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2007. 11. 8. 22:50목양자료/1.기독교자료

러시아 정교회

 

 고대 러시아의 종교

 


러시아는 988년에 비잔틴으로부터 기독교, 즉 동방정교(비잔틴정교)를 수용해 국교로 정한 이후, 타타르의 지배와 볼세비키혁명 등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도 1,000년이상의 오랜 기독교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비잔틴정교를 수용하기 전에 동슬라브에 속하였던 러시아는 다른 슬라브족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이교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9세기이전 슬라브인들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교신앙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자연의 현상을 신격화한 다신교였다고 할 수 있다.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공은 궁전 뜰 밖의 언덕 위에 은빛에 금빛수염을 한 번개의 신 '페룬'의 목조상을 비롯하여 태양신 '다쥐보그'와 '호르스', 바람의 신 '스트리보그' 여성노동의 수호신, '모코쉬', 일곱 개의 머리를 한 '시마글'의 상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일반 민중들은 풍요, 가축, 다산의 신으로 알려진 '벨레스'를 숭배하였다. 기독교 개종이전의 슬라브인들의 이교 신앙적 요소는 기독교로 개종 이후에도 기독교의 요소와 혼용되어 민중들의 일상생활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러시아 정교의 도입  

 


980년 블라디미르공은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키예프대공이라는 전제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블라디미르공은 초기에는 이교를 장려하여 민족의 통일을 도모하였지만 이후 러시아 루시를 국가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보다 보편적인 종교를 찾게 되었는데, 당시 유행하고 있던 동방정교, 로마 카톨릭교, 이슬람교, 유태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당시 아랍인들은 이슬람교를, 러시아 동쪽에 있는 하자르인들은 유대교를, 그리스인들은 동방정교를, 프랑크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로마카톨릭을 믿고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이 많은 종교가운데 동방정교를 수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키예프인들의 현세지향적이며 신인동격체인 민간신앙의 전통이 그리스정교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처음부터 전통적인 민간 신앙의 기반에서 받아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정교회는 국민들의 큰 저항이 없이 슬라브인들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정교가 처음부터 키예프 국가의 필요와 기존의 민간신앙 전통 위에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러시아정교는 현세 지향적인 민족신앙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민들 역시 민간신앙의 연장선상에서 정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러시아정교는 나름대로 농민들의 지식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도시의 엘리트 중심의 정교가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러시아정교는 농민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경작의 무게나 강수량의 적절한 배분, 유용한 작물의 성장, 가축의 방목 등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과거 이러한 문제에 해답을 주던 민간 신앙들이 정교 의례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계절주기에 따르는 농민의 민간 축제와 정교 의례가 뒤섞이게 되었다.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정교는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라 민간신앙과 부합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새로운 것(기독교)에 옛 것(민간신앙적 전통)을 대치하는 기독교화가 아니라 옛 것에 새로운 것이 선택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교적 종교 의례가 변형되어 정교회의 대표적인 축제일로 자리잡은 것은 마슬레니짜 축제와 엘리야의 날, 성 삼위일체의 날, 그리고 세례 요한의 날 등이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이교족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활절 전 7주 동안 벌어지는 마슬레니짜 축제는 '겨울 송별축제'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도 성행하고 있다. 6월 4일, 성 삼위일체의 날에 벌어지는 자작나무 축제일은 본래 어머니 대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은 귀신들, 즉 불의의 죽음을 당한 영혼을 위해 녹색의 성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소비에트 시절의 러시아 정교

 


1917년까지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의 국교였으며 다른 종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이콘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성상화는 정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집집마다 걸려 있었고 여행을 갈 때나 심지어 임종을 맞이할 때에도 가슴에 품고 있을 정도였다. 종교적인 국가로서 러시아는 어디를 가던지 교회와 수도원 성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볼쉐비키 혁명직후 러시아 정교회는 레닌의 '반교회 포고령'에 대항했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실패로 끝났다. 공산당 정부는 정교회 사제들을 체포하였으며, 교회 건물과 수도원 등 교회재산을 강제로 압수하였으며, 지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종교활동을 허용하였다. 이후 70여년동안 무신론을 표방한 볼세비키정권은 정교회를 비릇한 모든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정교회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어 1930년에 3만여 개에 달하던 개방된 교회의 수가 1940년 스탈린의 탄압정책후 1천 개이하로 줄어들었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 시대를 거쳐 1980년대 초에는 명목상의 교회 수는 6천 개이상이었지만 실제 예배를 보는 교회는 100개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정부 재산으로 몰수되어 창고, 극장, 박물관 등으로 전용되면서 제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활동중인 성직자의 수도 미약했다. 1930년까지만 해도 6만여명의 성직자가 활동했는데 1940년에는 3천 여명으로 줄었다. 수천 명의 성직자가 반소비에트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흐루시초프 시대, 특히 1969년대초에는 많은 종교인들이 구용소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소련당국은 종교인구가 총인구의 10%정도로 그 대부분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신도들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985년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을 주창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인정되었다. 1988년 4월에는 러시아선교 1천년제를 앞두고 피멘총주교와 고르바초프 서기장 사이의 회견이 있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게오르기 총주교와 스탈린 사이에 있은 회견이후 45년만의 일이었다. 1988년 6월에는 러시아정교회 지방회의가 개최되어 교구사제의 임명에 관한 교회측의 주도권을 확인하였다. 1988년 6월 5일부터 12일까지 러시아선교 1천년제가 소련의 국가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정교회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변화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정교회의 재건을 알리는 가장 상징적인 사업은 크렘린궁 맞은편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교회'의 건설이다. 2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건축비만 5억달러가 소요되어 1997년 완공된 이 교회는 세계 최대의 정교회 교회이다. 소연방의 붕괴이후 러시아정교회는 러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통합을 이루면서 정교회의 위상을 재고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의 특징

 


러시아 정교의 특징은 교권이 세속적 권력, 즉 왕권, 또는 국가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는 키예프 루시가 정교를 받아들일 때부터 국가의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에서 출발했으며 이후 모스크바 공국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다가 1721년 표트르 대제가 총대주교제를 신성종무원으로 대치하면서 완전히 국가에 종속된 기구로 전락해 버렸다.

원래 동방정교에서의 교회-국가관계는 통치자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사제의 존엄성으로서의 황제의 근심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제국의 복지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는 비잔틴의 이러한 조화(symphonia)에 대해 도덕적 권고와 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지웠다.

러시아정교가 세속적인 권력에 종교적 합법성을 부여해 준 것은 왕권의 강화와 국가권력의 확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모스크바 공국 시기였다. 타타르 세력을 물리치고 노브고로드를 해방시키면서 모스크바의 대공이 러시아의 유일한 지배자로 된 후 러시아는 국가 아이덴터티 확립이라는 문제제 직면하였는 데, 여기에서 정교회는 '제 3로마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러시아인들에게는 정신적 통합을, 그리고 왕권에게는 합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황녀인 소피야와의 결혼하고 비잔틴의 쌍두 독수리 문장의 도입, 그리고 자주적 지배라는 의미의 짜르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짜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할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성 힙볼리투스의 다니엘서의 재해석과 필로테우스가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왕권의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즉 모스크바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의 짜르는 비잔틴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이고 따라서 동방정교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수호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 3 로마론'은 결과적으로 군주에게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통합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짜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100년 후인 1589년에 독자적인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는 자주권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전기독교 세계의 중심이며 기도를 통해 전우주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니즘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러시아 민족주의 전통의 기반을 마련해 주게 된다.

러시아정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종교체계와 사회체계가 지나치게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는 도입부터 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이후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조화라는 논리를 통해 국가권력(자)의 모든 것에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해 주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농노제나 짜르체제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정교의 교리

 


러시아 정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보편주의, 상호의존성, 겸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평등의식과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단일한 공동체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러시아인들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여기려는 러시아인의 성향은 자기희생을 통한 집단의 유지와 각각 개인의 독특한 가치의 조화에 대한 동방기독교적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동양의 공동체와 러시아의 공동체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구분선이다.
러시아 정교는 통일과 조화, 상호의존성 등이 기반이 된 종교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상화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 의미가 표출되고 전달되었으며 사회적 영역과 충돌하면서 여러 모습의 문화형태로 재구성되었다. 현세지향적이고 민족적인 문화와 국가종속적인 문화, 평등지향적인 농민공동체, 길고 애국주의 등은 바로 상징이 재구성된 '사회적 실재'였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러시아 정교문화는 현세지향적이었으며 국가에 종속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집단주의적 전통은 자연히 집단원칙에서 개인을 인식하며 사회이익에 개인의 이익을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국가와 같은 사회적인 영역이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개인의 다양성이나 개성, 자율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민이라는 집단 앞에 강제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화의 억압,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회적 이익의 상징화 등이 러시아에서 전체주의적 체제를 가져 왔으며 이것은 러시아 정교의 기본 교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러시아 성상화

 


신학적인 의미 없이 단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던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동방정교의 성상화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상상화는 단순히 종교에 봉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통합적인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즉 러시아의 성상화들은 기독교성(Christianity), 즉 인간으로서의 신의 구현,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못 박힌 고뇌, 죽음과 지옥으로 떨어짐, 예수의 부활, 죄많은 인간에 대한 대속(구원) 설교를 통한 12사도의 전도, 성자들의 생과 투쟁, 순교, 예수의 생애,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죄씻음과 순례 등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상화는 12세기부터 비롯되는데 키예프의 동굴 수도원에 있던 성 알리피(St. Alipy)가 러시아 성상화의 원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들어와 성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성상화가 러시아적 혼의 상징이며 러시아인들의 일상 생활과 민간 문화의 통합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러시아의 성상화 가운데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제는 헌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성모 마리아였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성상화는 러시아의 모든 성상화 가운데서 가장 숭배되는 그림이며, 러시아의 어머니라는 이미지, 즉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민족적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성모 성상화는 중세 러시아에는 신앙과 전투, 예술과 군대 사이의 밀접한 협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보골류프스키(Andrew Bogoliubsky)는 성모 성상화를 도시의 방어를 고취시키기 위해 1395년에 모스크바에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카잔의 성모'라는 이름의 성상화는 이반 뇌제가 카잔에서 타타르를 물리친 것이 성상화의 힘이었다고 본다.

성상화가 정교회에서 이처럼 중요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동방정교에서는 사제의 설교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교회의 많은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그들이 이전에 들었던 것만을 상상하거나 유추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상화는 농민들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성상화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정교의 가르침을 느끼고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상화는 러시아 문화의 상징으로 모든 집에 걸려있게 되었으며 19세기까지 러시아 농민들은 오두막집의 성상화를 걸어두는 장소- 식탁 위의 '성스러운' 구석-를 성하고 거룩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은 집안에 들어오면 우선 성상화를 찾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며 세 번 성호를 긋는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주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고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