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집념의 결실 첫 한글성서 - 1887년 완역 '예수셩교젼셔'

2006. 6. 29. 16:36목양자료/1.기독교자료

믿음과 집념의 결실 첫 한글성서 - 1887년 완역 '예수셩교젼셔'

예수셩교젼서
온세계에 가정 널리, 또 가장 많이 퍼진 책은 단연 성서다.

1986년 최초로 성경전서 1백만부 반포를 기록한 우리나라는 금년에 2백만부라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한국성서공회에 따르면 올들어 10월말 현재 성경전서 2백만1천8백94부, 신약 1백93만4천5 백77부, 단권복음서 점자성경 등 총 6천3백만여부의 성경 및 문서가 반포되었다고 한다. 인 구 1인당 반포부수로는 세계 1위가 되었다.

교회사를 볼 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성서를 보급하는 사업을 벌인 세계 최초의 기관은 지 금으로부터 약3백년 전인 1698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된 '기독교지식 보급협회' 이다.

당시만 하여도 성서는 물량도 달리고 가격도 비쌌지만 무엇보다도 사제계급의 전유물이어 서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세계를 상대로 한 성경보급의 발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웨일즈 발러의 토머스 찰스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804년 출발한 영국성서공회가 그 효시다.

이어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미국성서공회 등이 결성되어 구미 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 카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들이 싼 가격에 대량으로 반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첫 탄생의 고고성을 울렸을까. 또 그 수태의 섭리와 해산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천주교가 한국에 포교되고 상당한 교세를 가지게 될 때까지도 성서와 관련된 작업은 특기 할 만한 것이 없다. 귀츨라프나 토머스 목사가 갖고온 성서도 중국의 한문성서였다.

성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로스(1842~1915)가 만주에 서 여러 한국인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하였고 1871년부터는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의 윌리엄슨의 지도로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아 노력을 집중해 나갔다. 1872년 8월말 지푸에 도착한 로스는 윌리엄슨의 충고에 따라 10월에 만주의 개항장 영구로 갔다.

일찍부터 한국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토머스 목사의 셔먼호 동승을 주선하기도 했던 윌리 엄슨은 로스에게 토머스의 순교에 관해 이야기했고, 두 선배의 한국 선교 열정에 감명받은 로스는 1874년 10월 고려문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고려문은 만주 통화현의 작은 마을로 당 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합법적 교역장소였다. 그러나 로스의 여행은 큰 성과를 얻지 못 했다.

1876년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 문호가 개방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로스는 두 번째로 고려 문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한국어 교사를 얻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의주상 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는 이미 한글성서 번역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학공부에 정진한 로스는 이응 찬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교재 'Corean Primer'를 낼 수 있었 다.

1879년 4월 로스가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로스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그리 고 이름을 알수 없는 한국 최초의 수세자 등은 1852년에 간행된 한문 '신약전서 문리'를 대 본으로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를 번역하였다.

로스가 휴가를 떠난 1879년 5월부터 2년간은 그의 동료인 우장의 매킨타이어 주도로 번역 이 진행되었다.

1881년초 매킨타이어는 우장에 들르는 한국상인들을 상대로 번역한 것을 직접 시험하면서 수정하였고, 한문을 사용하는 소수 식자층이 아닌 '오직 대중에 적합한 것을 목표로' 일의 가닥을 잡아갔다.

로스가 돌아온 6월부터는 심양 문광서원으로 작업장이 옮겨진다. 번역방법에 있어서도 일 대 진전을 보게 되었다. 한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 고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인이 정서해주면 다시 로스 등이 재수정하고 주석 성구사전 등을 참고하여 어휘를 통일 번역을 마치는 순서를 취했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완벽한 문자"라고 경탄한 바 있는 로스는 한글의 우수 성과 함께 최신 그리스어 성경을 이용함으로써 한문성경보다 훨씬 정확한 번역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1883년에는 사도행전가지 최종 번역본을 만들었고 이듬해부터는 서신서 번역을 본격화하여 1886년 가을에는 신약전서의 번역을 완료하였다.

이제 인쇄 출판의 문제가 남았다. 사실 출판사업은 애당초 로스가 2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1881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번역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출판도 병행해 나 갔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그해 9월부터 인쇄에 들어갔다. 성서 인쇄 전에 먼저 소책자의 시험인쇄가 있었는데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라 할 '예수셩 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10월초에 인쇄되어 이듬해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된다.

시험인쇄에 성공한 로스는 1881년 말부터 누가복음을 필두로 인쇄에 들어가 1882년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가 세상 빛을 보게된다.

각고 끝에 탄생한 이 옥동자의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그 서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韁螡 证螡/열어/사람이/부슬들어/우리가운데/일운/일을/긔슐폁되/처음으로 붓뎌/친히/보고/ 도를/뎐폁넌쟈/우리를/준ꟁ螡갓티/폁엿기로/鏁螡또/뜻폁여/모둔일을/자세이/근원을/좃차/쏁례 로/써/긔인/볼鏁螡/보인ꟁ螡의/실졍을/알게/폁미라"(1:1~4)(사선 필자주)

누가복음에 이어 1882년 5월에는 요한복음 3천부를 간행했다. 누가복음과는 달리 본문은 '하느님' 앞에서 한 칸씩 띄어쓰기를 하였다.

1883년 10월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묶은 단편과 1882년에 낸 요한복음의 수정판을 간 행했다. 1882년 판에 '하느님'으로 표기됐던 신명이 1883년부터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서 울말 채택도 늘어났다.

이렇게 단편이나 할본형태로만 발행되다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묶어져 나오게 된다(구약성서는 1910년4월2일 완역되어 19111년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다. 물론 이때의 신약은 '예수셩교젼셔' 와 다른 번역본이다)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로스의 고백처럼 비 록 '예수셩교젼셔'의 번역이 로스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그 실제번역이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 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로스본이라고 하기보다는 '예수셩교본'으로 부름이 더 타당할 것이 다(기독교역사연 '한국기독교의 역사').

1885년 인천으로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한글성경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인 번역자들은 일자리나 호구지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확 실히 배우고, 또 전하고자 했던 열렬한 신앙인들이었고 이들의 유산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 회의 초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