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자료 모음 2

2007. 11. 17. 00:17목양자료/5.절기자료

동방박사, 성탄문화 상징될 수 없다
메시아 사상을 갖고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큰 별'을 찾아 간 것


서성환 seobible@naver.com [조회수 : 160]






과소비, 향락으로 흘러가는 성탄문화에 대하여, 작년 2003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한 교파에서 '성탄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친 적이 있다(기독신문 1463호). 그러면서 그 운동의 상징 즉, 앰블렘(emblem)으로 동방박사 그림을 내세웠다. 올 해도 동일한 캐릭터를 사용하면서 그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좋은 행사지만 동방박사의 경배를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가에 대해 어느 누구도 성경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2004년 성탄절을 앞두고 '동방박사'의 성경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의 말씀에서 동방박사들의 경배에 대한 성경적 의미(진리)가 무엇인지를 말씀 중심으로 살펴보고, 비교를 위해서 (눅 2:8~20)의 말씀을 참고하고자 한다. 장황한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동방박사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들(동방박사의 전승, 신분, 경배의 스토리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성경중심으로만 해석한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다



▲ 동방박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별이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날에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면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라고 예수님의 탄생 의미를 일러주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의 별이 나타남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몰랐다. 그러나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알았다. 그래서 헤롯은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동방박사들이 별의 징조를 통해서 알게 된 '유대인의 왕'을 찾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물었으며, 대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미가 5장 2절의 예언을 정확히 이해하고는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다는 증거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본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르지 않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동방의 박사들이 이미 유대의 상인들을 통하여 구약 내용을 알고 있어서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경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면 그들은 '유대인의 한 왕'으로서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것이다.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보다 '다윗의 자손'이나 '그리스도'(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마 22:42, 막 12:35, 눅 20:41). 신약 성경에서는 이방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동방박사 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빌라도(마 27:11, 막 15:2, 9, 12, 눅 23:3, 요18:33, 39,)와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병들만(마 27:27-29, 막15:16-18, 눅 23:36-37, 요 19:2-3)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둘째, 동방박사들은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을 안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문적인 연구에 근거해서 왕을 찾았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된 근거는 구약의 예언이 아니라 그들이 연구하던 별에 의해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사상을 갖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출발했다면, 그들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마 2:2~6; 미 5:2)가 베들레헴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예수님에 대해서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막연한 풍문이나 자료만을 근거로 먼 길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 별의 출현이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 별이 유대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였을 때에 '아,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징조였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끝까지 별의 인도를 받지도 않고 유대의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별이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방의 박사들이 아마도 유대의 동방에서 예루살렘의 북동쪽을 통해서 왔을 것이다(사해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위쪽으로 둘러서 왔다면).

그 별이 베들레헴 위에 머물러 있었으나 유대 땅 위에 머물러있는 별을 보고 그들의 판단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별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육안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알 수 있는 정도의 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에 별의 출현으로 인한 유대의 소동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일반 사람들은 그 징조를 알아차릴 수도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의 출현은 예수님의 탄생과 거의 동시였을 것이고, 그 별을 따라 온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것은 적어도 몇 달 후였을 것이다(길게는 1년 이상. cf. 마2:16).

셋째, 동방박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별이었다.

동방박사들을 오늘날에는 천문학자로 생각할 수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별을 연구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 곧 앞으로의 기상뿐만 아니라 특별한 사건의 징조를 예언하는 일 등을 알려는 점성술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상한 한 별의 출현은 위대한 인물(왕)의 출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믿고, 그 장소를 알기 위하여 동방에서 별의 위치를 추적하다가 유대 땅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서 확신하게 된 결과('유난히 큰 별 혹은 특이한 별의 출현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예고한다'는 사실)입증해 줄 그 별을 추적하여서 위대한 인물(한 나라의 왕 혹은 세상을 호령할 미래의 왕)을 만나서 확인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자 관심이었다.

동방박사들의 관심이 '그 별의 징조에 대한 확인'에 있다는 것은 2장 10절의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10). 그들의 기쁨은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만나서 경배하는 신앙적인 기쁨이 아니라 그들의 연구 혹은 예언한 결과가 사실로 입증되는 것에 대한 감격, 즉 학문적인 성취에 대한 기쁨을 나타낸 것뿐이다.

메시아사상을 가졌던 유대의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후의 행동과 비교를 해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 가니라"(눅 2:20). 목자들은 예언의 성취와 천사의 말을 확인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였다.

이것이 신앙적인 사람들의 기쁨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함을 받았다는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며(눅 2:25~35),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던 안나도 예수님을 보고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눅 2:36~38).

그러나 동방의 박사들이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현장을 본 후가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적 연구의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그들이 연구해온 그 별이 한 인물의 탄생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넷째,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것은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에게 경배한 것이지 그리스도께 경배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으로 동방박사가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의 '경배'(프로스퀴네오)라는 표현은 헬라어에서 반드시 하나님에게 경배한다는 표현만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된 단어로서 ‘깊은 경외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엎드려 절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래서 마 18:26에서는 종이 왕에게, 행 10:25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하는 경우에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을 보고 그 왕은 일반적인 왕(정치적, 혈통적 왕)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적인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것은 한 민족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동방박사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예물을 준비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이 바친 예물은 그들의 연구에 대한 결과로서 만나게 될 미래의 왕에 바치기 위하여 준비한 선물이었다(고대에는 왕을 알현 할 때에는 선물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으며, 아마도 그 예물은 박사들의 고장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품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 물론 그 의미를 억지로 찾아본다면 다윗 왕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상징으로 황금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의 상징으로 유향을,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의 상징으로 몰 약을 바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종류의 선물을 바쳤든지 예수님과 관련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여섯째, 헤롯왕의 요청보다 꿈의 지시를 따르게 된 것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메시아로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하게 하는 사람으로 동방의 박사(점성가)들을 사용한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점성가들은 하늘의 변화나 징조를 통하여 땅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고, 그에 대하여 대비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상한 사건에 대하여 민감하며, 그 사건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는 특성을 갖고 있다. 예루살렘의 소동을 통해서 태어날 아기가 일반적인 왕이 아니라 종교적인 왕으로서 현재 유대지방의 왕으로 군림하는 헤롯 가문의 출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꿈에 나타난 지시자가 유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신의 뜻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꿈의 지시를 권력을 가진 왕의 요청보다도 더 신뢰하고는 다른 길로 돌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동방의 박사들이 구약이나 유대교 사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예언이나 지시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날 때의 표현을 '주의 사자'(마 1:20, 24, 2:13, 19, 눅 1:11, )나 '천사'(눅 1:13, 18, 19, 26, 30, 34, 35, 38, 2:10, 13, 15, 17, 21)라고 표현하는데 비하여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사자에 대하여는 그런 표현이 없이 단지 '꿈에 지시함'을 받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가 주는 의미

예수님 탄생에 대한 축하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유대인을 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에는 이방인 동방박사의 경배가, 이방인(헬라인)을 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에는 유대인 목자의 경배가 기록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롬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하였다. 세상적인 눈으로 진지하게 만물을 보아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데 예언자들을 통해서 수천 년 동안 계시하였으며, 또 그 계시를 따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책망의 메시지가 바로 이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께 대한 경배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탄생하시는데 정작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멀리 있던 이방의 동방 박사들이 자연을 통한 지식(점성술)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잘 알고 맞이해야 할 유대의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롯왕의 편에 서 있었다.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에 대한 경배 사실이 유대인들을 위한 마태복음에 기록한 것은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을 책망하기 위한 의미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마태복음 2장의 말씀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장 9절 이후의 예수님 탄생에 대한 언급 중에 나타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9~13).

즉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 사건의 의미는 요한복음 1장 11절에 기록한 "자기 땅에 오메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요 1:11)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에 대한 책망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둔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입성 할 때에 온 무리들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38~40).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이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마 2:1~12; 동방박사, 마 27:54;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백함), 동물들(민 22:21~35, 발람을 책망하는 나귀), 더 나아가서 생명도 없는 사물들을 들어서 찬양하고 경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기록의 의미는 동방 박사들의 예수님께 대한 경배가 초점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책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성탄절마다 교회에서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다른 많은 날 동안 꾸준히 해야 할 구제를 성탄절에 함으로서 성탄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앞두고도 일어났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기 위하여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리자 제자들은 많은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값진 것을 허비한다고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한 그 여인의 행함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말하여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6:6~13, 막14:3~9). 제자들은 물질의 가치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구속사적 사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탄절은 구속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맞이해야만 합니다.

특별한 날을 정해서 기념하는 날에는 그 기념에 맞는 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자자손손이 늘 기뻐해야 하지만 특히 8월 15일로 정한 광복절에는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광복절에 성탄축하 행사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일 성탄절에 개천절 행사를 한다면 그것은 성탄절의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1년 동안 못한 구제나 감사나 이웃 사랑을 속죄하듯이 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성탄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불우이웃을 도와야 한다면 도우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였습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를 따라, 세상의 풍토를 따라 '선물'이 주인공이 되는 성탄절이 아니라 천사들과 목자들의 본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평화를 만드는 성탄절'로 만듦으로서 성탄의 의미를 바로 세워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되게 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맞을 진정한 성탄
성탄, 전혀 가망 없는 세상에 용서와 생명을 주러 오신 날


윤종상 inglove@hitel.net [조회수 : 376]






(요 3:16)

성탄의 복된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성탄은 우리 앞에 와 있고 우리는 또 한번의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부터 교회를 다닌 분들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나 아련한 성탄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어른 분들은 구호물자 받는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릴 때 성탄의 추억이 있습니다. 여름성경학교를 막 끝내고 나면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집니다. 11월이면 이미 성탄축하 행사의 연습이 들어갑니다.

거의 한 2개월이 들뜬 분위기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지나가는지 이런 말 하는 게 죄스럽습니다만 그 때는 참 좋았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그 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는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성탄의 분위기는 식상해 있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교회가 흥미를 잃고, 나아가 예수 성탄에 대한 감격을 상실해 가고 있지 않나 합니다.

오히려 성탄의 의미도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더 날뛰고 설쳐대는 크리스마스, 주객이 전도된 크리스마스, 그래서인지 더욱 서글퍼지고 저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그런 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명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 여기에 편승해서 성탄의 감격을 상실해가고 있는 교회. 이 말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한 목회자의 넋두리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성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의 주로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성탄절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최대의 문제요 인류가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서 탐구해 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 아주 기막힌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죽음을 영생으로 바꿔주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냥 앉아서 덤덤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쁘고 기쁜 소식이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해서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할 수 없는 그 은혜에 목이 매여 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찬양해야 할 감사의 날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뉴스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수많은 일들, 사건, 사고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모든 일들을 안방에 앉아서 다 듣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한 사람 다치고 죽는 것은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엄청난 성탄의 뉴스마저 그저 덤덤하게 받습니다.

천지의 대주재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만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최대의 뉴스가 아니겠습니까. 크리스마스는 이 최대의 뉴스가 전하여진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참사람이 되어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불안과 공포와 애통과 사망에 헤매는 전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 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사람 예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굶주린 사람에겐 생명의 떡을, 고달픈 사람에겐 안식을, 불안한 사람에겐 평안을, 병든 사람에겐 치료를, 어두움이 있는 곳엔 광명을, 미움이 있는 곳엔 사랑을, 절망이 있는 곳엔 소망을, 죽음이 있는 곳엔 부활을, 생명을 심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주님! 내가 믿사오니 오시옵소서! 주님! 내가 환영하오니 오시옵소서! 생명길로 나를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알게 하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나에게. 나의 가정에. 성탄의 감격을 상실해가고 있는 이 땅의 교회에,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이 나라, 이 민족, 이 백성들에게 오시옵소서!" 기도하면서 이 성탄을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알게 하소서. 오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면서 맞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성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성탄의 축복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대의 선물인 아기 예수의 태어남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에 목자들은 들판에서 자기들의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천사들은 찬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첫 번 크리스마스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목자들은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들의 노래와 더불어 외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둡던 주위가 밝아지면서 똑똑히 들려오는 음성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것이 첫 성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워계신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구유에 나신 만왕의 왕 예수님께 경배하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른 것을 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찬송을 부르며 돌아갔습니다.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준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는 사9:6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사 임마누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택한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죽기 위해 오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 하는 필연성은, 오셔도 되고 안 오셔도 되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치료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 상처와 이 죄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불안과 고통가운데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죄와 허물로 인해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더 이상 버려둘 수 없는 사랑의 심정 때문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비천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이며 동시에 하나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예수님이 약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짐을 지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는 길이었고, 모든 사탄을 굴복시키는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요, 이 성탄에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는 길이었고, 모든 사탄을 굴복시키는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옥 유황불 속에서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탄생!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사랑은 확실히 증명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모두가 요란스럽게 떠드는 이날, 누추한 말구유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감격해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새롭게 질문하는 날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될 것에 무감각하고 참된 은혜에 무표정하고 참된 사랑에 무반응인 성탄절은 적어도 구원의 의미를 아는 성도의 성탄절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구촌 최대의 뉴스, 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요 우리가 맞을 메리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쁜 성탄절을 살리자
성탄 소식을 만방에 알리는 운동에 동참하자


유의신 yoo4422@orgio.net [조회수 : 384]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기독교인들만이 지키는 절기로 제한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둡고 조용한 계절이 되고 있다. 그래도 기독교계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서울 모 기독교 기관이 1970년대부터 시작한 크리스마스 조용히 보내기 운동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성탄 캐럴 부르기 등 밤을 새며 성탄 아침을 밝히던 추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오일 쇼크가 오면서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밝히던 불빛이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성탄절 거리는 어두워졌다.

게다가 2003년부터는 초중고등학교의 방학이 12월 31일로 연장되면서 청소년 중심의 크리스마스이브 프로그램이 크게 위축하고 말았다. 만약 이런 상태로 기독교계가 침묵하고 있다면 다음 세대쯤에는 교인들만이 지키는 국소적 계절이 되어버리고 기독교의 위상은 대단히 축소될 가능성이 보인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문화가 대 사회적으로 가장 깊이 그리고 넓게 파급된 것은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크리스마스를 설명하지 않아도 남녀노소 누구나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를 모두 알고 있지만, 지금 같은 추세라면 곧 이 땅에 크리스마스 소식을 만방에 알리는 자들이 반사회적 행위자로 취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개인 자격으로 12월 12~22일 저녁7시 30분간 거리에서 캐럴 부르기 운동을 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지면을 통해 주님의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살리기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싶다.

-성탄절 살리기 제안-

계절의 꽃인 크리스마스를 살리자

1. 12월 23일 저녁 7시에 일제히 30분간 동시 다발로 캐럴 부르기를 하자.

1) 개 교회나 단체 별로 20~40명, 또는 50~100명 단위로 통행자가 많은 거리를 선정하여 사전 답사하여 위치를 정한다(교회나 단체별로 그 규모에 따라 여러 그룹일수록 그 효과는 클 것이다).
2) 플래카드나 피켓을 준비하여 전면 또는 후면에 들게 한다.
3) 30분간 부를 캐럴을 선정하여 반주 테이프나 이동식 앰프로 육성을 돕는다.
가급적 악보를 보지 않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곡으로 하되 세속적 캐럴은 피한다.
4) 커피 봉사나 전도지나 선물을 준비하여 한편에서 봉사하면 좋을 것이다.

2. 12월 첫 주일부터 일제히 교회당이나 단체 사무실 및 건물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고 점화하도록 하자(각 개인 상점이나 사무실 및 개인 가정집에 최소한 한 집 한 등을 옥외에서 볼 수 있는 곳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달고 점등하도록 하자).
3. 12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믿지 않는 이웃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자(카드는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이 포함되는 카드를 선택하도록 하자).
4. 크리스마스 선물을 소외자들과 불신자들에게 정성껏 준비하여 24일 혹은 25일에 전하자.
5. 외국인 근로자나 유학생을 가정이나 교회에 초대하여 애찬을 나누자.

유의신 목사 / 믿음찬교회, 늘노래 담임목사, 동서대 교목




일회성 행사로 전락한 성탄절 유감
<함께가는공동체이야기 18> 성탄의 본질 잃어버린 작금의 성탄절…아기 예수 오신 진정한 의미 살리길


이창열 lcycom1@hanmail.net [조회수 : 218]






성탄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교회당을 장식하고 있는 트리 불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축성탄' 류의 상투적인 글자들도 눈에 들어온다. 거리에는 캐롤이 울려 퍼진다. 각 교회에서는 성탄절 축하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2003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올해도 역시 그 예수님을 맞이하는 특별한 행사가 많은 교회에서 열릴 것이다. 아니 교회를 넘어 양로원과 고아원 그리고 장애인 시설 등에서도 열릴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환하게 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탄절만 되면 반사적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가 성탄절을 일회성 문화 행사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다가, 성탄절만 되면 특별한 현수막을 내걸며 각 교회마다 갑자기 분주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런 호들갑스런 광경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목동에게 처음 알려진 것과 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1년 365일 중 단 하루 성탄절에만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것!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의 한 사람으로 이런 광경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해마다 되풀이되듯 이번 성탄절이 지나면 소외된 사람들은 다시 또 소외되고 말 것이다. 성탄절에 찾아 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그들에게 상처로만 남을뿐이다. 이웃을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지, 교회를 위해 이웃이 존재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이상하게 한국교회는 특별한 날에 대한 관심과 행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물론 성탄절은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과 평화와 소망을 주신 날이다. 그러므로 이 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특정한 날에 대한 그러한 특별한 구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경건이 특별한 한 날에만 집중될까 우려하는 것이다. 특별한 날에 대해 우리가 부여하는 그 의미가 우리의 잔잔한 일상 가운데서도 계속 표현될 때 특별한 성탄절은 더 풍요롭고, 더 특별해질 것이다.

요즘 일회용 컵이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 각 건물마다 커피 자판기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일회용 컵으로 우리들은 편리하게 커피를 즐긴다. 확실히 일회용 컵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생태계를 망치는 주범이라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안다. 마찬가지 아닌가! 일회성 문화 행사로 전락하고 있는 작금의 성탄 문화는 성탄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었을 뿐 아니라 공해가 되어버렸다.

교회가 작심하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성탄절에 넘쳐나는 우리 사회의 퇴폐소비향락 문화가 성탄을 대하는 교회의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이런 태도가 결국 흥청망청하는 세속의 쾌락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성탄의 의미가 평화를 위한 일상의 신앙 고백이 될 때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더는 성탄절이 일회성 문화 행사로 전락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구세군 자선남비의 유래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사관(조셉 맥피 정위)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끊게 합시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웃을 돕기 위해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깊은 마음이 오늘날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실시하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모든 이들에게 이웃사랑의 절실한 필요성을 되살려 주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만들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 준섭(조셉 바아)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 이웃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 구세군 자선냄비 - 에서 인용했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의 바실리카

"이 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내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하는 다윗의 동내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날이 차서 맏아들을 나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로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베들레헴이라는 한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은 아득한 시대의 특성을 거의 변함없이 전원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곳은 올리브와 삼나무가 널려 있고 거칠고 바위가 많은 언덕에 위치한 하얀 마을이다. 발음상으로 그 마을 이름의 의미는 히브리어로는 고기의 집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스러운 마을인 베들레헴에는 신약과 구약의 기억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넓은 목자의 길 위에는 짙은색 옷과 그들의 전형적인 머리띠를 멘 양치기 의해 끌려온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35[베들레헴 :예수탄생의 바실리카 외부는 강력히 요새화된 건물 모습이다.
36.37 [베들레헴 :예수탄생의 바실리카는 작은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간다.
38.39.40[베들레헴 :예수 탄생의 바실리카,내부의 광경.
이 교회의 웅대하고 기념비적인 특징은 강력한 빨간 사암의 코린트식 기둥 나열과 고대 모자이크 바닥의 단편에 의해 강조된다.
이런 배경에 걸맞지 않게 성서에 기록된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양치기의 땅으로 알려진 목장들은 다윗의 조상의 삶과 유대인의 위대한 왕에 대한 충분한 증거물이며,또한 신의 아들인 예수의 탄생에 대한 충분한 증거물이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우리에게 인간과 신 두가지 본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임을 나타내는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한 메세지로 남겼다.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고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사람들의 양심, 생각과 믿음 형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예수가 탄생한 날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는 없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12월 24일 밤으로 정했다. 그리스의 정통교회는 1월 6일로 보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은 1월 18일로 보고 있다. 예수가 탄생한 1세기 이래로 순례자들이 성스럽게 여긴 이곳에 예수 탄생의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서기 135년에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황제 하드리안은 동굴과 나무를 이교도의 신인 아도니스에게 바쳤다. 서기 332년에 있었던 콘스탄틴의 침략이 있고 난 후에야 기독교인들이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때 이래로 지금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숭배의 장소가 되었다. 바실리카는 완전히 파괴된 후에 다시 지어졌고, 새로운 교회가 6세기에 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이 새로 세워진 교회에는 3개의 애프스, 아르텍스로 변경된 안뜰 그리고 예수탄생의 동굴로 들어가는 층계가 있다. 세개의 수도원에 의해 둘러 쌓인 바실리카는 지금은 다른 기독교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바실리카는 작은 겸손의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방문객들은 허리를 굽히고 실제로 진짜 조그만 동굴을 지나가듯이 들어가야만 한다. 원래 문은 매우 큼직했을 것이다. :17세기 경에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슬람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안의 치장은 엄청나다. 그리고 4줄의 빨간 석회석기둥이 안을 떠받히고 있다. 그리고 고대 모자이크로 된 마루가 부분적으로 빛나고 있다.



41.[베들레헴:예수탄생의 바실리카.예수가 탄생한 제단의 모습]
42.[베들레헴: 예수탄생의 바실리카,주위의 15개 램프가 비추는 은으로 된 별표시는 예수가 탄생한 정확한 지점을 표시해준다.
43.44.[베들레헴 :예수탄생의 바실리카,동굴의 전경과 예수탄생의 제단식].
46.[베들레헴 :예수탄생의 바실리카. 예수탄생의 제단에 위치한 같은 이름의 동굴과 Manger의 제단.
본당의 벽에는 엄청난 모자이크의 흔적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모자이크에 새겨진 내용은 예수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이고, 처음 7개가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이 교회의 일부분이 예수탄생의 동굴에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이 조그마한 방, 예수탄생의 제단, 다른 기독교 집단들을 나타내는 15개의 은램프가 비추는 한개의 은으로된 별은 예수탄생의 장소를 나타낸다.



47.48 [베들레헴 :성 캐서린의 교회, 같은 이름을 가진 수도원의 전경과 그 앞에서 정 제롬의 상이 있는 교회의 정면도.
49.50 [베들레헴 :성 캐서린의 교회의 내부.
맞은편 :소위 밀크동굴로 들얼가는 입구.
[성 케서린의 교회와 수도원]

예수탄생의 동굴로 다다를 수 있는 동굴들이 여러개 있다. 그중의 하나는 성 케서린의 교회에 있는 동굴을 통하여 예수 탄생의 동굴에 다다를 수 있다. 이 교회는 19세기 중반에 프란체스코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그 내부의 본당 가운데에 복도가 있고 리브로 장식된 천장이 있다. 이 교회의 명성은 크리스마스날에 있었던 로마카톨릭 교회의 한밤중의 미사에 있다. 그 한밤중의 미사는 위성을 통해 전세계로 방송도었다.

그 교회의 수도원은 조용하고도 생기있는 분위기로 유명하다. 수도원의 중심부에는 성 제롬의 모습이 새겨진 기둥이 솟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라틴,그리스,히브리,아랍어에 대한 그의 광대한 학식과 지식으로 알려진 성 제롬은 여기에 있는 385에서 420개의 동굴중 하나의 동굴에서 35살의 나이로 운명하셨다. 그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성서"를 거기서 만들었다.



51.52 [베들레헴의 주위에 있는 언덕의 모습이 아직까지 농경지의 모습과 전원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53 [베들레헴의 집들이 주위의 경치와 어울리며 바위가 많은 언덕의 능선에도 올리브나무가 띄엄띄엄 서있다.]






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설교입니다.
이광복목사의 책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신약의 요셉
(마1:16)

요약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유다의 자손에서 나리라
그리고 요셉에게서 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한 분이 어찌 두 조상에게서 날 수 있는가?
그러나 예언이 응함을 고찰해 보면 유다 지파에서 나는 예언은 족보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고,
요셉에게서 난다는 예언은 요셉과 동일한 의로움과 그 심령을 가진 신약의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 의인 요셉을 통해서 영육 간 동시에 성취된 것이다.
우리도 신약의 요셉처럼 경건히 섬길 때 예수님이 인격에 나타난다는 교훈을 기억하자.



지난 시간에는 구약의 요셉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신약의 요셉입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 요셉, 다윗 시대에 아삽의 수하에서 신령한 노래를 불렀던 요셉(대상 25:2), 요야
김 왕 때 스바냐 족속의 제사장 요셉(느12:14), 잇사갈 지파의 가나안 정탐군 요셉, 위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요셉
(눅3:30), 예수 그리스도의 부친 요셉, 예수님의 동생 요셉(마13:55),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로 추천을 받은 유스도라 하는 요
셉(행1:22), 그런가 하면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본래 이름이 요셉입니다(행4:36). 그런데 이 시간에 살펴보는 요셉은 아브
라함의 증손인 야곱의 아들 요셉과 예수님의 부친인 요셉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마1:16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
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보면 하나의 사실을 말씀한 지극히 평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
다. 이 말씀은 성경 예언의 중요한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이 여자의 아들로 난다는 것은 늘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의 아들로 난다
는 것이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 아십니까? 이 문제가 그리 중요한 문제냐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
이 유다 지파로 좇아 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입니까? 그래서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
제가 풀릴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성경이 예언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메시야가 분명히 요셉에게서 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창9:24에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장차 인류의 구세주나 나타날 메시야 예수를 가리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 중에 가장 풀기 어려운 것이 메시야가 요
셉에게서 난다고 하는 창세기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요셉 지파에서 메시야가 났습니까?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인데 한 곳에서는 메시야가 유다에게서 나
온다 하고 또 동일한 성경인데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이 요셉에게서 난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래서 이 사건은 아주 난해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예언이 충족되도록 풀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 예
언이 바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메시야가 과연 예수님이신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다가 네 번째 아들이요, 요셉은 열 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분의 메시야가 이 두 사람에게서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육으로만 성경을 풀려고 하면 풀리지 않을 뿐 아
니라 메시야를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 몇 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1. 영적인 관점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도 영적인 관점이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가령 넷째 아들 유다가 장자가 된 것도 그의 세 형 즉 루우벤
과 시므온과 레위가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실수 좀 했다고 장자가 차자가 됩니까?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것을 중시하는 성경의
영적 관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고 그 자손들이 번성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의 장자권을 인정하지 않고 네 번째
인 유다에게 장자권이 넘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신령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요셉도 신령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 흔적이 있나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실재로 요셉도 영적인 관
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대상5:1-2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
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했습니다. 그러
니까 범죄하지 않으므로 영적 장자는 유다가 되고,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살렸으므로 육적 장자가 된 것입
니다.
이것이 신령한 관점에서 본 족보론입니다. 어떻게 성경은 대부분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영적인 말씀이 아니라면 어찌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이 육의 장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수 있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셉 사건도 실재적 사건임과 동시에 예표가 성취된 영적인 사
건으로 보자는 말씀입니다.

2. 신약의 요셉은 구약의 요셉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특징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기합니다. 이 신구약의 두 요셉은 비교해 보면 여러 면에서 같은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요셉으로 이름이 같습니다.
아버지 이름이 같습니다. 두 분다 아버지가 야곱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두 사람 다 의롭고 흠이 없었습니다. 또 두 사람 다
애굽으로 피난 혹은 팔려 갔었습니다. 혹은 두 사람이 형태는 다르지만 다 여자의 유혹에서 승리했습니다. 또 두 사람 모두 꿈
을 세 번이나 꾸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게 아들을 빼앗깁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두 아들을 빼앗기죠? 그래서
야곱의 양아들이 되어 열 두 지파에 채워집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의 요셉은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 빼앗기죠? 마9:15
에는 예수님의 이 죽으심을 빼앗긴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놀랍게도 두 사람은 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이름만 요셉일 분 아니라 그 인격의 내용도 동일한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동일한 인격체와 같은 실상의 나타남이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 같은 예가 세례 요한의 등장입니다. 세례 요한
은 분명 엘리야는 아니지만 성경에 보낸다고 하신 예언 성취의 그 엘리야였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모른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엘리야가 아니라 하여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세례 요한을 가리켜 "저가 또 엘
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아합 시대의 그 엘리야는 아니지만 성경에 하나님께서 예수 초림 전에 엘리야를 보낸다 하신 그 엘리야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인격적 내용을 통하여 성경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취인 것입니다. 이 영
적인 면을 모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유대나라가 장차 세계를 지배할 것만
을 기다리는 착각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라는 이름과 그들의 이름이 갖는 공통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창세기에 요셉에게서 나리라 한 메시
야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신약에서 요셉을 통하여 내용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난다, 혹은 요셉
에게서 난다 하는 두 예언이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요셉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의 예언이 조금
도 무리 없이 다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길 원합니다. 마치 구약의 요셉과 같은 신약의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셨듯이 우리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경건히 섬길 때 우리 인격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는 교훈입니다. 즉 신약의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속
에서 구약의 요셉을 닮음으로 그 예언 성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듯 우리도 요셉과 같은 그 경건한 신앙을 가짐으로 살아 계
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나타나시고 우리의 삶에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요셉과 같은 경건한 신앙을 가집시다. 그
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실재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약 요셉의 두 부친 문제
(눅3:23-24)

요약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 족보에서 신약 요셉의 두 부친 문제가 나타난다. 여러 학설 중 요셉 부친의 계대 결혼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사단의 방해는 계속되어 잠시 종족의 줄기는 끊겨도 하나님의 이어주시는 은혜는 계속된다. 이 계속됨은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매사의 삶에 늘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다시 회개하며, 나아가 강물 같이 흐르는 성령의 그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 연구에서
가장 난해한 점이 예수님의 부친인 요셉은 두 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1:16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
니라" 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눅
3:23에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라고 했습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요셉 아버지가 헬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과연 한 사람에게 두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한 사람에게 실재적인 두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재 아버지
는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에서 족보를 썼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약 세 가지의 학설이 있는데

먼저는, 마태는 예수의 왕적 족보를, 누가는 제사장적인 족보를 기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
나 이 설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을 뿐 더러 예수님은 왕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시기는 하시지만 그
러기에 두 아버지여야 한다는 성경적 배경도 없고, 또 아브라함과 다윗 사이의 족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관성이 없는 설입니다.

또 다른 학설은 마태는 예수의 부친 족보를, 누가는 예수의 모친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부친이 됩니다. 이 주장을 하는 이유는
메시야가 여인의 후손에서 난다는 예언을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생겨나는데 먼저는, 여인의 후손이란 남자 없이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됨을 강조 한 것이지
여자의 족보에서 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아의 족보를 말
하는 것이라면 두 사람 다 할아버지가 같은 맛닷이니 아주 가까운 가족이 되는데, 그보다 문제는
마리아 할아버지를 요셉 할아버지라고 할 성경적인 근거도 발견되지 않고, 그나마 이 족보가 마리
아의 족보라는 근거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학설은 마태의 족보는 법적인 족보요, 누가의 족보는 실재적인 족보라는 설입니다. 이 설
도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는 점에서 다른 학설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 족보
에서 아버지가 두 사람이 되는 성경적인 예가 여러 번 있으므로 성경적인 배경을 갖는 학설이라
는 점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예를 여기에 적용했을 때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
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이 마지막 설을 채택하여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버지를 두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계대결혼입니다. 계대결혼
이란 우리 한국에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만 가령 장남이 아들을 낳
지 못하고 죽으면 차남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되 그 아들은 차남의 것이 되지 않고 장남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재는 차남이 아버지인데 족보상으로는 장남이 아버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가 순식간에 두 분이 생깁니다.
성경에서 왜 이렇게 족보의 연결을 중시합니까? 그것은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에서
나리라는 성경적인 예언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참 메시야를 증명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는 그 조상이 갖는 신앙적인 여러 특징을 띤 그런 완전한 메시야가 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입기 위해 그러니까 결국 메시야를 설명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셉의 두 아버지인 야곱과 헬리는 형제지간이었을 것을
봅니다. 둘 중에 야곱이 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장자권을 이어가야
하는데 어떤 사건으로 장자가 죽습니다. 그러자 동생인 헬리가 계대결혼을 통해 형 야곱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곧 요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두 아버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계대결혼은 그 전에도 이미 예수님의 족보에서 채택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룻의 계대결혼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의
가문이 모두 모압으로 피신을 갑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여자 셋만 남고 가장 엘리멜렉도 두 아들
말룐과 길룐도 모두 죽습니다. 이 때 기론의 아내 오르바는 제 갈 곳 찾아서 갔지만 말룐의 아내
룻은 효심을 다해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늙었고 남편마저 죽었으니 자식이 없으니 룻을 계대결혼을 시킬 수가 있습니
까? 그러나 계대결혼이란 자식이 없으면 이제 그 기업을 무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로 차례가 돌
아갑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나오미를 가까운 친족에게 시집보내 계대결혼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
런데 그 대상자 중에 첫째 되는 사람은 자기가 아들을 낳아주어 봐야 자기 아들도 안될 것이고
재산마저 그 아들의 것이 될 것 같으니까 포기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너그럽고 재산 많으며 룻을
사랑하는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룻4:16을
보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말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오벳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분명 낳기는 말룐의 아내 룻이 나았고 아버
지는 보아스로되 오벳은 엘레멜렉의 아들이 되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대결혼입니다. 그리
고 이것이 예수님 족보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사단이 예수님의 가문이 끊어지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파란만장한 역
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짜르고 짜르고 막고 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
코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떤 손길이 나타나서라도 그 계대를 이어가도록 하셔서 메시
야의 줄기가 끊기지 않게 하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사단의 역사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시자 말자 헤
롯에 의해 애굽으로 피난 가시고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 아이들이 모두 죽었고 그 후에도 시시각
각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험한 그것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깨뜨리면 다시 이어주시고 또 깨뜨리면 다시 이어주셔서 예수님을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성경 사상 그대로 계
대결혼을 암시하는 야곱으로 기록했고, 누가는 실재를 강조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썼으므로 헬
리를 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족보상의 두 아버지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셨을 줄 믿습니
다.

그럼, 오늘 분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계속하여 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사단이
얼마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노력합니까? 신앙생활에 좀 열심 내려 하면 사단이 넘어뜨려 놓고
또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
좀 받았다 하면 시험이 와서 쏟고 또 쏟습니다. 물론 믿음 약한 우리에게 잘못이 있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은혜 받고 심령에 새순이 좀 난 것 같으면 또 시험 들게 해서
그 순을 끊어버립니다. 이러기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백 번 아니 천 번 아니 몇천 번도 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끊어버리면 그 순을 다시 나게 하시고 또 나게 하십니
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순이라고 했습니다. 슥6:12에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
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했는데 그 순이 궁극적으로는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건축은 장차 구속사역의 완수를 시사하며 나아가 우리를 영적으로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순을 통해서 신령
한 하나님의 전을 만들고 마십니다.

사단이 메시야의 계대를 파괴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혜와 생명 줄기는 이
제는 이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막지 못할 더 큰 은혜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흘러가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붙들기만 하면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
다. 그래서 우리는 상한 갈대 같지만 그리고 꺼져 가는 심지 같지만 온전히 이기게 하시는 그 은
혜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이렇게 구약의 사건이 신약에서 완전한 복음으로 결론되어집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어 회개하고 또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
시 회개하시고 일어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도 막지 못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
의 형상으로 변화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구약요셉 두 아버지
(창48:5)

요약
신약 요셉이 그러했듯 구약 요셉의 다른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것은 요셉을 높여 성부의 예표가 된 바로 왕이다. 바로 왕
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주어 요셉은 바로에게 양아들과 같았다. 그런데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새도 조부 야곱이
양아들 삼음으로 졸지에 두 아버지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육과 영의 두 아버지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
이다. 그리고 구약 요셉이 받은 축복은 구약에서는 성취도지 않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놀랍게 성취되었다.


지난번에 신약의 요셉에게 두 아버지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의 예언적 근거와 예수님의 두 아버지 우리의
두 아버지 문제 그리고 요셉이 받은 축복의 행방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 문제의 구약적 근거입니다.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 문제 역시 구약 요셉의 두 아버지가 그 예표입니다. 구약 요셉의 아버지는 이삭의 아들 야곱인데,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는가?
족보상으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독특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독특하다는 것은 양아버지 격인 아버지입니다. 그렇다고 확실한 양아버지
는 아닙니다. 그래서 양아버지 격인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당시 바로 왕은 요셉과 아람 출신으로 혈통도 같고 요셉과 그 민족을 대접한 아주 좋은 왕입니다. 이 왕이 요셉을 총리로 높임을 볼 때 이 왕은 모세
시대 바로와는 달리 예수님을 하늘까지 높게 하신 성부를 예표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부를 예표하는 인물이 요셉을 높였던 바로 왕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에게 바로 왕이 형태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 실제로 바로 왕이 아버지 역할을 했느냐?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데 이 왕이 요셉에게 양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창41:40에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습니다. 왕이 모든 권한을 요셉
에게 맡겼다는 것은 왕위 계승할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장반지를 요셉에게 주었는데 이것은 왕으로서 결재권
입니다. 그리고 왕만이 입는 세마포 옷과 버금수레를 주었는데 이는 온갖 권세와 부귀영화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당시 왕은 백성들의 주요 아버지로 불
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양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장차 신약의 요셉에게 두 아버지가 있을 것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
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왕과 헬리라는 이름이 비슷합니다. 바로라는 뜻은 '태양'인데 헬리라는 뜻은 '높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성경의 인명
지명 사건 등이 우연히 기록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성경에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야곱은 축복하기를 "네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12지파의 예언은 다 역사 속에서 성취
되었는데 이 요셉에게 한 예언만은 구약 마당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구약의 요셉과 똑 같은 배경을
가진 신약 마당의 요셉에게 그대로 성취되어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고전10:4에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벧전2:8에도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또 요10:11에 "나는 선한 목자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49:24의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리라"는 말씀이
신약 요셉에게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요셉의 두 아버지는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를 위해서 귀한 근거가 되고 예표가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우리의 두 아버지 문제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에게도 두 아버지가 계시지요?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 요셉, 이처럼 우리도 두 아버지가 계십니다. 영의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
의 아버지입니다. 이 근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또 다른 두 아버지 사건이 나옴을 봅니다. 그것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야곱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즉 야곱은
손자들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 말씀이 창48:5-6에 있습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
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야곱은 이스라엘 열 두 아들을 축복하기 전에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선포해 버
리고 열두 지파 속에서 요셉의 이름을 쏙 빼버립니다. 그래서 므낫세와 에브라임도 순식간에 두 아버지가 생겨납니다. 즉 한 아버지는 자기를 낳은 요
셉 아버지요, 족보상으로는 할아버지 야곱이 자기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도 안다 나도 안다"고 한 것을 보아 노년에 정신이 나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어떤 일의 예표가 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이 예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차 예수님에게 두 아버지와 우리 성도들에게 두 아버지가 있을 것을 시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20:17에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
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 그 말씀처럼 예수님과 우리에게는 두 아버지가 계십니다. 한 분은 하늘에 게신 영의 아버지이시고 한 분은
육신의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이란 이처럼 예언 없이 된 것은 없습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모두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만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아버지까지 두 아버지를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요셉이 받은 축복 문제입니다. 요셉이 받은 축복은 성취될 수도 없고 또 성취된 적도 없는데 과연 이 축복의 행방은 어디인가?

요셉이 받은 축복의 내용은 창49:22-26절입니다. 그 중 일부만 읽어 드리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
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49장에서 축복을 받지만 요셉은 48장에서 축복을 받고 49장에서 또 다시 아들들과 함께 곱곱으
로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의 분량도 두 장을 합해 놓으면 유다가 받은 축복을 능가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셉이 아들들이 받은 축복 말고도 자기
가 받은 축복이 있기 때문에 요셉도 가나안 땅을 분배받아야 하는데 자기 이름마저 열두 지파에서 빠집니다. 즉 요셉에 대한 축복은 구약 마당에서 성
취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바로 요셉 축복의 행방불명에 담긴 귀한 비밀인데 답을 말씀드리면 요셉에게 한 축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예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담긴 깊은 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구약 요셉에게 한 축복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먼저, "샘 곁에 무성한 가지가 된다"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요셉은 두 아들을 야곱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후손을 기대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지파보다 더 무성하
게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번성한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축복이 상식적으로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요? 후손이 없는 요셉에게 번성이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 마당에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신약 요셉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에게 복
음이 전파됨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갈4:26-28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
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했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자녀 없다고 한탄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하여 만든 믿음의 자손이 많으면 이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음에,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축복입니다.
여기 담을 넘었다란 장차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계 이방에까지 미칠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갈3:14에 "이는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활 쏘는 자가 학대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기 활 쏘는 자는 사단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사단이 쏘는 악한 사상의 불화살을 막아야 합니다. 즉 신약 요셉의 아들 예
수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될 터인데 거기에는 많은 사탄의 방해가 있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 팔이 힘이 있어 그것을 무너뜨린다"고 축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아무리 복음 전파를 방해해
도 더욱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충만하여 이기고 이겨 세계를 복음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요셉이 받은 축복은 구약 마당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신약 요셉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백성들에게 놀랍게도 성취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문자와 육으로만 풀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가끔 선보이듯 충실한 영적 해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으로
조직신학의 틀 안에서 성서신학이 더욱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을 철저히 버리고 성경 기자들이 보여주었던 새 것에 대한 충분히 이해와
접근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구약의 두 요셉은 메시야를 나타내는 귀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두 요셉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는 최고의 축복된 성도들이 되어
야 하겠습니다. 요셉에게 두 아버지가 있음 같이 우리도 하늘과 땅의 두 아버지가 있음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요셉이 받은 축복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 안의 무궁한 복을 누리십시다. 그들은 예언만 했지만 우리는 그 복을 누리게 된 사실을 감사하십시다.



두 요셉의 꿈과 신비한 탄생
(마1:18-25)

요약
신구약의 요셉은 세 번 꿈을 꾼다. 이 꿈을 통하여 구원을 위한 보호와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구약의 예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셉의 독특한 출생의 이력이다. 요셉의 모친 라헬은 정상적인 생육법으로 아들을 낳지 못했고 합환채를 통해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이 합환채는 5월에 황무지에서 나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의 인격 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려면 고난의 황무지를 통과하면서 성령의 합환채를 먹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약 요셉의 두 아버지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두 아버지가 있고 우리 성도들
도 반드시 두 아버지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요셉의 꿈과 신비한 탄생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먼저, 신구약 두 요셉의 꿈입니다.

구약 요셉과 신약 요셉이 꿈에 있어서도 놀랍게 일치를 이룹니다. 신구약의 요셉 모두 꿈을 세 번 꾸거나 꿈과 관계가 있습니
다.
먼저 구약의 요셉을 보면 창37장에 먼저 곡식단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꿉니다. 이 꿈은 두 번이지만
동일한 꿈이니 하나의 꿈입니다. 다음에 창40장을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직접 꾼 꿈은 아니지
만 꿈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41장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해 줍니다. 그렇게 하고는 바로 왕의 신임을 받아 7년
풍년 7년 흉년을 예비하고 백성들을 구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신약 요셉도 꿈을 세 번 꾸었습니다. 첫 번째가 마1:18-21에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두 번
째는 마2:13-15의 애굽으로 피난 가라는 꿈입니다. 세 번째는 마2:19-21의 헤롯이 죽었으니 나사렛으로 귀향하라는 꿈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구주 예수님이 보호되고 준비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요셉은 신약 요셉의 정확한 예표입
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요셉의 꿈은 결코 한 개인이나 한 가족의 꿈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구약 요셉은 신약 요셉만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꿈에 대해서만 말씀 드립니다. 구약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양곡 정책을 써서 나
라 안팎의 많은 백성들을 살림 같이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양식으로 유대인이나 멀리 이방 모든 세대의 백성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즉 애굽은 세상이고,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열 한 형제들은 하나님 백성인 성도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통하여
열 한 형제를 구원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이 구원받을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가지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우리들도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
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
어 갈함이 아니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
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8:11-13) 예언했습
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우리 성도들은 이 생명양식을 공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제 일생 소원이 무엇
이냐고 묻는다면 성경 66권을 다 강해해 보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성경 66권을 은혜롭게 강해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더 큰 소원이 없습니다.

2. 그럼 예수님의 성령 잉태에 대한 구약의 예표는 없는가?

마1:20-21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데 동정녀란 처녀라는 뜻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 완전한 처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
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처녀에게서 무죄하게 탄생하였다는 교리는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너무나도 중요하
여 2000년 동안이나 논쟁을 해왔고 사단이 이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이단 학설을 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동정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잉태는 죄악이 유전되는 보통 생육법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는 예수님의 성령 잉태가 나옵니다. 마1:18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했고, 눅1:35에도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태만 빌려서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죄가 없으
신 분이셔야 하고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만이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있고 또 인간이셔야 만이 승리하시어 아담의
실패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무려 700년 전에 예언했습
니다. 사7:14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요셉에게서 이 성령 잉태를 예표하는 사건은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셉이 탄생할 때 신비한 방법
을 빌어 탄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놀랍습니다. 이것이 성령 잉태는 아니지만 그것을 예표하기 위하여 보통 방법이
아닌 방법이 나타납니다. 가령 이삭이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려지는 그 사건도 실제 죽지는 않지만 십자가 예수님의 사건을 예표
함과 같습니다. 그 신비한 방법이란 요셉은 합환채를 통해서 태어난 것 입니다.
부끄럽지만 구약에는 흔히 그러했듯 야곱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12 아들이 있었는데 11 아들은 모두
일반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지만 한 아들 요셉만은 독특한 출생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
아 남편을 혼자 독차지합니다. 그러나 형인 레아가 많은 아들을 낳기까지 한 아들조차 낳지를 못합니다.
창30:1-2을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
나님을 대신하겠느냐" 했습니다. 이처럼 불화가 일어날 만큼 안달해도 안되니까 자기 몸종 빌하에게 들어가게 해서 대신 아들을
낳게 합니다. 즉 가정 불화가 생기기까지 남편을 종에게 주기까지 아들을 낳으려고 노력하지만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아의 큰 아들 루우벤이 황무지에서 합환채를 발견하고 집에 가져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루우벤은 형 레아의
큰 아들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그것을 보고는 남편을 형에게 주고 그 합환채를 삽니다. 이 합환채는 신비한 열매요 최음제로 알
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이 신비한 합환채를 먹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요셉입니다. 그렇다고 보통 생육법을 피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합환채를 얻은 때가 언제입니까? 합환채는 추수기인 5월에 나옵니다. 이 때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때입니다. 그래서
시기적 배경마저도 합환채가 성령을 상징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환채는 인근이 없는 황무지 광야에서 납니다. 이처
럼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배경과 사역과 죽으심 등 얼마나 황무지와 같이 거칠고 고통스러웠습니까? 그러나 이 역경의 고난을
통과함으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런 고난 속에서 참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완악해서 쉽게 순종하지 않고 역경 속에서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부
귀와 영화와 평안한 환경에서는 기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이는 영의 합환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고, 성
령 충만 없이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라헬은 루우벤이 합환채를 가지고 왔을 때 라헬은 정신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 였느냐 그것을 얻기 위해 자
기 남편과 바꿀 만큼 그래서 합환채를 먹었더니 하나님께서 드디어 태를 열어 주시고 라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은 동정녀 마리아의 모형이기도 하고, 신약 교회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방법으로 탄생한 루우벤 시므온 레위 등 아이를 아무리 많이 낳는다고 장자 상속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율법적으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하늘의 영적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 행위가 아닌 예수 믿어 성령으로 탄생하기
까지는 결코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영적 장자권의 축복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합
환채를 부지런히 먹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격에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참 구주이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온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풍성히 나눠줄 꿈을 가집시다. 그
리고 성령으로 변화되는 특별한 나음을 통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상속받으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의 애굽 피난
본문:마2:13-15
초점:고난과 축복

요약
사단의 박해는 두 방향에서 나타난다. 먼저는 오실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 조상의 계보는 고난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셨고 이기게 하셨다. 다음은 오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롯의 살인극과 유대인들의 암살 모의 및 십자가 처형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 주님은 대속사역의 완성을 이루셨고 사단은 패배자가 되었다. 이 시간에도 사단의 시험은 존재하지만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훈련시켜 준다는 점을 잊지 말자.


강해
지난 시간에는 라헬과 레아를 통해서 신구약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 차이를 말씀 드렸습니
다. 오늘은 요셉의 애굽 피난을 통해서 예수 이름을 가진 성도들의 고난과 축복에 대해서 말씀드
리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애굽 피난과 관련된 사건이 많이 나옴을 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흉년으로
애굽으로 피난 갔고, 야곱의 가족 모두가 흉년 들어 애굽에 피난 갔으며,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예레미야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외경이나
중간기 교회사를 보면 시리아 왕의 압제에 못 이겨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 피난 갔습니다.

참고로 신약의 요셉이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애굽으로 피난 간 것은 피난하기 좋은 지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거주해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숨으면 찾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아기 예수님과 자기 아내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을 갔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물을 필요도 없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에 귀한 진리
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단은 계속하여 예수 이름을 가진 자들을 방해하고 핍박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단이 예수님만 이기면 모든 것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단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예수 이름만 있으면 그를 핍박하고자 한다는 사실입니
다. 물론 이 핍박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이 핍박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와 큰 일을 이루게 합니다.

그럼 사단의 박해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1. 오실 예수님의 길을 박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예수님께서 오시지 못해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
야 사단이 아담에게서 얻은 그 승리를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오
시는 길에 온갖 고난과 방해와 박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보다 못한 사단이 과연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막을 수 있을까요? 성공은 할 수 없
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약속
하셨고 또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반드시 지켜 다른 길을 내시지 않으시기에 메시야의 줄기만 끊어
놓으면 사단은 승리하게 됩니다. 이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내서라도
후손이 끊기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메시야 자손이나 모형과 관련하여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
건들은 사단이 오실 메시야에 대한 박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도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아시는 대로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다시 온 세상을
다 타락시켜 이 세상에서 믿음의 대를 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 노아의 가정을
보호하시고 방주를 짓게 하여 구원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그 줄기에서 아브라함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는데 사단이 아브라함에게도
얼마나 역사합니까? 자기 줄기가 이어짐에 대해서 온갖 의심하게 만들고 사라의 몸종 하갈로 이
스마엘을 낳게 만드는가 하면 사라도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뺏길 뻔한 위기를 맞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자 대에 와서 장자 에서가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게 만들고, 야곱도 상속자가 되
지 못하게 하려고 집안에서 쫓아내고 일생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야곱의 장자 루우벤
이 간음죄를 짓는 사건도 그렇고, 유다의 장자 엘의 죽음도 그렇고, 차자 오난의 악한 마음도 그
렇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의 계대가 끊어지도록 하는 사단의 집요
한 핍박인 것입니다.

그런데 살몬 때에 와서도 살몬의 가정에 어떤 이변이 발생합니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여리고
의 기생 여인 라합을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입니다. 물론 라합은 구원 받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었기에 문제는 없지만 이런 면에서 그 가문의 어떤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 때에도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삼아야 하는 무슨 사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족보가 끊기려고 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장에도 14대씩 끊어서 말씀하는데 끊긴 부분들을 보면 대단한 위기가 있었음을 봅니다. 다윗
의 시대에 얼마나 위기가 많았습니까? 하루도 빠짐 없이 다윗의 생명을 찾는 사울왕의 군대 앞
에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수한 사람이 바벨론에 죽고 포로로 끌려가고 그리고 거기
서 이름까지 바뀌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못하도록 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예수 이름을 가진 가문에는 고난이 많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형과 예표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가령 아담
은 오실 자의 표상인데 사단이 가만 두려고 하겠습니까? 또 성전도 오실 예수의 예표인데 어찌
성전이 파괴되지 않고 지금가지 있겠습니까?

2. 사단은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여 없애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그래서 본문에 보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래서 베들레렘이 아이들의 피로 얼룩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
에 예수 이름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예수 이름은 물론 예수 이름
의 흔적만 있어도 핍박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수십 년간 예수 영화에 나오는 예수 역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예수 이름의 흔적조차
도 없애기 위한 사단의 역사입니다.

애굽에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에게 고난은 없었습니까? 공생애 시에 얼마나 유대인들이 예수
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지만 그것은 사단 자기
가 죽을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사단의
권세를 법적으로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초대교회에 있었던 박해나 반대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있었던 종교적 타락이
나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있었던 온갖 기독교 핍박도 모두 사단이 예수 이름에 대항하는 핍박이었
습니다. 그리고 각종 이단이나 자유주의나 재림 예수에 대한 신앙의 미지근 역시 같은 맥락의 사
단의 시험들입니다.

더 나아가 각인의 심령에도 오늘도 쉬지 않고 사단은 미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딤후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세상에 적당히 살려고 하면 핍박도 시험도 없지만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있는 것은 사단이 방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름에 대한 사단의 공격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알아야 할 것은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단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
에 대한 사단의 공격을 허용하신 이유는 도리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강해지고 더
복을 받고 더 번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박해하자 얼마나 이스라엘이 번성하고 강해졌습니까? 즉 사
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으나 그것으로 구원의 대 사역을 이루심과 같이 아무리 성도를 박해해도
성도들은 그것을 통해서 더욱 온전케 되는 영 육간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
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겉으로는 무차별적인 고난 같으나 참새 한 마리라도 머리털 한 개라도 아버지의 뜻밖에서 되어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히 쓰일수록 사단의 시험은 크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도리어 감
사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예수 이름에 지금도 변함없이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성도들에게 축복만 안
겨다 주고 맙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더욱 주님을 사랑하시고 고난이 닥칠 때도 낙심하지 마시
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여 크신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마스 명언


D.J.D
당신의 말구유 저편에 있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유심히 바라본다면 크리스마스가 당신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루터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하라. 만일 당신이 이것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노래하겠는가?

피터 아베랄드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이유는 세상에 의 지혜를 가로쳐 자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엘리자베스 스투아트 펠프스

찬송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청결한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는 날마다 새롭게 탄생한다. 그를 아 는 인생은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가슴 속에 영 원한 크리스마스를 유지할 것이다.

노만 빈센트 필

크리스마스는 이 세상에서 만능의 부채를 흔든다.보라! 모든 것이더 부드 러워졌고, 더 아름다워졌다.

로이 스미스

자기의 마음 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나무밑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부스 클리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유한한 인간의 영역 안에 무한한 하나님을 오시게 한 것이다.

윌리암 바클레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증거이다.

W.J. 카메론

이제껏 크리스마스는 단 한번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 기념일 뿐.

애미 카마이클

십자가의 길은 항상 구유 가까이에 있다.

랄프 W. 쇼크만

역사의 중심점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있다.

마리 앨렌 체이스

크리스마스는 어느 날이 아니라 맞이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이다.





구약의 예언 예언 내용 신약에서 성취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의 자손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창 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의 자손
눅 3: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야곱의 자손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창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 지파에서 나심
눅 3: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위를 상속받음
눅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
마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탄생의 때
눅 2:1-2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의 탄생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헤롯왕의 유아 학살
마 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애굽으로 피난감
마 2:14-15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
눅 3:3-6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의 아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이에서 전도하심
마 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시 78:2-4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3)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바라 4)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비유로 가르치심
마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선지자로 오심
행 3:20-22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사 61:1-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심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에게 배척 당하심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승리의 입성
마 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친구에 의해 배반당함
눅 22:47-48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은 삼십에 팔리심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시 35:11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거짓증인들에게 고소됨
막 14: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심
막 15:4-5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능욕 당하심
마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시 35:19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까닥 없이 미움받음
요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대신 고난을 받으심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심
막 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손과 다리가 찔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시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조롱과 모욕당하심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심
마 27:34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시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심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시 22: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옷을 제비뽑음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뼈가 꺾이지 않음
요 19:32-33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옆구리가 찔림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
마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49: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셀라}
부활하심
막 16:6-7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고전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승천하심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이영제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제공 / Copyrightⓒ 1999 K.C.M All webmaster



성탄트리는 어떤 나무로 만들어요?
박조현 2004-12-09 13:03:00, 조회수 : 94

궁금해요.








질문 - 성탄트리는 무슨 나무로 하나요?

김훈
"전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어릴 적 시골교회에서는 소나무도 많이 베어 사용했더랬지만요.

http://user.chollian.net/~k95092/doc/si-jeonnamu.html
http://www.scienceall.com/sa0srch/06/03e/content/searchView_49680.jsp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 처럼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급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있답니다. 흔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데는 전설이 있어요.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은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입니다." 라고 하네요~^^ 2004-12-09

김영희
구상나무--를 사용합니다.
이 나무는 자라있는 그 상태가 크리스마스 트리형식이지요.
그래서 많이 애용되고 있나봅니다.
멋진 트리를 만들고 찬양하며 주님의 탄생을 기뻐해봅시다.

<구상나무>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의 상록 교목.

학명 Abies koreana
분류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
분포지역 한국(한라산·무등산·덕유산·지리산)
서식장소 산지의 서늘한 숲속
크기 높이 약 18m

산지의 서늘한 숲속에서 자란다. 높이 약 18m이다. 나무껍질은 잿빛을 띤 흰색이며 노목(老木)이 되면 껍질이 거칠어진다. 어린 가지는 노란색이나 나중에 갈색이 된다. 겨울눈은 둥근 달걀 모양이고 수지가 있다. 잎은 줄기나 가지에 바퀴 모양으로 돌려나며 줄 모양 바소꼴이다. 길이 9∼14mm, 나비 2.1∼2.4mm이며 겉면은 짙은 녹색, 뒷면은 흰색이다.
꽃은 6월에 피며 암수한그루이다. 암꽃이삭은 가지 끝에 달리는데, 짙은 자줏빛이며 자라서 타원형의 솔방울이 된다. 수꽃이삭은 타원형으로 길이 1cm 정도이다. 열매는 구과로 10월에 익는다. 원통형이고 초록빛이나 자줏빛을 띤 갈색이며 길이 4∼6cm, 지름 2∼3cm이다. 종자는 달걀 모양으로 길이 6mm 정도이며 날개가 있다.
솔방울의 빛깔이 푸른 것을 푸른구상(for. chlorocarpa), 검은 것을 검은구상(for. nigrocarpa), 붉은 것을 붉은구상(for. rubrocarpa) 등으로 구분한다.
재목은 건축재·기구재·토목재·펄프재로 쓰고, 정원수나 크리스마스트리로도 많이 이용한다. 한국 특산종으로 제주도 한라산의 중턱 이상에 숲을 이루고 있고 전라남도 무등산, 전라북도 덕유산, 경상남도 지리산 등지에도 분포한다. 2004-12-09
14:58:11


우영식
인터넷에서 퍼온글~

흔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데는 전설이 있다.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은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 고
설교 한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전 로마인의 설날이었던 1월 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하였으며,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 튜튼족이 갈리아, 브리튼과 중앙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게르만족과 크리스마스 축제 의식들이 위의 관습들에 융합되게 되었다.
이에 음식과 모임, 크리스마스 이브(Christmas Eve)날 벽난로에 때는 장작, 크리스마스 케이크(Christmas cake), 전나무 장식, Christmas 선물과
축하 인사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되었다. 그리고, 중세 이래로 생존의 상징인 상록수가 크리스마스의 최대의 장식물이 되었다. '영원한 생
명'의 상징으로 상록수나 이를 이용한 화환, 화관을 쓴 것은 이집트인, 중국인 그리고 히브리인의 고대 관습에서 전한다.
또한, 유럽인들도 흔히 나무를 숭배해 나무 숭배는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스칸디나비아인들의 관습 속에 남았었다. 그래서, 이들은
악마에게 겁을 줘서 쫓아내기 위해 새해가 되면 상록수로 집과 헛간을 꾸
몄다고 한다. 나무를 이용한 척사의 풍습은 우리가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
과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논리적이다. 2004-12-09
16: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