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훈련론(A THEORY OF DISCIPLESHIP TRAINING)

2008. 3. 26. 22:47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제자 훈련론(A THEORY OF DISCIPLESHIP TRAINING) 
 
  이 부분에서는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 운동으로 제자훈련 프로그램(disciple making program)에 관하여 자세히 취급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전장인 소그룹 운동론에서 논한 교회성장의 방법론인 소그룹 전략의 문제들이 만족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다벤포트(Davenport, Donald Dewayne)는 제자훈련은 신약시대에서와 같이 교회성장을 위한 제일의 임무(number one task)이라고 말했다. 도날드 맥가브란의 말과 같이, 제자훈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회의 문제 해결이나 교회의 성장을 위한 열쇠가 된다.
올란도 코스타스(Orlando Costas)는 교회성장이 발생하는  주요한 분야를 주로 네 가지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수적 성장(numerical growth), 유기적 성장(organic growth)과, 개념적 성장(conceptual growth) 그리고 화육적 성장(incarnational growth)이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을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보았다. 신앙훈련, 즉 양육(follow-up)을 통한 개인의 성장(growing up)과, 성도의 교제를 통한 회중의 성장(growing together)과, 전도활동을 통한 모교회의 성장(growing out), 그리고 개척을 통한 지교회의 성장(growing more)이다. 이것은 교회성장 부분에 대한 대단히 좋은 분석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교회성장에 대한 또 하나의 어원학적인 접근이 시도되었다. 즉 그것들은 "auxano"(increase, growth), "o        "(to build up), "      "(mature)이다. 저자는 목회 경험에 의해 교회성장을 양적 성장 혹은 숫적 성장(quantitative growth or numerical growth)과 함께 질적 성장 혹은 영적 성숙(qualitative growth or spiritual maturity)과 그리고 경제적 성장(financial growth or giving increase)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중에는 숫적 증가(numerical increase) 즉,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이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양이 아니라 질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피터 와그너도 역시 교회성장에 있어서 교인 숫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hyper-concern for numbers)은 하나의 숫자놀음(numbers game)에 지나지 않으며, 사도행전 이후 신약 교회에 있어서 질적 성장이 기독교 사상의 분야에서 강조되어 왔다고 말하였다. 물론, 초대 교회에도 숫자가 대단히 중요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건전한 교회성장에 있어서 두 분야가 모두 중요하며, 상호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안나 넬슨(Nelson, Anna)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과 양은 상호 배타적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단간에 선택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신다. 그는 우리가 두 분야를 위하여 노력하기를 원하신다. 성장이란 영적이며 숫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회들은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등 두 분야에서 똑같이 성장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로버트 매너(Maner Robert E.)는 질과 양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가장 우선(top priority)을 두어야, 질적 성장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통하여 양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질적인 사역(quality ministry)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성장(growth)이 아니라 질적인 목회사역(quality ministry)이다....그러나 우리가 질에 대한 필요성을 말할 때에, 우리의 교회가 매년 똑같이 작은 교회로 남아 있는 것에 불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질적인 것을 준비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단계가 요구될 것이다. 성장은 질적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나야 한다." 일본의 기독교신학교 전임 교장이었던 죤 영(Young, John M. L.)은 양적 성장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영적 성장(spiritual maturity)이 양적 성장 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죠지 바르나(Barna, George)도 양이란 질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매너(Maner, Robert E.)도 역시 성장은 질적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둘 다 계속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교인들로 세우는 데로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이 두 분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아무도 논리적인 순서로 그 성장의 우선순위를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때에 따라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보다 앞에 올 수도 있는 반면에,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보다 앞서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전도대회(evangelism)나 부흥회(revival meeting)를 통하게 되면, 교회가 우선 양적 성장이 앞서 오게 되고, 질적인 성장이 뒤에 오게 되는 반면에,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과 같은 교육, 또는 양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하면 교회가 우선 질적으로 성장한 다음에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장이 바람직한데, 그 이유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의 결과를 동시에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자훈련 혹은 제자삼기(making disciples) 프로그램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며, 그의 요구일 뿐 아니라, 교회의 최우선적인 과제(primary work)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은 교회를 위한 근본적인 영적 비젼(spiritual vision)이다. 예수께서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NIV). 이 지상 명령은 예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공동의 지상명령(the Great Co-mission)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제자훈련의 가치
 (THE VALUES OF MAKING DISCIPLES)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제자훈련 사역이 가치(value)가 있는가? 평신도 사역으로서의 제자훈련 사역의 잇점(advantage)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이다. 그러면 과연 제자훈련 사역의 가치와 이점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요약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제자 훈련생(disciple)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은 우선 제자훈련생 개인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생도는 훈련기간 동안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한 예배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영적인 성장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제자훈련은 평소의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달리 특수 훈련이므로, 이 기간 중에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생활이 오로지 경건생활에로 집중되기 때문에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대하여 알렌 하디디안(Hadidian, Allen)은 "훈련사(discipler)에 의해서 주어지는 부단한 개인적 암시는 영적 성장 과정의 속도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된다(엡 4:13). 또 그가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쁜 행동패턴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NIV)고 말한다. 제자훈련의 또 다른 가치는 훈련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교회성장을 위해서 그의 제자들을 만들게 된다. 이것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가서 한 사람씩 제자를 삼는 제자훈련 운동(disciple making movement)이다.

 

제자훈련 훈련사(discipler)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사역은 특히 제자훈련 훈련사(지도자)에게 큰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훈련사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20)에 따라 그들을 제자로 만들 때마다, 그는 어떤 개인적인 유익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제자훈련 훈련사는 그의 임무를 다한 뒤에,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의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제자훈련 훈련사는 그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제자훈련 기간중 자신이 깨끗하게 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 하겠느냐"(롬 2:2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강조했다. 제자훈련 훈련사(지도자)는 직분자로서 주안에서 교인들을 가르치지만, 그러나 믿음은 물론, 직분을 가지고 있는 형제로서 서로가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훈련(discipling)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과 상담기술(counseling skills)을 배우게 하고, 대화하는 방법(dialogue methods)과 사람을 목회사역에로 인도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하는바, 제자훈련사(discipler)의 훈련생활속에서 그의 사역기술(ministering skills)을 발전시킨다.

 

제자훈련은 교회(church)에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사역은 몇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공동체를 강화시켜 준다. 즉 친교, 전도, 교회에 대한 봉사 활동을 활성화시킨다. 제자훈련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열심을 내게 할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물론 각 부서간에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튼튼하게 강화시켜 준다. 그리고 제자훈련의 또 다른 가치는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계속적인 제자훈련은 교회의 다음 세대를 보장해 준다. 이 점에 대하여 알렌 하디디안(Allen Hadidi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훈련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역이 차세대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제자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목회사역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디모데 후서 2:2에서 본래 바울사도의 말인즉: '디모데야, 하나님의 사역의 진행을 막아서는 아니되느니라. 너는 충성된 자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바톤을 넘겨줄 수 있으리라'이다."

 

제자훈련은 세계(world)에도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이다. 주님께서도 열두 명의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어 놓으셨다. 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앞으로, 속히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후계자들을 통하여 제자훈련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왜? 이는 한 마디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세상이 구원을 받고 행복해지려면, 먼저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 단번에 모두가 아니라 열두 사람, 아니 한 사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알렌 하디디안은 세상에 무엇하러 나왔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심각한 질문을 던진 다음, 세상을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최대의 소원이라고 피력했다. 그리고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가 하나님은 영원하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셋째로, 사람은 영원하다. 이 가설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표현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인간의 영원한 생명(영생)을 보는 것보다 고무적이고 도전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제자훈련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세상을 위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제자훈련에 대한 성령의 사역
(HELPS OF THE HOLY SPIRIT IN MAKING DISCIPLES)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교회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좋다. 물론, 제자훈련의 성공, 실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을 진행하심에 있어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성장을 위하여 제자들을 삼는 일에 도와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은 어떤 사람을 제자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성령은 몇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성령은 중생시키실 뿐만 아니라(요 3:5), 믿는 자의 신앙을 성장시키시는 분이시다(고전 3:6).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둘째로,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감동하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성장케 하신다. 예를 들면, 성경 에스골 골짜기의 말씀(성령)의 바람의 역사나(겔 38:1-10),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행 2:1-4), 그리고 교회사상의 대각성 운동들이 모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일어난 운동들이다. 셋째로, 성령은 지역적인 상황이나, 상업적인 여건으로 훈련사(지도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립된 신자들을 돌보시기도 하신다. 하디디안(Hadidian)은 이 성령의 돌보심으로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훈련사가 새신자들과 가까이 있을 수 없을 때에, 훈련사는 그 새신자들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령을 의지하는 것을 앎으로 위로가 된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들을 접촉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 시대의 바울 사도와 같이 서신을 통하거나, 전화를 통한다든지, 필요할 때에는 친히 심방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이 미쳐 신경을 쓰지 못하고 형편상 돌보기가 힘들 경우라도 성령께서는 그들을 돌보신다(롬 8:14, 26). 성령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며 하나님의 교회를지켜주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은혜로 인도하시기를 소홀히 하시지 않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의 접근방법
(APPROACHES TO THE MAKING DISCIPLES)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위한 접근방법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몇가지로 계획할 수 있다. 교회는 그 교회의 규모에 따라 하게 되나, 그 이상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다. 톰 사인(Tom Sine)은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네 그룹으로 구분했다: (1) 개인 제자훈련, 즉 친히 일대일로 접근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항상 개인적인 부름이었다. (2) 가정 제자훈련, 즉 전가족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 예를 들면, 고넬료집의 경우이다. (3) 성경연구, 평신도 간증, 혹은 비관습적인 그룹과 같이 소그룹 제자훈련이다. (4) 교회 제자훈련으로서 공식적인 교회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훈련을 하는 방법이다. 근본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은 소그룹(small group)으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교회 밖으로부터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영입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제자훈련을 대그룹으로 구성한다면, 그들을 질적으로 성장시키기가 어려운 반면에, 너무 작은 규모로 구성하게 되면, 교회의 양적 성장의 효과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빌 훌(Bill Hull)은 대그룹의 가장 큰 약점은 개인적인 접촉과 조율이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고, 왜 믿어야 하는가를 단지 말로만 봉사할 수 있는 반면에, 소그룹은 충분한 접촉과 조율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시간이 걸리고 개인의 시간을 충분하게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그는 소그룹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소그룹은 예수님의 방법이다. (2) 소그룹은 최적의 목회사역방법이다. (3) 소그룹은 여건을 조정할 수 있다. 헤스텐네스(Hestenese)는 크리스챤 소그룹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방되어 그들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일에 우리를 돕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동시에 도모하기 위하여, 제자훈련 클라스(class)는 제자훈련사가 운영하기에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계획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훈련에 있어서 숫자가 아니라 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셨다. 물론 예수께서 때로는 한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한편 돌봄의 사역(caring ministry)으로 개인들을 접촉하시는 일에 주력하셨다. 단기효과(short term)를 노리는 대전도의 형식(mass evangelism)과는 달리 제자훈련은 장기전략(long term ministry strategy)을 목표로 정예용사들을 무장시키는(equipping) 전략이다. 제자훈련 사역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소수를 택하셨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정예용사를 무장시키는 전략이다. 예수께서도 전도에 있어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고, 돌봄의 사역(caring ministry)으로 한 두 사람과의 상담을 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의 제자훈련 사역에 있어서는 그의 정예제자로 만들기 위하여 12명의 소그룹을 택하셨다. 이것이 세계를 향한 그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제자에 대한 이해
(UNDERSTANDING THE DISCIPLES)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희랍어 "       "(마데테스)에서 왔고, 라틴어 "disciplus"(디시풀러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학습자(learner), "학생"(pupil), "학자"(scholar), "연구생" (student), "추종자"(follower), "제자"(disciple)등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용어는 항상 "주인"(master) 혹은 "선생"(teacher)에 반하여 어떤 이의 "학생"(pupil)을 의미한다.

 

제자의 어원과 의미
 (Terminology and Meaning of Disciple)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그 자체가 잘 배우고 잘 훈련된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이 용어는 희랍사람들 가운데서 사용되어 왔고, 간혹 구약성서에서도 언급되었으나(대상 25:8; 사 8:16; 50:4), 후기 유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것은 고대 사회의 특징으로서 일반화되어 있었던 선생 학생(스승 제자)의 관계성(relationship)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talmid"(탈미드, 대상 25:8)로 흠정역(KJV)에서 "학자"(scholar), 개역성경(RSV)에 "학생"(pupil)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limid"(리미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사야 8:16은 두 번역성경에서 모두가 "제자"(disciple)로 번역되었다. 신약에서는 "talmidim"(탈미딤)이 Talmud(탈무드)를 만들어낸 랍비(rabbis)의 제자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Talmud(탈무드) 그 자체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Talmidim(탈미딤)을 말한다. 그러나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제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추종자들(followers)을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모세의 추종자들(요 9:28), 세례 요한의 추종자(마 9:14), 바리새인들의 추종자(마 22:6), 바울 의 추종자(행 9:25)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제자"(disciple)라는 말은 더욱 좁은 의미로(narrow sense) 사용되기도 했는데, 하나의 고유명사 처럼 "열둘"(Twelve)과 동의어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중에 어떤 이들(마 10:1; 11:1; 눅 9:54; 요 6:8)을 언급할 때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내에서는 12제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자의 이름으로, 고유명사 처럼 인식되고 불리어 왔다. 즉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유명사 처럼 불리워 오고 있다.

 

제자의 자세
(Attitudes of disciple)

 

무엇이 제자이며, 제자가 아니냐? 성서적인 개념으로서의 제자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제자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를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제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다. 신약에서 제자의 근본 의미는 중생한 그리스도인(born again: regenerated Christian)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제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ure)이다. 사실, 제자란 성숙이라는 차원에서 정의될 수 없다. 제자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를 노력하고, 그들의 생활에 확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그리스도인의 신분 (Christianship)과 제자의 신분(discipleship)에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being saved)과 "제자가 되는 것"(being a disciple)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신분(Christianship)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강조하는 한편, 제자의 신분(discipleship)은 하나님의 종의 신분(servantship)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리 쿤네(Gary W. Kuhne)는 제자를 자신의 성장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사역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제자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장하며, 전도의 열매를 맺고, 그의 열매를 보존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로 불리움을 받을 사람의 자격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을 하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응답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Christ's calling)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있어서 난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셨다. 심지어 부친의 죽음의 문제나 장례식과 같은 사후처리 문제까지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죽은 자는 저희 죽은 자들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인륜적으로 볼 때에 불효가 되라는 말씀 같다. 이러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주 직면하는 교회생활과 세상생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푸는 키원리(key-principle)가 있다. 그것은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이다. 무엇이 가장 우선(top priority)이냐 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관건이다.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이 최우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최우선(top priority)이기 때문에 상대상황이 아니라 절대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을 이 절대상황의 범주에서 섭리하신다. "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에 불리움 받은 주님의 종인 바울 사도의 철저한 소명의식 구조의 표현이다.
제자는 목회사역에 대한 두 가지 신앙의 자세, 즉 수동적 자세와 능동적 자세로 고려되어야 한다. 수동적 자세로, 제자는 그리스도를 닮는 자(an imitator of Christ: 살전 1:6)로서 사람들의 모범(an example of all people: 고전 11:1; 빌 3:17)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해야 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평신도 사역자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죤 막스웰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모범을 제시하고, 예수께서 소유하신 건전한 자세를 비이기적인 헌신(selflessness), 보장(security)과 복종(submission)등이라고 말했다. 능동적인 자세로서, 제자, 말하자면 훈련사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선생, 훈련사, 지도자(마 28:19-20)가 되어야 하고,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모방자,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의 신분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인 역할, 가르치는 것(교사 신분: teachership), 훈련하는 것(훈련사 신분: trainership), 그리고 지도하는 것(지도자 신분: leadership)들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제자훈련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신분에 걸맞는 기술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해리스 리(Harris W. Lee)는 여러 종류의 지도자(제자)가 있다고 본다. 즉 "선천적 지도자"(born leader)와 "후천적 지도자"(learned leader)로 구분한다. 워렌 벤니스(Warren Bennis)는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어떤 불가해한 과정을 통하여, 소위 지도력에 있어서 "위인"(Great Man)논리라고 부르는, 그들의 부름에 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월터 헨릭슨(Walter A. Henrichsen)은 제자들이란 다량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제자(지도자)들이란 가르치고(teaching), 훈련하고(training), 지도하는(leading)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일 을 위하여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교회 지도자가 만들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의 부르심으로 태어나, 훈련과정을 통하여 부각되는 것임으로 하나님의 보내시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상적인 지도자(제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테드 엥그스트롬(Ted W. Engstrom)은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뿐만 아니라, 자기의 특유의 힘을 알고 그룹의 선행을 위하여 자신이 보다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능력있는 지도자는 그룹의 관리에 있어서 그들의 일(task)뿐만 아니라 그 진행능력(process dynamic)에도 예민하다. 유력한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한다. 즉 훌륭한 제자가 되려고 배우는 훌륭한 지도자,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참된 지도자, 일종의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인 강력한 지도자,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 문제의 인물들을 다룰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그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궁극적인 지도자 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지도하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그리스도의 길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는 지도자들을 재 생산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배출해야 한다. 이상적인 지도자는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했다(고전 11:1).

 

제자 직분의 이해
(UNDERSTANDING DISCIPLESHIP)

 

촬스 밀란더(Charles Milander)는 사람의 제자화 과정을 세 단계로 분류하였다. 첫 단계가 접촉단계(exposure stage)로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영향력있는 신자와 접촉하여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타나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참여단계(commitment stage)로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 드리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제자신분의 단계(discipleship stage)로서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헌신하는 단계이다. 제자의 직분은 목사나 제자의 신분을 가진 지도자를 통해서 받기는 하지만, 본래는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이다. 근본적으로, 제자의 직분은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자 직분의 정의
(Definition of Discipleship)

 

구약성서에서의, "제자"는 선지자로 이해할 수 있고(왕상 19:16; 왕하 2:6), 제사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민 3:10; 시 109:8; 행 1:20). 신약성서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에 언급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비유해서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좇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4:19). 한 마디로 말하면, 본회퍼(Bonhoeffer, Dietrich)가 말한대로 제자란 그리스도에게 고착된 것을 의미한다. 참제자의 직분은 제자가 그의 주(master)와 같이 동일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제자의 직분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주종관계(relationship of Lord-servant: 마 16:16)와 제자에의 위탁관계(commitment to disciples: 마 28:19-20; 행 1:8)이다. 리차드 드 리더(Richard R. De Ridde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인격이 중심이다. 제자의 직분은 내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외적으로는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받아드리는 수납(acceptance)을 포함하고 있다....주님과 그의 생활로부터 동떨어진 제자의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제자는 그가 가지고 있거나 맺고 있는 모든 것으로써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볼 때, 크리스챤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마는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인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명령을 받은 사도들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크리스챤이 되면 누구나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미 언급한대로 피터 와그너(Peter C. Wagner)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며 교회의 멤버가 된 사람을 제자라고 정의 했다. 그러나 협의로 말할 때 제자는 12제자를 말하며 광의적으로 점차 확대시켜 70문도, 120문도, 500문도,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까지 그 개념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체의 구조와 기능을 통해 각 직분들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고 말했다(고전 12:12-29).
광의적인 의미로 말할 때에 모든 교인이 다 제자이다. 그러나 협의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목회사역을 직접적으로 돕기 위하여 교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이)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누가 성직자이냐 는 질문과 꼭 같은 것이다. 광의로는 신자 모두가 주의 종이다(벧전 2:9). 그러나 협의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아 기름부음 받은 사도나 선지자나 목사와 같은 주의 종들을 말한다(엡 4:11-12; 고전 12:28-29). 이는 누가 주의 종이냐 하는 말과 같은 질문이다.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되지 못한 평신도들 중에서 시험들 때에, 가끔 모세에게 항의하다가 징벌을 받은 고라의 무리와 같이 너만 주의 종이냐 하고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민 16:1-19). 결론적으로, 제자직은 좀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할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고 사명을 받은 직분을 의미한다.
  
제자의 길
(The Way of Discipleship)

 

제자의 길은 쉽지 않다. 애슈리만(Gordon Aeschliman)은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제자의 길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제자의 길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는 지도도 없다. 그것은 모호하고, 분명치 않고, 경악으로 꽉 차 있다"고 말했다. 사실, 제자의 길은 우선 파악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과연 어느 길이 제자의 길인지? 어느 길이 주님의 원하시는 길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로, 지식과 경험으로 얻어진 인간의 선입주견 때문이다. 인간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의지적 결정의 단계에 이른다. 하나는 지식을 통하여 행동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경험을 통해서 행동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지식과 경험은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얻어지게 되는데, 사실상 인간의 오관은 범죄로 인하여 잘못 되어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전달되는 지식이나 경험들을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실상 위험천만이다. 심지어 중생한 사람까지도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전달되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인 제자의 길을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도(the way of Cross)이므로 십자가의 도가 중심이 되는 성경말씀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져야 한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제자의 길이란, 주님이 가신 길을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이 주님의 말씀에는 몇 가지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로, 주님이 가시는 길과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역시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과 주님이 가시는 길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제자들이 가는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의 가시는 길을 깨닫고 따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주님의 가시는 길은 그 방향이 어디며,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은 그 방향이 어디인가? 먼저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을 세상을 향하여 가는 길로서, 당장은 육신이 잠시는 살 수 있는 길이지만 영혼이 영원히 죽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로서, 당장은 육신이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5). 이 길이 곧 주님이 가신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길을 바리새인들은 알 수 없는 길이다(요 8:14). 심지어는 도마와 같은 제자도 알지를 못했다(요14:5).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예수께 물었다(요 13:36). 이 십자가의 길은 신비스러운 길(a mysterious way)이다.
다음으로,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주님께서 가셔야 할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가셔야 하겠다는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의 이 의지는 하나님께로서 난 의지로서 하나님의 뜻으로 가시려는 의지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은 주님의 길인 동시에 하나님의 길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가시는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이다. 이 길은 가기가 쉽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요 8:21, 22).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요 14:26) 그 길을 알 수 있고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4).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 13:36)고 말씀하셨다.  인간으로는 갈 수 없으나 성령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 가려면, 주님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을 따라 우선 주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같이 제자로서의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나이다"(눅 9:57; 마 8:19).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외쳤다. 그리고 성령께 의탁하여야 한다. 제자의 직분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물론 현대에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성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인 마 28:19-20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제자의 직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세대를 통하여 필수 불가결한 직분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특히 현대에 와서 제자의 길을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희박하다. 그 길은 자기와 세상을 버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제자직의 원리
(Principles of Discipleship)

 

제자직의 원리는 교회성장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마 28:19-20에서 현재 명령 동사인 "가라"(go)는 원래는 분사구문, 즉 "계속해서 가라"(having gone)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동사(go)는 계속적인 의미와 명령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의 직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발하시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다. 제자직은 지식의 전달(a communication of knowledge)이 아니라, 생명과 영의 교통(a communication of life and spirit)에 있다(요 6:63).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경의 지식뿐만 아니라 생명과 영의 교통이 있어야 한다. 후안 깔로스 올티즈(Juan Carlos Ortiz)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직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친다. 제자직이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생명과 영의 전달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영혼을 구한다는 말과 다르다. 바울은 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사실, 제자직(discipleship)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됨의 신분으로(Christ's servantship) 그리스도를 모시는 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직의 표지
(Signs of Faithfulness in Discipleship)

 

그러면 제자직분에 있어서 신실함의 싸인(sign)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제자에게 있어서 신실함의 싸인은 회중들에게 유효한 소금과 빛이다. 회중들은 신자들이 회중생활을 통하여 믿음을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실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제자들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그러면 신실한 제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들이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 5:22). 이 모든 열매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생활의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다. 미국 연합감리교 감독회는 제자됨에 있어서 신실한 제자의 표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열가지로 정의하였다. (1) 교회의 회중생활에 성실한 참여(faithful participation in the life of a congregation), (2) 매일 성경읽기(daily readings of Scriptures), (3) 기도하는 생활(living a life of prayer), (4) 금식기(fasting), (5) 검소한 생활(living simply), (6) 생명의 은혜의 청지기(stewarding the gifts of life), (7) 타인에 대한 적선행위(doing good to others), (8) 평화와 정의의 옹호(advocating peace and justice), (9) 신앙의 나눔(sharing the faith), (10) 하나님께 영광(giving God the glory)등이다.  이들은 역시 성령의 열매로 집약된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들이다.

 

제자직의 자격
(Qualifications of Discipleship) 

 

  제자직의 자격(qualification)은 무엇인가? 제자직의 자격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면과 자연적인 면이다. 초자연적인 면에서 볼 때에, 제자직은 하나님의 부르심(Divine call)이고, 자연적인 면에서 볼 때에 제자직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롬 1:1; 행 9:15-16). 하나님의 부르심이 제자가 되는 첫번째 조건이다(엡:11-12). 이러한 기초 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목회사역을 위하여 그에게 중생시키시고,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은사까지 포함한다(고전 12:8-11; 12:28-30). 제임스 화�(James F. White)은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개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인준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은 목회사역을 위한 성도들 신앙을 말씀으로 무장시키는데 사용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building the Body of Christ) 사용해야 한다. 훌륭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제자연체 사이비 제자(似以非 弟子)는 그리스도 보다 자신의 주도권(initiative)을 행사하려 한다. 그리고 제자연체 하는 사람(would-be disciple)은 예수를 따르기 전에 자기 부친을 장사하려고 한다(마 8:21).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제자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즉 (1) 하나님을 아는 사람,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3) 기도의 사람, (4) 그리스도의 몸에 위탁된 사람, (5) 주께 순종하는 사람, (6) 정력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보면 무조건 주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사도의 직분과 같이 제자됨의 자격은 사도행전 6장 3절에서와 같이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하여, 어떤 인간적인 자격요건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입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제자직의 자격으로 청지기(집사)직과 같이 디모데 전서 3장 1절부터 13절까지와 디도서 1장 5절에서 9절까지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제자들)은 주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교훈과 계명을 가르쳐야 한다(신 6:4-9). 주를 뜨겁게 사랑하여 교회에 충성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비롯하여 가정의 모든 일에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충실해야 한다(딤전 4:3).

 

제자직의 위임
(Commitment to Discipleship)

 

복음서는 우리에게 제자의 길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즉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예수의 십자가를 지운 구레네 시몬의 모습(image)에서 역시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리움을 받은 제자의 모습(image)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 구레네가 제자의 모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의 두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열두 제자들의 불리움과 구레네 시몬의 불리움을 비교해서 관찰해 보면 차이가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선 열두 제자들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불리움을 받았으나 구레네 시몬은 사역의 종말의 시점에 불리움을 받은 셈이 된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불리움을 받은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평생의 가르치심과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왔지만, 구레네 시몬은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이 된 것이다. 단지 열두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불리움을 받을 때, 자의(自意)로 응했지만, 구레네 시몬은 그리스도의 말기에 타의(他意)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간 사람이다. 그러나 다 같이 그리스도의 증인임에는 틀림없다. 
제자의 두 모습 중에서 첫째로, 제자의 적극적인 모습이다. 열두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적극적으로 임했다. 열 두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겠다는 제자됨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이다. 구레네 시몬은 본래 자기는 원치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서 바로 앞에 섰던 것이다. 사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으로 바로 앞에 섰다. 어떤 면에서 제자의 길은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예수께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마시기 싫으신 십자가의 쓴잔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마셨던 것이다(눅 22:42; 마 26:39, 42). 결론적으로, 제자는 사람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자의 적극적인 모습과 소극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양면성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신인 양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두 마음을 보이신 것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인간적으로는 지고 싶지 않아 억지로 지는 십자가이지만, 순순히 그리고 성실하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그는 주님을 따른 신실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훌륭하고 사명에 충만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제자의 두 모습이다.
구레네 시몬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누가복음 9:23-24에 보면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성스러운 질의응답인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17:21)는 말씀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베드로의 제자됨의 선서인 것이다. 이것이 성스럽고 엄숙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하는 제자의 거룩한 선서식(宣誓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