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선교란?
2006. 11. 17. 17:39ㆍ선교자료/5.선교자료
성경적 선교” (요1:14) 한 중 기독교 신학 교류회(남경 05.11.11)
김명혁 목사(KWMA 이사, 한기총 공동회장, 소련선교회 부이사장, 강변교회 담임)
‘성경적 선교’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적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세상으로 오신 최초의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선교’ 즉 ‘성육의 선교’가 성경적 선교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성육의 선교'의 특징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육의 선교’를 본받아 성육적 선교를 한 사도 바울의 선교의 특징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육의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선교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머물지 않고 사람이 되셨고 삶이 되셨습니다. 선교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동남아 사람이나 남미 사람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선교 방식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고전9:20-22).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닌 삶이 되는 것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구 선수가 되고, 태권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태권도 선수가 되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육적’ 선교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성육의 선교는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천막을 치고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십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 가서, 빌립보에 가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고린도에 가서, 그리고 에베소와 로마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살았습니다. 선교는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곳곳에 가서 그곳에 있는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사는 것이 ‘성육적’ 선교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유스티니안 벨츠는 남미 서리남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고, 손양원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셋째, 성육의 선교'는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은혜가 충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진리가 매우 중요하지만 은혜가 없는 진리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선교는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착함과 관용과 사랑을 충만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150여명 중국에 사는 조선족 학생(주로 고아)들에게 조그만 착함과 관용과 사랑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많은 기쁨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난 지금 목사님을 만난 후부터 왜서인지 그냥 기분이 하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너무 행복해서 일까? 겁나는 거 없어요. 관심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깐!”(렴춘희). “저는 지금 그 동안에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아픔들을 다 잊고 훌륭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이 예전보다 적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님의 사랑이 저에게 또 다른 부모 사랑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리예란). “목사님의 도움으로 저는 학교에서 많은걸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 찬송대에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음니다”(동아려). 선교는 단순하게 착함과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넷째, 성육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 선포입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마10:7). 주님이 분부하신 선교가 ‘하나님 나라’ 선포였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는 종말 의식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와 선교는 너무 그 초점을 현세적 정치 경제 문화 민족 등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선교 위임령을 부여하시면서 '민족’이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두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두라고 암시했습니다. 민족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할 필요는 없지만, 교파를 무시하거나 정죄할 필요는 없지만, 민족주의나 교파주의는 극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민족주의를 단호하게 경계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도 한경직 목사도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할 것이고 때로는 장로교나 침례교 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만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현세적이고 미래적인)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며 종말을 준비하도록 하는 종말 지향적 선교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의 선교입니다.
다섯째, '성육의 선교'는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이 실천하시고 분부하신 선교가 ‘치유’와 ‘구원’의 선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라"(마10:8). 선교는 사람을 살리는 구원과 치유입니다.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선교는 사업 이전에 십자가의 피와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전인적인 구원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종교주의적 갈등과 대결이 극심해지는 21세기의 선교야말로 말을 전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치유와 구원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분부하신 선교적 사명을 가장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문둥병자들의 몸과 영혼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살린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악취 나는 나환자 환부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주므로 그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했고, 문둥이 깡패 두목을 회개 시켜서 살렸고, 두 아들을 죽인 ‘마귀 새끼’ 같은 안재선도 회개 시켜서 살렸습니다. 선교는 몸과 영혼이 죽어가는, 이미 죽은 수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성육의 선교는 ‘동반자적 협력’입니다.
성육의 사건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의 협력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방식이 ‘동반자적 협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마10:5). “이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눅10: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사로 보내실 때 열 둘 또는 칠십 인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 혼자만을 귀하게 보시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귀하게 보셨다는 사실이고, 서로 싸우지도 경쟁하지도 크려고도 하지 말고 함께 협력하며 사역을 하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래야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을 믿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요17:21).
일곱째, 성육의 선교는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실천하시고 분부하신 선교가 “땅끝까지 이르러”(행1:8) “모든 족속에게”(마28:19)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땅끝’은 지리적인 개념인 동시에 영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땅끝’은 저주의 땅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옥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셨고 그리고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이방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선언했고 땅끝인 서바나까지 가기를 소원한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행13:46,롬15:26).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당시 반 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였던 로마가 정죄나 타도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마지막 종점이 되었고 순교의 마지막 제단이 되었던 것처럼, 모슬렘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죄나 타도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마지막 종점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가 순교의 제사를 드릴 마지막 제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마지막 선교지가 모슬렘과 이단들이 사는 곳이었듯이, 우리들의 마지막 선교지도 선교가 불가능한 오늘의 ‘땅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성육의 선교는 ‘버림과 떠남’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방식이 ‘버림과 떠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2:7). ‘버림’과 ‘떠남’은 가볍게 남에게 강의할 주제도 아니고 쉽게 남에게 설교할 주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와 이중표 목와 같은 분들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처절한 영혼의 갈망으로 품어볼 수 있는 하나의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용서를 넘어선 사랑” 이란 제목의 창작극을 관람하면서 그리고 버림과 별세의 종 이중표 목사를 떠나 보내면서 깊은 감동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두 분은 오직 주님을 위해서 오직 양 무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볍게 떠났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을까?” 라는 절박한 영혼의 소원과 갈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교는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와 이중표 목사가 보여주신 ‘버림과 떠남’의 별세라고 생각합니다.
아홉째, 성육의 선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예수님께서 성육하신 후 세상에서 인류 구원의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수 제자 베드로가 주님께서 분부하신 선교 위임령을 순교의 제물로 마감하게 되는 최종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 우리는 모두 나 중심적인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선교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이적을 행하든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하게 될 위험성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모든 사역의 최종적인 목적과 비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두도록 혼신의 각오와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지극히 부족한 사람이 엄청난 내용의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저 스스로가 주님 닮은 선교적 삶을 살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부족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 닮은 ‘성육의 선교’를 조금이라도 이루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KWMA 이사, 한기총 공동회장, 소련선교회 부이사장, 강변교회 담임)
‘성경적 선교’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적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세상으로 오신 최초의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선교’ 즉 ‘성육의 선교’가 성경적 선교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성육의 선교'의 특징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육의 선교’를 본받아 성육적 선교를 한 사도 바울의 선교의 특징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육의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선교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머물지 않고 사람이 되셨고 삶이 되셨습니다. 선교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동남아 사람이나 남미 사람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선교 방식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고전9:20-22).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닌 삶이 되는 것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구 선수가 되고, 태권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태권도 선수가 되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육적’ 선교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성육의 선교는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천막을 치고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십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 가서, 빌립보에 가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고린도에 가서, 그리고 에베소와 로마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살았습니다. 선교는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곳곳에 가서 그곳에 있는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사는 것이 ‘성육적’ 선교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유스티니안 벨츠는 남미 서리남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고, 손양원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셋째, 성육의 선교'는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은혜가 충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진리가 매우 중요하지만 은혜가 없는 진리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선교는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착함과 관용과 사랑을 충만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150여명 중국에 사는 조선족 학생(주로 고아)들에게 조그만 착함과 관용과 사랑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많은 기쁨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난 지금 목사님을 만난 후부터 왜서인지 그냥 기분이 하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너무 행복해서 일까? 겁나는 거 없어요. 관심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깐!”(렴춘희). “저는 지금 그 동안에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아픔들을 다 잊고 훌륭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이 예전보다 적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님의 사랑이 저에게 또 다른 부모 사랑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리예란). “목사님의 도움으로 저는 학교에서 많은걸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 찬송대에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음니다”(동아려). 선교는 단순하게 착함과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넷째, 성육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 선포입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마10:7). 주님이 분부하신 선교가 ‘하나님 나라’ 선포였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는 종말 의식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와 선교는 너무 그 초점을 현세적 정치 경제 문화 민족 등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선교 위임령을 부여하시면서 '민족’이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두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두라고 암시했습니다. 민족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할 필요는 없지만, 교파를 무시하거나 정죄할 필요는 없지만, 민족주의나 교파주의는 극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민족주의를 단호하게 경계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도 한경직 목사도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할 것이고 때로는 장로교나 침례교 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만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현세적이고 미래적인)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며 종말을 준비하도록 하는 종말 지향적 선교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의 선교입니다.
다섯째, '성육의 선교'는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이 실천하시고 분부하신 선교가 ‘치유’와 ‘구원’의 선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라"(마10:8). 선교는 사람을 살리는 구원과 치유입니다.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선교는 사업 이전에 십자가의 피와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전인적인 구원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종교주의적 갈등과 대결이 극심해지는 21세기의 선교야말로 말을 전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치유와 구원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분부하신 선교적 사명을 가장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문둥병자들의 몸과 영혼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살린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악취 나는 나환자 환부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주므로 그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했고, 문둥이 깡패 두목을 회개 시켜서 살렸고, 두 아들을 죽인 ‘마귀 새끼’ 같은 안재선도 회개 시켜서 살렸습니다. 선교는 몸과 영혼이 죽어가는, 이미 죽은 수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성육의 선교는 ‘동반자적 협력’입니다.
성육의 사건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의 협력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방식이 ‘동반자적 협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마10:5). “이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눅10: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사로 보내실 때 열 둘 또는 칠십 인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 혼자만을 귀하게 보시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귀하게 보셨다는 사실이고, 서로 싸우지도 경쟁하지도 크려고도 하지 말고 함께 협력하며 사역을 하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래야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을 믿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요17:21).
일곱째, 성육의 선교는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실천하시고 분부하신 선교가 “땅끝까지 이르러”(행1:8) “모든 족속에게”(마28:19)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땅끝’은 지리적인 개념인 동시에 영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땅끝’은 저주의 땅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옥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셨고 그리고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이방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선언했고 땅끝인 서바나까지 가기를 소원한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행13:46,롬15:26).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당시 반 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였던 로마가 정죄나 타도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마지막 종점이 되었고 순교의 마지막 제단이 되었던 것처럼, 모슬렘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죄나 타도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마지막 종점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가 순교의 제사를 드릴 마지막 제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마지막 선교지가 모슬렘과 이단들이 사는 곳이었듯이, 우리들의 마지막 선교지도 선교가 불가능한 오늘의 ‘땅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성육의 선교는 ‘버림과 떠남’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방식이 ‘버림과 떠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2:7). ‘버림’과 ‘떠남’은 가볍게 남에게 강의할 주제도 아니고 쉽게 남에게 설교할 주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와 이중표 목와 같은 분들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처절한 영혼의 갈망으로 품어볼 수 있는 하나의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용서를 넘어선 사랑” 이란 제목의 창작극을 관람하면서 그리고 버림과 별세의 종 이중표 목사를 떠나 보내면서 깊은 감동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두 분은 오직 주님을 위해서 오직 양 무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볍게 떠났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을까?” 라는 절박한 영혼의 소원과 갈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교는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와 이중표 목사가 보여주신 ‘버림과 떠남’의 별세라고 생각합니다.
아홉째, 성육의 선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예수님께서 성육하신 후 세상에서 인류 구원의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수 제자 베드로가 주님께서 분부하신 선교 위임령을 순교의 제물로 마감하게 되는 최종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 우리는 모두 나 중심적인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선교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이적을 행하든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하게 될 위험성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모든 사역의 최종적인 목적과 비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두도록 혼신의 각오와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지극히 부족한 사람이 엄청난 내용의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저 스스로가 주님 닮은 선교적 삶을 살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부족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 닮은 ‘성육의 선교’를 조금이라도 이루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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