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까?
2006. 8. 26. 14:37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7절/ 060402 주일 낮
<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
우리는 축복받고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 꿈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날 때부터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래도 누가복음 3장 22절 말씀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미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다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승천하실 때에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다가 에베소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궁금해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 그들을 담임했던 분은 아볼로였는데, 아볼로는 학문과 구변은 뛰어났지만 예수님과 복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에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그 뒤에 오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해주자 저희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에 대해서 사도행전 19장 7절에서는 12명쯤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일꾼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대의 유명한 연설가인 아볼로가 목회해도 12명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하게 되면 그때부터 은혜와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의 철학과 성경 원어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품고 신대륙에 가서 조지아 주에서 목회를 했는데 3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사실상 목회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의욕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8시 24분에 모라비안 교도의 조그만 교회에서 참석해서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전과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도 그가 가는 곳마다 교인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웨슬레로 인해 세계 최대의 교단인 감리교회가 생겼습니다.
< 성령 충만한 삶의 능력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원자의 핵과 같습니다. 핵은 작은 입자지만 그 안에 무서운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연약한 존재라도 성령 능력이 임하면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할 때 어떤 능력이 생길까요?
1. 자신의 외면을 극복하는 능력
성령 충만하면 겉모습은 똑똑하지 않아도 똑똑한 삶을 살고, 겉모습은 부자가 아니라도 부요한 삶을 삽니다. 그처럼 성령 받은 자에게는 외면의 부족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이나 소유가 많은 사람보다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 주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지금이니까 그 제자들이 우러러 보이지만 옛날 같으면 3류 인생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전까지 목수였는데, 당시 23등급의 직업 중에서 19번째 가던 직업이 바로 목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불학무식한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이 볼 때는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행의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일행이라고 보이겠습니까?
당시 예수님 일행의 몰골을 생각하면 외적으로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게 되자 그들은 엄청나게 쓰임 받았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약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 곳에서 임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게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외모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물론 외모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머리를 수세미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외모 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외모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로 인해서 지나친 열등감에 빠지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생각하고 넉넉한 믿음으로 외모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요새 한나가 유난히 꽃게를 자주 찾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나가 저에게 안마를 해주면서 말했습니다. “아! 꽃게가 먹고 싶다. 아빠 얼굴을 보니까 꽃게가 생각나요.” 한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가끔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래도 아빠 얼굴이 꽃게처럼 생겼다고 말하면 됩니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약간 웃었는데 한나가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아빠 얼굴에 점이 많잖아요? 그것은 꽃게에 들어간 소스 같아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썩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그 풍부한 상상력에 조금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생각이 들기도 해서 한나의 상상력을 조금 더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의 다리를 안마해주고 있었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한나야! 그러면 아빠 다리를 보면 뭐가 생각나?”
한나가 남 기분 좋게 하는데 선수이기 때문에 좋은 말이 나올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뜸 말했습니다. “아빠 다리를 보면 으응... 30센티 자가 생각나요.” 그 말을 듣고 엄청나게 충격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아빠의 다리가 짧게 보여도 그렇지 30센티 자가 뭡니까? 방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도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한나도 같이 웃었습니다.
그때 저는 겉으로는 기분이 나쁜 척 하면서 “한나야! 아무리 농담이라도 어떻게 아빠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빠를 최고라고 생각하고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전날 한나의 말이 생각나면서 혼자 킬킬대며 웃었습니다. 제가 그때 속으로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주신 기쁨이구나!”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살면서 받는 상처가 오히려 유머의 소재가 됩니다. 그때에는 어떤 말도 넉넉하게 소화할 수 있는 영적 소화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언제 그런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됩니까? 성령 충만하게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2. 자신의 내면을 극복하는 능력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내재하는 자기 파멸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을 내면 그 일을 집어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자기극복능력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 그 사람과는 절대로 못 살아요.” 그러면서도 사단과는 얼마나 잘사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사단’과는 잘 살면서 ‘사람’과는 못살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함께 못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움직여야 하고, 배우자를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 때문에 못산다! 아내 때문에 못산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신 때문에 못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은 모르고 남이 못하는 것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지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송아지 뿔이 바로 나라고 매일 송아지 뿔을 때리니까 결국 송아지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억지로 고치려고 하면 가정이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100% 불행한 사람도 없고 100% 행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 파멸의 씨앗을 성령의 권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천성이 있습니다. 그 천성 중에는 나쁜 천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성도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좋은 방향으로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잘 살고 있지만 반대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곤고한 상태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불평과 원망과 상처가 많고, 남 탓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얼마든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신앙이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참을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나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평안과 기쁨과 해방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 있는 삶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성령 충만함이 없으면 그런 삶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3.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살다 보면 어려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면 언젠가 꿈같은 축복의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성공이 꼭 선은 아닙니다. 진짜 선은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대하고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까? 왜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 선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반대로 왜 악인들이 저렇게 잘 될까?” 가끔 그런 현실을 목격하면 때로는 야속하고, 답답하고, 실망도 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꼭 거절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삶에서 가끔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와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위기란 위험 속에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위험 속에서 오히려 더 드러나고 더 전진합니다.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역경도 축복으로 변하고, 갈등도 성숙함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번에 정길진 목사님이 사모님을 잃고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봉안실을 부부용으로 구입했습니다. 다시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며칠 전에는 사모님 전화 통화 목소리 녹음한 것을 우연히 듣고 미칠 것만 같고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틀 전에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평소에 가끔 부부싸움이라도 하시지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왜 부부싸움을 안 해요? 저희들도 가끔 했어요.” 제 생각에는 정길진 목사님 내외분은 너무 사람이 좋으셔서 부부싸움을 절대 안할 것 같았는데 목사님도 부부싸움을 가끔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을 해도 결코 선을 넘지 않고, 말을 절제하고, 곧 화해를 모색하며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부부싸움조차 더욱 큰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드러내고, 갈등 중에서도 사랑을 만들어내고, 역경 중에 더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평온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며칠 동안 시달리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자 그때 나타나 “여러분! 안심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든 환경에서도 믿는 사람답게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시골 청년들이 예루살렘을 뒤엎고, 나중에는 신앙으로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행동에 자신감도 생기고, 언어 속에 확신도 생기고, 무서운 추진력도 생기고, 어떤 나쁜 평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고, 진정한 행복도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행위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성령 충만함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4. 환상을 가지고 미래를 대처하는 능력
성령은 꿈을 꾸게 합니다. 꿈이 있는 한 사람은 꿈이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합니다. 모세가 꿈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니까 모든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평했지만 결국 모세 한 사람이 그 민족을 살린 것입니다. 회사를 보면 기업을 일으킨 한 사람의 힘이 불평하는 모든 사원의 힘보다 셉니다. 왜 그렇게 힘이 세게 됩니까? 그가 가진 큰 꿈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 안에서 꿈을 꾸면 지혜도 생깁니다. 사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싶으면 그 지혜도 구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정당하게 벌면서도 돈을 버는 길을 신기하게 찾아가는 것을 봅니다. 돈을 벌려면 무작정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버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잘 벌기 위해서 먼저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국내에 10번째 안에 드는 유명한 여행사에서 온 문자 메시지인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태국 푸켓! 폭탄 세일 4박 5일에 99,000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여행사라면 “사기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지나치겠지만 유명한 여행사이기 때문에 사기 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상식으로는 그 금액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길을 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익을 올리는 길이 있고,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들이 돈을 법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수익을 내는 길을 정교하게 찾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업을 해도 무작정 하지 말고 기도하며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정복할 수 있는 정교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정교한 길도 보여주실 것입니다. 저도 새벽에 무릎을 꿇으면 그날 하루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꿈은 너무 원대하고 찬란한 꿈입니다.
얼마 전 한 동료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 사이트는 한국 목사님들 사이에는 유명한 브랜드 네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더욱 큰 도전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이한규의 사랑칼럼’이 최고의 영적 브랜드 네임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칼럼이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이 자살을 포기하고, 절망했던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발전하길 소원합니다.
또한 저의 궁극적인 비전인 CMA 선교사 훈련학교가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션센터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들께서도 작은 오병이어의 헌신을 해주십시오. 누군가 한 사람이 헌신하면 헌신의 연쇄작용이 일어나서 꿈과 같은 열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도 누군가 한 사람의 헌신으로 영적 수류탄의 뇌관을 터뜨리면 역사는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선교사가 어느 시점보다 더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미국 CMA는 120년의 선교 노하우를 가지고 훌륭한 선교사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노하우를 한국에 잘 착근하면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자원국가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꿈과 그 꿈에 드린 땀과 정성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꿈을 주시고, 거룩한 꿈을 이룰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대표적인 표시는 꿈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파멸의 씨앗을 자꾸 뿌리지 말고 꿈의 씨앗을 자꾸 뿌려야 합니다. 성령이 주신 꿈과 환상이 있어야 신비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꿈이 새롭게 되면 사람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도 뚜렷한 꿈이 없으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시는 환상의 안경을 쓰면 꿈과 목표가 분명하게 됩니다. 기도 시간은 꿈을 날카롭게 다듬는 시간이고, 예배 시간은 절망을 팔고 꿈을 사는 시간입니다. 믿음은 현재의 현실이 어떻든 그 현실 속에서 내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찬란하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은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는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업과 자녀의 문도 열리고, 건강과 물질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부산에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새벽 네 시에 가족들을 깨워서 먼저 가족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새벽기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전 가족을 깨워서 찬송을 했습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주소서...” 그렇게 한참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찬송을 하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쿵 하고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목사님이 흥분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열심히 성령을 구했더니 드디어 너희 어머니에게 성령이 임하여 입신하셨다. 너희들도 준비해라.” 그리고 계속 찬송을 했습니다. 조금 후에 큰아들도 쿵 하고 넘어졌습니다. 곧 이어서 작은 아들도 입신했고, 나중에 목사님까지 입신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안 나타났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항상 정확하던 목사님이 왜 안 나타나나?” 그래서 권사님이 급히 사택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새벽기도 시간이 되었어요.” 그런데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모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성령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연탄가스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성령 충만함을 추구하다가 목사님이 진짜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가 바로 지식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였습니다. 원래 그 목사님은 혀가 짧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설교를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짜증이 나고 교회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어느새 알고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왜 연약한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려고 합니까? 도망가면 안 됩니다. 믿고 갑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쯤 되서 정말 못 견딜 것 같아 또 옮기려고 하면 목사님이 어느새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더해져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혀가 짧아도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열릴 것입니다. 성도에게 성령 충만이 없는 신앙생활은 불 없는 화로이고, 열매 없는 나무이고, 물 없는 웅덩이입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삶을 원하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습관이 새로워지고, 습관이 새로워지면 운명과 인격조차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 전쟁 중입니다.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 마귀를 사람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막는 힘인데 그 힘이 어디에서 생깁니까? 바로 성령 충만함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보다 가장 급선무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만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식이나 훈련이나 종교의 운동이 아니고 성령으로 인한 생명 운동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성령의 바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바람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사도행전 19장 1-7절/ 060402 주일 낮
<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
우리는 축복받고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 꿈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날 때부터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래도 누가복음 3장 22절 말씀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미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다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승천하실 때에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다가 에베소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궁금해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 그들을 담임했던 분은 아볼로였는데, 아볼로는 학문과 구변은 뛰어났지만 예수님과 복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에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그 뒤에 오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해주자 저희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에 대해서 사도행전 19장 7절에서는 12명쯤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일꾼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대의 유명한 연설가인 아볼로가 목회해도 12명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하게 되면 그때부터 은혜와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의 철학과 성경 원어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품고 신대륙에 가서 조지아 주에서 목회를 했는데 3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사실상 목회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의욕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8시 24분에 모라비안 교도의 조그만 교회에서 참석해서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전과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도 그가 가는 곳마다 교인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웨슬레로 인해 세계 최대의 교단인 감리교회가 생겼습니다.
< 성령 충만한 삶의 능력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원자의 핵과 같습니다. 핵은 작은 입자지만 그 안에 무서운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연약한 존재라도 성령 능력이 임하면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할 때 어떤 능력이 생길까요?
1. 자신의 외면을 극복하는 능력
성령 충만하면 겉모습은 똑똑하지 않아도 똑똑한 삶을 살고, 겉모습은 부자가 아니라도 부요한 삶을 삽니다. 그처럼 성령 받은 자에게는 외면의 부족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이나 소유가 많은 사람보다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 주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지금이니까 그 제자들이 우러러 보이지만 옛날 같으면 3류 인생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전까지 목수였는데, 당시 23등급의 직업 중에서 19번째 가던 직업이 바로 목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불학무식한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이 볼 때는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행의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일행이라고 보이겠습니까?
당시 예수님 일행의 몰골을 생각하면 외적으로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게 되자 그들은 엄청나게 쓰임 받았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약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 곳에서 임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게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외모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물론 외모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머리를 수세미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외모 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외모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로 인해서 지나친 열등감에 빠지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생각하고 넉넉한 믿음으로 외모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요새 한나가 유난히 꽃게를 자주 찾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나가 저에게 안마를 해주면서 말했습니다. “아! 꽃게가 먹고 싶다. 아빠 얼굴을 보니까 꽃게가 생각나요.” 한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가끔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래도 아빠 얼굴이 꽃게처럼 생겼다고 말하면 됩니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약간 웃었는데 한나가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아빠 얼굴에 점이 많잖아요? 그것은 꽃게에 들어간 소스 같아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썩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그 풍부한 상상력에 조금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생각이 들기도 해서 한나의 상상력을 조금 더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의 다리를 안마해주고 있었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한나야! 그러면 아빠 다리를 보면 뭐가 생각나?”
한나가 남 기분 좋게 하는데 선수이기 때문에 좋은 말이 나올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뜸 말했습니다. “아빠 다리를 보면 으응... 30센티 자가 생각나요.” 그 말을 듣고 엄청나게 충격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아빠의 다리가 짧게 보여도 그렇지 30센티 자가 뭡니까? 방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도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한나도 같이 웃었습니다.
그때 저는 겉으로는 기분이 나쁜 척 하면서 “한나야! 아무리 농담이라도 어떻게 아빠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빠를 최고라고 생각하고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전날 한나의 말이 생각나면서 혼자 킬킬대며 웃었습니다. 제가 그때 속으로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주신 기쁨이구나!”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살면서 받는 상처가 오히려 유머의 소재가 됩니다. 그때에는 어떤 말도 넉넉하게 소화할 수 있는 영적 소화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언제 그런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됩니까? 성령 충만하게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2. 자신의 내면을 극복하는 능력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내재하는 자기 파멸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을 내면 그 일을 집어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자기극복능력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 그 사람과는 절대로 못 살아요.” 그러면서도 사단과는 얼마나 잘사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사단’과는 잘 살면서 ‘사람’과는 못살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함께 못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움직여야 하고, 배우자를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 때문에 못산다! 아내 때문에 못산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신 때문에 못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은 모르고 남이 못하는 것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지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송아지 뿔이 바로 나라고 매일 송아지 뿔을 때리니까 결국 송아지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억지로 고치려고 하면 가정이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100% 불행한 사람도 없고 100% 행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 파멸의 씨앗을 성령의 권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천성이 있습니다. 그 천성 중에는 나쁜 천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성도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좋은 방향으로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잘 살고 있지만 반대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곤고한 상태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불평과 원망과 상처가 많고, 남 탓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얼마든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신앙이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참을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나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평안과 기쁨과 해방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 있는 삶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성령 충만함이 없으면 그런 삶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3.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살다 보면 어려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면 언젠가 꿈같은 축복의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성공이 꼭 선은 아닙니다. 진짜 선은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대하고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까? 왜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 선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반대로 왜 악인들이 저렇게 잘 될까?” 가끔 그런 현실을 목격하면 때로는 야속하고, 답답하고, 실망도 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꼭 거절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삶에서 가끔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와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위기란 위험 속에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위험 속에서 오히려 더 드러나고 더 전진합니다.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역경도 축복으로 변하고, 갈등도 성숙함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번에 정길진 목사님이 사모님을 잃고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봉안실을 부부용으로 구입했습니다. 다시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며칠 전에는 사모님 전화 통화 목소리 녹음한 것을 우연히 듣고 미칠 것만 같고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틀 전에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평소에 가끔 부부싸움이라도 하시지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왜 부부싸움을 안 해요? 저희들도 가끔 했어요.” 제 생각에는 정길진 목사님 내외분은 너무 사람이 좋으셔서 부부싸움을 절대 안할 것 같았는데 목사님도 부부싸움을 가끔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을 해도 결코 선을 넘지 않고, 말을 절제하고, 곧 화해를 모색하며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부부싸움조차 더욱 큰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드러내고, 갈등 중에서도 사랑을 만들어내고, 역경 중에 더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평온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며칠 동안 시달리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자 그때 나타나 “여러분! 안심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든 환경에서도 믿는 사람답게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시골 청년들이 예루살렘을 뒤엎고, 나중에는 신앙으로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행동에 자신감도 생기고, 언어 속에 확신도 생기고, 무서운 추진력도 생기고, 어떤 나쁜 평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고, 진정한 행복도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행위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성령 충만함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4. 환상을 가지고 미래를 대처하는 능력
성령은 꿈을 꾸게 합니다. 꿈이 있는 한 사람은 꿈이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합니다. 모세가 꿈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니까 모든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평했지만 결국 모세 한 사람이 그 민족을 살린 것입니다. 회사를 보면 기업을 일으킨 한 사람의 힘이 불평하는 모든 사원의 힘보다 셉니다. 왜 그렇게 힘이 세게 됩니까? 그가 가진 큰 꿈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 안에서 꿈을 꾸면 지혜도 생깁니다. 사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싶으면 그 지혜도 구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정당하게 벌면서도 돈을 버는 길을 신기하게 찾아가는 것을 봅니다. 돈을 벌려면 무작정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버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잘 벌기 위해서 먼저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국내에 10번째 안에 드는 유명한 여행사에서 온 문자 메시지인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태국 푸켓! 폭탄 세일 4박 5일에 99,000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여행사라면 “사기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지나치겠지만 유명한 여행사이기 때문에 사기 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상식으로는 그 금액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길을 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익을 올리는 길이 있고,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들이 돈을 법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수익을 내는 길을 정교하게 찾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업을 해도 무작정 하지 말고 기도하며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정복할 수 있는 정교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정교한 길도 보여주실 것입니다. 저도 새벽에 무릎을 꿇으면 그날 하루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꿈은 너무 원대하고 찬란한 꿈입니다.
얼마 전 한 동료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 사이트는 한국 목사님들 사이에는 유명한 브랜드 네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더욱 큰 도전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이한규의 사랑칼럼’이 최고의 영적 브랜드 네임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칼럼이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이 자살을 포기하고, 절망했던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발전하길 소원합니다.
또한 저의 궁극적인 비전인 CMA 선교사 훈련학교가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션센터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들께서도 작은 오병이어의 헌신을 해주십시오. 누군가 한 사람이 헌신하면 헌신의 연쇄작용이 일어나서 꿈과 같은 열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도 누군가 한 사람의 헌신으로 영적 수류탄의 뇌관을 터뜨리면 역사는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선교사가 어느 시점보다 더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미국 CMA는 120년의 선교 노하우를 가지고 훌륭한 선교사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노하우를 한국에 잘 착근하면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자원국가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꿈과 그 꿈에 드린 땀과 정성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꿈을 주시고, 거룩한 꿈을 이룰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대표적인 표시는 꿈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파멸의 씨앗을 자꾸 뿌리지 말고 꿈의 씨앗을 자꾸 뿌려야 합니다. 성령이 주신 꿈과 환상이 있어야 신비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꿈이 새롭게 되면 사람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도 뚜렷한 꿈이 없으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시는 환상의 안경을 쓰면 꿈과 목표가 분명하게 됩니다. 기도 시간은 꿈을 날카롭게 다듬는 시간이고, 예배 시간은 절망을 팔고 꿈을 사는 시간입니다. 믿음은 현재의 현실이 어떻든 그 현실 속에서 내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찬란하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은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는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업과 자녀의 문도 열리고, 건강과 물질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부산에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새벽 네 시에 가족들을 깨워서 먼저 가족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새벽기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전 가족을 깨워서 찬송을 했습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주소서...” 그렇게 한참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찬송을 하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쿵 하고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목사님이 흥분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열심히 성령을 구했더니 드디어 너희 어머니에게 성령이 임하여 입신하셨다. 너희들도 준비해라.” 그리고 계속 찬송을 했습니다. 조금 후에 큰아들도 쿵 하고 넘어졌습니다. 곧 이어서 작은 아들도 입신했고, 나중에 목사님까지 입신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안 나타났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항상 정확하던 목사님이 왜 안 나타나나?” 그래서 권사님이 급히 사택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새벽기도 시간이 되었어요.” 그런데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모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성령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연탄가스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성령 충만함을 추구하다가 목사님이 진짜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가 바로 지식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였습니다. 원래 그 목사님은 혀가 짧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설교를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짜증이 나고 교회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어느새 알고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왜 연약한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려고 합니까? 도망가면 안 됩니다. 믿고 갑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쯤 되서 정말 못 견딜 것 같아 또 옮기려고 하면 목사님이 어느새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더해져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혀가 짧아도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열릴 것입니다. 성도에게 성령 충만이 없는 신앙생활은 불 없는 화로이고, 열매 없는 나무이고, 물 없는 웅덩이입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삶을 원하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습관이 새로워지고, 습관이 새로워지면 운명과 인격조차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 전쟁 중입니다.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 마귀를 사람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막는 힘인데 그 힘이 어디에서 생깁니까? 바로 성령 충만함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보다 가장 급선무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만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식이나 훈련이나 종교의 운동이 아니고 성령으로 인한 생명 운동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성령의 바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바람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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