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13. 00:38ㆍ신학자료/5.성경신학자료
제 79과 성서의 역사와 지리(1) - 창조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
요점 : 1.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역사 흐름을 대략 공부한다. 2. 이 시대의 지명과 고고학적인 발견들에 대해 공부한다. |
1. 에덴동산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동산은 비손 강과 기혼 강,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힛데겔)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비손강과 기혼강의 위치를 알길이 없다. 아마도 노아의 홍수나 오랜 세월의 지층변화 때문에 두 강의 위치가 변화되었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의 상류가 에덴동산의 위치였다면 이는 지구 전체의 중심 부분을 가리킨다. 지구는 크게 양쪽 반구(半球)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동반구가 서반구보다 크고 유브라데 지역은 바로 그 동반구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2. 가인의 시대와 그 후의 문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후에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문화생활을 발전시켜 나갔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 앞에서 쫒겨나 정착한 곳은 놋 땅이었는데 이는 ‘유리함’ 이라는 뜻이다. 가인의 후손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는데 그것은 바로 일부다처제의 도입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단수)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하셨다.(창 2: 24) 일부다처제의 결과는 집안에 살인을 가져왔다.(창 4: 23)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하였는데 여기서 난 세 아들이 각각 목축업과 음악과 철공업을 일으켰다.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그 당시 성의 건축과 철기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노아의 홍수
이처럼 인간의 원시문화가 한창일 때 그 문화에 도취된 인간들이 문화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주로 성적인 타락, 향락의 도취, 도덕적 몰락, 종교적 부패와 타락이 극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이 부패한 시대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산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에녹이나 노아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둘은 모두 아담의 보다 의로운 아들인 셋의 계보에 들어가는데 에녹은 아담의 6대손으로 아담이 622세 때에 태어나 308년을 함께 살았으며 365세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갔다.(창 5: 24)
그러나 노아의 시대에는 셋의 자손들이 가인의 자손들과 결혼하면서 사회는 더욱 악하여 갔고 마침내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 3)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변호하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기를 멈추고 떠나시자마자 다가온 것이 노아의 홍수였다. 하나님은 의롭고 또한 은혜를 입은 노아를 택하여 세상에 홍수의 심판을 예언하게 하였고 길이 135미터, 높이 22.5미터, 폭 13.5미터의 거대한 배를 짓게 하시고 그 안에 칸을 막아 모든 육축과 짐승들을 한 쌍씩 보존하게 하셨다. 노아는 무려 120여년이나 외쳤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 살아났고 인류의 대 역사의 운하역할을 한 사람들은 노아 부부와 그의 세 아들 부부들에 불구했다.
노아의 홍수는 오늘날 고고학에 의해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증명 되었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지방과 키시에서 지하를 발굴한 끝에 주전 4천년경의 문화층과 접속된 2.5미터 두께의 광활한 진흙층을 발견했다. 이같은 진흙층은 곧 대홍수가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 진흙층에만 문화적 자취가 없을 뿐 그 이전이나 이후에는 모두 문화적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진흙층 아래에서 고고학자들은 10여개의 성읍터를 발굴해 내었고 여러가지 유형들도 발굴했다. 이런 진흙층은 갈대아 우르지방, 노아의 전설적 고향인 화라지방, 바벨론 동쪽 끝에 있는 가스저방 등,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정박했는데 지금 이 산은 터키 ‘반’ 호수의 북쪽 100키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해발 5,144미터이고, 사시사철 눈에 덮여있다. 지금까지 많은 탐험대 및 인공위성이 아라랏 산의 빙하속에서 노아의 방주와 흡사한 물체를 발견했었고 불란서 탐험가 페르낭 나바라는 1969년에 노아 방주의 잔해를 한토목 가져왔는데 미국 산림청은 이를 백참나무로 밝혔고 약 4천년 이상 묵은 나무로 감정했다.
노아와 그의 자손들은 아라랏산에서 내려와 거기에서 800키로미터 떨어진 홍수 이전의 그들의 고향 바벨론으로 돌아왔다. 홍수로 인한 수위가 가장 높은 산보다도 약 7미터나 올라서자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다 죽고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00년이 채 못되어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다가 심판을 받고 방언이 처음으로 나눠졌으며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야벳족속운 북쪽으로 가서 흑해와 카스피해에 정착하여 지금 유럽과 아시아에 거주하는 코카서스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함의 족속은 남쪽으로 가서 남부 및 중부 아라비아, 애굽, 지중해 동해안, 아프리카의 동해안에 정착했다. 셈의 족속은 유브라데강의 북쪽 유역과 그 변두리에 있는 유대민족, 앗수르족속, 시리아족속, 엘람족속이 되었다.
4. 니므롯의 바벨탑
니므롯은 함의 손자요 노아의 증손자로서 홍수에서 아브라함 사이에 이르는 400여년 사이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시날평지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하여 네 성읍을 건축하고 연합하여 혼자 다스렸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그후에 여러 세기동안 바벨론과 니느웨는 대국들의 수도가 되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시날 평지 위의 바벨탑은 의심할 나위없이 니므롯의 진두지휘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는 특이한 사냥군으로서 오갖 맹수들의 위협에서 백성들을 보호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여겼다. 사실 그는 사후에 그의 부인에 의하여 모르닥(Merodach) 이라는 명칭아래 신격화 되었고 그로부터 바벨론 종교가 시작되었다.
바벨탑의 건설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바벨론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다시 계속해서 세웠고 이것은 바벨론의 중심이 되었다. 이 탑은 바벨론에 있는 다른 탑들의 모형이 되었고 애굽의 피라밋 모양에 암시를 준 것 같다.
5. 셈의 전기
창세기 10장, 11장은 셈이 작성하여 아브라함에게 전해 주었던 것 같다. 셈은 홍수 이전 98년부터 아브라함이 150세 되던 때까지 600년을 살았다. 11장 10~26절에 기록된 계보는 셈에게 아브라함까지 10대(427년)에 걸친 내용이다. 이것도 셈이 손수 기록하여 아브라함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이 기간을 전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연대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이 름 |
아들이 출생한 나이 |
전체 나이 |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무드셀라 라멕 노아 노아(홍수때)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라함 |
130 105 90 70 65 162 65 187 182 500 600 100(홍수후 2년) 35 30 34 30 32 30 29 130 75(가나안에 들어감) |
930 912 905 910 895 962 365 969 777 950
600 438 433 464 239 239 230 148 205 |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아담에서 홍수까지 1656년, 홍수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427년이다.
아담은 므두셀라와 243년 같이 살았고, 므두셀라는 노아와 600년, 셈과 98년 같이 살았다. 아담의 죽음과 노아와 출생사이는 126년이다. 노아는 홍수 이후 350년 살았고 아브라함의 출생 2년 전에 죽었다. 셈은 홍수 이전 98년 부터 홍수 이후 502년 살았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 75년을 더 살았다. 아담은 7대 손자가 출생할 때까지 살았고 노아는 9대 손자가 출생할 때까지 살았다.
* 고대 중동 지역 구약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이 인접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대략 북위 20°와 40°사이 동경 25°와 50°사이에 위치하여 있으며, 팔레스타인(Palestine), 수리아(Syria = 한글 성경 구약에는 ‘아람’이라고 옮겨 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애굽(Egypt), 북부를 제외한 소 아시아(Asia Minor), 알메니아(Armenia)의 대붑분, 서부 메데(Media), 엘람(Elam), 남북부를 제외한 아라비아(Arabia), 동부 리비아(Lybia), 구부로(Cyprus), 그레데(Crete)와 동부 에게해(Aegean Sea)등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
*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현재 이락의 유명한 강들인 유프라테스(Euphrates)와 티그리스(Tigris)강이 흐르고 있는 넓은 지역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브라테스강 하류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Ur)에서 같은 강 상류에 자리잡은 갈그미스(Caechemish)까지의 거리는 2천 5백리에 이르며, 강의 굴곡을 따르면 4천여리를 헤일 수 있다. 다음으로 유프라테스 강 위에 놓인 갈대아의 수도인 “바벨론”에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까지의 직선 거리는 1천 1백여리이며, 길을 따라 굴곡하면 1천 4백여리에 이른다. 이런 광대한 지역에 옛 사람들은 관계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목축업까지 개발하여 그 일에 종사했다.” |
제 80과 성서의 역사와 지리(2)-족장시대부터 가나안 정복까지 -
요점 : 1.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은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주전 1,200년까지의 이스라엘 유목민시대는 성경역사의 여명기이다. 3. 히브리인의 족장중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이다. |
성서의 역사는 인류사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역사인 구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광범위한 여러 시기에 걸쳐 기록된 책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인 요인들을 세밀히 분석, 시대별로 구분해보는 것이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편리할 것이다.
1. 족장들
성경역사의 여명기는 유목민의 시대이다. 주전 1,200년까지 약 800년 동안의 히브리 민족의 생활 양식과 문화의 특색은 유목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족장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그 시대의 사회조직과 정치형태를 말한다. 족장이란 가족, 씨족의 할아버지, 또는 부족의 어른, 추장(酋長)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옛 구약시대의 족장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 이삭, 유다, 요셉 등이다.
1) 아브라함
신앙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다. 셈은 노아의 세 아들 중의 하나이다.(창 10: 1~5, 21~31) 성경은 셈으로부터 그 후손인 아브라함에게 까지 족보를 잘 기록하여 주고 있다.(창 11: 10~26)
아브라함은 주전 12세기에 초생달형 옥토에서 옮겨왔다.(창 11: 31~12: 5) 그의 떠난 곳은 수메르(Sumer) 땅의 중심지인 갈대아 우르였으며 약속 받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그는 여기 저기 옮겨 살았다. 먼저 세겜에서 벧엘로, 그리고 네겝으로(창 12: 6~9), 그리고 기근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다.(창 12: 10~13: 4) 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를 떠나 갔다는 사실은 지파의 분열을 의미한다.(창 13: 5~11) 아브라함이 그의 처 사라에게서 안 외아들인 이삭을 통하여 히브리인의 혈통이 전해졌다.(창 17: 15~21, 21: 1~7)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에게 또 하나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창 16: 1~16) 이스마엘은 북아프리카 지방의 유목민 중 몇몇 선조가 되었다.(창 25: 12~18)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후처 그두라를 취하여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도 북 아프리카의 유목민 선조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네겝으로 이사하여 살기도 했고 한때 브엘세바에 산 일도 있다.(창 21: 22~34) 그러나 그가 가장 오래 산곳은 헤브론으로서 사라도 자신도 모두 헤브론에 묻혔다.
2) 이삭
이삭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출생한 아들이다. 출생지는 브엘세바이다.(창 21: 2, 3, 14) 이삭은 네겝(남방)에 살고 있었다.(창 24: 62)
그러나 그 지방에 기근이 심할 뿐 아니라 그랄 골짜기의 우물 싸움 때문에 거기에 사는 그랄 목자들과 두번씩이나 싸워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세번째 우물을 팠을 때는 싸우지 않았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부터 외부적으로 아무런 침해도 받지 않게 되었다. 이삭은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다. 이삭의 평화주의는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인간 아비멜렉도 감화하여 마침내 그는 이삭에게 화친을 제의하게 되었다.(창 26장) 이삭은 만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노후에 살던 기럇아르바의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다.(창 35: 27, 28)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 어머니 사라가 묻힌 막벨라굴에 아내와 같이 장사되었다.(창 49: 30, 31)
3) 야곱
창세기의 족장들에 관한 기록에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여러 장소들은 세겜에서 헤브론에 이르는 중앙 산지 길을 따라 남방(Negeb)에까지 위치해 있다. 야곱에 관한 기사는 길르앗의 중심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27장부터 31장에 하란으로 향해 가던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란에 이르러 외삼촌 라반과 그의 가족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20년간 일을 하는 중에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 틈에서 12아들을 얻고 또 많은 소유를 가지고 환향하게 되었다.
야곱은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선조로서 그의 열 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은(창 30장) 그 가족이 라반의 무리에서 독립하여(창 31장)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을 말하고 있다. 에서 곧 에돔은 세일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36: 6~8)
야곱은 원주민들과 약간 충돌을 일으켰으나(창 34장)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주하였다.(창 35장, 37: 1) 그러나 그 후 기근에 못 이겨 권속들과 함께 애굽으로 이사해야만 되었다. 야곱은 애굽에서 죽었는데 그 장지는 헤브론이었다.(창 48: 1~50: 13)
2.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구약성서 처음 부분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사건은 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특별히 강조되는 곳이다.
1) 출애굽의 노정
원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셋이 있었다.
첫째는 고센지방에서 지중해를 가까이하여 블레셋지방으로 가는 길과 둘째는 고센지방에서 숙곳을 우편으로 바라보며 수르광야의 중심부를 통과 가나안의 중앙부분을 지나는 길과 세째는 고센땅에서 홍해쪽으로 남하하여 아카바만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이 세번째 길은 애굽 사람들이 시내 반도에서부터 동광석을 얻어들일 목적으로 개설한 산업도로이었다.
출애굽기 15장과 16장에 이스라엘의 시내광야 여정이 나온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적 도강과 원수의 멸망을 보고 개선가를 부르며 시내 광야로 행진한다. ‘수르’에서 ‘마라’, ‘엘림’을 지나 시내산에 도착하게 된다.(출 15: 22~23, 27, 16: 1) 마라는 홍해를 건넌 후 제1정착지로서, 그곳은 쓴 물이 있는 곳이다.(출 15: 23, 민 33: 8) 엘림은 홍해를 건너서 제2정착지이다. 그곳은 수르광야를 지나서 오늘날 수에즈 운하 동쪽이다.(출 15: 27, 16: 1, 민 33: 9, 10)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으로 아말렉을 만난 곳은 시내광야에 있는 르비딤이었다.(출 17: 8~13) 그곳에서 그들과 전쟁한 결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승리가 돌아 갔다. 이 때문에 사사기 12장 15절이나 15장에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과 대전하게 되었고 그들과 승패를 겨루게 되었다. 시내산을 떠나서 사막을 여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은 가데스였다.(민 33:16~36) 가데스는 놉의 중심지로써 가나안을 가려면 곧장 북쪽으로 가면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가나안 노정에 적개심을 품은 타민족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민 13: 1 ~14: 28) 그러나 그들은 사해 동족지역을 통과해야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해 동쪽에 거주하는 에돔과 모압왕국의 왕 때문이었다. 이러므로 에돔땅을 돌아 가데스 동남방에 나와서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사막 끝인 세일산 동편으로 향했다. 요단강 동편에 다다랐을 때 두 임금 시혼과 옥이 거느린 아모리인의 두 떼가 그들의 길을 막았으나 그들과 싸워 물리쳤다.(민 21: 21~22: 1) 모압인도 미디안도 히브리인과 대적하였으나 이들도 역시 패배하였다.(민 22: 22~24: 25, 민 31: 1~12) 그러나 모세는 살아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2) 가나안 입성
이스라엘은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인도되어 가나안으로 입성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함에 있어 중요한 요건은 전쟁과 정복과 분할이다. 그들은 가나안 7족과 전쟁하고 그들을 진멸하고 점령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분할해야 했다.(수 13장) 이스라엘 백성이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여리고 동편 길갈이었다(수 4: 19) 길갈은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성별된 곳으로서 한동안 이스라엘 지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여호수아가 점령한 지역은 남쪽과 북쪽으로서 남쪽에는 여리고, 아이, 하기스, 드빌, 에그론과 립나와 같은 성읍들이 있고 또 그것을 쳐서 파괴했다. 또 북쪽도성은 하솔(수 11: 11)이 묘사되어 있다. 정복을 마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라는 곳에 집을 지었다.(수 19: 50) 여호수아는 죽은 후 그의 성읍 딤낫세라에서 장사되었다.(수 24: 30)
* 팔레스타인(Palestine)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있어서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곳은 근동의 비옥한 정착지역 남서쪽끝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외곽지역이다. 이 땅은 바사(Perisia)만에서 시나이(Sinai)반도에 이르는 초생달 모양의 비옥한 지대로서 소위 “비옥한 초생달(Fertile Crescent)”이라 불리운다. 이 초생 달 지역은 서쪽으로 지중해를 면하고 있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아마누스, 아라랏, 자그로스 산맥 등 너무 험준해서 거의 넘을 수 없는 산악지대로 불러 싸여있다. |
* 성경에 노아의 아들 셈과 함께 야벳의 후예(後裔)들의 족보가 나와 있다.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의 후예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눠져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으로 흩어져 정착하였다. 이 수 많은 종족들은 세계열(系列)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곧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지역의 셈(Shem)의 후예와 이짚트와 그 일대의 함(Ham)의 후예와 북부와 서쪽 땅의 야벳(Japheth)의 후예이다. 성경의 족보에는 비옥한 초생달 지대와 시날(남부 메소포타미아)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여러왕도(王都)들과 기타 주요 중심지들 명단이 첨가되어 있다. 성경의 명단 가운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이 많고 또 어떤 것은 전혀 확인이 되지 않은 것도 있으나 성지(聖地)에 구심점(求心点)을 두고 있는 세종족(宗族)과 그들의 땅에 대한 개괄적인 구분은 정확한 것이다. |
* 족장들의 방랑생활을 말해주는 성경의 기사는 이천년 전반기의 동방 실정을 잘 반영시켜준다. 이 당시 비옥한 초생달 지대 전역(全域)에는 아모리 족들이 퍼져 있었다. 2천년대의 기록에 보면 팔레스타인과 수리아가 지정학상 한 지역으로 간주되어 아무루(Amuru:西便)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역이 유브라데(Euphrates)강 서편에 있는 땅이라서 그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이 땅이 아모리 족의 땅으로 언급되어 있고 그 경계는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와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 부터 하수까지”등으로 묘사되어 있다.(창 15: 18, 출 23: 31, 신 1: 17, 11: 24, 수 1: 4) |
제 81과 성서의 역사와 지리(3)- 가나안 정복에서 솔로몬까지 -
요점 : 1. 사사기의 내용 특지은 범죄, 예속, 기도, 구원의 순서로 되어있다. 2.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다. 3. 다윗의 왕권확립에 중요한 요소는 예루살렘과 법궤와 언약과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
1. 가나안 정복에서 솔로몬까지
1) 사사시대(B.C. 1,200~1,020년경)
사사시대의 범위는 여호수아의 사망에서 사울이 왕으로 즉위하여 왕정을 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는 임명된 어떤 지도자가 없었고 유사시에는 어떤 사람이 신의 소명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매 사건을 처리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시대 일어난 사람은 통수권과 사제권과 치리권까지 가졌다.
그들은 백성의 청원이나 위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위임과 절대권으로 특별한 능력과 계시를 가지고 통치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혼돈과 암흑기를 거쳤으며 가나안 족속들은 그들대로의 군웅할거의 시대를 거쳐 침략, 약탈 전쟁을 일삼았다.
① 활동한 사사들
성서에는 13명의 사사들 이름이 나온다. 곧 옷니엘, 에홋,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및 삼손이다. 그러나 이중 6명의 사사만이 두드러지게 사사기에 기록이 되어 있다. 개개의 사사는 다른 적들과 싸웠다. 옷니엘은 메소포타미아의 공격을 막았고(삿 3: 9~11) 에홋은 모압의 공격에 대처하였으며(삿 3: 12~30) 드보라는 가나안의 압정에 종지부를 찍었다.(삿 4: 1~24)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을 진압하였고(삿 6: 7, 8: 28) 입다는 암몬의 공격을 맞아 싸웠으며(삿 11: 1~33)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을 막았다.(삿 15: 1~20)
② 이웃 나라들
당시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메소포타미아, 모압, 아멜렉, 가나안, 미디안, 암몬, 블레셋 등 일곱 족속이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북으로 헤르몬산에서부터 남으로는 가데스 바네아까지, 그리고 지중해 요단까지였다. 이 영토와 관련해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수리아 건너편 북동쪽에 자리잡았고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은 요단 동편에 있었고 가나안인들은 북서쪽에 있었다. 블레셋은 지중해 연안 서쪽에 아말렉인들은 아라비아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2. 사울시대
가나안에 들어가 정주하는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지나는 중에 이방 여러 나라들과 수 차례에 걸쳐 비참한 전쟁을 겪었고 말할 수 없는 탄압과 침략을 당했다. 또 그들은 이방 나라들의 국체(國體)를 보고,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이방과 같이 왕을 세워주기를 구하였다.(삼상 8: 19~20)
1) 왕으로 피택됨(삼상 8장~12장)
세 번이나 사무엘은 왕을 허락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이라고 책망했다.(8: 10~22, 12: 12)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변화를 허락하셨다. 왕국이 설립되고 사울이 왕이 되는 단계로 이루어 진다.
첫째는 그가 라마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고(삼상 8: 4, 9: 1~10, 16), 두번째는 미스바에서 왕을 뽑은 것이고(삼상 10: 17~27), 세번째는 길갈에서 왕으로 취임한 것이다.(11: 14) 이리하여 사울은 사사중에 맨 나중 사람이자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는 수도를 그의 고향동리인 ‘사울 기브아’로 정하고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정착시키고 다스렸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멍에에서 구원하고 주위 대적들에게 전쟁을 일으켜 자주 눈부신 전승의 기록을 일으켰는데 거의가 다 그의 아들 요나단의 천재적인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삼상 13: 1~14: 16)
2) 사울의 타락(삼상 13~15장)
각 장마다 사울의 처음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이 나타난다. 사울의 죄는 인내심의 부족과(13장) 제멋대로 한(14장)것과 반역한(15장) 것이다.
그의 첫번째 잘못은 신정왕국(神正王國)의 근본원리에 불충성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치 않았다. 두번째 잘못은 두번의 어리석은 서원, 즉 적군에게 보복할 때까지는 어떤 음식이든 먹어서는 안되며 먹는 날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 결과 요나단이 죽을 뻔 하였다.(삼상 14: 24, 39, 44) 그리고 세번째 잘못은 아비멜렉에 취한 전리품을 감춰둠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3. 다윗의 시대
이스라엘에는 세가지 위대한 직분이 있었다. 그것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다. 다윗은 그중 하나인 왕이었고 시인이었다. 이 때 기록의 특징은 삼상 16장~왕상 2: 11까지는 행정적 기록이고, 역대상 2~3장, 11~29장은 교회적 기록이고, 시편은 체험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무엘과 열왕기는 정치에 대해서, 역대기는 예배에 대해서, 예언서는 종교에 대해서, 시편은 헌신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록이다.
1) 다윗의 즉위
다윗은 목동시절은 간단하지만 생동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다윗이 미래의 왕이 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고(16장), 둘째는 골리앗 장군을 맞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다.(17장)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의 궁전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미갈에게서 사랑을 받았다.(18: 7~11, 시 140, 141장) 그러나 다윗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그는 점점 사울의 시기심을 사게 되었다.(삼상 18: 6~16) 그후 다윗의 생활은 공포와 지극히 불안한 상태로 사울의 면전을 떠나 도망다니는 상태였다.
이와 같이 사울에게 쫒기던 다윗은 안전한 곳을 찾아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에 임시 피신하게 되었다.(27: 1~28) 그때에 블레셋과 이스라엘간에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사울은 길보아산에서 세 아들과 함께 블레셋군에게 죽임을 당했다.(삼상 31: 1~4)
이후 다윗은 그곳에서 환국하여 헤브론에 거하고 이스라엘은 사울의 손자 이스보셋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다. 이스보셋은 사울 왕의 뒤를 이을 능력이 없어 국정을 동요하고 문란에 빠지게 되고, 또 국권은 흔들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죽임을 당하고 종국에 가서 헤브론에서 나라를 세운 다윗에게 그나라가 통합되어 통일왕국이 되었다.(삼하 1: 5) 다윗은 위 헤브론에서 천도하여 예루살렘에 도읍하고 선정을 베푼다.(5: 13~15)
2) 다윗의 이웃 나라들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후 한 최초의 일은 왕국을 위해 여부스인들의 수로를 점령한 일이다.(수 15: 63) 그리고 엘리가 사사로 있을 때 블레셋과 충돌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되돌려 온 후 기랏여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건 보관되어 있었는데(삼상 7: 1~2) 그것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삼하 6: 7)
그러나 다윗은 이것으로 만족치 않고 주위에 포위되어 있던 블레셋, 모압, 소바, 수리바. 암몬, 아말렉, 에돔 등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삼하 8: 10. 12: 26~31) 그래서 적을 항복시켜서 조공을 드리게 하고 여러 성읍을 빼앗았다.
4, 솔로몬 시대
솔로몬의 치세는 자기들의 정적을 숙청하고 죽이는 일종의 유혈 쿠테다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울 계통의 아도니야(왕상 2; 12~25) 요압(왕상 2: 28~34), 시므이는 결국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고, 제사장 아비아단은 자기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당했다.(왕상 2: 26~27) 위에서 요압과 시므이에게 행한 것은 부왕 다윗의 유언을 실행한 것(왕상 2: 1~9)이라고는 하지만 왕의 권한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행사한 것은 솔로몬의 화려한 치적에 오점을 남겼다.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왕상 2: 46) 솔로몬은 부왕이 만든 것보다도 더욱 대규모의 정부조직을 만들고 차차 복잡해가는 국정을 대비하려고 생각하였다.(왕상 4: 2~19, 5: 16, 9: 23) 그 중에서도 그가 만든 징세기관은 모두 12지구인데 그중 9개를 요단 서편에, 셋을 동편에 두었다. 특이할만한 사실은 이 징세기관들은 12지파의 세력범위를 무시하고 분할한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12지파 의식을 희박하게하여 국가를 통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의도는 유다를 징세 구역으로 넣지 않았기 때문에 도중에 포기되어 버렸고, 이러한 허사가 타 지파의 반감을 사서 후에 통일 국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 사사기는 구원을 베푼 대(大)사사들(minor Judges)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각기 그들의 본래 성읍(城邑)에서 다스렸다.(삿 10: 1~5, 12: 8~15)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사들의 생활은 풍족하였고 이들이 이방 족속들과 전쟁을 했던 기록은 별로 없다. 이스라엘 지파 간의 동맹은 이들 사사에 의해서 유지되었고 사사는 매 지파마다 돌아가면서 세웠는데 평화시에는 이들의 권한이 매우 제한 되어 있었다. 사사기에는 모두 13사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매 지파마다 한명 꼴이고 그 중에 소 사사는 다섯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다섯 모두가 소 사사에 불과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스라엘의 사사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파간의 연맹을 기초로 해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비록 구원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매 지파에 사사를 한 명씩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 가나안의 제신들 가나안의 제신들 중에 중요한 신은 ‘바알’이라 하겠다. 이 바알에게는 아내 신이 있는데 아스테라는 중요한 여신이다. 이 여신은 자연의 생산을 의인화 한 것이며, 바벨론(Babylon)에서는 이수달이라 불리우며, 헬라 및 로마에서는 아스달데라고 불러졌다. 바알을 복수형으로한 바아림은 바알의 상을 의미한다. 아스달데의 복수형은 아스다롯이었다. 거룩한 기둥, 원추형의 돌, 또는 나무의 줄기를 야수리라고 부르며 여신을 상징했다.(신 7: 5, 출 34: 13) 바알의 신전과 아스다롯의 신전은 일반적으로 같이 있었다. 여사제는 신전 매춘부이며, 소돔인중에는 신전의 남성매음자도 있었다. 바알 예배는 엉터리 축제로써, 그들의 신전은 악덕의 중심지였다. |
제 82과 성서의 역사와 지리(4)
-왕국분열에서 신․구약 중간기까지 -
요점 : 1. 통일왕국은 120년간 계속되었으며 솔로몬이 죽은후 북쪽은 이스라엘왕국 남쪽은 유 다왕국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2. 구원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국가를 형성한 후 신정시댜, 왕국시대를 거쳐 포로시 대로 된다. |
1. 분열왕국
솔로몬왕이 죽은 후 통일왕국인 유다는 두왕국으로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을 계승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사에 있었다. 르호보암은 그 전 왕들보다도 더 큰 위협과 강경책으로 백성을 다스릴 것을 발표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영도 아래 있는 북부 족속들은 즉시 새 왕국을 세웠다.(열상 12: 20) 유다와 이스라엘은 B.C. 722년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약 250년간을 대립된 국가로 존재하였다.
2. 이스라엘 왕국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200년후 앗수르의 조공을 호세아왕이 거부하여 멸망될 때까지 통치한 왕은 모두 19명이었으며 이중 특이한 통치자는 다음과 같다.
1) 여로보암
이스라엘의 초대왕된 여로보암은 조직과 지도력이 뛰어난 왕으로서 수도를 세겜으로 정하고 건설했다.(왕상 12: 25) 그러나 여로보암의 실책은 신앙문제를 가지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벧엘과 단에 예배 처소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왕상 12: 29) 이 실수로 말미암아 바알신을 숭배하는 사상이 뿌리박게 되고 후에는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2) 아합왕
이스라엘 통치자들 중 가장 나약하고 어리석은 왕으로 아합은 철저한 우상숭배자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 숭배에 동조하고 수도에 아세라 목상을 설치했다.(왕상 16: 29~33) 이때 이에 대항하여 나온 하나님의 종이 엘리야 선지이다. 아합은 수리아 싸움에서 죽고 이세벨은 새 왕이 된 예후에 의해 암살 당하였다.(왕상 22: 1~40)
3) 여로보암 2세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업적이 뛰어난 왕으로서 물질적으로 거대한 나라를 건설했으나 도덕과 종교생활은 타락하였다.(왕하 14: 24) 이와같은 여로보암 2세의 도덕생활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왕국을 파멸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3. 유다왕국
유다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의해 예루살렘에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 유다의 통치자는 열아홉 명의 왕과 한 명의 여왕이 있었으며 이들 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이었다.
1) 르호보암
솔로몬의 외아들로서 아버지때 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나라를 완전히 분열시킨 장본인이다. 솔로몬의 학정으로 불만이 가득찬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악한 고문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므로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왕상 12: 4) 그리하여 고집세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12지파중 유다와 베냐민 두지파만으로 남왕국을 세웠다. 그는 또 애굽의 침략에 대비 국방력을 강화했으나 애굽왕 시삭의 침입으로 성전과 왕궁등이 모두 노락질 당하고 말았다.(왕상 14: 25~28)
2) 여호사밧
유다 왕들 중 가장 훌륭한 왕으로서 그는 신앙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우상들을 훼파하였다.(왕상 22: 41~50) 또 자기 밑에 유능한 지휘관들을 두어 백만대군을 양성하고 여러 성들의 방비를 굳혔다. 그의 25년간 통치는 번영의 시대였다.
3) 히스기야
유다 왕들 중 히스기야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움으로 에돔, 블레셋, 아람, 암몬 등을 정복했고 대내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히 했으며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신앙기틀을 바로 잡았다.
4. 바벨론의 포로시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은 유다가 바벨론에 등을 돌리고 애굽과 친밀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다. 유다왕 여호야김은 이에 굴복했고 여러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이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다.
1) 유다의 멸망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은 느브갓네살에 충성을 서약한 시드기야 왕인데 느브갓네살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대적 애굽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바벨론을 대적했다.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고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하였다.(왕하 25: 1, 렘 32: 24) 이리하여 B.C. 586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함락되었고 왕궁을 탈출하던 시드기야왕은 여리고에서 바벨론군에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히고 말았다.
2) 바벨론으로 끌려감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B.C. 589년 수 많은 유대인 포로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나 팔레스틴에 유대인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포로중에는 대부분 우수한 지배계급 혹은 숙련된 공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24: 16)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는 유다에 남아서 백성을 격려하고 지도하였으며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다시 70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였다.(렘 25: 11, 12)
바벨론인들은 포로를 다루는 방법이 앗수인들과는 달랐다. 앗수르는 포로의 봉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썼으나 갈대아인들은 그와 반대로 유대인들을 바벨론에 두고 집단생활을 시켰다.(에스라 2: 59, 8: 15)
5. 포로귀환시대
바벨론의 포로는 약 50년간 계속되었다. 바사왕 고레스는 B.C.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B.C. 538년에 여러 약소민족 및 유대인들에게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였던 유대인들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스 1: 2~4)
1) 제 1차 귀환(B.C. 536년)
이 때 지도자로서는 서민의 장(長)인 스룹바벨과 제사계급의 장인 예수아가 있었다.(스 2: 1, 2, 대상 6: 8~15) 귀환자들이 유다에 도착하여 처음에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바치며 초막절을 지키는 일이었다.(스 3: 1~7) 그 다음 해에는 성전의 지대(地帶)를 놓고 다윗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시 85, 87, 136)
이후 그들은 성전 재건을 계속 진행시키려 했으나 필역(畢役)하지 못하고 15년동안 중단하였다.(스 4: 4, 5, 5: 16) 원래 포로때 남아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성전건축을 원조하겠다고 신청했으나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그 신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스 4: 16)
2) 제 2차 포로귀환(B.C. 458년)
스룹바벨 다음에 에스라 선지자가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도움을 받아 다른 무리를 인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의 목적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성전 재건에 있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먼저 성전 재건에 착수했다.(스 7: ~10: ) 3년 후에 또 다시 바사왕의 술 관원이며 높은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 자격으로(느 5: 14) 예루살렘에 돌아와 유대인들을 이방인의 손에서 보호하고 무너진 성벽을 개축하였다.
6. 신․구약 중간기
구약과 신약간의 시대를 성서 중간 시대라고 한다. 이 중간시대는 신약시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과정이 된다.
1) 바사의 통치(B.C.538~322년)
바사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벨론의 포로된 유대인을 지배하였다. 바사는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학대하거나 심히 괴롭히는 일이 없이 바사의 통치를 받아 살게 하였다.
2) 헬라인의 정복(B.C. 344~332년)
바사의 세력이 흔들릴 무렵 헬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 바사를 공격하고 그들을 쫒아내며 놀라운 세력으로 인도까지 진출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에게 헬라문화를 수입하게 되었다.
3) 히브리의 독립(B.C. 143~6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유대인들에게는 심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통치자들은 유대인에게 헬라의 이방 종교와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이 히브리 민족에 절망적인 시기가 다가왔을 때 제사장 마카비아의 주동으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일어나 신앙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히브리인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 백성들은 충성스런 애국자요 헌신적인 여호와의 숭배자들이었으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세속화되고 마침내 내란등으로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B.C. 63년)
* 호세아와 사마리아의 멸망(B.C. 730~722)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북왕국은 급격하게 쇠퇴해갔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을 얻어 호세아는 베가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열왕기하 15: 30) 그러나 후에는 앗수르와 손을 끊고 애굽과 동맹을 맺었는데 앗수르왕 살메네셀이 이것을 침략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전투에서 호세아를 패전케 하고 그를 포로로 잡고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그로부터 3년 후에 살마네셀은 죽고 새왕 사르곤이 마침내 사마리아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국의 종말이었다. 북방에 남아 있던 요새들도 같은 운명으로 희생되었다.(왕하 17: ~ ) 새로 정복된 앗수르의 도(道)들은 앗수르의 총독이 거주하던 성읍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아람 다메섹은 다섯 도(道)로 나뉘어졌는데 앞서 설정된 여러 하맛 도(道)의 남쪽에 있었다. 정복당한 이스라엘 왕국의 지역들은 세 도(道)로 분할되어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돌, 므깃도, 길르앗이라 명명되었다. 이사야(사 9: 1)는 이 도(道)등을 고풍(古風)이 깃든 시적(詩的)명칭으로 말했다. 곧 해변 길(Via Maris), 갈릴하고임, 트랜스 욜단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 설정(設定)된 도(道)들은 대부분 수세기 동안 큰 변화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후에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그 다음에는 바사 사람들에게 탈취 당했다. |
*고레스는 고대 동방 최대의 제국을 창건하였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이집트를 정복하엿고 그의 후계자 다리오(Darius) 1세는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거대한 바사제국은 여러 도(道)로 나뉘어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도(에 8: 9)를 유대인과 대신(大臣)들과 방백들과 관원들”이 다스렸다. 제5관할구역은 유브라데강 저편(Abar Nahara)에 있었는데 그 땅의 한 도(道)가 “예훗(Yehud)” 곧 유다였다. |
* 헬레니즈의 발생과 전파 - 일반적으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알렉산더대왕 이후 3세기 동안의 문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때에 그리스의 문화는 동서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더 대왕은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서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언어와 관습과 문명을 통일시키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는 어느 정도 이 꿈을 실현시켰다. 그의 사후 동로마 제국은 셀류커스 왕조(Seleucids)와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Ptolemies)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헬라화 운동으로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
제 83과 예수님의 공생애 발자취
요점 : 1. 전기 갈릴리 사역은 남부 갈릴리에서 활동해서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치셨다. 2. 중기 갈릴리 사역은 갈릴리 지역에서 나인성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셨다. 3. 후기 갈릴리 사역은 서편 나사렛에서 동편 게네사렛 평지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셨다. |
1.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마 1~2장, 눅 1~2장)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부터 초자연적인 신비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이 사람의 혈통을 통해 탄생하리라는 사실은 이미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을 한 것으로 천사의 예고는 그의 모친 뿐 아니라 그 당시의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알려졌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사의 영접을 받았고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았다. 에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그 당시 로마의 분봉왕은 헤롯이었고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님과 함께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땅에 피신하였다. 헤롯이 죽자 그들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와 30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평범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예수님의 유년기의 여행은 3차로 구분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차 여행(베들레헴 - 예루살렘 - 베들레헴)
① 예수님의 탄생(눅 2: 1~14)
② 결레를 위해 성전에 올라가심(눅 2: 22~38)
③ 동방박사의 방문(마 2: 1~12)
2) 2차 여행(베들레헴 - 애굽 - 나사렛)
① 애굽으로 피신(마 2: 13~15)
② 나사렛으로 돌아옴(마 2: 19~23)
3) 3차 여행(나사렛 - 예루살렘 - 나사렛)
①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의 여행(눅 2: 41~52)
2.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 전의 기간은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은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외치며 요단강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예수님 자신도 친히 그에게 나가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 후에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금식한 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공생애의 사역에 나서게 되었는데 예수님 사역의 초기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한 여행(마 3: 13~17, 막 1: 9~11, 눅 3: 21)
2) 광야의 시험(마 4: 1~11, 막 1: 12~13)
3) 다섯 제자를 택하심(요 1: 38~51)
4) 베다바라에서 가나로(요 2: 12)
5)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요 2: 12)
6)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가심(요 4: 3~5)
7)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가심(요 3: 22)
8) 유대에서 수가성 우물가로 가심(요 4: 3~5)
9) 사마리아에서 갈릴리 가나로 가심(요 4: 43~46)
10) 가나에서 나사렛으로 가심(눅 4: 16~27)
3.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의 공생애는 사복음서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는 그 무대가 갈릴리와 유대를 중심하여, 예루살렘을 왕복하시면서 그의 사역을 이룩하였고 이 이외에도 사마리아와 베뢰아 및 다른 지역에서도 자신의 발자취를 남겨 놓으셨다.
1) 전기 갈릴리 사역
갈릴리는 로마의 속령으로 크게 북부 갈릴리와 남부 갈릴리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윗 갈릴리는 해발 2,000피트에서 4,000피트에 달하는 산맥과 고원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나타나 보인 곳이다.(마 28: 16~17) 남부 갈릴리는 에스드론 평원의 일부와 갈릴리 바다 서편 연변과 요단강 서쪽 언덕과 메름 호수의 위끝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시작을 이곳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시작하셨다. 또 가나는 나다니엘의 출생지이며(요 21: 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앓아 누운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셨던 곳이기도 하다.(요 4: 46~50)
2) 초기 유다 사역
가나의 혼인 잔치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셨다가 성전 유월절기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 당시 유대의 여러가지 상황은 정치적인 지도자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지도자들도 부패 타락하여 성전을 더럽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번째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고(요 2: 13~15) 유대 공회원이 니고데모와 만나 중생에 대해 토론하셨으며(요 3: 1~21) 끝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중에 수가성 밖에 있는 야곱의 우물 곁에서 죄인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셨다.(요 4: 1~42)
3) 중기 갈릴리 사역
예수님의 갈릴리 귀환은 사복음서에(마 4: 12, 막 1: 14, 눅 4: 14, 요 4: 43~45) 다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 즉시 돌아오시지는 않았지만 그가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은 고향땅 갈릴리에서였다. 갈릴리 지방은 인구밀도가 조밀했으며 주민들은 전 팔레스틴에서 가장 진보적인 자들이었다. 이제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리 전역에 퍼졌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환영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그의 메시야적 설교로 인해 배척을 받으시고 죽으실뻔했다.(눅 4: 16~31)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신 주님은 가버나움으로 그의 사역의 중심을 옮기셨다.
① 가버나움(Capernaum)
예수님의 사역은 가버나움에서 부터 갈릴리 여러 도시인 나사렛, 고라신, 벳세다, 디베랴와 나인에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있는 갈릴리 바다 북서쪽 연변에 놓여 있어서(마 4: 13~16, 눅 4: 31) 그곳은 귀한 어항이 되었고, 또 다메섹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들의 큰 무역 루트가 있어서 통행세를 받는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을 복음전파 활동 중심지로 삼으시고 다음과 같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❶ 귀신 들린자를 고치심(막 1: 21~28)
❷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막 1: 29~31)
❸ 중풍병자를 고치심(막 2: 1~13)
❹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요 4: 46~54)
② 고라신
고라신은 가버나움에서 멀지 않은 갈릴리바다 연안 북쪽 3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오늘날 케라제(Kerazeh)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이 벳세다와 함께 하나님의 울법을 어기고 회개치 아니하므로 장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고(마 11: 21~23, 눅 10: 13~15) 또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곳이기도 하다.
③ 나인성
나인성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한 도성으로 예수님꼐서는 죽어 장사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곳이다.(눅 7: 11~17) 이곳은 아직도 나인(Nein)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나사렛에서 8Km떨어진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4) 후기 갈릴리 사역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최초로 중지한 곳이 나사렛이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행적을 보고 놀라기는 했으나 또 다시 그를 배척하였다.(막 6: 1~6, 막 13: 54~58)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기이히 여기시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신유와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주어 각 곳으로 파송하여 전도의 경험을 쌓게 하셨다.(막 9: 36~11 :1, 14: 13, 막 6: 7~32)
4. 예수님의 은거
주님께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세례요한의 죽음의 소식이 퍼지게 되자 4가지 철수를 단행하셨다. 이 철수는 유대인들과의 극심한 대립과 육신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실 특별한 교훈을 위해서 취하신 특별한 조처였다. 주님께서 은거한 지역과 행하신 이적은 다음과 같다.
1) 첫 은거 : 두로와 시돈 및 데가볼리지역 -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막 7: 31)
2) 두번째 은거 :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 - 변화산상의 사건(막 9: 2)
3) 세번째 은거 : 베뢰아 지역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요 11: 1~46)
4) 네번째 은거 : 에브라임 지역 - 베다니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심(요 20: 54)
* 사마리아지역 사마리아 지역의 역사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아들 때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하였으며,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250여년을 내려오다가 B.C. 722년에 앗수르왕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에게 멸망 당하였다. 이 때, 사르곤 2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 다른 지방으로 옮겼고 자기 나라 백성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게 되었는데(열하 17: 5~24) 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족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한다. 그 다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여 사마리아 지방에 저희 백성을 두번째로 이주시켜 혼혈이 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바벨로니아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때 사마이라 사람들이 협력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거절하므로서 이 때로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는 단절되고 말았다. 유대인이 갈릴리지방으로 갈때에도 중간의 사마리아지방을 거치지 않고 요단강 저편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바로 지나 다녀셨다.(요 4: 3~6) |
* 예루살렘 예루살렘(Jerusalem)이란 이름은 ‘평화의 소유’ 또는 ‘평화의 기초’란 뜻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세계 어느 도시도 예루살렘만큼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닌 도시도 없다. 성경 중에는 8백번 이상이나 그 이름이 나온다. 예루살렘의 위치는 지중해에서 직선거리로 52Km 요단강에서 30Km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점은 이 지방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대가 아니므로 여행자는 최후의 언덕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바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시 125: 2) 예루살렘 시가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골짜기로 둘러 쌓여 있다. 서쪽과 남쪽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어서 이 두 골짜기는 비오는 철에 물이 흘러서 유다 산맥의 동남쪽을 거쳐 사해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둘러쌓여 그 위에 우뚝 선 도시가 예루살렘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