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행정

2007. 11. 8. 17:42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재무 행정



재무란 돈에 관한 일입니다. 어디건 무슨 일이건 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재정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돈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우리에게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돈을 악용하는데서 비롯된 관념이지 돈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재정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재무 행정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1) 교회의 재정은 헌금입니다.
교회는 어떤 기업과 같이 사업을 벌여서 거기서 나는 이익금으로 필요를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헌금을 통하여 공급됩니다.
헌금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적 헌신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귀한 재물을 정성껏 관리 사용해야 합니다.

(2) 성도에게 헌금을 가르쳐 교회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흔히 복음을 전할 때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 교회는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헌금을 강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전도를 합니다. 이 말이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옳은 말이나, 성도에게 있어서의 헌금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헌금의 필요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때의 어려움은 헌금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헌금 기준은 얼마여야 할까요?
성경에 얼마를 하여야 한다는 기준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 등의 경우를 볼 때 "성도의 전 재산은 주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가르치는 분들도 "구원받은 사람의 전체 재산은 주님 것이고, 우리는 그저 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면서도 성도의 헌신을 막연하고 또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를 드려야 좋은지를 확정하지 못하는 성도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언제든지 주님 것이니까"하면서도 실제 사용에 있어서는 자신의 소유이고, 관념에 있어서만은 "나는 주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야" 라는 생각 가운데 오히려 헌신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 드리는 그날까지는 진정한 주님의 것은 아닙니다.
저는 헌신의 기준에 대한 특별한 분별이 없는 한, 확고한 분별이 있을 때까지는 십일조를 기준으로 해서 가르쳐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십일조는 성도의 헌신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모든 성도가 "내 재산은 다 주님 것입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십일조라도 성실히 하는 성도가 되도록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많은 성도가 십일조에 못 미치는 헌신의 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적지 않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물론 그 이상으로 드리는 성도도 있을 것이고, 그런 분들은 주님 안에서 잘 하시는 것이며, 주님의 상급이 따를 것입니다.
만일 온 성도가 십일조를 드린다면 교회의 재정은 핍절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이 말씀을 해석하면 성도의 의는 율법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는 더 낫다는 말씀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다면 신약교회 성도의 헌신이 이에 못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헌신의 기준은 십일조가 하한선이 되어야 하며 그 이상은 믿음을 따라 드리는 것이 좋다고 분별합니다.

(3) 재정의 사용

① 일꾼을 위하여
민수기 18장 8~24절의 말씀들을 통해 볼 때 구약의 레위인들은 성막에서 얻어지는 성물과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십일조를 통하여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따로 농사를 짓는다든지 장사를 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성막에서 일을 하면서 성막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배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따로 수입을 올릴 만한 기업(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3장 14절,33절,14장 3절 말씀에서 보듯이 가나안 분배시 여호수아는 레위 족속에게는 땅을 배정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성막을 통하여 제물이나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십일조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지만, 신약 또한 같은 원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14절에서 일꾼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일꾼들이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오히려 권리라고까지 말하면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일꾼과 관련하여 구약을 인용하셨음으로 구약 말씀을 신약 일꾼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꾼이란 복음을 위하여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들, 아론을 도와 모든 레위인들이 성막을 섬겼듯이 복음에 따르는 모든 일들에 종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때문에 이런 이들은 생활을 위하여 따로 업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말씀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적 공급을 받으면 성직자를 연상하여 부정적 견해를 갖는데 반해 성경의 가르침은 일꾼들이 주의 일에 종사함으로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일할 수 없으므로 이들의 생활을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적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일부 부작용이 따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분명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여 선의의 일꾼들이 어려움을 당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울이 보인 본은 많은 일꾼들에게 갈등을 느끼게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바울의 본을 일꾼을 공궤하지 않는 이유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소문을 듣기도 하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분별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권면이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받으면 주님이 상급으로 갚으심을 받는 축복이지, 성경의 기본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꾼은 자비량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통하여 공급받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혼인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 천주교의 신부와 같이 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분으로 혼인하여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막10:6-8, 엡5:31).
그렇다고 자비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받으면 좋다는 것이지 모든 일꾼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일꾼은 주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고전4:2)입니다.
수입이 얼마여야 한다고 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용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이요, 당신의 일꾼을 위하여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수입을 올려 달라고 데모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열심히 일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하여 엘리야를 먹이셨다고 해서 모든 일꾼들을 다 그런 방법으로 공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특별한 경우를 일반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꾼에 대한 공급은 일반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공급하시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라고 분별해야 합니다.
따라서 각 교회는 일꾼에 대한 고려를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 일꾼의 수입은 얼마가 되어야 할까요?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의 중간 생활을 할 정도의 수입이 되어야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궁핍하면 일의 수행에 많은 지장을 줄 뿐아니라 일꾼의 마음을 갈리게 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반면 너무 부유해도 덕스럽지 못하다는 분별에서 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중에 레위 족의 수입은 우리에게 참고가 됩니다. 그것은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민18:21,24).
레위인들은 십일조로 살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12지파요 레위족을 빼면 11지파입니다. 이 11지파가 레위인의 생활을 위하여 11조를 드렸습니다. 11조의 의미는 아시는 대로 소득의 10분의 1을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레위족은 민족 전체의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생활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똑 같다 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분별됩니다.
문제는 신약에서 일꾼이 십일조로 살아야 한다는 명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신약의 일꾼들은 공궤 받는 일에 별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율법에 익숙한 자들로 당시 일꾼에 대한 공궤는 일반적이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같이 사셨지만 가룟 유다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의 필요를 채우는 분들이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사도행전 4장 34~37절은 왜 기록되었을까요?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을 왜 쓰셨을까요? 이것은 그때의 성도가 일꾼에 대한 공궤를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상의 말씀은 바울 이외의 일꾼들이 이미 공급을 통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의 사도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18장 3절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고린도전서 9장 6절의 바울과 바나바 등 극히 일부 외에는 생업을 가지고 일한 경우를 찾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그들은 업을 버리고 주를 좇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 부분이 재무 행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리에게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능한대로 일하는 형제님들이 전심사역할 것을 권합니다. 세상도 점점 전문화 시대로 가고 있는데 교회의 일꾼들이 생활비를 벌어가며 주님을 섬겨야 한다면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직장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직장을 다니고 남는 시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사역자에 대한 교회적 지출은 교회 재정의 40-50%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②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19:21)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15:26)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9:9)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딤전5:3)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③ 기타 교회의 필요한 경상비로 사용한다.
선교사라든지 기타 일꾼들도 다 일꾼의 지출에 해당하므로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출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선한 청지기와 같이 잘 관리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흔히 보면 내 것과 공금에 대한 애착이 다릅니다. 그래서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경우라면 만원도 아까워 신중히 하지만 그것이 공금일 경우에는 2만원, 3만원도 별로 대단치 않게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회에서 유흥업이 잘되는 이유가 접대비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그렇게 사용되서는 안됩니다.

④ 수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때때로 주님이 채워 주신다는 믿음 때문에 재정 운영을 규모 없는데까지 나아가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출을 무한정 조달해 주시는 분일까요? 아니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규모 없이 지출을 하고서는 주님이 채워 주실 것을 기대 합니다. 더욱이 개인이 아니라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인데 주님이 알아서 채워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지 욕심을 채워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즉 주님 기준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 우리 기준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욕심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현재의 형편은 주님의 최적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신 형편에 감사하고 거기에 맞도록 지혜롭게 재정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지상(紙上)에는 '무역 적자다, 감원이다'하는 기사로 난리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몇 달전 신문을 보면. "수치상으로 이상이 없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기업들의 건의에도 이상과 같이 말한 것이 행정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요즘 경제 발전으로 우리가 잘산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상품의 질에 있어서 선진국에 밀리고, 가격에 있어서는 후진국에 밀려 상품의 수출에 많은 어려움을 격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무분별한 과소비로 수입은 오히려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을 보여 무역수지는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 무역 수지 적자는 100억불을 넘어섰고, 연말까지는 또 얼마나 더 늘어날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0억불은 우리 돈으로 1$=800원 환산하여 8조라는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아이와 카세트, 소니 텔레비전 및 비디오, 캐논 카메라, 나쇼날 에어컨, 필립스 전자 제품, 나이키 운동화, 아디다스 체육복, 아이들이 좋아하는 패스트 푸드, 입생로랑 등 상표사용, 훼미리 마트라는 편이점, 필요 없는 전등을 켜는 것, 수돗물을 흘려 보내는 것, 먹다 버리는 음식물 등이 우리의 아까운 재산을 마구 해외에 내다 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또한 외국 회사가 국내에서 벌이는 다단계 유통업의 성장도 년2-3백%의 성장을 한다고 합니다.
여행 수지 적자도 96년 25억불에 이를 전망이고, 여행비는 80억불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고 보면 어마어마한 경비가 외국 길바닥에 깔리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여행은 어쩔 수 없겠으나 순수한 관광이 목적이라면 상당한 자제와 여행 시에도 경비의 절약이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부정으로 임기 몇 년 동안에 4천억, 5천억 하면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은 불과 몇 개월만에 8조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외국에 탕진해 버렸습니다. 무역수지의 적자는 주요 몇 나라에 대하여서, 특히 일본 상품에 대하여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8조라는 돈의 가치를 알기 위해 다음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라면을 좋아하는데, 라면 제조 회사인 농심 회사를 예를 들어보면 주식회사 농심은 자본금이 150억원이고, 종업원수 5,747명입니다. 한 종업원이 자기를 포함하여 4식구라면 5,747명 × 4 = 22,988명이 이 회사를 통하여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8조라는 돈은 이런 회사를 533 개나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것은 3,063,151명의 일자리가 생겨나게 됩니다(5,747명×533개).
또한 이분들이 4인 한 가정이라 예를 들면 이 것은 3,063,151명 × 4인 =12,252,604명의 생활비로 서울보다도 더 큰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회사의 일년 이익금은 약 50억원인데 533개의 회사가 새워졌다면 2조 6천 6백 5십억원이라는 회사 이익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회사들의 제품의 유통과 관계된 소득은 접더라도 그와 관련되는 효과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외국 상품을 씀으로 인해서 우리의 일자리가 그 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회사는 우리가 안 쓰는 상품을 계속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가 개선되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진다면 공장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으며, 문닫은 회사에서 일할 수 없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어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팔아 주는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서 청소나 하며(?) 살아가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정부는 뒤늦게 회복을 위하여 안감 힘을 쓰지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행정을 잘못하면 얼마나 큰 피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재정을 지속적인 적자로 운영하게 될 때 겪게 될 어려움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