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 12. 23:50ㆍ신학자료/5.성경신학자료
열두제자연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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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 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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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43-46)
들어가는 말
1.이름의 뜻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인 이 이름은 아마 북쪽 갈릴리 바다에 그리이스의 영향력을 계속하여 행사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의 이름을 따른 것 같기도 하다. 또 사도들의 고향인 벳세다를 도시의 지위로 승격시킨 공적이 있어서 지방의 통치자인 영주 빌립이란 이름으로 보상으로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빌립은 그리이스라는 세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뿐 아니라 그리이스에도 멧세지를 전하는데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동향인 빌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요4:4) 메시야를 찾으려는 안드레나 베드로처럼 빌립도 마찬가지로 메시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 빌립의 기질
태어날 때부터 오랜 친구인 베드로와는 달랐다. 베드로가 오직 자신의 신념만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과는 달리 빌립은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에는 또 하나의 오랜 친구인 안드레에게 많은 협조를 구했다.
흑백을 가려야 할 일이 생기면 분석적이면서 치밀한 빌립의 마음은 그 일을 심사숙고하고 흑백을 가리는 찬반의 결정에 신중을 기했다. 사실, 빌립은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계산하기 때문에 더러는 우유부단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도의 조력에 의존하기도 했다. 빌립은 결코 경솔한 판단을 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본 론
1.메시야를 증거하는데 신중(요 1:43-46)
1.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께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한 후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은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하셨다고 쓰고 있다(요 1:43). 안드레와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빌립에게 이야기했을런지도 모른다. 베다니와 갈릴리 사이의 길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인가 예수님은 빌립에게 제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을 권하셨다. 예수께서는 빌립을 세례 요한을 따르는 한 사람일 거라고 아셨기에 빌립을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게서 빌립을 찾으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찾는데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다.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나무에 올라가서 힐끗 예수를 구경하려고 했을 뿐이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시고 나무 위를 보신 후 스스로 삭개오의 집을 찾아 들어가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진실로 누가 누구를 찾는가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설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라고 말한 사람과 빌립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립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상통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빌립이 우물쭈물했다면 그것은 잠시 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빌립은 자신의 생애가 변함없이 항상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립은 천천히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길이지만 이것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최종적인 결단이었다.
2.빌립의 전도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의 생각이 나자, 즉시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친구에게 말해 주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것이 빌립의 첫번째 전도였다. 새로 만난 삶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진실한 전도정신으로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고 말했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리라고 빌립은 확신한 것이다. 빌립은 확신한 것이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확신을 말하였으나 나다나엘은 예루살렘이 더욱 실증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날 수 있느나?”(요1:46)고 물었다. 친구가 자기의 증거하는 것을 부인하였으니 빌립은 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에수 안에서 성취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빌립은 말다툼을 하지않고 간단하게 “와 보라”(요1:46)고 대꾸했다. 논리적인 대화가 신앙에 훌륭한 기초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논쟁을 하면 안된다. 논쟁이 더이상 불필요함을 깨달은 빌립은 친구에게 예수께로 가보자고 했을 뿐이다. 자신있게 설명할 수도 없고 신념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와 보라”고 고만 한 것은 빌립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증거해 주기를 원하거나 논쟁하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사람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이런 사람에게는 “저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돌아노는 주일 아침에 당신을 교회로 모시겠습니다. 아침 열 시까지 당신 집으로 제가 가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
드디어 빌립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안드레, 요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으며 빌립이 다섯번째가 되며 모두 기록되어 있다. (마10:3/막3:18/눅6:14). 그 후 사도들이 두 사람씩 작을 지어 복음전도 여행을 할 때 빌립과 나다나엘은 아마 한 짝이었을 것이다.
2.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계산(요한복음 6장 5-14절)
1.빌립은 수효를 계산했다.
어느날 자기를 따르는 수천의 무리를 보신 예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빌립에게 물으셨다.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빌립에게 그 해결 방법을 물으신 것이다. 그런데 빌립은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빌립은 마음 속의 컴퓨터 단추를 눌러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는 데는 이백데나리온 이상이 필요하다는 상당히 정확하고 실제적인 계산을 해 냈다. 이 금액은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먹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액수였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에 빌립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먹을 것을 사주려면 거의 일년 품삯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진 돈이 없는데 어떻게 당장 음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빌립의 정확하고 논리적인 생각은 필요한 돈을 잘 계산해 냈다.
2.현대의 빌립들
빌립과 비슷한 현대인은 맵시있게 옷을 입고 슈퍼마�에 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일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려고 하는 품목을 기록한 종이를 들고 짐차를 밀면서 선반에서 물건을 내릴 때마다 물건값을 적어 놓으며 카운터에 가서 자기의 계산과 맞추어 본 다음에 지불할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항상 신속하게 일한다. 논리가 정연하고 계산에 밝으며, 거의 기계적인 만큼 정확한 이 사람은 항상 전통을 존중하며,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수치를 맞추어 본다. 이 사람은 “우리는 전에 그렇게 한 일이 없어”. 또는 “그것은 할 수 없었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현대의 빌립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할 수도 있다는 반대되는 그 계획안에 결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식에 따라서 일을 처리합시다“라고 역설하였다.
2.빌립은 믿음이 없이 계산을 했다.
빌립은 비젼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확증과 계산과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위기에 처할 때를 대비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빌립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떡을 살 수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기질은 기적을 배척했다. 그는 너무도 타산적이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믿음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시려고 무리들을 먹일 떡에 대하여 그에게 물으신 것이다. 빌립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대답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구니에 음식을 가진 아이을 데리고 옆에서 있는 안드레를 쳐다 보셨다. 빌립이 비젼을 갖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는 속시원하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고 여쭈었다. 안드레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는 아이가 가진 것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성취하셨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빌립은 타산적인 성격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모시고 배웠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알아야 한다. 바람을 재우고 병을 고치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 나는 왜 「주여,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라는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왜 믿음이 없을까? 라고 빌립은 혼자 말했을 것이다. 그 날 빌립은 자신이 얼마나 속되고 융퉁성이 없는가에 대하여 얼마쯤 깨달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작은 것이 크다는 것도 배웠다. 교회는 주제넘고 경솔하게 예산의 집행을 좌절시키려는 기도로 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신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이 강한 것을 필요로 한다.
계산적이며 보수적인 머리가 반드시 냉정한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기계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것이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빌립은 무리를 충분히 먹이기를 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빌립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성경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고 애굽의 군대가 양쪽으로 포위하여 뒤쫓을 때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하셨다(출 14:8-3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처형이 이튿날 아침으로 계획되어 있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행 12:1-10).우리에게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3.헬라인을 맞을 때의 우유부단함(요12:19--22)
(요12:19-20) 유월절에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 몇 사람은 유명한 선생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직접 만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빌립을 소개자로 선택하였다. 그의 이름이 헬라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기 �문에 곧장 데려가지 않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 (마10: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신 적이 있음을 기억하였다. 이방인들은 사마리아인들 보다도 한 단계 아래로 낮은 사람들이었다. 주님이 원하실까? 생각하며 썩 내키지 않아서 착한 친구 안드레에게 상의했다. 빌립은 안드레의 조언에 힘을 얻어 주님꼐 고하였고 주님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다.(요12:25)
분석적인 태도를 가진 빌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불을 붙이지는 못 하였으나 자신의 가슴에는 불을 당겼다. 주님와 함꼐 하면서 설령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하여 빌립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지나치리 만큼 신중한 성격은 보다 큰 단호한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는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게 보통이다. 만일 빌립이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면 헬라인들은 준미을 만나지 못하고 제 갈길을 갖을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어떤 성도는 중요한 기회가 마주칠 때 마지못해 하듯이 꾸물거린다. 기회는 중요하다.안드레가 상드레와 상의 없이 구원에 관한 것은 신속히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빌립은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비록 이해하는데에는 우둔하였으나 부지런히 영적인 문제를 추구하고 생각하는 사라밍었다. 합리적인 생각을 쓸어 버리고 주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의문도 없애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찾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였다. 과학적인 방법과 실용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과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 능력과 존재에 대하여 우리들의 한정된 지식에 대하여 깨어서 주목하시기를 원하신다.
맺는 말
1. 그의 생애
초대교회의 문서들은 소아시아에서 성교하였다고 전한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둥지에서사역했는데 자주 갈라디아 지역을 순회하였다고 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불란서 고올(GAUL)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 곳 가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히애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면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서 빌립을 기념하는 교회당에 안치 되었다.
2.교훈
1)말씀의 권위 앞에 내 생각을 맡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2)내가 말씀을 받았을 때에는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3)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이 우너하시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결다으로 옮겨지기
위하여서는 내 주변에 좋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혼자의 생각은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성도는 교제하라.
4)주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
신앙의 성장괴정에는 위심과 회의가 있어서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질문을 드리면서 계속 주님 앞에 있어야 한다.이것이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빌립보서 4:8-9) 함께 읽읍시다.
생각하라// 행하라//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되자
열두제자연구.7 ======================= 정직한 사람 : 바돌로매 ======================= (요한복음1:43-51) 들어가는 말 1.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제자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2.이름의 뜻(Batholomew // Nathanael) 1)바돌로매//그는 왕족의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실제로는 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이다. 2)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이다. 3.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 마태, 누가, 마가과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요21: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한다.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요한은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은 친구였으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본 론 1.나다나엘은 성경을 상고했다. 1)나다나엘은 묵상했다. 무화과 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께서는 “너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를 찾았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다.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마음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늘 묵상하는 나다나엘의 습관에서 생긴 것이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다. (예)우리는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십대의 아이들은 귀가 아프게 라디오와 녹음기를 틀어 높으며 어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리비젼을 켠다. 우리는 또 매우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서 필요한 것은 시속 100km이상 달리는 스포츠카와 흔들의자“라고 비꼰 일이 있다. 나다나엘 시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절실히 필요한것이다. *누구든지 조용하게 생각하고 기도할 장소를 가져야 한다. //이삭은 한밤중에 들로 나갔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과 친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을 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후 은밀한 곳을 추구했다.」고 쓰여 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던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홍수와 같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회개했다.” 2)나다나엘은 기도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철저하고 규모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기도실의 벽을 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3)나다나엘은 성경을 연구했다.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 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다. 성경이 세계의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순전한 호기심에서 읽기도 한다. 성경의 문학적 가치 때문에 읽혀지기도 하며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하므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중보자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말씀하셨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마찬가지로 나다나엘도 메시야의 약속을 믿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즉석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2.나다나엘은 회의론자였다.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열심으로 설명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나?고 물었다(요 1:46)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나다나엘이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나사렛의 배경을 이해한 것은 부활과 다락방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난 후의 일 일것이다(마 2:23/눅24:44-48)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다. 이 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도 못할 분아니라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성경을 끌어와서 해석한다. 정직한 회의론은 빛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나다나엘의 결심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적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해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다. 이들의 편견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인격과 위엄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한편 나다나엘의 정직한 회의론은 더욱 상고하여 빛을 찾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의 개방성은 그의 성실한 정직한 마음은 가서 직접 보기를 원했다. 3.나다나엘의 큰 발견 두 사람은 빌립이 예수와 헤어진 장소로 갔다. 빌립은 속에서 안달이 났고 나다나엘은 좀 흥분했다가 깜짝 놀랐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다나엘의 모습은 이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1)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롬 9:6-8). 육신의 씨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행하며 그리스도에 앞서 메시야의 임하심을 간절히 고대하던 조상들과 같은 영적 신앙을 갖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은 영적인 씨에 속하도록 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나다나엘 속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교활하거나 속이는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 위선도 없고 간사함도 없기 때문에 성격은 맑은 물처럼 투명했다. 그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숨겨진 동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하고 속이는 것까지도 용인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의 행운은 이루 말할수 없는 귀한 보석(예수)으로 인도해 주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함과 위선에 진노하고 꾸짖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격을 속이지 않고 숨겨진 동기가 없다고 칭찬하셨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황하면서도 나다나엘은 솔직하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했다(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1:48)하시는 메시야의 시원 대답이 의문을 풀어 주었다. 확신을 가진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하였다. 베드로나 도마의 경우 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다(마 16:16/요20:28)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은 완전히 깨달았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기적을 이루시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 기적이 성취되면 뒤이어 또 기적이 성취되었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경은 눈을 뜨며, 벙어리는 말을 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지고 큰 무리가 먹으며, 폭풍은 잠자고, 죽은 자는 살아났다. 때로는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이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배신의 밤이 오자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 쳐형을 당하셨다. 이 때부터 부활이 있기까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은 완전히 죽어있는 듯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파할 결심을 하는 새로운 삶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며 이 사닥다리는 죄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준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깨닫게 되었다. 5. 생애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맺는 말 1.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이다. 자기의 약점을 끝 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개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자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열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자. 그때 부터 교정은 시작된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준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온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는가? 보통 ‘네 이미 잘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이다. (예)사랑을 고백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불평을 하면 더욱 한심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고백이라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시인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나다나엘은 고백의 중요성과 영감있는 아름다운 고백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진실하고 조용히 주님을 따라가며 생애를 주님 위해 바친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수 있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꼐신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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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6:12-19)
들어가는 말
1.이름
열 두 사도 가운데는 잘 알려진 시몬 베드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셀롯 시몬 두 사람의 시몬이 있었다. 열광자의 이름은 사도들의 네 가지 명단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마 10:4/막 3:18/눅6:15/행1:15). 어느 전설은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를 좇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전한다. 신약성경에는 셀롯 시몬의 개인적인 역사가 없을 뿐 아니라 열 두 사도의 거의 끝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한 재능 있든 없든 그의 이름은 그가 열광적이며 성급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본 론
1.시몬은 열광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마지막으로 강력한 지파로 등장한 셀롯(열심당)등 예수 시대에는 여러 파가 있었다. 시몬은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한다. 사실상 카나나이오스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인데 이는 누가가 고쳐서 “시몬”이라고 부른 단언이다(눅 6:15). 가나안인이라고 잘못 쓰여진 단어는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옳게 쓰여진 카나나이스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명칭”이다. 시몬은 유대의 극단주의자이다.
1)셀롯(열심당)의 기원
주전 167년예루살렘 근처서 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사움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그후 “대장장이”로 알려진 장남인 유다 막카베오가 지도자로 계승되었으나 로마군의 정복으로 막카베 시대는 막을 내렸다.
2)로마제국시대(해롯 왕)
외교적인 방법으로 준평화 상태를 유지했으나 그러나 헤롯이 죽자 팔레스타인은 중에 갈릴리 태생 유다가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부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
을 무장시켜 유혈폭동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어 유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퀴리노는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유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혈참극 속에서 유다는 살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셀롯이라고 알려진 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3)바라바
외국의 세력에는 단호하게 대항하는 혁명주의자의 이름을 가진 셀롯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때 무모하고도 냉혹하게 모든 이익을 포기해 버렸다. 이들은 살인과 폭동죄로 복역하다가 예수님 대신으로 석방된 셀롯 사람 바라바의 착상이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때 셀롯인들은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면서 실질적인 내란을 일으켰다. 셀롯인들은 포위, 공격하는 로마군에게 장기간 대적하여 그들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4)사해의 서쪽 해변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사다에는 천여 명의 셀롯인들이 최후까지 로마군에 항재하다가 지도자의 불을 뿜는 열변에 호응하여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도 끊었다. 그들은 광적인 애국자이며 자유투사였고 로마제국의 점령에 항거하는 과격파였다. 셀롯 시몬의 종족들은 외국의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투쟁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고무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음모를 꾸미고 종교적인 열성이란 이름을 빌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난폭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시몬은 그와 똑같은 주의, 주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정치적인 모험은 가금 더 큰 위험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2.변화된 시몬
아주 열광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용하게 될 수도 있다.
시몬은 주님에 의하여 변화 되었다.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인가? 유유상종인가?
1)시몬이 온유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 이끌렸을까?
첫째로, 예수님은 대단한 열성을 가진 분이셨다.
자신의 안락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하였다. 너무도 힘겹게 일했기 때문에 어느 날 격노한 폭풍우 속에 있는 배에서 잠이 든 때도 있었다. 예수게서는 생활하면서 최종 목적을 위하여 온 정력을 �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방해와 역경 속에서도 죄절하지 않았고 꺼지지 않는 정열을 가지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시몬이 꿈꾸고 있는 것보다도 더 신성한 왕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시몬의 새대에는 가난한 자는 마음대로 강도질을 하고 과부는 재산을 사취하고 일꾼들은 낮은 품삯과 불법적인 세금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이상 핍박을 받지 않을 살기 좋은 시대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시몬은 귀를 기울였다.
셋째로, 시몬은 직접 기적을 보았다.
그는 휴머니스트였기에 병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며 죽은자를 사리는 등 예수께서 성취하시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이전에 시몬은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을 본 일이 없다.
넷째로, 시몬은 예수께서 귀신을 쳐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게서 이방인의 단을 폐하고 환전상을 좇아내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것을 시몬은 목격했다. 시몬은 부패하여 민족에게 도무지 흼아을 줄수 없는어 유대교에 대한 이 조치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의거라고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다섯째로, 시몬은 자신의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임을 밝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요 3:13)
유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의 인자가 이 땅에 내려와 사악한 무리들을 멸하고 신성한 왕국에서 공의를 펴 영원히 다스린다고 예언했다. 시몬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언제인가 로마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혁명을 위한 능력을 가진 개혁자를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 메시야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미 임하였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도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세울 정치적인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음에서도 볼수 있다.
2)예수께서는 왜 시몬을 원하셨을까?
사도 가운데 셀롯인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심을 받는 예수님의 사역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몬을 택하신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여론에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시몬에게 주의를 환기시켜고 격렬한 시몬의 마음을 가라 앉히셨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는 데에 타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무시한것 같다. 예수께서는 조용한 태도를 갖거나 피동적으로 순종하는 무리들을 일률적으로 사도로서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각양각색을 망라한 소규모의 집합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시몬은 위험스러운 것을 맏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3)시몬은 반대자와 화해했다.
마태와 시몬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을까?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다. 마태는 로마제국의 도구였으나 시몬은 압제자의 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대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잡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것이다. 시몬과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능력을 증명해 주었다. 예수게서는 인간과 화해하시고 인간들은 서로 화목하였다.
4)시몬은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열광 그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정열을 좇는 목적에는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열정은 이성을 제약하는 수가 많으며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수도 적지 않다. 때로는 사람의 편견이 열광적인 색채를 띄게 되면 편견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지식이 없는 열광은 그릇된 교리나 이단, 심지어는 종교재판에까지 공격적으로 돌진하게 만든다. 잘못된 열광은 상대편이 진실하게 되는 사이에도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열광적으로 파괴적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를 시몬도 아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시몬의 열광은 자제되고 정화되어 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만일 족쇄를 벗어난 그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되겠는가? 주님은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셨다. 비록 셀롯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도들은 셀롯 시몬의 의견에 동정했을 것이다. 시몬의 열정은 사도들 전체에 불을 당겼다. 그의 열정은 쉽게 옮겨졌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불붙게 한다.
5)시몬의 미움은 사랑으로 변했다.
십자가를 위하여 칼을 포기한 시몬은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십자가의 처형이 있던 전날 밤에 그는 다락방에 주께서 열 명의 제자앞에 나타나신 첫 부활절에도 참석하였다.
주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시몬의 정치적인 야심은 온화한 포부로 바귀어 부드러워졌다. 호전적인 기질은 전도활동의 동기로 변하였다. 왕국에 대한 의견은유대를 위한 편협한 애국심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정열로 성장했다. 생명을 위하여 압제정권과 큰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통하여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깨달았다. 주님을 만나고부터 시몬은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게 하면서 온화하게 변했다. 증오로 시작한 사람이 사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3.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뜨거움이 필요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단한 열성으로 증거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행 17:6)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 열정 때문에 수십 년이 흐르기도 전에 복음은 힘차게 퍼져 나갔고 3세기가지 로마제국의 십분의 일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학생이 학문 속에서 전문지식을 얻기 위하여 한밤중에 기름불을 땠다면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시간을 들였다면 당신은 그와는 좀 “다르다”. 당신이 주일과 똑같이 월요일에도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단히 신앙깊은 사람이다.
이것은 사도의 시대로 되돌아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복음을 말하자 총독 베드로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라고 크게 소리쳤다. 만일 베스도가 무덤에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 바울과 자기의 위치를 바꾸고 싶을 것이다.
마리아는 일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기름을 발라 드리며 주 예수께 아낌없이 많은 것을 바쳤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은 것 모든 것을 진심으로 계산해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이도의선교사 헨리 마틴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했다. 혜린 마틴은 인도의 해변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불태우고 싶다”고 했었다. 스펄젼은 성실함이 영혼을 전도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자질이라고 말했다.“당신의 교회에 어떻게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하는 질문을 받은 스펄젼은 “열성을 가진 열광자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게 하듯 하라”(골 3:23)고 역설했다. 베드로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면했다.
셀롯 시몬은 예수님에게 무조건 감동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장래에 천국이 우리의 집이 된다는 것과 시험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살펴 주시는 구세주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을대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서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진실로 영원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에 더욱 감동한다면 우리도 시몬을 더욱 많이 닮게 될 것이다.
4.시몬의 순교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과 바벨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페르샤에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몬의 상징은 성경에 누운 물고기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오순절 후에 시몬이 그 어떤 제자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철저하게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시몬은 우리의 냉담함과 영적인 불구됨을 꾸짖는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맺는 말
1.자기의 개인적 야먕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다.
보인의 야망은 민족해방이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복음화에 있으을 알았을 때, 그는 과감히 자신을 두렸다. 사람마다 자기의 소원이 있고 자기의 이사이 있고 자기 뜻이 있고 열심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라는 사실이다. 내 야망이 준미의 뜻 보다 커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수가 없다.
2.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과 조화
진리를 절대로 타협할수 없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의 소산은 다양하므로 이를 양심의 자유라하고, 다양할수록 발전한다. ‘모든 것이 다좋으나 저 사람이 있어서 싫다는 사람은 좀더 자라야 한다. 더 성숙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의 생각을 용납해 주는데 있다.
3.성숙한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던 훈련의 배경
H.S의 지배에 자신을 맏겼을때 시몬이 시몬되었고, 복음의 일선지도자가 됨에는 H.S의 도우심이 있었다.(행 1:6) RA. Torry는 “셩령을 얼마나 붙드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붙느시느냐가 문제이다”라고 했다.
「주여! 오늘 성령으로 붙잡힘 받아 주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말하지도 말게 하시고, 시작도 말게 하소서」
##찬양과 통성기도로 마칩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전 기도했나요?
열두제자연구.8 ======================= 의심하는 사람: 도마 ======================= (요한복음1:43-51) 들어가는 말 1.별명 1)“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나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기 쉽다. 2) “의심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불려 왔다. 의심할 바 없이 도마의 별명은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잘못 이해하게 하는 요소도 있다. 눈에 뜨이는 그의 특징은 정직한 의심이다. 그는 진리를 알려고 질문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진리를 듣고 한 번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전심으로 그 진리를 따랐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화나는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요한복음에서는 도마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부활의 신비를 믿고 감동한 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몇 가지 증거 가운데 절정 단계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성실한 의심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3)“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 잘하는 사람“이란 별명이 도마에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2.제자 서열 도마는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제외하고는 새 복음서에서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1)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째로(마 10:3) 2)마가과 누가복음에서는 다 같이 여덟번째로 기록되었다.(막 3:18/ 눅 6:15). 3)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번째로 기록되어 있다(행 1:13) 4)요한복음에는 3번 언급된다. 요한은 부활 후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들 가운데 그를 포함시켜 디두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요 11:16) 3.성경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도마는 염세적이었지만 헌신적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아마 도마의 이중성격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인 디두모로 불리우게 되었을 것이며 ”쌍동이“(디두모)란 별명이 어울리기도 한다, 본 론 1.도마의 용감한 염세주의 (요한복음 11장 1-16절) 주님의 명성이 대단히 널리 퍼졌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폭도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나면서 제자들을 유대에서 요단으로 건너가는 곳인 비교적 안전한 베레아로 인도하셨다. 그곳에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을 기다린 후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보러 베다니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을 밝히셨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하나이까?”(요 11:8)고 여쭈었다. 제자들의 반대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요11:1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죽음이 아닌 육체적인 휴식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가자고 하는 것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요 11:4), 너희들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요 11:14-15). 1.유대로 돌아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의 거리를 좀 두고 바라보기만 하거나 마치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제의 했다. 도마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베다니로 갈 각오를 다짐했다. 우물쭈물하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집결시키는 용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지도자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였다. 그 용기는 그의 회의심을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땅으로 제자들이 발길을 재촉하였다. 2. 불완전한 도마의 용기 이 말만 본다면 그는 의리있고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침울하고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도마는 사물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의사와 능력을 가지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용감하였으나 도마의 마음에는 이판사판 이래저래 죽을 것이라면 두렸기는 하지만 지금 죽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를 너무 꾸짖지 말자. 깊은 실의에 빠졌던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라고 기도했으며 다윗은 우리가 항상 쓰는 말씨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고 울부짖었다(시42:5) 2.몹시 당황하여 질문하는 도마(요한복음 14장 1-7) 주님은 유월절 경배를 마치고 작별의 말씀을 하셨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제자들의 소망과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진리가 오리라는 제자들의 확신의 위험한 공포가 따랐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실로 새로운 시작임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배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축복이 내리는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셨다. 이 때 당황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요14:4)라고 말씀하시자 더 참을 수 없는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5)라고 여쭈었다. 주님의 사역이 죽음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도마는 이해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천국으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상에 왕국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의문을 도마는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의문은 믿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기 보다는 착각이나 혼란 때문에 생긴것같다. 도마의 질문에는 정직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마는 여러 가지로 추리해 보는 제자들의 의문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믿음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마의 의문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도마에게 은혜를 입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는 표본이요, 선생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약 속에 있는 예언과 상징과 표적을 성취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모든 것이시다. 3.도마의 정직한 의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날 밤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때에 그는 바위산 골짜기를 배회하거나 한적한 산을 오르면서 고독과 슬픔속에 눈물짓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는 왜 참석하지 않았을까?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현대의 도마는 “하루 종일 힘들여 일했더니 너무나 고단해, 다락방까지 걸어가려면 내가 너무 지칠거야”라고 양�를 구할 것이다.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 곳에 계시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마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에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조문을 하게, 그러나 그리스도는 안계실 걸세”라고 말했다. 예화) 카나다의 어느 도시에서 선거로 당선된 기독교인 시장은 당선된 직후 비서에게 “수요일 밤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은 하지 말게”라고 부탁했다. 이상하다는 듯 비서가 쳐다보니까 시장은 “수요일 밤에는 나의 주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네. 나는 주님과 만나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하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약속은 ㅇ하지 않을 걸세”라고 설명했다. 그 도시의 시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빠지지 않고 수요일의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가 주님의 집에서 경배하지 않으면 많은 은혜를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도마는 여러 가지를 잃었다. 1)도마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 텅빈 무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때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닫아 걸고 제자들은 그 날의 당황스러웠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우뚝서셨다. 이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그 가운데 자신도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18:20) 2)도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그날 밤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어떻게 예언했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마음은 불이 붙고 밝아졌다. 그러나 도마는 구약의 예언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 에언을 배우지 못하고 말았다. 3)도마는 믿는 자와 친할 기회를 잃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아직도 하나님이 갈고 닦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칠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로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에 머물러야 한다. 분명히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므로써 하나님의 자손들은 강건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예)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한다. 왜 한번도 빠지지 않는냐는 질문에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심 있어도 교회에 빠지지 말라.성도의 모임에 있으면 성도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주님과 만나고 교제한다는 사실이다.이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이론적 증명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한 순간의 체험이 눈 녹드시 다 사라지게 만든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의심이 사라진다. 4)도마는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었다. 예수께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고 이미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셨던 베드로를 제외하고 제자들이 죽은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다. 어찌된 일인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서 계시지 않은가! 살아계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20:19)라고 축복해 주셨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은 채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가르침과 영감을 받는다. 5)도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임받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하시고, 또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눅 24:27-28/요 20:21)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해 주셨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명을 부여받지 못했다. 6)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 유령인줄 알고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손,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에게 만져보고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못자국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설명할 때 못자국의 상처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도마는 제자들의 설명에 대하여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였다(요 20:21-25) 도마는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와 열 제자들의 증거를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실증적인 방법을 고집했다. 정직한 의심은 강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다. 7)절망적인 의심에 잠겨있었지만 도마는 확신을 가지려 하였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한결같이 거듭되는 다짐은 다음 주일의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도록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다. 도마는 실망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눈은 도마를 찾으시더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요 20:26-27)고 부탁하셨다. (예화)빌리그래함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라 할때 나는 오늘 아침도 대화를 나누었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하면 이는 웃기는 일이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갈6:4) 8)도마는 오래동안 추구하던 증거를 찾았다.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아무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이 열병있는 이마를 만지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어린 아이를 축복해 주는 것을 도마는 여러 차레 직접 본 일이 있다. 이제는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볼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말씀도 채 마치시기 전에 도마는 무릎을 굻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울며 고백하였다(요 20:28). 이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며 이전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의 어떤 형태의 확인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훌륭한 것이다. 도마의 음울한 의심은 빛나는 믿음으로 변하였다. 예수께서는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셨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증거를 찾는 믿음은 어느 편이 더 훌륭할까? 한 때 의심을 많이 하였던 도마는 의심을 풀면서 자기의 갈 길을 찾았다. 도마가 그 동료들 가운데서 믿음이 가장 확실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의심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안믿겠다는 것은 어둠에 그대로 있겠다는 것이기에 불신앙의 죄이다. 정직한 의심과 불신앙은 다르다. 주님께서 도마를 제자로 삼으셨던 이유는 바로 의심나면 물어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오늘의 우리들도 모르면 물어보자.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일수록 총명하여 진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기를 바란다. 9)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상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상기시며 준다. 상처는 금과 은처럼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표지가 될 것이다.(벧전 1:18-19) 예화//부모가 없는 어린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 집에 불이 났다. 이 층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년을 구하려고 애쓰다가 할머니는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불타는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살려달라는 소년의 울부짖음이 불꼿을 가르면서 흘러 나왔다. 집의 정면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한 사나이가 나와 이 층 창가에 닿을 수 있는 쇠파이프를 찾아 가지고 집의 뒷편으로 갔다. 몇 분간 그 사나이는 보이지 않더니 팔에 소년을 켜안고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 가운데 사나이는 소년을 목에 메고 뜨거운 파이프를 내려 왔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이 소년을 보호해 줄 사람을 결정하려고 마을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모인 사람들은 짧은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하였다. 첫번째 사람은 “나는 큰 농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오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두번째 사람은 “나는 교사입니다. 나에게는 큰 도서관이 있어요 소년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습니다”라고 자기가 소년을 맡는데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발언을 했다. 이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이 소년에게 농장, 책, 교육, 그리고 돈이나 여행등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소년이 함께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의장은 “또 말씀하실 분 없습니까?”라고 의견을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끌지 못하고 맨 뒷자리에 있던 낯선 사람이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얼굴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정면으로 나와서 그는 소년 앞에 똑바로 섰다. 낯선 이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꺼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마루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사나이는 손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상처를 쳐다 본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나이는 소년의 생명을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손은 드거운 쇠 파이프를 잡고 오르내릴 때 심한 상처를 입었다. 소년은 껑충뛰어 낯선 사나이의 품에 안기며 그에게 자기의 생명을 의지하였다. 농부가 일어나고 교사도 갔다. 부자도 가고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소년의 생명을 구한 그 낯선 사나이만이 외로이 남긴 채 모두 가버렸다. 상처입은 손은 다른 어던 말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연설을 한 것이다. 결 론 오늘날 많은 이해관계는 우리의 헌신봉사와 싸움을 걸고 있다. 나이가 젊거나 늙거나 가릴것이 없이 돈, 교육, 명성 환락의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의 손을 들어 올림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분이 수십 세기를 왕래하신 길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꼭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 (마태복음 10:2-4) 들어가는 말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던 천사가 성전완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건물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누가 상을 받을까?”추측을 했습니다. 설계자일까? 아니면 청부업자인가? 조각가? 목수? 구리를 다루는 기공자일까? 건축일을 하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기 때문에 완성된 성전은 걸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시골의 노인이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도데체 이 여인이 무슨 큰일을 했다는 말인가? 이 여인은 石公이 대리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데리고 오는 황소에게 건초를 충실하게 먹였을 뿐이었다. 작은 일과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작은 야고보는 말하고 행한 기록이 없다. 다만 12제자의 일원으로 선택을 받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는 것만 남아있다. 학자들은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한일이 없어서 잊혀진 제자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본 론 1.이름 주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는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3명있다. 교회사에서 이 세사람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자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1)12제자 가운데 중요한 제자 //요한의 형제로서“우뢰의 이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격 급한 사람인데 헤롯대왕에 의하여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한 분이다.(행12:1) 2)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주님 부활하신 후, 율법에 대한 이해를 둘러 싸고 예루살렘에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발언하였다.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한 후,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부각된 사람이다.(행1:14, 15:13) 그는 처음 부터 형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전15:4) 이때 결정적으로 주님은 단순히 육신적인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구세주로 오신 분이심을 신뢰하고 그의 삶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3)12제자 중 9번째로 기록된 작은 야고보(마10:3, 막3:18, 눅6;15, 행1:13) 2.가족관계 1)아버지는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있엇던 마리아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야고보”라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아교보보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불려졌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사회의 어느 회사 같은 데서 일을하다 보면 Miss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흔히 “Miss김”이라고 부를 때, 여러 Miss김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하게 되므로 “작은 Miss김, 또는 큰 Miss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별할 필요에 의해서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이 야고보는 키가 작았던 사람이며, 이 사람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알패오였으며, 요세라는 사람과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에게는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게 되면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는 세관에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레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마태로서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의 다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를 가리켜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가 야고보의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교 훈 1)열심당원이었다. 명단순서 도마(마태)->작은 야고보 ->다데오,시몬로 되어 있다.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다 민족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애국심을 가질때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애국심이 곧 신앙이라는 착각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 보다 더 크다. 이렇게 나라찾기 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민족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민족이라는 것보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더 숭고하고 더 위대한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족을 위한 열심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참으로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랑 선교회-김한식 선교사 *성서조선-김교신 정신을 요구되는 현장이 한국이다. 2)형제간 마태(세리)친로마-앞잡이 야고보(열심당)반로마-저격수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이상이 높으셨읍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로마인들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저항 속에서 그들의 청춘을 불사르던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으며, 그런가하면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지지 못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왜? 현실 참여를 안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기독교는 가진 사람에게도 예수가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꼭같이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입니다. 3)겸손한 사람 이 제자에 대한 별명을 “작은 야고보,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았을 뿐아니라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불평하는 무엇인가 말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은 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기 좋아했으면 한 마디 쯤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말이 안 되는 소리 한 마디조차 없었읍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숨어서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의 친구 이야기) 아리스다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 제자는 바울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설교한 일도 없습니다.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또 위대한 어떤 가르침을 교육시킨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어려울 때는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됩니다. 바울이 배에서 파선하고 어려웠을 때에 아리스다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인도인 섬에 도착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이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굉장한 일을 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꼭 있어주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잉 되어 주는지요! 저는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제가 설교 할 때에 그냥 앞에 앉아 있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설교자는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주는 사람, 이 사람은 작지만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정말 필요했던 제자였습니다. 4.순 교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다.” 유세비우스는 이 사람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약대의 무릎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늘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은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이 떠들며 아우성치고 있었을 때에도 말없이 문자 그대로 작은 구석에 들어가서 무릎 끓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작은 야고보가 아닌 야고보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보다는 기도를 더 즐기고, 설치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조용한 자리에서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며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하고 있던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유세비우스는 말을 계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서 이런 재미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제일 미남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에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보실 때 제일 미남을 뽑아내시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는 미남이었고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주님이 넘 좋아서, 떠들면 주님의 영광이 가리울까 봐 조용조용히 평생을 주님 앞에서 숨어서 주를 섬겼던 이 아름다운 제자 작은 야고보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습니다. 역사가 지나간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lstle)라고 바꾸었습니다. *벼룩-자기 키보다 200배 점프 *파리-성냥개비(비례-사람-6m나무든다) *1880년에 어느 이름없는 의학도가 학비 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여름에 너무 더워서 냉수 한 잔을 청하여 얻어 먹었다. 가난한 집에 우유를 가져다준 소녀를 눈여겨 보아 둔다. 20년후 병원의 외과주임은 어는 여인이 병원에 실려서 큰 수술을 받게되고 수술비 걱정을 하자 어느 분이 대신 지불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두었다. 눈물이 가득고여 감격어린채 편지를 본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적혀 있었다. “ 우유한잔으로 지불은 끝났습니다. Howad A. Kelly” 맺는 말 1.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 그것은 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하셨습니까? 생각나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씀을! 그런데, 이 세계에서 사실은 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작으면서도 제일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어느 민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구의 휴마라는 유명한 사람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이야기를 해서 현대인들은 다시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것만 생각한 나머지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좇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이어녕(문교장관)씨의 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는 작은 것을 지향하여 성공한 일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작은 것이 귀한 일을 하면 더 귀하게 여겨진다. 2.성실성 *교회 어려운때 꼭 나오는 사람!! *목사가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되라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처럼 작은 것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큰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큼직한 것에만 관심있고, 작은것에 소홀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요? 이 작은 야고보가 남긴 교훈은, 그는 별로 요란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별로 선전할 만한 것이 없을 지 모르지만 그는 “작지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허하게 자기위채에 서서 종의 직분을 수행하며, 설치지도 않았고, 참견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나 조용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던 아름다운 제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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