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교회는 열심히 선교를 해
왔다. 그래서 세계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국가가 되었고 일부에서는 별로 선교적 가치관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선교의 일등국가가 되자는
구호까지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한국선교가 그 양에 걸 맞는 질적인 성숙과 성과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중에서는 한국교회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중국선교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
성육신의 선교 사도행전 11장에는 초대교회의 무명의 성도들이 안디옥에까지 이르는 지리적 돌파와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하는 인종적인 돌파를 감행하는 개척선교의 결과 안디옥교회가 세워지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에
어느 날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방문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당신들이 한 신앙생활은 부족하며 틀렸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가르침 즉 모세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그들과 안디옥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행히 그
교회에는 문화적 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1.5세 혹은 2세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예루살렘에 대표단이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공의회를 열어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교회는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행15:28-29)고 결의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선교지 교회를 괴롭게 하는 유대의 문화적인 할례와 자문화중심적인 신학을 선교지 교회에 강요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소위 이방인교회라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선교지의 교회들은 자문화안에서 꽃 피는 복음의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오늘날도 소위
선교하는 나라의 교회들은 끊임없이 피선교지의 교회들에게 가서 자신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신학적, 문화적 멍에들을 선교지
교인들의 목에 두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사와 성도들도 설익은 자신들의 신앙과 경험을 가지고 선교지에 가서 선교지의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행위들을 하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행15:10)
현장이 중심되는 선교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국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중국어로 직역해서 요즘 제자훈련교재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게 되었다. 그 책은 좋은 책이긴 하지만 현재의 중국교회에 적합한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기에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해 왔다. 어느 날 중국 내의 지하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때 강의실 앞 쪽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옆에 앉은 동료에게 평신도가 무슨 뜻이니? 하고 묻자 동료학생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전체 학생에게 평신도라는 말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12명의 학생 중에서 단 한 명만이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가 한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 근처에는 본적이 없는데 다른 어떤 곳에 가면 평신도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4대째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가 가정교회의 사역자이기 때문에 가정에서 들은 것이 많은
학생이었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은 내용이 아주 좋은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전제가
만족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평신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평신도가 잠들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교회에는 평신도란 개념이 없고 아직까지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에 잠들기에는 중국의 상황은 아직 춥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게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그 시대와
그 사회문화에 대한 적합성이 없다면 그것은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는 일(행15:19)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본질을 기억하는 선교 몇 개월 전 「하늘에 속한 사람」의 주인공인 윈형제와 그 책의 저자인 폴 헤트웨이
목사와 Back To Jerusalem Foundation (이하 BTJ Foundation)에서 사역하는 사람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윈형제의 신앙의 건전성과 책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과 BTJ Foundation의 재정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제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제기되는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이 취하는 형태가 바로 현대 스타마케팅의 등식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바로
원형제라는 스타와 폴 헤트웨이라는 메니저와 BTJ Foundation이라는 기획사가 함께 앉아 있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백 투
예루살렘운동은 주님께서 중국 가정교회에게 준 전형적인 비서구교회를 향한 비전이다. 그런데 그것이 서구의 자본주의와 마케팅지향적인 선정주의로
오염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BTJ 운동을 통해서 예루살렘까지 가져간 복음이 과연 1세기 예루살렘을 출발한 복음과
같을 것인지에 대한 강한 회의가 들었다. 요즘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는 많은 대형프로젝트들을 보면서 여전히 동일한 의구심이
내면에 제기된다. 중국정부는 21세기의 정신문명의 부재라는 사회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한 방법으로 기독교 교리가 없는 기독교
윤리(Christian Ethic without Christian Doctrine)를 중국 사회의 사회윤리의 한 대안으로 접목시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북경사회과학원 학자들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행하고 있는 한국선교사역의 패러다임은 대부분
기독교적인 삶이 없는 기독교 교리(Christian Doctrine without Christian Life)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이 실제가 되는 선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교인들은 안디옥교회를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디옥교회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행15:24)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다는데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먼 거리를 가서 가르친 헌신과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도운 것이
아니라 교회를 괴롭힌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 제2위의 선교대국이라는 말을 스스로 하고 있고 괄목할 만한 선교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전 세계에서 행하고 있는 선교사역의 내용과 성과에 대해 냉철한 평가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선교지의 상황에 적실성이 없는 오염된 패러다임과 서구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수출할 만한 복음을 가지고
선교지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크레임 받을 복음을 수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중국교회를 도우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교회를 괴롭게 하고 혹하게 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열심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자기점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국 선교사역자들은 선교지 교회를 괴롭게 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교인들인가 아니면 선교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문화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문화적인 다양성과 신학적 건전성을 견지하는 바울과 바나나와 같은 자들인가? 한국교회는 과연 1차 공의회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성경적인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결론을 내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같은 깨어있는 경성함과 겸비함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자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자기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과 관념의 덩어리를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는 자기부인의 겸비함과 삶의 실제성속에 구현되는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선교지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되
섬김과 자유케 하는 복음으로 그들을 섬겨가야 할 것이다.
신갈렙/ 선교사, 열방네트웍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