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초대교회부흥약사

2007. 9. 28. 15:44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2장 한국교회의 성장 배경


2-1-1. 구원의 여명 - 준비된 그릇 한국

국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적적인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사의 사역이 한국 땅에서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1872년 중국의 선교사로 파송된 스코트랜드 장로교 출신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72∼1915)가 그 이듬해 한·중 국경지역인 고려문(高麗門, Corean Gate)을 방문하였다. 당시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있는 작은 마을로 청국과 조선국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다.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청년 4명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적적인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곧 복음을 받아 들여 로스의 성경번역 작업을 돕게 되었으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였다.


2-1-2. 역사적 부르심과 성경번역

한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적 부름은 존 로스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1872년 8월 말에 중국을 선교하기 위해 지푸에 도착한 존 로스는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로 갔다. 그는 1년간 어학 연수를 받으면서 중국어와 만주어, 그리고 사서삼경(四書三經) 공부에 진력한 결과 다음 해인 1873년 5월에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로스는 1874년 10월 9일 영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고려문 여행을 하였다. 로스는 한국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서를 팔며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한국 상인들은 복음의 진리보다는 영국산 면세품인 '양복'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망하여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한국의 상인이 한 사람 찾아왔고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로스는 그에게 한문 신약성서와 《훈아진언》(訓兒眞言 Peep of Day)를 건네주고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로스에게 신약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한국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한국개신교의 최초의 수세자들이 된다. 그 상인 바로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로스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은 1876년 3월의 강화도 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 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고 4월말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로스 선교사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의주의 상인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는 이미 한국어 성경번역을 계획하고 있었고, 곧 봉천으로 돌아와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인 1877년에는 한국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Corean Primer》를 상해에서 발간할 수 있었다. 이 때로부터 로스는 한글성서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이응찬과 한두 명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북쪽에서 로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신자들의 성경번역과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에 일본에서는 이수정을 통한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준비되고 있었다.

이수정은 온건개화파 양반학자로 임오군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뿐 아니라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친구 안종수로부터 들은 바 있는 기독교인 농학자 츠다센(律田仙)을 만나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이수정은 동경에 도착한 후 곧 츠다센을 방문하였고 그로부터 성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받았다. 이후 이수정은 츠다센의 도움을 받아 성서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몇 달이 지난 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는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야스가와 목사 입회하에 노월정교회에서 미국선교사 녹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은 성서를 동포들에게 읽히겠다는 생각으로 성서번역을 시작하였다. 이수정의 성서 번역은 두 대상을 놓고 시작하였다. 우선 한국의 식자(識者) 양반층을 대상으로 하여 한문성서에 한국식 토(吐)를 달아 펴낸 현토(縣吐)성서인 것이다. 현토성서는 《新約聖書馬太傳》, 《新約聖書馬可傳》, 《新約聖書路加傳》, 《新約聖書約翰傳》《新約聖書使徒行傳》등 5권을 펴냈다. 이어 일반 민중층을 의식한 《마가젼복음셔언 》(국판·洋紙·87면)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최초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러 지니고 내한한 성서이다.  

이수정은 한국선교에 있어서 성서번역뿐 아니라 몇몇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한국천주교와 한국문학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일본에서 펴내는 한편, 요한복음 14장을 본문으로 자신의 신앙고백문을 작성하여 각 언론사에 게재하였다. 또한 그는 1883년 12월 13일에 미국교회 앞으로 진정서를 보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위험을 무릎쓰고 전도와 순교를 불사한 신도들의 신앙을 지적하고, 한국인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으며, 또한 정부도 대외 통상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하지는 않을 지라도 기독교인을 찾아내어 박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피력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국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수정의 노력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고 이에 루미스와 녹스는 한국 탐사여행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매클레이의 내한에 이어 선교사들의 한국 파송이 이루어져 갔다.


2-1-3. 자생적(自生的) 교회와 선교사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은 한국신자들에 의해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1832년의 귀츨라프(Karl Guetzlaff)의 내한과 1865-66년의 토마스(Robert J. Thomas)의 선교와 죽음에 이어, 1870년대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선교사의 만주지역 진출에 힘입어서 시작된다. 비교적 초기에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란드 선교사들은 로스(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등이었다. 이들은 만주 선교를 개척하는 한편 대원군 때에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문이 거의 닫혀있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여러 가지 목적으로 만주에 온 한국인들을 만나 말과 글을 배우고 역사와 문화를 익히며 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결과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이들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받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천부씩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 이후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한반도에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간행된 복음서들은 앞서 거명된 수세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에게 반포되었다. 성경 간행 때에 식자공으로 활동했던 김청송(金靑松)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와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전도하여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이 로스 등의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이들 수세자들은 뒷날 중국인들의 핍박을 받아 압록강 남쪽으로 옮겨왔는데, 1885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북한지역을 여행하여 이들을 접촉하면서부터 선교의 문이 넓어지게 되었다. 한편, 번역된 복음서들을 들고 한반도로 들어갔던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도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특히,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상륜은 로스로부터 받은 성경과 전도책자들을 가지고 비밀리에 복음전도활동을 전개한 결과 1885년 초에는 70여명의 세례 청원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서상륜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300여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에 열심있는 전도인들에 의해 결신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한 그 해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광린 교수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고, 언더우드 역시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1885년 3월 8일자로 로스가 영국성서공회(BFBS)에 보낸 서한의 일절은 이렇다.

"그(서상륜을 가리킴)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여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서한이 미국계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보다 약 1개월 앞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수용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들 복음에 자발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만주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에 도입된 것과 함께 주목되어야 할 것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1882년 말에 도일한 이수정(李樹廷)이 1884년에 현토한한신약성경(懸吐漢韓新約聖經)을 출판한 데 이어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출판하였는데, 이 무렵 첫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던 H.G.Appenzeller와 H.G.Underwood가 이것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점 또한 세계선교사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일면이다. 즉 선교사의 도래에 앞서서 자국인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렇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그 동안 쌓아온 불교, 유교 등의 경전 번역의 전통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성경번역의 이러한 독특성은, 그 뒤에 보이는 성경연구에 대한 열심과 함께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을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선교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에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었다.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1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이미 두 개나 생겼다. 복음을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열심과 사명감에 불타던 선교사들의 정열이 어우러져서 이룬 성과였다. 그 뒤 19세기 말에서 1910년 국권상실의 기간동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인이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힘입은 바가 크지만 그보다는 목숨을 건 선구적인 한국의 교인들의 전도활동이 보다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채 언급되고 있는 수많은 무명의 전도인·매서인·전도부인들이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보다 신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


2-1-4. 서간도 한인마을 공동체

김청송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식자공일을 하던 사람인데 그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매서인 자격으로 고향인 즙안현(평안북도 강계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에 있는 한인 마을로 돌아가 전도하였는데, 그가 뿌린 성서와 전도문서를 읽은 일단의 사람들이 로스목사를 찾아오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임오군란때 변경으로 좌천된 군인들로 즙안현 한인촌으로 망명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한글복음서와 전도문서를 읽고 믿음이 생겨 찾아왔다는 것이다. 로스목사는 웹스터(Webster)목사와 함께 1884년 11월 이 마을을 찾아가게 된다. 영하 20도의 추위를 무릎쓰고 두 주간에 걸쳐 찾아간 그 곳에서 그들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한사람의 선교사도 찾아간 일이 없는 그 곳에, 한글성서와 전도문서만이 들어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쁨에 찬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비록 한국 땅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한인 사회였는데 1884년 75명의 한인이 세례를 받았고, 후에 25명이 더 세례를 받아 평신도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2-1-5. 의주 공동체

한국인의 국민성은 가족과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을 가진 한국의 청년들이 예수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조국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솟아올랐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 중 제일 먼저 이성하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성서와 전도문서를 지니고 중국 봉천에서 의주를 향하여 목숨을 건 순례의 길을 떠났다. 당시에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나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잡히게 되면 처형당하였다. 그는 국경에 경계가 너무 심하여 중국인 객주집에 짐을 맡기고 도강하여 구전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와 보니 성서와 전도 문서가 다 없어져 버렸다. 객주집 주인이 짐을 열어 금서가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일부는 불태우고 일부는 강에 버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로스목사는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좋은 비료가 됨으로써 장차 한국 교회가 크게 발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믿음에서 우러난 예언자적 외침이었던 것이다. 그 후 백홍준이 고국 떠난 지 10년만에 복음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게 된다. 그는 삼엄한 국경의 경계를 지혜로써 넘어섰고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수개월만에 10여명의 교인이 생겼고 자신의 집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의주공동체였던 것이다. 후에 백홍준은 국경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했는데 1892년 국법을 무시하고 외국인과 내통하며 이단 사설로 현혹한다 하여 체포되었다. 백홍준은 변절을 강요당했으나 끝내 거절하여 배교하지 않고 옥살이하다 2년 뒤 옥사함으로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후에 그의 사위 김관근이 조사직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주일날 세 차례의 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를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2-1-6. 소래공동체

백홍준 등과 함께 조국에 복음을 들고 돌아온 또 다른 청년은 바로 서상륜이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만주 우장에서 객고에 시달려 중병을 앓고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어었는데 때마침 이곳에 와있던 스코틀렌드 선교사 맥킨타이어(J. Macintyre)의 도움으로 회생하였다. 그 후 그는 로스의 성서 번역을 도왔고 자신이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의 허허벌판과 맹수와 강도의 위험을 무릎 쓰고 10여일 만에 국경마을 고려문에 도착한다. 하지만 고려문에 도착하여 국경을 넘다가 발각되었고, 금서인 성서를 반입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후 태연히 잠만 자고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 곳 검문소에 근무하는 관원 중 두 사람이 서상륜과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상륜을 밤중에 몰래 빠져나가도록 해 주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친척이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에 있는 송천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소래다. 소래 교회는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였고 순수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고 세워진 민족교회였다. 이렇게 개척된 소래 교회는 그 후 많은 교인이 생겨났고 그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언더우드를 만나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에게는 생명의 위험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기쁨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소래의 교인들은 참으로 순전한 신앙을 가졌다. 주일이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고 마을에 술집과 도박꾼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소래 교회는 선교사들의 훈련의 도장이 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게일 선교사가 와서 어학 공부를 하며 한국의 풍습을 익혔고, 1890년에는 마펫선교사가 다녀갔고, 침례교 선교사 펜윅도 이곳에서 서경조의 어학 지도를 받으며 한국선교의 훈련을 받았다.  


2-2. 복음의 씨앗
2-2-1. 초기 순교한 선교사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의 공로는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  초대교회 역시도 스테반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의 피가 있었기에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 땅에서도 초기 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흘린 아름다운 피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낮선 나라 이국 땅에서 오직 주님주신 사명 하나로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참으며 복음을 전하다가 간 선교사들의 거룩한 피의 역사이다.


2-2-2.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Robert Jerain Thomas, 1840-1866)

토마스는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선교의 사역을 떠났다. 그는 중국선교사로 파송받아 산동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천주교인들로부터 한국의 기독교 박해 사실과 한문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듣고 1865년 9월에 황해도 창린도 근처에 내려 와 성경을 나누어주며 전도하고 한국어를 학습한 후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무장 상선 셔먼호(General Sherman)의 통역을 맡아 다시 들어오게 되었는데, 한문 신약 성서를 가지고 들어와 선교하게 되었다. 그의 순교 일화는, 셔먼호가 한국군인들의 공격을 받아 불살라지고 사람들은 대동강변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토마스 목사도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는 죽기 직전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급히 자신의 품에서 성경을 꺼내 자신에게 칼을 들어 치려는 박춘권이라는 형수에게 주었다.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이때 토마스에게 성경을 받았던 형수 박춘권은 훗날 안주교회 영사가 되었고 그 성경으로 벽지를 삼았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후일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당(S.A. Moffett세움)이 되었다. 이 널다리골 교회에서 한국의 대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길선주 목사가 예수 믿고 목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이며 토마스 목사의 피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당시 토마스 목사의 나이 불과 27세였고 그의 부친이 목회하던 하노버(Hanover)교회당에는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욥17:11)라는 순교 기념비가 있다. 북미 장로교회 조선 선교부는 1932년9월14일 대동강의 석섬에 순교 기념 예배당을 헌당 하였는데 그 머릿돌에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쓰여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하였는데 토마스 목사처럼 처형당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다 죽었음을 볼 때 순교자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들의 죽음을 보면 대부분이 열악한 환경과 문화 속에서 밤낮 없이 복음 사업에 전념하다가 병을 얻어 죽어간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중에는 부모가 선교사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어린아이들의 희생도 있었다..  


4-2-3. 맥켄지(W.J.Mckenzie)

순교자들 중 특히 맥켄지의 기록은 너무도 애석하기에 소개하려 한다.

   1893년12월에 한국에 도착한 맥켄지는,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한국음식과 한복을 즐겨 입었고, 한국의 청년들과 잘 어울려 선교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곳 솔내에 들어왔으나 외롭고 쓸쓸한 생활이었다. 그는 장연읍에 전도차 다녀오면서 장티프스에 걸렸는데 며칠동안 고열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하고 말았다.  그 때가 1895년 6월 23일, 그의 일년반의 짧은 선교에 관하여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는 "그는 격리, 역경, 물질적 궁핍, 따위들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다 갔다"라며 애석해 했다. 그의 장례를 교회장으로 치루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불신자들이 그의 업적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교인이 되는 자가 생겨났다.  후에 그의 약혼녀인 맥콜리양(Miss E.A. McCuly)양이 세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893년 맥켄지 목사가 캐나다로부터 여기 내주할 때 동포는 외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교인은 몇 명 안되는 때라 폭양에 열심히 전도하더니 열병에 정신없이 기세하매 일동이 액석하여 다 주를 믿는지라.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함이 옳도다. 소래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는도다."
  
오늘날 한국이 자랑하는 교회의 성장과 세계 최대의 교회들은 이들이 흘린 값진 복음의 피 위에 세워졌고 성장해 왔다. 한국교회는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을 자랑하기에 앞서 겸허하게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생명을 건 헌신에 감사하며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2-3. 부흥의 불기둥
2-3-1. 선교사 하디( R.A.Hardi ,1865-1949)

한국의 대 부흥을 말하려면 하디선교사를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그는 한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한 주인공이였고, 그 운동을 초창기에 이끌어간 인물이기도 했다. 1903년 원산에서 일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모임의 인도를 맡은 사람은 캐나다인 의료 선교사로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였다. 당시 하디의 선교 사역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선교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기진맥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이 모임을 통하여 먼저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는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그 순간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이처럼 수고의 결과가 없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니, 내 자신에게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깨닫게 된 것은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그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디가 진정으로 선교사로써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을 때(성령의 은혜 없이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하디의 선교 현장에서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그는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지난 수년동안 나는 한국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해 오는 동안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그런 회개를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지식 수준에서 받아들일 뿐, 이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체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그나마 그들은 내가 아닌 다른 선교사들에게 영향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돌아온 첫 번째 주일 아침에 원산 교인들 앞에서 수치와 곤혹스런 얼굴로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면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말하게 될 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백과 회개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선포하는 나의 말을 듣고, 또 그 후 삼 주일 동안 나의 생활과 체험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교하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의 선교사를 회개시키시므로 한국을 구원하시는 부흥의 불기둥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하디는 그후 한국의 대부흥을 이루는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쓰임 받는 성령의 도구가 되었다. 그가 인도한 집회는 성령의 은혜가 강물처럼 흘렀고 죄를 자백하고 통회하는 소리가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하디의 이런 회개와 변화로부터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 성령체험을 내용으로 하는 각성운동이 원산지역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 교회 지도자들에게 파급되면서 한국교회의 체질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영향력은 한국의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선교사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쳐 선교사들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거듭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2-3-2. 길선주

하디가 시작한 대부흥운동은 길선주에 의해서 확고한 부흥운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길선주는 1869년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관성교로 시작하여 각양의 선도에 몰입, 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1893년 평야에 개신교가 들어 왔는데 길선주는 이에 흥미를 갖고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내어 그들이 믿는 도가 무엇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1896년 청일 전쟁 후 평양으로 돌아온 그를 먼저 믿은 김종섭이 끈질기게 전도하였다. 번민에 빠진 길선주는 상제에게 "예수가 참 구주인지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고 3일 되던 날 기도하던 중 옥피리 소리가 방을 진동하고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며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부르는 세 번 무르는 소리를 듣고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회개하였는데 이때 중생을 체험하고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 대곡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28세된 1896년 가을이었다.
그가 회개한 날이 마침 주일이었는데 김종섭의 안내로 널다리골 교회예배에 참석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믿는 즉시 가족을 전도하여 구원하였고 20년간 핍박하던 형 회주도 결국 구원받게 하였다. 그는1897년 8월15일 리(G. Le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그 이듬해 널다리골 영수가 되었고 1900년에는 장로가 되었다. 1902년, 평양 장대현 교회서 교회의 청빙을 받아 황해도 각지의 교회 조사로 오게 되었다.

길선주는 한국교회에 새벽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킨 장본인이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 그 집회에서 자신이 먼저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였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구정 집회가 열렸는데 기대와는 달리 집회가 무엇엔가 가로막힌 듯 막막하기만 했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도 그저 형식적이기만 했고 분위기는 무엇엔가 눌린 듯 무거웠다. 이런 집회의 분위기는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은혜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때 길선주는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일년 전에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말입니다'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내가 잘 돌보아 드릴테니 염려말라고 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미화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했던 것입니다. 내일 아침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의 회개의 고백이 끝나자 순간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무너지고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나타났다. 온 회중은 죄를 자백하며 통곡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집회는 저녁 7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 되었다. 이날이 바로 한국의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디의 죄의 자백과 회개를 통하여 부흥을 준비 시켰고, 길선주의 그것을 통하여 부흥의 사역을 퍼트리신 것이다.

집회의 설교는 대부분 길선주가 하였는데 설교의 내용은 회중의 심령을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영문 밖에 살던 방은덕이란 사람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었던 그는 교회당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온갖 죄를 자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죄인들을 많이 잡아 실적을 올리려는 마음에 어느 날 저녁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밤 길선주는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도적질 한 사람은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다스릴 수 없다. 죄있는 사람은 지옥이요 죄를 회개한 마음은 천당이다'라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들은 방은덕은 마음은 찔렸고 그 마음에 고통은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이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천당에 와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입니다. 어찌하오리까"하고 대성 통곡을 했다. 이 순간 성령의 역사는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고 온 회중은 통성으로 기도하며 자복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1907년 평양 장대현에서 있었던 사경회 이후 길선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가 되었다. 그는 계시록을 만독하였고, 설교를 이만번 하였다. 그를 통해 목사와 장로가 된 사람이 팔백 명이 넘고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 오백만명,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삼천 명이요, 교회설립을 육십 처에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중 하나였고 이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35년 11월 25일 평서노회 고창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소천하였다.

그가 인도한 집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로 임하였고 교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장면은 놀라운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난 그 통회와 자복이 한국의 교회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말세론 설교는 일본의 압제 하에 고통 하던 한국인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었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소망의 설교였다. 진정 그는 한국을 부흥시키시려고 준비한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이다.


2-3-3. 이적의 종 김익두

길선주가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이적과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가정을 일찍부터 돌봐 왔던 그가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타락의 생활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날마다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악행하였는지 사람들이 '오늘 호랑이 익두인지 억두인지 만나지 않게 해 줍소서'라고 성황당(城隍堂)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회심한 후에는 그가 과거를 뉘우치고 사람을 때린 장소마다 찾아다니며 방성대곡으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삼일간 금식을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명 가량의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 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 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그의 집회 역시도 철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임하는 집회였다. 1920년 10월 11일부터 열린 평야집회에는 일만여명이 모여 통회와 자복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새벽기도에는 수천명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통회의 눈물로 아침을 밝히는 영적 각성이 있기도 했다.
    
김익두목사는 원칙을 세우고 생활을 하였는데 오늘의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벽에 은밀히 기도할 것, 신구약 2장씩 숙독할 것, 냉수마찰, 하루 세 번 가정예배 드릴 것 등이다.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새신자 28만명, 치병자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2-3-4. 주기철과 순교자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음란하고 죄많은 이 세태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4-38)

선교사들이 피로써 복음의 씨앗을 뿌렸듯이 이 땅의 성도들도 많은 피의 씨앗을 뿌렸다. 말 그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던 한국의 순교자들은 단순히 죽임을 당한 순교가 아니라,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신앙의 지조를 지켜낸 참으로 위대한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그 중에 평야 산정현 교회의 주기절 목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 1987년 경남 창원에서 주현성 장로의 7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가 신앙 생활을 했던 웅천교회에는 그의 입교한 날을 14세 되던 1910년12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형 기원이 1910년 경 한글역 성서를 구하여 탐독하고 믿게 되었는데 그도 형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갔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의 간디'라고 불리는 고당 조만식을 만나게 되고. 그의 신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가 고향 웅천교회의 집사로 있을 때 김익두 목사가 마산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열었다. 그 부흥회에 참석했던 주기철은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그는 1936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고난의 길을 걷게 된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는 일본이 나라를 강점하여 식민화 하던 시기로 국운은 암울하고 민족정신은 억압받던 어려운 때였다. 일본은 황민화정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주기철은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죄로서 십계명을 어긴다 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1936년 9월 주목사는 평양 신학교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때 한 설교가 일사각오였다. 신사 참배 강요의 고난 앞에서 자신의 몸을 주의 제단에 바칠 것을 피력하였고 이런 그의 설교는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 받게 되었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는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중략). 예수를 환영하던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두 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중략).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중략). 신학을 말함으로 제군의 사명이 다 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사이다."

그러나 교단과 일부 노회들이 힘 앞에 굴복하고 신사 참배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수치이자 한국 교회의 시련의 역사이며 아울러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사건이었다. 산정현 교회에서 늘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교단을 지킬 것을 외쳐왔던 주목사는 교회 헌당 예배가 있던 1938년 2월 8일 별다른 죄목 없이 투옥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신앙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9월 일제의 강요에 굴복한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총회 직전에 그를 두 번째 투옥되었고 결의가 끝난 후 석방시켰다. 석방되어 돌아온 그는 1939년 8월에 세 번째 투옥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가 연루되지 않은 '농민회' 사건이 투옥 이유였다. 7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풀려 나온 직후  주목사는 '나의 다섯 가지 기원'이라는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한 후 박관준, 채정민, 이인재, 오윤선, 김형락, 박의흠, 최봉석, 한상동 등과 함께 조직적인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한다. 네 번째 구속은 1940년 5월이었고  그것이 그의 영광스런 삶의 마지막 길이였다.

그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투옥된 7년의 시간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일본 경찰은 주목사의 신앙을 꺾음이 바로 한국 교회를 꺾음이요, 한국민족을 꺾어 넘어뜨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 주목사에 대한 고문은 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일본 경찰이 행한 고문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두 손을 묶고 공중에 매단다.
  둘째.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온 몸을 지진다.
  셋째. 쇠 집게로 손톱을 뽑는다.
  넷째. 작은 궤짝 속에 넣어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한다.
  다섯째. 코에 고춧가루 물, 뜨거운 물을 부어 넣는다.
  여섯째. 바늘로 손톱과 눈을 찌른다.
  일곱째. 그네 타듯 줄을 당겨 매단다.
  여덟째. 학대하고 손가락을 자른다.
  아홉째. 여자는 나체로 고문하고 강간한다.(이 당시 고문하던 역사의 장소가 서울 서대문 박물관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이처럼 잔혹한 고문을 행하던 그들은 주목사에게 더욱 심한 고문을 행했다. 위에 거론된 고문을 행한 것 외에도 심지어 주목사의 성기 요도에 알코올 심지를 쑤셔 넣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고문을 당하면 성기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한 것이 면도날로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 소변을 볼 때면 그 통증을 견디지 못해 변기통을 잡고 울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그의 가족을 불러 고문하는 장면을 보여 주었는데 코와 입에 고춧가루 물을 부어  목에 찰 때까지 부었다. 실신한 주목사를 바닥에 눕히고 배를 밟아 물을 토하게 하고 또 천장에 그네를 타듯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방망이로 때려서 왔다 갔다 하게 해 주목사가 실신하자, 그 광경을 보던 어머니도 실신했다고 한다. 주목사는 투옥 기간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유언이 된 '오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달, 두달, 일년, 십년 계속 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중략).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 뿐 입니다(중략).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져 줍니다."  

한국 교회에 신앙의 일화로 전해지는 사건이 있는데,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이다. 아무리 고문을 하고 고통을 주어도 신앙의 변절을 하지 않자 어느 날 교도소 마당에 모든 수용자를 모아 놓고 주목사를 불러내었다. 거기서 널빤지에 대못을 박아 거꾸로 놓고 그 못 판 위를 맨발로 걸으라고 했다. 피를 흘리며 그 못 판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주목사의 눈에 예수님이 앞에 서서 함께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체험이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져 줍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지은 명상시가 있는데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며 종의 자세를 취했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낮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는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이런 고난 속의 영광은 주기철 목사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한 달 후쯤 신사 참배를 거부한 성도 2,000여명이 전국에 걸쳐 투옥되었고 그들 중 목사가 50여명, 폐쇄된 교회만도 200곳이 넘었다. 주목사의 산정현 교회와 성도들도 주목사의 '일사각오' 신앙으로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교회는 폐쇄 당했다. 투옥된 성도들과 목사들도 모두 주목사처럼 고문을 당해 맞아 죽고 병들어 죽은 시체를 밤이면 간수들이 들쳐 메고 나갔다고 한다.

산정현 교회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었는데 그 중에 방계성 장로가 있었다. 그가 고문실로 끌려 왔을 때 주목사도 있었다. 그날 너무나 많은 매를 맞아 일어서지를 못하는 주목사를 자신도 매를 맞아 성치 않은 몸으로 업고 감방으로 들어갔다. 그 날밤 고통스러워 엎드려 있는 방장로에게 주목사는 자신이 지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을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한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는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곤욕 지셨구나

  눈물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 다리 싸매 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칠전팔기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열어 주니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 길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리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 가오리

"장로님, 그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한 줄 한 줄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지은 시입니다. 제목을 '영문 밖의 길'[노래듣기]이라 붙이고 고문을 당할 때마다 더러는 소리를 내어 부르기도 하고 더러는 속으로 불러 가며 견뎌 왔지요."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곡조에 붙여 부른 이 노래는 그 후 한국교회의 고난의 현장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성가로 계속하여 불려졌다.

이처럼 일본의 우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당하는 주목사의 고난의 삶은 1944년 4월 21일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감방 안에서 하는 것을 끝으로 승리의 마침표를 찍는다.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면회를 온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 같소. 내 노모를 잘 돌봐 주시오. 내 사신은 평양 돌박산에 묻어 주오. 내 하나님 앞에 가서 이 수난의 겨레 위해 기도하리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을 논하면서 주기철 목사의 일생을 이처럼 길게 논한 것은 바로 그 부인의 말과 같이(우리 목사님 순교 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을 드리는 신앙의 삶이야말로 참된 부흥이며 승리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영적 대각성을 통하여 틔웠고, 수많은 한국인 순교자들의 피로써 지켜 왔던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철저히 통회하고 자복한 그 부흥의 역사가 이 수난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순교자의 신앙으로 훈련하였다고 믿는 것이다.


2-4-1. 부흥의 기반이 된 종교적 전통들

한국에 대부흥이 일어난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행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인들의 전투적인 기도운동이 있었다.


2-4-2. 새벽기도

한국인들은 새벽시간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사고에는 새벽에 공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토속적 신앙이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 기독교 안에서 중요한 기도 운동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었다. 새벽 기도는 공식적으로는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장로가 1906년 가을에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길선주 장로는 같은 교회 박치록 장로와 함께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을 걱정하며 새벽에 교회당에 나가 기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교인들이 하나, 둘씩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에는 300-500명이 매일 새벽 모여 기도하게 되었다. 이에 길장로는 당회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공식적인 새벽 기도회가 시작하게 되었다.

길장로의 공식적인 새벽 기도가 시작되기 전, 이미 한국 교회에는 새벽 기도를 드리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1904년 9월, 학교에서 있을 사경회를 준비하며 새벽마다 모여 기도하였는데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확신을 이때 체험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학생들이 새벽에 문빗장을 열어 몰래 예배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그들에게 언제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 하고 물었더니 학생들 대부분이 예배실에서 새벽에 기도하던 중 사죄의 확신을 얻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1905년에 모인 장로회 공의회에서도 추수감사절 후 한 주간 국가를 위해 전국교회가 특별기도회를 진행할 것을 가결하고 상동교회에서 매일 새벽 구국기도회를 가졌는데  수천 명이 모여 기도회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교회당 종소리는 새벽 기도시간을 알렸고,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룬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지금도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 취급을 받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목사와 교인은 진정한 목회자와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만큼 한국교회에서의 새벽기도 전통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교세가 큰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목회가 이처럼 부흥하게 된 것은 오직 기도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새벽4시 30분에 기도를 시작해서 7시까지 부르짖어 기도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또 12시까지 기도했다고 했다. 이처럼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첫시간을 하나님께 드려 기도하므로 시작하는 한국의 교회에 부흥의 축복이 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2-4-3. 철야기도·산기도
그래서 가족 중에 누가 군대엘 가면 온 가족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 한다. 한국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가면, 그리고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시작하면 주위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 한다. 또 목회자의 가족들은 그것을 반대하고 심지어 이혼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에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일반적 생활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위해 철저히 영적인 준비를 한다.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사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주무기다.

"눈에는 눈물이 나올 때까지, 목에서는 불이 나올 때까지, 이마와 등에 땀이 나올 때까지 기도한 후 전도하라" 이것은 나운몽 장로가 전도자들을 가르칠 때 한 말이다. 그만큼 한국의 목회자들은 철저한 기도 생활에 목회의 무게를 두고 있는데 그것의 밑바탕에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는 철저히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을 수행하는 종들은 그 하나님의 역사에 의지하여 사역할 때만이 부흥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에서의 기도생활은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신학생들은 저녁이면 때를 지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한다. 한국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기도로 터를 닦은 산이 서울에만도 여러 곳에 있다. 그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기도에 몰두한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날마다 새벽 기도를 인도하기 때문에 새벽 3∼4시 정도에 일어난다. 그리고 새벽 기도를 인도한 후 교인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계속 기도할 뿐 아니라 가장 오랜 시간 기도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아예 침소를 예배당으로 옮겨 밤새워 기도하기도 하고, 또는 산으로 올라가 밤을 세워 기도한다. 만약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교인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는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래서 한국의 목회자들은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은 잣은 금식과 기도생활, 수면부족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만을 위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안락과 생활까지도 포기하고 산다. 그들은 생활에서 안락을 위하여 시간을 나누기보다는 기도와 전도, 성경 읽기에 시간을 할애한다. 생활의 궁핍이 와도 목회에만 전념할 뿐 따로 직업을 갖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맡기고 목회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고 가정과 가족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한국 기독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각오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한국의 목회적 전통들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교자적 헌신 위에 부흥을 허락 하셨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가진 교회,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 세계의 50대 교회에 절반을 차지하는 성장으로 한국교회를 복주셨다.


2-6. 결론

마른 장작은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기름을 붓고 불꽃을 던지면 활화산이 되어 타오를 수 있다. 등잔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 기름이 있어야 하고 불이 당겨져야만 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조건에도 부흥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흥을 바라는 어떤 교회나 민족이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고, 철저히 헌신해야 하며,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초대 대부흥운동이 보여 주듯이 먼저 모든 죄와 허물을 통회(애통)자복한 심령과 교회 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 성령의 역사만이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시금 일어나는 운동이 있는데 바로 한국초대 교회의 부흥운동을 계승할  영적 각성 운동인 기도회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이 기도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교회의 모습을 염려하며 기고한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미상불 제 3의 밀레니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영적 지도자여야 할 우리 목사들에게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일까? 새 시대를 열어가는 또 다른 목회 병법일까 아니면 인터넷 시대의 정보를 장악한 목사일까? 새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제일 급선무가 있다면, 기도하는 시간을 현재보다 갑절로 늘리는 일이다.
존 칼빈이 언급한 대로 기도는 ‘믿음의 제일의 실천(chief exercises)이며, 날마다 은총을 덧입는 사건’이기에 더욱 그렇다. 교우들이 제일 보고 싶어하는 목사의 모습은 설교 전에 깊히 기도하는 모습, 그리고 오랜 시간 엎드려 기도하는 목사의 얼굴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 한국교회 전역에 확산되어야 할 아니 모든 목사들의 모임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이 무엇인가. 그 또한 목사라면 다같이 손에 손을 잡고 오래오래 기도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한국교회가 사는 일이다.
2000년 9월부터 매월 첫 월요일 밤마다 극동방송 선교본부에서 주최하고 있는 `통곡의 강 목회자 기도회'를 주목해 보자. 뚝섬 한강변에서 6백 50여명의 목사들이 밤(저녁 7시부터 익일 4시까지)을 꼬박 새우며 울며 기도하고 있다.
목사들이 먼저 흘리는 눈물의 기도가 한강을 이루어야만이 비로소 이 땅이 치료받게 된다는 것이 기도회 취지이다.  

한국의 부흥은 1907년을 전후한 영적 각성을 통해 일어났다. 성장보다는 영적 거듭남과 복음만 듣다가 성령의 임재를 만나 영적 도덕적으로 거듭난 중요한 사건이다. 후에 신사참배의 수난을 통해 알곡 가라지가 구별되고 6. 25를 거치며 하나님의 축복이 엄청난 교세의 성장을 가져 왔으나 영적 타락과 초기 교회의 전통을 잃어버림으로 교세의 정체와 사회의 타락과 사회에서 천대받는 교회의 무기력이 왔다.
이에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1907년의 영적 각성운동을 재현하여 숫자만 있지 영적으로 성결하지 못한 현 교회를 갱신하여 대부흥의 역사를 다시 이루고자 하는 사역이다. 다시 말해서 통회와 자복으로 성령의 역사를 다시 한국의 교회에서 나타나게 하고자 함이다.

김태권 목사(캄보디아 선교사)

출처 : 기독자료공유 삼용이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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