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하여

2006. 3. 4. 00:51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하여

니체는 초대 기독교회의 사랑의 동기를 ``전적 고대 가치의 완전한 재평가``라는 유력한 분별을 남겼다. 에로스란 고대헬레니즘 세계에서 유행하였고, 원시적 기독교의 특성은 아가페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러히 신약성경의 사랑의 유형과 헬레니즘의 사랑의 개념을 비교 연구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천상적 에로스``로서 이것은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으로 총칭되는 것들을 에로스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에로스란 동경과 욕구인데 그 대상에 내재된 매력적인 속성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에로스 사랑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소유함으로써 자기의 영적 굶주림을 만족시키려하나 이는 오산이다.

신약성경의 사랑은 이러한 자기 충동적이나 자기 욕구적인 에로스가 아닌.....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신약성경의 사랑이란 에로스와 달리 인간에게 결핍된 필요 대상을 동경하거나 추구하지 않는다. 오리혀 값없이 풍성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답해 가는 것으로 이러함을 앞으로 논증해 갈 것이다.

< 안더스 니그렌은 아울렌, 융그렌 등과 함께 룬트학파에 속하는 인물로써 스웨덴의 유력한 신학자(1977에 卒)였다. 그의 책 ``아가페와 에로스 AGAPE AND EROSE, The Christian Idea of Love.``란 책을 중심하여서...>


아가페대 에로스 1 :: 아가페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교

아가페 개념이 기독교의 독창적인 특색이란 것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그 독창성과 특색은 무엇인가?

종종 사랑의 계명으로....

신명기의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의 이 이중적 계명이 사랑 개념의 해석 출발점으로 인정되곤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신약 텍스트의 사랑의 개념의 출발점을 삼는다면 아가페 개념을 이해할 길이 막히는데... 이는 명령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두 부분의 계명이 소개될 시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인용부로서 소개되는 것이다.

두 계명을 결합한 사람이
누가복음에 따르면 구약종교의 대변자인 율법사(누가 10:25)라는 사실을 보아서 분명하다.
마가복음에선 예수 자신이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하고 두 계명들을 결합하는 반면, 한 서기관이 전심으로 예수에 대하여 동의한다.(막12:25)

물론 사랑의 계명은 구약에서 많은 규례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최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요약하는 유력한 지위를 그 계명에 부여했다고 지적한다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후기 유대교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적 특징을 고도로 담지하고 있었다하더라도 윤리와 종교 관계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삼는 경향이 부재한 적은 결코 없었다.
또한 사랑이 계명의 수많은 율법주의적 규정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미 호세아때 사랑이 율법의 중심적 요구라는 원칙이 분명히 인식되었다. (호6:6....하나님은 사랑(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경외의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의 총칭으로 인정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의 가장 큰 계명으로 만들려는 분명한 충동이 유대교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서도 기독교 안에서 질적으로 새롭고 독특한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사랑의 계명만을 언급하여, 기독교적 사랑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순환논법같이 불가능하다. 즉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중적 계명의 안내만을 받는다면 결코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인 아가페의 본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가페 개념을 설명해 주는 것은 그 계명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아가페 개념에 대한 통찰력이 그 계명의 기독교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사랑의 계명에 대한 구약적인 해석과 기독교적 해석 사이의 가장 현저한 차이점들 중의 하나는 그 계명의 범위가 기족교에서는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유대교에의 사랑은 배타적이고 특수주의적이다...유대교 여기서의 이웃은 제한된 본래 의미로의 이웃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보편적이며 포괄적이다.(갈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가 있을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랑 개념을 사해동포적·개인주의적 정신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고대세계에 널리 퍼져있었고 특히 스토아사상의 영향을 받은 계층들에서 환영받았으며 합리주의적 윤리관에 기초한 인간과 세계시민 개념으로 민족적·사회적 장벽을 초월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아가페 개념의 해석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전혀 쓸모가 없다. 합리적인 윤리 개념으로 기독교적 사랑 개념의 본질을 조금도 밝힐 수 없다.
1. 기독교적 사랑의 가장 독특한 특색은 보편주의가 아니다.
2. 기독교적 보편주의는 스토아사상의 보편주의와 전혀 다른 근거에 의존한다.

트뢸치는 정확하게 말하기를...``사회 문제들에 대한 관심에서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의 설교와 기독교회의 성립은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 운동적인 의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종류의 계급투쟁의 결과도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도 고대세계의 사회적 동요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다.

여기서 니체의 실험적 해석을 회상해 보면.....

니체는 기독교의 사랑을 유대인의 증오심에서 생긴 ``원한``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쓰기를....

``유대인의 증오심은 가장 심오하고 고상하며, 이상창조적이고 가치변환적인 증오심이다. 그와 비슷한 것은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 복수와 증오심의 나무의 줄기로부터 마찬가지로 독특한 것이 솟아났으니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사랑(new love) 즉 모든 종류의 사랑 가운데서 가장 심오하고 고상한 사랑이다.....나사렛 예수 즉 친히 사랑의 복음의 화신으로서 빈자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지복과 승리를 가져다주는 이 `구세주`가 바로 가장 불길하고 저항할 수 없는 유혹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가 바로 유대교의 이상적인 가치들과 혁신들로 완곡하게 인도하는 유혹이 아니던가?``

니체는 기독교적 사랑이, 모든 유대인적 가치들에 대해서도 가치판단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임의로 원한(resentment) 개념을 출발점으로 택했기 때문에 기독교적 사랑의 가장 심오한 성격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이타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니체의 견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또다른 입장은 기독교의 사랑이 유대교의 보복 교리에 대한 부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논점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바는 종전에 인정된 모든 가치들에 대한 가치변환에 관련된다는 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치들에 대해서 기독교적 사랑 개념은 부정적·비판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전형적인 표현은 산상보훈에 있는 예리한 대조법들에서 발견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당연히 유대교에 대립되는 기독교를 발견한다.

기독교는 유대교가 긍정했던 것을 부정해야 한다.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의 정확한 동해(同害) 보복의 원칙을 가르치면, 기독교적 요구는 당연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5:38-39)일 것이다. / 유대교가 사랑의 계명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기독교적 해석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사랑 개념이 적대자들의 견해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지만, 이런 차이적 견해는 분명히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이 그 것 자체의 분명한 실증적 기초 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 기초는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적대자가 원수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악인들을 사랑한다는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사실 안에 그러한 사랑의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은 이유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마5:44-45

기독교의 윤리는 훨씬 심오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윤리다. 그 윤리생활의 실지 내용이 종교적 관계 즉 하나님와의 교제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페 개념의 출발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개념인 것이다.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10.30에서 요약 발췌본...)


아가페와 에로스 2 ::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친교의 독특성

루터는 처음에 새 교회의 창립자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는 될 수 있는대로 오랫동안 옛 교회에 매달린다. 그의 개혁사업은 단지 주위의 세력 때문에 새로운 독립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장 현저한 실례는 기독교 자체의 출현에 의해서도 제공되는데 예수는 새 종교의 창립자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기독교는 유대교와 종류가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발전했다.

예수는 구약적 경건이 창안한 형식들 안에서 움직였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가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신을 선전하려고 오시지 않았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다. 그의 모든 활동의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을 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요점에서 세롭고 독특한 요소가 발견되는데 예수가 사람들에게 갖다주었던 것은 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나 사상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이다. 다시말해 그 새로운 요소는 종교생활의 핵심과 연관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9:17절의 예수의 비유를 빌리자면, 새 포도주는 시간이 지나면 옛포도주를 터뜨리고 유대교로부터 전적으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출현시킬 것이다.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유대교적인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유대교는 역사적인 연관성과 그밖의 연대성 및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그렇타면 기독교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독창성은 무엇일까?

``예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2:17고 말씀한다. 이 말씀으로써 그분은 유대교의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전통적 견해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보다도 더 강경한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유대인들에게서 의인(義人) 개념은......의인과 죄인, 경건자와 불경건자의 차이점은 가치의 차이를 의미함의 보편적의미였던 것이다. 유대교의 종교적 성찰은 그 자연스런 느낌을 극도로 강화하였다.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은 그를 고상하게 만들었다. 통상적인 평가처럼 율법에 전심하는 구약적 경건은 결코 외면적 형식주의가 아니라 경건한 사람은 율법이 붙들었던 내면적 연대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의인은 율법을 대할 때 외면적인 강요를 느끼지 않으며 내면적 연대감을 느낀다. 시편1편 글

이와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인들과 죄인들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데, 이제 예수가 나타나서 이 모든 것을 바람에 날려 버린다. 그분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여기서 종교적으로 율법에 헌신하여 성장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말씀이 자신들의 종교-도덕 유산의 토대를 맹공격한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공격대상은 어떤 고립된 교리적 요점만이 아니라 율법적 경건의 본질과 전통적 종교의 가장 민감한 정서도 공격을 받는다. 또한 예수가 이 재평가(revaluation)를 자신의 개인적·주관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이는 예수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케 판단한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부르실 때, 그분은 자신이 주도하여 죄인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파송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활동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분이 ``오신` 목적이다.
이와같이 예수는 그 재평가에 자신의 사명감을 결합시키고 그 재평가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고 선언한다. 예수 자신의 현재적인 행위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에 따른 것이다. 또한 예수는 자신의 행동양식이 하나님의 행동을 본딴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며 친히 그와 사귀려 하신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율법이 아닌 사랑의 통제를 받는다.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의 특징은 분배적 義(iustitia distributiva)의가 아니라 아가페(Αγαπη)이며, 응보적 義(retributive righteousness)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이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두 가지 상이한 종류들이 만난다. 충돌은 불가피하여....각각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더 진지하면 할수록 충돌을 피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지는데,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끊임없이 논쟁하신 것은, 진부한 권력투쟁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대해서 진지했기에... 그래서 인간적인 정의의 질서만이 아니라 신적인 정의의 질서까지 위배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엄성마저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싸움은 사랑의 종교에 대한, 율법적 종교의 항의였다.

이렇게 두 종류의 종교가 대립된지만 이러한 대립이 구약성경의 율법체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연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선 안된다.

시편 103:17-18에....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진다고 한 것을 주목하라.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율법적 체계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있을 자리가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율법적 정의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사랑은 신성모독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아가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새로운 종류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우선 재평가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즉 종교적 관계가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무슨 까닭에 죄인들이 부름받는가????

인간은 의로운 생활 덕분에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분과의 교제에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옛날 사상은 아주 자연스럽기 때문에 설명이 불필요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런 자연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자 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려지고 반면에 의인들은 빈손으로 떠나갈 때, 우리는 이 놀라운 변화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감정적 반동에 기인한 가치전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님 하나님이 죄인의 본성 가운데 의인보다 죄인을 더 가치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란 말인가? 도대체.....

후자를 지지자들이 많은데....그들 중 한사람인 막스 셸러(카톨릭저술가)의 예를 들어보면 흥미롭다.
그는 ``윤리의 구성에 있어서의 원한``이라는 평론에서.....어떻게 죄인이 실제로 의인보다 나은지를 보여주려고 크게 애쓴다.

악명 높은 죄인은 항상 자신의 영혼으로 그 악을 고백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고백은 공개적인 언어적 고백 만이 아니고...개인적인 내면적 고백과 죄인의 죄악된 의지가 유포하는 행동 속에 나타난 고백까지 의미한다. 그것을 고백한다는 사실 즉 그가 이미 죄악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죄를 범한다는 사실은 악하지 않고 선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며 감염이 퍼지지 못하게 한다. 왜냐면 악한 충동을 마음 속에 감추어 두는 사람들은 그 인격의 내부가 점점 더 깊이 감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시각에선 죄악된 행동과 후속하는 회개가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여 결국 인간의 내적 존재가 중독되는 것보다 더 낫다.

그것은 율법적 시각에서 선하고 의로운 것에 대한 침착한 자각과 잘 양립할 수 있는데 이것이 `하늘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의인 천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기쁨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사함을 받을 일이 적은 자가 적게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셀러가 인용한 구절들에 대해서 특별하게 만족하진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더욱 나쁜 것은 그의 전체적인 논증이 오류라는 점이다.

과연 예수는 인간이 죄를 발산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전염이 퍼지지 않도록 방지한다``는 견해이나 ``죄악된 행위가 악으로 하여금 인격의 더 깊은 수준까지 지배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견해를 수용하였을까?

이에 대한 증거를 복음서에서 찾아보지만 헛수고이다.

예수는 결코 죄를 인간 본성의 바깥 층에만 영향을 주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수는 죄의 뿌리가 사람의 가장 내적인 존재 즉 그 마음에 있다고 통찰한다. ``안으로부터 곧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7:17....
예수는 죄인 안에서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심적 핵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는 인간이 말하자면 그 자신의 외부에서 범죄함으로써 그 핵심을 흠없게 보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는다.

셸러는 예수의 가르침을 ```범죄하는 죄인은 범죄하는 의인보다 나으며, 범죄하지 않는 죄인의 내면본성은 그 죄악된 충동의 침범을 받아서 중독된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셀러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면 당연히 죄인에게 의인보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이 어떤 점에서 나은가를 질문한다. 이는 질문 자체가 셸러의 논증과 같은 그릇된 논리를 야기한다.

구약성경에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의 가치나 중요성에 매이지 않는다는 암시들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지만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너희를 속량하셨느니라..(신7:7-8)

사실 유대교는 의인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이런 원칙을 감히 적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철저히 적용한다. 예수에 의하면 이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최상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향한다는 그 사실에서 그 사랑의 절대성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기초를 죄인이 의인보다 낫다는 개념에서 구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진상을 모호하게 만들며 神人 관계를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되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설명은 종교적 관계가 여전히 종래의 율법적 유형에 속하며 하나님이 인간 개인의 인격적 미덕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암시를 주게될 것이다. 그렇타면 예수가 일으킨 그 위대한 변화도 참으로 새로운 원칙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분은 무가치하게 보였던 사람들 안에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고 이 발견이 종교적 관계에서 가지는 의미를 인정할 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신적 교제의 방법에 대한 표현들 중에서 가장 명쾌한 것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종전의 율법주의적 종교관계의 특례로 보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 개념과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명력을 없애버리는 가장 교활한 방법이다.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에만 의존한다.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다른 모든 종류들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신적인 사랑의 대상이 더 가치있느냐 덜 가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시는가?는 오직 한가지로 즉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아가페와 에로스 : 아가페 개념의 내용 (안더스 니그렌)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안에는 외부의 필연적 요소가 없다는 것으로 그 사랑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즉 자발적인 비동기적 사랑은 그 자체 밖 즉 인간의 개인적 가치 안에서 아무런 동기를 갖지 않는다. 또한 그 사랑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며, ``세리들과 죄인들``과 교제하는 예수의 행동의 특색을 드러냈다.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적 관계의 관점에선 설명이나 변호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수는 그 행동 안에서 자기가 성부의 사역을 실천하며 성부의 마음과 뜻을 계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하나의 법적인 관계로 파악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결국 그 대상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한계들을 부수며 그것의 대상의 가치에 의해서 좌우되기를 거부하며 그 고유한 내적 본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기독교에 의하면 `동기 부여된` 사랑은 인간적인 것이며, 자발적이며 `비동기적인`사랑은 신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종교적 관계에 대한 율법적인 파악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율법 안에서 동기부여된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다만 자발적이며 비동기적 사랑 즉 아가페에 관심을 두었다.

우리는 이러한 아가페가 필연적으로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는 새 포도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의인과 죄인에 대한 태도에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에게만 제한된다면 이는 동기적이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이란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고 요구할 수도 없는 죄인들을 찾아간다.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발적이고 비동기적인 본성을 가장 분명히 나타내었다.

예수가 의인들과 죄인들의 자리를 바꾸실 때 첫눈엔 이것이 단순한 가치재평가 즉 가치전도의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훨씬 심오한 문제로 어떠한 유의 가치판단 개념도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서 용납되지 못한다는 원칙을 표명한 것이다. 왜냐면 거룩한 하나님은 죄인의 죄 때문에 사랑함이 아니라 그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이 항상 의롭고 경건한 자만을 사랑하신다면 이는 비동기적과 자발성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대상의 값어치에 대한 모든 생각을 아예 포기할 때에만이 아가페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데....
``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퓌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5:45

아가페 개념 구조의 제일 먼저는 자발적이며 비동기적인 성격이다.
아가페는 가치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장 심오한 특징은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의 특징인 창조성에 참예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목할 때 아가페의 의미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것을 볼 수있다. 아가페는 창조적인 사랑이다.
그 자체엔 아무런 사랑의 가치가 없으나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획득되는 가치....바로 그와같은 가치 창조이다. 미덕이란 아가페와 전적으로 무관하며, 아가페란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치를 창조한다. 아가페는 사랑하며 사랑함으로써 가치를 분여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가치를 제공할 뿐이다. 아가페는 가치를 창조하는 원칙이다.

우리는 이제 아가페 개념의 가장 심오하고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특질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특질을 현대신학에서 매우 모호해졌는데,
리츨의 이래 여러 신학자들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기독교의 중심사사상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 개념을 `하나님의 부성애`와 연결했다. 그래서 아돌프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저서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세 가지 제목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각각에 전체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하르낙은 그것들 중의 하나에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라는 개념이 결코 기독교의 중심개념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다. 하르낙의 개념을 지지로 인용된 성경구절은 잘못 해석됐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영혼: 하르낙의 해석)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영혼: 하르낙의 해석)을 바꾸겠느냐?` 8:36-37.

여기서 하르낙은 목숨을 영혼으로 해석했다. 게다가 하르낙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모든 사람은 전세계보다 더 가치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하르낙의 선언은 이런 유의 무한한 가치가 인간 본성에 있다는 사상이 비기독교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임을 분명히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이 개념이 하나님의 사랑 개념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이다.
사람이 본성상 그러한 빼앗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상은..신성한 불꽃이 죄에 빠진 사람 안에서 완전히 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꽃은 사람의 얼굴을 가진 모든 인간 안에 있으며 그것의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실현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러한 불멸하는 내면적 가치만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결점이나 불완전을 무시하고 인성의 핵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이렇게 해석함이 타당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결국 자발적이거나 비동기적이지 않으며 인간성에 내재하는 무한한 가치에서 합당한 동기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의 용서란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인정하는데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이해하는 용서가 아님이 아주 명백하다.

예수께서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허물의 간과를 정당화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증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물로 베풀어진 것이다. 죄의 용서란 신적인 권능(εξουσια)의 창조적 사역이다.

아가페는 하나님과 교제의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내용을 결정한다. 아가페가 그 창조적인 본성에 힘입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주도한다는 면에서도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교제를 수립하는 주도권은 전적으로 신적 아가페에 놓여져 있다.
아가페 도래는 전적으로 혁명적이다. 이는 인간 편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전혀 없다. 단지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신적 용서의 길 즉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가페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시는 길이다.

아가페와 에로스 4 :: 비유들의 증거에서....(안더스 니그렌)

우리는 이전 주장에서 아가페 개념이 복음서 예수의 생활과 교훈에서 가장 중심적 위치를 가졌다고 했다. 참으로 그렇다면 아가페 개념은 예수의 비유들에 그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그러함은 증명되는데 아가페 동기는 비유들에서 전반적인 으뜸 주제를 형성함으로 입증된다.

복음서에서 아가페를 끄집어 냄에 있어서 오랫동안 어려움에 처해져 왔던 문제는 비유에 대한 과거의 풍유적 해석법 때문에 비유가 효과적으로 이용되지 못하였다. 풍유법은 온갖 종류의 변덕스러운 주해들이 가능하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즉 비유들에 대한 풍유적 해석은 예수의 실제 의도를 알리는 증거로선 무용지물이었다.

이러한 자의적인 방법을 극복하고 비유해석에 명료성과 논리를 부여함에 기념비적 저서는 율리허(Julichet)의 `예수 비유의 말씀`(Die Gleichnisreden Jesu, 2md., 1910)에서 예수의 비유는 풍유가 아니라 ``문자적 담화(disciurse)``라는 것을 예리하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부족점은 종래의 어려움을 제거함과 동시에 스스로 새로운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가페는 언제나 하나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율리허의 해석에 반대하여 수많은 비유들 특히 위대하고 중심적인 것들을 아가페 개념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를 비유에 국한하여 다룸에 있어... 율리허의 비유들이 증명의 방법들이라고 주장하는데.... 탕자의 비유 (눅15:1-32)에서 잘 예시된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한다는 생각보다 더 용납 불가능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멸망할 죄인들과 사귀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율법적 의로 양육받고 정착한 모든 이들도 예수를 하나님과 그의 공로로써 수립되고 보장되는 질서의 파괴자로 밖에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예수에 대한 비난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해서 함께 먹는다``고 말한 이 말보다 더 중대한 비난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스라엘 종교 전반의 토대를 뒤집어 엎는다는 비난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가 가르친 죄용서는 모든 사람을 그 행위에 따라 보응하는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공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깊이 뿌리박은 치밀한 반대에 직면하여서, 예수는 그 반대를 증명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제시했다고 한다고 한다.

여기서 방탕하고 돌아 온 아들에 대해 환영해준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즉 이로 하나님의 태도를 논증하도록 설득하는데 예수는 하나님도 죄인에 대해서 동일하게 대하신다는 자명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정반대의 유형의 종교들을 구별해야 한다. 즉 종교들은 증명적 유형(demonstrational)과 계시적 유형(revelational)으로 나뉜다.
증명적유형은 평범한 인간생활에서 출발점을 취하여 거기에서 종교생활로 올라가는 길을 만든다. 그래서 일정한 보편타당한 종교적. 윤리적 진리들에 도달하려고 한다.
계시적유형은 종교생활 자체에서 출발점을 취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만나며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 목적을 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보편적 명제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예수의 교훈은 전반적으로 철저하게 계시적 유형의 특색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들에도 해당되는데 예수의 비유들은 본질상 증명수단이 아니라 계시수단이다.
비유들은 합리적인 ``그래야만 한다``를 근거로 삼지 않고, ``권위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I say unto you)를 근거로 삼는다. 예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분의 서기관들과 다르게 권세 있는 자와 같다는 인상을 받은(마7:29)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가 온 것은 신 개념을 순수하게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를 주려고 오셨다. 예수는 성부가 주신 사명을 실천했으며 비유들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한 수단들이었다.

비유들에서 `하나님이 합리적으로 이렇게 행하실 수밖에 없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모든 합리적 계산에 반하여 실제로 이렇게 행하신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다.....그렇다면 그분이 죄인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며 더 자명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예수는 정반대되는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여전히 그 존엄성과 엄격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예수는 그 거룩하신 분이 죄인들을 찾아간다고 선포한다. 또한 예수는 자기 자신의 사명도 같은 방향으로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하다. 또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 ``막2:17라는 말씀에서....
마치 죄인들이 의인들 보다 어딘가 나은 듯이 죄인의 인격 안에서 어떤 동기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헛수고이다. 하나님 편에서 이 행동에 아무런 동기가 없다. 그것의 유일한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발적이며 비동기적인 것이 특색이다.

예수 비유들의 전반적인 의도는 결코 보편타당한 전제들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특정 행동을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비유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비동기적 사랑이 고유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동기적 사랑은 모든 합리적 계산을 물리친다. 바로 탕자의 비유가 의도하는 것도 그 사랑의 표현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지상의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하나님도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것은 오해이다. 이 경우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며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끌어내려진다. 실상은 그와 정반대의 방향을 취하는데 이 비유에서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의 태도가 주된 것이다.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바로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함의 이것에 대한 명백한 일례로 `포도원의 일꾼들의 비유`(마 20:1-16)에 대한 율리허의 설명에 잘 나타난다.

다른 곳에서처럼 이 비유에서도 전반적인 배경은 하나님의 ``동기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에 힘입어서 하나님은 무가치한 자들과 교제를 시작한다. (그 논점의 방향은 자격과 공로의 개념에 반대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의의 원칙으로 규정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한다. 집주인의 태도는 `동등하지 않은 일에 동등한 보수`라는 원칙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집주인의 태도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예시하는데 이바지 한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도처에 표현한다.

나중 온 자가 먼저 온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 이러한 행동에서처럼 우리는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어떤 행동방식이 가장 이로운 것인지도 결정할 필요가 없음임은 가난한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했다.

여기서 증명으로 볼수 없는데, 만약에 불평한 일군들처럼 공로와 자격이 진정한 문제였다면 옳을 것이다.그러나 이 비유의 목적은 종교적 관계에서 공의의 원칙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즉 동기있는 공의는 여기서 동기없는 사랑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분명히 사법적 관점에서 이 비유를 보면 불쾌한 것이 존재한다. 공의의 원칙 자체가 종교적 관계에는 적용불가한 것으로서 제거될 때라야 그 불쾌함도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일꾼의 비유인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어떤 동기를 찾아보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익한 일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불쾌함은 우리가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똑같이 비동기적임을 깨달을 때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색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의 아가페적 동기라함을 주시하면 그 뜻이 투명해진다. 비동기적 사랑으로 집주인은 늦게 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준다. 이것은 은혜로써 공로와 보수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초월한다. 불평가들은 주인의 이러한 은혜의 원칙을 이용해서 더 높은 법적 주장을 수립하려지만, 주인은 어서 공의를 지키자고 응답한다.

법적인 질서를 유지하고픈 사람들은 주인의 선심 때문에 도리어 불쾌해진다. 그러나 죄인들은 동기없는 선심을 받아들인다. 의인들은 동기적인 공의를 요구하고 비동기적 사랑을 거절한다. ...이와같이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리라..(16절)

탕자의 비유에서 법적인 질서를 대표하는 형이 배경에 서 있다. 그 형의 공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완전히 바르다. 그의 아우가 한 행동은 아버지가 보인 사랑에 하등의 근거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의 비동기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기독교적 사랑의 자발성은 모든 합리적 계산이나 계획에 반대됨을 의미하는데 아무리 무익해 보이고 희망이 없어 보일 때에도 아가페는 씨앗을 뿌린다. 이러히 비유에는 아가페의 정신이 가득하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두고 찾아 떠나는 비유도 차가운 이성적 성찰이 아니라, 비동기적 사랑이다. (눅15:4)

끝으로 자기 동료를 용서치 않는 무자비한 청지기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마18:23), 여기서 하나님 아가페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것의 무제한적 . 무조건적 성격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의지가 무제한적. 무조건적이라면 그 사랑과 용서를 받는 사람들도 무제한적.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가 바로 이말인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윤리적 뿌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출발하는 기독교 윤리의 특색은 제자들에게....`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라고 하신 말씀에 요약된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저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료인간들에게 그 사랑을 거저 전달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아가페와 에로스 5 :: 고대의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

번호: 85 글쓴이: bada
조회: 44 날짜: 2004/08/27 16:58

고대의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 ::

니체의 기독교가 ``모든 고대적 가치들의 재평가``를 의미한다는 유명한 공식구로 기독교와 고대세계의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이 공식문구는 통상적으로 인정된 것 보담 훨씬 많은 진리를 담고 있다.

가치재평가.... 즉 기독교의 중심동기인 아가페 동기란, 유대교의 율법적 경건과, 헬레니즘의 에로스적 경건 모두에 대한 정면공격과 같다.

아가페는 율법적인 신인관계면을 철저히 분쇄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가 바리새파와 충돌했고 바울이 율법에 투쟁했던 것이다. 아가페는 노모스(율법)에 대립하며 따라서 유대교의 전반적인 가치척도의 토대를 부정한다.
동시에 에로스적 특색인 고대 그리스-헬레니즘의 가치척도도 마찬가지로 반대한다.

그리스 인들에게 저들의 신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함은 저들 신들은 모든 욕망과 소유를 가졌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근본적 신앙을 고백한다. 이 사랑은 획득적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고 희생과 자기시여를 특징으로 가짐은 그것이 아가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닌 주려고 애쓰는 사랑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이나 동기부여가 전혀 유지될 수 없음이다.

그리스 사상에는 엄격한 의미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부재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플라톤은 ``신은 사랑과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Symposium,203) 그러나 기독교에서 아가페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의미한다. 그 교제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물론 그리스 철학자들도 때때로 대중적인 종교 개념들과 일치되게 사람들을 향한 신들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에도 고대사상과 기독교의 사상 차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따라 사는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될 것이다. .....이는 현자에게서 최고도로 발견될 것임이 분명하다......하여 현자를 하나님이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은 우리의 합리적 추측과 정반대라고 한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느니라.``(고전1:27-28)


그러므로 니체는 기독교가 고대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했다고 말한 점에 있어서 확실히 정확했다. 니체는 그뿐 아니라 이 가치재평가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논점을 지적한다. 이는 아주 중요하다.

니체의 이 말...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모든 용어에 대해서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십자가의 하나님`이란 공식구에 개재된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공식구는 고대인들의 취향엔 지나치게 무서운 모순이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대담한 전도가 아무데도 없었으며, 이 공식구만큼 무시무시하게 도전하거나 도전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것은 모든 고대 가치들의 재평가를 약속했다.`` Jensiets von Gut und Gose, Drittes Hauptstuck, 46

니체가 십자가상의 하나님에 대해 모든 고대가치들의 재평가를 발견한 최초 인물은 아니다. 기독교의 초창기에 기독교의 친구들과 원수들이 모두 그 점을 깨달았으며 바울도 `십자가상의 하나님` 이란 말에서 기독교가 도입한 위대한 가치재평가를 보았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함에 있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매달린 메시야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십자가의 아가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계 개념의 토대가 되는 전반적인 가치 도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고 말했다.
( 그리스-헬레니즘의 정신에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아가페를 전파하는 것도 역시 미련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윤리적. 종교적으로 아가페는 어쩔 수 없이 고대의 지적인 견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에....
윤리적 관점에서 아가페는 순전한 불의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지혜자의 이상과 상향적인 노력 개념과도 충돌한다.
아가페는 에로스 개념과 정면으로 반대되며, 또 사람이 신적인 영역으로 상승하는 것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십자가의 아가페는 인간 재판관들보다 못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에 불경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고대인의 신개념의 모든 특징들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불변성, 불후성 및 영원성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불변자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생활의 변화와 우연에 내려와서 거기서 예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가페는 하나님의 유대모니아(eudeaemonia) 그의 아름다움, 행복 및 지복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설득하여 그 지복과 자족상태를 버리고 심지어 자기를 비워 십자가의 죽음을 견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2세기의 켈수스(Celsus)같은 플라톤주의자의 기독교의 아가페에 대한 비평이 이런 종류였다. ( 켈수스는 모든 헬라인과 로마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품은 반감을 표현했을 뿐인데...``하나님은 순결한 사람들만을 상대하신다.``라는 것이 그들 신성불가침의 원칙이었다. )

자주 인용되는 말로...아가페가 기독교의 역설적이고 불합리한 본성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가 암시됨이``.... 아니라 욀혀 십자가의 아가페란 단순하고 명료하며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아가페가 역설적이고 불합리하다는 것은 이전에 인정되던 가치들에 대한 재평가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아가페엔 생명에 대한 두가지 태도 즉 두 유형적 종교와 윤리적 특징적 표현들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태도와, 신중심적 태도로 묘사된다.

자기중심적 유형에선 종교적 관계가 인간에 의해 지배된다. 여기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거나 그 자신이 신적인 존재일 것이다. (태양상이 바로로서 신격화 되듯이....이방은 왕이 되면서 신격화되곤 했다.)
신중심적 유형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집중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엔 절대적인 구별이 넘지 못할 경계선이 있다. 인간으로서 신적인 생명에 까지 올라가려는 것은 순전히 엄청난 교만이며 최고도의 불경건이다. 즉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다리를 놓으실수가 있다.

``사람의 에로스에 의해서는 도저히 하나님께 이르를 수 없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아가페 안에서 인간에게 강림하실 때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후패하는 일시적인 금생을 등지고 영혼의 근원인 고등세계를 향해서 영혼의 날개를 타고 상승하도록 설득하려고 애씀은 플라톤주의에서 최고조로 발전했는데 플라톤주의는 초감각적. 자존적인 신에 대해 가지는 열정적인 사랑과 동경이다.
이와 반대로 신중심적 경향은 배경적 편이었지만 기독교가 나타나기 전까지 완전치 못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모든 고대가치들의 재평가를 발견하는 가장 심오한 이유는 바로 기독교의 신중심적 성격에 있다.

종교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자기중심적 종교 즉 에로스의 주장은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 들어올림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로이 강림하심으로써 그 교제의 길이 확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중심적 종교 즉 아가페의 주장인 것이다.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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