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3. 17:48ㆍ목양자료/2.설교자료
부서지고 받은 祝福 (창 32:22~32) 하나님은 야곱의 문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원수인 에서를 쳐서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야곱의 원수가 되어서 야곱의 자아를 깨뜨려버리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을 도우시긴 도우셨는데, 외부적인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고 야곱 자신의 죄 성과 자아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처절히 부수시고 그 다음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깨어진다고 하는 것은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크게 쓰시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아도 깨지지 않은 사람은 쓰시지 않습니다. ①구름이 깨져야 비를 내리고, ②곡물이 깨져야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③향유를 담은 옥합도 깨져야 향유 냄새를 내고, ④기드온의 삼백 용사들도 항아리를 깨어버릴 때 그 항아리 안에 있는 횃불이 드러났습니다. 이렇듯 죄 성과 자아는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 성과 자아가 깨어질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위대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지식이 연관이 되어서 사람은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1. 끈질긴 罪性을 인정할 때 자아가 깨어집니다.사람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끈질긴 죄 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깨어져야 할 죄 인 이구나’ 라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그 때부터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1)잔꾀를 부리는 야곱(에서에 대처하는 방법)①야곱은 잔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잔꾀를 다 부립니다. 짐승을 두 떼로 나눕니다. 한 떼를 형이 치면 다른 한 떼를 가지고 도망가서 자신의 살 궁리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떼로 나눈 뒤에 한 떼에 여러 종을 붙이고 이것도 여러 떼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 종들에게 형 에서가 물어볼 것에 대비한 대답도 준비시킵니다. “너희는 누구며, 이 짐승들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주의 종 야곱의 것이며 자기 형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준비를 다 마치고 야곱은 잠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습니다. 22절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②“밤에 일어나”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야곱은 가족들도 다 깨웁니다. 그리고는 가축 떼와 함께 모두 다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③야곱은 모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뒤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야곱을 붙잡습니다. 아마 야곱은 ‘에서가 보낸 암살범이 아닐까? 산적, 도적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순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고 많은 설교자들이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다”라고 설교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④하나님이 야곱을 붙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격자시고, 야곱은 방어자가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을 공격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야곱을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을 부서뜨리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죄 성과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이 상황에 오기 전까지 ‘나의 원수는 나를 죽이려 하는 형 에서와 나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외삼촌 라반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 죄 성이 깨뜨려지는 야곱그러나 지금 얍복 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은 그것이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짜 내 원수는 내 안에 있는 죄 성과 나의 타락된 본성, 나의 깨지지 않은 자아, 교만 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 뼈 정도는 0.1초에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환도 뼈 정도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과 날이 새려 할 때까지 씨름을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했다’라는 의미이기보다 ‘야곱의 죄 성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날이 새려하니 하나님께서 “나는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날이 새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야곱은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캄캄한 데서 씨름을 한 것입니다. 떠나시면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시니 환도 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 때 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에 맞지 않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미련한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을 고백 시키신 것입니다. 야곱이 대답합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야곱이니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사기꾼이요, 형 에서의 발목을 잡은 자요, 남의 것을 빼앗는 찬탈자요, 모사꾼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시작)▷(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예화: 부곡에서 사역할 때 꿈속에서 도깨비에게 목이 조여 다 죽게 되었을 때 “주-여 나를 살려주소서.”고백하니 거대한 도깨비의 형체가 고백할 때 마다 작아져서 죽이고 승리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성을 인정하고 고백하자 그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우리 모두 하나님께 복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자아를 깨뜨리는 고백이 늘 있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이름을 바꾸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합니다.)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는데 먼저 ‘이스라엘’이라고 이름부터 바꿔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 죄 성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내가 겪고 있는 문제, 고통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사기꾼이요, 내가 위선자요, 내 안에 끈질긴 죄 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슴을 칠 때 우리 삶에 축복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 꽤 괜찮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 성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자신의 죄 성이 깨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能力을 깨닫게 되고 祈禱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깨어지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른 인정이 있게 됩니다. 야곱은 환도 뼈(엉덩이, Hip)가 위골되기 전에 하나님과 대등한 힘으로 겨루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려고 하자 하나님의 가벼운 터치로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깨지기 전에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존재입니다. 대개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와 동행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감사해야 하고, 불순종해도 “그렇구나!”하고 그저 수염이나 만지는 존재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잠깐만 손을 대셔도 인간은 금방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을 지내고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인생 말년에 건강을 잃고 연약해졌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 39편 11절에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 다윗은 자기가 강성할 때는 연약함을 몰랐으나 노년에 이르러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자신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환도 뼈가 위골되고 나서야 자기가 씨름한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는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그는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되었을 때 “내일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데 나를 쳐서 이렇게 절게 만드시면 내가 싸울 수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는데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는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붙든 것입니다.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나님이 가지 아니하시면 날이 밝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어 죽게 되지만 그래도 못 가게 합니다. 이것은 죽기 살기로 축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축복으로만 살 수 있겠다. 해서 하나님을 붙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 깨어진 야곱이 받은 축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하십니까? 깨진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얼마나 자신만만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했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며 예수님을 꾸짖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 떠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마태복음 26장 33절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5절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난 후에 깨져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방인의 큰 사도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된 후에 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이미 환도 뼈가 위골된 야곱을 하나님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붙드는 것을 뿌리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그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시며 축복하시고, 처절하게 패배한 야곱에게 도리어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하시며 승리자의 이름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야곱이 무엇을 이겼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야곱과 싸우셔서 질 리가 있는가?’라며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양치는 목자들에게는 이런 행습이 있습니다. 양이 낭떠러지를 가다가 밑에 맛있는 풀이 있으면 1m정도는 폴짝 뛰어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더 큰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풀을 다 뜯어 먹고 난 뒤에 뛰어 내린 1m를 다시 기어오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목자가 잡고 올라오라는 의미에서 로프를 던지면 자신을 잡으려는 줄 알고 오히려 낭떠러지로 뛰어 내려버립니다. 때문에 목자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양이 배가 고파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기진맥진할 때 로프를 던져 양의 몸을 감아 건져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이와 같이 자아가 깨지고 부서진 후에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성공하는 능력의 비결입니다. 結論: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대거나 원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원수는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은 머리와 곧은 목, 교만한 마음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면 그것이 바로 원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생애와 삶을 맡기시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축복의 길이라는 것 입니다. 자신의 자아가 깨지지 않고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원수인 자아가 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또한 야곱처럼 하나님과 일대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인간은 진실해지며, 자신의 죄 악 된 모습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이 일대일의 교제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 다른 문제는 햇빛에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祝福의 비결과 方法 (갈 6:7-10) 祝福의 비결과 方法 (갈 6:7-10) 2004.10/31주일 밤1640년 “하버드”라는 영국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이민 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은 700 파운드의 돈과 200권의 책이 그의 모든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보잘 것 없는 재산으로 유능한 목사를 키워내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보스턴에 하버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대학은 많은 석학들과 목사를 배출하여 인류에 크게 공헌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버드라는 사람이 뿌린 씨의 결실의 한 부분입니다.저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의 3가지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1. 심어야 거둘 수 있습니다.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법칙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자연법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심어야 거둘 수 있지 심지 않은 데서는 절대로 거둘 수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둡니다. 진실을 심으면 진실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며,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물질을 심으면 물질의 축복을 거둡니다.반면 원망과 불평을 심으면 원망과 불평을 거두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두며, 부정적인 생각을 심으면 부정적인 것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믿어야 됩니다.개미는 뜨거운 여름철에 식량을 열심히 물어다가 자기 집에 쌓았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노래를 부르며 한가로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개미는 창고에 쌓아둔 식량을 먹으면서 평안히 지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개미 집 앞에서 구걸했습니다. 개미는 베짱이에게 "왜 여름 내내 수고하지 않고 놀기만 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그 무엇을 거둘 수 없는 겨울이 닥친 후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열심을 다해 심으면 그 댓가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부지런함으로 심으면 부지런함의 댓가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마 25장에 보면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한 주인이 먼 외국으로 떠나면서 종 3명을 불러 한 종에게는 5달란트, 한 종에게는 2달란트, 한 종에게는 1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얼마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나누어 준 달란트를 회계했습니다. 5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여 5달란트를, 2달란트 받은 자는 2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다같이 칭찬 받았습니다.그러나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받은 돈을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1달란트 받은 종을 꾸짖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 25:26-27) 그리고 그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대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마 25:30) 이것은 심지 않은데서 무엇을 거두려고 하는 사람을 책망한 말씀입니다. 시 128:2에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피땀 흘려가면서 노력하면 그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심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되고 형통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2. 심은 종류대로 거둡니다.8절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그 심은 종류대로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1)육으로 심고 썩을 것을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사람이 자기 본능이나 충동이나 기분대로 인생을 산다면 그 사람은 육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 날에 썩어질 것밖에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이것이 가장 큰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인생도 있습니다.2)영으로 심고 영생으로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런 사람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이 주시는 소원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마 7:16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심은 그 종류대로 거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에 야곱의 가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배고픈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①그는 팥죽 한 그릇의 속임수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버렸고, ②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이처럼 가장 가까운 자기 가족을 속인 야곱이 나중에 어떤 일을 겪게 되었습니까? ③자기 아들들에게서 속임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사랑하는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된 것입니다. 또 야곱을 속인 아들들 중에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며느리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여 며느리와 성 관계를 맺고 말았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선을 심으면 항상 선을 거두게 됩니다.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선을 심었습니다. ①그는 종으로 팔려가서도 보디발의 집에서 선을 심었고, ②감옥에 들어가서도 선을 심었습니다. ③총리대신이 된 후에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종으로 팔았던 형들을 선대하였습니다.그 결과 요셉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무엇으로 심든지 그 종류대로 거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 18:20에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이것은 영원토록 불변하는 성경(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선을 심는 사람은 선을 거둡니다. 불의를 심는 자는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으나 결국 불의의 열매를 자기 속에 맺고 맙니다. 사랑을 심는 자는 사랑을 거두고, 미움을 심는 사람은 미움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어야 합니까? 어떤 것을 심어야 하며,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물론 그 과정이 비록 어렵고 힘들지라도 영광된 미래를 바라보며 좋은 것을 심는 성도,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때가 되어야 거둘 수 있습니다.어떤 노인이 뜰에 과수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도대체 언제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겠다고 심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태어났을 때 이 뜰에 있는 나무들은 열매가 풍성했소. 그 나무는 우리 아버지께서 자손들을 위하여 심어놓았소이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처럼 심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심은 것이 때가 되어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정한 때를 따라 결실합니다. 아무 때나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열매를 맺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나무는 다음해에 열매가 달리고 혹은 3년, 혹은 5년, 혹은 단 년에 열리는 과일도 있습니다.종류마다 그 열매가 다르듯 또한 나무의 종류마다 열매 맺는 기한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심는 것은 내가 거둘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9절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지금 내가 심는 것을 내가 거둘 때도 있지만, 내가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거둘 때도 있고 내 후대의 자손들이 거둘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심지 않으면 후엔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는 심는 그것으로 기뻐하고, 심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심는 그것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거두게 하심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 1:7절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차게 되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원리요,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믿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結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계속 심어가는 과정이 인생 아니겠습니까?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만 심고 있지는 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을 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쏟는 노력, 수고, 재물이 과연 성령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썩어질 것을 거둘 수밖에 없는 육체를 위한 것인가 이 시간 깊이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교회를 위하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하는 이 일들이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축복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에 힘써야 될 줄을 믿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원리를 명심하고 이제 우리의 남은 생을 하늘나라를 위해 심으십시다. 그러면 우리 당대에 심은 대로 거두시든지 우리 후손이 분명 풍성하게 거둘 것입니다.우리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나님 사랑의 方法/ 롬11:11-16 2004. 10/24 주일 낮'나는 부모로부터 동생보다 사랑을 적게 받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으면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10명의 자녀든, 1명의 자녀든 자녀를 생각하고 애쓰는 부모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다만 손가락의 크기와 형태가 다른 것처럼 사랑의 방법과 형태가 좀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자녀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의 길이처럼 나는 적게 사랑을 받았다고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0개 손가락이 전부 길이가 같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손으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엄지와 애지는 작아야 하고, 나머지는 길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손이 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이런 모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길이는 다르지만 손이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심여를 기우려 만드셨는데 손가락의 길이가 다르다고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어떤 형태, 어떤 모양이든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모르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부지와 같은 모습입니다.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항상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우리들의 죄악 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시기, 질투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를 미워하기 때문에 질투를 표현하시는 것이 아니요, 헛된 것에 절을 하고, 마음을 쏟는 붓는 가증한 행위들을 볼 때마다 거룩한 질투가 일어나십니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세상의 어떤 종류의 거짓된 신들과 비교대상이 되지 못합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상 헛되고 망령된 것들을 신으로 섬기고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마치 내 부모의 사랑보다 이웃집 아저씨의 사랑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철부지 모습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깨우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질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무서운 표현이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①교회 관심은 사랑, ②부부관심도 사랑, ③연인관심도 사랑, ④형제 관심도 사랑 ⑤성도관심도 사랑입니다.하나님께서 어떤 때 질투하시는가? ①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질투하신다. ②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면 질투하신다. ③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질투하신다. ④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면 질투하신다.2, 분노하시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요즘 세상을 보면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닥치면 무조건 사람들을 모아서 궐기 대회를 합니다.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거침없이 말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때까지 투쟁을 합니다. 농사꾼들의 투쟁을 보면서 마음이 서글프기까지 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 자신의 이익을 위한 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계시며 그 삶이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아름다운 삶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법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는 어떤 행위도 서슴치 않는 악행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악행들이 얼마나 악한 짓인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분노를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3, 징계하시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징계와 감정은 다르다.)(신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자녀가 잘못하면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징계가 없는 자식은 버릇없는 독선주의자를 만듭니다.(잠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라고 말씀하심처럼 자녀에게 매를 드는 이유는 그 미련함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미련함과 나약함을 깨우쳐 주기 위해 징계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망가지도록 방치하는 방관입니다. 예화: 절도 33범으로 사형장의 이슬이 남긴 유언(나는 이렇게 만든 우리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은 성경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많이 징계하셨습니까? 세상에 이스라엘 민족보다 많은 시련과 아픔을 당한 민족은 찾아보기 드물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군인들이 총을 소지하고 거리를 다닙니다. 일단 유사시에 적과의 전쟁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주변국들은 항상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왜?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샬롬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소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보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①자신들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해 주고, ②정치적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③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깨우칠 때까지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통하여 자신들이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어떤 삶의 방향을 잡고 나가야 할지를 깨달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미워하여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를 행복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막대기와 같은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시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느 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 하셨 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 이니이다.』긍휼이라는 단어는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를 잘 표현한 예화가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한 비유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일만 달란트라는 빛을 진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3조억원이라는 거액입니다.(1달란트=6000데나리온, 1데나리온=장정 1일 품삯,(5만원) 50.000×6.000×10.000=3조억 원)한 사람이 이러한 빚을 진다는 것은 돈을 빌려준 주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주인의 신뢰 속에서 빌려준 돈을 잘 활용을 해서 빚을 갚으려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용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빚을 단 한 푼도 값을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종은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이때 주인은 그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간절히 주인에게 "내게 참아주소서 다 갚겠습니다."라고 간청을 합니다. 주인이 생각할 때에 그 종은 일만 달란트를 값을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이때 주인이 내릴 수 있는 판결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장에 감옥에 집어넣어 그 죄 값을 받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를 감옥에 넣지 않고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며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을 구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만이 ①그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②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긍휼하심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만 달란트의 죄의 빚을 진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모든 죄의 빚을 갚지 않아도 구원시키시기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結論: 성도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①때로는 질투하시는 모습으로, ②분노하시는 모습으로, ③징계하시는 모습으로, ④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합니다. 성경의 역사도 이스라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편협한 사랑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와 축복을 내리시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저주와 멸망을 내리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편협한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하는 하나님이실까요?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열방민족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이유는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로 보여주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우리를 먼저 택하여 구원받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웃을 구원시키시기 위한 모습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까지 폭 넓게 적용하십니다. 오늘 분문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바울은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의 방법과 표현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셔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동일한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14절에 소개합니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라고 말입니다. 11절에도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임하게 하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열방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자로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마저 자신의 생각과 야망에 맞지 않는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을 이렇게 외면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이스라엘 땅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게 되었고, 그 복음의 능력은 이방인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이스라엘 민족이 버린 복음을 이방인들은 받아들임으로 인해 영원한 기쁨과 자유 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인해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배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 사랑의 독특한 방법입니다.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①때로는 질투하시는 모습으로, ②때로는 분노하시는 모습으로, ③때로는 징계하시는 모습으로, ④때로는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품에 안고 인도해 주시고, 항상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며, 풍성하도록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늘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과 사랑으로 축원합니다
世上에 주목받는 敎會 (행 2:42-47) 2004.10/24 주일 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수많은 교회들이 부르짖는 구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모습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은 듯 이 땅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의 현장은 아직도 교회의 진정한 사명과 역할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교회의 영원한 목표일 것입니다. 인간 세계가 불균형을 해소하고 서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나눔과 섬김뿐이라고 합니다. 가난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서로 돌보며 좀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와 나누며 살라고 가난이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행적의 핵심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고아, 과부, 병자와 철저하게 소외된 자들에게 집중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마7:12,10:41,11:5, 19:21,25:35) 그렇다면 우리 이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 정말 선한 고민 좀 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간절하게 원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보다 훨씬 삶의 현실이 고통스러운 디아스포라(박해의 칼에 흩어져 나그네 된 사람들)였는데도 서로 돌보며, 섬기며, 나누고, 희생하는 그들의 모습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그러면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하시니 과연 교회의 사명이 무엇일까요?다시 한번 본문을 통해 교회의 진정한 사명과 세상을 향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세상이 주목한 초대교회처럼 우리 만나교회도 주목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1. 세상이 주목하는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에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에 있습니다.세상이 주목하는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doing)에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being)에 집중된 예수생명 공동체였습니다.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죽으심과 부활과 영생의 신앙이 확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명에 참여하면 백발백중 도중하차하고 맙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은혜 안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나를 흔들어도 끄덕하지 않고 심지 깊은 신앙과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구원에 감격하여 죽는 그 날까지 예수님께 감사하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며 충성하실 수 있는 확실한 신앙 자, 예수의 산 증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세상이 주목하는 교회는 성령 충만한 역사를 경험하며 사는 영적 공동체였습니다.(重要)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이라는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아-멘 성령 없이 산다는 것은 마치 사막을 지나면서 물을 가지고 가지 않는 어리석은 여행자와 같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이처럼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핵심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이 있었습니다. ①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갈급해하며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고 ②날마다 뜨겁게 찬송하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③약속대로 성령은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임하셨고 ④잠시 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자 회개의 역사와 함께 이처럼 세상이 깜짝 놀라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무엇이든 중단 되지 않고 공급할 수 있는 거대한 댐과 같습니다.성령에 대한 말은 많지만 성령 충만한 흔적이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과 교회들이 아닐까요? 3. 세상이 주목하는 교회는 구조와 형식에 대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어 교회였습니다.구조와 형식에 대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어 ①남녀노소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 되며, ②나누며 ③섬기고 돌볼 수 있었던 운명공동체였습니다. 과연 지금 이 시대의 한국 교회의 구조와 성도들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사명과 세상의 갈급한 요청에 응 할 수 있을까요?초대교회 성도들은 ①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는 회당모임(오늘날 교회 공적 예배)에 참여하고 ②곧바로 다양한 형태의 작은 모임(오늘날 구역, 목장모임)에서 가르침 받은 대로 이웃과 동료들과 나누고 섬기며 뜨거운 교제가 있었고 이들 소그룹 안에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이 쉽게 들어와 함께 하나 되고 주님을 영접하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목사 혼자서, 또는 몇 몇 일군들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사역자로 사명 자들로 뜨겁게 활동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귀한 사명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적용> 1. 정말 구원받고 천국을 소유한자로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사십니까? 2. 세상을 향한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3.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아십니까?
먹고 남는 풍요 (막 6:35~44)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우리 인간들에게 베푸신 역사는 놀라운 것임과 동시에 풍요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 없는 시대에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어두운 역사를 빛의 역사로 변화시키심으로 풍요케 하셨습니다.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셔서 희망을 가지게 하심으로 풍요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용서받을 수 없는 여인을 용서하신 일이 라든지,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자유하게 하신 역사라든지, 각종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 일들, 죽은 자들까지 살리신 일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행복을 되찾게 하시는 풍요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서 풍요한 삶을 창조하시고 성취시키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인생의 삶을 살아감으로 풍요한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양과 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갈릴리 동북쪽 해안 벳세대 들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각종 병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와 함께 여러 가지 말씀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각종 병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벌써 몇 일째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 이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6:8-9)에 보면 한 어린아이가 준비해온 작은 도시락으로 어린 아이 혼자서 한 끼의 식사로 먹을 수 있는 소량의 음식이었습니다. 이 음식으로는 많은 무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모인 무리로 배불리 먹고 남는 풍요한 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서본문에서는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풍요의 역사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풍요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허황된 사건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풍요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풍요케 하시는 역사는 어느 시대나 가능한 역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을 가질 때입니다. 풍요케 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데서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1. 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빈들이었습니다. 빈들이란 광야를 뜻하고 그곳은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불가능한 명령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자가 되도록 ‘너희가 하라’고 하셨습니다. 풍요의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문제에 직면하여 문제를 외면하거나 피하거나 포기하는 태도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는 풍요한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야이로 회당자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야이로의 집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낳으리라. 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병을 고치기 위하여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더할 뿐 아무 효험도 없이 병은 더욱 중해갔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의 옷깃을 만짐으로 고침 받았습니다. 불행한 삶을 풍요한 삶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여인의 하고자 하는 믿음의 태도는 풍요한 삶을 이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풍요는, 인간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하고자 하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4) 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눅5:5) 고 했습니다. 하고자 할 때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것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막2:11)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에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무덤에 찾아가 무덤을 막아둔 “돌을 옮겨 놓으라. 요11:39)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따라 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을 때에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그 말씀에 따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풍요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풍요의 역사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고자 하는 믿음의 적극적인 태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기독교의 풍요의 역사는 불가능한 중에도 하고자 하는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풍요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 예수님께서 축사하셨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실 때 풍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축사하다’는 말이 공관복음에서는 ‘유카리스테오’라는 말로 쓰였는데 이는 ‘감사를 돌리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축복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감사의 대상이 되고 축복하시는 삶을 살 때에 풍요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보험회사에 근무하던 베벨리 셰아(Beverly 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셰아는 건반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잊지 못해,....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이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것은 그의 어머니 ‘레아 밀라’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셰아는 이 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감사의 대상으로 예수님의 축복 속에 사는 삶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편에서 악인과 의인이 삶을 말하면서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이 의인의 삶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 함 같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한,(시1:3)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풍요한 인생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시는 삶을 살아가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 인생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감사의 대상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곳에 풍요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사용하셨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예수님께 드려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 이상의 사람을 먹이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시어 사람들의 질서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실 때 오천 명 이상의 무리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풍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풍요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될 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관리하시도록 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용하시게 될 때에 풍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 인생관, 내 믿음, 내기도, 내 삶의 방식, 내 수고,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은 주님이 관리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될 때에 풍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장날이면 시장터에서 황소의 뿔로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들고 있었던 장사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황소의 뿔을 자르고 갈라서 갈고 문질러 예쁘고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들었습니다. 뽑혀진 보기 흉한 황소 뿔이 그 사람의 손에서 값비싼 장식품으로 변하는 것을 신기하게 구경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사용하시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는 인생은 풍요한 삶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피 흘리신 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손은 사망권세를 정복한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손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는 삶은 위대하고 풍요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려짐으로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 될 때, 위대하고 가치 있는 풍요한 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고 열심이 있는데도 풍요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열심히 예수님이 관리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공헌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데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공헌과 봉사가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께서 관리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1-4)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관리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되어야 풍요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많이 배웠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의 의도에 따라 사용되고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교회에 유명하고, 많이 배웠고, 물질이 많은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 목회에 힘과 도움을 주는 근원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되느냐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출신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부로 거칠게 성장함으로 성품이 다듬어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쉽게 흥분하며,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부르시고 택하셔서 관리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사용될 때, 하루에 오천 명씩 회개시키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세금을 걷던 마태는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될 때 “마태복음서”라는 복음서를 집필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진흙일 지라도 예수님께서 침으로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는 것으로 사용하실 때, 그 진흙은 소경의 눈을 고치는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관리되어지고 사용되어질 때, 하찮은 것일지라도 수많은 대중을 먹이는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에 있을 때, 풍요한 인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지금 우리는 분명한 삶의 태도를 정해야 합니다. 하고자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 나의 삶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손에 나를 넘겨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의도대로 관리되고 사용되십시오. 보리떡과 생선 두 마리가 에수님께서 축사하시는 것이 됨으로 풍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남게 한 그 풍요한 삶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한 알의 밀 (요12:24) 한 알의 밀 (요12:24) 2004. 9/26 주일 밤신앙인은 한 알의 밀처럼 썩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한 알의 밀처럼 썩어지는 것일까요?이 한 알의 밀이 썩어진다는 개념은 시대적으로 해석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을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초대교회 시대, 처음교회 시대, 어머니교회 시대 또는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에서 한 알의 밀이 된다는 것은 곧 순교를 의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도 예수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기도 했지만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독교인들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기름 가마솥에 처넣어 죽이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자의 굴속에 넣어 죽이고,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기둥에 묶여서 산채로 촛불이 되어지면서 순교의 붉은 피로 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밀알은 곧 순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만일 우리가 살고 있었다면 우린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그러나 A.D 313년 그 잔인하던 로마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그쳤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국가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한 알의 밀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순교입니까? 아니지요! 그 시대에는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죽이려 하는 자들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대접을 받고 교회들은 빼앗겼던 교회 재산을 다 돌려받았습니다. 모든 세금에서도 제외되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너무 편안해져서 오히려 나태해지고 타락해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바로 수도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사.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떠나는 삶. 한 벌의 옷을 입고, 한 켤레의 신발을 신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수도사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한 알의 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많았고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500여 년 전에는 종교개혁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을 잘못해석하고 성경을 변질시키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 특별히 교황 무오설이라든지, 유물설, 신부들에게 하는 고해성사, 그리고 돈 통에 금화를 넣으면 그 떨어지는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의 모든 죄는 사라지고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면죄부 사상은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잘못된 것이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창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으므로 아들, 딸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아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득 채우자. 악마는 결혼의 원수이며 가정을 파괴시키는 존재라고 하여서 그 당시 독신을 최고의 모습으로 자랑하던 독신주의가 사라지고, 독신으로 지내며 살아가던 수도원들도 점차로 사라지게 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시대에 한 알의 밀이란 무엇이었을까요?아마! 아이를 많이 낳는 것! 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그럼 지금 오늘날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1.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를 가리켜 갈등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 나뉘어져서 갈등을 합니다. 노와 사가 서로 갈라져서 갈등합니다.동과 서로 나뉘어져서 서로 다른 지역 색을 나타내며 우리끼리 갈등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수와 진보가 으르렁거리며 갈등을 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요즘은 말을 잘하고 소리가 큰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 바로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참는 것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고 싶은 말 참는 다는 것 힘들죠.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임금님은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어떤 이발사든지 임금님의 머리만 손질하고 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이 세어나갈까 해서 죽였죠. 한 이발사가 서약을 합니다. 임금님! 전 절대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받고 이발사를 살려 줍니다. 1-2년은 그런 대로 지나갔는데 점 점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에이고 그랬다간 귀가 아니라 내 목이 잘리지 하며 참지마는 견디다 못해 오히려 이발사가 병에 걸리게 됩니다. 의사가 진단을 하면서 당신은 아픈 데가 없는데 왜 이렇게 죽어 가는지 모르겠네요.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발사가 입을 엽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그래요. 이 말을 너무 너무 하고 싶은데요. 이 말을 했다가 다른 사람의 입으로 퍼졌다간 내가 죽어요. 그래서 말 못해요. 아이고 그럼 말해야죠. 저 앞에 갈대숲에서 소리쳐 보세요. 아! 나는 말해 좋고, 듣는 사람 없고, 좋고 이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갈대숲에 가서 소치 칩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 아무 사람에게도 말 안한 약속을 지켰으면서도 그 동안 원인 모를 질병에서도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 날 이후로 바람만 불면 그 갈대숲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렇게 참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흉보고 싶은 집사! 이야기비판하고 싶은 일들!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비밀들!이거 참을 수 있어요? 어렵죠! 썩는 것처럼 힘들죠! 그래서 말이 어때요? 많은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 특히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허물을 알면서도 참아주는 것 이게 21세기인 요즘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한 알의 밀입니다. 계세요? 누구세요? 저 지나가는 길손인데 하룻밤만 유숙할 수 있을까요? 어머 어쩌죠! 저희 집엔 방이 없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이 마루에서라도 주무세요. 아이구 비만 피할 수 있어도 감사하죠. 나그네는 마루에 누었습니다. 그런데 마루의 나무 사이에 간격이 있잖아요. 그 간격 사이를 보니까 아! 뭔가 반짝거리는 게 있는데 저게 뭐지 하는 사이에 오리가 다가와서는 꼭 삼켜 버렸습니다. 조금 있더니 집안에서 난리가 났어요. 아! 우리 집안의 소중한 진주가 사라졌다. 바로 이놈이 우리 진주를 훔쳤을 것이라고 아! 재워준 은혜도 모르고 도둑질을 해 야! 저놈을 꽉 묶어놓아라. 날이 밝으면 관가에 고발을 해서 치도곤을 내리라. 아저씨! 저를 묶는 건 좋아요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저를 묶으실 때 저 오리도 함께 제 옆에 묶어 주세요. 그날 아침에 보니까 오리 똥 속에 그 진주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너무 너무 미안해서 아! 왜 진작 저 오리가 삼켰다고 얘기하시지 왜 밤새 이런 고통을 당하셨느냐고 하니네! 아저씨 만일 어제 밤에 저 오리가 삼켰다고 하면 저 오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진짠지 아닌지 하여 벌써 죽였을 거예요. 우리도 생명인데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좀 고생하면 제가 좀 참으면 이렇게 다 해결될 텐데요. 뭘. 옛날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한 마리의 오리를 살리기 위해서 어려움과 고통을 참았던 손님의 그 자세가 오늘 우리에겐 썩어지는 한 알의 밀이 아니겠습니까?2.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한 알의 밀이되는 것입니다. 교회 앞이나 도로, 공원에 가면 쓰레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먹는 것은 좋은데 봉지나 작대기나 떡볶이를 먹던 컵이나 심지어 바나나 껍질을 송두리 채 담은 비닐봉지 담배꽁초, 술병, 깔고 앉았던 신문지 버리는 사람은 있으며 줍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우리가 치웁시다. 내가 솔선합시다. 아멘100년 전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선교하였던 아펜셀러의 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는 한국에는 전기도 없고, 마실 물도 깨끗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가 선포되도록 기도해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허버트라는 선교사는 내가 죽으면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 지금도 서울 연세 대 위로 가면 외국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기기엔 1살도 안된 아이 이제 돌 지난 아이들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인 미국에 있었으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그 아이들의 무덤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은 일! 남들이 외면하는 일 그 일을 내가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한 알의 밀이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있습니다. 귀머거리이기도 하고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헬렌 켈러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3일만 볼 수 있다면 나의 선생님의 얼굴과, 박물관과, 지는 석양을 보고 싶다. 단 3일만 말입니다.그런데 우리에겐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요. 좀 세상을 아름답게 보십시다. 아 - 멘다른 사람의 단점을 장점으로 보이게 사람을 키워주고 사람을 끌어주는 사람이 됩시다.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삽시다. 바로 이 마음이 지금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한 알의 밀알인 것입니다. 結論: 사랑하는 성도여러분!1)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2)남이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3)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한 알의 밀이 되어 여러분의 그 아름다움이 수천수만 배의 열매가 맺히시기를 축원합니다.
祝福 받는 자의 삶 (눅 1: 5~16) 2004.09/12 주일 낮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사람인가?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시1:1).▷시편 2편 12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로마서 4장 7절과 시편 32편 1절은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1장 28절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야고보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약1:12).▷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벧전4:14).▷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5:3~10).그렇다면 잘살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의 복의 개념과는 그 맥을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복 받을 사람입니까?①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②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③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④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⑤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실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⑥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경홀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 영적으로 귀한 복을 받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탄생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복 받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 義로운 삶을 사는 자가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본문 6절에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고 했습니다. “의”라고 하는 히브리어 “체데크”는 “바르다, 곧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바르고, 무엇에 대하여 곧은 것인가요.하나님과 의 관계에 있어서 곧고, 바르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데 흠이 없는 삶을 의인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곧고 바른 의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건축설계 제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손으로는 절대로 직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목수가 아무리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똑바르게 기둥을 깎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건축물을 지을 수 없고, 곧은 기둥을 세울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손으로는 직선을 그을 수 없지만, 곧은 자를 대고 그으면 그을 수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기둥을 곧게 깎을 수 없지만 먹줄을 치고 기둥을 깎으면 곧게 깎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종교적인 거룩함이나, 절대적인 도덕적 선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0~12).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영원히 버림 받아 멸망 받은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곧고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바른 삶을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율법의 말씀을 주시어 삶의 기준을 삼게 하셨고, 신약시대에는 복음의 말씀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며, 삶의 기준인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성경은 “인생아 주께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너희에게 보이셨으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미6:8).▷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마22:40).▷바울은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롬13:9).본문의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본문 7절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지 못함으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이 나이 많더라.”고 했습니다.아마도 두 사람의 평생소원은 자식을 두는 것이었을 터인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 소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십니다. 믿습니까? 또한 풍성히 축복하시고, 능력의 오른손으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했습니다(시91:14~16).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의로운 자에게 약속된 축복을 주십니다. 아 - 멘 2. 성전 中心의 삶을 사는 자가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본문 8절에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어느 때 나타나서 축복의 말씀을 전했습니까?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제단에 임합니다. 성전을 가까이 하는 자를 만나 주시고, 성전을 섬기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할렐루야”1)아이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2)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엘리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3)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단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4)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는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올라오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고 앉은뱅이 병을 고쳤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의 사람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성전인 교회를 귀히 여기고, 교회 중심의 삶을 살고,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복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3. 하나님 앞에 祈禱하는 자가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본문 13절에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했습니다.사가랴는 기도할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기도할 때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기도는 성도들에게만 주신 절대적인 특권입니다.축복 받는 자의 삶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하고 깨끗해지는 길은 없습니다. 지식으로, 학문으로 교양으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더러워진 심령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양으로도 안됩니다. 많은 도를 닦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성품 때문에 많은 선을 행하였다고만 복을 받는 것이아니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희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했을 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약5:13~15).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기도하면 천사가 동행합니다. 기도하면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기도하면 쇠사슬이 풀리고, 질병과 저주의 굴례가 벗어집니다.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응답의 문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1. 義로운 삶을 사는 자가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2. 성전 中心의 삶을 사는 자에게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3. 하나님 앞에 祈禱할 때 福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처럼 성전에서 기도하며 늘 기거하는 축복된 삶과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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