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돌을 굴려 놓아라

2006. 4. 13. 23:47목양자료/5.절기자료

무덤에서 돌을 굴려 놓아라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이사야 62 : 10~11, 요한복음 11 : 35-44

성경은 35가지의 예수님의 기적을 전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기적이 있었겠지만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기적은 이것뿐입니다. 35가지 가운데 9가지는 자연기적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 등의 기적입니다. 자연에 대한 기적은 예수님께서 자연의 창조자이심을 증명하신 기적입니다. 나머지 26가지는 치유기적입니다. 치유기적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이 치유기적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자이심을 증명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이라는 현상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기적을 베풀어도 인간은 한계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실컷 먹어도 또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고쳐도 죽었고 죽은 사람을 살려 놓아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라는 현상만 좇아가면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도 모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도 못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나사로가 다시 산 다음 예수님께 “주님, 나 또 죽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래, 또 죽는다”고 했더니 그 다음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힘든 과제입니다. 죽기가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두 번이나 죽었습니다. 이 힘든 과제를 두 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이 돌로 치려고 하는 위태로움도 마다하시고 다시 베다니로 가셔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아라테”라는 헬라어입니다. “아라테”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강한 명령을 표시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돌이 있다고 나사로가 나오지 못하겠습니까? 돌이 있는 것이 왜 방해가 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도 돌문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돌을 옮겨 놓고 돌문이 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돌을 옮겨 놓고 돌문이 열리는 것은 나사로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고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하여 돌을 옮겨 놓게 하셨고 돌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첫째, 돌을 옮겨 놓는 것은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동작입니다. 예수님은 돌문이 무덤 밖과 안을 가로막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밖이나 무덤 안을 동일시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죽은 자나 산 자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잔다고 하셨고 산 자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도 죽었다고 하셨고 죽은 자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는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중간의 돌문은 삶과 죽음을 가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희망과 절망을 구분하고, 생을 단절하는 도구입니다. 화평이신 주님,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주님, 가운데 가로놓여 있는 담을 허시는 주님은 먼저 가로막힌 돌문을 옮겨 놓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장벽 투성이입니다. 장벽으로 상처뿐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국가, 인종과 인종, 지방과 지방,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 언어와 언어, 이 세상에는 약간의 다른 것 때문에 편을 나누고, 보이지 않는 선 때문에 서로를 적대시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현대 시인은 “현대인은 장벽 쌓기는 좋아하지만 다리 놓기는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벽을 파괴하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의 장벽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돌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나사로가 다신 산 것을 입증합니다. 돌문이 닫혀 있어도 예수님은 나사로로 하여금 나오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돌을 옮겨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게 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로가 산 것을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 와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돌을 옮겨 놓고 모든 사람이 무덤 안을 훤히 들여다보게 하신 다음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연출입니까? 이런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마음으로 믿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는 것을 믿게 하시려고, 영원히 사는 것은 믿게 하시려고 돌을 옮겨 놓게 하시고 썩어 냄새가 나는 몸을 이끌고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게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나오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산 것을 확실하게 믿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 가운데 죽은 자들에 대한 증언을 합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죽은 자라고 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주검 앞에서 “잔다”고 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 확실하게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 후에 다시 일어나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살전 4:13­18).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에 가로놓여 있는 돌을 옮겨 놓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삶의 장애를 제거하십니다. 돌이 있어도 나사로로 하여금 나오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입니다. 돌문이 있어도 얼마든지 무덤에서 스스로 나오실 수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문을 여시고 나오셨고 돌을 옮겨 놓은 다음 나사로를 나오게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신 이유는 다시 사는데 가로막힌 장애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장애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죽음 같은 삶을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고,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희망을 되찾고 의욕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사야 62:10에는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고 합니다. 돌을 제하라는 것은 장애를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돌 같은 장애물을 우선 제거해야 합니다.

당시에 무덤을 돌로 닫는 것은 짐승들이 먹이를 찾다가 굶주리면 시체를 찾아 파먹기 때문에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거운 돌로 닫는다고 합니다. 돌문은 우리를 해하는 짐승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산 영혼은 마귀가 해치지 않지만 죽은 영혼은 마귀가 해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혼을 해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돌은 옮겨 놓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영혼은 더 이상의 돌문이 필요없습니다. 돌문을 제거하고 산 영혼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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