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의 프랑스인 천년왕국주의자들, French Prophets

2007. 11. 15. 02:29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영국 내의 프랑스인 천년왕국주의자들, French Prophets


체험을 강조하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뿌리는 매우 깊다. 고대로 거슬러 가면 서방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도 잠시 매료되었던 바 있는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프리지아의 몬타니즘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와서는 카타리파가 등장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프랑스 남부 쪽에 기반을 두었던 개신교의 일파인 위그노에서 유래한 영국 내의 일명 'French Prophets'라는 그룹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직접적 예언 및 신탁, 방언, 춤 등의 체험과 감정을 중요시하고 천년왕국의 현재적 도래를 강조한 급진적 종말론자들로서, 그러한 신앙관과 특히 신비적인 신앙형태가 특징이었다. 기본적으로, 박해를 받은 원인 중 하나가 그들 자신의 절제되지 못한 신앙형태에 기인한 바 크지만 성령을 강조하는 특색으로 인해 종교적 신앙을 역동적 신앙으로 재구성하는데 기여한 바도 있다. 이러한 형태의 신앙은 19세기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자였던 다비(John Nelson Darby)에게서 다시 나타났고, 그 영향을 받은 바 있는 미국 아주사 거리의 오순절 운동을 통해 재현되었으며, 오순절운동은 이후 카리스마 운동(은사주의 운동)으로 분화하였다.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이나 펜사콜라의 사역(Pensacola revival) 등이 그 후예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1598년 프랑스의 왕 앙리 4세는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통해 프랑스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주고 시민적 권리를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기하자 쟝 캬벌리어(Jean Cavalier)와 롤랑 라폴트( Roland Laporte)가 중심이 되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들을 까미새드(Camisards)라고 한다. 프랑스는 1550년 경에 시작되었던 칼빈주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앙과 예배는 1600년 경의 영국 퓨리탄들과 유사했다. 위그노는 프랑스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큰 소리로 성경을 읽고 들었다. 그들은 시편으로 찬양을 하였고 소리내어 기도를 하였으며 목사들은 성서를 기초로 설교하였다. 어린이들은 10살이 되면 부모의 허락 하에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이는 유아세례를 의미한다), 성경을 메모하여 숙지했다. 위그노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다. 이러한 모습은 카톨릭에 의한 박해 요인이 되었고 오랫동안 카톨릭과 맞서서 싸웠다. 위그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곧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685년에 그들에게 무서운 박해가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노예선의 밑창에서 노를 저어야 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려 했으며 사역자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일부 평신도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 박해로 인해 약 50만명의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이 나라를 떠났고 수천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어떤 이들은 카톨릭으로 복귀하였다. 임박한 천년왕국을 주장하였고, 신유의 기적, 직통계시와 예언 그리고 방언을 공공연히 행하던 이들은 박해기에 일부가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카톨릭 사제들을 살해하고 성당들을 불태웠다는 이유로 프랑스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추방되거나 영국으로 도피했다.

이들은 1687년 내내 수천의 천사들이 열을 맞추어 행진하고 드럼을 치면서 하늘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와 100여명의 천사들이 합창하는 것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요엘 2:28에서 약속했던 일 즉 마지막 날에 어린이가 예언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실현되는 징조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추방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어린이에게 기름을 부으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루이 14세는 1701년부터 1710년까지 그들이 숨어있던 세반느(Cevennes)라는 산에 군대를 보내어 진영을 초토화시켰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피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French prophets(프랑스에서 온 예언자들)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French Prophets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래의 글을 통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편, 이들은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까미새드(Camisards)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그들의 모임에서 예언을 할 때 프랑스 농민들이 입는 검은 색의 까미이스(camise)라는 옷을 입었고 주로 밤을 틈타 공격을 했기 때문이고, 세반느(Cevennes)라고 불린 이유는 Cevennes 산에 은거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샤프츠베리의 어얼(Earl of Shaftesbury)은 그의 책 'Charactics'에서 이들이 170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 학살 때에 피해왔다고 기록하였다. 프랑스를 탈출한 사람 중 일부는 미국으로 숨어들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첫 번 고용주였던 필라델피아의 카이머(Samuel Keimer)가 French Prophets에 속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1688년 2월 3일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더핑(Dauphine)에서 당시 16세였던 이사보우(Isabeau Vincent)라는 소녀가 잠결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사보우는 원래 카톨릭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어머니가 위그노가 되어 어머니를 따랐다. 소녀는 한참을 울고는 노래와 함께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위그노였던 삼촌과 함께 한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십계명과 시편을 리듬에 맞추어 노래하고는 매우 빠른 말로 설교와 예언을 하고 온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잠이 깨었을 때 이 소녀는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녀는 "말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성령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화롭게 하라고 주장했다. 소녀의 예언 중에는 요엘서가 말한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형태는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후 등장한 오순절 운동의 시작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일이 있은 지 6개월 안에 많은 소년 소녀들이 성령을 받은 예언자로서 등장했다. 더핑에서 이 운동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그 해가 다 가기 전 소녀의 집 부근에 살던 60여명의 어린이가 이것을 경험했다. 성인들 중 일부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어떤 농부의 아내는 팔 다리를 흔들며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이 지구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며 신실한 신자는 천년 왕국에서 예수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어린이들의 집회는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689년에 카톨릭이 이들에 대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수도원이나 병원 등에 가두었고 많은 이들을 처형했다. 1701년에 어린 예언자들의 수는 100여명이 넘었다. 이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간주되었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신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고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고 말하며 "지금이 종말이다. 회개하라!"고 설교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해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가 말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들 중 일부는 오순절 사건에서처럼 방언을 하기도 했다.

1702년에는 조금 나이가 든 예언자들이 박해에 대항하여 이들 무리를 이끌었다.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프랑스인 프로테스탄트들이 밤낮으로 이들의 예언이 지시하는 바를 따랐다. 그들은 천사들이 자기들을 보호해준다고 주장하면서 황실에서 파병한 2만명의 군대와 맞섰다.

이 와중에 일부의 예언자들이 영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French Prophets'라고 부른다. 이들은 1706년 런던의 매리언(Elie Marion)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나 프랑스에서처럼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일부는 영국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활동과 저술들은 후일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와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어머니라고 주장하며 18-19세기 초반 퀘이커 운동에서 이탈한 쉐이커 운동의 창시자 앤 리(Ann Lee)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공식적인 면에서 가장 먼저 오순절 체험을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는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 방언을 필사하는 체험을 했던 것처럼, 존 레이시(John Lacy, 1737, The General Delusion of Christians, A Cry from the Desert의 저자)라는 사람은 방언을 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로 또 어떤 경우에는 헬라어로 방언을 하였다.

'French Prophets'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공식적 규정을 만들지 않았고 정해진 신조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직접적인 인도 그리고 체험을 주장하며 어린이를 통한 직통계시와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신비적 현상이 두드러진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그들 선조들의 메시지나 체험들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며 회개와 내적 회심을 설교했다.

웨슬리는 당시 브리스톨 소사이어티가 이들 French Prophets들에 의해 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웨슬리는 그의 저널에서 1739년 2월 28일 주일에 한 예언하는 소녀를 방문하여 만난 것을 기록해 놓았다. 웨슬리는, 왜 자기를 찾아왔느냐는 소녀의 물음에 "너의 영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러 왔다"고 말하였는데 소녀는 의자에 기대어 숨을 깊게 내쉰 후, 약 10여분간 머리와 손, 신체의 모든 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움직이면서 분명하고도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당신의 일을 하십시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누가 아비라면 그 자식이 빵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있느냐? 나의 자녀야! 내게 빵을 구하라. 그러면 내가 빵을 줄 것이다. 전갈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여기서 판단하려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웨슬리는 같은 글에서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소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서를 주로 인용하며 예언을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며, 복음이 온 땅에 전해질 것이라는 많은 말을 하였다. 그런 다음 소녀는 우리에게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말하고 하였다."

'French Prophets' 들은 얀세니즘파 사람들(Jansenists, 얀세니즘은 17세기 로만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파였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예정설을 채택했으며,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과 매우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고 또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얀세니즘이 발흥했던 동시대에 등장했으며 박해를 받았다. 'French Prophets'의 역사적 실체는 사라졌지만 체험적 신앙이란 점에서 웨슬리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서 분명하게 그 원형이 재현되었다.

'French Prophets'의 급진적 사상들과 절제되지 못한 신앙형태는 다분히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해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사람들은 급진적 종말론에 심취하게 되고, 비이성적인 체험중심의 신앙으로 전락하기 쉽고,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신앙의 형태가 지나치게 분방한 모습이 되기도 하고,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강조하여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그로 인해 배타적인 자기 우월에 빠지기도 한다.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현상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역사적 상황에 의해 그 본질과 모습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역사적 상황에 복음의 메시지를 적용함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선도하고 극복하며, 현재의 삶과 사유와 일을 신앙의 정련되고 규범있고 정돈된 모습을 가지고 능력 있게 변화시켜가야 한다. 물론 이런 능력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