 하느라 남의 은혜까지 다 빼앗아 버립니다.
또 공부 많이 한 목사는 월급을 많이 달라고 합니다.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요것 주느냐 하는 것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볼 때 그들을 무시하면서 설교를 하니 교인들이 은혜가 되겠습니까?
결국 목회가 부흥하는 것의 여부는 교역자의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오랜 세월 다지고 다져서 많은 경험 속에서 성품으로 화(化)해야 됩니다. 그래서 얼굴도 웃는 얼굴로 판이 박혀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불만이 많은 사람은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사는데 얼굴 근육 오래 되면 변합니다. 그런 찌푸린 인상으로 설교하면 교인들도 쳐다보기 민망한데 설교가 되겠습니까? 얼굴 표정이 하루아침에 됩니까? 요새 말로 메이크업한다고 표정이 바뀝니까?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66권 말씀 중에 하필이면 한 구절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 다 놔 두고 "독사의 종들아"만 좋아합니다. "이 독사의 종들아 너희가 얼마나 복 받나 두고 보자." 이런 식입니다. 더구나 남이 잘 되면 더합니다.
장로가 집을 지었습니다. 자기 집만 잘 짓고 목사의 집은 형편없이 놔두니까 이게 마음에 안 들어 시간마다 은근히 내려치는 말을 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이런 식으로 자꾸 외치니 은혜가 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목회자의 성품에서 나옵니다.
성품이란 말을 어떤 사람은 입맛으로 고쳐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입맛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상대적이고 오랜 세월 음식을 먹어가면서 입맛이 그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입맛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김치를 먹고 된장찌개를 먹는데 우리가 늘상 먹어 왔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서 어떤 수준에 도달했을 때 이것이 목회자적 성품이 되어야 목회가 쉽습니다. 성품화되면 목회가 아주 편합니다.
목회자적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목회하는 것을 보면 쉽게 목회합니다. 또 재미있게 목회합니다. 그리고 목회를 즐기면서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것도 하나의 체질입니다.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성품입니다. 성품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교를 해도 좋고 교인들 만나는 게 좋고 심방하는 것도 좋고 예배드리는 것도 다 좋습니다.
어떤 목사는 교인을 모아 놓으면 보내고 싶지 않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시간을 끕니다. 이런 마음이 되어야 설교하는 것도 신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품화되지 못한 사람은 힘이 듭니다. 우선 참는 것이 힘듭니다. 설교 준비하는 것도 힘듭니다. 또 시간 시간 가르치려고 하면 왜 이렇게 자꾸 나를 괴롭히나 하는 생각에 매사에 짜증나고 힘이 듭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성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목회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지도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지도 않고 또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급하게 해결하려고 이런 기도원에 와서 40일 금식 기도하고 화끈하게 은혜 받아 내려가서 해보려고 하는데 별로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마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이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험도 해야 하고, 많은 깨달음도 있어야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나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가끔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했나?" "예, 했습니다." "어린애는 몇인가." "둘입니다." "그럼 그만 두게 안 가는 게 좋겠구만." 그럽니다. 또 어떤 집에서 자랐는지를 묻습니다. 부잣집에서 자랐다고 하면 "마가 같아서 안 되겠네" 하며 돌려보냅니다.
선교는 결심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선교사로 나갔다가 1년도 못 되어서 병들어 돌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고생을 해본 사람이라야 고생이 체질화되어 웬만한 고생에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성품도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사도적인 체질, 선교사적인 성품이 되어야 그 앞에 있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쉽게 겪으면서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품이 문제입니다. 성품은 많은 시간과 함께 얻어지는 것이요 많은 훈련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는 교역자의 성품이란 어떤 것입니까?
복음적이고 신학적인 성품
복음은 머리에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성품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경건한 생활, 기도하는 즐거움 등 적어도 기도 시간의 행복을 알아야 됩니다. 요즈음은 철야 기도가 인위적인 것 같습니다. 그저 찬송가나 부르고 간증하고 성경 보고 설교만 자꾸 하는데 그저 조용히 기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 자신도 조용히 무릎을 꿇으면 어느 새 하룻밤이 지나가고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신비스러운 교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그 성품이 벌써 그리스도와 만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어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주변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있어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 지각이 일반 사람보다 한 수 높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교인들이 읽는 성경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경을 읽는 순간에 그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구절구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간시간 은혜를 받고 있어야 입을 열면 설교가 나오지, 시간이 되었다 해서 주석을 찾아 몇 장 몇 절을 할까 밤새 헤맨다고 설교가 되겠습니까? 이 정도 되면 목회는 그만 두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목사의 성품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목사의 성품은 영적으로 수준이 높아야 될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영성도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영성이 높아야 됩니다. 영성은 단순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경건함입니다. 영에 대한 강도가 민감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느끼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것을 나는 봅니다. 다른 사람은 즐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즐깁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영적인 차원에서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닮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선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학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의 신학이 복음적입니다. 그래서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시간 성경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성품 자체가 복음화되고 신학화되고 영적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도, 어떤 말을 들어도 신학적 해석이 바로 나옵니다.
이런 것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만 신학보다 신학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항상 새로운 문제로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 해석해 놓은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책만 보아서도 안 되고, 명상만 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신학적 혹은 복음적 성품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기를, 교회 성장은 목회자가 지닌 신학에 달렸다고 합니다. 신학이 빗나가면 아무리 외쳐도 안 됩니다. 내 자신이 은혜로 충만해 있어야 교인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은혜의 채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카리스마적 권위라고 합니다. 카리스마적 권위가 충만할 때 그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흥됩니다.
쉽게 말하면,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륜이 계셔서 저 목사님을 세상에 나게 하셨고, 많은 일을 통하여 저분을 훈련시켰으며, 또 우리 교회로 인도하시어 나를 만나게 했다. 시간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듯이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부흥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카리스마적 관계가 성립만 되면 그냥 내버려둬도 그 교회는 부흥됩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심방한다고 부흥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카리스마적 관계를 다른 말로 하면 수직적 관계라고 표현합니다.
목회에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친하고 친교하는 것은 다 수평적 관계에 들어갑니다. 내가 교인들 이름을 알아 주고 가정을 알고 또 위로해 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수평적 관계라고 한다면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 등은 수직적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는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가 좋아질 때 수평적 관계도 함께 좋아지면 좋겠는데 꼭 반대입니다. 그리고 수직적 관계가 극소화되면 오히려 수평적 관계는 극대화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교역자와 인간적으로 친한 교인이 있다고 합시다. 대체로 그런 교인은 목사님을 통해서 은혜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고향 가버나움 사람들은 은혜 받지 못했습니다. 교역자에 대해 이미 아는 지식, 수평적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수평적인 목회에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교인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교인들은 지금 목사님을 통해 은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교가 농담으로 들린다고 말합니다. 설교가 농담으로 들리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들은 복음으로 성품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저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는 수직적인 관계에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목사님들은 행동을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제 자신도 처신을 잘못 할 때가 있는데 우리가 교인을 만날 때는 좀더 깊이 생각하여 행동해야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케리그마적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되겠고 완전히 소화하여 내 생활, 내 성품 속에 복음이 있어야 됩니다. 또 복음에 늘 감격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복음적인 성품이 될 때 교회가 부흥될 뿐만 아니라 교역자 자신도 정말로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인 성품
작년(1995) 9월호 〈타임(TIME)〉을 보니 IQ, EQ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IQ라는 것은 지능지수이고 EQ는 감성지수입니다. 이 세대는 감성의 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뭘 알고 뭘 생각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뭘 느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설교를 통해 자꾸 지식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했던 말을 자꾸 넣어 유식하게 해보려고 하는데 교인들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 해석하면서 너무 주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어떤 학자가 어떻고, 헬라어로는 어떻고, 히브리 어로는 어떻고, 더군다나 어떤 학파는 어떻고 하는 것은 논문 쓸 때나 적용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의 몇 장 몇 절을 자꾸 들먹이는데, 교인들은 가만히 듣다가 '그것 성경에 있겠지 뭐' 하고는 그 다음 이야기로 빨리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가 중요하지 몇 장 몇 절이라는 것이 교인들한테 별 의미가 없습니다.
교인들한테 지식을 주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설교는 교육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예배적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전달했느냐,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성도들이 어떻게 느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설교 내용을 너무 지적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는데 물론 지식도 있어야겠지만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를 쓰다듬고 만져 주면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I hate you.)" 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런데 "I love you." 하면서 소리를 막 질러대면 그 개는 사람을 문답니다. 이 말은 I love you냐 I hate you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져 주는 사람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지금 새로운 국면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설교하는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표정, 어떤 몸짓, 어떤 억양, 어떤 음성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30년 동안 설교학을 가르쳐 오면서 설교학에 대한 정의를 자꾸 바꿔가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새로운 정의를 내렸는데 "설교란 연출(production)이다"입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옛날의 설교는 종교학 강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설교는 연출입니다. 즉 똑같은 내용을 갖고도 어떤 표정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TV 드라마를 보더라도 별 내용은 없는데 연출을 잘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쏙 들어와 감명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좋은 대사라 하더라도 발음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말하면 영 듣기 싫고, 연출이 신통치 않으면 재미 없어서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 잘하는 것도 좋은 연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출가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타고 나야 됩니다. 아니 좀더 양보해서 말하면 긴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부목사님들이 열대여섯 명 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목사님 밑에 와서 벌써 7~8년 이상 됐는데 아무래도 설교는 목사님을 못 따라가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열등의식이 느껴집니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차 나이가 40이 넘고 50이 넘다 보니 점점 더 열등의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오는데 그때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나는 이거 35년 했다. 그러니 그런 줄 알아"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됩니까?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훈련을 통해서 오랜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도 겨우 될까 말까 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고 합니까?
저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부목사님들에게 설교를 부탁하는데 바로 지난 주간에 돌아와서 여론을 들어 보니 이번에 부목사님 중의 한 사람이 설교를 참 잘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었더니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표정이나 억양 등이 좋았나 봅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주 성숙한 설교를 했답니다. 그 동안 훈련을 많이 했나 봅니다.
설교는 이렇게 노력이 쌓여지면서 연출됩니다. 사실 책상 하나를 쳐도 그냥 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박자가 맞아야 감동이 오지 아무데서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음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이크 사용을 잘 못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 내용만 생각하고 이것만 전달하면 되는 줄 아는데 청중들의 느낌이 더 중요합니다. 감성이 중요합니다.
21세기는 3F의 시대라고 합니다. 여성(Female)시대, 감성(Feeling)시대, 상상력(Fiction)시대입니다.
지금은 여성시대가 되었습니다. 현재 서른 살 이하의 젊은 부부들 가운데 남편이 아내에게 "물 떠와라, 재떨이 가져와라." 이런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30%밖에 안 된답니다.
또 이 시대는 감성시대입니다. 감성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분시대입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죽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안 죽어도 자기 기분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히 기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 우리의 목회는 감성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대가 감성의 시대라는 말은 성품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냥 느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성품은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이루어입니다.
주도적인 성품
우리는 지도자적인 차원에서 주도적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책임질 줄 아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역자는 뒤에서 왈가왈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매사를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도적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서 목회자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책임을 지고 또 적극적이어야 주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쉽게 사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걸 못하면 안 됩니다.
잘못되었다는 말 한마디가 바로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면에 대해서는 참 약합니다. "내 잘못입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해서 백담사까지 갔다온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다 드러날 뻔한 일을 놓고도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윗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다른 누가 책임을 집니까? 교회 전체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내 책임을 남에게 떠맡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로, 집사 때문이고, 이것은 지역사회 때문이고, 이것은 뭐 어떻고 하면 목회자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존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는 특별히 주도성을 쥐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고 영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성품입니다.
정직한 성품
가장 위대한 힘은 정직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다윗 왕이 나오는데 그가 여러 가지 잘못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800번이나 나옵니다. 다윗처럼 이름이 많이 나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다윗을 사랑한 이유가 바로 정직함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밧세바의 사진이 있습니다. 물론 그림으로 그린 것이지만 그림에 보면 밧세바가 목욕을 마치고 물기가 있는 몸을 닦고 있고 하녀가 그 발을 닦아 주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아에게서 내일 집에 가겠다는 편지가 옵니다. 목욕을 하고 다윗왕을 만나러 가려고 하는 때에 남편에게 편지가 왔으니 얼마나 고민스럽겠습니까? 갈까 말까 고민하는 장면이 기가 막히게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에 그 많은 참회록이 있는데, 단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어느 때 무슨 잘못을 했건 잘했건간에 다 내가 책임지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지도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든지 책임지는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빠져 나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죄송하다고 말해야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정직함입니다. 대통령이라고 실수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목사라고 왜 실수가 없겠습니까? 잘했든 못했든간에 언제나 책임은 내가 지고 솔직하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정직함이 성품화되어야 합니다. 이리저리 핑계대는 모습은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품
성실성은 하루아침에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성실하게 살아도 겨우 인정받을까 말까 합니다. 또한 물질에 대해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제가 압구정동에 소망교회를 세우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처음에 11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한 3만 명 출석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3만명 중에 65%가 소망교회에서 예수 믿은 사람입니다.
그 중 제가 여러분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10년 전부터 '이건 목사님이 알아서 쓰십시오' 하고 교회에서 주는 목회 판공비가 있습니다. 그것이 점차 늘어서 지금은 1년에 3억 5천만 원입니다. 이건 제 마음대로입니다. 이것은 교인이 저를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일일이 영수증 첨부할 것 없이 목사님이 알아서 잘 판단해서 쓰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3억 5천만 원만 쓰는 게 아니라 한 5억 원 정도 씁니다. 자, 보십시오. 제가 중국에서 다녀가는 분에게 돈 1천만 원을 주었다고 해서 그분에게 영수증을 받겠습니까? 또 내가 북한에 가면서 돈 몇 억 원을 갖다 주었다고 해서 영수증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 중 영수증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안됩니다.
그런데 꼭 영수증을 제출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행스럽게도 교회에서 신임을 해주고, 또 교인들이 제게 주어서 좋은 일에 쓰도록 하는 돈이 교회 판공비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거의 없습니다만, 제가 돈 쓸 때만큼은 어느 재벌 부럽지 않게 씁니다. 이것이 다 어디서 오는 줄 아십니까? 교인들이 저를 믿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리 믿어 달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저를 믿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믿도록 평상시에도 처신을 잘해야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아멘 하시오, 아멘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교인들이 아멘을 안 하니까 목사님이 책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가 벌떡 일어나서 "아멘 거리가 있어야 아멘을 하지" 하더랍니다. '아멘' 할 만큼의 감동할 말씀이 있어야 내가 '아멘'을 하는 것이지 그걸 시킨다고 하겠습니까? 성실은 오랜 시간 성품화되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부지런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부지런해야 건강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비결을 보면 보통 사람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통계학적으로 3시간 정도 일찍 일어납니다. 정주영 씨도 하루에 4시간밖에 안 잔답니다. 평생을 그렇게 해왔답니다. 우리 교회 사무장로인 이명박 장로도 하루 4시간밖에 안 잡니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많이 읽고 배우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저희 교회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것 가운데 가장 고마운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내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또 하고 싶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제가 1960년에 목사가 되었는데, 그 동안 저는 항상 새벽기도에 개근입니다. 저희 교회를 개척한 지 19년이 됐는데 지난 19년 동안 새벽기도는 매일 제가 인도했습니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잠은 잘수록 늘어납니다. 적어도 목회자적 체질이 되려면 5시간 정도로 잠을 줄여야 됩니다. 남들과 똑같이 먹고 놀면서 무슨 목회를 하겠습니까? 부지런함과 성실은 체질화되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 절대 안 합니다. 교인들이 다 알아서 나오고, 이제는 그들도 성품화되고 생활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감사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성품으로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건강한 성품
육체적으로 건강하면 아무 데서나 누워도 잠이 오고, 어떤 음식이나 먹으면 소화되고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할 수 있고 즐깁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면 항상 넉넉하고 편합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건강하면 남이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신경 안씁니다. 욕을 하든 말든 욕한 사람만 입이 더러워지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눈 뜬 사람에게 장님이라고 해도 화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 감은 사람에게 장님이라고 하면 싸우자고 덤벼듭니다. 유식한 사람에게 "에이, 이 무식한 놈아" 하고 흉을 보면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거야" 하고 말지, 붙들고 유치하게 싸우겠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 요즘 말로 지게 놓고 에이(A)자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식한 놈이라고 하면 난리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주변에서 뭐라고 흉을 보든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성품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존재의식의 객관화 - 칼 융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주변환경이나 되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존재의식이 객관화되어 있으면 매사에 든든합니다. 누가 와서 뭐라고 한다고 "주여, 큰일났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런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정신이 건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2. 받아들이는 자세, 즉 넉넉한 수용성 - 돌로메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아들이고 충고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목회자는 이 수용성이 넉넉해야 합니다. 가릴 것 없이 다 좋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독특한 언어 습관이 있는데 누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 "아, 그렇습니까? 옳습니다. 그렇구말구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럽니다. 지금 연세가 95세인데 누구든지 꼭 그렇게 대합니다. 이것이 수용성입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항상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나 하고 옆에서 보면 "오, 일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역자의 성품입니다.
교역자가 너무 흑백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 틀려먹었다. 망했다. 썩었다." 이렇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빈약한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성품입니다.
3. 생산적인 성품 - 에릭 프롬
모든 면에서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합니다. 좋은 면, 유익한 면을 생각하고 다 잘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성품을 소유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 성품을 가져야 건강한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이론에 의해 볼 때 목회가 왜 어려움에 부딪칩니까? 다 목회자의 성품에서 옵니다. 성품이 건강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신학적 겸손을 가진 성품
신학적 겸손은 언제든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장로 여섯 사람이 한밤중에 목사님을 찾아가 항의를 하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한 목사님은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여섯 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걸 내놓고 가려고 하자 목사님이 "장로님들 좀 계십시오. 내가 이것 좀 읽어 보겠습니다" 하고 읽었습니다. 그 속에는 결정적인 이야기도 있고 목사님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걸 다 읽으신 한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감사합니다 하시더랍니다. 장로님들이 깜짝 놀라 목사님을 쳐다 보니 "저는 허물이 100가지가 넘을 줄 알았는데 6가지밖에 적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장로님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답니다. 이것이 겸손의 승리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지적받을 때 그 자리에서 변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 사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일리는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대로 받고 "아, 그래요" 하고 여러분 중심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제가 심리학적인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허물이, 비판받고 있는 허물 그것 하나뿐입니까? 노출되지 아니한 허물은 하나도 없습니까?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저도 가끔 비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부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찾아와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 들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하고 위로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한 목사님을 따라 제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말은 다행히도 참말이 아니라 전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모르고 있는 허물이 내게는 더 많이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데 그 양반들이 그걸 모르고 딴 이야기만 하는군요. 그래서 저는 제 문제에 대해 아무 변명도 하고 싶지 않고 대답할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전혀 기분 상하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힘은 겸손입니다. 신학적으로 겸손하고 나면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라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철저하게 겸손했습니다. 심지어는 더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합니다. 이만큼 겸손했기 때문에 어떤 비난도 어떤 문제도 잘 참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겸손이 체질화되어야 하고 또 일을 즐기는 체질이어야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목사는 목회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부지런히 움직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병 걸립니다.
다리를 쓰지 않으면 다리가 가늘어지고 팔을 안 쓰면 팔이 약해집니다. 머리를 쓰지 않으면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치매에 걸립니다. 목사는 일을 즐겨야 됩니다. 일을 즐긴다는 말은 부지런하다는 말보다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말입니다.
저는 설교를 무척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가 재미있습니다. 여기저기 설교하러 다니느라 바쁘지만 바쁜 것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아울러 삶에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즐기십시오. 즐겁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대신 즐기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하던 일만 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게 개척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더러 새로운 일을 하라고 하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컴퓨터입니다. 저는 컴퓨터 안 합니다. 내 비서가 잘하면 됐지 내가 왜 직접 합니까? 그 대신 나는 책보는 것이 좋으니까 책보는 것을 즐깁니다. 목사는 공부하는 걸 즐겨야 합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으면 설교할 때 가끔 인용하는데 교인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목사는 책을 즐겨 읽어야 됩니다. 좀더 깊이 있는 좋은 책을 많이 읽어서 속을 꽉 채워 놓으면 입만 열어도 설교가 됩니다. 책은 소설이든 뭐든 자나깨나 열심히 보십시오.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작적 성품
목사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항상 새로운 일을 창작해야 됩니다.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새로운 일을 모색해야 됩니다. 
설교도 어떤 의미에서 창작입니다. 해마다 하는 설교요, 같은 본문으로 설교할지라도 단 몇 마디라도 새롭게 개발해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마치 음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의 3대 원리는 영양가가 높아야 하고 맛이 좋아야 되고 분위기가 좋아야 됩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항상 새롭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태 의연하게 전통적인 음식만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나 목회 방식은 항상 창의적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물론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쯤은 자기가 다 극복해야 합니다.
지도력 있는 성품
지도적인 성품을 한마디로 말하면 위엄을 지킬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날씨가 덥다고 해서 함부로 옷을 벗으면 안 됩니다. 강단에 서는 사람은 위엄을 항상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의사 소통이 잘 되는 성품
요새 말로 하면 인간미 있고 대화술이 뛰어난 성품, 즉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잘 들어줘야 합니다. "저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기가 편해서 아무 때 만나도 좋아."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가능하면 안 만났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성품을 가져야 됩니다.
1. 존경하는 성품
교인은 교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존경하고 존중해 주어야 됩니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너희들 수고한다. 공부하느라 애 많이 쓴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교인들의 형편과 어려움을 다 이해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상대방을 먼저 존경해야 그들도 나를 만나는 걸 좋아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강의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수는 강의실에 나오기만 하면 저만 잘났다고 하고 남들은 다 무시합니다. 이런 교수는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을 존중해 주면서 강의하는 교수는 인기가 높습니다.
절대 교인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교인들의 사정을 존중해 주면서 대화해야 합니다.
2. 열린 마음 듣는 마음(open mind, hearing mind)
목사들은 항상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자기 말만 하려고 하고 남의 말은 잘 안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는 대개 잘 안 듣습니다. 설교를 안 듣는 목사는 설교도 잘 못합니다. 목사는 잘 들어야 됩니다. 열심히 듣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유가 있습니다.
3. 인내
어떤 말을 하든지 잘 새겨 듣고 판단은 좀 천천히 하십시오. 그 자리에서 당장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성급한 성품의 소유자는 사람을 얻지 못합니다. "잘 알아 들었습니다. 깊이, 유익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중에 또 만나서 이야기해야지, 그 자리에서 당장 "말도 안 돼요. 어림도 없는 소리요"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위대한 지도자는 인내할 줄 알아야 됩니다.
외교관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원수하고도 만나서 반갑게 인사합니다. 키신저가 모택동을 만날 때 무엇이 예뻐서 키스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누구하고나 반갑게 대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4. 비젼(vision)
먼 미래를 준비하며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성품을 갖춘 목회자는 신학적으로 전문가적인 권위가 있어야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단연 권위자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에 대해서, 목회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권위를 항상 높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어야 교회를 올바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