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아침편지/모나리자의 웃음

2008. 3. 14. 19:28일반자료/6.좋은글 자료

이수정의 아침편지/모나리자의 웃음

      모나리자의 웃음 / 공덕룡 여러 해 전, 모나리자에 관해 한 편의 글을 쓴 일이 있다. 레오나르 도 다빈치의 저 유명한 그림말이다. 모델은 15세기 프렌체의 귀족 죠콘드(Giocond)의 아내라고 전해진다. 차분하고 꿈꾸는 듯한 얼굴의 표정, 겹쳐놓은 두 손의 육감적 아름다움, 풍신한 의상의 질감(質感), 환상적 배경 등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특히 입가에 감도는 신비스러운 웃음은 흔히 '영원한 미소'라고 한다. 이렇게 나름대로 그립의 인상을 적었지만, 그 입가에 감도는 신비스러운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런 탐색을 시도하지는 못하였다. 그저 '야릇한 웃음'이라고 덮어두었던 것이다. 최근 유럽 여행길에서 루브르박물관에 들렀을 때, 「모나리자」 앞에 다시 섰다. 실로 22년 만의 대면이 된 것이다. 그 입가에 감도는 신비스러운 웃음은 여전하였다. 저 웃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순간 나는 당돌하게도 임신한 여인의 웃음을 떠올렸던 것이다. 당돌한 착상이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굳어져 갔다. 아이를 밴 여인의 만족감, 그런 감정은 드러내어 웃을 수도 없고 입을 다문 채 있자니 그런 야릇한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을 살펴보니 그 눈도 무엇인가를 담고는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눈이 짓는 감정의 표현은 입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입은 다물거나 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다문 입술, 연 모습에 따라 감정을 드러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눈은 뜬 채로 여러 감정을 드러낸다. 번쩍 광채를 발하는 눈, 이야기를 걸어오는 눈, 비웃는 눈, 우수에 잠긴 눈 등등 천차만별의 눈 표정이 있다. 그런데 모나리자의 눈은 그런 어느 눈도 아니다. 눈동자는 조금 왼쪽으로 돌아 있다. 그렇다고 곁눈질하는 눈도 아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 까? 몇 발 뒤로 물러서서 내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시선의 방향 을 쫓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혹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눈을 뜬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신비한 눈이요 야릇한 눈이다. '눈은 입만큼이나 말을 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저런 눈은 말이 없다. 역시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데 드러낼 수 없는 것, 이를테면 비밀스러운 만족감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한 해답을 얻었다. 눈이 담고 있는 것과 입이 담고 있는 것이 같은 것일 수 있으리라는 나름대로의 짐작이었다. 눈은 부릅뜨고 입만 웃는 표정은 없을 것이다. 입을 삐죽 내민 채 눈만 웃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눈과 입은 무엇을 담고 웃고 있는데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잉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눈에 어린 웃음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그와 비슷한 눈을 그림이 아닌 살아 있는 여인에게서 본 일이 있다. 전철 차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3호선 전철이 금호역을 지나 굴을 빠져 나와 동호대교 위의 옥수역에 정차하였다. 맑은 햇빛이 한강물에 반사되어 차안은 유난히도 밝았다. 나는 무심코 건너편에 앉은 사람쪽으로 시선이 갔다. 한 30대 여인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숙녀를 눈여겨본 것은 아니다. 그저 시선이 닿았을 뿐이다. 그 순간, 그 눈은 어디선가 본듯한 눈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모나리자의 눈 바로 그것이다. 그 시선은 앞을 보는데 그 눈은 나를 보는 눈도 아니고 차창 너머 한강의 경치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밖으로 향해 있었지만, 눈은 밖을 보지 않고 그녀 자신을 보는 - 그런 눈이었다. 즉 자기의 체내를 보는 눈이었다. 압구정역에 차가 머물자 여인은 좀 무거운 듯한 몸을 일으켰다. 아랫배가 나온 듯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 여인이 잉태한 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그렇다면 그 여인의 눈은 자신의 체내의 새생명을 지켜보는 눈이었을 것이다. 작은 생명의 태동과 발육을 지켜보는 엄숙한 눈이었을 것이다. 이 낯선 여인의 눈매에서 모나리자의 눈웃음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벽에 걸린 모사화 모나리자를 다시 눈여겨보니 아랫 눈꺼풀 밑에 한줄기 그늘이 져 있었다. 그 풍신한 의상도 임부가 입는 옷이 아니었을까. 글쎄요... 아름다운 여성은 어떤 표정을 하던지 살아있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여성의 표정 하나를 놓고 이렇게 많은 감정의 상태를 유추하는 것 자체가 더 놀랍군요. 최근에 이외수 시인의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뭔지 자신도 모른다. 라는 말에 많이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겉은 아름답게 단장할 줄 알면서 내면을 단장 할 줄 모르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한 여인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아름다움이 얼굴의 표정에 입술이든 눈이든 어디에든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이 표정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름답다고 스스로 자만 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모든 여성들의 바램이고 욕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삶에서 배어나온 것이어야 하기에 마음의 시선부터 아름다운 것에 머물 줄 알고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아름다움을 가꿀 줄 아는 그런 여성은 자신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주일 준비 잘 하시고 행복한 주일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저는 주일 지나서 월요일에 다시 편지 올리겠습니다. 이수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