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0. 6. 02:01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요시야:아마겟돈을 꿈꾸며 열왕기하 23장 29-30절 이종록 목사(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그대가 있기에 겨울도 따스합니다
이제는 영락없이 겨울입니다 가슴에 이는 찬바람이 더 매서운 한해의 이 끝에 서면, 어린 시절 징검다리 건너다 어느 만치 왔는지 뒤돌아보듯, 지난 날들 절로 돌아봅니다 올해도 꼭 이만큼 왔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자취 남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만큼 바라보이는 지난 날들, 저 끝쪽은 벌써 흐릿해지는데 그래도 다시 보니, 그대는 나와 함께 나는 그대와 함께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었습니다 봄에도 그대는 나와 함께 있었고 여름에도 나는 그대와 함께 있었고 가을에도 우리는 함께 있었습니다 그대는 내 곁에 나는 그대 곁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저 끝으로 이어지는 길, 우리가 추억하는 그 길은 함께 호흡하며 걸어온 동반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겨울에도 그대는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여 지금 내 손 잡은 그대가 있기에, 그대 손 잡은 내가 있기에 이 겨울도 인심사나운 이 겨울도 한없이 따스하기만 합니다
겨울. 천년의 마지막 겨울. 신화에서는 겨울이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겨울에서 죽음을 읽지 않는다. 겨울은 오히려 생명을 상징한다. 그 추운 겨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 시작하는 계절이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이 겨울에도 결코 죽음이 아닌 삶을 체험하며, 다가오는 새천년의 봄을 희망을 갖고 기다린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삶을 추구하는 역사학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삶'이다. 우리는 결코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삶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삶을 무시하는 경우들이 많다. 역사학도 그렇다. 역사학은 역동적인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이다. 지금까지 역사학은 인간들이 남긴 삶의 자취들을 통해서 과거 삶을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지나치게 인간의 삶을 실증적이고 도식적이며 획일적으로 살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간의 삶을 등한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역사학이 인간의 삶을 배제한 역사학으로 전락한 것이다. 요즘 역사학자들은 그런 비판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역사학을 추구한다. 린 헌트는 역사학이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역사에 적용한 실증사학에서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과 인류학을 역사에 적용하는 쪽으로 나갔다가, 인간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을 다루는 일상사와 심성사, 또는 문화사를 다루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 문학으로서의 역사로 나아간다고 말한다(Lynn Hunt, The New Cultural History). 나는 이것은 역사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역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매우 바람직한 노력이라고 본다.
구조사 중심의 사회사에 대하여 일상사는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상사가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익명의, 추상적인 구조로 이뤄진 역사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는 구체적인 개별 인간들의 희망과 실망,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노여움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이다.(안병직,'일상의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의 역사학,한겨레신문사, 34)
이처럼 역사학은 생생한 인간삶을 찾아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인간삶을 어떻게 발견해내고 서술할 것인가?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 The Content of the Form)는 역사는 과거를 역사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서 서사체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상상력. 이 얼마나 우리를 설레게 하는 말인가. 그 생생한 삶의 현장을 재현해낼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일 것이다.
그리고 괴스타 알스트룀은 역사연구는 미케네 도자기 파편들을 모아서 원래 형태대로 복원하는 작업과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도자기를 복원하려고 할 때, 조각이 없어진 부분은 다른 것들을 참고해서 흙으로 빚어서 메꿔넣는다. 역사는 이 사라진 부분을 메꿔넣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Gösta W. Ahlström, The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from the Palaeolithic Period to Alexander's Conquest, 20).
요즘 역사가들은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역사학을 나는 '삶을
추구하는 역사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의 여류 사학자인 나탈리 제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서
과거를 조명하려고 하며,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더 생생하게 과거를 재현하려고 노력한다(데이비스는 프랑스사를 연구하면서, '마르뗑
게르'라는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매우 흥미로운 재판사건을 섬세하게 밝혀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화[마르뗑 게르의 귀환
데이비스의 경우, 치밀한 묘사는 농민과 코라스 그리고 역사가 자신의 삼자 간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대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엄격한 사료비판이나 과학적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이다. 역사적 상상력을 매개로 과거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재판관 코라스가 전념했던 것처럼 증거에 의한 진실과 허위의 판단이 아니라, 역사적 가능성을 통한 역사현실의 재구성이다. 코라스가 심증만 있고 확실한 물적증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면, 역사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현실까지도 추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역사가가 시도하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는 사료상의 언어의 한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으로 사료의 언어가 침묵하고 있는 것까지도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밝혀내야 한다. 따라서 데이비스에 의하면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의 목표는 사료를 증거물로 해서 무엇이 과거의 엄연한 사실인지를 밝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료의 공백을 보완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이다(김기봉,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과 신문화사,' 오늘의 역사학, 한겨레신문사, 174).
지금까지 '삶을 추구하는 역사학'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부터 우리는 요시야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그는 지금부터 2600여년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는 성경기록과 주변 자료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료들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세밀한 부분들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밝혀보려고 한다.
므깃도 사건의 진상-"요시야는 범죄했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이천육백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의 므깃도에서 일어난 한 비극적인 사건을 다룰 것이다. 므깃도는 어떤 곳인가? 므깃도는 팔레스타인에서 중요한 고고학적인 장소로 알려져 왔는데, 므깃도의 현재의 지명은 '텔 엘-무테셀림'(Tell el-Mutesellim)이다. 넓이는 13에이커이고, 유적의 깊이는 대략 16.5미터이다. 텔 엘-무테셀림(Tell el-Mutesellim)의 뜻은 '사령관의 언덕'('mound of the commander')이다. 므깃도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므깃도는 해안도로를 통해서 남쪽으로는 이집트, 그리고 북쪽으로는 페니키아와 시리아, 그리고 더 멀리로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성경기자들도 므깃도를 여러번 언급한다. 므깃도 왕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정복된 통치자들의 목록에 나타난다(여호수아서 12장 21절). 므낫세 지파가 므깃도 지역을 점유하기로 했었으나, 이들은 므깃도와 그 주변 지역을 점유하는 데 실패했다(여호수아서 17장 11절, 사사기 1장 27절, 역대상 7장 29절). 바락이 시세라와 싸울 때, 전투가 타낙 부근의 '므깃도 해안'(사사기 5장 19절)까지 미쳤다. 이처럼 므깃도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므깃도는 다윗의 통치시기에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의 시대에 와서 므깃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다윗과 솔로몬도 므깃도를 전략요충지로 생각한 것이다. 므깃도는 이처럼 매우 중요한 장소였는데, 그렇기에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이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뤘다. 그만큼 므깃도는 인간의 탐욕이 집중되는 전쟁과 죽음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 전쟁과 죽음의 땅 므깃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야다. 요시야는 므깃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므깃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왕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는 제국주의적인 주변 강대국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순전히 생존차원에서 므깃도를 중요시했다. 그것은 요시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시야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병거에 올라서서 앞을 주시하고 있다. 저기 애굽군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지는 거대한 군대. 그것을 바라보는 요시야의 표정은 비장하다. 요시야는 북진하는 애굽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므깃도까지 왔다. 아마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왔을 것이다. 계백 장군이 신라에 패할 것을 알고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한 것과 비슷할 것이다. 요시야는 자기 뒤에 서 있는 유다 군인들을 돌아본다. 그들도 밀려드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고 있다. 곧 벌어질 전투가 승산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조금도 동요치 않고 굳굳하게 서 있는 사람들. 그들도 요시야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 위해, 생존차원에서 므깃도를 사수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다.
요시야 자신도 예상했겠지만, 요시야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우리는 요시야의 패배와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목격할 것이다. 열왕기는 요시야 최후를 우리들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의 최후를 단 두절로 요약한다. 이것은 요시야 죽음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빈약한 분량이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 최후를 짧디짧게 기록한다. 그는 아무런 설명도 첨부하지 않고, 매우 객관적인 어조로 아나운서가 사건보도하듯 그렇게 요시야의 최후를 처리하고 만다. 인간미가 전혀 담겨지지 않은 이런 공식적인 어투에 나는 화가 난다. 인간의 삶을 어쩌면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인데.
그렇지만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열왕기 기자가 본디 이렇게 말이 적은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장황하게 수식어를 사용하는 사람인가. 27절까지 그런 장황함은 여실히 나타난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요시야의 최후를 이야기하면서 왜 이토록 성의없는 모습을 보이는가? 열왕기 기자는 왜 요시야 최후를 이렇게 간략하게 감정도 없이 이야기하는가? 열왕기기자가 요시야의 최후를 이렇게 다룰 리가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처럼 간략하게 언급하고 말았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앞 구절들에서 읽을 수 있다. 요시야가 이뤄놓은 업적들을 열거해온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를 평가하면서 요시야가 그전 시대나 그 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열왕기하 23장 25절)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열왕기 기자가 요시야에게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식의 평가를 들은 왕들은 거의 없다. 요시야는 최대의 찬사를 받는다.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글을 쓴 열왕기 기자는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다가 비참하게 멸망당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멸망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요시야가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그 위대한 요시야마저도 유다를 멸망에서 온전히 구해내지 못했다. 요시야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여전히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나님은 요시야가 보여준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진노를 거두지 않으셨다.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열왕기하 23장)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목숨을 걸고 국가를 개혁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멸망으로 내달리고 있었다니. 본문을 쓴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지만, 요시야는 그 사실을 모른다. 요시야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22년 정도 지나면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요시야는 그 개혁을 통해서 나라를 어느 정도 굳건히 해놓았기 때문에, 국가의 미래에 대해서 조금은 희망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가 보는 것은 절망이다. 하나님은 이미 유다를 버리셨다. 국가를 개혁하고 (앞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왕 요시야마저도 막지 못한 유다의 종국.
이처럼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 일생에 대한 평가를 하고 나서, 요시야는 개인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멸망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요시야 최후를 말한다. 요시야 전사는 멸망을 치달리는 과정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허망함을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 최후를 간략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대신하지 않았을까. 짧막한 기록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체념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사가 배제된 짧고 간결한 이 글에서 우리는 요시야를 잃은 슬픔을 절제하며 그것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유대인들의 속깊은 아픔을 느낀다.
이런 모습은 글구성에서도 나타난다. 26절과 27절은 요시야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그리고 28절('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은 종결구다. 왕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이 종결구로 끝난다. 그러나 다른 왕들에 관한 기록과는 달리, 이 종결구는 요시야 최후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요시야에 관한 기록은 이 전형적인 종결구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이어진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열왕기 기자가 요시야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곤혹스러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본문을 차근차근 읽어보기로 하자. '요시야 당시에.' 직역하면 '그의 날들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다스리고 있을 때'이다. 지금까지 요시야는 자기 뜻대로 유다를 다스려왔다. 재위 18년에 시작한 두 번째 개혁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고, 그 이후로 1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요시야는 나라를 굳건하게 했다. 성경기자는 요시야 18년 이후에 요시야가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본격적인 개혁작업을 상당히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난다. 역대기는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라고 말한다. 요시야는 하려고 한 바를 모두 실행했던 모양이다. 요시야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본문은 재위 18년 이후 시기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이 바로 주전 609년 사건을 언급한다. 이 13년 동안 유다는 평화를 누렸다. 이 기간 동안에는 외적의 침입도 없었다. 평화. 요시야 시대의 평화. 그러나 우리는 이 평화로움에서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이런 불안감을 갖는 이유는 본문 기록이 재위 18년까지는 상세하게 기록하다가 그 이후 시기는 별 이야기없이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재위 18년 이후 13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 불과 두절(24,25절)에 기록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열왕기 기자가 보여준 문체에 비해서 지나치게 간략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13년 동안 요시야와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열왕기 기자는 그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뭔지 모르지만 열왕기 기자가 허둥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문장구성에서도 나타난다. 뭔가 불안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같은 느낌이다. 정말 우리 예감대로 이제 그 평화로움이 끝날 때가 되었다. 올라왔다. 올라왔다는 것은 유다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누가? '바로 느고'가. 그는 이집트 왕이다. 그런데 그가 왜 올라왔을까? 개역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로 번역하는데, 실제로는 앗수르 왕을 돕기 위해서 올라갔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을 '대항하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의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유프라테스 강으로'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집트 왕 바로 느고가 올라와서 앗수르 왕에게로, 즉 유프라테스 강으로 갔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역대기는 '애굽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고로'라고 자세하게 밝힌다. 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갔을 것이다.
느고가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까지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벨론이 메대와 힘을 합쳐서 서쪽으로 나아가려고 하자, 앗수르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전 612년에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을 당했다. 니느웨 함락 장면은 나훔서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 존귀한 자를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예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명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 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 거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나훔 2장)
1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나훔 3장)
수도가 함락되자, 앗수르 잔존세력들은 하란으로 후퇴했다. 앗수르는 더 이상 바벨론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이제 앗수르 제국은 바벨론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때 이집트가 앗수르를 지원하기 위해서 하란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하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유다를 통과해야 했다. 당시 북왕국은 이미 멸망당해서 앗수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통과하는 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유다였다.
요시야도 당시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앗수르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당한 것은 이미 3년전 일이다. 요시야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비책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요시야가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때 조선이 일본침입을 전혀 대비하지 못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한 것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총명한 요시야는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다. 비록 국제적인 변화의 큰 물결을 제뜻대로 다룰 수는 없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 지배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주전 612년에 앗수르 수도가 함락당해서 하란으로 옮기고 힘도 그만큼 약해졌겠지만, 그렇다고 유다가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는 있었겠지만 앗수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앗수르를 견제하던 애굽은 이제는 앗수르를 지원하면서 바벨론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유다는 앗수르나 애굽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리고 바벨론이 팔레스타인까지 힘을 미치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그동안 요시야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요시야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은 앗수르나 애굽이 유다에 반바벨론 동맹군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요시야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유다는 앗수르와 애굽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다.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이사야서 7장)
당시에 앗수르가 발흥하자 주변 국가들은 앗수르를 경계한다. 그러다가 앗수르가 서진(西進)하려 하자, 그들은 동맹관계를 맺고 앗수르에 대항한다. 그런데 유다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외교노선을 택했다.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만, 애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애굽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은 유다도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매우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만,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힘을 합쳐서 유다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유다왕 아하스를 제거하고 자기편 사람을 유다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잘아는 대로, 유다왕 여호사밧은 아합왕에게 눌려지냈다. 그래서 아합왕가와 사돈관계를 맺고, 아합왕이 소환하면 언제나 북왕국으로 가야 했다.
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었더라 2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3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 들과 일반이니이다(열왕기상 22장)
한 나라 왕이 할 일이 없어서 이웃 나라로 놀러 간 것이 아니다. 심심해서 옆집에 놀러가듯이 왕이 그렇게 행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공식방문이었을 것이고, 아합왕이 여호사밧을 불렀을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여호사밧은 아합왕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왕국으로 갔을 것이다. 아합왕이 전쟁을 할 때, 여호사밧도 군대를 이끌고 그 전투에 참여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북왕국은 남왕국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가가 당하는 설움이다. 이렇기 때문에 당시 앗수르나 애굽이 파병과 물자지원을 요청하면 유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왕 요시야' ('왕 요시야'라는 표현은 22장 3절에 나온다. 왕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이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는 이런 상식을 깨고, 애굽을 막기 위해서 출병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시야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애굽군대를 막겠다고 출병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시야가 그렇게 무모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요시야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 것이다. 그는 애굽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미리 짐작했을 것이다. 분명히 애굽은 북진할 것이다. 바벨론이 서진(西進)해서 팔레스타인을 장악할 경우, 애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바벨론의 서진을 막으려는 국익차원에서 출병한다. 애굽이 앗수르 잔존세력을 지원하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하란까지 진격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로를 이용하던지 아니면 육로로 팔레스타인 해안길을 통과해서 하란으로 진격하든지 해야 한다. 아니면 해상로를 타고 어느 지점까지 올라와서 거기서부터는 육상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바로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적으로 해상으로만 이동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47장을 보면, 느고는 북상하면서 블레셋을 통과했는데, 그들이 저항을 해서 블레셋을 격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느고는 육로를 통해서 이동했을 것이다.
요시야를 비롯한 유다 관리들은 느고가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서 대군을 이끌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느고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자 요시야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해서 므깃도로 가는데,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죽임을 당한다. 열왕기 기자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그가 그를 만나보고 그가 그를 죽였다'고 모호하게 말한다. '느고가 요시야를 만나보고, 느고가 요시야를 죽였다.' 우리는 느고가 요시야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 알지 못한다. 느고가 요시야를 만나보았다는 것은 느고가 개인적으로 요시야와 대면한 다음에 요시야를 죽였다는 것인가? 아니면 느고 군대와 요시야 군대가 접전했다는 것인가? 느고가 개인적으로 요시야를 만나보고 요시야를 죽였는데, 그것은 공개적인 처형인가 아니면 암살인가? 우리는 자세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열왕기 기자는 자세한 사실을 알려는 마음이 없다. 그는 자세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은폐하려 했을까? 왜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했을까? 열왕기 기자에게는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요시야가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요시야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건이었으며, 요시야의 대대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멸망으로 치달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요시야의 최후가 궁금하다. 도대체 므깃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대기를 보면, 조금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고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쏘는 자가 요시야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26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 27 그 시종 행적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역대하 35장)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 기자가 언급하지 않은 이런 자료들을 어디에서 입수했을까?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던 비사를 밝혀놓았을까? 그것도 얼핏보면 요시야에게 득이 되는 자료가 아니고 요시야를 비난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역대기 기자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가 느고 왕이 원하는 대로 애굽 군대가 북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고, 요시야는 그것을 어겼기 때문에 죄의 대가로 전사한 것인가?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를 결국 범죄한 왕의 대열에 포함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을 갖고, 역대기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자. 군대를 이끌고 므깃도에 근처에 당도한 느고는 요시야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그렇다면 느고는 요시야에게 협상단을 보냈다는 뜻일 것이다. 마소라 텍스트는 '사자들'이라는 말에 샬셀렛을 붙여서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하기를'로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어 '레모르'에 샬셀렛을 붙인다. 샬셀렛이 연거푸 두 번 나온다. 그러니까 느고가 요시야에게 협상단까지 보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느고는 요시야를 '유다 왕'(멜렉 예후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요시야를 상당히 우대하는 말일 것이다. 느고는 요시야를 설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는 '나와 그대가 어떤 관계인가?'로 읽는 것이 좋겠다. 두나라 관계가 대적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느고는 자신과 요시야 사이의 친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출병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느고는 요시야가 자신의 출병에 의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시야를 안심시키려고 한다. 이번 출병은 유다에 전혀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느고는 유다와 갈등관계를 빚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마디로 느고는 갈길이 바쁘기 때문에 요시야가 그들을 방해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고는 여기에 뜻밖의 말을 덧붙인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주어를 앞에 놓아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느고는 요시야를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요시야와 부딪치지 않고 갈그미스까지 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촉박한데, 요시야와 접전하면 아무래도 전력손실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느고는 진정으로 요시야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느고는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다. 느고는 자신이 출병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뜻이며,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세워서 할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느고가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느고는 서두른다. 그래서 요시야가 제발 자기 길을 막지 말기를 부탁한다. 그러면서 느고는 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니 요시야가 하나님 뜻을 거스리지 말라고 말한다. 느고 말대로라면, 요시야가 느고를 막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느고는 요시야가 하나님을 거스려서 그 죄가로 진멸당하지 말라고 충고까지 한다. 이처럼 느고는 사자들을 요시야에게 보내서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시작하고, 또 정중한 충고로 말을 끝내지만, 여기에는 느고의 단호한 뜻이 들어 있다. 결코 자기를 막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우리는 느고가 요시야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다. 느고는 하나님을 동원하면서까지 요시야를 협박한다. 요시야가 느고를 절대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만약 느고를 막으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것을 그만큼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는 느고가 그렇게 말한 것보다 역대기 기자가 느고의 말을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느고는 하나님 뜻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앗수르를 도와서 바벨론 연합군을 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시야는 느고와는 달리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느고가 그토록 강력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진멸당하지 말 것을 충고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출전해서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느고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데 요시야는 그런 계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도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신앙심깊은 느고와 불신앙적인 요시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대기 기자가 느고를 높이고 요시야는 낮추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신앙심깊은 요시야가 왜 이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저질렀는지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고 므깃도로 가지 않았다면, 자신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다도 멸망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석해한다.
그러나 나는 요시야가 범죄했다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22절은 요시야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요시야는 하나님 뜻을 거역한 사람이다.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느고의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이라는 구절을 '하나님 앞에서'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마소라 텍스트는 분명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이라고 한다.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가 느고 군대를 막은 것이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행위였다고 말하려고 했을까? 느고가 말한 것은 외교적인 문서이기 때문에 예의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해도, 역대기 기자도 느고가 한 말을 하나님이 하신 말로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이라는 구절은 요시야를 평가하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느고는 요시야와 가급적이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하는데, 왜 요시야는 그것을 반대하고 굳이 전쟁을 해야 했을까? 요시야는 전쟁을 즐기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당시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요시야가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 주제를 몰랐던 것일까? 도대체 그 신실하던 요시야가 왜 최후에 하나님께 범죄했을까? 역대기 기자는 우리에게 이런 의문을 갖게 만드는데, 더 근본적으로는, "요시야가 느고와 전투한 것을 하나님 말씀을 거스린 죄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요시야를 죄인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본문을 그렇게 읽고 싶지 않다. 당시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자. 느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기 전에 요시야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군주들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애굽 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정중한 부탁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국가들에게는 이것이 강력한 협박이지 결코 부탁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을 애굽이 더욱 강력하게 장악하겠다는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요시야가 이 요청을 들었을 때, 그는 이것이 유다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야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주권을 포기하지 않고, 그저 애굽군대가 지나가는 길만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는 "느고가 그냥 통과하겠다는데 요시야가 그것을 왜 막느냐?"고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냉혹한 세상사를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임진왜란에서 본다.
당시 일본은 도요테미 히데요시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시점이었다. 15세기 후반에 상인을 앞세운 서양세력이 점차 일본으로 밀려들었고, 그 결과로 일본에는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하여 종래의 봉건적 지배 형태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상업 도시를 기반으로 한 신흥 세력이 힘을 키우자 위협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흥 세력의 힘을 밖으로 내몰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방책을 모색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외부와의 전쟁이었다. 이를테면 전국시대를 통해 얻은 전쟁 수행 능력을 효과적으로 소비하고 신흥 세력들의 힘을 축소시키려는 일거양득의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대륙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신들을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청하였다.(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39-40.)
만약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 조선에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하고 일본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일본이 그냥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길을 열어달라는 것인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부당한 요구다. 어느 나라가 이런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겠는가. 그래서 임진왜란이 벌어진 것이다. 역대기 기자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느고가 군대를 동원해서 바벨론 군대를 치기 위해 갈그미스로 진격하는데, 유다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것이 어찌 하나님 뜻이겠으며, 애굽이 신속히 진군해서 앗수르를 돕고 바벨론을 치는 것이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겠는가. 그리고 강대국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벌이고, 약소국들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통당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 뜻이란 말인가. 아무리 뭐라해도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역대기 기자도 그의 역사관이 잘못되지 않는 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느고가 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이라는 역대기 본문의 구절을 단순하게 표면적으로만 들을 것이 아니고, 그 속뜻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 전사를 정말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요시야가 므깃도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거기서 전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대기 본문을 읽어야 한다. 마치 과부가 자식들을 키우다가 생활이 너무 어려울 때마다, 자기 홀로 두고 세상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면서,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리도 매정하게 혼자 세상을 떠났단 말이요' 하면서 남편을 원망하고 신세한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는 좀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강대국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서 세력다툼을 벌일 때, 그 사이에 있는 약소국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가? 바벨론-메대가 앗수르-애굽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당시 요시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립적인 외교노선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예를 광해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폭군으로 불리는 광해군은 실제로는 매우 총명한 군주였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 조선의 제15대왕(재위 1608~1623).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가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정권(戚臣政權)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24년 서인 이귀(李貴)·김류(金g)·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단행하여 이이첨·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41년(인조 19)에 죽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내치(內治)로는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제(號牌制)를 실시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경 방비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1619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지방을 공격하여 명(明)나라의 출병요구가 있을 때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두산동아백과사전, "광해군")
얼핏 보아도 광해군은 매우 지혜로운 왕이었고, 탁월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의 양면외교정책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그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양감사에 박엽, 만포 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응하게 했다. 그러나 부차 싸움에서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는 능란한 양면 외교솜씨를 보였다. 1619년 3월 강홍립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을 모두 하옥시켰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투항한 강홍립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그의 가족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신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 가족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오게 해 물품을 하사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강홍립의 투항은 사실 광해군의 책략이었다. 즉 명나라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협력하는 체 하면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고, 후금에 대해서는 명의 강요에 의해서 출병했을 뿐 그들과의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의 계책을 폈던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이런 계책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래도 적용되었다. 1609년 일본과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악화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63).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왕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요시야도 광해군 못지 않은 지혜와 담대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애굽 군대가 유다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요시야가 처한 입장이 광해군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요시야도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애굽을 돕는 척 하면서 바벨론과 내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결과가 뻔한 강공책을 사용했을까? 그것은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유다 홀로 어떻게 이집트에 대항한단 말인가. 이런 사실을 요시야가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시야가 굳이 강경책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의문이 강하게 든다. 앞에서도 여러 가지로 설명했지만, 요시야가 하나님 뜻을 거역했다고 하는 역대기 기자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대기 기자의 속뜻이 도대체 무엇일까? 앞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이제 그것을 좀더 자세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역대기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요시야는 드디어 개혁을 마무리했다. 요시야 18년에 시작한 개혁은 이제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 유다는 제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질서가 잡혀서 나라는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를 누렸을 것이다. 국토도 넓어져서 백성들은 희망에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난 것이다. 지금까지 요시야는 온 힘을 다해서 유다를 개혁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지향할 목표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보다 민족적인 자존심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추진하는 원동력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려는 종교적인 열정이었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도 개혁하고 백성들의 의식도 일깨웠던 것이다. 그런데 애굽이 군대를 이끌고 자기 영토를 지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껏 이루어놓은 일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애굽군대가 유다를 지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를 비롯해서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애굽의 영향력이 강화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요시야가 지금까지 추진해온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비책을 강구해왔겠지만, 요시야는 각료회의를 수없이 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대책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최종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애굽군대를 그대로 통과케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개혁을 해왔는데, 자주적으로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 자존심을 다 내버리고 애굽에게 굴복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뤄놓은 업적들을 이대로 다 포기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땅에 애굽군대가 통과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 힘으로 막기는 힘들다고 해도, 그렇다고 우리 입으로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우리를 짖밟고 우리 시체를 위를 통과해 간다면 몰라도, 우리 스스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요시야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잃을지언정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당당하게 보여줄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가 너희들에게 순순히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굴복하면 우리 노력을 다 포기하는 것이다." 요시야는 이렇게 마음먹고 출전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역대기 본문을 읽어보면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가 변장까지 했다고 말한다. '변장'(變裝)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당당하지 못함과 비겁함을 연상한다. 요시야는 무엇 때문에 변장을 했을까? 왜 떳떳하게 전투에 임하지 못하고 변장을 했을까? 무엇이 그를 두려워하게 한 것일까? 그리고 '변장'은 아합을 생각게 한다. 아합도 길르앗 라못 전투에 나갈 때 변장을 하고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죽는데, 그 과정이 요시야와 비슷하다.
2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31 아람 왕이 그 병거의 장관 삼십 이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지르는지라 33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 이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 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룻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 아합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상 22장)
아합과 요시야는 몇가지 점에서 같다.
1.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전사경고를 듣는다. 2. 변장을 하고 전투에 나간다. 3. 활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4. 부하들이 병거에 싣고 수도로 돌아온다. 5. 수도에서 죽어 장사된다.
나는 아합과 요시야가 비슷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 아니 그렇게 비슷하게 묘사하는 역대기 기자가 매우 못마땅하다. 역대기 기자는 아합이 전사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을텐데, 왜 요시야를 아합과 유사하게 묘사하는가? 아합처럼 요시야도 무엇인가 불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을까? 아합 기사를 읽어보면, 아람왕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합왕을 살해하라고 명령한다. 전투를 쉽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다. 아합은 이것을 알고 여호사밧과 옷을 바꿔 입는다. 여기까지는 아합이 지혜롭게 행동했다. 이것을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궁수들이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을 맞춘다. 아합은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대비책을 세운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인가?
요시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요시야는 갈길이 바쁜 애굽군대가 전면전을 벌이기 보다는 자신을 제거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생각하고 변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궁수가 요시야를 왕으로 생각하고 활을 쏜 것인지 아니면 아합왕처럼 우연히 활이 맞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요시야는 활을 맞고 중태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요시야가 변장한 것은 비겁해서가 아니고, 또 하나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요시야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의 생애가 끝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 땅 위에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요시야. 철이 들기 전인 여덟살 나이에 부친이 암살을 당하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요시야는 어쩌면 한번도 평안한 날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노심초사하며, 밤낮 구분없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요시야가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이뤄놓았을 리 만무하다. 우리가 보기에 요시야는 본받을 만한 선한 왕이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그렇게 행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요시야는 왕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요시야가 언제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 시간이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므깃도에서 활을 맞고 쓰러지면서 요시야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면 하는 마음을 가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결혼 2주년 기념일을 앞둔 크리스마스였다. 그가 제안을 했다. "우리 과천 대공원 가자." "왜요?" 하는 내 눈빛에 그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인데 먼 여행은 못 떠나도 가까운 데라도 다녀와야지." 그 무렵 그이는 낮엔 현장 기사로, 밤엔 야간 대학 3학년생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출근하고 밤 열두 시가 되어야 집에 오는 생활. 평일에는 물론 휴일에도 숙제 때문에 더 바빠 커다란 상 앞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그날은 큰마음을 먹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제안대로 우린 눈사람처럼 옷을 꽁꽁 챙겨 입힌 한 돌바기 아들을 앞세우고 과천 대공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나섰다. 캐럴송이 울려 퍼지는 거리와는 달리 대공원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넓은 벌판은 어제 내린 눈에 잠겨. 보이는 것은 온통 눈천지였다 남이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정신없이 아이와 노는 남편의 모습이 이날따라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흰 눈 위를 뛰어다니며 웃어대고. 남편은 아이를 잡으러 뛰어가고. 그러더니 저쪽에서 그이는 횐 눈 위에 앉아 있는 내게 소리쳤다. "거기서 기다려. 이쪽으로 오지 말라구." "왜요?" "아, 글쎄.... 비밀이 있어." 멀리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남편이 보이고 아이는 제 아빠가 하는 모양을 흥내내고 있었다 드디어 남편이 내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 선물을 줄게." "뭔데요?" 물으며 다가간 내 눈에 쏟아져 들어온 빛줄기. 그이는 횐 눈발 위에 색색의 낙엽들을 주워 모아서 글씨를 써놓았다. 축 결혼 2주년! 낙엽 글씨. 이런 선물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이는 외투를 뒤적이더니 그 위에 호빵 두 개가 담긴 비닐 봉지를 꺼내 놓았다. 성탄을 축하하는 케이크 대신이라며. 횐 눈발 위의 그 선물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내 눈시울이 자꾸 따뜻해져 옴은 왠일까. 그의 가슴 속 온기 때문인지 아직도 따뜻한 호빵은 비닐 봉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이가 말했다. "미안해. 여보. 크리스마스인데 아무 것도 못해 줘서, 예쁜 선물 을 해주고 싶었지만 당신이 주는 하루 용돈 1,500원으론 역부족이야. 하지만 내 마음 알지, 당신."('낙엽케이크,' 정숙희. 주부.)
조금 어렵더라도 어찌보면 이런 삶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시야는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이제는 그런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삶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므깃도에서 죽임을 당했을까? 유다 역사를 보면, 요시야가 화살에 맞은 므깃도는 유다왕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 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성에서 그 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 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열왕기하 9장)
이처럼 피비린내나는 비극적인 죽음의 장소. 유다인들은 므깃도를 무엇보다 요시야가 전사한 곳으로 기억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유다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제의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스가랴가 말하는 하다드리몬(Hadadrimmon) 제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유사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스가랴 12장)
이런 제의로 인해서 므깃도에 대한 슬픈 전승은 후대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교통과 전략적인 차원의 요충지라는 사실로 인해서 많은 전투들이 치러지고, 유다 말기에는 요시아라는 성왕이 비참한 전사를 한 곳이라는 점에서 므깃도는 하나님의 날에 선과 악의 세력이 전쟁을 하게될 곳으로 여겨진 것같다. 므깃도는 그 혼란한 역사만큼이나 묵시적인 성향이 강하게 부여된 곳으로 보인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예전에 조용필은 '허공'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스쳐버린 그 날들 잊어야할 그 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 날들
잊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아 돌아선 마음 달래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스쳐버린 그 약속 잊어야할 그 약속 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
그런데 조용필이 부른 이 '허공'이라는 매우 통속적인 노래가 사실은 80년에 민주화가 좌절되었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느꼈던 깊은 절망감을 표현한 노래였단다.
조용필이 불러 지금도 노래방 인기곡인 '허공'.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의 비련을 그린 노래로 통용되지만 여기서 '그대'를 '민주화'로 바꿔 부른다면…. 작곡, 작사를 맡은 정풍송씨는 분명 민주화를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79년 10.26 사건으로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던 시절. 그러나 잇따른 12.12와 5.17 사건. "국민 소망이 '허공' 속으로 묻히게 돼 그 허탈한 심정을 읊었다"고 술회한다....<중앙일보, 1999년 7월 10일자>
허공으로 표현되는 깊은 절망감.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같은 절망감. 요시야의 전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심각한 '허공'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이런 허무함은 역대기 기자에게까지 전해졌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가 범죄했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대기 본문을 표층적으로 읽지 말고 심층적으로 읽어야 한다.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 죽음을 백성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시야 죽음은 유다의 마지막 등불이 꺼진 듯한 매우 절망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역대기 기자는 강조한다. 유다 백성들은 요시야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그 비극적인 죽음을 기리는 제의를 계속 했다. 이런 경우는 다른 왕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윗왕도 이런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유다 백성들이 요시야를 얼마나 의지했는지 알 수 있다. 유다 백성들은 요시야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고, 그 이후 국가가 멸망으로 급속히 치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요시야를 더욱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요시야가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서 출전한 것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어떻게든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아주었다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심정이 역대기 본문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오한 '역설의 미학'이다.
요시야가 전투중에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은 채 퇴각하자, 느고는 추격하지 않고, 하란으로 진군한다. 느고는 요시야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왕실묘지에 묻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유다 유력인사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위에 오르게 한 것도 허용했다. 이것은 느고가 갈길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아하스가 이집트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느고는 당시에 하란에서 후퇴해서 하맛 근처 립나(리블라)에 머물고 있었다.
아카드 왕(나보폴라살)은 이야르달에 군대를 동원하여 앗시리아로 진격하였다....로부터 마헤스반달까지 그는 앗시리아로 성공적으로 진격하였다. 마헤스반달에 아카드 왕을 도우러 온 우만만다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앗시리아에서 왕위를 계승한 아수르-우발라트를 대항하여 하란으로 진격하였다. 적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수르-우발라트와 그를 도우러 온 이집트군은 그 도시를 버려두고 ...건너가 버렸다. 아카드 왕은 하란에 도착하여...그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는 그 도시와 신전의 많은 노획물을 실어갔다. 아카드 왕은 아달월에...떠났다(바벨론연대기, 헤이스,후커, 정중호옮김,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신년대기,111f.)
3개월 뒤에 여호아하스를 립나로 소환해서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벌금을 물게 하고, 요시야의 아들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해서 왕위에 올린다. 여호야김은 처음부터 친애굽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친애굽적인 노선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느고는 립나에서 퇴각해서 애굽으로 돌아갈 때 여호아하스를 데리고 가서, 여호아하스는 애굽에서 죽었다. 여호아하스도 매우 불행한 인물이었다.
31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열왕기하 23장)
그리고 여호야김도 애굽과 바벨론 사이를 오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지내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저가 바로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늑봉하였더라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열왕기하 23장 35절-24장 2절)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진 3개월 후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도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부자가 바벨론에서 서로 만났는지 모르겠다.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도 두 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눈이 뽑힌 채 바벨론에 끌려갔는데, 거기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여호야김은 친애굽노선을 취했던 것으로 보이고, 시드기야는 나중에 친애굽노선으로 돌아섰지만, 원래는 친바벨론노선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 아들들도 노선이 달랐던 모양이다. 요시야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요시야 아들들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바벨론이 여호야김을 바벨론으로 끌고 간 다음에 애굽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에 힘을 갖지 못한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더라(열왕기하 24장 7절)
여호야긴은 왕위에 오른지 석달이었지만, 바벨론이 위험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느부갓네살도 함께 왔다. 이때가 주전 598년이다.
8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0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13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 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고 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열왕기하 24장)
유다는 요시야가 전사한 주전 609년부터 주전 598년까지 10여년동안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 끼어서 두 나라의 간섭과 침공을 받아서, 거의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라가 쇠약해지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그 이후로 10여년 동안 이어져서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당하고 유다는 바벨론에 병합되고 만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주전 582년경에 다시 함락당한다. 주전 609년부터 58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유다는 수많은 침공을 받으면서 완전히 몰락해갔다. 그 몰락의 시작은 바로 요시야의 전사였다.
아마겟돈을 꿈꾸며
신약시대에는 므깃도는 전쟁과 혼란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기억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전쟁이 아마겟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장)
아마겟돈은 전쟁이 일어날 곳이다. 그래서 아마겟돈은 전쟁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것은 최후의 전쟁이다. 아마겟돈은 일반사람들도 잘안다. 아마겟돈이라는 영화도 나왔다. 물론 아마겟돈은 우리보다는 성경이 익숙한 서양사람들에게도 더 친숙할 것이다. 그런데 아마겟돈은 우리나라에서도 만화로도 나오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익숙한 단어다. 전쟁. 끔찍한 전쟁.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전쟁이다.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 그리고 나선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다. 요시야는 그 세상을 염원했을 것이다.
요엘은 그것을 '여호사밧 골짜기' 전투라고 부른다.
11 사면의 열국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12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밞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17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19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20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요엘서 3장)
요엘이 꿈꾸는 세상. 여호사밧 골짜기 전투 이후의 세상. 여호사밧 골짜기는 요시야에게는 아마겟돈이다. 아마겟돈 이후의 세상. 요시야는 그것을 꿈꾸면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겟돈, 즉 므깃도 산은 지리적으로 이스르엘을 떠올리게 한다.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3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호세아서 1장)
이렇게 이스르엘 골짜기는 전쟁과 심판의 장소이지만, 그곳은 결국 구원의 장소가 될 것이다.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세아서 1장 10절-2장 1절)
비슷한 말이 14절부터 다시 나타난다.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 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세아 2장)
요엘이 전쟁과 죽음의 땅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구원을 보았듯이, 호세아가 전쟁과 죽음의 땅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역시 구원을 보았듯이, 요시야도 므깃도에서, 그 전쟁과 죽음의 땅에서 먼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을 보았을 것이다.
13년의 평화가 끝나고 온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은 요시야. 그는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지켰으며, 굴복이 아닌 저항을 보여주었다. 바위에 계란던지는 격이었지만, 요시야는 세상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그 강력한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함으로써 비록 그들이 약소국이긴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지금도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러 OSCE합의 불구 체첸 공세 강화 [ 연합뉴스 ] 1999년 11월 20일 (모스크바) 러시아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정상회담에서 체첸 사태 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중재를 일부 허용키로 합의한 19일에도 러시아군은 체첸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 연방군 전투기 및 공격용 헬기들은 19일 아침까지 24시간동안 60차례나 출격했다고 북(北)오세티아의 모즈도크 주둔 러시아군 대변인이 인테르팍스 통신에 밝혔다. 포병부대와 공동으로 벌인 이번 공격으로 체첸 반군 탄약창고 1곳과 방공포대 2 곳, 다리 2곳이 파괴되고 반군 약 150명이 숨졌다고 러시아 관리들은 밝혔다. 한편 지난 18일 러시아 잉구셰티아 공화국에 있는 체첸 난민촌을 방문한 뒤 모스크바에 도착한 오가타 사다코 유엔고등난민판무관(UNHCR)은 이날 체첸 난민들이 처한 상황을 '대(大)재앙'으로는 규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가타는 난민들의 사망률이 높고 전염병이 돌고 있지만 판무관실의 '대재앙' 기준에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그러나 겨울이 닥쳐와 신속한 구호활동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오가타의 이같은 발언은 지난주 난민촌의 상황을 대재앙이라고 표현했던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얼 및 국제 사면위원회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이다.
체첸인들을 무엇을 꿈꾸며 러시아 제국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을까? 다시 요시야 이야기로 돌아가자. 비록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요시야가 꿈꾸던 세상, 그것은 아마겟돈 이후의 세상이었다.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아마겟돈을 꿈꾸었을 것이다. 최후의 전쟁.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 그래서 아마겟돈 이후에 이루어질 그 아름다운 세상. 탐욕과 살인으로 무장한 제국주의가 붕괴되는 그 세상. 전쟁없는 완전한 세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가실 그 나라. 그 복된 나라를 꿈꾸며 요시야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