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19. 23:25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은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 ||||||||||||
1892년에는 미남장로교회 소속의 교사들이 들어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함경남북도와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선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하는 한편, 신학교육, 문서사업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1901년에는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 박사의 희년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장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1919년 3.1운동에 이르러서는 장로교회가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에 따른 일제의 보복과 억압으로 교회는 큰 시련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해외선교와 국내 전도활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오던 장로교회는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왔으나, 점차 외국의 새로운 신학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식학자들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양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는 당시의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동안 정통신학교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有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 대속, 재림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총회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고 여러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 무렵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함께 어려운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평양신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간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서울에 '조선신학원(1940년)'을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신학교는 해방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신학교를 새로 세워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부산에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그후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의 신학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정통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장로회 신학교'(1948년)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해 1949년 4월 19일 서울에서 모인 제 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의 승리였다. 이처럼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 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 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1959년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WCC를 반대하는 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合同)하여 '합동총회'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합동측에 남아 평양신학교의 전신을 지키던 교수와 학생들은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1961년에 고려신학교와 합동한 후, 1965년 지금의 사당동(서울특별시 관악구 사당동 산 31-3번지)에 학교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으며, 1967년에는 1959년 통합측의 이탈로 인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 후 1975년 '총신대학'으로 1995년에는 '총신대학교'로 교명 인가를 얻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총회는 산하 중요 기관들로 총회 신문인 '기독신문'이 있으며, 총회 직영 교육기관인 총신대학교, 총신대학원, 총신교육대학원, 총신선교대학원이 있다. 그 외 총회인준신학교도 있다(칼빈대학교, 대신대학교, 광주신학교, 서울신학교, 부산신학교, 대전신학교, 전북신학교, 인천신학교, 청주신학교, 수원신학교, 광신대학교). 그동안 본 총회는 2006년말 현재 교단소속 교회 수는 10,905개, 전체교인 수는 2,818,092명으로 집계되고 있고, 총회 파송 선교사는 전세계 1,747명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한국의 최대교단으로 꾸준하게 성장해 왔다. 장차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21세기의 미래를 다같이 소망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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