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따라 7년 전 처음 베이징(北京)으로 파송 받았던 때를 기억해본다. 꽃샘추위가 지나고 따스한 봄 햇살이 찬란히 비치는 오후였다, 나는 중국에서 한 텀을(4년 반) 마친 후 안식년 기간에 싱가포르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다음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늦게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비전에 대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또한 중국영혼을 품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사역의 첫 번째 텀이라 언어와 문화적응 그리고 현지인들과 교제하는 것에 중점을 두리라 다짐하며 1999년 2월 아름다운 땅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당시 중국에 아는 사람이 없던 터라 유학원의 소개로 베이징짜오퉁(北京交通)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어 학원을 다녔지만 언어는 기초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초급부터 공부했다. 중국어는 발음과 성조가 중요한데 특히 권설음은 한국어에 없는 발음이라 발음하기가 어렵고 조금만 연습해도 혀가 아팠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현지인들과 30분 대화 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던지…. 오전에는 수업을, 저녁에는 현지인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 잘 들리진 않지만 하루에 두 시간씩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들었다. 현장감 있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근처에 큰 재래시장으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장을 보러 갔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러 간다지만 늘 쓰는 말은 “多少??(뚜오샤오 치엔?(얼마예요?)” “便宜一点??!(피엔이 이디얼바!(좀 깎아주세요!)” “?是?的??(저스 쩐더마?(이거 진짜예요?)”였다. 중국 사람은 잘 속인다는 말을 들은지라 안 깎아도 되는 물건도 몇 원 깎아보려고 몇 십분 동안 실랑이 했던 일도 기억이 난다. 베이징에서의 추억들 기관지가 약해 감기에 걸리면 기침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병원에 가면 얼마나 많이 많은 양의 약을 주던지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지금은 좀 덜하다고 하지만 그때의 베이징의 봄은 황사바람 때문에 문을 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외출 할 때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는 필수품이었다. 그때 한국의 아름다운 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베이징의 여름은 또 얼마나 더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더위였다. 베이징의 7~8월은 연이어 40℃를 오르내리는 날씨였지만 뉴스에서는 항상 39℃로 방송을 했다. 왜냐하면 40℃를 넘으면 쉬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재정을 아끼느라 에어컨 대신 소리가 요란한 선풍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도 모자라 어떤 날은 뜨거운 물만 나와 밤새 흘린 땀도 씻을 수 없었던 일들도 돌아보면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었다. 나를 제일 기쁘게 했던 싸고, 맛있고, 영양가 높은 중국음식들, 물론 그 음식으로 점점 살이 찌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두 명씩 알게 된 소중한 중국 친구들을 보면서 나를 그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학기가 끝날 무렵 그곳에 계시는 선교사님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언어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듣고 기도하면서 R대학에 들어갔다. 이 결정으로 비자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캠퍼스 안에서 중국학생들과 자유롭게 만나면서 캠퍼스 사역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어 공부도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익이 많았다. 중국의 대학생활은 마치 고등학교생활과 같았다. 아침 8시부터 오전시간은 필수과목수업이 있고 오후와 저녁에는 선택과목을 들어야 했다. 이미 30대 중반인 나는 20대 초반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학생들이 한 시간에 하는 것을 나는 5시간 내지 7시간을 해야 겨우 따라갔다. 그러나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언어 배우는 것이 바로 사역이라는 생각으로 느리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해 나갔다. 그 두꺼운 “한중사전”이 다 떨어질 정도로 단어를 찾고 또 찾았다. 언어 공부에 있어서는 내 나름대로의 규칙을 세웠는데 첫째, 특별한 일 외에 수업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둘째, 숙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하고 선생님께 교정을 받는다. 셋째,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특별한 주제의 내용을 스크랩한 후, 나의 느낌을 간단하게 적어 놓는다. 참고로 4년 동안 일주일에 한편씩 쓴 작문 숙제는 지금 설교를 준비하고 강의안을 준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훈련이었다. 넷째, 될 수 있으면 현지인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하루에 2시간정도 텔레비전을 본다. 그 결과 졸업할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어의 기초를 든든하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4년 동안 언어 외에 중국의 역사, 문학, 문화에 대해 배우면서 중국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학 캠퍼스는 현지인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어서 언어를 배우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마침 베이징에 사역언어를 배울 수 있는 훈련원을 통해 틈틈이 사역언어도 함께 배울 수 있어서 전도하고 제자훈련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은 단시간에 뭔가 해내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현지인처럼 언어를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언어의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언어를 배우는 동안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늘 있었다. 특히 2년쯤 지났을 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없는 것에 실망이 된 적도 많았다. 학교 시험을 칠 때, 논문을 쓸 때, 그리고 어눌한 언어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그때마다 언어를 만드신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주시도록 기도했고, 함께 언어를 배우는 선교사님들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현지인 친구들도 많은 힘이 되었다. 하루는 언어 때문에 풀이 죽어 있는 나에게 “물방울이 떨어져 결국 바위에 구멍이 난다(水滴穿石)”는 고사성어를 써 가져와 꾸준히 열심히 하면 언젠가 언어를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위로해 준적도 있다. 그 글은 학교를 마칠 때 까지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언어를 배우는 동안 중국을 더 알고 싶어서 방학을 이용해 중국 여러 곳을 여행했다. 어떤 때는 한 달 반 동안 혼자 소수 민족을 중심으로 조사를 하러 다녔던 적도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윈난(雲南)성의 한 지역을 여행 할 때 갑자기 온몸이 가렵고 빨갛게 부풀어 올라서 불안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27시간 버스를 타고 (쿤밍이 아닐까?)운남시에 도착해 병원에 갔는데 다행히 망고 알레르기여서 이후에도 중국 서북쪽을 계속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안(西安)에서 카스까지의 여행은 잊을 수 없다. 후이(回)족, 짱(藏)족, 위구르족을 만나서 교제했던 기억들이 너무 소중하게 남아 있다. 이런 여행들은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불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깊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베이징에 간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현지인 자매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어눌한 언어로 사영리를 전했고 그 자매는 그날 예수님을 그녀의 구세주로 영접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자매와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두 시간동안 성경을 가르친 나도, 또 그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그 자매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자매에게 많은 갈등과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왜냐하면 평생 사회주의 무신론과 실존주의 사상을 배워왔던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자기의 삶을 그분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자매로부터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가정에 어려움이 오면서 하나님께 원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6개월 지난 후에 그 자매는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고 그녀를 통해 그의 남자 친구와 같은 기숙사의 다섯 명의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일본어를 잘 하는 그녀는 언젠가 일본으로 선교를 떠나겠다고 한다. 그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얼마 전 제자훈련을 받은 학생들 가운데 한 형제가 신학을 해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렸는지 모른다. 언어를 배우면서 부족하지만 학생들에게 전도하고 제자훈련한 사역에 아름답게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한 그때 복음을 들었던 학생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돌아와 중국교회에 귀한 일꾼들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언어공부도 사역이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현지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역이다. 물론 어느 정도 언어가 되면 사역을 시작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언어를 배우는 초기 사역기간에(약 2년)는 언어배우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교지에서 언어를 배워야 할 시기에 열정이 앞서서 사역에 뛰어드는 선교사들을 종종 본다. 이런 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3-4년이 지나도 현지어가 초급수준을 넘지 못하며, 그래서 통역을 통해 사역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강권하심이 있으면 사역을 먼저 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언어를 배우는 시기에는 사역에 열매가 없더라도, 그리고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언어 배우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언어 학습의 경험들이 현재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언어에 대한 한계가 느껴질 때 마다 모든 언어를 만드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일구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돌아보면 언어 배우는 데 집중하느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에 많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다시 선교지를 간다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제일 우선에 두어야겠다는 결단을 해본다.
천주영/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