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조약,메르센 조약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

2007. 6. 3. 13:58교회사자료/10.세계사

 

1. 최고 간단 설명
(1) 베르�조약(843) :
프랑크왕국이 3개왕국으로 나누어지게되는 계기가 된 조약 ---> 즉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시작된 조약
(2) 메르센조약(870) :
3개 왕국 국경선이 다시 조정된 조약
---> 즉, ' 현재의 프랑스(서프랑크), 독일(동프랑크), 이탈리아(중프랑크)가 성립하게 된 조약 '

 

3. 보충 설명 - 1 

: 검색어에 베르� 조약과 메르센 조약을 각각 넣어 검색하시면 나오겠지만, 나름대로 간략한 정리가 된 곳의 자료를 올립니다. * 단! 세계사 용어가 교과서와 조금 다릅니다.

 

차석찬의 역사 창고 ( http://mtcha.com.ne.kr/ ) 자료입니다.

 

베르딩조약
  843년 프랑크왕국이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분열을 결정한 조약이다. 카롤링거왕조의 소(小)피핀의 아들 샤를마뉴에 의해 팽창한 프랑크왕국은 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 1세의 사후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전통인 균등한 재산 분배 원칙에 따라 프랑크왕국은 분열되게 되었다. 즉, 왕국은 3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장남 로타르의 중부제국(로트링겐 ·부르군트 ·북이탈리아), 차남 샤를 2세의 서프랑크왕국, 3남 루트비히의 동프랑크왕국이 성립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메르센조약 (Treaty of Mersen)
  870년에 동프랑크왕국과 서프랑크왕국이 맺은 로트링겐 분할조약을 말한다. 843년 베르�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은 869년 로트링겐 국왕 로타르 2세가 죽고 카롤링거 왕통이 끊어지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서프랑크 국왕 카를 2세(禿頭王)는 로트링겐을 병합하였다.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독일인 왕)는 이에 무력으로 대항하여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으나, 870년 메르센(네덜란드, 아헨 북서)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모젤강(江)과 마스강(江) 하류의 선을 따라 로트링겐과 프리슬란트를 분할하고 동쪽은 동프랑크, 서쪽은 서프랑크가 차지하였다. 그 후에도 양국간에 분쟁이 계속되어 880년의 리베몬조약으로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3세가 로트링겐의 서쪽 절반까지 차지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4. 보충 설명 -  

(1)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3왕국 분열전까지
  게르만 민족의 한 세력인 프랑크족은 로마시대의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립합니다.
  다른 프랑크 족 나라들(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이 망해 갈때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는 가톨릭을 받아들여 세력을 넓혀가고, 나라를 공고히 합니다.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과 그의 아들 피핀이 이슬람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힘을 키워 피핀이 결국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웁니다.

 

  피핀의 아들이 프랑크왕국 최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입니다. 카롤루스는 당시의 교황인 레오 3세를 도와주어 교황에 의해 서로마제국의 계승자로 인정받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대관식을 가집니다.

 

 카롤루스가 죽고 그 아들이 죽은후 내분을 겪고 분열됩니다.

* ( 주의 ) 교과서 이름인 '카롤루스 대제' = '사를마뉴' 입니다.

 

(2) 메르센 조약 이후
  서프랑크는 프랑스의 모태가 되는 카페왕조 열리지만, 제후들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동프랑크는 카롤링거 왕조가 대가 끊긴 후에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다가 10세기 초 오토 1세가 교황으로 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어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됩니다.
  중프랑크는 분열이 계속다가 나중에 이탈리아가 성립합니다.

 

5. 추신 : 1번과 2번이 주 내용입니다. 3,4번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의  정리가 필요하여 좀 길게 덧붙여졌습니다.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고등학교 세계사(교학사) 참고 작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