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敎會 제2기 [312-604년]

2008. 1. 16. 16:09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古代敎會 2기 [312-604년]

 

 

 

콘스탄틴 大帝부터 그레고리우스 敎皇까지

    

 

 

 

 

 

 1절 콘스탄틴 轉換

 

콘스탄틴의 개종

 

  Constantinus 로마군 장교 Constantius Chlorus와 Helena의 아들, 285년경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 나이수스(Naissus)[1]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보냈다. 모친 Helena는 旅人宿 주인으로서 콘스탄시우스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당시의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3년에 콘스탄시우스 로마 제국 서부지역 막시미안(286-305) 2정제(正帝, August) 치하에서 2부제(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Gaul 지방 Britannia 지방 통치자 되었다. 당시 동부지역 1정제는 Diocletianus(284-305)였고 1부제는 Galerius(305-311)였다.[2] 때에 콘스탄틴의 부친은 副帝가 되는 조건으로 막시미안 정제의 의붓딸인 Theodora Fausta와 결혼해야 했기에 아내와 헤어졌다. 콘스탄틴은 296년에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티나에서 장래의 敎會史家이며 체사레아의 주교가 Eusebius(260-340)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305년 5월 정제인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에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1정제가 되고 자신은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2부제로 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인 갈레리우스 1정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2정제, 副帝로는 Maximinus Daza(305-313)와 Severus(306-307)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Gaul지방의 불로뉴(Boulogne)로 갔다가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Galedonia 전쟁에 참전했다. 306년 7월 콘스탄시우스 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지방과 브리타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이로써 로마 제국에서는 디오클레시안이 제위 계승의 효과적 방법으로 수립한 4인 정치체제의 질서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서 310년 에스파냐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 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 서부지역 콘스탄틴 Maxentius(306-312)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 동부지역 Licinius(311-324)와 막시미누스 다자 지배하였다. 당시 콘스탄틴은 동방의 리치니우스와, 막센시우스는 막시미누스와 정치적 동맹 맺고 있었다. 콘스탄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그의 부친처럼 관용정책 시행하였고 리치니우스 이에 동조하였다.

 

  312년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시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에게 자기의 누이동생인 콘스탄시아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후, 막센시우스의 영지인 이탈리아로 出征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Turin, Milano, Verona 등지에서 저항군을 격퇴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의 티베르강에 놓여 있는 Milvio橋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전투 전에 발현(또는 꿈)을 통하여 그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神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 신의 이름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밀비오橋 전투의 승리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10월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했다(315년에 완성).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을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고, 후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大勝戰과 그리스도교 귀의에 대한 상이한 기록과 견해가 논란되고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있었던 콘스탄틴 체험이다. 락탄시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에서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 神의 천상 표시를 붙이고 싸우라는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첫 글자인 를 십자 표시인 +에다가 윗 부분을 약간 구부려 f'로 바꾸어 방패에 그려 넣어 그리스도인의 신을 보호신으로 삼고서 전투에 나가 승전하였다. 기적적 사건 기술이기보다는 황제의 꿈은 쉽게 이행될 수 있는 着想을 일으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의 보호 하에 전쟁에 나갔으며 승전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이러한 결심을 일으켜주었고, 보호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콘스탄틴의 친구인 에우세비오는 황제 자신이 겪은 체험을 듣고 황제의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실제로 발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전쟁의 勝算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느 날 오후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을 때 그의 군인들과 함께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싸워라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노그램(Χ와 Ρ의 조합문자)이 그려진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두 기록 중에서 오늘날 학자들은 락탄시우스의 실사적 진술을 에우세비오의 기적적 진술보다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틴의 전환에 대한 동기(動機)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①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는 견해 - 그 증거로, 그의 재위기간 내내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았고, 전임 황제들이 지니고 있던 대사제(Summus Pontifex)의 황제 칭호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음을 든다. ②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Mithra :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콘스탄틴은 일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3세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Summus Deus)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 콘스탄시우스가 바로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그는 신도들에 대한 박해령을 무시하고 관용정책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콘스탄틴 가정에는 이복 여동생 Anathasia가 그리스도교 신자(또는 유다교 신자)였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간주되었다.

 

帝國敎會의 창설

 

  밀비오橋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 로마에서 동안 지낸 다음 313년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의 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 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다른 동부 황제 다자는 박해자로서 포고령을 수행하는 장애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 313년 4월 Adrianopolis에서 M. 다자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에 니코메디아에서 밀라노 관용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를 내렸다. 이제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서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와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 정책을 실시하였고, 312년 자기 군대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 중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 법적 특권 부여하였다. 313년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하여 그곳에 라테란 대성전(성 요한 대성당)을 건립하고, 320년경에는 베드로 대성전, 이어 예루살렘 무덤 성당, 베들레헴 예수 성탄 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교도의 종교 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12년,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移讓)했다. 성당 죄인 도피처(逃避處)가 되는 특권도 부여했다. 국사범 용의자는 교회를 피신처로 삼을 있었으며 주교는 특권으로 국가의 결정을 무시하고 성당을 정치범의 보호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황제는 315년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 主日 그리스도교 예배일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 교회 축일 공휴일 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황제는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조치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相續權)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있게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히 방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이후 교황청에 흡수되었으며, 증여물과 기부금에 의해 생긴 재산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호단체가 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로마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 324년에 反교회 정책 시행하자 콘스탄틴은 크리스폴리스 전투에서 리치니우스 격퇴시키고 全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 역시 로마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25년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니체아 제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최초의 공의회 열도록 했고,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수도로 건설하였다.

  그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였고, 그의 가족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337년)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 領洗服을 입은 세상을 떠났다. 동방교회는 대제를 13번째의 사도, 준사도 공경하고 있다.

 

  대제를 계승한 아들, 콘스탄틴 2세(337-340), 콘스탄스(337-350), 콘스탄시우스 2세(337 -361)는 부친의 교회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였고, 동시에 이교 사상과 종교 행사를 탄압하였다. 콘스탄시우스 2세 341년에 미신행위와 우상숭배를 금하였고, 346년 콘스탄스 함께 로마 제국 전역에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로마 제국은 점차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대제의 이복 형제의 아들인 율리아노(361-363)가 황제로 등극하자 잠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과거의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戰死함으로써 그의 이교 사상의 부흥작업도 끝맺게 되었다. Jovianus(363-395)는 제국에서의 특권적 위치를 교회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 특히 Theodosius 1세(379-395)가 그리스도교 정책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로서 388년에 로마 제국을 통일하였는데, 그의 시대에 교회와 국가가 제휴관계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다. 380년 2월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 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고, 동시에 모든 국민이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선언하였다. 칙령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종교로 설정됨 시사한 것이다. 황제는 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 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그는 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의 칙령을 법으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시까지 이교도의 마지막 보루이며 피난처였던 원로원도 로마 신에 대한 신봉을 포기해야 했다. 392년에 하나의 법령을 반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되는 벌금형에 처하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모두 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리고, 이교도 제관과 여신을 섬기는 童女들의 수입금과 함께 이교 神殿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로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로 사라지고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政敎一致 국교 시대의 주교들은 자기 지방의 행정권까지 갖게 지방에서의 주교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국민의 보호자로서 권력가들의 압박과 관리들의 수탈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또한 주교들은 황제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시행착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전환기의 문제성

 

교회와 국가의 같은 밀접한 관계 대해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으니,

  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그것을 국가의 그리스도교화로 간주(에우세비오)하였고,

  어떤 이들은 교회의 俗化 두려워하기도 했다.

중세 교회개혁 문헌 콘스탄틴 이전 원시교회(Ecclesia primitiva)만이 개혁의 전형으로 보았다

,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으로부터의 격리 원시교회의 특징으로서, 그것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특징으로 돌아가야 한다(11, 12세기 피오레의 요아킴 요구)

  13, 14세기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자들 콘스탄틴 이후 교회에서 쇠퇴밖에는 보지 않았다.

  M. Luther,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교황직의 책임으로 돌리고. 이후 쇠퇴이론 프로테스

                탄트 역사 서술에 성행하게 되었다.

계몽시대 모든 악의 원인 사제직의 지배욕에서 비롯되는데, 사제들은 박해가 끝나면서부터

  황제의 총애를 누리고, 권세욕에 물들고, 복음의 순수성을 그들의 이기적 관심으로 희생시켰다.

콘스탄틴 이후 : 제국교회 자진하여 국가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러한 잘못된 발전이 시작된 시기 대해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이견 지닌 이들 생겼다.

부패가 벌써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

초기 그리스도교의 호교가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희랍화로 시작되었다는 이들

콘스탄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이 있었다.

 

  주요 비난은 언제나 콘스탄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국가 질서에 배열시킨 것은→ 의심 없이 하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즐겨 자신을 동료주교 불렀고, 니체아의 축연에서 겸손하게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였다. 얼마 그는 주교직 그의 관직처럼 지배하고, 비록 교회 사정에 관계되는 일일지라도 국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요구하였다(예 : 아타나시오 335년 황제에 의해 추방됨). 콘스탄틴은 교회 내의 생활에 더욱 심하게 간섭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신학 지식의 깊이와 그리스도교 구원 신비의 궁극적인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예로, 아리우스파의 분규 시초(324년)에, 그는 양측 대표자인 아리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 화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서 파의 대립 문제를 지엽적인 것으로 판단했는데 실제로 문제들은 그리스도교의 존립문제와 상관되었고, 구원 교리자체가 문제시 사실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틴 니체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 했고, 중요한 신앙문제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 그의 신봉자들 파문한 공의회의 결의에 처음으로 국가적인 추방 뒤따르게 했고,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 간섭은 이후 이단자 화형 처하기에 이르렀다.

  (예) 황위 찬탈자인 Maximus(383-388)는 스페인과 갈리아의 금욕운동의 창립자인 스페인 평신도 프리스킬리안을 385년 트리어에서 그의 6명의 伴侶와 함께 처형시켰다.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대표자들인 투르 마르티노, 밀라노 암브로시오, 로마 시리치오 교황 위의 잔학한 행위를 아주 맹렬하게 단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처형의 편을 주교들도 있었다.

  같은 국가 교회 공생, 적극적인 상봉이란 획기적 사건은 많은 신자들에게, 이제 교회는 자진해서 국가의 자유에 맡겨야 하고, 국가의 임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생각했다.

  승리의 도취감 세속과의 격리가 급속화되고

                일종의 세계 개방적인 문화 낙관주의로 변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자신 주교와 신부들에게 권한과 전권 위임하고, 교회에 많은 영예를 부여했으나,

  주교, 신부들 국가와 교제하는데 있어서 전혀 경험이 없었다.

              그동안 박해에는 대응했으나, 국가의 호의적 태도에 대해 미숙했다.

형편에 따라서는 호의적인 것이 적대적인 것보다 위험스럽다는 사실 체험하지 않을 없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교회 몰려든 군중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확신에 있고,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의 엘리트의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고,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온 대중의 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종교의 평범화 이교적·미신적인 것의 침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의 世俗化 남용 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교회는 위험들을 극복하였던 것일까?

  만일 우리가 예수의 肉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 교회를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예수의 삶의 계속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理想을 본래 주어진 형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발견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의 역사적인 발전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교회의 특성 진정한 역사성이다.

  교회는 시대와 떨어져서, 시대와 나란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 안으로 들어가고, 시대 안에서 자신을 시간화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는 정지될 없다. 교회는 본래 개개의 문화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 대한 개방과 접근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든 시대와 문화 안으로 끌고 들어가, 안에서 형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세상을 향한 개방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으로의 접근과 세상으로부터의 격리 사이에 있는 변화의 넓은 폭이 교회의 품안에서 성인과 죄인, 승리와 패배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시기의 부정적인 면에 이론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신학적일 것이고, 긍정적인 면을 부인하는 역시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일 것이다.

  당시의 포교열(布敎熱), 종교문제를 토의하고 신학문제를 해결한 정열, 특히 수도생활의 발전과 성인의 숫자는, 콘스탄틴 이후의 시기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충만했던, 교회사상 위대한 시기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1])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Nis지방

[2])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제1정제는 Nicomedia에,  제1부제는 Sirmium에 정주하였고, 서부지역에서는 제2정제가 Milano에, 제2부제가 Trier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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