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이해와 선교

2007. 6. 2. 22:34참고자료/5,영성 자료

성령 이해와 선교
이승오

들어가는 말
지역적으로 약간의 예외는 있기는 하지만(1) 근래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교회는 오순절 혹은 카리스마틱 계열의 교회들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운동의 통계를 잘 내기로 유명한 데이빗 바렛 (David Barrett) 은 2000년 현재로 전 세계에 6억 4천만 이상의 오순절 및 카리스마 교도 출석자들이 있다는 약간 믿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2) 이 통계를 차제하고서라도 실제로 오순절 이나 카리스마틱 교회들은 매우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다. 오순절 계통인 하나님의 교회는 미국에 800만, 하나님의 성회는 브라질에 1,720만, 한국에 150만, 국제 오순절 성결교회는 세계에 260만, 사중 복음교회는 세계에 280만, 하나님의 오순절 교회는 세계에 60만 등으로 나와있고, 오순절 그룹 예수전도단 (YWAM)은 세계에서 선교회 다음으로 큰 초교파 선교 단체이다.(3)

오순절 계통 교회들의 이러한 성장 현상은 선교지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남미의 경우 개신교의 70 - 80% 이상이 오순절 혹은 카리스마 계통의 교회들이라 할 수 있다.(4)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필리핀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필리핀에는 개신교로 분류될 수 있는 교단이 대략 270개 있으며, 개신교인의 총수는 4,966,882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 중에 3분의 1이 넘는 1,766,000 명이 오순절 계열 교회의 교인으로 집계되어 있다.(5) 뿐만 아니라 현재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들 (eg. Jesus is Lord Church, Bread of Life, Word for the World, Word International Ministry)은 대부분 독립적인 교단이면서 그 분위기는 기도와 성령을 강조하는 오순절의 특성을 보여는 교회들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가비떼 다스마리냐스 지역에도 Word International Ministry 라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하나 있는데, 15년전에 개척되었고, 지금은 평균 출석인원이 3천명을 넘고 있으며, 왕성한 선교활동과 지 교회 설립을 통해서 그 교세가 확장되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현재 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필리핀 장로교회는 200 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출석교인이 100명을 넘는 교회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며, 90% 이상의 교회들이 아직도 자립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6)

오순절 및 카리스마 계통 교회들의 급성장과 상대적으로 느린 장로교 계통 교회들의 성장의 요인을 한 두 가지로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를 성령에 대한 이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령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교회의 성장과 선교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왜 선교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지를 먼저 살펴보고, 오순절과 개혁교회의 성령이해를 비교 연구하면서 보다 통전적이고 바른 성령이해를 추구해보고자 한다.

1. 성령: 선교의 영
교회 성장과 선교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 자신이 바로 선교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5: 26에 주께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서 성령 자신이 바로 증인이 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 8)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사역의 확장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와 역할이 필수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과연 성령은 예수의 승천 이후로 교회를 선교사역에로 이끌어 동참토록 하여왔다.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은 선교의 주도자 (The Initiator)가 되신다.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의 주도자는 사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의 주도를 따라 순종한 것 뿐 이었다.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에 인도하심에 의하여 그 사역을 전개해 나갔다.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행동에 옮겼다.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명씩이나 회개하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 (행 2:1-41). 빌립 집사와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에디오피아 내시와 백부장 고넬료에게 전도를 하고 세례를 준 것도 성령의 지시와 역사 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행 8:26 - 40; 11:44 - 48). 최초의 선교사인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된 것 역시 성령의 명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행 13:1-3).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유럽대륙으로 그 길을 인도하신 분 역시 성령이었다 (행 16:1-10). 성령은 이처럼 복음의 확장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사자들을 인도하였다.(7)

둘째, 성령은 선교를 위한 전략가 (The Strategist) 이셨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교전략을 가지고 선교에 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했다. 빌립 집사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일일이 지시하셨다 (행 8:26,29,30). 고넬료를 전도한 베드로의 사역도 성령의 지시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성령은 우선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편견을 바꾸시었고, 후에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었다 (행 10:19-20).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성령께서 그의 길을 지도하셨다. 물론 그에게 선교전략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사역의 걸음을 결정적으로 인도하신 분은 늘 성령이었던 것이다.(8) 이런 점에서 그랜트 맥클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우두머리 전략가 (the Chief Strategist) 이시다. 인간의 계획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할 때에만 그 실효성이 있다. 성령은 각 시대와 장소를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전략을 분별하고 실행하는 것이 곧 교회의 책임이다.(9)

이런 점에서 최고의 전략가이신 성령을 늘 선교사역의 동반자로 모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이러한 일에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통보할 때에 "성령과 우리는" (행 15: 28) 이라는 표현으로 총회의 결정을 통보할 정도로 항상 성령에 민감하면서 그 분의 전략을 따른 사람들이었다.

셋째로, 성령은 선교의 동기 부여자가 (The Motivator) 되신다. 성령은 선교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질적인 능력을 허락하시는 격려자 혹은 동기부여자가 되신다. 성령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 교회의 힘의 원천이시다.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은 성령의 역사 아래 선교가 시작된 날이었으며,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을 체험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사도들은 어떤 이론의 타당성 때문이 아닌 성령의 충만에 의해서 지배받고 행동하였다. 즉 성령이 그들 위에 떨어졌을 때에 그들은 겁쟁이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고, 그 결과 자발적으로 전도의 사역을 위해 자신들을 드리게 되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교회는 왕성한 증인공동체가 되었다.(10)

선교와 교회 성장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같이 중요한 성령에 대한 이해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이해를 꼽는다면, 그것은 오순절의 성령이해와 개혁주의의 성령이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이해는 각각 나름대로 장점과 제한점들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둘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은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보다 넓게 열어줄 수 있으며, 앞으로의 사역에 있어서 선교의 주역이 되시는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을 보다 잘 받을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 주리라 믿는다.


2.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이 갖는 성령 이해
오순절 운동은 몬타누스주의(11), 중세 신비주의 운동, 재침례파,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으로는 17 -18세기에 일어난 독일, 영국, 및 미국 등지의 부흥운동 (Revival Movements)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웨슬리, 피니 (Charles Finney) 및 토레이 (R.A.Torrey) 등의 지도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즉 웨슬레에 의해 시작된 영국의 감리교 운동이 19세기에 미국의 피니와 무디에 의해 부흥운동 혹은 성결 운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20세기의 오순절 운동으로 번져갔다고 볼 수 있다.(12)

오순절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 중의 하나는 회심 이후의 경험 즉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인데, 이러한 견해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의 신학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중생을 가져오는 성령의 역사에 이은 성령의 2차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령의 2 차적인 사역이야말로 인간의 죄된 욕망을 뿌리채 뽑고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갖게 하여 준다고 가르쳤다. 그 후에 챨스 피니 (Charles Finney), 토레이 (R.A.Torrey), 심슨 (A.B. Simpson), 고든 (A.J.Gorden)과 같은 부흥운동의 선구자들이 이와 유사한 견해를 주장하였다. 특별히 피니의 조직신학 강의서(13) 는 오늘날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칭의 보다 성화를 중시하였고, 특별히 성령 세례의 필요성을 많이 강조하여 오순절 성령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4)

구체적인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순절 운동은 기존의 성도들 가운데 성령을 역사를 보다 더 많이 체험코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 시초는 1896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즉 미국 남동부에서 조용히 시작이 되어, 1901년에는 미국 중서부에 해당하는 캔사스 지역으로 번져갔고, 급기야는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에 결정적인 불을 붙인 주요인물은 윌리암 세이무어 (William J. Seymour)였는데, 그가 1906년 4월 9일 어떤 침례교도들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에서 방언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연상케 하는 모임이 되었다. 이 모임은 곧 미국 LA 근교의 아주사 거리 (Azusa Street) 312번지의 감리교회당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인디아나폴리스 주로 건너가면서 전 미국으로 메아리쳤고, 마침내 시카고에서 브라질로 그 불길이 번져갔다. 그 후에 노르웨이의 감리교 목사인 바랏 (Barratt)이 이 운동에 큰 감동을 받고 노르웨이로 돌아가 오순절 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이 영국, 독일, 스웨덴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 세대 (약 30년) 안에 오순절 운동은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15)

이제 오순절 운동에서 강조하는 점들을 살펴보자.(16)

첫째, 성령세례를 매우 중시한다. 윌리암스에 의하면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요 17:14),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고 (눅 10:20), 영적으로 깨끗하며 (요 15:3),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 예수와 하나되어 구원의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마리아 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아직도 성령께서 사도들의 기도후에야 임하셨다는 것 (행 8:4-25) 그리고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사건 후 3일만에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는 것 (행 9:1-19) 등을 성경적인 근거로 말한다.(17) 그는 중생과 성령 세례를 비교하여 설명하기를,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이 그 작위자 (Agent) 이며, 구속의 피가 그 수단이고 중생이 그 결과이지만, 성령세례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그 작위자 (Agent)이며, 성령은 그 수단이고, 권능으로 덧 입혀지는 것은 그 결과라고 본다.(18) 1955년에 있었던 오순절 세계 대회에서는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구원을 얻는 것이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며, 거듭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 고 주장하였다.(19)

둘째,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순절 운동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경험을 특별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험은 방언 혹은 고전 12장의 은사 목록에 나타나는 은사들을 부여하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20) 느낌을 가지고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치 않으나 방언을 하게 되면 가장 확실한 성령세례의 증거를 받은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성경적 증거로 이들은 행 2:4, 10:5-46, 9:7, 고전 14장, 막 16:17 등을 들고 있다. 인간이 성령의 충만을 입을 때 반드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방언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인간의 혀를 성령이 지배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므로 성령이 충만히 임한 증거라는 것이다.(21)

셋째, 방언 외에 성령세례의 증거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육신의 치유이다. "온전한 복음" (Full Gospel)이란 오순절 주의를 가르키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이것에 의하면 복음이란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치유도 얻게 되고 마침내 주의 강림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영과 혼과 육체의 온전한 구원이라고 불리운다.(22) 육체의 치유 역시 방언처럼 구체적인 증거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에 오순절 운동에서는 방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표징이 되고 있다. 오순절 주의는 이 두 은사 외에도 성령의 은사를 매우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주의의 커다란 특성 중의 하나는 눈에 분명하게 보여 누구든지 쉽게 식별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역사로 인해 실제적인 도움을 구체적으로 입을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매우 강조한다는데 있다.


3. 개혁 교회 전통이 지니는 성령 이해
개혁교회 전통에서 이해되는 성령의 사역은 워낙 방대하고 입장들도 다양하므로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대한 개혁교회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표는 아니므로 본 연구에서는 개혁교회 성령이해의 큰 줄기만을 다루어 보고, 주로 오순절 성령이해와 연관하여 쟁점이 되는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을 매우 강조하는 오순절에 비한다면 개혁교회는 성령에 대한 관심이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개혁교회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아도 전 4권 중에 성령에 관하여는 아주 적은 부분만을 할애한다.(23) 성령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에게 의인과 성화를 가져 다 주시는 분 즉 성도 개개인의 영적인 생활을 일깨워주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많다.(24)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이러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선택이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성령이 택한 자의 생명 안에서 강하게 역사 하여야 하는 것이다.(25) 즉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중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 얻는 것은 그들의 심령을 부르시고 그 삶을 성화 시키시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과 은혜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 없이는 중생치 못할 것이고, 성령의 항속적인 감화가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명은 그가 벗어 나온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되 떨어질 것이다. 결국 개혁교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이란 주로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성화와 연관되어 생각되어졌다.(26)

그렇다면 개혁교회는 오순절 성령운동에서 말하는 성령이해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27)

첫째, 성령 세례라는 말 자체를 잘 언급하지 아니하는 경향이 있다.(28) 개혁교회의 믿음에 의하면 성도가 구원 얻는 것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딛 3: 5). 성도를 의롭다 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신다 (딛 3: 6-7). 또 고전 12장 3절에서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기에, 예수를 구주로 부른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하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29) 이런 관점에서 죤 스토트 (John Stott)는 물세례를 성령세례의 표징 (Sign)으로 보면서, 성령세례는 실상 (reality)이고,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 물세례라고 설명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믿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30) 결국 개혁교회는 성령의 세례라는 것을 구원을 얻은 일정 기간 후에 특별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한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둘째, 오순절의 경험은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고,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질 수 있는 하나의 패턴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오순절 영적 전투를 위한 교회의 탄생일이다. 교회의 탄생일이 반복되어질 필요는 없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오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 살았었다. 이들은 이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었지만, 이미 성령께서 오신 오늘의 상황에서 이 패턴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31) 즉 오순절 성령 강림같은 사건이 반복될 필요는 없고, 따라서 오순절에서 일어난 것처럼 구원받는 것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오순절의 경험이 반복될 수 없는 것이듯 성령의 은사 역시 반복되지 못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일상적 은사들은 여전히 유효하되, 자연 현상을 뛰어넘는 비 일상적 은사들 즉 방언, 치유, 예언과 같은 은사는 사도들과 함께 지나갔다는 견해를 갖는다.(32) 칼빈은 "그러나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동안 나타내기를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가 영원히 놀라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사라졌다" 고 말하면서 기적의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강조하였다.(33) 개혁 교회인 관점에 성령론을 쓴 팔마는 (Edwin H. Palmer) 기적적인 은사와(34) 예언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성령은 오늘날 우리에게 환상이나, 직접 말씀이나, 영감된 편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35) 라고 하였다.

넷째, 오순절에서 성령의 은사를 많이 강조한다면, 개혁교회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개혁교회의 성령 이해는 본래 중생과 성화에 많이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구원 얻은 성도라면 이미 중생을 체험한 것이니, 이제 성령께서 역사 하실 사역은 성화이다. 성도들은 성령께서 자신 속에 역사하시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많이 맺혀지도록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께 자신을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갈 5:22- 24).


4. 성령 이해에 대한 평가
성령 이해에 대한 양 진영의 입장을 보면서 두 견해 모두 어느 정도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양쪽 모두 어느 한쪽 부분에 치우쳐 있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점에서 두가지 이해의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장점을 살리는 보다 통전적인 성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성령 세례" 라는 용어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문제라고 보여진다. 성령세례 라는 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에 엄연히 나오는 말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하였다.(36)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이 본 예수의 주된 사역은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로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성령 강림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시었다 (행 1:4). 이런 점에서 성령 세례를 단순히 물세례의 한 표징으로만 본다든지 물세례와 함께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의 세례" 라는 용어가 오순절 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어지므로 이것 자체를 아예 반대하거나 혹은 관심을 갖지 않는 자세는 옳지 않다고 보여진다.

둘째, 성령 세례의 시점을 고정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문제다. 개혁주의 이해에서는 성령의 세례를 별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정한다해도 중생의 시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오순절 운동에서는 특별한 경험과 은사를 동반하는 성령 세례가 구원을 받은 후에 일어난다고 본다. 즉 개혁주의 이해에서는 성령세례가 중생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별로 관심을 둘 일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오순절 주의에서는 성령의 세례는 구원 후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이것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보면서 매우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여주는 성령세례의 시점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오순절의 성도들과 (행 2: 1-4) 사마리아의 성도들은 (행 8: 4- 17) 구주를 믿은 후에 성령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는 물세례를 받기도 전에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께서 임하시었다(37) (행 10: 44- 48). 그러므로 성령 세례가 중생 후 어느 시점에 온다고 말하는 오순절의 견해도 문제지만, 성령 세례를 중생의 시점과 동일시하는 것도 바른 견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령 세례의 시차는 아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38) 물론 가장 일반적인 순서는 베드로의 설교 속에 잘 나타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 38). 즉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 세례는 주 예수를 확실히 믿고, 목마르게 갈급 하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그 시기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39)

셋째, 성령의 세례는 강력한 능력과 그로 인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할 때에 분명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고 (행 2:2),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고 (행 2:3), 각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행 2:4). 성령께서는 각가지 은사를 부여하시고 (고전 12: 7-11), 담대함을 주시어 하나님을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도록 하기도 한다 (행 4:31).

이런 점에서 방언의 은사, 예언, 기타 다양한 은사가 사도 시대에만 역사 하였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방언의 은사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데, 방언은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방언을 금지하는 것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 자체를 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은 자연히 선교와 교회성장을 막는 것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선교의 열매들이 강하게 맺혀지고 있는데, 자신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치유의 역사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치유를 하고 안 하는 것은 성령의 자유이다. 구하지도 않고 치유의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만 몸에 들어와도 몸에 열이 나고 변화가 일어나는데,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선교의 주도자이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 강하게 임하실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옳은 견해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령의 강림은 보는 사람들이 그의 강림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임하였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행 8:17-18) 라는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세례가 식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마술사 시몬까지도 다른 이들이 성령 받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부장 고넬료의 성령세례 사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4)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물론 성령의 역사를 일정한 품목으로 제한하는 것은 문제이다. 즉 오순절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방언이나 치유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고전 12장 11절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성령께서 그 분의 뜻을 따라 필요한 대로 적절한 은사를 허락하실 일이다.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로 주실 수도 있고, 다른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이런 것이 없이 마음에 큰 기쁨과 확신을 주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께서 역사 하심을 느끼게 하는 강한 체험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명령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고 하면, 효과적인 선교의 사역 감당을 위해 주어진 은사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교회 안에 무질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요소도 인식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래서 공 예배 중에 방언을 자제할 것을 권하면서 방언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통역을 붙일 것을 권하였다 (고전 14:1-33). 그러나 바울은 곧 이어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여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 39) 고 권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무질서를 가져온다고 해서 아예 무시하거나 금해버리는 것은 결코 옳은 자세가 아니다. 바른 자세는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잘못 오용되어지는 것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성령의 은사가 성도와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서 선교를 열매를 맺도록 성령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충만을 위해 성령 세례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개혁 주의든 오순절 주의든 성령의 충만은 공통적으로 중시 여긴다.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성경의 엄중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엡 5:18). 그런데 이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의 관계는 무엇인가?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을 얻은 성도는 이미 성령께서 임재 하시기에 이제는 성령의 충만 만을 간구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오순절에서는 구원을 얻은 성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하여 처음에 큰 회개와 함께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역사 즉 성령세례가 있고, 이 후로 계속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본다. 즉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하는 것을 성령세례라 하고, 그 후에 계속 체험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40)

성령 세례라는 것이 이처럼 처음 경험하는 성령 충만 이라고 한다면, 성령 세례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는 여러 가지가 있고, 이러한 용어는 개혁교회에서도 많이 사용되어져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즉 "성령 체험," "성령의 기름 부으심," "불 세례," "성령 받음," "능력 받음" 등의 용어가 성령 세례와 유사한 의미로 개혁교회에서는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필자도 어린 시절에 부흥회에 참여하여, 부흥사들이 "불 받아라," "성령 받아라," "능력 받아라" 라고 외치는 소리를 많이 들은 기억이 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처음 체험하는 일의 중요성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고, "백견이 불여일행" 이라는 말이 있다. 직접 보고 또 체험해보는 것이 훨씬 높은 학습효과를 지닌다는 말이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사실 온전한 이해를 했다고 하기가 어렵다. 성령 충만의 첫 경험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하여간 본인 자신이 느낄 수 있도록 성령의 임재를 처음 경험한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에 훨씬 용이할 것이다. 결국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지 성도가 성령의 역사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첫 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순절에서 강조하는 성령의 은사와 개혁교회에서 주로 강조하는 성령의 열매는 모두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인격까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성령으로 인해 훌륭한 인격이 되었다고 주의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해 내는 것은 아니다. 성도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이다. 한편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되어서 신자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존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양식을 형성하여 주는 것이다.(41) 그런고로 성령의 은사와 열매 중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성령께서 온전히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앞에서 살펴 본대로 선교와 교회 성장의 주도자는 성령님 이시다. 그런고로 참으로 능력 있는 선교와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을 바로 이해하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서 선교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에 대한 두 가지 큰 이해를 살펴보면서, 오순절과 개혁교회 모두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즉 양 진영의 성령 이해는 모두 약점들을 지니고 있다. 즉 무한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성령론도 무한하신 성령님을 완벽하게 기술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에 그 날이 되어야만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고전 13:12) 바울의 말씀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관점과 신학만을 가지고 서로를 비평하는 것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즉 양 진영의 성령 이해 중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두 이해가 무한하신 성령님의 부분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오순절주의 성령 이해와 개혁주의의 성령이해는 어느 하나의 선택의 문제가 (either - or) 아니라 통전적으로 (both - and)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면 오순절에서 강조하는 은사와 개혁주의에서 강조하는 열매가 모두 균형 있게 강조 되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아주 다양하다. 시끄러울 수도 있지만, 아주 조용하게 역사 하시기도 한다. 불처럼 역사 하시기도 하지만, 물처럼 역사 하실 수도 있다. 강력한 능력을 주시기도 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도 한다. 따라서 성령이 어떻게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은 성령께서 자의로 하실 일이다. 문제는 누가 참으로 성령을 사모하고 그 분의 능력을 덧입어 살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민감한가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개혁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거의 무관심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제한하려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이런 경향을 지닌 교회에 성령께서 역사 하여 초대교회의 능력있는 선교와 비약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42)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결코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특별한 예외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성령은 우리가 사모하고 모셔들이지 않는데 억지로 우리를 잡아 끌어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성령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분이 우리의 사역과 삶을 지배하시도록 늘 우리를 내어 드릴 뿐 아니라 늘 그 분과 소통해야 한다. 그 분께서 주시는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선교사들은 현지인 사역자들이 선교사를 의존하도록 만들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여 목회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어야 한다.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선교사 의존병이며, 이것이 선교지의 교회를 영구히 어린아이 교회로 만드는 가장 심각한 병폐로 보여진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사 자신 역시 후원자나 인간의 꾀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늘 성령을 의지하는 훈련을 쌓아야 하며 이를 선교지 사역자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할 때에 선교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선교를 능력있게 이끌어 가시게 되는 것이다.


주석
1) 한국 장로교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외가 될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는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게 성장해온 교회 중 하나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한 교회로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난 교회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2) David Barrett, 2000 Statistics in Frontier Mission, Gary B. McGee, "오순절 및 카리스마 선교" in 제임스 M. 필리스 & 로버트 쿠트 편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 재인용 (서울: 도서출판 이레 서원), p. 86.

3) Gary B. McGee, "오순절 및 카리스마 선교," p. 87.

4) 몇가지 예를 살펴보면, 총 개신교 신자 중 오순절 계열의 비율이 브라질 81.46%, 칠레 91.19%, 아르헨티나 72.73%, 과테말라 65.87%, 콜럼비아 60.68% 로 집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오순절의 비율이 평균 80% 이고, 적은 경우라도 60% 이상이 된다. 페트릭 죤스톤, 세계 기도 정보 (서울: 죠이선교회, 1994), pp. 104 - 500.

5) 페트릭 죤스톤, 세계 기도 정보 (서울: 죠이 선교회, 1994), p. 603.

6) 장로교의 이같이 느린 성장은 장로교 선교사로서 필리핀 땅을 밟은 후에 받은 충격 중의 하나였었다. 즉 한국에서는 그토록 왕성한 장로교가 이 땅에 들어 온지 20년이 넘도록 왜 이 땅에서는 이토록 힘없는 교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장로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안식교나 몰몬교와 같은 종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하여간 장로교라는 것을 설명 하는데만 해도 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고, 이럴 때마다 도대체 왜 필리핀의 장로교는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었다.

7) Michael Green,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5), p, 62.

8) Michael Green,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p. 174.

9) L. Grant McClung, Azusa Street and Beyond (New Jersey: Bridge Publishing , Inc., 1986), p. 84.

10) Alan R. Tippett, "The Holy Spirit and Responsive Populations." In Crucial Dimensions in World Evangelization. Arthur F. Glasser, et al., eds.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76), p. 195.

11) 몬타누스 주의는 영적은사, 세계의 종말 및 청결한 생활의 강조 등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지만, 신학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단일신론과 잘못된 재림 예언의 실패 등으로 무너지게 된 은사운동이었다. (각주를 좀 찾아 볼 것)

12) Frederick D. Brun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p. 35.

13) Charles G. Finney, 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 (New York: Saxton & Miles, 1846).

14) Frederick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40- 42.

15) Frederick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47 - 48.

16)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미간행 논문집 (서울: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1983), p, 47 재인용.

17) Ernest Swing Williams, Systematic Theology, Vol. 1 (Springfield, MO: Gospel Publishing House, 1953), p. 42.

18) Ernest S. Williams, Systematic Theology, vol. 3, p. 47.

19) "Scriptural Principles for Receiving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n Pentecost, No. 38 (Dec. 1956), p. 8.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성과 단회성, p. 51. 재인용.

20) Sinclair B. Ferguson & David F. Wright ed., New Dictionary of Theolog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8), p. 502.

21) Gee, Pentecostal World Conference Message, p. 48,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p. 51-52 재인용.

22) Gee, Concerning Spiritual Gifts, p. 12.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 52 재인용.

23) 예를 들어 1권 7장 4절, 2권 2장 27절 등에 구원과 연관하여 조금씩 언급되어 있는 정도이다.

24)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Atlanta, JA: John Knox Press, 1977), p. 33. 벌코프는 이러한 성령이해를 말하면서 매우 내향화되고 정적인 성령이해라고 지적하고 있다.

25) Inst. II. 2. 27.

26) 개혁 교회의 성령 이해가 단지 개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지는 않고, 보다 우주적인 차원의 이해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주의 창조에 동참한 창조사역과 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조차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여 죄를 억제하고 선을 권장하며 문화적 과업을 위한 재능을 부여하시는 보편은혜의 사역이다. 에드윈 H. 팔라, 성 령, 최 낙재 역 (서울: 한국 개혁주의 신행협회, 1977), pp. 32- 39.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후에 발전되고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27) 개혁교회 자체 안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하여 일치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고 조금씩 다른 견해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주된 견해들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28)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벌코프의 성령론, 팔마의 성령론을 보아도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29) E.H.Andrews, The Promise of the Spirit (Hertfordshire, England: Enangelical Press, 1982), p. 142.

30) John Stott, The Baptism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p. 37,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 129. 재인용.

31) E.H.Andrews, The Promise of the Spirit, p. 127.

32)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London: James Clarke & Co), p. 618.

33)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IV, 19, 18. (서울: 성문출판사, 1990), p. 921.

34) E.H. 팔머, 성 령, p. 162.

35) 팔머, 성 령, p. 164.

36) 예수의 사역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라는 말씀은 병행구절인 막 1:8과 눅 3:16 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37) 앤드류스는 고넬료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은 사실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넬료는 의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은 자였고, 베드로가 왔을 때에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33) 라고 말할 정도인 것을 보아 이미 그가 죄 고백과 회개의 상태가 되어 있기에 성령께서 바로 임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E. H. Andrews, The Promise of the Spirit, p. 128.

38)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중생의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중생의 시기를 확정지을 수 없듯이 성령 세례의 시기도 어느 일정한 시간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차영배,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 137.

39)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 37.

40)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반복성, p. 135.

41) 안승오, 능력있는 예배를 위한 7가지 질문: 선교학적 관점에서 본 예배의 이해와 실제 (서울: 빌라델비아, 2001), p. 268.

42)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아예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는 자연적인 출생 성장에 의해 세월이 흐르면 어느 정도 성장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능력 있게 불신자들에게 전도가 이루어지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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