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2007. 5. 30. 23:16ㆍ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성령님
2006/11/27 오전 11:46 | 성령님에 대한 이해
A. W. 토저 씀 / 이용복 옮김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 1:27)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만 몰두해야 한다. 현재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이 한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성령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하고 깨끗한 성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안에 거하신다. 왕이 더러운 내의를 불쾌하게 여기듯이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생각들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정이 시시각각 아무리 요동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세련된 성격을 타고난 소수의 특권층에게나 어울리는 호사스러운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전 세계의 구속(救贖)받은 모든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2. “또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더 깊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영적 문제들에 관하여 최종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삶에 최고 통치자요, 주님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십자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義)에 대해서도 죽어야 한다. 자신들이 전에 자랑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여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택한 사람에게 어떤 요구라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심지어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희생했던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힘들지만 그만큼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 길의 매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포기했던 것들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골 3:1,3)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우리가 고통스러운 내적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자기의(自己義)’라는 불신앙의 빛이 단 한 줄기라도 비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영혼이 황폐해지는 체험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분이 우리에게 부가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체험은 어떤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삶의 덧없는 유혹에 초연하여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체험을 통과할 때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자신을 비우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적 죽음을 통과하고, 수세기 동안 쌓인 아담의 쓰레기를 마음 밖으로 몰아내고, 천상(天上)의 손님을 맞을 모든 마음의 방을 비워 놓아야 한다.
4.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교회의 중요성을 믿으며, 성도와의 교제를 사랑한다. 물론, 주일에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왜 신앙의 문제에 실패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우리가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조급히 종교적 활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단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친 다음에 행동에 나서면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시키셨기 때문이다.
5. “모세가 그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그분과 말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의 피부가 빛나던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출 34:29)
내가 만나본 성도들 중 몇몇은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또 그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단언하건대, 나는 책을 통해 배운 것보다 그들과 교제하면서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성경교사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내 머리 속에 지식을 쌓아주는 것으로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형제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로움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내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사람을 가리켜 “이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그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를 느끼며 조용히 확신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유창하게 떠들어대는 이 세상의 어떠한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6. “일곱 등잔대 한 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의복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계 1:13)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유럽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은 세계적인 규모의 미술관에 걸려 있다. 대개 이런 화가들은 주님을 그리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이 우리 주님을 그릴 때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주님에 대해 그들이 갖는 개념상의 한계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주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속박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벽하게 그려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것을 순간순간 확신하면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확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겨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붓을 들고 우리 영혼의 캠퍼스에 피와 불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시기를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다.
7. “자기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께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갈 6:8)
인간에게 자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전한다.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력한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 부드럽게 임하지만 우리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이 능력은 우리에게 무한한 도덕적 능력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이 능력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능력과 은혜로 충만케 하실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능력을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무한한 도덕적 능력을 간과한 채 오직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도덕적 이상(理想)을 유아적(幼兒的)으로 모방하려는 가련한 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노력은 그리스도와 신약이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개선된 옛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죽음의 십자가를 통과한 생명이다.
이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죄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는 이 진리를 어떻게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가 회개하고 믿으면 된다. 그가 자기 죄를 버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버리면 된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아무 것도 변명하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면 된다.
이렇게 한 다음 그는 오로지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에게서 생명과 정화와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생명을 끝장낸 십자가가 이제는 우리의 죄를 끝장낼 것이다.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신 능력이 이제는 그분과 더불어 우리를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릴 것이다.
9. “내 혼이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른 것같이 만족하리이다.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양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리하오리니...”(시 63:5,6)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읽고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성경이 단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은 책의 형태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통신수단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때 성경은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코 침묵하신 적이 없다.
10. “그러나 본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이 일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이 일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면, 우리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 힘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의 조명(照明)을 받은 사람은 성령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깊은 진리를 통찰한다. 그에게는 진리를 증명하는 논증이 필요 없다. 그의 인식은 이성을 초월하며, 온전한 확신을 심어주고, 내적 만족감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높이 평가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신다. 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가? 그것은 이성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이 본질상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이성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11.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밑에 거하리로다.”(시 91:1)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혼자 성경책을 앞에 펴놓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 음성을 듣는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하나님이 동산에 임하여 거니시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만 아직 무슨 뜻이지 분명히 들리지는 않는다. 그 후 성령님이 성경의 뜻을 밝히 드러내주시는 복된 순간이 임하며, 그전에는 소리 또는 기껏해야 불분명한 음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친한 친구의 말처럼 다정하고 알기 쉬운 말씀이 된다. 그 다음으로 생명과 빛이 찾아올 것이고, 주(主)요 구주(救主)요,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 A. W. 토저 지음 <성령님>(규장 발행)에서 발췌
2006/11/27 오전 11:46 | 성령님에 대한 이해
A. W. 토저 씀 / 이용복 옮김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 1:27)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만 몰두해야 한다. 현재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이 한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성령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하고 깨끗한 성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안에 거하신다. 왕이 더러운 내의를 불쾌하게 여기듯이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생각들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정이 시시각각 아무리 요동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세련된 성격을 타고난 소수의 특권층에게나 어울리는 호사스러운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전 세계의 구속(救贖)받은 모든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2. “또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더 깊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영적 문제들에 관하여 최종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삶에 최고 통치자요, 주님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십자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義)에 대해서도 죽어야 한다. 자신들이 전에 자랑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여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택한 사람에게 어떤 요구라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심지어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희생했던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힘들지만 그만큼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 길의 매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포기했던 것들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골 3:1,3)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우리가 고통스러운 내적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자기의(自己義)’라는 불신앙의 빛이 단 한 줄기라도 비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영혼이 황폐해지는 체험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분이 우리에게 부가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체험은 어떤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삶의 덧없는 유혹에 초연하여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체험을 통과할 때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자신을 비우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적 죽음을 통과하고, 수세기 동안 쌓인 아담의 쓰레기를 마음 밖으로 몰아내고, 천상(天上)의 손님을 맞을 모든 마음의 방을 비워 놓아야 한다.
4.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교회의 중요성을 믿으며, 성도와의 교제를 사랑한다. 물론, 주일에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왜 신앙의 문제에 실패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우리가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조급히 종교적 활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단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친 다음에 행동에 나서면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시키셨기 때문이다.
5. “모세가 그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그분과 말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의 피부가 빛나던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출 34:29)
내가 만나본 성도들 중 몇몇은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또 그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단언하건대, 나는 책을 통해 배운 것보다 그들과 교제하면서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성경교사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내 머리 속에 지식을 쌓아주는 것으로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형제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로움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내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사람을 가리켜 “이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그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를 느끼며 조용히 확신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유창하게 떠들어대는 이 세상의 어떠한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6. “일곱 등잔대 한 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의복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계 1:13)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유럽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은 세계적인 규모의 미술관에 걸려 있다. 대개 이런 화가들은 주님을 그리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이 우리 주님을 그릴 때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주님에 대해 그들이 갖는 개념상의 한계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주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속박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벽하게 그려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것을 순간순간 확신하면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확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겨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붓을 들고 우리 영혼의 캠퍼스에 피와 불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시기를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다.
7. “자기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께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갈 6:8)
인간에게 자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전한다.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력한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 부드럽게 임하지만 우리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이 능력은 우리에게 무한한 도덕적 능력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이 능력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능력과 은혜로 충만케 하실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능력을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무한한 도덕적 능력을 간과한 채 오직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도덕적 이상(理想)을 유아적(幼兒的)으로 모방하려는 가련한 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노력은 그리스도와 신약이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개선된 옛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죽음의 십자가를 통과한 생명이다.
이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죄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는 이 진리를 어떻게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가 회개하고 믿으면 된다. 그가 자기 죄를 버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버리면 된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아무 것도 변명하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면 된다.
이렇게 한 다음 그는 오로지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에게서 생명과 정화와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생명을 끝장낸 십자가가 이제는 우리의 죄를 끝장낼 것이다.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신 능력이 이제는 그분과 더불어 우리를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릴 것이다.
9. “내 혼이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른 것같이 만족하리이다.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양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리하오리니...”(시 63:5,6)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읽고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성경이 단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은 책의 형태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통신수단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때 성경은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코 침묵하신 적이 없다.
10. “그러나 본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이 일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이 일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면, 우리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 힘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의 조명(照明)을 받은 사람은 성령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깊은 진리를 통찰한다. 그에게는 진리를 증명하는 논증이 필요 없다. 그의 인식은 이성을 초월하며, 온전한 확신을 심어주고, 내적 만족감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높이 평가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신다. 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가? 그것은 이성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이 본질상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이성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11.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밑에 거하리로다.”(시 91:1)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혼자 성경책을 앞에 펴놓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 음성을 듣는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하나님이 동산에 임하여 거니시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만 아직 무슨 뜻이지 분명히 들리지는 않는다. 그 후 성령님이 성경의 뜻을 밝히 드러내주시는 복된 순간이 임하며, 그전에는 소리 또는 기껏해야 불분명한 음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친한 친구의 말처럼 다정하고 알기 쉬운 말씀이 된다. 그 다음으로 생명과 빛이 찾아올 것이고, 주(主)요 구주(救主)요,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 A. W. 토저 지음 <성령님>(규장 발행)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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