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초의 기독교인 서상륜

2007. 9. 28. 15:40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최초의 기독교인 서상륜

『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37:25~26)

서상륜(徐相崙 1849 ~ 1925)은 평북의주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부모를 여위고 할머니 슬하에 살면서 일찍이 장사에 뛰어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1878년(29세)에 중국에 홍삼장사를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를 이미 기독교를 접한 친구들이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에게 데리고 갔다.

병원에 입원하여 목숨을 건져 귀향길에 오른 그에게 매킨타이어는 치료비를 청구하기는커녕 복음서를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처음 마지못해 받아온 성경이었으나 그것을 읽는 동안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 라는 선입견이 사라지고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텄다.

결국 귀향한지 일년 만에 집안일을 정리하고 다시 만주로 갔다. 장사가 목적이아니라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옛일을 다 떨치고 새로운 길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의 로스(John Ross)선교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로스선교사 에게 배우고 함께 지내면서 서상륜 은 자신의 이기적인 지난 삶을 돌아보고 회계하기 시작했다. 매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면서 누가복음을 직접 번역하였다. 누가복음의 번역이 끝나자마자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나라 친구와 친척은 나를 인물 좋은 도적놈이라 흉만 보고 말도 아니하고 버린 물건같이 보는데 타국의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얼굴색 다른 사람은 도리어 나를 친부형같이 사랑하니 이것이 어찌된 연고이뇨? 일년 전에 마근태(馬勤泰,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객점에서 죽을 인생을 그같이 구원하여......

그 때의 애쓴 은공과 약값을 걱정으로 말한즉 마근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고마운 마음이 나거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말씀 되로 예수를 믿으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겠다' 하시더니 지금 로스목사님이 이같이 참사랑으로 권하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참 하늘나라 백성이로다"

이런 점에서 만주의 매킨타이어와 로스목사는 한국 민족교회사의 첫 장을 여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매킨타이어는 최초로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로스는 최초의 한국말 성서번역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복음선교의 역사는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소수의 한국인 선구자들을 통해 주체적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한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닦은 사람들은 만주의 최초 수제자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서상륜과 백홍준은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최초의 순교자인 백홍준은 평북의주의 상인출신으로 1874년 만주에 갔다가 로스선교사 등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1890년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열었던 신학반에서 공부한 뒤 최초의 유급교역자로 활약하며 언더우드, 게일, 마펫 등의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한국교회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결국 관가의 주목을 받던중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의 지시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간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백준홍의 친구인 서상륜은 세례를 받은 후 6개월 동안 봉천에 머물면서 로스선교사의 성경번역에 계속 참여했다.

신앙에 기초한 그의 열정과 재간이 성경번역 뿐만 아니라 목판을 일일이 깎아내어 인쇄하는 일까지 맡아서 결국 1882년 가을에 심양 문광서원 간행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 와 (예수셩교 요안뇌 복음젼셔) 쪽 복음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의 사명은 번역보다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성경을 반포하는데 있었다.1882년10월 귀국길에 그는 복음서 한 상자를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압록강 국경을 건너다 관리들에게 검색을 당해 성경이 압수되었으나 관리의 호의로 훗날 성경일부를 돌려받았다. 관가에서 박해의 조짐이 보이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고향 의주를 떠나 삼촌댁이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로 옮겨갔다.

로스는 단편성경 4백여 권을 비밀리에 전하였고 서상륜은 이것을 가지고 전도하여 1883년 말에 '세례지원자 13명' 의 명단을 로스에게 보고하였다.

13명의 세례지원자를 보고받은 로스선교사는 또 상해 제물포간 항로를 통해 성경을 보내왔다. 1884년 봄부터 황해도 장연의 소래는 한국의 성경보급처가 되었다. 서상륜은 1886년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소래교회는 한국의 최초교회가 되었다.

서상륜, 서경조 두 형제는 전도의 활기를 띠어 70명이 넘는 세례 지원자를 얻었으나, 로스의 입국이 어려워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후 언더우드 목사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887년 1월 23일 주일에 3명의 세례지원자들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알렌선교사와 헤론의사 언더우드 목사 앞에서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등은 세례문답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월 27일 14명의 한국인 교인들과 새문안교회가 언더우드에 의하여 시작될 때 서상륜은 주축 교인이었다. 그는 장로뿐 아니라 어떤 직분도 맡지 않았다. 서상륜은 끝까지 평신도 전도인이었다.

서상륜은 당시의 양반들처럼 첩이 있어 이것이 걸림이 되어 장로로 안수 받는 것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서상륜의 활약은 기독교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905년 을사보호조약 쓴 글에서는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는 기독교를 개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나라를 올바로 세우는 기초로 생각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서상륜은 선유사로 위촉을 받아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현 정부의 잘못을 질타하며 내각이 사직하여야만 백성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1910년 일본으로 넘어가고 서상륜은 은퇴하여 장연군 대탄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1925년 12월16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총회장으로 치루어 졌고 그의 시신은 대탄리에 안치되었다. 후일 개항 후 입국한 외국선교사들이 '우리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가지러 왔다' 고 말한 것은 서상륜의 교회사적 위치를 정확히 자리매김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출처:완도성광교회

출처 : 기독자료공유 삼용이와순애
글쓴이 : 따스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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