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문밖에서 있을 때 (살전 4 : 13-18) 165.168.289 임종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엄숙하고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이 조용히 그리고 확신 가운데 서서 그것을 맞이해야 한다.
1, 가장 위대한 순간.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중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어 낙심천만한 가운데 있고 또한 그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악을 쓰면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다1 하지만. 믿는 우리는 복된 생애를 다 청산하고 천국에 간다는 확신으로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접을 받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2. 새 생활의 출발. 믿는 자의 임종은 임종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위대한 삶의 새로운 전기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임증 때 부를 찬송과 기도로 언제나 연습하고 준비해 두어야 한다.
3. 마귀 권세를 물리치 때 .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불투명해질 때 마귀의 유혹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여서도 오히려 초연해 지며, 마귀의 권세를물리치고, 숭리와기쁨과구속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71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죽음은 약속된 하나님 나라 입성이므로 엄숙하고 확신있게 맞이해야 한다.
사망율 이기는 능력 (고전 15 : 55-57) 152,222.289 인간에게 죽음이란 달갑지 않는 불청객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 찾아와 마음을 한껏 흔들어 놓곤 한다. 그러면 이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 죽음의 본질 .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증오하는데. 그러면 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인류 최대의 원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때문에 믿는 자에게 이 죽음은 더 이상 원수일 수가 없다. 오히려 이것은 평안한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앞잡이가 될 뿐이다.
2 . 죽음을 이기는 힘 . 이것은, "우리 주 라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을 맛보셨지만. 죽음이 그를 억류할 수 없자.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죽음이 와도 당황하거나 떨지않고 담담히 그것을 기다리며 환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로버트 눈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나는 가노라, 저 영광의 세계로, 죄여, 이제는 안녕, 죽음이여, 이제는 안녕"이라고 외쳤다. 실로 죽음을 정복한 자만이 이 땅에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도의 부활이므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 (시23:3-6) 444,453,476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정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신다. 그는 항상 우리를 푸른 목장. 잔잔한 시냈가로 인도하신다. 1, 사망의 음침한 곯짜기에서 보호하신다. 이 성도는 한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각기에서도 능히 인도해 주실 것이다. 여기 참석한 우리 모두도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강한 능력의 팔은 어떠한 원수 마귀외 권세도 물리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신다. 그의 인도와 보호는 잠시 잠깐 동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에 오를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3,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 이 땅에 사는 나그네는 잠시 잠깐 거하다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한다. 돈이 많아 좋은 집을 소유했다 해도 그 집은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임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집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집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임종-4) (빌1:20-24) 231.471.474
바울은 네로의 죄수가 되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 모든 고퉁도 다 이기며 승리하였다.
1, 죽음은 현세의 모든 악을 제거해 준다. 세상에 얽매인 자들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당하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세상의 유행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있는 보화를 사랑하며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에 주어진 삶을 값있게 살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도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된다.
2, 죽음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땅 위에는 언제나 슬픔과 고통의 한숨 소리가 그칠날이 없다. 음산한 거문고의 소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그러나 죽음 저 너머 저쪽 나라에 가면 밤도 없고 어둠도 없고 죄도 없다.
3, 죽음은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스런 낙원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그를 믿는 성도는 현세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다 당하였지만 장차 낙원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히려 찬송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자녀는 부름을 받아 갈곳이 천ㄱ국이므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감사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두 종류의 집 (입관-1) (고후 5 : 1-10) 272,541,545
신자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장차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자이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집과 하나님 나라의 집 즉 두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장막집 .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땅의 삶이 '장막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장막집은 야외에 다 치는 천막집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제든지 이동하기 쉽게 만든 간이 집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거두기 쉽게 지은 집이므로 내구성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학위에 소유하고 있는 집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이것은 역시 장막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이것은 모두 없어지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영원한 집 . 이 땅 위의 장막집과 반대되는 집은 곧 영원한 집이다. 그것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덧입게 하는 것이다. 고인은 한평생을 살면서 이 하늘 나라에 있는 집을 사모하고 열망했다. 그는 이제 그토록 사모하던 집을 가기 위해 이 장막집을 떠나려 하고 있다. 잠시 후면 그는 그곳을 가기 위해 조용히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그가 거주할 영원한 집이 있음을 확신하자. 성도는 약속된 천국의 집이 있으므로 사모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주 안에서 자는 자의 복 (입관-2) (살전 4 : 13-18) 165,291,545 본문에 자는 자리는 표현이 세 번, 쓱은 자라는 표현이 한번 나오는데, 특히 주 안에서 잠자는 자의 누릴 복락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1, 영원히 깨는 복 주 안에서 자는 자만이 영원히 깨는 복락에 참여할 수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에 심취해 있을지라도 주님을 모르면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 헤메일 것이며 사망과 흑암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영원허 깨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부촬에 침메하는 복. 본문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성도는 예수넘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는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될 것이다.
3, 위로힘을 받게 되는 복.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망 없는 다른 이아 같이 슬퍼하지 않게"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영광과 안위를 보기 때문에 멸망당할 자와 같이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늘 고인의 영광을 마응 속에 그려보며 우리 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부딸의 복이므로 큰 위로와 소망을 갖게한다.
그리스도의 인의 죽음 (입관-3) (롬 14 ; 7-9) 293.531,534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하여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선포하였다.
1. 이웃을 섬기는 삶.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라면 거기에 따르는 회생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성령에서는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굻주린 백성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행을 하게 하셨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앎. 그리스도인외 목적은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적인 생활에서 분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서도 밝히 표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하나닙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3. 죽을을 예비한 삶. 신자의 삶은 죽음을 잘 예비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고인된 OOO 성도는 죽음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살았을 때 이웃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초지일관하였다. 이제 그는 펀안히 예비된 천국의 복락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이웃과 주님을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성도가 얻을 안식 (입관-4) (시7 : 13-17) 222,225,476
성도가 이 땅 위의 삶을 살 때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삶을 살므로쌔 받는 복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겠지만. 본문에서는 안식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1,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하나님의 장막 속에 있는 성도는 펀안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가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현생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대서 방황했던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안식의 장악을 두르심으로서 위로와 안식을 공급해 주신다. 여기에서 성도는 영원한 안7과 위로를 얻게 된다.
2, 그들의 목자장이 되신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성도들의 대 목자장이 되선서, 그들을 영원한 생명 강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공급하신다. 고윽ㅂㅂ하신다. 이 EKd 위에 있는 지도자는 한결같이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주님만은 의로우시고 완전하셔서 결단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고통ㅇ의눈물을 씻어 주시고 위로와 안위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구분 안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다.
현생의 삶을 사는 성도는 언제나 찬바람이 휘몰아 치고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다. 피러나 이러한 삶 속떼서도 고인은 믿음을 지키고 천국의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충성,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고인이 누릴 천국의 영광과 안위는 지극히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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