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4. 27. 09:09ㆍ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최근에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어느 성도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서울 부근의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에 다녔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함이 있어서 동네에서 가까운 중형교회에 등록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은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고 빚도 많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습니다.
등록할 때 담임목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은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실정을 대충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새로 등록한 교인을 담임목사가 심방하는 절차에 따라서 심방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전도사가 심방예배 준비를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과일은 포도, 딸기, 오렌지 등으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마련하라고 하고,
떡은 오늘 아침 만든 인절미로 하고, 방석은 고전적인 방석으로, 탁자는 원탁으로,
음료수 잔은 무엇 등으로, 저는 너무도 황당해서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렇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물을 드려야만 축복을 받아서 어려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해서 목사님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와 전도사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한심하고 서글픈 일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리고 또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절)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는 주께서 나무에 달리면서까지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의 저주를 풀어낸 그 희생을 무력하게 하는 율법으로의 회귀를 꾀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무언가에 속박되고 구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이 일어났을 때 남부의 많은 노예들이 북부로 몰려갔지만 그들 대부분은
다시 남부로 되돌아가 예전의 주인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은 노예의 삶이 더 편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지리산에 방사된 곰돌이가 야생 적응에 실패하고 민가로 되돌아온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독립적 삶을 살아본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구속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는 법을 경험하지 못하고 타인의 지시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구속을 오히려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노예 근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구속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구속이 더 안락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일일이 지시하고 가르치는 대로 따르고 싶어 합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성도들의 무지함을 이용해서 손쉽게 목회를 하려는 유혹에 휘말립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약의 제사장처럼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교회 안의 기명(器皿: furnitures)을 성물(聖物)이라고 부르며,
설교단을 제단(祭壇)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일천번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헌금을 ‘제물’(祭物)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성물이니 제단이니 제물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용어는 구약의 희생제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린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에 자신을 단번에 드려 희생제를 폐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는 더 이상 희생제를 드릴 이유가 없고,
그렇기에 그런 제단이나 제물이나 제사장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그 용어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는 것들을 다시 이 땅에 있게 하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께서 더 이상의 희생제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지금까지 회복을 허락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모슬렘 사원을 짓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성전은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성전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목회자들이 앞서서 구약의 용어들을 끌어들여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지방에 내려온 유대 기독교 교사들은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율법 준수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주께서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성도들에게 준 자유를 훼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까닭은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를 엿보려고 한 까닭입니다.
유다 역시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우리 가운데는 이 가만히 들어온 자들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자유를 훼손하려고
거짓 가르침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받쳐서 복을 받는다’는 형태의 가르침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히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받을 것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격이 있는 자처럼 여겨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희생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해서 서로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일천번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희생제입니다.
그곳에는 홀의 아들 우리의 손자 브살렐이 만든 놋제단이 장막 앞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천 마리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물 천 마리는 구체적으로 설명이 없으나 추측하면 수소 천 마리일 것입니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소 한 마리가 200~300만 원 정도이므로 약 20~30억 원 정도라고 추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일천 번제의 경제적 희생은 20~30억 원이라면 이런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도대체 몇 사람이 될 것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천번제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합니까?
그들은 아마도 일천번제(一千燔祭)를 일천번제(一千番祭)로 알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번제’란 회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살라 바치는 희생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a thousand time offerings’가 아니라 ‘a thousand sacrifice’ 또는 ‘a thousand burnt offerings’라고 씁니다.
1000일을 기도하는 것을 ‘일천번제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얼토당토하지 않습니다.
일천번제를 기록한 성경말씀인 역대하 1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회중과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그리고 천 마리의 희생을 드린 그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이 천 날을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천번제는 회수가 아닙니다.
일천 번 기도하기를 작정하였다면 일천번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천일 작정기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천번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기대하는 심리가 깔려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습니까?
드려서 받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이며 이런 태도는 저주를 받습니다.
은혜의 법은 받은 바 은혜에 따라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자유이며, 갈라디아 이단들이 훼방하려고 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는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명목으로든 이 자유로운 복음을 훼손할 능력이 없습니다.
율법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은 제발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성숙하게 되고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성숙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것이 목회자의 본분이고 몫이 아닙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사건처럼 자신을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여기면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지도자들은
베드로 사도가 지도자들에게 가르친 말씀을 다시 새겨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ㅡ이상은 장봉운 목사의 글입니다-
서강사람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목사가 제사장이 하였던 일의 일부를 수행하고,
교회당이 성전의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를 제사장으로, 교회를 성전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선교초기에는 예배당이라고 했는 데
'70년대부터인가 성전이라는 말로 대체가 되어갔습니다.
또, 제단이니 제사장이니 하는 용어도 언제부터인가는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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